요즘 모 방송국의 인기드라마 선덕여왕과 관련하여 신라의 여러 제도와 문화가 자연스럽게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군주였던 선덕여왕 자체도 그렇지만 신라의 독특한 군사제도이자 교육시스템이기도 하였던 화랑(化郞)에 대해서도 관심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군의 상무정신을 대표하는 단어이기도 한 화랑과 관련된 잊혀진 이야기가 있는데 이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최근 인기리에 방송 중인 드라마 선덕여왕


1953년 휴전이라는 이름으로 치열했던 한국전은 일단 숨고르기에 들어갑니다. 전선이 고착화 된 후 대부분의 전투가 현재의 DMZ 인근에서 이루어졌지만, 초기 1년은 낙동강에서 두만강까지 정신없이 남북으로 전선이 왔다 갔다 하였기 때문에 한반도 전체가 전쟁의 화마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습니다.


                                      한국전의 비참함을 알려주는 유명한 사진입니다.
                           사진의 모습으로 보아 인천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휴전으로 전쟁이 일단 멈추자 피해를 복구하는 일은 남이던 북이던 제1의 과업이 되었고 더불어 전쟁으로부터 사상을 당한 많은 참전군인들에 대한 보상 또한 커다란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하지만 전쟁 전부터 이미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대한민국이 이들 전사상자에 대해 즉각적이고 충분한 보상을 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전쟁은 필연적으로 많은 전사상자를 양산하였습니다.


차라리 전사자의 경우는 시간을 두고 유가족에게 보상을 해 주어도 되었지만 전투로 인하여 몸이 불구가 된 상이용사들은 당장의 호구지책을 걱정할 딱한 처지였습니다. 국가나 사회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없기는 매한가지여서 상이용사들의 처절한 절규에 당장 도와줄 방법이 사실 없었습니다.


                나라 전체가 초토화되어 상이용사에 대한 구호도 제대로 이뤄질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전후에 사회로 복귀한 제대군인 특히 경제적으로 자활이 어려웠던 상이용사들의 불만은 사회적으로 커다란 문제가 되었습니다. 더구나 우리사회의 병폐중 하나가 선천적이던 후천적이던 신체적으로 불편한 사람을 깔보고 비하하는 이상한 못된 풍조가 있는데, 국가를 위해 희생한 상이군인들을 속어로 깨진바리라고 불렀을 정도로 차별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상이용사들이 생계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도 많지 않았고, 사회의 냉대도 있었습니다.


결국 국가가 즉각적인 보상이나 구호를 하기 힘들면 이들이 스스로 자활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도움을 주어야 했는데 이러한 사업의 시범으로 실시되었던 대책 중 하나가 화랑농장사업이었습니다. 사회적응이 힘들었던 상이용사와 가족들이 모여 살 수 있도록 거주지와 함께 인근에 자립할 수 있는 농장터를 제공하여 경작하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국가를 위해 희생한 분들을 위해 자활 시범 사업이 실시됩니다.


한미재단의 도움을 받아 상이용사 출신인 김국환(金國煥)씨와 진상구(陳相龜)씨의 주도로 인천시 산곡동 369번지 일대에 화랑농장이 조성되었는데, 1955년 3월 5일에 있던 화랑농장 개소식에 당시 최재유 보건부장관, 이익흥 경기도지사는 물론 맥카오 주한미군 후방지원 사령관등이 참석하였을 만큼 성황리에 사업이 개시되었습니다.


         당시 관영 매체에서 대대적인 보도를 하였을 정도로 성황리에 사업이 개시되었습니다.


화랑농장이 들어섰던 곳은 원래 구한말 장끝말이라는 이름의 한적한 동네였습니다. 일제가 중일전쟁을 시작하면서 현재 인천시 부평구 일대에 조병창이라는 군수기지를 만들 때 이곳에 거주하던 20여 가국의 원주민들을 내쫒으면서 마을도 사라졌습니다. 이후 한국전을 거치면서 일본의 조병창터에 미군부대가 주둔하게 되었는데 현재도 일부 시설이 남아있습니다.


                      반원으로 표시한 지역이 화랑농장인데 경인전철 백운역 인근입니다.


화랑농장은 미군기지터 일부를 환수 받아 설립되었는데 이후 정부의 지원 없이 자립적으로 운영되다보니 얼마못가 심각한 자금난에 봉착하게 되었고 1950년대 말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이후 다시 폐허가 된 농장에 많은 외지인들이 정착하게 되었는데 대부분이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물자를 유통하거나 미군부대 군속으로 근무하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금난으로 농장은 폐쇄되고 인근 미군부대 관련하여
                      생계를 이어가려는 많은 외지인들이 화랑농장지역으로 유입됩니다.
                             (현재도 화랑농장 인근에 일부 남아있는 미군기지)



이후 이곳은 농장이 아닌 좁은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옹기종기 주택들이 모여 앉은 전형적인 구식 주택가의 모습으로 급속하게 변하게 되었으나 일대를 아직도 화랑농장이라 부를 만큼 공공지명화 되어있습니다. 현재도 경인전철 부평, 백운역에서 산곡동 방향으로 가는 버스의 노선판을 보면 화랑농장이라 쓰여 있을 정도이고 마을로 들어가는 도로의 명칭도 화랑로입니다.


         현재 문서에 표기될 만큼 화랑농장은 공공지명화 되었습니다(부평신문 보도내용)


현재 이곳에 사는 분들 중에도 아마 이러한 마을의 유래를 아시는 분들이 그리 많지는 않을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근처는 이미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을 만큼 발전이 되었지만 화랑농장은 최근에야 재개발 예정지역으로 되었을 만큼 발전이 상당히 더딘 지역인데 앞으로 개발이 완료 후에는 어떻게 변모할지 궁금합니다.


                           현재 화랑농장의 모습인데 재개발지역으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현재 부평인근에 사는 사람조차도 화랑농장을 주말농장이나 도심인근의 가든 식 숯불갈비집으로 잘못 아는 분들도 꽤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만, 그 낭만적인 이름이면에는 국가를 위해 몸을 바쳤지만 제대로 보상도 받지 못하여 스스로 자활의 길로 나설 수밖에 없었던 상이용사분들의 처절한 피눈물이 담겨져 있습니다.


                낭만적인 화랑농장이라는 명칭은 어려웠던 시절 조국을 위하여 몸 바쳤음에도
             전쟁 후 어려움을 겪은 많은 상이용사들의 절규가 담긴 역사적인 이름입니다.


100년 전에는 장끝말로 불린 한적한 산골마을 이었지만 외세의 침략야욕에 의해 사라진 이름이 되었듯이 지난 50여 년간 계속되어온 화랑농장의 이름도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바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곳을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는 이상 그곳에 짧게나마 있었던 우리 현대사의 아픈 역사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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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비 트랙백 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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