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 대전 전쟁사 (독일 만슈타인 장군) -제 3 편-



                                    만슈타인의 작전회의


스타린그라드 6군 구출 작전

1943년 2월 17일. 히틀러가 갑자기 소련 전선으로 날아왔다. 우크라이나의 남부 집단군 사령부를 방문한 히틀러는 간부 회의를 소집하고 만슈타인을 새로 구성한 돈[DON] 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그에게 '겨울 폭풍 작전'을 맡을 것을 명하였다. 겨울 폭풍 작전은 스타린그라드에서 엄청난 소련군의 대병력에 포위 된 프레드리히 폰 파우루스의 6군을 구하는 것이었다.

겨울 폭풍 작전은 그 이전인 1942년 12월 12일 헤르만 호드 장군의 제 4 판저 군과 루마니아 군이 이미 시도 했었지만 스타린그라드를 겹겹이 둘러싼 소련 쥬코프 원수의 강력한 외곽 포위망을 뚫지 못했었다.

만슈타인이 새로 구성한 돈 집단군의 단위부대들은 오랜 전쟁으로 지치고 장비 손실도 많아 이런 막중한 작전을 실행하기가 무리였다.

그런 제약에도 불구하고 만슈타인은 세 개의 판저 사단과 57군단 예비 부대로서 소련군의 막강한 포위망을 뚫고 또 뚫어 스타린그라드의 파우루스 6군 30마일 지점까지 진격할 수가 있었지만 그것이 한계였다.

만슈타인 군은 1942년 12월 20일 스타린그라드 인접 아크사이라는 작은 시골 읍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한 소련군을 돌파 할 수가 없었다.



                             스타린그라드의 폐허가 된 거리에서 돌격하는 소련군

 

만슈타인은 스타린그라드에 포위된 6군 사령관 파우루스에게 포위망을 뚫어서 만슈타인의 57판저 군단과 링크하라고 권고했지만 파우루스는 준비만 한 채 주저하다가 이 유일한 탈출의 기회를 그냥 흘려 버렸다.

탄약과 연료 부족이 그 이유였다지만 스타린그라드를 사수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이 파우루스를 그렇게 우유부단하게 행동하게 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우루스가 우물쭈물하고 있는 사이 소련의 대군은 스타린그라드 외곽에 간신히 진출했던 만슈타인의 구원군을 격퇴하였다.



하르코프 전투


스타린그라드 함락이후 전면적으로 전황이 뒤 바뀌어서 소련은
공격을 하고 독일은 후퇴하는 양상이 되었다.

1943년 2월 히틀러는 소련군이 대공세를 취하는 소련 남부 전선의
전방 부대를 재편성해서 남부 집단군이라고 명명하고 만슈타인 원수를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만슈타인 원수는 소련군이 남부군의 북방에서 100km나
독일군 후방으로
밀고 들어온 것을 지켜보았다.

만슈타인은 기회를 보다가 1943년 2월 21일 승승장구하는 소련군의 남쪽 측면은 강하게 들이쳤다.
 

         하르코프 돌출부에 대한 만슈타인의 측면 급습. 독일에서 증원된 SS 군단이 큰 활약을 하였다.

유명한 하르코프 전투의 시작이었다. 독일군 측에서는 이 지역이 도네츠 분지였었기 때문에
도네츠 전투라고 호칭한다.

소련군은 너무 진출한 격이었던지라 측면을
두들겨 맞고 큰 혼란에 빠졌다.

만슈타인의 남부 집단군의 공격은 새로 배속 받은
SS 판저 군단의 지원과 호드 장군의 4 전차군의 지원에 힘입어 큰 포위망을 형성하였고 마침내 하르코프와 벨고라드를 점령하였다.

3월 16일까지 계속된 이 전투에서 1943년 2월 21일 만슈타인의
집단군은 로코프스키 원수가 지휘하던 소련군의 52개 사단을 와해시켜 버리고 70,000-80,000명의 소련군과 소련군 전차 615량을 섬멸하였다.

이 전투는 독일군이 대소 전선에서 거둔 마지막 대승이었다.



쿠르스크 전투


히틀러가 열세였던 소련과의 전쟁을 결정적으로 뒤엎을 야심으로 추진한
다음의 쿠르스크 전투에서 만슈타인이 남부 공격군으로 참여하였다.

쿠르스크는 독일군 지역으로 혹처럼 툭 튀어 나온 소련군의 점령지였다.
이 혹부리 부분을 남쪽과 북쪽 양면에서 집게 작전으로 공격하여 소련군의 연결부분을 절단하고 전방에 포위 된 소련군을 격멸하자는 계획이었다.

시타델[CITADEL-성채] 작전이었다.
그러나 신형 자주포의 출고를 기다리느라 작전이 무한정 연기되었다. - 이 아이디어는 북부에서 공격했던 모델 장군의 건의였다고 한다. 큰 실책이었다- 소련군은 작전이 연기 된 틈을 타 쿠르스크를 막강한 요새로 변화시켰다.



비록 독일이 돌격포의 원조였지만 소련도 대량 생산했었다. 이 돌격포는 152mm 포 -전차 보다도 자주포에 가깝지만 장갑이 있다. 스타린 탱크의 차체를 기본으로 제작되었다.


쿠르스크 방어 소련군 사령관은 로코프스키와 바투틴이었지만 모스크바 방어 사령관이었던 게오르규 쥬코프 원수가 후방에서 막강한 예비 병력을 거느리고 대기하고 있었다.

기습의 효과를 잃었다고 생각한 만슈타인은 히틀러에게 작전 취소를
건의했지만 히틀러는 그대로 강행하였다.

1943년 7월 5일 독일군은 작전을 미리 알아챈 소련군의
선제 포병 사격을 무릅쓰고 공격을 개시했었다.

남부 방향의 공격을 담당한 만슈타인은 예정대로 소련군의
거센 저항을 분쇄하면서 진격하였다. 그러나 북부 방향의 공격을 책임진 크루게와 모델 군의 진격이 소련군의 강한 저항으로 지지부진하였다.

집게 포위가 형성되지도 않았고 미군이 지중해 시시리 섬에
상륙하자 히틀러는 서둘러 시타델 작전 중지를 명령했다.

만슈타인은 힘들더라도 전 러시아군이 이 쿠르스크에 집결해있는 만큼
전세를 뒤집을 호기이니 힘들더라도 전투를 계속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소련군은 쿠르스크에서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즉각 반격으로
전환해서 전 소련의 대지를 비질하는 듯한 대공세를 강화했다.

비록 미완성으로 끝났지만 남부 공격을 했던 만슈타인 군은
자기들이 입었던 손실보다 훨씬 많은 피해를 소련군에게 주었다.

전후 쿠르스크 방어 사령관 게오르그 쥬코프 원수는 만슈타인의
지휘 능력을 크게 평가하는 발언을 했었다.



드니에퍼 강 철수 전투


1943년 9월 만슈타인 군은 추격하는 소련군에게 연속적인
타격을 주면서 드니에퍼 강의 서쪽으로 축차 후퇴하였다.

1943년 10월부터 1944년 1월 중순까지 만슈타인의 남부군은 유럽에서
세 번째로 긴 드니에퍼 강의 천연 장벽에 의지해서 소련군의 공세를 막아 내며 대소 전선의 남부를 안정시켰었다.

1943년 겨울부터 소련군의 대공세가 계속되었고 소련군은
드니에퍼 강의 상류 지역 도강에 성공하여 주요 도시인 키에프를 탈환하였다.



                                       소련군의 드니에퍼 강 도강작전


1944년 만슈타인은 소련의 거센 공세를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철수를 개시했다.독일의 약해진 국력은 그에게 버틸 병력도 화력도 지원해 줄 여력이 없었다.

히틀러가 만리장성과 같은 방벽으로 삼으려던 드니에퍼 방어선은
이렇게 해서 무너져 버렸다.

1944년 2월 중순 만슈타인은 히틀러가 무슨 일이 있어도 사수(死守)하라고 지시했던 코르순 포켓에서 포위 될 위험에 처해있던 그의 휘하 11군과 42군의 6개 사단, 56,000명을 철수시켰다.

히틀러 말대로 그대로 있었으면 이 병력은 스타린그라드의
6군과 같은 꼴이 되었을 것이다.

히틀러는 불같이 화를 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인지라
마지 못해
추인하였다.

철수한 만슈타인과 히틀러의 불화가 이때부터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무조건 사수를 명령하며 점령지역 고수에 집착한 히틀러와 달리 만슈타인은 그런 고정 방어는 전력이 약해진 독일군에게 무의미하니 대신 독일군의 주특기인 기동력을 활용한 기동 방어를 해야 한다고 주장해왔었다.

즉 영토 확보에 신경을 쓰지 말고 소련군이 몰려오게 유인하고
후퇴하면서 계속 기회를 보다가 측면에서 크게 한 방을 먹여 괴멸적인 타격을 입히자는 것이 만슈타인의 기동 방어 개념이었다.

불화가 계속되자 만슈타인은 그 간 독일 장군들이 내면에
품어왔던 불만을 자신이 나서서 표출하기 시작했다.

그 불만은 히틀러의 도를 넘는 작전 개입에 대한 불만이었다.
리델 하트는 책에서 그는 한 독일 장군에게 독일군이 몰락한 동부 전선에서 혹시 독일군이 승리했을 가능성이 있었는지를 물어 보았을 때 그 장군이 했던 확신에 찬 대답을 소개했다.

그 장군은 히틀러의 과도한 개입만 없었으면 소련 전선에서
독일군은 틀림없이 승리했을 가능성이 있었다고 대답했다.

군사적인 기초 지식도 없었고 전선 정보도 어두운 히틀러는
먼 후방에서 계속 현지 사령관이 받아들이기 함든 무리한 요구를 해서 전쟁을 엉망으로 만들어왔다.

앞 뒤 생각하지 않고 사수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히틀러의
전매특허식 전략이었다.
[영어로 말하면 "Victory or Death! -그의 유명한 단골 구호다.]

                                                   히틀러와 만슈타인


스타린그라드에서 6군을 다 소멸시켜 버린 것은 히틀러의
이런 무리한 명령의 결과였다.

는 사수라는 무리한 명령을 너무 쉽게 남발해댔다. 리델하트가 인터뷰했었던 한 독일 장군은 히틀러에게 '전략’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욕심’만 있었을 따름이었다라고 평했었다.

리델하트의 책은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켰지만 폴란드 침공이나
프랑스 침공 전까지는 과도하게 작전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프랑스 침공 때부터 간섭을 시작하더니
러시아 침공 때부터 과도하게 전쟁 수행에 끼어들어 일일이 콩 놓아라 팥 놓아라 하며 아예 일선 지휘관들을 제쳐놓고 전쟁 지휘를 직접하기 시작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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