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프독의 War History'에 해당되는 글 35건

  1. 2011.05.30 2차 세계대전 전쟁사 (독일 만슈타인 장군) -제4편-
  2. 2011.05.27 2차 세계 대전 전쟁사 (독일 만슈타인 장군) -제3편-
  3. 2011.05.26 2차 세계 대전 전쟁사(독일 만슈타인 장군) -제2편-
  4. 2011.05.23 2차 세계 대전 전쟁사 (독일 만슈타인 장군) -제 1 편-
  5. 2011.05.20 전송가[Battle Hymn]의 주인공 헤스 대령의 숨겨진 전공 -제2편-
  6. 2011.05.19 전송가[Battle Hymn]의 주인공 헤스 대령의 숨겨진 전공 -제1편-
  7. 2011.05.18 주지[住持]가 된 日 잠수함장
  8. 2011.05.17 주목해볼 AK-74 소염기
  9. 2011.05.12 빈 라덴보다 먼저 천벌받은 부하 테러리스트
  10. 2011.05.04 적 대공 탄막에 스스로 뛰어든 조종사
  11. 2011.04.28 일본 해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미 군함의 해상 육탄돌격
  12. 2011.04.26 어느 순진한 무장공비의 최후
  13. 2011.04.26 적진에 침입해서 레이다 기지를 통째로 훔쳐온 이스라엘 특공대[下]
  14. 2011.04.25 적진에 침입해서 레이다 기지를 통째로 훔쳐온 이스라엘 특공대 [上]
  15. 2011.04.15 새내기 여성 의장대원의 데뷔 무대
  16. 2011.04.15 지뢰밭에 착륙한 독일 4성 장군
  17. 2011.04.14 T-50 훈련기가 실전에 투입될 수 있을까?
  18. 2011.04.11 조선의 해외 무기 획득 사업-제2편- (2)
  19. 2011.04.07 조선의 해외 무기 획득 사업-제1편-
  20. 2011.03.30 중국 상공의 대만 비밀 정찰기 (1)
  21. 2011.03.30 무용지물이었던 일본의 전함들
  22. 2011.03.25 포크랜드 항공전 -제3편- (1)
  23. 2011.03.23 포크랜드 항공전 -제 2 편-
  24. 2011.03.23 포크랜드의 항공전 -제1편-
  25. 2011.03.18 음향 어뢰가 사용된 최초의 해전
  26. 2011.03.14 전차 잡는 대공 미사일??
  27. 2011.03.07 실전을 통해 터득한 저격의 노하우.. (1)
  28. 2011.03.04 태평양 전쟁 비사(秘史)-소.일 잠수함 해전 (1)
  29. 2011.03.03 한국 전쟁 이야기-장진호 덕동 고개 전투 (1)
  30. 2011.02.25 영국 항공모함 테세우스의 한국전쟁 출동기-제3편-







2차 세계대전 전쟁사 (독일 만슈타인 장군) -제4편-


                                                만슈타인


히틀러에게는 호전적인 독재자들에게 나타나는 공통적인
병리현상인 과대 망상증이 있었다.

리델하트의 책에서 밝히지는 않았지만 바로 이 무렵 히틀러는
“내 주위에 문관이건 무관이건 나보다 나은 인간이 한 명도 없다!”라고 큰 소리친 일이 있었다.

만슈타인의 전략으로 성공한 아르덴느 숲 돌파 작전을 자신의
능력에 의한 것임으로 착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까 히틀러의 과도한 작전 개입은 만슈타인의
천재성이 가져온 괴상한 산물(産物)일 수도 있다.

전쟁 지휘를 일선 지휘관에게 맡기라는 만슈타인의
고언은
히틀러와 그의 주변 나치 간신들이 듣지 않았다.

만약 그렇게 해주면 히틀러에 대한 불신감이 짙어져 가는 군부를
통제하기가 힘들다는 것이었다. 히틀러가 적극 공감하는 소리였다.

만슈타인은 몇 번이고 진언했고 히틀러는 몇 번이고 거부했다.
속 좁은 히틀러는 불쾌했을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이런 명장을 물리치기가 너무 아까워서 차마 그를 해직시키지 못하고 연기해 왔다.


                                              독일의 돌격포


게슈타포 사령관 히믈러, 그리고 선전상 겝벨스들이 거들며
만슈타인을 모략해댔다.

히틀러는 1944년 3월 31일 만슈타인을 파면하고 이틀 뒤에 그 자리에 그의 말을 잘 듣는 모델 장군을 임명했다.

같은 시기 히틀러의 과도한 작전 개입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크라이스트 원수도 해직되었다.

만슈타인은 그의 저서의 대미(大尾)를 부하들과 이별할 때의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모델 장군과 인수인계를 마친 그는 4월 3일 정든 부하 전우들과
이별을 고하고 남부군 사령부가 있던 르보프를 떠났다. 그가 사랑했던 부하들은 모두 기차 역까지 나와 아쉬워하며 그와 석별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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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누가 열차 밖에서 나를 불렀다

나의 전용기 Ju-52의 조종사였던 렝거 중위였다. 그는 갖가지 악천후와 어려운 비행 조건에서도 나를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었던 유능한 조종사였다.

그는 이미 전투기 부대로의 전출을 상신해 놓은 상태였다.
중위 계급의 조종사는 최전선에 보내져서 전사율 높은 출격에 내보내지는 그런 다급한 상황이었다.

달리는 열차 창문에 대고 그가 외친 말이 부하들이 존경하는 사령관에게 보내는 마지막 고별사였다.

“원수님 ! 오늘 제 비행기에서 크리미아 방패 표식  -히틀러가 수여한 크리미아 전투 참전 기장- 을 떼어 버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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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U-52. 독일군 소속이 아니라 현재 루프트한자 소유로 민간 비행기다.



말단 장교인 중위가 만슈타인을 해고한 히틀러에 대한 원망을
표시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방법 밖에 없었을 것이다.

만슈타인은 독일로 돌아와서 군을 떠나 조용히 은거생활에 들어갔다.
그가 해임된 후 1944년 7월 슈타이펜베르그 대령에 의한 히틀러 제거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다.

수 십 명의 장교들이 이 계획에 동조했다가 죽임을
당했다. 롬멜 원수도 그 중 하나였다.

만슈타인도 이미 그 전 해에 이 계획에 참여하도록
부탁을 받았었지만 그는 무슨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취지에는 공감한다면서도 참여를 거절했었다.


"Preussische Feldmarschalle meutern nicht!“
[“프러시아의 원수는 반역 같은 짓을 하지 않네!”]

히틀러가 엉망진창의 전쟁을 하는 것을 알면서도 만슈타인의 프러시아 적인 군인 정신은 감히 최고 사령관에게 반란을 꾀하는 것을 생각지도 못하게 했던 것이다.

독일이 패하자 그는 접근해오는 소련군을 피해 가족을 데리고 서부 전선의 영국군 몽고메리 원수에게 직접 항복했다.

소련은 영국에게 만슈타인의 인계를 집요하게 요청해왔다. 영국이 소련의 압력에 응하지 않으려면 그를 직접 재판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말단 부하가 전쟁 상황에서 저지른 학살 사건에 책임을 지고 법정에 섰다.

만슈타인은 18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그에게 호의적인
영국 여론의 압력에 의해 12년으로 감형되었다.

그가 훌륭한 장군이었음을 알아 주는 처칠 수상과 몽고메리 원수,
그리고 리델하트가 그를 공공연하게 옹호하였다. 수상에서 물러나 재야인이 된 처칠은 그의 변호사 비용까지 후원해 주었다.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영국군에게 비참한 대패를 연달아
안겨 준 롬멜에 대한 인식이 별로 좋지 않았던 영국에서 만슈타인에 대한 인식만은 아주 좋았던 것이 이색적이다.

영국군 형무소에 구금되었던 그는 4년 후에 석방되었다. 서독군이 재무장하게 되자 그는 당시 수상이던 콘라드 아데나우어 원수에게 초빙 받아 군의 조직 편성과 나토군 편입에 관한 조언과
입안을 했었다.

이 일이 끝나자 그는 바바리아 주로 이주해서 조용히 살았다.
명장이며 청렴했고 부하들의 존경을 받았던 그를 숭배하는 서독군 장교들과 나토군의 각 군 지도자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았다.

독일 연방군[BUNDESWEHR,히틀러 시절 독일 국방군은 WERCHMACHT다]에서는
만슈타인이 실질적인 참모총장이라는 우스개 소리까지 나왔었다.

그는 1973년 85세에 심장마비로 작고해서 그의 큰 아들의 곁으로 갔다.
큰 아들 게로 중위는 1942년 이미 동부 전선에서 전사했었다.

그는 1953년 전범으로 수감되었던 영국군 형무소에서 석방되자
1955년 '잃어버린 승리[Verlorene Siege]'라는 제목의 책을 집필했다.


                                                잃어버린 승리


이 책은 1958년도에 미국에서 'Lost Victory'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는데 세계에 이 영어제목으로 널리 알려지고 세계의 군사 전문가들 사이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동부 전선의 불리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승리를 잃지 않았던 만슈타인이
히틀러의 과도한 간섭과 미친 전쟁 지도만 없었더라면 자신을 비롯한 전문적인 군사 지식을 가진 독일 장군들이 틀림없이 승리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나타나는 제목이었다.

리델하트가 독일 장군들을 인터뷰했을 때도 꼭 같은 말을
들었는데 이는 만슈타인의 책 출간보다 앞선 것이었다.

만슈타인의 개인적인 자신감이 아니라 대 소련전의 최전선에서
싸웠던 독일 장군들이 공통으로 갖는 인식이었기에 이런 제목을 붙였을 듯하다.

자신이 명장이라는 과대망상에 빠져 마구잡이 간섭으로 전쟁을 망친 히틀러는 그에게 엉뚱한 자신감을 가지게 만든 아르덴느 숲에서 또 한 번 자신의 군사적 재능을 도박 해보고자 했다.

아르덴느 2차 작전이 그것이다. 우리들한테는 발지 전투로 알려졌다. 독일군 총사령관 룬드스탠드 전투라는 이름도 있다. 만슈타인이 제안했고 히틀러가 승인했던 1차 아르덴느 돌파작전을 그대로 답습한것이다.

숲을 관통해서 미군과 영국군을 양분하고 벨기에 안트워프 항까지 직통하는
작전이었는데
망해가는 독일이 가진 전투 자원을 모두 동원해서 정면의 미군을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아르덴느 숲의 미군


전투 자원을 다 써버린 독일은 연합군의 진격을 제대로 제지할 힘이 없어서 1945년 5월 히틀러는 자살하고 전쟁은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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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 대전 전쟁사 (독일 만슈타인 장군) -제 3 편-



                                    만슈타인의 작전회의


스타린그라드 6군 구출 작전

1943년 2월 17일. 히틀러가 갑자기 소련 전선으로 날아왔다. 우크라이나의 남부 집단군 사령부를 방문한 히틀러는 간부 회의를 소집하고 만슈타인을 새로 구성한 돈[DON] 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그에게 '겨울 폭풍 작전'을 맡을 것을 명하였다. 겨울 폭풍 작전은 스타린그라드에서 엄청난 소련군의 대병력에 포위 된 프레드리히 폰 파우루스의 6군을 구하는 것이었다.

겨울 폭풍 작전은 그 이전인 1942년 12월 12일 헤르만 호드 장군의 제 4 판저 군과 루마니아 군이 이미 시도 했었지만 스타린그라드를 겹겹이 둘러싼 소련 쥬코프 원수의 강력한 외곽 포위망을 뚫지 못했었다.

만슈타인이 새로 구성한 돈 집단군의 단위부대들은 오랜 전쟁으로 지치고 장비 손실도 많아 이런 막중한 작전을 실행하기가 무리였다.

그런 제약에도 불구하고 만슈타인은 세 개의 판저 사단과 57군단 예비 부대로서 소련군의 막강한 포위망을 뚫고 또 뚫어 스타린그라드의 파우루스 6군 30마일 지점까지 진격할 수가 있었지만 그것이 한계였다.

만슈타인 군은 1942년 12월 20일 스타린그라드 인접 아크사이라는 작은 시골 읍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한 소련군을 돌파 할 수가 없었다.



                             스타린그라드의 폐허가 된 거리에서 돌격하는 소련군

 

만슈타인은 스타린그라드에 포위된 6군 사령관 파우루스에게 포위망을 뚫어서 만슈타인의 57판저 군단과 링크하라고 권고했지만 파우루스는 준비만 한 채 주저하다가 이 유일한 탈출의 기회를 그냥 흘려 버렸다.

탄약과 연료 부족이 그 이유였다지만 스타린그라드를 사수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이 파우루스를 그렇게 우유부단하게 행동하게 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우루스가 우물쭈물하고 있는 사이 소련의 대군은 스타린그라드 외곽에 간신히 진출했던 만슈타인의 구원군을 격퇴하였다.



하르코프 전투


스타린그라드 함락이후 전면적으로 전황이 뒤 바뀌어서 소련은
공격을 하고 독일은 후퇴하는 양상이 되었다.

1943년 2월 히틀러는 소련군이 대공세를 취하는 소련 남부 전선의
전방 부대를 재편성해서 남부 집단군이라고 명명하고 만슈타인 원수를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만슈타인 원수는 소련군이 남부군의 북방에서 100km나
독일군 후방으로
밀고 들어온 것을 지켜보았다.

만슈타인은 기회를 보다가 1943년 2월 21일 승승장구하는 소련군의 남쪽 측면은 강하게 들이쳤다.
 

         하르코프 돌출부에 대한 만슈타인의 측면 급습. 독일에서 증원된 SS 군단이 큰 활약을 하였다.

유명한 하르코프 전투의 시작이었다. 독일군 측에서는 이 지역이 도네츠 분지였었기 때문에
도네츠 전투라고 호칭한다.

소련군은 너무 진출한 격이었던지라 측면을
두들겨 맞고 큰 혼란에 빠졌다.

만슈타인의 남부 집단군의 공격은 새로 배속 받은
SS 판저 군단의 지원과 호드 장군의 4 전차군의 지원에 힘입어 큰 포위망을 형성하였고 마침내 하르코프와 벨고라드를 점령하였다.

3월 16일까지 계속된 이 전투에서 1943년 2월 21일 만슈타인의
집단군은 로코프스키 원수가 지휘하던 소련군의 52개 사단을 와해시켜 버리고 70,000-80,000명의 소련군과 소련군 전차 615량을 섬멸하였다.

이 전투는 독일군이 대소 전선에서 거둔 마지막 대승이었다.



쿠르스크 전투


히틀러가 열세였던 소련과의 전쟁을 결정적으로 뒤엎을 야심으로 추진한
다음의 쿠르스크 전투에서 만슈타인이 남부 공격군으로 참여하였다.

쿠르스크는 독일군 지역으로 혹처럼 툭 튀어 나온 소련군의 점령지였다.
이 혹부리 부분을 남쪽과 북쪽 양면에서 집게 작전으로 공격하여 소련군의 연결부분을 절단하고 전방에 포위 된 소련군을 격멸하자는 계획이었다.

시타델[CITADEL-성채] 작전이었다.
그러나 신형 자주포의 출고를 기다리느라 작전이 무한정 연기되었다. - 이 아이디어는 북부에서 공격했던 모델 장군의 건의였다고 한다. 큰 실책이었다- 소련군은 작전이 연기 된 틈을 타 쿠르스크를 막강한 요새로 변화시켰다.



비록 독일이 돌격포의 원조였지만 소련도 대량 생산했었다. 이 돌격포는 152mm 포 -전차 보다도 자주포에 가깝지만 장갑이 있다. 스타린 탱크의 차체를 기본으로 제작되었다.


쿠르스크 방어 소련군 사령관은 로코프스키와 바투틴이었지만 모스크바 방어 사령관이었던 게오르규 쥬코프 원수가 후방에서 막강한 예비 병력을 거느리고 대기하고 있었다.

기습의 효과를 잃었다고 생각한 만슈타인은 히틀러에게 작전 취소를
건의했지만 히틀러는 그대로 강행하였다.

1943년 7월 5일 독일군은 작전을 미리 알아챈 소련군의
선제 포병 사격을 무릅쓰고 공격을 개시했었다.

남부 방향의 공격을 담당한 만슈타인은 예정대로 소련군의
거센 저항을 분쇄하면서 진격하였다. 그러나 북부 방향의 공격을 책임진 크루게와 모델 군의 진격이 소련군의 강한 저항으로 지지부진하였다.

집게 포위가 형성되지도 않았고 미군이 지중해 시시리 섬에
상륙하자 히틀러는 서둘러 시타델 작전 중지를 명령했다.

만슈타인은 힘들더라도 전 러시아군이 이 쿠르스크에 집결해있는 만큼
전세를 뒤집을 호기이니 힘들더라도 전투를 계속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소련군은 쿠르스크에서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즉각 반격으로
전환해서 전 소련의 대지를 비질하는 듯한 대공세를 강화했다.

비록 미완성으로 끝났지만 남부 공격을 했던 만슈타인 군은
자기들이 입었던 손실보다 훨씬 많은 피해를 소련군에게 주었다.

전후 쿠르스크 방어 사령관 게오르그 쥬코프 원수는 만슈타인의
지휘 능력을 크게 평가하는 발언을 했었다.



드니에퍼 강 철수 전투


1943년 9월 만슈타인 군은 추격하는 소련군에게 연속적인
타격을 주면서 드니에퍼 강의 서쪽으로 축차 후퇴하였다.

1943년 10월부터 1944년 1월 중순까지 만슈타인의 남부군은 유럽에서
세 번째로 긴 드니에퍼 강의 천연 장벽에 의지해서 소련군의 공세를 막아 내며 대소 전선의 남부를 안정시켰었다.

1943년 겨울부터 소련군의 대공세가 계속되었고 소련군은
드니에퍼 강의 상류 지역 도강에 성공하여 주요 도시인 키에프를 탈환하였다.



                                       소련군의 드니에퍼 강 도강작전


1944년 만슈타인은 소련의 거센 공세를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철수를 개시했다.독일의 약해진 국력은 그에게 버틸 병력도 화력도 지원해 줄 여력이 없었다.

히틀러가 만리장성과 같은 방벽으로 삼으려던 드니에퍼 방어선은
이렇게 해서 무너져 버렸다.

1944년 2월 중순 만슈타인은 히틀러가 무슨 일이 있어도 사수(死守)하라고 지시했던 코르순 포켓에서 포위 될 위험에 처해있던 그의 휘하 11군과 42군의 6개 사단, 56,000명을 철수시켰다.

히틀러 말대로 그대로 있었으면 이 병력은 스타린그라드의
6군과 같은 꼴이 되었을 것이다.

히틀러는 불같이 화를 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인지라
마지 못해
추인하였다.

철수한 만슈타인과 히틀러의 불화가 이때부터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무조건 사수를 명령하며 점령지역 고수에 집착한 히틀러와 달리 만슈타인은 그런 고정 방어는 전력이 약해진 독일군에게 무의미하니 대신 독일군의 주특기인 기동력을 활용한 기동 방어를 해야 한다고 주장해왔었다.

즉 영토 확보에 신경을 쓰지 말고 소련군이 몰려오게 유인하고
후퇴하면서 계속 기회를 보다가 측면에서 크게 한 방을 먹여 괴멸적인 타격을 입히자는 것이 만슈타인의 기동 방어 개념이었다.

불화가 계속되자 만슈타인은 그 간 독일 장군들이 내면에
품어왔던 불만을 자신이 나서서 표출하기 시작했다.

그 불만은 히틀러의 도를 넘는 작전 개입에 대한 불만이었다.
리델 하트는 책에서 그는 한 독일 장군에게 독일군이 몰락한 동부 전선에서 혹시 독일군이 승리했을 가능성이 있었는지를 물어 보았을 때 그 장군이 했던 확신에 찬 대답을 소개했다.

그 장군은 히틀러의 과도한 개입만 없었으면 소련 전선에서
독일군은 틀림없이 승리했을 가능성이 있었다고 대답했다.

군사적인 기초 지식도 없었고 전선 정보도 어두운 히틀러는
먼 후방에서 계속 현지 사령관이 받아들이기 함든 무리한 요구를 해서 전쟁을 엉망으로 만들어왔다.

앞 뒤 생각하지 않고 사수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히틀러의
전매특허식 전략이었다.
[영어로 말하면 "Victory or Death! -그의 유명한 단골 구호다.]

                                                   히틀러와 만슈타인


스타린그라드에서 6군을 다 소멸시켜 버린 것은 히틀러의
이런 무리한 명령의 결과였다.

는 사수라는 무리한 명령을 너무 쉽게 남발해댔다. 리델하트가 인터뷰했었던 한 독일 장군은 히틀러에게 '전략’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욕심’만 있었을 따름이었다라고 평했었다.

리델하트의 책은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켰지만 폴란드 침공이나
프랑스 침공 전까지는 과도하게 작전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프랑스 침공 때부터 간섭을 시작하더니
러시아 침공 때부터 과도하게 전쟁 수행에 끼어들어 일일이 콩 놓아라 팥 놓아라 하며 아예 일선 지휘관들을 제쳐놓고 전쟁 지휘를 직접하기 시작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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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 대전 전쟁사 (독일 만슈타인 장군) -제2편-


                                       만슈타인 원수


아르덴느 돌파 작전


폴란드를 항복시킨 독일의 다음 목표는 프랑스였다.
원래 독일에는 프랑스를 침공할 때 북쪽의 벨기에, 네델란드 등을 유린해버리고 프랑스의 측면을 침공한다는 슐리히펜 플랜이라는 것이 있었다.

어차피 독일과 프랑스의 국경에는 프랑스가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부어서 만든 마지노 요새 선이 있어서 정면 돌파가 힘들었었다.

이 슐리히펜에 계획에 따라서 fall gelb(황색 작전) 계획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만슈타인은 이 작전의 입안에 관여했으면서도 이미 세계에 널리 알려진 슐리히펜 계획에 따라 그대로 벨기에를 침공한다는 것은 현명한 작전이라고 보지 않았다.

이미 영국과 함께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한 프랑스는 프랑스와 벨기에 국경에 대군을 집결해놓고 독일군의 공격을 대비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는 독일 기갑부대의 창시자 하인즈 구데리안 장군과 함께 의논하여
공격 예정 지역인 독일-벨기에 국경 아래에 있는 프랑스령 아르덴느 숲의 우회 침투를 조사해본 후 이 작전을 상신했다.

이 곳은 삼림이 울창하여 통과 불능지역이라고 판단한 프랑스가 아무런 방어 준비를 해놓지 않은 지역이었다.

이 곳만 통과하면 뮤즈강까지는 거칠 것이 없이 진격할 수가 있었다.
벨기에와 프랑스 지역에서 슐리히펜 계획에 따라 밀집한 영불군과 남프랑스의 병력을 양분한 후 기갑 부대를 진격시켜 덩케르크로 직행한다는 작전이었다.

하지만 그의 의견은 이미 히틀러가 결정한 작전을 뒤집을 의사가
없었던 간부들에 의해 배척 당했다.

하지만 그는 룬드스테드 참모장에서 동부 전선의 38군 사령관으로
전임하면서 히틀러에게 신고하는 기회를 이용해서 이 계획을 강하게 상신했다.

히틀러는 원래 귀족 출신에 지적(知的)인 이미지가 강한
만슈타인을 도도하다고 보고 별로 좋아 하지 않았었다.[귀족은 이름에 폰-von-이 붙는다.]

히틀러가 자신처럼 평민 출신인 에르빈 롬멜 원수와
하인즈 구데리안 대장을 좋아했던 사실과 대조된다.

만슈타인이 끝까지 나치당에 입당하지 않았던 것도
히틀러가 그를 싫어했던 이유중의 하나였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심 더 기발하고 공격적인 작전 계획을 찾던 
히틀러는 이 작전 계획에 흥미를 가지고 검토해 본 뒤에 기존 작전 계획을 포기하고 이 공격적인 계획을 받아 들였다.

결국 이 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어서 프랑스는 항복하였고, 영국군은 덩케르크에서
장비를 몽땅 잃고 영국으로 철수하는 참패를 당했다.

만슈타인의 작전 계획은 만슈타인 계획이라는 공식 명칭이 있지만
후에 식클 플랜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지게 된다.[Sichelschnitt -sickle cut-] 식클은 유럽의 농기구인 낫을 말한다. 밀 보리같은 농작물을 베듯 프랑스를 두 쪽으로 베어서 두 동강이 낸다는 뜻으로 붙인 것이리라.

유럽의 석권에 성공한 히틀러는 기분이 좋아져서 이 아이디어를 낸
만슈타인을 대장으로 진급시키고 그에게 훈장을 수여하였다.


1941년 2월.
만슈타인은 56 판저[panzer; 기갑부대]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히틀러는 그해 6월 22일 대군을 동원해서 소련을 침공하였다.

그의 몰락을 가져다 준 치명적인 실수였었던 이 소련 침공 작전은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명명되었다.

독일 참모 본부나 일선 장군 대다수가 이 침공계획을 반대했었지만 이미 정신이 이상해진 히틀러는 병참이나 보급 또는 수송 등의 문제를 가볍게 무시해버렸다.

세계의 강대국인 미영[미국은 아직 참전전]과 겨루고 있는 판에
또 광활한 영토와 자원을 가진 소련과 또 다른 전선을 만든다는 것은 지각없는 짓이었지만 독일 장군들이 히틀러의 장기인 말솜씨와 그의 카리스마에 눌려 전쟁에 끌려 들어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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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독일군이 박살 난 것은 영미가 공격했던 서부전선이 아니라
소련과 겨루었던 동부전선에서였다.

이 전쟁에서 독일군 손실 병력의 70퍼센트가 발생했었다.
소련은 줄기차게 자기들이 독일을 쳐부순 주인공이라고 했었다. 요즈음은 사가들이 이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해주는 추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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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이미 두 번의 서부 전선 전역(戰役)에서 두각을 보인 
만슈타인은 대 소련 전에서 유감없는 천재 명장의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공격의 포문이 열리자 마자 단 이틀 사이에 100마일을 진격해서
두 개의 결정적인 전략 목표인 드비나 강의 두 다리를 점령하였다.

1941년 9월 그는 11군 사령관으로 승진 발령되었다. 전 사령관이었던 쇼베르트 장군은 이 블로그 앞에서 소개한 바 대로 그의 연락기가 지뢰 밭에 내리는 바람에 횡사하였다.




크리미아 -세바스토폴 요새 공성 전투


전투 지휘관으로서의 그의 눈부신 전공은
크리미아 반도 점령 - 세바스토폴 공성 작전에서 크게 꽃을 폈다.

크리미아 반도는 소련 영토가 흑해로 뻗어 나온 반도이며
소련 침공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었다.

만슈타인의 11군은 41년 10월 28일 소련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이어서
크리미아 반도 전역을 휩쓸며 10여일 만에 석권해버렸다.

그러나 견고한 요새로 둘러싸인 세바스토폴 항구는 맹렬히
저항하며 버티었다.

이 곳을 점령하지 않고서는 크리미아 점령이 의미가 없다고 본
만슈타인은 점령 작전을 추진하였다.

1941년 10월 30일 시작한 공성전은 의외로 고전하면서 두달이나
허비하였다.

1941년 12월 26일 크리미아 반도의 목 부분에 해당하는 케르크 해협의
테오도시아에 소련군이 기습 상륙해서 만슈타인 군을 위협하였다.

이 기습 상륙 작전은 독일군이 모스크바 교외에서 공격의 기세가 꺽였던
겨울 위기 때 찾아왔는데 적의 반격은 대규모였고 매우 거셌다.

이 생각지도 않았던 배후 기습에 만슈타인은 세바스토폴 공략을
중지하고
대부분의 부대를 크리미아에 상륙한 소련군을 공격하는데 투입하였다.



                                                크리미아 전투
               왼쪽 아래에 세바스토폴이 보이고
오른쪽 육지에 가까운 쪽에 케르크 항이 보인다.


다음해 5월 18일 소련군은 결국 17,600명의 전사자와 347량의 전차, 그리고 3,500문의 야포를 유기하고 상륙하였던 케르크 해협을 되건너 패주하였다.

배후의 소련군을 평정한 만슈타인은 다시 세바스토폴 공략을
준비하였다.

세바스토폴 요새를 재 공략하면서 만슈타인은
독일 본토에서 긴급히 수송해온 800mm 대구경 열차포 '구스타프'를 사용했다. 이 포는 프랑스의 마지노 요새를 부수기 위해서 특별히 만든것이었지만 소련 전선으로 출동했다.



                                        거대 폭탄 45발을 발사했었다.


1904년 여순 공략전에서 일본군이 280mm 요새포를
요새화한 여순항에 사용했던 것에서 영감을 받았는지 모른다.

독일 공군의 맹폭하에 5월 18일 요새 공격이 다시 개시되었다.
세바스토폴 외곽 방어선이 6월 16일 돌파되었고 치열한 전투가 잇따른 뒤인 7월 4일 드디어 세바스토폴이 점령되었다.

히틀러는 이 소식에 기분이 좋아져서 만슈타인을 세바스토폴의
정복자라고 치켜세우며 만슈타인을 원수로 특진시켰다.




레닌그라드 포위 전투


그가 난공불락인 세바스토폴의 점령에 성공한 것을 본
독일 참모 본부는 그 때까지 점령당하지 않고 버티고 있던 북쪽 발틱 해의 레닌그라드 공격을 그에게 맡겼다.

만슈타인은 그의 군대 일부와 참모들을 인솔하고
남부 전선에서 북부 전선으로 이동하였다.

레닌그라드 공격은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갑자기 외부의 소련군이 휠씬 우세한 병력으로
만슈타인 군을 공격했다. 만슈타인은 소련의 압도적인 군세를 교묘한 기동으로 피해가며 연속적인 반격을 가했다.




                                      모스크바 기념관에 있는 레닌그라드 항쟁기록화


몇 달간의 전투에서 소련군은 무려 6만 명이나
잃는 참패를 당했다.

그러나 레닌그라드 외부에서 소련군과의 힘에 부치는 전투를 치룬
만슈타인 군은 힘을 소진하여 레닌그라드 공략 작전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레닌그라드 포위전은 1943년까지 계속되었지만 독일이 점령을 포기한
결과로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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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 대전 전쟁사 (독일 만슈타인 장군)
-제1편-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전격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영국의 전략가 바실 H.리델하트 경은 독일을 여러번 방문, 2차 세계 대전에서 싸웠던 독일 장군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를 책에 담았다.


독일군의 탄생에서 여러 전투를 거쳐 소멸되기까지를 여러 단계로 나누어, 독일 장군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회고담과 평가와 의견을 기록한 것이다.


그가 인터뷰한 독일 장군 중에는 거물 룬드스테드 원수에서부터 동부전선에서 싸운 크라이스트 원수, 북 아프리카 사막전에서
영국군에게 포로가 되었던 토마 장군, 그리고 히틀러가 무리하게 전개했던 발지 전투의 독일군 사령관 만토이펠 대장도 있었다.


이 글의 주인공이 되는 만슈타인 장군은 인터뷰 대상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가 전범으로 몰려 영국군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신임하던 구데리안 장군이 리델하트 경의 "간접 접근 이론"을
읽고 이에 감동을 받아 적극적으로 받아 들여서 독일 군대를 기계화 했고, 전격 전략을 실행했었기 때문에 그가 그의 제자격인 독일 장군들을 만나서 인터뷰한 내용도 전격전의 체험과 제언에 관한 것들이 많았다.

“The German general talks"라는 이 책은 1948년 최초로 발간되었는데 이후 19개국에 번역되어 출판되었을 정도로 2차 세계 대전 명 군사 저서의 하나다.



                                      바실 H,리델하트
기습과 기동에 중점을 두는 "간접 접근 이론"을 개발했다. 독일은 이 이론을 실전에 대입해서 전격전의 신화를 만들었다.


이 책의 존재는 이미 알았었고 리델하트의 전략에 관심이
많았던터라 오랜 노력 끝에 이 책을 구해볼 수가 있었다.


책의 63 페이지에 이런 글이 있다.
만슈타인을 소개하는 대목에서다.


“ 독일 장군 중에서 최고로 유능한 장군은 에
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일 것이다. 이 
 사실은 내가 인터뷰했던 대부분의 독일 장군들, 룬드스테드 장군에서 부터 아래 모든 장군들의 공통된 평가이기도 하다.“


리델하트는 이 의견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글을 이 책뿐만 아니라
그 뒤에도 자주 썼었다. 리델하트는 자주 만슈타인이 위대한 명장이었을뿐더러 부하들이 존경하는 위대한 지휘관이었음을 서술하고 있다.


한 저명한 전쟁사가는 2차 세계 대전에서 명장이라고 타이틀을
붙여줄만한 장군들은 대부분 독일에서 배출되었다고 했었다.


미국의 패턴이나 영국의 몽고메리 등 다른 나라의 명장들도
있었지만 독일에서 배출된 명장들은 전쟁 중 타 국가들의 명장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도 더 많았다는 것이다.


2차 세계 대전사를 지휘관 평가 위주로 분석하면서 읽어보면
단연코 일리가 있는 말이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만슈타인 원수에 필적할만한 장군은 역시 독일
장군인 롬멜 원수나 소련의 쥬코프 원수 정도가 아닐까 한다.
[아이젠하우어 원수가 세계 최고의 명장으로 쥬코프를 지목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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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만슈타인을 격찬한 이 책에서 리델하트는
롬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냉혹한 평가를 했다.

지금 한국의 일부 밀리터리 블로거들 사이에는 롬멜이 원수의 그릇이
아니라 대대장이나 연대장급의 인물이라는 잘못된 평가 절하의 인식이 있는데, 이의 출발점 중에 리델하트의 평가가
있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롬멜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아주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은 후에
이 블로그에서 밝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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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 대전 최고의 명장이라는 평가를 받은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에 대해서 글을 써본다.


만슈타인[1887년 11월 24-1973년 6월9일]은 원래 만슈타인 가문의
출신이 아니었다.


그는 1887년 프러시아 군의 포병 장군이었던 프릿츠 에리히 폰 르윈스키의 열 번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어머니 헤렌 폰 스페링의 막내 여동생이자 이모인 헤트빅 폰 스펠링과 그의 남편으로 역시 귀족 출신 장군인 게오르그 폰 만슈타인
중장에게 바로 양자로 입양이 되었다.


그가 르윈스키라는 이름 대신 만슈타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내력이었다.


만슈타인의 양부모는 오랫동안 자식이 없었기에 두 가족 사이에는
만슈타인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열 번째 아들은 만슈타인 가문에
양자로 보내기로 결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친부모와 양부모 모두 무인 가족이었기에 그가 군인의 길을 가는 것은
숙명이었다.
그는 열 세 살 때부터 6년간 유년학교[Kadettenanstalt]에서 수학한 뒤 1906년 소위로 임관하였다.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실전을 겪으면서 중상을 입기도 했던 그는
종전이 될 때 대위였었다. 전후 대폭 축소된 독일군에 계속 남아서 근무했었던 그는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고 독일의 재군비를 서둘렀을 때 독일 참모 본부에 있었다.

그는 1935년 참모 본부의 작전 국장을 맡게 되었다. 그는 이 직에 있을 때 중요한 프로젝트 하나를 완성했다. 보병 지원 전문의 돌격포[sturmgeschutze-자주포] 개발을 제안해서 완성시킨 것이다.

자주포는 1차 세계 대전 때 영국이 완성시켰지만 전차의 개념보다도 문자 그대로 자주 포병의 개념이 강했었다. 만슈타인은 이 자주포에 전차를 대신하는 장갑 돌격포의 새로운 개념을 부여해서 제안했었다.


                                          

                                        전쟁중 최대로 양산되었던 3호 돌격포


전차의 성능을 발휘하되 복잡한 포탑을 제거해서 생산 단가를 대폭 낮춘 이 돌격포 개념은 나중에 소련과 미국 등에서도 채택되었을 정도로 아주 성공적인 독일 무기 개발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폴란드 침공 작전>

히틀러가 주도한 2차 세계 대전의 서곡인 폴란드 침공 시 1939년 8월 18일 8사단의 사단장의 직책을 마친 만슈타인은 남부 집단군 사령관 게르드 폰 룬드스테드의 참모장이 되었다.


 

                           독일 보전 합동의 공격 -전쟁 후반의 사진이다.


그는 유능한 작전참모 군테르 브루멘트릿과 함께 폴란드
침공 작전을 입안했었다.


만슈타인은 이 때부터 기갑 부대의 돌파력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집단군이 가진 기갑 부대를 모두 발터 폰 레이케나우 장군의 10군에 집중해서 10군을 선봉으로 폴란드의 대군을 비즐라 강 서쪽에 포위할 돌파 작전을 입안했고 룬드스테드의 승인으로 이 작전 계획에 따른 폴란드 침공 작전이 1939년 9월 1일 감행되었다.


폴란드 남부의 대 포위 전략이 성공하여 남부의 폴란드 군은 완전 포위되었고 이들을 가두어 놓은 독일군은 거칠 것 없이
쾌속으로 전진했다.


1939년 9월 27일 폴란드는 항복하였다.
만슈타인은 폴란드를 잠재적인 큰 적인 소련을 상대하기 위한 완충지대로 남겨 놓는 것이 상책이라는 개인적인 생각을 했었지만 전쟁광 히틀러에게는 통하지 않는 개념이었다.


폴란드에서 선보인 독일의 기계화 부대와 항공대의 번개 같은 진격은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독일이 폴란드 전역에서의 거둔 대승리는 만슈타인이라는 천재가
입안을 주도했었던 '기갑부대의
집중 사용에 의한 돌파'라는 혁명적인 전략 개념이 큰 역할을 하였던 것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전차라는 것은 포병과 같은 보병의 지원수단이었고
전차 부대의 집중 사용이라는 것은 아주 새로운 개념이었다. 리델하트가 제창하고 독일 구데리안이 추종했었지만 이를 적극 채택해서 실전에서 시도해본 사람은 아직 없었다. 


만슈타인의 작전 입안으로 독일에 의해서 폴란드 전선에서 최초로 시도되었고, 대성공한 이 전략은 전격전[blitzkrieg]라는
이름으로 세계 전사에 최초로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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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가[Battle Hymn] 헤스 대령의 숨겨진 전공  -제2편-


 

이것은 마치 서부영화에서 인디언들에게 둘러싸인 포장마차들이 기병대의 구원을 기다리는 것과 흡사했다.


영화에서는 으레 기병대가 극적으로 제 시간에 나타나기 마련이었다.
두 곳에 교신이 된 나는 공격대가 오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미 공군의 항공 공격으로 파괴 된 북한군 T-34


공산군 기계화 부대는 어차피 길에 갇혀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였기 때문이었다. 30분쯤 뒤에 우리 대구 주둔 Bout -1 부대 소속 미군 조종사들이 모는 무스탕 기들이 나타났다.


나는 그들에게 적군의 상공을 선회하면서 우리가 했던대로 
계속 적 부대가 전진을 못하도록 하고 있으라고 일러놓았다.


나와 팀버레이크 중위는 대구 기지로 돌아가 연료와 탄약을
보충하고 다시 현장에 나가 일본에서 날아 올 공격대를 기다렸다.


드디어 일본 기지에서 F-82, F-80, B-26 등이 대거 출동했다.
이들 공격대는 도착과 동시 도로에 늘어선 기계화 부대를 공격했다. 각종 포탄과 기총탄들이 길게 늘어선 기계화 부대에 죽음의 불벼락을 안겼다.


                   한국전 최초로 적기를 격추했던 F-82기, 무스탕. 두 기를 쌍둥이로 합성한 기체를 가지고 있다.


나는 그 날 현장에 3회 출격하였는데 마지막 출격 때 보니 그 산등성이
길에 앞 뒤가 막혀서 늘어섰던 북한군 전차와 차량들이 모두 불타고 있었다.


마침 그 때는 바람도 불지 않아 연기가 수마일 상공으로 치솟고 있었다.
어두워지기 시작할 때는 적군의 기계화 부대 전체가 파괴되고 말았다.


미 극동 사령관 파트릿지 대장은 이날의 성공적인 공습 작전이
위기의 한국 전쟁 초반 전황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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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공군의 무스탕 기 - 헤스 대령이나 다른 교관들도 태극 마크를 단 무스탕기로 출격했었다.

이 공격으로 북한군 105 전차 사단 전차 38량, 자주포 7문, 그리고 트럭 117대가 파괴되고 북한군 다수가 섬멸당했다.

개전이래 유엔군의 항공 공격을 자주 받았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대규모 주간 행군을 했던 북한군은 대 타격을 받은 이 공습 이후 기계화 부대는 철저히 밤에만 기동하는 행군 방법으로 작전을 바꾸었다. 하지만 기계화 부대의 야간 기동이나 전투는 그 효율성을 크게 약화시키고
전진을 대폭 느리게 만든다.


앞에서 말했듯이 기계화 부대는 일본에서 출격했던 
대규모의 항공력 없이는 전부 섬멸하기가 힘들 정도의 대부대였었다.


헤스 대령이 단 두 기의 전투기만으로 출격했지만 좁은 국도에서
앞과 뒤의 차량들을 공격해서 이들을 가두어놓고 일본으로부터 대 규모 항공력이 출격할 때까지 장시간 잡아 놓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기계화 부대는 신속하게 기동해서 촌락이나 조치원 같은 도시로 흩어져 은신처로 피신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점으로 보아 단 두 기로 출격했었던 헤스 대령의 대담하고 지혜있는 대처가 큰 역할을 했다고 보아야 한다.


긴 도로에서 적 기계화 부대가 섬멸된 사례가 또 있다. 한달 뒤인 1950년 8월11일
경남 고성 사천 도로에서 105 전차 사단의 83 기계화 연대가 진격하는 미 해병을 피하여 도주하다가 미 해병 F-4U 전투기들에게 섬멸되었는데 함께 행군 중이던 대 병력도 함께 섬멸되었다. 

고성의 공습에서 83 기계화 연대의 차량 45량과
모터 사이클 55량이 박살나고 북한군 200명이 사살되었는데 평택에서는 덤벼들다가 두들겨 맞은 것이고 고성에서는 도망가다가 두들겨 맞았다는 차이가 있다.

울프 독이 항상  하는 이야기지만 한국 기계화 부대는 도로를 따라 공격과 기동을 해야 하는 근본적 취약점이 있다는
것을 이 북한 기계화 부대의 섬멸이 간접적으로 잘 보여준다.


                                                   대전 시가로 행진해 들어오는 105 여단 부대.
운좋게도 평택의 대폭격에서
섬멸된 부대와 따로 기동했었기 때문에 살아 남은 부대였다. 모터 싸이클을 모는 북한군은 모택동 군에서 넘어온 중국 동포들로 구성된 정예 부대였었다. 그러나 이 부대는 경남 고성에서 미 해병의 진격을 피해 도주하다가 모두 섬멸되고 말았다.


역시 같은 맥락이지만 산길에 기계화 부대를 몰아 넣지 말라는 한국 전쟁의 교훈을 북한 측이 여실히 보여준 사례이기도 하다.

평북 운산의 1 기병사단이나 장진호반의 미 7 사단 32 연대, 서울 북방 고양의 해피 밸리 전투에서의 영국군 얼스터 연대의 경우 중공군이 선두와 후미를 대거 인력으로 막은 다음 공격해서 섬멸당했는데 북한군은 단 두대의 무스탕 전투기에
앞뒤를 막히고 섬멸당한 것이 특색이다.


1951년 1월 3-4일 야간에 있었던 해피 밸리 전투를 아는 분은 극 소수였다. 좁은 논길에서  방망이 수류탄만으로 무장한 중공군에 의해 파괴된 얼스터 연대 배속의 쿠퍼 부대 크롬웰 전차 중 하나. 쿠퍼 부대 14량 전차 모두 수류탄에 궤도가 파괴 되어서 기동 불능상태로 포기되었다.



만약에 이 기계화 부대가 미 공군의 맹습에 섬멸당하지
않고 살아남았더라면 전황이 어떻게 흘러갔을까 한번 생각해보자.


북한 기계화 부대가 그대로 남하했더라면 대전에서 비록 대패했겠지만
7월 20일까지 버티었던 미 24사단의 지연전은 불가능했을 것이고 북한군은 그 보다 훨씬 먼저 대전을 함락하고 남진했을 것이다.



                            1950년 7월 20일 24사단장 딘 소장이 로케트 포로 직접 파괴한 T-34탱크
      딘 소장은 워커 중장으로 부터 7월 20일 까지 버티라는 명령을 받고있었고 부대 붕괴를 무릅쓰고 이를 수행했다.


최악의 경우 일본에서 급파된 미 1 기병사단이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 여유를
박탈하고 낙동강까지 몰아 붙였을지도 모른다.


가능성 높았던 다른 시나리오도 있을 수 있다.
앞에서 말한 바 대로 경부 축선의 빠른 돌파 가능성도 있겠지만, 차량이나 전차 등에서 여유가 있었던 105 전차 사단이 호남 지방으로 우회했었던 북한군 6사단에 차량과 전차등을 배속시켜 이들의 신속한 이동을 크게 도왔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한국전쟁 중 북한군 최대 명장이라는 방호산이 지휘했던 북한군 6사단은
모택동 군 출신으로 구성된 정예 부대로서 유엔군이 눈치채기 전 호남 지방을 급속히 우회해서 낙동강 교두보의 서쪽에 나타나 측면을 크게 위협했었다.


북한군은 뒤 늦게야 하동 전투에서 미군 350명을 사살한
이 부대에 105 전차 여단 소속 83 기계화 연대를 급파했었다. 시간적으로 상당히 늦은 배치였다. 이 연대가 앞에서 소개한 고성 사천 가도에서 미 해병대의 콜세어 부대에게 전멸당한 부대다.


방호산의 6사단은 북한군 부대 중에 유일하게 남해안에
도달한 부대이기도 했지만 인천 상륙 후 낙동강에 전개된 북한군 사단들이 모두 붕괴 분산 도주했는데도 건재 순을 유지하고서 태백산을 따라
북한 지역 집결지로 무사히 도주한 유일한 부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방호산은 전후 1954년 김일성에게 숙청당했다.


북한군 6사단은 순전히 도보로만 이런 신속한 측면 기동을 했었다. 포차(砲車)가 피스톤 수송( 차량이나 선박 지점왕복하면서 사람이나 물건계속 태워 나르거나 실어 나르는 .)을 해서 기동을 했었다지만 거의 도보로만 기동을 했었다.

만약에 김일성이 이들 사단의 가능성을 내다보고 평택 남방에서 파괴된 탱크나 트럭 중 일부라도 지원해주었더라면 휠씬 빠른 속도로 급습해와 낙동강 방어선의 측면이 빨리 붕괴되고 유엔군은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미군의 폭격으로 불타는 북한 유조차


또 평택에서의 폭격은 북한군의
기본 전력을 군수 보급면에서도 크게 약화시켰다는 점에서 그 성과를 평가할 수 있다.


개전 초 소련은 장비 공급에 늦장을 부려서 북한군은
가지고 있는 장비가 파괴되면 보충하기가 쉽지 않았었다.


1950년 7월 2일 충북 충주시 외곽 동락리에서 국군 6사단 7연대에게
전멸당한 북한군 15사단 48연대는 800명의 전사자를 내고 트럭도 60 대나 빼앗겼다. 그런데 이 트럭이 이 연대가 가진 전체 자산이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전투가 있었다.

북한군 연대장
김치구가 지휘하는 이 연대는 다시 남하하다가 경북 상주 화령장에서 국군 17연대에게 기습당해 전멸의
대패를 당해야했다.


특기할 것은 김치구 중좌가 지휘하는 이 연대는 동락리에서
손실당한 차량을 보충하지 못하고 소가 끄는 달구지로서 군수품을 운반하며 남하했었다는 사실이다.

두 번에 걸쳐 치뤼진 화령장 전투에서 김치구의 연대는 단 한량의 차량도 보유하지 않아 국군에게 노획당한 것이 없었다. 동락리에서 대패하고 장비 보충없이 급히 손실 인원만 보충한 채 남진했다는
이야기다.


이 사실은 전투
에서 손실당한 장비를 비교적 수월하게 미군으로부터 보충 받았던 국군과 대비된다.


북한군은 헤스가 주도했던 공습으로 손실당한 장비들을
후의 낙동강 방어전에서도 결코 보충할 수 없었다. 이 공습으로 북한은 전투력의 약화라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던 것이다.


                         금강 방어선에서의 미군 포병 -암담한 시기에 북한군 기계화 부대가 섬멸되었다.


미국이나 한국에서 작전의 명칭조차 없이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
이 폭격 작전에 명칭만이라도 부여해서 한국전쟁의 한 페이지에 의미 있게 평가되었으면 한다.


헤스 대령은 1951년 250회 출격을 끝으로
한국 근무를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헤스 대령과 원장 황온순 여사와 고아.  황온순 여사는 후란체스카 여사가 추천했다고 한다.


그의 고아 공수작전이 크게 보도되자 그의 자서전 집필 의뢰가
쇄도해서 그는 전송가[Battle hymn]라는 제목의 책을 집필해서 출판했다.


그 책이 인기를 끌자 영화계에서도 의뢰가 와 1957년
전송가는 당시 최고 스타 록 허드슨 주연으로 영화화 되었다.


헤스 대령은 자서전과 영화에서 받은 인세를 한 푼도 쓰지
않고 자신이 설립하고 황온순 여사가 책임자로 있던 고아원에 모두 기부하였다.


이 고아원은 후에 서울로 이전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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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가[Battle Hymn]주인공 헤스 대령의 숨겨진 전공 -제1편-



나이 드신 독자 분 중에 전송가(戰頌歌- Battle Hymn)라는 영화와 실제 주인공 딘. 헤스 대령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록 허드슨 주연의 전송가 -1957년-
그러나 사실과 너무 다른 스토리로 비판을 받았었다. 흥행을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이었는데 하여튼 히트를 쳤다.


헤스 대령은 목사 안수를 받고도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 후에
입대해서 전투기 조종사가 특이한 이력을 가졌다. 2차 세계 대전시에는 유럽에서 P-47 전투기를 몰고  63회 전투 출격하는 전적을 쌓기도 했었다.


                      딘 헤스 대령의 한국 참전때의 모습 - F 51 무스탕 조종석에서

그는 한국 전쟁 직전 일본으로 파견되었다가 한국전에 참전하게 되었는데 참전 당시 계급은 소령이었고  한국 근무 중 중령으로 진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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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매니아를 위한 사족이다.

그는 자서전에서 독일 항복 후 기네스 북에도 오른 독일 공군
최고 전사인 한스 유리히 루델 대령이 그의 부대에 투항했었음을 쓰고 있다.


루델 대령은 동부 전선에서 소련을 상대로 슈투카 조종사로 싸웠는데 2,530회나  전투 출격을 했었다.[한국 공군은 유치곤 대위의 203회]

적 전차 격파 519량, 차량 800량, 장갑열차 4량, 적 해군 전함 [32,000톤급의 마라트]격침, 순양함 두척, 구축함 한 척을 격침했었다. 적기 12기 격추, 열두번이나 격추당했었고 세 번 포로가 되었지만 모두 탈출했었다. 폭격기를 몰던 그가 격추시킨 소련 전투기 조종사 중에 레프 세스코프라는 항공 영웅도 있었다.

그는 다리 하나를 잃고서도 외다리로 계속 출격해서  러시아군을 공격했었는데
전쟁 마지막 동부[소련] 전선에서 싸웠던 그는 혹독한 취급을 당할 소련군에 항복하는 것을 거부하고 부하들과 FW-190을 몰고 두시간을 비행하여 서부 전선으로  탈출해서 연합군에 항복하였다. 

전송가에 묘사된 독일 전투기들의 항복 착륙 순간이 어쩐지 낯익어서 루델 대령의  슈투카 파이럿이라는 자서전을 찾아 보니 그가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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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스 대령에게 주어진 미션은 아직도 걸음마 단계인 한국 공군의
조종사들을 훈련시키고 공군을 크게 육성하는 BOUT 1 이라는 명칭의 프로젝트 추진이었다.


그는 미군 장교 4명과 100여명의 병사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왔다.


물자와 장비가 턱없이 부족했었고 고정된 훈련 비행장도 없어서
이 비행장 저 비행장을 전전하였는데, 이처럼 어려운 여건에서도  한국군과 고락을 함께하며 한국 전투기 조종사 훈련에 최선을 다했다.


그의 열성에 힘입어 전투기 한 대 없던 한국 공군은
3년도 안되어 75기의 무스탕 전투기에 자체 출격이 가능한 근대 공군으로 성장했다.


                         전쟁이 발발한 다음날 일본에 F-51(무스탕)기를 인수하러 간 한국 공군 조종사들.
이착륙 훈련만 받고 돌아와 바로 출격했었다. 일본 육군 항공대의 베테랑 조종사들이었지만 익숙치 않은 무스탕기를 조종하다가 이근석 대령이 전사했다. 그는 일본 육군 항공대의 조종사로서 연합군기 23기를 격추했던 조종사였었다. 한국 조종사들은 전쟁의 위기를 넘기자 헤스 대령의 교관들로 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다시 이수했었다.


그는 한국 공군을 훈련시키면서도 수시로 미군
또는 한국 공군 조종사들과 동반 출격해서 250회 출격 기록을 남겼다.



                                                                   100회 출격의 축하식


그러나 헤스 대령은 이런 군사적인 면보다도, 그가 한국 고아들을
위해서 고아원을 세우고 중공군의 남하로 인해 후퇴하던 1950년 12월 14일 미 공군 수송기를 동원해서 1,000명의 전쟁 고아들을 모두 제주도로  피난시킨 대 수송 작전이 매스컴에 알려지면서 크게 이름을 알렸었다.

 

                                                          헤스 대령이 몰던 무스탕 18번기.
한국 공군의 태극기 기체 표시가 있다. 그의 한국어 번역 로고인 신념의 조인이라는 글이 써있다. 목사인 헤스 대령이 결정한 By faith, I fly.의 한국어 번역이었다. [믿음으로 비행한다는 원래의 뜻이 조금  왜곡 된 느낌이 든다.]


그는 한국에서 근무하는 동안은 물론 임기를 끝내고 미국에
돌아 간 뒤에도 계속 자금을 모아 고아원을 돌봤었다. 이승만 박사 내외와도 아주 가까웠던 그는 한국 역사에서 가장 유명하고 한국 민족에 가까웠던 미 공군 조종사로 남아있다.



           그는 이승만 박사를 아주 존경했었고 이승만 박사 내외는 그를 아들처럼 아꼈다. 훈장 포상식 뒤의 촬영.


한국을 자주 방문했던 헤스 대령은 93세의 나이에도
아직 생존해있다.


                                                C-54 수송기 10대로 단행한 1,000명 고아의 제주도 공수
장난감 자동차 공수 작전이라는 명칭이 붙어있다. 옆의 원장 황온순여사는 전쟁중 아들을 잃었었다.이화 여전을 나왔고 영국 유학을  다녀와 영어가 능숙했었다. 2003년 작고.


그러나 헤스 대령이 한국 전쟁 중에 전투기를 몰고 츨격하여
큰 전공을 세웠던
사실은 군이나 언론에서 잘 몰라주고 있다.

평택 남방 도로에서 적 기계화 부대의 등뼈를 부러뜨린 폭격 작전인데 전쟁 초기 극히 불리했던 한국전의 전황 극복에 엄청나게 기여한 항공 공격이었다.


그 때 한국군은 북한의 기습으로 입은 심적 물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한국 전선에 투입되었던 미군들도 7월 5일 오산 죽미령 전투에서 대패한 후 계속 밀리기만 하던 터였다.


오산 죽미령 공격은 북한군 최정예 4사단 18연대가
실행했었고 105전차 사단은 33량의 T-34 전차를 동원하여 오산  방어선의 중앙 도로를 돌파하여 공격의 예봉을 담당했었다.


그런 때에 딘 소장은 제 24사단을 재편하여 대전 북방에 방어선을 구축하고자
했다.

아래는 헤스 대령의 저서 전송가에서 빌려온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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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은 마침 일요일이었는데 아침 날씨가 너무 흐려서 우리 훈련단은 그냥 죽치고 앉아 있었다.

[이 날은 오산 죽미령 전투에서 패배한지 닷새 되는 7월 10일이었다. 이 무렵은 장마철이어서 계속 비가 왔었고 한반도 전역의 기상이 좋지 않았었다. 1950년 7월 10일은 일요일이 아니었는데 헤스 대령이나 작가가 착각을 한 듯하다.]
 

마침 통신 정비병 하나가 F-51 무전기를 작동시켜려고 만지작 거리고 있었는데 미 24사단 21연대에 배속된 공군 항공 통제단[FAC] 짚차의 무선을 통해 비상 항공 지원의 요청이 수신되었다.


이 불순한 날씨에 일본에서 전투기가 급히 온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현실적으로 우리 Bout-1 훈련단 비행기가 비교적 가까이 있던 셈이었다. 그런데 우리의 활주로는 연일 쏟아지는 비 때문에 절반 정도는 6인치 되는 깊이의 물에 잠겨 있었다.
 

허나 비상 지원 요청을 받은 이상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조종사들한테 모두 출격하라고 명령하는 것 역시 정당한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누구 지원자가 있나 물었더니 그 당시 10여명의 
미군 조종사 가운데 한 사람인 팀버레이크 중위가 나섰다.

우리 둘은 무스탕기를 서서히 활주로로 몰고 나가 신속하게 폭탄과 기총탄을 무장할 만큼 무장하였다. 우리는 완전 무장으로 무거워진 기체를 가까스로 활주시켜 이륙하였다.


상공에 오르자 나는 지원 요청을 한 전방의 FAC에게 무선을 보냈다.
그랬더니 전방에서 국도를 따라 내려오는 기계화 부대를 공격해달라는 것이었다. 상군은 기계화 부대에 대해서 속수무책이었다. 우리 육군에게는 적 탱크를 파괴시킬 중무기가 없었다.[최선의 대전차 무기인 3.5로케트 포는 대전 전투 때부터 사용되었다.]


우리가 목표물을 향하여 날아가자 하늘이 맑아졌고 적의
기계화 부대가 환히 내려다 보였다. 이것을 보자 나는 전율을 느꼈다.


                                                          한국 공군 F-51(무스탕)기 편대의 출격



탱크, 트럭, 기타 별별 차량들이 10-15마일 가량 되는 비포장 도로에
줄을 지어 가고 있었는데 높은 상공에서 보니 부대 행군 간격 때문에 마치 중간 중간 토막 난 뱀처럼 보였다.


전방 항공 통제단에서 보낸 무선으로 들려오던 경악이 섞여있던
목소리를 이제 충분히 이해 할만했다.


상황이 이러했으니 F-51 2대 가지고는 어림도 없었다.
그 때에 내 비행기는 무선이 가능했으나 팀버레이크 중위의 비행기와는 교신이 안 되었다.


나는 손짓으로 그에게 이 기계화 부대의 후미를 공격하라고 
일러 놓은 다음 나는 부대의 선두로 가서 타격을 가하기로 하였다. 우리는 기계화 부대 양 끝에 급강하 하면서 기총탄을 퍼붓고 폭탄 세례를 가했다.


다행히도 우리의 폭탄들이 목표했던 곳들에 모두 명중했다.
선두와 후미의 차량들을 폭파시키는 동시에 목표에 커다란 구덩이를 만들어 놓았으니 북한군들은 행열 앞과 뒤 어디로건 빠져 나갈 길이
없이 도로에 고정되고 말았다.


이들을 가두어 놓은 다음 나는 긴급 호출 신호인 메이데이를
기지 사령부로 날렸다.


                                                              장마철의 F-51(무스탕) 출격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답신이 없었다. 바로 아래에 대물 표적을 놔둔 나는 단념할 수가 없었다. 이런 대물 표적을 처분하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항공 공격대의 출격이 필요하였다.

[
당시 한국에는 미 공군의 대부대가 없었다. 아직도 일본의 공군기지에서 한반도로 출격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헤스 대령은 일본 기지를 호출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답신이 올 때까지 30-40분 간격으로 반복 호출을 하면서
차량 대열에서 쏘아 올리는 대공 사격을 제압하는 기총 사격을 되풀이 하였다.


적군의 대열 자체는 그대로 놓아둔 채 적군 차량 중에서 대열 옆길로
빠져나와 탈출하려는 새치기 차량들을 보이는대로 공격했다.


드디어 나의 메이데이 신호가 마침 일본 상공에서 불순한 기후 때문에
이다쓰케 공군기지에 비상 착륙하려던 어느 미 공군 비행기에 포착되었다.



헤스 대령이 한국 참전시 그의 오른 팔 역할을 했던 크레이그웰 중위. 혹심한 미군 내부의 인종 차별을 이겨냈고 아주 유능한 조종사였었다.


목마르게 기다리던 답신이 있자 나는 이 쪽 상황을 설명하고
올 수 있는 모든 전투기들은 다 와주기를 청하였다.

일본 교신 후 대구 소재 미 육군 통신대와도 교신이 트여 대구 비행장에 있는 나의 부대 비행기들도 모두 출동하도록 연락해줄 것을 부탁했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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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住持]가 된 日 잠수함장



일본에는 우리나라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종교가 있다.
일본의 개국신[開國神]인 "아마데라스 오오가미"라는 우리나라 단군 격의 여자를 모시는 신도[神道]가 그 것이다.


 

                                       오미와 신사 입구의 도리이


일제가 한반도 강점기에 삼천리 방방곡곡에 신사라는 것을
만들어 놓고 한국인들에게 참배를 강요했다가 코웃음으로 응수 받았던 일본 민족만의 종교이기도 하다.


신도에도 불교와 같이 절도 있고 주지(住持)도 있다.
절은 신사라고 부르고, 승려는 신관이라고 부르며 신사의 책임자는 궁사[宮司]라고 부른다.



                                          신관, 궁사의 차림세
       직급이 엄격해서 여러 계급이 있고 궁사가 되기 위해서는 국립대학인 신관 전문 교육 기관의 교육을
       필해야 한다.
뒤에 따르는 여자는 신녀라는 신사 소속 여성.


가끔 한국 TV에도 등장하는 인물로서 한국의 버선을
뒤집어쓴 것 같은 건[巾]을 쓰고 포대기 같이 풍성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궁사이다.


궁사에 해당하는 한국어가 없으니 이 글에서는 관례대로
주지로 번역하기로 한다.


일본인들은 신사에 가면 박수를 세 번 쳐서
신을 부르고 허리를 굽혀 집안의 안녕함을 기원한다. 궁사들은 기원의 실행과 봉납은 물론 결혼식과 장례식을 주재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궁사는 신도들과 신과의 가교 역할을 한다고 하겠다.



                                                 궁사


잠시 이야기를 바꾸어 본다. 태평양 전쟁이 다 끝나가던 시기인 1945년 7월 30일 심야인 00:14
태평양에서 단독으로 항진하던 미국의 중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 함이 뇌격을 받고 격침되었다.


이 순양함에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한 두 발의 원자탄에 이어 투하할 계획이던 제 3의 원자탄이 적재되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었지만,
사실 이 함은 8월 7일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 리틀 보이의 농축 우라늄과 중요한 부품을 샌프란시스코로부터 원자탄 투하 발진 기지인 티니언 섬으로 수송해왔었다.



                                       인디애나폴리스 함. 9,800톤.


임무를 수행한 인디애나폴리스 함은 필리핀의 레이테 근해를 거쳐 오키나와 근해의 미 함대에 합류하고자 항해 중이었다.


인디애나폴리스 함은 너무 방심한 탓에 호위함 없이 홀로 항해했었고
피격후 보낸 조난 신호조차 잘 전달되지 않아 1,196명의 승무원들 대부분이 나흘간이나 표류하였는데 상어와 기갈로 인해 879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이 해역은 세계 최대의 상어 떼가 횡행하는 곳이다. 격침 사실을 모르던 미 해군이 구조선을 보내지 않아 수많은 수병들이 상어에게 잡아 먹혔다.]


인디애나폴리스 함의 격침으로 미군은 전쟁 중 최대의 인명피해를 보았다.
역사상 최대의 상어 떼에 의한 피해이기도 했다.

 

                   표류하다가 구조되어 괌 섬으로 이송된 인디애나포리스 함의 승조원들



인디애나폴리스 함을 뇌격한 적함은 일본 잠수함 I-58함이었다.
함령 불과 2년의 최신식 대형 잠수함이었다.


               I-58. 3천톤급의 대형 잠수함으로 인간 자살 특공 병기인 가이텐 4기를 싣고 있다.
                   I-58에서도 여러 기의 가이텐이 출격해서 미해군 함정들을 공격했었다.


함장은 일본의 해군사관학교 출신인 하시모토 모치쓰라 중좌였다. 태평양 전쟁에서 가장 유명한 일본 잠수함이었고 함장이었다.

                                               하시모토 중좌.


미 해군사상 가장 끔찍한 피해를 입혔던 하시모토 중좌는 나중에 궁사가 되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생역전이었다.


하시모토 중좌는 패전 후 미국으로 불려갔다.
그의 뇌격으로 승조원 다수가 사망했던 인디애나포리스 함의 함장 찰스 버틀러 멕베이 대령이 지휘태만으로 군법회의에 회부되었기 때문이었다.


증인으로 법정에 섰던 그는 멕베이 대령을 적극 변호하는 증언을 했다.
[멕베이는 사면되고 1949년 소장으로 전역했지만 1968년 자살했다. 평생 인디애나폴리스 함 격침의 심리적인 충격에 시달렸다고 한다.]


                              격침 사건에 대해서 기자 회견을 하는 맥베이 함장.


귀국 후 하시모토는 해운계에 투신해서 상선 선장이 되었으나 상선 선장 생활 몇 년이 지나지 않아 한국 배와 충돌하는 사고를 당하고 배에서 내려야 했고, 1954년에 가와사키 중공업에 입사하여 일본 해상 자위대 최초의 잠수함 오야시오 함의 건조 프로젝트에 종사했었다.

그리고 그의 다음 인생은 바다와는 전혀 관계없는 오미와 신사의
궁사라는 신도의 직업에 투신하는 것으로 반전했다.


그는
궁사라는 직업에 만족한 듯, 죽을 때까지 신사(神社)에서 궁사로서 조용히 지내다가 2000년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의 아들도 궁사의 직을 이어 받아서 후임자가 되었다.


                                                 오미와 신사.

원자탄을 수송했던 순양함을 격침시켜 수많은 미 수병들을 전사하게 했던 잠수함장이 신사의 궁사라는 길을 간 것이 이색적이어서 일본 기록을 찾아보니 그의 형들도 해군 사관학교 출신이었지만 아버지는 역시 궁사였다.


일본 패전 후 군대는 해산되고 아무런 보상도 없이 직업을 잃은
일본 육해군의 간부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몸부림을 쳐야했다.


          I-58함의 전후 내부 모습.  I-58은 전후 미군에게 몰수되어 사세보 근해에서 격침 당했다.


알래스카의 기스카 섬에서 일본군을 감쪽같이 철수시켜 유명해진 함대 사령관
기무라 마사토미중장처럼 염전 사업에 뛰어 들어 큰 돈을 번 사람도 있었고 진주만에서 어뢰 공격을 시도하다가 포로가 된 사카마키처럼 도요다 자동차 회사의 중역이 된 사람도 있었지만 전직 군인들은 대부분은 아주 어려운 생활을 했었다.


해군의 격추왕 사카이 사부로는 인쇄소를 차려서 겨우
생활 기반을 닦기 전까지는 7년간 막 노동자 생활을 했었다.


그러나 종교인의 길을 간 사람도 있었다.
진주만 공격대 대장인 후치다 미쓰오 중좌인데 기독교의 전도사가 되었고 전도차 우리나라도 한번 다녀갔었다.


                                             후치다 미쓰오 대좌
영화 도라! 도라! 도라!에서 배우 다무라 다카히로
가 콧수염을 단 후치다를 연기한 것을 기억하는 올드 팬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원자탄이니 어뢰니 잠수함이니 하는 첨단 병기의
세계에 있던 하시모토의 이미지와 한국인이 보기에 케케묵은 궁사의 이미지는 너무 대조적이다.


                      잠망경을 잡고 뇌격 명령을 내리던 하시모토의 인생 전반부의 자세는
                     
후반부에 이렇게 경배하고 기원하는 자세로 변화하였다.


더구나 그의 뇌격으로 인해 미 수병들이 끔찍하게 집단 전사하였다는 사실도
인간의 행복을 지향하는 궁사의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

하여튼 그는 궁사답게 자신이 죽음의 길로 가도록 명령했던 가이텐 승무원들과 자신의 공격으로 죽은 미군들의 영혼을 애도하며 평생을 보냈다고 그의 자서전은 전하고 있다. 인디애나폴리스 함장 맥베이와 대조적인 삶이다.

전역 후 여러 이색적인 길을 가는 것은 한국군 출신들에게서도 많이
볼 수 있지만 태평양 전사의 큰 고비를 만든 하시모토는 확실히 이색적인 후반의 인생을 살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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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해볼 AK-74 소염기


                                              구 소련제 AK-74


이 포스팅은 물론 열혈국방을 방문한 독자분들을 위한 글이지만
내심은 방위산업의 무기개발자나 군의 병기분야 전문가들이 꼭 보아주었으면 하는 글이기도 하다..


미국은 총기의 천국이다. 수많은 스포츠용 총기도 개발되어있고, 탄약이나 조준경의 발달 수준 등은 제약 많은 우리로서는 상상하기조차 쉽지가 않다.


총기 관련 서적은 물론 정기 간행물도 여러 종류이며, 민간 총기 시장이 넓고 애호가의 층이 두텁다 보니 분야도 수 십 개로 세분화 되어 있다.
군용 총기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분들은 차라리 미국 민간 총기 분야의 자료를 수집하는 것이 더 넓고 깊은 지식을 얻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미국 민간 시장에서 취급되는 총기들은 최첨단의 자동 총기에서 수렵용 총기, 전근대적인 흑색 화약[화승총]
총기까지 다양하다.


미국의 총기 애호가 중에 군용 총기만을 애호하는 매니아들이 있는데,
미국에서는 세계 각국의 군용 총도 자동사격 기능만 제거하면 개인이 거의 모두 구매 할 수가 있다. 미군의 M-14, M-16은 물론 러시아나 중국제 AK-47,시모노프, 유럽의 FN FAL 등도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곳이 미국이다. [그러나 요즘은 군용 총기 수입 분야에 여러 규제가 강화되어 가고 있는 추세이다.]


군용 총기의 악세사리도 무척 다양해서 총기에 부착하는
개머리판에서 스코프 마운트까지 시장에서 볼 수가 있다.


그런데 한 악세사리가 벌써 30년 가까이 스테디 셀러로
팔리고 있어 이색적이다. 

바로 러시아가 개발한 특이한 소염기다.
소염기는
발사 시 총구에서 발생하는 화염을 측면으로 분산시켜 화염의 크기를 축소해 줌으로서 적에게 발견될 확률을 줄여주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M-16이나 K-1,2 소총의 총구에도 이 것이 부착되어 있다.


                              미국 총기 악세사리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는 AK-74 소염기


놀랍지만 이 소염기는 미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러시아제 군용 소총 AK-74의 것을 미국 회사들이 복제 생산한 것이며 여러 종류의 복제 소염기가 판매 되고 있다.


북한을 포함한 소련 등의 여러 구 공산권의 국가들이 주력 개인화기로
쓰고 있는 AK -74 소총 소염기의 숨겨진 특징을 소개한다.


이 총이 세상에 등장한 것은 70년대다.
북한에서는 88식 소총으로 개명되어 생산되었는데 90년대에 일선 특수 부대부터 지급되었다.



                        김정일 열병식에 등장한 북한 공수부대 여군이 들고 있는 88식 소총
                                       
김정일을 보고 감격해서 울고 있다.


기존 AK-47M의 구조를 개량하고 서방의 5.56mm 소총탄의 개념을 살린 5.45mm 실탄을 채택한 소총이다. 총을 경량화해서 휴대하기 좋은 점이 특히 돋보이고 AK-47의 고질적인 문제인 불량한 명중률도 어느 정도 개선되었다.


미스테리하게 느껴지던 AK-74는 아프가니스탄 전쟁 때 무자헤딘들에게
노획되고 미국의 관계 당국에 전해져서 여러 평가 실험들이 행해졌다.

실험 결과
여러 사실들이 발견되었는데, 특히 미국 전문가들이 놀란 것은 총을 자동으로 발사했을 때 총구가 상방향으로 튀어 오르는 현상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성능은 AK-74 총구에 부착된 소염기의 덕분이다.
단순함을 기본으로 하는 디자인의 AK 계열 소총에 어울리지 않게 보기에도 아주 정교하게 잘 만들어져 있다.


                                         오리지날 AK-74 소염기


군 복무자들은 잘 아시겠지만 총을 발사하면 총구가 반동에 의해서 상방향으로 펄쩍 뛰는 현상이 있다. 특히 권총 발사시 이 현상은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총구의 상향 반동 현상은 총기의 사격 정확성을 크게 훼손한다.
완전 자동 사격시는 연속되는 상향 반동으로 명중률의 저하는 물론 총의 조작조차 힘들다.


이 상향 반동을 조금이라도 줄여 보고자 가스통을 총신의 상부에
설계하기 시작하였는데 요즈음은 근대 군용 총의 표준화가 되어 버렸다. 우리의 옛 M-1 총과 요즈음의 K-2 소총을 비교해보면 이해가 가리라 본다.



                                                   AK-74 소총과 5.45mm 실탄, 그리고 대검



총기에 따라서는 반동을 줄이기 위해서 소염 기능보다도
개스를 측방으로 분산시켜 후방에 가하는 반동 압력을 줄여주는 기능을 더 중시하는 소염기가 부착되기도 하는데 AK-47의 소염기는 소염의 역할 보다도 총구의 상향 반동을 감소 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디자인 되어 있다.


야간에 어둠을 배경으로 AK-47과 M-16을 비교 발사해보면
AK-47의 총구 화염이 M-16의 화염보다 두 세배 더 크다. AK-74의 소염기도 소염 기능보다는 상향 반동을 줄이는 기능 전문으로 디자인 된 것이다.


AK-74를 테스트 해본 미 전문가는 이 기능이 탁월해서 완전 자동으로 
발사하면 총을 잡은 자세와 총구를 지향하는 상하 각도에 따라 총구가 상방향으로 튀기는커녕 아래로 향하는 믿지 못할 성능까지도 체험했었다.


소련의 신병기가 가진 놀라운 기능이 알려지자 미국 민간 밀리터리 총기
시장에서 마케팅을 하던 한 업체가 잽싸게 이 소염기를 제조해서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 신형 소염기는 현대 5.56mm 총기라면 약간의 가공을 거쳐서
어느 총의 총구에라도 부착할 수가 있다.


이렇게 성능이 탁월하다면 미국이건 독일이건 모방 생산 할만도 하다.
미군이 현재 채택하고 있는 대검, 즉 칼집과 결합해서 절단기로 사용할 수 있는 대검이 원래 AK-47의 대검을 모방한 것이니만큼 소염기를 모방 생산하는 것도 주저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도 이 소염기를 모방해서 제식 소총에 부착한 국가는 없다.

이유가 있다. AK-74의 소염기는 사실 소염기[flash hider]라고 하기가 곤란한 도구이다. 발사 화염을 없애는 기능을 아예 생략한 것이므로 소염기[flash hider]라기 보다 반동 완화기[muzzle brake]라는 기능 전문의 장치라고 해야 한다.


                        미국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는 AK-74 소염기 - 다른 회사 제품이다.



발사시 나오는 화염은 오히려 없을 때 보다도 더 크다. 이것은 야간 전투시 발사자에게 크게 불리한 상황을 조성한다.

그리고 그 긴 길이도 총기를 콤팩트하게 만들어가고 있는 현대 군용 총기 개발의 추세에 역행하는 것이다. 이 핸디캡이 기관단총 같은 짧은 총신에 이 소염기를 부착할 아이디어를 제외하게 한다.

M-14 총에 불필요하게 긴 소염기를 부착해서 많은 구설수에 시달렸던
기억도 총기 개발자들에게 부담을 주고 있다.


AK-74 소염기는 완전 자동 사격 시에 위력을 발휘한다.
람보 영화에서와 같이 마치 호스에서 물을 뿌리듯 소총으로 완전 자동 사격을 하는 상황은 실전에서는 극히 드물다.


사실 적과의 갑작스런 조우나 실내와 같은 근접 전의 경우를
빼놓고는 반자동이나 3발 점사로서 사격을 하는데, 완전 자동사격의 경우는 총구의 상향 반동이나 명중률을 따질만한 상황이 아니다. 실전에서의 이러한 완전 자동 사격의 특성이 AK-74 소염기의 채택을 외면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AK-74 소총은 여러 변형이 있다. 이것은 유탄 발사기가 부착된 형이다.


그러나 이런 제약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총기 개발을 위해서 AK-74 소총의 소염기는 계속 유의 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수많은 총기 제품이 새로 탄생하고 소멸되는 미국 총기 시장에서
AK-74의 소염기 복제품이 예민하기 짝이 없는 미국 총기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으며 지금까지 롱런했다는 것은 이 제품 속에 무엇인가가 숨겨진 가능성으로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관련해서 미국의 남북전쟁 무렵 등장한 6총신 개틀링 기관총의 경우를
참고해보자.


6개의 총신이 한 묶음으로 된 이 기관총은 흑색화약 시절
전 세계에 가장 성능 좋은 자동 화기로서 팔려나갔었다. 조선에도 도입되어 1894년 공주 우금치에서 동학군에게 대 타격을 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개틀링 기관포 -20세기 초에 소멸된 다총신 개념이 50년만에 살아 났다.


그러나 무연 화약시대가 열리고 하이람 맥심이라는 성능좋은 기관총이 발명되자 개틀링은 역사의 뒤편으로 퇴장하여야 했고, 2차 세계대전까지도 소멸한 개념의 무기였었다.
 
그러나 발사속도가 빠른 전투기 용 기관포를 개발하던 General Electric사의 기술진에 의해서 개틀링 기관총의 소멸된 개념이 다시 되살려져 오늘날 최신 전투기 F-22에도 장착된 벌칸 포가 되었다.



                                          AK-74 소염기를 앞에서 본 모습


AK-74 소염기 역시 지금은 서방세계의 군용 총기 시장에서 외면 받고 있지만 앞으로 총기나 탄약의 기술 개발에 따라 이 AK-74 소염기를 기반으로 한 탁월한 성능의 제품이 만들어질 가능성도 있다는 믿음이 들어 이 글을 통해 관계자들에게 제언해본다..

(이글은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으로 국방부의 공식적인 입장과는 관련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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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라덴보다 먼저 천벌받은 부하 테러리스트



                             살인귀의 말로 - 자르카위의 시신


금세기 최대의 살인마 오사마 빈 라덴이 사살당했다.
인간의 죽음을 축하할 이유는 별로 없지만 그는 사실 죽어 마땅한 응징을 받았다.

그가 막대한 재력으로 펼친 테러는 세계의 어떤 종교적, 정치적 또는 도덕적 명분을 갖다 붙여도 정당성을 부여할 수 없는 것이다. 그가 행한 살인들은 그가 숭배하는 알라조차도 등을 돌릴만큼 잔인한 것들이었다.

그런 암살 테러범 밑에서 최악의 살인 졸개 노릇을 하다가 미군의 폭탄 세례를 받고 저 세상으로 간 잔인한 인물이 있었다.

독자 분 중에 2004년 한국의 젊은이 김선일 씨가 이라크에서 테러리스트 일당에게 납치되어 참혹한 최후를 맞은 사실을 기억하시는 분이 많을 것이다.


독실한 신앙인이던 김선일 씨는 아랍어를 전공했고 학비를 벌어 석사 학위에 도전하고자 이라크 소재 한국 기업 다나 무역에 취업했었다.


다나 무역은 미군들에게 납품업을 하는 기업이었다. 김선일 씨는 테러리스트가 많은 모술에 주둔한 미군에 납품차 가던 중에 납치되었다.


아부 자르카위는 김선일 씨 살해 등 갖은 악행을 저지르다가  이라크에서 최후를 맞았지만 실은 요르단 태생이다.[1966년 생]


생긴대로 불량스럽던 그는 젊은 시절 요르단 뒷거리에서 숱한 범죄를 저지르며 형무소를 드나들던 깡패였다. 서른일곱 번의 사건에 연루된 범죄 경력이 있고 알콜 중독자였다.

                           조무래기 조폭 수준의 불량배였던 젊은 시절의 자르카위


그러다가 어떻게 바람이 불어 1989년 아프가니스탄으로 흘러
들어가
소위 말하는 반 소련군 무력투쟁인 지하드[성전]에 끼어들었다. 이때 알 카에다의 두목 빈 라덴과도 친교를 텄다.


이 뒤에 자르카위는 요르단에서 군주제 폐지 쿠데타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5년간 교도소 살이를 했었다.


출옥 후 성전의 이름 아래 아프가니스탄과 북부의 거점을 들락거리며 테러 활동에 관계하다가 2003년 미군에 의해 이라크가 침공되자 잔악한 테러 활동을 격화 시켰다.


원래 자신의 폭력 조직을 알 카에다의 이라크 지부로서 연결하여 협력 체제를 만든 뒤에는 테러의 극을 달렸다.

                                    악명 높은 테러리스트 시절의 자르카위


요르단과 이라크 내외에서 폭탄 테러와
납치 암살 등을 수시로 저질러서 악명을 떨쳤는데, 그가 악명을 세계에 드날린 것은 납치한 미국인 니콜라스 버그 씨를  직접 참수하는 끔찍한 장면을 담은 비디오가 세계에 알려 진 뒤이다.


그후 자르카위는  2004 년 6월 김선일 씨를 납치해서 인질로 잡고 있다가 그를 직접 살해했으며, 김선일 씨가 살해되기 직전까지의 모습이 담긴 동영상이 국내에도 방영되어서 국민들의 격분과 슬픔을 불러왔었다.


                                           알 자르카위의 다른 모습 
                              그의 행적때문인지
불량배의 인상이 뚜렷해 보인다.


이라크의 미군은 그의 목에 2천 500만불의 현상금을 걸고
그를 추적했었다. 쫓기던 그는 네 시간마다 은신처를 옮기는 용의주도함을 보였다. 그는 한 때 미군 공격에 중상을 입기도 했지만 용케 잘 빠져 나가며 체포를 피했다.


그러나 갖은 악행을 저지르던 살인마 자르카위에게 결국 하늘의 응징이 내려졌다.


자르카위가 2006년 6월 7일 오후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북쪽 8킬로 떨어진 교외인 바쿠바의 안전가옥에서 비밀 회합을 가질 것이라는 정보가 미군 당국에 입수되었다.


자르카위는 이 회합에 두 번째 부인과 어린 아들까지 대동하고 나타났다.  참석한 부하들은 총 7명이었다. 회합을 하다가 미군이 포위하고 있는 것을 알아챈 자르카위 일당은 격심한 사격으로 저항했다.


                                   정밀 폭격으로 파괴된 자르카위 안가


미군은 할 수 없이 두기의 F-16기를 불렀다.
F-16기들은 레이다로 유도하는 500 파운드짜리 스마트 폭탄 두 발씩을 장비하고 있었다.


목표를 여러번 확인한 F-16기 조종사는 스마트 폭탄 한 발을 투하했다. 예외는 없었다. 폭탄은 정확히 명중해서 안가(安家)는 산산조각이 났다.


자르카위는 발견될 당시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주변에서 구경했던  이라크 주민들은 미군들이 자르카위를 구타했다고 증언했지만 다 죽어가는 그에게 폭력을 행사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미군이 살펴보고 있는 그의 비트 흔적.

아마 숨이 넘어가는 그를 살리기 위해서 심폐회생 수술을 하는 장면을 보고 오해한듯하다. 그의 부인 이스라와 자식 아부둘 라만은 이 폭격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그는 세 번 결혼했다. 첫 부인은 자르카위의 고향에서 네 명의 자녀들과 같이 살고 있다. 폭격으로 죽은 두 번 째  부인 이스라는 그 녀가 14 살 때 자르카위와 결혼했다.  그녀의 아버지도 테러리스트로 시아파 지도자를 암살했었다. 자르카위는 이라크의 한 여인과 세 번째 결혼을 했지만  그녀의 신상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폭격으로 같이 죽었다는 설도 있다.]



                      미군이 발표한 자르카위 시신의 다른 사진. 시신 단장을 한 사진이다.

김선일 씨를 무참히 살해한 그의 행각을 보면 그의 두목 오사마 빈라덴 처럼 난세(亂世)면  꼭 나타나서 사상이니 종교니 민족이니 하는 명분을 업고 마음대로 살인을 일삼는 싸이코패쓰 기질이 있는 그런 범죄자들의 한 부류라고 밖에 볼 수 없는 것 같다.


이따위 불량 살인배에게 우리의 성실했던 젊은이가 희생된 것이 안타깝지만 그가 하늘의 응징을 받은 것을 보니 사필귀정이나 인과응보니 하는 옛말들이 떠 오르게 된다. 그가 지옥으로 뒤따라 오는 옛 두목 오사마 빈 라덴을 보면 무슨 소리를 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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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대공 탄막에 스스로 뛰어든 조종사



전폭기가 폭탄을 무장하고 출격했을 때, 적기에게 요격을 당할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되면 조종사는 무장한 폭탄을 모두 버리고 회피 기동을 하는 것이 상식이다.



                                           F 105 기의 편대 비행


이 지경이 되면 출격 목표는 자연히 포기하게 된다. 하지만 후미를 물고 추격하는 적기가 있는 위기 상황에서도 주어진 출격 목표를 반드시 달성해야겠다고 다짐한 한 조종사가 폭탄을 버리고 이탈하는 대신,
 
적기를 끌고 적 대공 포화가 치열한
화망(火網) 속에 스스로 뛰어 들어 겁을 먹은 적기가 추격을 포기하게 만들고 자신은 화망을 통과하면서 손상을 입은 전투기를 끝까지 조종하여서 임무를 완수한 사례를 소개한다.


보통의 사람들이 갖기 힘든 용기를 발휘했던 이 조종사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 최고의 무공훈장인 명예 훈장[MEDAL OF HONOR]을 수여 받았다.



                                            멀린 데스레프센 대위


그는 미 공군의 멀린 데스레프센 대위였다.
데스레프센 대위는 1934년 아이오아 주에서 태어나 1955년 군에 몸을 담았다. 1967년 그는 월남 전선에서 F 105 기를 조종하는 대위였다.


F 105 기는 월남전 초기 월맹 폭격을 전담했던
미 공군의 주력기였다. F 105 기는 핵전쟁을 상정한 50년대의 설계 개념으로 만들어진 전폭기였는데이 전폭기는 대형이어서 크기가 어지간한 소형 여객기 수준이었다.


하지만 20mm 벌칸 포도 있고 음속의 두 배가 넘는 속도도 낼 수 있어서 전투기는 아니지만 일부
공중전도 가능했는데 실제 월맹 기 28기를 격추하기도 했으며, 한편으로는 월남전 최초로 미그기에 격추 당한 미군기가 되는 불명예를 기록하기도 했다.


                                       공중 급유를 받는 F 105 기


그러나 이 전폭기는 조준 시스템이 핵폭격을 위주로 설계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밀 폭격을 하기 위해서는 급강하 폭격을 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식의 급강하 폭격은 적의 밀집된 대공포화에 길게 노출되는 문제점이 있었다.

그래서 월남 참전 F 105 기들은 극심한 피해를 입었었다. F
105 기는 총 833기가 생산되었는데 이중 월남전에서 무려 382기가 격추 등으로 손실되었다.

F 105 기가 단발기였던 사실도 이 손실에 기여했다.
월남전에서 극심한 피해를 입은 F 105 기는 나중에 쌍발의 F 4 기로 교체되었다.


1967년 3월 10일, 72기나 되는 대규모 전폭기들이 월맹
타이구엔 제철소 폭격 작전에 전위 편대로서 출격했다. 타이구엔 제철소는 월맹의 중요한 산업 시설로 폭격에 동원된 대규모의 전폭기들은 이 제철소의 크기를 말해준다.


데스레프센 대위의 편대는 링컨 편대로서 그는 3번 위치에서 비행했다.
72기의 대 편대는 F 105 기와 F 4 팬텀 기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월남전 폭격의 후기 주역 F 4 팬텀 기 - 와일드 위즐형임


F 105 기들은 태국의 코라트와 타키리 기지에서 출격했었고
신형 팬텀기는 태국의 우본 기지에서 출격했는데, 링컨 편대는 이들 본 편대가 출격하기 전에 먼저 이륙해서 목표 지역으로 향했다.


전위 편대에 주어진 임무는 아주 위험하고 중요한 것이었다.
타이구엔 제철소의 하늘을 방어하고 있는 샘[SAM -2]미사일 포대, 대공 포와 대공 기관포들을 가능한 최대로 파괴하는 것이었다. 특히 샘 미사일은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기 때문에 대 편대의 출격에 앞서 반드시 파괴해야 했다.


타이구엔 제철소의 상공에 진입한 링컨 편대는
선두 편대장 기부터
기수를 내리고 목표에 돌입하였다. 편대장 기는 두 사람이 타는 복좌의 F 105 F 기였다.


적의 대공 포대를 공격하는 전폭기들은 와일드 위즐[족제비]
이라고
불렸다. 와일드 위즐은 제일 먼저 적 목표에 도착해서 적 대공 포화와 정면으로 맞서야 했으며, 마지막으로 폭격 성과를 확인한 후 이탈해야 하는 고되고 위험한 임무를 수행했다.


이 임무를 맡은 F 105 F 와일드 위즐기는 조종을 담당하는 전방석과
전자 장치 조작을 담당하는 후방석의 조종사 2명이 탑승하는 복좌형이다.
 


                                      F 105 F 복좌 와일드 위즐 기



F 105 F 기로만 편성된 편대로 출격하기도 했지만 단좌형인
F 105 D 기와 혼성한 편대로 출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편대장 데이비드 에버슨 소령과 후방석의 호세 루나 대위가
조종하는 편대장 기는 적 85mm 대공 포에 맞아 격추되었다. 두 사람은 비상 탈출에 성공했지만 모두 포로가 되었다. 편대장 기의 다른 동료 기 역시 적 대공 포화에 큰 손상을 입고 임무에서 이탈하여 기지로 귀환해야 했다.



                                            소련제 85mm 대공포
                                   북한도 한국 전쟁중 대규모로 사용했다.



이제 중요한 대공 화력 파괴 임무는 3번기 데스레프센 대위의 어깨에 걸려있게 되었다. 그가 공격을 위한 기동 비행을 하는 동안 월맹의 최신 미그 21 기가 그의 후방에 나타났지만, 적 대공 포대들을 격파하겠다는 결심을 단단히하고 있던 델스레프텐 대위는 폭탄을 버리고 회피 기동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후미에 붙은 미그기를 그대로 이끌고 적의 대공 화망이 치열한 상공으로 뛰어 들었다. 미그 21 기는 아군의 대공 포화에 피격당할까 봐 겁을 먹고 추격을 포기했다.



                                             F 105 기의 무장
               2차 세계대전 때의 4발 폭격기 B 17이나 B 24보다
더 많은 폭탄 무장이 가능하다. 


적기를 떨어냈지만 대공 화망을 통과하면서 데스레프센  대위의 F 105 기도 피탄 되어 기체에 큰 손상을 입었다. 다른 조종사가 그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면 언제 추락할지 모르는 공포심에 시달리면서 한시 바삐 기지로의 귀환을 서둘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느 순간 엔진이 정지하거나 화재가
발생할지도 모르는 기체를 그대로 조종하며 적의 대공 미사일 포대 공격을 시도 하였다.



                            SAM 2 가이드 대공 미사일- 소련 원명은 S-75 드비나다.


하지만 대공 미사일 포대 자체가 대공 기관포로 중무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관포의 치열한 탄막 사격을 뚫고 접근하기가 쉽지가 않았다. 더구나 목표 상공에 퍼진 안개 같은 구름과 폭격으로 생긴 연기로 인해 대공 포대를 발견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그는 윙맨인 케네스 벨 소령과 함께 여러 번의 급강하 폭격으로 대공 포대들을 파괴하면서 기회를 보았다. 그때 데스레프센 대위에게 다시 미그 21 기가 따라 붙었지만 그는 안개 같이 뿌연 구름 속으로 급강하해서 미그 21 기의 공격을 피했다.


그런데 그가 구름 속에서 벗어났을 때 바로 아래 직하방에
대공 미사일 포대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절호의 기회였다. 그는 급강하를 지속하면서 대공 미사일 포대에 폭탄을 투하했고 동시에 벌컨포를 발사했다.


두어 번 통과하며 20mm 기관포로서 미사일 발사 기지를 초토화 시켰다.
두 기의 미사일 포대를 파괴한 것을 확인한 그는 언제 추락할지 모르는 불안한 상태의 피격된 전폭기를 몰고 800 킬로를 날아 아슬아슬하게 태국 기지에 귀환하였다.



                                             태국의 타키리 기지 
                                월맹과의 거리가 멀어 공중급유를 받아야
했다
                        이 장거리를 대파된 전폭기를 몰고 돌아 온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링컨 편대의 활약으로 대공 화력이 약화 된 타이구엔 제철소에 후속 출격한 전폭기 대 편대들은 팬텀 기 두 기를 잃었지만 타이구엔 제철소가 단시간에 복구되기 힘들 정도로 큰 피해를 입혀 작전을 성공시켰다.


데스레프센은 1968년 2월 1일 린든 B 존슨 대통령으로부터
명예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는 1977년 대령으로 군에서 은퇴한 뒤에 민간인 생활을 하다가 1987년 12 월 14일 53세의 나이로 작고하고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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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의 육탄 돌격


태평양 전쟁이 개전하면서 일본은 미국의 과학 기술과 생산 경제력을
두려워했지만, 막상 전투에서 맞 부닥치면 용맹함과 강인함에서는 미군이 일본군을 압도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미군은 무사의 나라인 일본 병사들처럼 죽음을 초개와 같이 알고
육박전이나 돌격전을 감행하는 것을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이는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군과 전투해본 경험에 비춰 백인종이란 뒤가 무르고
악착같지 못하다는 인상을 가진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진주만 기습과 함께 말레이지아로, 필리핀으로 몰고 들어가 영국군이나 미군 등과 싸워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둔 일본군은 허망하게 패퇴하는 미·영군을 보고‘그러면 그렇지... 제까짓 코쟁이들이’하였었다.


그러나 미군의 반격이 시작되고 과달카날에서 미군 해병대들과
대결 해본 일본군은 그 생각을 깨끗이 버려야 했다.


미 해병들도 일본군 못지않게 총검 돌격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육박전도 사양하지 않았다.


일본군은 놀랄 수 밖에 없었는데 예상치 않던 미군들의 용감성은 바다에서도
발휘되어 일본 해군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1942년 과달카날 근해에서
일본 해군의 거함 히에이에게 육박해서 히에이 함장을 비롯해서 다수를 살상하고 큰 피해를 준 미 구축함이 있었다.


구축함 라피[USS Laffey DD-459]다.
구축함 라피는 1941년 10월 31일 진수한 비교적 새로운 함정이었다. 이 함정은 나중에 크게 활약한 프레처나 기어링급 보다는 조금 작고 구형인 벤슨 급으로서 1,620톤의 크기에 5인치 주포 4문과 5문의 20mm 기관포가 있었다. 그래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여러 전장에서 활약하였다.



                                           미 구축함 라피


미국이 반격을 개시했던 과달카날 전역에서 치열했던 육상전과 마찬가지로 해전도 자주 발생했었다.


1942년 11월 13일.
구축함 라피는 대니얼 캘라한 제독이 지휘하는 다섯 척의 순양함과 여덟 척의 구축함 초계선을 따라 야간 순항하고 있었다.


과달카날의 핸더슨 비행장을 야간 포격하러 내침하는
일본 함대나 과달카날 일본군 보급함대를 경계하는 초계 임무를 수행중이었다.


라피는 다섯 척의 구축함 중 구축함 쿠싱의 뒤에,
그리고 스테렛과 오배넌의 앞의 2번 위치였다.


자정 무렵 레이다 견시는 적함 출현을 보고했다.
후에 '과달카날 해전'이라는 이름이 주어진 해전이 시작된 것이다. 야간을 이용해서 내습한 일본 함대는 아베 히로아키 중장이 지휘하는 두 척의 전함, 한 척의 경순양함, 그리고 열 네 척의 구축함이었다.



                                            아베 히로아키 중장
                                 야마모토의 전쟁 지도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두 척의 일본 전함은 히에이와 기리시마로 미군 함대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세력이었다. 미 함대가 누릴 수 있는 강점은 단지 함들이 장비하고 있었던 레이다들 뿐이었다.


적이 포사격 거리에 이르자 즉시 교전이 벌어졌다.
조용했던 해상에 포성이 진동하고 각 함의 포에서 토하는 섬광과 서치 라이트 불빛이 난무했다. 구축함 라피도 전투에 뛰어들어 적함들에 포사격과 어뢰 발사를 되풀이 하였다.


이 치열한 해전 중에 적 기함 히에이가 갑자기
어둠을 뚫고  라피의 좌현 측방에 나타났다.


두 군함은 불과 몇 분 내에 충돌이 확실한 전방의 한 방향을 
향하여 서로 가까워지며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전함 히에이와 구축함 라피는 불과 6미터 내로 육박했다.
충돌하면 장갑이 두꺼운 히에이는 무사하지만 라피는 침몰을 피치 못 할 것이었다.


그 때 라피의 위치는 절망적이었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적 함대의 본진에 뛰어 든 것이다. 바로 뒤에 일본 전함이 있었고 다른 전함이 바로 좌현 쪽에 있었고 좌현 함미 쪽에서 일본 해군 구축함 두 척이 항해 중이었다.



                                                전함 히에이
       일왕 히로히도가 가장 좋아 했던 군함으로서 관함식때 자주
사용하였다. 1913년 건조시 세계 최강의
       함으로서 두어번의 개장으로
현대화 되었다. 사진은 마지막 개장후인 1942년 사진 36,600톤


이제 다른 방법은 없었다.
아수라(불교, 싸우기를 좋아하는 귀신..)와 같이 싸우고 혼란을 틈타서 도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라피는 회피 기동을 하면서 바로 지척에 다가온 산더미 같이 거대하게 보이는 히에이에 가지고 있던 모든 화력을 집중했다.


높이 보이는 함교가 주 목표였다.
여섯 문의 20mm 기관포가 일본 함대 지휘소인 함교를 비질하듯 두들겼다. 여기에 4 문의 5인치 주포도 거의 영(零)거리에서 히에이에게 불을 뿜었다.

당황했던 히에이도 응전했다. 전함의 주포인 14인치 포탄 한 발이 라피를 때렸다. 라피가 이 거대한 탄의 충격에 휘청거릴 때 뒤에서 따라오던 일본 구축함 데루즈키가 부채 살처럼 여러 발 발사한 어뢰 중 한 발이 라피의 함미에 명중하였다.



                               구축합 데루즈키, 후에 어뢰정 PT에게 격침당했다. 


함미에는 탄약고가 있었다. 함장은 이미 항해 능력을 잃은 배를 버리고 탈출하라는 총원 퇴함의 명령을 내렸다.


퇴함 명령이 내려지던 순간 함미의 탄약고가 대 폭발을 일으키며
라피는 두 조각이 나서 급속히 침몰했다.


승무원중 함장을 비롯해서 59명이 전사했고 116명 부상한채 구조되었다.
일본 구축함 데루즈키는 한달 뒤 과달카날 근해에서 미 해군 어뢰정 PT 37과 PT 40에게 뇌격을 당하고 역시 발화한 불이 폭뢰에 번져 폭발과 함께 침몰했다.


1992년 과달카날 해저에서 라피의 함체가 발견되었는데 후반부
삼분지 일은 흔적도 없었지만 전반부는 히에이의 주포에 맞은 함교 아래 부분의 커다란 파괴공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깨끗한 상태였다.


네 문의 주포와 기관포들은 모두 좌현으로 돌려져 있었다.
격침 될 때까지 히에이에게 화력을 퍼부었던 사실을 증명해주는 것이었다.


사지에 몰려서 필사적으로 발휘한 용감함이라지만
구축함 라피의 분전과 희생은 예상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이날 과달카날 해전에서 미 함대는 참패를 당했다.


함대 사령관 캘라한 제독과 차석 지휘관 스코트 제독도
전사했고 다량의 전투함을 상실했다. 전투뒤 온전하게 작전을 계속할만한 전투함은 중순양함 헤레나와 구축함 한 척 뿐이었다.


                           일본 해군의 포격이 함교에 명중하여 전사한 캘라한 제독
                             후에 미국 최고 무공 훈장인 명예훈장이 추서되었다.


이에 비해서 일본 함대의 손실은 상대적으로 경미했다. 히에이가 세 척의 미군 구축함의 공격으로 피해를 입어 대파되었지만 기리시마와 경순양함 나가라 그리고 네 척의 구축함이 온전해서 지척에 있는 과달카날 섬의 헨더슨 비행장에 폭격을 할 수가 있었다.


과달카날 섬의 해병들은 이날 밤 천지를 진동하는 해전의
포사격 소리로 잠을 이루지 못했었다.


일함들은 그대로 항진해서 과달카날로 돌격하여 함포사격을 할
전력이 충분했었다.
그러나 라피의 돌발적인 공격으로 부상을 입고, 자기 눈앞에서 부하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는 것을 보고 간담이 서늘해진 함대 사령관 아베 제독은 작전 중지를 명하고 철수하고 말았다.


평소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함대 사령관과 사이도
안 좋았고 과달카날을 사수하려는 해군 전략을 반대하고 있었지만, 피투성이가 된 자신과 부하들의 피해에 그만 마음이 약해진 것이 틀림없었을 것이다.



          손상을 입고 귀환 중 미군기의 공습을 받고 최후의 회피 기동을 하는 히에이-결국 격침되었다.


그가 지휘했던 히에이는 귀항 중 미군의 항공 공격으로 침몰 당했고, 그는 야마모토에게 해임 당한 후 3 개월 뒤 불명예 제대나 다름없는 강제 퇴역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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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무장 공비와 월남 둑코 전투의 영웅.

           - 비단 이불 속에서 자폭한 마지막 공비-


1969년 1월 21일, 청와대 기습에 실패한 김신조 부대는 사방으로 
흩어져 휴전선쪽으로 도주했다.


이어진 군단 규모의 대 토벌 전에서 사살당한 두목 김종웅의 이야기는 전
에 소개를 한 바 있다.

토벌 작전 열흘 뒤 마지막 공비가 소탕되었는데
마지막으로 사살 된 공비의 최후는 그 지역에서 군복무를 했던 필자의 기억에 현지 주민들에게 직접 들은 일화로서 남아 있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를 체포하려고 출동했던 중대장은 66년 8월 9일,
월남 캄보디아 접경 둑코 전투에서
맹호부대 1개 중대를 지휘하여 공격해온 월맹군[2개 대대]176명을 사살하고 대승을 거둔 영웅 이춘근 대위였다.


                          
  둑코 전투 후의 이 춘근 대위


둑코 전투는 나중에 승리를 거둔 짜빈동 전투와 함께 월남전에서 한국군이 거둔 2대 대첩으로 꼽히기도 한다.



아래는 조선일보의 1968년 2월 1일 보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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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밤 10시

파주군 광탄면 00부락 맨 꼭대기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김중일 노인[78세,가명]의 집에 느닷없이 괴뢰 무장 특공대의 잔당 1명이 들이닥쳤다.

김 노인은 사랑방에서 부인 이부산[61세]씨와 문산에서 세배 온 막내 아들 재근[32세, 가명]씨를 데리고 한창 설날 이야기로 꽃을 피우고 있을 때였다.



                        1968년 설날 밤에 공비가 찾아온 경기 파주군 광탄면의 외딴 집.


그 때였다. 밖에서 인기척이 있어 김 노인이 이야기를 끊고 방문을 열었는데 괴한 1명이 총부리를 김 노인의 코 앞에 바짝 갖다 대었던 것이다.


“이북에서 왔는데 밥 좀 주시구레.”


아들 재근씨와 부인 이씨는 방 안에 들어 선 괴한을
보고 와들와들 떨며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러나 김 노인은 곧 정신을 차리고,


“자, 추운데 앉으시오. 마침 우리 막내가 저녁을 먹으려던
참인데 이거라도 드시우."라며 은근히 말을 던졌다.


공비는 비로서 총을 거두고 아들 재근씨가 먹으려던
돼지고기 찌개와 쌀밥을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공비는 안심한 듯 말문을 열었다.
“서울 갔다 오는 길인데 서울은 큰 판잣집뿐이더구만요.”


김 노인이 눈짓을 하자 재근씨는 부엌에 나가는 척하며
밖으로 나가 이웃 방에 세든 사영식씨 [32, 가명]의 방으로 건너갔다.


사영식씨와 재근씨는 아랫 마을 이장 김옥순씨[48, 가명]에게 뛰어가 무장 공비가 나타났다고 말하였고, 김씨는 동네 청년들을
깨워 앰프 방송소에 잠복하고 있던 군인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도록 했다.


신고를 받은 이향수[27] 중위, 김의열 상병, 박동건 상병 등
3 명은 곧 김 노인 집으로 달려가 포위망을 폈고, 운전병 방이랑 일병을 시켜 미 2사단 대 간첩 작전 중대에 있는 중대장 이춘근 대위[35]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재근씨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공비가 눈치 못 채도록 말을
건넷고 김 노인은 막걸리 반 되를 반주로 따라 주며“하룻밤 푹 쉬고 가라.”고 권했다.

마음을 놓은 공비는 요강을 갖다 달라고 말했다. 김 노인은 요강과 대야에 따뜻한 물을 떠서 갖다 주었다.

공비는 따뜻한 물을 보더니 발에서 불이 붙는 것 같다면서 발을 씻어야겠다고 말했다. 김 노인은 공비의 양말 세 컬레를 손수 벗겨주고 발을 씻어 주었다. 발 고린내가 방에 진동하였다.


그 동안 이 노파는 수수엿을 세 번이나 갖다 주고
들락날락하며 밖에 있는 군인들과 연락을 취할 수가 있었다. 냉수를 다섯 그릇이나 마셔 버린 공비는 오른쪽 허벅다리의 관통상을 내보이며 사흘만 묵어가게 해달라고 졸랐다.

김 노인의 은근한 대접에 공비는 자신이 청주 한씨이고 스물 다섯 먹은 총각이라는 말까지 털어 놓으며 김 노인을 아바이라고 불렀다.


“아바이! 아바이 신세는 꼭 갚겠습니다.
요 다음 5월에 내려올 때 노동당에 이야기해서 아바이 신세를 갚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후 공비는 졸린듯 하품을 해댔다.
김 노인은 이 방이 바깥 방이라 위험하니 안방으로 들어가자고하여 공비를 안으로 안내했다. 김 노인은 새로 꾸민 비단 이불을 내려 따뜻한 아랫목에 깔아 주고 요강과 물 주전자를 넣어 주면서,

“혹시 밖에서 인기척이 나도 놀라지 말게. 인천서 세배 온 손자와 손자 며느리가 멋도 모르고
  들어올지 모르니까 모르는 체하고 자란 말일세!“라고 타일렀다.


괴한은 등잔불을 끄고 잠이 들었고 사씨 부인과 두 어린이
그리고 김 노인 가족들은 조용히 집에서 나와 피신했다.


뜬 눈으로 밤을 세운 김 노인과 군인들은 날이 새길 기다려
공비를 생포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새벽 6시 50분 쯤 아래쪽에서 00사단 장병들이
들이 닥치면서 아군 포위 병력을 무장 괴한으로 오인하고 총을 쐈다. 방안의 동태를 살피던 이 대위는 공비가 벌떡 일어나는 기미를 알아채고 소리 쳤다.


“김신조도 자수해서 평안히 살게 되었다. 너
는 이제 완전히 포위되었으니 조용히 자수하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잠시 후 꽝! 하는 수류탄 폭발 소리가 나며 방문이 떨어져 나가고 조용해졌다. 공비가 자폭한 것이었다. 수류탄을 입에 물고 비단 이불을 뒤집어 쓴 채....그는 머리가 절반이나 날아가서 처참한 모습으로 죽었다.

이 대위는 공비를 생포하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 하며 못내 아쉬워 했다.




               둑코 전투에서 맹호 부대가 월맹군에게서 거둔 노획품


당시 서부 전선의 미군 작전 지역에도 무장 공비들이 출몰하여 미군 사상자들이 자주 발생했었다.
미군들도 공비 토벌차 출동하곤 했는데 지형에 익숙하지 않아 효과가 별로 없었다. 이에 한국군의 협조을 받아 공비의 습격에 대비하였다.

월남 둑코 전투에서 존슨 미 대통령으로부터 은성 무공 훈장을
받았던 이 대위는 일 년 전 이 날이 바로 서부 전선 미 2사단에 대 간첩 작전 중대인 CAO(Civil Affairs Operation, 민사작전) 부대가 창설된 날이었다라고 귀뜸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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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근무 하던 부대는 공비가 죽은 광탄면에서 인접한 적성면에 위치해 있었다.


1.21사태 때 여러 공비들이 인근에서 소탕되었지만 유독 이 공비의
마지막에 대한 이야기가 두드러지게 동네 어른들 사이에 퍼져 있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내가 들은 바로는 이렇다.

도주하던 공비가 광탄면의 한 민가에 침입하여 밥을 빼앗아 먹었는데, 겁을 먹은 주인이 너무 잘해 주니까 안심하고 푹 자다가 신고를 받고 출동한 군대에 포위되었고, 국군의 투항 권유에 공비는 "속았다!" 라고 한탄하고서 수류탄으로 자폭했다는 것이다.

공비는 또 후대에 크게 감격하며 밥을 먹으면서도 "아바이! 조금만 참으시라요. 수령님이 곧 조선을 통일 할거라요!“라고 엉뚱한 소리를 하며 노인을 위로하더라는 것이다.


공비의 머릿속에는 북한에서 배운대로 미제 괴뢰
군사 정부의 학정에 신음하는 남한 인민들이 김일성 원수를 그리워한다는 선입견으로 꽉 차 있었다는 말이다.


치열한 이데올로기의 냉전 분위기가 가시지 않은
그 무렵 동네 분들의 이야기는 멍청한 북한 공비 놈이 노인에게 속아 토벌되었다는 경멸 섞인 조롱을 담고 있었다.


                               공비가 자폭한 방.
          공비가 요청한 요강과 주인노인이 가져다 준 물 주전자가 보인다.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바뀌어 그 공비의 죽음을 다시 생각해보니 연민의 정이 앞선다.

특수전 전문가의 평에 의하면 1.21사태는 부족한 정보로 엉성하게
기획한 엉터리로 작전으로 목표 달성 여부에 관계없이 1.24군 부대원의 완전 생환은 제로에 가까웠다고 한다.


투입 인원의 생환 가능성이 극히 낮은 작전은 실행해서는 안 되는 것이
특수전 작전의 기본 원칙이다. 그러나 투입 인원이 모두 죽더라도 작전 목표의 일부라도 성공하면 나쁠 것이 없으니 일단 저질러 보자는 김일성의 사고방식이 위의 순진한 공비가 자폭으로 인생을 마감하게 한 원초적인 원인이었다.


실패한 1.21사태가 김일성에게 준 교훈은 거의 없었다.
그는 그 해 10월 또 다시 120 명의 대 부대를 울진 삼척 지구에 침투시켜 몽상에 가까운 유격전을 해보겠다고 했다가 섬멸의 맛을 보아야했다.


그러나 1.21사태가 김일성에게 준 교훈이 하나 있었다. 남한에 침투한
1.24군 부대가 법원리에서 나무꾼 형제들에게 발견된 것이 작전 실패의 단초가 되었는데, 이를 통해 남한 주민들이 모두 북한에 적대적이라는 사실을 알게되었던 것이다.
 
이후 울진 삼척 공비들은 북한 출발 전부터
남한 주민들을 학살하라는 지시를 받았고, 그 결과 이승복 군을 비롯해서 여러 죄 없는 양민들이 학살되었다.


결국 김일성의 무모함과 잔인성이 
남과 북의 무수한 인명을 희생시키는 씻지 못할 죄악을 저질렀다과 봐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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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특공대의 레이다 기지‘보쌈’탈취 작전



특공대의 투입 전, 먼저 공군이 이집트 군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유인하기 위해 레이다 기지 인근 해안가 목표물에 공습을 가하기로 했다.


밤 9시, 특공대는 레이다가 있는 라스-아랍 해안의 수에즈 만 건너 편 시나이
반도에 있는 오피르 비행장으로 이동해서 마지막 점검을 마치고 대기하고 있다가, 이스라엘 스카이호크 기들이 이집트 해안가 목표물에 대한 공습을 시작하기 직전 이륙했다.



                                     이스라엘 공군의 A-4 스카이호크 기


공수병 특공대는 3 기의 프랑스제 슈페르 프레롱 기에 탑승했다. 레이다 세트를 운반할 임무가 주어진 시콜스키 헬리콥터 2 기의 조종사인 네헤미아와 제비크는 수에즈 해협 시나이 반도 쪽의 해안 전방 기지에서 특공대로부터 레이다 적재 요청 신호가 들어 올 때까지 대기하기로 하였다.


슈페르 프레롱 헬리콥터는 인원뿐만 아니라 노획에 필요한 각종 장구를 적재해서 기체 무게가 적재 한계에 달했기 
때문에 무거운 기체를 가까스로 비행해서 이집트 영내로 침입했다.


헬리콥터의 엔진 소음은 출격한 스카이호크기의 폭음 소리에
많이 희석되어 어느 정도 작전 기도비익의 효과를 얻을 수있었다.


스카이호크 기들은 예정대로 레이다가 은폐되어 있는 곳의
서쪽 해안가 군사 목표물에 폭격을 가했다.


특공대를 실은 헬리콥터들은 레이다 기지에서 6킬로 지점에 착륙했다.
레이다 기지의 이집트 병들에게 발각되지 않기 위해서 거리를 둔 것이다.


헬리콥터는 적재 한계에 달한 무거운 중량때문에 착륙에서도 애를 먹었다.
12기의 이스라엘 전투기들이 레이다 기지에서 떨어진 이집트 군 병영에서 구원대가 출동할 것에 대비해서 초계 비행을 하였다.


기습은 완전 성공이었다.
레이다 기지의 이집트 군 경비 병력과 운용 요원은 추정했던 것보다
훨씬 적었다. 단지 10여 명 정도의 이집트 군들이 혼비백산해서 갈팡질팡하다가 절반 정도는 이스라엘 특공대의 공격에 섬멸되었고 나머지는 일찌감치 손을 들고 나와 포로가 되었다.


경비 병력과 레이다 운용 인원을 제압해버린 이스라엘 특공대는
즉시 대형 트럭 위에 장치된 레이다의 해체 작업에 착수했다.


 

                      질[ZIL]트럭에 적재한 P-12 레이다. 탐지거리 200km, 탐지고도 25km.


레이다 기술자 에즈라는 트럭 위에 장치된 레이다 장비 위로 뛰어 올라가 안테나의 분리 작업에 돌입했다.

특공대원들도 연습한 대로 지참해온 각종 도구로 레이다를
두 개로 분리해 나갔다.

그러나 작업은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연장이 맞지 않은 경우도 있었고 작업 중 도구가 부러지는 경우도 있었다. 트럭에 레이다를 장착한 케이블은 용접기로 잘라냈다.


분리한 안테나와 레이다 세트를 공수하기 좋게 다시 케이블로
팩킹해서 모든 작업을 완료한 특공대는 수에즈 만 건너 시나이 반도 전방 비상 비행장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콜스키 헬리콥터
두 기를 불렀다.


조종사 네헤미야가 4톤이 넘는 레이다 본체 운반을 맡았고
제비크가 2.5톤이 되는 안테나와 레이다 부속 통신 장비 운반을 맡았다.


드디어 특공 대원들의 환호 속에 장비를 인양한 두 헬리콥터가
어둠속으로 사라지고 잠시 후 슈페르 프레롱 헬리콥터가 다시 대원들을 수송하러 돌아왔다.


무사히 시나이 반도로 되돌아온 두 시콜스키 헬기들은 무거운 소련제 레이다를
대기하고 있던 대형 트럭 두 대에 각각 안착 시켰다.


정보 전문가들과 전자 전문가들이 대기 하고 있다가 레이다의 이상유무를 점검하였고 이후 트럭들은 이 장비들을 정밀하게 분석하고 테스트 할 모처로 출발하였다.


이스라엘 군의 적 레이다 탈취 작전은 이스라엘 국내에서는
비밀로 붙여졌었다.


그러나 이 작전은 이집트의 소식통을 통해서 외국에
먼저 보도가 되고 말았다.


이스라엘에게 레이다 같은 중장비를 강탈당한 이집트는
또 다시 서방 언론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한 신문 만화는 이스라엘 특공대가 나세르의 대통령궁에 도둑질하려고
 침입하는 코믹한 장면을 실었는가 하면 다른 신문은 이스라엘 특공대가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훔쳐서 헬리콥터에 싣고 도주하는 만화도 게재했다.


세계가 다 알게 되자 이스라엘은 국내에도 보도 금지 검열 조치를
풀어서 국민들에게 작전결과를 공개했다.


노획하여 이스라엘로 가져 온 소련제 레이다는 이스라엘
전문가들에게 의해서 모든 기능이 모두 분석되었다.


특히 이 신형 레이다가 가진 대단히 긴 탐지 거리와 관련된 기능에 대해서는
철저한 연구와 분석이 거듭되었고, 여기서 파악된 정보는 대응 전술과 전자 방해 장비 개발에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마침내 이스라엘 기술진의 노력으로 이 신형 레이다를
재밍(jamming, 전파교란)하는 전자 방해 장비[ECM]가 개발되어 이스라엘 전투기들에 장비되었다.


 

                                          P-12 레이다의 영상 스코프


이 신형 레이다는 후에 미국에게도 제공되어서 소련 전자 공학의 수준이 파 헤쳐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집트는 소련제 최신 레이다를 외딴 지역에 배치하면서
경계 병력을 포함한 아무런 방어 대책을 강구하지 않았었다.


이스라엘 특공대가 한 시간이나 머무르며 레이다를 분해해서
운반해 나갈 때까지도 이집트는 아무런 저지 병력을 보내지 않았었다.


어지간한 국가, 이를테면 한국 같은 국가의 국방 체제라면 적의
특공대가 뻔뻔할 만큼 유유히 레이다 기지 전체를 보쌈해가는 것을 이처럼 무심하게 지켜보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건국 후 아랍제국과의 대결에서 번번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전쟁의 9대 원칙중 '기습의 원칙'에 충실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서두에서 밝혔었다.


반면 이집트를 포함한 아랍국들이 번번이 당했던 것은
그들이 전쟁의 9대 원칙 중 하나인 ‘경계의 원칙’에 항상 무신경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이 레이다 탈취 사건이 증명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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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특공대의 레이다 기지‘보쌈’탈취 작전


이스라엘이 아랍 제국(諸國)과의 반세기 넘는 전쟁에서 얻은
승리는 기본적으로 기습이라는 전술전략을 통해 얻어 진 것이다. 전쟁의 9대 원칙 중‘기습의 원칙’에 철두철미하게 충실했던 국가는 이스라엘만한 국가가 없을 듯하다.


이스라엘이 이집트 최고의 기밀인 최신형 레이다 기지를 통채로
뜯어서 탙취 해 간 기습 작전을 소개한다.


6일 전쟁 중 이집트령 시나이 반도를 휩쓴 이스라엘은
이집트 군이 사용하던 소련제 P-10형(型) 레이다 여러 세트를 노획했다. 이스라엘 전자전 전문가들은 노획한 소련제 레이다를 분석해서 이집트 레이다 망을 교란하는 장치(ECM; Electronic Counter Measures, 전자 방해 기술)를 개발했다.


                           구형 P-10 안테나 ; 실질 탐색거리 70km. 탐지 고도 15km


이스라엘 전투기들은 공습 시에 적 레이다를 교란하는 장치를 가동하여 적의 조기 경보를 무력화 시키고 기습에 성공할 수가 있었다.


1967년 6일 전쟁이 끝난 후에도 평화는 찾아오지 않았고, 이스라엘은 이집트, 시리아와 1,000일간
끊임없는 국지전을 벌여야 했다.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가 지난 전쟁에서 이기지 못한 이스라엘을
갈아서 마모 시키듯 파멸시키겠다고 선언하고 시작한 소모 전쟁[War of Attrition]에 돌입했던 것이다.


소모 전쟁에서 양국의 공군은 주역을 했다.
6일 전쟁이 끝나고 2년 정도 지났을 때 이스라엘 조종사들은 그들의 이집트 레이다 교란 장치[ECM]가 더이상 약발이 듣지 않음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이스라엘 군 당국은 이집트가 소련제 최신형 레이다를 도입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집트의 신형 레이다는 이스라엘 공군기에게 위협적인
존재임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 조종사들은 이집트 군이 구형 레이다를 사용할 때보다 더 빨리 탐지 당하고 요격 당해서 곤경에 처하는 경우가 많았다.


신형 소련제 레이다는 그 탐지 거리가 무척 길어서 
이스라엘 공군기의 접근을 보다 먼거리에서부터 탐지할 수 있었고 빠른 주파수 변환 기능이 있어서 교란시키기도 무척 어려웠다.


ECM을 활용할 수 없게 된 이스라엘 공군기가 신형 레이다의
탐지를 피하는 길은 저공으로 침투하는 방법 밖에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다.


이스라엘 기술 부서와 군 정보 부서는 이집트가 새로 도입한
신형 소련제 레이다에 관련한 정보를 입수하고자 백방으로 노력 했으나 좋은 돌파구가 열리지 않았다.


69년 이스라엘 기갑 부대가 수에즈 만을 건너가 이집트 영토에서
대여섯 시간 동안이나 이집트 영토를 휘젓고 다니며 군사 시설을 파괴하던 이집트 후방 상륙의 기습 작전이 있었다.


이스라엘 공군은 이 작전 중에 적의 신형 레이다가 발견되기를
내심 바랬으나 작전 중에 발견되어 파괴된 이집트 군의 레이다는 모두 구형이었다.


몇 주 뒤 이스라엘 공군은 시나이 반도 서쪽의 공중 영역을 감시하는 이 지역에
새로운 신형 레이다 한기가 배치 된 사실을 감지하였는데, 그 정확한 위치를 도대체 알아 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정찰기가 이집트 영토인 라스-아랍스 해안 상공에서 촬영해온 사진에서 드디어 단서가 발견되었다. 이스라엘의 정찰사진 판독 전문가가 이 해변의 안쪽에 수상한 물체가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었다.


사진은 몇 배로 확대되어 정밀 분석에 들어갔고
이어서 레이다 전문가들이 호출되어 사진 판독실로 달려왔다. 밤 늦게 까지 정찰 사진에 대한 분석 작업이 이루어졌고 이 수상한 물체는 교묘하게 위장된 소련제 최신형 P-12 레이다 기지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폭격에 의한 파괴가 최선의 해결책이었고 즉시 폭격 준비 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관련자들 사이에 부산한 논의가 오고 간 끝에 특공대를
동원해서 이 신형 레이다를 탈취해 분석하자는 쪽으로 군의 방침이 변경되었다.


1969년 12월 24일 레이다 탈취 작전 명령이 발령되었다.
그 작전 결정은 이스라엘 공군기들이 약 7톤의 무게에 달하는 레이다 기지를 통째로 매단 채 수에즈 만을 건너서 이스라엘로 운반 해 낼 수 있다는 공중 수송 능력에 대한 분석이 있은 뒤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정도의 중량을 공중 수송해낼 수 있는 헬리콥터는 불과 몇 달 전에
이스라엘이 미국에서 도입한 대형 CH-53 시콜스키 헬리콥터뿐이었다.


작전의 개요는 레이다 기지에 프랑스제 슈페르 프레농 헬기로
특공 부대를 투입해서 이집트 레이다 경비 인력을 제압하고, 노획한 레이다를 시콜스키 헬리콥터로 운반해 나오는 것이었다.
 
지상 작전 임무는 이스라엘 나할 공수여단의 50대대에게 주어졌다.



               프랑스 대형 헬리콥터 슈페르 프레농- 중국군은 이 헬리콥터를 다수 보유하고 있다.


가능하다면 시콜스키 헬리콥터로 레이다 시설 전체를 통째로 운반해 오는 것이었고, 다음 차선책은 분해해서 운반하는 것이고, 이것조차 여의치 않다면 레이다의 핵심 부분만이라도 뜯어 온다는 것으로 유연성 있는 작전 목표가 설정되었다.


레이다 기지 급습 작전이 추진되면서 이 지역에 대한 공습이나
정찰 등의 활동은 전면 자제에 들어갔다. 이집트 군의 의심을 살만한 여지를 두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스라엘 공군 사령관 모티 호드 장군은 수립된 작전을 면밀하게
검토하고 이를 재가했다.


작전을 실행하기 위한 바쁜 준비가 한참 진행되던 도중 시콜스키 헬기
부대장 네헤미아 다간이 새로 도입한 시콜스키의 최대 적재 중량은 실제로 3톤이 약간 넘는 정도 밖에 안된다는 것을 알려 왔다. 매뉴얼에 있는 스펙과는 차이가 있었다.


강습 준비 팀은 즉시 시콜스키의 실제 적재 중량을 확인
하기 위한 실험에 들어갔다.


여러 번 실험한 결과 네헤미아의 말대로 시콜스키의
최대 적재 중량은 4톤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즉 시콜스키 한 기로는 레이다의 절반 정도만 운반할 수 있을 뿐이었다.


특공 팀은 레이다 시설을 본체와 안테나 두 부분으로 분해해서
두 기의 시콜스키로 나누어 운반하기로 하였다.


중책을 맡은 헬리콥터 조종사들은 네헤미아와 제빅 마타스였다.
담당자들이 작전명‘수탉’이라고 명명한 이 강습 작전은 이스라엘이 막 도입한 CH-53 시콜스키 헬리콥터의 처녀 출전이었다.


                    미국 시콜스키 CH-53 헬리콥터. 이스라엘은 현재 33기를 보유하고 있다.


시콜스키 헬리콥터 승무원들은 6일 전쟁 때 시나이 반도에서 노획한 소련제 구형 P-10 레이다를 매달고 이착륙 연습을 여러 번 하면서 실전 감각을 익혔다.


이 테스트 비행에서 한 헬리콥터는 레이다 본체를, 다른 헬리콥터는
안테나를 운반하는 본래의 계획이 역시 가장 이상적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조종사들은 작전에 투입할 공수병들은 신체적으로 매우 튼튼하며
체격도 큰 사람들, 즉 장사급 거인들로 선발되어야 한다고 건의했다.

공수병들은 레이다 시설물을 공중에서 떠있는 시콜스키 헬리콥터의 견인 호이스트[갈구리] 연결하는 힘든 임무를 수행 할 것이었다.


이 작업은 캄캄한 야간에 시간에 쫓기며 헬리콥터의 날개가
일으키는 강풍과 먼지 속에서 실수 없이 해야 되기 때문에 힘이 센 거구의 장정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정찰기 사진 판독 결과 신형 소련제 레이다는 트럭의
적재함에 실려 이집트 사막의 참호 속에 위장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사진을 바탕으로 특공대들은 트럭에 케이블로 묶여 적재 된
레이다의 케이블과 볼트를 절단하고 해체해서 헬리콥터에 매다는 연습을 밤을 새우며 연습했다.


노련한 레이다 전문가인 에즈라 특공 작전의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하면서
레이다의 완전한 해체와 운반을 감독하고 도와주는 임무를 수행할 예정이었다.


그는 힘들여 해체와 운반 과정을 연습하는 특공 공수병들 사이를 계속
왔다 갔다 하며 이들에게 레이다가 파손되지 않고 무사히 이스라엘 영토에 안착하도록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 줄 것을 여러 번 당부를 하고 지도했다.


그는 예민하고 복잡한 안테나를 신속 정확하게 
분해하는 방법을 여러 번 되풀이하며 교육 시켰다.


모든 준비가 다 끝났다.
작전안을 수립해서 참모 총장에게 승인을 받은지 단 48시간 만이었다.
작전은 크리스마스 다음 날인 12월 26일 금요일 오후 10시에 개시되었다.

(다음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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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여성 의장대원들의 데뷔 행사

                                 - 이번 글은 울프독님이 직접 행사를 취재하고 기고해 주셨습니다.-


지난 금요일 용산 전쟁 기념관에서 2011년도 첫 국방부 의장대 시범이 있었다.
올 첫 시범은 특기할 새 소식을 담고 있다.

의장대 전문 팀에 이동 배치 된 여성 부사관들이 전쟁 기념관에서 첫 선을 보이는 데뷔 무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국방부 의장대에 포크 댄스같은 시범을 보이는 여성 대원팀이 있었지만 이번에 이동 배치 된 여성 부사관들은 남자 대원들과 똑 같은 시범 훈련을 받은 전문 인력이다.


                                                        

"아-! 서울 공기 정말 탁하다!"


전쟁기념관 입구에서 만난 남녀 학생들. 독특한 복장이 인상적이어서 어느 군 소속인지 지켜봤다.

"한국군인가 ?"

멍청한 울프 독을 보고 인솔 교수가 설명한다.

"우리는 민간 대학의 군사학과 학생들입니다."

알고 보니 대전의 '뜨는 대학 ' 혜천 대학 군사학과 학생들이었는데.. 오늘 단체 관람을 위해서 방문하는 길이었다.

우리나라에도 미국 VMI(Virginia Military Institute; 버지니아 군사학교)같은 민간 군사 대학이 생긴 것은 알고 있었는데  오늘 처음 그 학생들을 보았다. 하여튼 국군의 질적 발전을 위해서 좋은 제도들이 탄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미군들도 첫 시범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오산 미 공군 기지의 장병들인데 전철을 타고 용산 삼각지 역까지 왔단다.




엄마와 같이 관람 온 아기.

"엄마야! 좀 비켜라. 나도 좀 보게!"




의장대 장병들이 캐릭터의 복장으로 어린이들에게 재미 써~비스!




드디어 시작! 북소리가 용산의 하늘을 뒤 흔든다.





드디어 후방에.. 여성대원들이 합류 한 국방부 의장대 등장 !



 



넓은 광장의 정면으로는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뒷태만 촬영할 수  밖에 없었다..ㅡㅡ;
총은 가벼운 모조총을 들었다.
총 6명이 용산의 첫 무대에 선을 보였다.





긴장  !





초조 !




 도전 !




받들어 총 자세로 시범 시작!





여성 의장대원들이 의장대 중앙에서 시범을 주도한다.




절정으로 가는 행사 !




박진감의 작열!




박력과 파워가 남자 대원들을 압도한다.
여성대원들 정말 잘한다! 화이팅!!




휘날레로 다가가는 중.....  너무 빨리 끝나 아쉽다!





"  에이~~  벌써 끝났어 ?  누나들아! 또 한번만 더 보여주라!"




에휴~~힘들어..  오늘 실수 없었죠?
실수는 무슨... 너무 잘했는걸 !

현재 새로 임관한 8 명의 여자 대원들이 우윤미 소대장 지도하에 맹연습 중! 곧 선보인단다 !





관람객들을 위한 기념 촬영 !




관람객들과의 써비스 기념 촬영 .


전격전이 따로 있냐?
남학생들이 우당탕 쇄도해서 옆자리를 다 선점해 버린다.
하여튼 머스마들은 다 똑 같다니까! ^^




함께 온 여학생들이 괜스레 뿔났다..
"너와 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냐?! 우리 교수님을 !"
방효식 교수님이 제자들의 뜨거운 사랑과 의리에 감동하신다.
" 맞다! 군인은 의리가 최고 아이가?!"




학생들이 의장대 간부들에게 질문도 하고 기념 촬영도 한다.
미래의 직업 세계에 대한 강한 호기심과 당찬 포부를 보이는 모습이 보기에도 흐뭇하다..

오늘 여성 의장대원들이 최초로 선보였지만.. 뒤를 따를 후배들도  줄을 이을 것이라는 예감을 들게 한다.

오늘 전쟁기념관을 방문한 학생들 중에 장래 의장대의 간부들도 꼭 탄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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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뢰밭에 착륙한 독일 4성 장군.



 

                  륀트스테드 원수처럼 전형적인 프러시아 군인의 풍모를 지닌 쇼베르트 장군
                  위풍당당한
무인의 모습이 그의 덧없는 죽음을 더욱 애석하게 느끼게 만든다.


독일 전략가 크라우제비츠는 전쟁은 불확실성의 연속이라고 말한바 있다.


그 말대로 전쟁은 변수의 연속이라고도 할 수있다.
무수한 변수는 상상을 뛰어 넘는 상황을 연출하기도 한다.


육상 병력이나 차량을 주요 표적으로 하는 땅 밑의 지뢰가
하늘을 나는 항공기를 폭파해서 탑승원 두 명을 저 세상으로 보낸 사건이 1941년 소련 땅에서 있었다.


탑승원 한 명은 조종사였었고 다른 한 명은 소련을
침공한 독일군의 4성 장군 지휘관이었다.


지뢰 폭발의 횡액을 입고 비명에 죽은 독일 장군은
독일 육군 오이겐 지그프리드 리터 폰 쇼베르트 대장이었다.

그는 미치광이 히틀러가 '바바로사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스타린 통치의 소련을 대대적으로 침공할 당시 독일군의 선두에 섰던 11군 사령관이었다.


전쟁 초기에 세상을 떠난 바람에 그는
롬멜이나 구데리안이나 
만슈타인 같이 세계 전사에 이름을 날리는 명장의 반열에 오를 기회를 갖지는 못했지만 대단한 능력을 가진 전투 지휘관이었다.



                                  오이겐 지그프리드 리터 폰 쇼베르트 대장


그는 1883년 바바리아 주의 군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서 1902년에 군문에 투신한 전형적인 프러시아 무인(武人)이었다.


그는 1차 세계대전 때 대대장으로 영국군과의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귀족의 작위를 받았으며,전후 공화정이 된 독일의 군대에서도 능력을 발휘하여 1934년에는 17사단 사단장이 되었다. 이후 1938년 7군단장으로 진급한 그는 폴란드 침공에서 역시 큰 전공을 세웠다.


1940년 9월, 그는 히틀러가 바바로사 작전을 수립하고 소련 침공을
은밀히 준비할 때 소련 남부 쪽에 전개 될 11군 사령관으로 임명 되었다.


드디어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의 전면적인 소련 침공 작전이
개시되었다.


그의 11군은 우크라이나의 남부 평야를
거칠 것 없이 진격해갔다.


작전이 개시되고 전선이 소련 땅으로 깊숙이 확대된 1941년 9월 12일,
쇼베르트 대장은 연락기인 훼셀러[Fieseler]를 타고 전선으로 날아갔다.


 

                                          훼셀러 스토르치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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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셀러 스토르치 기는 독일이 전전(戰前)인 1935년에 개발해서 1937년부터 생산하기 시작한 작은 연락기다.

훼셀러 스토르치 기는 날개가 길어 이착륙 거리가 100여 미터로 대단히 짧았다.

이착륙 장치[바퀴]도 비교적 튼튼해서 야지(野地)의 어느 정도 평탄한 곳이면 무난히 뜨고 내릴 수가 있었다.
고정익기이지만 회전익기인 지금의 헬리콥터와 비슷한 기능을 발휘하던 비행기라고 할만하다.

[연락기(liaison plane)는 후에 정찰기 또는 관측기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 한국군이 쓰는 O-1(Observation-1) 기는 과거에 연락기(Liaison)의 첫 이니셜을 붙인 L-19였다.]

훼셀러 기는 전쟁 중에 2,900기가 생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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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셀러 스토르치 기는 역사의 장면에 두 어 번 얼굴을 내민다.

1943년 9월 12일 90명의 독일 특공대가 이태리 북부 아스펜 산맥의 고산 리조트 그랑 사소에 위치한 캄포 임퍼라토레 호텔에서 (실각당하고 유폐 된) 무소리니를 구출할 때도 큰 역할을 했었다.


훼셀러 스토르치 연락기는 특공대장 스코르제니 대위와 무소리니를
태우고 절벽 위의 작은 공간을 이용해 절묘하게 이륙 한 뒤 비엔나로 직행, 훌륭하게 구출 임무를  완수했다.



              구출한 무소리니를 태우고 이륙을 준비 중인 훼셀러 기의 조종사 발터 겔라크 대위는
              절묘한 이륙 솜씨를 발휘하였다.



사막의 여우 롬멜 장군은 열사의 사막을 이 작은 연락기로 누비면서 아프리카 군단을 지휘해서 전설적인 승리를 기록하였다.


훼셀러 기로 전선 시찰 중에도 벌판에 자주 착륙해서 일선 지휘관에게 명령을 내리거나 판단을 위한 정보를 수집 하는 것이 롬멜의 전형적인 전선 밀착형 지휘 방법이었는데, 쇼베르트 장군도 이런 스타일의 지휘를 한 것 같다.


쇼베르트 장군은 9월 12일 우크라이나의 평원에 착륙하였다.
그가 왜 전선에 착륙했는지에 대해서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통상의 지휘 목적으로 착륙했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훼셀러 연락기가 고장 나서 비상 착륙을 했다는 것이다 .


착륙하는 그의 훼셀러 기의 바퀴가 닿은 곳에는 퇴각하는
소련군이 조밀하게 설치해 놓은 넓은 지뢰 지대가 있었다.

휘셀러 기는 착륙해서 불과 몇 초의 활주 중에 지뢰를 밟고 폭발하였다.


대파된 기체 잔해는 그대로 밀려가다가 또 다시 지뢰에
접촉하고 폭발했다. 조종사와 쇼베르트 장군은 탈출은 시도도 해보지 못하고 즉사했다.


그의 사후 11군 사령관직에는 명장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가
부임했는데, 이후 독일군 최고의 명장이라는 타이틀이 주어지는 불후의 전공을 세우게 된다.


앞에서 말했지만 몇 년 만 더 생존해서 활약했더라면, 그는 독일 전사에서 명장의
반열에 올랐을 텐데 전쟁에서 항상 나타나는 변수에 의해서 어이없는 비명에 간 것이다.


전장에서 프러시아 무인다운 장렬한 최후를 맞지 못하고, 하필이면 지뢰밭에
연락기로 뛰어 들어 맞은 최후에 대해서 그는 저 세상에서 아쉬운 통한의 원념을 머금고 또 머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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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기의 실전 투입.


한국의 항공기 제작 기술도 장족의 발전을 가져와 이제 KT-1 터보 프롭 훈련기와 수출까지 추진하고 있는 초음속 고등훈련기 T-50 훈련기 두 종을 보유하게 되었다.



                                           T -50 고성능 훈련기


훈련기는 조종사 훈련이 목적이지만 전쟁과 같은 유사시에는 적을 공격하는 임무도 주어져있다.

한국의 두 훈련기에도 전쟁발발시 전선 출동의 임무가 주어지게 되어있다. 그러나 이 당연지사 같은 훈련기의 전투 출격에 한마디 해야 할 필요를 느껴 몇마디 적어본다.


전투나 공격 전문의 전투기나 공격기들은 그 이름답게 목적에 맞는
공격 장비들도 다 갖추고 있고 적의 대공 사격에 대비한 방어 장비들도 다 갖추고 있다.


그러나 훈련기들은 이런 실전을 위한 장비가 없거나 단순하다. 다시 말한다면 실전에 투입하는 훈련기들은 적의 대공 사격에 대응하기 위한 수단이 취약한 열등한 성능의 전투기나 공격기라고 할 수 있다.

열등한 성능의 훈련기는 실전 투입시 낮은 생존율과 깊은 연관이 있다.


물론 실전 투입시 대공 방어 능력이 낮은 적을 선별해서 목표로 한다는
상식 수준의 배려는 있어야한다는 생각은 해보겠지만, 문제가 그렇게 단순한 것만은 아니다,


아래에 우리가 훈련기의 실전 투입을 위해서 연구해볼만한 전사가 있다.


이스라엘은 1960년대 프랑스에서 개발한 훈련기인 푸가 마지스터
기를 직도입 16기, 국내 라이센스 생산 36기하여 합계 52기나 보유했었다.


비교적 소규모인 이스라엘 공군에
이 정도의 많은 훈련기가 필요없었을텐데 저렴한 푸가 기를 많이 확보해서 훈련뿐만 아니라 실전에 투입하려던 계획이 있었던 것같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보유한 푸가 기 중 20기에 날개에 두 발의 소형 폭탄[50kG,]이나 12발의 80미리 로케트 탄 랙커를 장착하고, 7.62미리 기관총 두 정을 보강해서 실전에 활용할 수 있도록 개조했었다.


                                                    푸가기 
                   쌍발 엔진이고 수직 미익이 없다.
기본 무장은 7.62mm 기관총두 문뿐이다.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의 선공으로 6일 전쟁이 발발했다. 이스라엘 공군의 고성능 미라주나 미스테르 등의 전투기는 총 출동하여 이집트 공군 격멸과 대공 시스템 파괴에 집중하였다.


공군의 공격과 함께 이스라엘 기갑 부대는 시나이 반도를
쾌속으로 진격해 갔다.


전격전에서 기갑 사단의 돌격에 항공기의
근접지원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개전 첫날 이스라엘의 고성능 전투기들은 이집트 공군 격멸에 집중했던터라 지상전까지 지원할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첫날 훈련기들인 푸가 기들이 로케트를 장비하고
기갑부대 전방의 적들을 공격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6일 전쟁 당시 일선에 출격한 푸가 기들은 임시 변통 공격기로 개조한 20기가 전부였다. 푸가 기들은 진격하는 이스라엘 기갑부대 앞을 가로막는 적들을 공격햇다.

           


                                             1967년 6월 전쟁


푸가 기들은 개전 둘째 날부터는 이집트 공군 격멸을 완료한 전투기들에게 시나이 전선을 넘기고 요르단 전선에 출격해서 적 보병과 기갑 포병의 인원과 장비들을 파괴하는 근접 지원 임무를 수행 하였다.


실전에 투입된 푸가 기들은 우수한 이스라엘 조종사들의 능력에 힘입어 지상 지원 
임무를 만족스럽게 수행했다. 

이런 성과를 올린 이면에는 푸가 기가 6대나 격추당한 피해가 있었다. 푸가 기 비행 대대장 아리에 벤오르와 부대대장 아르농 리브낫이 격추되어 전사했다. 불과 2~3일간의 출격에 푸가 기들의 1/3이 격추되었다는 말이다.

이스라엘 공군 기록은 푸가 기 6대 격추를 예상을 벗어난
큰 피해로 평가했다.


                                       착륙중인 푸가 마지스터 기


현대의 전장은 6일 전쟁때 보다 훨씬 더 복잡해지고 더 살벌해졌다.

6일 전쟁에서는 존재 하지도 않았던 이동식 대공 미사일이나
견착식 휴대용 미사일, 그리고 레이다로 조준, 추적, 발사하는 비호나 에리콘 같은 대공포는 현대 지상군의 표준화된 장비들이다.


북한 지상군들도 이런 장비는 기본으로 다 장비하고 있는
사실이 뉴스 화면에서도 자주 보인다.


이제 한반도의 전장터는 무스탕이나 콜세어 기들이
하늘을 휘젓고 다니며 지상의 공산군들을 두들기던 6.25전의 시절은 아닌 것이다.


6,25때 북한은 미군의 제트 전투기인 F80이 출현했는데도 2인승 훈련기인 야크 7B라는 저성능의 복좌 훈련기들을 편대 출격시켰다가 개전 다음 날 1950년 6월 26일 일본에서 날아온 F-82 쌍발기(트윈 무스탕)에 3대나 격추 당하는 굴욕을 당했었다.

비로소 정신을 차린 북한 프로펠러기들은 다시는 미군기에 도전하지 않았었다.


                                            야크 -7B기
       북한 공군은 1950년 6월 26일
미 공군의 제트기가 출현한 수원-안양 상공에 이런 저성능의 훈련기
       후방석에 부조종사까지 탑승시켜 출격시켰었다.



우리는 물론 세계 각국의 공군들은 이스라엘의 전사뿐만 아니라 한국 전사에서 기록 된 북한 공군의 무모한 행동을 잘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보유한 전투 자산을 모두 투입해서 전투역량을 극대화
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훈련기의 실전 투입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첨단 전투기들의 무대인 공중 무대는 조종사들의 단순한 용기나 우월한 기술만 믿고 뛰어들 공간은 절대 아니다.

훈련기를 실전에 투입할 상황을 기대하고 있다면 당국은 실전 상황에 대한 치밀한 조사와 분석을 실시해서 훈련기를 전투에 투입해야 할 이상적인 조건을 미리 설정해야 할 것이다.

비록 훈련기라해도 생존 확률을 높이는 기본 장비는 필히 보유해야 할 것이고 이를 상정한 훈련을 충실히 실시해서 훈련기의 공격 효과와 귀환 생존성을 향상시켜야 하는 것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전투 상황에 직면한 세계 각국 공군들이 숙고해야 할 문제다.

다행히도 초음속 훈련기 T-50은 실전 투입시 다른 어느나라 훈련기보다 공격력도 높고 생존력도 더 강한 여러 기능을 갖추고 있다.

훈련기의 실전 투입이라는 상황에 T-50을 활용할 공군에서 실전에 부응할 수준 높은 시스템과 전술도 함께 개발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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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해외 무기 획득 사업-제2편-
 

    

1624년 4월 24일.조선왕조 실록에,

일본의 도쿠카와 이에미쓰의 습직(襲職; 직무를 이어 맡음)을 축하해주려 파견하는 회답사(回答使)의 파견을 앞두고 비변사에서 조선 특산 비단을 가져가서 일본 시장에 팔고 그 대금으로 일본제 조총을 사오자고 건의하는 기록이 보인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경기의 군사가 가장 정예하고 건장하므로 안을 지키고
밖을
막는 데에 관계되는 바가 매우 중대합니다. 그러나 경기의 물력이 피폐하여 기계를 마련하여 줄 수 없습니다. 이 번에 일본으로 회답사가 가는 편에 호조로 하여금 화사주(花絲紬) 수천 필을 장만해 보내어 수천 자루의 조총을 사오게 하여서 경기 군사에게 나누어 주어 교련(敎鍊)하여 성취하게 하소서. ”

※화사주(花絲紬)는 일본에서 인기 있었던 조선 특산 비단이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라. 환도(環刀-일본도)도 사오도록 하라.”하였다.


                                 임금님 어가를 호위하는 어영청 조총병들


인조의 신정권이 비록 친명 반 후금 정책을 취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북방의 심상치 않은 정세에 대비해서 소멸해 버린 조총대를 다시 만들자는 비변사 내면의 의도가 있었다는 사실이 이 건의에서 보인다,


이괄의 난에 혼난 인조의 심기에 맞추어, 왕실 근위대격인
어영청 소속 경기 병사들을 품질 좋은 일본의 조총으로 장비 시키자는 건의였다.

당시 후금국은 초반부터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인조 정권에 심사가 잔뜩 뒤틀어져 있을 때였다.


후금국이 조만간 손을 보려고 벼르고 있는 상황에서 그 전 군주 광해군
같았으면 미리 앞장서서 일본에서 조총을 구해왔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회답사로 임명되어 일본에 가는 정립이 아래와 같이 무기 구입을 뒤틀어 버리는
한심한 건의를 한다.


무기 구입을 건의하는 비변사의 건의가 재가(裁可) 된 후 보름이
지나지도 않아서였다.


1624 5월 11일,

정립, 강홍중, 신계영을 보내어 일본(日本)에 회답하였다.

정립 등이 떠나려 할 때에 아뢰기를,

중국은 부모의 나라로서 혹 유무(有無)를 무역해도 본디 크게 해로울리 없는데도 오히려 수검(搜檢;금제품(禁制品) 따위를 수색하여 검사함.)하는 법이 있습니다. 

더구나 왜노(倭奴)는 원수의 나라로서 사신을 보내어 회답하는 것은 실로 부득이한 상황에서 나왔는데, 재화(財貨)를 가져가서 이익을 꾀하는 일이 있다면 사신이 모욕을 당하고 나라의 체모가 손상되어 관계되는 것이 작지 않을 것입니다.

비국(備局-비변사)의 공사(公事)에 따라 화사주 수천 필로 조총, 환도를 사오게 하셨는데, 이 성명(盛名)의 시대에 처음 사신을 보내면서 버젓이 재화를 가져가 무역의 길을 열게 하면, 도이(島夷)에게 깔보이고 나라의 체모를 손상시킬 듯합니다.”


하니, 인조가 답하기를,


아뢴대로 하라. 수검하는 일은 사신이 엄금하면 절로 그 폐단이 없을 것인데 어찌하여 반드시 따로 경관을 보내야 하겠는가.”

험악해져가는 국제 정세는 외면하고 명분론에 젖어 후금에 적대하다가
재앙을 불러온 인조의 신하답다.


답답한 인조는 보름 전에 비변사에 내린 전교를
뒤집어 버리고 정립의 건의를 따른다.


국제 정세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 이렇게 명분을
따지는 허황된 인식이 인조 정권에 통하고 있었으니 청[후금국]이 인조를 손보려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은 일으킨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인조가 국방을 게을리 했던 댓가는 엄혹했다.
1638년 12월 1일 용골대와 마부대가 인솔하는 기습대가 압록강을 건너 단 3일 만에 왕실의 피난지인 강화도로 들어가는 길을 차단하고 인조의 조정을 남한산성으로 몰아 넣었다.


이어서 청 태종이 거느린 15만 명의 청군이 후속하여
침공, 남한산성을 물샐 틈 없이 포위하고 공격해 들어왔다.


공성전(戰; 성이나 요새를 빼앗기 위하여 벌이는 싸움)47일간 계속되었다.
수비대는 식량 부족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식량이 떨어지고 더 버티지 못했던 인조는 결국 1638년 2월 1일 성을 내려와 송파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진흙 바닥에서 세 번이나 절하고 머리를 아홉 번이나 조아려야 하는 삼궤구고두의 수모를 겪으며 한국 역사 최악의 수치스런 항복을 하게 된다.



                                                남한 산성


광해군과 달리 아무런 국방의 준비도 안하고 있으면서, 외교적으로는
신생 강국 청에 뻣뻣하게 대응한 인조에게 이러한 결과는 어쩌면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엄청난 정월의 추위 속에서 47일간 진행 된 공성전은 치열하였다.
후금 군은 대포까지 동원해서 남한산성을 파상적으로 공격했다.


그래도 1만 명의 방어 군이 지키던 남한산성이 15만 대군의
청에게 함락되지 않고 방어 해냈던 것은 조총병의 분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총에 이은 다른 해외 도입 무기를 소개한다.

이 것은 무기가 아니라 조총의 필수품인 화약의 원료 '염초(焰硝)'이다.

우리는 고려 때 최무선이 원나라 상인 이원에게서 화약의
제조법을 입수했고 한국 최초의 화포도 제조한 것으로만 알고 있다.[1377년]


그러나 조총에 사용하는 화약의 기초 핵심 성분인
염초는 300년 넘게 국내 생산이 되지가 않았었다.


그 긴 세월 고려나 조선의 화약은 중국이나 일본에서
수입한 염초로 제조해야 했다.

[최무선이 이원에게서 염초의 제조법을 배웠다고 쓴 기록도 있는데 이는 신뢰하기 어렵다. 300년이 넘는 염초 수입이 이를 뒷받침한다.]


염초는 폭발력이 강한 성분으로 오늘날 번개탄의
기본 성분이 되는 초석과  같은 것이다.


염초에 유황이니 숯가루니 하는 성분들을 섞어서
화포나 화승총에 쓰는 흑색 화약을 만드는 것이다.


옛 염초는 오래된 건물의 천정이나 대들보 마루 사이에 
쌓인 고은 먼지를 모아 끓이는 등의 몇 가지 공정을 거치면 생성이 된다.


일본의 각 영주들은 농민들에게 이 먼지를 공출하여
조총용 화약을 만들었다.


중국은 별로 어렵게 보이지도 않는 이 염초 제조 비법을 조선에
전해 주지 않아 조선은 전량 중국이나 일본에서 수입해서 써야했다. 그 세월이 무려 300 년이나 된다.


임진왜란 해전 때마다 일본의 선단을 격멸했던 충무공 이순신 함
대의 각종 함포[총통]들도 수입한 염초로 만든 화약을 사용했었다.


믿어 지지 않는 사실이지만 조선왕조실록에 이를 증명하는
기록들이 보인다.


앞서 인조에게 '일본에 비단을 수출하고 그 대금으로
조총을 사오자'는 상서문에 이런 구절이 뒤이어 붙어있다.


“... 그리고 염초를 사오는데 편리하기는 중국만한 데가
없으니, 이번 사은사가 가는 편에 역시 해조로 하여금 수만 근을 살 수 있는 값을 주어 사오게 하소서.“


염초가 국내 생산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또 다른 사실이 이 보다 앞서 임진왜란 중인 1593년의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다.


비변사가 조우여문이라는 왜군 포로가 염초를
만드는 기술이 있다고 보고하자 선조가 지시를 하면서


“...
이 포로가 조총과 염초의 기술을 안다고 하니 잡아 두고서 우리 군사에게 이 기술을 전수하게 하라.“ 했다.


하지만 다른 신하가 간사한 왜인은 믿을 바 없다고 처형을 건의해서
염초 제조 기술이 전수되지 않았다.


염초 제조 기술이 국내에 도입된 것은 왜란과 호란을 겪고
세월이 한참 지난 숙종 때가 다 되어서였다.


숙종 때 역관 김지남[1654-1718]이 사신 판서 민취도를 수행하여
연경에 사행(使行)갔다가 이의 제조 비법을 알아냈다.


그가 중국에서 입수한 비법대로 염초를 만들어 실험해보니
매우 성공적인 결과가 나왔다.


김지남이 이를 조정에 보고하니 재상 남구만이 숙종에게 계청(啓請;임금에게 아뢰어 청하던 일)하여
군기시(軍器寺)에게 실험해보게 하고 마침내 이를 대량 생산하는데 성공했다.


김지남은 1698[숙종 24년]년, 신전차초방[新傳煮硝方]이라는
염초 제조법을 책으로 간행하여 전국에 널리 보급하였다.


이 때부터 염초 제조법은 군대는 물론 민간에도 퍼져
포수들 까지 염초를 직접 제조해서 100% 국산 화약을 활용하게 되었다.


그의 업적을 인정한 조정은 그를 정3품 통정대부에 승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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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문의 아들 김경문도 역관(譯官)이었다. 1718년 국경 분쟁을 조정하기 위해서 청나라에서
목극등이 오자 김지문 부자는 조선 측 대표 박권과 백두산에 방문하였다.

고지대 국경선 실제 조사에는 박권이나 김지문은 고령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김지문의 아들 김경문이 목극등을 수행하고 올라갔다.


그가 현명하게 대처해서 국경선이 우리 주장대로 되고
백두산에 정계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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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문은 300년 숙원 문제를 해소하여 병기의 완전한 
국내 생산을 성공시켜 자주 국방의 기본 토대를 열었다.


그의 공로는 최무선이나 문익점의 공로에 못지않은 것인데
현대에 그의 공로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없으니 유감스럽다.


한 때 적국이었던 일본으로부터 도입한 조총이 정작 대 활약을 해야 했을 전쟁은 광해군이 준비했던 후금국과의 전쟁이었는데, 광해군이 준비한 조총과 조총대는 오히려 후금을 위해서 싸우는 기구한 운명이 되어 버렸고, 청 태종이 침공한 병자호란 때도 국운을 건져내는 대승리는 아쉽게도 이루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조선의 조총, 또는 조총병의 운명이 그렇게
기대 밖이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세계 전사에 특기되는 일본 오다 노부나가의 삼단 사격에
의한 대승과 비슷한 승리가 병자호란 때 있었다. 남한산성에 포위 된 인조를 구하기 위해서 출동했던 평안도 병력이 강원도 김화 탑골에서 승리를 거둔 것이다.



                   나가시노 전투의 다른 그림. 김화 탑골 싸움을 연상해볼만한 단서를 준다.


나가시노 전투 보다 규모는 훨씬 작았지만 명군을 연파했던 철기병이 조선의 조총대에게 맥을 못 추고 대패 당한 전투였다.


김화의 탑골 전투는 평안 병마사 유림과 평안 관찰사
홍명구가 지휘했다.


전투가 개시되자 청군은 전매 특허격인 기병 돌격으로 쇄도해왔다.
산기슭에 진을 쳤던 홍명구의 조선군은 청군 철기병들의 공격에 와해되어 전멸하다시피 했고 홍 명구도 전사했다. 사르호에서 철기병에게 당했던 조선군의 참패를 닮은 전투였다.


그러나 병마사 유림은 전술적으로 철기군이 활동할 수 없는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고 있었다.


산의 능선을 차지했는데 앞에 잣나무 숲이 있었다.
이 지리적 위치를 이용해서 유림은 대단히 능란한 전투 지휘를 했었다.


나가시노에서의 다케다군과 같이 청 군의 철기병은 파상공격을
해왔다.


           앞편의 그림 다시 올린다. 총이 풍부했었던 노부나가 부대와 달리 조선군은 총수와 궁수가
           혼성 편성되어있다.



유림은 위의 그림에서와 같이 총수와 궁수가 혼합된 사격진을 갖추어놓고, 적을 불과 몇 십 보 앞까지 유인한 후 깃발 신호에 따라 총과 활을 일제 사격으로 발사하는 사격 지휘 방법을 사용했다.


이 일사분란하게 통제된 집중 사격에 후금 군은 수차례의
기병 돌파를 시도하다가 무더기로 시체가 되었다.


이 전투에서 조총병들에게 대어가 낚였다.
임진왜란의 전투 중에도 이런 대어가 낚인 일은 없었다.


전투 도중에 유림이 내려다보니 한 청군 장수가 말을 타고
산 위 아래를 달리면서 악을 쓰며 병사들의 돌격을 독려하고 있었다.


유림은 저격병 열 명을 엄선해서 적 기병을 차단하기위해
만들어 놓은 목책을 넘어 숲 사이로 빠져나가 이 자에게 접근했다.

[이 대목에서 조선군이 나가시노 전투와 같이 마방진지(馬防 陣地)를 구축해놓은 사실이 드러나 보인다.]


사거리 내에 몰래 접근한 저격대는 침착하게 조준을 하고
유림의 사격 명령에 일제 사격을 가했다. 청 장수는 말에서 고꾸라지며 굴러 떨어져 죽었다.


전쟁이 끝나서 그의 신원이 알려 졌는데
그는 누르하치의 매부가 되는 왕족이었다


이날 교전에서 총과 활의 조합된
사격으로 청군이 입은 피해가 막대하였는데, 그날 밤 적진에 몰래 접근한 조선 정찰병이 관찰한 바 통곡 소리가 진내에 가득했다고 한다.


유림이 지휘했던 조총수들은 별도 파견된 어영청 휘하의
정예 부대였었다.


비록 앞에서 말한 비변사의 비단 판매와 조총 구입이
실행되지 않았었다해도, 그 이후 10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임금을 모시는 정예 어영청 부대는 대마도를 경유해서 수입 된 조총들을 최우선적으로 장비했을 것이다.


선조가 시작했었던 해외 병기 취득 사업이 몇십년만에 조그만 결실을
맺은 전투라고도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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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해외 무기 획득 사업-제1편-




첨단 무기의 해외 도입 사업은 한국 국방 정책에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고 매년 엄청난 예산이 해외 무기 획득에 지출되고 있다.


조선 시대에도 국왕이 직접 챙기던 해외 무기 획득 사업이
있었다.


아래는 해외 무기 획득사업이 증오나 체면이나 또는 명분을
떠나서 국익만을 따져서 결정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입증해주는 조선의 국방 구매 사업사의 한 사례를 소개한 것이다.


조선이 해외에서 구매해오던 무기는 두 종류이다.
그 하나가 임진왜란 7년의 전란동안 조선군에게 큰 괴로움을 주던 일본군의 조총이었다.


다른 하나는 300여년의 세월동안 국산화를 하지 못해 외국산
수입해야 했던 화약의 원료인 염초다. 사실로 받아 들이기 힘든 분들이 많을 것이다.


--- 임란 전부터 조선의 무반(武班)사이에 명품으로 통하던
왜검[일본도]도 있으나 이는 이 글에서 생략하고자 한다. ---


조총부터 살펴보자.

조총은 일본이 원산지가 아니라 1543년 일본 남단
다네카시마[현재는 가고시마현]에 표착한 포르투갈 인들이 전래 해준 것이다. 덕분에 조총은 일본에서 한 때 다네카시마라는 명칭으로 통했었다. 현재 다네카시마에는 일본 우주 개발 로케트 발사 기지가 있다.


다네카시마의 16세 젊은 도주[島主]는 중국 배를 타고 표착해온 포르투갈인들로부터 2,000량이나 되는 거금을 주고[현재 시세로 10여억 원의 대금]을 지불하고 총과 그 제조 기술을 전수받았다.


젊은 도주는 조총을 새나 잡는 스포츠의 도구로 생각하고
그런 목적으로 조총 사격을 즐겼는데 옆 섬과 벌어진 전투에서 조총을 사용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일본의 조총


이 소문이 전해지면서 조총은 삽시간에 일본 전국에 퍼졌다.
당시는 일본이 60여개의 국가로 나뉘어져 밤낮없이 싸움질을 하는 전국시대였었다.


오닌의 난이래 백여년간 싸움이 그치지 않고 계속되는
시대였었기 때문에 신병기인 조총은 너도나도 찾는 인기 상품이었고 값도 무척 올랐다.


한마디로 전란의 시대에 돈벌이 잘 되는 대박
상품이 되었다.


이에 창안한 오사카 부근 사카이의 상인들은 숙련된
대장장이들을 불러 모아 조총을 대량으로 생산하였다.


자본의 지원을 받는 대량 생산에 힘입어 조총의
제조 기술은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원래 세계가 알아주던 도검 제조 기술을 보유했었던 일본의 장인들은 그 기술을 조총 제조에 그대로 응용했다.


사카이 장인들이 만든 조총은 원산지인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제 보다도
더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일본인들은 조총을 대개 철포[鐵砲]라고 불렀고 조총 부대도
철포대[鐵砲隊]라고 불렀다.


이 철포부대를 대규모로 운용해서 역사의 방향을 전환시킨 사람이 전국
시대를 거의 마감시킨 오다 노부나가다.


그는 1575 년 6월 29일 나가시노 전투에서 3,000명의 철포부대를
전개시켜 3단 사격이라는 연속 사격 전술로서 영주 다케다 가쓰요리의 12,000 정예 기병대를 전멸시키고 다케다 가문을 멸망시켰다.

 

                                      1575년 나가시노 전투
             왼쪽이 노부나가 철포부대, 노부나가 군은 통나무를
병사 개인들이 운반해와서 기병대를
             저지하는 마방진지를 구축했었다.



임진왜란 때 탄금대에서 신립의 조선군과 격돌한 일본군은 나가시노에서 써 먹은 일제사격 전술로 조선군을 대파하였고 신립은 강에 뛰어들어 자살 하였다.


임진란 내내 조총이 조선군에게 가하는 타격은 실로 컸다.
조총에 크게 당한 조선의 군주 선조는 조총에 큰 관심을 가지고 이를 모방한 조총의 생산을 직접 독려하였다. 그러나 조선이 제조한 조총은 그 품질이 별로 좋지 않았었다.


조선제 조총의 품질이 안 좋았다는 기록이
조선 왕조 실록 여기저기에 보인다.


1607년 일본으로 출발하는 사신에게 선조가 전교하는 내용의 일부다.


“... 또 적을 막는 병기로는 왜(倭)의 조총만한 것이 없다. 우리나라가 대략 만드는 법을 배워 만들기는 하였으나 모두 쓸 수 없었다. 얼마 전에 함경 감사가 은자(銀子)를 모아 올려 보내서 조총을 사가기까지 하였었다.”
※위에서 함경감사가 한양에 와서 사간 조총은 일본제이다.※


선조의 교시는 국산 조총은 아예 쓸 수가 없는 불량품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조선의 기술로 화약의 폭발력을 견디어 내는 강도 높은 조총을
만드는 기술이 아직 개발 되지 않았다는 말인 듯하다.

--- 조선 말 화승총[火繩銃-조총]으로 사냥하던 포수들은 사용 중 화승총이 폭발하여 실명하거나 손가락이 잘려지는 사고를 상당히 많이 당하였다. 산간 부락에서는 애꾸눈이나 손가락 없는 포수를 자주 접할 수가 있었다. ---


위의 교시에 이어진 선조의 지시는 조총을 일본에서
수입해오라는 명령이었다.


“...만일 이번 회답사의 사행에 해조[該曹,공조- 재무와
 상공 담당 부서]에게 물건 값을 헤아려 주게 하여 조총을 편리한 대로 다수 사들여 오게 한다면 적국의 병기를 배에 가득히 싣고 돌아온다 해도 참으로 방애스러울 것이 없을 것이다. 이 또한 한 가지 이로운 일이니 아울러 의논하여 시행하도록 비변사에 말하라.”


1618년 북방에 흥기한 누루하치의 후금국 철기병 부대와
전쟁을 하던 명나라의 장수 유정이 조선에 각종 군수물자의 지원을 강청(强請)해왔다.


이에 거절하지 못한 병조에서 광해군에게 건의한다.


“... 그리고 환도와 조총은 우리나라에서 만든 것이 비록 매우 거칠고
엉성하기는 하나 훈련도감과 군기시에게 정밀하고 좋은 것을 특별히 가려 숫자대로 미리 준비하게 하소서.“


조총을 생산한지 20여년이 흘렀어도 그 질이 그닥 좋아 지지 않았다는 것을
위의 기록이 말해준다.


조총에 한이 맺혀 증오와 체면을 내던지고 일본의 조총 제작은
물론 수입까지 추진했던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조총부대의 육성에 총력을 기울였다.


국토가 결단 나고 백성의 삶이 도탄에 빠지는 왜란이
겨우 지나고 나니, 북방의 여진족들이 무서운 기세로 일어나서 조선의 안전을 위협하는 상황이 왔었기 때문이었다.

실로 그 기세는 대단해서 대국 명나라의 군대는 연패를 거듭하고 있었다.


여진족이 세운 후금국의 군력의 핵심은 철기병이라 불리던
기병대였다.


기병대에게는 조총의 일제 사격이 특효약이라는 사실은 이미
일본의 오다 노부나가가 증명해 보인바 있어 동양 병학계의 상식이 된지 오래였다.


철기병을 격파할 수있는
강한 조총부대의 육성을 추진하던 광해군은 조총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다. 화기도감을 세우고 조총의 대량 생산에 박차를 가했는가 하면 대마도를 통한 일본제 조총과 왜검의 수입량을 대폭 늘였다.


대마도는 조선과의 조총 장사로 짭짤한 재미를 보았다.
대마도가 조총 100여정을 보내 주면서 일본에서 금값으로 팔리는 조선 인삼을 500근이나 청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광해군이 즉위할 무렵의 조선이 보유한 조총 숫자는 1610년[광해군 2년]
1월 12일 광해군에게 올리는 보고문에서 나타나있다.


“... 도감의 조총은 비축하여 두고 사용할 때를 기다리는 도구가 아니라
본래 초군(哨軍)의 평상시 사용을 위한 물품이므로 만드는 대로 지급하여 망가지면 대용하게 하였으니, 도감의 각군으로서 소지한 자가 지금 거의 1천 9백 7십여 명입니다.”


광해군은 이 1,970정의 소총에 더해서 추가 생산과 수입을 통해 조총을 계속 늘려갔으며,
7년 뒤에는 5,000명의 조총대를 육성해냈다.


조선이 강력한 조총대를 보유한 것을 알게 된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것을 들먹이며 대 후금전쟁에 이 조총대를 파병하라고 압력을 가해왔다.


명분따위 보다도 백성의 안녕을 위해서 후금의 비위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던 광해군은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파병을 미루었으나 계속 된 압력에 버티지 못하고 1619년 추운 정월 5.000명의 조총대를 주축으로 하고 기타 병력을 증강한 10.000명의 원정 부대를 파견하였다.


1만명의 원정군은 평안도 3,500명, 전라도 2,500명,
황해도 2,000명 충청도 2,000명 등으로 구성되었다.


임진란의 재앙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해 빈궁하기 짝이 없는
조선이 젖 먹던 힘을 다해서 모은 병력이었다.

[출발 전 강홍립은 광해군으로부터 상황을 보아 잘 알아서 처신하라는 비밀 지령을 받았다.]


원정 조선군은 1619년 2월 1일 압록강을 건넜다.


그러나 조선의 조총대는 1619년 3월 심하 부근 사르흐에서 명나라 장수
유정을 후속하다가 유정의 군과 함께 철기병의 연달은 기습을 받고 큰 피해를 입었다.


봄철이면 부는 만주의 모래 바람을 틈타 철기병들이
폭풍처럼 덮치는 바람에 조총대는 단 한번의 일제 사격을 해보았을 뿐,그대로 와해되고 말았다. 광해군의 밀지를 받고 기회를 보던 도원수 강홍립은 후금 군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후금의 철기병들과 맞서는 조선의 조총대. 조총과 활이 교대로 배치된것에 유의.


파견한 1만 명의 병사 중 그 해 안으로 조선으로
도망쳐 돌아 온 조선군은 1,40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후금에게 조선군들은 호박이 넝쿨 채 굴러 들어온 보물들이었다.
후금은 조선군 병사들을 일일이 심사해서 튼튼한 자는 조총대를 주력으로 해서 편성한 부대에 편입시켰다,


그리고 나머지 신체 조건이 부족한 병사들은 각 여진족 부락에 나누어
농사일을 하도록 했다.


청태조 누르하치는 비록 강제 동원한 것이기는 하지만 조선 조총병들을
잘 대우해주었고, 명나라와의 전투에 투입해서 큰 재미를 보았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물러나고 인조가 왕좌에 앉았다.
그리고 인조가 이괄의 난을 겪고 가까스로 정권이 안정이 된 뒤 점검해보니 군기감에 조총이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1
624년 인조 2년 4월 25일. 특진관 이서(李曙)가 아뢰기를,“도감(都監)의 군기(軍器)는 변란을 겪은 뒤에 아주 없는데, 근래 저자에서 산 것은 겨우 2백여 자루의 조총뿐입니다. 쌀을 마련하여 지금 더 사들인다면 많은 수량을 장만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조로 하여금 쌀을 지급하여 사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결국 광해군이 조선의 국방을 위해서 막대한 국가 재정을 투입,
생산하고 수입해서 가까스로 확보한 조선의 조총 5,000정은 타 민족끼리의 엉뚱한 전쟁에서 전량 소멸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제2편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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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상공의 대만 비밀 정찰기
 

U-2기는 미국이 보유했던 극비 첩보 정찰기였다. 소련 전투기나 샘 미사일이 도저히 올라오기 힘든 20.000미터[7만피트]의 상공을 날며 특수 카메라로 지상 목표물들의 세밀한 사진을 찍는기능이 있는 스파이 기였다.


[그러나 소련은 그들의 SAM -2기의 성능과 사용법을 계속 개량해서 U-2의 격추에 성공했다.]


1960년 U-2기가 소련 상공에서 격추되고 조종사 게리 파워즈가 체포되어
국제적으로 시끄러운 문제를 일으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파워즈의 격추에는 이설이 있다는 것도 밝혀둔다.-



                             소련 수상 니키타 후르시쵸프와 격추 된 U-2기 잔해


그 뒤 미국이 더 신형인 SR-71을 개발했었기 때문에 U-2기는 약간 구식화 되었지만 이 극비 정찰기는 대만 공군에서도 운용하고 있었다.


이 글에서 대만 U-2기의 비밀작전과 격추되어 중국에 억류되었다가 귀국한 두명의 조종사들의 고달펐던 운명을 소개한다.

 


                             박물관 천정에 매달아 전시한 U-2기. 긴 날개가 돋보인다.


1960년 소련에서 격추되어 국제적인 망신을 당했지만 미국 CIA는 파워즈 사건이 나고서도 U-2기의 운용을 중단하지 않고 오히려 확대했었다.


U-2기는 쿠바 위기 때도 첩보 비행에 나섰다가 격추 된 일이 있었지만 월남전 때도 대폭 투입되었었다.


미 CIA는 냉전시대 소련만큼이나 중요한 적성국이었던 중국에 대한 비밀 항공 첩보를 그냥 두고 지나 갈 리가 없었다.



                                   대만 U-2기

미 CIA는 중국 본토에 대한 공중 첩보 작전을 다른 방법으로 추진했다. 대만 공군과 합동 하는 방향으로 추진 한 것이다.


즉 대만 공군이 U-2기를 운용하고 정비와 기술 지원은 미국이 하며 첩보는 공동으로 활용하는 방향이다.


본토 수복을 꿈꾸며 중국과 치열하게 군사 대결 중이던 대만도 이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지금은 상상이 가지 않지만 대만과 미국은 냉전시절 더 이상 좋을 수가 없다고 할만큼 관계가 밀접했다.

한국 공군이 F-86이라는 구식기를 애지중지 하며 사용할 때 대만 공군은 미국이 제공한 최신식F-104 전투기를 몰았었다.

더구나 이들이 한국 내 미공군 기지를 비밀 작전기지로 사용했었던 것이 우리로서는 이색스럽다.

미국과 대만의 비밀 공중 첩보활동은 그 역사가 U-2기 활동 시기보다 더 이른 옛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57년 12월. 미국과 대만은 미 해군 정찰기 P-2 넵츈기를 개조한 비밀 정찰기 다섯대로  동업을 개시했었다.

이 정찰기는 진한 청색으로 칠해져 야간에 잘 보이지 않았다. 대만군이 조종하던 넵츈 정찰기는 야간에 저공으로 침투해서 주로 중국 레이다 망의 전자정보를 수집하고 정보원을 투하하기도 했으며 또 삐라를 뿌리기도 하였다.


                              미 해군 P-2 넵츈 정찰기


창설된 미·대만 합동 부대에게 34중대라는 부대명칭이 주어지고 검은 박쥐 중대라는 별칭도 주어졌다.

검은 박쥐 부대의 운명은 그렇게 좋지가 않았다. 검은 박쥐 부대의 넵츈 정찰기들 중 두 대는 한국에서 추락했었고 세 대는 중국에서 격추되었다. 생존자는 한 명도 없었다. 검은 박쥐 부대는 1967년에 활동을 종료하였다.

U-2기의 활용 범위를 찾던 미국은 대만과 함께 협력할 방법을 찾았다..

넵츈 부대를 운영했던 두 국가는 이 경험을 살려  U-2기를 비밀운용하는 미·대만 합동의 블랙 캣 비행부대를 창설하였다.


대만 공군은 이 U-2기 부대를 넵츈 운용 부대의 뒤를 이어 공군 35중대,또는 
흑묘 중대[黑猫 中隊]라 불렀다.


중요한 임무를 맡은 부대라서 장개석의 아들이자 국방상인 장경국이 자주 방문해서 부대를 점검하고 부대원을 격려했었다.



                                 흑묘 중대의 엠브렘

최초로 먼저 6명의 대만 조종사와 정비 요원이 미국으로 파견되어 극비리에 U-2기 조종 훈련을받았다. U-2기 조종 훈련을 받은 대만 조종사는 15년간 총 28명에 달한다.


1961년에 최초의 U-2기가 대만으로 양도되었으며 미국의
정비 및 첩보 전문가들이 대만의 타요유안 기지로 파견되었다.



                         미국에서 훈련 중인 대만 U-2기 조종사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대만 U-2기 부대는 암호명 레이저 작전[면도칼 작전]이라는 작전에 따라 1974년까지 13년간 중국 본토 상공에 102회 침투하는 비밀 출격을 했었다.


넓은 중국 대륙의 구석구석을 파고들기 위해 대만 첩보기들은 때로는 베트남 상공을, 때로는 북한 상공을 경유하는 침투 비행을 하기도 했었고, 또 양국 상공을 첩보 비행하기도 했었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의 정찰기가 소련 영공내 출격을 25회밖에 하지 않은 것에 비하면 대단히 많은 출격을 했다고 할 것이다. 대만 U-2기 조종사들은 8-9시간의 장시간 비행을 해야하는 힘든 첩보 비행 출격을 잘 견디어 냈다. 


가끔  중소 국경을 넘어 소련 영토로 들어가서
첩보를 수집해 오는 위험한 임무도 수행하였다.

                                   대만 U-2기가 비행했던 첩보 비행 코스
                     중국 방공부대를 혼란시키기 위해서 항상 지그재그 코스로 비행했다.
                     평양 상공을 거쳐 군산 미 공군기지를 경유하는 코스도 보인다.


그러나 대만 공군과 미 CIA가 합동으로 추진한 이 비밀작전에서 희생자가 안 나올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중국도 소련처럼 그들이 보유한 SAM 미사일 발사 기술을 개발하고 추적 기술도 발전시켜서 총 5대의 대만 U-2기를 격추시켰다.


중국은 U-2기에 골머리를 앓았다. 중국은 격추시킨 U-2기의 잔해를 진열해놓고 전시하기도 하였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 중에 3천여 조각이 난 U-2기도 있었다.


더구나 격추된 U-2기의 레이다파 탐색기 시스템 12가 중국에 노획된 뒤
대만 U-2기의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중국에 격추된 다섯 대의 U-2기 대만 조종사 중 세 명이 전사했었다.
다른 두 명은 고공에서 격추되는 U-2기에서 기적적으로 탈출하여 목숨을 건졌으나 중국의 포로가 되었다.


U-2기는 공기가 희박한 상공을 날 수 있게 설계 되었지만 대단히 연약하고[격한 기동을 하면 날개가 펄럭인다.] 조종하기도 까다로워서 격추된 것 말고도 훈련과 중국 연안 정찰 비행중에 7명의 대만 조종사가 목숨을 잃었다.


미국이 순차적으로 공급했던[대만이 항상 두 대만 보유, 작전하게 하였다.] U-2기는 모두 19기였었는데 이중 11기를 상실했던 것이다.


[그러나 촬영한 사진 정보는 모두 오키나와 미군 기지로 가져가고 대만에 공급되지 않았다. 거듭된 대만의 항의로 60년대 말부터 첩보 비행의 정보와 판독 기술이 제공되었다.] 


중국 상공에서 격추된 최초의 대만 조종사는 1963년 11월 1일 출격했다가 격추된 예 창티 소령이다.


그는 중국 북서부 지방의 중국 핵 실험장을 정탐하다가 격추 되었다.


세 발의 샘 미사일이 그에게 발사되었다.



               유명한 SAM-2 대공 미사일- 소련의 정식 명칭은 SR-75드비나다.

그는 첫 번째 샘 미사일을 잘 피했지만 두 번째 쌤 미사일에 피격되어 하반신에 수 십 개의 파편이 박히고 기압복이 다 찢어지는 중상을 입었다.


그가 정신을 차린 곳은 대수술을 받은 중국의 한 병원이었다. 그가 낙하산에 매 달린 채 발견되었을 때 그가 몸에 걸치고 있던 것은 조종화 한 컬레 뿐이었다.


그가 어떻게 그 저온에 산소가 희박한 고공에서 탈출했는지는 의문이다.


1965년 1월 10일 장 리이 소령이 조종하는 대만 U-2기가 내몽골에서 샘 미사일에 격추 되었다.


이 출격이 특별났던 것은 그는 우리나라 군산의 미 공군 기지를 출격해서 산동반도를 거쳐 내몽골로 들어갔다가 격추 되었다는 사실이다.



                                    군산 비행장

대만 U-2기들도 넵츈처럼 우리나라 군산의 미 공군기지를 자주 사용했었다. 미국의 배려가 있었을 것이다.



                        U-2기 조종사 화 쉬춘 소령의 조종복장


두 사람은 중국에서 5년간의 형을 살고 사상 개조 사업이라는 명목으로 집단 농장에 배치되었다.


그 곳의 삶은 가난과 노동의 연속이었다.

더구나 수형 생활 중 문화 혁명이 일어나자 홍위병들에게 지독한 학대와 수모를 당해야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 수모를 잘 버티어 냈다.


한편 대만은 두 조종사의 운명이나 행방을 알아 낼 수가 없었다. 중국이 아무런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결국 고심하던 대만 공군 당국은 1967년 두 조종사를 전사 처리하고
가족들에게 연금을 지급했다.


두 조종사 다 기혼자였는데 부인들은 남편의 전사 통지를 받자 나중에 다 재혼했다.


갖은 고생을 하던 두 사람은 중국이 개방 개혁의 길로 들어섰던 1982년 11월 10일 홍콩으로 추방되었다.


실로 4반세기에 가까운 인고의 생활을 겪었던 이들이 조국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두 사람을 전사 처리했던 대만은 이들이 중국군에 적극 협조했고 공산주의자로 세뇌되었다고 의심하고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 CIA와 여러 정치 단체에서 구명 운동과 압력이 들어가자 할 수없이 귀국을 허락했다.


1950년대 중국에서 포로 생활을 했던 장개석 군대 장군들의 사상개조를 의심해서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던  대만의 속 좁았던  피해 망상증이 80년대에도 여전히 계속되었던 것이다.


중국의 U-2기 요격 방법이 발전하고 피해가 늘어나자 중국 본토에 대한 첩보 비행은 1967년도부터 중단되었다.


첩보 위성이 발달했던 것이나 더 성능 좋고 생존성이 좋은 SR-71이 작전을 왕성하게 하고 있었던 것도 이유가 된다.



                                 음속 3.3배의 SR-71.
              사고로 추락한 적은 있지만 적에게 격추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대만의 U-2기는 중국 해안 루트를  따라가며 측방에서 중국 연안 지방을 엿보는 작전 비행을 1974년까지 계속 하였다.

1974년 2대의 U-2기가 대만을 떠나 미국으로 반납 비행을 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대만 공군 U-2기들의 임무는 종료되었다.


최초로 격추 된 조종사 예 창티는 나중에 대만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했다. 푸대접 하던 조국에게 염증을 느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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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전함들의 미 비행장 포격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의 정형화 된 상륙전 전략을 보면
먼저 항공력이 일본군을 강타하고 이어서 접근한 함대의 함포가 무지막지한 포격을 한 다음 해병대가 상륙정을 타고 상륙해서 굴을 파고 숨어 있는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섬을 점령하는 것이 전쟁의 시나리오였다.


해군 함포의 화력은 미군이 태평양 전쟁 진행에서 활용했었던
항공력과 함께 미 해군의 전투 주력 자산중의 하나였다.


그 중 3만 톤이 넘는 전함의 거포가 쏟아내는 포화는
함포 화력의 주역이었다.

거함인 전함[battleship]이 함대 결전의 핵이라는 사실은 1905년 러일 전쟁때 쓰시마 해전과 그후 1차 세계대전 중인 1916년 영독 함대가 싸운 유트란드 해전에서 증명된 바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 영 일등 해군 강국은 초노급이라는 거함 경쟁에 돌입해서 거대 전함건조에  열을 올렸다.

일본은 막대한 국력을 동원해서 거대 전함들을 속속 건조했다. 항공모함이 출현하자 전함보다 항공모함을 더 건조해야 한다는 의견이 비등했지만 거함대포주의는 일본 해군의 주류적인 해군의 철학이었다.

하지만 전함들은 태평양 전쟁에서 사실 '왔다 갔다'하는 역할에 그쳐 무용지물에 가까웠다는 것이 전쟁의 결과로서 증명되었다.



                            전함들의 일제 포격. 원안에 날아가는 포탄들이 보인다.


태평양 전쟁은 새로운 항공모함 시대를 열었다. 항공모함 시대는 전함에게 새로운 역할을 요구하고 있었다.

태평양 전쟁에서 전함이 적함과 포화를 교환하는 해전을 벌인 것은
불과 서 너 번에
지나지 않았고, 주로 육상 표적을 쏘는 해상 요새의 포병 역할을 하였다.

미 해군 전함이 지상의 일본군이나 시설을 포격하면, 발사된 거탄들이 낙하하면서 굉음을 내고 대폭발을 하면서
커다란 구덩이를 만드는 바람에 땅을 파고 들어간 일본군들은 간을 졸이며 공포 속에 떨어야 했다.


그러나 
거꾸로 일본군 전함이 지상의 미군들을 포격해서 큰 피해를 입힌 적도 있었는데 일본군 전함 공고와 하루나가 1942년 10월 과달카날섬의 미군 핸더슨 비행장을 두들긴 야습 포격이 그것이었다.



                                             일본군 전함 공고
            1913년 진수, 영국에 주문한 마지막 전함 36,600톤,30노트, 14인치[360미리]포 4문 장비
            두 번의 개장으로 현대화 되었는데 사진은 개장전의 모습이다.



                                          일본군 전함 하루나
                     공고와 같은 급이고 같은 영국 디자인이지만 일본에서 건조하였다.
                     제원은
공고와 유사하며 사진은 개장 후 모습.


                              과달카날 룽가 포인트에 일본군이 건설중인 비행장.

                   1941년 12월 8일 태평양 전쟁 발발후 확장일로의
전략을 구사했던 일본 해군은
                   과달카날 섬을
무혈 점령후 이곳에 비행장 건설을 추진했다.
이 과달카날은 남
                   진한 일본군의 최전선이었다.
과달카날은 1568년 페루에서 출발한 스페인 탐험
                   선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과달카날이라는 이름은 탐험대원 페드로 드 오르테가
                   바렌시아의
고향인
안다루시아 지방의 작은 도시 이름이다



미군은 1942년 8월 7일 해병 1사단을 동원해서 과달카날 섬과
인접 플로리다 섬의 툴라기에 기습 상륙 작전을 가했다.


일본 해군의 수상기 기지였던 툴라기에서는 약간의 교전이
있었으나 과달카날은 미 해병 1사단 11,000명의 병력이 거의 저항 없이 상륙했다.


해안에 교두보를 확보한 미 해병대는 룽가 포인트 지역으로 전진해서
비행장을 건설 중인 일 해군의 비행장 설영대[設營隊, 야외에 시설이나 천막 따위를 설치하기 위하여 편성한 집단]를 밀림으로 내쫓고 건설 중인 비행장을 점령했다.


미군들은 일본군이 가지지 못했던 중장비인 불도저를 동원하여 미완성 비행장을 완공,
8월 18일에 작전 가능 상태로 만들었다.


                                             
완공된 헨더슨 비행장에 최초로 착륙한 미 해군 카타리나 비행정
                  이 비행장에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전사한 헨더슨 소령의 이름이
주어졌다.



헨더슨 비행장을 기지로 해서 활동했던 미국 해군, 해병대, 육군, 그리고
뉴질랜드 혼성 항공대는 상륙 작전 기획 중 섬에 붙여진 암호명을 따서 캑터스[cactus -선인장] 항공대라 명명되었는데, 이 항공대는 6개월간 계속된 과달카날의 육해공 전투에서 일본군 격멸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44년 잘 정비된 헨더슨 비행장 사진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던 10월 13일 일본군의 해군기지 트럭 섬을 출발한 전함 공고와 하루나 두 척의 전함들이 야음을 틈타 과달카날로 접근했다.


일본군 연합함대 사령관 마모도 이소로쿠가 제독이 구리다 다케오 중장이 지휘하는 공고와 하루나 공격 함대에
헨더슨 비행장 포격을 명령했던 것이다.


두 척의 전함은 한 척의 순양함과 아홉 척의 구축함으로 구성된 호위 함대를
거느리고 출동했었다.


이틀 전인 10월 11일에도 일 중순양함 부대가 헨더슨 비행장을
포격하기 위해 출동했다가 에스페란스 곶에서 미 함대에게 저지당했었는데, 두 전함들은 아무 저지도 받지 않고 무사히 과달카날에 도착하였다.


과달카날 해역에 도착한 두 척의 전함들은 14일 새벽 1시 33분
16,000미터의 거리에서 14인치거포의 포격을 개시하였다. 일본 해군의 14인치 포는 3식 연산탄 대공용 고폭탄을 발사했다.  이 거탄들은 항공기뿐만 아니라 신관만 조정하면 인마살상과 시설파괴의 대지 공격도 가능했다



                                 야습 포격에 불타는 헨더슨 비행장 항공기들


당일 헨더슨 비행장에는 캑터스 항공대 소속 전투기,
폭격기, 정찰기 등 잡다한 군용 항공기들이 90기나 밀집해있었다. 연료 탱크와 산더미 같은 보급품들도 여기저기 산적해 있었다.



                                          포격이 거쳐간 아침의 모습


거탄들은 사정없이 날아와 폭발했다. 단잠에 빠져있던 비행장의 미군들은 방공호 속에 뛰어들어 공포 속에 포격을 견디어 내야 했다.


포격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83분간이나 계속되었다.
일본 해군의 두 전함들이 발사한 포탄들의 총계는 무려 973발이나 되었다.


그 중에 2,200평방미터의 좁은 헨더슨 비행장에 명중한 탄만해도
700여 발이 넘었다.


거탄들은 두 개의 활주로를 대파시키고 항공유 저장 탱크를
명중시켜서 모든 항공유를 연소시켰는가 하면 90기의 항공기중에 48기를 파괴시켰다.


미군은 41명이 전사했다.
이 중에 6명이 조종사였다.



                                 포격에 파괴된 미 해군 F4F 와일드 캣 전투기


폭격을 종료한 두 전함은 즉시 함수를 돌려 트럭섬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두 개의 활주로 중 보조 활주로에 해당하는 한 개는 미군이 상륙한 뒤에 건설한 것이어서 일본군에게 그 정확한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았었다.


덕분에 이 활주로에는 포격이 집중되지 않아 서너 시간의
수리 후에 출격이 가능해졌다. 손상 항공기들도 몇 주 만에 긴급한 보충으로 원상회복되었다.



                                    공중 촬영한 헨더슨 비행장 피해 모습


일본 전함이 육상 표적에 함포 사격을 가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으며, 미국은 일본 전함의 헨더슨 비행장 포격 사건을 태평양 전쟁사에서 관심 있게 다루고 있다.


또 이 포격 사건을 정점으로 일본 해군의 수상함 부대가 내리막길로 가게되기 때문에 일본 해전사에서도 상당히 의미가 있다.



                                  대피 기동으로 항공기의 공격을 피하는 하루나.


일본은 러일전쟁의 쓰시마 해전에서 대승한 후 시대가
바뀌었음에도 거함 대포를 동원한 함대 결전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세계 최대 거함 야마토와 무사시를 건조했었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 중 전함들의 임무는 해상에서 적함과
해전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상륙 작전을 위한 화력 지원에 그 존재와 효용의 가치가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하지만 이미 제공권과 제해권을 상실한 상태였기 때문에 일본 전함들은 
공고와 하루나의 성공적인 과달카날 포격을 끝으로 그 기회를 다시는 갖지 못했다.


몇 달 뒤 공고와 하루나와 같은 전과를 기대하며 야간 출동했던
일본 전함 기리시마가 과달카날 근해에서 미 전함 워싱턴의 레이다 조준 일제 사격에 침몰하고 말았다.

태평양 전쟁 중에 있었던 유일한
전함대 전함의 대결이었는데 일본이 완패했다.
[기리시마도 공고 하루나와 같은 급이다]


몇 달 뒤에는 히로히토 일왕이 좋아했던 히에이 전함이 항공 공격에 의해 
격침 되고 말았다.


히에이 함대 역시 공고와 하루나의 성공을 기대하고
과달카날로 침투 중이었다.


해전에서도 레이다와 항공 지원 없이는 일본
전함들이 설 곳이 없다는 것이 과달카날에서 증명된 것이다.



                                            전함 기리시마
                      미 전함 워싱턴이 가한 단 한번의 레이다 조준 포격에 격침되었다.


전함들이 쓸모가 없어졌는데도 일본 전함들은 전과 없는 비생산적인 출동을
거듭하다가 1945년거함 야마토의 자살 출동이라는 어이없는 비극을 거쳐 종말을 맺었다.


일본인들은 끝까지 거함 대포주의의 꿈을 놓지 않았던 것이다.
과달카날을 포격했던 공고는1945년 7월 28일 일 구레 해군기지 항내에 정박해 있다가 미 해군 항공기의 공격을 받고 격침되었고 하루나는 그 전해인 1944년 11월 26일 필리핀 근해에서 미 잠수함에게 격침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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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크랜드 항공전 -제3편-


이 전쟁에서 영국 해군의 씨 해리어기와 공군의 해리어[GR.3]기는 전쟁 전 우려했던 바와는 달리 그 성능과 내구성이 입증되었다.


참전 용사인 겟지 예비역 해군 중령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해리어기는 1,500회 출격을 했고 보유기는 98%의
가동률을 보였습니다.“


이틀 뒤 영국군이 확보한 교두보를 완전히 장악하고 섬의 내륙으로
진격해 들어 갈 준비를 하고 있는 순간에 아르헨티나 해군의 마지막 남은 스카이호크기 4대가 덮쳐 들었다.


이들은 영국 해군 호위함인 앤티롭를 공격했다.

아르헨티나 해군의 칼로스 린케 대위가 다시 이 출격에 나섰었다.


“공격 접근 비행 마지막 3분 동안 나는 편대장인 과다그니니와 함께 
적 함대에 돌격했었습니다. 불행히도 그는 영국 함 브로드스워드에서 발사한 씨 다트에 맞고 전사했지요. 나는 나의 전우이자 편대장을 잃고 말았습니다."


네 대의 스카이호크기는 앤티롭에 두 발의 폭탄을 투하해서
함체에 큰 구멍을 내게 했다.


그 날 밤 불발탄인줄 알고 방심했던 두 발의 명중 폭탄 중에서
한 발에 지연신관이 장착되어 있어서 뒤늦게 폭발했다.


함에 큰 화재가 일어나서 다음날 아침에 앤티롭은 침몰하고 말았다.


                                        침몰전 화재가 발생한 앤티롭



앤티롭이 침몰한 날 험스에서 이륙하려던 씨 해리어기가 추락해서 고든 바트 중령이 전사했다.그리고 하루 동안은 조용했다.



                                   아르헨티나 공군 사령관 라미 도조 장군.
                           포크랜드 전쟁에서 죽을 쑨 육군과 달리 공군은 선전해서 
                           한때 국민적 인기를
누리기도 했었다.


5월 25일은 아르헨티나 독립 기념 192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런 의미있는 날에 무엇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함대 사령관 존 우드워드 제독은 함대를 포트스탠리 동쪽 60마일 해상까지 진출시켰다.


씨 해리어기들에게 왕복 시간을 줄여서 더 긴 체공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대공 장비가 잘 된 구축함 브로드스워드와 코벤트리를
산 카르로스 만 북쪽에 배치하였다.


이들은 아르헨티나 전폭기들을 유인할 디코이[사냥에서 들새나 들짐승을 사정거리 안으로 유인하기 위하여 만든 모형 새]의 역할을 했다.
과연 이날 아르헨티나 해공군 여섯 대의 스카이호크기들이 출격했다. 두 대는 기체 이상으로 돌아가고 네 대가 두 척의 영국 구축함에게 육박했다.


씨 해리어기기들은 네 대를 보았으나 브로드스워드로부터
대공 미사일을 발사할 예정이니 거리를 두라는 경고를 받았다.


이틀 전 엔티롭을 공격했던 링케와 그의 새 편대장이 브로드스워드에
그대로 돌진하여 폭탄을 투하했다.


세 발의 폭탄은 명중하지 않았고 한 발은 선수를 뚫고 다른 쪽 현으로
빠져서 바다에 떨어졌다.


다른 두 대는 코벤트리로 저공 돌진했다.
씨 해리어기들은 이들 스카이호크기를 보았으나 역시 대공 미사일을 발사할테니 거리를 두라는 교신을 받고 그저 지켜만 보았다.


코벤트리는 씨 다트 한발을 발사했으나 명중하지 않았다.
아르헨티나의 마리아노 베라스코 중위가 투하한 세 발의 폭탄이 코벤트리에 명중해서 모두 함체 내부에서 폭발하였다. 코벤트리는 전복되어 기울다가 침몰하였다.


                                    침몰한 영국 4,800톤급의 코벤트리 함


아르헨티나의 스카이호크기는 한 대도 격추되지 않았다. 아르헨티나 해군이 최고 전과를 올린 날이었다.


한편 같은 날 두 대의 슈페르에땅다르기들이 각기 프랑스제
엑소세 미사일을 장착하고 출격했다.


이들은 영국 함대 레이다 망 훨씬 북쪽 으로 날아가서 C-130 허큐리스기를
개조한 급유기에서 연료를 공급받고 남하했다.


아르헨티나 해군은 영국 해리어기들이 모두 포크랜드에서 멀어지면서
급강하해서 레이다에서 사라지는 것을 발견했다. 항모의 위치를 숨기기 위한 저공 비행이었다.


잠적하는 위치는 각기 달랐지만 방향은 한 곳이었다.
아르헨티나 해군은 그 방향을 뒤지면 영국 기동함대의 주력 항공모함을 만날 수가 있을 것이었다.


아르헨티나 해군은 며칠 전 슈페르에땅다르기들을 이 방향으로
출동시켜 보았으나 연료 부족으로 돌아와야 했다.


해군은 급유기를 동원해서 급유를 받고 여유 있게
수색을 해볼 작정이었다.

이 날은 운이 좋았다. 슈페르에땅다르기가 영국 항모에서 발신하는 레이다 전파를 잡은 것이었다.


두 기는 즉시 더 강하하여 단 15미터의 저고도로 레이다 추정
발신 위치로 비행해갔다.


이들의 앞에는 씨 해리어기들이 모두 출동하고 단 몇 기의
초계 엄호만 받고 있는 항모 험즈가 있었다.


                                            영국 항공모함 험스



그 뒤에 산 카르로스 만으로 향하고
있는 화물선 아트란틱 컨베이어호가 있었다.

영국 항모 험즈 주변 네 귀퉁이에는 네 대의 링스 핼기가 
적 함대함 유도탄을 기만하기 위한 위장 비행을 하고 있었다.[영국의 앤드류 왕자가 이 들 조종사들 중의 한명이었다.]


40마일 밖에서 기수를 쳐들고 고도를 높인 슈페르에땅다르기는
짧게 레이다를 작동 시켜서 영국 항모 험스의 위치를 확인했다.


두 슈페르에땅다르기들은 즉시 두 발의 엑소세 미사일을 발사했다.
발사할 때의 거리는 20마일이었다.


험스는 슈페르에땅다르기가 쏘는 전파를 감지하고, 즉시 함의 대공화기들이
최대한 화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급 변침(變針)함과 동시에 날아오는 엑소세를 기만하기 위해서 채프[다량의 은박지]를 발사했다.


엑소세 미사일 한 발은 함에 미치기 전에 바다에 추락하였다.
한 발은 험즈를 향하여 계속 날아왔으나 함의 상공을 통과해버렸다.


그러나 함의 상공을 통과한 엑소세 미사일은 아무런 방비책도 없던
아트란틱 컨베이어 호를 탄두의 작은 레이다로 감지하고 쫓아갔다.


엑소세 미사일은 선체의 측면을 부수고 선내에 들어가서 폭발했다.
선내에는 영국 공군의 대형 헬리콥터 C-47 치누크 네 대와 각종 장비와 보급품 그리고 대량의 연료가 있었다.


치누크 한 대만이 이륙하고 있어서 다행히 살아남았다.
대형 헬기인 치누크들은 상륙한 영국군의 포트스탠리 점령 작전을 위해서 꼭 필요한 장비들이었다. 아트란틱 컨베이어 호는 며칠간 불에 타다가 침몰하였다.


포트스탠리의 비행장에 있는 아르헨티나 군의 레이다는
전쟁기간 내내 영국군에게 상당한 괴로움을 주었었다. 포트스탠리 비행장은 벌칸 폭격기의 장거리 폭격과 씨 해리어기들의 연다른 공격,그리고 영국 해군 함의 포격에도 그 저항을 멈추지를 않았다.


레이다는 영국 전투기들의 상황을 모니터하고 아르헨티나 본토에 연락해서
공습을 기획하게 하였다.


또 포트스탠리 공항은 아르헨티나 군에게 젖줄과도 같았다.
포크랜드의 아르헨티나 군에게는 밤마다 본토에서 저공비행으로 날아오는 C-130 허큐리스 수송기가 군수품과 무기 그리고 차량과연료들을 보급했다.


이 공항에는 영국 전투기들을 요격 할 제트기도 없었지만 대공 방어망은 여전히 튼튼했다.
비행장은 프랑스와 독일이 합작 생산한 로랑 대공 미사일과 영국제 타이거캣 미사일에 의해서 방어되고 있었고 여기에 스위스제 35mm 외리콘 쌍열 대공포가 이를 보조 하고 있었다.


영국 해군은 밤에도 해리어기를 출격시키는 것이 너무 과중한 임
무였었고 해리어기가 장비한 블루 폭스 레이다는 저공으로 날아오는 허큐리스 수송기를 발견할 룩 다운[look down]능력이 거의 없었다.


※ 영국 해군기에게 격추당한 유일한 허큐리스기는 야간 보급 비행 때 당한 것이 아니라 6월 1일 주간에
  
영국 해군 함대를 정찰하러 섬의 동북 쪽으로 장거리 초계에 나섰다가 씨 해리어기에게 격추 당한
   TC -63기였다.

   이 허큐리스기는 아르헨티나 해군이 보유한 단 한 대의 록히드
P-2V 넵춘기가 부품 부족으로 비행을
   못하게 되자 대신 초계에
나섰다가 격추 된 것이다.


                                            포트 스탠리 공항



포트스탠리 공항의 레이다를 무력화시켜야 할 필요를 절감한
아센션 섬의 영국 공군에게는 미국에서 공급받은 레이다 기지 공격용 슈라이크 미사일이 있었다.


슈라이크 미사일은 레이다가 쏘는 전파를 쫓아가서 파괴하는
레이다 파괴 전용 미사일로서 월남전에서 큰 활약을 하였다.


포트스탠리 공항의 레이다 파괴에는 이 미사일이 필수적이었다.
포크랜드 전쟁에서 출동한 다섯 대의 벌칸기 중 두 대에 이 미사일이 장비되어 있었다.


5월 30일
벌칸기의 첫 출동에 포트스탠리 공항의 레이다가 파괴되었지만 단 하룻 만에 다시 활동을 개시하였다.


6월 2일
벌칸기는 다시 장거리를 출격하였다. 한번 당한 일이 있던 스탠리 공항의 레이다는 침묵을 지켰다. 벌칸은 40분이나 공항 상공을 배회했으나 레이다는 작동되지 않았다.


조종사 닐 맥도걸은 포트스탠리 공항 폭격시 기지를 발휘하였다.


그는 밤 하늘에 벌칸기 4발 엔진의 요란한 폭음을 뿌리며 공항에 저공으로 접근하였다.


유혹을 참지 못한 대공 포대의 레이다가 작동되었다. 맥도걸은 즉시 슈라이크 미사일을 발사해서 대공 포대 한 곳을 파괴하였다.


그러나 귀환 길에 벌칸기의 급유 봉이 파괴되어 주유를 받기가
불가능해지자 그는 브라질로 기수를 틀어 리오데자네이로에 공항에 불시착했다.


그는 일주일간 억류되었다가 석방되었다.

비밀 무기인 슈라이크 미사일은 브라질 당국에 압류되었다.


             영국 폭격기의 슈라이크 미사일에 명중 된 아르헨티나 군의 미제 웨스팅하우스 레이다


5월 30일 아르헨티나 해군은 단 한 발의 엑소세 미사일만 보유하고 있었다.
이 금쪽 같은 엑소세 미사일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한 작전이 꾸려졌다.


두 대의 슈페르에땅다르기 중 한 대는 한 발만 남은
엑소세 미사일을 장비하고 한 대는 그냥 출격했다.


이들의 목표는 영국 항모의 격침이었다.
슈페르에땅다르기에 동행하는 스카이호크기가 있었다. 모두 네 대의 아르헨티나 공군 A-4C기들이었다.


해상 비행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은 슈페르에땅다르기를 따르다가
엑소세 미사일이 발사되면 엑소세 미사일을 따라서 영국 항모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5월 30일
이 별스런 편대는 아르헨티나 남부 리오그란데 기지를 출발했다. 두 대의 KC-130기들이 중간에서 연료를 보충해주고 돌아갔다.


아르헨티나 해공군 혼성 편대는 적 항모가 있다고 생각한
포크랜드 동남방을 향하여 190 마일을 날아갔다.


경계 거리에 들어서자 이들은 짙은 구름과 마침 내리는 장대비를
뚫고 강하하여 15피트 상공에서 비보라 치는 해면에 착 붙어서 비행을 계속했다.


영국 함대는 잠수함 초계선의 경고로 그들이 멀리서 날아오는 것을
알았으나 이들이 저공으로 내려가자 항적을 잃었다.


조금 뒤 슈페르에땅다르기가 탐색을 위한 레이다를
짧게 가동하자 이를 알아채고 비상 대응에 들어갔다.


슈페르에땅다르기의 조종사는 짧게 가동한
레이다에 나타난 함영(艦影)이 영국 항모 인빈시블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아르헨티나 해군 항공대가 보유한 마지막 엑소세 미사일을 발사했다. 영국 함대에서 24마일 떨어진 지점이었다.


발사 뒤 두 대의 슈페르에땅다르기들은 기수를 돌려
기지로 귀환했다.



                                    엑소세 미사일의 함체 돌입 순간


뒤에서 따라오던 공군의 스카이호크기들은 앞으로 빨리 사라지는
엑소세를 힘겹게 뒤따랐다.


엑소세 미사일이 노린 영국 함정은 항모가 아니라 구축함 HMS 아벤저와 엑스터였다.
엑스터가 덩치가 커서 슈페르에땅다르기 조종사가 레이다 화면만 보고 거대 항모로 오해 했던 것이다.


두 척의 영국 구축함에 네 대의 스카이호크기들이 쇄도했다.
엑스터에서 발사한 씨 다트 대공 미사일이 두 대의 스카이호크기를 격추시켰지만 나머지 두 대는 계속 육박해 들어왔다.


두 대는 각각 두발씩의 500파운드 폭탄을 투하했으나
모두 빗나갔다.


폭탄을 투하한 스카이호크기들은 북방 해역에서 자신들을 기다리는
허큐리스 급유기를 향하여 기수를 돌렸다.


포크랜드의 전쟁도 두 달이 지난 6월이 되자 영국이 공격할 지상 목표도
많이 감소했고 큰 손해를 입고 저항력을 거의 상실한 아르헨티나 공군이나 해군의 위협도 없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포크랜드 섬 내륙으로 진격해간 영국군은 구스그린을 점령하고
더 진출해서 수도 포트스탠리 남쪽 20마일 지점의 피츠로이에 집결하여 최후의 공세를 준비하고 있는 중이었다.


전쟁은 마감 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머피의 법칙이 이 순간에 찾아왔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아르헨티나의 마지막 반격이 준비되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아르헨티나 공군은 솥바닥을 있는대로 긁어서 마지막 일격을
가할 편대를 구성했다.


6월 7일이었다. 시계가 불량한 틈을 타 두 척의 양륙함이 피츠로이 만에 정박해서 병력과 화물들을 양륙시키고 있었다.


6대의 대거기와 8대의 스카이호크기, 그리고 미라주3기 두 대까지
가세한 대 습격대가 구성되어 출격했다.



                                               포크랜드 지도


6대의 대거기는 피츠로이 만에 있는 HMS 프리머스를 공격했다. 네 발의 폭탄이 명중했으나 한발도 폭발하지 않은 불발탄이었다. 5대의 스카이 호크기는 목표에 접근하자 두개 편대로 나누어서 영국 상륙함에 폭탄 투하를 했다.


예상치 못한 공습에 대공포화도 미처 준비가 되지 않았다.
대공포화가 미약한 것을 보고 아르헨티나 스카이호크기들은 고도를 높여 폭탄의 신관이 확실히 작동되도록 하였다.


세 발의 폭탄이 한 척의 트리스트람 양륙함에 명중하여서 모두 폭발하였다.
다른 한 척에도 명중하여서 큰 불이 일어났다.


아르헨티나 스카이호크기들의 마지막 폭격으로 상륙함에서
상륙을 대기하던 병력 50명이 전사하고 57명이 중상을 입었다.




                             전쟁 막판 피츠로이에서 공격당한 상륙함 트리스트람


포크랜드 전쟁 중 단일 폭격으로 입은 최대의 인명피해였다.
피츠로이 만에서 성공적인 폭격을 마치고 아르헨티나 기지로 돌아가던 스카이호크기 편대의 링케는 2차 공격대가 출격했음을 알았다.

링케는 그들과 교신하면서 공격 정보를 주었다.
그들의 공격이 아주 성공적이었으며 목표는 대공 방어망이 약해서 공격은 별로 어렵지 않다고 말했다.


고무된 2차 공격대는 일약 피츠로이로 달려 갔다.
그러나 상륙함들이 공격 받았다는사실을 긴급 연락 받은 영국 기동함대가 두 대의 씨 해리어기를 급파했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었다.


2차 공격대 4대가 불타는 상륙함의 연기가 하늘로
치솟고 있는 피츠로이 만 상공에 다다랐지만씨 해리어기들에 의해 요격되었다.


이 공중전에서 영국 공군의 데이비드 모간 대위가 사이드와인더 미사일로
두 대의 스카이호크기를 격추시키고 그의 편대기 조종사 데이비드 스미스 대위가 다른 한 대의 스카이 호크기를 역시 미사일로 잡았다.

이 공중전으로 개인 전과에 두 대의 격추 기록을 추가한 모건은 격추기가 4기로 늘어나 포크랜드 전쟁 최고 격추왕이 되었다.


피츠로이만 기습을 끝으로 아르헨티나 공군기의 출격은
더 이상 없었다.


6월 14일 포트스탠리가 영국군에 함락되고 아르헨티나 군이
항복함으로서 두 달 넘게[74일] 진행된 전쟁은 끝이 났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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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크랜드 항공전 -제2편-

이틀 뒤인 5월 4일 아르헨티나의 낡은 P2V 넵츈[미국 록키드사 제조] 초계기는
포트스탠리 항 남쪽 85마일 해상에서 영국 기동 함대를 발견했다.


넵츈은 급상승해서 함대의 전모를 살펴보고 리오그란데
기지에서 대기 중이던 두 대의 슈페르에땅다르기에 필요 정보를 통보했다.


                                         미 록키드 사의 P-2 넵츈기


두 해군 기는 프랑스 제 함대함 엑소세 미사일을 장비하고 있었다.
슈페르에땅다르 기들은 200마일의 거리를 해면 15미터의 저공 비행으로 영국 함대에 접근했다.


목표가 가까워오자 아르헨티나 조종사 조시아는 고도를 40미터로
올리고 짧은 순간 슈페르에땅다르기의 레이다를 작동시켰다. 그는 레이다 화면에 뜬 백색 물체를 확인했다. 영국 구축함 쉐필드 함이었다.


 

                                     화재가 발생한 영국 구축함 쉐필드 함



쉐필드 함에서 20마일 더 멀리에 항모가 있었으나 조종사는 쉐필드의
대공 미사일 망을 통과해서 더 비행하는 모험을 하고 싶지 않았다.


두 기는 바로 앞에 있는 쉐필드에 엑소세 미사일을 발사하고
기수를 
빠르게 돌려 그 곳을 이탈했다. 발사 거리는 12마일이었다.


슈페르에땅다기르 조종사 조시아가 짧은 시간 가동했던 레이다의 전자파는
영국 구축함 쉐필드에게 감지 당했다.


적기가 지척에 출현했음을 안 쉐필드 함의 함교(艦橋)는 당황했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두 기가 발사한 엑소세 미사일 한 발은 날아 가다가 목표를 잃고
바다에 추락했으나 한 발은 12마일의 짧은 거리를 번개같이 날아 쉐필드 함의 함체 측면을 강타했다. 이어서 발생한 화재로 20명이 전사했다. 나중에 중상자 중 5명도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화재가 극심해서 결국 쉐필드 함은 계속 연소하며 표류하다가 10일 뒤에
침몰하고 말았다.


영국 구축함 쉐필드가 아르헨티나 해군의 슈페르에땅다르기에게
격침당하자 영국군은 이들 5기의 육상 기지인 리오그란데 기지를 특공대로 기습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지만 실행되기 전에 취소되었다.


대신 포크랜드 해역으로 출동했던 다섯 척의 영국 해군 잠수함으로하여금
아르헨티나 12마일 영해 밖에서 초계선을 만들어 공격해오는 아르헨티나 전투기들에 대한 조기경보를 하도록 하였다.


구축함 쉐필드가 격침 당하는 날은 영국 해군에게 불운한 날이었다.
포크랜드 서남단에 있는 구스그린이라는 작은 도시 인근의 비행장을 공습 나갔던 항모 험즈의 씨 해리어기도 대공포에 격추되었다.


조종사 닉 테일러 대위는 탈출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쉐필드 함의 피해에 놀란 영국 기동 함대는 섬에서 더 멀리 떨어진 해
역으로
일단 이동했다.


씨 해리어기의 격추가 주는 교훈은 씨 해리어기가 결코 대지 공격에
적합한 기종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씨 해리어기기는 해상 초계와 제공권 확보에만 사용하기로 결정 되었다.
포크랜드의 대지 공격은 곧 수송선에 운반되어 도착할 영국 공군의 해리어기에게 일임하기로 했다.


영국 공군의 육상용 해리어 기[GR.3기]들은 지상 공격을 위한
컴퓨터 시스템과 항법 시스템들을 장비하고 있어서 더 안전하고 더 정확하게 폭격을 가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씨 해리어기를 찾아 온 불운은 계속 되었다.
이틀 뒤 공중 초계 중이던 두기가 항모의 레이다에 나타난 물체를 확인하기 위해서 안개 속으로 사라진 뒤에 영원히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


두 조종사들, 존이튼 존스와 알커티스는 함대 항공대의 가장 긴
비행 시간을 가진 노련한 조종사들이었다.


두 기의 실종으로 두 척 항모를 주축으로 하는 기동 함대는
겨우 18기의 씨 해리어기만 가용하는 불안한 상태가 되었다.


불운은 아르헨티나 공군에게도 닥쳤다.


5월 9일
4전투 비행단 소속 스카이호크기 두 대가 구름 속을 비행하다가 산에 부딪혀 추락했고, 사흘 뒤 영국 함대를 공격하던 스카이호크기 편대 세 대가 영국 함대에서 발사한 씨 울프 대공 미사일에 맞아 격추되었다.


아르헨티나 해공군이 초 저공에서 투하한 영국제 1,000파운드의 폭탄은
잘 폭발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발견한 아르헨티나 조종사들은 적어도 60미터 이상의
은 고도로 상승해서 폭탄을 투하하여야 했다. 이 고도는 영국군의 미사일 명중이 가능한 위험한 고도였다.

아르헨티나 군은 저공에서 왜 폭탄이 작동되지 않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이는 고도가 낮은 위치에서 투하할 경우 폭발로 인해 기체가 손상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특별히 세팅된 신관 때문이었다.[타이머 역할을 하는 폭탄 후미의 프로펠러가 어느 정도 돌아야 신관이 작동했는데 영국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이 비밀로 했던 이 사실을 영국의 BBC가 보도하는 바람에 아르헨티나도 알게 되었다.


아르헨티나는 폭탄에 저공에서도 안전하게 투하가 가능하도록 급조치를
해서 6월 8일부터 이 폭탄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불발탄은 계속 발생했다.

5월 18일 영국 화물선 아틀랜틱 컨베이어가 영국 공군의 해리어기[GR.3]와
해군의 씨 해리어 기 두 종의 전투기와 필요 물품을 아센션 섬으로부터 운반해왔다.



                               아트란틱 컨베이어 함-나중에 엑소세 미사일에 침몰


공군과 해군의 해리어기들은 컨베이어 호의 선상에 두 개의 컨테이너로 임시 가설한 이륙장에서 수직 이륙하여 영국 항모로 이동해왔다. 전쟁 중 파견 된 공군의 해리어기[GR.3]는 총 8대였다. 이들은 두 항모의 전력을 크게 보강시켰다.


5월 하순이 되자 작전의 포커스는 포크랜드 북쪽
산 카르로스 만이라는 곳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이 곳은 영국군이 상륙하기로 예정된 곳이었다.

아르헨티나 해공군은 섬들 사이의 좁은 해협에 위치한 산 카르로스 만을 공격하기 위해서 해협 요소요소에 배치된 영국 호위함들의 대공 화망을 뚫어야 했다. 나중에는 영국 육군의 대공 미사일 부대까지 배치되었다.

영국군은 이곳을‘폭탄 골목’이라 불렀다.
아르헨티나 공군이 이런 위험한 곳에 죽자살자 뛰어들어 수 없는 폭탄 공격을 가했었기 때문이다.


5월 21일 영국은 이 산카르로스 해협의 해변에 상륙 작전을 개시하였다.
총 4천명의 영국군이 이날 산 카르로스 만으로 상륙했다.


원래 이곳이 인적이 드문 곳이고 일기까지 불순해서 아르헨티나 군은
상륙 초반에는 저지를 위한 아무런 작전을 하지 못했다.



                                             포크랜드 전투 상황도 
        산 카르로스 만과 구스 그린,피츠로이만, 포트 스탠리 등 이 글에서 등장하는 지명이 다 보인다.


교두보를 확보하고 각종 장비와 물자를 양륙하기 시작할 무렵 갑자기 날씨가 맑아지면서 시계가 좋아 졌다.


영국군이 상륙을 개시한 것을 안 아르헨티나 공군은
결사적인 파상공격을 해왔다.


첫 공격에 나선 전투기는 6기의 이스라엘제 대거기들이었다.
이들은 남쪽을 경계하는 영국군의 허를 찔러 북쪽 바다에서 부터 기습해왔다.


첫 공격에서 투하한 폭탄은 화물선 안트림 호에 명중하여
선내로 깊이 파고 들어갔다.


그러나 천행으로 폭탄은 불발탄들이었다.
아르헨티나 공군의 미구엘 카레로 대령은 그 때 중위로서 공격에 참여했었는데 후에 이렇게 회상했었다.

“우리는 단지 7,500리터의 연료만 가지고 출격했습니다.
폭탄은 두 발만 적재했지요. 이것만 해도 전투기의 한계 적재량을 오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르헨티나 남부 포크랜드 맞은 편 본토 티에라델푸에고에
있는 리오그란데 기지에서 이륙하였다.


“ 이륙 후 바다 위를 15분간은 무선 항법장치로, 그리고 나머지 15분은 
지상 레이다에 유도되어 비행했었지만 남은 비행은 나침반과 시계에 의지해야 했습니다.“


아르헨티나 공군 소장인 호라시오 미르 곤자레스는 그때 소령으로
공격 편대를 이끌고 있었다.


“우리는 리오그란데 기지에서 이륙해서 포크랜드까지 한 시간 45분정도
비행해서 공격하고 되돌아 왔습니다. 기지 귀환 비행은 단지 45분간의 여유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기지에 착륙할 때 연료 탱크의 연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상륙 첫날 터보 프롭 엔진 두 기가 달린 아르헨티나 토종 공격기
푸카라도 용감하게 함대를 공격했지만 아덴트 함에 격퇴되었다.


                                     아르헨티나 제 쌍발 터보 프롭 공격기 푸카라


이어 전투 초계 중이던 영국 조종사 샤키 와드는 아르헨티나 공군의
후안 톰바 소령이 조종하는 이 토종 공격기를 추격해서 30mm 아덴 기관포로 사격했다.

그러나 톰바 소령은 느리고 둔한 그 쌍발 공격기를 노련하게 조종해서 회피 기동을 했다.


씨 해리어기의 첫 공격에 수평타가 날아갔고, 두 번째 공격은 오른쪽 엔진을 파괴하였고,
세 번째 공격은 왼쪽 엔진을 날려버렸다.
그래도 이 쌍발기는 당분간 비행을 계속하다가 추락했다. 톰바 소령은 탈출해서 생존했다.


그는 나중에 구스그린에서 진격해온 영국군에게 붙들려 포로가 되었다.
그는 영어를 잘해서 이후 영국군 최고의 통역장교로 활동을 하였다.


전 시대적인 이상한 전투기를 조종하여 용감하게 영국 함대를 공격한
그는 영국 함대 장병들에게 영웅으로 인기를 끌었다.


이날 영국 해군 조종사 닐 토마스와 마이크 브리센은 함대에 접근하는
네 대의 스카이호크기를 요격해서 한 기를 확인 격추하고 한 기는 미확인 격추했다.


그렇게 전투기들이 격추되는데도 아르헨티나 전투기들은 계속 날아왔다 .


앞에서 인용했던 편대장 곤자레스 소령은 땅에 닿을 듯한 저공으로
산 카르로스 만 언덕을 넘어갔고, 시야에 영국 상륙함대가 들어왔다.


그는 영국 상륙함 중 13척이 대공 유도 무기 체계를 갖춘 호위함들이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놀랐다.
더 다가가 이들의 대공 화망에 뛰어 드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어쩔 수없이 그는 가장 가까운 호위함에 폭탄 한 발을 던지고
역시 해면을 거의 미끄럼 타듯 비행하며 수많은 수송선들 사이를 빠져 도주하였다.


그러나 함대 접근 중 그의 편대기 한 대가 영국군 씨 해리어기 조종사
롭 프레데릭슨 중령에게 격추 당했다.


뒤이어 나타난 6대의 스카이호크기가 호위함 아르고나트에
두 발의 1,000파운드 폭탄을 투하했다. 그러나 두 발의 폭탄은 함내 깊숙이 뚫고 들어왔지만 폭발하지 않고 처리되었다. 그래도 함의 내부에 상당한 파손을 입혔다.



                                       아르헨티나 해군의 A-4 스카이호크 기


앞서 말한 곤자레스 소령의 편대는 호위함 아덴트 함에 저공으로 육박하여 폭탄을 투하 했는데 그 중 1,000파운드 폭탄 한 발이 명중하였고 두 발은 함 옆 해면에 떨어졌으나 폭발하지 않았다.


약간의 시차를 두고 아르헨티나 공군 5비행단의 스카이호크기들도 상륙 교두보로 
돌격해 들어왔다. 이미 대파된 아덴트 함은 두 발을 더 맞았다.


세 대의 대거기들이 뒤따라와서 구축함 브리리안트 함에
기총소사를 했지만 801편대의 씨 해리어기 조종사 와드와 스티븐 토마스에게 격추당했다.


이어서 나타난 세 대의 아르헨티나 해군 스카이호크기들이 대파된
아덴트 함에 500파운드의 지연 폭탄 두발을 투하했다.


이 공격 뒤에 영국은 아덴트 함을 포기하였고, 그날 늦은 오후에 침몰하였다.


                                             침몰한 아덴트 함


영국군 상륙 작전에 출격하여 마지막 공격을 감행했던 이들 세 대의 스카이호크기들은 무사히 귀환하지 못했다.


초계하던 800항공대의 씨 해리어기들이 기습을 가하고
도주하던 스카이호크기들을 추격해서 세 대 모두 격추시켰다.


땅거미가 질 무렵에야 공격을 멈춘 아르헨티나 해공군은 스카이
이호크기 5대, 대거기 5대, 쌍발 푸카라기 2대를 잃었다.


그 중 9기는 영국 해군의 씨 헤리어기들에게 격추 된 것이고
나머지는 영국 해군과 육군 대공포화에 희생되었다.


한편 이 상륙 작전의 첫날 포크랜드 섬의 지상 표적을 공격하던
영국 공군의 해리어기[GR.3기] 한 대와 헬리콥터 한 대가 아르헨티나 군의 대공포화에 격추되었다.


- 다음회(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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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크랜드의 항공전 - 제 1 편-




포크랜드는 영국령이고 주민들도 영어를 말하는 영국인들이었지만
포크랜드를 말비나스라고 부르던 아르헨티나는 오랜 기간 동안 그 섬의 영유권을 주장해왔다. 


1982년 아르헨티나의 정권을 잡고 있던 군부는 포크랜드를 점령해도
영국이 그 먼 곳까지 군사력을 파견해서 탈환하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말비나스 섬을 접수하기 위한 실력행사에 들어갔다.


아르헨티나 군대는 1982년 4월 2일 포크랜드의 수도
포트스탠리에 상륙하여 이를 점령했다. 주둔 병력이 일개 소대도 되지 못한 영국 해병대는 항복했다.



                                             포크랜드 전쟁 지도
                         포크랜드 제도의 위치와 아센션 섬,그리고 사우스 조지아 섬


비록 노쇠했지만 자존심에 먹칠을 당한 대영제국의 국민들은 격앙했다.

철나비라는 별명을 가진 마가렛 대처 여사는 TV에 나와 대노한 모습으로 포크랜드의 탈환 계획을 공식 선언했다.


영국은 두 척의 항공모함을 중심으로 원정부대를
구성했다.


항모 두 척은 험스[HMS Hermes]와 인빈시블[HMS Invincible]이었다.
구형 인빈시블은 이미 퇴역이 결정되어 고철로 팔리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영국 해군의 항모 인빈시블



그러나 포크랜드가 침공 당하자 두 항모에 즉시 비상이 걸리고, 다음날에는 2개의 해군 씨 해리어기 항공대가 두 항모에 배치되어 출동 준비에
들어갔다.


포크랜드 탈환을 위한 코포레이트 작전이 발동 된 것이다.

※ 영국 해군이 사용하는 씨 해리어기는 공군의 해리어기[GR.3로 통칭]와 외양도 비슷하고 수직 이착륙하는 것도 같았으나 다른 점들이 있었다.


씨 해리어는 소금기 많은 해상 운용을 위해서 주요 기체 부품에
부식 방지 처리가 되어 있었고, 좁은 항모에서 이착륙에 필요한 양호한 시계를 확보하기 위해서 조종석의 캐노피 방풍유리도 전방이 잘 보이도록 더 둥글게 튀어 나와 있었다.


두 항모는 스키 점프대 같은 비행 갑판이 있어서 씨 해리어기는 수직 이륙하는 것 보다 더 많은 폭탄을 적재하고 출격할 수가 있었다.

블루 폭스라 불리는 해군 씨 해리어기의 레이다도 성능이 강력해서 유효 탐지 거리가 더 길었고 공중 뿐만아니라 해상 탐지 능력도 있었다.

씨 해리어기는 아직 신 기종이라서 그 성능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중이라 실전 능력은 미지수였다.


 

                                          영국 해군의 씨 해리어기


그러나 이 전투기는 포크랜드 전쟁에서 서방 세계에서 만든 잡다한 전투기들과 한판 승부를 겨루어 그 능력을 입증했다.

출동 전 해군은 조종사가 부족해서 공군[royal air force]에 부탁하여 두 명의 해리어 조종사를 지원 받았다.


이들은 수송함으로 후속하는 예비 항공대에 배속되어서
전쟁 중반기부터
출격을 시작했다.


씨 해리어기에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미국이 급거 공급한 공대공 미사일 사이드와인더[ Sidewinder-L ]
L형은 해군 조종사들에게 자신감을 주었다.


사이드와인더 L형 신형 유도탄은 아주 예민한 최신형 센서가 있어서
조준기 밖에 있는 항공기도 추적해서 격추 시킬 수 있는 광각(廣角) 발사 능력이 있었다.


한 군사 소식통은 이 미사일이 재래 사이드와인더와 달리
적기의 후방이 아니라 전방에서 발사해도 적기의 기수에서 공기 마찰로 발생한 미세한 열을 감지해서 명중하기 때문에 적기에 대한 정면 발사가 가능하다고 말한 바있다.



                                            사이드와인더 9- 엘 형


영국 해군 주력 함대는 1982년 4월 6일 영국 포트머스 항을 출발했다. 함대는 먼저 남대서양 영국령 아센션 섬에 도착해서 지중해에서 이동한 다른 영국 함대와 만나 포크랜드 탈환 기동 함대를 꾸려 4월 18일 4,000마일 남쪽의 포크랜드 제도로 출발했다. 씨 해리어기가 출격 개시가 가능한 해역 도착 예정은 4월 30일이었다. 포크랜드 공략 기동 함대 사령관은 존 샌디 우드와드 해군 소장이었다.


 

                                     함대 사령관 존 샌디 우드와드 제독


한편, 아르헨티나 해군들도 모두 출동해서 4월 29일 작전 위치에 배치 완료된 상태였다.


아르헨티나 해군도 '5월 25일'함[ARA Veinticinco de Mayo]이라는 영국제 구식 항모를 보유했었고, 해군 항공대는 미 해군기였던 A-4 스카이호크기와 프랑스제 슈페르에땅다르 함재기와 엑소세 대함 미사일로 장비 되어 있었다.



                    아르헨티나 5월 25일함 - 영국 항모 였다가 아르헨티나에 매각 된 것이다.


아르헨티나 공군은 여러 기종의 잡다한 전투기와 공격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해군과 같은 스카이호크기도 있었고 프랑스제 미라주기,
이스라엘에서 미라주5기를 복제 생산한 대거기, 영국제 칸베라 폭격기, 아르헨티나 고유 디자인인 쌍발 터보 프롭기인 푸카라 공격기도 있었다.


아르헨티나 육해군의 전체 보유기는 대서양에서 출동하는 영국 함재기 보다
10배나 더 많았지만, 포크랜드로 출격 가능한 아르헨티나 남부 리오그란데 기지에 전개된 전투기는 36기뿐이었다.


나중에 여러 기가 추가되어, 포크랜드에서 싸운 아르헨티나 전투
기는 50기였다. 영국 기동 함대가 가동한 씨 해리어기는 총 34기였다.

첫 항공전 개시의 포문은 포크랜드 공략 함대가 도착하기 전인
4월 25일, 포크랜드에서 남쪽으로 800 마일이나 떨어진 사우스 조지아 섬에서 열렸다.


영국 해군의 웨섹스 헬리콥터가 사우스 조지아 섬 그리트비켄 항에
정박중인 아르헨티나 잠수함 산타페[산타페는 미 해군 구피급 잠수함]를 폭뢰로서 공격한 것이다.


산타 페는 격침되고 섬을
점령하고 있던 소수의 아르헨티나 군은 영국 코만도 부대에게 항복했다.


영국 코만도 부대는 이미 포크랜드로 향하고 있던 27,000톤급의
보급 선, 타이드스프링호에 승선하고 있던 병력이었고, 이 대형 수송선은 급히 파견한 여러 척의 영국 전투함대와 같이 사우스 조지아 섬을 탈환했었다.


뒤이어 영국 공군이 포크랜드 탈환 작전의 서막을 여는
대 장거리 폭격을 단행했다.


출격한 날은 5월 1일 이었다. 동원한 폭격대는 와딩톤 공군 기지에 소속된 아브로 벌칸 폭격대였다.



            벌칸기는 50년대 냉전 시기에 소련에 핵폭격을 할 목적으로 제작된 4발 델타익 폭격기였다. 
            
25살이나 된 이 낡은 폭격기들은 곧 퇴역 예정이었다. 그러나 먼 남쪽에서 발발한 전쟁은 
            이들 노 폭격기들에게 은퇴 전 마
지막 화려한 실전 활약의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이들 폭격기들은 영국에서 장거리를 날아 먼저 아센션 섬으로 이동했다.



남대서양을 세로로 가로질러 왕복 15,000키로라는 사상
최장의 출격 거리를 기록한 이 첫 도양(渡洋) 폭격에는 두 기의 벌칸기만 출격했으나, 동행한 빅터 급유기는 무려 11기였다.



                            영국 헨드리 페이지 빅터 폭격기를 개조한 급유기도 있다.


첫 출격에서 벌칸기 한대의 엔진 고장으로 급유기 한대는
임무를 포기하고 아센션 섬으로 돌아갔다.


위더 대위의 벌칸기와 10기의 빅터기는 그대로 긴 거리를 직행해서
포크랜드 중심 도시인 포트 스탠리 공항 활주로를 야간 폭격했다.


3만 5천 피트의 고공에서 21발의 폭탄이 투하되었는데 단지 한 발만이
명중하여 활주로에 큰 구멍을 팠을 따름이었다.


이틀 뒤에 똑같이 대군의 급유기를 동행하고 포크랜드를 찾아간
벌칸기 한대는 한 발도 명중시키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초기 벌칸기들의 폭격은 폭격 타격보다 더
중요한 전략적 수확을 거두었다.


아르헨티나 공군은 단 한 개의 구멍을 파기 위에서 15,000킬로를
날아 오는 이 미치광이들이 비행거리가 휠씬 짧은 북쪽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인들 안 찾아오겠느냐는 불안에 다수의 전투기[미라주기]들을 수도 주변에 배치해서 포크랜드 공격 항공력을 그만큼 약화시켰다.


5월 1일 상륙이 임박했다고 생각한 아르헨티나 공군은
무려 36기의 전폭기를 출격시켰다.


작전 해역에 도착한 항모 인빈시블에서 이륙하여 공중 초계[COMBAT
AIR PATROL] 비행을 하던 씨 해리어기들은 함대 레이다의 유도로 서쪽에 나타난 비행 물체들과 조우했다.


아르헨티나 공군의 미라주기 6대였다.
3만 5천 피트를 나는 미라주기들은 영국 해군의 해리어기들이 단연 강점을 가진 저공으로 하강하는 것을 주저하였고, 영국 공군은 고공 전투 능력이 뛰어난 미라주3기와 높은 고도에서 격돌하는 것을 원치 않아 두 적들은 상과 하에서 서로 흘겨만 보고 있었다.


하지만 선수는 미라주기가 먼저 쳤다.
연료 부족에 조바심이 난 미라주기가 급강하해서 해리어기들과 얽혀 들었다. 영국 해군의 바튼 대위가 발사한 사이드 와인더가 미라주기의 조종석 후부를 강타해서 조종석 전체를 날려 버렸다.


동료 조종사 스티븐 토마스가 발사한 미사일은 구름 속으로 피신하는
다른 미라주기를 파손시켰다.


피격 된 미라주기는 본토 귀환이 불가능하자 기수를 포트스탠리 공항으로
돌려 비상착륙하고자했으나 공항에 배치된 아르헨티나 대공 포대의 사격에 격추되고
말았다.


같이 출격한 이스라엘제 미라주기인 대거기 3대가 함대의 일부 함정에
폭탄을 투하하고 30mm 기관포를 발사하기도 했으나 투하한 폭탄들은 모두 빗나갔다.


                                      아르헨티나 공군의 대거기
           이스라엘이 프랑스 미라주5형기를
국산화한 NESHER기가 원형으로 아르헨티나에 수입되면서
          
대거기로 이름을 개명했다.


두 대의 대거기가 역시 이스라엘제인 열 추적 샤르피르 미사일을
토니 펜폴드와 마틴 헤일 대위가 조종하는 씨 해리어기에 발사했으나 거리가 너무 멀어 명중하지 못했다.


오히려 대거기 한 대가 펜폴드 대위의 미사일에 격추 당하자 모두 기수를 돌려
본토로 도주했다.


포크랜드로 출격했던 아르헨티나 공군의 영국제 캔버러 폭격기
한 대도 이날 격추 당했다.



                                          영국 쌍발 공격기 캔버러


공군이 대거 출격한 같은 날, 아르헨티나 항모 '5월 25일’함도 200마일 북쪽에서 영국 함대를 공격하고자 폭탄을 장비한 A-4 스카이호크기를 출격시키려 했으나 낡은 항모의 카타펄트는 폭탄을 만재해서 무거워진 스카이호크기를 발진시키지 못 했다.


다음날인 5월 2일 아르헨티나의 순양함 벨그라노함이 영국
핵 잠수함 콘쿼러함에게 격침당하자‘5월 25일’함은 겁을 먹고 항구로 도피해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다시는 바다로 나오지 않았다.


전쟁 개시 며칠 만에 상황은 아르헨티나 측에 별로 안 좋은 쪽으로
정리가 되었다.


미라주기들은 모두 벌칸 폭격기의 내습을 경계하고자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올라갔고 대거기와 스카이호크기, 슈페르에땅다르기들만이
영국 기동부대의 씨 해리어기들과 맞서는 형국이 되었다.


해군기인 스카이호크기와 슈페르에땅다르기는
공중 재급유 능력을 갖추고 있었으나, 대거기는 그 기능이 없어서 리오그란데 기지에서 포크랜드까지 간신히 왕복 비행 할 능력밖에 없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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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음향 어뢰 해전-인도·파키스탄 전쟁





천암함 사건 1주년이 되어 간다.

북한은 이 천인공노할 만행에 음향 어뢰를 사용한 사실이 밝혀졌다. 
[음향 어뢰는 배의 엔진 소음 등을 따라 추적하는 수중의 유도탄형 어뢰를 말한다.]

 

                    천암함 - 비열한 만행이 발생한지 일년이 되어간다. 2010년 3월 26일 침몰.


세계 해전사에서 음향 어뢰가 사용된 사례가 딱 한 번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의 이야기다.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때 파키스탄 해군
잠수함이 음향 어뢰로 인도 프리게이트함 한 척을 격침한 해전을 소개한다.


원래 인도는 영국 통치 때까지 파키스탄, 인도, 방글라데시로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국가
였는데 독립되면서 종교에 따라 인도[힌두교]와 파키스탄[이슬람교]로 분리 되었다.


이슬람교는 공교롭게도 인도 대륙의 동쪽과 서쪽 양쪽에
퍼져있어, 파키스탄은 국토가 동 파키스탄과 서 파키스탄으로 분리된 상태로 독립하였다.


그러나 동서로 분리된 파키스탄은
여러 갈등이 발생했는데, 결국은 동 파키스탄의 독립선언과 서 파키스탄 주민간 무력 충돌의 정치 갈등으로 비화했다.


이에 인도가 개입하면서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하였다.
결과 파키스탄이 패배하고 동 파키스탄은 독립하여 오늘날의 방글라데시가 되었다.


1971년 12월 3일부터 12월 16일까지 발생했던 인도·파키스탄 전쟁
동안 양국 사이에 발생했던 해전은 상당한 규모였다.


12월 4일 야간에 인도 해군이 파키스탄 해군에 선공을 가했다.
인도 함대가 파키스탄의 카라치 항을 기습하여 구축함 한 척을 격침시키고 기뢰 제거함 두 척을 대파하고 육상 정유 시설을 파괴하였다. 파키스탄 해군의 전사자만도 720명이나 발생하였다.


동 파키스탄의 벵갈만에서도 인도 해군은 항공모함까지 동원하여
파키스탄 해군을 완전히 봉쇄하고 제해권을 확보했다.


파키스탄 해군은 전쟁 전, 정세가 험악해지고 전운이 감돌자
잠수함 한 척에 기뢰를 적재하고인도 해역으로 출동시켰었다.


은밀한 임무에 동원된 파키스탄 잠수함은 1944년 미국에서
진수한 텐크급 디아블로 함이었는데,


                                  카지 함, 1570톤 - 파키스탄 최초의 잠수함.


1963년 파키스탄에 양도 되어 그 이름이‘카지’함으로 바뀌었다.
1967 파키스탄은 이 잠수함을 터키로 보내 기뢰 설치 시설을 추가하는 개수를 했다.


서 파키스탄을 떠난 카지는 3,000마일이나 항해해서 벵갈만으로 들어왔다.

카지는 벵갈만 인도 동부에 위치한 비샤카파트남 항으로 출입하는 항로에 기뢰를 설치하라는 명을 받았었다. 이 항구는 인도의 해군 기지가 있는 곳이다


그러나 이 잠수함은 기뢰를 부설하는 작업을 시작한지 몇 분 만에
초계하던 인도 해군 구축함 라쥐푸트 함에게 폭뢰 공격을 받고 격침당했다. 자파르 무하마드 칸 함장 이하 승무원 92명 전원이 사망했다.


인도 해군의 발표에 의하면 이 잠수함이 동 파키스탄 치타공의
파키스탄 해군 기지와 교신하는 무선을 감청하고 이에 대응 출동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파키스탄은 잠수함 내부의 적재 기뢰 폭발로 침몰했다고 주장한다.
이 설은 중립적인 여러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있다.
[인도는 카지 함을 인양해서 격침 원인을 조사해보자는 몇 외국 단체의 요청을 거절하고 있다.]


파키스탄 해군은 잇따른 패배 소식에 맥을 추지 못하며
절망감을 참아야 했다.


                        한고르 함 -프랑스 다프네이급 잠수함, 860톤. 장보고 함보다 작다.



그러나 파키스탄 해군의 최신 잠수함 한고르함
인도 해군의 프리게이트함 쿠크리를 뇌격해서 격침시키는 개가를 거두어 파키스탄 해군의 우울한 사기를 일신했다.


해전은 12월 8일 밤에 발생했다.
파키스탄 해군의 최신예함이었던 한고르함은 1968년 프랑스에서 건조한 프랑스 다프네이급 잠수함이다.


전쟁 1년 전인 1970년에 파키스탄에 인도되었었다.
정세가 험해지자 한고르함은 1971년 11월 21일 파키스탄의 기지에서 출항했다. 주어진 임무는 인도 대륙의 카티와 해안 초계였다.


1971년 12월 2일 한고르는 봄베이 항[뭄바이 항] 앞 바다에
잠복 감시하고 있다가 인도 서부 함대의 다수 함정들이 출동하는 것을 탐지했다.


이 함대에 인도의 대형 순양함 미소르도 있었다.


인도 함대는 앞서 소개한 파키스탄의 카라치 항을 급습할
목적으로 출동하고 있는 중이었다.


함대는 수중에 잠복한 한고르함의 전방을 아주 근접해서
지나갔다.


한고르함은 무선 폐쇄를 하고 죽은 듯이 엎드려
있었다. 인도 함대가 통과하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 부상한 한고르함은 인도의 대규모 함대가 출동했다는 정보를 카라치에 보고했다.


보고는 곧 닥쳐올 인도 해군의 파키스탄 카라치 항 기습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였지만 이 중요한 메시지 발신은 인도 해군 통신 정보대에게 감청 당하고 말았다.


무선이 파키스탄 해군의 잠수함에서 발신된 것임을
파악한 인도 해군은 다음날인 12월 3일 서부함대 14전단 소속 프리게이트함 두 척을 인근 해역으로 급파했다.


두 프리게이트함들은 쿠크리키르판이었다.
[쿠타르라는 함도 출동했다는 설도 있다.]
모두 인도 고유의 칼 이름을 딴 함명(艦名)을 가지고 있다.


미국이나 일본같이 대잠 항공 초계 능력이 뛰어난 나라라면
대잠기를 즉각 파견했겠지만 인도 해군은 이런 항공 초계 능력이 턱없이 부족했었다,


출동한 두 척의 군함은 며칠간 전파 발신 주변 해역을 수색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했다.


한편 12월 9일, 한고르함의 전파 탐색기에는 인도 해군 함정들이 발신하는
무선 신호로 추측되는 여러 개의 전파가 감지되었다.


한고르함의 능동 소나 분석 결과, 무선 발신체 두 개는 확실히 인도 해군 전투함에서 발신하는 것임을 알수 있었다.


바로 한고르함을 잡기 위해서 출동했던 쿠크리와 키르판이
서로 주고 받는 무선이었다.


한고르함은 발신 추정 해역을 탐색하기 위해서 북쪽으로 항로를 잡았다.
한고르함의 함장 타스님 중령은 이를 추적해서 발견하면 격침하기로 결심했다.


이 때 목표와의 거리는 6-8마일이었다.
그러나 느리게 수중 항해를 하는 한고르함의 속도보다 적 전투함의 수상 항해 속도가 훨씬 더  빨랐다.


한고르함은 뒤로 처져서 빠르게 앞으로 빠지는 두 함들과 
더 이상 접촉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고르함은 적의 항로를 예상하고 앞질러가서
잠복할 위치로 직행하였다. 저녁 7시경이었다.


1971년 12월 9일 자정 무렵 적함에 접근한 한고르함은
깊숙이 잠항하였다. 이제부터 접근과 뇌격은 오직 소나만을 이용한 맹목 항해에 의해서 행해 질 것이었다.


두 척의 인도 해군함들이 점점 한고르함에 가까워 옴을 탐지 할 수있었다.
사거리 내에 두 척이 들어오자 40미터의 해저에 있던 한고르함은 선두의 키르판에게 음향 어뢰 한 발을 발사했다.


하지만 손에 땀을 쥐고 기다리던 한고르함 소나 병에게
아무런 폭발음도 들려오지 않았다. 어뢰가 목표를 명중시키지 못했던 것이었다.


                          쿠크리는 영국이 건조한 블랙우드급 프리게이트 함.-1,456톤
                                 
사진은 쿠크리와 같은 급의 익스마우스 함.
 

어뢰가 명중하지 못했지만 키르판은 어뢰가 스쳐 지나갔음을 알아챘다.


키르판의 함장은 자신의 함이 적 잠수함의 공격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자마자 함수를 돌려 최대 속도로 도주해 버렸다.


키르판은 대피했지만 그 남쪽에 있던 쿠크리는 도주하지 않고
반대로 어뢰가 달려 온 방향을 파악하고 함수를 한고르함을 향하여 역시 최대 전투 속도로 정면 육박해왔다.


한고르함은 전속력으로 덤비는 쿠크리로 함수를 전환하고
응전에 나섰다.


발사 제원을 입력하고 조준한 한고르함은 두 번째의 어뢰를 발사했다.
한고르함 소나 병의 이어폰에 음향 어뢰가 달리는 소음과 이어서 엄청난 폭발음이 잡혔다. 쿠크리에게 명중한 것이다.


폭발음이 들리기 직전 힌고르함의 소나 병은 쿠크리의
마드라 나태뮤라 함장이 즉시 어뢰 회피 기동을 명령하는 것을 감지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늦었다.


간발의 차이로 음향 어뢰는 쿠크리의 엔진 소리를 쫓아와 폭발했다.
한고르함은 전투후 부상해서 생존자를 찾았지만 아무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음향 어뢰에 명중한 쿠크리는 단 2분 만에침몰하고 18명의 장교를 포함한 176명의 전 승무원이 침몰하는 함과 함께 운명을 같이했다. 인도 구지라트 주 디우 해안 앞 바다에서의 해전이었다.


                                      뇌격 순간의 긴장한 한고르함 내부 그림.
                  중앙에 서 있는 사람이 타스님 함장.
나중에 쓰리 스타 제독으로 진급했다.


일설에 의하면 함장이 구명 조끼를 부하 장교에게 건네주고 침몰하는 함과 함께 운명을 같이 했다고 하는데 이 말은 신빙성이 없다.[생존자가 한 명도 없었는데 누가 목격하고 이런 소리를 했는지 궁금하다.]

한고르함의 첫 뇌격에 놀라서 도주하던 키르판은 동료함이 침몰
되는 것을 보고 크게 분격해서 다시 되돌아와 급하게 폭뢰 공격을 가했다.


키르판은 이 폭뢰 공격에 한고르함이 격침되던가 또는 최소한 위협을 느껴
철수하기를 기대했지만, 한고르함은 피하지 않고 기회를 엿보다가 폭뢰를 뿌리는 키르판의 함미에 음향 어뢰를 한 발 더 쏘았다.


한고르함이 발사한 세 번째 음향 어뢰였다.


키르판은 한고르함이 어뢰를 발사하자마자 이를 발견하고 빠른
회피 기동과 함께 다시 최고 속력으로 도주하였다.


한고르함도 함수를 서쪽으로 돌리고 더 깊은 바다 속으로 잠항해서 다시
있을지 모르는 키르판의 역습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키르판은 그대로 철수하고 말았다.


한고르함은 나흘간 그 해역을 어슬렁거리며 추가 먹잇감을 찾았으나
인도 해군은 잠수함 출몰 해역으로 다시 출동하지 않았다. 한고르함은 12월 13일 서 파키스탄 해군기지로 귀항하였다.


인도·파키스탄 전쟁은 12월 16일 인도의 승리로 종식되었고
동 파키스탄에서는 라만 수상을 수반으로한 방글라데시 정부가 수립되어 방글라데시 국의 탄생을 선포하였다.


한고르함은 파키스탄 해군에서 30년 이상을 활동하다가
2006년에 퇴역하였다.


천안함 사건을 바탕으로 음향 어뢰가 사용되었던
인도 해군과 파키스탄 해군의 해전 상황을 살펴보면 두 가지의 특성에 눈길이 간다.


첫째는 음향 어뢰의 명중률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사실이다.
세 발 쏘아서 한 발이 명중했는데 유도 무기의 명중률로는 아무래도 시원치 않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어뢰가 사용된 해전은
두 번 있었다.


첫 번이 인도·파키스탄 전쟁이고 다음이 1982년의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전쟁이다.


포클랜드 전쟁에서 1982년 5월 2일 영국 핵잠수함 콘쿼러함이
아르헨티나 순양함 벨그라노함을 격침했다.


                                    영국 핵잠 콘쿼러 함-4,000톤급 대형함.


영국 잠수함은 유도 장치가 없는 재래식 어뢰
세 발을 발사해서 그중 두 발을 명중시켰다.


함장 크리스 레포드 브라운 중령은 장비했던 음향 어뢰를
사용하지 않았던 이유로 그 신뢰성에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었다.


40년의 세월이 지나 정밀 공업이 별로 발달하지도 못한 북한의 음향 어뢰가 천암함을 명중했는데, 그 간 세계적으로 음향 어뢰 제작 기술이 크게 발전하였고 북한도
이 방면에 기술을 상당히 축적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하다.

두 번째는 통신 보안의 문제이다. 인도·파키스탄 해전이 의미하는 또 다른 것은 전쟁 중의 해군 함정들의 통신 보안 문제이다.


                           격침되는 아르헨티나 순양함 벨그라노[9,575톤].323명 사망 


앞에서 소개했다시피 양쪽 해군은 상대방 함정의
무선을 감청해서 정보를 얻고 이에 대응하는 작전을 전개했었다.


인도·파키스탄의 잠수함 해전사가 주는 또다른 중요한 교훈은 해전에서
무선 통신 보안의 중요성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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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전 비사 - 
전차에 발사한 샘 대공 미사일.



적 항공기 격추 목적으로 개발한 대공 미사일을
전차에 발사했던 중동 전쟁의 해프닝을 소개한다.

1973년 10월 욤 키프르 전쟁 후반, 선제 공격을 했던 이집트가 이스라엘의 거센 반격으로 오히려 절절매며 패주하던 수에즈 운하 전투 때의 이야기다.


이야기 시작에 앞서, 이집트 군의 대공 미사일에 대해서 소개한다. 이집트 군이 사용하던
소련제 대공 유도탄 SA -2[소련명 S-75 드비나 : 나토 코드명 가이드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