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ust 의 軍史世界'에 해당되는 글 141건

  1. 2011.06.09 100년 전 그 자리로 돌아온 군함 '바랴그'를 보며..[下]
  2. 2011.06.07 100년 전 그 자리로 돌아온 군함 '바랴그'를 보며.. [上]
  3. 2011.05.31 "우리의 비행기는 우리의 힘으로 구입하자" - 건국기
  4. 2011.05.31 야구를 모르면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5. 2011.05.23 영광의 국군 기갑사(機甲史) [ 끝 ]
  6. 2011.05.19 영광의 국군 기갑사(機甲史) [6]
  7. 2011.05.18 영광의 국군 기갑사(機甲史) [ 5 ]
  8. 2011.05.13 영광의 국군 기갑사(機甲史) [4]
  9. 2011.05.12 영광의 국군 기갑사(機甲史) [3]
  10. 2011.05.11 영광의 국군 기갑사(機甲史) [ 2 ]
  11. 2011.05.06 영광의 국군 기갑사(機甲史) [ 1 ]
  12. 2011.04.27 지도에는 없는 철도 노선
  13. 2011.04.25 냉전과 화해의 기억을 안고 흐르는 독일 엘베강[ 下 ]
  14. 2011.04.21 적의 전차를 개조해서 장갑차로 활용하다.. (2)
  15. 2011.04.15 냉전과 화해의 기억을 안고 흐르는 독일 엘베강[ 上 ]
  16. 2011.04.12 주인이 바뀐 소련제 전차
  17. 2011.04.11 아군과 적군 모두가 두려워한 요격기
  18. 2011.04.06 영화속 람보의 허구와 진실
  19. 2011.04.04 누가 공병대를 삽질(?)부대라 하는가? (2)
  20. 2011.03.25 故민평기 상사의 혼이 담긴 3.26기관총
  21. 2011.03.24 아픔을 망각하고 앞으로 나갈 수는 없다
  22. 2011.03.18 핵 만능 시대의 자화상[下]-너무나 무서웠던 무지(無知)
  23. 2011.03.17 핵 만능 시대의 자화상[上] -무식한 혹은 용감한?
  24. 2011.03.14 세계 최강의 용병부대는 어디일까?
  25. 2011.03.09 침략자의 마지막 도박, 복제 전투기[下]
  26. 2011.03.08 침략자의 마지막 도박, 복제 전투기[上]
  27. 2011.03.07 105mm 곡사포 이야기[下] (1)
  28. 2011.03.03 105mm 곡사포 이야기 [上]
  29. 2011.02.22 전차이야기 - 고양이 전차 " 탱켙(Tankette) "
  30. 2011.02.14 전차 이야기-지상전의 왕자!! 코끼리에서 전차까지..







인연 혹은 악연 [下]
 
 
집중 공격을 받아 인천 앞바다에서 격침당한 바랴그를 조사한 일본은 함의 상태가 의외로 양호하다고 판단하여 이를 인양하여 수리하기로 결정하였다. 전리품이 되어 일본으로 끌려가 수리를 받은 바랴그는 오노(小野)로 이름이 바뀌어 일본 해군의 훈련선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약 10년 후 1차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에 바랴그는 돈을 받고 러시아에 되팔려가는 운명이 되었는데, 이것은 사실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다.

 

                                      전성기 당시의 바랴그
 

러시아가 이배에 대해 가지는 애착이 남달랐다고 할 지는 모르겠으나 격침당한 것으로도 모자라 적에게 노획된 굴욕의 함을 돈을 주고 되샀던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 애매모호하기 때문이다. 1차대전 당시 러시아와 일본 모두 연합국이었고 러시아의 전황이 워낙 다급하였기 때문에 벌어진 작은 에피소드로 치부할 수도 있겠으나 이처럼 바랴그의 운명은 기구하였다. 하지만 바랴그의 이후 생애도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

 

                                   인천 앞바다에 침몰한 바랴그
 

러시아 함대에 배속 된 바랴그는 발트해 인근에서 벌어진 해전에 투입되었으나 독일과의 전투 중 피격을 당하면서 수리를 위해 1917년 영국의 리버풀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 러시아혁명이 발발하고 그 와중에 수리비를 내지 못할 처지가 되자 영국 해군이 바랴그를 나포해 버렸다. 하지만 선령이 너무 오래되어 사용가치가 없자 전후인 1923년 독일에 고철로 판매되었고 결국 해체되어 용광로 속으로 사라졌다.

 

                                  영국에 있는 바랴그 기념비
 

역사의 격랑 속에 초라하게 생을 마감하였지만 한때 위기의 순간에도 불굴의 용기를 뽐냈던 바랴그라는 이름에 대한 향수를 잊을 수 없었던 러시아인들은 1989년 소련 최초의 본격 항공모함이라 할 수 있는 쿠즈네초프(Kuznetsov) 급 2번 함의 이름을 바랴그로 명명하고 건조를 진행하였다. 30여기의 고성능 Su-33 함재기를 운용 할 수 있는 쿠즈네초프 급 항모는 현재 미국의 항모를 제외 한다면 최강으로 손색없는 야심작이다.

 

                              건조중단 당시의 항공모함 바랴그
 

그런데 1991년 소련이 붕괴하자 막대한 건조비용을 감당 할 수 없었던 러시아는 70%의 공정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제작을 포기하였고 선명 또한 동시에 취소되었다. 그 후 여러 차례의 용도변경이나 매각협상 끝에 비운의 항공모함은 2001년 중국에 팔렸는데 지구 반 바퀴를 돌아 도착한 곳이 공교롭게도 100년 전 요동반도의 지배자로 군림하던 제정러시아 해군의 모항이었던 따롄이었다.  즉 100여 년 전 바랴그가 활동하던 바로 그 자리였다.

 

                          따롄의 조선소에서 개조작업 중인 바랴그
 

건조가 취소되면서 이름이 공중에 떠버린 바랴그는 한동안 사라진 이름이 되었다. 그러다가 구 소련의 해체 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흑해함대 분리에 관한 협정을 맺으면서 최강의 공격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되는 슬라바 급 순양함들 중 하나인 체르포나(Chervona)를 러시아 해군이 인계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이름이 바랴그로 명명되었다. 최강의 함에 또다시 바랴그라는 이름을 승계한 것을 보면 러시아 해군이 바랴그라는 함명에 대해 갖는 애정이 유별난 것 같다.
 


                             인천항을 방문한 미사일 순양함 바랴그
 

지난 2004년 2월 바랴그 함을 포함한 러시아 함대가 인천항을 방문하였던 적이 있었는데 러일전쟁 100주년을 맞아 당시 인천 앞바다에서 산화한 바랴그와 까례에츠의 전몰장병들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이 때문에 본의 아니게 바랴그는 우리에게도 상당히 인연이 있는 이름이 되었다. 하지만 힘이 없어 우리 땅과 바다가 외세의 각축장이 되었던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는 유쾌한 기억이라 할 수는 없다.

 

                  2011년 2월에 속초함에서 벌어진 러시아 해군 추모행사
 

알아 본 것처럼 러시아 해군에게 바랴그는 상당히 곡절이 많았던 함명 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우리 역사에도 자국을 남겼고 중국과 일본에게도 의미 있는 기록을 남겼다. 더구나 한 때 바랴그라는 이름으로 건조되던 항공모함이 중국의 따롄으로 가서 중국 최초의 항공모함으로 취역할 준비를 마쳤다는 것도 현재 우리의 안보환경과 연관 지어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부분이다. 100년 전의 모습이 오버랩 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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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혹은 악연 [ 上 ]
 

 

 
바다에서 고구려 본토로 향하는 길목을 가장 바깥에서 방어하던 비사성(卑沙城)이 위치한 따롄(大連)은 현제 중국의 요동(遼東)반도 끝에 위치한 항구 도시다. 이곳을 봉쇄하거나 점령하면 자연스럽게 발해만(渤海湾)을 장악하고 더불어 중국의 심장부인 베이징을 향해서 비수를 세울 수 있으므로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라 할 수 있다.
 

                                          지리적 요충지인 따롄
 

현재 한국 기업의 대 중국 투자가 가장 많이 이루어진 곳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산둥(山東)반도인데 반하여 일본은 따롄을 중심으로 하는 요동반도 지역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그 이유는 과거의 향수를 못 잊어 하기 때문인데, 옛 이름이 뤼순(旅順)인 이 도시에서 안중근 의사가 수감되고 순국하였던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따롄은 가장 먼저 일본이 지배하였던 중국의 영토였다.

 

                                          최근 따롄의 모습
 

1895년에 있었던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이곳을 지배할 수 있었으나 3국 간섭으로 러시아에게 권리를 빼앗겼다. 이후 절치부심 끝에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이곳을 점령하여 중국과 만주로 향하는 요충지로 발전시켰다. 이런 이유로 지금도 따롄의 구도심은 군데군데 러시아, 일본 식 건물들이 상존하고 있어 그 고단했던 역사를 얼추 엿볼 수 있다.

 

                              20세기 초에 촬영된 뤼순항의 모습
 

최근 이 도시에 있는 조선소에서 수리 중인 한 선박에 관한 소식이 외신을 통해 타전되었다. 지난 2001년 러시아 국내사정으로 건조가 중단된 군함이 해상 호텔 용도로 중국에 팔려왔는데, 그동안 개조작업을 거쳐 중국 최초의 항공모함으로 조만간 취역할 예정이고 함명이 스랑(施琅)으로 정해졌다는 내용이었다. 중국 정부의 공식 발표는 아니었지만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내용이어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었다.

 

                         조만간 취역할 예정으로 보도된 중국의 항공모함
 

그런데 구 소련에서 70%의 공정 상태에서 건조를 중단하였을 당시에 붙여졌던 이 함의 이름이 바랴그(Varyag-Viking이란 뜻)였는데, 현재 이 함명은 슬라바(Slava)급 순양함 3번 함의 이름으로 승계시켰을 만큼 러시아 해군에게는 상당히 의미 있는 이름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바랴그가 따롄은 물론 이곳과 뱃길이 연결된 인천과도 상당히 인연이 많다는 점이다.
 

                            러시아의 슬라바 급 미사일 순양함 바랴그
 

한반도가 강대국의 전쟁터가 되려는 불길한 조짐이 보이자 대한제국은 1904년 1월 21일 국외중립을 선언하였다. 하지만 1월 27일 일본 함대가 뤼순항에 정박 중인 러시아 함대를 급습하여 러일전쟁이 개시되었고 전쟁의 불똥은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2월 4일 개전을 선언한 일본은 한반도 지배권을 선점하기 위해 2월 8일 육군을 제물포(인천항)에 상륙시켜 서울로 진격시켰던 것이었다.

 

                          러일전쟁 당시 인천(제물포)에 상륙하는 일본군
 

일본의 뤼순항 급습으로 3척의 군함이 침몰당하는 피해를 입는 와중에 러시아 해군의 순향함 두 척이 극적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지만 인천 앞바다에서 14척으로 구성 된 일본함대에게 포위당하였다. 이때 러시아 해군은 항복하지 않고 저항을 선택하여 함포사격으로 일본 순양함 2척을 불사르는 용기를 보였지만 사방에서 날아오는 포격에 타격을 입고 침몰 당하였다.

 

                                 출동하는 바랴그(우)와 까례예츠
 

이 때 인천 앞 바다에서 중과부적의 상태임에도 굴하지 않고 전투를 펼쳐 장렬하게 최후를 맞은 2척의 러시아 순양함 중 한 척의 이름이 바랴그였다. 이 전투에서 구조되어 러시아로 송환 된 생존 승무원들은 영웅 대접을 받았는데 사실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두고 주변 강대국들이 벌인 전쟁이었으므로 바랴그와 인천의 인연은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다.  그런데 이후 침몰 하였던 바랴그의 운명이 이상하게 진행 되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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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의 감격을 상징하던 공군기
 
 
40대 이하 세대에게 서울의 중심인 여의도에 비행장이 있었다는 사실은 상당히 생소할 것이다. 그곳에 주둔하던 공군부대가 현재 성남에 있는 서울공항으로 이전하기 전인 1971년 2월까지 비행장이 존속하였는데, 사실 여의도 공항은 1916년에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공항이었다. 믿기 힘들겠지만 1958년 김포공항으로 그 기능이 이전하기 전까지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관문인 국제공항 역할까지도 담당하였다.

 

                                            하늘에서 바라 본 여의도공항의 전경
 

우리나라 최초의 공항이고 사대문 인근이다 보니 항공 역사와 관련된 많은 비화가 담겨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공항 개장 이듬해 인 1917년 세계적인 곡예 비행사인 스미스(Art Smith)가 곡예비행을 선보이기도 했고 한국인 최초의 비행사인 안창남이 1922년 12월 단발 쌍엽기 금강호를 타고 시범비행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해방 직후 임시정부 요인들이 미 군정 당국의 반대로 말미암아 개인자격으로 입국하였던 장소이기도하다.

 

                                  서울의 관문 노릇을 하던 1950년대 여의도국제공항
 

하지만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보다 더 감격스러웠던 순간이 여의도 비행장에서 있었다. 한국전쟁 발발 40여일 전인 1950년 5월 14일에 있었던 건국기(建國機) 헌납 명명식이 바로 그것이다. 대한민국 공군이 10 기의 T-6 훈련기를 캐나다에서 도입하여 명명식을 기졌는데 이것은 단순한 비행기의 도입 행사가 아니라 처음부터 온 국민의 기대와 열망을 담고있던 감격스러운 사건이었던 것이다.

 

                                       건국기 헌납명명식 당시의 감격을 묘사한 그림
 

1949년 10월 별도의 군으로 독립하였지만 한국 공군은 미국으로부터 원조 받은 L-4, L-5 연락기 20기만 보유하였을 뿐이었다. 정부는 미국 군사고문단에 전력증강 요청을 하였고 고문단장 로버츠(William L. Roberts) 준장도 이에 동의하여 40기의 F-51전투기를 비롯하여 약간의 장비를 지원해 줄 것을 본국에 요청하였다. 하지만 국군을 치안유지에나 필요한 존재로 인식하던 미국 정부는 이런 요구가 너무 과도하다며 지원을 거절하였다.

 

                          공군이 독립하였지만 극히 빈약한 장비만 보유하였을 뿐이었다


그러자 우리 정부는 "우리의 비행기는 우리의 힘으로 구입하자"는 구호 아래 범국민적인 애국기 헌납 운동을 선언하고 모금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국민들의 열화와 같은 참여로 목표액을 초과한 총 3억 5,000만원의 성금을 모을 수 있었다. 힘이 없어 나라를 빼앗긴 고통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던 국민들은 어렵게 되찾은 자주를 지키기 위해서는 든든한 국방력의 건설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국민의 열망을 담아 보무도 당당히 비행하는 건국기 편대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신생 독립국에서 모은 성금만으로 최신식 전투기를 살 수는 없었고 또 유일한 무기 공급국이라 할 수 있던 미국도 판매를 금지하고 있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캐나다가 보유한 중고 T-6 Texan 10 기를 구입하게 된 것이었는데 신생국의 하늘을 책임지라는 의미에서 건국기라고 명명되었고 각각의 기체에 다음과 같이 별도의 기명이 부여되었다.

 

                                                   건국10호기 (경북1호)
 

건국 1호기(교통1호), 건축 2호기(전북학도1호), 건국 3호기(전남학도1호), 건국 4호기(전매1호), 건국 5호기(충남1호), 건국 6호기(체신1호), 건국 7호기(국민1호), 건국 8호기(농민1호), 건국 9호기(전남1호), 건국 10호기(경북1호)
 

                                           건국기 헌납명명식 당시의 조종사들
 

한마디로 새로운 국가의 건설과 성금을 모금한 국민의 애국심을 상징하기 위하여 명명된 성스러운 이름들이었다. 따라서 이처럼 고귀한 이름을 부여하기 위한 건국기 헌납명명식에는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3부 요인이 참석하였고, 온 국민이 감격하였음은 두말할 나위조차 없었다. 비록 텍사스 사람들로 불리던 연습기였지만 건국기는 신생 대한민국의 자랑이었다.

 

                                           종전 후 공군 연습기로 복무 중인 모습
 

명명식 직후 한국전이 발발하자 건국기들은 적을 저지하기 위해서 보무도 당당히 출격하였다. 그러나 연습기로 전투 임무를 수행하기에는 한계가 너무 많았다. 위험을 무릅쓰고 저공으로 내려가 급조한 폭탄 투하장치를 이용하거나 후방 탑승자가 손으로 폭탄을 투하하는 방법으로 적 기갑부대를 공격하기도 하였으나 성과는 극히 미미하였고 자랑스러운 건국기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조종사들은 울분에 몸을 떨었다.

 

                                                   국산 T-50 고등훈련기
 

다행히도 전쟁 발발 일주일 만에 미국이 F-51 전투기를 공급하기로 결정함으로써 건국기는 연습기 본연의 임무로 돌아갔고 종전 후인 1962년 12월 1일까지 조종사 588명을 양성해 냄으로써 한국 공군의 기틀을 다지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이처럼 한국 공군의 연습기에는 국민들의 희망과 관계자들의 피와 눈물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우리가 만든 최신예 T-50이 대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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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몇 회까지 하지 ?
 
 
지난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우승과 WBC대회의 선전이후 야구의 인기는 폭발적이라고 해도 가히 틀린 표현이 아닌 듯하다. 경기를 보려고 수많은 관객들이 야구장을 찾는데, 예전과 달리 가족단위 관람객과 여성들이 많아진 것에서도 그러한 변화를 알 수 있다. 또한 동네 주변 놀이터에서 배트를 휘두르거나 공을 던지고 받는 아이들이 늘어난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요즘 야구의 인기가 대단하다
 

그런데 운동으로써 야구는 넓은 경기장과 많은 장비 그리고 최소한의 적정 인원이 요구되므로 쉽게 즐기기에는 힘들다는 단점이 있다. 거기에다가 규칙이 세세할 정도로 너무 많아 초보자가 입문하기는 매우 힘든 종목이기도 하다. 그렇다보니 문화적으로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나라들을 제외하고는 인기가 많지 않아 주로 미주나 극동 아시아 일부 국가에서 성행한다.
 

                                      사실 야구는 쉽게 즐기기에 제약 사항이 많다
 

즉, 특정 지역에서는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스포츠이지만 그렇지 않은 나라에서는 상당히 생소한 종목이 바로 야구다. 물론 모든 운동 종목이 전 세계인 모두가 골고루 좋아 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야구가 우리나라에서는 최고의 인기 스포츠이지만 같은 뿌리인 것으로 여겨지는 크리켓이 뭐 하는 경기인지 아는 이들을 찾기는 가뭄에 콩 나듯 할 정도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축구는 전 지구적인 스포츠라 할만하다.

 

                           아마도 축구만큼 전 지구인의 사랑을 받는 스포츠도 드물듯하다.
 

그런데 한 쪽에서는 어린이와 여성들까지 엄청나게 좋아할 정도로 인기를 끌지만 반대로 다른 한쪽에서 철저하게 무관심(무지)한 운동이라면 종종 군사적 수단으로 유사시에 상당히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야구를 좋아하는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 간에 전쟁이 벌어져 피아를 구분할 필요가 있을 때 야구와 관련된 내용이 유효적절하게 쓰인 경우를 전사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다음은 바로 그러했던 에피소드다.
 

                           야구가 전쟁 중 피아를 구분하는 수단으로 쓰였던 적이 있었다
 

1944년 12월, 수세에 몰리고 있던 독일은 비밀리에 전력을 집중하여 놓고 연합군이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던 대공세를 개시하였다. 이른바 '히틀러의 마지막 도박' 또는 '발지 전투'라고도 불린 공세였는데 이때 미군 후방으로 침투하여 교란작전을 벌이기 위한 독일의 특작부대가 전선에 투입되었다. 무장 친위대의 스코르체니(Otto Skorzeny) 중령이 지휘하는 제150 기갑여단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특수전의 대가로 유명한 오토 스코르체니
 

그중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일부 대원들이 미 군복을 입고 노획한 9대의 미제 지프에 분승해 미군 진영에 투입되어 멀쩡한 길가에 지뢰 지대 표시하기, 표지판 돌리기, 거짓 정보 흘리기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미군 후방을 교란하였다. 비록 9개조로 이루어진 44명의 특작부대가 벌인 소규모의 작전이었지만 그 효과는 대단하여 유언비어에 속아 연합군 총사령관 아이젠하워가 사령부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만들었을 정도였다.
 

                                 미군 전차로 위장한 제150기갑여단 소속의 5호 전차
 

이처럼 미군이 단시간 내에 급격히 혼란에 빠지게 되면서 발생한 가장 큰 문제는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런 예상치 못한 문제에 봉착하자 미군들은 상식처럼 쉽게 알지만 독일군들이 모르는 질문을 검문에 사용하였다. 예를 들어 '미키 마우스의 여자 친구는?' 같은 질문이었는데 그중에는 미국의 국기라 할 수 있는 야구와 관련된 질문도 있었다.

 

                                               검문 방법에 야구가 동원되었다
 

'올해 월드시리즈 우승팀은?', '디트로이트 팀 이름은?' 같은 질문은 미군이라면 당연히 알겠지만 아무리 영어를 잘하더라도 독일군은 대답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전사를 살펴보면 미군들이라고 모두 야구를 좋아하지 않았던 듯하다. 한 장성이 시카고 컵스(Cubs)가 아메리칸 리그에 속한다고 대답하여 억류된 적이 있었는데, 아마 그 장군은 복귀한 후 야구팀 이름 외우느라고 고생하였을 것 같다.

 

             미 군복을 입고 후방 작전을 벌였기 때문에
스파이 죄로 즉결처분되는 독일 특작부대원
 

비록 언급한 내용은 오래전의 예이기는 하지만 유사시에 북한군 특작부대의 후방 침투가 충분히 예상되는 우리나라의 안보환경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참고할만한 사례가 아닌가 생각된다. 예를 들어 무승부, 일몰, 우천 경기가 아니면 야구는 9회까지 진행되는 것은 상식이지만 평생 야구를 접해본 적이 없는 이들에게 야구가 몇 회까지 하는지는 수학 문제만큼 답하기 어려운 질문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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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국군 기갑사(機甲史) [ 끝 ]

 
피눈물은 씨앗이 되어
 
 
1978년 4월 7일, 신문 1면 톱으로 한국이 전차 개발에 성공하였다는 기사가 대대적으로 보도 되었다. 하지만 사실 정확한 표현으로는 기존에 국군이 도입하여 사용하고 있던 구형 M-48 전차를 M-48A3K와 105 mm 주포를 가진 M-48A5K로 성능개조를 하여 전력화하는데 성공하였다는 것이 맞다. 특히 M-48A5K는 당시 미군이 주력으로 사용하던 M-60과 맞먹는 성능을 보유하여 국군의 기갑전력을 급속히 향상시키는데 일조를 했다.

 

                                  M-48 전차 개조공장을 방문한 故 박정희 전대통령
 

이처럼 변신과정을 거친 M-48 전차는 현재도 국군 기갑전력의 한축을 담당하고 있으며 이런 개조 생산은 한국형 전차의 개발에 중요한 경험으로 축적되었다. 하지만 이런 노력 때문인지 미국이 여러 이유를 들어 M-60 전차의 한국 판매를 거부하자 독자적인 전차개발에 뛰어 들었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판매거부 조치는 국산전차 개발에 커다란 동기를 부여한 형국이 되었다.
 

                     강력하게 개조된 M-48A5K 전차는 상당수가 현재도 현역에서 활동 중이다.
 

1970년대 말 한국은 M-1 전차를 개발한 미국 크라이슬러 디펜스社의 도움을 받아 한국 지형에 맞는 전차의 개발에 나섰다. 이러한 장기간의 노력의 결과 시험 물량 출고와 테스트 후 1987년 9월, 드디어 국민들 앞에 그 자랑스러운 최초의 한국형 국산전차가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것이 바로 K-1 전차였다.

 

                                                  최초의 국산전차인 K-1
 

이후 계속 된 양산으로 약 1,000여대의 K-1전차가 국군에 성공적으로 제작되어 공급되었고 더불어 동 시기에 함께 개발에 성공한 국산 K-200 보병수송장갑차가 함께 제식화 됨으로써 1990년대 초부터 국군은 창군이래 계속된 대북 기갑전력의 열세를 질적으로 일거에 만회하고 세계최강의 기갑세력 중 하나로 우뚝 서게 되었다.


                                         공지합동 훈련에 참가중인 기계화보병부대
 

하지만 국군 기갑부대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K-1 전차를 개량한 120mm주포를 가진 K-1A1 전차를 개발하여 배치하였으며, 거기에다가 K-2 차세대전차와 K-21 보병전투장갑차를 개발하여 현재 대규모로 도입하기 전 단계이다. 비록 양산 직전 단계에서 예상치 못한 문제점이 발견되어 생산 및 도입이 늦어지고 있지만 지금까지처럼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공적인 배치가 이루어 질 것으로 확신한다.

 

                                         보다 강력하게 업그레이드 된 K-1A1 전차
 

이러한 전력 확충을 발판으로 현재 국군은 맹호부대를 필두로 결전, 불무리, 필승, 화랑부대가 기계화사단으로 개편 되어 그 위용을 과시하고 있으며, 오뚜기부대가 기계화사단으로 개편 진행 중에 있다. 그외 별도로 수개의 기갑여단이 공격의 첨병으로 그 임무를 다하고 있으며 거기에 더해 각 보병사단마다 전차부대나 장갑차부대를 운용 할 정도로 고도로 기계화된 전력을 자랑하고 있다.


                                         도하 시범을 보이는 신형 K-21 전투장갑차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국군 기갑부대의 시작은 너무나 보잘 것 없었고 기갑이라는 호칭을 붙이기조차 낯간지러울 정도로 미약한 전력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선배들은 이러한 미약한 전력을 원망하였지만 절대 탓하지 않고 용감히 전선으로 뛰어들어 전력 이상의 전과를 거두었다. 오늘날 우리의 기갑전력은 국방백서에 나타난 것처럼 2,300여대의 전차 2,400여대의 장갑차 그리고 1,000 여문 이상의 자주포로 이루어진 막강 전력이다.


                                                 차세대 전차인 K-2


하지만 기갑연대에서 시작된 전력이 어느 날 갑자기 뻥튀기처럼 갑자기 늘어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기갑이라 부르기 민망하였던 미미한 전력으로 시작되었던 국군의 기갑부대가 오늘날 이렇게 막강한 전력으로 성장하기까지는 창군 초기와 전쟁 당시의 피눈물을 머금고 조국을 수호하고자 하였던 선구자들의 노력이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다. 그들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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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국군 기갑사(機甲史) [ 6 ]
 

멀고도 험한 성장과정
 
 
1954년 본격적인 중(重)전차인 M-4를 미군으로부터 인수받아 국군은 드디어 진정한 전차부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유엔군이 대대적으로 철군을 단행한 1957년에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미군으로부터 총388대의 셔먼 전차를 축차적으로 도입하게 되면서 국군은 본격적인 기갑부대 확장기에 들어선다.


                           국군이 장비한 최초의 전차인 M-4A3E (1957년 해병대 소속)
 

북한군 전차에 응어리진 감정을 가지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은 전차의 보유와 확장에 대한 집념이 대단하여 어렵게 마련한 기갑전력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당시 국군이 도입한 M-4 전차는 76mm 주포를 탑재한 M-4A3E형 이었는데 비록 북한의 T-34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열세라고 평가는 되었지만 우리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전력이었다.

 

                                             4.19혁명 당시 출동한 M-4 전차
 

기록에 따르면 'M-36 전차는 본격적인 전차로 보기 힘든 장비이므로 진정한 전차라고 할 수 있는 M-4 전차가 우리 기갑 역사의 실질적인 출발점' 이라고 하였을 정도로 그 의의가 컸다. 하지만 이정도 수량으로는 집중화된 독립적인 기갑부대를 구축하기 힘들었다. 전쟁 전에도 그랬지만 북한은 우리의 기갑전력을 능가하였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당시에는 미국의 지원보다 북한에 대한 소련의 지원이 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북한이 T-54/55 계열의 전차를 대량 도입하자 대응에 나서야 했다
 

전후 북한이 당대 최신예인 T-54/55 계열의 전차를 도입하여 그 전력을 급격히 확대하여 나가자 한국군도 더 이상 M-4로 대응하기가 곤란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에 상응하는 대체전력으로 1959년부터 M-47 전차를 총 463대 도입하여 60~70년대 국군 기갑세력의 중추로 운용하였다. 하지만 이 당시도 전반적으로 열세였던 시기로 평가되고 있다.
 

                                     북한의 기갑전력에 대응하고자 도입된 M-47
 

대량 생산되어 미국의 동맹국들에게 상당량이 공급되어진 M-47은 많은 탄약 적재량과 함께 입체식 거리측정기를 장착하여 주포의 명중도가 뛰어난 장점을 가지고 있어 일선에서 오래동안 활약하였고 현재 일부는 해안포로 운용중이기도 하다. 하지만 곧바로 M-48 전차의 개발에 착수 하였을 만큼 M-47은 개발국인 미국에서도 그리 성능에 만족하지는 않았던 전차였다.

 

                                    퇴역하여 인천상륙작전 기념관에 전시 중인 M-47
 

국군의 기갑전력이 본격적인 확장기로 접어 든 것은 월남전 때문이었다. 국군의 대규모 월남전 파병과 1971년 한국에 주둔하던 미 7사단의 철수로 생긴 전력의 공백을 메우고자 1971~1975년 사이에 한미 협의에 의해 국군 현대화 5개년계획이 수립되었고, 이에 따라 M-48A2C 전차 400여대와 M-113 장갑차 400여대를 미국이 지원하였다. 이를 모태로 해서 본격적인 국군의 기갑부대가 육성될 수 있었다.
 

                                       오래 동안 국군의 주력으로 활약한 M-48 전차
 

이렇게 취득한 대규모의 M-48 전차와 M-113 장갑차를 발판으로 1973년 월남에서 철군 한 수도사단이 국군 최초의 기계화사단으로 개편되어지고 후속하여 제1기갑여단, 제2기갑여단이 창설됨으로써 기갑장비를 집중 운용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힘들게 구축한 기갑전력은 우리 스스로의 역량에 의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대외 원조에 의존 한 것이었다.

 

                                           인천항을 통해 도입되는 M-113 장갑차
 

1970년대 들어 더 이상 원조에 의존해서 자주국방을 이룰 수는 없다고 판단한 정부는 그동안 이룬 경제개발을 바탕으로 '우리 땅은 우리 손으로 지키자'는 기치하에 자주국방을 위한 대대적인 투자에 적극 나서게 되었고 더불어 기갑장비의 국산화를 위한 노력도 함께 하였다. 국군 기갑사에 새로운 한 획이 그어지는 순간이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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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국군 기갑사(機甲史) [5]
 

잊혀 지지 않을 소년전차병의 기록
 
 
 
기갑부대라고 칭하기 부끄러운 기갑연대를 보유한 상태에서 전쟁을 맞은 국군은 200여대의 T-34 전차를 앞세우고 남침을 감행한 북한군의 기습에 일방적으로 밀려 후퇴 할 수밖에 없었다. 탱크를 막을 제대로 된 무기도 없었고 대전차 전술 또한 부재하여 설령 기습이 아니었다하더라도 침략자를 격퇴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전쟁 초기 크나큰 아픔을 안겨 준 북한의 T-34
 
울분에 찬 병사들이 여러 전투에서 육탄으로 적 전차를 막아냈으나 이 또한 한계가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국군은 극심한 전차 공포증에 빠질 수밖에 없었고 이와 반대로 전차의 보유를 더욱 갈망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미군의 참전으로 아군에게도 기갑부대의 지원이 가능하게 되었지만 국군이 본격적으로 기갑장비를 갖추게 된 것은 좀 더 시간이 흐른 이후다.
 

                                     낙동강 방어전 당시에 투입된 미군의 M-26 전차

 
1950년 11월 29일, M-36 전차 6대가 훈련목적으로 도입되고 동래에 위치한 육군종합학교에 전차병과가 설치됨으로써 국군은 그렇게 소원하던 전차를 보유한 진정한 기갑부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준비과정을 거쳐 1년이 지난 1951년 10월 5일 국군 최초의 전차부대인 제51, 제52전차중대가 창설되어 국군은 제대로 된 기갑부대를 보유하는 감격의 순간을 맞이하였다.

 

                                                국군이 최초로 도입한 M-36
 

그런데 이때 장비한 M-36은 85mm 포를 갖춘 북한군 T-34를 충분히 능가하는 90mm의 대구경 포를 장비하였지만 이른 바 오픈 탑(Open Top) 구조의 포탑을 가진 보병 화력지원용 구축전차(Tank destroyer)였다. 얼핏 모양은 전차에 가까웠지만 실질적으로는 자주포로 볼 수 있는 장비여서 부족한 방어력을 보강하기 위해 철판을 포탑에 덧대거나 심지어 샌드백을 쌓아 놓기도 했다.

 

                개방된 포탑 구조에서 알 수 있듯이 M-36은 전차라기보다는 자주포에 가까웠다.
 

하지만 반궤도차량을 장갑차로 취급하고 M-8을 국군 최고의 중화기로 여겼던 창군 초기처럼, M-36은 국군 기갑사에 있어 최초의 전차로 귀하게 여겨지고 운용되기 시작하였다. 참전용사의 증언에 따르면 "보병을 지원하기 위해 M-36을 몰고 가서 90mm 주포를 사격하면 보병들의 사기가 오르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고 하였을 정도로 전쟁 초기 북한 전차에 일방적으로 치욕을 당할 수 밖에 없었던 국군에게 M-36은 사기앙양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한국전쟁 당시 활약한 M-36의 귀한 컬러사진
 

그런데 M-36과 관련하여 많이 알려지지 않은 학도병 이야기가 있다. 1952년 4월, 16~18세의 학생 120여명으로 구성되었던 제57 전차중대의 소년 전차병들이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소년들은 일본에서 6개월 동안 기술교육을 받은 후에 하사관으로 복무시켜준다는 구두약속을 받고 입대하였으나, 논산훈련소와 전차교육대에서 3개월 동안만 훈련을 받은 뒤 학도병 신분으로 곧바로 최전방 연천 지역에 투입되었다.
 

                  출동하는 소년 전차병 부대인 제57 전차중대의 M-36 (사진-오명섭 참전용사)


제57 전차중대는 연천 지역에서 제1사단을 지원하며 혁혁한 전과를 올렸지만 아쉽게도 이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고 있다. 노병의 증언에 따르면 "고지에서 밀려 퇴각할 땐 탱크 뒤에 아군의 시체를 십여 구씩 매달고 내려왔다"고 당시를 회상하였을 정도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그들의 피눈물은 단지 학도병이라는 이유로 제외되어 오래 동안 기억에서 사라진 이야기가 되었던 것이었다.
 

                     늦게나마 명예를 되찾은 소년 전차병 참전 기념탑 (사진-오명섭 참전용사)
 

당시 M-36은 주로 5대로 편성된 소대 급 단위로, 보병의 돌격 시 배후에서 화력을 지원하는 형태로 운용되었을 뿐 공산군 전차 부대와 직접 교전을 벌이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전쟁에 본격 참전한 전차 부대의 주력으로 M-36은 그 용맹을 다하였고 이와 더불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소년 전차병들의 피눈물은 이제 새롭게 밝혀져 자랑스러운 국군 기갑사에서 중요한 장을 차지하고 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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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국군 기갑사(機甲史) [4]
 

또 다른 주먹들
 
 
기갑연대에는 기마 300필을 보유한 2개 중대 규모로 이뤄진 기병대대가 있었다. 요즘 일부국가의 산악부대 외에는 전투부대로 기병대를 별도로 운용하는 나라는 더 이상 없으리라 생각 되지만 당시에는 엄연한 전투부대였다. 장갑대대가 전쟁초기 서서히 각개 격파 되었던 것에 비한다면 기병대대는 낙동강 방어선까지 편제를 그대로 유지하였으며 전쟁초기 기갑연대의 제 부대들 중 최고의 전과를 올린 부대였다.
 

                               기갑연대 소속이었던 기병대대의 검열 모습

 
1950년 7월 말 경북 청송까지 후퇴한 기갑연대는 워낙 소모가 심하여 그 전력이 미약한 상태였다. 도보대대는 김포전투에서 상실되었고 장갑대대는 각 전선에서 거의 격파되어 M-8 장갑차 4대만이 청송으로 이동하였다. 반면 당시까지 200여명의 병력을 유지한 기병대대는 편제를 대부분 유지하면서 기갑연대의 주력으로써 맹활약 하였다.
 

                                       시가행진 중인 기병대대
 

오늘날 제1사단을 최고의 상승부대(常勝部隊)로 꼽는 이유 중 하나에는 전쟁 내내 편제를 유지하였다는 사실도 포함되어 있다. 수많은 부대들이 전쟁 중 해체 및 재창설의 과정 등을 겪고는 하였는데 제1사단은 후퇴 시기에도 대부분의 편제와 장비를 보존하였고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훌륭한 전과를 올렸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기갑연대 중에서도 최후까지 전력을 보존하여 방어전을 펼쳤던 기병대대의 노력은 영웅적이라 할만 했다.
 

                    1950년 7월초에 촬영된 기병대대원들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
 

1950년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7월 초 한강도하를 감행하였다. 이때 긴급하게 시흥전투사령부를 구성하여 한강 남쪽에서 북한군을 방어하던 혼성 부대 중에는 기병대대도 있었는데 천호동에서 한남동 대안에 이르기까지 넓은 정면을 방어하였다. 한강을 방패막이 삼아 적의 공격을 막아냈고 후퇴 시에는 기병대의 기동력을 이용하여 아군의 최후 철수부대를 엄호하는 작전을 펼쳤다.
 

                                     전선으로 향하는 기병대대
 

특히 미군 전사에는 7월 초순 경북 구미 부근에서 미 제24사단 63포병대대 B포대가 1개 대대병력의 북한군에 포위되어 몰살 당할 위험에 처했을 때 홀연히 나타난 기병대대 2개 소대가 적 배후를 급습하여 이들을 구출한 전과가 상세하게 나오기도 한다. 이후 북진에도 참여하였던 것으로 기록이 나와 있지만 1.4 후퇴 후 더 이상의 기록을 발견 할 수 없는데 아마도 기병대가 더 이상 전장상황에 맞지 않다고 판단되어 해체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북진 당시의 모습인데 이후 기병대대는 국군 역사에서 사라진다
 

도보대대는 2개 중대 규모로 구성된 경무장 보병대대
였는데 오늘날 수색대와 비슷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전쟁 개전 시에는 기갑연대의 본부 및 남산 송신소 등을 방어하다가 한강 이남으로 후퇴하여 김포지구방어사령부 소속으로 방어전에 나섰다. 전쟁 초기에 당시 북한군 중 최고의 기동을 보여주었다는 북한군 제6사단의 김포 반도 도하 작전으로 국군의 배후가 노출될 위험에 처하자 도보대대가 긴급 투입되었다.
 

                                  이동 중 휴식을 취하는 국군 보병부대
 

약간의 M-8 장갑차의 지원을 받아 부천 및 오류동 방향으로 진출하여 방어선을 구축한 도보대대는 병력과 화력의 절대 열세에도 불구하고 전쟁 초기 북한군 최강으로 평가되던 6사단과 혈전을 벌여 상상 외의 타격을 입힘으로써 영등포 진출을 지연시켰다. 하지만 김포 공항 탈환에 실패하며 부대가 해체 될 만큼의 타격을 입었고 지휘관은 자결을 하였다.

 

                      도보대대의 살신성인 정신은 국군의 귀감으로 남아있다
 

비록 도보대대는 기갑연대의 제 부대들 중 가장 먼저 산화한 부대가 되었지만 중과부적의 상태에서도 최선을 다한 그들의 용맹으로 말미암아 시흥전투사령부의 각 부대가 수원 이남으로 안전하게 후퇴 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되었다. 도보대대의 용맹함은 오늘날 국군 수색대대나 수색중대와 같은 첨병부대들이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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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국군 기갑사(機甲史)[3]
 
 

장갑대대의 보조전력
 
 
장갑대대의 주력은 M-8이었지만 그 보조전력으로 약간 수량의 반궤도 차량과 정찰용 무장 짚차도 운용하였다.  M-8이 오늘날 주력전차(MBT ; Main Battel Tank) 역할을 하였다면 반궤도 차량은 병력수송장갑차(APC ; Armored Personnal Carrier), 무장 짚차는 기갑 수색대의 역할을 하였다고나 할 수 있을 것 같다. 기갑 부대를 전역한 예비역이나 현역 장병들이 들었다면 기가 찰 정도의 빈약한 장비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국군 기갑 부대의 역사는 이렇듯 빈약하게 출발하였다.
 

                                        현재 국군의 주력 병력수송장갑차인 K-200
 

그렇지만 초창기 우리 선배들은 이런 빈약한 장비에도 불구하고 적들과 용감히 맞서 호국의 첨병으로서 역할을 다 하였다. 그중에는 M-8 장갑차처럼 약간의 흔적을 국군 역사에 남기고 사라진 장비가 있는데 흔히 하프트랙(Half Track)으로 불리는 반궤도차량도 그렇다. 반궤도차량은 말 그대로 전륜은 바퀴, 후륜은 무한궤도를 장착한 차량인데 요즘은 보기 힘든 주행 장치다.
 

                              가장 유명한 반궤도차량인 독일의 하노마그 Sd.Kfz.251
 

이들 반궤도차량은 제2차대전 당시 기계화부대의 주요장비였다. 전차와 함께 진격하는 보병들을 신속 정확하게 운반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 오늘날 병력 수송 장갑차의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볼 수 있지만 장갑차라기보다는 야지 주행 성능을 높인 트럭에 가깝다. 특히 미국의 반궤도차량이었던 M-2/M-3는 독일의 하노마그(Hanomag Sd.Kfz.251)에 비한다면 차량으로 정의해도 무방하다.
 

                                               미군이 사용하던 M-2 반궤도차량
 

그런데 국군은 당시 보유한 M-2/M-3 반궤도차량을 반장갑차라 하였을 만큼 귀하게 여기고 M-8 못지 않은 장비로 취급하였다. 전차와 같은 중무장한 기갑부대의 지원을 받아야 그 능력을 제대로 발휘 할 수 있는 수송용 장비를 우리는 최고의 전투 장비로 운용하였던 것이다. 사실 이런 반궤도차량으로 이동하는 보병을 호위 할 기갑세력도 없었으니 이런 생각이 잘 못된 것이라 할 수도 없을 만큼 당시 우리는 부족한 것이 많았다.
 


                           여순사태 당시에 출동한 국군의 M-3 반궤도차량 (사진-LIFE)
                               일종의 트럭을 우리는 장갑차로 취급하며 귀하게 여겼다.
 

기갑연대의 장갑대대에는 반장갑차 24대로 구성된 중대가 있었다. 하지만 말만 장갑차지 장갑 능력과 화력이 빈약하였던 관계로 전쟁 전 여순사건 같은 후방작전 시 교통이 나빴던 오지에 병력을 수송하기 위한 용도로만 사용되었다. 기갑연대가 보유했던 반궤도차량은 경북 청송에서 기갑연대가 북한군 12사단에 포위당하는 악조건에서도 적의 진격을 10일 이상 막으며 분투하던 도중 장열하게 산화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71년 실미도사건 당시의 수도경비사령부 M-16 반궤도차량 (사진-조선일보)
                            M-2/M-3의 개량형인 M-16을 70년대 초반까지 운용하였다.
 

더불어 장갑대대에는 M1919 기관총을 장착한 짚차 20여대로 구성된 중대가 있었다. 제2차대전 당시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집차 등을 정찰 및 수색용도로 투입할 때 많이 사용하던 방식이었는데 정확도 등을 고려한다면 이동 중 사격은 별 효과가 없어 보인다. 아마도 정차 중 사격이나 목표까지 이동 후 탈착하여 사격하는 전술을 사용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장 짚차 중대원들의 시가 행진 모습
 

오늘날 미군이 운용하는 험비 고기동차량과 비슷한 역할을 하였다고 판단되나 험비와 비교한다면 말도 안 되는 빈약한 장갑 및 기동능력의 열세가 보인다는 것을 추측 할 수 있다. 전쟁 전 미군 군사고문단 보고서에 따르면 짚차의 기동력을 이용하여 적의 배후를 우회 포위하는 훈련에서 탁월한 성과를 보였다고 기록 되어 있으나, 비정규전 같은 상황에서나 효과가 있었을 것 같고 전쟁 같은 전면전에서는 별다른 전과를 올리기 힘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여순사태 당시에 출동한 무장 짚차


국군의 경우 긴급 편성 된 김포 지역 방어사령부의 최복수 중령이 김포 공항 탈환작전에서 기관총을 난사하며 짚차를 몰고 돌진하다 산화하였다는 기록이 있지만, 전쟁 중에 무장 짚차 중대가 어떠한 활약을 보였는지 알려진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이처럼 비록 빈약한 장비였지만 M-2 반궤도차량과 무장 짚차는 당시 기갑연대 주력부대인 장갑대대의 보조전력으로 조국을 지키기 위해 그 맡은 바 임무 이상의 역할을 다하였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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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국군 기갑사(機甲史) [ 2 ]
 
 
장갑대대의 주력 M-8 장갑차
 
한국전쟁 직전 '기갑연대'에서도 핵심전력은 국군 유일의 기계화장비 완비부대인 장갑대대였다. 미군정이 물러나면서 인도한 장비를 인수하여 창설된 부대였는데, 당시 국군의 모든 대대급 부대 중 최강의 전력을 갖춘 부대로 평가를 받았지만 이는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국군의  무장이 얼마나 빈약하였는지 반증 할 수 있는 자료이기도하다.
 


                          항복한 일본군의 안내를 받아 서울로 진입한 미군의 M-8 장갑차
 

3개 중대로 구성된 장갑대대는 M-8 정찰 장갑차 27대, M-2/M-3 반궤도 차량 24대 그리고 20여대의 무장 짚(Jeep) 차를 보유하였다. 부대 명칭대로 기갑연대 예하의 장갑대대라 칭하기에 부끄러운 수준이었지만 이것이 창군 초기에 국군이 보유한 모든 기동 전투장비였다. 오늘날 국군의 기갑부대와 비교한다면 상당히 민망한 수준에서 국군의 기갑부대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시가행진 중인 기갑연대 소속의 M-8 장갑차
 

당시 사료를 보면 이들 장비가 혼재된 형태로 중대가 편성되지 않고 M-8 중대, M-2/M-3 중대 그리고 무장 짚 중대로 각각 개별 편성된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후방임무가 아닌 정규전에서는 각 중대별로 분리되어 작전을 펼치기 보다는 대대 전체가 작전에 투입되어야 효과적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주력이라 할 수 있는 M-8 중대조차도 소대별로 나누어 전방의 각 사단에 배속하여 운용하였다.
 

                              M-8 장갑차는 부득이한 사유로 소대별로 나뉘어 배치되었다
 

지금이야 통신강국 KOREA지만, 해방 후 우리나라의 통신사정은 몹시 열악하였고 군도 예외는 아니었다. M-8에 장착된 SCR-506 무전기는 장거리 통신에 적합하여 남산통신소를 키스테이션으로 하여 육군본부와 전방 사단의 통신에 유효 적절히 사용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강릉의 8사단에 배속한 M-8 장갑차에서 송신한 육성이 서울 남산 통신소에서 수신되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귀중한 자산을 통신용 목적으로 뿔뿔이 나눈 것이었다.
 


                             창군 초기 국군의 기간 통신망 역할을 담당한 SCR-506 무전기
 

이미 제2차대전을 통하여 집단화된 기갑부대가 효과적임은 입증된 사실이었지만, 사실 장갑중대의 전력으로는 굳이 집단화고 뭐고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자 M-8을 통신용으로만 운용할 수는 없었다. 북한군 T-34 전차에 전방의 부대들이 유린되자 M-8은 출동하였다. 명령을 내린 상부나 이를 운용하던 병사 모두가 계란으로 바위치기인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망설일 수 없었다.
 

                  창군 초기  M-8 장갑차는 국민들에게 국군의 위용을 어필하는 최고의 무기였다
 

M-8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에서 정찰용으로 개발된 경장갑차였지만 건군 초기에 국군이 유일하게 운용한 중장비여서 시가행진 등 공개 행사에서 국군의 위용을 국민에게 어필하였다. 당시 북한군은 M-8과 비슷한 성능의 BA-64 정찰 장갑차 54대를 정찰 및 수색 용도로 운용하였지만 M-8이 전쟁 초기에 달려 나가 막으려 하였던 상대는 북한의 T-34 전차였다. 화력이나 장갑능력에서 정면으로 맞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M-8이 상대할 적수라면  BA-64 장갑차가 맞지만
                          T-34 전차의 남진을 막기 위해 출동하여야 했다. (노획한 BA-64)

 
의정부축선을 방어하던 7사단을 돕기 위해 출동한 M-8의 37mm 주포가 불을 뿜어 수많은 철갑탄을 적 전차에 명중시켰지만 대부분 튕겨 나가는 참담함과 함께 차례차례 적 전차의 희생양이 되어 갔다. 이런 수모에도 불구하고 M-8 장갑차는 김포와 영등포 일대에서 북한군 6사단을 상대로 지연전을 펼칠 때 큰 활약을 하였고, 옥천 지연전에서는 적 전차의 무한궤도를 끊어 전차 공포증에 빠져있던 아군에게 용기를 불어 넣기도 하였다.

 

                M-8 장갑차의 모습을 일부 확인 할 수 있는 M-20 장갑차 (사진-4.19 민주혁명회)
 

이렇듯 개전 초 성능 이상의 활약을 펼친 M-8 장갑차는 여러 전투에서 차례로 파괴되었고, 북진 시 청진부근에서 전투하였다는 기록은 있으나, 흥남철수 적재품목에서 발견 되지 않아 결국 1950년 말 국군 전력에서 사라졌다.  4.19 당시의 사진을 보면 M-8과 동일한 차체를 쓰던 M-20 장갑차를 볼 수 있는데, 이 또한 현재 보존되어 있지 않고 있다. 아쉽지만 사진으로나마 용감했던 M-8 중대원들의 무용담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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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국군 기갑사(機甲史) [ 1 ]
 

 
기갑연대를 아십니까 ?

 
현재는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하는 대한민국 육군이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한국전쟁 발발 이전에 창설되었던 부대로는 제1, 2, 3, 5, 6, 7, 8, 수도경비사령부(전쟁 도중 수도사단으로 개편되었는데 현재의 수도방위사령부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의 8개 사단 급 부대와 육군본부 직할의 제17연대, 기갑연대가 있었는데 그야말로 국내 치안 유지에나 적합한 단출한 규모였다.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 창설 당시의 모습
 

그런데 창군 당시의 군사(軍史)를 살펴보면 8개 사단을 구성하였던 예하연대 및 2개 독립연대들은 수시로 예배속을 변경하고는 하였다. 아래의 표는 사단 창설 시와 한국전쟁 종전시의 각 부대의 예하연대가 변경된 내용이다. 이런 이유는 모든 것을 백지상태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창군 당시의 여러 사정과 곧이어 벌어진 전쟁으로 인하여 부대의 해체 및 재 창설 등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창군 8개 사단의 전쟁 전후 예하연대 예배속 상황표
 

때문에 현재도 국군의 간성(城 ; 방패와 성이라는 으로, 나라지키는 믿음직한 군대인물이르는 .)으로 그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보유하고 있는 창군 8개 사단의 역사와 예하에 속해 있는 연대의 역사가 반드시 일치 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자면 국군 최초로 창설 된 연대였던 제1연대는 상급소속부대가 제1여단, 제7여단, 제7사단을 거쳐서 현재는 수도기계화사단의 예하부대(수도사단이 기계화사단으로 개편되면서 현재 제1여단)로 있다.
 

                                    세계적인 기갑부대인 수도기계화사단의 기동훈련
 

그런데 자료를 살펴보면 숫자가 아닌 단대호(單隊號 ; 단위 부대마다 소속, 규모, 병과 따위를 정하여 붙인 번호.)를 가진 연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기갑연대"인데 지금도 명맥이 이어지고 있는 전통의 부대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부대는 오늘날 세계적인 전력을 자랑하는 국군 기갑부대의 시작과 관련이 있다. 1948년 "독립수색단"으로 창설된 후 수차례의 예배속 과정을 거쳐 한국전쟁과 월남전쟁까지 참전한 기갑연대의 역사는 바로 국군 기갑사 그 자체라 할 수는데 다음은 기갑연대의 예속 및 참전기록이다.
 
1948년 12월 10일   서울 서빙고에서 독립수색단으로 창설
1949년  6월 20일   수도경비사령부(현 수도기계화사단) 창설시 예속
1949년 11월 15일   육군본부 직할의 독립연대로 예속 전환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과 동시에 참전
1950년  6월  28일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편성 시 각 혼성사단에 분산 예속
1950년  8월  28일  수도사단에 예속되어 종전 시까지 주로 동부전선에서 전투
1965년 10월  23일  수도사단 예속부대로 월남전 참전
1974년  이후          월남 철군 후 수도사단의 기계화사단 개편 시 기갑여단으로 승격

 

                                  창군 직후 시가행진 중인 기갑연대 소속의 M-8 장갑차
 

기갑연대를 지금과 평면으로 비교하기도 곤란하지만 한국전쟁 당시 남침의 선봉이었던 북한군 제105 탱크여단과도 비교되지 않는 극히 빈약한 장비를 보유한 상태로 시작한 부대였다. 기갑이라는 부대명칭과 달리 일부 대대만 경량의 장갑차를 보유한 한마디로 무늬만 기갑부대였는데 그 편제는 다음과 같았다.
 
장갑대대 - 예하 3개 중대
기병대대 - 예하 2개 중대
도보대대 - 예하 2개 중대

 

                                      하루아침에 이런 모습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비록 전쟁 초기에 수많은 손실을 입어 부대가 붕괴되다시피 하는 피해를 입기도 하였지만, 기갑연대는 국군 기갑부대의 선구자로서 후배들에게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는 용맹함을 보여 주었다. 앞으로 몇 회에 걸쳐 국군 기갑부대의 시초가 되는 기갑연대의 초기 모습과 전선에서 용감하게 적과 맞섰던 전투, 그리고 이를 발판으로 국군이 세계적 수준의 기갑부대를 보유하게 되기까지의 간략한 역사에 대해 알아보고자한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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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전용철도의 재발견

 


19세기 초에 시작된 철도교통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말보다 빠른 이동수단이었고 현재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역마차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과 물자를 수송할 수 있는 철도는 병력의 이동과 군수물자의 수송에도 효과적이어서 전쟁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1866년의 보오전쟁과 1870년의 보불전쟁은 프로이센이 철도를 전쟁 수단으로 유효 적절히 사용하여 승리를 거둔 최초의 사례였다.

 


                  키리졸브 훈련 도중 철도를 이용하여 기갑장비 수송을 하는 모습

 


여타 운송수단이 발달한 현대에 와서도 철도교통의 중요성은 여전히 크다. 특히 중량의 장비가 많은 군대의 경우 철도를 이용하여 인력과 물자를 수송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며 그것은 우리 군도 마찬가지이다. 흔히 장병들이 휴가 때 많이 이용하는 TMO로 알려진 '국군수송지원반'이 철도를 이용한 병력 및 장비의 수송을 담당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지도에는 표기되어 있지 않지만 여러 부대를 연결하는 군 전용철도가 임무에 사용된다.

 


                                      주요역에서 볼 수 있는 TMO

 


그런데 철도는 모두가 자기가 살고 있는 곳 근처에 들어서기를 원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내가 살고 있는 곳 바로 옆에 놓이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소음을 비롯한 여러 불편함 때문이다. 더구나 철도가 내가 이용할 수는 없고 특수한 목적에만 사용된다면 오히려 방해물로 여기는 경향이 크다. 이에 해당되는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앞서 언급한 군 전용철도들이다.

 


                        교통을 통제한 상태로 도심을 가로질러 가는 군용열차

                              어쩔 수 없이 불편함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현재 우리나라에 산재한 여러 군 전용철도는 간선철도망과 부대를 연결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도심을 관통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철도 운행 시, 통행을 막는 경우도 흔하고 운행이 자주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철도로 인하여 생활권이 분리되거나 철로 주변이 쓰레기 무단 투기 장소로 변질되는 경우도 많아 시민들이 불편을 겪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군 전용철도의 철거를 요구하는 민원이 자주 발생한다.

 


              모 군용 철도 주변에 방치된 쓰레기. 이 또한 수많은 민원의 대상이다.

 


다음은 이와 관련하여 최근 모 지역지에 보도된 내용이다.

 

O의원은 국회 국방위 청원심사소위에 참석, O구민 4천134명이 서명한 'O구내 군전용 철도선 폐선' 청원의 처리를 촉구했다.

"군 전용선이 중심부를 관통하고 있어 도시발전에 장애가 될뿐더러 주민생활 불편을 초래하고 있다"며 "군 전용선을 조속히 폐선시켜 달라"고 말했다. O의원은 "국방부가 군 전용선을 폐선하더라도 O역의 공간이 넓은 만큼 하치장을 마련하고, 도로 등 대체교통수단을 이용하는 방안이 있다"

 

           거주지를 분리하고 있어 철거민원이 되고 있는 군용철도 (사진-부평신문)

 


이에 대해 국방부의 입장도 다음과 같이 보도되었다.

 

"전시 군수물자 수송이 대량으로 발생하면 육로에만 의존하기에 한계가 있어 철도 폐선에 동의할 수 없다"

 

이처럼 같은 팩트를 놓고 서로 상반된 입장을 가졌지만 어느 쪽이 일방적으로 옳다고 단정할 수 없어 쉽게 답을 내어놓을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와 관련하여 최근 민·관·군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차선책을 도출해서 군 전용철도 주변 환경을 개선하는 노력을 보인 사례가 있다.

 


     민관군이 협력하여 주변을 공원처럼 멋있게 탈바꿈하고 있는 모습 (사진-부평신문)

 


다음은 이와 관련한 보도 내용이다.

 

O구는 O부대와 "철도전용선 관리를 위한 관‧군 협력 공동협약서"를 체결했다고 밝혔다. O부대는 이 지역을 지역주민을 위해 개방하고 월 1회 환경정화 활동을 위한 인원 및 장비 등을 지원하며, O구청은 수목‧살충작업 등 관리에 철저를 기하고, 공동으로 시설물 보호 및 주민안전을 위해 노력하자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 날 O구청장은 "그 동안 무단투기 지역으로 골머리를 앓았던 곳이 주민쉼터로 탈바꿈할 수 있도록 협조해주셔서 감사하다"고 했으며, 이에 O사령관은 "군도 주민의 삶의 질 향상에 보탬이 될 수 있어서 뿌듯하고, 앞으로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화답했다.


 

  군용철도 주변을 공원으로 개발하고 레일바이크를 도입한 또 다른 사례 (사진-구로구청)


 

비록 이러한 노력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아니지만 서로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군 부대주변 주민들에게도 이로움을 주는 좋은 시도가 아닌가 생각한다. 더불어 군용철도에 레일바이크를 도입함으로써 칙칙했던 분위기를 순식간 일소하고 주민들의 공원으로 탈바꿈한 또 다른 사례를 본다면 군용철도가 기피시설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관계자들이 조금만 더 노력하고 아이디어를 낸다면 틀림 없이 보다 많은 좋은 해결책이 나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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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베강에서 벌어진 냉전의 역사 [ 下 ]
 
 

냉전시기에 동서는 전 분야에서 체제경쟁을 하였지만, 국력을 올인하다시피하며 가장 치열하였던 경쟁을 벌였던 것은 우주개발 분야다. 그 시작은 1957년 소련이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Sputnik) 1호를 쏘아올린 일이었는데, 미국의 교육제도까지 바꿀 정도로 그 후폭풍은 엄청난 것이었다.
 

                               미국을 경악에 빠뜨린 스푸트니크 1호
 
 
이후 미국과 소련은 국력을 쏟아 붓는 무한경쟁에 돌입하여 우주를 체제 우월을 입증하는 선전무대로 만들어 버렸다. 사실 이런 무한경쟁은 우주개발을 적어도 30년 이상 단축시켰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지만, 과학탐사와 개발이 상호 협조가 아닌 체제경쟁을 위한 수단이었다는 것이 문제였고 양국 모두에게 엄청난 경제적 짐이 되었다.
 

       치열한 우주개발 경쟁은 1960년대에 인간의 달 탐험을 이루는 업적을 선보였다
.
 

그러한 무한경쟁의 장소였던 우주에서 데탕트를 상징하는 이벤트를 벌여 세계인에게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행사가 기획되었다. 1975년 7월 15일, 미국 우주선 아폴로(Apollo) 18호와 소련 우주선 소유즈(Soyuz) 19호의 도킹 행사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것은 인류가 우주개발에 나선 후 사상 처음으로 미국과 소련이 함께 실시한 우주탐사였다.
 

                                미국과 소련의 합동 우주탐사가 기획되었다.

 
모든 일에서 최초라는 것은 당연히 중요하다. 지나고 나서 초기의 업적을 지금과 비교하면 우습게 보일지 몰라도 최초 성공까지의 수많은 도전과 실패는 바로 오늘을 만든 밑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러시아 우주선을 미국 관광객이 타고 우주비행에 나서는 시대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최고의 특급 국가기밀을 적국에게 오픈시켜 주는 이런 시도가 곧 동서 화해의 신호탄이었던 것이었다.
 


                                당시 양국 우주비행사들의 합동 훈련 모습
 

도킹과 관련한 준비를 위해 양국 우주비행사와 기술진이 사상 최초로 상대편 기지를 방문하여 기술적 협의와 합동훈련을 하게 되었다. 미소의 우주선에서 사용하는 공기만 하여도 미국이 산소 60% 질소 40%의 혼합물인데 반하여 소련은 100% 산소를 사용한다는 사실이 처음 대외에 밝혀 질 정도로 당시는 모든 것이 비밀이었던 시대였다. 당연히 모든 진행과정 하나하나가 신선한 충격이었다.

 

               우주에서 화합의 시대를 연 아폴로 18호와 소유즈 19호의 승무원들
 

이런 어려운 준비과정을 거쳐 미소의 우주선이 우주공간에서 결합하고, 미국의 스태포드(Thomas P. Stafford)선장과 소련의 레오노프(Alexei Leonov) 선장이 악수하는 모습을 세계인들에게 생방송으로 보여줌으로써 일말이나마 평화에 대한 희망을 주었다. 그것은 인류에게 미국과 소련이 협력을 할 수도 있다는 희망을 안겨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도킹 후 우주에서 악수를 나누는 장면
 

그런데 예정보다 6분 정도 빠르게 이루어져 대서양 상공 우주에서 도킹이 이루어졌지만 최초 미소의 우주선이 접촉하기로 예정된 장소는 바로 30년 전 미소의 군대가 처음으로 악수를 나누었던 엘베강 토르카우 위의 우주였다. 아마도 미국과 소련이 가장 분위기가 좋았던 시간과 장소를 기억하기 위해서였는지 모르겠지만 이를 바라보던 분단 독일국민들의 심정은 그리 좋지는 않았을 것 같기도 하다.
 

                    현재 세계 각국의 협력으로 건설 중인 국제 우주 정거장 ISS
 

하지만 역사의 도도한 흐름은 엘베강변과 우주에서 있었던 이러한 기억을 과거의 사실로 만들어 버렸다. 독일은 다시 통일이 되었고, 오늘날 우주개발은 ISS(International Space Station ; 국제우주정거장)라고 불리는 거대한 우주정거장으로 상징 되듯, 전 인류가 동참하여 개발하는 협력과 평화의 장이 되어 가고 있다. 미소가 나치를 쳐부수고 조우하였던 엘베강은 66년 전에도, 우주선이 만났던 36년 전에도, 오늘도 흐르고 있다. 그리고 강물처럼 역사도 흘러가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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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획무기의 재활용 사례 [ 下 ]

 

  

전차의 탄생 이후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며 체득한 한 가지 법칙이 있는데, 전차가 아무리 강력하더라도 보병의 지원 없이 단독으로 작전을 벌이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행위라는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보병이 아무리 빨리 뛰어도 전차의 속도를 맞출 수 없다는 새로운 고민이 생겨났다. 이때 해결책으로 등장한 것이 보병을 소화기로부터 보호하고 빠르게 이동시킬 수 있는 장갑차다.


 

                                        장갑차의 중요성은 점점 증대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장갑차의 종류도 상당히 세분화 되었는데, 보병병력을 전투지역까지 안전하고 빠르게 이동시키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는 보병수송차량(APC; Armoured personnel carrier)과 보병이 탑승한 상태로도 일부 전투를 수행하거나, 하차하여 전투중인 보병에 대한 화력지원을 목적으로 하는 보병 전투차량(IFV; Infantry Fighting Vehicle)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때문에 APC에 비해 최전선에서 직접 전투를 벌이도록 설계된 IFV가 화력과 장갑이 뛰어날 수밖에 없다.

 


                             2차대전 당시 대량 사용된 하프트랙은 APC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일부 IFV는 예전에 사용하던 경전차와 맞먹는 성능을 자랑하기도 하는데 그렇다하더라도 장갑차는 장갑차이기 때문에 화력과 방어력에서 주력전차(MBT; Main Battle Tank)를 능가할 수는 없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다음과 같은 장갑차의 태생적 한계 때문 이다.

 


장갑차는 적 전차나 진지가 목표가 아닌 탑승한 보병을 최대한 보호하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이므로 적의 소화기로부터 보호 할 정도의 장갑이면 된다. 전차의 경우는 대 전차전을 염두에 두고 설계 되므로 당연히 상대의 공격을 막아낼 방어력이 필요하다. 이런 이유로 전차의 방어력이 장갑차보다 강력 할 수밖에 없다. 장갑차의 과도한 장갑은 필연적으로 기동력의 약화를 불러 올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IFV인 M-2전투장갑차. 그렇다고 전차의 성능을 능가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최근 무기 발달사를 보면 기갑장비의 성능 향상 못지않게 PZF-3, RPG-7과 같은 대전차무기의 발달도 눈에 뜨인다. 휴대 및 사용이 간편한 이들 무기는 전차의 취약 부분에 명중하면 심각한 타격을 줄 정도로 위력이 있다. 그런 이유로 소화기로부터의 방어력만 갖춘 장갑차가 이들로부터 공격을 당한다면 그야말로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대전차무기의 성능 향상으로 장갑차의 안전도 위협받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도 이스라엘은 전차의 장갑능력을 가지고 있는 괴물 같은 장갑차를 보유하고 있는데 바로 아크자리트(Achzarit)라고 불리는 IFV다. 그런데 아크자리트는 앞서 소개한 타이란 전차만큼이나 주변 아랍국들을 배 아프게 만든 장갑차이다. 왜냐하면 타이란 전차처럼 아랍 측으로부터 노획한 T-54/ 55전차를 개조하여 만들어낸 장갑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갑차임에도 전차의 장갑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노획전차를 개조하여 만든 IFV인 아크자리트

 


노획한 적의 무기를 굳이 사용하지 않는다면 차후 적이 재 노획하지 못 하도록 완전히 폐기하는 것이 원칙이다. 사실 서방측과 소련측 무기는 구경을 비롯한 많은 부분이 상이하기 때문에 노획하였다 하더라도 포탄 등이 소모된다면 계속 사용하기 어려워 처음부터 폐기하는 것이 유리한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노획한 T-54/ 55를 자신들이 두고두고 사용할 수 있도록 개량한 것이었다.

 


                                  개조를 하였음에도 T-54/ 55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타이란 전차인데 사실 당시에 이스라엘은 메르카바(Merkava) 전차의 개발을 추진 중이었기 때문에 노획된 적 전차를 모두 개조할 필요는 없었다. 한마디로 그만큼 노획한 적 전차가 부지기수로 많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멀쩡한 노획 전차를 버리기도 싫었던 이스라엘은 이들을 장갑차로 만들기로 발상의 전환을 하였던 것이다.

 

                       1개 분대가 탑승 할 수 있고 탑승상태로 전투 가능하게 개조되었는데,
                                   
노획무기 재사용의 모범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200여대의 T-54/55 전차에서 포탑을 제거하고 엔진과 변속장치를 교체한 후, 장갑을 증강하고 후방부에 출입구를 설치하여 RPG같은 대전차무기의 공격을 막아낼 육중한 IFV인 아크자리트가 탄생한 것이었다. 무게가 45톤에 육박하여 도하가 불가능하고 기동성이 떨어지는 면도 있으나 보다 안전하게 보병을 최전선까지 수송 할 수 있게 되었다. 한마디로 노획무기 재사용의 모범이라 할 만한 사례가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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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베강에서 벌어진 냉전의 역사 [ 上 ]

 

 

1945년 4월, 전 세계를 전쟁의 불길로 뒤덮으며 지긋지긋하게 타오르던 제2차대전도 서서히 그 끝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패배를 인정할 줄 모르는 고집불통의 히틀러가 소년병까지 동원하며 최후의 발악을 해보았지만, 노도와 같이 동서 양쪽에서 독일의 마지막 숨통을 끊기 위해 진격하는 연합군과 소련군을 막을 방법은 사실 없었다.

 


 

              이 정도라면 전쟁을 포기 하는 게 맞지만 히틀러는 국민들을 계속 사지로 몰아넣었다.

 


동부전선은 독일과 소련의 완충지대였던 동유럽을 석권한 후 독일 본토로 계속해서 밀려들어오는 엄청난 규모의 소련군에 의해 철저히 유린당하고 있는 와중이었고,
서부전선 또한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구성된 연합군이 독일의 천연요새 지대인 라인강을 도하하여 진군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라인강을 도하하는 미군과 베를린을 점령한 소련군

 


이렇게 동과 서에서 독일의 중심부를 향해 달려 온 소련군과 연합군이 조우한 역사적인 장소가 독일 본토의 중심부를 흐르는 엘베강(Elbe River)이다. 엘베강은 체코에서 발원하여 독일을 가로질러 북해로 빠지는 1,000Km가 넘는 강으로 오래전부터 내륙수운에 사용된 독일의 주요 교통로이기도 하다.

 


 

                                              독일 본토를 가로지르는 엘베강

 


이렇게 독일 한가운데를 상징하는 엘베강변의 토르가우(Torgau)에서 1945년 4월 25일, 미 1군과 소련 코네프(Konev)군이 만나며 더 이상 진격할 곳이 없어지게 되었고, 유럽에서의 전쟁은 그것으로 사실상 종말을 고하였다. 비록 단말마적인 저항이 독일의 곳곳에서 간간이 벌어졌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토르가우에서 조우한 미소 양국 병사들

 


사진처럼 최전선에서 전쟁을 경험했던 미국과 소련의 병사들은 승리의 기쁨과 살아서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는 즐거움으로 말미암아 쉽게 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말단병사들의 기쁨과 기대와 달리 공통의 적이었던 나치 독일이 사라지자 이들은 앞으로 이 강의 동서 양편으로 나뉘어 서로 적으로 지내게 될 운명이었다.

 


 

                                    그들은 이 순간을 즐겼지만 적이 될 운명이었다.

 


이렇게 역사적 현장이었던 엘베강은 전후 독일을 동서로 분단하는 경계선이자 이데올로기로 나뉘어 동서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냉전시기에 유럽의 최전선이 되었다. 마치 한강 하구처럼 전쟁 전에 내륙수운으로 번창하였던 엘베강 일대는 팽팽한 군사적 대치가 이뤄지면서 침묵의 강이 되어 버렸다.


 

 

                                         냉전의 상징이었던 찰리검문소 경고판

 


그리고 이러한 동서의 첨예한 대치는 사상 최대의 전쟁인 제2차대전이 끝난 지 불과 5년 만에 지구반대편 한반도에서 결국 무력 충돌을 불러와 국제전으로 비화하였으며, 곧이어 베트남 전쟁과 세계를 핵전쟁의 공포로 몰아넣은 쿠바사태 같은 위기의 순간을 만들어 내었다. 어쩌면 인류사에 가장 무서웠던 시기가 바로 이때였을지도 모른다.

 


 

                      쿠바사태는 어쩌면 인류사에 있어 가장 초조했던 순간이었을지 모른다.
                                   (쿠바로 향하는 소련 선박을 감시하는 미국 정찰기)

 


1970년대 들어서 조금씩 이러한 긴장상태를 극복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는데 이를 데탕트(Detente)시대라 한다. 동서를 대표하는 미국과 소련 양쪽 모두 핵무장을 통한 무한경쟁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고, 차라리 경쟁이 아닌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는 선에서 공존의 길을 걷고자 하는 사고의 전환을 이루게 된 것이다.

 


 

                                무한 경쟁이 부담스러웠던 미소는 데탕트시대를 열었다

 


미국과 소련은 서로에게 부담이 되었지만 포기할 수 없었던 핵무기를 감축하는 방법으로 군축을 통한 실질적인 동서 긴장완화를 시도하였다. 그러면서 이벤트적인 성격의 깜짝쇼를 연출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 깜짝쇼의 배경으로 독일패전과 분단 그리고 동서 냉전의 상징인 엘베강이 역사에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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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획무기의 재활용 사례 [ 上 ]
 
 
세계가 동서로 갈려 첨예하게 대립했던 냉전 당시에 서방측의 주력전차(MBT; Main Battle Tank) 중 최고의 성능을 가진 걸작이라면 서독의 레오파드(Leopard 1)전차를 꼽는다. 하지만 2차대전의 패전국이라는 치명적인 멍에를 가진 서독의 전차가 실전에 투입되기는 곤란하였고 주로 흔히 패튼시리즈(Patton Series)라고 불린 미국의 M-47/ 48/ 60전차들이 서방측을 대표하는 전차로 활약하였다.
 


                                     냉전 시기 서방측의 대표적 전차였던 M-60
 

반면 동구권에서는 1980년대 이전까지 공산권과 친 소련 국가들의 유일한 무기 공급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소련의 전차 일색이었다. 따라서 2차대전 이후 등장한 미소의 전차는 서로를 숙명의 라이벌로 여기고 상대를 뛰어넘기 위해 항상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 전차 사이의 직접적인 충돌은 없었고, 이들 무기를 채용한 국가들 간의 전쟁을 통해 미국과 소련의 전차들은 서로 뒤엉켜 싸웠다.

 

                                         같은 시기에 공산권을 대표한 T-55전차
 

이 시기 미국과 소련이 만든 전차가 정면으로 충돌하여 대규모의 기갑전을 벌인 경우는 이스라엘과 아랍 제국 사이에 수 차례 벌어진 중동전에서였다. 동 시대에 있었던 한국전이나 월남전은 지형상 대규모 기갑전이 벌어지기 힘든 환경이었다. 결과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미국제 전차를 이용하던 이스라엘이 소련 전차를 사용하던 주변 아랍국들과 전투를 벌여 일방적이라 할 정도의 완승을 이끌어 냈다.
 


                                            욤키푸르 전쟁 당시 파괴된 양측 전차
 

하지만 이런 결과는 훈련, 전술에서 이스라엘이 뛰어났기 때문이지 전차의 성능 차이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냉전 시기에 동구권에서 사용한 소련제 전차들의 성능이 상당하였음은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인데, 엄밀히 말해 현재 미국의 주력 전차로 명성이 자자한 M-1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미국의 전차가 소련의 전차를 성능면에서 압도한 적은 없었다.

 

                   M-1의 등장으로 미국은 소련보다 좋은 성능의 전차를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전차로 잘 알려진 T-34의 예에서 보듯이 전차에 대한 기술적 기반이나 생산 능력을 본다면 오래전부터 소련은 이 분야에서 미국을 앞서고 있었다. 특히 1950년대 중반 소련의 야심작인 T-54/ 55전차가 출현하였을 때 피탄 면적을 최소화한 혁신적인 디자인과 뛰어난 기동성 그리고 서방의 전차들을 압도하는 대구경 주포 등으로 인하여 당대 최강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소련의 기술력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꾼 T-34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당대 최강으로 평가받았던 T-54/ 55전차가 주인이 바뀌어, 그것도 격렬한 전투를 벌인 교전 상대에 의해서 더욱 더 강력한 전차로 탄생한 희한한 경우가 있었다. 1967년 이른바 '6일 전쟁' 당시에 이스라엘이 노획한(사실 버리고 도망간 것을 접수하였다는 표현이 적절) 이집트의 T-54/ 55들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유기된 T-55전차들
 

지금도 무기개조 분야에서 감히 어느 나라도 따라 올 수 없는 실력을 가진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인데, 그들은 전리품으로 수확한 T-54/ 55를 개조하여 최강의 T-54/ 55를 만들어 냈다.  바로 Ti-1967 타이란(Tiran)전차인데, 이 전차들로 별도의 기갑여단을 운용하여 아랍의 T-54/ 55와 교전을 벌이기도 하였고 1972년 욤키프르 전쟁 때는 최신식 T-62전차들까지 노획하여 새로운 타이란 전차를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이스라엘이 개조한 최강의 T-55인 타이란 전차 부대의 퍼레이드
 

이렇게 탄생한 타이란은 동급 최강의 T전차로 명성을 날렸고 한때 이들의 주인이었던 아랍 국가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이후 이스라엘은 이들을 값지게 사용한 후, 외국에 팔거나 무상으로 원조하여 외교적으로 생색을 냈을 만큼 마르고 닳도록 써먹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만행(?)을 지켜만 보고 또한 얻어터지기까지 하였던 주변 아랍국들이 배가 아팠을 것은 불문가지일 것이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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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더 무서웠을까 ?
 
 
독일 본토를 향해 동과 서에서 수백만 연합군과 소련군이 몰려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유럽에서의 전쟁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특히 전쟁 초기 세계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던 독일 공군도 이 시점에서는 무지막지한 전략 폭격에 나선 연합군의 폭격기 비행대를 겨우겨우 요격하는 수준으로까지 전락하였다.

 

                 전쟁 말기 독일을 궁지로 몰아넣은 연합군의 전략폭격기 비행대
 

미군과 영국군의 주야에 걸친 대 공습은 독일의 전쟁 수행의지와 능력을 급속히 약화시키고 있었고, 독일 공군의 자랑이던 Me-109와 Fw-190이 이들을 막기 위해 연속된 출격을 감행하였으나 폭격기를 보호하기 위해 따라온 P-47이나 P-51 같은 연합군의 호위기들에 의해서 차단 당하기 일 수였다.

 

                   독일이 요격에 나섰으나 연합군 호위기들에게 차단당하였다

 
결국 독일은 기존의 방법으로는 엄청난 물량공세로 공격해 오는 연합군의 폭격기를 요격하는데 한계에 부닥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하나, 연합군 호위기들을 순식간에 따돌릴 만큼 빠른 속력과 기동력을 갖추어 폭격기에 단숨에 접근이 가능하고, 일발필살로 격추시킬 만큼 강력한 화력을 장비한 요격기가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방에 연합군 폭격기를 요격할 수단이 절실하였다


그 결과 유인 로켓이나 제트엔진을 활용한 다양한 전투기들이 제작되어 전장에 투입되었다. 그 중에는 세계최초의 로켓 전투기인 Me-163 Komet(혜성)도 있었는데, 땅딸하고 뚱뚱한 외형의 둔한 모습과는 달리 제2차 대전 당시 등장한 전 세계의 모든 유인 비행체 중 가장 빠른 속도를 가진 전투기였다.

 

                                     전설의 로켓 요격기인 Me-163
 

1944년 8월 5일 브란데스 상공을 비행 중이던 연합군 비행대 위로 3기의 괴물이 갑자기 튀어 올라와 폭격기들을 호위하던 3기의 P-51을 단숨에 격추시킨 후 순간적으로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고, 이를 그냥 멍하니 지켜보던 연합군 조종사들은 순식간 공포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전투기가 바로 Me-163이었는데 당대 최강이던 P-51보다 시속 250Km가 빨랐다.
 

        연합군은 귀신같은 속도로 치고 올라와 공격 후 사라지는 괴물을 발견하였다
 

때문에 연합군 측에서는 다음에 Me-163이 나타나더라도 상대의 공격이 빗나가고 빨리 사라져버리기를 기도하는 방법 밖에는 별다른 대책이 없을 정도였다. 결국 몇 차례의 습격을 더 받은 이후 연합군 폭격기 조종사들 중에는 Me-163이 출몰하는 곳으로의 비행을 거부하는 경우까지 발생하였다. 한마디로 Me-163은 연합군 조종사들에게 죽음의 공포였던 것이었다.

 

                            연합군 폭격기 조종사들은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무적의 요격기 Me-163로 비행하는 독일 조종사들이 가지고 있던 공포가 연합군 조종사들의 공포를 뛰어 넘고 있었다. 비록 동체는 오래전에 개발된 글라이더였지만, 1941년에 로켓엔진을 장착하여 급히 제작하면서 조종사의 안전에 대한 조치는 거의 없다시피하였는데, 이로인해 조종사들이 작전 이외의 사고로 많이 사상하였기 때문이었다.

 

                              많은 조종사들이 전투외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또한 추진체가 인체에 닿으면 피부를 괴사시킬 정도로 폭발력이 강하여 비행 중에 폭발사고가 벌어지는 경우도 있었고, 뿐만아니라 조종이 상당히 힘들고 착륙장치가 부실하여 전복되는 일이 비일비재 하였다. 때문에 독일의 조종사들은 너무나 위험한 Me-163을 좋아하지 않았고 일부 고참 조종사들은 탑승을 거부하기도 하였다. 즉 Me-163은 독일 조종사들에게도 죽음의 공포였던 것이다.

 

                 조종은 물론 연료주입 같은 유지보수 작업도 위험한 기체였다
 

사실 Me-163은 비행 가능 시간이 10여분으로 매우 짧아 극히 한정 된 작전에만 투입될 수 있었다. 그리고 워낙 초고속에다 선회 반경이 커서 공격 기회를 제대로 잡기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막상 전사에 기록된 격추기는 총 9기 밖에 안되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 심리적 효과와 파장에 비해서 전술적 성과는 극히 저조한 요격기 였던 것이다.
 


           사진의 편안한 모습과 달리 피아 모두에게 Me-163은 공포 그 자체였다
 

즉 한쪽은 탑승을 두려워 할 만큼 무서워했고, 다른 한쪽은 나타나지 않기만을 학수고대 하였을 정도였는데 재미있는 것은 서로 자신들의 공포감만 느낄 뿐 정작 상대가 얼마나 Me-163을 무서워하는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전쟁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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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을 쏘는 용기
 
 
조총 같은 초기의 총은 현대에 와서 장난감정도로 취급 되지만 기계공업과 금속재료의 발달됨에 따라 총의 성능은 이전과는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관통력, 명중률, 사거리 등 여러 기준으로 총의 우열을 설명하지만 앞서 언급한 조총이라도 인마를 살상하는데 부족함은 없다. 그런데 총은 탄생 때부터 지금까지 굳건히 내려오는 한 가지 법칙이 있다.
 


                                         아무리 구식이라도 총은 살상 행위가 가능하다

 
바로 비유도무기라는 것이다. 일단 발사되면 단순히 궤적을 따라 날아가므로 발사 전 조준 행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물론 오래되거나 기계적 결함으로 말미암아 정확히 날아가지 않고 탄착군이 매번 다르게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만 적어도 현대에 사용되는 총은 정비를 소홀히 하지 않고 조준만 잘하면 목표물까지 날아가는데 그리 커다란 문제는 없다.
 


                                    총은 비유도 무기이므로 조준이 상당히 중요하다
 

때문에 총의 성능은 사거리, 관통력 등으로 판가름 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사용자의 개인적 능력에 따라 살상력이 결정 되는 무기라 할 수 있다. 같은 총을 가지고 특등사수와 신병 간에 사격경기를 한다면 그 결과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아무리 좋은 성능을 가진 총이라도 제대로 조준할 수 없는 이가 사용한다면 결코 무력투사의 도구가 될 수 없다.

 

                            제대로 조준하지 않고 총을 쏘면 무기로써의 효용도가 낮아진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대강 쏘기만 해도 적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지지만 이런 것은 사실 말도 되지 않는다. 엄폐하여 노출 된 적을 저격하는 상황이 아닌 한 교착 된 전선에서 서로를 향해 조준 사격을하기는 상당히 어렵다. 조준을 하려면 머리를 들어야 하는데 전선에서 상대를 쳐다보는 것 자체가 사실 상당히 하기 힘든 행동이기 때문이다.

 

                                    총을 제대로 쏘기 위해서는 부단한 훈련이 필요하다
 

때문에 평소에 많은 훈련을 쌓아야 전투 중에 제대로 사격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감정을 가진 동물이라 아무리 훈련을 해도 어려운 것이 있는데 바로 자신의 목숨과 관련하여 본능적인 행동이 나올 경우다. 제대로 된 전쟁영화를 보면 머리를 숙인 체 손과 총만 참호 위로 내놓고 총격전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이 총격전의 진짜 모습이 아닐까 생각 된다.

 

                                               이런 모습은 결코 가능하지 않다
 

참호에서 총만 내밀고 싸웠던 전쟁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제1차대전 당시의 서부전선인데, 많은 병사들은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를 적의 총알에 대해 극도의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총구만 내놓고 사격하는 참호총(Trench Gun)이라는 형태의 총까지 등장하였을 정도였다. 명중률은 당연히 형편없었고 진짜 재수 없는 적들이나 이 총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어쩌면 이것이 인간이 본능적으로 취할 수 있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사실 무섭고 두려운 상황에서 내 몸을 보호하기 위한 본능은 인간이 행하는 그 어떤 행위보다 우선한다. 때문에 명중률도 형편없고 그다지 효과도 없는 참호총과 같은 총이 실제 전선에서 사용되기도 하였을텐데, 그 만큼 전투 중에 몸을 드러내 놓고 나를 쳐다보는 상대를 쏘기 위해서는 본능을 초월하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라도 싸워야하는 전쟁은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병사 개개인에게 전투는 본능이 먼저 튀어 나올 수 있는 무서운 순간이다. 이러한 무서움 속에서도 두려움을 최대한 억제시키고 군인답게 용감히 전투에 임할 수 있게끔 현재도 우리의 많은 젊은이들은 반복적으로 훈련을 받고 있다. 이처럼 그들의 땀과 눈물 그리고 노력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안전할 수 있다. 그들의 노고에 감사의 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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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부대 ? .. No .. 첨병부대 !




軍은 국방이라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당연히 그것이 군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재해가 있을 경우 응급복구에 최우선으로 동원되는 중요한 상비자원의 역할도 하고 있다. 따라서 전쟁이 아닌 유사시에 군이 수시로 동원되고는 하는데 그 중 제일 먼저 움직이는 부대가 공병대다. 그 이유는 공병대가 보유한 장비와 기술이 응급복구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수해 복구에 투입된 공병대

 


동티모르,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아이티의 경우처럼 국군의 해외 파병 시, 의무대와 더불어 제일 먼저 파견되는 부대가 공병대인데 이것은 재건작업을 통하여 민사작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함이다. 이와 같은 모습이 자주 노출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공병대를 단지 군에 있는 건설부대 혹은 재건부대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아이티에 파견 된 단비부대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예처럼 토목공사를 하는 시설(施設) 공병 업무도 공병대의 중요한 임무이지만 원래 공병의 주 임무는 전투부대를 가장 최측근에서 직접 지원하는, 아니 최전선에서 직접 전투를 수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첨병부대다. 다시 말해 공병은 후방의 지원부대가 아닌 수색, 포병 또는 기갑과 같은 전투병과라는 의미다.


 

                                            캐나다의 전투공병의 수중침투 훈련 모습

 


흔히 첨병부대라 한다면 수색대 같은 경보병부대가 떠오르지만 수색대의 주 임무는 교전이 아니라 본진의 작전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한 사전 정찰 활동이다. 오히려 본진의 공격과 방어를 위해서 빗발치는 포탄이 난무하는 최전선의 위험지역에서 제일 먼저 투입되어 작전을 벌여야 하는 부대가 공병대인 것이다.

 


                                            지뢰를 제거하여 진격로를 개척하는 모습


 

공병대는 공격 시 아군 주력부대가 자연장애물이나 적이 설치한 인위적 구조물을 극복하고 쉽게 전진 할 수 있도록 사전에 진격로를 개척하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한다. 한반도처럼 산과 하천이 많은 지역에서 공병의 역할은 두말할 필요가 없고 특히 집단화 된 기계화부대로 적의 종심을 속전속결로 타격하여야 하는 현대의 전장 환경에서 그 중요성은 더욱 크다.

 

                                              공병대의 부교 설치 모습

 


만일 도하를 위한 부교가 설치되어 있지 않고, 폭격으로 끓어진 길이 연결되지 않고, 전진로 앞에 적이 매설한 지뢰지대가 온전하게 있다면 아무리 좋은 전투 장비를 갖춘 부대라고 하더라도 발자국도 움직이기 힘들 것이다. 즉 공병대는 전투부대의 이동에 앞서 최전선의 진격로를 먼저 개척하여야 하는 중요하고도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는 부대인 것이다.

 


                                                미군 공병대의 지뢰지대 수색

 


공병대는 또한 후퇴 시에도 중요한 임무를 수행한다. 적의 주력이 접근할 목지점에 지뢰를 살포하거나 지형지물을 이용한 방어막을 구축하여야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교량이나 도로를 파괴하는 임무도 수행한다. 그런데 이런 일 또한 아군 주력이 안전하게 후퇴한 이후 공격하여 접근하는 적들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최후까지 남아서 하는 지극히 위험한 임무다.


 

                                        당신들의 노고에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이처럼 공병대는 공격 시에는 제일 먼저 전선에 투입되고 후퇴 시에는 제일 나중에 후퇴하여야 하는 가장 어렵고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는 첨병부대다. 거기에다가 평화 시에 건설과 재건을 통한 대민지원과 국위선양에 항상 앞장서고 있다. 자랑스러운 임무를 묵묵히 수행하는 모든 대한민국의 공병 병과 관계자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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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의 기관총
 

현재 여러 나라에서 채용하고 있는 M-2중기관총은 탄생한지 거의 100년이 다 된 장수 무기로 국군도 창군 당시부터 사용하여 왔다. 12.7mm의 대구경을 가진 중량화기여서 주로 차량이나 항공기에 거치하여 사용하는데 그동안 많은 성능개량이 이루어졌다. 특히 가장 최신식 버전으로 알려진 M-2/QCB(Quick Change Barrel)는 치명적인 단점으로 알려진 총열 교환 방법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였다.

 

                                            미 해병이 사용중 인 M-2중기관총

 
그런데 이러한 M-2/QCB를 더욱 개선하여 우리 실정에 맞게 탄생한 중기관총이 K-6다. K-6는 국산 무기 개발의 초창기라 할 수 있는 1986년에 개발에 착수하여 불과 1년 반 만에 제작을 완료하였고, 1989년부터 전 군에 보급되었다. 다시 말해 국군이 사용 중인 K-6는 가장 성능이 개선된 M-2라 해도 과언이 아니고 일선 부대에서 오래 동안 실전에 사용되면서 호평을 받아왔다.
 

                                               국군이 사용 중인 K-6중기관총
 

비록 차세대 중기관총인 XK-13가 성공적으로 개발되어 채용되면 서서히 교체되겠지만 100년 가까이 현역에서 물러나지 않은 M-2의 역사를 반추한다면 K-6는 그리 쉽게 도태되지 않고 앞으로도 상당기간 국군의 주력 중기관총으로 그 역할을 다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최근 일부 매체를 통해 알려진 작은 소식이 있었는데 그것은 K-6의 역사에 있어 기념비적인 사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개발 중인 차세대 중기관총 XK-13
 

무기는 제식번호 외에 그 용맹함을 상징하는 별도의 애칭이 부여되는데, 예를 들어 국산 기동헬기의 이름인 '수리온'은 일반인들의 공모를 받아서 탄생하였다. 그런데 소총이나 기관총처럼 소화기의 경우 애칭은 없고 대개 제식번호로만 불리는데, 이번에 특이하게도 K-6에 이름이 부여 되었다. 비록 일부 도입 물량에 한해 부여된 것이지만 그 의의는 사뭇 다르다.
 

                                       최근 도입된 K-6에 새롭게 이름이 부여되었다.


1년 전인 2010년 3월 26일 오후 9시 22분, 북의 기습 도발로 천안함이 침몰 당하면서 46 용사가 희생되었고 구난 과정 중 해군 특수전여단의 한주호 주위가 순직하는 사건이 벌어져 온 국민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이 당시 전사한 故민평기 상사의 모친인 윤청자 여사가 "영해와 영토를 한 발짝이라도 침범하는 적을 응징하는데 써 달라"며 1억8백9십8만8천원을 기탁하였는데 해군은 이러한 고귀한 뜻을 받들어 K-6중기관총을 구입하였다.

 

                                                 故민평기 상사와 윤청자 여사

 
이처럼 뜻 깊게 도입된 18정의 K-6중기관총이 천안함이 속해 있던 제2함대 소속 함들의 근접 방호용 무기로 조만간 장착 될 예정이다. 처음에는 이를 '민평기 기관총'이라 명명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천안함 사건을 잊지 말고 46용사 모두를 의미할 수 있는 3월 26일을 기려 '3.26 기관총'으로 명명하게 되었다고 한다. 비록 이와 같이 기증된 18정의 K-6에 한하여 붙은 이름이지만 여기에 담긴 뜻은 엄청나게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번에 기증 된 '3.26 기관총'
 

2000년 예멘의 아덴 항에 정박하고 있던 미 해군의 최신예 구축함 콜(Cole)호가 알카에다의 폭탄 테러에 의해 60여명 가까이 사상당하고 선체가 대파되는 피해를 입은 적이 있었다. 각종 첨단 무기를 장착한 최신예 이지스함이 어이없게 피격당한 것이었는데 이때부터 가장 오래된 구형 장비라 할 수 있는 M-2중기관총이 가장 가까이 다가온 적을 방어하는 무기로 새롭게 각광받기 시작하였다.

 

                                        '3.26 기관총'은 호국의 첨병이 될 것이다
 
이번에 해군 초계함에 새롭게 장착된 K-6도 마찬가지다. 비록 중기관총은 은밀히 침투하는 적 잠수함이나 적함을 단숨에 격파할 수는 없지만 비정규전 도발을 선호하는 북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무기다. 최첨단만으로 모든 침략을 막아낼 수 없음은 이미 역사가 입증해 주고 있다. 이번에 새롭게 이름이 부여된 '3.26 기관총'이 기증자의 뜻을 기려 호국의 첨병으로 그 맡은바 역할을 다해 주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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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을 망각하고 앞으로 나갈 수는 없다
 
 
지난 2004년 2월 초, 러시아 태평양함대 소속의 미사일 순양함 바르야그(Varyag)가 이끄는 일단의 군함들이 인천항을 방문하였다. 양국 해군의 친선도모 등 여러 목적이 있었지만, 한반도를 빙 돌아 인천을 방문한 가장 큰 이유는 정확히 100년 전 러일전쟁 당시에 인천 앞바다에서 전사한 제정러시아 함대 소속 장병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였다.


                                             러시아의 미사일 순양함 바르야그
 

1904년 1월 27일, 일본함대가 당시 러시아의 조계지였던 뤼순(현 따롄)항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함대를 급습하여 러시아 군함 3척을 침몰시키면서 러일전쟁이 발발하였는데, 이 와중에서 두 척의 러시아 순양함이 극적으로 항구를 탈출하였다. 하지만 제물포(현재 인천항) 앞 팔미도 부근에서 추격에 나선 14척의 일본 군함들에 의해 엄중히 포위당하는 위기에 빠졌다.


                                      뤼순항에서 탈출한 바르야그(右)와 까레예쯔
 

14대 2라는 엄청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군함들은 항복 대신 교전을 선택하였다. 용감하게 포탄을 일본 함대에 발사하여 2척의 일본 순양함을 침몰시키면서 분전하였으나 포위망을 벗어나지 못한 채 일본 함대의 집중 공격을 받아 침몰 당하였다(이상 제물포해전).  그런데 당시에 침몰하여 수많은 수병이 목숨을 잃은 러시아 군함들의 이름이 바르야그까레예쯔(Koreyets-한국이라는 뜻)였다.

 

                        제물포 해전에서 일본 해군의 압도적인 공격으로 침몰당한 바르야그
 

이때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일부 러시아 수병들은 일본의 포로가 되었다가 강화조약 성립 후 본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는데, 제물포 해전에서 보여 준 죽음을 불사한 저항 때문에 영웅으로서 열렬히 환영 받았다. 이처럼 비록 비참한 최후를 당했지만 바르야그와 까레예쯔는 러시아 해군의 역사에서 영원히 기억되어야 할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지난 2004년 인천을 방문한 러시아함대 지휘관의 모습
 
 
그래서 100년이 지난 2004년, 같은 이름을 승계 받은 바르야그함이 역사적인 패전의 장소를 방문하여 추모행사를 벌였던 것이었고, 인천 연안부두 친수공원에 추모비까지 세웠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는데, 구 소련 해군이나 지금의 러시아 해군 함정들은 대한해협을 통과할 때마다 반드시 러일전쟁 당시에 산화한 러시아 해군 전몰용사들에 대한 추모행사를 벌인다는 것이다.


                                              연안부두 친수공원 내 추모비
 
위에서 언급한 내용은 러시아가 세계사에서 참패로 기록된 러일전쟁 당시의 치욕을 결코 잊지 않고 있음을 의미하는 중요한 예라 할 수 있다. 비록 바르야그가 적의 공격으로 침몰 당해 러시아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안겨주었지만, 현재 최신 전투함의 이름을 바르야그로 명명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습공격한 적과 중과부적의 상태에서도 당당히 맞섰다는 사실 또한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비참한 최후를 당했지만 바르야그는 영원히 기억될 이름이다
 

러시아 해군이 정작 치욕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적을 얕보고 방심하였던 사실이다. 즉 패배 그 자체보다 상대를 무시하였던 자체가 바로 치욕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교훈을 잊지 않기 위해 오래전 산화한 장병들을 추모하면서 역사적 과오를 다시 한 번 성찰하는 것이다. 이처럼 치욕은 아픔이지만 회피하여야 할 과거의 유산은 결코 아닌 것이다.
 


                                                      합동영결식

 
지난해 5월 4일 국방부 대회의실에서 열린 대통령 주재 전군 주요 지휘관회의에서 천안함이 침몰한 3월 26일을 '국군 치욕의 날'로 인식하고 기억할 것이라고 밝혔는데, 당시에 치욕이라는 단어를 쓰면서 까지 자책하였던 것은 그만큼 결의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다. 적의 기습에 의해 꽃다운 수많은 장병들이 희생당한 엄청난 사실을 단지 아픈 기억이라고 회피할 수는 없다.

 

                                치욕을 결코 잊지 말고 와신상담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결과가 치욕스럽다고 이를 무조건 감추거나 숨길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러한 자세가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치욕을 깊이 되새기고 반성의 기회로 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3월 26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여야 하며, 이런 일이 다시는 재발하지 않도록 되새기는 반면교사의 시간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천안함과 순국장병들을 잊지 말아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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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무서웠던 무지(無知)
 

 

지금이야 바다 속으로부터 우주에 이르는 전 지구적인 방공 감시망과 이를 요격하는 정밀한 유도 미사일 체계가 있기 때문에 가상 적국의 중무장한 폭격기가 미국 본토로 침투하여 폭탄을 떨어뜨릴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희박하지만, 앞의 글에서 설명한 것처럼 당시만 해도 전투기가 발진, 폭격기까지 요격을 나가 격추 시키는 방법 밖에 없었다.

 

                             오늘날 방공체계는 이전과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발달하였다.

 
당시 미국의 방공체계를 연구하던 담당자들의 생각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미국 본토를 공격하려는 적의 폭격기를 무슨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완전히 없애버리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이것은 한편으로 적의 핵 공격을 어떻게 해서든 무력화 시키겠다는 미국의 결연한 의지이기도 하였다.


                                           최신 고고도 방공 유도무기인 SM-3

 
하지만 핵을 막기 위해 핵을 사용하겠다는 발상은 경악스러울 뿐이다. 어쨌든 이러한 목적으로 미국은 AIR-2 지니(Genie)로 불리는 전술 핵탄두 탑재 공대공 로켓탄을 개발하였는데, 이것을 다연장로켓인 마이티마우스 대신 F-89 요격기에 탑재하여 소련 전략 폭격기가 미 본토에 침투하는 것을 막아내고자 하였다.

 

                                                    AIR-2 전술 핵 탑재 로켓

 
당시의 기술수준으로는 오늘날 공대공미사일 같은 정밀유도무기의 제식화가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기관포보다 상대적으로 강력한 다연장로켓을 요격용 무기로 채택하였다. 그런데 이것으로도 적의 폭격기를 격추시키지 못한다면 어마어마한 핵폭탄의 폭발력을 이용하여 흔적도 없이 적기를 날려버려 미국을 지키겠다고 당시의 방공 책임자들은 결론을 내어 버린 것이었다.


                             AIR-2 핵 로켓을 시험 발사하는 F-89(左)와 지상의 관측요원
 

비록 AIR-2가 전략 폭격을 염두에 둔 공격용 핵폭탄은 아니고 폭발력과 살상력이 한정 된 방어용 전술 핵무기이기는 하였지만, 단지 적의 폭격기를 잡기위해 그것도 자국 상공에서 핵폭탄을 먼저 쏘는 행위도 서슴지 않겠다는 자세는 당시 냉전시기의 대립이 얼마나 심각하였는지 알려주는 예라 할 수 있을 정도다.

 

                                           핵 폭발 모습과 이에 놀란 지상 관측요원
                                        지금이라면 감히 상상도 못 할 실험 모습이다.
 

물론 당시 기술로는 이것이 확실한 요격수단 이기는 했겠지만, 핵폭탄을 이용하겠다는 것 자체가 아무리 생각해도 황당할 뿐이다. 큰 피해보다 차라리 작은 피해를 감수 하겠다는 것으로 밖에는 생각 할 수 없는 것 같다. 하늘에서 핵폭탄을 터뜨려도 괜찮다고 생각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방사능 오염의 피해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았다면 과연 이러한 방어체계를 생각 할 수 있었을지 모를 정도다.

 

                           어쨌든 F-89는 사상 최고의 무장을 탑재한 요격기로 기록 되었다.

 
어쨌든 핵무기를 장착하여 역사상 가장 강력한 무장을 갖춘 전투기가 되었던 F-89는 17년 이상 1,000여대가 배치되어 미 대륙 방어임무에 투입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핵 만능주의가 판치고 이데올로기가 이성을 압도하던 시기였지만 무식한 것인지 아니면 용감한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을 뿐이다. 만일 오늘날 이러한 방공요격체계를 만들겠다고 하면 먼저 분노한 국민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완벽한 방공체계가 과연 존재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지난 9.11 테러 당시를 회상하면 아무리 기술적으로 완벽한 방공망을 구축하였어도 어쩔 수 없는 한계는 있나 보다. 당시 자료를 보면 비상사태를 감지하고 방공 전투기들이 출격하였지만 민항기라서 격추를 망설였다는 이야기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결국 미국의 심장부가 테러리스트의 공격으로 피해를 입었던 것을 보면 완벽한 방공망은 어쩌면 영원히 이루기 힘든 과제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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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식한 혹은 용감한 ?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떨어뜨려 제2차 대전을 종결지은 미국은 유일 핵보유국으로 전후 세계질서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왔다. 비록 곧바로 개시된 냉전으로 공산권과 긴장된 줄다리기를 벌여왔지만 필살기인 핵폭탄의 보유는 체제경쟁에서 미국이 충분히 앞서고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만들었다.

 

                 핵폭탄은 제2차대전 종결의 상징이 되었지만 한편으로 냉전의 아이콘도 되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미국의 자만도 잠시뿐이었다. 불과 4년 후인 1949년 9월, 소련이 핵폭탄 실험에 성공하자 미국 또한 소련의 핵폭탄 위협에 노출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미국이나 소련 모두 핵폭탄의 무서운 폭발력만 알고 있었지 방사능피해가 더 무서운 죽음의 그림자라는 사실은 제대로 파악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초기에는 핵폭탄의 폭발력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핵무기 무적론이 거세게 몰아친 냉전기간 초기에 발생한 한국전쟁에서 공공연히 핵폭탄의 사용이 운운되었을 만큼, 인류는 핵폭탄의 진정한 무서움을 모르고 있었다. 이런 시대적 상황으로 인하여 지금 생각으로는 말도 안 돼는 터무니없는 무기가 개발되었을 뿐만 아니라 실전배치 되기도 하였다. 다음은 이런 상상을 초월한 황당한 무기의 이야기다.

 

                         뭐 이런 정도는 아니었지만 냉전 초기 황당한 무기가 개발 되었다.
                                     (1930년대 잡지에서 상상한 미래의 전차)
 

지금은 핵폭탄을 대륙간 탄도 미사일에 탑재하여 사용하는 것을 정석으로 여기지만, 1950년대 미소가 핵무기로 중무장하며 냉전시기를 열어갔을 때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면 핵폭탄을 운반할 플랫폼이 그리 다양하지는 않았다. 당시에는 히로시마나 나가사키의 경우처럼 장거리 폭격기를 이용하여 적진 깊숙이 침투하여 투하하는 방법이 유일무이한 방법이었다.

 

                                  냉전 초기 미국의 전략폭격기인 B-36 Peace Maker
 

이런 이유로 미소 모두 상대편의 전략 거점 깊숙이까지 침투할 장거리 전략 폭격기의 개발에 서둘렀고, 한편으로는 침투하는 적의 폭격기를 방어할 고성능 방공 요격기의 필요성도 제기 되었다. 지금이야 미사일을 이용한 지대공, 함대공 방공체계 뿐만 아니라 공대공 요격 체계도 있지만, 당시에는 적기의 요격은 사실상 제2차대전 당시의 방법에서 벗어 날 수 없었다. 다시 말해 전투기를 출격시켜서 폭격기가 격추될 때까지 쏘아 버리는 방법 뿐 이었다.

                                        미 본토 방공 요격기로 활약한 F-89 Scorpion
 

이때 미국은 노스롭사가 개발한 F-89 스콜피온(Scorpion) 전투기를 미국 본토 방어 전용 요격기로 개발하여 실전배치하였다. 이 요격기는 적 폭격기가 미국 본토까지 침투하였을 경우, 핵폭탄 투하 전에 완벽하게 피격 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그래서 전통적인 고정 무장인 기관포를 제거하고 마이티마우스(Mighty Mouse)라고 불리는 다연장 로켓 발사기를 장착하였다.

 

                                              Mighty Mouse를 발사하는 F-89
 

지금처럼 정확한 정밀유도 미사일 체계가 없었던 당시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요격하기 힘든 기관포를 사용하지 않고 폭격기에 빠르게 다가가 넓은 면적에 로켓탄을 집중 발사하여 타격을 가하는 것이었는데, 당시로는 훌륭한 요격 방법이었다. 그런데 군부의 책임자들은 이러한 방공체계도 별로 신뢰하지 않았는지 빗맞아도 적의 폭격기를 완전히 분쇄해버릴 체계를 생각하였다. 바로 핵이었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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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의 용병
 
 
최근 리비아 사태와 관련해서 돈을 받고 전투를 대행하는 용병에 대한 보도가 자주 언급된다. 용병은 그 역사가 오래된 편인데, 국민개병제가 정착되기 이전 유럽에서는 전투의 상당 부분을 책임지던 주체이기도 했다. 국방을 용병에 의지하는 것이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리비아의 경우나 교황청을 지키는 스위스용병(Swiss Guard)들처럼 지금도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리비아사태에 등장한 용병
 

용병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까삐블랑(Kepi Blanc)이라 불리는 프랑스의 외인부대 (Foreign Legion)다. 그런데 까삐블랑이 소문만큼 용맹하였냐는 조금 의문스러운 점도 있다. 부대원 전원이 전멸하면서까지 요새를 사수하는 등, 많은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지만 그보다는 영화나 소설의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하여 초강력 부대로 과장되어 소문난 것은 아닌지도 모른다.

 
                                                   프랑스의 외인부대
 

앞서 언급한 교황청의 스위스 용병은 역사적으로 최강이라는 전통을 간직하고 있고 지금도 그 용맹함이 자자하지만, 현재 이들은 소규모의 경호부대 성격을 가지고 있어 전선에서 직접 작전을 실시할 전투부대라고 보기는 힘들고 오히려 근자에 들어서는 바티칸을 대표하는 하나의 상징으로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주관적인 질문이라 생각되지만 실전 전투부대로 최강의 용병부대는 어디일까?

 
                                   그 자체가 관광 상품이기도 한 바티칸의 스위스 용병
 
이에 대해 다른 의견이 많겠지만 영국이 운용하고 있는 구르카(Gurkha)용병을 최강이라 하여도 결코 과언이 아니리라 생각한다. 네팔의 구르카족 출신들로 구성된 구르카용병은 용맹하기로 첫손을 꼽는데 결코 모자람이 없는 무시무시하고 경우에 따라 잔혹할 만큼의 전과를 역사에 기록하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영국이 이들을 용병으로 쓰게 된 것은 그들과 치열한 싸움을 벌인 이후였다.

 
                                         이라크전 참전직전 훈련 중인 구르카용병
 
19세기 초 영국이 동인도 회사를 설립해서 인도를 식민지화 할 무렵 영국의 침략에 대항하여 네팔 지역의 구르카인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맞서 싸웠다. 구르카인들은 고산지대 출신이라 엄청난 폐활량을 바탕으로 뛰어난 체력과 함께 용맹한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쿠그리(Kukri)검이라는 단도를 사용하여 근접전을 벌일 경우 결코 패하지 않는 뛰어난 전과를 발휘하여 상대에게 극심한 공포를 안겨 주었다.
 
                                           쿠그리검을 들고 돌격하는 훈련모습
 
이처럼 저항 초기에 영국군을 위기로 몰아넣기도 하였지만 결국 장비의 열세로 항복하면서 식민지로 전락하였는데 오히려 이러한 과정에서 영국은 구르카인들의 뛰어난 전투능력과 강인한 정신력에 반해 버렸다. 이후 영국은 이들을 전투병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당근과 채찍을 동원하였고 결국 가장 믿음직한 용병으로 편입하는데 성공하였다.


                                                  제1차대전 당시 프랑스 전선
 

이들은 이후 1차대전, 2차대전, 한국전쟁은 물론이거니와 포클랜드전쟁, 걸프전처럼 영국군이 가담한 대부분의 전쟁에 참전하여 그 용맹을 떨쳤다. 1982년 포클랜드 전쟁당시 포클랜드 제도를 점령하고 있던 아르헨티나군이 구르카부대가 공격 한다는 말에 곧바로 항복 하였다고 전할 만큼 그 명성은 이미 전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는데 현재도 약 3,000여명이 영국군으로 근무 중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해리 왕자와 함께 근무를 서는 구르카부대
 
변변한 직장을 구할 수 없는 네팔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엄청난 경쟁을 뚫고 선발된 후 영국에서 9개월 동안의 고된 훈련기간을 거쳐야 정식으로 용병이 될 수 있을 만큼, 네팔인들에게는 선망의 직업으로 바뀐 지 오래되었지만 막상 이들을 고용한 영국에서는 1997년 이후에 입대한 이들에 한해 심사를 거쳐 시민권을 부여하는 등 그동안 전과에 비해 적절한 대우는 미흡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적절한 대우를 요구하는 예비역 구르카부대원

 
하지만 네팔의 경제상황이 좋아져 굳이 용병으로 돈 벌러 갈 필요가 없거나 영국이 이들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면 용맹한 구르카용병의 이야기도 한낮 과거의 이야기로만 남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그것이 좋은 것이 아니겠는가? 이번 리비아 사태에서 보듯이 전쟁터나 분쟁지역에 용병이 투입되는 것이 결코 바람직한 모습으로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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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략자의 마지막 도박, 복제 전투기 [下]
 
 
태평양전쟁 말기에 미 해군이 주력으로 사용하던 전투기는 F4U와 F6F였다. 전쟁 초기에는 일본의 제로기가 구닥다리 미군 전투기를 압도하였지만 얼마가지 않아 새롭게 등장한 위 전투기들에 몰려 도망 다니기에 급급한 실정으로 역전 당하였고, 일본은 이런 격차를  극복할 수 없었다. 일본 군부는 이러한 암울한 상황을 다시 바꾸고자 하였다.
 
                               시범비행중인 미군의 F6F(아래)와 일본의 제로전투기(위)
                                          하지만 제로기는 F6F와 맞서기 힘들었다.
 

마침내 1944년 중순경, 만난을 무릅쓰고 잠수함으로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서 독일로부터  얻게 된 최신 군사지원 자료에는 전편에 소개한 Me-163외에도 세계최초로 제식화한 제트전투기 Me-262에 관한 귀중한 자료도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귀한 자료를 입수한 일본은 이를 Ki-201로 명명하고 나까지마사에 즉시 제작하도록 지시하였다.
 
                                            최초의 제트 전투기인 독일의 Me-262
 

그런데 제2차 대전 당시 일본 군부는 육군과 해군이 서로 협력하기 보다는 권력을 분점하고 경쟁하던 사이였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전사나 무기개발 과정을 살펴보면 자존심을 내세워 쓸데없이 경쟁을 하고는 하였는데, 그러한 와중에 일본식 Me-262 또한 처음부터 육군용과 해군용으로 나뉘어 개발되었다.

 
                                      일본판 Me-262인 Ki-201 제작 중 모습
 

물론 전투기가 육군용과 해군용이 기능이나 성능이 차이가 많이 날 수밖에는 없지만 1945년에 와서 일본 해군은 더 이상 항공모함을 운용할 여력이 되지 못한 상태였다. 더구나 한곳으로 자원을 집중하여 무기를 개발해도 부족할 판에 굳이 각 군별로 자원을 나누어 신무기 개발에 나선 것은 한마디로 말해 무모한 도전이었다.

 
                                                  나까지마 제작공장
 
어쨌든 설계도를 바탕으로 일본은 육군용인 카류해군용 기까의 동시 개발에 착수 하였다. 비행체로써의 기본구조는 육군용 해군용이 별로 차이가 없었지만, 이를 사용하고자하는 목적은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해군은 적의 폭격기를 요격하는 제공 전투기로 개발에 나섰지만 육군은 폭탄을 탑재 할 수 있는 전폭기로써 개발방향을 잡았다.
 
                                                    엔진장착부
 

사실 Ki-201의 원형인 Me-262도 히틀러의 간섭으로 인하여 폭격기로 개발되는 잘못된 길을 갔었다. 당시 독일이건 일본이건  본토가 무차별적으로 폭격을 당하던 와중이었기 때문에 연합군의 공습을 저지하는 것이 우선의 당면 과제였다. 따라서 단 한기의 고성능 요격기가 아쉬운 형편이었는데 프로펠러기가 감히 추격하기 어려운 속도를 자랑하는 제트기는 이에 적합한 물건이었다.

 
                                                  지상시험 중인 모습

 
하지만 즉시 보복을 외치던 위정자들의 편협한 발상에 제트기의 이런 장점은 묻혀버렸다. 지상공격은 비행기의 속도보다 저공에서의 선회력과 대공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내구성이 좋아야하는데 초기의 제트기는 그런 임무에 부적합하였다. 결론적으로 자신들의 처지를 직시하지 못한 히틀러나 일본 육군의 한심한 발상은 인류사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전체 도색이 완료된 Ki-201


어쨌든 카류를 기준으로 일본 군부는 제작사에 운항속도가 최고시속 852km, 상승한도는 12,000m 그리고 항속거리는 980km가 되며 주무장으로 30mm기관포 2문과 보조무장으로 20mm기관포 2문 그리고 500~800Kg의 폭탄 1발을 장착할 수 있도록 요구하였는데 이는 오리지널인 Me-262의 성능을 웃도는 것으로 당시 일본 항공업계에서 실현 불가능한 가혹한 것이었다.

 
                                 일본의 인기 애니메이션인 마징가에 등장한 Ki-201

 
제작사는 1946년 3월까지 원형기를 포함하여 총 18기의 초도기를 만들 예정이었지만 종전으로 개발은 중단되었다. 비록 이들이 완성되었어도 전쟁의 향방을 바꿀 수는 없었겠지만 연합군은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는데 조금 더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우리 입장에서는 미완성으로 끝난 이러한 시도가 다행이라 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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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략자의 마지막 도박, 복제 전투기 [ 上 ]
 
 
허가를 득하여 합법적으로 모방하는 경우도 많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짝퉁이라 불리는 것처럼 불법으로 흉내 내는 경우도 있다. 전자건, 후자의 경우건 오리지널이라 불리는 원래 기술이나 제품이 좋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평이 좋지 않다면 굳이 기를 쓰고 전수받으려 하거나 불법으로 복제할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짝퉁은 그만큼 원판이 좋고 유명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중국이 짝퉁 제국으로 불리지만 그것은 허가를 득하지 않고 겉으로만 흉내 내기에 급급한 경우이고, 선진기술을 모방하거나 이전받아 대성공한 나라는 원래 일본이다. 예를 들어 트랜지스터나 전자레인지의 원천 기술은 미국이 가지고 있지만 이를 상업화한 것은 일본이었다. 어쨌든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고 이러한 노력으로 일본이 짧은 기간 내 선진국으로 도약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일본의 라디오는 선진국 기술을 모방하여 상업적으로 성공시킨 대표적 예다.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무기분야에서도 그런 경향이 많았다. 우리는 흔히 제2차 대전 당시의 일본군 무기라면 제로기로 대표되는 일부 전투기나 상대적으로 강했던 해군의 항공모함, 전함 등을 연상한다. 하지만 일본은 전반적으로 기술 수준이 떨어져 당시 최첨단 무기를 모방하여 개발하려던 시도를 벌였는데 그중에는 최신식 전투기도 있었다.
 
                   일본 항공자위대의 F-2 전투기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F-16의 영향을 받았다.
 

그런데 기술력이 앞선 동맹국 독일의 도움이 있기는 했지만 외관으로 드러난 모습만 보면 단순한 기술 협력이 아닌 영락없이 짝퉁이라 불러도 이의가 없을 정도인 전투기가 개발되었다. 비록 완성 전에 종전이 되어 실용화되지는 못했지만 당시에 일본이 이런 시도를 했다는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사실이다. 다음은 그와 관련한 이야기다.
 

고공 요격기 J8M1
 
J8M1은 제2차 대전 말기 연일 계속되는 미군의 폭격에 시달리던 일본이 B-29폭격기를 요격 할 방법이 없어 고민 하던 중, 전략물자 교환 협정에 의거 독일로부터 정보를 제공받은 Me-163 Komet를 기초로 제작한 로켓요격기다. 당시 독일도 비슷한 사정이었고 이런 목적에 Me-163를 투입하지만 사실 그다지 눈에 띄는 전과는 올리지 못하였다.

 
                                                 원형인 독일의 Me-163

 
일본은 원래 Me-163을 그대로 양산할 생각이었지만, 설계도나 각종 자료를 싣고 일본으로 오던 독일의 잠수함이 연합군의 공격으로 침몰했기 때문에, 사진 및 드로잉만 가지고 도면을 제작 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 일부 일본 자료에는 Me-163과 닮았지만 단지 모양만 비슷할 뿐 실제 크기나 성능이 완전히 다른 새로운 무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일본의 J8M1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사실 신빙성이 부족하다. Me-163은 제2차 대전 당시 사람이 탔던 비행체 중 최고속도를 기록한 당대 최고 기술의 집약체였다. 지금과 비교하면 상당히 어설프고 조잡한 무기처럼 보이지만 Me-163같은 로켓요격기를 단지 사진과 손으로 그린 어설픈 자료만 가지고 단기간 내 복제한다는 것이 결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발 중에 있던 J8M1
 

어쨌든 하루라도 빨리 실전 배치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한 일본 군부는 미쓰비시 중공업으로 하여금 제작에 착수하게하면서 동체는 해군이, 로켓 엔진은 육군이 담당하도록 하였다. 제작에 박차를 가해 1945년 7월 7일, 요코스카 해군 비행장에서 이누즈카 대위의 조종으로 제1호기의 시험 비행을 실시하였다.

 
                                      박물관에 Me-163과 비교 전시된 J8M1 모형
 

그러나 이륙 직후 고도 350m에서 엔진이 멈춰 불시착하여 대파되었고 조종사는 다음날 사망하였다. J8M1은 총 7기가 제작되었지만 얼마가지 않아 일본은 항복하였고 실패의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1970년 오사카에서 개최된 EXPO에 J8M1 모형을 전시하였을 만큼 일본이 가지고 있던 애착은 생각보다 컸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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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mm 곡사포 이야기 [下]
  - 위대한 국군 포병의 시작 M-3
 
 
5,400여 문에 이르는 국군의 포병 전력은 서방 세계 최대로 평가받지만 우리와 대적 중인 북한의 포병 전력은 과하다
싶을 정도인 13,000여 문으로 추정될 만큼 엄청난 규모다. 한마디로 한반도는 단위 면적당 야포 밀집도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포병 전력에서 이처럼 현격한 양적 격차가 지속되었음에도 단 한 번도 북한에 주눅 들었던 적이 없었다.


               북한의 포병은 양적으로 엄청난 규모지만 우리는 이런 양적 차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잘 알다시피 한국전쟁 발발 당시에 단 한대도 없던 전차에 비한다면 그나마 양호한 편이었지만 포병전력도 엄청나게 차이가 벌어져 있었다. 자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개전 전에 남북 포병간의 전력비는 약 1:4 정도로 추정될 만큼 지금보다 더 큰 격차를 보였다. 하지만 놀라운 투혼과 뛰어난 작전으로 아군은 이러한 차이를 상쇄하면서 당당하게 맞서왔다.
 
                                   창군 초기 국군의 가장 강력한 화력이었던 M-3 곡사포
 

창군 당시 국군이 보유한 야포는 M-3 105mm 견인곡사포
였는데 이것은 당시 미군이 표준으로 사용하던 M-2 105mm 곡사포를 공수부대용으로 축소 제작한 것으로 사거리가 M-2의 60퍼센트 수준이었고 화력도 약하였다. 따라서 종전 후 많은 수가 폐기되거나 여러 나라에 공여되었는데 이때 국군도 이를 수령했다. 이처럼 미군에게는 보잘 것 없는 무기였지만 M-3는 신생 대한민국 육군에게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미 공수부대에서 사용하던 당시의 모습
 

하지만 국군이 인계받은 91문은 겨우 오늘날 1개 포병연대의 수준이었다. 당시 국군은 총 8개 사단과 2개 독립연대로 편제되어 있었는데 야포가 모자라 38선을 지키던 제1, 6, 7, 8사단과 독립 제17연대에만 포병대대가 배치되었다. 반면 북한은 각 사단별로 122mm 곡사포와 76mm 곡사포가 혼성 편재된 포병연대를 구축하고 있었고 별도로 Su-76 자주포도 운용해 총 400여 문의 야포를 장비하고 있었다.

 
                                       북한군이 남침의 선봉에 내세웠던 Su-76 자주포
 

지금은 K-9처럼 세계 최고 수준으로 중무장하고 있지만 여타 분야처럼 국군의 포병도 그 시작은 미약했다. 하지만 6.25전쟁에서 포병의 신화는 양적으로 압도한 북한군이 아니라 부족한 장비를 갖춘 국군이 써내려갔다. 평소 훈련을 거듭하며 실력을 배양해 온 아군의 포병들은 전선을 가리지 않고 맹활약을 펼치면서 침략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M-3 곡사포대의 훈련 중 모습
 

옹진반도를 지킨 제17연대가 3배가 넘는 북한군의 공격으로 부대가 분리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틀간 적의 남진을 막고 연대 전력의 90퍼센트가 해상으로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도록 최후까지 교두보를 확보한 것은 제7포병대대의 활약 덕분이었다. 특히 포병대대장 박정호(朴廷鎬) 소령은 마지막 포탄까지 완전 소모시킨 후 적의 노획을 우려해 야포를 파괴한 후 맨 마지막으로 해상 철수했다.

 
                                                작전 중인 국군의 M-3 곡사포
 

문산 축선을 방어하던 제1사단은 편제를 6.25전쟁 내내 유지했던 유일한 국군 사단이었다. 한마디로 적들이 도저히 이길 수 없었던 강철 철벽과도 같은 부대였고 이런 전통은 전쟁 개전 직후 전략적으로 아군이 가장 불리하였던 1950년 6월에도 그러했다. 고랑포 인근 357고지 전투와 봉일천 전투처럼 개활지로 나온 적 주력의 남진을 피로 막은 제6포병대대의 활약으로 제1사단은 방어전을 펼칠 수 있었다.

 
                            북한은 월등한 포병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아군에 압도당하였다.
                              (직사화기로도 사용한 북한군의 KS-12 85밀리미터 대공포)
 

의정부 축선은 잘못된 방어 전략으로 아군의 몰락을 가져온 실패의 반면교사가 되었지만 그러한 패배 속에는 육군포병학교 교도2대대장으로 긴급 투입된 김풍익(金豊益) 중령처럼 제로 거리에서 직사사격으로 적의 전차 부대를 저지한 살신성인의 노고도 숨겨져 있었다. 비록 꽃처럼 산화하면서 유명을 달리하였지만 이들의 투혼은 득의만만하게 남진하던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김풍익 중령
 

동부전선에서 아군 포병의 분투는 한국전쟁 초반의 물줄기를 바꿔놓는 결정타였다. 춘천 지구를 방어한 제6사단 16포병대대와 강릉 지구의 제8사단 18포병대대는 한마디로 아군 포병사의 신화가 되었다. 제16포병대대의 놀라운 선전을 발판으로 제6사단은 북한군 2군단을 궁지에 몰아붙였고 제18포병대대는 백병전까지 마다하지 않으며 진지를 고수하여 아군 주력이 안전하게 후퇴할 수 있도록 퇴로를 확보해 주었다.

 
                                   자랑스러운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국군 포병부대
 

이처럼 미약한 장비를 이끌고 한국전쟁 초기에 인상적인 승리를 이끌어 온 선배 포병부대와 용사들의 무용담은 단지
수적 열세가 전력의 우열을 가르는 것이 아님을 입증해 주었다. 따라서 지금도 수적으로는 북한의 포병전력이 우리를 앞서지만 그것이 결코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이미 자랑스러운 전통은 국군 포병의 자부심으로 자리 잡았고 앞으로도 길이 전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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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mm 곡사포 이야기 [上]

 - 새로운 탄생을 기원하며
 
 
최근 우리 군이 보유 중인 구형 무기의 개량사업에 관한 하나의 뉴스가 언론 매체를 통해 보도되었다. 오래 동안 육군의 주력 화포로 사용되었던 105㎜곡사포를 현대식으로 개량한다는 소식이었는데, 사실 전혀 새로운 뉴스는 아니고 방위사업청에서 이미 1년 전에 사업자 선정을 위한 공고를 내었기 때문에 군관계자나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많이 알려진 내용이었다.

 
                                              105mm곡사포 부대의 훈련 모습
 

구형이지만 105㎜곡사포는 구조가 간단하여 쉽게 고장이 나지 않고 헬기 이동이 가능할 만큼 가벼워 산악지대가 많은 한반도 환경을 고려한다면 앞으로도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는 무기다. 사업의 내용은 105㎜곡사포를 고성능 차량에 탑재하여 기동성을 높임과 동시에 자동발사가 가능하도록 표적지시기와 컴퓨터를 장착하는 것이다. 즉 성능은 업그레이드하되 운용 인력은 감축하는 방향으로 개량될 예정이다.

 
                  차량에 탑재된 곡사포의 모습. 아마 이런 식으로 개량되지 않을까 추측 된다
 

이와 관련하여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많은 갑론을박이 오고가고 있는데 핵심은 105㎜곡사포가 오래된 무기라는 점이다. 개량 대상으로 언급되는 M-101 곡사포는 제작된 지 30여년이 넘은 구형 장비로 현재 포병의 주력이 사거리와 파괴력이 큰 155㎜곡사포와 자주포로 바뀌면서 멀지않은 장래에 퇴역이 예상되었다. 즉 효용성과 별개로 너무 오래된 장비를 계속하여 사용할 필요가 있냐는 논쟁이었다.

 
                                          현재 주력 야포중 하나인 K-55 자주포

 
따라서 반대 측은 구형 장비를 조속히 도태시키는 대신 개량에 투입될 비용으로 신형 무기를 구입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주장한다. 반면 찬성 측은 거대한 북한군 포병을 고려한다면 양적으로 우리 포병전력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2천여문의 105㎜곡사포를 개량하여 계속 사용하는 것이 옳다는 의견이다. 더불어 상당량의 비축탄 또한 쉽게 장비를 도태시키기 힘든 요소로 들고 있다.

 
                                  국군은 창군 당시부터 105mm 야포를 사용하였다.
                                  (한국전쟁 초기에 맹활약한 M-3 105mm곡사포)

 
이러한 찬반의견 모두는 나름대로 충분한 이유와 설득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의 포병전력은 서방국가 최대 규모로 평가될 정도이지만 향후 감군을 예정하고 있으므로 양적 경쟁보다는 질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 반대 측 의견의 핵심이다. 반면 그럼에도 북한의 포병에 비해서는 양적으로 절대 열세이기 때문에 구형장비라도 개량하여 대응 전력을 유지하자는 것이 옳다고 찬성 측은 주장한다.

 
                                                  북한군의 170mm 자행포
 

이처럼 다양한 의견이 분분하지만 정책당국에서 구형 105㎜곡사포를 계량하여 계속 전력화하겠다고 결정한 의미는 그것이 효과적이라는 충분한 판단이 섰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더구나 발표된 내용에 따르면 자주화된 개량 105㎜곡사포는 보병 연대에 배치할 계획으로 알려져 북한에 비해 부족한 편으로 평가되던 연대 급 부대의 화력을 대폭 증가시켜 줄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 연대 급 부대가 보유한 4.2인치 박격포
 

현재까지 우리군 보병연대는 화력지원을 사단의 화력 지원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형태인데, 이번 개량사업으로 연대 급 부대가 별도의 강력한 자체 화력을 보유하게 되면 작전능력이 훨씬 커지게 될 것은 명약관화하다. 이것은 한편으로 기존 사단 급 부대의 포병 전력이 자주포 위주로 개편되어 보다 강력하게 변모하게 됨을 의미한다. 즉 연대뿐 만 아니라 사단의 화력도 대폭 강화되어 작전 능력이 배가될 것이다.

 
                                         노장의 새로운 변신을 기대해 본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는 이야기처럼 창군 이래 계속하여 국군의 주먹으로 묵묵히 그 역할을 다해오던 105㎜곡사포의 멋진 변신을 상상해 본다. 이러한 상상에 걸맞게 개량사업이 완벽하게 이루어져 아군의 전력이 혁신적으로 증강되기를 기원하고 관련 당사자들의 노력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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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크이고 싶었던 전차들
 
 
비록 최근에는 휴대하기 편리한 각종 고성능 대전차화기의 발달로 인하여 전차무용론이 심각하게 대두되기는 하지만, 1916년 제1차 솜전투(Battle of Somme)에서 고착된 전선을 돌파할 회심의 비밀무기로 전차가 처음으로 세상에 등장한 이후 100여년 가까이 지난 현재까지 전차는 지상전의 왕자로 그 권위를 가지고 있다.


                                           아직까지도 탱크는 지상전의 왕자로 전혀 손색이 없다
 

그런데 전차가 영어로 탱크(Tank)라는 명칭이 붙게 된 데는 조금 웃기는 사연이 전해진다. 영국에서 이 전차를 개발하여 전선에 공급할 때 적군이 알아볼 수 없도록 문서나 전차의 겉포장에 탱크(흔히 말하는 물이나 유류 저장고를 지칭하는 탱크)라는 암호로 표기하면서 그 이름이 유래하였다는 것이다. 사실 최초의 전차인 Mk1의 겉모습이 물탱크와 비슷하게 생기기도 하였는데 이런 유래가 확실하게 확인된 사항은 아니다.

 
                                              초기 전차인 Mk VII의 생산 모습인데 마치 물탱크 같다
 

오늘날 전차라고 한다면 떠오르는 일종의 스펙이 있는데, 예를 들어 두꺼운 장갑, 무한궤도를 가진 구동형태, 터렛 형태의 포탑 등이 그러하다. 이러한 보편적인 전차의 모습은 수많은 실전을 통하여 단점을 하나하나 개선하고, 기갑부대의 아버지로 불리는 하인츠 구데리안(Heinz Guderian) 같은 기갑부대 선각자들의 노고가 더해져 정립된 것이다. 따라서 무기사에 있어 초기 전차는 상당히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였다.


 
               
무전기, 큐폴라, 바구니 구조 터렛 등을 갖추어 현대 전차의 표준이 되었던 독일 3호 전차
 

전차가 물탱크 같은 초기의 엉성한 모습에서 지상전의 왕자로 본격 자리매김하게 된 시기는 제2차 대전부터인데, 이전까지는 국가별로, 제작사별로 각기 다른 중구난방의 모습으로 진화하여 왔다. 전차를 지상전의 주역으로 만들었고 새로운 전술 개발에도 앞장섰던 독일도 전쟁 초기만 해도 오늘날 기준으로 볼때 전차로 보기 힘든 1호 전차나 2호 전차를 주력으로 삼고 있었을 정도였다.


 
                
제2차 대전 초기 독일군의 주력이었던 1호 전차-전차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많다.
 
따라서 1930년대 초반까지는 전차의 백가쟁명시대라 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모습의 전차들이 선보였다. 그중에는 전차의 모습을 갖춘 일군(一群)의 경장갑전투차량도 있어 각국에 널리 보급되었는데 이를 탱켙(Tankette)이라 한다. ‘작은 전차’라는 어원에서 알 수 있듯이 보병지원 또는 정찰을 위한 경전차였는데 사실 무장이나 장갑능력을 고려할 때 전차로 보기는 힘든 모습이었다.


 
            
                                                      1930년대 활약한 폴란드 군의 탱켙
 

탱크의 원조인 영국에서 1930년 초 개발한 카든로이드(Carden-Loyd) Mk4를 탱켙의 시초로 보고 있는데, 이후 이러한 탱크 아닌 탱크들이 유럽의 각국으로 널리 퍼져 사용되게 되었고 일부는 제2차 대전에 참전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보통의 소화기에도 구멍이 뻥뻥 뚫릴 만큼 얇은 장갑과 작전능력의 한계 등으로 인하여 급격히 전선에서 도태되었다. 한마디로 전차도 아니고 장갑차도 아닌 어정쩡한 형태이었기 때문이었다.


 
                                    태평양전쟁에서 파괴 된 일본의 94식 탱켙이 미군 M-4에 얹혀져있다.
 

대규모로 제식화 되었던 유럽전선에서 탱켙이 특별히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는 기록을 찾아 보기 힘들고, 태평양 전쟁에서는 일본이 탱켙을 대량생산하여 밀림전에서 유효 적절히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유럽 전선에서 독일군 티거(Tiger) 전차 앞에서 고양이 정도였던 미군 M-4전차가 일본의 탱켙을 상대로 호랑이 노릇을 하였다는 사실에서 예견 되었듯이 탱켙은 급속도로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다.


 
                            탱켙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비젤장갑차와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 디스켙
 

오늘날 독일연방군 공정부대가 사용하는 비젤(Wiesel)장갑차를 보면 탱켙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지만 탱켙의 카테고리에 넣을 수 있는 소형탱크는 더 이상 없다. 탄생 시기부터 탱크가 되고 싶었지만 탱크 아닌 탱크로 어중간하게 존재하다 사라진 탱켙을 보면 이름 때문인지 초기 디지털 시대에 PC의 기록매체로 맹활약하다 홀연히 자취를 감춘 디스켙(Diskette)이라 불린 미니 플로피디스크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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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등장한 한니발의 코끼리
 

 
제1차 대전 당시 전선이 고착화되고 인명손실이 늘어나자 이를 타개할 방법을 골몰하던 영국은 비밀리에 최초의 현대식 전차 Mk I을 제작하여 1916년 9월 15일 솜전투(Battle of Somme)에 투입하였다. 전세를 뒤집을 만한 회심의 히든카드로 전장에 데뷔시켰지만 운용 노하우가 전무하였고 작전에 투입한 전차가 총 49대밖에 되지 않았던 데다가 고장차량까지 생겼다.

 
                                            1916년 솜 전투에 사상 최초의 전차가 등장하였다
 

이 때문에 생각했던 것만큼의 피해를 독일군에게 입히지 못하고 전선돌파에 실패하자 일선에서는 전차무용론까지 제기되었다. 그러나 전차가 장차전의 주역임을 입증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는 않았다. 1917년 11월 20일 캉브레전투(Battle of Cambrai)에서 474량의 전차를 집중 투입한 영국은 진지돌파에 성공하였고 이로써 전차는 그 효과를 인정받게 되었다.

 
                                                  깡브레전투에서 전차는 돌파의 주역으로
                                                  진면목을 발휘하였다
 

2차 포에니전쟁 초기에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Hannibal)이 코끼리를 동원하여 로마군을 기겁하게 만들었던 것처럼, 캉브레전투에 등장한 영국의 대규모 전차부대는 참호에 안주하여 소극적방어전을 펼치던 독일군을 혼비백산하게 만들어 버렸다. 당시 영국의 신문들이 한니발의 코끼리가 다시 등장하였다고 대서특필하고 전차의 전선돌파와 작전모습을 상세하게 보도하였을 정도로 의기양양하였다.


 
 
                                                          영국의 언론은 한니발의 코끼리가
                                                          재림하였다고 선전하였다
 

전선의 병사들도 전차가 한니발의 코끼리를 능가하는 전선의 수호신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믿음직스러워하였다. 전차를 앞에 두고 건배를 하는 당시 병사들의 모습은 마치 새 차를 장만하고 무사고 운전을 기원하며 고사를 지내는 우리의 모습과 상당히 유사할 정도인데, 항상 죽음을 앞에 두고 싸워야 하였던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해 줄 수 있는 새로운 무기가 등장하여 느꼈을 반가운 감정이 자연스럽게 표출 된 것이라 생각 된다.

 
 
                                                   영국군은 전차가 승리를 안겨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이런 기쁨도 잠시뿐이었다. 코끼리의 약점을 알게 되자 로마군이 가지고 있던 두려움은 급속히 반감되고 그에 상응한 작전을 펼칠 수 있었던 것처럼, 당시 기술로는 어쩔 수 없이 빈약했던 전차의 장갑능력과 느린 기동력을 독일이 파악하게 되자 효과적인 대전차 공격방법을 찾아내었던 것이었다. 더구나 독일도 즉시 전차를 카피 생산 하자 전차가 연합군만이 보유한 필살기가 아니게 되었다.

 
   
                             적들도 코끼리를 만들어 내었고 전차간의 전투도 벌어지게 되었다
 

상대도 전차를 보유 하였다는 것은 다시 말해 전차끼리의 전투가 일어난 것을 뜻하며 당시 신문들은 전쟁터에 새롭게 등장한 전차전의 모습을 상세히 기술하였다. 결국 영국의 입장에서는 한니발의 코끼리보다 약발이 오래가지 못한 꼴이 되었다. 전선에 그럭저럭 데뷔하여 무기사에 길이 남을 도도한 발자국을 찍었지만 당시의 전차는 전쟁 전체를 좌우 할 만큼 위력적이지 않았던 둔중한 코끼리였을 뿐이었던 것이었다.
 

                                               전차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보내는 보병들의 모습
 

하지만 이 코끼리들이 진화하여 전쟁의 주역으로 등장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는 않았다. 역사상 처음으로 전차의 공격을 받아 두려움을 겪었던 독일은 다음 전쟁에서는 이를 갈고 다듬어 미처 참호가 만들어질 틈도 주지 않았을 만큼 전선을 급속히 돌파하여 승리를 이끌어 내는데 성공하였던 것이었다. 제2차 대전을 기점으로 전차는 지상전의 왕자로 자리매김하면서 불과 20년 만에 둔한 코끼리가 날렵한 공룡으로 변하였던 것이다.

 
               전차는 다음전쟁에서 지상의 왕자로 등극하였고 지금도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런데 역사는 도전과 응전의 과정이라는 말처럼 전차의 발달은 대전차 무기의 발달도 함께 동반하였고 현재까지 그런 추세는 지속되고 있다. 대전차 무기는 시간이 갈수록 휴대가 편리하고 정확도는 물론 파괴력도 높아져서 전차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지만 전차는 등장이후 지상의 왕자 자리를 계속 차지하는 것을 보면 과연 어디까지 발전하게 될지 궁금해진다. 과연 훗날에도 한니발의 코끼리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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