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ust 의 軍史世界'에 해당되는 글 141건

  1. 2011.02.07 "0"세대 전투기를 아시나요?
  2. 2011.02.04 해적국가 소말리아는, 우리 최초의 파병국가였다.
  3. 2011.01.25 '기후와 날씨'는 중요한 무기이다.
  4. 2011.01.24 여명작전의 UDT대원은 최영 장군과 같았다.
  5. 2011.01.19 날씨 무시하면, 전쟁에서 망신당한다. (1)
  6. 2011.01.17 무기, 신세대가 구세대를 이길까?
  7. 2011.01.12 6.25전쟁 당시엔 몰랐던, 위기(下)
  8. 2011.01.11 6.25전쟁 당시엔 몰랐던, 위기 (上)
  9. 2011.01.05 멋진 '나치 친위대'보다는, 평범한 사람이 낫다.
  10. 2011.01.03 '워커 힐'과 6.25전쟁 영웅
  11. 2010.12.27 다연장로켓 K-136 구룡, 북한 122mm방사포에 대응하다.
  12. 2010.12.22 6.25당시 크리스마스를 지켜낸 우리군
  13. 2010.12.20 훈련은, 어떠한 여건에서도 중단될 수 없다.
  14. 2010.12.16 귀신잡는 해병대, 동해 NLL도 지켰다.
  15. 2010.12.13 서해 최북단은 백령도가 아닌, '석도와 초도'였다.
  16. 2010.12.09 서해 5도를 지켰던, 1950년대 소녀시대(여고생들)
  17. 2010.12.07 서해 5도 NLL, 역사와 의미를 돌아본다. (2)
  18. 2010.12.06 서해5도 전력증강에 대한 생각 하나
  19. 2010.11.30 연평부대의 사투는 6.25당시 18포병대대와 같았다.
  20. 2010.11.23 첨단무기개발 성공에는 실패와 눈물이 있었다.
  21. 2010.11.22 아시안게임 제1회 대회, 한국전쟁으로 불참하다.
  22. 2010.11.16 신념에찬 지휘관, 이를믿는 부대원들 작품,'장진호 전투'!
  23. 2010.11.11 정밀타격 순항미사일의 원조, 독일 V-1
  24. 2010.11.03 외제 전투기와 국방,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5)
  25. 2010.11.03 외제 전투기와 국방,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26. 2010.10.29 변신의 명수, 전투기 (2)
  27. 2010.10.18 K-2전차, 어려움을 극복하기 바랍니다.
  28. 2010.10.11 6.25 전적지로 떠나보자!
  29. 2010.10.07 6.25 전쟁 당시, 9.28수복의 숭고한 가치
  30. 2010.09.27 역전의 용사, 한국 여자축구! 그리고 기관포.





                         잃어버린 세대 ?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지구의 역사는 약 40억년이지만 이에 비하여 인류가 출현한 것은 약 400만 년 전이라 한다. 그리고 글로써 역사를 기록한 것은 약 3,000여 년 전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지구의 역사에 비하면 상당히 짧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이 막연히 체감하고 있는 역사는 불과 2,000년 정도 밖에는 되지 않는다.

 
                                     인류의 역사는 지구 역사에 비하면 티끌과 같다
 

그 이유는 서양력 때문이다. 지구상 모든 국가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국가에서 사용하는 서양력은 역사를 BC(기원전)과 AD(기원후)로 나누어서 표기한다. 이런 통상적인 표기방식 때문에 기원전 시대의 많은 역사적 기록과 유물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기원후 역사가 느낌상으로 더 큰 비중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서기 1년 이전의 모든 역사를 비슷한 시기로 보는 착시현상이 벌어진다.
 

그래서인지 막상 기원전 시기를 모두 비슷한 동시대로 인식하는 오류를 범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석기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만화에 공룡이 등장하는 것처럼 말도 안 돼는 허무맹랑한 내용들이 종종 묘사되고는 한다. 극화니까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단지 기원전이라는 이유 때문에 10만 년 전과 1억 년 전이 비슷한 시기로 연관 지어지는 것은 그만큼 어느 정도 이전의 과거를 정확히 느끼기 어려워서다.
 

                             인간과 공룡이 공존한 이런 장면은 한마디로 어불성설이다
 

무기사에도 이와 비슷한 경우가 종종 있는데 대표적으로 전투기의 세대구분이 그렇다. 누가 그런 구분법을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이전의 역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트시대가 도래하면부터를 제1세대 전투기시대로 구분하고 있다. 따라서 제트기 등장 전에 있던 시기는 마치 BC처럼 취급받는다. 다음은 1940년대 이후의 전투기 구분법인데 대략 다음과 같다.


   제1세대 - 제트전투기 최초 등장시기  Me-262, F-86, MiG-15 등
  제2세대 - 초음속 돌파시기  F-104, MiG-19, MiG-21, Mirage 3 등
  제3세대 - 레이더 및 기본유도무기탑재시기  F-4, MiG-25 등
  제4세대 - 고성능 전자장비 및 정밀유도무기탑재시기  F-15, F-14, Su-27 등
  제5세대 - 스텔스 및 차세대전투 기능  F-22, F-35 등


                                        제1세대 전투기인 Me-262와 제5세대로 인정받는 F-22
 

사람의 주관적 기준이 관여할 수도 있겠지만 위의 구분은 많은 자료에서 통용되는 기준이다. 그런데 이러다보니 전사의 큰 획을 장식한 불멸의 프로펠러전투기들이 황당하게도 단지 제트세대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BC시기의 역사처럼 도매 급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같은 전장에서 활약하였지만 P-40과 P-51는 세대가 다를 만큼 현격한 성능차이를 보인
             전투기들이다. 하지만 지금의 구분으로는 제1세대 이전 전투기들로 구분된다.
 

프로펠러 전투기라도 매니아들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의 전투기로 활약한 P-40과 P-51의 성능차이가 엄청나게 크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굳이 매니아가 아니더라도 제1차 대전 당시의 복엽기와 제2차 대전 당시의 전투기를 같은 세대로 뭉뚱그려 표현하는 것이 이상하다고들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도 제트기 시대부터 1세대로 하다 보니 이들 모두가 엉뚱하게도 전투기 시대의 BC가 되어 버린 것이다.

 
                    프로펠러 전투기라는 이유만으로 이들을 동급의 전투기로 묶기는 곤란하다
 

전투기도입 당시부터 시기를 구분한다면 너무 구분이 많이 갈 것 같아서 그렇게 표현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제트전투기의 등장을 마치 AD로 하고 그 이전 전투기의 역사를 하나의 역사로 몰아넣은 것은 공룡시대와 석기시대를 같은 시기로 표현한 만화영화를 보는 것처럼 왠지 불편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사실 전투기가 가장 멋있게 하늘의 주역으로 활약하였던 시기는 제트기 등장이전인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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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로 평화유지군이 파견되었던 바로 그곳
 


극적인 ‘아덴만 여명 작전’과 관련하여 소말리아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마치 국가가 직접 나서서 해적질을 하는 것으로 착각이 될 만큼 소말리아하면 해적이 떠오를 정도인데, 일부 언론 매체에서는 해적질이 소말리아의 가장 큰 산업이라고 비하할 정도다. 도대체 나라가 어떠하기에 자국민들이 전 세계로부터 비난받는 해적질을 거리낌 없이 자행하도록 방치하고 있다는 말인가?
 

                           청해부대의 작전과 더불어 소말리아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현재 각종 통계자료에 따르면 소말리아는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다. 국토의 대부분이 건조지대라 유목 외에 별다른 산업기반도 없으며 이 마저도 생산 활동이 미미하다. 따라서 종종 대량의 아사자가 속출하는 끔직한 기아사태가 발생하여 국민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 더구나 장기간의 내전으로 인하여 그나마 형식상 존재하는 정부도 어느 누구도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상태인 사실상 무정부국가이다.
 

                            몇 십 년간 이어진 내전으로 국가의 기능이 완전 마비되었다


그렇다보니 해적질이 이 나라의 산업 아닌 산업이 되어버린 형국이고 해적들은 먹고살기 위한 수단이라고 주장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해적들과 이를 뒤에서 비호하는 군벌들이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핑계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사익을 채우기 위해 온갖 나쁜 짓도 마다하지 않는 이들의 존재가 나라의 발전을 가로막고 대부분의 선량한 소말리아 국민들을 도탄에 빠뜨린 가장 큰 주범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어떤 반론도 있을 수 없다.

 
                                   가난하다는 사유로 해적질이 정당화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소말리아가 원래부터 이토록 비참한 국가는 아니었다. 제국주의 시대에 공식적으로 서구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던 아프리카의 유일 지역이었을 만큼 역사적 자부심이 큰 나라였다. 오늘날 해적질의 주 활동무대인 이른바 ‘아프리카의 뿔(Horn of Africa)’이라 불리는 동아프리카 반도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어 유사 이래 오래동안 아랍, 아프리카, 인도를 연결하는 무역의 중심지로 영화를 누리기도 했다.


                                             우주에서 바라 본 아프리카의 뿔


그러나 국민들이 단결하여 국가를 발전시키지 못하였고 1991년 이후 내전이 발발한 이후 국가의 몰락이 가속화되면서 오늘날 이러한 지경까지 이르고 말았다. 수백만의 난민이 발생하고 무고한 인명이 희생되자 유엔은 1992년 12월 치안유지를 위한 개입결의안(제794호)을 채택하여 평화유지군(PKO)을 파견하였는데 바로 이때 우리나라도 유엔의 요청을 받아들여 대한민국 수립 후 최초의 평화유지군을 파견하였다. 바로 ‘상록수부대’다.


                                            태극기가 선명한 상록수부대의 군복


국군의 해외 파병은 월남전과 1991년에 있었던 걸프전도 있었지만 이들 사례는 연합군의 일원으로 파병된 경우이고 국제기구의 요청에 따라 평화유지군으로 해외로 나간 것은 1993년 7월 소말리아 파병이 최초였다. 당시 공병대대를 주축으로 창설된 상록수부대는 1995년까지 2차례에 걸쳐 연 인원 516명을 파견하여 지역 재건, 의료 지원 등 인도적 활동을 중심으로 평화정착 지원임무를 수행하였다.


                                             소말리아 현지에서 활동하는 모습


그런데 이처럼 우리도 참여한 유엔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소말리아의 평화회복은 실패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현재는 AU(아프리카 연합) 주축의 평화유지군이 소말리아의 치안 확보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지만 공공연히 백주에 테러행위가 자행 될 만큼 아직까지도 소말리아의 항구적인 평화는 요원해 보인다. 따라서 해적 문제 또한 가까운 시일 내에 해결 될 가능성마저 희박하다. 국제사회는 물론 소말리아 국민들에게도 안타까운 일이라 할 수 있다.

 
                                            1995년 귀국 보고를 하는 상록수부대


해적 사건 때문에 부각되었지만 이처럼 소말리아는 국군과 인연이 많은 곳이었다. 어느덧 상록수부대의 파병은 과거의 일이 되었지만 이것은 대한민국이 세계 평화의 일익을 담당하는 책임 있는 국가로 자리매김하는 기폭제였다. 현재 우리는 평화유지군을 세계의 여러 분쟁 또는 재해 지역에 파견하여 훌륭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1993년 소말리아 파병은 그 의미가 크다 할 수 있다. 소말리아에 하루 빨리 평화가 정착하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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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무서울 수 있는 무기
 
 

오늘날 영화산업은 대규모 해외로케나 컴퓨터그래픽(CG) 등을 많이 이용하는 관계로 특정장소를 고집하지는 않지만 할리우드(Holly Wood)는 아직도 영화산업의 메카다. 이전에는 뉴욕 같은 동부에서 영화촬영이 이루어졌으나 1911년 네스터(Neste)라는 영화사가 촬영소를 건설한 것을 시작으로 할리우드의  여건이 좋다고 소문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환경이 많이 바뀌었어도 영화산업의 상징인 할리우드
 

영화산업이 유독 할리우드에서 발달하게 된 데는 자본이나 인력 조달이 편리한 측면도 있지만 사실 그 보다 결정적인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 바로 건조한 날씨다. 영화도 산업이라 비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촬영기간은 제작비와 상당히 관련이 많다. 따라서 제작비를 절감하여 많은 이윤을 남기려면 당연히 촬영에 투입되는 시간을 최대한 단축시켜야 한다.

 
                                     영화 제작 기간은 비용문제와 직접 연결 된다
 

배우의 출연 등은 인위적으로 조정 가능하지만 날씨는 사람의 능력으로 바꿀 수는 없었다. 만일 촬영 계획을 잡아 놓고 만반의 준비를 다하였는데 비가 오면 모든 것이 어긋날 수밖에 없다. 맑은 날이라도 비 오는 장면은 소방호스로 물을 뿌려 쉽게 재현할 수 있지만 반대로 내리는 비는 막을 방법이 없어 일 년 내내 맑은 날씨가  이어지는 할리우드는 영화산업에 유리하였던 것이다.

 
           인위적으로 비오는 장면을 연출하는 모습 (출처-http://blog.naver.com/sansuyu2010)
                               하지만 반대로 오는 비를 멈추게 하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오늘날 과학기술은 부분적인 인공강우가 실용화 한 수준까지 발달 하였다. 과거에 수시로 벌어지던 기우제를 생각한다면 이제는 비를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이 더 이상 기적이 아니라는 의미다. 반면 할리우드의 존재 이유처럼 오는 비를 멈추게 하는 것은 아직도 그리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이것 또한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인공강우는 흔하게 사용하는 기술이 되었다 (출처-수자원공사)
 

비록 비용도 많이들고 제한적인 경우에만 사용하지만 오는 비를 멈추도록 하는 기술도 현재 존재한다. 가장 앞선 기술을 보유한 나라가 러시아(소련)인데 이러한 기술의 시작은 군사적 목적 때문이었다. 전사를 살펴보면 날씨로 인하여 작전 차질을 겪은 예를 찾아보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닐 만큼 날씨와 군사는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러시아(소련)는 유사 이래 겨울의 혹한을 방어무기로 적절히 사용하였다.
 

러시아(소련)는 알다시피 전통적으로 기후와 날씨를 중요한 무기로 사용하였던 경험이 있던 나라여서 이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많은 선도적 기술을 보유하였다. 그 동안 러시아(소련)이 비밀리에 갈고 닦은 날씨 제어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던 적이 두 번 있었는데, 두 번 모두 세계인의 주목 속에 개최 된 행사였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개막식
 

1980년 7월 19일, 모스크바에서 제22회 올림픽이 개최 되었으나 개막당일 모스크바에 폭우가 쏟아지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군용기들이 특수약품을 살포하여 비구름 제거작전에 들어가 주경기장인 레닌스타디움 반경 500미터 이내에 내리는 폭우를 개막식이 진행되는 동안 막아버렸다. 개막식이 끝난 후 폭우가 쏟아 졌다고 하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이러한 기술은 극비에 붙여졌다.

 
                                          2005년 제2차대전 승전 60주년 기념식
 

2005년 5월 9일, 러시아는 세계 54개국 정상들을 초청한 가운데 제2차 세계대전 승전 60주년 기념행사를 모스크바에서 성대히 개최하였다. 행사는 비가 쏟아지는 날씨에 시작되었는데 절정이라 할 수 있는 군사 퍼레이드가 개시 되자 군용기가 모스크바 상공의  비구름을 없애는 작전에 전격 투입되어 비를 막아버리고 그 사이 군사 퍼레이드가 성공적으로 끝났다.
 

                           자연재해를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다면 그것은 비극이다
 

위와 같이 비록 특정 행사를 위해 강우를 제어 기술이 선보이기는 하였지만, 이러한 기술이 인류의 복지가 아닌 만일 살상의 도구로 사용된다면 그것은 상당히 무서운 일일 것이다. 자연 재해는 인간의 삶을 위태롭게 가장 큰 요소인데 그것이 인위적으로 가능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무서운 일이라 할 것이다. 날씨를 제어하는 기술이 무기가 되는 일이 없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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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덴만에서 부활한 명장
 
 

지난 2011년 1월 21일, 우리군은 역사에 길이 빛날 쾌거를 이루었다. 해적에게 피랍된 '삼호주얼리호'의 인질 구출 작전에서 우리군은 세계 대테러전 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대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비록 피랍선박 선장 석해균 씨와 UDT대원 3명이 부상을 당하였지만 21명의 인질들과 이번 작전에 투입된 해군요원들 모두가 완벽할 정도로 무사했다는 점은 격찬을 받을 만 했다.

 
                                        함교로 진입을 시도하는 해군 UDT대원들
 

항상 세계 최고 수준의 특수전 부대를 보유하고 있다고 자부하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해외에서 벌어진 테러작전에 투입된 경험이 일천하기 때문에 청해부대가 이 정도로 멋지게 활약할 줄 예상했던 이들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이번의 업적은 이스라엘 특공대가 지난 1976년 실시하여 이제는 인질 구출 작전의 전설이 된 엔테베 작전과 견주어도 결코 손색이 없을 정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엔테베 공항에 억류되었다가 무사히 구출된 인질들
 

인질 구출 작전이 어려운 이유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생명을 우습게 아는 흉포한 테러범의 위협 하에 인질들이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선박이나 항공기 피랍의 경우는 좁은 공간 안에 테러범들이 인질들과 뒤섞여 있어 이들을 구분하여 테러범을 일일이 제거하고 인질을 구해내기가 상당히 힘들다. 따라서 격렬한 교전이 벌어졌음에도 모든 인질들의 생명을 구하고 해적들을 완벽하게 제압한 이번 작전이 더욱 빛나는 것이다.

 
                            격렬한 총격전 와중에도 무사히 구출된 삼호주얼리호 선원들
 

이것은 마음 한 구석에 가졌던 모든 염려를 일순간 종식시키는 것을 넘어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무한한 자부심을 가지게 만들었다. 또한 지난해 우환이 연이어 발생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던 국군의 사기를 단 번에 회복시켜주었다. 더불어 우리를 만만하게 보았던 국제 테러조직에 엄중한 경고를 주었고 앞으로 도발이 반복될 경우 어떻게 응징을 받게 될 것인지 확실히 알려주었다.

 
                                             청해부대 UDT대원들의 훈련모습
 

우리나라는 소말리아 해적의 위협으로부터 선박들을 보호하기 위한 '항구적 자유 작전-아프리카의 뿔(Operation Enduring Freedom-Horn of Africa)'에 참여하기 위해 지난 2009년 3월 청해부대를 창설하여 현지에 파견하기 시작하였다. 4,500톤급 한국형 구축함을 기반으로 1기의 슈퍼링스 헬기와 특수전 임무를 수행할 30여명의 UDT대원으로 구성된 청해부대는 4개월을 주기로 교대되고 있는데 금번에 활약한 최영함은 제6진이다.

 
                                        청해부대 1진으로 파견되었던 문무대왕함
 

다음은 그동안 항구적 자유 작전에 파견되어 총 15회의 해적 퇴치 작전을 실시한 청해부대의 일지다.
 
1진 2009년 3월 13일 문무대왕함
2진 2009년 7월 17일 대조영함
3진 2009년 11월 20일 충무공 이순신함
4진 2010년 4월 2일 강감찬함 (CTF-151 연합해군 기함)
5진 2010년 7월 9일 왕건함
6진 2010년 12월 29일 최영함

 
                                           6진으로 파견된 최영함의 출항모습
 

이번 작전의 주인공인 최영함은 지난 해 12월 29일 파견되었기 때문에 현지에 도착하자마자 작전에 투입된 경황없는 상황이었지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작전을 성공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번에 '아덴만 여명 작전'에서 최영함이 보여준 모습은 640여 년 전 홍산대첩(鴻山)을 이끌어 이후 왜구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던 백수최만호(白首崔萬戶)의 재림이라 하여도 결코 모자람이 없다.

 
                                백수최만호로 불린 최영장군의 묘 (출처-Wikimedia)
 

백수(白首)는 백발을 뜻하고 만호(萬戶)는 대장군이라는 뜻을 지닌 몽골말에서 유래된 고려의 관직이다. 즉, 백수최만호는 멋진 백발을 휘날리며 전투를 지휘하던 고려말의 명장 최영(崔瑩, 1316~1388)을 왜구들이 두려워하면서 부르던 별명이었다. 이름을 물려받은 구축함답게 최영함은 너무나 멋진 서전을 장식하였다. 앞으로 남은 임무기간 동안에도 왜구에게 죽음의 사신이었던 백수최만호의 혼이 항상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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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씨는 아무리 대비해도 모자람이 없다
.
 
 
히틀러는 소련침공을 바로 앞에 두고도 이탈리아가 망신을 당하고 있던 북아프리카와 발칸반도 전선에 전력을 나누어 개입하였을 만큼 자신만만하였다. 지난 1939년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대전이 발발한 이래 독일군은 패배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특히 1940년 여름에 유럽 최고의 육군을 보유한 프랑스를 불과 7주 만에 무너뜨려 세계를 놀라게 하면서 더 이상 유럽에서 독일을 맞상대할 나라가 없어 보였다.

 
              히틀러는 소련 침공을 앞두고 북아프리카 전선에도 개입하였을 만큼 자신만만하였다
                                     (사막을 가로질러 전진하는 독일 아프리카군단)
 

반면 소련군은 지난 1939년 겨울, 7배가 넘은 병력을 앞세워 핀란드를 쳐들어갔다가 겨울 추위와 핀란드군의 격렬한 대응에 무너져버린 한심한 군대의 표상이었다. 비록 강화조약을 맺고 승리를 거두었지만 소련군이 입은 인명 피해가 핀란드군의 10배가 넘는 엄청난 규모였다. 이런 사실을 목도한 히틀러는 독일군보다 규모에서 컸던 소련군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독일에서 모두가 그렇게 낙관적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소련은 지난 핀란드 침공에서 역사에 길이 남는 망신을 당하였다.
                                   (핀란드군의 유격전술에 전멸한 소련군 기갑부대)
 

결국 일부의 우려대로 전쟁은 독일의 의도대로 진행되지 않았고 4년간의 격전 끝에 패배하였다. 결론적으로 독일이 좌절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예상을 뛰어넘는 소련군의 끈질긴 저항이었지만 여기에 덧붙여 겨울 혹한도 크게 한 몫 하였다. 소련과의 전쟁을 앞두고 혹한을 대비하여 했음에도 제대로 된 설상복이나 부동액도 준비하지 않고 전쟁을 벌였을 만큼 날씨에 대한 독일의 준비는 상당히 미흡하였다.

 
                          1941년 12월 모스크바 전투 당시 소련군 진지로 투항하는 독일군
                  소련군과 달리 제대로 된 방한 장비와 설상복이 준비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열대지방에 전혀 생각지 못한 한파가 닥친 것도 아니고 소련의 겨울 날씨가 춥다는 것은 상식인데도 독일의 준비 상태는 왜 그토록 엉망이었을까? 130년 전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하였다가 어떻게 무너져 내렸는지는 히틀러는 물론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최근 혹한보다 보급의 문제였다고 보는 경향이 크지만 나폴레옹이 폴란드로 도망쳐 나왔던 12월 초에 영하 35도까지 떨어졌을 만큼 그해 겨울은 추웠다.

 
                       겨울에 소련과 벌이는 전쟁이 어떠할지는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모스크바에서 후퇴하는 나폴레옹)
 

그런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 있었음에도 독일은 어처구니없게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였다. 그것은 바로 모든 것을 자기식대로 해석해 버린 히틀러와 그를 일방적으로 떠받들던 추종자들 때문이었다. 소련을 침공한 1941년 6월, 독일군 기상전대는 이번 겨울 날씨가 상대적으로 따뜻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그러했던 이유는 1939, 40년의 겨울이 30년 만의 혹한이었는데, 20세기 들어 2년 이상의 추위 다음에는 통상 날씨가 온화하였기 때문에 내린 결론이었다.

 
                                    제2차 대전 당시 사용한 이동 기상관측장비 Kurt
 

그러나 가을이 되자 기상전대는 상층대기의 순환이 예년과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을 관측하였고 이를 근거로 1941년 겨울은 유래가 없을 만큼 강한 추위가 몰려 올 것으로 예보를 변경하였는데 그때는 독일이 소련을 신나게 몰아붙이던 중이었다. 히틀러는 전황에 고무되어 자신은 나폴레옹과 다르다고 진작 결론을 내려버렸고 괴링은 한술 더 떠 ‘영하 15도 이하로 절대 내려갈리 없다’고 단언하면서 보고를 묵살하였다.
 

                              자신들의 입맛대로 날씨를 제단 하여 버린 히틀러와 괴링
 

하지만 1941년 겨울은 영하 30~40도의 혹한이 계속된 100년만의 혹한으로 기록되었고 독일의 진격은 결국 멈출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날씨를 자기편으로 이용한 소련군도 지난 핀란드 침공당시 혹한으로 엄청난 수가 전사상한 경험이 있어 이를 교훈 삼아 동계전투 준비를 철저히 하여 독일의 진격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누가 추위를 잘 참느냐가 아니고 누가 대비를 잘하고 있느냐의 문제였다.

 
                                동계전투는 대비를 튼튼히 한 자가 승리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역사의 교훈이다.
 

사실 괴링이 주장한 영하 15도도 보온대책 없이는 편안히 버티기에 매우 힘든 혹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한에 대한 충분히 대비도 없이 전쟁을 벌인 행위는 만용이라 할 수 있다. 실력만 과신하여 과거의 교훈을 무시한 독일과, 반대로 전에 있었던 비참함에서 교훈을 얻은 소련과의 전쟁은 어쩌면 이미 승패가 갈렸던 것일지도 모른다. 상대뿐만 아니라 자연까지 과소평가해서 승리를 얻은 예는 없다. 그것은 역사의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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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 몇 살이냐 ?
 
 

과학기술의 발전은 그야말로 눈이 부실 지경이다. 특히 어느덧 우리 삶과 가장 밀접하게 된  IT분야는 일일이 쫓아다니기 힘들 정도인데, 그렇다보니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다. 불과 10년 전에 이동통신과 결합한 손바닥만 한 컴퓨터로 언제어디서나 필요한 내용을 실시간 검색을 할 수 있게 되리라고 확신한 이들은 그리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불과 10년 전만해도 이런 모습을 상상하기는 힘들었다 (사진-fnnews)
 

사실 새로운 기술이 가장 빨리 실용화되는 분야 중 하나가 바로 무기인데 그 이유는 단순명료하다. 남이 보유하지 못한 기술을 이용한 무기가 장차에 있을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것은 굳이 일일이 역사적 사례를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단순히 예를 하나만 든다면 총의 등장은 화살의 필요이유를 상실하게 만들어 버렸다. 화살을 아무리 업그레이드하여도 총 앞에서 무기로써의 가치가 무의미하게 된 것이다.

 
    온갖 폼을 잡는 칼잡이를 총으로 순식간 제압하는 인디아나 존스 (레이더스 스틸컷)
 

그런데 이런 당연한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무기가 하나있다. 이른바 콜트 45구경(Colts .45)으로 불리는 M1911권총이다. 제식번호에서 알 수 있듯이 올해가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인데 놀랍게도 아직도 일선에서 애용되고 있다. 국군도 지난 1988년 자체 개발한 K5권총을 제식화하기 전까지 사용하였고 미군은 1985년 M9권총을 채택하기 전까지 사용했고 일부에서는 아직도 쓰고 있다.

 
                          탄생 100주년이 된 M1911 콜트 45구경 권총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다른 무기들과 비교한다면 M1911의 위대함이 어떠한지 쉽게 이해 될 수 있다. 지금은 최신 스텔스전투기인 F-22가 하늘의 제왕으로 군림하고 있지만 100년 전에는 나무골격에 헝겊으로 동체를 감싼 복엽기가 날아다녔다. 1916년 전차가 처음 등장하였을 때 모습은 마치 물탱크 같아 암호명도 Tank로 정해졌고 결국 일반명사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그때 탄생한 무기가 박물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살아서 사용되고 있다.

 
                        1916년 탄생한 최초의 전차인 Mk1의 조악한 모습
                         M1911의 유구한 역사가 경탄스러울 수밖에 없다
.
 

총기의 보유와 사용이 엄격히 제한되고 있는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 같은 나라는 개인의 총기 보유가 자유롭고 총기수집이 취미인 사람들도 많은 편이다. 이들에게 M1911는 상당히 인기가 있고 특히 생산 년대가 오래된 기종은 콜렉터들에게 비싼 가격에 거래되고 있을 정도다. 오죽하면 미국의 프로야구팀인 휴스턴 애스트로스(Houston Astros)가 창탄하였던 1962년 당시 처음 이름이 휴스턴 콜트45(Houston Colts .45s)였다.
 

                                      휴스턴 콜트45의 팀 로고
 

흔히 '자동화기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존 브라우닝(John Browning)이 제작한 M1911이 아직까지도 질긴 생명력을 이어가는 가장 큰 이유는 더 이상의 개량이나 업그레이드가 필요 하지 않았을 만큼 완성도가 높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무기로써 권총이라는 물건은 그 용도가 극히 제한적이므로 어느 정도 이상의 성능만 달성하면 충분히 사용가치가 있다는 의미다.

 
                                 전설적인 총기 발명가인 존 브라우닝
 

M1911의 명성이 어떠했는지 알려주는 일화가 2차대전 당시 독일이 이를 사용했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다. 지금도 세계적인 방산 업체인 노르웨이의 콩스버그 그루펜(Kongsberg Gruppen)이 2차대전 전에 M1911을 라이센스 생산하고 있었다. 그런데 1940년 독일이 노르웨이를 점령하자 소량이기는 하였지만 제작시설을 이용하여 독일군 용도로 M1911을 생산하여 공급하였다.
 

                           독일육군병기국 마크가 각인된 희귀한 M1911
 

그런데 새롭게 독일육군병기국(Waffenamt)의 주관 하에 제작하였다는 표식과 더불어 미국 콜트 사가 원 저작자라는 문구는 그대로 새겨 넣어, 아무리 전시라 해도 저작권은 보호된다는 전통을 지켜 주었다. 오래 동안 존재하다보니 M1911은 이처럼 재미있는 일화가 많이 따라다닌다. 일천한 국산 무기 개발사를 뒤돌아보면 어쩌면 부러운 부분인데 우리에게도 M1911처럼 세대를 뛰어넘는 국산 무기가 탄생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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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위험했던 순간 [ 下 ]
 
 
 


아군은 지난 한달 동안 무려 300여 킬로미터를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퇴하고 있었는데, 특히 12월 5일 평양을 내준 이후부터는 제대로 된 교전도 없이 도망간 다닌 형편이었다. 이어서 서울마저 포기한 아군은 37도선에서 전열을 일단 재정비하고 있었으나 적극적인 항전의지가 없어서 만일 중공군의 공세가 재개된다면 결국 다시 낙동강방어선까지 철수 할 것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아군은 중공군의 공격이 재개되면 또 다시 후퇴할 생각이었다
 

따라서 일선 부대나 장병들은 평택-삼척을 연결하는 북위 37도선 바로 뒤에 있는 금강은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막연한 예상과 달리 불과 50킬로미터만 더 밀린다면 유엔군은 즉시 철군할 예정이었고 그것은 대한민국의 종말과도 같은 의미였다. 결과적으로 1951년 1월 10일을 전후한 시기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한 이래 최대의 위기상황이었다.

 
                     북풍한설을 무릅쓰고 자유를 찾아 떠나는 피난민들
                     자칫하면 이들의 이런 노고도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천만다행히도 중공군은 이러한 유엔군의 절박한 상황을 몰랐고 일단 진격을 서울에서 멈추었다. 서울 점령 후 중공군은 더 이상 공세를 유지할 수 없었을 만큼 힘이 완전히 소진된 상태였는데, 사실 중공군은 보급에 문제가 있어 공세를 일주일이상 지속하기 힘들었던 군대였다. 따라서 5일 정도 적의 공세를 막아낸다면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지만 적의 이러한 치명적인 약점을 아직까지는 몰랐다.

 
                  중공군의 제한적인 보급능력은 상당히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만일 그 당시 상황에서 공세까지는 아니더라도 중공군이 공격하려는 시늉만 하였더라도 아군은 후퇴할 가능성이 컸다. 그랬다면 그것으로 전쟁은 끝이었고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상황이었다. 유엔군은 중공군을 과대평가하여 회피만 하였지만, 막상 적도 아군의 위기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던 것이었다. 결국 이러한 미세한 서로의 판단착오가 위험천만한 순간을 너무 조용하게 넘어가게 만들었다.

 
                   1951년 1월 중순은 서로에 대해 제대로 모르던 시기였다.
 

이처럼 앞으로 어떻게 싸워야할지 막막해 하던 유엔군의 생각과 달리 중공군이 추격을 멈추고 전선이 고요해지자 신임 미 8군사령관으로 부임한 리지웨이(Matthew Ridgway)는 소규모라도 승리를 얻기 위한 국지전인 교전을 구상하였다. 전세를 뒤집겠다는 의도는 전혀 아니었고 중공군 참전이후 계속된 연이은 패배와 그로인한 후퇴로 곤두박질치고 있는 아군의 전투의지를 회복하기 위해서 당장의 작은 승리가 절실히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기회를 만든 신임 미 8군사령관 리지웨이(좌)
 

리지웨이는 소규모의 선공을 결심하고 갑자기 움직임이 둔화 된 중공군을 찾아 나서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1개 전차대대와 포병 및 공병을 증강한 미 25사단 27연대 전투단이 투입되었고 이를 울프하운드(Wolfhound) 작전으로 명명하였다. 하지만 말이 선공이지 수색에 가까운 소극적인 작전이었다. 그런데 혹시나 하는 조바심에서 실시한 작은 작전이었지만 이는 한국전쟁의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울프하운드 작전에 나선 27연대 전투단
 

1월 15일 항공기의 엄호를 받으며 평택-오산을 연결하는 1번 국도를 따라 수원방향으로 개시된 이틀간의 수색작전의 결과는 상당히 고무적이었다. 수원 부근에 조우한 중공군은 상상이상으로 보급수준이 매우 열악하여 가까운 시일 내에 공세를 재개할 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던 것이었다. 이제까지 신비스러운 군대로 여겨졌던 중공군의 취약점을 적나라하게 파악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면서 아군에게 싸워볼만하다는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었다.

 
                            극적으로 대한민국은 되살아 날 수 있었다.
                                       (서울을 재탈환한 국군)
 

공교롭게도 이 작전은 철군을 기정사실화하고 후속대책을 위해 방한한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Lawton Collins) 대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실시되었는데, 이 작전으로 중공군과 그들이 사용한 전술이 낯설었을 뿐이지 결코 미국보다 강하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인지하게 되면서 현 전선에서 반격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벼랑 끝에 몰려있던 대한민국이 극적으로 살아나고 한국전쟁 당시에 최고로 위험했던 시간이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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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위험했던 순간
[ ]



오래 동안
"한국전쟁 당시에 대한민국이 가장 위기였던 순간이 언제였는가?" 한다면 열이면 열 19507월부터 9월 사이에 벌어진 '낙동강방어선전투'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된다. 총 연장 200여 킬로미터의 낙동강방어선의 일각이라도 북한군에게 돌파되어 부산이 점령당한다면 그것으로 전쟁이 끝나는 상황이었으므로 상당한 위기의 순간이었음에는 틀림없다.


                                낙동강방어선전투를 가장 위기의 순간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영천전투에서 파괴된 북한군 T-34)



부산에서 가장 가까웠던 마산은 불과
40여 킬로미터에 불과했고 가장 먼 대구도 100여 킬로미터 남짓하였다. 일단 지도상으로 한반도의 90퍼센트 이상을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국부와 인구의 90퍼센트를 북한이 차지하고 있다는 의미와 같았다. 하지만 낙동강방어선은 시간을 얻기 위해 대신 공간을 내어주고 유엔군 스스로 선택한 방어선이었다.



                               지도상으로 본다면 우리가 가장 밀렸던 시기이기는 하다



개전이후 전력이 압도적이었던 북한군이 쉽게 우회 돌파할 수 있었을 만큼 전선이 연결되어 있지 않아 금강방어선까지는 쉽게 무너져 내렸다
. 결국 아군은 증원군이 도착하여 전력의 균형을 맞추어야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고 따라서 시간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런 복합적인 요인을 고려하여 유엔군은 전략적 방어물이 불비한 호남지역을 과감히 포기하고 낙동강을 교두보 삼아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낙동강방어선은 군사전략상 아군이 선택한 상황이기도하다

                                        (부산항을 통해 속속 증원되는 유엔군)



그리고 예상대로 전선이 촘촘히 연결되자 북한군은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었고 서서히 전력을 증강시킨 아군은 반격에 나설 수 있었다. 경우에 따라 위기의 순간도 다가왔지만
, 사실 19508월이 경과하면서 북한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이것은 지도상으로 낙동강방어선이 위기임에는 맞지만 군사전략상으로는 적의 공세를 막아낼 수 있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선택한 방법이었다는 의미다.



                             낙동강이 철옹성으로 변하자 아군은 반격에 나설 수 있었다

                                            (인천에 상륙하는 미 해병1사단)



그렇다면
6.25전쟁 기간 중 대한민국 최대의 위기는 언제였을까? 지난 1990년대 들어 미국에서 비밀이 해제된 여러 가지 문서가 공개되기 시작하면서 많은 사실이 새로 밝혀졌는데 이중에는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하던 것과 달리 진정으로 위기였던 순간이 따로 있었다. 19511월초, 미국이 전쟁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즉 대한민국을 포기하고 한반도에서 물러날 준비를 하였던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진정한 위기의 순간은 따로 있었다

                                (전쟁 초의 급박한 순간을 웅변하고 있는 폭파된 한강교)



1950
1025일 중공군이 등장한 후 계속된 두 차례의 공세에 놀라 유엔군은 황급히 38선 일대로 도망쳐 내려왔다. 지연전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중공군과의 접촉을 거부하고 일사천리로 달려왔을 만큼 유엔군은 처음 접해본 중공군을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38선 일대에서도 적의 남진이 멈출 가능성은 그리 커 보이지 않았고 미군 당국은 또 다시낙동강까지 물러날 의사를 표시하여 이승만 대통령을 크게 실망시켰을 정도였다.


                                    중공군의 참전이후 전쟁의 양상은 급격해 바뀌었다

                                         (195114일 서울에 진입하는 중공군)



하지만 더 무서운 계획이 준비 중에 있었다
. 1222일 미군 합동참모본부는 "중공의 참전 의도가 북한회복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유엔군을 완전히 몰아내려는 것임이 명백해 진다면, 유엔군은 한반도를 포기하고 가능한 빨리 철수 한다"는 경악할만한 결정을 하였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중공군이 금강까지 진출하면 제주도에 약 이백 여만의 한국인을 소개시켜 망명정부를 수립하고 유엔군은 한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나간다는 계획이었다.


                                   한국을 완전히 포기하고 철군할 계획이 수립되었다

                                             (흥남철수 당시 후퇴하는 유엔군)



더구나 이 계획은 동요를 우려해 한국정부에는 정식통보하지 않아 우리 정부는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었다
. 바로 그 상태에서 중공군의 제3차 공세가 시작되었고 아군은 195114일 서울을 다시 내주고 110일경 평택-삼척을 잇는 37도선까지 후퇴하였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금강까지는 불과 50킬로미터였다. 여기서 조금만 더 후퇴한다면 그것은 대한민국의 종말이었다. 바로 그때 작은 반전의 기회가 찾아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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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은 평범한 이들이 만들어 나간다

 
 
외모가 뛰어난, 특히 호감을 불러일으킬 만큼 멋진 모습을 지닌 사람들은 일단 점수를 따고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지 극심한 취업난과 겹쳐서 성형이다 다이어트다 하고 남녀노소불문하고 난리 떠는 것도 아마 이런 이유도 한 몫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결코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지만 어느덧 엄연한 사회현상으로 자리 잡은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외모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그런데 "멀쩡하게 생긴 놈이"라는 말이 있다. 겉모습은 아무 문제도 없는데, 아니 오히려 남들보다 뛰어난데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짓이 영 딴판일 때 사용하는 관용어다.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 하는 것처럼 가장 먼저 외형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겉모습과 달리 정반대로 행동한다면 좋은 첫인상을 느꼈던 이들의 실망은 클 수밖에 없다.

 
                                 종종 멋진 이들이 실망시키는 행동을 범하고는 한다
 

군대가 멋있을 필요까지는 없으나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말처럼 멋있어서 나쁠 것도 없다. 군대가 멋있다는 것은 한편으로 군기가 확립되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당연히 패전한 군대에게서 멋을 발견할 수도 없다. 그런데 밀리터리 역사를 보면 '멀쩡하게 생긴 놈'이라는 관용어가 너무 잘 어울릴 만큼 진짜 멋있게 생긴 부대가 가장 나쁜 짓만 하고 다녔던 기록이 있다.

 
                    겉모습만으로는 가장 멋있게 생긴 부대라 해도 모자람이 없는 나치 친위대
 

히틀러의 사병들과 다름없던 나치 친위대(SS-Schutzstaffel)가 거기에 가장 걸 맞는 예다. 친위대는 정규군이 아닌 별개의 무력집단이었지만 전쟁말기에 최대 90만 명을 상회하는 병력으로 구성된 38개 사단을 운용하였을 만큼 거대한 군사조직이었다. 전사를 살펴보면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많은 친위대원들이 편협적인 나치의 이념에 광적이라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충실하였다.
 

            친위대원들이 나쁜 짓을 서슴지 않게 자행했던 것은 편협된 이념에 매몰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정신무장 덕분에 나름대로 전쟁에서 뛰어난 전투력을 보여주었던 예도 있었다. 하지만 게슈타포와 더불어 친위대는 나치의 조직 중 가장 극단적이고 폭력적이며 광신적인 활동으로 악명이 높았다. 이들은 게르만족 우월주의와 타 인종 증오 교육을 받았기에 점령지역의 유대인, 집시, 전쟁포로들을 대량 학살하는 주역이 되어 전후 전범재판에서 부인할 수 없는 범죄단체로 선언되었을 정도였다.

 
                           친위대에 의해 주민 전체가 잔인하게 학살당하고 폐허로 변한
                           프랑스의 소도시인 오라두르-쉬르-글란.
                           현재도 제2차 대전의 비극을 상징하는 사적지로 보존되고 있다.
 

이런 무시무시한 악행에 그 누구보다도 앞 장 섰지만, 멋있는 겉모습 때문에 나치의 선전매체에서 선전도구로 많이 등장하였다. 특히 절도 있는 열병식 모습은 당시 최전선의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보통의 독일 국민들에게 이들이 얼마나 나쁜 일만 저지르고 다니는 집단인지 상상도 못하게 하였을 정도였다. 한마디로 규정한다면 단지 멋진 옷을 입은 악마들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점령지역 유태인을 희롱하며 웃고 있는 친위대원
                                    겉만 멋진 악마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
 

친위대를 극단적인 예로 들었지만 사회생활 중에도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이들이 나쁜 짓을 하였던 사례를 발견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진정한 사람의 가치는 멋이 아니라 참된 인격에 의해서 확인될 수 있다. 따라서 처음 언급한 신언서판의 순서는 결코 사람의 인격을 가리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즉, 사람의 가치는 겉모습이 아닌 함께 부대끼고 겪어봐야 할 내면의 모습으로 판단하여야 한다.

 
                  진정한 멋은 겉모습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이다(사진-애니메이션 미녀와 야수)
 

언젠가부터 성형과 과도한 다이어트가 정상적인 것처럼 여겨지는 시대가 되었지만 결코 이것이 사람의 가치를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다. 잘생기고 멋있는 것이 항상 올바른 것은 아니고 그들이 나쁜 짓을 하면 오히려 더욱 실망스럽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해 준다. 세상은 평범하고 잘 생기지 못하지만 건강한 사고방식을 가진 보통의 수많은 사람들이 만들어 나간다. 이것은 불변의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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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이 들었지만 제대로 모르는 장군의 이름
 

 

중공군의 갑작스런 등장은 자신만만하게 북진을 이끌던 미 8군 사령관 월튼 워커(Walton H. Walker 1889~1950)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적의 공세는 거셌고 지금까지의 북진하였던 길을 뒤돌아 후퇴하여야 했을 만큼, 명령을 내린다고 중공군을 막을 수 있던 상황은 아니었다. 이제 워커에게 부여된 임무는 단 하나, 최대한 후퇴 속도를 조절해 전선을 최대한 빨리 고착화시키는 것이었다.
 

                                     한국전쟁 초기 미 8군 사령관이었던 월튼 워커
 

후방에 튼튼한 방어선을 만들려면 우선 중공군의 남진을 최대한 지연시켜 시간을 벌어야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중공군에 놀라 후퇴하기 바쁜 일선 부대의 분투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워커는 바닥까지 떨어진 예하부대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제일선을 찾아다니며 동분서주하였다. 원래 워커는 야전을 돌아다니며 직접 상황을 파악하는 것을 즐겼지만 지금은 더욱 열심히 돌아 다녀야 할 상황이었다.
 

                      그는 전선을 직접 순시하며 현장에서 지휘하는 저돌적인 지휘관이었다
 

1950년 12월 23일, 워커는 경원축선에서 중공군과 맞서 방어전을 펼치던 미 24사단과 영 27여단을 방문하기 위해 의정부 북방으로 출발했다. 당시 상황으로는 서울을 다시 포기하여야 했는데, 군은 물론 민간인도 함께 안전하게 소개하려면 이들 부대가 좀 더 오래 동안 이곳을 방어해내야 했다. 또한 그는 이번 기회에 미 24사단에서 중대장으로 근무하는 외아들 샘 워커(Sam S. Walker 1925~)대위도 오랜만에 만나려 했다.
 

          방한한 콜린스 미 합참의장에게 아들 샘 워커 대위를 소개하는 월튼 워커 미 8군사령관. 그는 
          대를 이어 군인이 된 아들을 상당히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그런데 오전 11시 경 워커를 태운 지프가 현재의 서울 도봉동 596-5번지 지점을 통과하여  의정부로 향할 때 반대편에서 남하하던 트럭과 정면으로 충돌했고 이 사고로 그는 현장에서 사망했다. 비록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에 비하여 세인들에게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유엔군 지상군의 주력인 미 8군을 이끌며 최전선을 종횡무진 활약하던 명장의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사망 60주년을 맞아 최근 사고현장에서 벌어진 추모제(사진-연합뉴스)
 

이를 안타까워한 미군 당국은 한국에 있던 외아들 샘 워커 대위로 하여금 아버지의 시신을 미국으로 운구토록 조치하였다. 그런데 샘은 남아서 싸우겠다고 고집하여 결국 맥아더가 직접 불러 운구지시 명령을 내렸다. 강골이었던 그의 아버지처럼 전형적인 무인이었던 샘 워커는 이후 최연소 미 육군 대장에 올랐고 이것은 아직까지 미군 역사상 부자가 대장에 오른 두 차례 밖에 없는 희귀한 예가 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 훗날 미 육군대장에 오른 아들 샘 워커
 

월튼 워커의 이름은 한국인들에게 많이 알려진 편인데 그 이유는 사실 호텔 때문
이다. 국내에 변변한 시설이 없어 휴가 때마다 일본이나 태국으로 놀러 가는 주한미군들을 유치할 목적으로 1963년 4월 한강변에 설립한 호텔을 워커 장군으로 이름을 따서 워커 힐(Walker Hill)로 명명하였는데 그 이유는 전쟁 영웅에 대한 사랑이 남다른 미국인들의 감성을 자극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지금은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급 호텔로 자리매김한 워커힐
 

하지만 그는 지난 한국전쟁 당시 가장 위태로웠던 낙동강전선을 성공적으로 사수한 맹장이었다. 그가 지휘한 미 8군과 국군의 분투가 있었기 때문에 아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역전타를 날리고 감격스런 북진을 할 수 있었다. 비록 중공군의 참전으로 통일의 꿈이 무산되고 그 또한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감하였지만 한국전쟁 초창기에 그가 남긴 족적은 두 말할 나위 없이 컸다.

 
                  지난 6월에 미 8군 영내에서 있었던 워커 장군 동상 제막식 (사진-연합뉴스)
 

그런데 호텔명 때문에 흔하게 불려지는 것과는 별개로 그가 이러한 인물이었는지 제대로 아는 이들은 사실 그리 많지 않다. 그를 기리기 위해 지난 6월 23일, 사망한지 60년이 지나고 나서야 용산 미 8군 사령부내에서 동상이 제막되었지만 이 또한 일반인들이 접하기는 힘든 위치이다.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애쓰다 바로 이맘 때 이국땅에서 생을 마감한 그를 한국전쟁 60주년인 2010년을 돌아보며 다시 한 번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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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136 구룡의 역사적 의의
 
 

지난 12월 23일 포천에 위치한 승진훈련장에서 열린 대규모의 공지합동훈련이 언론 매체를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원래 이번 훈련은 내년 초에 실시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북한의 연평도 기습도발에 따라 그 시기가 앞당겨졌다. 특히 북한의 기습 공격이 있을 경우 즉시 자위권을 행사하여 대규모의 보복 타격하겠다는 국군의 의지를 담은 무력과시 목적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공지합동훈련 중인 국군의 멋진 모습 (사진-KODEF 손민석)
 

따라서 국군이 보유한 다양한 종류의 장비들이 투입되었는데, 국군 주력 기갑장비인 K-1전차와 K-200장갑차는 물론 이번 연평도 포격사건으로 잘 알려진 K-9자주포 등의 포병장비 그리고 공대지 타격에 나선 공군의 최신예 전폭기 F-15K와 육군 항공대의 500MD 및 AH-1S헬기 등도 선을 보였다. 그런데 이번 훈련에서 특히 시선을 끌었던 장비가 있었는데, 바로 국군의 다연장로켓 K-136 구룡이다.
 

                     금번 훈련에서 로켓탄을 발사하는 구룡 (사진-조선일보)
 

보도를 보면 이번에 모두 3문이 훈련에 참가하여 총 54발의 로켓탄을 쏘아 관람객들의 탄성을 자아내었다고 하는데, 구룡은 국방과학연구소 주관으로 1970년대 후반에 개발되어 1981년에 제식화되었기 때문에 사실 최신식 장비로 보기는 힘들다. 구룡이 이처럼 최신예 무기는 아니지만 공개훈련에 등장하는 것도 그리 흔한 일은 아닌데, 아마도 연평도 포격과 상당히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예전 국군의 날 퍼레이드에 등장한 K-136 구룡
 

왜냐하면 지난 11월 23일 북한이 연평도를 기습하였을 때 사용한 주력 무기가 122mm방사포였는데 이것이 바로 다연장로켓이다. 그동안 북한의 방사포는 안보를 상당히 위협하는 전력으로 알려졌고 실제로 도발이 이루어지자, 우리에게도 북한의 방사포를 압도하는 무기가 있음을 알릴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특히 구룡은 개발 초기부터 북한의 122mm방사포를 염두에 두고 개발된 무기다.
 

                               연평도에 발사된 북한의 122mm 방사포탄
 

사실 1939년 배치된 소련의 BM-13(이른바 Katyusha)를 현대식 다연장로켓의 원조로 보는 것처럼 다연장로켓은 공산권에서 주로 애용하던 무기체계였다.  이에 대응하여 미국이 다연장로켓 개발에 나선 것이 1976년이었으니 상당히 늦은 편이었고 따라서 우리가 1970년대 들어서 본격적으로 국산무기개발에 나섰을 때 참고할만한 서방측의 다연장로켓이 전무한 상태였다.
 

                 이른바 카츄사로 불린 BM-13은 현대 다연장로켓의 원조로 본다
 

그러다보니 구룡을 처음 설계할 때 유일하게 현존하던 소련의 방사포를 참조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외형상으로 비슷하게 되었다. 하지만 냉전이 첨예하던 1970년대에 공산권 장비의 획득은 불가능하였으므로 단지 외관상으로 비슷하다고 구룡을 무조건 카피한 무기라 단정할 수 없다. 이것은 세계적인 군사전문지인 제인연감(Jane's Yearbooks)이 독창적인 무기로 인정하여 최초로 수록한 한국산 무기라는 사실(국방과 기술 381호 p.45)에서도 알 수 있다.
 

                                 K-136 포대의 호쾌한 일제 사격모습
 

우리는 무기 개발초기에 먼저 면허생산을 하였고, 여기서 기술력을 쌓아 각종 무기를 만들어 내었지만 그것도 모두 완전히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현재 국군의 주력인 K-1전차도 미군의 주력인 M-1전차를 만든 크라이슬러 디펜스(Chrysler Defence)사의 기술 제휴로 만들어 진 것이다.  2000년대 이후 본격 제식화되기 시작한 K-9자주포, K-2전차 등이 순수하게 우리의 기술력으로 만든 무기들이다.
 

             M-270 MLRS를 능가하는 차세대 다연장로켓의 개발 성공을 기원한다
 

그렇다보니 초창기라 할 수 있는 1970년대에 자력으로 만들어낸 구룡은 초기 국산 무기를 대표하는 명작이 되었다. 그래서 국산 무기개발사에서 구룡의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직접 도움을 받을 만한 기술기반도 전무한 어려운 여건에도 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구룡을 만들어낸 당시의 기술진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현재 구룡을 대체하기 위해 개발 중에 있는 것으로 알려진 차세대 다연장로켓의 성공도 기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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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마스의 자유를 지킨 이들
 
 
 
우리 역사에서 1950년 크리스마스는 상당히 고통스러웠던 시기였다. 눈앞을 가리는 눈보라를 동반한 엄청난 혹한도 몸을 힘들게 만들었지만 더욱 아픔으로 다가왔던 것은 갑작스런 중공군의 출현과 더불어 통일의 꿈이 좌절되었기 때문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탈환한 서울을 불과 석 달 만에 다시 적에게 내어주어야 했고 수십만의 병력과 피난민이 흥남항구를 통해 공산치하를 빠져나와야 했다.

 
                               1.4후퇴 당시 영등포역에서 남행열차에 오르는 피난민들
 

하지만 여러 차례의 패배와 후퇴를 거듭하면서 겪은 아픔과 절망의 반대급부로 중공군의 약점을 알게 되면서 고난은 정지될 수 있었다. 우리가 강하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단지 중공군을 몰랐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어쩌면 너무 단순한 사실을 확인한 이후부터 전세는 또 다시 바뀌었고 어느덧 전쟁이 발발한지 1년이 경과하였을 때 전선은 전쟁 발발 전에 남북을 나누던 38선 일대에서 고착화되었다.

 
                                 한강을 도하하여 서울을 재탈환하는 국군 제1사단
 

그런데 이러한 전선의 정체는 의도적인 결과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전쟁이 장기화되고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자 전쟁을 주도하던 미군과 중공군, 양측 모두는 이기겠다는 의지보다는 지지 않고 전쟁을 끝내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휴전협상이 시작되었고 그러는 동안 양측 모두 지난 1년 동안 보여준 거대한 공세를 심정적으로 중단한 상태가 되었다.

 
                       1951년 여름을 넘기며 전선이 38선 일대에서 고착화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선이 평화로웠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왜냐하면 군사분계선을 염두에 두고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 국지적으로는 더욱 치열해지는 양상으로 전쟁의 패턴이 바뀌었던 것이다. 그 결과 고지쟁탈전이 격화되었고 이것은 한국전쟁 후반부를 대변하는 단어가 되었는데, 경우에 따라서 너무 많은 희생이 벌어져 군 수뇌부를 당혹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한국전쟁 발발이후 두 번째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수 있었다.

 
                        1951년 크리스마스를 맞아 트리를 만드는 미 10군단 통신대대원들
 

후퇴의 악몽으로 가득한 지난 번 한국전쟁 첫 째 크리스마스도 피와 눈물로 얼룩졌지만 두메산골에서 벌어지는 피비린내 나는 끓임 없는 격전으로 말미암아 이번 크리스마스도 이에 못지않게 고통스러웠다.  그중에서도 동부전선의 어은산 일대에서 1951년 12월 25일부터 벌어진 1090고지 전투는 크리스마스가 결코 평화와 사랑이 가득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증거였다.

 
                      크리스마스 날 중공군은 1090고지를 피탈하기 위해 공세를 개시하였다
 

휴전협상에 의해 1951년 11월 군사분계선을 가조인하고 후속합의를 이끌기 위해 1개월간의 한시적 휴전이 결정되었으나 중공군은 이를 어기고 북쪽으로 돌출되어 있는 국군 제7사단의 전초진지 일대에 은밀히 전력을 증강시켜 크리스마스에 기습공격을 감행하였다. 참전이후 계속된 패턴대로 중공군은 포격을 집중하여 아군 진지를 타격한 후 심야에 압도적인 병력으로 고지위로 다가오면서 격전은 시작되었다.
 

              국군 7사단은 고지를 사수하였고 이후 1090고지는 크리스마스 고지로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전쟁발발이후 산전수전을 다 겪은 국군은 어느덧 쉽게 물러서지 않는 용맹한 군대로 바뀌어 있었다. 압도적인 적의 심야공격에 일시적으로 진지를 피탈당하기도 하였지만 날이 밝자 곧바로 반격에 나서 적을 압박하였다. 결국 아군의 강력한 응전에 엄청난 사상자를 남긴 체 12월 28일 중공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이를 기념하여 1090고지는 크리스마스 고지로 불리게 되었다. (중공군은 1952년과 1953년에 걸쳐 크리스마스 고지에 대하여 3차례의 공세를 감행하였지만 모두 좌절되었다)

 
                         지금 누리는 크리스마스의 즐거움은 결코 그냥 얻어진 것은 아니다
 

전쟁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크리스마스로 명명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이를 지키기 위하여 쏟아 부은 국군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이 담겨져 있다. 비단 그것은 크리스마스 고지뿐만 아니라 휴전선 일대에 연이어 솟아있는 모든 고지가 마찬가지다. 단장의 능선처럼 고통스러운 이름이건 크리스마스 고지처럼 아름다운 이름이건 그곳 모두에는 조국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였던 모든 이들의 영혼이 담겨있고 그분들의 노고 덕에 우리는 다시 크리스마스를 평화롭게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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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그들은 뛰었다 !
 
 

요즘 자가운전자들의 공통적인 고민이라면 비싼 기름 값 일 것이다. 더불어 혹한기에 접어들면서 유류로 난방을 하는 가정의 주름살도 깊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보니 오래 동안 잊혀 진 연탄이 최근 몇 년 전부터 각광을 받고 있다. 관련 전문가들의 말을 빌리자면 "1990년대 같은 저유가시대로의 회귀는 원유의 수요와 공급 상관관계로 볼 때 불가능하다."고 하니 이런 고유가는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라 생각된다.
 

               현재의 유류 수급관계로 볼 때 고유가는 계속될 것으로 예측 된다 (사진-중앙일보)
 

더불어 저유가로 인한 풍요로움을 느낄 수는 없겠지만 우리나라의 경제규모가 커져서 이 정도의 유가 수준은 충분히 충격을 흡수 할 수 있으므로 오일쇼크(Oil Shock) 당시 같은 어려움을 겪기는 않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그렇다면 고유가시대의 어려움은 있겠지만 예전의 오일쇼크 당시처럼 경제가 완전히 마비 될 정도는 아니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 하다.

 
                 원유가 한정된 자원이지만 다양한 노력을 병행하면 고유가 시대를 극복할 수 있다.
 

아마 40대 이하에게는 오일쇼크라는 단어가 상당히 생소하겠지만, 1974년과 1979년에 있었던 국제유가급등은 세계경제를 순식간 공황상태로 빠뜨리는 엄청난 충격파를 가져왔다. 특히 1974년 1월 1일을 기점으로 배럴 당 3달러 하던 유가가 14달러(지금 물가 수준으로는 140달러 정도라고 한다.)로 폭등한 제1차 오일쇼크는 성장 초기에 있었고 경제규모도 작았던 우리나라의 생활방식을 순식간 바꿀 정도로 말 그대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1974년 오일쇼크 당시 석유를 얻기 위해 줄 선 모습
 

차량운행 제한, 연탄공급 확대 같은 원론적인 대책 외에도 요즘에는 상상하기 힘든 다음과 같은 대책도 실시되었다. 평일 오후 6시 이전 TV 방송이 금지되었고, 네온사인 간판도 사라졌으며 운동경기의 나이트 게임이 금지되었는데, 이런 조치가 단계적으로 해제된 것이 1980년대 중반 들어서부터다. 이런 고난의 시대(?)에 군이라고 예외 일수는 없었다. 다음은 오일쇼크 당시였던 1974년에 전차병으로 근무하였던 J씨의 경험담이다.
 

                                 한때 국군의 주력이었으나 현재는 퇴역한 M-47전차


그의 회고에 따르면 계속하여 이런 식으로 훈련 했던 것은 아니지만 오일쇼크가 닥치자 당시 전차병들은 훈련장을 뛰는 것으로 기동훈련을 많이 대체하였다고 했다. 5인 1조로 구성된 M-47 전차병들이 한데 모여 자신들의 전차가 기동한다고 가정하고 예정방향으로 깃발을 들고 구보하는 식으로 훈련을 하였던 것인데, 알다시피 지상의 왕자인 전차들이 엄청난 연료를 소모하지만 그렇다고 훈련을 중단할 수 없어서 선택하였던 고육책이었다.

 
                                전차병들이 마치 보병처럼 뛰어다니며 훈련하여야 했다
 

최근 벌어진 북한의 연평도 도발에서 연평부대 K-9 자주포대원들이 보여준 투혼은 평소 실전과 같은 훈련을 거듭하였기 때문에 즉각 대응할 수 있었던 증거다. 훈련은 모든 것이 충분히 지원되는 좋은 환경 하에 이루어지는 것이 좋겠지만 혹시 그렇지 못하더라도 결코 중단될 수는 없다. 오일쇼크 당시 전차병들은 위에 언급한 예처럼 훈련량을 늘이는 방법으로 질적 부족분을 보충하려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던 것이다.

 
                             철저한 훈련 덕분에 위기의 순간에도 즉각 대응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전차에 탑승하였다고 가정하고 전차병들이 무리지어 깃발 들고 뛰어다닌다고 상상하면 웃음이 나오지만, 당시 나라전체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훈련을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을까 하고 숙연해 지기도 하다. 그 어려웠던 시기에 이런 식으로나마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이들은 애썼던 것이었고 그들의 노고덕분에 대한민국은 발전을 중단하지 않았던 것이다.

 
                                              제2차 오일쇼크 당시의 신문보도
 

사실 오일쇼크는 에너지의 대외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의 경우 언제든지 닥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비록 그 당시처럼 고통스런 경험이 반복되어서는 곤란하겠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대비를 철저히 하여야 할 것이다. 먼저 사용하지 않는 전원의 코드를 뽑는 사소한 일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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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잊혀지지 않을 귀신잡는 용사들의 이야기
 
 

지난 1999년에 들어 북한이 서해에 새로운 군사분계선을 전격 선언하고 난 이후 연쇄적으로 벌인 일련의 군사도발로 인하여 NLL(북방한계선)을 서해 5도에 연한 군사분계선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동해바다에서의 군사분계선 또한 NLL이다. 다만 동해안의 NLL은 DMZ을 직선으로 바다 쪽으로 확장한 모양새이고 더불어 인근에 도서가 없기 때문에 서해 쪽과 지리적 여건이 다를 뿐이다.

 
                           보통 많이 간과하지만 NLL은 동해안의 군사분계선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동해에서 북한의 해상 도발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지금보다 더 극렬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1967년 작전 도중 북한 해안포의 포격에 의해 침몰하여 39명이 전사한 당포함 피격사건이나 이듬해 벌어진 미군 정보수집함인 푸에블로호(USS PUEBLO) 피납사건 그리고 1969년에 31명 탑승원 전원이 사망한 미군 정찰기 EC-121 격추사건이 모두 동해의 NLL 또는 북한 영해 부근에서 발생하였다.

 
                                  천안함 사건 이전 최악의 격침 사고인 당포함 사건
 

다만 적극적으로 분쟁지역으로 각인시키고자하는 서해에 비해서 동해의 NLL은 북한이 트집을 잡을 만한 이슈가 그다지 많지 않은데,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서해 5도 같이 북한이 껄끄러워 할 만한 전략요충지가 동해 NLL 인근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고 서해안의 석도나 초도보다 더 위협적인 위치에 있던 동해안의 여러 섬들을 휴전 직전까지 아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북한의 포격으로 파괴된 연평도 (사진-연합뉴스)
 

사실 해병대의 전략도서 확보작전은 서해보다 동해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신편 된 해병대 독립 제42중대는 1951년 2월 14일 초대 중대장 심희택(沈熙澤) 중위의 지휘 하에 원산 앞바다의 여도(麗島)를 거점으로 하여 주변의 신도(新島), 대도(大島), 모도(茅島), 사도(砂島), 황토도(黃土島) 등 총 6개 섬을 기습 점령하였다. 때문에 북한 측 동해안의 최대 요충지인 원산항은 전략적으로 봉쇄당한 입장이었다.

 
                           해병대는 여도를 비롯한 원산 앞바다의 주요 도서를 점령하였다
 

하지만 북한 입장에서 이보다 더 치욕스러운 사건은 해병대의 독립 제43중대에 의해 이루어졌다.  함경남도 명천이 고향인 최청송(崔靑松) 중위가 지휘한 제43중대는 그해 8월 28일, 명천군 상가면 앞바다의 양도(洋島)를 기습 점령하였다.  양도는 3개 섬으로 이루어진 소규모의 제도였지만 이곳의 점령은 북한입장에서 함경도 해안의 연해 길목을 차단당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여도에 상륙하는 해병대원의 모습
 

막강한 제해권을 발판으로 요충지 섬들을 해병대가 점령하자 북한은 이곳 섬들의 대안에 5배 이상의 병력을 증강시켜 배치하여야만 했고 그 만큼 최전선에 가해진 압박을 돌릴 수 있었다.  섬을 점거한 소수의 해병대가 육지로 진격할 수는 없었지만 북한 측의 공세에 수시로 격렬한 교전이 벌이지고는 하였다.  경우에 따라 일시적으로 외부와 연결이 단절된 해병대원들이 섬 안에 갇혀 산화하는 불상사도 있었지만 그러한 상황에서도 그들은 끝까지 최선을 다하였다.

 
                  동해 도서작전에서도 해병대는 불굴의 투혼을 보여 주었다 (사진-영화 스틸컷)
 

이처럼 동해안의 여도와 양도를 근거지로 하여 적의 배후를 양도부대로 개칭되었고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휴전 때까지 현 진지를 사수하였다.위협하고 적 보급차단 및 연안봉쇄에 혁혁한 전공을 세운 제42중대와 제43중대는 1952년 10월 여도부대와   비록 이들 부대의 도서작전은 전술적인 측면에서 중대규모가 펼친 작은 규모의 후방작전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눈엣 가시처럼 적에게 끼친 전략적인 효과는 엄청나게 컸다.

 
만일 원산만과 양도 일대에 NLL이 설정 되었다면 적들이 느낄 곤혹감은 대단하였을 것이다. 영흥만의 경우는 말할 필요조차 없지만 양도는 현재 북한의 미사일 기지로 유명한 무수단리및 핵 실험 장소 부근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러한 전과가 그동안 소홀하게 취급되어 왔던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휴전과 동시에 이들 요충지 섬들을 포기하고 철수하여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만일 이 섬들을 아직까지 우리가 장악하고 있고 이곳까지 NLL이 선포되었다면 과연 어떠하였을까?  서해 5도가 현재 대한민국 안보에서 차지하는 전략적 위치를 고려한다면 쉽게 답이 나올만한 이슈가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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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령도가 끝이 아니었다
 
 

'서해 최북단'
흔히 신문보도나 방송 매체에서 백령도를 지칭할 때 쓰는 표현인데, 백령도가 군사분계선의 가장 서북쪽 끝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휴전이후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군사분계선은 육상을 가로지르는 DMZ(비무장지대)와 바다의 경계선인 NLL(북방한계선)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철책으로 명확히 구분된 DMZ와 달리 NLL은 서해 5도의 북쪽 해상을 연결하는 바다 위의 가상 선이므로 육안으로 구별하기는 힘들다.
 

                   현재 서해 최북단인 백령도 (천연비행장으로도 유명한 백령도의 사곶 해변)
 

그런데 우리가 좀 더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면 서해 최북단의 섬은 백령도가 아닐 수도 있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당시에 유엔군사령관 클라크(Mark Clark)장군은 서해 5도의 북쪽인 북위 37도 35부와 북한의 점령지인 옹진반도 남단의 북위 38도 03부 사이의 중간 해역을 연결하여 NLL을 선포하면서 그 이북에 아군이 점령하고 있던 섬에서 철수하였기 때문이다.

 
                                         북한이 도발의 빌미로 삼고자하는 NLL
 

이때 해병대가 적의 도발을 물리치고 강고하게 점령하고 있던 동서해의 여러 섬들을 부득이 포기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서해의 석도(席島)와 초도(椒島)는 그야말로 요충지 중의 요충지였다. 석도와 초도는 평안남도와 황해도를 가로지르는 대동강하구의 광량만에 위치한 섬들인데, 북한 서해의 최대항구인 진남포와는 30킬로미터의 거리이고 평양까지도 70킬로미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북한의 심장부를 겨냥하는 위치인 석도와 초도
 

최근 연평도에 MLRS가 배치된 것과 관련하여 서해 5도를 방어기지가 아닌 유사시에 적 후방을 타격하는 전략 거점으로 육성하면 북한이 상당히 곤혹스러워 할 것이라는 의견에서 알 수 있듯이, 만일 현재까지도 석도나 초도를 우리가 장악하고 이곳에 장거리 타격무기를 전진 배치한다면 북한이 느낄 압박감은 이루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한 것은 석도나 초도의 점령은 북한이 서해바다를 포기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NLL이 석도까지 연결되었다면 북한의 서해는 완전히 고립되는 형국이다
 

NLL을 초도와 석도까지 연결한다면 북한의 서해바다는 완전히 봉쇄되는 형국이다. 현재 서해 5도로 인하여 주요 항구인 해주가 제 기능을 십분 발휘하지 못하는 것만 보아도 충분히 유추 가능한 부분이다. 지난 천안함 사태로 인하여 북한군 잠수함대가 전개하고 있는 해군기지로 알려진 비파곶이 바로 석도 맞은편에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위치의 전략적 가치를 충분히 알 수 있다.
 

                                  북한의 잠수함기지인 비파곶이 바로 앞에 있을 만큼
                               석도와 초도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교동도를 거쳐 백령도 점령을 완수한 해병대 독립 제41중대가 1951년 5월 7일 기습 상륙하여 석도와 초도를 장악하자 북한은 경악하였다. 북한이 얼마나 위기의식을 느꼈는지는 한 개 중대가 점령한 석도와 초도를 경계하기 위해 무려 2개 사단을 맞은편 대안에 이동 전개 시켰던 사례에서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다. 당연히 섬을 재 장악하기 위한 북한의 도발은 집요하였고 그 과정에서 철수 전까지 수많은 격전이 벌어졌다.
 

                           1951년 12월 21일 병력교대를 위해 초도에 상륙하는 해병대원
 

해병대는 압도적인 해군의 화력 지원 하에 적의 접근을 거부시키는데 성공하였지만, 소수의 부대가 적진 한가운데에 동 떨어져 벌이는 작전은 항상 많은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었다. 예를 들어 1952년 3월에 석도 앞의 작은 무인도인 호도에서 벌어진 격전에서 악천후로 인하여 외부지원이 끈긴 해병대 1개 소대가 5배나 많은 적의 공격을 끝내 격퇴시켰지만 소대원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실종당하는 참사를 겪기도 하였다. 이처럼 해병대는 피와 눈물로 서해의 요충지를 지켜내었다.
 
 
                            서해의 요충지를 소수의 해병대원들은 피와 눈물로 사수하였다
                             (석도에서 교전 중 부상당한 병사를 후방으로 이송하는 모습)
 

하지만 앞에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휴전협정 체결 후 유엔군은 원격지라 판단한 석도와 초도를 전격 포기하였다. 따라서 우리가 서해 5도에만 준하여 NLL을 설정한 것은 북한에게 커다란 은혜를 베푼 것과 다름없었고 사실 북한도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못하고 전후 20년간 엄중하게 이를 지켜왔다. 하지만 최근 방자하게도 이를 망각하고 도발을 일삼는 것을 보면 석도와 초도를 너무 쉽게 포기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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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해 5도를 사수한 소녀시대
 
 
1951년 4월 2일, 해병대 독립 제41중대는 강화도 서북단에 위치한 교동도를 기습 점거하였다. 당시 피아가 한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중이었기 때문에 강화도, 황해도 연백, 경기도 개풍을 동시에 감제할 수 있는 교동도를 확보하였다는 것은 한강 하구를 우리의 의도대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찬란했던 서해 5도 확보 작전의 시작이기도 하였다.

 
                                             교동도는 지금도 전략 요충지다
 

아군의 점령 전까지 교동도는 군사적으로 무주공산이었지만 강 건너 연백에는 대규모의 북한군 8사단 2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이들은 군사적으로 교동도를 점령하는 것이 불가능하더라도 순순히 내어주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지난 연평도 포격 사건처럼 교동도에 수시로 포격을 가하여 위협을 가하는 것과 동시에 간첩을 침투시켜 후방을 교란하는 양동 작전을 구사하였다.

 
                                   북한은 교동도에 대한 다양한 공세를 지속하였다
 

원래 작은 교동도에는 2천여 명의 원주민이 살고 있었지만 전쟁 통에 외지에서 유입된 피난민들로 인하여 거주인구가 1만을 상회하면서 간첩들이 활동하기에 좋은 여건이 조성된 상태였다. 따라서 제41중대는 교동도를 선점한 후, 진지 구축 같은 군사작전 외에도 적극적인 대민교육활동을 벌여 전선 바로 뒤를 혼란시키려는 북한군의 기도를 일거에 제압하였다.

 
                          피난민들이 몰려든 틈을 이용한 북한의 후방 작전은 집요하였다
 

이와 관련한 재미있는 한 가지 일화가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교동도를 점령한 독립 제41중대는 군목이었던 신성국 소위가 정훈조를 조직하여 간첩 색출과 더불어 거주민들을 상대로 한 방첩교육 같은 민사작전을 벌였다. 그런데 병력이 부족하다 보니 현지에 거주하던 많은 민간인들이 부대활동에 자진 참여하여 해병대의 활동을 적극 도왔고 그중에는 5명의 여고생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인천상륙작전 당시에 후방작전을 펼치는 해병대의 모습 (사진-Getty Images)
 

원래 교동도에 고등학교가 없기 때문에 그녀들이 진짜 여고생이었는지 아니면 학정을 피해 이북에서 피난 온 학생들이었는지는 모르지만, 포탄이 날아다니는 최전선 일대에서 중요한 활동을 벌이기에는 너무나 어린 소녀들이었음은 확실하다. 따라서 해병대는 위험을 경고하며 이들의 활동을 만류하였는데, 소녀들의 결심을 바꿀 수 없어 결국 민간인 계도 활동에 투입하였다.

 
                        전쟁 전 옹진반도에 주둔한 국군 제17연대를 위문한 여고생들의 모습
                        서해 5도에서 활약한 여고생들도 이와 비슷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사실 오늘날과 달리 당시에 여고생이라면 상당한 인텔리 계층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한마디로 지식과 미모를 겸비한 여고생들의 적극적인 정훈작전이 후방 대민계몽에 상당히 효과적이었던 것으로 해병대 전사에는 소개되고 있다. 굳이 언급하자면 그녀들을 당대의 소녀시대라 칭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소녀들의 활동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당시 여고생들은 상당한 지식인 계층이었다. (휴전 반대 데모를 하던 당시의 여고생)
 

제41중대는 다음 목표인 백령도를 점거할 예정이었고 당연히 소녀들의 동행을 거부하였다. 그러자 여고생들이 몇 날을 울고불고 애원하였고, 결국 무지막지한 떼쓰기 전술로 귀신 잡는 해병대를 처참하게 굴복시킨(?) 여고생들은 백령도까지 동행하여 멋진 후방 작전을 계속하였다. 해병대 전사를 살펴보면 그녀들은 이후 해병대와 함께 대동강 하구의 석도까지 침투하여 후방작전에 종사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란 속에 활약한 수많은 소녀시대가 대한민국을 수호하였다 (최초의 여성 해병인 문인순 여사)
 

아쉽게도 현재 여고생들의 정확한 신상이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분명한 것은 그녀들도 서해 도서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숨어있는 해병대원들임에 틀림없다는 점이다. 전란 속에 활약한 그녀들의 노고로 지켜낸 서해 5도와 NLL은 오늘날 대한민국을 지탱하는 힘이 되었다. 해병대의 서해 5도 사수에 기여를 아끼지 않은 당대의 소녀시대에게 진심으로 존경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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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LL 그리고 해병대

 
 
금번에 발생한 연평도 포격사건으로 인하여 NLL(북방한계선)이 국가 방위에 엄청난 역할을 하고 있음이 다시 한 번 부각되었다. 지리적 여건으로 말미암아 NLL에 배치된 우리 해병대의 전력이 북한군에 비해 절대 열세인 사실이 우려스럽게 다가왔지만, 그것을 역으로 생각하면 아군의 10배가 넘는 북한 4군단을 DMZ으로 전개되지 못하도록 잡아놓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리적 여건으로 말미암아 NLL의 아군이 열세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대규모의 북한군을 
             잡아놓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림-연합뉴스)

 
서해바다에 이렇게 전략적으로 놀라운 군사분계선이 위치하게 된 것은 백령, 대청, 소청, 연평, 우도로 점점이 흩어져 있는 서해 5도를 휴전당시 아군이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북한이 무효화를 주장하면서 NLL 자체를 인정하려 들지 않지만 막상 NLL을 선포하였을 때 북한은 가만히 있었다. 그러했던 이유는 한마디로 그것이 그들에게 유리하였기 때문이었다.

 
                               서해 최북단 백령도에서 바라본 장산곶 (사진-연합뉴스)
 

1953년 휴전직후 유엔군사령부는 휴전 당시에 별도의 논의가 없었던 해상 분계선과 관련하여 NLL을 선포하고 즉시 북한에 통보하였다. 그것은 NLL을 넘어서 우리 해군이 작전을 펼치지 않겠다는 의미였는데, 북한군이 이곳 아래로 내려오지 말라는 경고의 뜻보다 우리가 이곳을 넘어 북쪽으로 가지 않겠다는 통보에 가까웠다.

 
                        휴전협정 조인 당시의 모습 그런데 해상 경계에 대한 논의가 없었다
 

현재 NLL은 북한의 군사적 도발을 억제하는 최전선이 되었지만, 휴전 당시에는 오히려 북한이 얻는 이익이 컸다. 바로 전쟁 내내 그들을 공포로 몰아넣으며 괴롭혀온 유엔군 해군의 공격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즉 유엔군 해군이 알아서 어느 선 이상으로 올라오지 않겠다고 스스로 선언하였으니 너무 반가웠던 것이었다. 그만큼 그들은 바다를 심정적으로 포기한 상태였다.

 
                        한국전쟁 당시 적진을 향해 날리는 전함 미주리의 가공할 포격 장면
 

NLL 설정 당시에 아군이 장악하고 있는 도서를 연결하여 바다위에 분계선을 긋는 것은 너무 당연하였다. 국경이 아닌 군사분계선은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있는 곳을 연결하는 것이 불문율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NLL을 다행스럽게 생각한 북한은 휴전 직후에 어떠한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그런데 1973년 이후부터 북한은 서해 5도 주변수역을 연해라고 주장하면서 긴장을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제1차 연평해전 당시의 긴박한 모습
 

계속적인 군비증강으로 우리를 앞섰다고 판단한 북한은 이때부터 노골적인 도발야욕을 표출하였다. 당시는 월남전이 격화되어 가고 있었고 더불어 한반도 방위의 한 축을 담당하던 미 7사단이 철수하는 등 주변정세가 좋지 않게 돌아가던 중이었다. 더불어 오일쇼크에 따른 극심한 경제 침체도 우리를 어렵게 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침략의 명분을 잡기위해 NLL에 대한 북한의 트집이 시작되었던 것이었다.

 
                             철수 전 미 제7사단이 주둔하였던 레드크라우드 기지 정문
 

지금은 그때와 안보환경이 많이 바뀌었지만 서해에서 벌어진 여러 차례의 교전이나 연평도 포격처럼 북한이 아직도 NLL에 목을 매는 이유는 NLL의 철폐보다 긴장감을 조성하여 북한내부의 동요를 단속하려는 목적과 동시에 대한민국의 내부분열을 노리기 때문이다. 사실 처음 언급한 것처럼 오래되었지만 생소했던 단어인 NLL이 최근 들어 누구나 알게 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해병대 제6여단과 연평부대의 선배인 독립 41중대를 포함한 도서방어부대기
 

이렇게 현재도 우리 안보를 굳건히 지키는 최전선인 NLL이 성립될 수 있도록 서해 5도를 확보하게 된 것은 전쟁이라는 혼란한 상황 중에도 그 전략적 위치를 미리 인지하고 전광석화 같은 도서 확보작전을 펼쳤던 해병대 독립 41중대를 비롯한 도서방어부대의 분투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곳을 이제는 후배들인 해병대 제6여단과 연평부대가 굳건히 지키고 있다. 변함없는 당신들의 투혼에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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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후 도입되기를 희망하는 것
 
 

금번 서해상에서 벌어진 한미 연합훈련은 사상 최대 규모로 평가되는데, 그중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은 미 해군의 항공모함 조지 워싱턴호(CVN-73 USS George Washington)이었다. 항공모함을 운용중인 국가가 그리 많지 않고 더더구나 조지 워싱턴호 같은 초대형 핵 추진항공모함은 미국만이 유일하기 운용하는 전략 병기이기 때문에 세인들의 주목을 받은 것이다.
 

                             서해로 출동하기 위해 모항인 요코스카항을 빠져나오는 조지 워싱턴
 

항공모함이 전략병기인 까닭은 그 뛰어난 기동력 때문이다. 이동이 자유로운 항공기지를 보유한 국가와 그렇지 못한 국가 간의 대결에서 누가 유리할 것인지는 굳이 오래 생각할 필요가 없다. 혹자는 배가 빨라봤자 얼마나 빠르겠냐고 반문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래도 전투지역 근처에 비행장을 새롭게 만드는 것보다 비행단을 탑재한 항공모함을 이동시키는 것이 시간적으로 훨씬 유리하다.
 

             비행장 파괴 시에 사용하기 위한 비상활주로는 비행장의 신속 확보가 쉽지 않다는 의미
             이기도 하다 (비상활주로에서 훈련 중인 F-15K) 이러한 제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항공모함은 그래서 전략병기로 취급받는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비록 그 크기가 모두를 압도할 만큼 어마어마하지만 항공모함 자체는 무기라기보다는 일종의 플랫폼이고 항공모함에 탑재한 함재기들에 의해 그 능력이 결정지어 진다고 할 수 있다. 항공모함을 물자수송 등의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항공모함의 존재이유가 아니다. 따라서 함재기 없는 항공모함은 본연의 임무를 상실한 무기라고 단정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조지 워싱턴호에 탑재된 다양한 종류의 함재기들
 

이처럼 항공모함이 최고의 전략 무기로써 자리매김하게 하도록 만들어 주는 함재기에는 공대공 전투와 공대지, 공대함 공격에 투입되는 다목적 전술기외에도 조기경보기, 전자전기, 대잠작전기, 수송기, 구난헬기 등이 존재한다. 물론 국군이 보유한 장비들이 미 항공모함 함재기들과 비교하여 결코 성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조지 워싱턴 항모전단의 편대 비행모습
 

오히려 우리 공군의 최신예 주력기인 F-15K는 항공모함의 주력 전술기인 F/A-18E 보다 우위에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조만간 제식화 될 예정인 국군의 조기경보기 E-737도 항공모함에 탑재된 E-2C보다 작전반경이나 능력이 좋다. 비록 항공모함이라는 기동성 있는 플랫폼을 국군이 운용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적어도 항공전력 만큼은 우리 군도 그에 못지않게 뛰어남을 알 수 있다.

 
                                                           착함하는 F/A-18E 슈퍼 호넷
 

그런데 우리 군이 미 항공모함 함재기들과 비교하여 아직 갖추지 못한 장비가 있는데 바로 전자전기(EWA-Electronic Warfare Aircraft)다.  전자전기는 아군 전술기가 적진 에서 원활히 작전을 펼칠 수 있도록 사전에 적의 레이더망이나 통신망 등을 교란시키는 중요한 임무에 투입되는데, 이번에 작전에 동원된 조지 워싱턴호에는 EA-6B가 탑재되어 있고 조만간 최신의 EF-18G로 교체될 예정이다.

 
                  전자전기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미 해군의 전자전기인 EA-6B 그라울러) 
 

우리 공군의 주력기인 F-15K나 KF-16에도 일부 전자전을 수행할 수 있는 기능이 있으나 매우 제한적이다. 만일 유사시에 한국 공군이 단독적으로 작전에 나설 경우 전자전기가 함께 투입된다면 그 능력을 배가 시킬 수 있을 것이다. 흔히 공대공전투기, 공대지공격기, 전자전기, 조기경보기, 공중급유기 및 수색구조대가 함께 출격을 나가는 것을 스트라이크 패키지(Strike Package)라고 하는데, 우리 공군 단독으로 이런 패키지를 구성하기에는 아직 부족한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방공망이 강화된 적진에서 작전을 펼치기 위해서 전자전기의 도입이 요구 된다
                 (고성능 대공미사일인 S300으로 추정되는 장비를 선보인 북한군 열병행사)
 

북한의 방공망은 세계에서 가장 오밀조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지난 10월 10일 고성능의 지대공미사일인 S300으로 추정되는 장비도 선보여 그 능력이 더욱 확대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따라서 위기 시에 이러한 북한의 방공망을 뚫고 작전을 펼쳐야 하기 위해서라도 최신예 전자전기의 조속한 도입이 요구된다. 연평도 사태이후 전력 증강을 위해 당국도 적극 나서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이 분야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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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들이 있기에
 
 

북한의 연평도 급습 당시의 생생한 모습을 담은 몇 장의 사진들이 공개 되었다. 특히 포진지가 적의 피격으로 불타는 위급한 순간임에도 침착하게 K-9자주포를 전개하는 해병대원들의 처절한 사투와 철모가 불타고 얼굴에 화상을 입는 와중에도 맡은바 임무를 다한 임준영 상병의 모습은 보는 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어 주었다.

 
                                   철모가 불타는 순간에도 최선을 다한 임준영 상병
 

그러한 연평부대의 처절했던 11월 23일 전투의 모습에서 지난 60년 전 기습남침을 감행한 압도적인 북괴군에 맞서며 살신성인의 분투를 보여 주었던 제18포병대대의 모습이 떠올랐다. 시대와 환경이 다르지만 이번 해병대 연평부대의 투혼은 지난 한국전쟁 당시 제8사단 18포병대대(현 제2사단 예하)의 모습을 반추하는데 결코 모자람이 없고 생각되어 소개한다.

 
                                        적의 기습으로 탄흔이 가득한 포진지의 모습
 

1950년 6월 27일 새벽 4시, 그동안 국군 제8사단의 강력한 저항으로 진격이 지체되었던 북한군은 5배나 많은 전력을 앞세워 공격을 재개하였고 결국 국군 제5사단 10연대가 담당하던 연곡천 방어선을 돌파하였다. 이때 10연대의 급작스런 붕괴로 말미암아 최전방 배후까지 올라와 화력 지원을 하던 제18포병대대의 포진지도 동시에 적의 전면에 노출되는 위기에 빠졌다.
 

                                      창군 초기 국군의 유일 중화기였던 M-3곡사포
 

만일 이 상태에서 무작정 후퇴한다면 이동속도가 느린 포병대대 전체가 적에게 추월당하여 포위될 가능성이 농후하였다. 따라서 포병대대는 정면에서 교전하여 적의 진격속도를 누그러뜨리면서 후방으로 이동하기로 하였다. 장병들의 생사도 물론 중요하지만 아군의 유일중화기와 다름없는 M-3곡사포를 최대한 보존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이처럼 단 한 문의 포도 쉽게 포기할 수 없었을 만큼 한국전쟁 초기에 우리 군의 전력은 부족하였다.

 
                               포병대대는 적을 가시권까지 끌어들여 직접 타격하였다
 

포병대대원들은 옥쇄(玉碎)의 각오로 인식표를 땅에 묻고 포병진지 전방 100미터까지 적들이 다가오도록 기다린 후 수평으로 포신을 낮추어 직접 타격하여 적을 당황하게 만들었고 포진지로 난입한 적과 백병전을 치루며 포들을 이동시켰다. 이러한 급박한 와중에도 2문의 포가 밭에 빠져 회수할 수 없자 적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조치하고 난 후 후퇴하였을 만큼 대대원들은 침착하였다.

 
                                           제18포병대대 순국 3용사 추모행사
 

이때 2번 포차 운전병 심우택 이병은 포 폐쇄기를 안은 채 산화했고, 통신소대 최서종 중사는 와이어 드럼을 회수하기 위해 적진으로 뛰어 들어갔다 돌아오지 못했다. 또한 관측반 한명화 하사는 끝까지 관측소에 남아 임무를 수행하다 순국했다. 이처럼 적에게 포위 될 위기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제18포병대대 병사들이 보여준 이러한 분전은 전쟁 당일 강릉을 점령하려던 북한의 계획을 무려 사흘간이나 지체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힘이 되었다.

 
                                          그대들의 분투에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이번 적의 연평도 도발에서 압도적인 적 해안포 세력에 비해 불리한 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연평부대가 보여준 놀라운 사투는 밤하늘의 별처럼 국군의 자존심을 세워 준 모습이 아닐까도 생각되며 60년 전 제18포병대대가 보여준 용전과 비교하여 결코 모자람이 없다. 선배들 못지않은 투혼을 보여준 연평부대원들의 노고에 감사의 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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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패와 눈물 없이 성공은 없다
 
 

1980년대가 끝나갈 무렵, 미국의 신형 전략폭격기 B-2 Spirit가 세상에 처음으로 모습을 보였을 때 많은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적의 방공감시망을 피해 목표지점까지 은밀히 다가갈 수 있는 스텔스(Stealth) 성능도 경이로웠지만, 그러한 자세한 성능은 차치하고도 우선 눈에 보이는 비행기의 모양새만 가지고도 상대의 기를 죽일 정도였다.

 
                          경이롭다 못해 괴기스럽기까지 한 B-2 전략폭격기
 

지금까지 보아왔던 비행체와 확연히 차이가나는 전익기(Flying Wing) 형상 때문이었는데, 이러한 혁신적인 모습을 빗대어 "저것은 지구인이 만든 것이 아니라 외계인이 선물한 것" 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한마디로 겉으로 보여 지는 외형만으로도 최첨단의 무기임을 자랑하는데 결코 모자람이 없었다.

 
                  여타 전략폭격기와 비교하여도 확연히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좌에서 우로 B-2, B-52, B-1B)
 

그런데 상상을 뛰어넘는 혁신적인 디자인의 전익기는 사실 하루아침에 만들어 진 것은 아니고 그 역사가 의외로 오래 된 형태의 비행체다. 흔히 저런 비행체를 보았을 때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이라면 비록 실용화까지는 이르지 못하였지만 혁신적인 구상을 많이 남겨 이후 호사가들에게 많이 회자되는 나치의 비밀병기다. 그렇다면 나치 독일이 저런 비행체를 연구 하였던 것일까?

 
                          마치 UFO같은 나치 독일의 Sack AS-6 실험기
 

다음 사진은 1942년 말 독일의 글라이더 제작사인 호르텐(Horten)이 설계한 Ho-7 실험기다. 이를 바탕으로 제2차 대전 종전 직전에 아래 사진처럼 제트엔진을 장착한 Ho-229까지 제작하였으나 전쟁이 종결 되고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 지금보아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뛰어난 모습인데 무려 65년 전에 전익기는 이미 실용화직전까지 제작이 이루어졌다.

 
                              혁신적인 모습의 Ho-7의 1940년 비행모습 
 

연과 같은 모습인 전익기는 체공에 상당히 적합한 구조지만 자세제어에 상당한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이 때문에 컴퓨터와 같은 전자 제어기술이 부족하였던 당시에 완벽한 전익기의 완성은 상당히 어려웠다. 그런데 독일이 이러한 전익기 개발 유일국가는 결코 아니었다. 단지 선도국가들 중 하나였을 뿐이고, 개발과 적용에 있어 빛을 발 한 나라는 미국이었다.

 

               개발도중 종전으로 완성되지 못한 Ho-229(上)와 최근 재현한 목업
 

아래 사진은 1929년 미국 노드롭(Northrop)의 실험기인 X-216H다. 완전한 전익기로 볼 수 없는 실험기였는데, 1940년에는 N-1M처럼 보다 발전된 단계까지 제작이 이루어졌다. 우연이었는지 독일의 Ho와 거의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독일이 패전하고 난후 노드롭은 전후에도 이 분야 연구의 선도적 역할을 계속 담당하였다.

 
                              1929년 비행에 나선 노드롭의 X-216H
 

이런 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노드롭은 실험용 차세대 전략폭격기인 XB-35을 제작하여 비행에 성공하였는데 그때가 1946년 6월 25일이었다. 비록 B-36이나 B-52같은 차세대 전략폭격기에 밀려서 제식화되지 않았지만 4톤의 폭장을 하고 무려 12,000Km를 비행할 수 있는 성능을 자랑하였다. 일설에는 시대를 앞서는 너무 혁신적인 모습이 오히려 채택되지 못한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고 할 정도였다. 
 

                            1946년에 제작된 실험용 전략폭격기 XB-35
 

비록 군에서 거부당하였지만 XB-35는 이듬해 제트엔진을 장착한 실험기인 YB-49로 진화를 거듭하여 비행 실험까지 완료하였다. 그런데 YB-49에서 B-2의 모습을 엿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이처럼 최신 전략폭격기 B-2의 제작사인 노드롭(현재의 노드롭그루먼)은 이미 수 십 년 전부터 전익기와 관련한 노하우를 축적하여 왔기에 B-2가 탄생한 것이었다.

 
                                      제트 엔진을 장착한 YB-49
 

이처럼 혁신적인 비행체가 외계인의 도움이 있어서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그 동안 계속된 연구와 축적된 기술 그리고 장기간에 걸친 꾸준한 도전으로 탄생한 것이다. 당연히 그러한 과정 중에는 무수한 실패와 난관이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사실 이것은 무기의 개발사뿐만 아니라 모든 일상사에 해당되는 이야기다.  혹시 그동안 남의 성공 뒤에 숨어있던 실패와 눈물은 보지 않고 결과만 부러워만 하지 않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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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으로 불참한 제1회 대회
 
 
 
1948년 7월 29일 제2차 대전에서 입은 피해가 완전히 복구되지 않은 영국의 런던에서 제14회 올림픽이 개최되었다. 지난 1936년 제11회 베를린 대회 이후 무려 12년 만에 부활한 평화의 제전이었다. 이 대회는 전후의 시대상을 반영하듯 독일, 일본과 같은 패전국들의 참가가 불허되었던 반면, 우후죽순처럼 탄생한 많은 신생 독립국들이 올림픽 무대에 새롭게 얼굴을 내밀었다.

 
             제14회 런던 올림픽에서 대한민국 최초로 메달을 획득한 김성집 선생
 

그러한 국가들 중에는 대한민국도 있었는데, 엄밀히 말해 대한민국은 폐막식 다음날인 1948년 8월 15일에 정부가 수립하였으므로 공식적으로는 아직 국가의 실체가 존재하기 전이었다. 하지만 그런 형식적인 문제는 차치하고 오랜 압제로부터 해방을 맞은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은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세계무대를 내달렸다.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웠다는 이유만으로 고초를 겪었던 시절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런던 올림픽에서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경기에 임하는 축구 국가대표
 

바로 그 대회에서 열강의 식민지로 수많은 고초를 겪었던 아시아의 신생 독립국들은 지역 내의 단결을 목적으로 하는 별도의 지역제전을 만들기로 의견을 모았다. 인도의 IOC위원인 손디(Guru Dutt Sondhi)가 제창한 의견에 대한민국, 인도, 필리핀, 버마(현 미얀마), 중국(현 대만), 실론(현 스리랑카)의 6개국이 동의하였고 이듬해 창설된 아시안게임연맹(AGF)이 제1회 대회를 1950년 인도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제1회 아시안게임 엠블램

 
이것이 바로 올림픽 중간 해에 4년마다 개최되는 아시안게임(Asian Games)이다. 이렇게 작지만 원대한 꿈을 가지고 시작한 아시안게임은 어느덧 중국의 광저우에서 제16회 대회를 개최하게 되었을 만큼 연륜이 쌓였다. 이번 대회에는 45개국의 9,700여명의 선수들이 참여하여 모두 42개 경기의 476개 세부종목에서 열띤 경쟁을 펼치는 거대한 축제의 장으로 변하였는데, 이것은 종합경기대회로는 올림픽 다음가는 거대한 규모다.

 
       제16회 광저우 아시안게임 개막식에 입장하는 대한민국 선수단 (사진-Mydaily)
 

우리나라 선수단은 대회 초반부터 다양한 종목에서 골고루 선전을 펼치며 국민들을 즐겁게 하여 주고 있다. 중국의 독주가 두드러지지만 대한민국은 아시안게임에서 항상 선두권에 드는 경기력을 유지하고 있는데, 특히 지난 1994년 일본의 히로시마에서 개최 된 제12회 대회를 제외하고는 제10대회 이후 계속하여 전통의 체육 강국인 일본보다 앞선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다.

 
          놀라운 경기력을 선보여 국민에게 기쁨을 선사한 박태환 선수 (사진-Osen)
 

이처럼 항상 대회의 주역으로 커다란 활약을 보여주는 대한민국은 아시안게임의 창설에부터 적극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2번의 대회를 개최(1986년 서울, 2002년 부산)하였고 제17회 차기대회(2014년 인천)도 개최할 예정으로 있는 핵심 중의 핵심국가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그 의의가 컸던 제1회 대회에 우리나라가 참석하지 못한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아시안게임의 주역인 우리나라는 전쟁으로 제1회 대회에 참석할 수 없었다
.
 

원래 제1회 대회는 1950년 인도의 뉴델리에서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준비가 부족하여 1년이 연기된 1951년 3월 4일에 열렸다. 11개에서 온 489명의 선수들이 6개 경기의 57개 세부종목에서 열띤 경쟁을 벌였는데 올해 대회와 비교하면 상당히 소박한 대회였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대회 창설의 주역이었던 대한민국은 전쟁으로 말미암아 참가할 수 없었다. 당시는 1.4후퇴 이후 공방전이 치열하게 벌어졌던 시기라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오늘의 환호와 감격 속에서도 과거의 아픔을 잊지 말아야한다
 

신생독립국으로 지역 내 평화구현에 적극적으로 앞장서려고 하였고 이를 적극 추구하고자 노력한 대한민국이 막상 침략을 당하여 제1회 대회에 불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진정 가슴 아픈 과거라 아니할 수 없다. 어느덧 오랜 시간이 흘러 오늘의 환호와 감격 뒤에서 이런 흔적을 찾기는 힘든 시절이 되었지만 잊지 말고 기억하여야 할 분명한 역사가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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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뒤로 돌아 공격한다.

 
 
G-20정상회담 때문에 자세히 보도되지는 않았지만, 지난 11월 10일 중요한 행사가 전쟁기념관에서 벌어졌다. 6.25전쟁 당시에 벌어진 가장 극적이었던 전투 중 하나였던 장진호(長津湖)전투 제60주년 기념행사였다. 함경남도의 장진호에서 함흥에 이르는 첩첩산중의 가도에서 벌어진 이 전투는 세계전투사에서 전설로 전해질 만큼 기념비적인 전투였다.

 
                                                장진호전투 60주년 기념식
 

전투는 1950년 10월 말부터 장진호일대로 진격하던 미 해병 제1사단이 험준한 산악 사이에 매복해 있던 약 10배 가까이 많은 중공군 제9병단이 포위당하면서 벌어졌다. 전투 중  영하 30도까지 떨어지는 혹한의 날씨가 연일 계속되었는데, 이런 악천후에서 미군이 전투를 치러본 것은 처음이었고 이후 이것은 미군 당국이 동계전투연구에 대대적으로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
 

                                                치열했던 장진호전투의 모습
 

백과사전처럼 전투결과만을 간략히 기술한 단편적인 내용에만 따르면 장진호전투를 중공군의 승리, 미군의 패배라고 기록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지리적 점령만을 승패의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비록 미군은 피해를 많이 입었지만 승자로 기록된 중공군의 피해는 참혹할 정도였다. 미군은 전사 393명, 부상 2,152명, 실종 76명의 피해를 입었지만 반면 중공군은 5만 여명이 전사상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포위당한 이들에게 찾아 와 스스로 항복한 중공군 포로들
 

흔히 1.4후퇴로 잘 알려진 중공군의 제3차 공세에 이처럼 처참하게 무너진 제9병단이 동원될 수 없었다. 때문에 이 전투로 인하여 미군이 함경도 일대에서 후퇴하게 되었으므로 전략적으로 중공군이 승리한 것은 맞는데, 중공군이 전투력을 상실할 만큼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기 때문에 전술적으로는 미군의 대승으로 언급되고 있다. 따라서 미군, 특히 이 전투의 주역이었던 미 해병 제1사단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장진호전투 당시의 미 해병 제1사단
 

미 해병 제1사단의 자랑이 된 이 전투에서 사단장이던 스미스(Oliver P. Smith) 소장(훗날 대장으로 예편)의 리더십은 상당히 유명한데, 오늘날도 그가 보여준 지휘능력은 상당한 반면교사가 된다.


                                          장진호 전투를 승리로 이끈 올리버 미 제1해병사단장
 

우선 올리버는 무리한 진격을 삼가 했다. 그는 아군이 대공세에 나섰던 1950년 10월 북진당시에 UN군부대 중 거의 유일하게 배후의 안전을 확보하고 난 후 사단을 이동시키는 신중함을 보였다. 비록 진출은 더딜 수밖에 없었지만 이러한 철저한 준비는 중공군의 출몰이후 대책 없이 무너져 내린 여타부대들과 달리 후퇴시기에도 미 해병 제1사단이 놀라운 전투력을 유지시켜 주었던 힘이 되었다.
 
                                     험로를 통하여 철수하는 미 제1해병사단 병사들
 

다음으로 그는 위기의 순간에도 전부를 구해내는 용기를 보였다. 애당초 안전한 철수가 불가능해 보이자 상부로부터 병력만이라도 항공편으로 철수시키라는 제의가 들어왔다. 하지만 스미스는 본대철수를 위해 비행장을 확보하려면 일부 병력이 적지에 낙오될 수 있고 또한  장비가 중공군에 넘어가면 나중에 더 큰 위험이 되므로 그는 4,300명의 부상자만 항공편으로 철수시키기로 결정하고 적과 교전하며 육로로 탈출하는 길을 택하였다.

 
                                           전우의 시신을 수습하여 탈출하는 모습
 

해병대는 하나이며 결코 좌절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전 예하장병에게 전하여 사기를 북돋은 후 전 병력과 장비는 물론 전사자의 시신까지 수거하여 적진을 돌파하여 탈출하였다. 당시 그가 부대원들에게 "우리는 철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적을 격멸하고 후방을 향하여 새롭게 공격하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훈시를 내렸고 이것은 전설이 되었다.
 

                                      기념식에 참석한 역전의 용사들 (사진-세계일보)
 

이처럼 신념 있는 지휘관의 용기와 이를 믿는 부대원들이 함께 이루어낸 장진호전투는 비록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전투였다. 따라서 말년에 접어든 많은 참전 용사들이 노구를 이끌고 행사에 방문하였을 만큼 장진호전투 참전용사들이 갖고 있는 자부심은 그야말로 대단하다. 가장 무섭고 어려웠던 시기에 보여주었던 그들의 진정한 용기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많은 교훈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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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항미사일에 관한 작은 이야기
 
 
 

제2차 대전 말에 등장하여 세상을 놀라게 한 대표적인 비밀무기 중에 이른바 독일의 유명한 V병기가 있다. 그중 독일 공군이 운용하였다던 V-1은 오늘날 대표적인 장거리 정밀 타격 무기인 순항미사일(Cruise Missile)의 원조로 손꼽는데, 특히 초기의 공중발사 순항미사일(ALCM)인 AGM-86C를 보면 V-1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다.
 

                        지금 봐도 그 모습이 어설프지 않은 V-1과 이를 요격하는 스핏화이어
 

V-1은 펄스제트(Pulse-Jet) 추진으로 무유도 비행을 하여 적진을 타격하는 무인자폭비행기에 가까운 형태였는데, 오늘날 순항미사일과 비교한다면 정밀타격능력, 비행능력 등에서 평면적으로 비교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당시 연합군을 공포로 몰아넣는데 결코 부족함이 없었다. 호되게 당한 영국도 여러 번의 실패 끝에 스핏화이어로 근접 요격하는 방법을 겨우 터득 하였을 정도였다.

 
                                     V-1은 사출기와 이륙난간을 이용하여 발사되었다
 

V-1은 미리 제작된 거대한 사출기를 겸한 이륙난간을 이용하여 발사하는 체계여서 사실 운용하는 입장에서 볼 때는 상당히 제약사항이 많았던 무기였다. 독일 공군 또한 V-1을 보다 쉽고 편리하게 발사가 가능하게끔 많은 시도를 하였으나 전쟁이 종결되어 이를 실현하지는 못하였다. 전후에 V-1을 노획한 미국은 비행기에 장착하여 공중발사실험을 하는 등, 좀 더 정밀한 타격무기로 V-1을 개량하기 위해 힘썼다.

 
                                     전후 노획한 V-1을 공중발사 실험하는 모습
 

이런 시험결과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이른바 외과수술폭격(Surgical Strike)의 표본이라 불리는 토마호크(Tomahawk)순항미사일이 나타난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자체개발한 현무3 순항미사일을 보유하고 있고 그 외에도 많은 군사강국들이 다양한 종류의 순항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는데 그 기술적 기반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독일의 V-1과 만나게 된다.

 
                                       오늘날 순항미사일의 대명사가 된 토마호크
 

그런데 독일이 오늘날 순항미사일의 개념에 대해서 생각하였던 것은 V-1 훨씬 이전이었다. 이미 독일은 제1차 대전에 당시에 다음 사진과 같은 공중투하폭탄을 개발하였다. 무인비행기에 폭탄을 장착하여 적진을 습격하는 단순한 형태의 비행체였는데 실전에 적용하였는지의 여부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부에서는 이를 최초의 순항 미사일로 볼 정도다.
 

                              제1차 대전 당시 프랑스 신문에 보도 된 독일의 무인 자폭기
 

물론 당시의 기술로 무인자폭기가 원격제어나 자동제어를 통한 정밀한 순항능력을 갖추기는 어려웠겠지만 이런 이론적 바탕이 있었기 때문에 독일은 이후 V-1을 개발 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최초의 순항미사일이라는 명예를 가지고 있는 V-1도 어느 날 갑자기 툭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이처럼 오래전부터 꾸준히 연구하여온 기술력이 집합된 결과였다.

 
                    태평양 전쟁에서 광기에 사로잡힌 이들의 인간순항미사일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런데 전사에는 마구잡이 순항미사일을 등장하였던 경우가 있었다. 바로 가미카제(神風)라고 불리던 일본의 자폭기다. 순전히 희생을 전제로 한 인간의 조종능력에 의존하여 목표까지 날아가는 단순한(?)구조였는데 연합군에게 많은 공포를 유발하였다. 사실 공포가 컸던 이유는 그 폭발력보다 광기에 사로잡힌 인간들의 모습 때문이었다.

 
                              지금도 반복되는 자폭테러를 보면 가미카제가 연상된다
 

그런데 이것을 단순히 과거의 일만으로 치부하기는 힘든 것 같다. 미사일이건 비행체이건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구 어디에서인가 계속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느덧 일상화 된 무차별 자폭 테러를 보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인간’이라는 격언이 맞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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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를 건너 재탄생한 전투기들 [ 下 ]
 
 
                             타향에서 출현한 후계자들
 
 
그런데 한국전쟁 휴전당시에 남북 중 하나를 선택하여 돌아가거나 전향하는 것을 거부하고 인도나 브라질 같은 제3국으로 망명한 많은 전쟁 포로들이 있었던 것처럼,  패전 직후 미국이나 소련이 아닌 중립지역의 국가들로 망명하였던 독일의 엔지니어들이 있었다. 이들은 망명국으로부터 많은 환대를 받으며 독일에서 연구하였던 프로젝트를 계속 수행하였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미국으로 옮겨 온 독일의 V-2 팀
 

때문에 미소의 제1세대 제트전투기들이 등장하였을 때 그 동안 항공산업이 특별히 앞서 있거나 기술적 기반이 충분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던 국가들에서 F-86, MiG-15와 맞먹는 제트기들이 생산되기도 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전쟁당시 중립국이었던 스웨덴의 J-29 Tunnan전투기였다.

 
                    제1세대 전투기로 홀연히 등장한 스웨덴의 J-29 Tunnan
                    독일의 귤이 회수를 건너 오렌지가 된 부인 할 수 없는 증거다
 

그 모양은 오히려 오리지날 베이스로 생각하던 Ta-183의 재현이 아닌가 할 정도로 똑 같았다.  스웨덴이 독자적으로 개발하여 어느 날 뚝딱하고 만들었다고는 절대로 상상 할 수 없을 만큼 닮아 있다.  부인 할 수 없지만 이것은 귤이 발트해라는 회수를 건너 오렌지가 된 경우였다.

 
                영락없이 J-29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Ta-183의 상상도(上)와
                전후 소련에서 노획물을 이용하여 카피 개발한 Ta-183의 희귀한 모습
                독일의 귤이 전후 소련 오렌지의 기반이 되었음을 입증하는 증거다
 

그런데 귤이 강을 건너는 정도가 아니고 대양을 건넌 경우가 있었는데 바로 대서양을, 그것도 밤낯은 물론 계절도 정반대인 곳까지 멀리 이동하여 오렌지가 되었던 경우가 있었다. 남미의 아르헨티나는 전쟁 중 미국의 압력으로 외형적으로는 중립을 유지하였지만 전쟁기간 내내 상당히 친독적인 정책을 유지하였던 국가였다.

 
         친독적이었던 아르헨티나에는 전쟁 후 독일의 많은 전범들이 도피해 있었다
            ( 아르헨티나에서 모사드에 의해 납치 체포 된 아이히만의 재판모습 )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많은 독일 엔지니어들이 아르헨티나로 망명하였고 SS나 게쉬타포처럼 처벌을 두려워한 많은 전범들도 이 대열에 합류 하였다. 그중에는 포커울프의 유명한 엔지니어로 불세출의 전투기인 Fw-190와 Ta-152시리즈를 제작 하였던 탕크(Kurt W. Tank 1898~1983)도 있었다.
 

                                도살새 FW-190의 아버지 쿠르드 탕크
 

그는 1947년 아르헨티나 정부의 지원 하에 코르도바에 옛 포커울프 직원들을 규합하여 종전으로 중단된 제트전투기 연구를 재개하였다. 탕크는 Ta-183를 프로토타입으로 하여 MiG-15에도 채택된 영국의 롤스로이스 Nene II엔진을 장착한 제트전투기를 만들었는데 비행에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아르헨티나 군부와 자리를 함께 하고 있는 탕크
 

이 전투기는 비록 실전에 데뷔한 기록이 없지만 나타난 성능만으로도 F-86이나 MiG-15와 맞먹는 성능을 보여 주었다.  이로써 아르헨티나는 미국, 소련 등과 더불어 초기 제트전투기 개발의 주역으로 당당히 자리매김 할 수 있었다.  그 전투기의 이름이 Pulqui II였다.  귤이 또 하나의 오렌지가 되었던 것이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진화한 또 하나의 오렌지인 Pulqui II
 

회수를 건너온 귤이 퇴보하여 탱자가 될지 아니면 오렌지가 될 지는 결국은 받아들이는 당사자가 하기 나름이고 또한 이러한 사례는 결코 남의 일만이라 할 수는 없다. 비단 무기뿐만 아니라 국가 방위와 관련한 모든 분야가 우리나라에 와서는 오렌지가 될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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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를 건너 재탄생한 전투기들 [ 下 ]
 
 
                             타향에서 출현한 후계자들
 
 
그런데 한국전쟁 휴전당시에 남북 중 하나를 선택하여 돌아가거나 전향하는 것을 거부하고 인도나 브라질 같은 제3국으로 망명한 많은 전쟁 포로들이 있었던 것처럼,  패전 직후 미국이나 소련이 아닌 중립지역의 국가들로 망명하였던 독일의 엔지니어들이 있었다. 이들은 망명국으로부터 많은 환대를 받으며 독일에서 연구하였던 프로젝트를 계속 수행하였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미국으로 옮겨 온 독일의 V-2 팀
 

때문에 미소의 제1세대 제트전투기들이 등장하였을 때 그 동안 항공산업이 특별히 앞서 있거나 기술적 기반이 충분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던 국가들에서 F-86, MiG-15와 맞먹는 제트기들이 생산되기도 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전쟁당시 중립국이었던 스웨덴의 J-29 Tunnan전투기였다.

 
                    제1세대 전투기로 홀연히 등장한 스웨덴의 J-29 Tunnan
                    독일의 귤이 회수를 건너 오렌지가 된 부인 할 수 없는 증거다
 

그 모양은 오히려 오리지날 베이스로 생각하던 Ta-183의 재현이 아닌가 할 정도로 똑 같았다.  스웨덴이 독자적으로 개발하여 어느 날 뚝딱하고 만들었다고는 절대로 상상 할 수 없을 만큼 닮아 있다.  부인 할 수 없지만 이것은 귤이 발트해라는 회수를 건너 오렌지가 된 경우였다.

 
                영락없이 J-29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Ta-183의 상상도(上)와
                전후 소련에서 노획물을 이용하여 카피 개발한 Ta-183의 희귀한 모습
                독일의 귤이 전후 소련 오렌지의 기반이 되었음을 입증하는 증거다
 

그런데 귤이 강을 건너는 정도가 아니고 대양을 건넌 경우가 있었는데 바로 대서양을, 그것도 밤낯은 물론 계절도 정반대인 곳까지 멀리 이동하여 오렌지가 되었던 경우가 있었다. 남미의 아르헨티나는 전쟁 중 미국의 압력으로 외형적으로는 중립을 유지하였지만 전쟁기간 내내 상당히 친독적인 정책을 유지하였던 국가였다.

 
         친독적이었던 아르헨티나에는 전쟁 후 독일의 많은 전범들이 도피해 있었다
            ( 아르헨티나에서 모사드에 의해 납치 체포 된 아이히만의 재판모습 )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많은 독일 엔지니어들이 아르헨티나로 망명하였고 SS나 게쉬타포처럼 처벌을 두려워한 많은 전범들도 이 대열에 합류 하였다. 그중에는 포커울프의 유명한 엔지니어로 불세출의 전투기인 Fw-190와 Ta-152시리즈를 제작 하였던 탕크(Kurt W. Tank 1898~1983)도 있었다.
 

                                도살새 FW-190의 아버지 쿠르드 탕크
 

그는 1947년 아르헨티나 정부의 지원 하에 코르도바에 옛 포커울프 직원들을 규합하여 종전으로 중단된 제트전투기 연구를 재개하였다. 탕크는 Ta-183를 프로토타입으로 하여 MiG-15에도 채택된 영국의 롤스로이스 Nene II엔진을 장착한 제트전투기를 만들었는데 비행에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아르헨티나 군부와 자리를 함께 하고 있는 탕크
 

이 전투기는 비록 실전에 데뷔한 기록이 없지만 나타난 성능만으로도 F-86이나 MiG-15와 맞먹는 성능을 보여 주었다.  이로써 아르헨티나는 미국, 소련 등과 더불어 초기 제트전투기 개발의 주역으로 당당히 자리매김 할 수 있었다.  그 전투기의 이름이 Pulqui II였다.  귤이 또 하나의 오렌지가 되었던 것이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진화한 또 하나의 오렌지인 Pulqui II
 

회수를 건너온 귤이 퇴보하여 탱자가 될지 아니면 오렌지가 될 지는 결국은 받아들이는 당사자가 하기 나름이고 또한 이러한 사례는 결코 남의 일만이라 할 수는 없다. 비단 무기뿐만 아니라 국가 방위와 관련한 모든 분야가 우리나라에 와서는 오렌지가 될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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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를 건너 재탄생한 전투기들 [ 上 ]
 
                                              
                                            승자의 권리
 
 
"귤이 회수를 건너가면 탱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어떤 생물이나 물건이라도 환경이 바뀌면 이에 맞춰 변화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격언인데, 탱자가 귤보다 맛이 없는지는 모르겠으나 본고장을 떠나면 아무래도 품질이 나빠진다는 의미가 내포 되어 있는 말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본고장을 떠나면 그 모습이 변하기 마련이다
                                            (김치를 탱자로 만들어 버린 기무치)
 
 

그런데 반드시 그런 것이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속담이기도 하다. 귤이 강을 건너면 탱자가 될 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반대로 오렌지가 될 수도 있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말이 있듯이 오리지널보다 나중에 나온 파생형이 좀 더 업그레이드 될 가능성도 충분히 많기 때문이다.

 
                              비보이는 한국으로 건너 와서 탱자가 아니라 오렌지가 되었다

 
특히, 무기의 경우가 그러한데 90퍼센트 이상은 시간이 갈수록 오리지널보다 훨씬 성능이 우수한 놈들이 나온다. 그 이유는 최신 무기가 기존 것보다는 성능이 좋아야 이길 수 있다는 단순한 논리 때문이다. 처음에는 상대편 것이 좋다면 비록 카피를 하여 우선 탱자라도 만들겠지만 개발에 관한 노하우가 쌓이면 오렌지를 만들 수 있는 것이 바로 무기 체계다.

                       독일의 보병휴대용 대전차무기인 팬저파우스트를 카피하여 탄생한 RPG-7은 
                  지금도 사용 중인 베스트셀러다.

 

1945년, 연합군이 독일 영토내로 진입하고 제3제국의 멸망이 가시화 되자 품질 좋은 무기를 개발하였던 독일의 수많은 엔지니어들이 살길을 찾아서 갈 길을 가게 되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자의든, 타의든 어쩔 수 없이 미국이나 소련으로 갈 길을 정하였고, 이들이 적국의 엔지니어지만 적극 스카우트하는데 미국과 소련 또한 주저하지 않았다.


                             전쟁말기 앞선 무기체계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였다
                                      (노르트란트의 V-1 제조시설을 점령한 미군)
 

특히 이들 중 미국이나 소련의 목표가 되었던 엔지니어들은 독일이 독보적으로 앞서있던 로켓과 제트기관련 종사자들이었다. 이들은 독일에서 연구하다가 종전으로 중단되었던 프로젝트를 새롭게 자리잡은 미국과 소련에서 재개하였고, 냉전이 본격 개시되자 최신무기를 앞다투어 만들어 내었다.


                             V-2 개발의 중추로 전후 미국으로 건너가 그 명성을 꽃 피운 폰 브라운
 

이런 이유 때문에 로켓이나 제트전투기 분야에서 새롭게 등장한 동서 양진영의 무기들은 유사하게 닮아있다. 당사자들은 독창적으로 개발 하였다고 강변 할지 모르겠지만 기본적인 구조뿐만 아니라 외양까지도 흡사 할 정도였다. 특히 이들 중 백미인 F-86과 MiG-15는 형제지간이라고 불러도 별다른 이의를 제기 하지 못할 만큼 외양이나 성능이 막상막하였다.


                      독일의 패전으로 제작이 중단 된 차세대 제트전투기의 목업인 P.1101

 
F-86과 MiG-15은 패전으로 중단 되었던 메셔슈미트의 P.1101프로젝트와 포커울프가 심혈을 기울여 제작하였던 Ta-183의 아류작들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유사하다. 후퇴익 주익과 동체에 삽입시킨 인테이크와 노즐은 제1세대 제트기들의 기본모양이 되었다. 따라서 P.1101은 F-86에 Ta-183은 MiG-15의 등장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다.

 
                      냉전시기 제1세대 전투기였던 F-86과 MiG-15는 독일의 오렌지들이었다.


 
이처럼 제2차 대전 후에 곧바로 다가온 온 냉전으로 말미암아 이후 미국과 소련의 무기가 세계시장을 순식간 양분하게 되면서 본의 아니게 독일의 귤은 전쟁 당시의 적들에 의해 오렌지로 변화하였다. 그런데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미국과 소련 외에 의외의 장소에서 오렌지가 되었던 경우도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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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부터 무적의 독일전차는 없었다.
 



흔히 독일 축구국가대표팀을 '전차군단'이라 언급하는 것처럼 제2차 대전 당시에 독일이 만든 전차는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이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는데, 바로 독일의 전차들이 처음부터 뛰어난 성능을 보유하였다고 생각하는 점이다. 즉, 독일은 전쟁 내내 뛰어난 전차를 생산, 보유하였고 이 때문에 무적 독일기갑부대 신화가 쓰여 졌다고 믿고 있는 이들이 많다.


                                제2차 대전 독일군하면 무적의 기갑부대가 뚜렷이 각인되어 있다
 

지금까지도 명성이 자자한 5호전차 팬터(Panther), 6호전차 티거(Tiger), 쾨히니스티거 (Königstiger) 같은 고성능의 전차들은 이러한 상식을 확고하게 해주는 증거들로 거론된다. 또한 지금도 그렇고 당시에도 세계 최고였던 독일의 기계공업 수준이 이러한 믿음을 확고하게 뒷받침하여 준다. 하지만 각론으로 들어가 살펴보면 결코 그런 것은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당대 최강으로 평가받는 6호전차 쾨히니스티거
 

우선 전쟁 초반기부터 독일이 팬터, 티거같은 중전차로 유럽대륙을 마구 휘젓고 다니면서 전격전(Blitzkrieg)의 신화를 만든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때는 이들이 전선에 등장하기 전이었다. 따라서 이들 전차들은 결코 신화를 만든 주역이 아니었다. 독일의 극성기를 가져온 전격전은 유능한 장군들이 구사한 작전이라는 소프트웨어를 기반으로 얻은 승리였지 결코 하드웨어 때문이 아니었다.

 
                                    장난감 같은 1호 전차가 전격전의 신화를 만들었다
 

독일의 최대팽창기였던 1941년도까지 전선을 휘 젖고 다닌 것은 1~4호전차들이었는데 이들의 성능은 당시 연합군의 전차에 비해 결코 좋지 않았다. 먼저 1, 2호전차는 전차라고 부르기에 민망한 수준이었고, 개발사상이 훌륭하여 현대전차의 시작이라 평가되는 3, 4호전차 또한 1:1로 프랑스나 소련의 중전차들과 맞서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더구나 전쟁 내내 독일의 전차는 수량으로 상대를 압도한 적도 없었다.
 

                               3,4호전차는 훌륭하였지만 상대를 입도할 정도는 아니었다.
 

앞서 언급한 팬터나 티거 같은 전차는 전쟁 중반이후에 등장하였는데 이때는 독일이 쇠퇴기에 접어들어 방어에 급급하던 시기였다. 다시 말해 이들은 전격전이라는 신화가 창조된 1941년 이전에는 아직 전선에 데뷔도 못하였다. 오히려 전선에서 부딪힌 T-34나 KV처럼 성능이 좋은 소련전차에 놀라 개발 도중에 있던 이들이 완벽하지 못한 상태에서 서둘러 전선에 등장한 측면이 있을 정도였다.

 
               전쟁 초기에 독일전차의 성능이 미흡하여 체코제 전차들 대거 사용하였을 정도였다.
 
뒤늦게 개발된 만큼 이들은 목표로 하였던 기본적 성능은 좋았지만 가격이 비쌌으며 생산성도 좋지 못하였다. 또한 구조가 너무 복잡하여 유지보수에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서둘러 전선에 투입되다보니 기계적 신뢰수준도 떨어져 처음에는 야전에서 가동률이 급격히 저하되었다. 이들은 보급이나 유지보수 등 비전투외적인 요인 때문에 많은 수가 전장에서 비전투 손실로 유기되었을 정도였다.

 
                   독일 중전차들은 유지 보수가 상당히 어려웠다 (야전에서 정비 중인 티거)
 

비록 이후 이들은 두고두고 이야기 될 만큼 훌륭한 전투력을 발휘하였는데, 여기에 전쟁 초반기의 독일군 기갑부대의 전과가 자연스럽게 오버랩되면서 독일 전차는 좋다는 막연한 인식이 에스컬레이트 되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독일군의 신화는 뛰어난 전차들을 앞세워 이룬 결과가 아니었고 후반기에 등장한 전차들도 너무 서둘러 투입된 관계로 처음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독일의 기술력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최근 공개된 레오파드2A7)
 
시행착오와 실전결과를 바탕으로 독일의 전차들은 천하무적의 위치까지 올라갔지만 이때는 전쟁말기였고 전쟁의 흐름을 바꾸지도 못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습득한 엄청난 노하우는 아직까지도 독일의 전차가 최고의 위치를 고수하도록 만든 가장 큰 자산이다. 냉전시대에 서방세계 최고의 전차였던 레오파드(Leopard)나 현재 탑클라스로 평가받는 레오파드2(Leopard 2)는 바로 이러한 밑거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K-2가 만난의 어려움을 극복하기를 기대합니다.
 

이러한 독일의 사례는 좋은 무기가 온갖 실패와 어려움을 극복하고 얻은 결과임을 증명하는 반면교사다. 최근 K-2 흑표전차가 파워팩 문제로 제식화에 애를 먹고 있다는 뉴스는 뼈를 깎는 아픔을 딛고서야 명품이 탄생할 수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문제를 극복하여야 진정한 명품은 탄생할 수 있고 그것은 역사가 가르쳐 준다.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는 관계당국에 격려의 말을 전하며 분발을 촉구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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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어있는 전적지 답사하기
 
 

그동안 무심코 간과하던 주변을 탐사하는 작은 여행이 최근 들어 인기를 끌고 있다.  너무 바쁘게 살아오고 유명한 명승지를 찾는 것이 여행의 전부인 줄 알았기 때문에 새롭게 발견한 이런 방법이 더욱 신선하게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대상은 상당히 다양한데 올레길처럼 한적한 시골길을 걷는 것도 있지만 재래시장 답사처럼 우리의 삶이 이뤄지던 오래된 공간을 찾아보는 것까지 포함한다.
 

                    최근 도시 주변을 가볍게 떠나는 여행이 인기를 끌고 있다 (북촌 한옥마을)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전적지도 좋은 여행 코스가 된다.  남한산성, 행주산성처럼 이제는 사적지로 취급 받는 곳도 있지만 6.25전쟁과 관련한 장소도 분명히 탐사 해 볼 가치가 있는 여행지라 할 수 있다.  6.25전쟁은 가장 가까운 시점에 있었던 비극이었고 그 여파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으므로 그와 관련된 전적지는 충분히 여행의 의의를 살릴 수 있다.
 

                             간과하지만 6.25전쟁과 관련한 전적지도 좋은 답사코스인데
                           예를 들어 지금도 이용 중인 한강철교도 중요한 역사의 현장이다
 

그런데 6.25전쟁 관련 전적지라면 먼저 휴전선 일대를 생각하기 때문에 지레 포기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하지만 한반도 대부분이 전쟁터였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지도 못하는 곳곳에서도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그중 한반도에서 가장 인구가 집중된 경인지역에도 우리가 모르던 숨어있는 전적지가 많다.  하늘이 높아지는 풍성한 가을을 맞아 부담 없이 찾아 볼 수 있는 인천의 관광지 겸 전적지를 답사 순서대로 소개한다.
 

                                                     인천전적지 탐사도
 
 
                                         월미도

 
아직도 섬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지만 월미도가 육지와 연결된 지 90년 가까이 되었다.  선착장 부근에 인천상륙작전 당시에 유엔군이 처음 상륙한 녹색해안(Green Beach)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지만 사실 북쪽에 매립된 현재의 공장지대가 녹색해안이다.  월미도는 해변이 원래부터 소문이 난 관광지였지만 군부대 주둔지였다가 2001년에 개방된 월미산 공원이 최근에는 오히려 각광받고 있다.
 

                                        1950년 9월 15일 월미산을 점령한 유엔군


                                   현재 전망대가 자리잡은 월미산 정상 부근의 모습
 

                                         북성부두

 
인천사람들도 잘 모르는 사실인데 경인선 종점인 인천역 뒤편의 고가도로 북쪽 끝에 북성부두라 불리는 조그만 포구가 있다.  도심에서 보기 힘든 포구여서 그 자체만으로도 좋은 구경거리가 되고 배가 들어오는 물때마다 번개장이 선다.  그런데 이 부두의 석축 일부가 인천상륙작전 당시의 상륙하는 해병대의 모습이 생생한 사진에 나와 있는 바로 그곳으로 이른바 적색해안(Red Beach)이다.

 
                                    인천상륙당시 레드비치 제방으로 상륙하는 유엔군


               인천역 뒤에 숨어 있는 북성부두에서 유일하게 예전 레드비치의 제방을 볼 수 있다.
 
 
                                       자유공원

 
인천역 바로 앞은 국내에서 가장 큰 차이나타운으로 한국화한 자장면이 처음으로 모습을 보인 곳이기도 하다.  오래 동안 쇠락하였는데 한중간 뱃길이 열린 1990년 이후 관광지로 재정비되면서 각광을 받고 있다.  상륙당일 이곳 뒤의 응봉산을 유엔군이 점령하면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였는데 맥아더 장군 동상으로 유명한 자유공원이 바로 이곳이다.  자유공원은 개화기 당시에 만들어진 한반도 최초의 근대식 공원으로 원래 이름은 각국공원이었다.

 
                    인천상륙당시의 응봉산 일대 (고지위의 건물이 현재도 남아있는 기상청)


                                        응봉상 정상에 조성된 자유공원의 최근모습
 
 
                                           해안동

 
자유공원에서 해안동 방향으로 계단을 따라 하산하는 것이 좋다.  원래 이곳은 부두창고들만 있던 외진 곳이었는데, 최근 이를 재개발하여 근대식 예술관인 인천아트플랫폼으로 만들어 새로운 구경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그런데 계단 양쪽의 석등모습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이 계단을 중심으로 청국조계지와 일본조계지가 나뉘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자유공원과 그 일대는 구한말 국권이 침탈당하였을 당시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교훈의 장소이기도 하다.
 

                                   최근 새롭게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인천아트플래폼


                        좌우의 석등 모습이 다른 자유공원에서 해안동으로 내려오는 계단
 
 
                                          홍예문

 
인천아트플랫폼을 관람하고 신포동으로 가는 길은 근대 건축학의 보고와 같은 곳이다.  한식 구옥은 물론 일본식, 중국식, 서양식 고택과 각종 상업용 건물들이 아직도 무수히 남아있다.  예전에는 도시 개발을 가로막는 구조물로 여겼지만 지금은 보존가치가 큰 역사적 건축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이 일대를 거쳐 다시 위로 올라가 기상대 부근으로 가면 1908년 만들어진 홍예문이 있는데 각종 영화나 드라마의 배경에 자주 등장하였고 부근에 있던 인천중학(현재 제물포고등학교)는 전쟁 기간 동안 야전병원으로 사용되었다.

 
                       전쟁 중 야전병원으로 사용된 인천중학교 (뒤에 보이는 것이 기상청)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한 홍예문
 
 

지금까지 설명한 곳들은 운동화 질끈 동여매고 천천히 도보로 관광하면 약 5~6시간 정도면 충분히 관람할 수 있는데, 자연 풍경보다는 그곳에 담겨있는 사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 코스가 되었다.  그런데 의외로 6.25전쟁 당시에 가장 거대했던 작전이 펼쳐진 곳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은 것 같다.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그러한 흔적을 찾아 주말여행을 떠나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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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켜 낸 숭고한 가치
(9.28수복)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인 1950년 9월 28일 중앙청(지금은 철거된 옛 조선총독부관저)에 태극기가 게양됨으로써 서울 도심의 공방전은 종결되었고 지금까지 격렬하게 저항하던 적은 전의를 상실하고 북으로 패주하였다.  이로써 수도 서울은 6월 28일 적에게 피탈된 지 정확히 3개월 만에 수복되었다.

 
                                1954년 9월28일 4주년 행사 당시의 태극기게양 재현모습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지난 9월 28일 대대적인 경축행사가 서울중심부 일원에서 벌어졌다.  특히 이번에는 10월 1일 국군의 날 기념식도 앞당겨 함께 개최되어 다채로운 각종 행사가 열렸다.  특히 서울 도심에서는 여간해서 보기 힘든 각종 군용기들의 시범 비행이 선보여 많은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하여 주었다.
 

                                      지난 9월 28일에 열린 서울수복 60주년 행사

 
이처럼 9.28수복은 엄청난 의의가 있는 사건인데, 6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 막상 그 뜻을 제대로 아는 이들이 드문 것 같다.  9.28수복의 의의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일상(日常)으로의 회귀라 표현할 수 있다.  산소가 부족한 곳에 가서야 그 고마움을 뼈저리게 느끼듯 당연하게 대하여 오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9.28수복은 똑똑히 알려준다.

 
                             너무 시간이 흘러서인지 9.28수복의 진정한 의의를 잊고 있다

 
일상이라 표현하였지만 사실 그것은 자유를 뜻한다.  서울이 피탈된 후 적 치하에 남겨진 150만의 서울 시민들은 곧바로 무시무시한 폭력과 공포를 겪으며 극심한 통제와 탄압을 받았다.  그것은 남북 간의 이념과 체제차이에 따른 갈등을 뛰어넘어 힘을 가지고 있는 자가 한 없이 약한 이들을 상대로 자행한 무자비한 테러라 단언 할 수 있을 정도다.  다음은 이에 대한 생생한 증언들이다.


                                      남로당의 환영을 받으며 서울로 진입하는 북한군 전차부대
                         이후 점령 북한군과 남로당은 서울을 공포의 공간으로 만들어버렸다
 

곳곳에서 ‘반동’으로 몰아 즉석 처형하는 인민재판이 열렸다. 김원일 씨는 “민심이 너무 나빠져 인민재판이 점령 3일 만에 중단됐다”고 말했으나, 이현희 교수와 이원경 씨는 “7, 8월에도 계속됐다”고 회고했다. 인민재판은 잔인성 못지않게 일관성 없는 기준으로 반발을 샀다. (2010년 9월 27일 동아일보)

 
                         시민들을 인민재판한 후 총살을 위해 집행장으로 끌고 가는 모습
 

한번 내몰린 적들은 도망가기에 바빴고 이를 본 시민들은 기쁨의 눈물로 국군을 맞았다고 노병은 기억합니다. <인터뷰> 강동구(예비역 준위) : "그 때 왜 이제 오느냐 울면서 울며불며 그랬는데 우리도 같이 따라 울었어요. 울면서 전투한 거 에요." (2010년 9월 28일 KBS 뉴스)

 
                              서울 점령기간 동안 벌어진 정치 선동행사 (사진-동아일보)
 

숨어서 지낸 3개월이 마치 30년 같았다는 이야기도 흔하게 찾아 볼 수 있을 정도다.  그만큼 무차별 학살과 탄압이 자행되던 이른바 ‘인공(人共)통치 3개월’이라 언급되는 이 시기는 우리에게 씻기 힘든 커다란 상처를 안겨주었고 이것은 이후 전쟁 그 자체보다 더 크게 남북 간을 심리적으로 멀리 갈라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인공치하 3개월간의 폭압 통치는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남겨 주었고
                         이것은 남북 간을 심리적으로 멀어지게 만든 결정적 이유가 되었다
 

인공통치 3개월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알려주는 결정적인 증거가 석 달 뒤에 있었던 1.4후퇴다
.  서울이 공산군에게 재점령 될 위기에 놓였을 때 혹한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서울시민들은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 피난길에 올랐다.  중공군이 폐허가 된 도시를 재점령 했을 때 서울은 거동이 불편한 일부 노약자들만 남아있던 텅 빈 도시였다.
 

                                혹한도 자유를 찾아 떠나는 서울시민들을 막지 못하였다
                                지난 인공통치기간 동안의 악몽 때문이었다 (사진-LIFE)
 
몇 십 년 만의 혹한이라는 1950년의 추위도 자유라는 일상을 또다시 포기할 수 없었던 서울시민들의 탈출을 가로막을 수 없었다.  그만큼 1950년 여름에 있었던 북한의 서울 점령 3개월은 너무나 잔혹한 기억이었고 그러한 공포로부터 일상을 회복시켜준 9.28수복의 의의는 실로 대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9.28수복은 숭고한 가치를 지켜낸 역사적인 사건이다 (사진-뉴스엔)
 

바로 폭력과 공포로부터의 해방을 이끈 9.28수복을 경축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6.25전쟁에서 수많은 피와 눈물을 바쳐가며 끝까지 우리가 지키고자 하였던 지고지순한 가치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러한 가치는 앞으로도 소중히 지켜야 할 유산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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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전의 용사, 기관포에 관한 이야기 [ 下 ]
 
 
                                  
                           최신식만으로 극복하기 힘든 것

 
 
항공모함 탑재용 전투기로 개발하였으나 그 어마어마한 성능에 놀라 자존심 강한 미 공군도 군말 없이 주력기로 채택한 괴물이 있었으니, 바로 도깨비 F-4 팬텀이었다. 이놈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속도, 고도, 항속거리, 작전반경 등의 비행능력은 물론이거니와 제2차 대전 당시 맹활약한 B-17 중폭격기와 맞먹는 엄청난 폭장량을 자랑하는 당대 최고의 전투기였다.
 

                                    허술해 보이는 팬텀의 모습. 하지만 전설이 된다
 

그런데 팬텀은 적외선유도방식의 AIM-9 사이드와인더 4발과 레이더유도방식의 중거리 유도탄 AIM-7 스패로우 4발로 중무장하면서 전통적인 공대공무장인 기관포를 과감히 제거한 최초의 전투기였다. 팬텀은 바로 미사일 만능주의를 맹신하였던 시대사상에 맞추어 탄생한 미국의 자만심이었고 그만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강의 전투기로 자타가 공인하였다.

 
                                        스패로우 공대공 유도탄을 발사하는 팬텀
 

이러한 팬텀은 그동안 야심만만하게 제작하였던 미 공군의 전투기들이 월남전에서 그리 신통치 않은 성과를 보이자 필승카드로서 당당히 참전하게 되었다. 그런데 수치상으로는 당대 최고의 성능을 지니고 있었고 미사일로만 중무장한 기관포 없는 최초의 전투기라는 최첨단을 대표하는 명성과는 달리 공대공전투에서 처음부터 애를 먹었다.

 
                              월남전초기 미 공군의 주력전투기였던 F-105 썬더치프
 

BVR(비가시거리 전투)의 장점을 살리지 못하는, '육안으로 적기를 식별한 후 교전에 임하라'는 미 정부의 정치적 교전규칙 때문에 발생한 일이기도 하였지만, 선회력이 좋은 월맹의 MiG기들과 가시권 내에서 공대공 대결을 하였을 때 막상 기관포가 없는 전투기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적에게 꼬리를 물리지 않도록 줄기차게 회피기동을 하는 것 밖에는 없었다.

 
                       예상과 달리 기관포가 없던 팬텀이 근접전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미사일을 사용할 수 없을 만큼 근접하여 선회전으로 치고 올라오는 MiG기를 뻔히 보면서 팬텀기들은 어찌 할 바를 몰랐다. 만약 기관포가 장착되었다면 과감히 독파이팅으로 치고 나갔을텐데 주렁주렁 달려있는 미사일은 근접전에서는 사용할 수가 없었고 오히려 기동전의 방해물로 존재하였다. 즉 넘치는 자신감과는 달리 실전에서는 많은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미국은 뼈저리게 실감하였다.

 
                                        베트남에서 호적수였던 F-4E 와 MiG-17
 

결국 적기를 공격할 방법이 없어 속수무책으로 쳐다만 보아야만 한다는 일선의 불평이 계속되자 M-61A1 기관포포드를 장착한 F-4D가 출현하기에 이르렀고 F-4E에 와서는 기관포가 공대공 고정무장으로 내장되었다. 보이지 않는 자존심 경쟁을 벌이던 해군의 F-4B는 끝까지 기관포를 장착하지 않았지만 해군 조종사들이 기관포가 장착된 F8U를 매우 선호하였다는 증언만 보더라도 미사일로만 공대공전투를 치루기에는 분명히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
 

                       해군 조종사들이 선호하였던 F8U, 흔히 Final Gun Fighter로 불렸다
 

1960년대와 비교할 때 지금의 공대공미사일은 비약적인 성능 향상을 이루었다. 공대공미사일의 대명사인 사이드와인더만 하더라도 초기형의 경우는 적의 배기구를 정면으로 마주 본 12시 방향에서만 그것도 유도가 가능한 충분한 거리를 떼어놓고야 사용할 수 있는 병기였으나 최신의 AIM-9X는 그야말로 전후좌우를 가리지 않는 전천후 미사일로 불릴 만큼 비약적인 성능개량이 이루어졌을 정도다.
 

                                                F/A-18에 장착된 M-61A1 벌컨포
 

이러한 자신감 때문인지 앞글에서 소개한 것처럼 F-35의 등장과 더불어 그동안 코피를 흘린 후 까먹고 있던 미사일 만능주의가 다시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전투기 등장 이래 계속하여 고정무장의 두목으로 군림하던 기관포는 미사일로 결코 대체할 수 없는 그 나름대로의 효과가 있기 때문에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을 것이다.

 
                     궁여지책으로 SUU-16/A 포드를 개발하여 기관포를 장착한 팬텀의 모습 
                       미사일 만능주의는 환상이었고 이런 현실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기관포는 감히 미사일과 비교하기 힘든 어쩌면 가장 단순한 무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하늘의 제왕이라 평가되는 F-22를 비롯한 최신예 전투기 대부분이 처음부터 기관포를 장착한 것만 보아도 쉽게 기관포를 대체할 만한 것도 없는 것 같다. 그런데 고려청자처럼 무기뿐만 아니라 아무리 첨단의 기술이 등장하여도 결코 극복하기 힘든 그런 경우가 세상사에는 많다. 최신 유행을 쫓는 것도 좋지만 한번 정도는 뒤를 돌아보는 여유가 항상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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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열혈국방 트랙백 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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