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ust 의 軍史世界'에 해당되는 글 141건

  1. 2010.09.24 '미사일'이 '기관포'를 대체할 수 있을까? (1)
  2. 2010.09.08 6.25 전사자의 귀향을 바랍니다. : '추석'에 즈음하여
  3. 2010.09.01 비둘기에서 스마트폰까지! : 전쟁터 통신의 역사 (3)
  4. 2010.08.30 최강 독일에 맞선, 위대한 폴란드 기병대여! (3)
  5. 2010.08.27 지상의 왕자 -'전차'의 성장통에 관하여.
  6. 2010.08.24 제2차대전과 제트기 개발 경쟁!
  7. 2010.08.23 해군 항공대여, 적 잠수함을 섬멸하라!
  8. 2010.08.18 하늘에 뜬 저승사자
  9. 2010.08.16 잠수함 잡는 '대잠초계기'
  10. 2010.08.12 잠수함의 약점을 찾아서!
  11. 2010.08.09 '안보관광'이 뜬다! (포천 '승진훈련장 기동훈련' 참관) (2)
  12. 2010.08.05 목함지뢰? 지뢰를 피하는 방법! (1)
  13. 2010.08.03 교훈을 얻고 대비를 하라
  14. 2010.07.30 '불굴의 의지' 훈련에 참여한 함재기들
  15. 2010.07.27 '한미 연합훈련'의 수퍼캐리어(초대형 항공모함) 이야기
  16. 2010.07.22 태평양을 왕복하는 6.25당시 총기들
  17. 2010.07.15 6.25 상황 재현, 잠시 짚고 넘어가도 될까요??
  18. 2010.07.14 최고의 무기 AK-47소총, "그러는 거 아냐." (3)
  19. 2010.07.12 해외파병 성공의 요건, '무사귀환'을 바라며.
  20. 2010.07.09 1950년 6월, 공군의 극적 분투
  21. 2010.07.05 6.25전쟁 당시, 해군의 용전분투 (2)
  22. 2010.07.01 연평해전 고(故) 윤영하 소령을 추모하는 '송도고등학교' (2)
  23. 2010.06.29 동해안에 기록된, 6.25전쟁 남침의 증거
  24. 2010.06.25 6.25전쟁 당시, 제트전투기 공중전
  25. 2010.06.22 6.25 당시, 해군의 활약 (3)
  26. 2010.06.17 군 복무의 모범, 엘비스 프레슬리
  27. 2010.06.15 6.25의 전우, 에티오피아
  28. 2010.05.27 결코 작지않았던 커다란 은혜 (6.25 참전국)
  29. 2010.05.18 축구전쟁(Soccer War) [下]
  30. 2010.05.14 축구전쟁(Soccer War) [ 上 ]



    역전의 용사, 기관포에 관한 이야기 [ 上 ]
 
 

                          미사일 만능주의 ?
 


미국의 전투기 획득사업인 JSF(Joint Strike Fighter-3군 합동타격기)에 따라 개발 중인 F-35 Lightning II의 경우 기체가 작은 관계로 고정무장인 기관포에 관한 상반된 소식이 종종 들려오는데, 당연히 기관포가 장착될 것이라는 설부터 과감히 기관포를 생략하고 오로지 미사일로만 공대공무장을 할 것이다 하는 등의 여러 이야기가 분분할 정도다.
 

                                공중급유 시험 중인 공군형 F-35A 실험기
 

미국이 만든 전투기에 장착되는 대표적 기관포라면 M-61A1인데, 일설에 따르면 JSF에는 소형인 마우저 27mm기관포나 25mm벌컨포 등이 장착될 가능이 크다고 한다. 그런데 최신예 전투기인 F-22도 기관포를 장착하였을 만큼 전통적으로 전투기의 고정무장으로 기관포를 고수하고 있는 미 공군의 경우를 보면 JSF의 여러 변형기종 중 적어도 공군형인 F-35A에는 기관포가 장착될 가능성이 큰 것 같다.
 

                                           마우저 27mm기관포
 

다만 확실하게 추론하여 볼 수 있는 것은 기관포 장착문제로 많은 말이 오고간다는 사실 자체가 역으로 생각하면 애당초 JSF 구상 시에 기관포를 고려하고 있지는 않았다는 반증이다. 장차 대부분의 공중전은 상대방을 보지 않고 공대공미사일로만 벌어지는 BVR(Beyond-Visual-Range 가시권 밖)전투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이러한 구상은 일견 타당한 측면도 있다.
 

       해병대형인 F-35B의 구조도인데 수직이착륙장치 탑재로 기관포 수납공간이 없다
 

BVR과 이를 뒷받침하는 고성능의 레이더 및 조기경보기술 그리고 미사일의 획기적인 성능 향상은 더 이상 기관포로 적기와 근접하여 교전하는 상황이 없도록 바꾸었다. 그런데도 미 공군이 기관포를 고집하는 이유는 과거의 경험 때문이다. 사실 미사일 만능주의는 최근에 나온 현상은 아니고 이미 오래전 이야기의 리바이벌에 불과하다.
 

                        중거리 공대공미사일인 AIM-120 AMRAAM의 발사모습
 

최초의 공대공 미사일이며 열 추적 유도탄의 대명사이기도 한 AIM-9 사이드와인더가 실전에 첫 선을 보인 것은 1958년이다. 첨예한 냉전시기에 대만해협을 사이에 두고 발생한 대만군과 중공군 간의 충돌 당시 대만공군의 F-86은 미국이 개발하여 비밀리에 실전에 배치한 사이드와인더를 장착하고 있었다.
 

                          초기 사이드와인더인 AIM-9A 형을 장착하고 있는 F9F
 

반면 중공군의 MiG-15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독파이팅(Dog Fighting-근접 공중전)만을 할 수 있는 무장만 갖추고 있었으며, 당연히 미국 측이 제공한 사이드와인더의 존재를 몰랐다. 그 이전에 벌어졌던 형식대로 공대공 전투는 개시되었고 후위가 상대에게 물린 전투기는 급강하 기동 등을 통하여 상대의 사정권을 벗어나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공대공미사일을 장착한 대만군의 F-86
 

중공군의 MiG-15 조종사들이 F-86의 기관포 사정권을 벗어났다고 안심해하는 순간 F-86이 발사한 사이드와인더들이 순식간 다가와 후위를 강타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피격 된 수많은 중공의 MiG기들은 차례차례 대만해협으로 추락하였다. 공대공미사일의 대명사가 된 사이드와인더의 성공적인 데뷔 모습이었다.

 
            1958년에 있었던 대만해협전투에서 공대공미사일이 찬란하게 데뷔하였다
 

이런 일방적인 결과는 소련에게는 충격을, 미국에게는 자만심을 가지게 만들어 버렸는데 특히 미국의 자만심은 차후의 공대공전투전술을 미사일을 기반으로 하는 체계로 급속히 변화시켰다. 공대공미사일이 이제 하늘의 주역으로 등장하였음은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과도하게 맹신하는 것은 너무 성급한 결단이었다. 미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코피가 터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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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향에는 유효기간이 없다
 
 
 
다음의 기사는 조금 오래전의 내용인데,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어 그 일부를 간략히 소개한다.

   ( 2004년 8월 24일 연합뉴스 )
    제1차 세계대전 때 사망한 오스트리아 군인의 시신 3구가 지난 20일 이탈리아 알프스 산맥의 빙하에서 거의 완벽
    하게 보존된 채 발견됐다 ... (중략) ... 역사학자들은 이들이 1918년 9월 3일 전투 중에 수류탄에 의해 사망한 것
    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날 이탈리아군과 호주군(*주 - 기자가 오스트리아를 오스트레일리아로 착각하여 번역한
    듯
) 은 '대전투'라고 불리는 교전을 벌였으며 오스트리아군이 11명의 사망자를 내고 승리했다. 이들의 장례식은  
    24일 오후 치러지며 사망한 지 86년 만에 지역 군인 공동묘지에 묻히게 된다
.
 

                  제1차 대전 당시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간에 있었던 알프스 전선의 극적인 모습
 

이 기사를 보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세월이 너무 많이 흘러 그 유족들이라도 찾을 수 있을 지가 궁금하였다. 아마도 망자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보존되어 있다면 직계 또는 방계 유족들을 찾았을 가능성도 있었겠지만, 설사 유족들을 찾았어도 거의 90년이 다 되었기 때문에 망자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생존 후손들은 없을 것이다.

 
                                        알프스 고산 준령을 행군하는 오스트리아군

                      이런 곳까지 올라와 싸울 생각을 하는 것은 아마 인간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더욱 가슴 깊게 느껴지던 것은 국가가 잊지 않고 전사자의 마지막 길을 살펴 주었다는 것이다. 사망자들은 국가의 부름을 받아 최선을 다해 전투에 임하였고 그러한 그들의 노고를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국가가 잊지 않고 챙겨주었다는 것은 한마디로 국가가 부를 때 국민이 나서야 하는 이유이자 동기가 되기 때문이다.

 
                               산악진지에서 이탈리아군을 격퇴하는 오스트리아 척탄병
 

제1차 대전은 오스트리아 역사에서 지우고 싶은 아픈 기억이라 할 수 있다. 패전으로 말미암아 전쟁 전 유럽의 5대 강국으로 군림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한순간에 군소국가로 몰락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 이후 나치에게 강제 합병되고 제2차 대전 후에는 국토가 분단당하는 치욕까지도 겪었다.

 
                                                부상병을 하산시키는 모습
 

이처럼 제1차 대전은 되새기고 싶지 않은 역사의 시작이었지만 오스트리아는 그것을 절대로 외면하고, 부인하고, 왜곡하지도 않고 분명한 그들의 사실로 인식하고 있다. 또한 그러한 과정에서 희생당한 자국국민들의 노고를 결코 잊지않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전사자들이라 할지라도 대우에 극진한 것이다.

 
                         정밀한 기법을 동원하여 6.25전쟁 전사자 발굴 사업이 진행중이다.
 

그런데 이것은 결코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올해는 6.25전쟁이 발발한지 60주년이 되는 해다. 60년 전 일일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무명의 대한민국 국민들이 국가의 부름을 받고 거대한 전쟁에 뛰어들었고 작전 도중 실종되거나 행방불명 된 이들도 부지기수다. 만시지탄이지만 본격적인 발굴사업이 시작된 것이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고 그것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마지막 한명의 용사를 발견하는 그날까지 사업은 계속되어야 한다
 

국민은 국가의 부름이 있다면 의무를 다하여야 한다. 하지만 국가 또한 나라를 위해 그 의무를 다한 국민을 끝까지 책임지는 모습을 보일 때 진정으로 국민들도 그 의무를 다하기 위해 노력 할 것이다. 실종 병사의 귀향에는 결코 유효기간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은 6.25전쟁이 결코 과거의 사실이 아닌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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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둘기로 전쟁하던 시절 그리고 지금

 

 
전화가 희귀했던 예전에는 전화의 보유 유무가 부의 상징이었으며 또한 재산이었던 시대가 있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아주 오래전도 아닌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통신 인프라가 열악하여 전화 개통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청색전화니 백색전화니 해서 통신권 자체가 프리미엄이 붙어 거래되기도 하였다.

 
                           한때 전화 (엄밀히 말해 통신권)가 고가로 거래되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전철역이나 터미널처럼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공공장소에는 대규모의 공중전화 부스가 있었다. 지금은 길거리에서 공중전화를 찾기가 힘든 시대가 되었지만 그 때만 해도 공중전화가 설치된 곳에는 전화를 걸기 위해서 항상 사람들이 길게 줄 서있는 모습이 일상이었다. 때문에 지금 같으면 상상하지도 못할 어처구니없는 사고도 종종 일어났다.

 
              예전에는 공공장소에 대규모 공중전화부스가 있었고 항상 사람들이 길게 대기하였다
 

워낙 줄이 길다보니 통화를 간단명료하게 하는 것이 예의였는데 경우에 따라 앞사람의 통화가 길어지면 급한 통화를 하여야 할 뒷사람이 전화를 빨리 끓으라고 재촉하여 트러블이 발생한 적이 흔했다. 대부분 말싸움으로 끝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주먹다짐까지 오고가는 경우도 많았고 심한 경우에는 앞사람의 통화가 길다고 살인까지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날, 뒤 사람 배려안하고 통화를 하다가는 싸움이 벌어질 지 모른다 
 

핸드폰이 대중화된 이후의 좋은 점 중 하나는 이런 모습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예처럼 통신 때문에 살인사건까지 발생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통신과 우리 삶이 동떨어져 있지 않음을 반증하고 있다. 그 만큼 통신은 교통과 더불어 인간사의 흐름을 지속적으로 연결해주는 중요 사회간접자본이다.

 
                                          통신은 인간사를 연결하는 중요 수단이다

 
통신의 중요성은 군에서 특히 더한데 전쟁의 승패에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 할 정도다. 통신이 차단된 백만 대군을 정예 십만 군대가 이길 수도 있는 것처럼 통신망이 승패의 결정적 요소로 작용한 예를 전사에서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처럼 전쟁터에서 통신은 과거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당연히 중요하다.

 
                                         통신이 가장 중요한 곳이 바로 전쟁터다

 
지금이야 생필품화 된 핸드폰을 다들 가지고 있겠지만 이동통신의 필요성이 제일 먼저 제기되고 이동통신 수단을 제일 먼저 실용화한 곳도 사실 군이고 역사도 오래되었다. 그 중에서 현대의 휴대폰은 커녕 무전기 개념조차 희미했던 제1차 대전 당시까지만 해도 전서구(傳書鳩-Homing Pigeon)는 전장에서 유용하게 쓰였던 이동통신 수단이었다.

 
                                 정찰기에서 전서구를 이용하여 정보를 보내는 모습

 
비둘기는 자기가 살던 곳으로 회귀하는 성질이 강하고 사육하기도 쉬운 편이라 유무선 통신이 실용화되기 전까지 가장 빠른 통신수단으로 애용되었다. 기원이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을 만큼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왔기에 당연히 전쟁과도 관련이 많은데 별도의 전서구 관리부대도 있었고 애니메이션 발리언트(Valiant)처럼 제2차 대전 당시에도 종종 사용되었다.

 
                                             제1차 대전 당시의 전서구 관리부대

 
그 만큼 전쟁은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이 동원되는 치열한 경쟁의 장이다. 그런데 요즘 통신업계의 무한경쟁은 전쟁보다 오히려 더 무서운 속도인 것 같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덕분에 문명의 혜택으로 요즘처럼 사람과 사람간의 통신이 원활한 적이 유사 이래 없게 되었고 오히려 최근 열풍이 부는 스마트폰처럼 단순히 통신을 넘어서 그 이상이 가능한 세상이 되어 버렸다.

 
                    이제는 알고싶지 않은 타인의 통화내용까지 강제로 듣게되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너무 편해서 그런가?  핸드폰을 비롯한 통신수단의 대중화와 다양화는 예전에는 없던 새로운 예의가 요구될 만큼 또 다른 많은 문제를 양산하였다. 문명의 이기를 사용하면서 남을 배려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느낌이다. 전서구를 이용하여 전쟁을 하던 시절보다 통신이 자유로운 지금이 더 삭막하다면 그것은 좋은 수단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인간들이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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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연 그들은 바보들이었나?

 
 
일본이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을 일으켰을 때를 제2차 대전 개시일로 보자는 일부의 의견도 있지만, 역사교과서나 백과사전 같은 많은 공인된 자료에는 독일이 폴란드를 기습 침공한 1939년 9월 1일을 제2차 대전의 시작으로 본다. 아마도 당시까지 세계사의 주역이었던 서구를 위주로 역사를 기록하다가 보니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폴란드를 전격 침공한 독일군

 
따라서 제2차 대전과 관련한 대부분의 서적들은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전쟁사를 기술한다. 독일의 침공을 받은 폴란드는 불과 한 달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고 이것은 독일의 급속한 팽창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승자인 독일군의 전과는 상세히 설명하는 반면 순식간 몰락한 폴란드군에 대해서는 무능함을 묘사한 내용이 많다.
 

                     많은 자료가 폴란드군의 무능함을 묘사하고 있다 (포로가 된 폴란드군)
 

다음은 이와 관련하여 가장 많이 알려진 대표적인 내용이다.
 
독일 대 폴란드 전쟁에서 가망이 없음을 알면서도 월등히 우수한 독일 기갑부대와 맞서 싸우는 폴란드 기병대의 모습은 전쟁 장면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면서도 시대가 바뀌었음을 알려주는 비극적인 장면이었다. ( 폴 콜리어 외, 「제2차세계대전」, 2008 )
 
SF영화 속의 한 장면이라면 또 모를까, 전쟁이 장난도 아니고 이게 무슨 황당한 시추에이션? 전차의 위력을 전혀 알지 못하는 기마병들은 승리를 다짐하며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고 있다. 보나마나 지는 전쟁인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전쟁이 아니라 일방적인 학살이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다.  ( 리젠, 「CEO의 원가 자르기 비법」, 2007 )
 

                              폴란드 기병대는 바보 같은 돌격의 대명사로 회자되었다
 

제2차 대전사를 읽다보면 이처럼 폴란드 기병대가 독일 기갑부대를 향하여 창을 꼬나 잡고 돌격하였다가 전멸한 이야기가 자주 인용된다. 이때 군사에 대해 별반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라도 이렇게 생각하였을 것이다. ' 무식한 것들이 용감하다라고 ...'
 
그런데 그것만이 진실일까? 과연 그들은 창으로 전차의 장갑을 뚫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단순, 무식하게 전차를 향하여 돌격하였을까? 폴란드인들은 후진국이라서 전차의 존재를 까맣게 모르고 있었을까?
 

                      과연 그들은 창으로 전차를 뚫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바보들이었을까?
 

영광의 16세기 폴란드를 이끌었던 주역으로, 이른바 윙드 후사르(Winged Hussar)로 알려진 기병부대는 폴란드에서 최고의 정예부대로 자랑스럽게 생각되고 있으며 현재도 의전용 기병대를 운용하고 있을 정도다. 제2차 대전 발발 당시에 폴란드의 기병대는 비록 시대에 뒤쳐졌지만 엄연한 전투병과였다. 따라서 전사를 보면 기병대가 개전 첫날부터 독일군과 격전을 벌인 사실을 종종 찾아 볼 수 있다.
 

                         기병대에 대한 폴란드의 자부심은 크다 (최근 폴란드 기병대의 모습)
 

그러한 전투 중에서 위에 언급하였듯이 오해를 불러왔던 것은 9월 19일 볼카 베그로바(Wolka Weglowa)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제9 마로폴스키(Malopolski) 기병연대가 독일 기갑부대와 격전을 벌여 순식간 100여명이 전사하는 커다란 패배를 당하였는데, 마침 이를 목도한 이탈리아 기자가 '바보 같은 폴란드 기병들의 돌격' 이라고 기사를 작성하면서 이 같은 사실이 널리 알려지고 이후 왜곡정도가 더욱 증폭되었다. 그런데 본질은 결코 그것이 아니었다.
 

                                   전선으로 달려가는 폴란드 기병대의 역동적인 모습

 
우선 독일에 비해 열세여서 그렇지 당시에 폴란드도 엄연히 기갑부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사실 독일의 전차부대가 폴란드를 앞선 것은 재군비를 선언한 이후부터이므로 불과 3~4년 밖에 되지 않았다. 따라서 폴란드군들이 전차를 창으로 뚫을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바보들이라는 말은 성립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을 뻔히 아는 폴란드 기병대는 왜 무모하게 기갑부대를 향해 돌격하였을까?
 

                 폴란드군도 전차를 보유하고 있어 결코 생소하지 않았다 (폴란드 제10기갑여단)
 

당시 폴란드 기병대는 함락 위기에 빠진 수도 바르샤바를 방어하기 위해 이동 중이었는데 우연하게도 대규모의 독일 전차부대와 조우하게 되었다. 진지를 구축하여 방어선을 설정하고 말고 할 수도 없을 만큼 허허벌판에서 순식간 독일군 전차들에게 포위당한 그들이 살 수 있는 길은 항복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망설임 없이 돌격을 선택하였다. 전차를 향해 돌격하는 행위는 정녕 무모하였지만 굴종보다 영예로운 군인의 길을 선택하였다.
 

                           그들은 바보가 아니라 침략자에 굴복하지 않았던 용사들이었다
 

그들은 결코 멍청한 바보들이 아닌 당시의 상황에서 가장 군인답게 취할 수 있던 행동을 망설이지 않고 실시한 영웅들이었다. 전쟁터에서 폴란드 기병대와 마주한 독일군들은 그들에 대해 경외감을 가질 정도였는데, 9월 1일 폴란드 기병대와 격돌하여 승리를 이끈 독일의 명장 구데리안(Heinz Guderian)은 전쟁이후 저술한 저서에서 그들이 보여준 용기와 신념에 대해 찬사를 남겼을 정도였다.
 

                       만일 누가 우리 선배들의 육탄공격을 우화한다면 과연 어떠하겠는가?
                                           (춘천전투 당시 육탄전 재현행사)
 

이처럼 전쟁과 관련된 이야기는 단지 쓰여진 것만이 진실은 아니다. 만일 6.25전쟁 당시에 침략자를 막으려 육탄으로 전차에 돌격하였던 우리선배들을 제3자가 무모한 바보들이라 우화시키고 그것을 남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일까? 우리가 왜곡된 정보만으로 남을 잘못 평가 하는 일은 다시는 없어야 한다. 그러면 남들도 우리를 왜곡하여 우습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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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전차를 만든다는 것이
 
 

전차(Tank)를 전쟁에 데뷔시킨 것은 영국이었고 이를 효과적인 전쟁도구로 승화시킨 것은 독일이었다. 하지만 제2차 대전 이후 지금까지 최강의 기갑전력을 보유한 나라는 소련-러시아라 할 수 있다. 특히 냉전 시기에 소련이 보유하였던 기갑전력은 양과 질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냉전 당시 서유럽을 위협한 소련의 기갑부대

 
특히 1950년대 제1세대 전차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T-54T-55는 무려 15만 여대 이상이 소련 및 동맹국들에서 생산되어 서방을 위협하는 지상군 전력의 중핵을 담당하였다. 우리에게 너무 큰 아픔을 주었지만 전차 개발사에서 최고 성공작으로 평가받는 T-34의 뒤를 이어 T-54, T-55가 대성공을 거두자 이에 자신감을 얻은 소련은 계속하여 기갑전력의 우위를 확보할 제2세대 전차의 개발에 나섰다.

 
                             명품이었으나 우리에게 유쾌하지 않은 기억을 안겨준 T-34
 

이때 개발한 전차가 우랄설계국의 주도로 T-55를 개량한 T-62다. 동시대에 서방의 주력이었던 M-60, 레오파트, 치프텐, AMX-30등과 충분히 맞설 수 있을 만큼 대구경 115mm 활강포를 채택한 T-62는 1978년까지 소련 및 동맹국에서 2만5천대 이상 생산되어 동구권의 주력전차로 자리매김하였다. 현재 북한의 주력전차로 알려진 천마호나 폭풍호도 T-62의 파생형이다.

 
                                           소련 제2세대 전차의 효시인 T-62

 
그런데 유독 기갑전력에 욕심이 많은 소련은 T-62가 막 일선 부대에 배치되기 시작할 시점에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차세대 전차를 이미 구상하고 있었다. 키로프설계국의 주도로 Object 430로 명명된 전차개발안은 한마디로 기존의 상식을 깨는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우선 115mm 활강포(이후 125mm로 대체)를 채택하여 화력을 대폭 증강시킨 것 가지고도 모자라 일발필살의 9M112 대전차미사일을 장착하여 공격력을 극대화하려 하였다.

 
                                                 Object 430 개발시안
 

거기에다가 기존 전차에서 흔히 사용하는 주조장갑이 아닌 세라믹을 이용한 새로운 개념의 복합장갑을 도입하여 방어력도 크게 강화시키려 하였으며, 파워가 향상 된 차세대엔진과 자동장전장치 등을 도입하여 기동력과 전투력을 획기적으로 개선한 한마디로 기존의 상식 틀을 깨는 당대 최고의 전차 개발을 목표로 하였는데, 소련은 이것을 T-64로 명명하였다.

 
                                    T-64는 소련의 야심이 담겨있는 차세대 전차였다
 

그런데 당대의 기술력을 너무 앞선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오히려 T-64의 개발을 더디게 만들었다. 더불어 야심만만하게 먼저 데뷔시킨 T-62가 예상과 달리 중동전에서 서방측 전차에 비해 열세인 것으로 나타났다. 조급해진 소련은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 T-64의 개발과는 별도로 T-62를 우선 개량하는 프로젝트를 시급히 진행하기로 하였다.

 
                           T-64의 개발이 난항을 겪자 T-62를 개량한 T-72가 탄생하였다
 

우랄설계국
은 T-55에서 T-62로 이어진 신뢰성 높았던 플랫폼을 최대한 이용하여 새로운 전차개발에 나서게 되었다. 결국 개발에 난항을 겪고 있던 T-64와 전반적인 성능은 비슷하지만 개발 및 제작이 훨씬 유리한 전차를 개발해 내는데 성공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제2세대 동구권 전차의 대명사가 되는 T-72다. 이후 무려 2만대 이상이 생산 된 T-72는 소련 및 동맹국에 공급되었고 우크라이나에서 현재도 생산중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T-72는 동구권의 주력전차로 급속히 자리 잡았다

 
절치부심하던 키로프설계국이 T-64를 간신히 개발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소련군에만 3,600여대가 배치되는 것으로 생산이 종결되었다. 비록 동맹국에게 공여를 거부하고 소련만이 보유한 최신예 전차였지만 사실 대타로 나선 T-72가 먼저 소련의 주력전차로 자리매김하게 되자 T-64가 대량배치 되기에 상황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비록 T-64는 계륵과 같은 신세로 전락하나 후계자인 T-80의 탄생을 가져왔다
 

참고로 T-72는 이후 한 번 더 변신을 하여 T-90으로 발전하였고 야심만만한 출발과 달리 소련의 주력 전차로 등극하지 못하는 굴욕을 맛보았던 T-64는 개량이 되어 현재 러시아 최강의 전차로 평가받는 T-80으로 발전하였다. T-80이 T-64의 경우와 다른 점이라면 우리나라를 포함한 여러 국가에 수출되어 각국의 주력 전차로 활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K-2 흑표가 최근 밝혀진 난관을 극복하고 최고의 전차가 되기를 기원한다.

 
30여년을 매달리다가 개발포기를 선언한 인도의 ARJUN전차도 그렇지만 T-64는 최고의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소련(러시아)조차도 전혀 새로운 개념의 전차를 만드는 것이 상당히 어려운 일임을 알려준 예라 할 수 있다. 많은 기대 속에 개발을 완료하였지만 본격 제식화를 앞두고 동력계통의 일부문제로 애를 먹고 있다는 K-2 흑표의 최근 소식은 어쩌면 한 번 정도 겪어야 할 성장통일지도 모른다. 만난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K-2가 진정한 지상의 왕자가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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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부터 새로 만든다는 것이

 
 
음모론이나 무기에 대해 관심이 많다면 한 번 정도 제2차 대전 당시에 독일이 만들었던 비밀무기에 관한 이야기를 보거나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V-1, V-2, Me-262처럼 실제로 전선에 등장하여 연합군을 경악시킨 놀라운 무기도 있었지만, 단지 구상단계로 끝나고 이후 흥밋거리로 전해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다음에 소개할 내용도 이와 관련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V-2는 대표적으로 알려진 나치의 비밀병기다.


 
오래전 인터넷 검색 도중 아래 그림을 보고 깜작 놀랐던 적이 있었다. ( 현재는 폐쇄된 폴란드사이트로 후속 확인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단지 가정으로만 끝날 수 있는 내용일 수 있음을 미리 밝힌다) 그림은 독일의 유명한 항공기 제조사인 포케울프(Focke Wulf)가 제2차 대전 말에 콘셉을 잡은 차세대 전투기인 Ta-183의 예상도인데, 설명이 너무 자세히 되어있었다.

 
                                       상상력을 유발시킨 문제의 Ta-183 그림
 

설명에 따른다면 전쟁 당시에 포케울프의 제작소나 연구소 같은 관련 시설이 東프로이센(East Prussia-현재 러시아의 칼리닌그라드와 폴란드 동북부 일대)에 있었던 듯하다. 사실 습작에 불과한 단순 개념도는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이미 독일은 최초로 제트기를 만들고 제트전투기도 처음 데뷔시킨 나라인데다 Ta-183의 디자인도 극히 평범한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제2차대전 당시 포케울프사의 명성을 드높인 프로펠러 전투기 Fw-190
 

그림을 보고 놀랐던 이유는 사실 다른데 있었다. 포케울프 제작진이 제2차 대전 후 스웨덴으로 가서 제트기 제작에 깊이 관여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냉전시대에 동서진영을 대표하여 제트전투기로 명성을 드높인 후퇴익 제트전투기인 F-86과 MiG-15는 제2차 대전 후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미국과 소련에서 옮겨간 독일 기술진들이 직간접적으로 제작에 참여하였다. 그래서 거의 동시에 등장한 이 두 전투기의 외형이 놀랄만큼 비슷하다.

 
                        MiG-15(전)와 F-86이 비슷한 모습을 가지게 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거의 동시대에 중립국 스웨덴이 최신 후퇴익 제트전투기인 J-29를 선보였는데, 이것은 미국과 소련 외에 처음으로 제식화에 성공한 후퇴익 제트전투기이었다. 제트기 (그것도 후퇴익)의 개발은 첨단기술이 필요하다. 따라서 그동안 별다른 기술적 기반이 없다고 평가되던 스웨덴이 J-29를 만들어낸 데에는 패전국 독일 기술진의 참여가 있었을 것이라 심증이 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정밀 기계공업의 강국인 스웨덴의 자체 기술력을 폄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스웨덴의 SAAB J-29 Tunnan

 
특히 포케울프가 구상하던 여러 제트전투기 모델 중 Super TL과 스웨덴의 J-29는 이름만 바꿔 달았다고 해도 무방할 만큼 너무 닮았다. 시중에 떠도는 수많은 나치 비밀병기 콘셉을 보면 UFO타입의 나치 비밀병기처럼 당대 기술로 불가능한 것들이 많지만 Super TL은 실현 가능성이 컸던 모델이어서 전후 독일 기술진의 J-29 제작 참여 가능성에 더욱 무게가 실린다.

 
                                           포케울프가 구상하고 있던 Super TL

 
포케울프의 관련 시설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東프로이센은 소련군에게 제일 먼저 점령된 독일영토였다. 당시 거기에 살던 400여만의 독일인들은 보복을 피해 피난을 하였는데, 제트기 엔지니어들이 발트해 건너에 있던 중립국 스웨덴으로 도피하였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사실 이 정도 고급인력이 굴러 들어온다면 마다할 나라는 없다. 그들이 스웨덴에 정착하여 제트기 전투기 개발에 착수하지 않았을까?
 

                             오랜 기술력을 바탕으로 제작된 스웨덴의 최신 전투기 그리펜
 

그렇다면 오늘날 최신예 전투기인 그리펜(Grippen)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스웨덴의 전투기 제작기술은 독일의 기술진이 뿌린 씨앗에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한 장의 개념도에 쓰여 있는 내용과 J-29를 연관지어 이처럼 여러가지 가능성이 생각나게 만들 만큼 고성능 제트기를 자력으로 만든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고 그것은 현재도 그렇다.

 
                                                공군의 고등훈련기 T-50
 

사실 우리가 T-50 Golden Eagle 같은 고성능 제트기를 직접 만들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앞에서 추론한 것처럼 생각지도 못한 외부의 자발적 도움 가능성도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제트기 제작에 관한 노하우 습득에 있어서 거의 백지상태에서 시작하였다. 그러한 어려움을 겪으며 이뤄낸 쾌거여서 더욱 자랑스럽고 그 성과가 소중하다. 앞으로도 계속적인 발전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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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는 자 그리고 찾는 자[끝]



 
 

                           좀 더 확충되기를 바라는 부분

 

오늘날은 탐지기기의 발달에 힘입어 물 밖으로 떠오른 잠수함뿐만 아니라 물속에 숨어있는 잠수함까지도 하늘에서 탐지 할 수 있을 만큼 항공기를 이용한 대잠초계 활동 영역이 더욱 넓혀졌다. 특히, 고정익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대잠헬기의 등장은 항공모함처럼 거대한 플랫폼이 아니더라도 보통 크기의 수상전투함들도 하늘을 통한 대잠 초계활동을 가능하게끔 만들어 주었다.

 
                                초기의 수상발진형 대잠초계기 Martin Flying Boat

 

더불어 대잠미사일이나 공중투하어뢰 같은 정확한 대잠 타격능력의 발달은 은밀히 숨어있는 잠수함이라도 하늘로부터의 공중초계에 포착된다면 곧바로 침몰로 연결 될 수 있을 만큼, 잠수함에게 대잠초계기는 더욱 위협적인 존재로 변하였다. 더구나 잠항 중에 있는 잠수함이 하늘에 떠 있는 대잠초계기의 존재를 즉시 알아내기가 어려워, 수면 위에서 잠수함을 감시하는 수상함보다 더욱 위험한 존재가 되었다.

 
                                   해상초계 단일 목적으로 최초로 개발 된 P2V Neptune


잠수함도 수시로 부상하여 몸을 노출 시킬 수밖에 없었던 예전의 재래식 잠수함의 한계를 극복한 핵추진이나 AIP같은 여러 가지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보다 은밀히 작전 활동이 가능하게 되었지만, 항공초계에 탐지되지 않기 위해서는 예전보다 더욱 조심스럽게 임무 활동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현재 우리 군도 운용중인 P-3 Orion

 
결국 처음 하늘에서 잠수함을 감시하기 시작한 이후 많은 시일이 지났지만 쫓는 대잠기와 쫓기는 잠수함의 위치는 바뀌지 않았다. 그러한 이유 중에는 아직까지도 물속의 잠수함이 하늘에 떠있는 항공기를 공격할만한 마땅한 공격체계가 부족한 점도 있다.  물론 잠대공 요격 미상일이 연구 단계에 있어 가까운 시일 내 실용화도 예상되지만, 아마도 이런 상황에서 쫓고 숨어 다니는 일방적인 줄다리기는 앞으로도 상당기간 계속 되리라 생각된다.

 
                             우리도 사용하였던 2세대급 항모 탑재 초계기인 S-2 Tracker
                                         ('전쟁기념관'에 가시면 볼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아직도 많은 북한 잠수함세력의 위협에 대처하여야 하며, 또한 주변국 잠수함들의 천연이동로라고 불리는 동해를 비롯한 인근 해역의 초계 활동을 강화하기 위해서  해군의 대잠초계 능력을 좀 더 증대 시킬 필요가 있다. 특히 천안함사태에서 보듯이 서해 또한 결코 잠수함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할 수 없기에 더욱 그러하다.

 
                                    최근에 퇴역한 항모 탑재형 초계기인 S-3 Viking

 
현재 영해를 초계하기 위해 우리 해군은 OO기의 함정탑재용 링스(Lynx)대잠헬기와 OO기의 P-3C 대잠초계기를 운영하고 있다. 이들 기종들은 현재 여러 나라의 주력 대잠 초계기로 널리 사용될 만큼 훌륭한 성능을 자랑하는 좋은 기종이다. 특히 국내에서 대대적으로 개수하여 최근에 제식화한 P-3CK는 부족하였던 대잠 초계능력을 대폭 증가시켜주었다.
 

                               최근 도입되어 국군의 대잠 초계 능력을 확장시킨 P-3CK


 
이러한 체계적인 장비의 도입과 운용으로 우리 군의 해상초계 능력은 꾸준히 증가되었지만, 아쉽게도 아직까지 주변 해역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명선인 인근 주변 수역까지 24시간 쉬지 않고 완벽하게 감시하는데 충분하지는 못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장기적으로 해군 항공대의 전력 확충에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으로 생각되는 부분이다.
 

                                      미국 항공모함을 방문한 한국 해군의 링스헬기

 
우리 해군은 삼면이 바다인 영해를 방어하는 것은 물론 청해부대처럼 우리의 국익을 지키기 위해 원양에서도 작전을 펼치는 시대가 되었다. 이처럼 다양한 임무에 투입되기 위해서라도 좀 더 많은 임무를 담당할 수 있는 해군 항공대의 역할이 더욱 요구된다. 대잠초계를 비롯한 해상에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임무에 완벽하게 대처할 수 있는 우리 해군의 발전과 노력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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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는 자 그리고 찾는 자 [3]




                                하늘에 뜬 저승사자
 
레이더가 실용화되어 그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 영국해협전투의 예처럼 제2차 대전은 각종 군사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이 있었던 시기로 대잠초계분야 또한 폭 넓은 진화가 있었다. 각종 탐지장치가 등장하고 무선통신기술이 폭넓게 사용 되는 등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보다 광범위한 범위의 탐색이 가능하여, 제1차 대전 당시와 달리 인간의 시야를 벗어난 지역까지의 초계가 가능하여 지기 시작하였다.

 
           함재기의 발달과 항모의 실용화로 보다 광범위한 해상초계가 가능하여 졌다
 

그리고 제2차 대전, 특히 태평양전역에서 군사적 패러다임의 급격한 변화가 있었는데 바로 항공모함의 본격 실용화와 각종
함재기의 발달이다. 이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원양에서 제한을 받지 않고 자유로운 항공작전이 가능하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항공모함에 탑재한 함재기를 이용하면 함대나 상선의 이동 경로를 미리 탐색하여 적 함대를 사전에 수색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즉시 공격도 이루어지게 되었다.
 

                부상한 잠수함이 해상초계기의 눈을 벗어나기는 힘든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까지의 기술로는 오늘날처럼 하늘에서 수중을 감시하는 정밀한 탐지기기는 아직 실용화되기 전이었다. 그러므로 해상초계활동 중 발견한 적 수상함이나 부상한 잠수함이 아닌 수중에서 잠항하는 잠수함을 탐색하고 공격하는 임무는 바다위의 구축함이 담당하였다. 다시 말해 이때까지는 하늘 위에 떠서 물속에 숨어 있는 잠수함까지 발견하기는 힘들었다. 다만
부상하여 있는 잠수함의 탐색은 이전에 비해 월등히 쉬웠고 공격도 즉시 가능하였다.

 
                           잠수함의 어설픈 부상은 최후를 의미 하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잠수함은 배터리 충전 등을 위하여 부상 할 때 예전보다 더욱 조심하게 되었고 구축함뿐만 아니라 하늘로부터의 감시와 공격에도 항상 대비해야 할 만큼 위험스러운 임무환경을 맞이하였다. 물론 스노클(Snorkel)과 같은 장비의 개발로 이런 위험을 조금 감소 할 수 있었지만 스노클도 작동 시 하늘에서 발견하기 쉬운 흔적을 바다 위에 남기었다. 한마디로
대잠초계기가 잠수함의 천적으로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스노클을 수면 위에 노출하고 잠항 중인 유보트
 

아직은 초보 수준이었던 대잠초계기였지만 제2차 대전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그 위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변모했다. 특히 대서양과 유럽 인근에서 주로 활약하던 독일해군 유보트들의 손실을 보면 대잠초계기의 위력을 여실히 알 수 있다. 당시 연합군함정에 의한 손실이 264척인데 대잠초계기에 의한 손실도 250척이었을 정도였고 결국 하늘로부터의 공격에 진절머리가 난 독일은 대공포를 장착한 초계기 요격잠수함인 U-flak까지 취역시킬 정도였다.

 
                               대잠초계기 공격을 위한 대공화기 탑재 유보트
 

당시의 대잠초계기는 적 잠수함의 출몰이 예상되는 지역을 천천히 초계비행하면서 잠수함의 부상흔적 등을 찾는 형태였는데, 만일 수면위에 잠수함 출현 흔적을 발견하면 근처 아군에게 통보하여 즉시 요격하도록 하거나 만일 적 잠수함이 초계기의 공격 범위 안에 노출되어 있다면 직접폭격 등을 실시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초계기가 직접 공격까지 하였다
 

이와 같은 대잠초계를 위해 제2차 대전 당시 미국은 두 가지 형태의 대잠초계기를 운영하였다. 하나는 항공모함에 탑재한 전투기와 뇌격기(어뢰를 이용하여 적함을 공격하는 전투기)를 하나의 편대로 구성하여 대잠임무를 수행하는 것이었는데, 이런 조합 형태는 아군함대 인근이나 적의 반격이 있을지도 모르는 최전선의 해역에서 이루어지는 작전 형태였다.

 
                             제2차 대전 당시 본격적으로 등장한 초계기는
                                오늘날 초계기의 직접적인 선배가 된다
 

또 하나는 제해권이 장악된 후방 해역에서 적 잠수함의 게릴라식 기습을 막기 위해한 작전 형태였는데,
장거리 항속 및 체공이 가능한 대형수상기를 이용하여 대잠초계 활동을 펼쳤다. 이렇게 소형인 항공모함에 탑재 대잠초계기를 이용한 초계활동과 육상에서 발진 가능한 대형항공기를 이용한 초계활동은 오늘날도 계속 이용하고 있는 일반적인 대잠초계 형태로 자리 잡았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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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는 자 그리고 찾는 자 [2]


                              초기의 모습

 
대잠초계기는 그 특성상 장시간 하늘에 체공하여야 하지만 기동이 날렵하거나 속도가 빠를 필요까지는 없다. 때문에 플랫폼이 되는 비행기들은 전투기와는 달리 굳이 기체가 고성능일 필요까지는 없다. 그러나 대잠작전 및 해상초계에 필요한 각종 센서(Sensor)류가 워낙 고가의 장비다 보니 이러한 장비들이 탑재된 대잠초계기 한 기의 가격은 보통 고성능 전투기의 그것을 능가하고는 한다.


            오늘날 대잠초계기는 육상발진형, 항모탑재형, 헬기형 등 여러 형태가 있다
 

초계 임무를 실질적으로 좌우하는 각종 센서류는 그 자체만으로도 고도의 전략물자인데, 수요처도 한정되어 있고 제작에도 정밀한 기술력이 요구되어 이를 생산하는 나라도 얼마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막강한 해군력을 보유하였던 나라들이 자신들의 해상지배력을 계속 유지하려는 필요에 의해서 장기간의 노력과 개발로 이루어진 성과물이기 때문에 이 분야의 기술은 미국과 영국이 선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계기는 플랫폼 자체가 고성능은 아니지만 센서류가 고가인 무기체계다

 
잠수함의 무서움이 널리 알려진 시기는 앞글에서 설명한 것처럼 유보트의 신화가 처음 등장한 제1차 대전부터인데, 당시에는 주로 사람의 오감에 의해서 잠수함의 탐지가 이루어졌다. 오늘날 보편적인 대잠초계 장비로 사용되는 소나(Sonar)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ASDIC 같은 초보적인 초계장비가 개발되기도 하였지만 당시 기술 여건상 그리 좋은 성능은 아니었다고 전해진다.

 
         오늘날 소나의 기술은 어군탐지에도 이용되는 등 여러 목적으로 사용 중이다
 

독일의 유보트들이 충전 등을 위하여 수시로 수면 위로 부상하였지만 연합군은 수상함만으로 이들을 발견하기 매우 힘들었다. 이때 하늘에서 잠수함을 감시하는 방법을 생각하게 되었는데 비행선(Airship)이 적당한 플랫폼으로 떠올랐다. 제1차 대전은 본격적으로 비행기가 실전에 본격 투입된 무기사적으로 혁명적인 시기였지만, 넓은 바다 위에서 잠수함을 탐색하기에는 체공시간이나 비행반경 등을 고려 할 때 그리 적합하지는 않았다.

 
     제1차 대전은 비행기가 본격적으로 무기로 활용된 시기였으나 항속거리 등이 짧아
             넓은 지역을 장시간 초계할 플랫폼으로 사용하기는 곤란 하였다

 
그래서 비행선이 적합한 초계도구로 사용된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센서에 해당되는 부분은 오로지 비행선에 탑승한 인간의 눈(眼) 밖에는 없었다. 비행선이 비록 장시간 체공은 가능하였지만 속도가 느리고 거대한 동체를 이착륙시키기 위해서는 해안주변의 연근해에서만 활동이 가능하였고, 당시의 통신기술을 고려할 때 잠수함을 발견하였어도 이를 해군 구축함에 즉시 통보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비행선이 최초 초계용 항공 플랫폼으로 등장하였다

 
더구나 마땅한 자체 대잠공격 능력을 보유하지 못하여 부상한 잠수함을 바로 아래에서 발견 하였다 하더라도 손가락만 빨았을 뿐이었끼 때문에 비행선은 전술적으로 뛰어난 효과는 발휘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하늘에서 잠수함의 출몰을 감시하는 것은 망망대해를 수십 척의 수상함 들이 떼를 지어 헤집고 다니는 것보다는 분명히 효과적이었다.

 
                 하늘에서 해상을 감시하는 것이 효과적 방법임이 입증되었다


 
오늘날 고성능 PC와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인 APLLE ][ 를 단순히 성능만 가지고 비교를 할 수는 없지만, 컴퓨터는 반드시 집체만한 대형이고 여러 명의 전문가들만이 사용한다는 고정관념을 무너뜨린 APLLE ][ 와 같은 선구자의 등장 없었다면 오늘날의 정보화 사회를 만든 기술적 발전과 진보도 없었을 것이다. 요즘 스마트폰의 열풍도 이미 이를 시대를 앞서보고 사전에 차근차근 준비한 기술적 기반이 있었기에 탄생한 것이다.

 
                    비행선에 의한 초계활동은 보잘 것 없는 시작이었지만 
                          오늘날 해상초계기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관점으로 본다면 제1차 대전 당시에 인간의 감각에 의지하여 적 잠수함을 발견하는 한 없이 보잘 것 없어 보이던 초보적인 형태의 공중초계 활동을 결코 우습게 볼 수는 없다.  ( 사실 '견시'는 오늘날에도 중요한 초계수단이다 ) 그러한 하나하나의 시도와 시행착오가 쌓여서 오늘날의 고성능의 대잠초계기가 탄생되고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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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는 자 그리고 찾는 자 1




잠수함
(Submarine)
이 개발되고 그 위력을 발하기 시작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유보트(U-Boat)로 잘 알려진 잠수함을 독일해군이 대량 운용하면서 부터이다.  비록 전쟁 전에 독일은 대대적인 건함을 통하여 세계 2위 수준의 해군력을 보유하였지만 영-프 연합군보다는 열세여서 적극적인 정면대결은 할 수 없었다.  이때 독일은 150 여척의 U-Boat 를 이용한 변칙작전으로 종전 시까지 무려 1,200만 톤의 연합국 선박을 침몰 시키는 전과를 발휘하였다.


                  제1차 대전은 잠수함의 효용성을 입증 시켰다 (종전 후 자침한 유보트)
 

하지만 은밀한 잠수함이라 하여도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자주 수면위로 부상(浮上)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대다수 잠수함의 동력구조에 기인한다.  원자력이 아닌 재래식 동력의 잠수함은 디젤 엔진으로 발전기를 가동하여 생산된 전력을 잠수함에 설치된 대형축전지에 충전한 후 이 전력을 이용하여 전기 모터를 가동시켜 추진력을 얻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초기 잠수함들은 오랜 기간 잠항하여 작전을 펼칠 수 없었다
 

그런데 축전지가 소모되면 디젤 엔진을 이용하여 다시 충전하여야 하는데 디젤엔진을 가동하려면 외부로부터 공기를 공급받아야 하므로 어쩔 수 없이 공기가 있는 수면위로 부상 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당시의 기술로는 수중에 숨어서 할 수 없었던 정찰 및 통신을 위해서라도 잠수함의 장점인 은밀함을 포기하고 부득불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야 했다.

 
                         충전, 정찰, 통신 등 여러 이유 때문에 수시로 부상하여야 했다
 

지금은 원자력 추진 잠수함의 경우처럼 이론적으로 무한대 잠항이 가능하고, 재래식 동력 잠수함도 AIP(Air Independent Propulsion)의 탑재로 잠수시간이 획기적으로 늘었다.  거기에 더하여 수중에서 외부와의 통신이나 수면 위 탐지 장치 등 여러 기기들의 개발 때문에 예전처럼 수시로 부상하여야 하는 일이 많이 줄어들기는 하였지만, 잠수함이 본격 활약하기 시작한 당시에만 해도 이것은 잠수함의 태생적인 한계로 여겨졌다.

 
                        요즘은 여러 첨단 기술로 잠수함에 대한 제약이 많이 완화되었다.
                             (AIP를 탑재하여 장시간 수중 작전이 가능한 손원일함)



수상전투함이 잠수함을 잡는 방법은 한마디로 공격을 받기 전에 먼저 발견하여 폭뢰나 어뢰 등을 이용하여 침몰 시키는 것인데 특히 수면 위로 부상한 잠수함은 손쉬운 먹잇감이 되었다. 사실 잠수함은 어뢰이외에 별다른 외부무장이 거의 없었던 관계로 적들 앞에 부상한다는 자체가 곧 잠수함의 최후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작전 중 부상은 그만큼 위험하였다.


                             수면 위로 떠오른 잠수함은 손쉬운 먹잇감일 뿐 이었다
 

이러한 고유한 잠수함의 약점을 최대한 노려서 공격하고자 이들을 찾고 요격하기 위한 구축함(Destroyer)이 해군의 주요 전력으로 등장한 것도 이때부터다.  사실 오늘날의 구축함은 종합전투함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당시에는 오로지 잠수함을 잡기위한 단일 목적함으로 운용되다 시피 하였고 이들 구축함은 잠수함이 부상할 만한 위치를 주로 탐색하며 사냥하기 위해 애썼다.

 
                              잠수함의 활약 때문에 구축함의 중요성도 증대 되었다.
                              제1차 대전 당시 영국의 주력 구축함이었던 V-Class
 

그런데 부상한 잠수함을 찾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구축함이나 초계함들이 쉴 새 없이 넓은 바다를 돌아다는 것이 아니라 잠수함 탐지수단을 탑재한 비행체를 이용하여 하늘에서 감시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현대에 와서도 잠수함의 동력체계 변화 및 소나부이(Sonobuoy) 같은 대잠 탐지 수단의 발달로 인하여 초기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지만 하늘로부터 잠수함을 찾는 노력은 아직도 계속 되고 있다.

 
                                  결국 하늘에서 잠수함을 추적하는 방법이 고안 된다
 

오늘날 대표적인 대잠초계 항공기들은 해안 부근이나 대형 항공모함에 근거를 두고 작전하는 고정익기 형태와 주로 구축함이나 호위함 정도 규모의 함정에 탑재하여 작전을 펼치는 헬기형태로 구분 되는데, 이 중에서 앞으로 몇 회에 걸쳐 대잠초계기들에 대한 간략한 역사와 내용을 알아보고 이와 관련하여 우리 해군 항공대의 나갈 방향에 대해 점검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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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상의 전환이 돋보인 행사
 

 
우리나라에서 군이 관련된 관광축제로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이라면 진해(현 창원시 진해구)에서 개최되는 군항제라 할 수 있습니다.  지난 1963년부터 벚꽃이 만발하는 매년 4월의 개화시기와 맞물려 다채로운 문화행사가 진해에서 벌어지는데, 전국 각지의 관광객들이  이곳을 방문하여 축제를 즐기고 있습니다.  비록 '이충무공호국정신선양회'의 주도로 축제가 열리지만 행사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해군도 행사의 주요 당사자입니다.

 
                   진해군항제에서 시가행진 중인 해군사관학교 생도대

 
원래 군항제는 1952년에 시작 된 충무공의 얼을 기리는 추모 사업에서 기원을 두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후계자인 해군의 위상을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는 장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를 발맞추어 해군도 부대개방행사나 의장대시범 같은 다양한 대민활동을 벌입니다.  이제는 다양한 행사가 각 군이나 부대별로 다양하게 펼쳐지지만 그 역사와 전통을 따져 본다면 진해군항제가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부대개방 행사의 모습 (사진-동아일보)

 
아시다시피 진해는 대한민국 해군의 요람과 같은 곳입니다.  비록 그 시작이 한반도를 강점한 일제가 대한해협을 감제할 수 있는 요충지로 이곳을 주목하여 1906년 군항예정지로 고시한 후 1912년부터 해군기지로 만들어져 사용되었지만, 해방 이후에는 대한민국 해군의 핵심으로 당당히 그 역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진해는 근대적 의미의 군사시설이 최초로 들어선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군사도시입니다.

 
       비록 일제 때 군항으로 개발되었지만 진해는 현재 우리 해군의 핵심기지입니다

 
통상적으로 군 기지는 그 특성상 주변에 제한이나 제약이 가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군사도시라면 일반 국민들이 느끼는 감정이 그리 긍정적이라 볼 수 없고 특히 기지 주변에 거주하는 많은 주민들이 불편함을 느끼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진해군항제는 군사도시도 화려한 축제의 장이 될 수 있음을 입증하는 좋은 예라 할 수 있습니다.


                                    군항제에서 행사장으로 이동하는 군악대
 
그런데 이와 조금 다르지만 최근 전혀 새로운 형태와 군과 관련한 관광 상품이 나와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경기도 포천에 있는 '승진훈련장'에서 벌어지는 군부대의 대규모 기동훈련을 민간인이 참관할 수 있는 관광 상품인데, 국민들에게 국군의 위용과 훈련내용을 적극 홍보할 수 있고 또한 군부대로 인하여 관광객 유치가 힘든 지자체 경제 활성화에도 도움을 주는 좋은 시도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승진훈련장에서 공개행사로 벌어진 기동훈련 (사진-세계일보)

 
군항 자체보다 도시의 축제행사인 군항제와 달리 승진훈련장 개방행사는 군 훈련 참관 자체가 목적인 획기적인 관광 상품입니다.  그동안 군이 국민과 가까워지려 부대개방, 무기전시 또는 병영체험 행사 등을 벌였지만 실제로 장비가 기동하고 포탄이 발사되며 또한 목표가 타격되는 거대한 훈련을 실제로 직접 참관하는 관광은 한마디로 차원이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민군이 함께 훈련을 참관중인 모습 (사진-연합뉴스)
 
보전포공 합동훈련이 가능한 승진훈련장은 단일 훈련장으로 아시아 최대라고 알려졌는데 바로 이러한 거대한 규모 때문에 민원이 많고 주변의 발전도 더딘 편입니다.  그런데 포천시는 관광자원으로 이를 활용하여 지역경제 활성화를 꾀한다는 발상의 전환을 하여 군에 안보관광을 제안하였고 군 당국도 국민들의 안보의식 함양에 많은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여 이에 적극 응함으로써 관광 상품이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훈련이후 전시 중인 장비를 관람하는 어린이들 (사진-서울신문)

 
여러 차례의 시범 행사를 거쳐 지난 8월 4일 승진훈련장의 안보관광이 시작되었는데 많은 호평을 받았습니다.  현재 군과 포천시 그리고 관광당국은 훈련 스케쥴을 고려하여 주 1회 행사참관이 가능하도록 상품을 구성하였는데 우선 11월까지 계속 될 예정입니다.  관광은 여가 활동의 일환이지만 그러한 와중에도 우리 국민이 국가안보에 대해 새로운 것을 깨닫고 '군'은 국민의 군대임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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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드리지 말고 신고하세요!

 
 
대부분의 무기는 상대를 공격하는데 사용되는데, 특이하게도 지뢰(地雷)는 방어용으로 사용되는 무기라 할 수 있습니다.  지뢰는 외부에서 가해지는 압력이나 충격으로 뇌관을 작동시켜 폭발하는 원리로 작동하므로 주로 상대의 공격이 예상되는 통로지역에 대설하여 놓습니다.  사실 이러한 방식은 역사가 상당히 오래된 편인데 화약을 이용한 현대적 의미의 지뢰는 제1차 세계대전 때 탄생하였습니다.
 

                                          여러 종류의 지뢰들
      (좌에서 시계방향으로 M-15 대전차지뢰, M-14 대인지뢰, KM-14 대인지뢰)

 
지뢰는 상대방의 눈에 잘 띄지 않도록 땅에 파묻힌 채로 살포되므로 상당히 발견하기가 힘듭니다.  따라서 지뢰가 폭발하여 피해를 입게 된 뒤에야 발견되는 경우가 흔하고 지뢰의 매설이 예상되는 지형을 통과하여 공격할 때는 공병대등이 먼저 탐색하여 공격로를 사전에 개척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지뢰는 비인도적 무기의 대표로 손꼽힙니다.


                          매설된 지뢰는 발견하고 제거하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사실 모든 무기가 인도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특별히 지뢰가 비인도적인 무기로 꼽히는 이유는 피해 대상이 무차별적이라는 점 때문입니다.  비록 나를 방어하기 위한 무기지만 적들만 골라 선별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고 경우에 따라서는 지뢰를 매설한 측에게도 피해를 입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전진과 후퇴가 반복되어 전선의 등락이 심한 경우에 이런 경향이 많습니다.

 
                                 대전차지뢰에 의해 피폭된 M1A1전차

 
하지만 그보다도 지뢰가 비인도적인 이유는 전쟁이 종결된 이후에 발생하는 폭발사고 때문입니다.  전쟁이 끝나면 무기를 사용할 일이 급격히 감소되지만 지뢰는 제거되지 않는 한 계속하여 작동합니다.  더구나 발견하기도 어렵고 제거에도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므로 평화가 정착된 이후에도 본의 아니게 폭발사고가 자주 일어나고 이 경우 피해를 입는 이들의 대부분은 민간인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최근 전방지역에 출몰한 북한의 목함지뢰(木函地雷)가 문제가 되는 부분도 바로 이점입니다.  군의 작전 통제구역뿐만 아니라 여름 휴가철에 민간인의 접근이 가능한 하천 인근에 무차별적으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북한 측 지뢰가 어떠한 경위에 의해서 흘러 들어왔는지 아직까지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지만 8월 3일까지 총 76발의 목함지뢰가 출몰하였고 그중 하나는 지난 7월 31일 폭발사고를 일으켜 민간인이 희생되기도 하였습니다.


 
                            최근 전방지역에서 발견되는 북한 제 목함지뢰

 

현재 발견 된 목함지뢰는 우리 측에서는 생소한 방식인 나무상자 안에 TNT같은 폭발물이 들어있는 형태의 대인 살상용 지뢰입니다.  제2차 대전 당시에 소련이 주변의 재료를 이용하여 값싸고 신속하게 만든 것이 시초라고 하는데, 이 때문에 북한에서는 러시아말로 '고체폭약'이라는 의미의 '뜨로찔'이라고도 부르고 6.25전쟁 당시에도 폭 넓게 사용된 것으로 전해집니다.

 

                                             목함지뢰 구조도

 
외피가 나무다 보니 쉽게 썩어서 매설 이후 5~7년마다 교체하여야 하지만, 반면 제작이 쉽고 금속탐지를 피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또한 투박한 겉모양과 달리 상당히 강한 폭발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밟는 것처럼 외부의 압력이 있어도 터지고 부비트랩식으로 줄을 건드리거나 뚜껑을 열어도 폭발하는데 안전핀이 제거된 상태에서는 불과 1kg 정도의 작은 압력에도 터질 수 있어 상당히 위험합니다.


 
                 현재 군은 최선을 다해 지뢰를 수색하고 제거 중에 있습니다
.


 
보도에 따르면 군 당국은 지난달 17~23일 개성지역에 내린 많은 비로 인해 유실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보고 북측에 재발방지를 위한 전화통지문을 발송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유일하게 목함지뢰만 떠내려 온 점을 들어 민간인 피서객을 노린 의도적인 방출가능성도 진지하게 제기하고 있습니다.  다만 현 시점에서 원인이야 어떠하든 발견된 것만도 70개가 넘을 만큼 다량의 지뢰가 살포되어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목함지뢰 발견 시 신고를 부탁하는 안내문

 

현재 군 당국에서는 한강하류와 임진강 등 북한과 연결된 하천 주변에서 대대적인 수색작업을 벌이고 이들을 제거하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깊숙한 풀밭이나 모래톱, 수면 하에 목함지뢰가 매몰되어 있을 가능성이 상당히 큽니다.  따라서 해당 지역에 가게 될 경우 주의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물론이고 만일 발견하였다면 절대로 건드리지 말고 군경에 즉시 신고하여야 하겠습니다.  안전을 위한 철저한 준비는 결코 과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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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훈을 얻고 대비를 하라


 
 
<사례 1> 1935년 10월 30일, 차세대 폭격기로 개발 중인 모델번호 299실험기가 최종평가 시험비행을 벌이던 도중 추락하였는데 어처구니 없게도 조종사 과실에 의한 사고였습니다.  결과는 참혹하여 조종사를 비롯하여 비행기에 탑승하였던 수많은 관계자들이 모두 숨지는 끔직한 참사가 되었습니다.  비록 299실험기는 여타 경쟁기종에 비해 성능이 앞선다고 사전 평가를 받았음에도 정식 도입 여부가 불투명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추락하여 불타는 299실험기
 

<사례 2>
1943년 2월 18일, XB-29실험기로 명명되어 제작 중이던 차세대 폭격기가 최초 실험비행에 나섰습니다.  군 관계자와 기술자들을 태우고 40여 분 동안 비행했을 때 갑자기 엔진에서 불이 났고 이로 인해 비행기가 공장지대에 추락하여 탑승자 전원 및 공장 관계자 등 총 31명이 사망하는 초유의 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결국 XB-29실험기의 본격 제식화는 유보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장지대에 추락하여 엄청난 인명피해가 발생한 XB-29실험기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은 무지막지한 전략폭격을 실시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적 후방을 공습하여 상대의 전쟁수행 능력과 의지를 꺾어버린 전략폭격은 한마디로 전쟁의 패러다임을 새롭게 바꾼 거대한 군사전략이었습니다.  이때 미국은 유럽전선과 태평양전선에 각기 다른 4발 중(重)폭격기를 투입하였는데 유럽에서는 하늘의 요새(Flying Fortress)라고 불린 B-17이, 태평양에서는 최강요새(Superfortress)로 알려진 B-29가 활약하였습니다.

 
          제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폭격기로 명성이 자자한 B-17(좌)와 B-29
 

그런데 B-17은 <사례 1>에서 소개한 모델번호 299실험기가, B-29는 <사례 2>의 XB-29실험기가 바로 원형기입니다.  이처럼 무기 개발사는 물론 전쟁사에 커다란 발자국을 남긴 뛰어난 전략폭격기들이었던 B-17과 B-29의 명성은 엄청난 실수에 의한 실패와 기술부족에 의한 시련을 극복하였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B-29는 6.25전쟁에서도 맹활약하였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완벽하게 만들어져 문제없이 사용되는 것이 가장 좋고 누구나 바랍니다.  하지만 무기 개발사를 살펴보면 이처럼 실패와 좌절을 극복한 예를 발견하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복잡하고 정밀한 기술이 요구되는 무기일수록 이런 실패의 예는 흔하고 드러나지 않는 소소한 문제점까지 고려한다면 처음 무기를 만들었을 때 처음 구상한대로 완벽하게 작동하는 무기를 만들기란 어쩌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보아야 합니다.

 
                공포의 비밀무기로 유명한 V-2 로켓도 엄청난 실패를 겪었습니다.
 

따라서 본격 제식화 된 이후에도 사용도중 발견 된 여러 문제점을 지속적인 개량이나 개선을 거쳐 고쳐나가면서 사용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사실 이것은 비단 무기류뿐만 아니라 상업제품에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이제는 당연시 되는 각종 제품의 리콜제도의 대상에는 베스트셀러로 많이 팔리고 사용되는 제품들도 포함되고는 합니다.

 
                          리콜은 흔한 일상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지난 7월 29일 장갑차 도하훈련 도중 침수사고가 발생하여 조종사가 순직하는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
하였습니다.  더구나 사고가 발생한 장갑차는 많은 기대 속에 최근 제식화되어 추후 국군의 주력이 될 K-21장갑차였습니다.  곧바로 사고의 발생 원인을 밝히기 위해 대대적인 조사가 벌어지겠지만 신형 장비를 가지고 훈련 도중 사고가 발생하였고 더구나 인명 피해까지 있었기 때문에 국민들의 충격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사고 후 인양된 K-21장갑차 (사진-뉴시스)
 
만일 기계적 결함에 의한 사고라면 조속히 개선이 이루어져야 사고의 재발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전술한바와 같이 새로운 무기나 장비가 완벽하게 제작되어 별다른 문제가 없이 완벽하게 작동하면 가장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최대한의 노력을 경주하여 다시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철저히 개선하여야겠습니다.

 
                조속히 원인이 규명 되어 사고가 반복되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인간의 실수에 의해 실패한 B-17이나 결함으로 사고를 겪은 B-29도 뼈아픈 실패를 극복하고 마침내 무기사에 길이 남는 성공한 명품무기가 되었듯이 K-21장갑차도 이러한 뼈아픈 사고를 잊지 말고 이를 반면교사의 사례로 삼아서 훌륭한 무기로 조속히 자리 잡도록 당국과 제작업체에게 노력을 촉구합니다.  반드시 교훈을 얻어 사고의 재발이 없도록 대비하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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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굴의 의지'  훈련에 참여한 함재기들
 
 

작전명 불굴의 의지(Invincible Spirit)로 명명되어 지난 7월 25일에 시작된 한미연합훈련에는 우리 해군이 보유한 독도함을 비롯한 다양한 각종 함정들과 F-15K를 위시한 공군의 최 신예기들이 참여하여 막강한 능력을 선보였습니다.  그런데 이번 훈련에 선보인 무기들 중 하이라이트는 미국이 보유한 항공모함 CVN-73 조지 워싱턴호와 현존하는 최강의 전투기로 자타가 공인하는 최신예 전투기 F-22라 할 수 있습니다.


                                    연합훈련 중인 미 항모 조지 워싱턴호와 한국 해군의 독도함

 
그중 전략 기동장비의 꽃인 항공모함은 훈련이전부터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미국만이 운용 중인 슈퍼캐리어(초대형 항공모함)는 다양한 종류의 함재기를 탑재하여 작전을 펼치는데, 항공모함이 우리에게 낯선 장비이다 보니 이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함재기도 생소한 편입니다.  물론 F-4팬텀기처럼 함재기에서 파생된 기종을 사용하였지만 통상적으로 함재기는 항공모함을 기반으로 운용되므로 우리에게 낯선 것은 사실입니다.

 
                   갑판에 다양한 종류의 함재기를 가득 싣고 항해 중인 항공모함 조지 워싱턴
 
 
항공모함에는 통상 1개 항모비행단(CVW-Carrier Air Wing)이 탑재되어서 운용되는데, CVW는 소속 항공모함을 필요에 따라 바꾸기도 하며 CVW를 구성하는 비행대도 작전의 투입 목적에 따라 수시로 변경되고는 합니다.  이번 한미연합훈련에 참여한 조지 워싱턴에는 별개의 임무에 투입되는 8개의 비행대로 구성된 제5항모비행단(CVW-5)이 전개되었습니다.  막강하지만 우리에게는 상당히 생소한 이들에 대해 알아봅니다.
 

                                         전투폭격비행대 (VFA)

 
공대공전투와 공대지전투를 펼치는 전폭기로 구성된 비행대로 항모비행단의 주먹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재 CVW-5에는 F/A-18E 슈퍼호넷으로 구성된 3개 비행대(VFA-27, 102, 115)와 구형인 F/A-18C 호넷으로 구성된 1개 비행대(VFA-195)가 탑재되어 있습니다.  통상 1개 비행대가 12~14기의 전폭기로 구성되니 48~56기의 전폭기가 항공모함에 탑재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착함 중인 VFA-27의 FA-18E 전폭기
 

                                        조기경보비행대 (VAW)

 
조기경보기는 작전 구역을 감시하는 역할을 담당하는데 한마디로 하늘의 눈이라 할 수 있습니다.  통상적으로 공중을 통한 적의 내습을 원거리에서 감시하거나 아군 VFA가 원거리로 작전을 나갈 때 함께 동행하여 아군기가 원활하게 작전을 펼치도록 돕는 임무에 투입됩니다.  CVW-5에는 4~6기의 E-2C 조기경보기로 구성된 1개 비행대(VAW-115)가 전개되어 있습니다.
 

                                          이함하는 VAW-115의 E-2C 조기경보기
 

                                          전자전비행대 (VAQ)

 
전자전기는 적의 레이더망을 비롯한 전자 감시체계를 교란하는 역할을 담당하는데 한마디로 아군이 대지공격 등의 작전을 펼칠 때 상대의 눈을 멀게 하는 것입니다.  통상적으로 VFA가 작전을 나갈 때 조기경보기와 전자전기가 함께 동행 하여 작전을 펼치며 CVW-5에는 4~6기의 EA-6B 전자전기로 구성된 1개 비행대(VAQ-136)가 전개되어 있습니다.  전자전기는 아직 우리 군도 보유하지 못한 최고의 전술장비입니다.
 

                                         이함 준비 중인 VAQ-136의 EA-6B 전자전기
 

                                             수송비행대 (VRC)

 
말 그대로 항공모함을 기반으로 하는 수송기부대입니다.  항공모함은 한 번 작전을 나가면 장기간 작전을 펼치므로 인근 육지나 다른 항공모함 사이의 긴급한 인원이나 화물의 수송이 필요한 경우가 발생합니다.  이러한 목적에 수송비행대가 투입되는데, CVW-5에는 2~4기의 C-2A 수송기로 구성된 1개 비행대(VRC-30)가 전개되어 있습니다.

 
                                           비행 중인 VRC-30의 C-2A 수송기
 

                                        헬리콥터비행대 (HS)


조종사구조, 해상구난, 연락, 수송, 대잠초계 등의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는 헬리콥터로 구성 된 비행대입니다.  CVW-5에는 4~6기의 SH-60, HH-60 고성능 헬리콥터로 구성된 1개 비행대(HS-14)가 전개되어 있습니다.
 

                                          작업 중인 HS-14의 HH-60H 헬리콥터

 
위에서 언급한 CVW의 구성은 통상적이지만 고정된 것은 아니고 임무와 상황에 맞게 수시로 변경되거나 조정됩니다.  평소에는 위에서 언급한 60여기 정도의 각종 작전기를 탑재하고 항공모함이 작전에 나서지만 이들 작전기들 대부분은 하나하나가 최고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최신예기라서 상당한 능력을 발휘합니다.  따라서 흔히 항공모함 비행단의 전투력이 중소국가의 공군력을 능가한다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패키지 시범 비행 중인 항공모함 조지 워싱턴에 탑재된 제5항모비행단(CVW-5) 소속의 함재기들
 

사실 항공모함 자체는 그리 무서운 무기가 아닙니다.  워낙 큰 덩치 때문에 방어에 불리하여 수많은 호위함의 보호 없이 단독으로 바다로 나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무서운 능력을 가진 CVW를 원거리로 이동시켜 작전을 펼칠 수 있기 때문에 전략무기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항공모함에서 내려 육지에 전개 된 CVW는 통상적인 비행단 수준으로 능력이 반감된다는 점입니다.  마치 악어와 악어새처럼 항공모함과 CVW는 함께 있을 때 최고의 능력을 발휘합니다.  이처럼 무서운 전략무기도 결국 모든 것이 갖추어졌을 때 힘을 쓰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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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의 수퍼캐리어에 대한 이야기
 
 

최고의 전략 병기 중 하나로 평가받는 항공모함은 이미 실전에 등장한지 100년 가까이 되었을 만큼 생각보다는 오래전에 개발된 무기입니다.  한마디로 비행기가 무기로 사용되자마자 항공모함이 등장하였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항공모함은 여러 나라에서 여러 형태로 개발되어 사용하다가 제2차 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등을 거치면서 어느 정도 정형화된 모양으로 개념이 정립되어졌습니다.
 

                               최근 부산에 입항한 조지 워싱턴의 모습 (사진-조선일보)
 

현대 항공모함의 표준처럼 여겨지는 슈퍼캐리어(Super Carrier-초대형 항공모함)은 현재 미국만이 운용 중인데, 지난 7월 21일 한-미 연합훈련을 부산에 입항하여 언론에 공개된 배수량 9만 7천 톤의 핵추진 항공모함 CVN-73 조지 워싱턴 (USS George Washington)호도 거기에 해당됩니다.  최초의 슈퍼캐리어의 영예를 가지고 있는 항공모함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건조에 착수하여 1955년 취역한 CV-59 포레스탈(Forrestal)입니다.

 
                                               최초의 슈퍼캐리어인 포레스탈

 
사실 슈퍼캐리어의 명확한 정의가 내려져 있는 것도 아니지만, 배수량기준으로 적어도 7만 톤이 넘고, 경사활주로(Angled Deck)가 장착된 총 길이 300미터가 넘는 갑판, 4개의 사출기 및 엘리베이터 등을 그 외형적인 특징으로 손꼽을 수 있습니다.  즉, 제트화로 대형화된 60여기 이상의 전술기를 탑재하여 최대 한개 편대를 동시에 이함 시킬 수 있거나 이론상으로 함재기를 동시에 이착함을 동시에 시킬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륙하는 다양한 종류의 함재기들
 

이에 부합된 능력을 처음으로 보유한 항모가 바로 포레스탈인데 이후 등장한 미국의 항모들을 통상적으로 슈퍼캐리어라 지칭합니다.  현재도 이 정도 규모의 항모를 실전 운용하는 나라는 미국밖에는 없는데, 최근 취역 한 CVN-77 부시(George H.W.Bush)호까지 이러한 구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정도로 포레스탈은 기념비적 작품이었습니다.  굳이 차이라면 시대의 기술이 접목된 동력, 아일랜드구조, 엘리베이터 위치, 무장이나 센서류 정도라고나 할 정도입니다.
 

           포레스탈의 개념도인데, 최근 항공모함과 비교하여 엘리베이터 위치 등이 차이가 있습니다.
 
 

포레스탈의 등장이전까지 미국이 운용하였던 최대 규모의 항모가 배수량 5만 톤 정도였던 미드웨이급(Midway Class)이었으며, 현재 미국의 항모 이외에 최대 규모인 러시아의 쿠즈네쵸프(Kuznetsov)나 영국의 도입예정인 CVF급 항모도 이착함 능력 및 배수량 기준으로도 60년 전 등장한 포레스탈에 미치지 못합니다.  단지 배수량으로만 따진다면 이에 필적할 만한 항모는 제2차 대전 당시 일본해군의 시나노 정도 밖에는 없습니다.

 
                  러시아 유일 항공모함인 쿠즈네쵸프는 사출기가 없어 운용능력이 부족합니다.
 

포레스탈이 최초로 제식화한 슈퍼캐리어는 맞지만 서류상으로는 제2차 대전 직후 연구된 CV-58 유나이티드 스태이츠(Uniter States)의 개념이 정립된 최초의 슈퍼캐리어이었습니다.  하지만 장거리 전략폭격기, 핵미사일 등의 이유로 항모무용론이 제기되자 개발이 취소되었는데 그 구조가 현대의 항모와 많은 차이를 보이며 오히려 태평양 전쟁 중 일본 항모와 닮았다는 느낌이 들게 합니다.
 

                                  서류상의 계획되다 폐기된 CV-58 유나이티드 스태이츠 
                                경사활주로가 없는 등 현대의 항공모함과 차이가 많습니다
 

이처럼 용도가 폐기 될 운명에 처했던 슈퍼캐리어가 포레스탈로 부활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제트기 시대의 도래에 따른 함재기의 대형화 때문입니다.  오래 동안 대양의 주인이었던 전함(Battleship)이 그 덩치로 인하여 사라진데 비하여 오히려 항공모함이 덩치를 더 키우게 된 이유가 바로 항모의 존재 이유였던 함재기의 크기가 커졌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퇴역한 F-14함재기의 멋진 이함 모습
                       슈퍼캐리어의 등장으로 고성능 대형 함재가의 운용이 가능해졌습니다
 

이전 항공모함은 크기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여기에 탑재하여 운용할 수 있는 함재기가 공군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성능 상 핸디캡을 가질 수밖에 없었으나 슈퍼캐리어의 등장은 F-4, F-14, FA-18같은 대형 함재기의 운용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영국이 수직이착륙기를 이용한 경항모 시대를 개막하였으나 결국 다시 중형 항모정책으로 회귀한 가장 큰 이유는 수직이착륙기와 경항모 자체가 가질 수 밖에 없는 작전능력의 한계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의 항공모함과 작전 중인 영국의 경항공모함
                                  한눈에 보이는 크기만큼 작전 능력의 차이가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미국도 이러한 공룡을 만들어 놓고 그 능력을 제대로 몰라 여러 가지 실험을 하였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으로 이전의 미드웨이급에서는 상상도 못 할 거대비행체의 이착함실험 등이 그것입니다.  비록 시범적으로 KC-130F 수송기의 이착함에는 성공하였지만 대형 수송기도 할 수는 있다 정도만 증명하였을 뿐 갑판 운영에 있어서의 비효율성 등으로 단지 실험으로만 끝납니다.


                              포레스탈 갑판에서 이함대기 중인 KC-130F의 실험 모습
 

이처럼 새롭게 시도할 연구가 많았을 만큼 슈퍼캐리어는 군사 패러다임의 정립에 많은 변혁을 불러왔고 이때부터 무서운 전략 병기로 본격적으로 진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처럼 새로운 장을 개척한 포레스탈은 1993년 퇴역하여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무기사적 의의는 크고 영원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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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평양을 왕복하는 총기들
 

 
우리나라에서는 수렵용 엽총이나 사격장 용도로 허가를 받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개인이 총기를 보유하는 것이 불법입니다.  때문에 총기와 관련한 사고가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없다고 보아야 할 정도로 적고 이것은 앞으로도 계속하여 지켜져야 할 원칙이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범죄율이 높은 여러 나라에서 법으로 총기 보유를 강제하고 싶어도 어느덧 하나의 문화가 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경찰의 단속에 적발된 불법 사제 총
 

이러한 딜레마를 가지고 가장 크게 체감하고 고민하는 나라가 아마도 미국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서부개척 시대를 거치면서 민병대의 전통을 하나의 자랑이자 역사로 생각하는 미국은 현재도 총기의 보유가 자유롭고 총기의 수집이 하나의 취미로도 정착되었을 정도입니다.  금연자도 담배 수집을 취미로 가질 수 있듯이 총기의 사용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도 총기 컬렉션을 할 만큼 총기와 그와 관련된 문화가 관대한 나라가 바로 미국입니다.

 
                  잦은 총기사고에도 불구하고 총기를 규제하지 못하는 것이 미국의 고민입니다
 

국가의 역사가 짧은 탓도 있겠지만 미국은 유별나게도 지나간 물건에 대한 가치를 상당히 높게 쳐줍니다. 골동품이라기보다는 폐품에 가까운 불과 십여 년 밖에 되지 않은 아주 가까운 과거의 물건도 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다보니 시골 동네에도 골동품가게(Antique Shop)를 쉽게 찾아 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렇다보니 단지 예전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생판 모르는 남의 사진첩도 거래되는 경우까지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골동품 점인데 남의 사진까지 거래가 됩니다
 

그런 점은 총기와 관련하여서도 마찬가지며 실제로 실전경험이 있는 총기를 역사적인 소장품으로 간직하려는 사람이 많은 것이 당연할 정도입니다.  따라서 제2차 대전, 한국전쟁을 거쳐 월남전 초기까지 사용된 M1과 M1카빈소총(이하 카빈)은 상당히 소장가치로써의 인기가 높습니다.  이들 소총은 총 1000만정 가까이 생산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생산국인 미국뿐만 아니라 수많은 여러 나라에서 주력 제식소총으로 사용되었습니다.

 
                                                      M1소총(상)과 카빈
 

하지만 거대한 전쟁에 가장 많이 사용된 주력 소총이었던 관계로 아직까지 제대로 작동하는 M1과 카빈이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전 세계에서 아직까지 보관상태가 양호하여 작동되는 M1과 카빈의 대부분은 우리나라에 있다입니다.  얼마 전까지 예비군용으로 사용되었을 만큼 상당량의 작동한 소총이 보관 중입니다.  그러나 부품조달, 보관비용 등의 여러 문제로 실전용으로 사용하기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예비군 훈련에 사용된 카빈
 

마침 이렇게 우리나라에서도 애물단지가 되어가던 이들 소총들이 미국 호사가들을 위해 다시 바다를 건넜습니다.  지난 2009년 말 예비군용 총기로 보관되어 있던 M1과 카빈 중 상태가 양호한 12만 2천정 (M1 7만5천정, 카빈 3만 5천정)의 소총들이 미국의 민간판매용으로 방출되기로 결정된 것이었습니다.  외화를 획득할 수 있는데다가 구형총기에 대한 재고관리 부담을 줄일 수 있어서 한마디로 일석이조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미국의 민간인이 취미로 사용 중인 M1
 

전술한 것처럼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인마살상용 총기의 개인 보유가 허용이 되지 않기 때문에 M1이나 카빈 같은 고성능소총(총 자체가 구형이지만 총기로써의 성능은 상당히 좋은 편으로 현재도 평가되고 있음)의 국내 소비가 불가능하므로 전량 비용을 들여 자체 폐기하여야 되는데 그런 점에서 볼 때 이러한 대외 재판매 방식은 상당히 좋은 정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6.25전쟁 당시 미 해병대가 사용 중인 카빈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을 구하러 미국에서 한국으로 태평양을 건너왔던 귀중한 무기들이 그동안 소중하게 사용되고 보관되다가 이제는 미국의 호사가들을 만족시켜 주기위해 반대로 태평양을 건너가게 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재미있는 역사적인 사건이 아닌가도 생각됩니다.  아마 이들이 생명체였다면 많은 생각이 들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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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 아쉬웠던 부분들

 
 
6.25전쟁 제60주년을 맞이하여 각종 매체에서 특집 프로그램이 상영되고 있고 당국도 이와 관련한 다양한 행사를 벌이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당시의 기록필름을 이용한 시사프로그램과 달리 당시의 상황을 재현한 최근의 극화나 행사를 보면 고증과 관련하여 자못 아쉬운 부분이 있는데 이에 관하여 몇 가지 이야기하고자 한다.

 
                  참전 영국군을 초청하여 4월 17일 개최 된 임진강전투 기념식 (사진-뉴시스)
 

우선 시청자들로부터 가장 질타를 많이 받은 부분이 당시 사용한 무기나 장비에 대한 묘사가 적절하지 않다는 점이다.
극화니까 내용은 별개로 하고 사실 6.25전쟁에 실제로 사용된 장비를 소품으로 구하는데 상당한 무리가 따른다는 점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 밴드 오브 브라더스(Band of Brothers) ’ 같이 사소한 부분까지 정확히 고증을 거쳐 재현된 전쟁영화나 드라마에 이미 눈높이가 맞추어져 있는 상태다.
따라서 눈에 거슬릴 정도로 고증이 잘못된 부분에 대한 불만이 클 수 밖에 없는데 그것은 우리나라에도 이에 관한 정보를 아는 이들이 많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전쟁 극화의 모범으로 불리는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한 장면
 

가장 대표적으로 거론 된 것이 신작 드라마 ‘ 전우 ’ 에 등장한 헬리콥터다.
헬리콥터가 6.25전쟁에 처음 등장한 것은 맞지만 드라마에 나온 헬리콥터는 월남전에 사용된 UH-1H 기종이었다.
비록 이 부분이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고 질타도 받았지만 개인적으로는 굳이 헬리콥터라는 피사체를 극에 등장시키고자 하였다면 어쩔 수 없었던 차선책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 드라마가 실제로 있었던 전쟁사를 재현한 것이 아니라 재미를 추구하는 가상의 극화이고 내용 전개상 헬리콥터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우에 등장한 UH-1H 헬리콥터 (사진-KBS)
 

하지만 또 다른 극화인 ‘ 로드 넘버 원 ’ 에 등장한 북한군 T-34전차는 정말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방송 전에 1억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북한군 전차를 재현하였다고 선전하였는데 문제는 엉뚱하게 재현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사용된 전차를 재현하려는 시도는 칭찬받을 만한 일이지만 이왕 거금을 들여 할 것이면 제대로 해야 했는데 전혀 그러지 못하였다.
전쟁당시에 북한군이 사용한 T-34는 85형인데 방송국에서 재현한 모조전차는 제2차 대전 당시에 소련군이 사용한 외형부터 차이가 많이 나는 76형이었다.
한마디로 힘은 힘대로 쓰고 욕은 욕대로 먹은 부분으로 조금만 신경을 썼으면 충분히 재현 가능하였는데 대충하다보니 벌어진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조금만 더 신경 썼으면 제대로 재현할 수 있었던 T-34 (사진-MBC)
 

사실 여기까지는 아마추어(?)가 벌인 일이고 드라마는 아무래도 장비나 소품보다 극 전개가 우선이니 그냥 넘어갈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막상 6.25전쟁 60주년을 기념하여 당국에서 개최한 재현행사에서도 아쉬운 부분이 등장하였다.
지난 6월 28일에 6.25전쟁 초기 대한민국을 구한 위대한 전투로 평가되는 ‘ 춘천전투 ’ 재현행사가 제2군단 주도로 현지에서 열렸다.
당시 민관군이 혼연일체가 되어 맹활약한 국군 제6사단의 선전을 재현하였는데 제16포병대대의 포격장면과 북한군 자주포에 대한 육탄공격 장면이 행사의 하이라이트였다.
 
                            제6사단의 선전을 표현한 춘천전투 재현행사 (사진-연합뉴스)
 

당시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기 위해 주체측이 많은 애를 썼음에도 연출 병사들이 사용한 소총이 K-2였던 것처럼 아쉬웠던 부분이 종종 눈에 띠었지만 크게 문제될 부분은 아니라 생각한다.
하지만 적의 SU-76 자주포를 국군이 현재 보유한 M-48 전차로 재현하였다는 점은 커다란 실수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실제 있었던 전투의 재현이라면 적어도 자주포는 자주포로 재현하는 것이 옳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비슷한 시기에 열렸던 ' 지평리전투 ' 재현행사와 비교하여 아쉬운 점이라 할 수 있다.

 
                             적의 자주포를 전차로 재현 한 것으로 못내 아쉬운 부분이다.
 

지난 5월 27일에 참전 유엔군 노병을 초청하여 현지에서 제7기동군단 주체로 지평리전투가 재현되었다.
미 제2사단 마크를 군복에 부착하고 M-1 카빈 소총을 소품으로 섰으며 마지막에 전차를 앞세운 크롬베즈 전투단의 돌격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여 호평을 받았다.
다만 중공군이 사용한 소총을 나무모형로 깎았는데 아쉽게도 6.25전쟁 당시에 사용하지 않은 AK 소총 모양으로 만들었다는 점이 옥에 티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평리전투 재현행사 (사진-뉴시스)


하지만 개인적으로 위에서 일일이 언급한 부족한 점들은 아픈 과거사를 상기하려는 노력과정에서 벌어진 작은 에피소드라고 그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어느덧 6.25전쟁을 서서히 먼 과거의 기억이 되어가고 있고 그것을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세대가 더 많아진 이때에 그러한 과거사를 잊지 않게 노력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비록 아쉬운 많은 부분이 있었지만 이런 부분은 차차 개선될 것이라 생각하며 비극의 과거사를 잊지 않고 새롭게 각인시켜주려 노력하는 많은 이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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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원한 것은 그것이 아니야 !
 

 
추론이기는 하지만 지구상에 파생형을 포함하여 단일 품목으로 가장 많이 생산되어 널리 퍼진 무기라 한다면 AK-47소총이 아닐까 생각된다.
원 개발국인 구 소련은 물론이거니와 옛 공산권을 포함한 여러 국가에서 이 순간에도 대량으로 생산되고 있어 그 어느 누구도 정확한 생산량을 알고 있지 않을 정도다.

 
                                AK-47은 무기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라 할 수 있다
 

군은 병력과 장비로 구성이 되는데 병력이 보유하는 최소한의 화기가 소총이다.
보병은 물론이거니와 통신이나 수송처럼 비전투병과 사병들도 소총은 기본적으로 장비하고 있다.
당연히 무력을 보유한 집단들은 기왕이면 성능이 좋은 소총을 기본무기로 갖추려 한다.
거기에다가 성능이 좋은 소총이 가격까지 저렴하다면 금상첨화라 할 수 있다.

 
               AK-47은 냉전시기 공산권은 물론 현재도 많은 국가의 표준 소총 노릇을 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1947년 개발되어 아직까지 많은 나라의 군대가 기본 장비로 채택하고 있는 AK-47은 가장 좋은 소총이라고 평가하여도 무방할 듯하다.
제작이 용이한 만큼 가격도 저렴하고 내구성과 정비가 용이한데다 화력까지 좋아 미국의 M-16과 더불어 '최고의 공격용 소총' 이라고 평가를 받지만 저작권 개념이 희박한 공산국가에서 탄생한 총답게 카피 본까지 합한 생산량은 M-16을 훨씬 능가한다.

 
                                       북한도 AK소총의 주요 생산 소비국 중 하나다
 

이런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인 AK-47은 개발자 칼라시니코프(Mikhail Kalashnikov)와 떼어놓고 이야기 할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 전차부대 하사관으로 참전한 그는 1941년 독일군과 교전하던 중 포탄 공격을 받고 부상을 당하여 입원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는 소련군이 자기 안방에서 독일에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는 치욕적인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옐친(左) 러시아 전대통령과 칼라시니코프
 

장고 끝에 그는 독일에 비해 성능이 떨어지는 소련의 무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이처럼 결론을 내렸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대체적으로 독일 무기들의 품질이 소련 것에 비해 좋았지만 T-34처럼 소련 또한 좋은 품질의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사실 독소전 초기에 소련이 몰렸던 가장 큰 이유는 전선 지휘부의 무능과 경험부족이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최전선에서 말단으로 참전하였던 칼라시니코프에게는 당장 손에 들고 있던 무기차이가 눈에 보였을 것이다.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소총을 제작하였다
 

독일의 침공으로 소련이 위기에 처하였던 것을 직접 경험한 그는 다시는 이런 치욕을 겪지 않기 위해 무기의 기본이 되는 소총에 대해 연구하였다.
그리고 종전이후 툴라(Tula)조병창에서 일을 하며 그가 구상하던 소총을 탄생시켰는데 이것이 바로 AK-47이다.
그만큼 AK-47은 한 개인의 일생의 노력이 응축된 산물이었다.

 
                                그는 전쟁 초기 소련이 당한 치욕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 소련이 채택 후 대량 생산하거나 여러 국가에 생산하도록 허락하여 전 세계에 마구 공급된 AK-47은 방위를 위한 목적으로만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게릴라, 테러리스트는 물론 마약사범이나 갱단까지 널리 애용하는 무기가 되었고 이렇게 AK-47이 전 세계 구석구석에 퍼져 살육도구로 이용되는 현실에 칼라시니코프는 매우 괴로워했다.

 
                   하지만 국가 방위가 아닌 무력 집단의 살육도구로 사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지난 2006년 6월 12일 중앙일보에 실렸던 기사 중 일부이다.
그는 11일(현지시간)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 AK-47소총이 오사마 빈 라덴 추종자들의 손에 들려있는 장면을 TV에서 볼 때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내가 개발한 소총이 저들 손에 들어가게 됐을까'자문하곤 한다 "며 안타까움을 나타냈다...(중략)...그는 " AK-47 소총 개발은 당초 파시스트 독일 침략군으로부터 조국을 지키려는 순수한 열정에서 시작됐다 " 고 회고하였다.

 
                                M-16 개발자 유진 스토너(右)와 함께 한 칼라시니코프
 

비록 한 개인의 열정과 애국심에 의해 탄생한 명품이지만 전 세계 분쟁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등장하는 AK-47을 보면 아무리 좋은 물건도 제대로 된 임자를 만나야 빛을 발할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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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사귀환의 이유
 

 
인류역사에 있어서 전인미답의 경지에 최초로 발을 디딘 사람들은 영웅으로 길이길이 그 명성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아무도 가지 않았던 곳에 온갖 역경을 물리치고 도달하였던 그 자체만으로 그들은 칭송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이런 탐험가들이 길이 인류사에 남기 위해 요구되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탐험에 나선 이들의 무사귀환이다.

 
                 산악인 오은선은 여성최초로 히말라야 14좌 완등에 성공하였다 (사진-연합뉴스)
 

목표했던 곳에 도달하는 자체도 중요하지만 통상적으로 생환하지 못하면 완벽하게 성공한 탐험으로 인정하지는 않는다.
통신 및 이동수단이 발달한 요즘은 목표에 도달한 사실이 실시간으로 확인가능하고 조난을 당하여도 구조 될 가능성이 높지만 예전에는 무사히 귀환을 하지 못하면 탐험의 성공여부 자체를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단지 그러한 이유 때문이라기보다는 사람의 생명이 탐험의 과정이나 결과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남극점에 도달하였지만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스코트 탐험대
 

다음의 경우를 살펴보면 무사귀환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1953년 5월 29일 오전 11시 반, 영국 에베레스트 제9차 원정대 소속의 뉴질랜드인 에드먼드 힐러리와 네팔인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가 에베레스트 정상에 발을 디뎠고 이들은 지구의 마지막 극점을 정복한 위대한 사람들로 영원히 기록에 남게 되었다.
그런데 그 보다 훨씬 오래전인 1924년 6월 8일, 영국 에베레스트 제3차 원정대의 조지 말로리앤드류 어빙이 인류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을 것이라 믿는 사람들도 많다.

 
                                           에드먼드 힐러리(右)와 텐징 노르가이
 

"산이 있어 오른다" 는 유명한 명언을 남긴 말로리는 동료 어빙, 오델과 함께 해발 8,100m 지점에 6캠프를 설치하는데 성공하였다.
여기에서 말로리와 어빙은 안개 속을 헤치며 정상을 향하여 출발하였고 이들을 마지막으로 목격한 사람은 6캠프에 남아 지원을 맡은 오델이었다.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 일순간 안개가 걷히자 오델은 에베레스트 정상 아래에서 천천히 정상을 향해 다가가는 작은 점 모양의 말로리와 어빙 일행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안개가 다시 끼면서 이들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는데, 그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조지 말로리(右)와 앤드류 어빙
 

1999년 영국 BBC가 주축이 된 원정대가 말로리의 시신을 찾는데 성공하였으나 그가 지니고 있던 카메라는 발견하지 못하여 등정여부를 밝힐 수는 없었다.
만일 추후에라도 카메라가 발견되어 정상정복의 순간을 기록한 사진이 나온다면 인류의 탐험사는 다시 쓰여 지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라도 성공적으로 완수한 등정으로 볼 수는 없으므로 힐러리와 노르가이의 업적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티에서 근무 중인 단비부대 (사진-KODEF)
 

이것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무사귀환이 단지 탐험의 결과 여부를 알리기 위해서 중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탐험도 의미가 있지만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사람의 생명이고 이를 탐험과정 중 온전히 보존하는 것이 바로 완벽한 성공의 기준점이다.
이러한 숭고한 원칙은 탐험 같은 분야뿐만 아니라 힘들고 어려운 곳에서 근무를 하여야하는 모든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명제이기도 하다.

 

                                        해외에 파견나간 국군의 무사안위를 기원한다.
 

현재 이역만리에 곳곳에 파견되어 묵묵히 맡은바 임무를 수행하는 수많은 대한민국의 군인들이 있다.
그들의 임무가 탐험이나 모험이 아니기 때문에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귀환한다고 해서 앞에 언급한 예처럼 역사에 길이 남을 영웅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임무를 수행하고 안전하게 돌아와야 할 이유는 너무나 명약관화하다.
그들은 나라와 국익을 지키기 위해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해외로 나간 소중한 이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무사귀환은 미지를 개척하고 돌아온 어떠한 탐험가들의 영웅적인 행동 못지않게 우리에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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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적이었던 대한민국 공군의 분투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최근 각종 매체를 통해 극이나 다큐멘터리가 방송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개전 초기의 참담했던 상황을 묘사하는데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북한군 전차다.
국군이 용감하게 육탄방어에 나섰지만 전차를 앞세운 북한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다.
당시에 국군이 보유하지 못한 전차는 6.25전쟁 발발 당시의 현격한 전력차이를 한 번에 알려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북한군 전차를 육탄공격 중인 국군을 묘사한 TV 드라마 (사진-MBC)
 

그런데 이처럼 전차로 대표되는 기갑전력 외에도 국군은 거의 모든 부분에서 북에 비해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엄청난 열세를 보이고 있었다.
병력으로는 1 : 2 수준이었지만 화력까지 계량화한다면 전쟁 발발 당시에 남북 간의 전력차이는 약 1 : 5 정도까지 벌어져 있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그중에서도 사실 가장 전력차이가 심했던 것은 항공전력이었다.
전차의 경우라면 비록 북한군의 T-34를 막는데 무용지물이었지만 2.36인치 로켓포나 57밀리 대전차포처럼 형식적이나마 대전차무기를 보유하였던 것에 비한다면 전쟁 발발 당시의 항공전력은 그야말로 비교불가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출격준비에 나선 북한 공군기

 
당시에 북한군은 야크(YAK)전투기 외 160여기의 작전기를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총 200여기의 군용기로 구성된 항공사단을 보유하였다.
하지만 당시 국군은 단지 L-4, L-5, T-6 훈련기 23기 만 보유하여 전투력은 전무한 상태여서 공대공전투로 적기와 맞상대할 수 없었다.
당연히 개전하자마자 북한기가 서울 상공에 나타났을 만큼 제공권은 북한군이 장악하였다.

 
                                         적 전차를 향해 육탄 돌격하는 L-5 훈련기
 

그러나 단지 공대공전투가 불가능하다고 국군은 그냥 손을 놓고만 있지는 않았다.
후방석에 정비사들이 급조폭탄을 휴대하고 있다가 눈으로 조준하여 손으로 투하하는 공대지 육탄작전을 펼치기 위해 당시 하늘의 용사들은 망설임 없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비록 이러한 육탄공격은 미미한 성과밖에 기록하지는 못하였지만 보유한 274개의 폭탄마저 개전 3일 만에 바닥이 나자 더 이상 작전을 진행 할 수도 없었다.
쉽게 극복할 수 없었던 현격한 전력차이에 하늘의 용사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 바로 1950년 6월의 모습이었다.


                                선명한 태극 마크를 붙이고 현해탄을 건너오는 최초의 F-51편대
 

그러한 국군에게 미국의 즉각적인 참전과 원조는 어둠을 밝히는 빛줄기가 되었다.
미국은 한국 공군에게 10기의 전투기를 공급하는 바우트원(Bout One) 계획을 실시하였고 이에 따라 전쟁 발발 하루 뒤인 6월 26일 이근석 대령을 비롯한 10명의 국군 조종사들이 F-51 전투기를 인수받기 위해 일본 이타즈케의 미 공군기지로 도착했다.
일본에 도착한 조종사들은 즉각 전투기 전환 훈련에 돌입했으나 악천후 등으로 인해 나흘 동안 1인당 20~30분 정도의 훈련비행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급박한 전황 소식을 접한 조종사들은 즉각 귀국을 요청하여 7월 2일, 10기로 이루어진 F-51 전투기 편대가 대구에 도착하였고 다음날부터 출격에 나서 적에 대한 공대지 작전에 투입되었다.

 
                        지난 7월 1일 제11전투비행단에서 열린 F-51 전투기 인수 재현행사
 

세계 항공전사에서 보기 힘든 극적인 광경이라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닌 순간이었다.
전투기를 다뤄 본적이 없었던 조종사들이 불과 나흘간의 급박한 훈련을 거친 후 실전에 투입되어 전과를 올린다는 것은 거의 기적과 다름없다.
그들은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기 위해 모든 위험을 무릅쓴 것이었고 그러한 분투는 국난 극복의 커다란 힘이 되었다.
한국 공군의 선구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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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둠을 밝힌 용전분투

 
 
1950년 6월 25일 새벽 5시, 해군본부로부터의 긴급출동 명령을 받은 YMS-509 경비정이 동해의 묵호항을 빠져나와 북상하였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명령을 내린 해군본부나 정장이었던 김상도 소령도 전면전 발발사실은 몰랐다.
북상하던 509정은 7시 20분경 옥계 인근 해상에서 북한군 상륙부대를 이동하던 북한군 소형 포함을 발견하고 즉시 교전을 벌였는데 이것은 6.25전쟁 최초의 남북 해군간의 교전이었다.

 
                                           YMS-509와 동급의 미 해군 소해정
 

비록 적함을 침몰시키지는 못하였으나 50여 분간의 교전 끝에 북한군 함정을 북으로 패주시켰다.
그리고 509정은 당일 오후 3시에 또 다른 북한군 상륙부대 함정들과 교전을 벌여 상륙정 1척을 격파하고 발동선 1척을 나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당시 북한은 남침과 동시에 동해안 후방에 특작부대를 상륙시켜 국군 제8사단의 배후를 단절시키는 작전을 구사하였는데 509정의 분투로 많은 차질을 빚었다.

 
                          후방으로 침투하던 북한군을 차단하는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대한민국 해군의 지략은 같은 날 서해바다에서도 빛을 발하였다.
전면전임이 확인되자 해군본부는 유일한 상륙함 LST-801 천안함을 옹진반도로 급파하였다.
원래 전면전이 발발할 경우 고립된 옹진반도에 주둔한 제17연대를 후방으로 철수시키기로 계획은 되어 있었지만 해군은 육군의 요청을 기다리지 않고 인천경비부 사령관 유해거 중령에게 명령을 즉각 하달하였다.
 

                                제17연대를 구출하기 위해 출동한 LST-801 천안함
 

이때 천안함 하나로 부족할지 모른다는 판단에 따라 경비부가 보유한 모든 소해정들과 인근의 민간 선박을 징발하여 급조된 철수 선단을 구성하는 치밀함을 해군은 발휘하였다.
그 결과 적에게 함락될 위기의 상황에서 성공적으로 해상철수한 제17연대는 즉시 국군의 예비대가 되어 전쟁 초기의 피 말리는 지연전에 투입되었고, 이후 인천상륙작전에도 참여하여 반격전의 선봉장으로 맹활약하였다.

 
                                                  옹진반도 전투 상황도
 

하지만 전쟁 초기의 대한민국 해군이 보여준 최대의 하이라이트는 남해바다에서 있었다.
전면전 발발 소식을 접한 해군본부는 당시 우리 해군이 보유한 최대 전투함인 PC-701백두산함에게 출동 명령을 내렸다.
백두산함은 변변한 전투함정이 한 척도 없음을 한탄한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이하 모든 해군 장병들이 월급을 털어 마련한 기금에다가 국민의 성금 등이 모여 어렵게 장만한 함이었다.

 
                                          하와이에서 포탑을 장착하는 PC-701함
 

사실 함이라고 이름을 붙였지만 미 해군에서 퇴역하여 해양대학의 실습선으로 활용하던 구현 선박에 3인치 포를 장착한 450톤 규모의 소형 함정이었다.
하지만 태평양을 가로질러 태극기를 게양한 백두산함이 1950년 4월 10일 모항인 진해에 입항하였을 때 국민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 만큼 한국 해군에게 귀중한 전투함이었다.
바로 이러한 한국 해군의 자랑이 조국을 구하기 위해 출동한 것이었다.

 
                                                      작전 중인 백두산함
 

진해기지를 출항한 백두산함은 25일 18시경, 급속히 남하하던 미확인 괴선박을 발견하고 추격에 나섰는데 이 괴선박이 약 600명의 무장병력을 탑승시킨 북한의 1,000톤급 수송선임을 알게 되었다.
백두산함은 유리한 위치에서 교전을 벌이고자 일단 현장에서 이탈한 후 통제부의 명령을 받아 26일 0시 10분경 다시 근접 접근하여 공격을 개시하였다.
북한군이 격렬한 저항이 있었지만 이 전투 결과 아군은 전사와 부상이 각각 2명인 피해를 입었지만 적선을 격파하여 침몰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대한해협전투 상황도
 

전사에는 이를 대한해협전투라고 표기하는데 그 의의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북한 무장선의 임무는 부산항 점거를 위해 북한군을 상륙시키기 위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만일 그렇게 되었다면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의 유일 생명선이 조기에 차단될 수도 있었던 아찔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백두산함은 그러한 절체절명의 위기로부터 대한민국을 구한 것이었다.
 

                                           전쟁 직전 촬영된 백두산함의 장병들
 

이처럼 개전 초에 압도적인 적에게 밀려 고전을 거듭하였던 지상의 상황과 달리 대한민국 해군은 서전부터 상당한 전과를 올렸고 그것은 암울했던 시기에 어둠을 밝혀준 횃불과 같았다.
비록 최근에 발생한 천안함 사태와 관련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대한민국 해군은 이처럼 자랑스러운 전통을 가진 대한민국의 보루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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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도고등학교에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지난 6월 29일은 6인의 전사자가 발생한 제2연평해전 발발 8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동안 해군주관으로 지내오던 추모식이 지난 2008년부터 정부주관 공식행사로 바뀌었고 특히 올해는 서울의 전쟁기념관에서 TV생중계 속에 성대히 개최되었다.
더불어 그동안 부대 내에 있어서 평소 국민들이 접하기 힘들었던 참수리 357호의 동일 크기의 모형이 함께 전시되어 제2연평해전의 의의와 장병들의 활약상을 쉽게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제2연평해전 8주년 행사
 

이와 관련하여 하루 전인 6월 28일, 인천 옥련동에 위치한 송도(松都)고등학교에서 작지만 상당히 의미 있는 교내 행사가 벌어졌는데, 이 학교의 72회 졸업생으로 전투 중 산화한 참수리 357호의 정장 고(故) 윤영하 소령의 추모행사였다.
그런데 이 행사는 단발적인 1회성 추모제가 아닌 제2연평해전 다음해인 2003년부터 학교에서 자체적으로 벌여오는 연례행사라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이처럼 의미 있는 교내행사를 매년 실시하고 있는 송도고등학교를 방문하여 이와 관련한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 대담 기원서 교감선생님 )

 
                                 송도고등학교에서 열린 고 윤영하 소령 추모행사
 

문)
  매년 교내 추모식을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2002년 월드컵 열기에 파묻혀 당시 여섯 명이나 전사한 제2연평해전이 너무 쉽게 잊혀져가는 것 같아 상당히 안타까웠습니다. 때문에 적어도 선배가 산화한 우리 학교의 학생만이라도 이를 기억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여 그 이듬해부터 6월 29일을 기해 추모행사를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인양되는 참수리 357정
 

문)
  외부의 참여나 지원이 있었습니까?
답)  아닙니다. 순수하게 학교가 주관하는 자체 행사였고 경우에 따라 손님들을 초대하여 행사를 치르고는 했습니다. 예를 들어 작년(2009년)에는 영하의 흉상 제막행사를 함께 하였는데 영하 부모님을 초청하였습니다.
 
문)  고 윤영하 소령에 대해 기억나는 것이 있는지요?
답)  우리학교는 사립이다 보니 영하를 가르치던 선생님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습니다. 저 또한 그렇고요. 학교 다닐 때 영하가 워낙 과묵하여 군인이 될 줄을 몰랐는데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가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제2연평해전 약 3주전에 영하가 학교를 찾아 온 적이 있었어요. 스승의 날에 출동 중이어서 찾아뵙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더군요. 그때 차 한 잔 마시고 헤어졌는데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을 몰랐습니다.

 
                                      2009년 교내에 설치된 고 윤영하 소령 흉상
 

문)
  고 윤영하 소령 때문에 학교와 해군과의 인연이 각별하다고 들었습니다.
답)  예. 우선 영하의 해군사관학교 동기 분들이 매년 우리 학교에 윤영하 장학금을 기탁하여 주고 있습니다. 참 고마운 분들입니다. 그리고 제2함대 소속의 제천함과 자매결연을 맺어 매년 방문  행사를 하고 있는데, 학생들의 안보교육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문)  올해는 6.25전쟁 6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지요?
답)  제2연평해전이나 천안함사태에서 알 수 있듯이 아직도 우리나라는 안보에서 한시도 눈을 팔 수 없는 환경입니다. 그런데도 신문보도에서 보듯이 요즘 청소년들 중 6.25전쟁의 발발일은 고사하고 어떤 전쟁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기성세대의 잘못이 아닌가도 생각됩니다. 교육을 통해 자라나는 세대들이 사실을 정확히 알게끔 더욱 노력하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우리학교는 그렇게 하고자 노력합니다.

 
                                       송도고등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 앰블램
 

고려의 도읍지였던 개성에서 1906년에 개교하여 무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송도고등학교는 6.25전쟁 중이던 1952년에 인천으로 피난하여와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그렇다보니 6.25전쟁에 대한 의미가 상당히 남다를 수밖에 없어 전쟁 발발일과 제2연평해전이 속한 6월 마지막 주를 호국영령을 기리기 위한 추모주간으로 정하여 매년 이와 관련한 각종 교내행사와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추모 행사 중의 송도고등학교 학생들
 

송도고등학교는 특히 농구부가 유명한데 이충희, 김승현, 유희형, 김동광, 정덕화, 강동희 등 한국 농구사의 기라성들이 바로 이 학교 출신이다.
하지만 유구한 역사에서 알 수 있듯 농구부보다 정, 관, 군, 학계를 빛낸 이 학교 출신의 많은 인사들이 배출되었다.
이처럼 역사가 오래된 학교이고 당연히 학교를 빛낸 수많은 졸업생들이 배출되었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그 중에서도 가장 젊은 졸업생이라 할 수 있는 고 윤영하 소령을 기리는 행사를 매년 잊지 않고 열어오고 또한 이를 교육에 적극 반영하고 있는 송도고등학교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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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해안 기록된 남침증거
 

 
흔히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38선 일대의 모든 북한군부대에 '폭풍'이라는 남침 암호가 하달되면서 04시에 일제히 포격을 개시하면서 발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모든 남침 준비를 완료한 북한군이 전면남침을 개시한 시간이 04시였고 이것은 6.25전쟁 발발의 개시 시간으로 알려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북한군이 38선 이남으로 월경하여 도발을 개시한 것을 전쟁 개시시점으로 본다면 실제로 전쟁은 그보다 1시간 앞선 03시에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새벽 4시에 북한군의 포격이 개시되면서 6.25전쟁이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왜냐하면 비록 38선 전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북한군 일부가 6월 25일 03시에 38선을 넘어 이미 남침을 개시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6.25전쟁 당시 상륙작전하면 인천상륙작전을 먼저 떠올리고 전사에 대해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통영상륙작전, 원산상륙작전 등도 생각이 날 것이다.전쟁 중 상륙작전의 대부분은 위에 언급한 예처럼 제해권을 확보한 유엔군의 주도로 이루어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막연한 상상과 달리 6.25전쟁 중 최초로 벌어진 상륙작전은 북한군이 시도 하였는데, 이것은 전쟁 개시시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북한이 주장하는 6.25전쟁 북침설이 허구임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이기도 하다.

 
                       북한군의 동해안 상륙과 강릉전투 상황도
 

1950년 6월 25일 03시 북한군 제766부대(최근 개봉한 영화  '포화 속으로' 에서 차승원이 지휘관으로 나온 부대)가 동해안의 임원진으로 그리고 제945부대(오래동안 제549부대로 알려졌었다)가 인근의 정동진으로 기습 상륙하였다. 그리고 기록을 살펴보면 북한 스스로도 이것은 성공적인 기습작전이었다고 자화자찬하고 있다.03시에 동해안에 상륙한 북한군은 연대규모의 경무장부대들로 해당 지역에 상륙한 후 현지에서 암약하던 공비 세력과 연결하여 국군을 분리하고 고립시키는 임무에 투입되었다.당시에 동해안을 담당하던 국군 제8사단은 38선 일대의 주문진에 제10연대, 강릉에는 사단사령부를 그리고 후방인 삼척에 제21연대를 배치해 놓고 있었는데 북한군이 중간에 상륙하여 제8사단의 연결을 끓고 제10연대와 사단사령부의 배후를 차단하였다. 따라서 국군 제8사단은 개전 첫날 38선을 돌파하여 남진하는 북한군 주력과 배후를 압박하던 이들 상륙부대에 의해 순식간 고립된 형국이었다.

 
                      영화 '포화 속으로'에 묘사된 북한군 제766부대
 

다행히도 국군 제8사단은 놀라운 투혼을 발휘하여 전면의 적을 막고 대관령쪽 퇴로를 확보하여 무사히 철수를 단행할 수 있었고 이것은 6.25전쟁사에 있어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거론된다.
그런데 동해안에서 벌어진 바로 이러한 숨막히는 개전 초기의 상황에서 중요한 의의를 그동안 많이 간과하였다.
우선 03시에 북한군 정규군이 동해안에 상륙하였다는 점이다.
이미 북한은 38선 일대에 포격을 날리기 이전에 그들의 정규군을 우리 후방으로 침투시켜 도발을 감행했고 그렇다면 6.25전쟁 개시시간을 03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03시에 전쟁이 벌어졌음을 기록한 남침사적비
 

이것은 또한 6.25전쟁을 지금까지도 북침이라 왜곡 선전하는 북한의 주장이 거짓임을 입증하는 증거다.
개전 당일 국군 후방으로 대규모 병력을 상륙시킨다는 자체가 벌써 북한군의 남침을 입증한다.
상륙작전은 규모의 대소 여부를 떠나서 사전에 충분한 사전준비를 마친 후에나 실시할 수 있는 군사작전이기 때문이다.
도발을 받자마자 즉각 반격하여 상대의 배후로 연대규모의 부대가 상륙을 펼친다는 자체가 우선 말이 되지 않는다.

 
         사전 준비가 필요한 상륙작전은 즉시 반격에 사용할 수 없는 군사작전이다.



비교적 소규모였던 통영상륙작전 당시의 해병대도 사전에 많은 준비를 하였다. 따라서 북한의 북침설은 개전 당일 동해안에서 벌어진 상륙작전만으로도 부인할 수 없는 거짓임이 여실히 입증된다. 1950년 6월 25일 03시 동해안에서 벌어진 북한의 기습상륙작전은 개전 시기에 대하여 한 번 정도 생각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북한의 남침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증거로 적극 활용될만한 역사적 사실이라 할 수 있다.

 
                                     제8사단 강릉전투 승전비
 

그런데 야심만만하게 후방에 상륙한 북한군 부대는 이후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하였다.비록 전쟁 발발 당일 동해안 국군 제8사단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지만 방어에 나선 민관군의 노력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 전사에 일일이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무명 사병들과 민초들의 노력이 위기를 기회로 승화시킨 주역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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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전쟁 당시 하늘에서 벌어진 아이러니



독일이 제2차 대전 말기에 등장시켜 연합국을 놀라게 한 최초의 제트전투기인 Me-262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의외로 인류 최초의 제트기인 Heinkel-178은 그리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다.
독일이 만든 Heinkel-178이 항공공학사의 기념비로 결코 손색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제2차 대전 중 관련 자료 대부분이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제2차 대전 발발직전인 1939년 8월 27일, 최초로 비행에 성공한  Heinkel-178은 베를린 기술박물관으로 옮겨져 전시되었으나 전쟁 말기에 연합군의 공습을 받아 망실되었다.


독일이 만든 최초의 제트기인 Heinkel-178

            
 
이처럼 제트전투기뿐만 아니라 제트기도 최초로 만들어내 독일은 제트기분야의 역사에 독보적인 한 페이지를 장식한 나라다.
그렇게 된 데는 새로운 분야에 대한 도전정신과 실험정신으로 가득 찬 엔지니어의 진취적인 사고방식과 이를 우대하고 적극 장려하던 독일의 장인문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기술축적이 있었기에 다른 경쟁국에 비해 독일이 제트전투기의 제식화에 먼저 성공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제트기를 만든 독일 기술력을 바탕으로 등장한 최초의 제트전투기인 Me-262

 

그런데 제트기나 제트전투기의 데뷔와 달리 최고의 제트엔진은 영국이 만들고 있었다.
제트기의 심장은 두말 할 필요 없이 제트엔진인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제트기를 먼저 만들어낸 독일보다 영국이 이 방면에서는 기술력이 앞섰다.
사실 제트엔진을 최초로 만든 것도 독일이 아니라 영국이었다.
최초의 제트전투기인 Me-262도 고질적인 엔진 문제로 골치가 아팠을 만큼 독일도 엔진만큼은 영국보다 기술적 기반이 취약 하였다.
 
                                            영국이 개발한 최초의 터보제트엔진
 

영국인 프랭크 휘틀(Frank Whittle)은 1937년 최초로 터보제트엔진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하였고  이처럼 미세하게 앞선 기술력만큼 영국이 독일보다 좋은 제트엔진을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전후 독일은 패전국이 되어 이 분야의 발전이 정체되었지만 승전국인 영국의 기술은 계속 발전하여 왔고 오늘날도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휘틀의 기술을 상업화한 영국계 롤스로이스(RR)의 제트엔진은 현재도 미국의 제널럴일렉트릭(GE), 플랫휘트니(P&W) 엔진과 더불어 최고의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군인이자 엔지니어였던 프랭크 휘틀
 

RR은 미국의 GE에 제트엔진의 핵심기술을 이전해 주었고 이를 바탕으로 GE는 J-33엔진이 제작하면서 이를 탑재한 미국 최초의 제트전투기인 F-80이 탄생할 수 있었다.
이후 J-33은 J-35, J-47로 진화를 거듭하여 F-84, F-86 같은 미국의 초기 제트전투기의 심장이 되었고 이후 이들은 6.25전쟁에서 맹활약하였다.
6.25전쟁은 제트전투기 간에 공중전이 벌어진 최초의 전장으로 항공전사에 커다란 획을 그었다.
그런데 의외지만 6.25전쟁 당시에 공산군의 제트전투기인 MIG-15도 RR의 도움 때문에 등장할 수 있었다.


6.25전쟁 당시 항공전의 라이벌이었던 F-86과 MIG-15

                               

공교롭게도 둘 다 롤스로이스의 기술을 제공받은 엔진을 장착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제2차 대전이 끝난 1946년 영국은 전쟁 당시에 나치독일을 쳐부수기 위해 한편에 서서 싸웠던 소련에게 당시에 막 개발을 마친 최신형 제트엔진인 RR Nene(Mk1)엔진을 선물하였다.
군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우호관계를 과시하기 위해 영국 정부가 행한 사건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엔진을 준다고 해도 소련의 기술력으로 이를 복제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자만심도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동체시험까지 완료하였지만 제트엔진에 대한 노하우가 부족하여 기술적 한계를 느끼던 소련에게는 천군만마가 되었고 무허가 짝퉁 클리모프(Klimov) VK-1엔진으로 탄생하였다.


                                    RR엔진의 무허가 짝퉁인 소련의 클리모프엔진


그리고 이렇게 탄생한 VK-1 엔진은 6.25전쟁 중반기에 갑자기 등장하여 유엔군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MIG-15기의 심장이 되었다.
결국 최초의 제트전투기간 공중전은 RR의 기술력을 이전받은 전투기들 사이에 벌어진 전투라고 정의할 수 있다.  
본의가 아니고 또한 그런 결과를 원한 것도 아니었겠지만 이처럼 전후 도래한 냉전시기에 첨예하게 대립한 동서구의 제트전투기의 발달에 있어 영국의 역할은 지대하였다.
한마디로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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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둠을 밝힌 용전분투
 

 
1950년 6월 25일 새벽 5시, 해군본부로부터의 긴급출동 명령을 받은 YMS-509 경비정이 동해의 묵호항을 빠져나와 북상하였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명령을 내린 해군본부나 정장이었던 김상도 소령도 전면전 발발사실은 몰랐다.
북상하던 509정은 7시 20분경 옥계 인근 해상에서 북한군 상륙부대를 이동하던 북한군 소형 포함을 발견하고 즉시 교전을 벌였는데 이것은 6.25전쟁 최초의 남북 해군간의 교전이었다.

 

YMS-509와 동급의 미 해군 소해정

                                        
 
비록 적함을 침몰시키지는 못하였으나 50여 분간의 교전 끝에 북한군 함정을 북으로 패주시켰다.
그리고 509정은 당일 오후 3시에 또 다른 북한군 상륙부대 함정들과 교전을 벌여 상륙정 1척을 격파하고 발동선 1척을 나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당시 북한은 남침과 동시에 동해안 후방에 특작부대를 상륙시켜 국군 제8사단의 배후를 단절시키는 작전을 구사하였는데 509정의 분투로 많은 차질을 빚었다.

 

후방으로 침투하던 북한군을 차단하는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대한민국 해군의 지략은 같은 날 서해바다에서도 빛을 발하였다.
전면전임이 확인되자 해군본부는 유일한 상륙함 LST-801 천안함을 옹진반도로 급파하였다.
원래 전면전이 발발할 경우 고립된 옹진반도에 주둔한 제17연대를 후방으로 철수시키기로 계획은 되어 있었지만 해군은 육군의 요청을 기다리지 않고 인천경비부 사령관 유해거 중령에게 명령을 즉각 하달하였다.
 

제17연대를 구출하기 위해 출동한 LST-801 천안함

                       
 
이때 천안함 하나로 부족할지 모른다는 판단에 따라 해군은 경비부가 보유한 모든 소해정들과 인근의 민간 선박을 징발하여 급조된 철수 선단을 구성하는 치밀함을 발휘하였다.
그 결과 적에게 함락될 위기의 상황에서 성공적으로 해상철수한 제17연대는 즉시 국군의 예비대가 되어 전쟁 초기의 피 말리는 지연전에 투입되었고, 이후 인천상륙작전에도 참여하여 반격전의 선봉장으로 맹활약하였다.

 

옹진반도 전투 상황도

                                               
 
하지만 전쟁 초기의 대한민국 해군이 보여준 최대의 하이라이트는 남해바다에서 있었다.
전면전 발발 소식을 접한 해군본부는 당시 우리 해군이 보유한 최대 전투함인 PC-701백두산함에 출동 명령을 내렸다.
백두산함은 변변한 전투함정이 한 척도 없음을 한탄한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이하 모든 해군 장병들이 월급을 털어 마련한 기금에다가 국민의 성금 등이 모여 어렵게 장만한 함이었다.

 

하와이에서 포탑을 장착하는 PC-701함

                                         
 
사실 함이라고 이름을 붙였지만 미 해군에서 퇴역하여 해양대학의 실습선으로 활용하던 구현 선박에 3인치 포를 장착한 450톤 규모의 소형 함정이었다.
하지만 태평양을 가로질러 태극기를 게양한 백두산함이 1950년 4월 10일 모항인 진해에 입항하였을 때 국민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을 만큼 한국 해군에게 귀중한 전투함이었다.
바로 이러한 한국 해군의 자랑이 조국을 구하기 위해 출동한 것이었다.

 

작전 중인 백두산함

                                                   
 
진해기지를 출항한 백두산함은 25일 18시경, 급속히 남하하던 미확인 괴선박을 발견하고 추격에 나섰는데 이 괴선박이 약 600명의 무장병력을 탑승시킨 북한의 1,000톤급 수송선임을 알게 되었다.
백두산함은 유리한 위치에서 교전을 벌이고자 일단 현장에서 이탈한 후 통제부의 명령을 받아 26일 0시 10분경 다시 근접 접근하여 공격을 개시하였다.
북한군의 격렬한 저항이 있었지만 이 전투 결과 아군은 전사와 부상이 각각 2명인 피해를 입었지만 적선을 격파하여 침몰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대한해협전투 상황도

                                                      
 
전사에는 이를 대한해협전투라고 표기하는데 그 의의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북한 무장선의 임무는 부산항 점거를 위해 북한군을 상륙시키기 위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만일 그렇게 되었다면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의 유일 생명선이 조기에 차단될 수도 있었던 아찔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백두산함은 그러한 절체절명의 위기로부터 대한민국을 구한 것이었다.

 

전쟁 직전 촬영된 백두산함의 장병들

                                         
 
이처럼 개전 초에 압도적인 적에게 밀려 고전을 거듭하였던 지상의 상황과 달리 대한민국 해군은 서전부터 상당한 전과를 올렸고 그것은 암울했던 시기에 어둠을 밝혀준 횃불과 같았다.
비록 최근에 발생한 천안함 사태와 관련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대한민국 해군은 이처럼 자랑스러운 전통을 가진 대한민국의 보루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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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연한 길을 자원한 황제
 
 

2002년 8월 13일자 미국의 금융전문지인 포브스(Forbes)에 따르면 한 인물이 2001년 6월부터 2002년 6월까지 1년간 보통사람은 꿈에도 꾸기 힘든 총 3,700만 달러에 달하는 소득을 올린 것으로 발표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정도로 고소득을 올린사람은 이미 고인이 된지 25년이 넘었던 사람이었다.

 
                                               세계적인 금융전문지인 포브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화물차 운전수로 일하며 평범한 삶을 살던 중 우연히 연예기획사 관계자의 눈에 띄어 스무 살이 되던 1955년 연예계에 데뷔하게 되었고 잘 생긴 외모와 훌륭한 가창력 그리고 탁월한 무대매너 덕분에 순식간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면서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이 젊은이는 순식간 스타가 되었다
 

그런데 연예계에서 이름을 막 휘날리며 정력적인 활동을 벌이던 1957년, 그는 국가로부터 징집영장을 받았다.
당시만 해도 미국은 징병제였고 징집을 당한이상 병역의무를 반드시 이행하여야 했다.
그런데 군 복무기간 동안 공백기는 자칫하면 인기를 먹고사는 연예인들에게 여러 가지 좋은 기회를 잃게 될 수도 있었다.

 
                                                   신체검사를 받는 모습
 

마침 이때 그의 대중적인 상품성을 알고 있던 군 당국이 군의 이미지제고를 위한 예술특별부대에 그를 배속하여 주겠다는 제안을 하여왔다.
만일 그가 이런 부대에서 근무를 한다면 계속하여 대중과 접촉할 수 있어서 인기유지에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군의 이러한 특별한 제안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그는 특별한 제안을 거부하고 여타 국민들과 똑같이 의무를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보통의 여타 다른 국민들과 차별이 되는 어떠한 대우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여느 사병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훈련받고 미군의 근무규정에 따라 병역활동을 하기를 원하였으므로 군의 특별 제안을 거부하였던 것이고 그의 뜻대로 훈련소에 입소하는 것을 시작으로 극히 평범한 군 생활을 시작하였다.

 
                                        자대 배치를 받은 서독에 도착하였을 당시
 

1958년 신병 훈련을 마치고 그가 자대배치를 받은 곳은 서독의 한 미군기지였는데, 서독은 전쟁이 막 끝난 한국과 더불어 가장 첨예하게 공산진영과 대립하던 냉전시대의 최전선이었다.
즉, 미군으로써 가장 기피지역 중 한곳에 배속을 받은 것이었다.
당시 미 육군 공문에는 '그를 우러르는 많은 청소년들이 훗날 군 생활에서도 그를 본받을 것' 이라고 기록되었다.
 

                                      서독의 제1기갑사단에서 소총병으로 근무 중
 

그의 극히 평범한 군 복무는 그를 추앙하던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병역의무의 신성함과 고귀함을 알게 해 주었다.
그에게 편안한 군 생활을 제안하는 대신 선전도구로 활용하고자 하였던 군은 오히려 어떠한 특혜도 마다않고 묵묵히 군무에 임하였던 그의 모습 때문에 역설적으로 처음 생각했던 것 이상의 커다란 선전효과를 얻게 된 셈이었다.
 

                     어깨 위의 견장을 자랑스러워하였던 그를 대중들은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런 행동과는 별개로 타고난 바람기와 인기는 어쩔 수 없었던지 서독에서 군복무 중일 때 미성년자였던 한 미소녀와 염문을 뿌려 세인들의 가십거리도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소녀는 피 끓는 젊은이의 1회성 사랑이나 지나가는 바람의 대상이 아니었고 이후 황제의 부인이 됨으로써 사랑에도 책임을 다하는(?) 멋있는 모습을 전 세계 팬들에게 보여 주었다.
이 인물이 바로 로큰롤의 황제인 엘비스 프레슬리(Elvis Aron Presley 1935~1977)다.

 
                             멋진 모습으로 군복무를 수행중인 엘비스 프레슬리
 


병역 비리사건이 터지면 대중의 사랑을 받는 연예인들이 종종 연루되어 실망시키고는 하였지만, 최근에는 위에 소개한 엘비스 프레슬리 못지않게 많은 우리의 젊은 연예인들이 군복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일부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힘들다는 병과에서 자진하여 근무하는 멋진 모습을 보여 주어 팬들을 기쁘게 만들고 있다.
부여된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고도 제대 후 계속하여 인기와 대중의 사랑을 받는 스타들이 더욱 많아지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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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티오피아의 용맹한 사자들

 
 
조금 오래전인 2007년 3월 7일, 강원도 춘천에서 뜻 깊은 행사가 열린 적이 있었다.
에티오피아(Ethiopia) 한국전 참전 기념관의 개관식이었는데, 참전 당시 에티오피아군의 활약상은 물론 현재 에티오피아의 물산 등을 상설 전시하는 복합공간이다.
의외지만 6.25전쟁에 참전한 UN군 국가의 기념관 중 이런 형식의 다목적 복합공간은 이것이 최초라고 하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만시지탄(晩時之歎)이라는 생각이 든다.

 
                                에티오피아 참전기념관 개관행사 당시
 

현재 지구상에 있는 200여 국가들 중 경제적으로 어려운 나라로 손꼽히는 곳이 에티오피아다.
따라서 기아와 빈곤 타파를 위해 많은 비정부 구호단체들이 활동을 벌이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모든 세상사가 흥망성쇠를 겪듯이 기록으로 남겨진 역사만 3,000년이 넘는 에티오피아가 처음부터 못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보다 우위에 있어 6.25전쟁 당시에는 군대를 파견하여 우리를 도와준 국가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세계 최고(最古) 교회 중 하나인 베트 지요르기스 교회 유적지
 

만세일계(萬世一係)를 자랑할 만큼 역사가 깊은 독립 국가였지만 에티오피아는 제2차 대전 직전 이탈리아의 침략으로 고초를 겪은 역사가 있었다.
당시 집권층에게 망명지를 제공하고 침략자 이탈리아군을 격퇴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영국의 영향으로 전후, 적극적인 친서방주의 정책을 취한 셀라시에(Haile Selassie 1892~1975) 황제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즉시 파병을 결정하였다.

 
                                 파병을 주도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
 

아마도 잠시나마 국권을 잃었던 쓰라린 경험 때문이었는지, 그는 동서냉전시기가 도래하자 어느 한편에 확실히 가담하여야 차후에도 국가의 주권을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전격적으로 파병이 결정되었는데, 1950년 8월 당시 에티오피아군은 황실근위를 담당하던 10개 대대밖에 없었다.
결국 이들 중에서 자원자들을 차출하여 1개 대대규모의 신편 파병부대를 창설하였다.

 
                          파병 직전 카그뉴대대를 사열하는 셀라시에 황제
 

이 부대는 카그뉴(Kagnew) 대대라고 명명되었는데, 황실근위대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였으나 사실 현대적 교리에 따른 대대급 전술훈련 경험도 없었던 전근대적인 군대였다.
하지만 파견 나온 영국군 교관의 지도하에 강도 높은 전투훈련을 받아 얼마 지나지 않아 용맹스러운 군대로 탈바꿈을 하였고, 1951년 5월 6일 파견사령관 게브레(Kebbede Guebre) 대령의 지휘 하에 부산에 도착하였다.

 
                           모자에 국기가 선명한 부산도착 직후의 모습
 

카그뉴대대는 부대정비 후 7월 11일, 가평으로 이동하여 종전 시까지 미 제7사단에 배속되어 전투에 참전하였다.
여타 UN군에 비교한다면 부대편성 및 교육훈련 등의 여러 가지 이유로 비록 참전은 늦은 편이었지만, 1951년 9월 적근산전투를 필두로 1952년 10월 김화고지전투, 1953년 5월 요크, 엉클고지전투 등에 연이어 참가하면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용맹한 아프리카 사자들인 카그뉴대대의 전투 모습
 

이들이 전투를 벌인 곳은 오늘날 에티오피아군 참전비와 최근 건립된 기념관이 있는 춘천 일대의 중동부전선 일대였는데, 고원지대 출신들답게 고지전에서 탁월한 전과를 벌여서 용맹한 아프리카의 사자들답게 한번 피탈된 고지는 반드시 탈환하는 괴력을 선보였고 종전 시까지 적에게 포로가 된 에티오피아군 병사가 한명도 없다는 무서운 신화를 창조하였다.

 
           아프리카의 용맹한 사자들은 민사작전을 벌일 때 순한양들로 돌변하였다
                       ( 에티오피아군이 설립한 고아 보호시설인 보화원 )
 

연인원 총 3,518명이 이역만리 한반도에서 발발한 전쟁에 참전하여 전사 120명, 부상 536명 등의 피해를 당한 에티오피아군은 1965년까지 순차적으로 철군하였다.
엘리트 집단인 황실근위대원이자 파병경력 때문에 병사들은 귀국하여 영웅대접을 받았으나, 1974년 멩기스투(Mengistu Haile Mariam 1937~)가 이끄는 쿠데타세력이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한 후 단지 북한과 싸우는데 이들이 자원하였다는 이유만으로 갖은 핍박을 받기도 하였다.

 
                                       전적지를 방문한 참전용사들
 

사회주의 정권의 탄압으로 탄압을 받은 6.25전쟁 참전 용사들은 수도인 아디스아바바 외곽에 한국촌(Korea Village)을 형성하여 어려운 삶을 살고 있었으나, 다행히도 최근 한국 구호단체의 참여로 참전용사 및 그 후손들에 대하여 지원이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다.
비록 늦었지만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라 생각되고 우리가 어려울 때 목숨을 주었던 그분들에게 더욱 많은 도움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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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코 작지 않았던 커다란 은혜

 
 
전투병을 파병한 16개 참전 국가를 포함하여 6.25전쟁 당시에 무려 40여 개의 나라들이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을 위해서 직간접적인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어려웠을 때 도움을 주었던 이들 국가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은 두고두고 되새기고 기억하여도 결코 모자람이 없을듯하다.
 

6.25전에서 맹활약하는 필리핀군

                             
 
이들 국가들 중에는 전투병력 및 무기는 물론이거니와 경제적으로도 가장 많은 도움을 주었던 미국과 같은 나라는 물론 의료용 알콜과 혈청 같은 특정물품을 보내주었던 쿠바 같은 생소한 나라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하나라도 아쉬웠던 당시 우리나라의 입장을 고려할 때 도움을 주었던 나라들의 경중을 일일이 따지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다.
 

우리가 많은 도움을 받은 것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를 지원한 40여 국가 중 굳이 참전 16개국을 자주 언급하는 것은 다른 가치로는 도저히 환산 할 수 없는 고귀한  인명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참전 UN군 병사들 대부분에게 극동의 신생국 코리아는 평생 듣도 보도 못한 이역만리 타국이었다.
이처럼 생소한 곳에 와서 많은 나라의 젊은이들이 귀한 생을 마감하거나 아니면 평생을 가지고 갈 부상을 당하였다.

 

많은 외국의 젊은이들이 사상당하였다.

                                 
 
이런 너무나 고마웠던 16개 참전국 중에는 룩셈부르크대공국 ( Grand Duchy of Luxembourg ) 도 있다.
흔히 베네룩스 3국이라는 단어처럼 많이 들어는 보았지만 의외로 제대로 알지는 못하는 나라가 바로 룩셈부르크인데 유럽 중부의 프랑스, 독일, 벨기에 사이에 있는 입헌군주국으로 서울시의 4배 정도 되는 크기에 약 45만의 국민이 사는 미니국가다.
 

유럽의 소국 룩셈부르크

                                   
 
룩셈부르크는 1867년의 런던조약으로 영세중립이 보장되었던 국가였다.
그러나 이웃 벨기에와 더불어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본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독일에게 점령당하여 수많은 희생자와 국토의 황폐를 초래했기 때문에 소극적인 중립을 포기하고 1948년 북대서양조약기구 NATO의 창설국이 되어 집단 안보체계를 통한 국가의 안전을 담보하는 정책 전환을 하게 되었다.
 

중립을 포기하고 집단안보 체제에 가담한다.(전쟁 당시 룩셈부르크를 점령한 독일군)

  
 
중립을 포기한 룩셈부르크는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최초 44명의 자원자들로 구성 된 소대규모의 부대를 1950년 11월 한국에 파병하였고 이후 연인원 89명의 용사들이 지구 반 바퀴 건너에서 벌어진 전쟁에 참전하였다.
워낙 작은 규모라서 단독적인 작전은 펼치지는 못하였고 미 제3사단 예하의 벨기에대대에 편입되어 휴전 후까지 전선에서 활동을 하였다.
 

6.25전쟁에 참전한 룩셈부르크소대 (사진출처-동아일보)

                
 
하지만 룩셈부르크군이 소규모라 하더라도 후방에서 편하게 작전을 펼쳤던 것은 아니었다.
전사 및 실종자 7명에 21명의 용사들이 부상당하였을 정도로 전투에 적극적으로 임하였는데 이러한 규모를 분석하면 룩셈부르크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모든 참전국들 중 총 인구 대비 참전 병력 비율 및 전사상자 비율이 1위를 하였을 만큼 대한민국에게 최선의 도움을 우리에게 주었던 국가다.

 

룩셈부르크와 그 국민들께 감사를 전한다(유럽연합군의 일원인 현재 룩셈부르크군의 멋진 모습)

 

룩셈부르크는 냉전이 끝난 현재 안보적으로 가장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서유럽에 있으면서도 2개 대대 900명의 상비군을 운영하고 있는 국가다.
유럽 주요국가들 사이에 있으면서도 워낙 나라가 작아 의외로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룩셈부르크는 한국전 당시 이처럼 귀한 피를 받쳐가며 그 어느 나라보다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룩셈부르크와 그 국민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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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구전쟁 [ 下 ]

 
 
그로부터 1주일 뒤 이번에는 장소를 엘살바도르로 옮겨 2차전이 벌어졌는데, 홈팀인 엘살바도르 국민들 뿐만 아니라 국경을 넘어서 원정 응원을 온 대규모의 온두라스 응원단의 불뿜는 응원 대결 속에 경기가 개시되었다.
치열한 접전 끝에 이번에는 홈코트의 이점을 얻은 엘살바도로가 3-0으로 승리하여 승패를 원점으로 돌려 버렸다.
 

엘살바도르에서 개최된 2차전에서 홈팀이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에 경기가 어느 정도 과열되었는지 경기를 중계하였던 온두라스 방송단이 "엘살바도르에게 죽음을~", "엘살바로르에게 신의 저주를!~" 이라는 부적절한 멘트를 쉴새없이 외쳐대었다.
마치 상대편을 타도할 원수로 간주하여 생방송에 공개적으로 욕을 하는 것과 같은 어이없는 모습이었다.
 

생방송 중에 상대편을 노골적으로 욕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렇듯 과열된 경기와 관중들의 적대감으로 가득찼던 경기가 끝난 후, 관중석에서는 흥분한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 관중 간에 집단 난투극이 벌어졌다.
원정을 와서 상대적으로 소수였던 온두라스의 응원단은 일방적으로 집단 린치를 당하여 피투성이가 된 상태로 국경 밖으로 추방당하는 폭력사태가 일어났다.
소식이 온두라스에 전해지자 온두라스 전역에선 거주하고 있던 엘살바도르인에 대한 무차별적 보복 테러행위가 발생하였다.
 

경기 후 엄청난 보복 테러가 발생하였다.

 

그동안 불편하였던 관계에 있다가 축구경기로 감정대립이 격해진 이 두 국가는 6월 16일 상호간에통상교역 금지를 단행하고, 이에 대하여 6월 18일 엘살바도르는 세계인권위원회에 온두라스를 제소하여 버리면서 더욱 격화되었다.
결국 6월 23일 양국은 단교를 단행하였다.
그야말로 다혈질의 라틴아메리카 국민들답게 순식간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양국간의 관계는 순식간에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요즘은 홈앤드어웨이 ( Home and Away ) 방식으로 축구경기가 벌어질 때 양편의 승패가 동일하면 원정 경기에서 다득점한 팀이 최종 승리한 것으로 판정하는데, 당시에는 재경기를 벌여야 했다.
승패가 1승 1패로 동일하여 이미 축구를 넘어 폭력과 외교적 마찰을 불러왔을 만큼 감정의 골이 깊게 파인 양국간의 재경기가 확정되자 국제축구연맹은 골치가 아플 수밖에 없었다.
결국 세 번째 경기는 제3국인 멕시코에서 벌이기로 결정되었다.
 

3차전은 육박전으로 변질되었다.


 
단교 직후인 6월 27일, 제3의 장소인 멕시코시티에서 벌어진 최종전은 양측을 응원하는 관중들보다 삼엄히 경비에 나선 멕시코 경찰들이 더 많았던 경기로 기록되었는데, 경기내용은 안 봐도 비디오인 것처럼 운동이 아닌 집단 격투기같은 형태로 진행되어 말그대로 선수들이 피를 흘리는 혈전으로 비화되었다.
결국 연장까지 가는 치열한 접전 끝에  3-2로 엘살바도르가 승리를 거두어 결말을 보았다.

 

엘살바도르는 선전포고와 함께 전쟁을 개시하였다

 

그런데 이런 경기 결과는 양국 간의 감정을 풀기는 커녕 더욱 악화시켜 계속되는 외교적 비난과 자국에 있는 상대국 국민들에 대한 테러로 이어졌다.
특히 온두라스 정부의 방관 하에 상대적으로 온두라스에 자국 국민이 많았던 엘살바도르인들에 대한 피해가 늘어났다.
그러자 분노한 엘살바도르는 7월 13일 새벽, 온두라스에 선전포고 후 포병부대의 포격을 시작으로 전쟁을 개시하였다.


온두라스는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결국 패전에 이르렀다

 
 
엘살바도르군의 주력이 온두라스 동서 요충지인 엘포이와 아마킬로를 함락시키고 공군은 온두라스의 수도 테구시갈파와 여러 도시를 폭격하였다.
기습을 받은 온두라스는 반격을 하였지만 초전의 충격을 극복하지 못하여 2천 여 명이 넘는 전사자를 내며 치욕적인 패배를 거듭하였다.
결국 이를 방관할 수 없던 미국 주도의 미주기구(OAS)의 중재로 온두라스는 사실상 패전을 당한 상태로 휴전에 이르게 되어 100시간만에 전쟁이 종료되었다.
 

축구전쟁 당시의 온두라스 공군 F4U

 

이 두 국가 간의 앙금은 오래 동안 계속되다가 1980년 10월 페루의 수도인 리마에서 벌어진 평화조약으로 간신히 마무리되었다.
물론 이런 사례는 극히 희귀한 사례고 재발되어서도 곤란하다.
그런데 그동안 뉴스를 보면 폭력사태를 우려하여 종종 무관중 경기가 열리는 등, 세계 최고의 인기 스포츠인 축구는 여타 경기종목과 달리 스포츠 이상을 뛰어넘는 그 무언가가 분명히 있는 것 같다.
 

정해진 규칙을 준수하고 상대를 존중할 때 스포츠는 가치가 있다.

 

이러한 축구 이상의 그 무엇이 우리의 자랑스러운 응원문화처럼 아름답게 표현되면 다행인데, 전쟁으로 비화한 위의 사례같이 변질된다면 스포츠의 존재 이유가 없어질 것 같다.
축구에서의 전쟁은 정해진 규칙에 따라 정정당당하게 그라운드에서만 펼쳐지고 상대방을 존중할 때만 멋있다.
이번 2010년 월드컵에서는 멋진 축구전쟁만 있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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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구전쟁 [上]


 
 
2010년은 4년마다 열리는 지구촌의 대제전인 월드컵(FIFA World Cup)의 해로 이번 제19회 대회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6월 11일 개최될 예정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의 개최는 경합에 의해 결정되었다기보다는 사상 최초로 아프리카대륙에서, 그것도 한때 흑백 갈등의 상징이었던 비극의 땅에서 세계적 행사를 개최함으로써 평화를 어필하려는 국제축구연맹(FIFA)의 의도에 따라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금번 월드컵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그런데 평화의 제전이라는 모토와는 전혀 동떨어진 사건이 월드컵의 역사에 있었다.
그것도 모든 나쁜 것들 중의 최악이라 할 수 있는 전쟁이 바로 월드컵 때문에 벌어진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니 당대의 기준으로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는데,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도 아닌 불과 한 세대 전의 이야기로 흔히 축구전쟁(Soccer War)로 통칭한다.  

월드컵과 관련하여 월드컵 역사에 있어 유명한, 하지만 창피한 사건이기도 했던 축구전쟁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전쟁의 포연속에서도 열리는 것이 축구경기이지만 어처구니없게 축구가 전쟁을 촉발시킨 역사가 있었다.


 
한 세기 전의 영국이나 현재의 미국 정도가 아니면 대양을 건너가서 외국과 전쟁을 벌일 나라는 사실 없다고 보아야 한다.
때문에 대부분 국가 간의 충돌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나라 사이에서 발생한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고 역사적으로 보면 대부분 국경을 접하고 있는 나라간의 사이가 좋았던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반대로 멀리 떨어져 있는 국가들끼리는 사이가 나쁠 일도 없고, 혹시 사이가 나빠진다하여도 전쟁까지 벌어지기는 사실 힘들다.
예를 들어 쿠바가 한때 우리나라의 적성국이었지만 적대국이라 하기에 곤란하였던 이유도 사실 너무 많이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전쟁은 인접국 사이에서 벌어진다.

 

우리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고만고만한 나라들이 몰려있는 중미(Central America)의 경우만 해도 역사적, 인종적, 언어적, 종교적, 문화적으로 많은 공통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웃간의 사이가 좋지 않은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그 중에서 비슷한 시기에 독립한 국가들로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엘살바도르온두라 사이에서 전쟁이 발발하였던 적이 있었는데, 그 직접적인 원인은 어처구니없게도 축구 때문이었다.
축구전쟁이라는 명칭처럼 축구가 양국간 전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기는 하였지만, 이면에는 전쟁이 발발할 수 밖에 없었던 내재적 요인이 축적되어 폭발할 순간만 기다리고 있었던 상태였다.
마치 호시탐탐 전쟁을 개시할 구실만 찾고있다가 사라예보의 총소리로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국경을 서로 맞대고 있는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 모두 독립 이후 계속해서 반복된 정변으로 해가 뜨고 질 정도로 정부가 안정되지 못한 전형적인 중미 국가들이었다.
여담으로 중미에서 정치적으로 안정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는 나라라면 코스타리카 정도가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이 지역은 정치적 안정을 찾아보기가 상당히 힘들다. 
그런데 일본의 통일을 이룬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군부가 군부통치하던 아르헨티나가 내부의 불만을 외부로 표출하여 무마하기 위해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켰던 것처럼, 1960년대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의 정부 모두는 국가 이익을 위해 타국의 이익을 침해하는 정책을 용인하고는 하였다.

많이 닮은 엘살바도르(좌)와 온두라스 국기

 
 
20세기 초부터 약 30만 명의 엘살바도르 국민들이 국경을 넘어 온두라스(인구는 양국이 얼추 비슷한데 국토는 온두라스가 8배 정도 크다)로 이주하였는데 이들이 온두라스의 경제권을 급속히 장악하고 사회의 상층부를 이루게 되었지만 온두라스 국민들에게는 배타적인 모습을 보여 왔다.
그러자 1969년 온두라스정부가 새로이 농지개혁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눈에 가시같던 엘살바도르인 수만 명을 국외로 추방하자 두 나라 사이의 감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두 나라 관계가 악화되던중 월드컵예선전이 열렸다.(1970년 멕시코월드컵 포스터)


 
바로 이런 와중에 1970년 제9회 멕시코월드컵 중미예선에서 두 나라가 맞서게 되었다. 홈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치루어진 예선전이 벌어져 온두라스에서 1969년 6월 8일 경기가 먼저 열렸는데, 이 경기에서는 일방적으로 응원을 받은 홈팀 온두라스가 1-0으로 승리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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