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ust 의 軍史世界'에 해당되는 글 141건

  1. 2010.05.11 냉전의 시작을 알린 소련 전차 (2)
  2. 2010.05.03 공포는 무지(無知)에서 온다 (2)
  3. 2010.04.27 시련에도, 해군 청해부대는 간다.
  4. 2010.03.25 완전 소중한, 군수지원부대 (2)
  5. 2010.03.19 야전식량의 후손, '햄버거'
  6. 2010.03.16 미 해/공군, 맞수의 진면목을 보이다.
  7. 2010.03.12 미 해,공군 제2라운드입니다. 땡! (제트기 경쟁) (1)
  8. 2010.03.10 미 육,해군은 오랜 라이벌
  9. 2010.03.05 군병원의 민간 개방에 대한 작은 생각
  10. 2010.03.02 '악마의 유산' 올림픽 성화 (1)
  11. 2010.02.25 전설의 바이애슬론 용사들
  12. 2010.02.23 김연아 선수와 브라이언 오서 코치 그리고 금메달 (2)
  13. 2010.02.19 스위스가 무장중립국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4)
  14. 2010.02.17 마지노선에 대한 잘못된 선입관 (5)
  15. 2010.02.12 무기의 국적이 무슨 필요...이기면 장땡
  16. 2010.02.09 박격포에 대한 재발견 (4)
  17. 2010.01.20 베를린 장벽은 인과응보 (1)
  18. 2010.01.15 새로운 시도 F-35 의 인생역정
  19. 2009.12.31 경인년, 새해에는 멋지게 비상하시길...
  20. 2009.12.28 불침(不沈)의 상징이 된 이름 (1)
  21. 2009.12.24 북풍한설 속의 크리스마스 이브 (2)
  22. 2009.12.22 크리스마스 공수작전 (1)
  23. 2009.12.18 1944년의 크리스마스 (4)
  24. 2009.12.16 전선에 울려 퍼진 크리스마스 캐럴 (2)
  25. 2009.12.14 강력해진 테러 무기 EFP
  26. 2009.12.10 핵전쟁의 공포에서 탄생한 인터넷 (2)
  27. 2009.12.09 왜 ? 예비군복만 입으면 ...
  28. 2009.12.04 군인도 때로는 멋있고 싶다.! (2)
  29. 2009.11.30 전쟁에서 탄생한 명품 바바리코트 (2)
  30. 2009.11.24 학살의 표적이 된 화려한 군복 (1)



                     냉전의 시작을 알린 전차
 


 1945년 5월 7일, 프랑스 랭스(Rheims)에 있는 연합군사령부에서 독일의 항복조인식이 열렸다.
하지만 소련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독일을 겁박하여 다음날 베를린에서 그들의 주도 하에 별도의 항복조인식을 실시하였다.
이처럼 전쟁의 끝을 상징하는 행사는 새로운 대립과 갈등의 시작을 알리는 선전의 장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바로 냉전(Cold War)의 시작이었다.

 

전날 미-영 주도하에 벌어진 항복조인식에 반발한 소련은 1945년 5월8일 별도의 행사를 가졌다.

 

그리고 1945년 9월, 패전국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서 연합군의 전승기념 퍼레이드가 벌어졌다.
명목상으로는 승리를 자축하는 연합국들의 합동행사였지만 베를린을 점령한 소련군의 축제에 서방측 연합군 관계자가 옵서버로 참관한 것과 다름없었다.
비록 겉으로는 화기애애하였지만, 행사에 참가한 군의 고위 책임자들은 앞으로 서방측과 소련은 한 배를 탈 수 없는 상대임을 잘 알고 있었다.


승리 직후 함께 행진하는 미국과 소련의 병사들

 

사실 전쟁 내내 소련군과 칼을 섞었던 것은 독일이었으므로, 서방측과 소련은 군사적으로 낯선 상대였다.
따라서 이번 퍼레이드는 소련군의 위용을 미영의 관계자들이 가까이서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던 서방측 참관단은 브란덴부르크문을 지나 행진하던 소련의 전차대열을 보고 경악하였다.
사전에 정보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최신형 전차가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 전차의 모습을 보고 경악하였다.

 
 
현대 소련전차의 어머니라고도 불려진 JS-3(또는 IS-3) 중(重)전차가 세상에 선보인 것이었다.
IS는 스탈린의 이름(Iosif Stalin)을 딴 것인데, 때문에 흔히 소련의 IS중전차를 스탈린전차라고 부른다.
서방측 관계자들은 당시 서방측 전차들이 흉내 낼 수조차 없을 만큼 탁월한 JS-3의 외형만으로도 압도당하고 있었다.

 

외형에서부터 IS-3는 탁월하였다.



JS-3는 아름다운 곡선형태의 터렛(포탑)과 조종사가 위치하는 동체의 전면장갑을 V자 형태로 제작하여 피탄 면적을 최소화하였다.
더구나 최신 장갑형태인 공간장갑을 사용하여 방어력을 배가하였다.
이러한 장갑방식은 현대 전차들의 대부분이 기초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구조인데, 이것은 다시 말해 당대 기술수준을 뛰어넘는 구조였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런 방어에 적합한 구조는 1940년대 기술로 구현하기 힘든 것이었다.


 
당시에도 이런 구조가 상당히 뛰어난 형태임은 다들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이렇게 전차를 제작하는 것은 보통의 기술력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 전차를 보자마자 경악하였던 것이다.
JS-3는 장갑능력 뿐만 아니라 122mm 43구경포를 장비한 화력도 감히 비교상대가 없을 정도였다.
그 만큼 소련은 기술적으로 매우 진보한 이 중전차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다.

 

최신 전차에 대한 소련의 자부심은 하늘을 찔렀다.


 
JS-3는 기존에 사용하던 JS-2를 개량하여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말, 체르야빈스크(Chelyabinsk)에 있는 제100공장에서 생산을 시작하였다.
제2차 대전 참전기록이 없이 전후 행사에서 처음으로 목격되었던 이유에 대하여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굳이 다 이긴 전쟁에 투입하여 장차 대립할 미국에게 사전에 신기술을 누출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 정설로 굳어져 있다.

 

전쟁 전 트랙터를 생산하던 체르야빈스크 제100공장


 
소련에 명품 T-34중형(中型)전차가 있었음에도, 자신들이 원조한 전차로 전쟁을 치렀다고 거만하게 생각하고 있던 미국은 이 전차의 등장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으며 차세대 전차 개발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리고 JS-3는 소련의 중전차 시리즈 프로젝트의 효시인 T-10의 원조가 되었다.
한마디로 그날의 놀라운 등장은 동서냉전을 예고하는 상징적인 모습이었다.

 

공여 받은 미제 M-3전차로 전투를 하는 소련군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소련의 전차개발 사상이 중전차와 중형전차를 함께 제식화하여 기갑전력을 구성하였던 기존방식을 제2차 대전 후 폐기하고 T-54/55로 대표되는 중형전차 정책으로만 진행되면서 IS-3로 대표되는 소련의 중전차 개발 프로젝트는 중단되었다.
아마도 당시 서방측 전차가 소련 측 전차에 절대열세 때문에 굳이 중전차개발에까지 자원을 투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냉전 시기 소련을 대표한 T형 전차


 
사실 미국이 소련을 능가하는 전차를 개발하여 제식화한 것은 1980년부터 본격 배치된  M-1전차이후부터다.
이것은 T시리즈로 대변되는 소련의 전차를 월등히 능가하는 전차를 만드는데 그만큼 오랜 기간이 걸렸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실, 냉전기간 동안 미국을 포함한 서방측 스스로도 독일제 레오파드(Leopard)를 최고의 전차로 평가하였을 정도였다.

 

IS-3이 처음 등장한 1945년 9월의 행사는 냉전의 시작을 알리는 자리였다.


 
 혹자는 중동전 때 이스라엘이 사용하던 미제 전차가 아랍 국가들이 보유한 소련제 T시리즈 전차에 일방적으로 승리를 거두지 않았냐고 반문 할지 모르겠지만, 전차성능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사실 전술 및 훈련의 차이였다.
비록 IS-3는 소련의 정책 전환으로 전차개발사에 아주 잠시만 등장하는 전차가 되었지만 냉전의 개막을 알리는 무시무시한 발자국을 역사에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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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포는 무지(無知)에서 온다

 
 
냉전이 한창이던 1976년 9월 6일, 극동 소련의 프리모스키 크라이(Primorsky Krai)에 위치한 추구예프카(Chuguyevka)공군기지에서 이륙한 소련 제11항공군 소속의 전투기 1기가 갑자기 연해주를 벗어나 일본열도 북부의 홋카이도(北海島)에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모습이 정밀하다고 소문난 일본의 방공망에 포착되었다.

 

일본 레이더에 적성국 전투기의 접근이 감지되었다.

 

빠른 속도로 바다를 건너 일본 영공에 다가온 정체불명의 소련전투기를 요격하기 위해 일본항공자위대 소속의 F-4EJ 편대가 출격하였다.
비록 적대행위를 하지는 않아 격추는 하지 않았지만 엄청난 속도를 자랑하는 소련전투기는 일본 편대를 유유히 따돌려 일본을 경악하게 만든 후 홋카이도(北海島)의 하코다테(函館) 비행장에 비상착륙하였다.

 

하코다테기지에 비상 착륙한 소련전투기


 
얼마 후 착륙한 전투기에 다가온 일본 관계자들에게 전투기에서 내린 조종사 벨렌코 ( Viktor Belenko ) 중령은 자신을 미국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며 정치적 망명의사를 명확히 하였다.
이 사건은 당시 서방세계를 발칵 뒤집고 소련에게는 당혹감을 안겨주었는데, 그 이유는 망명 희망자가 몰고 온 비행기 때문이었다.
그 전투기는 NATO코드명으로 박쥐여우(Foxbat)라고 불리던 MiG-25였다.

 

망명 조종사 벨렌코의 모습

 

MiG-25는 종종 고고도로 서유럽 영공으로 날아와 휘젖고 다니고는 하는데 서방측은 이를 막을 마땅한 방법이 없어 쩔쩔매고 있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다.
특히 1970년대 중동의 하늘을 주름잡던 이스라엘 공군이 이집트와 시리아에 임대된 MiG-25가 이스라엘 영공을 가로지르며 정찰활동을 하여도 격추시키지 못하였을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자랑하고 있던 중이었다.

 

냉전시대 서방은 MiG-25에 대해 공포를 느끼고 있던 중이었다.


 
마하3을 넘나드는 속도를 가진 것으로 알려진 소련의 이 최신전투기에 대해서 당시 서방측은 엄청난 공포를 가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소련의 천하무적 비밀병기였는데, 생각지도 않은 망명자 덕분에 미국은 눈에 가시같은 소련의 비밀병기를 샅샅이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당연히 전 세계 언론의 이목은 일본의 변방인 홋카이도에 쏠릴 수 밖에 없었다.

 

불시착한 MiG-25 주위에 몰려든 조사요원들


 
소련은 기체의 즉각 반환을 요구하였지만 미국은 결코 그럴 생각이 없었다.
후방으로 MiG-25를 이송시켜 철저하게 분해하여 원없이 검사한 후 11월 15일 생색을 내고 돌려주었다.
그런데 당시 검사결과가 공표된 바는 없지만 세월이 흘러 드러난 정보에 따르면 당시 MiG-25를 검사한 후 가장 놀랐던 점은 이 전투기에 대해서 서방측 스스로가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후방에서 조사하기 위해 C-5 수송기에 탑재하는 모습


 
일설에는 미국 군부에서 MiG-25의 성능을 이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의회로부터 예산을 많이 따내기 위하여 고의로 정보를 은폐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어쨌든 검사 결과 MiG-25는 고고도에서 속도가 빠르다는 것만 제외하고 그리 훌륭한 전투기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동안 정확한 정보도 없이 단지 소련 측에서 흘러나온 선전에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였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MiG-25는 무지가 공포를 유발하였던 대표적인 물증이 되었다.


 
결국 무지(無知)하기 때문에 필요 이상의 공포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었고, 그렇게 된 이유 중에는 6.25전쟁에서 혜성처럼 등장하여 MiG-15에 호되게 당한 쓰라린 경험도 크게 한 몫 하였다.
사실 세상을 살 때 많이 그리고 정확히 알고 있으면 두려운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모르기 때문에 두려운 것은 군사 뿐만 아니라 인생사도 그런 것 같다.
그래서 공부하고 경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고 그것은 국방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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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려운 시기에도 묵묵하게
 

 
천안함사건과 이와 관련된 금양98호의 침몰 그리고 링스헬기의 추락이 연이어 벌어진 2010년은 대한민국 해군사에 있어 두 번째되는 시련의 시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39명이 전사한 당포함 피격사건과 여객선 한일호가 충남함과 충돌하여 94명의 민간인이 사망하는 일이 있었던 1967년의 사건 다음이라 할 만큼 천안함 사건은 크나 큰 시련임에 틀림이 없다.

 

천안함사건은 크나 큰 시련임에 틀림없다.


 
워낙에 천안함 사건이 위중한 관계로 제대로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이처럼 어려운 시기임에도 대한민국 해군은 여전히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어수선하였던 지난 4월 2일, 해군작전사령부 부산기지에서는 청해부대 4진이 소말리아 작전지역으로 예정대로 출항하였고 항해 끝에 21일에는 현지에서 임무를 마친 3진과 부대 교대 후 임무에 투입된 일이 있었다.

 

지난 4월 2일 출항하는 청해부대 4진 강감찬함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청해부대는 소말리아 인근 해상에서 암약하는 해적들로부터 한국선박들을 비롯한 민간선박을 보호하기 위해 창설된 부대인데 특히 대한민국 국군의 해외 파견역사상 처음으로 해군 단독으로 임무에 투입되고 있으며 부대구성에도 상당히 특색이 있다.

 

현지에 도착하여 적응훈련에 돌입한 청해부대의 모습


 
청해부대는 최신예 한국형 구축함에 대잠헬기 슈퍼링스 1기와 30여명의 UDT/SEAL 특수전요원들로 부대가 구성되다보니 함 자체가 바로 부대라 할 수 있다. 그렇다보니 일정기간 현지에서 근무 후 부대전체를 교체하는 형식으로 임무를 계속 이어나가고 있다. 지난 2009년 3월 제1진이 작전에 투입된 이후 이번에 파견된 부대는 제4진으로 4,500톤급 구축함인 DDH-979 강감찬함이 파견되었다.

 

청해부대 4진에 포함된 해군 특수전요원들


 
더구나 이번에는 아덴만과 소말리아 동부 해상에서 대해적 작전을 전담하기 위해 2009년 1월 1일 연합해군사령부 예하에 창설된 다국적군 부대인 CTF-151을 대한민국 해군의 이범림 준장이 21일부터 8월31일까지 지휘하게 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CTF-151의 지휘관은 파견국가 순번대로 돌아가며 담당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우리나라의 차례인 것이다.

 

아덴만에서 작전을 펼치는 CTF-151의 다국적 전투함들


 
이범림 준장은 강감찬함을 기함으로 하여 참가국에서 파견된 21명의 다국적군 참모단의 보좌를 받으며 CTF-151을 지휘, 통제할 예정으로 알려져 있다.
지휘가 경쟁은 아니지만 여러 나라 해군 지휘관과 자연스럽게 비교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므로 한국해군의 역량을 세계에 알릴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 주기를 바란다.

 

맡은바 임무에 최선을 다하여 주기를 기대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지금 대한민국 해군은 초유의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책임있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대한민국의 국격을 높이기 위해 맡은바 임무를 다하려 애쓰고 있다. 어려움 속에서도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하는 해군의 노력에 격려의 박수를 보내며 안전하고 무사히 임무를 수행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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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게 너무나 중요한


사람이 살아가기 위한 3대 필수요건이 의식주(衣食住) 임은 모두 알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물론 모두가 중요한 요소이지만 그중에서 식(食)이 제일 중요하다는데 이론의 여지는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방한복을 입고 극지정복에 나선 용감한 탐험대라도 항온동물인 사람이 체온을 유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영양분이 공급되지 않는다면(쉬운 말로 먹을 것이 떨어진다면) 탐사를 포기하고 조난신고를 하여야 합니다. 



인류가 등장한 이래 먹는 것은 가장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이점은 군이라 해서 절대 예외는 아닙니다. 물론 먹을 것이 풍부하더라도 총탄이 다 떨어졌으면 이미 패전한 전쟁이지만, 그렇다고 먹지 않고 병사들에게 싸우라고 한다면 과연 얼마나 전투력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따라서 적을 외부와 고립시킨 후 굶주림에 지쳐 스스로 항복하게끔 하는 것은 유사 이래 보편적인 전술이었고, 당연히 먹는 것을 포함한 군수지원은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인 요인이었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군인도 먹어야 싸울 수 있습니다.


 무적의 나폴레옹 군대가 모스크바를 점령하였지만 초토화 작전을 펼쳤던 러시아에게 결국 무릎을 꿇고 후퇴하였던 이유는 현지조달을 원칙으로 삼았던 군수지원 시스템의 붕괴 때문이었습니다. 광활한 러시아 대지의 한겨울 혹한도 무서웠지만 생각과 달리 점령지에서 먹을 것을 구할 수 없고 후방에서 식량 공급도 이뤄지지 않자 그들은 군화를 씹으면서 후퇴할 수 밖에 없었었습니다.



초토화 작전에 휘말려 비참한 말로를 맞은 나폴레옹 원정군


 150여년 후 독소전 당시 스탈린그라드에서 포위되었던 독일 제6군의 병사가 가족에게 보냈던 편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어머니 창피한 이야기지만 너무 배가 고픕니다. 먹을 것을 보내주세요..(중략)..어머니 저는 살아서 돌아 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히틀러의 후퇴금지명령과 군수지원을 장담한 괴링의 허언으로 말미암아 적진에 고립된 9만여 독일군들이 굶주림에 지쳐 항복하였는데, 전쟁 후 집으로 살아서 돌아온 병사는 고작 6천여 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패전한 독일군 포로


  반면 6.25전쟁에서 미 해병1사단이 장진호전투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부대원들의 강철 같은 신념에 확실한 군수지원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미 해병대는 비록 압도적인 적의 공세에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든든한 지원을 발판삼아 그들을 포위하였던 중공군들에게 몇 배 이상의 출혈을 강요하며 철수에 성공하여 이후 중공군의 재편에 많은 시간이 들도록 만들만큼 엄청난 타격을 입혔습니다.

 

고립된 해병대를 격려하기 위해 적진까지 날아온 맥아더

 
당시에 중공군은 약 5배의 병력을 동원하여 미 해병 1사단의 철수로를 2중, 3중으로 포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후퇴하고있던 미군과 달리 후속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스스로 무너진 경우가 많았습니다. 영하 30도의 매서운 혹한은 후퇴하는 미군에게도 곤혹스러웠지만, 여기에 더해 식량 보급마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던 중공군에게는 제대로 전투도 못해보고 스스로 무너지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장진호 전투에서 포로가 된 중공군


지금까지 먹는 것을 예로들어 설명하였지만 전시나 평시에 전면에 나서지 않고도 티(?)나지 않게 힘쓰는 부대가 바로 군수지원부대입니다. 흔히 전사를 보면 전투부대의 찬란한 전과가 주로 나열되지만 사실 이들 못지않게 중요하면서도 승리를 위해 뒤에서 묵묵히 힘을 보태는 부대가 바로 군수지원부대이고 이들의 노고 없이 승리는 이뤄질 수 없습니다.

      

묵묵히 모두를 위해 애쓰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사실 군수지원부대는 제대로 잘 돌아가고 있을 경우에는 아무도 관심가지지 않고 당연하게 생각만 하다가 막상 조금의 실수라도 있는 경우에는 비난이란 비난은 다 들을 수 밖에 없는 부대입니다. 그런데 군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도 군수지원부대처럼 잘 드러나지 않지만 묵묵히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여주시는 분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의 군과 사회를 지탱하여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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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 기마부대 야전식량의 후손 『햄버거』
 
 
원래 초원지대는 기후조건이 농사에 부적합하여 가축을 방목하고 여기서 얻은 고기와 부산물을 주식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발흥한 국가답게 13세기 몽골이 정복전쟁에 나섰을 때 즐겨먹었던 음식도 대부분 고기였는데 그중에서 날고기는 선봉에서 정복전쟁을 이끈 몽골군 기마부대의 주요 식량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고기를 익혀 먹기에 시간이 부족하였을 만큼 정복 전쟁에만 매달렸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재현 행사에 등장한 몽골군 기마대

                                

그런데 아무리 고기를 즐겨먹는 민족이라 하더라도 날고기는 상당히 질겨서 그냥 먹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당시 몽골 기마부대는 날고기를 말안장에 깔고 다녀 부드럽게 만든 다음 잘게 썰어서 먹고는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휴대하기 간편한 몽골 기마부대의 최고 야전식량이었습니다.  이런 요리를 본 유럽인들은 이것을 타타르스테이크(Tartar Steak)라고 불렀습니다.

 

타타르스테이크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타타르스테이크는 몽골의 장기간 지배를 받은 러시아, 헝가리 등을 중심으로 현지인들이 좋아하는 각종 야채를 곁들여 함께 먹는 별미음식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시간이 흘러 이지역과 교역을 하던 독일 함부르크 지역의 한 상인이 이 요리법을 독일에 소개하였는데, 막상 날로 고기를 먹기가 역겹자 이를 익혀먹기 시작하면서 다시 한 번 변신이 이루어졌습니다.

 

고기를 날로 먹는 것은 인류의 오래된 문화지만 섭취하고 소화하는데 그리 편리하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음식이 햄버그스테이크(이른바 함박스테이크)라고도 부르는 함부르크스테이크(Hamburg Steak)인데, 어느덧 세계인이 즐겨 먹는 음식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세월이 흐르고 환경이 바뀌면서 현지인의 입맛에 맞게 변화한 몽골의 날고기 음식은 20세기에 들어 또다시 커다란 변신을 거치게 되었습니다.

 

함부르크스테이크



1904년 미국의 세인트루이스만국박람회(Expo)에서 몰려드는 관람객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즉시 요리하여 공급하는데 애로를 겪던 무명의 한 요리사가 함부르크스테이크를 이용한 즉석음식을 만들어 팔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함부르크스테이크를 작게 만들어서(이후 패티 Patty 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빵 속에 야채와 함께 넣어서 음식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공중의 히트를 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햄버거는 필요에 의해 탄생한 식품입니다.



이렇게 탄생한 간편 음식이 바로 햄버거(Hamburger)입니다. 오늘날 콜라와 더불어 미국을 대표하는 음식문화인 햄버거는 바로 몽골 기마부대의 전투식량에서 유래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변화를 거쳐 탄생한 음식답게 햄버거는 이후 종교나 문화적인 차이에 따라 패티를 달리하는 방법 등으로 계속 진화를 거듭하면서 어느덧 미국을 떠나 햄버거는 전 세계인이 즐겨먹는 음식이 되었습니다.

 

음식만 놓고 본다면 바쁜 현대인들은 매일 전쟁을 치르는 것 같습니다.



최근 건강을 먼저 생각하는 웰빙(Wellbeing)바람이 불면서 대표적인 정크푸드(Junk Food)로 낙인찍히기도 합니다만, 만들기 쉽고 먹기 간편하다는 장점 때문에 어느덧 바쁜 현대인들의 대표적인 한 끼 식사가 되었습니다. 단지 먹는 것만 놓고 본다면 종종 햄버거를 손에 들고 일하는 현대인들은 고기를 날로 먹으며 싸우던 전쟁터의 몽골 기마대 만큼 치열한 삶을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삶이 바로 전쟁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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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의 라이벌[ 3 ] 경쟁자, 하지만 사랑하는 전우

 
                                                        누가 최강인가 ?
 
월남전의 교훈으로 미국은 다기능 다목적 전투기보다 뛰어난 기동력으로 공대공전투에서 적을 완벽하게 제압할 수 있는 차세대 초강력 전투기를 개발하게 되었고 공군과 해군이 각각 별도의 프로젝트를 진행하였습니다. 그 결과 현재도 최강 전투기들로 인정받는 두 놈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등장합니다.
 
   
                                               공군 F-15 Eagle
 

공군은 최강의 기동능력과 공대공 능력을 갖추었다고 자화자찬하고 대외적으로도 최고의 전투기로 인정받는 F-15 Eagle을, 해군은 장거리 요격능력으로 더 이상 따라 올 수 없다고 자부하는 F-14 Tomcat을 개발하여 제식화하였습니다. 아마도 P-51 과 F4U 이후 최강의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해군 F-14 Tomcat
 

F-15는 실전에서 피격추율 0퍼센트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가지고 있을 만큼 그 성능이 입증된 당대 최강의 파이터로 계속적인 진화를 거듭하며 여러나라에서 아직도 최고의 전투기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반면 특징적인 가변익 형태를 가진 F-14는 이란에게 소수가 공급된 적이 있었지만 주로 미 해군만 사용되었고 최근 완전히 퇴역하였습니다.
 

                                       너무 비싸서 
 
F-15와 F-14가 최강임은 맞지만 강한만큼 비싼 것이 흠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돈 많은 미국이라도 마구 구입하지 못할 정도여서 이들을 보조하는 전력으로 가격은 저렴한 또 다른 경량전투기들을 개발하여 제식화 하는데 이놈들이 의외로 뛰어난 성능을 보여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공군 F-16 Fighting Falcon

 
바로 공군의 F-16 Fighting Falcon과 해군의 F/A-18 Hornet입니다. 그런데 F/A-18은 처음 F-16 도입당시 함께 제안되었던 YF-17를 베이스로 하여 개발된 전투기였습니다. YF-17의 인상적인 능력에 주목하였던 해군은 비록 공군기 채택경쟁에서 탈락한 이를 좀 더 개량 발전하여 F/A-18 이라는 또 다른 명품전투기를 만들어 내었던 것이었습니다.

 
                                              해군 F/A-18 Hornet
 

비록 F-16과 F/A-18은 공군과 해군의 보조전력 개념에서 채택하였지만 오히려 눈부신 진화를 거듭하여 F-15나 F-14와는 차별된 또 다른 다양한 능력을 선보이면서 미국 외 여러 나라의 주력전투기로도 채용되었습니다.  F-16과 F/A-18은 분명히 또 다른 멋진 라이벌이었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로 그리고 .. 
 
최근 막대하게 소요되는 전투기개발비의 부담과 냉전시대의 해체로 인하여 미국은 외국자본 및 기술을 처음부터 끌어 들여 해군, 해병대, 공군이 함께 사용할 플랫폼을 개발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JSF(합동타격기)로 알려진 F-35 Lightning II입니다. 비록 공군이 F/A-22이라는 괴물을 독자 채택하고는 있지만 이것으로 해공군의 라이벌 관계는 끝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F-35 Lightning II
 

지금까지 알아본 것처럼 공군과 해군과의 이러한 자존심 경쟁이 어쩌면 한심하고 우습게 보이기도 하지만 과연 이것이 미군의 모습일까요?
 
아마도 그들의 진짜 모습은 전황이 어려웠던 태평양전쟁 초기에 도쿄 공습을 위해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는 육군의 특공폭격비행대를 항모에 탑재하고 위험을 무릅쓴 체 적진 깊숙이 항해하였던 해군의 모습이 바로 진정한 라이벌의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미드웨이 해전에서 고군분투하는 해군 항공대를 돕기 위해 뻔히 안 맞을 줄 알면서도 일본 항모를 격침하려 호위 전투기도 없이 제로기가 우글대는 적진으로 망설임 없이 날아가 고공폭격을 감행하였던 미 육군의 B-17 폭격기 편대들도 진정 멋진 라이벌의 모습이었습니다.

 
 

이처럼 평소에는 자존심을 세우며 으르렁대다가도 국가가 위기에 닥쳤을 때 힘을 합하여 난관을 헤쳐 나가는 모습이 바로 맞수의 진정한 멋진 모습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 육해공군도 겉으로는 가장 멋있는 군대라고 치열하게 경쟁은 하되 위기의 순간이 닥치면 일사분란하게 행동할 줄 아는 멋진 라이벌로 자리매김 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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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의 라이벌 [ 2 ] 

제트시대에 재현된 개구리들


                                                  공군 F-80 Shooting Star



제2차 대전 후 제트시대가 도래하면서 공군(이때부터 육군 항공대에서 공군으로 독립)의 F-80 Shooting Star와 해군의 F2H Banshee가 최초로 공군과 해군의 제트전투기로 각각 제식화됩니다. 이 당시 미국은 유럽과 태평양에서 사상 최대의 전쟁을 승리하였다는 자신감에 가득 차 전후 세계최강의 위용을 뽐내며 감히 누가 내게 맞서랴하는 자만심이 충만하였던 시기였습니다.


                                         해군의 F2H Banshee


그러다가 선배들인 P40과 F4F의 꼴을 답습하게 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한국 하늘에 제트 1세대의 최강 전투기 중 하나로 인정받는 소련의 MiG-15의 갑작스런 등장으로 말미암아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꼬리를 내리게 됩니다. 결국 이들은 또 한 번 서로 간에 잘난 척만 하다가 곧바로 사라진 그저 그런 전투기들이 되었습니다.


                                      공군의 승리  


6.25전쟁에서 갑작스런 MiG-15의 등장에 그나마 미 공군은 F-86 Sabre라는 회심의 후속대타가 있었고 이후 MiG-15와 F-86은 항공전사에 길이 남는 인상적인 공중전을 펼쳐 보이며 세기의 라이벌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반면 해군은 사실 손가락만 빨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 같은 침울한 시간을 보냅니다.

 

                                          공군 F-86 Sabre 


시급히 도입한 F9F Cougar 등을 써보기도 하였지만 사실 적기는 물론이거니와 철천지원수인 공군의 F-86의 능력과 맞먹는 놈을 쉽게 제식화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사실, 함재기들은 항공모함 탑재를 위하여 공군기에 비해 기체구조에 제약사항이 많을 수 밖에 없었고 때문에 능력의 제한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 제트시대에 와서는 이러한 제약이 더욱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F-86의 해군용 버전인 FJ Fury
 

해군은 결국 자존심을 뭉개가며 울며 겨자 먹기로 공군의 F-86을 함재기로 재설계하여 FJ Fury 라는 이름으로 항공모함에 탑재하게 됩니다. 하지만 앞에서도 설명하였던 이유로 함재기로 재설계하면서 F-86 고유의 능력을 많이 상실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그저 그런 평범한 전투기가 되며 별다른 인상적인 활약을 보이지 못합니다. 제트시대에 와서 해군은 더 이상 공군의 상대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해군의 절치부심 
 

F-86의 성공에 자부심이 하늘을 찌른 공군은 1950년대 일련의 제트기시리즈를 개발합니다. 이른바 센추리시리즈 (Century Series)라고 불리던 F-100 이후의 전투기들이었습니다. 그 첫째 작품이 세이버의 닉네임을 계승한 F-100 Super Sabre로 제식화 된 최초의 초음속 전투기였습니다. 이때만 해도 소련 최초의 초음속 전투기 MiG-19를 충분히 대적 할 수 있으리라 판단  하였습니다.
 

                                                   공군 F-100 Super Sabre


반면 해군은 F-100과 동일한 엔진을 장착하였으나 기동성과 맷집능력이 뛰어난 F8U Crusader를 제식화하였고 이들은 동시에 월남전에 참전합니다. 자만하였던 공군은 MiG-17 과 MiG-21에 믿었던 F-100이 혼쭐이 나자 곧바로 일선에서 후퇴시킵니다. 그러면서 마구 개발 하였던 전투기들을 이것저것 되는대로 참전시키기 시작하였습니다. 


                                            해군 F8U Crusader
 

사실 월남전은 미공군기의 능력이 나빠서라기보다는 정치적 입김에 가해진 교전규칙 때문에 특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던 경우가 많았습니다. 반면 같은 제약이 있기는 하였지만 그동안 절치부심하며 내공을 키워왔던 해군은 F8U의 뛰어난 기동력으로 공대공전투에서 짭짤한 성과를 얻어내었고 서서히 공군의 망신살이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공군의 박탈당한 자존심 
 
 

센추리씨리즈를 개발한다고 난리치던 공군이 많은 전투기를 만들어내었음에도 실전에서 뾰족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사이에 내공을 키워온 해군은 희대의 도깨비 F4H Phanthom II를 함재기로 제식화 하였습니다.  그동안 센추리씨리즈가 월남전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초초해진 공군은 평판이 자자한 도깨비를 해군으로부터 빌려서 시험                  

                                             해군 F4H Phanthom II

 
그 결과 지금까지 공군이 개발하였던 모든 전투기들의 능력을 초과한다는 사실에 경악하였고 비록 자존심상하는 일이었지만 눈물을 머금고(?) 이를 공군전투기로 제식화하기로 합니다. 여담으로 공군기를 함재기로 만들기는 힘들지만 함재기를 공군기로 전환하기는 상당히 쉽습니다.

 

                                           F4H의 공군용 버전인 F-110 Spectre
 

최초에는 공군 제식부호인 F-110 Spectre 라고 명명하였으나 이마저도 1962년 시행된 국방성의 제식화 부호 통일계획에 따라 F-4 Phanthom II라는 해군의 명칭을 그대로 가져다 쓰게 되었습니다. 굳이 공군이 살린 마지막 자존심이라면 기관포를 장착하고 공중 급유구를 해군과 다르게 설치하였던 점 정도라 할 만큼 공군은 라이벌 해군에게 굴욕을 겪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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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의 라이벌 [1]  
                        
                        아군을 깨부수자?



아래 사진은 현재 모두 퇴역한 미 해군의 제공전투기인 F-14의 편대 비행 모습이니, 조금 오래 된 사진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래 사진을 보면 조금 황당한 구석이 있습니다. 동체에 ' 해군 힘내라! 육군을 깨부수자! ' 라고 쓰여 있는데 만일 평소에 저렇게 글씨를 써 놓고 날아다닌다면 육군의 항의는 그만 두고라도 언론에서 먼저 두들겨 맞지 않을까요?

 

 
아마도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육군과 해군의 정기 미식축구경기(아니면 이와 비스무리 한 행사 때)에서 육군을 약 올리고 해군을 응원하기 위한 비행이 아닐까하고 추측됩니다. 그렇다면 고정익 항공 전력이 전무한 육군은 아파치 헬기나 M1A1 전차에다가 ' 해군을 깨부수자! ' 라고 비슷한 응원 문구를 썼을지 모르겠습니다. ^^
 
그런데 사실 삼군병립체제가 확고한 미군에서 최고의 라이벌을 뛰어넘어 각 군 간에 거의 원수지간으로 경쟁하는 분야라면 해군항공대공군(전신 육군항공대 포함)의 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공군을 육군항공대의 연장으로 본다면 해군과 육군이 직접적으로 경쟁 할 곳은 사실 하늘밖에는 없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미국의 해군항공대와 공군(육군항공대)의 자존심 경쟁, 그중에서도 특히, 공통 영역이라 할 수 있는 제공전투기분야의 경쟁은 하나의 연속된 에피소드로 볼 만큼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간략히 알아보고자 합니다.


                           우물 안 개구리들  

 
제2차 대전 발발당시 전운이 감돌던 유라시아로부터 지리적으로 멀찍이 떨어져 있던 미국은 폭격기분야에 주력하여왔던 관계로 당시의 경쟁 군사열강과 비교하여 보았을 때 공대공 전투에 뛰어난 전투기가 없었다고 보아야 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육군 P-40 Warhawk

 
유럽공군이 Me-109, 스핏화이어 등을 제식화 하고 일본해군이 제로라는 명품을 가지고 있었던데 비한다면 당시 주력이었던 미 육군의 P-40 Warhawk와 해군의 F4F Wildcat는 사실 그저 그런 보통 성능의 전투기였습니다. 참전초기에 코피가 터져 본 후에 1:1로 적기와 맞서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을 정도였습니다.

 
                                                해군 F4F Wildcat


하지만 전쟁 전에 하와이같이 양군의 주둔지가 겹친 곳에서는 서로가 잘났다고 상대군 기지상공에서 위협비행, 곡예비행등을 하면서 잘난 척하였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도토리 키 재기, 우물 안 개구리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맷집으로 승부한 놈들

 
제2차 대전 당시 미군 프로펠러기들의 특징 중 하나가 못생긴 돌쇠스타일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돌쇠스타일의 전투기들은 기동능력 등에서 상대적으로 열세를 보였지만 반면 스타일에 걸맞게 단단한 맷집을 겸비하여 공중전을 벌이기에 나름대로 적합한 장점은 있었습니다.

 
                                             육군 P-47 Thunderbolt

 
거의 동시대에 제식화 되어 우물 안 개구리들을 급속히 대체한 육군의 P-47 Thunderbolt와 해군의 F6F Hellcat는 그런 점에서 기동능력이 적기보다 뒤쳐지기는 하였지만, 든든한 기체 골격을 바탕으로 급강하능력과 맷집이 뛰어나 적기와 맞서 승리를 이끌어 내었던 공통점을 가진 전투기들이었습니다.

 
                                               해군의 F6F Hellcat


항공 전사를 살펴보면 이들은 꼬랑지를 물려 적기가 총알이 떨어질 때까지 때려도 살아남아 상대방 조종사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던 전설이 아직까지도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돌쇠들은 육해군간 선의의 경쟁보다도 다음에 소개 할 자군 내의 다른 전투기들과 묘한 경쟁을 벌이게 됩니다.


                          프로펠러 전투기의 지존들  

 
제트시대가 본격 도래하였던 1950년대 초기까지 살아남았던 (비록 전투기에서 대지공격 임무로 업종은 변경 하였지만) 명실공이 프로펠러 전투기의 지존들이 바로 육군의 P-51 Mustang과 해군의 F4U Corsair였습니다. 미군 전투기답지 않게 날렵한 자태와 뛰어난 능력으로 인하여 사상 최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한마디로 당대 하늘의 최고봉이라 칭하여도 손색이 없는 천하의 명품이었고 지금도 이들을 능가하는 프로펠러기는 없습니다.

 
                                             육군 P-51 Mustang

 
앞서 설명한 P-47과 F6F도 그랬지만 이들 또한 참전하였던 전역이 서로 달랐습니다.  육군 전투기의 경우는 거의 유럽전선에서 해군전투기는 태평양전선에서 각각 다른 적들을 상대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직접적인 전력 비교는 사실 힘듭니다. P-51 예찬자들은 최강 독일공군과의 경쟁에서 이겼다는 사실을, F4U 지지자들은 상대적으로 뛰어난 맷집 등을 예로 들며 지금도 설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해군의 F4U Corsair

 
그런데 역사상 P-51과 F4U가 직접 실전을 벌인 예가 한번 있었습니다. 1969년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사이에 벌어진 전쟁 당시였는데, 흔히 월드컵 예선전 때문에 전쟁이 촉발되었다고 해서 축구전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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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의료시설의 확충과 더불어 최근 119로 대표되는 소방방재청의 기능이 대폭 확대되기는 하였지만 후송과 치료에 시간을 다투는 응급환자, 특히 교외에 거주하는 응급환자의 경우는 기존 의료체계만 가지고 즉시 대응하기에 벅찬 것도 현실입니다. 영리를 추구하는 대다수 민간의료기관이 인구가 많은 지역에 위치하다보니 벌어지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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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존 대부분의 응급시설은 대도시 인근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국토가 작다고는 하지만 도심만 벗어나면 병원은커녕 약국조차 없는 곳이 많습니다. 따라서 농어촌 지역에는 정책당국이 운영하는 보건소가 있지만 이 또한 응급환자 진료를 목적으로 한다기보다는 예방의료 행위와 만성 환자의 초보적인 진료를 할 수밖에 없는 형편입니다. 특히 강원도 고지대나 서해낙도 같은 격오지는 의료사각지대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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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곳곳에 보건소를 설치 하였음에도 의료사각지대가 많습니다.
 

그런데 군사적 대치 상황이 반세기 넘게 계속된 우리나라는 격오지에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한편으로 생각 한다면 인구분포와 상관없이 일정 지역별로 최소한의 응급의료체계가 준비되어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물론 군 자체가 의료기관은 아니지만 적어도 전쟁을 대비하여 체계적인 최소한의 응급구호를 갖추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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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간 응급환자 이송을 위해 군장비가 이용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따라서 유사시 외부의 요청이 있으면 구호를 위해 군이 투입되고는 하였습니다. 사실 그동안 군이 비상 의료행위에 투입되는 것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응급의료 사각지대에  군의료진이 처음부터 능동적으로 참여하겠다는 뉴스가 최근 보도되었습니다.  다음은 기사내용입니다.


 (전략) ... 현재 4곳에 불과한 군병원의 민간 개방을 점차 확대해 의료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취약지역 주민들을 돕기로 했습니다. 국가응급의료지원체계에 군병원까지도 편입시킨다는 계획입니다. 이와 함께 전국 17개 군 병원을 오는 2020년까지 10개로 통합하고, 외과 등 군 특성에 맞는 분야를 집중 육성하기로 했습니다 ... (중략) ... 기동의무지원 부대도 만들어 해외파병을 전담시킬 계획입니다. 이를 위해 다음달 중순쯤 국방장관과 보건복지부 장관 간에 공동협약을 체결하는 한편, 국방부와 복지부 관계자들로 구성된 정례협의기구도 만들기로 했습니다. 
                                                                                             (2010-02-24 KBS 9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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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 의무시설이 국가응급의료지원체계에 편입될 것으로 보도 되었습니다.

 
군 의무시설과 인력은 전상당한 장병을 즉시 치료하기 위한 목적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그에 맞게 특화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원론적으로 전시 또는 전시에 준하는 위급한 사태가 아닌 평시에도  군 의무관련 시설은 항상 예비 된 상태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국가전체의 의료자원을 관리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조금 아쉬운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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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 의료시설에 여유가 있다면 국민들을 위해 사용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됩니다. 

 
군 의무시설이 민간을 위해 사용되기 위해서는 당연히 본연의 임무인 장병에 대한 의료행위에 차질이 없다는 전제가 충족되어야 함은 물론입니다.  군 의료기관의 평시 임무는 당연히 현역 장병들에게 최고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체 의료 수요를 감당하고도 남는 능력이 있다면 국민들을 위해 이를 사용하는 것은 상당히 긍정적인 정책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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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려는 우리군의 발전을 기원합니다.
 

군의 자원은 위난의 시기를 위해 항상 대비하여야 하지만 평시에 국민을 위해서도 사용될 수 있다면 그것도 상당히 바람직하다고 생각됩니다.  우리군의 방대한 네트워크와 자원이 기존 국가응급의료지원체계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국군은 국민의 군대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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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마의 세 가지 유산 중 하나였던 올림픽 성화
 
 
 
제2차 대전이 끝난 지 반세기가 지났지만 히틀러라는 희대의 독재자와 나치라는 전범 집단을 긍정적으로 볼만한 요소는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인류사에 끼친 악행이 쉽게 치유되기 힘들만큼 너무나 컸기 때문입니다.  독일에서 조차 동동장소에서 나치와 히틀러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금기시되고 법적으로도 나치에 대한 모든 것이 부인되고 부정될 정도입니다.

 
                          히틀러와 나치는 두말할 필요 없는 인류사의 악입니다
 

하지만 한 시대를 좌지우지하였던 인물과 집단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아직도 음으로 양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는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시대에 뒤진 인종주의를 찬양하는 네오나치 ( Neo NAZI ) 같은 극소수의 추종세력들에게 히틀러와 나치는 아직도 영웅시되고 본받아야 할 교범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경우는 인간세계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가끔 어처구니없는 극소수의 추종세력이 아직도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이들 악마들이 남긴 유산 중에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좋은 전통이나 문명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있습니다.  애써 부인하고 싶지만 이것들을 악마의 긍정적 유산으로 지칭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세 가지 예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첫째 유산 - 폭스바겐 비틀 (Volkswagen Beetle)
 

모든 국민들이 차를 소유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하며 1933년 정권을 잡은 히틀러는 차량 설계자인 페르난트 포르쉐에게 다음과 같은 조건을 만족하는 새로운 개념의 차, 즉 국민차의 개발을 의뢰합니다.


                                           히틀러와 폭스바겐 비틀
 

어른 두 명과 어린이 세 명이 탈수 있고, 1리터의 연료로 14.5km이상 달릴 수 있으며, 최대시속은 100km의 고성능이지만 정비하기 쉬어야하되, 값은 1천 마르크 이하(당시 1천 마르크는 오토바이 한대의 가격이었음)로 저렴해야 한다는 까다로운 조건이었습니다.
 
                                 현재도 명성을 이어가고 있는 New Beetle
 

불가능할 것 같은 이러한 어려운 조건을 만족시키며 탄생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딱정벌레(Beetle) 였습니다.  하지만 1939년 제2차 대전의 시작으로 공장에서 조립 중이던 국민차는 대중에게 공급되지 못하고 급히 군용차로 변경되었습니다.  전쟁을 염두에 두었던 히틀러의 전략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폭스바겐 비틀의 명성은 아직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둘째 유산 - 아우토반 (Autobahn)
 
                                   아우토반 기공식에 참석한 히틀러와 나치 간부

 
아우토반은 독일이 건설한 자동차 전용도로였는데, 진정한 세계 최초의 현대식고속도로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히틀러 집권 전 일부구간이 개통하기는 하였으나 나치가 정권을 장악한 후, 독일의 동서의 주요구간을 가로지르는 총연장 7,000Km에 달하는 통합 간선도로망 건설에 착수합니다.

 
                              현재도 최고의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아우토반

 
초기에는 대공황에 따른 실업자구제 및 국가물류망의 확충 등이 그 목적이었으나 완공초기라 할 수 있는 1930년대 말부터 이미 독일은 전시 상황에 돌입중이어서 군대 및 군수물자의 이동에 더 적절히 쓰였습니다.  즉, 침략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토반은 현재도 세계최고의 고속도로라는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독일의 자랑거리입니다.
 
 
셋째 유산 - 올림픽 성화 봉송 (Olympic Torch Relay)

 
올림픽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아이콘 중 하나인 성화는 1928년 제9회 암스테르담대회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그리스의 올림피아에서 고대의식에 따라 불을 채화하여 세계 각국을 거치는 장거리 릴레이를 거쳐 개최도시까지 불씨를 봉송하고 개막식에서 성대히 성화대에 불을 밝히는 행사는 1936년 제11회 베를린대회부터 실시되었습니다.

 
                             베를린 올림픽 개막식 당시의 성화 최종 주자

 
세계만방에 히틀러와 나치를 자랑하기 위한 선전수단의 일환으로 올림픽을 개최하였던 독일은 개막식의 극적효과를 높이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베를린올림픽 조직위원장이었던 칼 다임의 의견을 히틀러가 수용하여 성화 봉송을 실시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계획에 걸맞게 행사가 성대히 그리고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대회의 극적 효과를 증대시켰습니다.

 
                                     밴쿠버 동계올림픽 개막식의 성화

 
그런데 올림피아에서 베를린까지의 성화 봉송루트가 이후 제2차 대전 당시에 발칸반도를 향한 독일군의 진격로가 되었습니다. 평화의 제전을 위하여 실행하였던 행사가 처음부터 전쟁을 염두에 두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를 철저히 전쟁에 이용한 것을 보면 히틀러와 나치는 진정한 악마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올림픽 성화 봉송 릴레이 행사는 범지구적인 중요한 전통행사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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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선수들이 금번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연일 선전하여 국민들을 기쁘게 만들어 주고는 있지만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불모지와 다름없는 동계스포츠 종목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영화 ‘국가대표’로 유명해진 스키점프(Ski Jumping) 그리고 외화 ‘쿨 러닝(Cool Running)’으로 많이 알려지게 된 봅슬레이(Bobsleigh) 같은 종목은 우리나라에서 대중적이지 않을 뿐더러 쉽게 즐기기도 어려운 종목들입니다.

 
                                 봅슬레이는 아직까지 생소한 종목입니다
.
 

그러한 생소한 종목 중에 바이애슬론(Biathlon)도 포함됩니다.  바이애슬론은 노르딕스키와 사격을 혼합한 경기로 총을 메고 스키를 타고 일정한 거리를 주행하여 그 중간에 있는 사격장에서 사격을 하는 복합 경기입니다.  즉, 스키를 이용하여 장거리를 빨리 뛸 수 있는 지구력과 더불어 사격에서 높은 점수를 얻기 위한 고도의 집중력이 동시에 필요한 종목인데, 특히 사격은 다른 동계스포츠 종목과 쉽게 매치가 되지 않아 우리에게 더욱 생소합니다.

 
                            총을 메고 스키를 타는 모습이 이색적인 바이애슬론

 

스키와 사격을 각각 따로 떼어놓고 본다면 그리 생소한 종목은 아니지만, 심장이 터질 듯이 뛰다가 사격을 위해 심호흡을 멈추고 정신을 집중시키는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하여야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므로 상당히 어려운 종목으로 소문나 있습니다.  이런 이종 종목들의 복합경기는 하계 올림픽에도 있는데 근대5종 (Modern Pentathlon, 육상, 수영, 사격, 펜싱, 승마)와 트라이애슬론 (Triathlon 육상, 수영, 싸이클) 등이 그러합니다.
 
                장거리를 달린 후 숨을 멈추고 사격을 하여야하는 고난도 경기입니다.
 



바이애슬론은 스키를 타면서 사냥을 다녔던 북유럽 사람들의 풍습에서 유래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부 인터넷 카더라 통신에는 18세기 후반 노르웨이와 스웨덴 국경에서 양국 국경수비대가 시합을 시작한 것이 시초라고도 하는데, 노르웨이가 오래 동안 스웨덴의 속국으로 있다가 20세기 초에나 독립한 나라이니 이러한 주장은 그리 신빙성은 없어 보입니다.

 
                           스키를 타고 사냥을 나가는 핀란드 사냥꾼들의 모습
 

농사를 지을 수 없을 만큼 환경이 열악한 북유럽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눈길을 뛰어다니며 사냥을 하던 관습이 지금도 남아있을 정도이니, 바이애슬론이 군사적인 분야에서 유래가 되었다기보다는 삶 가까이에서 시작된 종목으로 보는 것이 맞을 듯합니다. 따라서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같은 북유럽 국가들이 이 종목의 강국입니다. 그런데 총이라는 무기는 사냥용도뿐만 아니라 당연히 전쟁의 도구로도 이용이 됩니다.

 
                          총은 사냥과 스포츠의 도구이지만 전쟁수단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전쟁에서 바이애슬론이 필요한 것은 어쩌면 필연적이라 할 수도 있었습니다. 비록 스포츠로 바이애슬론은 1958년에 세계선수권이 열리고 1960년 제8회 대회 때부터 동계올림픽종목이 되었지만, 스키를 타고 사냥을 하던 북유럽 사람들의 관습이 전사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인 적은 그전에도 많았습니다. 특히 제2차 대전 당시의 핀란드 인들은 놀라운 바이애슬론 능력을 선보이며 소련 침략군에 당당히 맞섰습니다.

 
                                       소련군에 맞서는 핀란드군
 

장작패기(Mottie) 작전으로 유명하였던 핀란드군의 유격전술에 5배나 많았던 소련침략군은 눈 폭풍 속에 갇혀 비참하게 허물어졌는데, 이때 전직 사냥꾼 출신이었던 핀란드의 저격수들은 스키를 타고 적들이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고속 기동하여 침략자들을 차례차례 저격하여 소련군을 공포에 몰아넣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의 생존방식이 조국을 수호한 지름길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전선에서 맹활약한 핀란드의 사냥꾼들은 최고의 바이애슬론 선수들이었습니다.
 

여타 종목과 마찬가지로 바이애슬론 또한 뵈른달렌(Ole Einar Bjorndalen) 같은 슈퍼스타들이 올림픽을 비롯한 각종 대회를 찬란하게 빛내 왔습니다.  하지만 제2차 대전 당시 침략자들에게 결연히 맞서 일어난 핀란드의 전직 사냥꾼들이 역사상 최고의 바이애슬론 선수들이 아니었던가 생각됩니다. 그들은 무명이었지만 역사상 그 어떤 바이애슬론 슈퍼스타들보다 위대한 업적을 역사에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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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계 올림픽사의 명승부 '브라이언의 전쟁'


BOB
는 흔히 공군간의 전쟁으로 불리는 제2차 대전 당시의 영국 본토항공전(Battle of Britain)을 의미합니다. 지금도 재현하기 힘들만큼 사상 최대의 공중전으로 기록된 BOB는 1940년부터 1941년 사이에 영국과 독일 사이에 벌어졌는데, 나치 독일의 팽창을 처음으로 저지한 역사적인 대전투로 전쟁사에 커다란 한 획을 그었습니다.  그런데 동계올림픽 역사에도 BOB로 불린 또 하나의 거대한 전쟁이 있었습니다.  마침 우리나라의 김연아 선수와 관계가 있어 이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격렬한 공중전으로 인하여 런던 세인트폴사원 위에 남겨진 비행운의 모습으로 
                      사상 최대의 공중전이었던 BOB를 상징하는 유명한 사진입니다.


우리가 절대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 오래 동안 여겨졌던 분야 중 하나가 피겨스케이팅이었습니다. 선천적으로 기다란 상체 그러나 이에 철저하게 반비례하는 숏 다리,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체력 그리고 서양적인 안무를 소화하기 힘든 감정상의 문제 등 여러 이유로 한국인이 이 분야에서 절대 성공할 수 없다고 지레 체념하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80년대 올림픽을 2연패한 카타리나 비트의 폭발적인 연기모습 
               오래 동안 이런 서양선수만이 세계챔피언이 되는 줄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한국에서 피겨스케이팅은 당연히 세계적 수준과는 거리가 멀고 따라잡기도 힘들며 따라서 국내에서는 비인기 종목의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스스로 단정 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정관념을 통쾌하게 허문 신세대가 홀연히 등장하여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고 또 즐겁게 만들고 있습니다.

 
                           오호 ! ~ ~ 어느 날 갑자기 요정이 등장하였습니다. ^^

 
국민여동생으로 불리는 김연아 선수인데, 그녀는 무관심 받는 한국의 미개척 스포츠분야에서 각고의 노력을 묵묵히 경주하여 세계적 선수가 되었고 각종 국제대회에서 수상을 하여 우리 국민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신세대답게 자기주장이 강한 개성만점의 이 어린 소녀는 '안하니까 못하였던 것' 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우리에게 확실히 알려주었습니다.

 
                        대한민국에 이런 챔피언이 있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

 
잘 알려져 있다시피 김연아 선수는 현재 올림픽이 열리고 있는 캐나다에서 브라이언 오서(Brian Orser)를 비롯한 전담 코치진과 함께 훈련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래전 브라이언 오서를 코치로 영입하였다는 뉴스를 접하였을 때 개인적으로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스폰서가 자금을 대어 명망 있는 코치를 영입하였겠지만 오서는 단지 돈만 많이 준다고 쉽게 스카우트할 수 있는 그런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브라이언 오서 코치와 함께 한 김연아 선수

 
그는 1980년대 피겨스케이팅 남자 싱글 종목의 세계 챔피언으로 금번 벤쿠버에서 열리는 올림픽의 성화주자로도 나섰을 만큼 현재도 캐나다의 국민영웅입니다. 그런데 그런 인물이 김연아 선수의 개인 교사로 영입되었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 역설적으로 그녀가 당시 세계 피겨 스케이팅 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1984년 사라예보 올림픽 당시의 오서
 


오서는 전담 코치가 된 이후에 한동안 병행하던 아이스쇼 팀에서 완전히 은퇴하여 오로지 김연아 선수 지도에만 전념할 정도로 열정적입니다. 또한 인터뷰에서 "이런 선수를 가르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은 나에게 엄청난 행운이다"라고 하였을 정도로 훌륭한 선수를 지도하는 기쁨을 톡톡히 느끼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오서코치로부터 훈련을 받는 모습

 
이런 오서는 지난 1988년 동계올림픽에서 있었던 BOB (Battle of the Brians-브라이언의 전쟁)이라는 유명한 에피소드의 당사자이기도한데 필자는 당시 그가 벌인 전쟁을 TV로 직접 보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도 피겨계의 전설로 남아있을 만큼 멋지고 강렬하였던 브라이언의 전쟁에 대해 소개해 볼까 합니다.

 
                        BOB가 유명한 Battle of Britain를 뜻하는 것만은 아니고
          피겨스케이팅 역사의 전설인 Battle of the Brians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1981년부터 캐나다 국내선수권을 재패한 오서는 1984년 세계선수권과 올림픽에서 연속하여 은메달을 땀으로써 세계 최고의 선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1987년 세계선수권에서 대망의 1위에 오름으로 다음 해에 있을 올림픽의 강력한 우승후보가 되었습니다. 더구나 1988년의 올림픽은 고국인 캐나다 캘거리에서 개최 될 예정이었고 그는 캐나다팀의 기수였을 만큼 국민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1988년 캘거리 올림픽 당시 홈팀인 캐나다 선수단의 기수로 활약하는 오서

 
그런데 당시 그에게 피할 수 없는 평생의 호적수가 있었는데 바로 미국의 브라이언 보이타노(Brian A. Boitano)였습니다. 그와는 올림픽 전에 있었던 두 번의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1, 2위를 한번 씩 나누어 가졌을 만큼 호각지세를 펼치던 라이벌 중의 라이벌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름이 둘 다 브라이언인 오서와 보이타노는 1988년 캘거리에서 역사에 남는 명승부를 펼칩니다.

 
                  1988년 브라이언 오서(左)와 브라이언 보이타노(右)의 전쟁 모습

 
흠잡을 데 없는 훌륭한 연기를 펼친 둘은 모두 합계 81.8이라는 동점을 받게 되었는데 9명의 심판 중 5명이 보이타노를 1등, 오서를 2등으로 평가하였고 4명은 반대로 오서를 1등, 보이타노를 2등으로 평가하여 종이 한 장차이로 보이타노가 금메달을 차지하였습니다. 이때의 경쟁이 얼마나 치열하였는지 이를 흔히 브라이언의 전쟁이라고 표현하고 있고 아직도 역대 최고의 명승부로 손꼽고 있습니다.

 
                           시상식 당시의 모습 (左에서 右로 오서, 보이타노)

 
비록 명승부로 두고두고 이야기 되지만 간발의 차이로 올림픽 금메달을 놓친 오서에게는 브라이언의 전쟁이 결코 잊혀 지지 않는 아쉬움으로 남아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지도자로 변신한 그에게 샛별처럼 등장한 김연아 선수는 오래 동안 응어리 져온 이러한 아쉬움을 대신 풀어 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수도 있을 것 입니다.

 
                              스승을 능가하는 지존이 되기를 기원 합니다

 
언제까지 김연아 선수와 오서코치가 같은 배를 타고 갈지는 모르겠으나,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고 김연아 선수가 스승을 뛰어넘는 위대한 선수가 됨으로써 스스로에게는 성취감을, 국민에게는 커다란 기쁨을 그리고 스승에게는 오랜 꿈을 이루어 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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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平和를 거저 얻을 수는 없다.
 

각종 군비관련 자료를 보게 되면 최근 스위스의 총병력은 12만 명에다가 즉시동원가능 예비군도 약 10만 명 정도로 나와 있습니다. 거기에다가 최강의 MBT로 평가받는 레오파드2 전차 같은 최신예 무기로 충실히 무장하고 있습니다. 인구 800만, 우리나라의 반 정도 되는 작은 국토에 그것도 주변에 위협을 줄 만한 잠재적국도 많지 않은 나라가 이렇게 많은 군비를 갖추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스위스 육군의 날렵한 훈련모습

 
사실 이 정도도 대규모 감군이 단행된 1990년대 말까지 유지되던 현역 30만, 예비군 30만에 비하면 많이 축소된 숫자입니다. 이웃한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같은 강대국이 약 30만 내외의 군대를 보유하고 항상 준 전시상태인 이스라엘이 15만 정도의 현역을 보유하고 있는 것과 비교한다면 결코 밀리지 않는 전력입니다. 막연히 연상하는 평화이미지가 큰 영세중립국이 이렇다고 하니 언 듯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기동 훈련 중인 스위스 육군의 레오파드2전차

 
하지만 스위스의 평화는 절대로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영세중립은 다자간의 국제 조약에 의해서 외교적으로 인정받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외부의 침략이 있을 때 반드시 남들이 와서 도와준다고 담보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중립국이니 침략하지 말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소용없었던 양차 세계대전 당시의 베네룩스3국 예만 봐도 스스로 중립을 보존 할 수 있는 능력과 자신감이 있어야 평화가 지켜지는 것입니다.

 
                             제1차 대전 당시 영세중립국인 벨기에를 점령한 독일군

 
현재 시점에서나 스위스 주변에 적대 세력이 없어 보이는 것뿐이지, 역사적으로 스위스는 주변 강대국들로부터의 침탈을 피하기 힘든 지정학적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때문에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잊지 않고 엄격한 무장을 통하여 중립과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스위스 인들이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다음은 이러한 노력을 보여주는 스위스 국민들의 찬란한 기록입니다.
 
* 모르가르텐 Morgarten 전투 (1315년)
전투 외세의 지배를 벗어나고자 독립을 선언한 4개 칸톤으로 구성된 스위스 동맹군이 오스트리아 레오폴드 1세의 대군을 모르가르텐 계속 인근의 애게리 호수에 수장시킨 전투로 스위스 최초의 승리였고 이후 무장을 통한 적극적 자위정책이 시작됩니다.

 
                                           모르가르텐 전투 기록화
 

* 셈파흐 Sempach 전투 (1386년)
4개 칸톤이 자치권을 획득하자 이에 고무된 주변지역이 연방에 합세하려 하였고 이를 막으려는 오스트리아와 충돌이 벌어졌습니다. 연방의 대승으로 전투는 종결되었고 그 결과 대략적인 오늘날 스위스모습이 이뤄지게 됩니다.

 
                                       셈파흐전투 600주년 기념주화

 
* 낭시 Nancy 전투 (1477년)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더불어 스위스의 독립을 방해하던 전통적 외세였습니다. 현재 프랑스의 일부인 당대 지역의 패자 보로고뉴왕국이 스위스의 합병을 노리고 침략을 개시하여 2년간 전쟁이 벌어졌는데 스위스는 낭시에서 침략군을 전멸시켜 버렸습니다.

 
                                           낭시 전투 기록화
 

* 30년 전쟁 (17세기)
신성로마제국을 중심으로 신구교간에 벌어진 세계대전이었는데 비록 당시 스위스도 신교와 구교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이런 거대한 전쟁에 휩쓸리지 않고자 대외중립을 표명하고 군대를 국경으로 보내어 철통경비를 하여 전화를 차단하였고 이때부터  무장중립의 전통을 세우게 됩니다.
 
* 뒤프르 (Henri Dufour) 장군의 통일전쟁 ( 1847년 )
 앙리 뒤프르는 나폴레옹시대의 몰락 후 스위스의 통일을 이룩한 군사영도자입니다. 그는 전투 중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이 외세인 오스트리아-프로이센세력을 무력으로 축출하여 분열된 스위스를 통일하고 독립을 수호한 스위스의 이순신 장군입니다.

 
                                       앙리 뒤프르 장군의 동상
 

* 보불전쟁 (1870년)
 스위스는 무력의 대부분을 프랑스-독일-스위스 국경에 집중배치 하여 외세의 침탈에 대비하였습니다. 실제로 파리가 독일에 포위되자 프랑스는 스위스를 통과하여 독일의 배후를 치고자하였으나 자국의 영토가 전쟁터가 되는 것을 피하려는 스위스의 강력한 반대에 눌려 실패하였고 그 결과 스위스는 중립을 지켜냅니다.
 
* 제1차 대전 (1914년~1918년)
보불전쟁당시처럼 프랑스-독일-스위스 국경에 배치하여 중립을 지켜냅니다. 영세중립을 표방하다 독일의 침략으로 국토가 쑥대밭이 되어버린 벨기에와 극명히 대비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 제2차 대전 (1939년~1945년)
히틀러가 동맹국 이탈리아로의 최단 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스위스를 접수하려 생각하자 스위스 국민들은 앙리 기상 ( Henri Guisan ) 장군의 영도 하에 똘똘 뭉쳐 최악의 경우 터널과 도로를 파괴하면서 강력하게 저항하겠다는 의지를 보임으로써 히틀러의 침략욕구를 포기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접경지역에 배치된 스위스군을 시찰하는 앙리 기상의 모습
 

사실 위에서 열거한 전투나 에피소드는 오늘날까지도 단단한 자위 무장을 통하여 중립을 지켜온 스위스의 피나는 수많은 투쟁 중 극히 일부이며 오늘날도 무장중립의 정책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실 스위스의 역사를 살펴 볼 때 지금까지 자국을 침략한 외세에 대해서 끝까지 저항하였고, 대부분 승리를 거두어 주변의 외세도 스위스의 무장중립을 인정하게끔 만들 수밖에 없는 피의 투쟁을 벌여 왔습니다.
 
평화는 결코 거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준비된 힘이 있어야 지킬 수 있는 것 입니다. 고려에 대한 거란의 침략 야욕을 결정적으로 포기 하게 만든 것은 서희의 입이 아니라 '강감찬의 힘'이었습니다. 물론 서희의 입은 힘으로도 대적 할 수도 있다는 자신감이 내포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지만 결국 최종적으로 힘으로써 의지를 보여주자 평화는 찾아왔습니다.

 
                 준비를 소홀히 한 결과가 어떠하였는지는 역사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병자호란 때처럼 힘도 없으면서 모화사상에 물들어 입으로만 평화를 원한다고 해보았자 그 결과는 어떠하였는지 역사가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지난 역사를 반추하고 여기에 평화를 지키기 위해 중립을 표명하면서도 철저한 무장을 통해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던 스위스의 노력은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나가야할지를 알려주는 반면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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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노선?
 
 
신문이나 방송에서 자주 인용되고 표현인데 많이 접하였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오늘 국제유가가 마지노선으로 여겨지던 배럴당 XX달러를 넘어섰습니다.
여야는 올해 말을 마지노선으로 정하고 원내 통과를 완료하기로 합의 하였습니다.
 
흔히 위기감을 나타내기 위해 마지노선 (Maginot Line) 이 인용되는데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최후의 한계를 은유적으로 표현합니다.  다시 말해 더 이상 양보하기 힘든, 또는 최후의 보루로 반드시 고수하여야 할 목표임을 의미하며 또한 그 만큼 돌파하기 힘든 든든한 방어막이라는 뜻도 함께 내포하고 있습니다.

 
                      막아야 할 위기의 한계점으로 마지노선이라는 말이 종종 인용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참으로 잘못된 표현이라고 생각 됩니다.  戰史에 있어 마지노선은 최후의 보루가 아닌 적을 가장 앞에서 방어하는 최전선의 방어물이었습니다.  또한 뚫릴 수 없다는, 또는 뚫려서는 곤란하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대명사와 달리 실제로는 나라를 구하지 못하고 너무나 허무하게 종말을 맞이하였습니다.

 
                                 하지만 마지노선은 허무하게 종말을 맞이하였습니다.
                                     (독일군에게 항복한 마지노선의 프랑스군)

 
참호를 깊게 파고 일진일퇴 피 말리는 대치 끝에 제1차 대전에서 결국 승리를 거머쥔 프랑스는 방어가 최고라는 생각이 뇌리에 각인되어 버렸습니다.  따라서 참호를 더욱 깊게 파고 이를 더욱 단단한 보호물로 막아버리면 어떠한 적의 공격도 물리치고 최후의 승리를 얻게 된다는 믿음은 맹신이 되어버렸고 전후 많은 논란 끝에 엄청난 비용을 들여 독불국경에 마지노 요새선을 건설하였습니다.

 
                   참호전의 끔찍했던 기억은 전후 거대한 요새선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

 
장차전에서는 고정화된 요새가 그리 효과적이지 않을 것이라는 일부의 반대도 있었지만 프랑스 젊은이의 40퍼센트가 사상 당하였을 만큼 제1차 대전의 상처가 워낙 깊어 거금을 들여 방어막은 근대과학의 정수를 모아 구축 될 수 있었습니다. 1927년부터 1930년까지 약 200억 프랑이라는 막대한 비용을 들어갔는데 이 때문에 공군력 확충 등에 실패하였다는 평가까지 나올 정도였습니다.

 
                               독불국경을 따라 어마어마한 요새선이 만들어졌습니다.

 
건설은 베르덩 전투에서 부상까지 당한 당시 육군장관 마지노 (Andre Maginot) 의 주도로 스위스부터 룩셈부르크에 이르는 프랑스와 독일의 국경 750킬로미터를 따라 건설되었고 그의 이름을 따서 이 장대한 요새선의 이름이 명명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노라는 이름은 어떠한 외침으로부터도 안전하게 프랑스를 보호할 수호천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고 국민들도 그렇게 믿었습니다.

 
                     프랑스국민들은 마지노선이 그들을 지켜줄 것으로 맹신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위대한 군사 건축물의 결정체가 한심한 콘크리트임이 판명 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1940년 독일침공군은 이곳을 우회하여 연합군을 던커크해변에 고립시켜 버리면서 전쟁을 순식간 끝내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움직일 수 없는 요새에 안전하게 틀어 박혀 있던 수십만의 프랑스군은 뒤로 돌아 나타난 독일에게 얌전히 항복하는 것으로 임무를 끝냈습니다.

 
                  하지만 배후를 돌파 당한 마지노선은 콘크리트 덩어리에 불과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악몽 같은 참호전이 재발되더라도 완벽하게 자국의 병사들을 보호 할 수 있다면 최종 승자가 된다는 고루한 교리에 집착하여 나타난 결과였고 이 때문에 마지노선은 전사에 지상 최대의 삽질로 표기되었습니다. 물론 마지노선 자체가 뚫린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이를 회피하여  승부수를 띄운 독일의 전략 때문에 무용지물이 되어버렸습니다.

 
                           1944년 프랑스를 회복한 미군이 마지노선을 바라보는 모습

                   가장 중요할 때 하나도 쓸모없던 공룡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였을지요?

 
때문에 마지노선은 굳건한 방어막이나 반드시 지켜내겠다는 의지를 표현하는 말로는 부적합 합니다.  결론적으로 나라를 구하지 못한 방어막은 결코 최후의 보루를 의미하는 중요한 의미로 쓰여서는 곤란합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마지노선은 무용지물이나 미래를 제대로 내다보지 못하고 현실에만 안주하려는 단순한 생각이 낳은 한심한 결과의 대명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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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을 지키려던 핀란드의 투쟁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연합국(미국, 영국, 소련, 프랑스 등등)과 추축국(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등)으로 나누어 격전을 펼쳤던 제2차 대전당시에 핀란드는 성격이 조금 애매하였습니다.  전쟁기간 내내 핀란드의 주적은 소련이었지만, 전쟁초기였던 1939년까지만 해도 영국과 프랑스 같은 연합국들이 핀란드를 적으로 대하지 않고 오히려 군사원조를 하면서 소련과의 전쟁을 후원하였습니다.
 

                            1939년 겨울전쟁 당시 수오미살미에서 괴멸당한 소련군
 

그렇다고 애시 당초 처음부터 독일의 동맹국은 아니었고, 1941년 독소전이 발발된 이후 필요에 의해 독일편에 서서 추축국에 가담하게 되었습니다.  독소전 내내 핀란드는 소련의 요충지인 레닌그라드 봉쇄의 한축을 맡아 맹공을 가하였으나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소련 영내로 진입하지는 않고 1939년에 있었던 전쟁에서 소련에게 강탈당한 핀란드 영토를 회복하는 것으로 만족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전쟁 말기에 소련의 우세가 확실하여지자 단독으로 소련과 강화하여 전선에서 이탈함과 동시에 총부리를 뒤로 돌려 핀란드에서 작전 중이던 독일군들을 몰아내었습니다. 사실 제2차 대전에서 핀란드과 소련의 전쟁은 여타 전선과는 별개로 보아야합니다. 연합국대 추축국의 전쟁이 아닌 제정 러시아 때부터 간섭을 하여온 소련의 침략에 대항한 신생 독립국의 해방전쟁이기 때문입니다.

 
                       1943년 계속전쟁 당시 독일장비로 무장한 핀란드군의 모습
 

1941년 독소전 이후 독일편에 섰던 것은 독일이 예뻐서가 아니라 오로지 소련이 미웠기 때문이었고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수단으로 독일의 힘을 빌렸던 것에 불과합니다. 이런 사정 때문에 미국은 처음부터 핀란드를 적으로 간주하지도 않았고 영국은 핀란드에게 외교적으로는 선전포고를 한 적국이었지만 교전을 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펼치지 않았으며 그럴 의사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무기 취득에 어려움을 겪던 핀란드는 겨울전쟁(1939년~1940년)계속전쟁(1941년~1944년)으로 불리는 일련의 대소 전쟁기간 동안 국적을 불문하고 여러 국가의 무기를 운용 하였습니다.  특히, 핀란드 공군의 전투기를 보면 제2차 대전 당시 추축국, 연합국, 중립국은 물론 노획한 소련의 전투기까지 사용하였습니다. 다음은 핀란드가 전쟁 중 사용한 다양한 나라의 전투기들입니다.


 
                                                  미국산 P-40
 


                                               영국산 Hurricane

 

                                                이탈리아산 G50
 


                                                독일산 Me-109
 


                                                  소련산 La-3
 

                                               프랑스산 MS406

 


                                           네덜란드산 Fokker D.XXI
 


                                            스웨덴산 Jaktfalken II
 

독소전 기간 중 히틀러가 핀란드를 방문하였을 때 히틀러의 전용기를 호위하던 핀란드 전투기가 미국제 F2A Buffalo 였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 국적불문, 성능불문하고 여러 나라의 전투기를 사용 할 수밖에 없었던 약소국의 고민을 엿볼 수 있는 예입니다. 사실, 조국의 방위를 위해서 무기의 국적이 무슨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단 한기의 전투기도 아쉬운 형편에서 날아다니는 것이라면 무조건 사용을 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고생고생하면서 나라를 외세로부터 구하고자 노력한 핀란드는 비록 전후 영토의 일부를 소련에게 할양하고 배상금도 지불하는 굴욕을 감내 하였지만, 고슴도치 같은 강열한 저항을 보여주어 소련에게 결코 힘으로는 핀란드를 굴복시키기 불가능하다고 각인시켜 전후, 이웃 발트3국처럼 소련에 편입되거나 동유럽처럼 위성국가가 되지 않고 친소중립을 조건으로 독립국가로 존속할 수 있도록 만듭니다.

 
                                     국제평화유지군 소속의 최근 핀란드군
 

이런 노력으로 인하여 핀란드는 냉전시기에도 동서방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여 고도의 복지국가가 되었습니다.  강대국을 옆에 두고 오랜 기간 침탈과 지배를 받았으면서도 결국 자주 독립을 지켜낸 핀란드 인들의 불굴의 저항 정신에 찬사를 보냅니다.  또한 전쟁 못지않은 살얼음판 같았던 냉전시기에 외세 및 국제환경을 적절히 이용하여 최고의 복지국가를 이룬 노력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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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시라 박격포라고 ?

 


보병을 근접에서 지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박격포(Mortar)는 운반과 휴대가 편리한 소형화기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글씨로 정의하고 겉으로 보기에 그렇다는 것일 뿐, 정작 박격포를 담당하는 병사들은 스스로를 '어둠의 자식들'(?)이라고 자조섞인 말로 부를 만큼 이동과 운반이 그리 만만하지는 않습니다.

 
                              국군의 60mm 박격포 (사진-조선일보 유용원기자)
 

현재 국군은 다양한 종류의 박격포를 운용하는데 중대 화력지원용 60mm 박격포, 대대 화력지원용 81mm 박격포, 연대 화력지원용 4.2' 박격포 (최근 120mm로 교체중이라 합니다) 등이 있습니다. 이중 4.2'(혹은 120mm) 박격포만 하더라도 별도의 운반차량을 이용하여 이동할 만큼 보기와 달리 무게가 상당히 많이 나가는 중량장비입니다.

 
                   BV-206 전술차량에 탑재된 4.2' 박격포 (사진-조선일보 유용원기자)
 

통상 60mm와 81mm 박격포는 휴대하여 운반하는데, 그중 가장 작은 60mm 박격포만하더라도 장난이 아닐 만큼 무겁습니다. 행군이 모두에게 힘들지만 그중 중화기를 담당하는 병사들의 고생이 많고 박격포 담당병사들의 노고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분해된 박격포를 들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 무게가 장난이 아닌데, 이를 메고 산악 행군이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하늘이 노래질 정도입니다.

 
                          박격포를 분해하여 운반 중인 보병들 (사진-도깨비뉴스)
 

이처럼 휴대와 이동이 힘들지만 보병들이 이를 장비하는 이유는 간단한 구조만큼 즉시 사용할 수 있고 상대적으로 보병들이 휴대할 수 있는 화기들 중 화력이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중화기의 이동이 힘든 산악지대가 많은 우리나라 같은 지형에서 그 효과는 상당하다고 합니다. 오래전 일선지휘관과 대담한 적이 있었는데 박격포의 효용성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국군의 81mm 박격포 (사진-조선일보 유용원기자)
                              81mm 의 경우 매뉴얼에 차량 탑재나 도보이동
                          모두 가능하다고 되어있으나 대부분 도보로 운반합니다.
 

비록 근접하여 있으나 높은 엄폐물의 정상이나 배후에 있는 적을 타격하려면 무엇으로 할 수 있겠는가? 소수의 엄폐된 적을 제압하기 위해서 헬기를 동원 할 것인가? 아니면 포병에게 지원을 요청 할 것인가? 바로 이것이 박격포의 필요이유다. 따라서 우리나라 같이 구릉지대나 산지가 많은 지형은 말 할 것도 없거니와 고층 건물이 많은 시가에서도 가장 위력을 발휘 하는 것이 박격포다. 중동의 게릴라들이 도심에서 게릴라전을 수행 할 때 사용하는 최고의 화력지원용 무기가 RPG-7과 박격포인데, RPG-7은 후폭풍과 발사시의 노출로 인하여 생존성이 뒤떨어지는데 반하여 비정규전에서도 숨어서 사용할 수 있는 박격포는 최고의 타격무기라 할 수 있다.

 
                                 박격포를 이용하여 시가전을 펼치는 게릴라
 

비록 박격포가 그 구조가 간단하고 역사도 오래되어 구시대의 유물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위에 소개한 이유처럼 현대전장에서 아직도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으며 이것은 국군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흔히 Surgical Strike(외과수술처럼 필요한 곳만 골라서 타격한다는 정밀 타격)라고 불리는 정밀유도폭격 화력지원체계를 자랑하는 미군도 최 일선 보병의 든든한 화력지원 무기로 당연히 박격포를 애용하고 있습니다.

 
                                           박격포를 발사하는 미군
                        시공을 초월하여 보병에게 가장 친근한 화력투사 수단입니다.
 
더구나 미군들의 차세대 박격포는 GPS로 유도되는 정밀타격 시스템이 도입되어 그 능력이 엄청 업그레이드된다는 정보를 오래전에 들었는데, 이정도의 성능이라면 단거리 지대지미사일로 불러도 될 것 같다고 생각 됩니다. 제식화 여부는 아직 모르겠지만 만일 미군이 사용한다면 머지않은 시기에 국군도 비슷한 성능의 대구경 박격포를 운용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믿기 힘들겠지만 이놈도 박격포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작고 귀엽고 날렵한(?) 박격포의 이미지를 구기는 엄청난 놈이 역사에 있었습니다. 제2차 대전 당시 독일육군이 사용하였던 칼(Karl) 자주박격포입니다. 구경이 600mm나 되는 이놈이 박격포라고 상상되십니까? 야포라고 해도 이런 거대야포는 앞으로도 보기 힘들 것입니다. 사실 august도 문장을 그대로 해석하여 박격포라고 소개하였지만 이놈이 왜 박격포인지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방열하고 있는 칼 자주박격포 포대
 

현재도 세계적인 방산업체인 라인메탈이 1937년부터 개발한 칼은 원래 철옹요새인 독불국경의 마지노선을 박살내기 위한 단일 목적으로 개발 하였습니다. 총 7문이 제작되어 Adam, Eva, Thor, Odin, Loki, Ziu 로 명명된 6문이 실전 배치되었으나 막상 전격전의 대성공으로 서부전역에서는 사용되지 못하였고, 실전투입은 1942년 동부전선의 세바스토폴전투에서 이용되었습니다.

 
                                       무시무시한 포탄 발사모습
 

칼 자주박격포는 목적에 맞게 두 종류의 포탄을 사용하였는데 장거리 타격이 가능한 경포탄의 무게만도 1.6톤에 이르렀습니다. 기록영화를 보면 발사하고 난 몇 초 후에 목표물을 타격하는 모습이 한 장면에 잡혔을 만큼 박격포(?)라는 명칭에 걸맞게 야포에 비교하면 사거리도 짧고 포신도 또한 단축입니다.

 
               칼에서 발사된 박격포탄이 작렬하는 모습. 지옥이 따로 없을 듯합니다.
 

만일 사전정보에 의해 적군이 박격포로 공격한다고 해서 엄폐진지에 들어가 있는데 머리위로 저 포탄이 날라 왔다면 얼마나 황당하였을까요? 아마 지옥이 따로 없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자신만만하게 파도 타러 나갔는데 갑자기 전혀 생각지도 못한 거대한 쓰나미를 만난 꼴이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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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벽 그리고 인과응보
 
 
요즘 민간인 거주지 인근에서 국경을 나누기 위해 설치된 장벽이라면 팔레스타인 지역을 고립시킬 목적으로 이스라엘이 설치한 거대한 장벽이 이슈화됩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그런 장벽이라면 냉전시대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을 먼저 떠올리시는 분이 많으리라 생각 됩니다. 특히 지난해 말 장벽 붕괴 20주년을 맞이하여 대대적인 행사가 열렸고, 이 때문에 한동안 지나간 역사의 사실로 잊혀져가던 베를린 장벽이 새삼스럽게 부각되었습니다.

 
                    베를린 장벽 제거 후 또 하나의 분단의 상징이 된 팔레스타인 장벽
 

그러나 패전국으로 당연한 응징을 받아 국토가 분단되고 베를린에 장벽이 생기게 되었던 독일과 달리 순전히 타의에 의해 허리가 잘리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동족상잔의 끔직한 전쟁까지 치른 우리에게 있어, 냉전시기에도 그나마 제한적인 통행이 가능했던 베를린 장벽은 그리 커다란 장벽으로 보이지도 않았고 지금은 작은 흔적만 남기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어느덧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 기념식
 

베를린 장벽이 있었을 당시 가장 많이 고초를 겪은 것은 물론 보통의 독일 국민들이었고 어쩌면 이것은 그들이 감수하여야 할 몫이었습니다. 그런데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20세기말 장벽으로 고통 받았던 독일이 베를린처럼 하나의 도시가 아니라 한나라의 국경을 장벽으로 봉쇄하여 약소국 국민들에게 고통을 주었던 가해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사실, 20세기 들어 독일에게 고초를 겪은 약소국이 한둘도 아니기는 합니다만)
 
                           독일은 약소국을 장벽에 가두었던 원죄가 있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은 프랑스 침공을 위해 중립국 벨기에를 점령하였습니다. 그런데 계획과 달리 전선이 고착화, 장기화되자 독일은 전선의 배후에 위치하게 된 벨기에를 손쉽게 통제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즉, 해상을 통한 영국의 상륙전이나 당시 중립국이었던 이웃의 네덜란드를 통한 벨기에와 연합국과의 연결을 막기 위하여 내렸던 결론이 벨기에의 국경을 고압선으로 완전히 봉쇄하여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벨기에와 네덜란드 국경 사이에 설치된 고압선 지도
 

이미 북쪽은 바다, 남쪽은 독일, 서쪽은 전선으로 가로막혀 있던 벨기에에게 동쪽의 중립국 네덜란드는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는데, 독일은 이곳 국경 200킬로미터에 2,000볼트의 고압선을 설치하여 벨기에를 완전히 고립시켜 버렸던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약소국 국민들을 상대로 자행된 욕심 많은 강대국의 천인공노할 만행이었습니다.

 
                             좌측이 중립국 네덜란드 우측이 독일 점령 벨기에
 

독일이 표면적으로 군사적인 명분을 내세웠으나 이로 인하여 독일의 점령지로 추락한 벨기에 국민들은 생필품의 대외 보급로가 봉쇄 (지금도 벨기에의 대외무역은 앤트워프뿐만 아니라 이웃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이나 로테르담을 이용하여 많이 이뤄집니다) 되어 크나큰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배고픔에 못 이겨 피난 가려던 수많은 벨기에 국민들이 이 장벽에서 희생이 됩니다.

 
                                         고압선에 희생된 벨기에 국민
 

이런 봉쇄는 독일이 항복한 1918년까지 계속되었고 그로 인한 고통은 약소국 국민들의 몫이었습니다. 그에 비한다면 20세기 후반에 있었던 베를린 시민들의 고통은 그리 크게 보이지도 않습니다. 자고로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으로 고통을 받는 것은 인과응보이고 동정을 받기 힘든 행위입니다. 남을 괴롭히고 죄짓고 살다가는 후손들이 힘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역사의 교훈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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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방미인의 한계 ?
 
  
소련의 붕괴로 냉전시대가 종식되자 근심이 많아진 집단이 생겼는데 바로 무기를 만드는 군수업체들이었습니다. 소련의 맞상대였던 미국이 군사적 우위를 계속 점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적정수준의 군비가 필요하였지만 막상 가장 큰 주적이 사라진 이상 대규모의 군비증강은 옛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그동안 짭짤한 재미를 보았던 무기제조업체들도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냉전의 종식은 국제정치적으로는 물론이거니와 국방정책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옵니다
.
 

그동안 천문학적인 예산을 국방비로 사용하고 있던 미국이었지만 군비 증강을 명분으로 내세울만한 이슈가 사라지자 정책 담당자들도 한정 된 예산 내에서 최대한 효율적인 방법으로 집행하고자 골머리를 앓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원래가 예산삭감이 가장 큰 주요임무 중 하나인 의회도 행정부가 제출한 국방비에 칼질을 해대기 일 수였습니다.

 
                            이러한 변혁의 시대에 군수업체들의 고민이 생겼습니다.
 

그런 이유로 탄생한 프로젝트가 JSF(Joint Strike Fighter 합동타격기)인데 개념은 상당히 단순합니다. 기존에 전투기를 사용하는 공군, 해군 해병 항공대의 차세대 전투기를 하나의 플랫폼으로 통일하면서 개발초기부터 전투기 교체가 필요한 외국까지 참여시켜 개발비용을 절감하고 대량생산을 통하여 생산단가를 획기적으로 낮추고자 나온 차세대 무기 획득 계획이었습니다.

 
           플랫폼을 통일하고 해외 수요처까지 개발에 참여시켜 생산단가를 낮추려 하였습니다.
 

이때 사운을 건 록히드마틴 콘소시엄과 보잉 콘소시엄의 충돌 결과 승자가 된 록히드마틴 은 프로젝트 제안시 제출한 X-35를 베이스로 해서 공군형 F-35A, 해병대 및 영국군용 F-35B, 미 해군용 F-35C 의 다양한 변형기종으로 개발하였고 일부 모델은 롤아웃 행사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는 각 군에서 요구하였던 다양한 조건을 맞추기가 까다로와 개발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까다로운 조건 때문에 개발에 난항을 겪고 있다는 후문이 있습니다.
 

먼저 공군용으로 제안 된 F-35A는 기존 Low급으로 사용하던 F-16을 대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더해서 군 당국은 CAS를 전담하는 A-10의 임무까지 가능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얼핏 생각하기에도 F-16과 A-10의 임무를 하나의 기종으로 합치는 것이 상당히 어려운 작업으로 생각되는데, 때문에 최근 들리는 소식에 따르자면 F-35A가 A-10를 대체까지는 하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흘러나옵니다.

 
                                                  공군용 F-35A
 
해군용으로 제안 된 F-35C는 기존에 함재기로 사용하던 F/A-18A/C 기종을 대체하기 위해 개발된다고 하는데 문제는 F-35의 기체가 비교적 작아 기존 공격기만큼의 폭장량을 갖추기 힘들 것 이라는 의구심이 증폭되고 있고, 거기에 더해 특별히 쌍발엔진기가 단발엔진기보다 안전하다는 확실한 물증은 없지만 전통적으로 쌍발을 선호하던 해군당국의 입맛에도 맞지 않는다고 합니다.

 
                                                   해군용 F-35C
 

가장 큰 문제는 해병대 및 영국군용으로 제안 된 F-35B형입니다. 이놈은 한마디로 AV-8을 대체하기 위한 기종인데 가장 큰 문제는 수직이착륙이 가능하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VTOL기의 역사가 오래되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제작이 쉬운 것도 아닙니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최근 초도비행에 성공하였다고 하는데 제식 화까지는 많은 보완이 필요하리라 생각됩니다.

 
                               최근 초도 비행에 성공한 해병대 및 영국군용 F-35B
 

지금까지 등장한 VTOL기중 그나마 제대로 성공한 것이 영국이 만든 해리어(Harrier)인데  미국도 이것을 라이센스 제작하여 사용하고 있는 현실만 봐도 VTOL기의 개발이 상당히 어렵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수직이착륙을 돕기 위해 채택한 리프트 팬이 기체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되므로 스텔스 기능을 위하여 내부에 설계된 무장수납공간을 축소 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B형의 경우 수직이착륙 조건 때문에 개발 및 운용에 많은 제약이 따를 전망입니다.

 
무장장착이 외부에 이루어지게 되면 당연히 스텔스기능에 많은 제한이 따르게 되는데 이런 이유로 이 기종의 최대 해외 구매국이자 공동 개발국인 영국도 많은 불만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계획보다 제작단가가 대폭 상승하였고 이런 여러 이유들이 맞물려 수요처인 미군은 물론 각국에서 최초 계획보다 도입 예정물량을 줄인다는 점입니다.

 
                             F-35 Lightning II  시제 1호기의 발표회 모습입니다.
                             과연 팔방미인의 한계를 극복 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결론적으로 돈 좀 절약하기 위한 좋은 기획으로 JSF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기는 한데, 자고로 만병통치약이나 팔방미인이 막상 뭐 하나 특별하게 아주 잘하는 것은 없듯이 F-35도 그럴 가능성이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와서 프로젝트를 물려 예전처럼 각 군이 별도의 기체를 만들 수도 없고 어쨌든 당국의 고민이 큰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과연 이 프로젝트가 소기의 목적대로 완성 될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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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Winner Takes It All


세상을 살면서 무수히 많은 1등을 보아옵니다. 그리고 저 또한 제가 몸담고 있는 분야에서 1등이 되고 싶다는 욕심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말로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부인하지만 사회가 주목받는 1등 이외의 존재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아마도 그런 이유는 The Winner Takes It All 이라는 병리현상 (?)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한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끝없는 경쟁을 통해 생존할 수 있는 냉정한 현실은 승리한 1등만이 주목을 받고 나머지는 아웃사이더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말로는 올림픽이 참가에 의의가 있다고 하지만 막상 세계 신기록을 세우고 1등한 인물에게만 포커스가 맞춰집니다. 하물며 1등만이 살아남는 각종 선거에서 낙선자의 비애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패자의 눈물은 뭉클하지만 영원히 기억되기 힘듭니다

 
군사 분야에서도 이런 법칙은 철저하게 적용됩니다. 아니 전쟁에서 2등이라는 말 자체가 곧 패배를 의미하기 때문에, 어쩌면 그 어느 분야보다도 1등이 되기를 가장 원하는 분야일 수 있습니다. 더불어 원칙적으로 최고의 성능을 갖춰야 채택될 수 있는 군수 관련시장에서 2등이라는 존재는 곧 사라져야 할 대상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軍事에서 2등은 패배와 다름없습니다. ( 항복조인식에 참석한 일본대표 )
 

군수시장의 규모가 크고 경쟁체제를 통한 개방적 무기 획득 시스템을 가진 미국은 통상 새로운 무기를 도입할 때 다양한 참여업체들의 치열한 경쟁을 거칩니다. 당연히 무기를 제조하여 납품하려는 업체들은 그들이 개발하여 생산한 무기가 채택될 수 있도록 엄청난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경쟁을 통해 살아남은 무기만이 제식화 될 수 있습니다 ( B-17 공장 )
 
그렇다보니 각종 무기 획득 프로그램 중 좋은 성능에도 불구하고 미세한 차이로 1등이 되지 못하여 안타깝게 탈락한 경우가 의외로 많습니다. 다음은 미 공군의 각종 전술기 획득 프로그램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경쟁하다가 아깝게 탈락하여 정식으로 태어나보지 못하고 그 운명을 다한 2등들입니다.

 
                            CAX ( 근접 공격기 프로젝트 ) 에서 A-10에 뒤진 A-9
 
                        ATF ( 차세대 전투기 프로젝트 ) 에서 F-22에 밀린 YF-23
 
                         JSF ( 합동 타격기 프로젝트 ) 에서 F-35에 밀린 X-32
 
이들은 The Winner Takes It All 원칙 때문에 단지 제안단계로만 그 생을 마감하였고 박물관이나 기록에서나 그 존재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쉬운 일은 아니지만 패배자도 멋있게 부활한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미 공군의 거대한 프로젝트였던 LWF ( 경량 전투기 프로젝트 ) 에서 F-16에 밀려났지만, 명품 미 해군 함재기인 F/A-18로 환골탈퇴 하여 멋지게 등장한 YF-17가 바로 그런 예입니다.

 
                                          LWF 경쟁에서 탈락한 YF-17
 
사실 1등이라는 존재는 경쟁에서 뒤쳐진 2등 이하의 수많은 존재가 있기 때문에 돋보이는 것이며 당연히 로빈슨 크로우소의 1등은 돋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1등은 그 노력과 실력으로 인정받아야 합니다. 1등이 아니라는 이유로 경쟁에서 뒤쳐지고 있다는 생각은 절대 하지 마십시오. 소수의 1등 이외 이러한 수많은 하나하나의 존재들 또한 모두 소중합니다.  

 
                               YF-17을 베이스로 멋지게 재탄생한 F/A-18
 

혹시 올 한해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습니까? 결코 좌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 대부분이 1등의 영예를 차지한 A-10, F-22, F-35, F-16이지는 않지만, 언젠가는 멋진 모습으로 재탄생하여 비상 할 수 있는 YF-17이기 때문입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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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침(不沈)의 상징이 된 이름
 
 
밀리터리에 대해 관심이 없는 분이라도 살면서 한 번 정도는 엔터프라이즈(Enterprise)라는 군함의 이름을 들어 보셨을 것 입니다. 재래식 동력함인 CV-63 키티호크 (Kitty Hawk)가 2009년 퇴역하면서 미국의 모든 항공모함들이 핵추진함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을 만큼 이제는 의의가 많이 감소하였지만 엔터프라이즈는 최초의 핵추진 항공모함이라는 명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최초의 핵추진 항모인 엔터프라이즈가 취역 40주년을 자축하던 당시의 모습

 

1961년 취역하였으니 벌써 50여년 가까이 바다를 누비고 있는 셈인데, 수차례에 걸쳐 실전 에 투입되었고 한반도에 군사적 위기가 고조되었을 때에도 등장하여 그 위용을 뽐내고는 하였습니다. 무지막지한 건조비용에 놀란 미 해군 당국이 이후 2척의 항공모함을 재래식 동력함으로 만들었을 만큼 엔터프라이즈는 당대를 앞선 괴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엔터프라이즈인 CVN-65가 미 해군 최초의 엔터프라이즈는 아닙니다.

 
                               현재도 현역으로 활동 중인 CVN-65 엔터프라이즈
 

통상 해군의 군함명은 인물명, 지역명, 역사적 사건명 등 여러 사유로 결정되는데 그렇게 작명된 수많은 선명 중에서도 두고두고 기억하여야 할 가치를 지닌 특별한 선명은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한국 해군의 충무공 또는 이순신과 같은 함명이 바로 그런 경우라 할 수 있는데 이런 영예로운 선명을 지닌 군함이 퇴역하면 새로운 군함이 선명을 승계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아마 한국 해군에게 가장 영광스런 이름이라 할 수 있는 이순신함
 
세계최강 미 해군에서는 엔터프라이즈가 그런 경우에 해당 됩니다. 미 해군 함명들중 가장 많이 계승 되어온 이름이며 또한 이름에 걸맞게 많은 전공을 세웠던 선명입니다. 한마디로 미 해군 불침의 영광이라고나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호 엔터프라이즈
1775년 5월 18일 영국으로부터 노획한 70톤짜리 소형 범선입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노획물인데 독립전쟁당시 미국의 국력을 고려 할 때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생각 됩니다.
 
2호 엔터프라이즈
1776년 12월 20일 역시 영국군으로 부터 나포한 25톤 소형 범선입니다.  1호도 그렇지만 나포된 소형선박이기 때문에 그리 오래 사용 되지는 않은듯합니다.
 
3호 엔터프라이즈
1799년 건조된 125톤 범선이며 엄밀히 말해 이 선박부터 엔터프라이즈의 영광이 시작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 차례의 전투에 참여 하였으며, 특히 미국 연안 해적 소탕에 투입되어 40여척의 해적선을 격멸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립니다.

 
                                    적함 트리폴리를 격파하는 3호 엔터프라이즈
 
4호 엔터프라이즈
1831년 건조된 194톤 범선으로 주로 중남미 지역의 작전에 참여 합니다. 이로써 엔터프라이즈는 미국연안을 벗어난 지역에서 명성을 떨치게 됩니다.
 
5호 엔터프라이즈
1877년 3월 16일 건조된 1,375톤 증기기관 겸용 범선입니다. 기관의 장착과 선체 대형화로 좀 더 넓은 지역에서의 작전을 수행 합니다.

 
                                최초로 기관이 장착된 5호 엔터프라이즈 (1877년)

 
6호 엔터프라이즈
1917년 제작된 1 파운드포 1문을 장비한 SP-790급 소형경비정의 이름 입니다. 오랜만에 엔터프라이즈의 전통을 승계한 선박이 등장하였으나 그동안 추세와 달리 소형선박에 명명됩니다.
 
7호 엔터프라이즈
1938년 5월 12일 취역한 항공모함 CV-6입니다. 흔히 엔터프라이즈의 영광이라면 이놈을 생각 할 정도로 너무나 유명한 전공을 세웠으며 전설이 된 함정입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리의 주역이었고 이후 수차례의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고 수차례의 피격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복하고 침몰당하지 않았던 미 해군의 영광이었습니다.

 
                                  미 해군의 전설이 된 7호 엔터프라이즈 CV-6
 
8호 엔터프라이즈
1961년 11월 25일 취역한 최초의 원자력 추진 항공모함 CVN-65입니다. 현재도 현역에서 활동 중이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많은 활약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무시무시한 초대형항모가 커다란 위험에 빠졌던 적이 있었는데 전투로 인한 것이 아니고 안전사고 때문이었습니다.
 
1969년 1월 14일 하와이 근해에서 훈련도중 갑판을 이동하던 차량의 배기가스에 노출되어 과열되었던 로켓이 갑자기 오작동으로 발사되었고 마침 주기되어 있던 다른 함재기를 피폭시켜 대화재가 발생합니다. 화재는 장장 4시간 동안 계속 되었고 다수의 인명피해가 발생한 미 해군의 비전투 항모사고중 하나로 기록됩니다. 옆에 있던 호위함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항모를 밀어서 다음날 진주만까지 안전하게 귀환시킬 수 있었습니다.

 
                                        사고 당시의 CVN-65 엔터프라이즈
 

그런데 공교롭게도 불멸의 항모 CV-6 엔터프라이즈도 태평양전쟁 당시 동일한 해상에서 크게 타격을 입었으나 안전하게 진주만으로 귀항하였던 적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당시 사고가 제2차 대전 때 죽은 일본군의 원혼 때문이라는 괴담도 있었으나 결론은 엔터프라이즈라는 이름은 불침의 아이콘이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CVN-65가 퇴역해도 이 이름을 승계하는 다른 항정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한국 해군의 레전드가 된 참수리 325호
                             (1999년 제1차 연평해전 당시 북한 경비정을 들이받는 모습)
 

미 해군에 비하면 역사가 일천한 우리 해군은 앞에서 언급한 충무공처럼 역사적인 인물 외에는 승계하여 사용할 만큼 전통 있는 함정명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2009년 비록 함정명은 아니지만 함번으로 한국 해군의 전설이 될 자랑스러운 이름이 등장하였습니다. 1999년 발발한 제1연평해전과 2009년 벌어진 대청해전에서 연거푸 대승을 이끈 참수리 325호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대청해전의 승전을 이끈 참수리 325호 장병들
 

325호가 함번이라서 함명이 되기는 곤란한 점이 있겠지만 이미 325호는 한국 해군에게 함번 이상의 의미가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훗날 퇴역하더라도 미 해군의 엔터프라이즈처럼 후속함정에게 승계되어 계속 사용됨으로써 그 용기와 기백이 영원히 알려지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지난 한해 대한민국 해군 여러분 고생이 많으셨고 그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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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마스 이야기 [ 끝 ]
 
                 1950년 ( 흥남 ) 에피소드
 
 
통일의 기대가 한껏 부풀어 올랐던 달콤했던 1950년 10월이 지나가고 찬 서리가 내리던 11월이 되었을 때 전선의 상황은 뭔가 이상해지고 있었습니다. 산속 깊숙한 곳에서 저항하는 적들이 지금까지 상대한 북한군이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한만국경에서 벌어진 우발적인 작은 충돌이 아니라 대규모의 중공군이 개입했다는 사실이 확인된 순간 지금까지의 전쟁은 무효가 되어버렸습니다.

 
                          중공군의 등장은 새로운 전쟁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12월이 되어 속절없이 아군 부대들이 중공군에 각개 격파되어 나가자 후퇴는 결정되었고 지금까지의 진격로를 뒤로 돌아 북한 땅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 동해의 전략거점이자 함경도의 초입인 원산이 12월 7일 중공군에게 점령되자 한반도 동북부 방향으로 진격하여 잘 싸우고 있던 미 10군단, 국군 1군단은 순식간 배후가 절단되면서 적진 한가운데 고립될 위기에 봉착하였습니다.

 
                                          중공군의 포로가 된 미군
 

다행히도 제해권, 제공권을 가지고 있던 UN군은 이를 발판삼아 한반도 동북부의 요충지인 흥남일대로 집결하여 교두보를 설치한 후 바다로 철수할 준비를 하였습니다. 항구도시 흥남에는 병력 10만 5천명에, 차량 1만8,422대 그리고 3만 5천 톤의 각종 군수물자들이 모여들었고 이를 해상으로 이동시키기 위하여 총 125척의 각종 선박이 동원되었습니다. 그리고 미 7함대의 엄청난 화망이 철수작전 동안 흥남항을 향한 중공군의 접근을 거부시켰습니다.

 
                                         1950년 12월 흥남항 전경
 

1940년 프랑스북부의 됭케르크에서 독일군에게 포위된 30만의 연합군이 기적 같은 해상철수에 성공하였던 이후 사상 최대의 해상 철수작전이 한반도에서 이루어지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군이 배를 타기위해 흥남항을 향하여 속속 집결하는 것과 발맞추어 군인들을 능가하는 엄청난 규모의 피난민이 함께 부두로 모여들고 있었는데 바로 자유를 찾아 남으로 가고자 했던 북한주민들이었습니다.

 
                                   철수대기 중인 군인들과 섞여있는 피난민들
 

수많은 사람들이 평생 대대로 살아온 고향을 등지고 간단한 소지품만 챙겨 언제 돌아올지도 모를 남쪽으로 가고자 하였을 만큼 지난 5년간 벌어진 공산학정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극악하였습니다.  그렇게 후퇴하는 아군을 따라 흥남으로 몰려든 한반도 동북부의 주민들은 벌써 20여만 가까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안전하게 탈출시켜 주겠다고 그들에게 사전에 약속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공산학정을 피하여 탈출하려는 민족의 거대한 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철수작전을 총 지휘한 미10군단장 알몬드 (Edward Almond )는 커다란 시름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또한 한국전에 발을 들여 놓고 난 후 한반도 곳곳에서 벌어진 엄청난 학살현장을 익히 보아왔고 흥남항에 모여든 대부분의 피난민들이 그러한 공포가 무서워 피난하고자하였던 사람들이라는 사람을 그 또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이데올로기 전쟁으로 변한 한국전쟁은 후방의 민간인들조차 결코 안전할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흥남철수의 총책임자 알몬드 미 10군단장
 

하지만 알몬드에게는 당연히 군의 철수가 우선이었기 때문에 미 10군단 민사부 고문이자 통역이었던 현봉학 박사에게 3천여 명의 민간인만 소개하겠다는 의중을 밝힙니다.  하지만 북풍한설에도 뜬눈으로 서서 밤을 새며 부두에 몰려든 수십만 피난민의 애끓는 눈초리를 그 누구도 외면하기 힘들었습니다. 이때 국군 1군단장 김백일 장군이 이들의 동반 탈출을 강력히 주장하였고 현봉학 박사도 알몬드를 설득하였습니다.
 
                                          부두에 대기중인 국군 1군단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배의 빈곳이라면 어디건 상관없이 배가 침몰하지 않을 수준까지 피난민을 태우고 철수하라고 명령이 하달되면서 장엄한 인도주의 작전이 12월 12일 시작되었습니다.  영하 20도를 밑도는 맹추위와 더불어 눈보라가 흩날리는 흥남부두는 군인들과 각종 물자를 비롯하여 괴나리봇짐을 짊어진 남녀노소구분 없는 피난민들이 함께 승선을 하였고 그들은 차례차례 자유를 향한 탈출에 오릅니다.

 
                             지휘부의 결단으로 장엄한 탈출극은 시작됩니다.
 

비록 모든 피난민을 다 구할 수는 없었지만 1950년 크리스마스 이브인 12월 24일 마지막 철수선이 불타는 흥남항을 떠나면서 군사적 철수를 완료함과 동시에 총 9만8천명의 피난민들이 함께 북한을 탈출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것은 이후 결과적으로 한민족 역사상 최단 시기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거주지를 옮긴 문화인류학적 기록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탈출선 출항 직후 폭파되는 흥남부두
 

하지만 무엇보다도 1950년 눈보라 속의 크리스마스가 빛났던 이유는 지금까지 인류가 벌여온 수많은 전쟁사를 살펴보아도 찾기 힘든 인도주의 때문이었습니다.  어쩌면 전쟁에서 인간을 생각한다는 점은 사치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장 어려운 여건 하에 벌어진 1950년 크리스마스의 기적은 인간이 가장 중요하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보여준 아름다운 표상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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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마스 이야기 [ 3 ]

                  1950년 ( 서울 ) 에피소드


 

AIDS로 유명을 달리 하기는 하였지만, 명화 자이언트(Giants)에 출연 하였던 당대의 미남배우 록 허드슨 (Rock Hudson) 입니다. 지금 봐도 참 잘생겼군요.

 
 

마릴린 먼로만큼은 아니지만 당대의 섹스심벌인 마사 헤이어 (Martha Hyer) 입니다.

 
 

인도 출신으로 말론 브란도의 첫 번째 아내이기도 했던 안나 카슈피 (Anna Kashfi) 입니다. 여담으로 브란도가 바람 핀 것에 분노하여 이혼 법정에서 브란도의 귀 방망이를 날린 에피소드로도 유명합니다. ( 갑자기 골프채로 얻어맞으며 도망 다닌 '숲속의 호랑이'가 생각난다는 -.- ; )

 
 

이분은 한국계인 필립 안 (Philip Ahn) 으로 안창호 선생님의 첫째 아드님이기도 합니다.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동양계 영화인의 대부역할을저 하였는데 참고로 배역 중 " 일본인 악당으로 연기하여 비참하게 최후를 맞는 역할이 제일 재미있다, " 라고 하였습니다. ^^

 
 

위 배우들은 1957년 미국 유니버설 영화사에서 제작한 전송가 (Battle Hymn) 에 같이 출연 하였는데, 전송가는 실존 인물인 딘 헤스 (Dean Hess) 대령의 동명 자서전에 기반을 두고 제작한 영화로 할리우드 영화로는 보기 드물게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외국영화에 우리나라의 이미지가 잘못 묘사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당시에는  더더욱 한국에 대해 알려진 것이 없어 태국식불상이 소품으로 나오는 등 고증이 잘못된 점도 있고, 더구나 전쟁을 배경으로 하다보니 어둡고 비참한 면이 나오는데 이것은 당시의 제작 여건상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영화 속에 묘사된 서울 거리

 
주인공 헤스 (록 허드슨 분) 대령은 제6146기지 부대장으로 1950년 7월 부임하여 최초의 한국공군 전투기조종사들을 훈련시켜 배출한 교관이었으며, 또한 직접 전투기를 몰고 2백50여 차례나 출격하기도 한 용맹한 파이터였습니다. 이러한 전과로 그는 미국 공로훈장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무공훈장도 수여 받았습니다.

 
                                이승만 전대통령으로부터 무공훈장을 수여받은 헤스

 
특히 그가 조종한 F51 무스탕 제18번기는 동체에 信念의 鳥人이 새겨져있어 더욱 유명한데 현재도 한국공군의 모토가 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실질적인 한국공군의 아버지라 불릴 만한 군사적 업적을 이룬 인물입니다. 그렇지만 헤스대령은 한국전쟁 고아들을 전쟁의 위기에서 극적으로 구출하는데 도움을 준 인물로 더욱 유명하고 영화는 이런 내용을 각색한 것입니다.

 
                              한국 공군의 모토가 된 헤스의 18번기 '신념의 조인'

 
전쟁고아들을 돌보던 황온순 (극중 양은순, 안나 카슈피 분) 원불교 보살은 우연한 기회에 제5공군사령부에 군목인 러셀 브레이즈델 (Rusell Blaisdell) 중령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한국보육원 설립자인 황온순 보살은 한국전쟁 고아들의 어머니이시고 이를 도운 브레이즈델 목사는 한국전쟁의 쉰들러로 추앙받는 분입니다.)

 
                     2001년 한국보육원에서 재회 한 황온순 보살과 브레이즈델 목사

 
그러던 중 중공군의 개입으로 1950년 12월 아군의 후퇴와 서울소개가 결정되자 황온순 보살과 브레이즈델 목사는 고아들을 인천에서 배편으로 피난시키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선편이 부족하여 일부 어린이만 배를 탈 수 있었고 907명의 어린이가 적진에 고립될 위기에 빠졌습니다.

 
                                         수송기에서 내리는 전쟁고아들
                                 (사진은 전송가 촬영을 위해 미국 방문 중의 모습)

 
바로 그때 이런 사정을 접한 헤스 대령이 16기의 C-54수송기를 확보하여 김포공항에서 제주도로 고아들을 공수하는 계획을 실시하였습니다. 중공군이 서울에 입성하기 바로 전인 1950년 12월 20일, 모든 전쟁고아들이 안전하게 제주도로 탈출할 수 있었고 그해 크리스마스를 안전하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작전명 Kiddy Car Airlift로 미군 전사에도 기록된 보기 드문 인도주의 작전이었습니다.

 
                                           황온순 보살과 헤스 대령
 

이러한 내용을 극화 한 것이 바로 영화 전송가인데 영화 속에서 당대 미남 배우 록 허드슨이 어눌한 한국말로 인사하는 것과 은순(황온순 보살)역을 열연 하였던 안나 카슈피 역시 우리말로 전쟁고아들에게 노래를 불러 주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또 영화 속에 고아로 출연한 어린이들 대부분이 영화 촬영을 위해 직접 미국에까지 갔던 한국보육원의 전쟁고아들이었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황온순 보살과 고아들
 

당시의 전쟁고아들 대부분이 지금은 70세 가까이 되거나 고인이 되셨을 만큼 오래전의 일이 되었지만,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 전쟁의 폐허 속에 내버려졌던 수많은 고아들이 급박한 상황에서도 안전한 곳으로 극적으로 이동하여 따듯한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는 기적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은 결코 영화 속의 모습이 아니라 바로 지금 살고 있는 이 땅에서 벌어졌던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의 가슴 아픈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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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마스 이야기 [ 2 ]
         
           1944년 에피소드(
숲속 오두막집에서 있었던 휴전)


1944년 12월, 이른바 벌지 전투(Battle of the Bulge)로 알려진 서부전선에서 독일과 연합군 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던 당시, 벨기에 국경 부근인 독일 휘르트겐 숲속 작은 오두막집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1944년 크리스마스 때 숲속의 작은 오두막집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아헨에서 살다가 연합군의 계속된 공습으로 인하여 이곳으로 피난 온 열두 살 먹은 프리츠 빈켄(Fritz Vinken )은 어머니와 함께 이곳 한적한 오두막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야포의 포격, 폭격기 편대의 비행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던 1944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때였습니다.

 
                                         프리츠 빈켄의 어릴 적 모습
 

비록 쉴 새 없이 포 소리가 이어지는 전쟁터이기는 하였지만 민방위 대원으로 근무 중인 아버지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사랑하는 가족들이 함께 모여 조촐한 크리스마스 파티를 할 수 있다는 기대에 소년 빈켄은 들떠 있었습니다.
 
그때 느닷없이 오두막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촛불을 끄고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눈 쌓인 겨울나무들을 배경으로 철모를 쓴 병사 둘이 유령처럼 서 있었고 조금 뒤 눈 위에는 부상을 당한 병사가 누워 있었습니다.

 
                                    낙오하여 부상당한 미군들이 찾아왔습니다.
 

어머니와 빈켄은 거의 동시에 그들이 적군인 미군들임을 알아챘습니다. 어머니께서는 흥분을 가라앉히려는 빈켄의 어깨 위에 한손을 올려놓고 잠시 동안 가만히 서 계셨습니다. 무장한 그들은 구태여 우리의 허락이 없더라도 강제적으로 집으로 들어올 수 있었으나, 그냥 문 앞에 서서 잠시 쉬어가게 해 달라는 간절한 눈빛으로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중 한 사람과 프랑스어로 말문을 열었습니다. 부대에서 낙오한 그들은 독일군을 피해 사흘이나 숲속을 헤맸고 동료는 부상까지 입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철모와 점퍼를 벗고 나니 그들은 겨우 소년티를 벗은 앳된 모습이었습니다. 비록 적군이었지만 어머니의 눈에는 단지 도움이 필요한 아들 같은 소년들로만 보였습니다.

 
                            지치고 다친 그들은 간절히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어머니께서 " 들어오세요 " 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부상자를 들어다 빈켄의 침대 위에 눕혔습니다.  부상자를 살펴보러 가면서 어머니가 빈켄에게 말했습니다. " 저 두 사람의 발가락이 언 것 같구나. 자켓과 구두를 벗겨 줘라. 그리고 밖에 나가 눈을 한 양동이만 퍼다 다오 "  빈켄은 어머니 말씀대로 눈을 퍼와 그들의 퍼렇게 언 발을 눈으로 비벼 주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독일군들이 오두막집에 왔습니다
.
 

그 사이 어머니는 크리스마스이브때 쓰려고 아껴 두었던 수탉 한 마리와 감자를 가져와서 요리를 만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얼마가 흐른 뒤, 고소한 통닭 냄새가 방안에 가득 차자 또다시 누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 또 미군들이겠지 ) 하는 생각하고 빈켄이 문을 여니 밖에는 네 명의 독일군이 서 있었습니다.
 
순간, 빈켄의 몸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적군을 숨겨 주는 것은 최고의 반역죄로 즉결총살 감이었음을 비록 어리지만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프뢸리헤 바이낙텐 ( 축 성탄 ) ! " 어머니가 인사를 하자 병사들은 날이 밝을 때까지 쉬어 가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 물론이지요 ... 따뜻한 음식도 있으니 어서 들어오셔요. " 막 구워지고 있는 통닭 냄새에 코를 벌름거리던 병사들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순식간 긴장감에 흐르고 독일군과 미군은 싸울 준비를 하였습니다
.
 

그러자 어머니가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씀을 덧붙였습니다. " 하지만 우리 집에 이미 다른 손님들이 와 있습니다 ... 비록 그들이 당신들의 친구는 아닐지 모릅니다. " 그 찰나 독일군들은 총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고 숨어서 문 밖을 살피던 미군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방에 팽팽한 긴장이 감도는 순간 ... 어머니가 다시 침착한 태도로 말을 이었습니다. "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입니다 ... 우리집에서 싸움이 벌어지는 것은 절대로 허용할 수 없습니다 ... 당신들은 내 아들과 같습니다 ... 그리고 저 안에 부상당해 낙오한 미군들도 마찬가지예요 ... 모두가 배고프고 지친 몸입니다 ... 오늘 밤만은 죽이는 일을 서로 잊어버립시다. "

 
             소박한 식사와 함께 작은 오두막집에서 그들만의 휴전이 이루어졌습니다.
 

무거운 침묵이 계속되었고 아마도 그 자리의 어느 누구에게나 그것은 참으로 긴 시간이었을 겁니다. 그것을 깨뜨린 것은 총소리가 아니라 어머니의 명랑한 목소리였습니다. " 뭣들 해요 ? ... 우리 빨리 맛있는 저녁을 듭시다. 총은 모두 이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아요. "  그러자 젊은 독일군과 미군들은 동시에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고분고분 총을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갑자기 손님이 늘어난 관계로 저녁을 더 준비하기 위해 어머니는 빈켄에게 감자를 가져 오라고 하였습니다. 창고에서 식량을 찾는 동안 빈켄은 미군 부상병의 신음소리를 들었습니다. 감자를 가득 안고 돌아와 보니 독일군 하나가 안경을 쓰고 부상당한 미군의 상처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적개심을 풀고 서로를 도왔습니다.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 위생병이군요 ? " 그러자 안경을 쓴 독일 병사가 대답 하였습니다. " 아닙니다. 하지만 몇 달 전까지 하이텔베르그에서 의학을 공부했습니다. " 그는 꽤 유창하게 들리는 영어로, 추위 덕분에 환자의 상처가 곪지는 않았다고 미군들을 안심 시켰습니다.
" 과도한 출혈 때문입니다. 쉬면서 영양을 섭취하면 괜찮을 것입니다. " 서로 간의 적개심이 서서히 가시면서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모두 식탁에 앉았을 때 다시 보니 나의 눈에까지도 군인들은 아주 어리기 보였습니다.

 
                            지치고 힘든 어린 병사들은 눈물을 훔치기 바빴습니다.
 

쾰른에서 온  하인츠와  빌리는 열여섯 살이었고, 스물 세 살 난 하사가 가장 나이가 많았습니다. 하사가 배낭에서 포도주 한 병을 꺼내자, 하인츠는 호밀 빵 한 덩어리를 꺼내 놓았습니다. 어머니는 그 방을 잘게 썰어 식탁 위에 놓고 포도주 반병은 부상당한 미군 소년을 위해 따로 남겨 두었습니다.
 
식사준비가 되자 어머니는 모든 병사들을 식탁에 모아놓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귀에 익은 " 주님이시여, 오셔서 저희들의 손님이 되어 주십시오." 라는 구절을 읊조릴 때 어머니의 눈에 눈물이 맺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곳 전쟁터까지 오게 된 병사들은 그 순간 어린 소년들의 모습으로 돌아가 눈물을 훔치기 바빴습니다.

 
                     그들은 그해 크리스마스때 가장 빛나는 별을 함께 보았습니다
.
 

자정 직전 어머니는 문 밖으로 나가 함께 베들레헴의 별을 보자고 말씀 하셨습니다. 모두들 어머니의 곁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을 찾는 동안 그들에게서 전쟁은 어디론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빈켄(右)과 생존자의 재회모습
 

다음날 아침, 독일군과 미군들은 오두막집 앞에서 악수를 나누었습니다. 독일군 병사가 미군들에게 부대로 돌아가는 길을 상세히 가르쳐 준 뒤, 그들은 서로 헤어져 반대편으로 걸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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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마스 이야기 [ 1 ]
 
                      1914년 에피소드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 쾌속 진공하던 독일군의 진격이 마른전투 (Battle of Marne) 에서 프랑스군의 강력한 반격에 막혀 멈춘 후 전쟁은 소강상태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참호전으로 변한 전선에도 어느덧 눈발과 더불어 크리스마스 이브가 찾아왔고 밤은 점점 깊어져갔습니다.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졌고 어느덧 전선에 크리스마스가 다가왔습니다.

 
춥고 습한 참호 속에 웅크리고 언제 있을지 모를 독일의 공격에 대비하던 영국군들의 귀에 독일어로 부르는 낯익은 노래 소리가 낭랑한 바로 그때 들려 왔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四面楚歌처럼 영국군의 사기를 더 떨어뜨리기 위한 독일의 심리전으로 처음에는 생각 하였다고 합니다.)

 
                              어디선가 크리스마스캐럴이 울려 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노래 소리는 서서히 독일군 참호 쪽 전체로 변해가더니 합창처럼 전선에 울려 퍼져 나갔습니다. 바로, 독일어로 부른 ' 고요한 밤, 거룩한 밤 ' 이었습니다. 그러자 영국군 참호 쪽에서도 이를 영어로 따라 부르기 시작했고, 한 낯 동안 포격이 반복되던 전선이 순식간에 크리스마스캐럴 아카펠라 경연장이 되었습니다.

 
                                밤새도록 치열한 (?) 노래 대결이 있은 후
                           독일의 한 병사가 작은 크리스마스트리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밤새 캐럴이 울려 퍼진 전선에 동이 터오자 한 독일군 병사가 참호 밖으로 나와 영국군 쪽으로 조심스럽게 걸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방아쇠에 손이 간 영국 병사들은 그 독일 병사의 손에 들려있는 것을 보고 총에서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독일병사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작은 나무에 초를 단 크리스마스 트리였습니다.

 
                     양측 병사는 무기를 내려놓고 전선 중간으로 나와 어울렸습니다.
                                       (기념재현 행사와 박물관 기념물)


 
순간 영국군 측에서도 몇 몇 병사들이 참호 밖을 빠져나가 그 병사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고 양측 지휘관은 놀라서 병사들을 제지하였으나 그러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은 양측 참호 중간지대에서 만나 악수를 하고 크리스마스 인사를 나누게 됩니다. No Man's Land 로 불리던 죽음의 땅에 잠시간의 기적이 일어났던 것 입니다.


                              지옥의 전선에 크리스마스의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당시의 극적인 모습이 담긴 실사)


 
참호 밖으로 나온 병사들은 그때서야 양측 참호 사이에 무수히 널려있던 양쪽 병사들의 시체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양측 지휘관들이 시체수습을 위하여 잠시 동안 휴전을 하기로 합의합니다. 영국 병사들을 묻을 때는 곁에 있던 독일군들이 기도하고, 독일 병사를 묻을 때에는 반대로 영국군 병사들이 명복을 빌어주었습니다.

 
    
                                           시신을 함께 수습하는 모습


                 이후 전쟁 기간 내내 시신 수습을 위한 일시적 휴전이 종종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시체가 치워지자 들판에서 양측 병사들의 축구경기가 벌였습니다.  피탄 공이 가득 찬 진흙벌판은 공을 차고 쫓는 병사들의 함성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경기 후에는 병사들끼리 기념사진을 찍고 서로 지급받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교환하였습니다. 그리고 모여서 가족 사진을 서로 보여주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크리스마스의 휴전을 보도한 당시 신문보도
 
그러나 이 사실을 알게 된 양쪽 군 수뇌부는 경악하였고 적군 병사와 어떤 형태의 접촉도 금한다는 강력한 명령이 즉시 내려옵니다. 그리고 일선의 지휘관들에게는 참호를 벗어나 적군 병사에게 접근하는 경우에는 이적행위자로 간주하여 현장에서 총살해도 좋다는 지침이 하달됩니다.

 

 
잠시나마 평화로웠던 1914년의 크리스마스가 그렇게 지나고 다시 아침이 찾아오자 포탄이 상대편의 머리위로 떨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최전선의 병사들에 의하여 기적적으로 멈춰졌던 전쟁은 명령에 의해서 다시 시작되어졌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크리스마스의 평화는 결코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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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다른 공포 EFP
 
 

이치에 맞지 않는 불합리한 상황을 설명할 때 모순 (矛盾) 이라는 고사성어를 씁니다. 단어 이면에 담겨있는 정확한 의미는 차치하고 단지 뜻으로만 풀이한다면 모순은 창과 방패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한마디로 무기의 역사와 다름없습니다. 전투도구인 무기는 살상을 목적으로 하지만 반드시 하나의 전제조건이 있는데 나의 피해는 막고 적에게만 피해를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창과 방패, 어쩌면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무기는 남을 공격하는 공격용무기와 나를 보호하는 방어용장비로 나뉘어 함께 발달하여 왔습니다. 이것은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적도 함께 추구하는 공통의 명제인데, 나의 공격 도구는 상대의 방어망을 뚫어야하는 반면 나의 방어장비는 상대의 공격을 무력화시켜야 한다는 상반된 조건을 만족시켜야 합니다. 말 그대로 모순입니다.

 
              공격은 반드시 수비를 뚫어야하지만 수비는 공격을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충족시켜야 하는 가장 대표적인 무기가 바로 전차입니다. 전차는 단 한발로도 적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화력을 가져야 하는 반면, 최전선을 휘젓고 다니면서 활약하는 무기답게 상대의 어떠한 공격도 너끈히 물리쳐야하는 방어력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상과 달리 이 두 조건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막강한 화력과 두터운 장갑을 자랑하는 M1A1 전차
 
보통 전차의 장갑능력이 향상되면 이를 깨뜨리기 위한 대전차무기가 개발되고 다시 이것은 전차의 방어력 향상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무한반복의 과정을 계속합니다. 이처럼 ' 역사는 도전과 응전 ' 이라는 역사학자 토인비 (Arnold J. Toynbee) 의 말에 가장 부합되는 예가 바로 무기의 발달과정입니다. 그리고 이런 경향은 정규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테러와 대테러 전술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전차의 발달과 더불어 대전차무기의 성능도 향상되었습니다.

 
일전에 소개한 IED (Improvised Explosive Device 급조 폭발물) 도 최초에는 일반 차량에 대한 기습공격을 목적으로 하였지만 험비 (HMMWV) 같은 경장갑차량이 등장하여 그 효과가 감소되자 폭발력과 살상력이 초기 형태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증대된 무서운 IED들이 속속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제는 중장갑을 두른 MRAP (Mine Resistance Ambush Protected) 처럼 새로운 이동 정찰 수단이 개발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방어력을 증강하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방어력 실험중인 MRAP ( 한대에 10억이 넘는 고가의 장비입니다 )
 

IED는 주로 매설되어 있다가 방어력이 취약한 이동차량의 하부를 공격하는 형태가 주로 쓰이는데 이 때문에 차량의 하부를 V자 형태로 가공하여 폭발력을 분산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공격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방어력이 증대되자 테러조직은 단순 폭발을 이용한 공격수단 외에 장갑을 완전히 관통시켜 파괴하는 EFP (Explosively Formed Penetrator 장갑 관통 폭발형 관통자) 라고 불리는 새로운 공격수단을 활용하기에 이르렀으며 최근 그러한 추세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라이너가 덧대어져 있는 EFP의 모습

                                     이라크에서 적발된 EFP 비밀제작공장
 

전통적으로 중장갑을 관통하기 위해서는 성형작약탄 (HEAT) 이 사용되는데 이를 이용한 새로운 형태의 IED가 바로 EFP입니다.  성형작약 앞에 구리 등으로 만들어진 라이너 (Liner) 를 덧대어, 기폭 시 라이너가 고속으로 원뿔형으로 변형 사출되면서 표적을 관통하는 구조인데, 가내수공업 형태로도 제작이 가능할 만큼 구조가 단순하지만 그 능력은 중장갑도 뚫을 정도로 강력합니다.

 
                                      EFP에 공격당한 MRAP의 모습
 
                                    수색하여 발견한 EFP를 제거하는 모습
 

결국 이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전차 등에 사용되는 반응장갑 같은 특수한 장갑장비가 필요하나 현실적으로 모든 이동차량을 이렇게 할 수도 없으며 사실 이런 점은 대테러 작전운용 경험이 많은 미군도 고민거리입니다. 결론은 EFP를 포함한 IED는 방어력 증대 외에도 사전에 치밀한 수색으로 발견하거나 또는 다양한 재밍 (Jamming 전파교란) 기술을 이용하여 원격 조정 기폭장치를 무력화시키는 여러 가지 방법이 병행되어야 그 위험을 감소시킬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라파엘社의 대 IED 레이저 요격 씨스템
 

도둑 하나를 열 명의 경찰이 잡기 힘들다는 격언처럼 테러와 이를 막기 위한 준비는 상당히 고단한 줄다리기이고 어려운 과정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도둑을 잡기 힘들다고 경찰이 자신의 임무를 결코 포기할 수 없듯이, 비록 EFP와 같은 무서운 테러무기 또한 효과적으로 대응할 여러 가지 방법은 분명 존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역사처럼 무기도 도전과 응전의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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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도 모르게 너무나 중요한
 

 
과거에도 물론이거니와 디지털 전장화 되어가는 장차전에서도 통신의 중요성은 크다고 하겠습니다. 아니 유사 이래 전쟁터에서 통신의 중요성이 강조되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과연 통신이 두절된 상태에서 전투 자체가 가능할지요? 열심히 싸워 이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통신이 두절되어 양익이 무너졌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면 얼마나 황당할까요?

 
                          앞만 보고 싸우기 위해서 더더욱 통신은 중요합니다.
 

막상 전쟁사를 들여다보면 통신분야는 간혹 조연정도로 등장하지만 지휘는 반드시 통신을 통하여 이뤄지기 때문에 그 어떤 병과 못지않게 그 중요합니다. 흔히 일선의 전투부대에 비해 지원계통 부대에 대한 세인의 관심이 적지만 통신도 엄연히 중요한 지원 수단입니다. 흔히 위대한 장군은 싸움에 임하기전 보급부터 생각한다는 명언처럼 전쟁은 전투부대 단독으로 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통신의 확보여부가 승패를 좌우 합니다
 

통신체계의 미비로 실패한 대표적 작전이 제1차 대전 당시 서부전선에서 독일이 슐리펜계획(Schlieffen Plan)에 따라 진행하였던 공격전이었습니다. 애초에 수립된 계획은 훌륭했지만 이를 실행에 옮기는데 있어 각 부대 간 통신이 원활히 이뤄지지 않았고 더불어 군 최고수뇌부가 이런 정보를 쉽게 취합하여 정확히 분석하는데 실패하여 마른에서 진격이 멈추었고 결국은 패전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급격한 진지이동이 많은 야전에서 통신확보는 중요합니다
 

기갑부대의 아버지로 불리는 독일의 명장 구데리안(Heinz Guderian)은 통신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기갑부대를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해서 전차에 무전기를 탑재하도록 조치하였습니다. 너무 당연한 것이라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제2차 대전 초기인 1940년 당시만 해도 연합군 측의 전차는 깃발로 신호를 보내는 구닥다리 시스템이었습니다. 그러니 전쟁 초 연합군이 독일의 상대가 되지 못하였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당연해 보이는 저 통신장비가 처음부터 전차에 탑재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
 

사실 통신의 중요성은 군뿐만 아니라 일반 사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마치 공기처럼 평소에 원활히 소통되면 그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이를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조금이라도 이상이 발생하면 난리가 나고 이를 관리하는 기관에 대해 온갖 비난이 난무하고는 합니다. 그만큼 우리 삶이 통신과는 떼어놓고 말하기 힘든 세상이 되었고 통신망의 마비는 국가혼란을 가져올 정도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이 한시도 통신과 떼어놓고 말하기 힘든 세상이 되었습니다
.
 

때문에 이와 같이 중요한 통신망은 전쟁 시 항상 1순위 타격목표가 됩니다. 반면 우리의 통신망은 온전히 지키는 것 또한 두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유사시에 복구하는 능력도 중요하지만 다양한 통신망 체계를 사전에 갖추어 다양한 돌발변수에 대비하는 능력 또한 상당히 중요합니다. 이제는 생활의 일부가 된 인터넷도 핵전쟁으로 인하여 통신망이 파괴되었을 때를 가정한 비상 통신체계인 ARPANET에서 유래 되었을 정도입니다.

 
                    핵전쟁에서 통신망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터넷이 시작됩니다.
 

오래전 신문에서 읽은 것 같은데 군 훈련 시 핸드폰 통신을 이용한 야전 훈련을 하였다는 보도를 얼핏 보았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기존 군통신망과 별개로 민간 시설을 이용한 별도 통신망을 구축하기 위한 실험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한국의 통신기술 덕분에 한국군의 통신기술 또한 세계 최고 수준으로 올라서기를 기대하며 당연히 그렇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분들의 노고가 있기 때문에 통신강국 KOREA 가 있습니다
 

현재도 묵묵히 뒤에서 우리 사회의 신경망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발전시키고 유지 보수하여 주시는 모든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님들의 숨은 노고가 있기 때문에 통신강국 KOREA가 있는 것이라 생각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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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복이야기 [끝] 
                    이제는 말 할 수 있다
 

혹시 똘망똘망하던 신입사원 미스터 김이, 평소에 예의바르던 모범맨 이주임이, 골부처같이 묵묵하던 박대리가 갑자기 몸에 탈이 나거나 술 먹고 취하지도 않았는데 한순간에 이성을 잃어버린 것처럼 어떻게 저렇게 바뀔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만큼 완전히 변한 모습을 느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

 
                                  종종 완전히 돌변한 사람들을 보고는 합니다
 

바로 예비군 훈련에 소집된 자원들에게 발견할 수 있는 흔한 모습입니다.  양복이나 작업복만 입혀놓으면, 근무처에서 오다가다 만나게 되면 앞에서 말한 것처럼 흠잡을 데 없이 멀쩡하던 사람들이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 군복만 입혀놓으면 순식간 눈빛이 개심치레해면서 최대한 불량한 모습으로 급속히 변화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멀쩡한 사람이 군복만 입혀 놓으면 순식간에 돌변합니다.
 
따듯한 봄날에 예비군 훈련 중에도 야전상의까지 껴입고도 추워서 몸을 웅크리고 틈 만나면 졸면서도, 막상 식사시간 때가 되면 마치 걸신들린 것처럼 식당을 향해 우사인 볼트를 능가할 만큼 전력 질주하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아시겠지만 군대의 3고가 춥고, 배고프고, 졸립고인데 이것은 예비역이건 현역 ( 특히 고참순 ) 이건 군복만 입혀놓으면 생기는 무시무시한 병입니다.

 
                               군복을 입으면 춥고, 배고프고 졸립니다.
 

이 병의 구체적인 증세는 한겨울에 반바지만 입는 불끈남이라도 군복은 아무리 껴입어도 춥고, 평소에 다이어트하느라 적게 먹는 신중남도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픕니다. 더불어 전날 충분히 잤어도 틈 만나면 졸기 바쁩니다. 거기에 더해 아무데나 침 뱉고 건덩건덩 대며 무기도 제대로 관리하지 않고 지나가는 아줌마만 보아도 자동으로 고개가 돌아가고 틈 만나면 짤짤이를 하려드는데, 이거 참 이상한 증세 아닙니까?

 
                               


그렇다면 군복과 군대 3고 및 자세불량과의 상관관계를 조사하지 않을 수 없는데, 틀림없이 우리군의 전투 능력을 반감시키기 위하여 가상적국의 스파이들이 군복제조과정에 몰래 침투하여 특수한 약품을 첨가한 것이라는 결론에 도출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복을 입었을 때는 허우대 멀쩡한 사람들이 군복을 입고 이렇듯 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전투력을 무력화 시키는 약품이 첨가되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새 군복을 입은 신병 때는 전혀 약효가 보이지 않다가 고참을 거쳐 예비역이 되어 무시무시한 증세가 절정에 이르는 것을 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그 약발이 강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초강력 세제로 빨아도, 무수한 시간이 흘러도 그 약효가 없어지지 않고 잠복하고 있다가 어쩌다 예비군 훈련 때 군복만 입으면 즉시 무서운 병이 도지게 만들어 버립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이 예비군의 본 모습은 아닙니다
 

원래 군이라는 조직은 고참으로 갈수록 전투력이 뛰어나고 예비역은 훌륭한 전략 전투자원이 되는 법인데 이렇듯 군 전력의 중추인 고참과 예비역들의 영혼을 좀먹도록 암약하는 스파이들의 활동이 계속된다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철저하게 막아야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니면 하루속히 군복에 침투한 무시무시한 독극물을 제거하는 해독제를 만들어야 되지 않을까요?

 
          전략 예비전력인 멋진 예비군들은 실제 훈련에 들어가면 진정한 포스가 작열합니다.

 

만일 군 당국에서 힘들다면 이제는 이런 공공연한 군사비밀을 국민들에게 솔직히 공표하여 군복 공장에서 암약하는 간첩을 잡아내거나 해독제 개발에 모든 역량을 결집하여 적극적으로 해결하여야 하겠습니다. 네? 그런데 죽어도 스파이를 못 잡고 해독제도 만들 수 없을 것이라고요? 왜요? 이렇게 증거가 충분한데 왜 못 잡죠?  이상도 하여라 ~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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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복이야기 [ 3 ] 
              패션 디자이너가 만들었던 군복

               
 
남자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군대이야기를 싫어하는 여자들처럼 설령 밀리터리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척 보면 ‘ 아! 저것은 어느 나라 군대 ’ 라고 쉽게 알아 볼 수 있는 군대가 있습니다. 바로 제2차 대전 당시 독일군입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만큼 인상적인 독일군의 군복 때문이기도 합니다.

 
                         제2차 대전 당시 독일군 군복은 특징적인 멋이 있습니다
 

비록 인류사에 기록 된 나치의 용서받지 못할 범죄 행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제2차 대전 당시의 독일군이 뚜렷하게 기억되는 이유는 일당백의 전투력을 발휘하였던 뛰어난 작전능력과 프라모델의 단골로 등장하는 멋있는 각종 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불어서 너무나 멋있는 군복이 독일군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디자인 측면에서 여타 군대와 구별되는 뭔가 독특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제2차 대전 당시의 독일군복이 지금의 군복과 비교해 봐도 전혀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더 멋있어 보이는 이유는 나름대로 디자인에 신경을 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나폴레옹 시대 이후 제1차 대전까지 사용된 시각적으로만 화려한 울긋불긋한 군복처럼 비실용적인 군복도 아니었습니다. 한마디로 외형은 물론 기능까지도 훌륭하였던 시대를 초월한 명품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단지 행사용 복장도 아니었습니다
 

1923년 독일의 메트징겐(Metzingen)에서 디자이너 겸 의류제작자인 휴고 페르디난트 보스(Hugo Ferdinand Boss 1885~1948)는 몇몇의 직원들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딴 휴고보스AG(Hugo Boss AG)라는 조그만 의류 업체를 설립하였는데, 우연한 기회에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 전부터 이미 나치의 사병이 되다시피 한 돌격대(SA)에게 유니폼을 공급하여 주게 되었습니다.

 
                    SA유니폼을 공급하면서 휴고보스AG는 나치와 관련을 맺습니다

 
정권을 잡은 후 베르사유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재군비를 선언한 나치는 새롭게 군대를 재건하면서 독일국민들에게는 자신감을 심어줌과 동시에 잠재적 적국들에게는 강력한 인상을 안겨줄 수 있는 상징이 필요하였습니다. 바로 이때 휴고보스AG가 납품한 SA유니폼에 크게 만족하였던 나치는 재건된 독일군의 군복을 휴고보스AG에게 제작 의뢰하였습니다.

 
                      휴고보스의 군복은 강렬한 이미지를 심어주는데 성공합니다

 
단순하면서 실용적이고 인상적인 남성복 디자인에 일가견이 있던 휴고보스AG는 독일군, 친위대(SS)는 물론 정부기관의 각종 유니폼을 만들어 공급하였고 이것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제2차 대전의 독일군을 특징하는 이미지로 남게 되었습니다. 아래 사진처럼 패션의 나라라는 프랑스의 당시 군복과 비교하여 보아도 하늘과 땅차이의 멋있고도 특징적인 디자인이었습니다.

 
         1930년대 독일 친위대(上)와 프랑스 군대의 모습인데 확연한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휴고보스AG는 전쟁 중 어마어마한 군복을 공급하느라 수많은 유태인, 적군포로 및 점령지역의 외국인 등을 강제로 동원하였는데, 이러한 점이 종전 후 전범으로 기소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비록 휴고 페르디난트 보스가 나치의 수혜를 많이 입은 기업인으로 재판을 받았지만 전쟁의 발발이나 전쟁범죄와 그리 관련이 없었던 관계로 80,000마르크의 벌금만으로 면죄 받았습니다.

 
                             휴고보스AG도 전후 처벌을 피하기 힘들었습니다.
 

전쟁과 관련이 많았던 벤츠, BMW, 크룹, 라인메탈 등 독일의 수많은 기업들이 현재도 세계 일류의 기업으로 남아서 명성을 떨치는 것처럼 휴고보스AG 또한 세계적인 패션기업으로 존속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의류뿐만 아니라 시계, 향수 등 여러 패션 관련분야에 진출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남성복에 특히 강점이 있다고 알려져 있는 것을 보면 그 유구한 전통이 살아 있는 것 같습니다.

 

                               현재도 휴고보스AG는 세계적인 패션기업입니다

 
이와 비교하면 우리나라의 군복은 현역군인, 매니아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로부터도 그다지 멋있다는 평가를 받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august가 군복무를 하던 오래전의 밋밋한 군복에 비하면 그래도 많이 좋아지기는 한 것 같은데, 아쉽게도 실용적이거나 상무정신을 드높일 만큼 위엄 있는 모습을 보이는 데는 2% 부족한 것 같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국군에게 멋있고 기능도 좋은 군복이 공급되기를 기원합니다
 

기능이 최우선 선택기준인 군복이 반드시 멋있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시대를 초월한 명품으로 손색없는 휴고보스AG의 군복처럼 착용한 군인들에게는 자부심을, 국민들에게는 자긍심을, 상대에게는 두려움을 느끼게 해줄 수 있는 군복이 국군에게 보급되기를 바랍니다. 뛰어난 디자이너들이 많은 섬유산업의 강자인 우리나라에서 결코 하지 못할 일은 아니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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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복이야기 [ 2 ] 
                 참호전에서 나온 名品 
 

 
저절로 두툼한 외투를 찾게 되는 쌀쌀한 계절이 되었습니다.  신사들과 새침때기 숙녀들 중에 흔히 바바리(Burberry)라고 불리는 코트로 한껏 멋을 내고 종종 걸음으로 갈 길을 재촉하는 분들도 많아졌습니다.  흔히 두툼한 점퍼류의 외투에 비하면 방한 능력이 떨어지지만 미적 감각을 추구하는 정장차림의 멋쟁이들에게 바바리만큼 잘 어울리는 훌륭한 패션소품도 없습니다.

 
                              바바리코트는 여성 정장에도 잘 어울리는 외투입니다.
 

그런데 이런 멋진 외투가 종종 바바리맨으로 불리는 변태들의 도구로 사용되어 사회문제가 되고는 합니다. (딸 키우는 아빠의 입장에서 하루라도 빨리 못된 변태들이 박멸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무리 비싸고 멋진 옷이라도 이상한 목적으로 사용하면 천박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옷이 제대로 된 주인을 만나야 빛난다는 말은 만고의 진리라고 생각됩니다.

 
              학교근처에서 바바리맨을 체포하는 장면이라고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입니다.
                       하루 빨리 저런 못된 변태들이 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바바리는 고유명사입니다.  원래 이런 종류의 의류를 트렌치코트(Trench Coat)라 하는데, 영국의 세계적인 패션 메이커인 바바리社에서 만든 트렌치코트가 우리나라에서는 대명사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상업적 성공을 거둔 제품 중 이런 케이스가 많은데 예를 들어 해당 아이템의 유명제품인 포크레인(Forkcrane)이나 호치키스(Hotchkiss)는 굴삭기(Excavator)와 스테플러(Stapler)의 대명사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영화 카사블랑카에서 바바리사의 트렌치코트를 입은 험프리 보가트
                  아마 트렌치코트가 가장 멋있어 보이는 명장면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
 

그런데 하필 이처럼 멋진 코트에 뜬구름 없이 참호를 뜻하는 트렌치라는 단어가 붙게 되었을까요?  의외라고 생각될지 모르겠지만 현대 도시인 최고의 패션 정장인 트렌치코트는 말 그대로 참호용 군복이었습니다.  오늘날 신사들의 정장이나 소품 중에 의외로 밀리터리와 관계된 것이 많은데 트렌치코트도 그러하며 오히려 다른 소품에 비해 그 역사도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이 어지러운 참호와 멋진 패션 소품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1914년 제1차 대전 초기, 독일의 진격이 프랑스의 마른 부근에서 멈춰 진 후 서부전선은 종전 때까지 지리 한 참호전으로 일관하게 됩니다.  이러한 참호전은 불과 수 백 미터의 전진을 위하여 수십만 군인의 어처구니없는 희생도 마다하지 않았던, 전쟁사에서 가장 잔인하고 한심한 전투의 표본으로 기록되는데 대표적으로 솜전투, 베르덩전투, 이프르전투 등을 들 수가 있습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참호에서 덧없이 죽어갔습니다.
 

참호를 파고 대치한 양측 사이의 땅을 흔히, No Man's Land라고 지칭 할 만큼 그야말로 참호전은 현실에 나타난 지옥이었습니다.  춥고 습한 지옥 같은 참호에 머물며 전투를 벌여야 했던 군인들을 위해 방습 및 보온기능이 있는 군납외투가 납품되었는데 이때부터 이를 트렌치코트라고 불렀습니다.  그중 영국군들이 사용하던 것이 좋다고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나면서 영국군의 트렌치코트는 일약 세계적으로 유명한 외투가 되었습니다.
 

                  습하고 추운 참호에서 싸우는 군인들을 위한 외투가 만들어졌습니다.
 

바바리社외에도 또 하나의 메이커인 아쿠아스텀(Aquascutum)社의 트렌치코트도 상당히 호평이 좋아 당시 영국군 군수납품시장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습니다.  국내에는 바바리가 최고의 브랜드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영국이나 유럽에서는 아쿠아스텀의 트렌치코트도 꽤나 유명합니다.  어쨌든 종전이 된 후 그 기능성 때문에 많은 이들이 트렌치코트를 애용하게 되어 오늘날까지 중요한 패션 의류가 되었습니다.

 
                               바바리사의 트렌치코트를 착용한 영국군 장교
 

오늘날 세계의 멋쟁이들이 외투로 입고 다니는 트렌치코트는 말 그대로 전쟁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대다수 현대인들이 참호전을 치르는 심정으로 트렌치코트를 입고 출근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트렌치코트는 외부에서 활동이 많은 영업사원들이 착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분들의 삶을 보면 세상 살아가는 자체가 참호전 못지않다는 느낌을 받고는 합니다.
 
바바리맨을 검색하다 보니 재미있는 사진이 있어 몇 장 소개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런 우스운 모습과 달리 못된 변태들은 하루 빨리 사라져야 할 사회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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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열혈아 트랙백 0 : 댓글 2

                                                         군복이야기 [ 1 ]
                 눈에 띄지 말란 말이야


전쟁 자체가 살상을 피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노력여하에 따라서는 인명의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전쟁을 일선에서 지휘하는 정책 당국과 지휘관들의 역할은 상당히 중요한데, 만일 이들이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한다면 적보다 먼저 제거 되어야 마땅합니다.

 
                 전쟁은 살상을 피할 수 없지만 노력여하에 따라 줄일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면 너무나 컬러풀한 군복으로 멋을 낸 군인들이 일렬로 도열하여 진격과 방어를 하는 장면이 나오고는 합니다. 그런데 이런 시대극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기는 합니다만 너무 적의 눈에 잘 띄는 울긋불긋한 군복을 입은 모습은 사실 상당히 생소합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를 재현한 사진
 

적에게 이쪽의 세력(?)이 크다는 것을 은연중 과시하기 위해서 그랬다는 설(說)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당시의 통신 사정과 관련이 많습니다. 눈과 귀 그리고 전령의 소식으로만 정보를 얻을 수밖에 없는 당시의 지휘관들은 작전을 원활히 구사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아군과 적군을 쉽게 구별하여야 했는데, 그런 이유 때문에 눈에 짤 띄는 군복을 입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를 배경으로 한 시뮬레이션 게임의 화면인데
                 피아를 구분하여 지휘하기 위해 실제같이 형형색색의 군복을 입혔습니다.
 

더구나 당시에는 칼과 창을 함께 사용하였을 만큼 아직까지는 총포의 정확도가 상당히 떨어지고 사거리나 성능도 지금과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부족하였기 때문에, 병력 배치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을 만큼 눈에 잘 띄는 군복을 입어도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더불어 매복이나 기습보다 정면 대결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던 시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한마디로 노출을 시키고 싸워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무기의 성능도 뛰어나지 않아 군복은 그리 커다란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나폴레옹 전쟁 때까지는 이러한 전장의 패션쇼를 그런대로 용서(?)하여 줄 수가 있지만 무기의 성능이 비약적인 발달이 이뤄진 제1차 대전 당시에도 이러한 전통이 그대로 답습되고 있었습니다. 1870년의 보불전쟁이후 최초로 벌어진 전면전이라서 평화를 너무 오래 만끽하였는지는 몰라도 당시의 전쟁 당국자들의 사고방식은 나폴레옹시대에서 멈춰져 있었습니다.

  
                       제1차 대전 당시 울긋불긋한 군복을 입고 돌격하는 프랑스군
                          놀랍게도 100년 전의 전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다음의 사진들은 제1차 대전 당시 각국의 군복입니다. 참호를 넘어 돌격하는 군인들이 입고 있는 눈에 잘 띄는 울긋불긋한 패셔너블한 군복은 적들에게 " 나 여기 있어! 맞춰봐라 ! " 고 알려주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는 설령 그렇게 입어 눈앞에 보여도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는 공격할 방법이 없었지만 이미 시대는 원거리 저격이 가능한 고성능 소총과 기관총이 일선 무기가 되어 있었습니다.

 
                                       제1차 대전 당시의 독일군
                                       제1차 대전 당시의 러시아군
 
                                       제1차 대전 당시의 영국군

                                      제1차 대전 당시의 프랑스군
 

결국 눈에 잘 띄는 멋있는 군복을 입은 병사들은 상대에게 좋은 표적이 되었고 전선을 무수히 많은 피로 적셔내려 갔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이전의 전쟁과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사상자가 많았던 이유에는 이러한 고루한 복식문화의 전통을 가지고 있던 군복도 한 몫 하였다고 감히 단언하고 싶습니다.

 
 

비록 얼마가지 않아 잘못을 깨닫고 허둥지둥 대책을 세우기 바빴지만, 당연한 상식을 깨닫기까지 덧없이 사라진 고귀한 생명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의장대에게나 어울릴 이런 군복을 입혀 군인들을 사지로 몰아낸 당시의 전쟁지도부는 지탄을 받아 마땅합니다. 전쟁은 절대 멋으로 하는 것은 아니고 패션쇼 경연장도 아닙니다. 그런데 혹시 지금도 너무 과거의 전통에 집착하여 이와 유사한 실수를 반복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반문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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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비 트랙백 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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