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거 아니면 존속 ?
 
 

외국에 나가 바닷가를 가보신 분들이면 아마 공감하시는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하게 보지만 외국 바닷가에서는 보기 힘든 것이 있는데, 바로 사람이 접근하기 쉬운 해안을 따라 쭉 쳐져있는 철조망입니다. 이것은 밀수나 밀입국을 막기 위한 부수적 목적도 있지만 주로 북한의 대외 침투를 저지하기 위해 설치된 군사시설물입니다.

 
                외국의 경우 대부분 해안가의 출입이 자유롭습니다 (중국 칭다오 해변)
 

전방이야 원래 민간인 출입제한이 많은 군사작전지역이지만 후방의 해안가 대부분도 철조망으로 막혀있어서 출입에 제한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들은 이것을 오래 동안 어쩔 수 없는 운명으로 생각하고 많은 불편이 있어도 감내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여름철 일부기간만 열리는 천혜의 비경인 동해안의 철조망을 보면 그런 아쉬운 심정이 더합니다.

 
                  아쉽게도 우리나라의 경우 해변 출입이 자유롭지 않은 곳이 많습니다
 

그런데 최근 안보환경의 변화와 발맞추어 당국도 철조망의 필요여부를 엄격히 심사하여 새로운 해안경계 체계를 갖춤과 동시에 적극적으로 철책을 제거하여 가까이하기 힘들었던 해안을 국민에게 돌려주는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하였고 많은 국민들도 군 당국의 이러한 시도를 반기고 있습니다.

 
                       최근 철책이 제거되어 접근이 용이하게 변한 일부 해안가
 

그런데 군 당국과 관련 정책당국에서는 철책 철거를 긍정적으로 검토하는데 반하여 혜택을 누릴 민간에서 오히려 계속하여 철책을 존속시키기 원하는 지역도 있습니다. 바로 천혜의 습지인 한강하구 지역입니다. 아시다시피 한강하구의 일부는 자연적으로 DMZ을 이루기도 하는 등 군사분계선과 가까워 후방의 해안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중히 경계되고 있는 지역입니다.

 
                              DMZ의 일부이기도 한 한강하구의 모습과 습지지역
 

역설적이지만 전 세계에서 DMZ만큼 자연보호가 잘 된 지역도 보기드믑니다. 전쟁당시 포격으로 한번이상 속살이 뒤집혔을 만큼 엄청난 변화가 있었지만 1953년 휴전이후 지금까지 무려 양측 합하여 엄청난 화력을 갖춘 100만 대군이 철책으로 사람들의 출입을 엄중히 막고 있어 지구상에 인위적으로 조성된 최대의 원시적 자연지대라는 명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히려 환경단체에서 한강하구의 철책 철거를 반대하고 있습니다
 

서해바다와 만나는 넓은 한강하구도 전 세계에서 보기 힘들만큼 사람의 발길이 오래 동안 닫지 않은 엄청난 규모의 습지와 갯벌지역으로 철새와 수상생물의 보고이자 강변식물들의 대규모 군락지입니다. 그러한 한강하구에 사람이 출입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 바로 한강하구의 철책선이고 이 때문에 자연보호단체에서는 이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철책선 개방을 적극 반대하고 있습니다.

 
                               어느 쪽 주장이 맞는지 판단하기 힘들만큼
                               우리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딜레마입니다
 

전쟁 때문에 철책이 생겼지만 그만큼 자연이 보호되었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마치 인간의 발길이 폭탄보다 더 무서운 자연파괴범이라는 확실한 증거라고도 생각됩니다. 이러한 점은 통일 후 DMZ의 철책을 걷어낼 때도 분명히 갑론을박이 될  주제 같은데 아마 가장 좋은 것은 철책도 없고 자연도 보호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필자의 이러한 생각이 말도 안 되는 너무 이상향의 이야기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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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랑치고 가재잡고
 
 

돌처럼 급하면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자연물을 무기로 사용할 수도 있지만, 오랜 세월동안 지구상에서 사용 중인 무기는 예외 없이 인간의 손을 거쳐서 만들어졌습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무기도 상업적인 거래가 이루어지는 공산품의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일반 공산품과 차이라면 공급과 수요가 제한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최신 전투기인 F-35 조립공장. 보통의 일반 공장처럼 분주한 모습입니다.

 
공급측면에서 볼 때 대다수의 무기는 일반 공산품처럼 이윤을 남기려는 목적을 가진 사기업에서 제작하여 공급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다만 무작정 만들어서 공급하는 것이 아니고 국가의 철저한 통제와 감시 하에 공급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에 비하여 수요처는 상당히 한정되어 있습니다.

 
                          무기는 통제 하에 제작 공급이 되지만 이를 제작하는
                             사기업이 이윤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 제2차 대전 당시 탱크를 생산하여 엄청나게 성장한 크라이슬러 )

 
총기거래가 허용되는 미국처럼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의 상거래 행위로 개인이 무기를 구매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무기는 군, 경처럼 특정 목적으로만 이를 사용하고 또한 통제가 가능한 기관이 수요처입니다. 하지만 불법적인 폭력, 테러를 목적으로 하는 개인이나 단체에 무기가 음성적으로 공급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한데, 이 경우가 사실 가장 큰 문제입니다.

 
              무기가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게 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따라서 여타 공산품과 달리 무기는 단지 수요가 있다고 공급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즉, 돈이 있다고 무기를 함부로 구매할 수도 없을 뿐더러, 반대로 생산자는 무턱대고 무기를 팔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무기의 원초적인 존재 이유가 살상과 파괴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파괴력이 강한 무기는 거래가 엄격히 금지되고 있으며 이것은 국가 간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일부무기는 돈을 준다고 살수도 없고 팔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무기는 경제적인 요소도 중요하지만 정치, 외교적인 변수가 국가 간 거래에 있어 최우선 고려대상이 됩니다. 최신 무기의 경우는 아무리 우방이라도 공급이 불가하거나, 공급이 이루어지더라도 성능이 하향조정 된 다운그레이드 형이 공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최신 무기가 아니더라도 국가 간의 거래가 활발히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적성국이라면 결코 거래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란에게 공급되기로 하고 제작도중 이란 혁명으로 인하여
                       미국과 국교가 단절되자 금수 조치 된 키드(Kidd)급 구축함

 
때문에 무기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국가라면 정치, 외교적으로 우방이라 단정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공군의 차세대 주력기 도입 계획이었던 FX프로젝트에서 미국과 프랑스가 치열하게 경쟁을 벌였던 예에서 보듯이 단지 우방이라는 사실만으로 무기의 거래가 쉽게 성사되는 것 또한 아닙니다. 이것은 역으로 우리가 해외에 무기를 수출하는 것 또한 쉽지 않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FX사업에서 치열한 경쟁 끝에 도입된 F-15K Slam Eagle

 
터키에 공급된 K-9자주포나 인도네시아에 수출된 KT-1훈련기도 있지만 사실 방위산업의 역사가 일천한 우리의 경우 무기를 외국에 공급한 예가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단지 무기를 상품으로만 따진다면 품질이나 가격에서 충분히 경쟁력이 있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 외에도 여러 요소 때문에 쉽게 외국으로 수출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터키에서 K-9을 라이센스 생산한 T-155 Firtina

 
그런데 비록 국산은 아니지만 국군이 운용했던 노후 장비들이 우방국들에게 저렴하게 또는 무상으로 공급되는 경우가 점차 증가하고 있습니다. 최근 보도된 것처럼 해병대에서 사용하던 구형 LVT7A1 상륙장갑차 10대가 인도네시아에 무상 양도되기로 한 것을 비롯하여 필리핀과 가나에 공급되거나 공급 예정된 고속정, 페루에 제공되기로 한 A-36공격기 등이 그러합니다.

 
                                최근 인도네시아에 양도가 결정된 LVT7A1

 
이러한 예는 국군의 유휴 장비를 원활하게 도태시킬 수 있으면서도 지원국에게는 추후 국산 방산물자를 수출하는데 긍정적인 효과를 낼 수 있도록 사전에 인연을 다져놓는 좋은 정책이라 생각됩니다. 사실 보관 및 유지에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드는 노후무기를 단지 보유만한다고 전력이 증강되는 시기는 지났고 이는 첨단과학군을 지향하고 있는 우리의 경우에도 당연히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최근 해외 수출을 위해 노력 중인 T-50

 
따라서 시의 적절하게 최신 무기를 도입함과 동시에 노후 장비를 제식무기에서 탈락시켜 이를 외교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상당히 긍정적인 정책이라 생각됩니다. 국군이 보유 중인 구형 장비의 대외 지원이 국군의 전력을 보다 첨단화시키면서도 우방과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고 이후 국산방산 물자의 수출에도 기여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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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된장!  우리 이긴 것 맞아?
 
 
 
지난 11월 11일은 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제1차 세계 대전이 종전한지 91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와 관련한 작은 생각입니다.

 
                     우리에게 낯설지만 제1차 세계대전은 지옥의 전쟁이었습니다.
 

이렇게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격투기 선수인 추성훈과 최홍만이 경기를 벌였습니다. 추성훈이 경기개시와 더불어 최홍만을 흠씬 두들겨 팹니다. 최홍만이 종종 반격을 하였지만 라운드가 계속 될수록 추성훈의 일방적인 우세 속에 경기가 진행되었고 결국 최홍만은 너무 맞아서 두 눈이 부어서 감길 정도로 수세에 몰렸습니다.

 
         실컷 몰리다가 회심의 반격을 하려는데 상대가 기권하여 버리면 조금 황당하겠죠?
 

그런데 최홍만을 때리다 때리다 추성훈이 지쳐버리고, 이틈을 노려 뚝심의 최홍만이 반격을 하려는데 갑자기 추성훈이 타월을 던지고 기권을 합니다. 물론 이렇게 되면 최홍만은 기권승을 거두는 것이지만, 온몸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추성훈을 제대로 때려 보지도 못하였으니 얼마나 약이 오를까요? 차라리 패했으면 그러려니 할 텐데, 이런 경우라면 승리를 얻은 것이 실감도 나지 않고 그리 기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쟁에서도 그런 경우가 왕왕 있었습니다.
 

전사를 살펴보면 이런 황당한 승리를 거둔(?)전쟁이 있었습니다. 서양에서는 대전쟁(Great War)이라고 더 많이 불리는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그러합니다. 세계대전으로 호칭될 만큼 서류상으로는 여러 나라가 참전 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 독일과 러시아의 동부전선과 독일과 영국, 프랑스 연합군이 싸웠던 서부전선의 전쟁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제1차 대전의 최대 격전지였던 서부전선
 

그런데 이 전쟁의 패자(敗子)가 다 아시다시피 독일입니다. 외부와 고립된 상태로 장기간의 총력전을 펼친 결과, 독일 경제가 파탄에 이르러 더 이상 감내할 수 없는 지경에 다다르자 결국 항복하였지만, 사실 단지 물적, 인적 손실의 관점에서 볼 때 바다 건너와서 싸운 영국과 뒤 늦게 참전한 미국을 제외하고는 독일의 손실은 제1주적이었던 프랑스나 러시아 보다 적었습니다.

 
            독일도 많은 희생을 겪었지만 오히려 승자인 프랑스의 피해가 더 컸습니다.
                                   (베르덩전투의 독일군 집단묘지 )
 

오히려 브레스트-리토프스크조약에 의거 휴전한 동부전선은 제정러시아의 많은 영토를 전리품으로 얻은 독일이 승자의 입장이었습니다. 서부전선으로만 축소한다면 프랑스와 벨기에영토에서 대부분의 전쟁행위가 벌어졌습니다. 다시 말해 99% 이상의 물적, 인적 피해가 프랑스와 벨기에 영토에서 발생하였던 것입니다.

 
                   서부전선에서 지옥이 재현된 곳은 프랑스와 벨기에의 영토였습니다.
                                        (서부전선 주요 전투지역도)
 

연합군이 쏘았던, 독일군이 응사했던 간에 상관없이 포탄들은 프랑스나 벨기에 땅에서 폭발하였고 이 때문에 이들 국가의 영토의 물질적 피해는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심하였습니다. 이른바 현실에 등장한 지옥으로 표현되는 마른, 이프르, 솜므, 베르덩 전투 등의 일련의 대회전으로 인하여 서부전선은 말 그대로 No Man's Land가 되었던 것 입니다.

 
                   항공촬영한 전선의 피탄공 인데 마치 스펀지 같은 모습입니다.
                               과연 저곳에서 살아날 수 있었을까요?
 

원래 사이도 나빴고 감정도 좋지 않은 사이였지만, 전쟁 내내 이처럼 무서운 피해를 겪었기 때문에 프랑스가 종전 후, 베르사유조약으로 독일을 철저하게 망가뜨리는데 기를 쓰고 앞장섰던 것은 한편으로 충분히 이해할만한 합니다. 문서상으로는 항복을 받았지만 독일영토에 제대로 총알 한발 날려보지 못하고 전쟁을 끝내었기 때문에 프랑스는 얼마나 약이 올랐을까요?

 
            승자가 얻은 것은 황당한 폐허뿐이었는데 이런 것을 승리라 할 수 있는지요?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어 독일이 항복을 하고 두 손을 들었을 때, 물론 지긋지긋한 전쟁이 드디어 끝나서 좋기는 하였겠지만 막상 독일을 제대로 때려보지도 못하고 막아내기만 급급하였던 프랑스는 이렇게 이야기 하였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된장, 아니 케챱! 우리 이긴 것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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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포의 그림자 IED ( 급조폭발물 )
 

 
너무 종류가 광범위하여 쉽게 정의할 수 없지만 흔히 IED (Improvised Explosive Device) 라고 통칭되는 무기가 있는데 굳이 번역하자면 급조폭발물로 이름붙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정식으로 제식화 된 폭탄이 아니라 일종의 사제폭발물의 의미가 강한데, 그러다보니 질이 떨어지고 성능도 미흡하다는 인상을 심어 줍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깡통을 이용하여 제작한 급조폭발물
 

개념상 IED는 이를 사용하는 집단이나 개인이 직접 제작한 폭탄인데, 그러다보니 종류도 많고 그 성능도 제각각 입니다. 예를 들어 화염병도 일종의 IED로 볼 수 있지만 만일 직접 제작한 핵폭탄이 있다면 이 또한 IED의 개념에 포함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종류가 중구난방이지만 최근에 와서 IED는 테러집단이 사용하는 매설폭탄을 의미하는 대명사로 서서히 바뀌고 있습니다.
 

                                                 매설된 IED
 
테러조직은, 특히 점령지에서 활동하는 테러조직은 전면에 나서서 정규군과 직접 교전을 벌이기가 곤란합니다. 때문에 적은 비용이나 인원으로 상대에게 은밀히 피해를 주고 동시에 선전효과가 큰 공격수단을 택하려 하는데 IED는 이런 목적에 상당히 부합되는 무기입니다. 특히 IED는 공격으로 인한 직접적인 물리적 피해 외에도 이해 당사자에게 직접적인 공포를 유발시키는데 효과적입니다.
 

                                      IED에 의해 폭파당한 차량의
잔해
 

세계 최고의 전투력을 지녔다고 평가되는 미군이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을 군사적으로 쉽게 점령하였지만, 막상 치안확보에 쩔쩔매는 가장 큰 이유도 바로 저항세력이 테러도구로 애용하는 IED때문입니다. IED에 의한 직접피해도 무시할 수 없지만 이를 탐색하고 방어하는데 들어가는 간접피해는 물론, 동료들이 바로 옆에서 갑자기 폭사당하는 모습을 지켜본 군인들의 심리적 피해도 엄청납니다.

 
                                             IED폭발 순간
 

IED는 주로 기존의 폭탄에 기폭장치를 추가하여 원격으로 폭파시킬 수 있도록 만드는데,  상대의 주요이동로에 매설하였다가 기회를 포착하여 폭발물을 터뜨리는 형태로 사용하는데 주로 타격 효과가 큰 정찰차량 등을 목표로 합니다. 지뢰처럼 외압에 의해 자동으로 폭발하는 경우도 있지만 타이머를 부착하여 폭발시간을 정한다던지, 유선 또는 무선 원격조정 장치를 이용하여 폭발공격을 가할 수 있는 형식처럼 다양한 종류가 있습니다.
 

                                            다양한 종류의 IED
 

사실 사적으로 폭탄을 제작하거나 개량할 수 있는 조직이나 개인이라면 이미 엄청난 무력을 행사하고 있는 해당 분야의 스페셜리스트입니다. 때문에 단지 급조폭발물이라는 명칭과 달리 테러조직이 사용하는 IED는 자신이 원하는 공격대상을 기다렸다가 공격할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할뿐더러 그 파괴력 또한 어마어마합니다. 특히 고성능의 기존 폭탄을 사용할 수 있으니 경우에 따라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입니다.
 

                     테러 단체가 선정용으로 제작한 필름에 담긴 IED공격 순간
 

예들 들어 미군들이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점령지역에서 정찰용으로 처음에 애용한 험비(HMMWV)같은 경장갑 차량도 속수무책으로 피해를 당하자, 2007년부터 미군은 110억 달러를 들여 MRAP (Mine Resistant Ambush Protected) 라 불리는 특수 장갑차량 7,000여 대를 도입하여 일선에 공급하였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MRAP이 병사들의 안전을 완전히 담보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IED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MARAP
 

중장갑으로 보호받는 M-1 전차 같은 장비라 하더라도 만일 바로 밑에서 강력한 155mm 곡사포 폭탄이 폭발할 경우 결코 안전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가장 효과적인 IED대처법은 매설된 폭탄을 먼저 찾아내어 제거하거나 이를 우회하여 다니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대처법은 엄청난 시간과 노력 그리고 위험이 수반되는 방식인데, 이것은 IED를 사용하는 테러조직이 원하는 부수적인 효과이기도 합니다. 

 
                                    IED의 공격으로 파괴된 M-1전차
 

IED가 전쟁의 승패를 바꿀 수는 없지만 전쟁이후의 상황에 커다란 작용을 하는 것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첨단 무기체계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작금의 시대에 어쩌면 가장 오래된 방식이자 가장 재래식 방법이기도 한 IED가 최신식 군대에 가장 무서운 공포의 그림자가 된 것은 한마디로 역설적입니다. 그래서 전쟁과 테러, 무엇보다도 이를 사용하고자하는 인간의 의지가 무서운 것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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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자에게 대든 하룻강아지
 
                                                                
 
아이슬란드(Iceland)라는 나라에 대해 들어 보셨는지요? 대서양의 북극권에 있는 제법 큰 섬나라로 국토의 크기가 대략 우리나라와 비슷하지만 총인구가 불과 30만에 불과한 약소국입니다. 전통적으로 수산업과 관광산업이 이 작은 나라의 기반 산업인데 작년 말 불어 닥친 국제 금융위기 때문에 커다란 타격을 입고 경제적으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아이슬란드의 풍광입니다
 

군사적으로 볼 때도 지상군이 약 120명 정도이고, 경비정이 4척인 해양경비대, 공군은 없으며 헬기만 4대인 그야말로 웬만한 국가의 지역경찰력에도 미치지 못하는 민망한 수준입니다. 따라서 1949년 NATO 창설 12개국의 일원이었을 만큼 국가의 방위를 대외 동맹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습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아이슬란드의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본인들 의사와 상관없이 국제 동맹 체제에 가담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작지만 정규군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PKO 활동 중인 아이슬란드 여군)
 

아이슬란드는 징검다리처럼 유럽과 북미를 연결하는 대서양 항로 한가운데에 위치한 지리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데 제2차 대전 당시에 공식적으로는 중립을 유지하였음에도 영국과 미국에 의해 군사적으로 점령당하였을 정도였습니다. 대서양을 통하여 생명선을 유지하고 있던 영국과 바다를 건너가 유럽에서 싸워야 할 미국에게 아이슬란드의 중립 선언은 그리 중요한 문제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제2차 대전 당시 아이슬란드 산스케이드에 주둔했던 미군
 

지리적으로 미국과 소련의 중간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1986년 냉전체제의 해체를 예고한 레이건과 고르바초프의 역사적인 회담이 열린 곳이 바로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빅(Reykjavík)이었을 만큼, 냉전 시기에는 미국이 소련을 감시하기 위한 전략 시설물들을 이곳에서 비밀리에 운용하였고 주변 해역에 이를 역 감시하기 위한 소련의 함대가 수시로 출몰하고는 하였던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냉전을 허물기 시작한 역사적인 1986년 레이캬빅 미소정상회담
 
이처럼 군사적으로 자위를 행사하기에도 터무니없이 작은 초미니 국가가 지난 1976년 영국에 일전불사를 외치고 나왔던 적이 있었습니다. 영국이 아무리 늙은 사자(영국의 상징이 사자)이지만 건방지게도 하룻강아지가 사자에 덤빈 형국이었습니다.  전쟁이 벌어지면 영국이 아이슬란드를 요리하는 데 불과 반나절도 걸리지 않겠지만 영국은 곤혹스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아이슬란드 인근으로 출동하는 영국 구축함
 

한마디로 초등학생이 격투기 챔피언에게 싸움을 걸었다고 결투를 벌일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영국의 입장에서는 한마디로 세계의 이목이 두려웠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선언한 아이슬란드도 자신들이 이길 가능성이 전무 하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지만 결코 장난으로 영국과 대결하려 하였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영국에게는 극히 일부지만 한마디로 아이슬란드에게는 모든 것이 걸린 문제였습니다.
 

                아이슬란드는 사자에게 대든 하룻강아지였지만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분쟁은 1976년 초 아이슬란드가 선포한 200마일 배타적 경제수역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영국 트롤 어선단이 아이슬란드의 선언을 무시하고 수역 안에서 조업을 계속하자 이를 쫓아내기 위해 아이슬란드 해양경비대가 출동하였고 반대로 영국해군이 자국 어선단 보호를 명분으로 군함들을 출동시켰습니다. 열 받은 아이슬란드는 펄펄뛰며 영국과 단교하고 전쟁 일보직전까지 갔지만 노르웨이의 중재로 간신히 실전은 면하게 됩니다.

 
                              영국의 어선을 밀어내는 아이슬란드 경비정
 

그런데 이것도 처음이 아니었고 이미 1958년과 1972년에 두 차례에 걸쳐 있었던 충돌의 연장이었습니다. 그때마다 아이슬란드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고 영국과 처절히 맞섰습니다. 아이슬란드가 영국해군을 상대하기 위해 동원한 장비는 어선을 개조한 작은 보트였을 뿐이었지만 거친 북해의 바다위에서 영국의 구축함들과 당당히 대치하였습니다.
 

                       대구는 아이슬란드가 양보할 수 없는 생명선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아이슬란드 근해에서 무슨 고기가 잡히기에 이렇게 나라의 운명을 걸고 전쟁까지 불사하였던 것이었을까요? 바로 유럽인들에게 최고급 어종에 속하는 대구(Cod)때문 이었습니다. 아이슬란드 근해는 한랭어종인 대구가 우글거리는 황금어장인데 앞에서도 언급하였던 것처럼 아이슬란드에서 어업은 국가의 생명선이기 때문에 이처럼 전쟁 불사까지 외치고 나왔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바다를 지키는 것은 결코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독도 근해에서 일본 순시선과 대치중인 해양경찰대 경비함정들)
 

결국 원만하게 타협이 이루어졌지만 혹자의 경우는 만일 1970년대 영국이 아니라 제국주의 시대였다면 과연 아이슬란드의 생존을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무모한 만용이었다고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나의 모든 것을 누군가 빼앗으려든다면 과연 가만히 있어야 하나요?  우리나라가 아이슬란드만큼 작은 나라는 아니지만 적어도 국익을 지키기 위한 노력만큼은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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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빠졌는가?
 
 
 
일설에는 1941년에 있었던 유고슬라비아 전선에서 처음으로 등장하였다고도 하는데, 어쨌든 많은 자료에는 1943년경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있었던 일이었다고 합니다.  황량한 사막에 밤이 찾아오고 전투가 소강상태에 빠지자 독일군 진지에서 한곡의 구슬픈 노래 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미군 진지를 향해 흘러 나왔습니다.
 

                             구슬픈 노래가 레코드판에서 흘러 나왔습니다.
 
Vor der Kaserne, vor dem grossen Tor, Stand eine Laterne und steht sie noch davor.  So wollen wir uns wiedersehn, Bei der Laterne wolln wir stehn, Wie einst Lilli Marlene, wie einst Lilli Marlene ...
 
가로등이 환하게 밝혀진 병영의 정문 앞에, 여전히 그녀는 서 있네.  그렇게 다시 만나기를 고대하며,  가로등 옆에서 우리는 계속 서 있고 싶어,  언젠가 릴리 마를린이 그랬듯이,  언젠가 릴리 마를린이 그랬듯이 ...
 

 

이 노래는 1915년 제1차대전 당시 독일의 라입(Hans Leip 1893~1983)이 러시아 전선으로 떠나며 그의 애인을 생각하며 썼던 사랑의 시에 1937년 당시 유명한 작곡가였던 슐츠(Norbert A. Schultze 1911~2002)가 곡을 붙여 만든 구슬픈 반전가요 릴리 마를린(Lilli Marlene)이었습니다.

 
                                        릴리 마를린 레코드판 표지
 

독일은 이 애련한 사랑의 노래를 전선에서 크게 틀어 연합군 병사들이 향수병에 걸리도록 선무공작을 하였던 것이었고,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만리타향 낯선 사막의 전쟁터에 싸우던 수많은 연합군 병사들은 순식간 우수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군들은 그렇게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빠져드는 것 같았습니다.

 
                         사막의 미군들은 음악소리를 듣고 우수에 빠져듭니다.
 

그런데 얼마안가 미군 쪽에서 독일 측을 향하여 대응차원에서 노래를 틀어놓았는데 이때의 노래도 바로 릴리 마를린이었습니다.  이때 미군 측에서 독일 진지로 틀어놓은 레코드에서 릴리 마를린을 부른 사람은 당대의 섹스심벌로 유명한 할리우드의 여배우 마를린 디트리히(Marlene Dietrich 1901~1992 )였습니다.

 
                                      당대의 섹스심벌 마를린 디트리히
 

남자의 가슴을 후벼 파는 디트리히의 섹시하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독일 측을 향하여 울려 퍼지는 릴리 마를린 노래 소리는 역시 고향에서 멀리 떠나와 전쟁을 하던 수많은 독일병사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결국 총통에 명령에 따라 싸우기만 하는 로봇이 아닌 사람들이었던 독일의 젊은 병사들도 우수에 빠져들었습니다.
 

              디트리히와 그녀의 노래는 미군은 물론 독일군에게도 인기가 많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릴리 마를린은 독일군은 물론이거니와 연합군 병사들도 가장 사랑하는 노래가 되었는데 그 인기가 어느 정도였냐면 이 노래가 울려 퍼질 시간이 되면 일단 전투가 중단되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속설도 전해질 정도가 되었습니다.
 

                   노래가 들리면 전투가 중단되었다는 속설까지 전해져 내려옵니다.
 

그런데 독일 측을 향한 역공작의 히로인이었던 디트리히는 베를린에서 태어난 순수한 독일 사람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가수로 연예계에 몸을 담았으나 1930년 폰 슈테른베르크(Josef von Sternberg 1894~1969) 감독이 제작한 영화 푸른 천사(Der Blaue Engel)를 통해 은막에 데뷔하여 국제적으로 유명한 여배우가 되었고 더불어 세계 영화의 메카인 할리우드에서도 활약을 하게 되었습니다.
 

                          디트리히는 데뷔와 동시에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습니다.
 
이후 디트리히는 독일과 미국에서 몇 편의 영화를 더 찍었는데, 당시 히틀러의 오른팔이었던 괴벨스가 나치의 선전 영화에 출연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원래부터 정치적인 신념 때문에 그런 것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나치를 혐오하였던 디트리히는 제의를 단호히 거부하고 미국에 정착하여 시민권을 얻고 세계적인 배우로 활동하였습니다.
 

                 나치의 강요가 있었으나 그녀는 단호히 거부하고 미국에 정착합니다.
 

전쟁 후 등장한 유명한 마릴린 먼로가 등장하기 전까지 할리우드 최고의 섹스심벌이었던 그녀는 앞에서 예를 든 선무방송을 위한 녹음뿐만 아니라 전쟁 중 군비모금 자선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석하여 쇼를 하기도 하고 최전선을 방문하여 병사들을 위문 하는 등 反나치 활동에 열성적이었습니다.

 
                                       부상병을 위문하는 마를린 디트리히
 

이러한 활동은 미국에서는 인기연예인의 반열에 그녀를 올려놓아 명성을 드높였지만 반면 고향인 독일에서는 지금도 국가를 반역한 매국노로 은연중 지탄받고 있습니다.  비록 나치에 반대하는 행동이어서 공개적으로 비난하지는 못하지만 전쟁 중 그녀가 부른 노래 소리에  방심하다가 죽어간 많은 군인들의 미망인들이 그녀를 마녀로 매도 할 만큼 미움이 크다고 합니다.
 

                    삭막한 전선에서 들린 그녀의 노래는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요?
 

상대를 맥 빠지기 위해 틀어 놓았던 릴리 마를린 그리고 이 노래 때문에 피비린내 나는 전선에서 적과 아군을 구별하지 않고 만인의 연인이 되었던 마를린 디트리히 ... 이 모두가 전쟁으로 인하여 예술이 불행에 빠져든 것일까요?  아니면 전쟁의 어지러움 속에도 예술이 계속 빛을 발한 경우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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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자냐 ? 호랑이냐 ?
  
 
사람도 그렇지만 무기도 이름이 있습니다.  통상 개발당시부터 명칭이 부여되고는 하는데 보통의 경우 개발자의 편의대로 이름이 지어진 후 본격적으로 제식화되면서 군 당국에서 정식으로 제식명(Code Name)을 부여합니다.  예를 들자면 제2차 대전 당시 독일육군이 개발하던 로켓 중 개발과정에서 부호 순서에 의거 A-4로 불린 놈이 이후 실전배치 되면서 정식으로 V-2로 명명되었습니다.

 
                          독일의 비밀병기 V-2는 개발 중 A-4로 불리어졌습니다.
 

대부분의 제식명은 알파벳 약자와 숫자의 조합으로 이루어지고 이와 더불어 별도의 별명(Nick Name)이 붙는 경우가 많은데 별명은 스스로 붙일 수도 있고 아니면 타칭으로 불리 우는 경우도 있습니다.  특히, 냉전시기에 소련 무기의 경우는 서방에서 분류하기 편하게 자의적으로 이름을 붙였는데 이를 흔히 나토코드(NATO Code)라고 합니다.  때문에 MiG-25 Foxbat처럼 그럴듯한 이름도 있지만 MiG-19 Farmer와 같이 무기로써는 조금 황당한 별명도 있습니다.
 

        Foxbat (上) 같은 멋진 경우도 있지만 Farmer (下) 처럼 황당한 타칭도 있습니다.
 

무기는 그 성격상 대부분의 애칭이나 별명이 강인한 인상을 주는 명칭에서 따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이 자연현상일 수도 있고 ( ex-Tornado ), 형이상학적 인 것 ( ex-Phantom ) 일수도 있으며, 지명이나 ( ex-Iowa ) 인명 ( ex-Washington ) 일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곤충명 ( ex-Hornet ) 인 경우도 있으나 아마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은 사납고 용맹한 동물명 인 것 같습니다.
 

                                  자연현상인 Tornado에서 명칭을 딴 전폭기
 

구체적인 통계나 자료를 가지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니지만 식육목(食肉目) 고양이과(猫科) 포유류가 무기의 명칭으로 많이 사용되는 것 같습니다.  독수리 같은 맹금류의 경우도 무기명에 많이 쓰이기는 하지만 대부분 군용기의 애칭으로 쓰이는 반면 맹수들인 육식 포유류의 경우는 지상, 수상, 공중 가릴 것 없이 중구난방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강인한 고양이과 맹수들이 무기명에 많이 쓰입니다.
 

식육목 고양이과 포유류 중에서 가장 용맹한 놈들이라면 사자호랑이를 들 수가 있습니다.  이전부터 ‘호랑이와 사자가 싸우면 어느 놈이 이길까?’ 하는 등의 선문답이 많았지만 사실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이놈들이 워낙 맹수들이라 흔히 ‘동물의 왕자’라고는 하지만 아프리카 코끼리와 이놈들이 싸운다면 사실 상대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호랑이와 쌍벽을 이루는 사자
 

그런데 특이한 것은 호랑이나 호랑이 파생어 이름을 붙인 무기들은 많은데 비하여 사자와 관련하여 명명된 무기는 찾기가 힘듭니다.  제가 기억력이 나쁘고 아는 것이 변변치 못하여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Tiger 로 명명된 것 중 쉽게 생각나는 것만 해도 독일의 6호 전차, F-5E 전투기,  F7F ( Tiger Cat ) 전투기, 국산 자주 대공포 비호, 유로콥터 EC-505 ARH 등등이 떠오르는데 반하여 사자로 명명된 무기는 생각나는 것이 IAI의 Kfir 정도 밖에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Tiger 라고 불리는 놈들 ( 6호 전차, EC-505, F-5E )
 

왜 그럴까요?  흔히 막상막하의 용맹성을 가졌다고 생각되는 두 놈 중 호랑이가 더 많이 쓰이는 이유가 아프리카 초원에서 활동하던 사자보다는 유라시아 대륙을 터전삼아 활동하던 호랑이를 더욱 많이 보고 접하여 왔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대부분 현대적인 무기의 개발국들이 유럽 또는 유럽계가 주축인 미국인데 반하여 사자의 활동무대인 아프리카에서 개발 된 현대무기가 전무하다시피 해서 생긴 결과가 아닐까요?
 

               오랜 기간 사자가 밀림에서 사는 것으로 막연히 관념화하여왔는데
          그것은 아프리카가 제대로 알지 못할 만큼 먼 곳이라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뭐 확실한 근거나 객관적인 자료 및 통계적인 분석을 가지고 하는 이야기냐구요 ?  물론 절대 아닙니다.  그냥 august 의 믿거나 말거나 입니다. ^^  여담으로 사자하면 일본 애니메이션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데스카 오사무 (手塚治蟲 1928~1989) 의 ‘정글大帝 (한국명 밀림의 왕자 레오)’ 가 생각나는데 한마디로 잘못된 표현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자는 밀림에 살지 않고 초원 ( 사파리 ) 에서 산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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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가 뭐 어때서 ?
 
뭐 그 이유야 다들 아시는 것처럼 우리나라에서 금기시 되는 숫자가 4입니다.  국군도 끔찍이 이 글자를 피해 다닙니다.  그런데 원래부터 4자를 피하였던 것은 아니었고 창군초기였던 1948년 현지에 주둔했던 제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된 이른바 여순반란사건이후 부대 단대호에서 4자를 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국군에서 4는 터부시되는 숫자입니다.
 
어쨌든 우연인지는 모르겠으나 결국 전통적으로 싫어하는 숫자인 4가 이 사건이후부터 국군에게 더욱 터부시 되는 결정적 이유가 되었습니다.  현재 연대급 이상의 부대는 말할 것도 없지만 그 이하 제대도 4소대, 4중대라는 명칭은 피하고 화기소대, 화기중대 등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극히 예외적인 경우라고 한다면 무기 제식번호에서 K-4를 부여받은 유탄발사기 정도라고나 할까요?


 
                                            K-4 유탄발사기


 
북한의 경우는 현재 4사단이 존재하는 것처럼 4자에 대한 금기는 없는 것 같은데 18은 거부하고 있습니다.  발음이 욕 같기도 하지만 한국전당시 18사단이 한 번도 이겨 본적이 없는 굴욕의 부대였기 때문에 그랬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런 사실이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1952년 북한군 18사단은 해체된 이후 아직까지 재편성되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북한군에게 18은 패전의 상징입니다.


 
중국도 우리와 같은 이유로 4자를 매우 싫어합니다.  반면 재물을 뜻하는 글자와 발음이 같은 8은 최고의 숫자로 꼽힙니다.  아파트도 8층이면 프리미엄이 붙고 2008년 8월 8일 8시에 올림픽 개막식을 시작하였을 정도니 더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숫자에 대해 호불호가 뚜렷한 중국이지만 군대의 단대호에는 4자가 들어가는 부대가 의외로 많습니다.  이런 점을 보면 국군보다 금기 사항은 덜 한 듯합니다.

 
           특정일시에 올림픽을 열 정도로 8에 대한 중국인들의 애착은 남다릅니다.


 
반면 서양에서는 8이나 13이 금기 사항인데 종교적인 이유 때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중 군사 문화와 관련해서 13은 정말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1962년 제정된 통합미군 군용기 제식번호 체계 중 전투기 일련번호에서 13이 공란으로 남아있는데 일부로 피하였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특히 미국은 아폴로프로젝트 중 유일하게 13호가 실패하면서 날아다니는 물체에 13을 붙이는 것을 고의적으로 피한다는 말까지 전합니다.

 
                                서양에서도 금기시 되는 숫자가 있습니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당연히 4자를 피해 다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미 해군의 전투기들을 보면 우리가 금기시하는 4자 제식번호가 붙은 놈들이 유독 베스트셀러가 많습니다.  베스트셀러가 최고의 품질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보편타당하게 애용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우리와 달리 미해군에게는 4가 너무나 사랑스러운 행운의 숫자인 듯합니다.  다음은 미해군에게 전설이 된 4들입니다.


 
                              태평양 전쟁 초기 미해군의 사역마 F4F Wild Cat
 
                         사상 최강의 프로펠러 전투기로 명성을 떨친 F4U Corsair
 
                           불멸의 도깨비 F4H ( 신제식 번호 F-4B ) Phantom II
 
                   베트남 / 중동 / 포클랜드에서 종횡무진 활약한 A-4 Sky Hawk
 
                          이제는 지나간 역사로 남게 된 풍운아 F-14 Tomcat
 


이것을 보면 결국 시대와 지역에 따라 선호하는 숫자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떠한 특정 숫자가 당사자에게 행운인지 불행인지는 사람들이 심정적으로 정하여놓은 기준에 따라 그렇게 생각하는 것뿐이지, 숫자 때문에 행운이 오고 불행이 닥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을 뿐 입니다.  혹시 숫자에 대한 편견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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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들이 무기를 알아?

 
요즘같이 상업제품이 범람하는 시대에 商品들의 라이프 싸이클은 갈수록 점점 짧아지고 있습니다.  멀쩡한 핸드폰이 실증이 난다는 이유로 버려지는 것처럼 나온 지 얼마 안 돼는 제품이 단종 되는 경우를 허다하게 봅니다.  이런 이유로 신제품이나 기술개발에 게을리 한 기업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힘들게 되었고 그만큼 경쟁이 치열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위에서 아래로 발전하는데 한 세대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전시나 냉전시대에 비해서 그 속도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지만 무기의 발전 속도 또한 대단합니다.  무기의 성능이 적이 보유한 것보다 뒤진다면 그것은 곧바로 패배를 의미하기 때문에 최신기술을 접목한 무기의 발달은 상업제품의 발달속도를 능가하였지 결코 뒤쳐지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정밀타격 병기들의 경우만 해도 10년의 간격을 두고 발생한 걸프전이라크전을 비교할 때 엄청난 차이를 보여줄 정도였습니다.


                        Surgical Strike 의 전형이 된 Tomahawk 미사일 발사장면

 
이토록 살벌한 경쟁에서도 길게는 몇 십 년의 명성을 유지하는 스테디셀러들이 있는데 참으로 대단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브라보콘, 박카스, 새우깡, 초코파이 같은 제품들은 무수한 변혁의 시대에도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데 지난 세월만큼이나 이제는 어느덧 해당 아이템의 대명사가 되다시피 하였습니다.


                                 우리주변에서 볼 수 있는 스테디셀러
 

그런데 항상 최신을 추구하는 무기에서도 이런 놈이 있습니다.  흔히 캘리버 50 ( 구경 12.7 mm ) 이라 불리는 M-2 중기관총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이놈이 처음 세상에 선보였을 당시에는 미사일이라는 단어가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고 요즘 보병들의 표준 제식화기인 돌격소총도 만들어 지기 훨씬 이전이었습니다.


                                                  M-2 중기관총
 

제1차 대전 말 항공기에 장착한 M-1918 기관총을 개량하여 탄생한 것이 M-2 중기관총인데 최초에는 수냉식이었으며  M-1921 이라는 제식명이 붙게 됩니다.  그러던 중 이놈이 항공기뿐 아니라 전차 같은 전투차량에 장착해도 효과가 좋은 것으로 판명이 되어 1933년 M-2 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M-2 의 원형인 수냉식 M-1921 기관총
 

이 후 한 번 더 변신을 하여 공랭이 가능하도록 총신을 강화시켜 지속 사격을 할 수 있는  M-2 HB ( Hevy Barrel )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제2차 대전은 물론 이거니와 한국전, 월남전, 중동전을 거쳐 현재까지도 실전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국군이 제식화하여 사용 중인 K-6 중기관총도 M-2 를 베이스로 하여 개량한 형태입니다.

 
                                       국군이 사용 중인 K-6 중기관총
 

이놈은 일반 보병들이 사용하기에는 무겁고 총열 교환을 자주 하여 주어야 한다는 약점이 있으나, 최초에 너무 잘 만들어져서 더 이상 개선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가 나올 만큼 시공을 초월하여 오래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다못해 최신 무기의 습득에 남다른 욕심이 있는 미군당국도 무게를 줄여 보는 등 개량 형 개발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하였을 정도였습니다.
 

                             제2차 대전 당시는 물론 현재도 사용 중인 M-2
 

복엽기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시절에 만든 기관총이 80여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최 일선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움을 넘어 경이의 대상이라 할 것 입니다.  오래전 TV 광고에서 노인이 " 니들이 게 맛을 알아? "  한 것처럼 이놈이 생명체였다면 최신무기라고 뽐내는 놈들 앞에 가서 이렇게 외쳤을 것 같습니다.  " 니들이 무기를 알아? "  혹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오래된 것을 무조건 무시하고 있지는 않았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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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특공대의 잊혀진 비사 (秘史)
 
 

온산이 울긋불긋 불타오르는 늦가을은 산행을 즐기는데 대단히 좋은 계절입니다.  일주일에 산을 한번 정도 가는 인구가 천만 명을 넘었다는 최근의 통계처럼 등산은 온 국민의 스포츠이자 오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즐기면서 산을 올라가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분명히 차이가 있는데 전쟁 중 목숨을 걸고 산에 올라가는 것은 고난의 행로와 다름없습니다.  이와 관련한 에피소드입니다.
 

               이 화려한 가을이 완전히 지나기 전에 산에 한번 다녀오는 것은 어떨지요 ?
 

전쟁의 승패에 있어 병참의 중요성은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한국전쟁 또한 군수지원의 중요성이 입증된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중공이나 소련과 국경을 맞이하고 있는 북한에 비해서 해상을 통한 군수물자를 보급 받아야 하였던 우리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병참요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UN군이 제해권을 확보한 덕분에 안전하게 해상 보급이 이루어 질수 있었고 이것은 고난의 시기에 대한민국을 지탱하여 주었던 힘이기도 하였습니다.
 

                       화물을 열심히 하역하는 한국전 당시 인천항의 모습입니다.
                        UN 군의 해상보급은 자유를 수호하는 원동력이었습니다.
 

한반도는 산악이 70% 이상을 차지하는 지역이라 최전선의 군수지원에 있어서 상당히 불리한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지금은 사통팔달의 도로가 많이 개통되어 평시의 군수지원 환경은 많이 좋아 졌다고 합니다만 동부전선의 산악지역은 아직까지도 폭설이라도 한번 내리면 병참선이 차단 될 정도의 악조건입니다.

 
                    한국전은 초기를 제외하고 대부분 산악전으로 일관하였습니다.
 

하물며 지금도 그러한데 사회적 인프라가 거의 없다시피 한 한국전 당시는 더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특히 1951년 말부터 휴전까지 진행된 참호전은 대부분 고지를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었는데 이러한 고지에 주둔한 제 부대에 대한 병참지원은 상당히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산악전을 지원하기 위한 민간인 부대의 병참지원 모습입니다
.
 

그래서 UN군은 보급품을 운반하는데 일반 노무자들을 활용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민간에게 아웃소싱을 한 것이었는데 전쟁 발발 직후부터 국군을 지원하기 위해 조직된 소위 보국대를 비롯하여 유엔군 참전 이후 만들어진 민간 운반단 ( CTC - Civilian Transport Corps ), 한국근무단 ( 일명 노무단 ), 부두하역단 등이 다양한 형태로 지원 활동을 하였습니다.

 
                  포탄 같은 중량물도 이 분들의 보급 수송에 절대 의존하였습니다.
 

그중 최전선의 산악 고지전을 치르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속칭 지게부대라고 불린 노무대가 있었습니다.  이 노무대는 전쟁 동안 산세가 험한 지역에 위치한 부대에게 포탄, 식량 등의 보급품을 지게에 지고 운반하여 주었는데 대부분이 당장의 호구지책이 어려웠던 월남해 내려 온 청장년들이나 피난민들이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징집으로 충당되기도 하였습니다.
 

                    대오를 갖추어 정렬한 지원단 (上) 과 화물 적재 후의 모습
 

전쟁 당시 노무자들의 규모는 육군 사단에 편성되어 전투근무지원을 직접 수행한 노무단원 9만여 명을 포함하여 약 30여만 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추산되며 공식 기록에 의하면 전쟁 시 임무를 수행하다가 희생당한 노무자들의 규모가 전사 2,064명, 실종 2,448명, 부상 4,282명 등으로 집계하고 있으나, 많은 수의 노무자들이 공식적으로 등록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제 규모는 그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되고 있습니다.
 

                              미군들은 이 분들을  A특공대라고 불렀습니다.
 

노무자들의 지원 수단은 주로 지게였는데 그 모습이 알파벳 A와 흡사하다고 하여 통상 근무단을 ' A Frame Army ' 즉, 지게부대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미 8군 사령관이었던 밴플리트 ( James Van Fleet 1892~1992 ) 장군은 회고록에서 " 만일 노무자들이 없었다면 최소한 10만 명 정도의 미군병력을 추가로 파병했어야 했을 것이다. " 고 이들의 노고를 극찬하였습니다.
 

           이 분들의 노고는 조국을 수호하는 원동력 이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처럼 A 특공대는 戰史의 전면에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아군의 승리를 위하여 묵묵히 맞은바 임무를 다한 최고의 정예 부대였습니다.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음지에서 묵묵히 힘써 주신 A 특공대 선배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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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설로 남은 별
 


1960년 9월 26일, 홈구장인 펜웨이 파크(Fenway Park)에서 홈팀 보스턴 레드삭스( Boston Red Sox)가 볼티모어 오리올즈(Baltimore Orioles)와 경기를 벌이고 있었는데 바로 이 경기를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 42살의 老타자가 타석에 들어섰습니다.  그가 날카롭게 휘두른 방망이에 공은 커다란 궤적을 남기고 홈런이 되었고 모든 관중의 기립환호와 아쉬움 속에 통산 521홈런을 기록한 이 타자는 야구복을 벗고 은퇴하였습니다.

 
                          마지막 타석을 홈런으로 장식하고 老타자는 은퇴합니다
.

 
바로 메이저리그의 전설로 남은 위대한 야구선수 테드 윌리엄스(Ted Williams 1918~2002)의 은퇴 경기 당시의 장면입니다.  1941년 시즌 그가 기록한 0.406 (456타수 185안타)의 타율은 역대 8위의 기록이지만 이 기록을 마지막으로 메이저리그에서 아직까지 4할 대 타율 기록이 나오지 않는 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위대한 야구선수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전설의 강타자 테드 윌리엄스


 
20년간 오로지 보스턴 레드삭스 소속으로 있었으면서 통산 0.344타율, 2654안타, 521홈런, 1839타점의 놀라운 성적을 기록한 그를 평가할 때 반드시 따라다니는 하나의 가정이 있습니다. 바로 전쟁에 참전하지 않고 계속하여 운동을 하였다면 과연 어떤 기록을 남겼을까 하는 가정입니다.


 
                                 그의 백넘버는 당연히 영구결번입니다.

 
윌리엄스는 선수생활 중 제2차 대전과 한국전쟁에 현역으로 참전하여 무려 5년이라는 공백 기간이 있었습니다. 호사가들이 컴퓨터로 분석하여보니 공백 기간 동안 그가 선수생활을 계속하였을 경우 222개의 홈런을 더 쳐냈을 것이고, 그렇다면 통산 743개의 홈런을 기록하여 행크 애런보다 앞서 베이브 루스의 통산 714홈런 기록을 경신했을 것이라고 분석하였을 정도였습니다.
 

                       베이브 루스의 기록을 먼저 갱신하였을 지도 몰랐습니다.


 
역사적인 4할 타율을 기록한 그는 이듬해인 1942년 타율 0.356, 36홈런, 137타점으로 타격부문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였으나 시즌 도중 전쟁에 참전하라는 영장이 떨어졌습니다. 그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시즌을 끝마치기 전에 해군에 입영신청을 하고 해병대 조종사로 태평양전쟁에 참전하여 맹활약하였습니다.


 
                          1942년 시즌을 완전히 마치지 못하고 참전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3년간의 공백 끝에 1946년 야구장으로 돌아온 윌리엄스는 타율 0.342와 38홈런, 123타점의 맹타를 휘둘러 공백 기간의 우려를 무색하게 만들어 버렸고 1947년에는 리그 MVP에 오르는 등 참전 이전과 다르지 않은 훌륭한 기량을 팬들에게 선보였습니다. 통상 군복무기간 동안 경기력이 하락된다고 여겨지는데 그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은 이야기였습니다.


 
                       제2차 대전 후 야구장으로 복귀하여 변함없이 맹타를 날립니다.


 
그런데 절정기의 기량을 선보이던 1952년, 그에게 또 한 번의 징집영장이 전달되었습니다.  즉시 현역으로 복귀하여 한국전에 참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에도 윌리엄스는 망설임 없이 현역으로 다시 복귀하였고 1952년 겨울 "이번에는 죽을지도 모른다." 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듣도 보도 못한 극동의 한국으로 떠납니다.

 
                          다시 한국전에 참전하여 최전선에서 활약합니다.


 
이전 참전 때도 그랬지만 윌리엄스는 유명세를 이용하여 후방에서 시간이나 보내는 그런 군인이 아니었습니다.  1953년 2월 16일 평양 남쪽 폭격작전에서 그의 애기가 공산군의 대공포에 맞아 추락당할 절체절명의 위기를 당하기도 하였으나 수원기지까지 날아와 동체착륙을 하였을 정도로 군인 윌리엄스대위는 최전선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던 역전의 용사였습니다.


 
           1999년 보스턴에서 열린 올스타전의 히어로는 바로 테드 윌리엄스였습니다.
 

      메이저리그의 현역 올스타들조차 그의 옆에 한 번 서 보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1953년 휴전까지 총 39번의 출격작전을 수행한 그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레드삭스의 중심타자로 맹활약하였습니다. 윌리엄스는 수차례의 참전기간에도 기량이 전혀 녹슬지 않았고 1957시즌과 1958시즌에 리그 타격왕에 올랐는데 1958시즌의 40세 최고령 타격왕 기록은 앞으로도 깨지지 어려운 불멸의 기록입니다.

 
                           경기 전 추모행사와 펜 웨이 파크에 서있는 동상
 

2002년 7월, 그가 84세로 숨을 거두자 메이저리그는 경기 전 그를 추념하는 행사를 가지고 게임을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기록한 놀라운 성적도 그를 신화의 반열에 올려놓는데 결코 모자람은 없지만 거기에 더해서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모범적인 태도로 인하여 테드 윌리엄스는 모든 미국민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대중적인 인기는 물론 진심어린 존경까지 받을 수 인물이 우리나라에도 많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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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력 향상을 위한 당근

한국이라는 이미지를 세계에 자랑 할 것이 별로 없던 1980년대까지 만하더라도 스포츠는 대내적으로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대외적으로 국위를 선양하는데 많이 이바지 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올림픽 3위 입상이상, 아시안게임 1위처럼 스포츠를 통하여 국위를 선양한 자에 한하여 병역면제 혜택을 주기 시작하였던 것은 1980년대부터 입니다.


                         한국 스포츠의 좋은 성적은 국민을 기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동기는 한국이 올림픽을 유치한 후 대폭적으로 경기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였는데, 사실 1981년 서울이 제24회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은 되었지만 바로 이전까지 해방 후 우리나라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것은 1976년 제21회 몬트리얼 올림픽에서 레슬링 양정모 선수의 단 1개에 불과 하였을 정도로 한국의 경기력은 사실 미약하였습니다.


       지금은 한국이 세계적인 스포츠열강 이었지만 한국의 경기력은 사실 미약 하였습니다
                  (해방 후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된 레슬링의 영웅 양정모 선수)


때문에 자칫하면 서울올림픽이 돈 들여 어렵게 판만 벌여놓고 남의 나라 선수들의 잔치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올림픽 개최국의 자부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선수들에게 동기부여를 할 수 있는 병역면제 같은 특단의 조치가 이루어졌고, 이러한 정책을 병행한 체육 진흥책이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이후 한국은 올림픽과 같은 국제 대회에서 당당히 체육 열강으로 진입하는 결과를 얻었습니다.


즉흥적인 변화와 원칙의 훼손


하지만 이렇게 제정된 법조항을 즉흥적으로 개정하면서까지 선수에게 병역면제 혜택을 부여한 경우가 있었는데 바로 2002년 월드컵 4강의 기적을 이룬 축구 국가대표팀의 성과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거둔 자랑스러운 업적은 단군 이래 최대로 전 세계 한민족을 하나로 뭉치게 만들었고 온 국민들이 행복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올림픽 상위 입상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자격이 충분하였을지 몰랐습니다.


                     2002년 축구 국가대표팀은 우리를 하나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2006년에 있었던 제1회 WBC야구대회에서 한국대표팀이 엄청난 선전을 하여 국민들을 기쁘게 하였습니다. 그때 다시 한 번 병역면제라는 선물이 선수단에 부여가 되었는데 많은 국민들이 긍정적으로 이를 받아들였지만 당시에 이런 예외 규정이 자꾸만 발생한다면 원칙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냐는 반대여론도 많이 나왔습니다.

                         2006년 야구 국가대표팀도 국민을 기쁘게 만들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개인적으로는 국위를 선양하고 국민들을 기쁘게 해준 운동선수들에 대해서 굳이 병역혜택이 아닌 다른 차원에서의 보상이 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국민의 의무인 병역과 관련한 원칙은 되도록 고수되어야 하는 것이 옳고 국민이 열광하는 분위기에 편승하여 그때마다 원칙을 자꾸만 바꾼다면 나중에는 감당하지 못할 상황까지 이를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신성한 병역의 의무에 관한 원칙이 흔들린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연예인들도 병역을 충실히 완수하여야 더욱 인기가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병역면제를 주장하는 이유가 국위선양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가 가장 경기력이 왕성한 시기에 선수들이 군복무를 하면 이후 경기력이 후퇴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시기에 병역면제를 하여주고 선수들로 하여금 더욱 운동에 정진시키자는 의견도 있습니다. 사실 이제는 운동실력으로만 한국을 자랑하던 그런 시기는 솔직히 지난 것 같고 경기력과 관련한 주장과 관련하여 다음의 에피소드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범근 선수의 도전

1978년 12월 방콕에서 열린 제8회 아시안게임 축구 결승전에서 한국은 북한과 연장전까지 치르는 명승부 끝에 0-0으로 공동우승을 합니다. 그 경기직후 한국 최고의 스트라이커였던 차범근 선수는 독일 행 비행기에 오릅니다. 이유는 단하나, 세계 최고의 축구무대에서 뛰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었는데 마침 독일 교민으로부터 분데스리가 팀을 소개해 주겠다는 연락을 받았었습니다.


         1978년 아시안게임 축구 결승은 한국과 북한의 숨 막히는 혈투 끝에 공동우승으로
          막을 내리고 이 경기 직후 스트라이커 차범근 선수는 독일 행 비행기에 오릅니다
.


 하지만 지금처럼 전문 매니저의 도움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서독에 찾아온 축구 변방 아시아의 이방인을 반겨준 팀은 아무 곳도 없었습니다. 조금 먼저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하던 일본인 오쿠데라가 있었고 비록 아시아에서 차범근은 오쿠데라보다 실력이 뛰어난 것으로 자타가 인정하고는 있었지만 차범근도 한국축구도 서독에서는 관심 밖의 대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부 젊은 분들은 차범근 선수를 통신회사 광고에 등장하는 감독 또는 TV 해설자 정도로 알지만 개인적으로 한국 축구사에서 가장 위대한 스트라이커였다고 생각 합니다. 하지만 차범근 선수가 처음 서독에 갔을 때 눈길을 주었던 구단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와중에 겨우 입단 테스트 기회를 준 구단이 있었는데 리그 최하위 다름슈타트였습니다. 하지만 테스트에서 보여준 차범근의 기량은 다름슈타트를 만족시켜 입단계약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다름슈타트는 차범근을 입단 시키자마자 12월 31일 경기에 곧바로 데뷔시켰는데 한국인 운동선수가 세계적인 빅 리그에 데뷔해본 경험이 없던 당시 이러한 소식은 국내에 대서특필되었습니다.


        간신히 분데스리가에 데뷔하였습니다. (사진은 레버쿠젠 소속으로 뛰던 말년의 모습)


박지성선수가 프리미어리그에, 박찬호선수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것 이상으로 당시만 해도 온 국민은 열광을 하였고 기대가 컸으며 당연히 차범근 선수가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좋은 활약을 펼쳐 한국의 명예를 드높여 주기를 고대하였습니다. 그 후 한 두 차례의 경기에서 돋보이던 활약을 보여준 차범근은 곧바로 분데스리가의 관심대상 선수가 되었고 차선수의 선전에 국민들을 기쁘게 하였습니다.


원칙은 원칙


그런데 당시 정부는 차범근 선수에게 소환명령을 내립니다. 그것도 최대한 빨리 귀국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현역 군인 신분으로 당시 성무팀 ( 공군축구팀인데 그 당시는 오늘날 尙武처럼 별도의 국군체육부대가 없이 각 군별로 팀을 운영하였습니다 ) 소속인 차범근 선수가 병역을 완전히 마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고 빨리 와서 군복무를 이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정부는 차범근 선수에게 원칙을 지키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자 사회 일각에서 차범근 선수가 어렵게 분데스리가에 진출하였으니 외국에서 국위를 선양 할 수 있도록 조기 제대를 시켜주어 계속 서독에서 활약 할 수 있도록 하자는 여론이 벌 떼처럼 일어났었습니다. 요즘이라면 바로 직전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였고 사회적 분위기로도 조기제대가 충분히 가능한 일일지도 몰랐는데 당시 정부는 병역에 관한 원칙을 절대로 훼손 할 수 없다고 천명하였습니다. 


병역의무가 경기력을 약화 시킨다?
 

결국 차범근 선수는 추상같은 소환령에 봇짐을 싸들고 돌아와 1979년 5월까지 잔여 군복무를 마친 다음에야 다시 서독으로 향하게 되었고 서독 복귀 후 그의 기량을 눈여겨 본 명문 프랑크푸르트팀에 입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원칙을 고수한 정부의 방침으로 군복무를 완수한 차범근 선수의 경기력이 약화되었을까요?


   원칙을 지켜 의무를 다한 차범근 선수는 다시 독일로 가서 최고 선수의 반열에 오릅니다.

그의 독일 활약상을 대변하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2002년 월드컵 당시 독일 대표팀의 일원으로 한국을 방문한 스트라이커 미하일 발락이 입국 일성으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세계적인 스트라이커 발락의 어릴 적과 최근의 모습) 

차범근 선수는 많은 축구 꿈나무들이 어려서부터 본받고 싶어 하던 영웅이었습니다.

  " 이곳이 정말 차붐의 나라인가요? 어려서부터 저의 우상이었고 영웅이었던 위대한 축구선수 차붐의 나라를 방문하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 (발락)

현역에서 은퇴하였지만 차범근 선수는 분데스리가 최고의 외국인 선수로써 아직도 명성을 남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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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모 방송국의 인기드라마 선덕여왕과 관련하여 신라의 여러 제도와 문화가 자연스럽게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군주였던 선덕여왕 자체도 그렇지만 신라의 독특한 군사제도이자 교육시스템이기도 하였던 화랑(化郞)에 대해서도 관심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군의 상무정신을 대표하는 단어이기도 한 화랑과 관련된 잊혀진 이야기가 있는데 이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최근 인기리에 방송 중인 드라마 선덕여왕


1953년 휴전이라는 이름으로 치열했던 한국전은 일단 숨고르기에 들어갑니다. 전선이 고착화 된 후 대부분의 전투가 현재의 DMZ 인근에서 이루어졌지만, 초기 1년은 낙동강에서 두만강까지 정신없이 남북으로 전선이 왔다 갔다 하였기 때문에 한반도 전체가 전쟁의 화마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습니다.


                                      한국전의 비참함을 알려주는 유명한 사진입니다.
                           사진의 모습으로 보아 인천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휴전으로 전쟁이 일단 멈추자 피해를 복구하는 일은 남이던 북이던 제1의 과업이 되었고 더불어 전쟁으로부터 사상을 당한 많은 참전군인들에 대한 보상 또한 커다란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하지만 전쟁 전부터 이미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대한민국이 이들 전사상자에 대해 즉각적이고 충분한 보상을 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전쟁은 필연적으로 많은 전사상자를 양산하였습니다.


차라리 전사자의 경우는 시간을 두고 유가족에게 보상을 해 주어도 되었지만 전투로 인하여 몸이 불구가 된 상이용사들은 당장의 호구지책을 걱정할 딱한 처지였습니다. 국가나 사회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없기는 매한가지여서 상이용사들의 처절한 절규에 당장 도와줄 방법이 사실 없었습니다.


                나라 전체가 초토화되어 상이용사에 대한 구호도 제대로 이뤄질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전후에 사회로 복귀한 제대군인 특히 경제적으로 자활이 어려웠던 상이용사들의 불만은 사회적으로 커다란 문제가 되었습니다. 더구나 우리사회의 병폐중 하나가 선천적이던 후천적이던 신체적으로 불편한 사람을 깔보고 비하하는 이상한 못된 풍조가 있는데, 국가를 위해 희생한 상이군인들을 속어로 깨진바리라고 불렀을 정도로 차별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상이용사들이 생계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도 많지 않았고, 사회의 냉대도 있었습니다.


결국 국가가 즉각적인 보상이나 구호를 하기 힘들면 이들이 스스로 자활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도움을 주어야 했는데 이러한 사업의 시범으로 실시되었던 대책 중 하나가 화랑농장사업이었습니다. 사회적응이 힘들었던 상이용사와 가족들이 모여 살 수 있도록 거주지와 함께 인근에 자립할 수 있는 농장터를 제공하여 경작하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국가를 위해 희생한 분들을 위해 자활 시범 사업이 실시됩니다.


한미재단의 도움을 받아 상이용사 출신인 김국환(金國煥)씨와 진상구(陳相龜)씨의 주도로 인천시 산곡동 369번지 일대에 화랑농장이 조성되었는데, 1955년 3월 5일에 있던 화랑농장 개소식에 당시 최재유 보건부장관, 이익흥 경기도지사는 물론 맥카오 주한미군 후방지원 사령관등이 참석하였을 만큼 성황리에 사업이 개시되었습니다.


         당시 관영 매체에서 대대적인 보도를 하였을 정도로 성황리에 사업이 개시되었습니다.


화랑농장이 들어섰던 곳은 원래 구한말 장끝말이라는 이름의 한적한 동네였습니다. 일제가 중일전쟁을 시작하면서 현재 인천시 부평구 일대에 조병창이라는 군수기지를 만들 때 이곳에 거주하던 20여 가국의 원주민들을 내쫒으면서 마을도 사라졌습니다. 이후 한국전을 거치면서 일본의 조병창터에 미군부대가 주둔하게 되었는데 현재도 일부 시설이 남아있습니다.


                      반원으로 표시한 지역이 화랑농장인데 경인전철 백운역 인근입니다.


화랑농장은 미군기지터 일부를 환수 받아 설립되었는데 이후 정부의 지원 없이 자립적으로 운영되다보니 얼마못가 심각한 자금난에 봉착하게 되었고 1950년대 말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이후 다시 폐허가 된 농장에 많은 외지인들이 정착하게 되었는데 대부분이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물자를 유통하거나 미군부대 군속으로 근무하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금난으로 농장은 폐쇄되고 인근 미군부대 관련하여
                      생계를 이어가려는 많은 외지인들이 화랑농장지역으로 유입됩니다.
                             (현재도 화랑농장 인근에 일부 남아있는 미군기지)



이후 이곳은 농장이 아닌 좁은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옹기종기 주택들이 모여 앉은 전형적인 구식 주택가의 모습으로 급속하게 변하게 되었으나 일대를 아직도 화랑농장이라 부를 만큼 공공지명화 되어있습니다. 현재도 경인전철 부평, 백운역에서 산곡동 방향으로 가는 버스의 노선판을 보면 화랑농장이라 쓰여 있을 정도이고 마을로 들어가는 도로의 명칭도 화랑로입니다.


         현재 문서에 표기될 만큼 화랑농장은 공공지명화 되었습니다(부평신문 보도내용)


현재 이곳에 사는 분들 중에도 아마 이러한 마을의 유래를 아시는 분들이 그리 많지는 않을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근처는 이미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을 만큼 발전이 되었지만 화랑농장은 최근에야 재개발 예정지역으로 되었을 만큼 발전이 상당히 더딘 지역인데 앞으로 개발이 완료 후에는 어떻게 변모할지 궁금합니다.


                           현재 화랑농장의 모습인데 재개발지역으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현재 부평인근에 사는 사람조차도 화랑농장을 주말농장이나 도심인근의 가든 식 숯불갈비집으로 잘못 아는 분들도 꽤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만, 그 낭만적인 이름이면에는 국가를 위해 몸을 바쳤지만 제대로 보상도 받지 못하여 스스로 자활의 길로 나설 수밖에 없었던 상이용사분들의 처절한 피눈물이 담겨져 있습니다.


                낭만적인 화랑농장이라는 명칭은 어려웠던 시절 조국을 위하여 몸 바쳤음에도
             전쟁 후 어려움을 겪은 많은 상이용사들의 절규가 담긴 역사적인 이름입니다.


100년 전에는 장끝말로 불린 한적한 산골마을 이었지만 외세의 침략야욕에 의해 사라진 이름이 되었듯이 지난 50여 년간 계속되어온 화랑농장의 이름도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바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곳을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는 이상 그곳에 짧게나마 있었던 우리 현대사의 아픈 역사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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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참화를 겪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후 연합군은 베를린으로의 진격을 개시 합니다. 이때 독일은 영국 본토와 가까운 벨기에의 해변 도시에서 다량의 V1와 V2를 영국으로 발사하였고 연합국은 이를 격멸하고자 공습을 단행 합니다. 덕분에 벨기에의 곳곳은 연합국의 폭탄에 의하여 멍들게 됩니다. 하지만 벨기에의 영토가 아작 난 것은 제3제국의 패망을 목전에 둔 시점에서 보여준 히틀러의 똥고집에 의해서입니다.


                 전쟁 말기에 영국을 공격하기 위한 독일의 비밀병기가 벨기에에서 발사됩니다.


결과적으로 독일의 패망을 6개월 앞당겼다는 발지 전투(Battle of Bulge)때문입니다. 제2차 대전 사가들로 부터는 독소전의 다른 전투에 비해서 과장되게 알려 졌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서부전선에서 독일과 연합군의 피 튀기는 마지막 대회전이 벌어진 곳은 바로 약소국 벨기에 영토입니다. 그래서 전쟁 말기에 마지막으로 쑥대밭이 됩니다.


                    벨기에 영토에서 벌어진 발지 전투는 서부전선 마지막 대회전이었습니다.


어쨌든 전쟁은 독일의 패망으로 끝나고 벨기에는 해방이 되나 침략도 해방도 자국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단지 침공로에 놓였다는 이유만으로 국토가 망가지고 국민은 피폐해 집니다. 그것도 30여 년 동안 두 번씩이나 같은 강대국 때문에 말입니다. 아니 처음부터 주변 강대국 사이에서 벨기에의 안위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역사에 비추어


지난 우리역사를 돌아볼 때 벨기에가 겪었던 참화와 비슷했던 치욕의 역사가 계속 반복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마다 목적은 항상 우리를 침탈하는 것이었지만 침략자들의 대외적인 명분은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떠들곤 하였습니다.


                                       임진왜란에서 일본의 명분은 정명가도였습니다.


몽고가 일본진출을 계획 하였을 때도 고려를 짓밟고 황폐화 시켰습니다. 전혀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말입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내세웠던 명분은 정명가도(征明假道)였습니다. 이런 교활한 명분하에 우리는 침략을 받았고 이를 구원한다며 명과 일본은 우리나라 국토를 황폐화시키며 백성을 수탈하며 신나게 피를 흘립니다.


                                청일전쟁 당시 평양전투에서 포획된 청군 포로


근대에 들어와 청과 일본은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제국주의 전쟁을 우리 땅에서 벌입니다. 이 역시 우리와의 의지와 상관없이 말입니다. 역시 황폐화 되는 것은 우리 국토이고, 수탈되는 덧은 우리 민중이었습니다. 우리가 침탈되었을 때의 공통점은 우리 스스로 지킬 힘이 없었을 때나 스스로 태평성대라고 생각하고 국방을 게을리 하였을 때라는 점입니다.
                           

현재의 벨기에와 우리

벨기에는 두 번의 전쟁 결과 어정쩡한 중립이 냉혹한 국제정세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음을 깨닫고 독일과 프랑스로 부터의 위험을 제거하고자, 2차 대전 후 오히려 냉전체제에 능동적으로 참여합니다. NATO 본부를 자국에 유치한 것만 보아도 벨기에의 의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벨기에는 어설픈 중립을 포기하고 국제질서에 능동적으로 참여합니다.
                                       (벨기에에 있는 NATO  본부)


벨기에는 지난 세기에 있었던 두 차례의 연속된 경험으로 독일이나 프랑스로 부터의 침공이 있을 때 자력방위가 힘들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고 소극적인 중립이 아닌 적극적인 동맹에 참여 하여 국가의 안보를 지키려 하였던 것이었습니다.


                               힘을 기르지 않고 국제 질서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체
                                       말로만 평화를 지킬 수 는 없습니다.


우리가 벨기에만큼 인구나 국력이 작은 나라는 아니지만 우리 주변의 국가들이 무시할 수 없는 강대국임을 깨닫고 말만 앞서는 어설픈 자주를 외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국제적 힘의 균형을 이루는 데 참여하여 그 일익을 담당하여야 할 것이며 한편으로는 우리 스스로를 충분히 자위 할 수 있는 잠재적인 능력을 키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침략을 당했을 때 "나가 싸우란 말이야! 제발"이라는 절박한 호소는 냉정한 국제 현실에 절대 통용 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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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침공로가 되다.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 후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기 때문에 또 다시 독불간에 전쟁이 발생하리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 되었습니다. 긴장된 포니워(Phoney War)기간동안 독일과 프랑스 모두 장차전에 대한 세밀한 구상에 돌입하였습니다. 이때 그들의 공통점은 바로 벨기에로 귀착됩니다.


                                다시 벨기에는 독일과 프랑스의 전쟁터가 되려 하였습니다.


독일은 만슈타인(Erich von Manstein)의 입안으로 마지노선이 끝나는 벨기에의 아르덴느(Ardennes)를 돌파하여 프랑스를 섬멸할 기상천외한 계획을 세웠는데 반하여 프랑스는 다일- 브레다 계획(Dyle-Breda Plan)이라는 오늘날 이스라엘이 자주 사용하는 공세적 방어개념과 비슷한 대응전략을 구상 합니다.


                             1) 1차 대전 당시 독일의 침공로 (슐리펜 계획)
                       2) 2차 대전 당시 프랑스의 방어 게획 (다일-브레다 계획)
                       3)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침공로 (만슈타인 계획 - 낫질 작전)
                       독일, 프랑스 모두 벨기에를 장차 전쟁터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프랑스의 계획은 한마디로 방전으로 승리를 쟁취한 1차대전의 경험이 기반이 되었는데 그 개요는 다음과 같이 요약 할 수 있습니다.

첫째, 독불국경간은 마지노선으로 충분히 방어 할 수 있고, 또한 독일도 이곳으로 주력을 투입하여 침공하지는 않을 것이다.

둘째, 때문에 독일은 1차대전 때와 같이 벨기에 평원을 이용한 침공을 감행 할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 에방에말요새에 막혀 돌파에 어려움은 있을 것이다.

셋째, 이때 연합국 주력(프랑스 1집단군 및 영국 대륙원정군)을 벨기에-프랑스 국경 근처에 배치하였다가 독일이 벨기에를 침공하자마자 즉시 벨기에 영토내로 진입하여 벨기에와 연합하여 독일의 주력을 섬멸한다.


       독일은 앞만 보고 있던 프랑스의 배후를 단절하려 하였습니다. (2차 대전 당시 프랑스군)


이 얼마나 약소국 벨기에를 하찮게 생각하는 발상입니까? 독일은 침공로로, 프랑스는 자국에서의 전투를 회피하고자 약소국 영토를 전장터로 삼고자 하였으니 말입니다. 만에 하나 프랑스가 독일-폴란드 전쟁직후 대독 선전포고를 한 이상 독불전선에서 침공전을 하여야 하는데, 이를 외면하고 자국 내에서의 전투만 회피만 하려는 소극적 대응전략으로 시간이나 보내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당시 벨기에 국민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을까요?


짧은 침략, 긴 고통

드디어 세기의 악당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1940년 5월 서부전선의 전투가 시작 됩니다. 또다시 벨기에는 프랑스를 공격하려는 독일의 침공로에 놓이게 됩니다. 굳이 1차대전 때와 다른 점이 있었다면 이번에는 벨기에 평원이 아닌 아르덴 산악지대가 독일 기갑부대가 지나가는 주 침공로가 되었다는 사실 일 뿐입니다.


                              아르덴의 삼림지대가 독일의 침고로로 예정되었습니다.


벨기에 국민들이 철석같이 믿던 에방에말요새이었지만 독일의 독창적인 공수 특공에 의해 불과 10분 만에 엎어진 거북이 꼴이 되고 맙니다. 단지 85명의 팔슈름야거(Fllschirmjager-제2차 대전 당시 독일의 공수부대)의 특공작전에 의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사전에 은밀히 개척하여 놓은 통로를 지나 독일군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순식간에 벨기에를 석권하여 통과하면서 프랑스로 물밀듯이 들어갑니다.


                               에방에말을 점령한 전설적인 독일의 공수부대 팔슈름야거


그것도 독일 주력도 아닌 기만전술을 썼던 B집단군의 페이트모션에 의해서 말입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이러한 독일 책략에 속아 프랑스군 총사령관 가믈랭(Maurice Gamelin)은 연합군 주력인 프랑스 제1집단군과 영국원정군을 벨기에 영토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명분은 벨기에 구원, 독일을 응징한다는 것이었지만, 진짜 속뜻은 프랑스 영토 내에서 전쟁을 피하고자 함이었습니다.



                                              덩케르크에서 후퇴하는 연합군


물론 결과는 아시다시피 기습적으로 연합군의 배후를 치고 들어가는데 성공한 독일의 포위망에 걸려 나룻배라고 얻어 타고 영국으로 도망가기 급급하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벨기에는 독일의 전광석화 같은 기습에 의해서 장기화된 1차 대전 때보다 물적 피해가 적었다면 그나마 다행(?)이라고나 할 만큼 아주 짧게 침략을 당합니다.


                                                    전쟁으로 사망한 벨기에인들


하지만 이후 점령지로써 독일 전쟁 수행을 위한 수탈을 당하게 되고 대영 전쟁을 전초기지 역할을 하느라 전 국토가 군사기지 노릇을 하게 됩니다. 이웃 네덜란드와 더불어 벨기에는 현재도 집집마다 식량비축 창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독일의 수탈기간 동안 워낙 배가 고팠던 쓰라린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며 벨기에 국민으로 살던 28,000여 유태인들이 가스실로 끌려가게 됩니다.

(계속됩니다.~ 명절 잘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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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대밭이 된 약소국

독일은 계획대로 벨기에를 돌파하여 노도와 같이 북부 프랑스로 쇄도하여 들어갔으나,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필히 우익을 강화시켜라"라는 유언을 남긴 슐리펜(Alfred Graf von Schlieffen)의 의도와 달리 병력을 우익에 집중하지 못한 당시 독일 육군 참모총장 小몰트케(Helmuth von Moltke)의 실책으로 마른전투(Battle of Marne)에서 독일군의 진격이 멈추게 되고 이후 종전까지 무시무시한 참호전에 돌입하게 됩니다.


                                   마른에서 프랑스는 독일의 진격을 극적으로 막아내었고
                                 이후 서부전선은 참호전으로 변모하였습니다.


이후 지옥으로 변한 참호전은 후방에 앉아있는 지휘관들이 상황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체로, 이전 전쟁과는 비교 할 수 없는 엄청난 살상무기로 무장한 상대편 진지로 나폴레옹 전잰당시처럼 무조건 병력을 돌격시켜 말 할 수 없는 인적피해를 야기한 그야말로 무식한 전쟁의 표본이 됩니다. 때문에 이런 결과 참호로 연결된 전선부근은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됩니다.


               혼히 No Man's Land 라고 표현할 만큼 전선은 살아있는 지옥이었습니다.


전쟁 참여국의 국토가 유린된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 일 수 있겠지만 고착된 전선 한 가운데 놓여있던 벨기에는 남의 나라 전쟁 때문에 국토가 박살(?)나게 됩니다. 전사에는 벨기에가 제1차 대전 때 연합국 편이라고 단순히 설명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중립을 짓밟은 독일의 침략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택할 수 밖에 없었던 차선책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강대국 간의 전쟁으로 벨기에 영토는 풍비박산 났습니다.


특히, 그 악명 높은 독가스가 최초로 사용 된 곳도 벨기에의 이프르(Ypres)입니다. 1915년 4월말에 독일은 병력 이동을 은폐하기 위한 수단으로 약 5천 개의 가스통을 열어 연합군측으로 염소가스를 흘려보냈고, 예상치 못한 독가스에 연합군은 1만 5천명이 중독되고 5천명이 사망하는 큰 타격을 입게 됩니다. 덩달아 벨기에 또한 본의 아닌 가스피해를 입게 됨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악명 높은 독가스도 벨기에 영토에서 처음 살포됩니다.


1차대전 서부전선에서는 누가 누가 많이 죽나하고 경쟁을 벌인 많은 무서운 싸움이 있었지만 1917년 제3차 이프르 전투의 일부였던 파스샹달(Passchendaele)전투는 연합군과 독일군 양측이 성과 없이 참호와 진흙탕 속에서 고귀한 인명을 무자비하게 희생한 서부 전선에서 가장 끔찍했던 기억으로 남게 된 전투로 기록되며 영불해협에 자리 잡은 벨기에의 아름다운 도시는 지동에서 없어진 것과 같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잠시 동안의 평화


1918년 전쟁이 끝났을 때 서부전선기준으로 패전국 독일은 자국 영토에는 폭탄한방 맞지 않았지만, 막상 승전국 벨기에는 그 참상이 얼마 심하였는지 국제올림픽 위원회(IOC)에서 평화를 열망하는 마음으로 1차대전 후 최초의 올림픽을 1920년 벨기에의 앤트워프(Antwerp)에서 개최하도록 조치합니다. 당시 IOC의 생각으로는 이것보다 더 확실하게 평화를 어필하는 대안이 없었다고 합니다.


                                          1920년 제7회 앤트워프 올림픽 개막식


제1차 대전의 교훈으로 독일은 고착된 전선을 돌파하는 전격전의 교리를 가열 차게 연구하고 호된 경험을 얻은 프랑스는 공격자가 때리다 때리다 지쳐 쓰러 질만한 완벽한 요새를 꿈꾸게 됩니다. 1927년에 착수하여 10년 뒤인 1936년에 완성한 바로 마지노선(Maginot Line)입니다. 마지노선은 총연장이 약 750km로서, 북서부 벨기에 국경에서 남동부 스위스의 국경까지 이르고, 중심부는 독일과 프랑스의 국경을 따라 이어진 영구 요새선이었습니다.


                                              프랑스 방어 전략의 상징인 마지노선


당시 벨기에는 제1차 대전의 결과로 프랑스와 긴밀한 관계를 이루고 있었고, 프랑스 마지노선의 축성에 자극받아 벨기에-독일 국경에 1932년부터 1935년 사이에 에방에말 요새(Fort Eben-Emae)를 구축 합니다. 당시에는 마지노선보다 더 견고하고 강력한 요새로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 요새는 다시는 자국의 영토가 강대국의 싸움에 유린되지 않을 거라는 벨기에 국민의 믿음을 대변한 건축물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벨기에의 자부심인 에방에말 요새
                            마지노선보다 훌륭한 방벽으로 소문이 자자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약소국 벨기에가 그들의 앞에 있던 독일의 위협만 대비ㅏ고 있었지만 위협은 또 다른 곳에서도 잠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우방이라 믿고 있던 프랑스도 만일 독일과의 전쟁이 재발한다면 벨기에를 전쟁터로 이용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무서운 사실을 벨기에는 제대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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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국의 이름으로


독일과 이탈리아의 통일이후 현재까지 유럽의 역사를 살펴보면 5개의 강국이 있음을 알게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후 미국과 소련이라는 초강대국의 등장과는 별개로 이들 5개국은 아직까지도 역사의 주역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열거하면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그리고 이탈리아인데 이들은 서로간의 견제와 균형을 이뤄가며 이합집산을 하였고, 20세기 들어 발생한 두 차례 세계대전의 주역이기도 합니다.


                                   영국의 제국주의 침탈을 풍자한 독일신문의 삽화
                           하지만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것과 같았습니다.


흔히, 세계대전을 이야기 할 때 몇 개국이 참전하고 몇 명이 죽고 등의 통계자료가 나오곤 하는데, 실제 위에서 언급한 국가들 외에 자의적으로 대전에 참전한 국가는 극히 들물다고 단언 할 수 있겠습니다. 굳이 예를 든다면 지금은 사라졌으나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강대국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정도였다고나 할까요? 나머지 국가들은 이들 강대국 간의 이합집산에 따라 마지못해, 어쩔수 없이 전쟁의 폭풍에 휘말리게 되었다고 생각 합니다.


                                        지금은 그저 그런 중부유럽의 약소국이지만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유럽의 강대국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훈련모습)


특히, 독일과 독일의 東西에 접하여 있던 러시아와 프랑스는 이러한 충돌의 중심이었으며, 어쩔 수 없이 이들 사이에 끼인 여러 약소국가들이 전화에 휘 말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동유럽 쪽은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 그리고 냉전종식 후 지도제작 업자들이 호황을 맞을 정도로 국가 및 국경의 변동이 심하여 딱히 어떤 나라가 원하지 않는 전화의 피해를 많이 입었나 판단하기조차 어려운 점도 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직전의 유럽지도
                                       중동부 유럽이 오늘날과 차이가 많습니다.


서부전선으로만 시야를 돌려보면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벨기에, 네덜란드, 록셈부르크의 3개국이 있는데 이들 국가들은 고래싸움에 새우 등이 터지는 꼴로 20세기에 들어 원하지도 않는 참화를 입게 됩니다. 그중 양차 세계대전에서 그들의 의사와 아무런 상관없이 최대의 격전지가 되었던 약소국 벨기에(Belgium)의 눈물에 대해 몇 회에 걸쳐 알아보고자 합니다.


예고된 전쟁터


제1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독일은 언젠가 보불전쟁의 패전국으로 이빨을 갈고 있던 프랑스와 일전이 있을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준비성 강한 독일인답게 구체적인 對프랑스전쟁 계획 또한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른바 슐리펜 계획(Schlieffen Plan)입니다. 최단시간(계획상 6주) 내 프랑스를 쳐부수고 난 후, 러시아를 징벌한다는 한마디로 내륙국 독일이 가장 회피하고 싶은 양면 전쟁 거부책입니다.


                           죽기 전에 장차 독일의 전쟁 해법을 연구했던 참모총장 슐리펜


그런데 이 계획은 독일주력이 독불국경에서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고 중립국인 벨기에를 돌파하여 프랑스 북부로 진공 후 파리를 대포위함으로써 프랑스의 조기 항복을 유도 한다는 점이 핵심 이었습니다. 단지 독불국경보다 벨기에가 평야지대인 관계로 대규모 부대의 기동이 용이하여 파리에 쉽게 근접 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영세중립을 표명하던 약소국의 주권을 철저히 무시한 상태로 계획은 입안되었습니다.


                      슐리펜 계획에 의거 독일은 벨기에를 거쳐 프랑스를 침공할 예정이었습니다.


즉, 전쟁이전 부터 약소국의 주권은 전혀 안중에도 없이 단지 침공의 편이만을 위하여 이나라를 전쟁터로 삼을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인데 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어쨌든 사전에 치밀하게 수립되어 있던 슐리펜 계획에 의거 독일은 1914년 8월 3일 프랑스에 선전포고와 함께 벨기에를 침공합니다.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을 점령한 독일군



프랑스, 러시아와 군사적 협력을 약속한 3국 협상국이기는 하였으나 최초 전쟁발발 당시에는 중립을 표명하였던 영국이 1914년 8월 4일 독일에게 즉각 선전포고를 하게 되었던 명분이 바로 중립국 벨기에를 독일이 치범한 것을 이유로 들었을 정도로 당시 세계는 독일의 기습적인 침공에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였습니다.   

(august의 전쟁사 시리즈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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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Holly Wood)는 잘 아시다시피 로스앤젤레스 인근에 있습니다. 1911년 네스터(Nester)라는 영화사가 처음으로 영화촬영소를 건설한 것을 시초로 하여 이곳의 영화산업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전에는 뉴욕 같은 동부지역에서 많은 영화촬영이 이루어졌으나 갈수록 할리우드의 영화제작 여건이 좋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그 명성을 얻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영화산업은 세트를 벗어나 대규모 해외로케나 컴퓨터그래픽 등을 많이 이용하여 영화를 제작하는 관계로 더 이상 할리우드의 촬영장만을 고집하지는 않지만, 아직도 이곳 인근에 많은 영화관련 산업체가 포진하고 있으며 그 명성 때문에 할리우드 자체만으로도 세계적인 훌륭한 관광지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대작 전쟁영화들도 할리우드에서 제작되었습니다.


오래전 미국에 갔을 때 세계 영화산업의 메카라는 이곳에 가 본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을 안내하던 분이 이런 질문을 하더군요.

안내인   august님 왜 할리우드에 영화산업이 발달 하였을까요?
august  글쎄요?... 혹시, 대도시 인근이어서 사람이나 돈을 구하기 편리해서요?

안내인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august   그게 뭡니까?

안내인    바로 비가오지 않는 건조한 이곳의 날씨 때문입니다.
august   날씨요?

안내인    영화를 제작하는데 있어 맑은 날시가 많아야 촬영하기가 좋습니다. 촬영스케쥴을 잡아 놓았는데 비가 오면 계획이 어긋날 수밖에 없습니다. 날씨가 맑더라도 비 오는 장면은 물을 뿌려 인공으로 쉽게 만들 수 있지만, 반대로 비가 오는 날씨를 맑게 할 방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august    아! 그렇군요. (믿거나 말거나) 


                                        비하면 생각나는 명화 Singing In The Rain


영화정도는 소방호스를 이용하여 비 오는 장면을 연출 할 수 있지만 오늘날의 과학 기술은 인공강우를 이용하여 극심한 가뭄지대에 비를 만드는 것이 일부 가능 할 정도 (물론 많은 전제 조건이 따르기는 합니다만) 까지 발달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할리우드의 존재 이유처럼 오는 비를 멈추게 하는 것은 그리 쉽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비 오는 장면은 쉽게 연출할 수 있지만 반대로 비가 오면 촬영이 취소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공기후의 연구와 실용에 있어 앞선 나라가 러시아인데 처음에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연구하였다고 합니다. 전사를 살펴보면 날씨로 인하여 작전 차질을 겪은 예를 찾아보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닐 만큼 기후와 군사는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군사 분야 또한 날씨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러시아-소련이 그 동안 비밀리에 갈고 닦은 날씨 제어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던 적이 두번 있었는데, 두 번의 경우 모두 세계인의 주목 속에 러시아에서 개최 된 국제적인 행사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서였습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개막식 당시 스타디움 인근만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1980년 7월 19일 소련의 수도인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22회 하계올림픽이 개최 되었습니다. 개막식 당일 일기예보로는 모스크바에 폭우가 쏟아지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소련 당국의 비밀작전에 의거 주경기장인 레닌스타디움 반경 500m 이내에 내리는 폭우를 개막식이 진행되는 동안 막아버립니다. 개막식이 끝난 후 폭우가 쏟아 졌다고 하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이러한 소련의 과학기술은 극비에 붙여졌습니다.


                         2005년 승전 60주년 기념식에서도 행사장 인근의 비를 멈추었습니다.


지난 2005년 5월 9일 러시아는 옛 영광을 재현하고자 모스크바에 세계 54개국 정상들과 VIP 들을 초청한 가운데 제2차 세계대전 승전 60주년 기념행사를 성대히 개최하였습니다. 간간히 비가 쏟아지는 날씨에 호스트인 푸틴 대통령 내외가 우산을 쓴 채 내외귀빈을 맞이하였는데 행사의 절정인 군사 퍼레이드가 개시 되자 특수 화학약품을 살포할 11기의 비행기가 투입돼 모스크바 상공의 비구름을 없애는 작전을 실시하여 성대히 기념식을 치룹니다.


                        이런 기술이 복지가 아닌 살상의 도구로 사용된다면 무서운 일이겠죠?




위와 같이 비록 특정 행사를 위해 강우를 제어하는 기술이 선보이기는 하였지만 이러한 기술이 군사적인 부분이 아니고 인류의 복지를 위해서 광범위하게 쓰일 수 있는 시대가 오면 참으로 좋은 일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살상을 위한 도구로 이용된다면 상당히 무서운 일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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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2002년부터 미 육군이 제식화하기 시작한 다목적 경장갑차 스트라이커(Stryker)에 대해서 들어 보신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현재도 미 육군이 다양한 실험을 하면서 개념 연구 중인 차세대 여단 전투단을 이 장갑차 때문에 흔히 '스트라이커 여단 전투단(SBCT-Stryker Brigade Combat Team)이라고도 부를 만큼 한마디로 차세대 부대의 근간이 되는 핵심적인 장비라 할 수 있습니다.


                  미 육군 차세대 핵심 전술 장비가 될 것으로 예상되는 스트라이커 장갑차


C4I(Command, Control, Communications, Computers, and intelligence의 약자로 컴퓨터와 통신을 기반으로 한 종합 지휘체계를 의미)가 장차전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판단한 미 육군은 당시 참모총장 신세키(Eric Shinseki)의 주도로 이러한 환경에 따라 작전을 펼 칠 수 있는 새로운 전술단위 부대를 구상하였습니다. 이때 미 육군은 신개념부대에서 사용할 새로운 장갑차를 군수업체들에게 요청하였고, 무려 35종의 후보작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여 GM社의 차륜식 장갑차가 채택되었습니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주도한 신세키 미 육군 참모총장


GM의 모델은 당시 미 해병대가 사용 중이던 LAV-25 피라니아(Piranha) 장갑차를 육군이 제시한 요구조건에 부합되도록 개량한 형태였습니다. 여담으로 LAV-25은 원래 스위스 모바크(MOWAG)社가 만든 장갑차를 캐나다GM에서 라이센스 제작한 것이었습니다. 미 육군조차 이미 기존에 제식화 된 장갑차를 개량한 것을 채택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을 보면 새로운 개념의 무기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Stryker의 베이스가 된 LAV-25 입니다.
                     장갑차를 새로 만드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놈은 미군 사상 최초로 전쟁터에서 무공을 세웠던 일반 병사들의 이름을 따서 제식명이 정해지게 되었습니다. 주인공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제17공수사단 소속으로 유럽 전선에서 무공을 세운 스튜어트 스트라이커(Stuart S. Stryker 1924~1945)와 베트남 전쟁에서 제26사단 소속으로 전공을 세운 로버트 스트라이커(Robert F. Stryker 1944~1967)였는데 그들의 공훈을 기려서 이름이 명명되었던 것입니다.


                                 스튜어트 스트라이커(左)와 로버트 스트라이커


미군은 무기에 유명인물의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특히 육군의 경우는 지휘관들의 이름을 딴 장비가 많은데 예를 들어 M-47, M-48, M-60 전차는 맹장 패튼(George Patton, Jr)의 이름으로, M-1 전차는 애이브럼스(Creighton Abrams)장군의 이름을 따서 정하여졌습니다. 그런 전통을 가지고 있던 미 육군이 무명에 가까운 사병들의 이름을 따서 차기 장갑차의 이름을 명명하였다니 신선한 충격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맹장의 기갑장비의 대명사가 된 애이브럼스(上)와 패튼


비록 현대적 무기의 개발사를 놓고 보면 일천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이지만 지금까지 개발된 주요 장비를 살펴본다면 '신궁', '비호', '현무' 등 상무적인 이미지가 강한 추상적인 명칭을 많이 부여하여 왔습니다. 물론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이제는 우리도 군인, 그것도 창군이후 국군발전에 이바지한 인물의 이름으로 무기나 장비의 이름을 지어 보는 것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최근 한국 해군은 인물명으로 함정명을 명명하는 전통을 세웠습니다.

          창군의 주역 손원일 제독과 제2연평해전의 영웅 윤영하 소령을 기려서 명명한 함정들


그것도 유명한 장군보다 스트라이커 장갑차처럼 전사에 길이 빛날 무공을 세웠던 일반병사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붙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 됩니다. 해군의 경우는 충무공같은 역사적인 인물 외에도 최근 인물들의 이름으로 함정명을 정하는 고마운 전통을 세웠지만 아직 육군이나 공군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특히 대부분 전술장비인 육군의 무기류는 병사들과 동고동락을 함께 하는 성격이 강하므로 이런 이름이 붙는다면 병사들의 사기에도 좋은 효과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천둥으로 명명된 'K-9 자주포'


예를 들어 국내 방산 역사상 최고의 성과물 중 하나로 손꼽히는 K-9 자주포의 이름은 '천둥(Thunder)'인데 한국전쟁 당시 무서운 투혼을 보여주었던 제8사단 제18포병대대의 순국 3용사 중 한분으로 가장 계급이 낮았던 용사의 이름으로 명명하였다고 가정하면 'K-9 심우택, 자주포' 등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故 심우택 이병 - 1950년 6월 27일 강릉지구전투에서 아군 포대가 포위당하자 후퇴하지 않고 혼자 남아 아군 야포가 노획당하지 않도록 폐쇄기를 제거하던 중 전사)


                       수많은 무명용사의 피로써 지켜온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입니다.


물론 우리 군 문화에서는 생경한 제식명이기 때문에 어쩌면 어색한 측면도 있고, 왠지 북한식 노력영웅의 구호를 붙이는 것 같은 느낌도 들기는 합니다. 하지만 무명에 가까운 일반 사병들 중 국가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였던 분들의 노고를 기리기 위해 한 번 정도는 고려해 봄직 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이들의 피와 눈물로 지켜진 곳이 바로 대한민국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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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제약회사 화이자(Pfizer)는 협심증 환자들에게 흔하게 발생하는 질환인 흉통의 완화제로 기존에 많이 사용하던 니트로글리세린계 약을 대체할 신약 개발을 완료하고 병원에서 환자들을 상대로 임상 실험 중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험도중 유독 남성 환자들에게서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이상증세를 발견하였습니다.


                                         다국적 제약회사인 화이자
                         제약산업은 아직까지 한국이 세계적 수준에 뒤진 분야 중 하나입니다.


환자 A  "마님 앞에서 마구 마구 도끼질을 하면서 장작을 패고 싶다는..."

환자 B "오! 마이 갓뜨 ~ 내 나이 70인데 고목나무에 꽃이 피고 있다는..."

환자 C "아무래도 협심증 때문이 아니고 엉뚱한 곳에서 돌연사 할 것 같다는..."


                           임상실험 중 환자들로부터 엉뚱한 푸념을 듣게 됩니다.


본래 약의 개발 목적과는 달리 남성에게만 나타나는 곤란한 부작용과 이러한 부작용에 어쩔줄 모르고 난감해하던 남성 환자들의 푸념(?)에 화이자는 약의 개발 방향을 180도 돌려 전혀 다른 곳으로 전환합니다. 이 약은 결국 다른 용도의 치료제로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자신감을 상실한 남성을 위한 약으로 개발방향이 바뀝니다.


이 약의 효능은 시판 이전부터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판매소식이 뉴스를 통해서 적극 알려질 만큼 세계 제약시장에 찬란하게 데뷔합니다. 그것은 신체의 노화나 각종 질환으로 자신감을 잃고 있던 세계의 수많은 남성들에게 한줄기 복음이었습니다. 바로 특유의 파란색으로 널리 알려진 비아그라입니다.


                            처음 목적과 달리 우연히 비아그라가 탄생을 하였고,
                      약으로는 보기 드물게 짝퉁까지 양산 될 정도로 히트를 쳤습니다.


비아그라는 주객전도라는 말이 너무나 어울릴 만큼 본래 개발 목적과는 다른 용도로 세상에 등장했고, 약으로는 보기 드물게 짝퉁까지 대량 생산되어 은밀히 유통 할 정도로 베스트 셀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무기의 역사를 살펴보면 비아그라처럼 본연의 목적과는 달리 엉뚱한(?)곳에서 빛을 발한 무기들도 많습니다.


                                  아직도 그 명성을 전하는 88mm Flak


1933년 정권을 잡은 히틀러는 베르사유조약을 일방적으로 폐기하고 공개적으로 독일의 재 군비를 추진하였습니다. 당시 독일군이 방공포로 사용하던 것이 75mm Flak이었는데 조약폐기 후 이를 대체할 새로운 대구경의 대공포를 비밀리에 개발 완료하고 이를 실전 배치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무기의 역사에 길이 명성을 남기게 된 88mm Flak 대공포였습니다.


                               적기를 격추하기 위해 작렬하는 88mm Flak


이 대공포는 제2차 세계대전 개전 초기부터 독일의 무조건 항복으로 종전 할 때까지 독일의 영공을 방어하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였던 훌륭한 대공포였습니다. 그런데 많은 매니아들은 88mm Flak을 본연의 목적인 대공포보다는 연합군 전차에게 가장 무서운 저승사자였던 명품 대전차포로 기억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88mm Flak은 명품 대전차포로도 그 명성이 자자합니다.


전사를 읽어보면 이놈이 본래의 용도를 벗어나 대전차포로 사용되게 된 것도 비아그라처럼 극적이었는데 시작이 다음과 같이 알려져 있습니다. 독일 전격전의 신화가 만들어진 1940년 서부전선에서의 일이었습니다. 아라스(Arras)에서 신나게 진군하던 독일 기갑부대가 갑자기 등장한 마틸다 重전차로 중무장한 영국군에 의해서 진격이 멈추어지게 되었습니다.


                    마틸다전차를 요격하면서 신화가 시작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당시 독일의 주력이었던 1,2호 전차나 보유하고 있던 대전차 화기로 마틸다 전차를 파괴할 수 없자 다급히 대공포로 사용하던 대구경의 88mm Flak로 마틸다 전차를 요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독일군도 놀랄 만큼 적전차를 손쉽게 격퇴하였고, 이때부터 이놈이 자기의 본분을 망각(?)하고 대전차포로도 사용 되었다고 합니다. (* 스페인 내전에서 처음 사용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대전차포 용도로 사용되었는지에 대해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무수한 탱크 킬 마크 (Kill Mark)만으로도 그 명성을 유추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아프리카 전선에서 롬멜 (Erwin Rommel 1891~ 1944)이 지휘하던 독일 아프리카 원정군은 이몬을 이용하여 무려 200여대의 전차를 격파하여 연합군으로 하여금 88mm의 공포라는 소리가 나오게 만들었습니다. 이후 대공포로써의 임무도 물론 성실히 하였지만 독일군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다니며 최고 저격수의 임무도 수행하였습니다. 더욱이 최고의 전차인 티이거나 쾨니히스티이거의 주포로도 채택되어 그 명성을 길이 전하고 있습니다.


                                 88mm Flak은 전선의 비아그라였습니다.


개발 목적과는 달리 오히려 엉뚱한 (?) 곳에서 더 효과적인 약발을 보인 88mm Flak은 실의에 빠져 있던 남성들의 구세주로 탄생한 비아그라처럼 독일군을 구원하는 수호신이 도었고 그 명성을 길이 남겼습니다. 따라서 88mm Flak을 전선의 비아그라라 칭하여도 결코 모자람이 없다 할 것입니다.


           좌절하지 마십시오. 우리 인생에도 88mm Flak이나 비아그라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일생도 그런 것 같습니다. 사는 도중 어렵고 실패의 과정도 분명히 있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더 큰 성과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혹시 일시적으로 어렴움을 겪거나 곤란한 점이 있더라도 좌절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우리 삶에도 전혀 생각지도 못한 88mm Flak이나 비아그라가 분명히 생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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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전용사의 구장
( Veterans Stadium )


개인적으로 야구를 좋아합니다.  요즘 대대적인 흥행몰이에 나서고 있는 국내리그도 재미있지만 메이저리그 ( 이하 MLB ) 에서 맹활약하는 우리나라 선수들의 선전도 흥미롭습니다.  특히 한국인 최초로 MLB에 도전을 하여 여러 굴곡에도 굴하지 않고 아직까지 현역으로 뛰는 박찬호 선수의 분전은 진짜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박찬호 선수는 올해 필라델피아 ( Philadelphia ) 팀으로 옮겨 활약하고 있는데 이 팀과 관련하여 생각나는 것이 있어 올려 봅니다.


            박찬호 선수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MLB가 낯설지 않게 되었습니다.

국내 최고의 밀리터리 사이트인'유용원의 군사세계'에서 august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는 남도현 작가를 '열혈3인방' 팀블로거(객원필진)로 초대하였습니다.

남도현 작가 성균관대학교 무역학과를 졸업하고 럭키금성상사, 한국자동차보험 등에서 근무했으며 현재는 국제무역 및 물류 대행회사인 DHT AGENCY를 운영중이신 사업가입니다.

남 작가는 청소년시절부터 역사, 전사와 관련한 밀리터리 분야에 관심이 많았으며, 최근 『교과서는 못 가르쳐주는 발칙한 세계사』, 『히든 제너럴』,『BEMIL의 비밀스런 군사이야기(공저)』 등을 저술하며 본인만의 軍史世界로 독자 및 네티즌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앞으로 '열혈3인방' 팀블로거(객원필진)로 매주 1~2편씩 '스포츠와 문화속의 밀리터리 이야기''august만의 독특한 軍史世界'로 전해드릴겁니다. 남작가님의 개인블로그는 blog.chosun.com/xqon 입니다. 밀리터리에 관심있는분들은 한번 들어가보시길 바랍니다.


MLB를 처음 접한 것은 1970년대 AFKN을 통해서였습니다.  경기내용은 그냥 얼추 인지할 수 있었으므로 영어를 몰라도 보는데 크게 어려움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그런데 그때 처음 본 MLB와 국내야구를 비교하면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거의 변하지 않은 점이 있는데 바로 경기장 시설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TV에서 처음 본 1970년대나 지금이나 MLB의 구장들은 초현대식인데 이와 비교하면 국내 야구장은 아직도 수준이하가 많습니다.


     1980년대 중축되었으나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대구야구장 (上) 과
   1960년대 탄생했음에도 현재도 최고의 야구장으로 손꼽히는 LA다저스구장



1982년에 개관한 잠실야구장을 선두로 사직야구장과 문학야구장 정도를 제외한다면 사실 국내의 나머지 경기장은 프로경기를 치루기에 민망한 수준이고 일부는 선수나 관중들의 안전문제까지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정도까지라고 하니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건설에 천문학적 비용이 드는 돔구장까지는 바라지 않고 하루 빨리 노후한 경기장들이나 대체하여 쾌적하게 경기를 즐길 수 있었으면 합니다.


    말로만 무성한 돔구장 보다 문학야구장급 구장이나 빨리 생겨야겠습니다


반면 야구의 발생지답게 MLB의 야구장들은 시설도 훌륭하지만 저마다 독특한 특색이 있습니다.  특히 구장이름이 그러한데 최근에는 상업적인 이유로 일정기간 동안 금전적 대가를 받고 후원기업의 이름을 따서 구장의 이름을 명명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천편일률적으로 지명을 따서 이름을 붙이는 우리와 달리 지명은 물론 사람의 이름 등을 붙여서 나름대로 특색이 있게 구장이름이 명명되고는 하였습니다.


     소유주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애틀란타 브레이브스 홈구장인 터너필드
 

그 중 미국의 두 번째 수도였던 동부의 유서 깊은 도시 필라델피아를 연고지로 하고 있는 필리스 ( Phillies ) 야구팀과 이글스 ( Eagles ) 미식축구팀이 1971년부터 2003년까지 함께 홈구장으로 사용하였던 구장이 이른바 벹 ( Vet ) 으로 불린 베테랑스구장 ( Veterans Stadium ) 이었는데 우리말로 ' 예비역구장 ', ' 재향군인구장 ' 또는 ' 참전용사의 구장 ' 정도로 해석 할 수 있습니다.


             참전용사의 구장으로 명명된 필라델피아 경기장 (上)
          참전 군인에 대한 미국인들의 존경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이름은 구장이 한창 지어지고 있던 1968년에 필라델피아 시 의회는 미국이 참전한 모든 전쟁에서 희생을 한 미국 참전용사들의 애국심을 기리기 위해 이름을 베테랑스구장으로 명명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이러한 이름 덕분인지 1976년 이후 2001년까지 유구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미 육군과 해군의 미식축구 정기전이 17회나 이곳에서 개최되었습니다.


     100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미 육군과 해군 미식축구 정기전 포스터들 


베테랑스구장은 다른 빅 구장과 마찬가지로 야구장외에도 축구장 등 여러 목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야구장으로 전환 시 관중 수용능력이 무려 62,000석이나 되는 MLB 최대 구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와 비교하면 두말할 필요 없이 훌륭한 구장인데도 노후 되었다고 바로 옆에 42,000석의 시티즌스뱅크파크 ( Citizens Bank Park ) 를 새로 만든 후 2004년 3월 폭파해체 하였습니다.


      헐린 흔적이 있는 베테랑스구장과 옆에 새로 지은 시티즌스뱅크파크


그런데 일설에는 노후 되었다는 것은 핑계이고 단지 너무 특징이 없는 밋밋한 모습이어서 허물고 신축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한 모습이지만 베테랑스구장은 흔히 쿠키커터 ( Cookie-Cutter ) 라고 불리는 반듯한 좌우대칭형 ( 흔히 모범생형 ) 을 가진, 한편으로 말하자면 하드웨어적 특징이 거의 없는 구장입니다.


        MLB에는 마치 찌그러진 모습 같은 특색 있는 구장들이 많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AT&T 파크
(上)
          그린몬스터 유명한 보스턴 레드삭스의 펜웨이파크


대부분 메이저리그의 구장은 운동장이 좌우대칭이 아니거나 AT&T Park 처럼 극단적으로 관객석이 변형되었거나 찌그러진 구장모습 때문에 좌측외야에 엄청난 장벽을 설치한 펜웨이파크 ( Fenway Park ) 의 그린몬스터 ( Green Monster ) 처럼 인상적인 상징물이 있는 등 구장마다 독특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특징이 없이 그냥 팍팍 찍어낸 듯 한 쿠키커터 스타일을 가졌기 때문에 베테랑스구장이 일찍 해체되었다는 것입니다.


            외야에 수영장이 있는 애리조나 D-Backs 의 채이스필드


우리에게는 한마디로 어이가 없는 너무 부러운 이야기이지만 지어진지 100여년 가까이 되었음에도 현재도 사용 중인 리글리필드 ( Wrigley Filed ) 나 펜웨이파크는 말할 것도 없고 MLB 구장 중 가장 멋있는 구장들로 명성이 자자한 다저스타디움 ( Doger Stadium ) 이나 엔젤스타디움 ( Angel Stadium ) 이 베테랑스구장과 비슷한 시기에 지어졌던 점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가능성도 있는 이야기 입니다.


         인프라도 그렇지만 평범한 일상에서 애국심을 고취하고
                  국가의 부름을 받고 헌신한 이들에
              대해 예우하는 문화는 본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분들 덕분에 대한민국이 존재 할 수 있었습니다.
 


흥행을 위해 우리가 보기에 너무나 멀쩡한 구장을 가차 없이 허물어버리는 미국 스포츠산업의 능력도 대단하고 선수들은 물론 관중들에게도 편안함과 즐거움을 주는 경기장의 하드웨어는 진정 부럽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무명의 참전용사들을 기리기 위해 구장의 이름을 명명하였던 그들의 평범한 애국심이 가장 본받아야 할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더불어 거대한 전쟁을 겪은 대한민국의 수많은 참전용사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충분하였는지 한 번 반문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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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ugust 의 軍史世界 트랙백 0 :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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