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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5.20 전송가[Battle Hymn]의 주인공 헤스 대령의 숨겨진 전공 -제2편-








전송가[Battle Hymn] 헤스 대령의 숨겨진 전공  -제2편-


 

이것은 마치 서부영화에서 인디언들에게 둘러싸인 포장마차들이 기병대의 구원을 기다리는 것과 흡사했다.


영화에서는 으레 기병대가 극적으로 제 시간에 나타나기 마련이었다.
두 곳에 교신이 된 나는 공격대가 오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미 공군의 항공 공격으로 파괴 된 북한군 T-34


공산군 기계화 부대는 어차피 길에 갇혀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였기 때문이었다. 30분쯤 뒤에 우리 대구 주둔 Bout -1 부대 소속 미군 조종사들이 모는 무스탕 기들이 나타났다.


나는 그들에게 적군의 상공을 선회하면서 우리가 했던대로 
계속 적 부대가 전진을 못하도록 하고 있으라고 일러놓았다.


나와 팀버레이크 중위는 대구 기지로 돌아가 연료와 탄약을
보충하고 다시 현장에 나가 일본에서 날아 올 공격대를 기다렸다.


드디어 일본 기지에서 F-82, F-80, B-26 등이 대거 출동했다.
이들 공격대는 도착과 동시 도로에 늘어선 기계화 부대를 공격했다. 각종 포탄과 기총탄들이 길게 늘어선 기계화 부대에 죽음의 불벼락을 안겼다.


                   한국전 최초로 적기를 격추했던 F-82기, 무스탕. 두 기를 쌍둥이로 합성한 기체를 가지고 있다.


나는 그 날 현장에 3회 출격하였는데 마지막 출격 때 보니 그 산등성이
길에 앞 뒤가 막혀서 늘어섰던 북한군 전차와 차량들이 모두 불타고 있었다.


마침 그 때는 바람도 불지 않아 연기가 수마일 상공으로 치솟고 있었다.
어두워지기 시작할 때는 적군의 기계화 부대 전체가 파괴되고 말았다.


미 극동 사령관 파트릿지 대장은 이날의 성공적인 공습 작전이
위기의 한국 전쟁 초반 전황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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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공군의 무스탕 기 - 헤스 대령이나 다른 교관들도 태극 마크를 단 무스탕기로 출격했었다.

이 공격으로 북한군 105 전차 사단 전차 38량, 자주포 7문, 그리고 트럭 117대가 파괴되고 북한군 다수가 섬멸당했다.

개전이래 유엔군의 항공 공격을 자주 받았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대규모 주간 행군을 했던 북한군은 대 타격을 받은 이 공습 이후 기계화 부대는 철저히 밤에만 기동하는 행군 방법으로 작전을 바꾸었다. 하지만 기계화 부대의 야간 기동이나 전투는 그 효율성을 크게 약화시키고
전진을 대폭 느리게 만든다.


앞에서 말했듯이 기계화 부대는 일본에서 출격했던 
대규모의 항공력 없이는 전부 섬멸하기가 힘들 정도의 대부대였었다.


헤스 대령이 단 두 기의 전투기만으로 출격했지만 좁은 국도에서
앞과 뒤의 차량들을 공격해서 이들을 가두어놓고 일본으로부터 대 규모 항공력이 출격할 때까지 장시간 잡아 놓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기계화 부대는 신속하게 기동해서 촌락이나 조치원 같은 도시로 흩어져 은신처로 피신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점으로 보아 단 두 기로 출격했었던 헤스 대령의 대담하고 지혜있는 대처가 큰 역할을 했다고 보아야 한다.


긴 도로에서 적 기계화 부대가 섬멸된 사례가 또 있다. 한달 뒤인 1950년 8월11일
경남 고성 사천 도로에서 105 전차 사단의 83 기계화 연대가 진격하는 미 해병을 피하여 도주하다가 미 해병 F-4U 전투기들에게 섬멸되었는데 함께 행군 중이던 대 병력도 함께 섬멸되었다. 

고성의 공습에서 83 기계화 연대의 차량 45량과
모터 사이클 55량이 박살나고 북한군 200명이 사살되었는데 평택에서는 덤벼들다가 두들겨 맞은 것이고 고성에서는 도망가다가 두들겨 맞았다는 차이가 있다.

울프 독이 항상  하는 이야기지만 한국 기계화 부대는 도로를 따라 공격과 기동을 해야 하는 근본적 취약점이 있다는
것을 이 북한 기계화 부대의 섬멸이 간접적으로 잘 보여준다.


                                                   대전 시가로 행진해 들어오는 105 여단 부대.
운좋게도 평택의 대폭격에서
섬멸된 부대와 따로 기동했었기 때문에 살아 남은 부대였다. 모터 싸이클을 모는 북한군은 모택동 군에서 넘어온 중국 동포들로 구성된 정예 부대였었다. 그러나 이 부대는 경남 고성에서 미 해병의 진격을 피해 도주하다가 모두 섬멸되고 말았다.


역시 같은 맥락이지만 산길에 기계화 부대를 몰아 넣지 말라는 한국 전쟁의 교훈을 북한 측이 여실히 보여준 사례이기도 하다.

평북 운산의 1 기병사단이나 장진호반의 미 7 사단 32 연대, 서울 북방 고양의 해피 밸리 전투에서의 영국군 얼스터 연대의 경우 중공군이 선두와 후미를 대거 인력으로 막은 다음 공격해서 섬멸당했는데 북한군은 단 두대의 무스탕 전투기에
앞뒤를 막히고 섬멸당한 것이 특색이다.


1951년 1월 3-4일 야간에 있었던 해피 밸리 전투를 아는 분은 극 소수였다. 좁은 논길에서  방망이 수류탄만으로 무장한 중공군에 의해 파괴된 얼스터 연대 배속의 쿠퍼 부대 크롬웰 전차 중 하나. 쿠퍼 부대 14량 전차 모두 수류탄에 궤도가 파괴 되어서 기동 불능상태로 포기되었다.



만약에 이 기계화 부대가 미 공군의 맹습에 섬멸당하지
않고 살아남았더라면 전황이 어떻게 흘러갔을까 한번 생각해보자.


북한 기계화 부대가 그대로 남하했더라면 대전에서 비록 대패했겠지만
7월 20일까지 버티었던 미 24사단의 지연전은 불가능했을 것이고 북한군은 그 보다 훨씬 먼저 대전을 함락하고 남진했을 것이다.



                            1950년 7월 20일 24사단장 딘 소장이 로케트 포로 직접 파괴한 T-34탱크
      딘 소장은 워커 중장으로 부터 7월 20일 까지 버티라는 명령을 받고있었고 부대 붕괴를 무릅쓰고 이를 수행했다.


최악의 경우 일본에서 급파된 미 1 기병사단이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 여유를
박탈하고 낙동강까지 몰아 붙였을지도 모른다.


가능성 높았던 다른 시나리오도 있을 수 있다.
앞에서 말한 바 대로 경부 축선의 빠른 돌파 가능성도 있겠지만, 차량이나 전차 등에서 여유가 있었던 105 전차 사단이 호남 지방으로 우회했었던 북한군 6사단에 차량과 전차등을 배속시켜 이들의 신속한 이동을 크게 도왔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한국전쟁 중 북한군 최대 명장이라는 방호산이 지휘했던 북한군 6사단은
모택동 군 출신으로 구성된 정예 부대로서 유엔군이 눈치채기 전 호남 지방을 급속히 우회해서 낙동강 교두보의 서쪽에 나타나 측면을 크게 위협했었다.


북한군은 뒤 늦게야 하동 전투에서 미군 350명을 사살한
이 부대에 105 전차 여단 소속 83 기계화 연대를 급파했었다. 시간적으로 상당히 늦은 배치였다. 이 연대가 앞에서 소개한 고성 사천 가도에서 미 해병대의 콜세어 부대에게 전멸당한 부대다.


방호산의 6사단은 북한군 부대 중에 유일하게 남해안에
도달한 부대이기도 했지만 인천 상륙 후 낙동강에 전개된 북한군 사단들이 모두 붕괴 분산 도주했는데도 건재 순을 유지하고서 태백산을 따라
북한 지역 집결지로 무사히 도주한 유일한 부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방호산은 전후 1954년 김일성에게 숙청당했다.


북한군 6사단은 순전히 도보로만 이런 신속한 측면 기동을 했었다. 포차(砲車)가 피스톤 수송( 차량이나 선박 지점왕복하면서 사람이나 물건계속 태워 나르거나 실어 나르는 .)을 해서 기동을 했었다지만 거의 도보로만 기동을 했었다.

만약에 김일성이 이들 사단의 가능성을 내다보고 평택 남방에서 파괴된 탱크나 트럭 중 일부라도 지원해주었더라면 휠씬 빠른 속도로 급습해와 낙동강 방어선의 측면이 빨리 붕괴되고 유엔군은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미군의 폭격으로 불타는 북한 유조차


또 평택에서의 폭격은 북한군의
기본 전력을 군수 보급면에서도 크게 약화시켰다는 점에서 그 성과를 평가할 수 있다.


개전 초 소련은 장비 공급에 늦장을 부려서 북한군은
가지고 있는 장비가 파괴되면 보충하기가 쉽지 않았었다.


1950년 7월 2일 충북 충주시 외곽 동락리에서 국군 6사단 7연대에게
전멸당한 북한군 15사단 48연대는 800명의 전사자를 내고 트럭도 60 대나 빼앗겼다. 그런데 이 트럭이 이 연대가 가진 전체 자산이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전투가 있었다.

북한군 연대장
김치구가 지휘하는 이 연대는 다시 남하하다가 경북 상주 화령장에서 국군 17연대에게 기습당해 전멸의
대패를 당해야했다.


특기할 것은 김치구 중좌가 지휘하는 이 연대는 동락리에서
손실당한 차량을 보충하지 못하고 소가 끄는 달구지로서 군수품을 운반하며 남하했었다는 사실이다.

두 번에 걸쳐 치뤼진 화령장 전투에서 김치구의 연대는 단 한량의 차량도 보유하지 않아 국군에게 노획당한 것이 없었다. 동락리에서 대패하고 장비 보충없이 급히 손실 인원만 보충한 채 남진했다는
이야기다.


이 사실은 전투
에서 손실당한 장비를 비교적 수월하게 미군으로부터 보충 받았던 국군과 대비된다.


북한군은 헤스가 주도했던 공습으로 손실당한 장비들을
후의 낙동강 방어전에서도 결코 보충할 수 없었다. 이 공습으로 북한은 전투력의 약화라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던 것이다.


                         금강 방어선에서의 미군 포병 -암담한 시기에 북한군 기계화 부대가 섬멸되었다.


미국이나 한국에서 작전의 명칭조차 없이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
이 폭격 작전에 명칭만이라도 부여해서 한국전쟁의 한 페이지에 의미 있게 평가되었으면 한다.


헤스 대령은 1951년 250회 출격을 끝으로
한국 근무를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헤스 대령과 원장 황온순 여사와 고아.  황온순 여사는 후란체스카 여사가 추천했다고 한다.


그의 고아 공수작전이 크게 보도되자 그의 자서전 집필 의뢰가
쇄도해서 그는 전송가[Battle hymn]라는 제목의 책을 집필해서 출판했다.


그 책이 인기를 끌자 영화계에서도 의뢰가 와 1957년
전송가는 당시 최고 스타 록 허드슨 주연으로 영화화 되었다.


헤스 대령은 자서전과 영화에서 받은 인세를 한 푼도 쓰지
않고 자신이 설립하고 황온순 여사가 책임자로 있던 고아원에 모두 기부하였다.


이 고아원은 후에 서울로 이전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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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열혈국방 트랙백 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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