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부'에 해당되는 글 65건

  1. 2011.05.19 국방부에서는 지금 무슨일이??
  2. 2011.02.07 "0"세대 전투기를 아시나요?
  3. 2011.02.04 해적국가 소말리아는, 우리 최초의 파병국가였다.
  4. 2011.01.25 '기후와 날씨'는 중요한 무기이다.
  5. 2011.01.24 여명작전의 UDT대원은 최영 장군과 같았다.
  6. 2011.01.19 날씨 무시하면, 전쟁에서 망신당한다. (1)
  7. 2011.01.17 무기, 신세대가 구세대를 이길까?
  8. 2011.01.17 [전투형 군대?] 제1탄. 현빈도 간다.
  9. 2011.01.12 천안함, 연평도 그리고 북한이 '서울광장' 에!
  10. 2011.01.11 한-일 국방장관, 국민이 싫다는데 왜 만났나?
  11. 2011.01.11 6.25전쟁 당시엔 몰랐던, 위기 (上)
  12. 2011.01.05 멋진 '나치 친위대'보다는, 평범한 사람이 낫다.
  13. 2011.01.03 '워커 힐'과 6.25전쟁 영웅
  14. 2010.12.31 '2011년 국방의 새로운 각오!' 대통령께 보고드렸습니다.
  15. 2010.12.27 다연장로켓 K-136 구룡, 북한 122mm방사포에 대응하다.
  16. 2010.12.24 2010년 전사자 유해발굴과 새해 병복무기간 단축 이야기 (3)
  17. 2010.12.22 6.25당시 크리스마스를 지켜낸 우리군
  18. 2010.12.20 훈련은, 어떠한 여건에서도 중단될 수 없다.
  19. 2010.12.19 생생! '10년 응급처치 경연대회("살려야 한다!")
  20. 2010.12.16 귀신잡는 해병대, 동해 NLL도 지켰다.
  21. 2010.12.13 서해 최북단은 백령도가 아닌, '석도와 초도'였다.
  22. 2010.11.30 연평부대의 사투는 6.25당시 18포병대대와 같았다.
  23. 2010.11.27 '방사포탄 추진체 1번', 국방부가 조사하고 있습니다.
  24. 2010.11.25 '한미 연합훈련', 계획대로 실시합니다.
  25. 2010.11.24 연평도를 지키고 싶었던, 우리 해병..., (2)
  26. 2010.11.23 첨단무기개발 성공에는 실패와 눈물이 있었다.
  27. 2010.11.22 아시안게임 제1회 대회, 한국전쟁으로 불참하다.
  28. 2010.10.29 변신의 명수, 전투기 (2)
  29. 2010.07.23 국방부 정책홍보담당관, '트윗벙개'의 추억.. (2)
  30. 2010.06.01 대학생들 및 네티즌들에게 천안함을 공개합니다.

 



여러분은 혹시 국방부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잘알고 계신가요??

사실 "국방부"하면 군인과 각종 무기로 국가를 지키고 있는 군의 모습이 먼저 연상될 뿐,
국방정책을 결정하고 추진하는 정책부서인 국방부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쉽게 떠오르지 않을 것입니다.

국방부의 업무가 타 정부부처에 비해 국민의 일상 생활과 직접  관련되어 있지 않을 뿐더러,
보안을 중시하는 부처 특성상 폐쇄적인 조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기도 할텐데요..




그나마 조금 더 관심을 갖고 국방부 홈페이지에 나타나 있는 조직도를 찾아본다면
국방부의 업무에 대해 개략적으로 알아볼 수는 있겠지만..
(특별히 업무내용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이 되어있는 것도 아니고..)


                                                           국방부 조직도 크게보기


조직도에서 보듯이 국방부는 "정부내의 작은 정부"라 불릴만큼 약 70여개의 과가 다양한 분야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어 그 업무 범위가 방대하고, 또 국방관련 전문부서도 많아

조직도상의 명칭만으로는 국방부의 업무를 이해하기가 어렵죠.
(사실 국방부에서 근무하는 직원조차도 근무해 보지 않은 다른 과에서 어떤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지 모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

이쯤되면 " 과연 국방부의 저 많은 부서에서는 도대체 무슨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자연스레 궁금증이 일어나게 되는데요..

그러한 궁금증을 일시에 해소할 수 있는 좋은 방송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준비 중에 있다고 합니다.

바로 "보고듣는 국방정책"이란 프로그램인데요..
국방부 본부의 각 과장들이 국군방송 TV에 출연, 해당과의 업무와 주요 정책 및 현안들에 대해
직접 설명을 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이는 국방부의 주요 정책을 국민들에게 직접, 그리고 좀더 쉽게 설명을 드림으로서
국민과의 소통을 강화하고 보다 친근한 국방으로 다가가기 위한 방안으로 추진되는 것입니다.



마침 그 첫 방송의 녹화가 있다길래 현장을 찾아가 보았는데요...
잠깐 녹화현장 모습을 소개해 드릴까요..


  첫 주자로는 국방부의 핵심 중에서도 핵심 부서인
  기획총괄담당관(과장 김동주)과 조직관리담당관(과장 이남우)이 나섰습니다. 

  방송출연이 쉽지 않은 일이고, 대부분 처음인지라 모든 과장님들이 부담을 갖고있기는 마찬가지이나
  "매도 처음 맞는 게 낫다"는 각오로 두분 과장님이 용감하게 먼저 출연을 결정한 것이라고 합니다.

  출연자 대기실에서 출연을 앞두고 있는 과장님들을 만나뵈었는데요...

  방송 출연시 분장은 기본. 다소 겸연쩍지만 방송파를 탄다는 기대감과
  조금이라도 더 잘 나와야한다는 욕심에 다소곳이 분장사의 분장도 받고..


  녹화 시작을 기다리며 수없이 읽어서 이미 외우다 시피한 대본도 다시 한번 넘겨보고,
  방송작가에게 방송요령에 대해 조언도 들으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지만, 
 
  기다리는 내내 목이 타는 듯 연신 물을 마시는 표정에서는 긴장된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내가 웃는게 웃는게 아니야~~)





  마침내 녹화장 세팅이 끝나고 녹화가 시작되었습니다.

 



  MC는 미스코리아 출신인 하경민 아나운서가 맡아주었는데요.
 
  미모만큼이나 아름답고 격조있는 말솜씨로 
  과장님들을 리~드(^^)하며 매끄러운 진행을 해주었습니다.

  (하지만 녹화가 끝난 후..
    " 어휴~~ 국방정책에 관한 전문 용어가 많아 힘들었어요"라며 한숨을 내쉬기도..)

 



  녹화가 진행되는 도중..
  잠꼬대도 업무 이야기로 할 정도로 업무에 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문가임에도
  막상 카메라 앞이라 그런지 대사가 꼬여 몇차례 NG가 있기는 했었지만..




  잠시 후 분위기에 익숙해 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 여유를 찾고 술술~
  업무에 대해 한가지라도 더 소개해 드리기 위해 열변을 토하며 진짜 실력을 발휘하였습니다.
 

 



  어렵사리 첫 녹화가 끝나고..
  홀가분한 표정의 과장님들이 "첫 녹화라 더 긴장되고 힘들었던 것 같다" 라고하자
  방송 스탭 중 한 분이 "처음 녹화가 제일 쉽고, 갈수록 어려워진다.."며 팁을 알려 주더군요.
  (다음 차례 과장님들은 조금 더 긴장하셔야 할 듯..^^)



"보고듣는 국방정책" 은 5.24일 12:20분 첫 방송을 시작으로
주 2회(매주 화, 목요일 12:20분) 방송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알기 쉬운 국방정책의 A to Z가 여기 다 있습니다. 

국방부에 대해 알고 싶으신 분들은 모두 국군방송 TV 앞으로..
오세요~~




신고
Posted by 열혈국방 트랙백 0 : 댓글 0





                         잃어버린 세대 ?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지구의 역사는 약 40억년이지만 이에 비하여 인류가 출현한 것은 약 400만 년 전이라 한다. 그리고 글로써 역사를 기록한 것은 약 3,000여 년 전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지구의 역사에 비하면 상당히 짧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이 막연히 체감하고 있는 역사는 불과 2,000년 정도 밖에는 되지 않는다.

 
                                     인류의 역사는 지구 역사에 비하면 티끌과 같다
 

그 이유는 서양력 때문이다. 지구상 모든 국가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국가에서 사용하는 서양력은 역사를 BC(기원전)과 AD(기원후)로 나누어서 표기한다. 이런 통상적인 표기방식 때문에 기원전 시대의 많은 역사적 기록과 유물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기원후 역사가 느낌상으로 더 큰 비중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서기 1년 이전의 모든 역사를 비슷한 시기로 보는 착시현상이 벌어진다.
 

그래서인지 막상 기원전 시기를 모두 비슷한 동시대로 인식하는 오류를 범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석기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만화에 공룡이 등장하는 것처럼 말도 안 돼는 허무맹랑한 내용들이 종종 묘사되고는 한다. 극화니까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단지 기원전이라는 이유 때문에 10만 년 전과 1억 년 전이 비슷한 시기로 연관 지어지는 것은 그만큼 어느 정도 이전의 과거를 정확히 느끼기 어려워서다.
 

                             인간과 공룡이 공존한 이런 장면은 한마디로 어불성설이다
 

무기사에도 이와 비슷한 경우가 종종 있는데 대표적으로 전투기의 세대구분이 그렇다. 누가 그런 구분법을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이전의 역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트시대가 도래하면부터를 제1세대 전투기시대로 구분하고 있다. 따라서 제트기 등장 전에 있던 시기는 마치 BC처럼 취급받는다. 다음은 1940년대 이후의 전투기 구분법인데 대략 다음과 같다.


   제1세대 - 제트전투기 최초 등장시기  Me-262, F-86, MiG-15 등
  제2세대 - 초음속 돌파시기  F-104, MiG-19, MiG-21, Mirage 3 등
  제3세대 - 레이더 및 기본유도무기탑재시기  F-4, MiG-25 등
  제4세대 - 고성능 전자장비 및 정밀유도무기탑재시기  F-15, F-14, Su-27 등
  제5세대 - 스텔스 및 차세대전투 기능  F-22, F-35 등


                                        제1세대 전투기인 Me-262와 제5세대로 인정받는 F-22
 

사람의 주관적 기준이 관여할 수도 있겠지만 위의 구분은 많은 자료에서 통용되는 기준이다. 그런데 이러다보니 전사의 큰 획을 장식한 불멸의 프로펠러전투기들이 황당하게도 단지 제트세대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BC시기의 역사처럼 도매 급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같은 전장에서 활약하였지만 P-40과 P-51는 세대가 다를 만큼 현격한 성능차이를 보인
             전투기들이다. 하지만 지금의 구분으로는 제1세대 이전 전투기들로 구분된다.
 

프로펠러 전투기라도 매니아들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의 전투기로 활약한 P-40과 P-51의 성능차이가 엄청나게 크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굳이 매니아가 아니더라도 제1차 대전 당시의 복엽기와 제2차 대전 당시의 전투기를 같은 세대로 뭉뚱그려 표현하는 것이 이상하다고들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도 제트기 시대부터 1세대로 하다 보니 이들 모두가 엉뚱하게도 전투기 시대의 BC가 되어 버린 것이다.

 
                    프로펠러 전투기라는 이유만으로 이들을 동급의 전투기로 묶기는 곤란하다
 

전투기도입 당시부터 시기를 구분한다면 너무 구분이 많이 갈 것 같아서 그렇게 표현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제트전투기의 등장을 마치 AD로 하고 그 이전 전투기의 역사를 하나의 역사로 몰아넣은 것은 공룡시대와 석기시대를 같은 시기로 표현한 만화영화를 보는 것처럼 왠지 불편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사실 전투기가 가장 멋있게 하늘의 주역으로 활약하였던 시기는 제트기 등장이전인데도 말이다.




신고
Posted by 열혈국방 트랙백 0 : 댓글 0


  

        최초로 평화유지군이 파견되었던 바로 그곳
 


극적인 ‘아덴만 여명 작전’과 관련하여 소말리아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마치 국가가 직접 나서서 해적질을 하는 것으로 착각이 될 만큼 소말리아하면 해적이 떠오를 정도인데, 일부 언론 매체에서는 해적질이 소말리아의 가장 큰 산업이라고 비하할 정도다. 도대체 나라가 어떠하기에 자국민들이 전 세계로부터 비난받는 해적질을 거리낌 없이 자행하도록 방치하고 있다는 말인가?
 

                           청해부대의 작전과 더불어 소말리아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현재 각종 통계자료에 따르면 소말리아는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다. 국토의 대부분이 건조지대라 유목 외에 별다른 산업기반도 없으며 이 마저도 생산 활동이 미미하다. 따라서 종종 대량의 아사자가 속출하는 끔직한 기아사태가 발생하여 국민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 더구나 장기간의 내전으로 인하여 그나마 형식상 존재하는 정부도 어느 누구도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상태인 사실상 무정부국가이다.
 

                            몇 십 년간 이어진 내전으로 국가의 기능이 완전 마비되었다


그렇다보니 해적질이 이 나라의 산업 아닌 산업이 되어버린 형국이고 해적들은 먹고살기 위한 수단이라고 주장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해적들과 이를 뒤에서 비호하는 군벌들이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핑계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사익을 채우기 위해 온갖 나쁜 짓도 마다하지 않는 이들의 존재가 나라의 발전을 가로막고 대부분의 선량한 소말리아 국민들을 도탄에 빠뜨린 가장 큰 주범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어떤 반론도 있을 수 없다.

 
                                   가난하다는 사유로 해적질이 정당화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소말리아가 원래부터 이토록 비참한 국가는 아니었다. 제국주의 시대에 공식적으로 서구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던 아프리카의 유일 지역이었을 만큼 역사적 자부심이 큰 나라였다. 오늘날 해적질의 주 활동무대인 이른바 ‘아프리카의 뿔(Horn of Africa)’이라 불리는 동아프리카 반도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어 유사 이래 오래동안 아랍, 아프리카, 인도를 연결하는 무역의 중심지로 영화를 누리기도 했다.


                                             우주에서 바라 본 아프리카의 뿔


그러나 국민들이 단결하여 국가를 발전시키지 못하였고 1991년 이후 내전이 발발한 이후 국가의 몰락이 가속화되면서 오늘날 이러한 지경까지 이르고 말았다. 수백만의 난민이 발생하고 무고한 인명이 희생되자 유엔은 1992년 12월 치안유지를 위한 개입결의안(제794호)을 채택하여 평화유지군(PKO)을 파견하였는데 바로 이때 우리나라도 유엔의 요청을 받아들여 대한민국 수립 후 최초의 평화유지군을 파견하였다. 바로 ‘상록수부대’다.


                                            태극기가 선명한 상록수부대의 군복


국군의 해외 파병은 월남전과 1991년에 있었던 걸프전도 있었지만 이들 사례는 연합군의 일원으로 파병된 경우이고 국제기구의 요청에 따라 평화유지군으로 해외로 나간 것은 1993년 7월 소말리아 파병이 최초였다. 당시 공병대대를 주축으로 창설된 상록수부대는 1995년까지 2차례에 걸쳐 연 인원 516명을 파견하여 지역 재건, 의료 지원 등 인도적 활동을 중심으로 평화정착 지원임무를 수행하였다.


                                             소말리아 현지에서 활동하는 모습


그런데 이처럼 우리도 참여한 유엔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소말리아의 평화회복은 실패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현재는 AU(아프리카 연합) 주축의 평화유지군이 소말리아의 치안 확보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지만 공공연히 백주에 테러행위가 자행 될 만큼 아직까지도 소말리아의 항구적인 평화는 요원해 보인다. 따라서 해적 문제 또한 가까운 시일 내에 해결 될 가능성마저 희박하다. 국제사회는 물론 소말리아 국민들에게도 안타까운 일이라 할 수 있다.

 
                                            1995년 귀국 보고를 하는 상록수부대


해적 사건 때문에 부각되었지만 이처럼 소말리아는 국군과 인연이 많은 곳이었다. 어느덧 상록수부대의 파병은 과거의 일이 되었지만 이것은 대한민국이 세계 평화의 일익을 담당하는 책임 있는 국가로 자리매김하는 기폭제였다. 현재 우리는 평화유지군을 세계의 여러 분쟁 또는 재해 지역에 파견하여 훌륭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1993년 소말리아 파병은 그 의미가 크다 할 수 있다. 소말리아에 하루 빨리 평화가 정착하기를 기원해 본다.






신고
Posted by 열혈국방 트랙백 0 : 댓글 0


                   

                   가장 무서울 수 있는 무기
 
 

오늘날 영화산업은 대규모 해외로케나 컴퓨터그래픽(CG) 등을 많이 이용하는 관계로 특정장소를 고집하지는 않지만 할리우드(Holly Wood)는 아직도 영화산업의 메카다. 이전에는 뉴욕 같은 동부에서 영화촬영이 이루어졌으나 1911년 네스터(Neste)라는 영화사가 촬영소를 건설한 것을 시작으로 할리우드의  여건이 좋다고 소문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환경이 많이 바뀌었어도 영화산업의 상징인 할리우드
 

영화산업이 유독 할리우드에서 발달하게 된 데는 자본이나 인력 조달이 편리한 측면도 있지만 사실 그 보다 결정적인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 바로 건조한 날씨다. 영화도 산업이라 비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촬영기간은 제작비와 상당히 관련이 많다. 따라서 제작비를 절감하여 많은 이윤을 남기려면 당연히 촬영에 투입되는 시간을 최대한 단축시켜야 한다.

 
                                     영화 제작 기간은 비용문제와 직접 연결 된다
 

배우의 출연 등은 인위적으로 조정 가능하지만 날씨는 사람의 능력으로 바꿀 수는 없었다. 만일 촬영 계획을 잡아 놓고 만반의 준비를 다하였는데 비가 오면 모든 것이 어긋날 수밖에 없다. 맑은 날이라도 비 오는 장면은 소방호스로 물을 뿌려 쉽게 재현할 수 있지만 반대로 내리는 비는 막을 방법이 없어 일 년 내내 맑은 날씨가  이어지는 할리우드는 영화산업에 유리하였던 것이다.

 
           인위적으로 비오는 장면을 연출하는 모습 (출처-http://blog.naver.com/sansuyu2010)
                               하지만 반대로 오는 비를 멈추게 하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오늘날 과학기술은 부분적인 인공강우가 실용화 한 수준까지 발달 하였다. 과거에 수시로 벌어지던 기우제를 생각한다면 이제는 비를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이 더 이상 기적이 아니라는 의미다. 반면 할리우드의 존재 이유처럼 오는 비를 멈추게 하는 것은 아직도 그리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이것 또한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인공강우는 흔하게 사용하는 기술이 되었다 (출처-수자원공사)
 

비록 비용도 많이들고 제한적인 경우에만 사용하지만 오는 비를 멈추도록 하는 기술도 현재 존재한다. 가장 앞선 기술을 보유한 나라가 러시아(소련)인데 이러한 기술의 시작은 군사적 목적 때문이었다. 전사를 살펴보면 날씨로 인하여 작전 차질을 겪은 예를 찾아보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닐 만큼 날씨와 군사는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러시아(소련)는 유사 이래 겨울의 혹한을 방어무기로 적절히 사용하였다.
 

러시아(소련)는 알다시피 전통적으로 기후와 날씨를 중요한 무기로 사용하였던 경험이 있던 나라여서 이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많은 선도적 기술을 보유하였다. 그 동안 러시아(소련)이 비밀리에 갈고 닦은 날씨 제어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던 적이 두 번 있었는데, 두 번 모두 세계인의 주목 속에 개최 된 행사였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개막식
 

1980년 7월 19일, 모스크바에서 제22회 올림픽이 개최 되었으나 개막당일 모스크바에 폭우가 쏟아지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군용기들이 특수약품을 살포하여 비구름 제거작전에 들어가 주경기장인 레닌스타디움 반경 500미터 이내에 내리는 폭우를 개막식이 진행되는 동안 막아버렸다. 개막식이 끝난 후 폭우가 쏟아 졌다고 하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이러한 기술은 극비에 붙여졌다.

 
                                          2005년 제2차대전 승전 60주년 기념식
 

2005년 5월 9일, 러시아는 세계 54개국 정상들을 초청한 가운데 제2차 세계대전 승전 60주년 기념행사를 모스크바에서 성대히 개최하였다. 행사는 비가 쏟아지는 날씨에 시작되었는데 절정이라 할 수 있는 군사 퍼레이드가 개시 되자 군용기가 모스크바 상공의  비구름을 없애는 작전에 전격 투입되어 비를 막아버리고 그 사이 군사 퍼레이드가 성공적으로 끝났다.
 

                           자연재해를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다면 그것은 비극이다
 

위와 같이 비록 특정 행사를 위해 강우를 제어 기술이 선보이기는 하였지만, 이러한 기술이 인류의 복지가 아닌 만일 살상의 도구로 사용된다면 그것은 상당히 무서운 일일 것이다. 자연 재해는 인간의 삶을 위태롭게 가장 큰 요소인데 그것이 인위적으로 가능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무서운 일이라 할 것이다. 날씨를 제어하는 기술이 무기가 되는 일이 없기를 기원한다.





신고
Posted by 열혈국방 트랙백 0 : 댓글 0





                    아덴만에서 부활한 명장
 
 

지난 2011년 1월 21일, 우리군은 역사에 길이 빛날 쾌거를 이루었다. 해적에게 피랍된 '삼호주얼리호'의 인질 구출 작전에서 우리군은 세계 대테러전 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대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비록 피랍선박 선장 석해균 씨와 UDT대원 3명이 부상을 당하였지만 21명의 인질들과 이번 작전에 투입된 해군요원들 모두가 완벽할 정도로 무사했다는 점은 격찬을 받을 만 했다.

 
                                        함교로 진입을 시도하는 해군 UDT대원들
 

항상 세계 최고 수준의 특수전 부대를 보유하고 있다고 자부하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해외에서 벌어진 테러작전에 투입된 경험이 일천하기 때문에 청해부대가 이 정도로 멋지게 활약할 줄 예상했던 이들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이번의 업적은 이스라엘 특공대가 지난 1976년 실시하여 이제는 인질 구출 작전의 전설이 된 엔테베 작전과 견주어도 결코 손색이 없을 정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엔테베 공항에 억류되었다가 무사히 구출된 인질들
 

인질 구출 작전이 어려운 이유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생명을 우습게 아는 흉포한 테러범의 위협 하에 인질들이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선박이나 항공기 피랍의 경우는 좁은 공간 안에 테러범들이 인질들과 뒤섞여 있어 이들을 구분하여 테러범을 일일이 제거하고 인질을 구해내기가 상당히 힘들다. 따라서 격렬한 교전이 벌어졌음에도 모든 인질들의 생명을 구하고 해적들을 완벽하게 제압한 이번 작전이 더욱 빛나는 것이다.

 
                            격렬한 총격전 와중에도 무사히 구출된 삼호주얼리호 선원들
 

이것은 마음 한 구석에 가졌던 모든 염려를 일순간 종식시키는 것을 넘어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무한한 자부심을 가지게 만들었다. 또한 지난해 우환이 연이어 발생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던 국군의 사기를 단 번에 회복시켜주었다. 더불어 우리를 만만하게 보았던 국제 테러조직에 엄중한 경고를 주었고 앞으로 도발이 반복될 경우 어떻게 응징을 받게 될 것인지 확실히 알려주었다.

 
                                             청해부대 UDT대원들의 훈련모습
 

우리나라는 소말리아 해적의 위협으로부터 선박들을 보호하기 위한 '항구적 자유 작전-아프리카의 뿔(Operation Enduring Freedom-Horn of Africa)'에 참여하기 위해 지난 2009년 3월 청해부대를 창설하여 현지에 파견하기 시작하였다. 4,500톤급 한국형 구축함을 기반으로 1기의 슈퍼링스 헬기와 특수전 임무를 수행할 30여명의 UDT대원으로 구성된 청해부대는 4개월을 주기로 교대되고 있는데 금번에 활약한 최영함은 제6진이다.

 
                                        청해부대 1진으로 파견되었던 문무대왕함
 

다음은 그동안 항구적 자유 작전에 파견되어 총 15회의 해적 퇴치 작전을 실시한 청해부대의 일지다.
 
1진 2009년 3월 13일 문무대왕함
2진 2009년 7월 17일 대조영함
3진 2009년 11월 20일 충무공 이순신함
4진 2010년 4월 2일 강감찬함 (CTF-151 연합해군 기함)
5진 2010년 7월 9일 왕건함
6진 2010년 12월 29일 최영함

 
                                           6진으로 파견된 최영함의 출항모습
 

이번 작전의 주인공인 최영함은 지난 해 12월 29일 파견되었기 때문에 현지에 도착하자마자 작전에 투입된 경황없는 상황이었지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작전을 성공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번에 '아덴만 여명 작전'에서 최영함이 보여준 모습은 640여 년 전 홍산대첩(鴻山)을 이끌어 이후 왜구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던 백수최만호(白首崔萬戶)의 재림이라 하여도 결코 모자람이 없다.

 
                                백수최만호로 불린 최영장군의 묘 (출처-Wikimedia)
 

백수(白首)는 백발을 뜻하고 만호(萬戶)는 대장군이라는 뜻을 지닌 몽골말에서 유래된 고려의 관직이다. 즉, 백수최만호는 멋진 백발을 휘날리며 전투를 지휘하던 고려말의 명장 최영(崔瑩, 1316~1388)을 왜구들이 두려워하면서 부르던 별명이었다. 이름을 물려받은 구축함답게 최영함은 너무나 멋진 서전을 장식하였다. 앞으로 남은 임무기간 동안에도 왜구에게 죽음의 사신이었던 백수최만호의 혼이 항상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






신고
Posted by 열혈국방 트랙백 0 : 댓글 0




           날씨는 아무리 대비해도 모자람이 없다
.
 
 
히틀러는 소련침공을 바로 앞에 두고도 이탈리아가 망신을 당하고 있던 북아프리카와 발칸반도 전선에 전력을 나누어 개입하였을 만큼 자신만만하였다. 지난 1939년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대전이 발발한 이래 독일군은 패배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특히 1940년 여름에 유럽 최고의 육군을 보유한 프랑스를 불과 7주 만에 무너뜨려 세계를 놀라게 하면서 더 이상 유럽에서 독일을 맞상대할 나라가 없어 보였다.

 
              히틀러는 소련 침공을 앞두고 북아프리카 전선에도 개입하였을 만큼 자신만만하였다
                                     (사막을 가로질러 전진하는 독일 아프리카군단)
 

반면 소련군은 지난 1939년 겨울, 7배가 넘은 병력을 앞세워 핀란드를 쳐들어갔다가 겨울 추위와 핀란드군의 격렬한 대응에 무너져버린 한심한 군대의 표상이었다. 비록 강화조약을 맺고 승리를 거두었지만 소련군이 입은 인명 피해가 핀란드군의 10배가 넘는 엄청난 규모였다. 이런 사실을 목도한 히틀러는 독일군보다 규모에서 컸던 소련군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독일에서 모두가 그렇게 낙관적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소련은 지난 핀란드 침공에서 역사에 길이 남는 망신을 당하였다.
                                   (핀란드군의 유격전술에 전멸한 소련군 기갑부대)
 

결국 일부의 우려대로 전쟁은 독일의 의도대로 진행되지 않았고 4년간의 격전 끝에 패배하였다. 결론적으로 독일이 좌절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예상을 뛰어넘는 소련군의 끈질긴 저항이었지만 여기에 덧붙여 겨울 혹한도 크게 한 몫 하였다. 소련과의 전쟁을 앞두고 혹한을 대비하여 했음에도 제대로 된 설상복이나 부동액도 준비하지 않고 전쟁을 벌였을 만큼 날씨에 대한 독일의 준비는 상당히 미흡하였다.

 
                          1941년 12월 모스크바 전투 당시 소련군 진지로 투항하는 독일군
                  소련군과 달리 제대로 된 방한 장비와 설상복이 준비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열대지방에 전혀 생각지 못한 한파가 닥친 것도 아니고 소련의 겨울 날씨가 춥다는 것은 상식인데도 독일의 준비 상태는 왜 그토록 엉망이었을까? 130년 전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하였다가 어떻게 무너져 내렸는지는 히틀러는 물론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최근 혹한보다 보급의 문제였다고 보는 경향이 크지만 나폴레옹이 폴란드로 도망쳐 나왔던 12월 초에 영하 35도까지 떨어졌을 만큼 그해 겨울은 추웠다.

 
                       겨울에 소련과 벌이는 전쟁이 어떠할지는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모스크바에서 후퇴하는 나폴레옹)
 

그런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 있었음에도 독일은 어처구니없게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였다. 그것은 바로 모든 것을 자기식대로 해석해 버린 히틀러와 그를 일방적으로 떠받들던 추종자들 때문이었다. 소련을 침공한 1941년 6월, 독일군 기상전대는 이번 겨울 날씨가 상대적으로 따뜻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그러했던 이유는 1939, 40년의 겨울이 30년 만의 혹한이었는데, 20세기 들어 2년 이상의 추위 다음에는 통상 날씨가 온화하였기 때문에 내린 결론이었다.

 
                                    제2차 대전 당시 사용한 이동 기상관측장비 Kurt
 

그러나 가을이 되자 기상전대는 상층대기의 순환이 예년과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을 관측하였고 이를 근거로 1941년 겨울은 유래가 없을 만큼 강한 추위가 몰려 올 것으로 예보를 변경하였는데 그때는 독일이 소련을 신나게 몰아붙이던 중이었다. 히틀러는 전황에 고무되어 자신은 나폴레옹과 다르다고 진작 결론을 내려버렸고 괴링은 한술 더 떠 ‘영하 15도 이하로 절대 내려갈리 없다’고 단언하면서 보고를 묵살하였다.
 

                              자신들의 입맛대로 날씨를 제단 하여 버린 히틀러와 괴링
 

하지만 1941년 겨울은 영하 30~40도의 혹한이 계속된 100년만의 혹한으로 기록되었고 독일의 진격은 결국 멈출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날씨를 자기편으로 이용한 소련군도 지난 핀란드 침공당시 혹한으로 엄청난 수가 전사상한 경험이 있어 이를 교훈 삼아 동계전투 준비를 철저히 하여 독일의 진격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누가 추위를 잘 참느냐가 아니고 누가 대비를 잘하고 있느냐의 문제였다.

 
                                동계전투는 대비를 튼튼히 한 자가 승리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역사의 교훈이다.
 

사실 괴링이 주장한 영하 15도도 보온대책 없이는 편안히 버티기에 매우 힘든 혹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한에 대한 충분히 대비도 없이 전쟁을 벌인 행위는 만용이라 할 수 있다. 실력만 과신하여 과거의 교훈을 무시한 독일과, 반대로 전에 있었던 비참함에서 교훈을 얻은 소련과의 전쟁은 어쩌면 이미 승패가 갈렸던 것일지도 모른다. 상대뿐만 아니라 자연까지 과소평가해서 승리를 얻은 예는 없다. 그것은 역사의 진리다.







신고
Posted by 열혈국방 트랙백 0 : 댓글 1


                        

                     너 몇 살이냐 ?
 
 

과학기술의 발전은 그야말로 눈이 부실 지경이다. 특히 어느덧 우리 삶과 가장 밀접하게 된  IT분야는 일일이 쫓아다니기 힘들 정도인데, 그렇다보니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다. 불과 10년 전에 이동통신과 결합한 손바닥만 한 컴퓨터로 언제어디서나 필요한 내용을 실시간 검색을 할 수 있게 되리라고 확신한 이들은 그리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불과 10년 전만해도 이런 모습을 상상하기는 힘들었다 (사진-fnnews)
 

사실 새로운 기술이 가장 빨리 실용화되는 분야 중 하나가 바로 무기인데 그 이유는 단순명료하다. 남이 보유하지 못한 기술을 이용한 무기가 장차에 있을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것은 굳이 일일이 역사적 사례를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단순히 예를 하나만 든다면 총의 등장은 화살의 필요이유를 상실하게 만들어 버렸다. 화살을 아무리 업그레이드하여도 총 앞에서 무기로써의 가치가 무의미하게 된 것이다.

 
    온갖 폼을 잡는 칼잡이를 총으로 순식간 제압하는 인디아나 존스 (레이더스 스틸컷)
 

그런데 이런 당연한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무기가 하나있다. 이른바 콜트 45구경(Colts .45)으로 불리는 M1911권총이다. 제식번호에서 알 수 있듯이 올해가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인데 놀랍게도 아직도 일선에서 애용되고 있다. 국군도 지난 1988년 자체 개발한 K5권총을 제식화하기 전까지 사용하였고 미군은 1985년 M9권총을 채택하기 전까지 사용했고 일부에서는 아직도 쓰고 있다.

 
                          탄생 100주년이 된 M1911 콜트 45구경 권총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다른 무기들과 비교한다면 M1911의 위대함이 어떠한지 쉽게 이해 될 수 있다. 지금은 최신 스텔스전투기인 F-22가 하늘의 제왕으로 군림하고 있지만 100년 전에는 나무골격에 헝겊으로 동체를 감싼 복엽기가 날아다녔다. 1916년 전차가 처음 등장하였을 때 모습은 마치 물탱크 같아 암호명도 Tank로 정해졌고 결국 일반명사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그때 탄생한 무기가 박물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살아서 사용되고 있다.

 
                        1916년 탄생한 최초의 전차인 Mk1의 조악한 모습
                         M1911의 유구한 역사가 경탄스러울 수밖에 없다
.
 

총기의 보유와 사용이 엄격히 제한되고 있는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 같은 나라는 개인의 총기 보유가 자유롭고 총기수집이 취미인 사람들도 많은 편이다. 이들에게 M1911는 상당히 인기가 있고 특히 생산 년대가 오래된 기종은 콜렉터들에게 비싼 가격에 거래되고 있을 정도다. 오죽하면 미국의 프로야구팀인 휴스턴 애스트로스(Houston Astros)가 창탄하였던 1962년 당시 처음 이름이 휴스턴 콜트45(Houston Colts .45s)였다.
 

                                      휴스턴 콜트45의 팀 로고
 

흔히 '자동화기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존 브라우닝(John Browning)이 제작한 M1911이 아직까지도 질긴 생명력을 이어가는 가장 큰 이유는 더 이상의 개량이나 업그레이드가 필요 하지 않았을 만큼 완성도가 높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무기로써 권총이라는 물건은 그 용도가 극히 제한적이므로 어느 정도 이상의 성능만 달성하면 충분히 사용가치가 있다는 의미다.

 
                                 전설적인 총기 발명가인 존 브라우닝
 

M1911의 명성이 어떠했는지 알려주는 일화가 2차대전 당시 독일이 이를 사용했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다. 지금도 세계적인 방산 업체인 노르웨이의 콩스버그 그루펜(Kongsberg Gruppen)이 2차대전 전에 M1911을 라이센스 생산하고 있었다. 그런데 1940년 독일이 노르웨이를 점령하자 소량이기는 하였지만 제작시설을 이용하여 독일군 용도로 M1911을 생산하여 공급하였다.
 

                           독일육군병기국 마크가 각인된 희귀한 M1911
 

그런데 새롭게 독일육군병기국(Waffenamt)의 주관 하에 제작하였다는 표식과 더불어 미국 콜트 사가 원 저작자라는 문구는 그대로 새겨 넣어, 아무리 전시라 해도 저작권은 보호된다는 전통을 지켜 주었다. 오래 동안 존재하다보니 M1911은 이처럼 재미있는 일화가 많이 따라다닌다. 일천한 국산 무기 개발사를 뒤돌아보면 어쩌면 부러운 부분인데 우리에게도 M1911처럼 세대를 뛰어넘는 국산 무기가 탄생하기를 기대해 본다.






신고
Posted by 열혈국방 트랙백 0 : 댓글 0



                                    [전투형 군대?] 

                                   제1탄.  현빈도 간다.



'시크릿00'의 차도남 현빈이 '해병대'를 지원하셨다는 사실, 모두들 알고 계시죠?    
"부디 선발되소~서!! ^^ "


                    '빤짝이 트레이닝복'을 입고, 현빈은 그렇게 해병대를 준비하였나보다.??? ^^



                           현빈은 '빤짝이'츄리닝, 해병대는 '빨간'추리닝! 우왕~닯았다.


우리의 네티즌님들, 현빈이 복무할 지도 모를 '해병대'.  과연 어떤 곳인지? 아니, 부대는 어떤지? (특히 여자분들.) 무척 궁금하실텐데요,  2011년 현빈이 입대할 군대는 '전투형 군대'!!!

아니, 전투형 군대는 뭥미??  ㅇㅇ;



          너무나 '귀여운 모습'이라 '해병대'가 아니라고요? 겨울이면 가뿐하게! 폭설피해 복구작전.


'전투형 군대'의 탄생은.. 작년, 아니 지금까지 계속되어온 '북한의 무자비한 도발'에 기인한다고 하겠습니다. 끊임 없이 '적화통일'을 꿈꾸는 북한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우리군은 고민,고민 하였드랬습니다.
'강한 대응'으로 감히 북한이 도발을 꿈꾸지 못하도록 해주자!  아자! 아자! 아자 ~~~~!!!
그래서, 국방부와 군은 2011년형 '전투형 군대' 준비하였습니다.
그럼, '전투형 군대'를 솜솜 뜯어 보실까요?


                                                                                                                                                                                    
     
    군 간부의 능력을 제고하고, 장병 정신교육과 교육/훈련을 강화하는 등 현존하는 전력을 극대화하여 현장에서 
   반드시 싸워 이기는 '군대다운 군대'로 재탄생하겠다 것이지요. 

   기존의 전력구조를 원점에서 검토하고 재설계하여, 우리군을 네트워크중심전(NCW)에서 합동성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는 군대로 만들겠다~ 이말씀!

    또, 이를 위한 많은 정책들을 추진하겠다는 것입니다.
 

 
20만 명 대 2만명???

남한 대 북한의 특수부대 병력이라지요? 끊임없이 적화통일 야욕을 불태우고 있는 '이글이글~~아이!!!  북한'. 북한의 특수전 전력은 세계 최대 규모로 평가받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남한 특수부대의 병력증강과 장비보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요...


                                         지금도 적화야욕에 불타고 있는 '이글아이' 김정일


다시, 현빈의 해병대 이야기!
직업군인 중심인 '특전사'와는 달리 '해병대'는 병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유사시 전략 타격부대 역할을 담당해야할 우리 군의 최정예 부대랍니다. (현빈님이 바로 이곳을 가고자 하신다는 거~ ! ) 또, 해병대는 통일 과정과 통일 이후에도 핵심역할을 담당하게 될 전략부대이기도 합니다.

'전투형 군대'! 더 알고 싶으시다고요?


            공군은 1월 11일부터 4일간 국산항공기 TA-50 최초전력화에 대비하여 부대 지휘관,참모 
            대상으로 시뮬레이터 처험을 실시하였습니다.



<제2탄>에 계속됩니다..       20,000. ^^




 

신고
Posted by 열혈국방 트랙백 0 : 댓글 0





지금, '서울광장'에 오세요!



지금 이시각! 12월 25일부터(이미 시작되었죠?) '11년 1월 8일까지 서울광장에서는 '천안함, 연평도 그리고 북한'이라는 기획사진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시청역 서울광장에 기획사진전이 있네요~>



올 한해는 북한의 천안함 피격사건과 연평도 포격도발로 온 국민들이 분노와 참담함 속에 있었고, 국방부와 군도 어려움을 겪었던 한해였습니다.

그런데, 국내외 주요 언론들이 '지금은 정전 이후 최대 안보위기'라고 평가하고 있음에도 금년 12월중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는 우리 청소년들을 비롯한 사회전체에 심각한 안보불감증과 취약한 안보관이 만연해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국방부는 기획사진전을 마련하여, 국민들이 북한의 실체를 바로보고 굳건한 안보의식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하였습니다. 



직접 와보세요!















신고
Posted by 열혈국방 트랙백 0 : 댓글 0




 

어제(1월10일 월요일) 국방부에는 일본 방위대신이 제15차  '한-일 국방장관회담' 갖기 위해 방문하였습니다. 


아니, "과거사 청산도 끝나지 않았는데, 독도 영유권 문제도 해결 안 됐는데, '한일 군사협력'이라  고라고라고라???" 또, 식민지가 그리도 되고 싶나?  우리의 네티즌님들!  거품 잔뜩무신 심정, 이해가 안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놈의 국방부는 "왜?  Why?"  일본하고 군사협력을 하자는 '알수 없는 태도'취하는 거냐구?


                                               '시크릿 00' 의 박상무님 曰, "와~~이?"


회담 시작 전에서 끝난 후까지, 바로 지금 이순간에도 우리의 네티즌들은 끊임없는 찬반토론으로 속을 끓이고 계신 중인데 말입니다.  
그럼, 국방부가 도대체 왜 그랬는지 한번 들어나 보실까요?
이번 회담은 천안함 사태, 연평도 포격도발 등 지역 안보정세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자리였습니다.


                                 북한의 도발은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도발과 우라늄 농축시설 공개 등 도발행위가,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를 심각하게 저해하고 있어  한일 양국은 긴밀한 공조를 약속하였습니다.

한-일은 이미, 해외에서의 유엔 평화유지활동(PKO), 인도적 지원과 재난구호활동, 해외파병 현장에서 군사적 우호관계를 다져 나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양국의 국방은, 국내 외에서 양국 간 물자ㆍ식량ㆍ연료 등을 상호 지원할 수 있는 '상호군수지원협정' 등 교류 협력의 심화, 확대가 더욱 필요해질 것입니다.


                                              파병현지의 우리 단비부대와 일본 파병부대



또한, 향후 정보의 공유가 중요해질 것을 공감하며 '정보보호에 관한 협정'에 관해서도 협의해 나갈 것과,  군 고위급 인사교류를 활성화'하고, 부대와 교육 교류, 수색 구조훈련 등 국방교류/협력을 발전시켜 나가기에 합의하기도 하였습니다.


                      더 큰 대한민국을 위해, '성숙한 동반자 관계'로의 발전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과거 일제의 침략에 분노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북아와 나아가 세계 속의 '더 큰 대한민국'으로의 발전과 미래전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한-일간 '성숙한 동반자관계'를 모색해 나아가는 것도 우리에게 의미가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신고
Posted by 열혈국방 트랙백 0 : 댓글 0



                                                        가장 위험했던 순간
[ ]



오래 동안
"한국전쟁 당시에 대한민국이 가장 위기였던 순간이 언제였는가?" 한다면 열이면 열 19507월부터 9월 사이에 벌어진 '낙동강방어선전투'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된다. 총 연장 200여 킬로미터의 낙동강방어선의 일각이라도 북한군에게 돌파되어 부산이 점령당한다면 그것으로 전쟁이 끝나는 상황이었으므로 상당한 위기의 순간이었음에는 틀림없다.


                                낙동강방어선전투를 가장 위기의 순간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영천전투에서 파괴된 북한군 T-34)



부산에서 가장 가까웠던 마산은 불과
40여 킬로미터에 불과했고 가장 먼 대구도 100여 킬로미터 남짓하였다. 일단 지도상으로 한반도의 90퍼센트 이상을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국부와 인구의 90퍼센트를 북한이 차지하고 있다는 의미와 같았다. 하지만 낙동강방어선은 시간을 얻기 위해 대신 공간을 내어주고 유엔군 스스로 선택한 방어선이었다.



                               지도상으로 본다면 우리가 가장 밀렸던 시기이기는 하다



개전이후 전력이 압도적이었던 북한군이 쉽게 우회 돌파할 수 있었을 만큼 전선이 연결되어 있지 않아 금강방어선까지는 쉽게 무너져 내렸다
. 결국 아군은 증원군이 도착하여 전력의 균형을 맞추어야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고 따라서 시간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런 복합적인 요인을 고려하여 유엔군은 전략적 방어물이 불비한 호남지역을 과감히 포기하고 낙동강을 교두보 삼아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낙동강방어선은 군사전략상 아군이 선택한 상황이기도하다

                                        (부산항을 통해 속속 증원되는 유엔군)



그리고 예상대로 전선이 촘촘히 연결되자 북한군은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었고 서서히 전력을 증강시킨 아군은 반격에 나설 수 있었다. 경우에 따라 위기의 순간도 다가왔지만
, 사실 19508월이 경과하면서 북한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이것은 지도상으로 낙동강방어선이 위기임에는 맞지만 군사전략상으로는 적의 공세를 막아낼 수 있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선택한 방법이었다는 의미다.



                             낙동강이 철옹성으로 변하자 아군은 반격에 나설 수 있었다

                                            (인천에 상륙하는 미 해병1사단)



그렇다면
6.25전쟁 기간 중 대한민국 최대의 위기는 언제였을까? 지난 1990년대 들어 미국에서 비밀이 해제된 여러 가지 문서가 공개되기 시작하면서 많은 사실이 새로 밝혀졌는데 이중에는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하던 것과 달리 진정으로 위기였던 순간이 따로 있었다. 19511월초, 미국이 전쟁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즉 대한민국을 포기하고 한반도에서 물러날 준비를 하였던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진정한 위기의 순간은 따로 있었다

                                (전쟁 초의 급박한 순간을 웅변하고 있는 폭파된 한강교)



1950
1025일 중공군이 등장한 후 계속된 두 차례의 공세에 놀라 유엔군은 황급히 38선 일대로 도망쳐 내려왔다. 지연전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중공군과의 접촉을 거부하고 일사천리로 달려왔을 만큼 유엔군은 처음 접해본 중공군을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38선 일대에서도 적의 남진이 멈출 가능성은 그리 커 보이지 않았고 미군 당국은 또 다시낙동강까지 물러날 의사를 표시하여 이승만 대통령을 크게 실망시켰을 정도였다.


                                    중공군의 참전이후 전쟁의 양상은 급격해 바뀌었다

                                         (195114일 서울에 진입하는 중공군)



하지만 더 무서운 계획이 준비 중에 있었다
. 1222일 미군 합동참모본부는 "중공의 참전 의도가 북한회복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유엔군을 완전히 몰아내려는 것임이 명백해 진다면, 유엔군은 한반도를 포기하고 가능한 빨리 철수 한다"는 경악할만한 결정을 하였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중공군이 금강까지 진출하면 제주도에 약 이백 여만의 한국인을 소개시켜 망명정부를 수립하고 유엔군은 한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나간다는 계획이었다.


                                   한국을 완전히 포기하고 철군할 계획이 수립되었다

                                             (흥남철수 당시 후퇴하는 유엔군)



더구나 이 계획은 동요를 우려해 한국정부에는 정식통보하지 않아 우리 정부는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었다
. 바로 그 상태에서 중공군의 제3차 공세가 시작되었고 아군은 195114일 서울을 다시 내주고 110일경 평택-삼척을 잇는 37도선까지 후퇴하였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금강까지는 불과 50킬로미터였다. 여기서 조금만 더 후퇴한다면 그것은 대한민국의 종말이었다. 바로 그때 작은 반전의 기회가 찾아왔다. (계속)

 

 

신고
Posted by 열혈국방 트랙백 0 : 댓글 0



             세상은 평범한 이들이 만들어 나간다

 
 
외모가 뛰어난, 특히 호감을 불러일으킬 만큼 멋진 모습을 지닌 사람들은 일단 점수를 따고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지 극심한 취업난과 겹쳐서 성형이다 다이어트다 하고 남녀노소불문하고 난리 떠는 것도 아마 이런 이유도 한 몫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결코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지만 어느덧 엄연한 사회현상으로 자리 잡은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외모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그런데 "멀쩡하게 생긴 놈이"라는 말이 있다. 겉모습은 아무 문제도 없는데, 아니 오히려 남들보다 뛰어난데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짓이 영 딴판일 때 사용하는 관용어다.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 하는 것처럼 가장 먼저 외형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겉모습과 달리 정반대로 행동한다면 좋은 첫인상을 느꼈던 이들의 실망은 클 수밖에 없다.

 
                                 종종 멋진 이들이 실망시키는 행동을 범하고는 한다
 

군대가 멋있을 필요까지는 없으나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말처럼 멋있어서 나쁠 것도 없다. 군대가 멋있다는 것은 한편으로 군기가 확립되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당연히 패전한 군대에게서 멋을 발견할 수도 없다. 그런데 밀리터리 역사를 보면 '멀쩡하게 생긴 놈'이라는 관용어가 너무 잘 어울릴 만큼 진짜 멋있게 생긴 부대가 가장 나쁜 짓만 하고 다녔던 기록이 있다.

 
                    겉모습만으로는 가장 멋있게 생긴 부대라 해도 모자람이 없는 나치 친위대
 

히틀러의 사병들과 다름없던 나치 친위대(SS-Schutzstaffel)가 거기에 가장 걸 맞는 예다. 친위대는 정규군이 아닌 별개의 무력집단이었지만 전쟁말기에 최대 90만 명을 상회하는 병력으로 구성된 38개 사단을 운용하였을 만큼 거대한 군사조직이었다. 전사를 살펴보면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많은 친위대원들이 편협적인 나치의 이념에 광적이라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충실하였다.
 

            친위대원들이 나쁜 짓을 서슴지 않게 자행했던 것은 편협된 이념에 매몰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정신무장 덕분에 나름대로 전쟁에서 뛰어난 전투력을 보여주었던 예도 있었다. 하지만 게슈타포와 더불어 친위대는 나치의 조직 중 가장 극단적이고 폭력적이며 광신적인 활동으로 악명이 높았다. 이들은 게르만족 우월주의와 타 인종 증오 교육을 받았기에 점령지역의 유대인, 집시, 전쟁포로들을 대량 학살하는 주역이 되어 전후 전범재판에서 부인할 수 없는 범죄단체로 선언되었을 정도였다.

 
                           친위대에 의해 주민 전체가 잔인하게 학살당하고 폐허로 변한
                           프랑스의 소도시인 오라두르-쉬르-글란.
                           현재도 제2차 대전의 비극을 상징하는 사적지로 보존되고 있다.
 

이런 무시무시한 악행에 그 누구보다도 앞 장 섰지만, 멋있는 겉모습 때문에 나치의 선전매체에서 선전도구로 많이 등장하였다. 특히 절도 있는 열병식 모습은 당시 최전선의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보통의 독일 국민들에게 이들이 얼마나 나쁜 일만 저지르고 다니는 집단인지 상상도 못하게 하였을 정도였다. 한마디로 규정한다면 단지 멋진 옷을 입은 악마들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점령지역 유태인을 희롱하며 웃고 있는 친위대원
                                    겉만 멋진 악마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
 

친위대를 극단적인 예로 들었지만 사회생활 중에도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이들이 나쁜 짓을 하였던 사례를 발견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진정한 사람의 가치는 멋이 아니라 참된 인격에 의해서 확인될 수 있다. 따라서 처음 언급한 신언서판의 순서는 결코 사람의 인격을 가리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즉, 사람의 가치는 겉모습이 아닌 함께 부대끼고 겪어봐야 할 내면의 모습으로 판단하여야 한다.

 
                  진정한 멋은 겉모습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이다(사진-애니메이션 미녀와 야수)
 

언젠가부터 성형과 과도한 다이어트가 정상적인 것처럼 여겨지는 시대가 되었지만 결코 이것이 사람의 가치를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다. 잘생기고 멋있는 것이 항상 올바른 것은 아니고 그들이 나쁜 짓을 하면 오히려 더욱 실망스럽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해 준다. 세상은 평범하고 잘 생기지 못하지만 건강한 사고방식을 가진 보통의 수많은 사람들이 만들어 나간다. 이것은 불변의 진리다.







신고
Posted by 열혈국방 트랙백 0 : 댓글 0



          많이 들었지만 제대로 모르는 장군의 이름
 

 

중공군의 갑작스런 등장은 자신만만하게 북진을 이끌던 미 8군 사령관 월튼 워커(Walton H. Walker 1889~1950)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적의 공세는 거셌고 지금까지의 북진하였던 길을 뒤돌아 후퇴하여야 했을 만큼, 명령을 내린다고 중공군을 막을 수 있던 상황은 아니었다. 이제 워커에게 부여된 임무는 단 하나, 최대한 후퇴 속도를 조절해 전선을 최대한 빨리 고착화시키는 것이었다.
 

                                     한국전쟁 초기 미 8군 사령관이었던 월튼 워커
 

후방에 튼튼한 방어선을 만들려면 우선 중공군의 남진을 최대한 지연시켜 시간을 벌어야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중공군에 놀라 후퇴하기 바쁜 일선 부대의 분투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워커는 바닥까지 떨어진 예하부대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제일선을 찾아다니며 동분서주하였다. 원래 워커는 야전을 돌아다니며 직접 상황을 파악하는 것을 즐겼지만 지금은 더욱 열심히 돌아 다녀야 할 상황이었다.
 

                      그는 전선을 직접 순시하며 현장에서 지휘하는 저돌적인 지휘관이었다
 

1950년 12월 23일, 워커는 경원축선에서 중공군과 맞서 방어전을 펼치던 미 24사단과 영 27여단을 방문하기 위해 의정부 북방으로 출발했다. 당시 상황으로는 서울을 다시 포기하여야 했는데, 군은 물론 민간인도 함께 안전하게 소개하려면 이들 부대가 좀 더 오래 동안 이곳을 방어해내야 했다. 또한 그는 이번 기회에 미 24사단에서 중대장으로 근무하는 외아들 샘 워커(Sam S. Walker 1925~)대위도 오랜만에 만나려 했다.
 

          방한한 콜린스 미 합참의장에게 아들 샘 워커 대위를 소개하는 월튼 워커 미 8군사령관. 그는 
          대를 이어 군인이 된 아들을 상당히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그런데 오전 11시 경 워커를 태운 지프가 현재의 서울 도봉동 596-5번지 지점을 통과하여  의정부로 향할 때 반대편에서 남하하던 트럭과 정면으로 충돌했고 이 사고로 그는 현장에서 사망했다. 비록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에 비하여 세인들에게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유엔군 지상군의 주력인 미 8군을 이끌며 최전선을 종횡무진 활약하던 명장의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사망 60주년을 맞아 최근 사고현장에서 벌어진 추모제(사진-연합뉴스)
 

이를 안타까워한 미군 당국은 한국에 있던 외아들 샘 워커 대위로 하여금 아버지의 시신을 미국으로 운구토록 조치하였다. 그런데 샘은 남아서 싸우겠다고 고집하여 결국 맥아더가 직접 불러 운구지시 명령을 내렸다. 강골이었던 그의 아버지처럼 전형적인 무인이었던 샘 워커는 이후 최연소 미 육군 대장에 올랐고 이것은 아직까지 미군 역사상 부자가 대장에 오른 두 차례 밖에 없는 희귀한 예가 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 훗날 미 육군대장에 오른 아들 샘 워커
 

월튼 워커의 이름은 한국인들에게 많이 알려진 편인데 그 이유는 사실 호텔 때문
이다. 국내에 변변한 시설이 없어 휴가 때마다 일본이나 태국으로 놀러 가는 주한미군들을 유치할 목적으로 1963년 4월 한강변에 설립한 호텔을 워커 장군으로 이름을 따서 워커 힐(Walker Hill)로 명명하였는데 그 이유는 전쟁 영웅에 대한 사랑이 남다른 미국인들의 감성을 자극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지금은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급 호텔로 자리매김한 워커힐
 

하지만 그는 지난 한국전쟁 당시 가장 위태로웠던 낙동강전선을 성공적으로 사수한 맹장이었다. 그가 지휘한 미 8군과 국군의 분투가 있었기 때문에 아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역전타를 날리고 감격스런 북진을 할 수 있었다. 비록 중공군의 참전으로 통일의 꿈이 무산되고 그 또한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감하였지만 한국전쟁 초창기에 그가 남긴 족적은 두 말할 나위 없이 컸다.

 
                  지난 6월에 미 8군 영내에서 있었던 워커 장군 동상 제막식 (사진-연합뉴스)
 

그런데 호텔명 때문에 흔하게 불려지는 것과는 별개로 그가 이러한 인물이었는지 제대로 아는 이들은 사실 그리 많지 않다. 그를 기리기 위해 지난 6월 23일, 사망한지 60년이 지나고 나서야 용산 미 8군 사령부내에서 동상이 제막되었지만 이 또한 일반인들이 접하기는 힘든 위치이다.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애쓰다 바로 이맘 때 이국땅에서 생을 마감한 그를 한국전쟁 60주년인 2010년을 돌아보며 다시 한 번 생각한다.







신고
Posted by 열혈국방 트랙백 0 : 댓글 0






              새해가 밝아오고 있습니다!

                       
                              
한해동안 사랑 많이 주셔서 감사드리고요,

                                  
                                         
새해 복 마니마니~~~받으세요!           <열혈국방 올림>
 
    
           
                                                                         
                                                                               

12.29(수)  국방부는, 대통령께 2011년 추진할 업무에 대해 보고를 드렸답니다.

   

                      12.29(수) 국방부 대회의실에서는 대통령 연두업무보고가 있었습니다. 

 
2010년 한해를 돌아보면... 북한의 도발 등으로 우리군도 국민들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한해였습니다.

이제, 국방부와 군은 2011년 새로운 각오로,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국민의 사랑과 신뢰를 받는 군'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고자 한답니다.

이를 위한 2011년 시스템 합리화와 제도개선!  한번 보실까요?


1.
병 복무기간이? 


  육군기준 6개월(24⇨18개월) 단축에서 3개월(24⇨21개월) 단축되고, 육군‧해병대(전투‧의무
  경찰, 경비교도, 상근예비역)는 21개월, 해군(해양경찰, 의무소방원)은 23개월, 공군(공익근무
  요원 중 사회서비스 및 행정 업무를 지원하는 자)은 24개월로 조정됩니다.

  * 시행은, 복무형태별로 2011년 1월 1일에서 2월 27일까지 조정 완료!

  일반 병역의무자(의 입영의무 면제연령을 현행 31세에서 36세로 하고, 병역기피자 등의 경우
  현행 36세에서 38세부터 면제처분토록하여
입영의무 등의 면제 연령을 상향 조정했습니다.




2.
6・25 전사자 유가족 유전자 샘플채취 방법을?

  기존 '혈액채취'에서 특수카드를 이용한 '구강(口腔) 내 분비물을 채취' 방법으로 전환
  하였고요,



3.  국가시책인 출산율 향상 대책의 일환으로 군인 가족 중 셋째 이상의 자녀가?


  군병원에서 진료를 받는 때엔 의료비
전액 감면!
  여군이 불임치료 시술을 받기 위해 휴직이 필요한 경우엔 최대 1년간 분할하여 불임
  휴직을 사용, 이 기간 동안 봉급의 절반을 지급하고요,
 
  장교 및 부사관 후보생의 교육의욕 고취 및 우수자원 유인
을 위해 봉급을 ‘10년 대비 10%
  인상, 위험근무수당, 특수지근무수당 등
각종 수당을 인상
합니다.




4. 
정예신병 육성을 위하여 신병 교육기간을?


  현행 5주에서 8주로 연장합니다.
  * 시행시기 : 2011년 1월 1일부터 시행
    
  ‘군인・군무원신분증’의 재질을 ‘종이’에서 IC칩이 내장된 PVC(polyvinylchloride)의 ‘전자
  공무원증’으로
개선하였습니다.




5.  전투복을 디지털 5도색 화강암무늬로 개선?


  위장효과를 극대화 하고 신소재 채택으로 신축성, 쾌적성, 항균성의 기능을 부여, 상의 내어
  입기, 사선형 주머니 등 인체공학적 디자인으로 미국, 일본 등 선진국 전투복에 뒤지지
  않으며, 전투력 극대화에 기여할 것입니다.


  전투화 조달방법을 수의계약에서 경쟁계약으로
, 기존 전투화보다 가볍고, 착용감과 충격흡수
  기능, 미끄럼방지 기능, 방수 및 땀 배출 기능 등이 강화된
기능성 전투화를 ‘11년부터 3년간
  확대 보급하여
전투력 극대화 기여할 것입니다.

     
  산정(算定) 위주의 원가관리 체계를 검증(檢證) 중심으로 전환하기 위하여 원가관리부를 원가
  회계검증단으로 개편하고 국방통합원가시스템을 운영할 것입니다.




6. 
기초생활수급자의 생계보장을 위해 예비군훈련을 보류하고?


  예비군훈련장 화장실 개선 및 동원훈련 입소시간을 1시간 늦추는(08:00→09:00) 등 예비군
  훈련 관련 불편사항을 개선
것입니다.
    
  예비군대원이 공무상 사망했을 경우 보상금 최저 기준액을 상향조정함으로써(중사 1호봉
  (약 3천6백만원)→상사 18호봉(약 9천만원))
국가책임을 강화
하고 대원의 권리를 보장할
  것입니다.




7. 
기존에 5개 부대를 군 책임운영기관으로 지정,업무성과가 향상되어?


  국군 대전병원, 육군 특수무기정비단, 제3보급단, 해군 제1함대 정비대대,공군 제83정보통신
  정비창 5개 부대를 추가로 지정・운영합니다.
    
  국방정보화법을 본격적으로 시행(’11.1.1일부), 국방정보화 추진체계를 정립하고 산ㆍ학ㆍ연
  협력을 통한 국방정보기술 선진화
및 국방정보화 수준을 제고합니다.



네티즌 여러분, 새해에도 '열혈국방' 많이많이 방문해 주세여~~~





신고
Posted by 열혈국방 트랙백 0 : 댓글 0




                      
              K-136 구룡의 역사적 의의
 
 

지난 12월 23일 포천에 위치한 승진훈련장에서 열린 대규모의 공지합동훈련이 언론 매체를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원래 이번 훈련은 내년 초에 실시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북한의 연평도 기습도발에 따라 그 시기가 앞당겨졌다. 특히 북한의 기습 공격이 있을 경우 즉시 자위권을 행사하여 대규모의 보복 타격하겠다는 국군의 의지를 담은 무력과시 목적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공지합동훈련 중인 국군의 멋진 모습 (사진-KODEF 손민석)
 

따라서 국군이 보유한 다양한 종류의 장비들이 투입되었는데, 국군 주력 기갑장비인 K-1전차와 K-200장갑차는 물론 이번 연평도 포격사건으로 잘 알려진 K-9자주포 등의 포병장비 그리고 공대지 타격에 나선 공군의 최신예 전폭기 F-15K와 육군 항공대의 500MD 및 AH-1S헬기 등도 선을 보였다. 그런데 이번 훈련에서 특히 시선을 끌었던 장비가 있었는데, 바로 국군의 다연장로켓 K-136 구룡이다.
 

                     금번 훈련에서 로켓탄을 발사하는 구룡 (사진-조선일보)
 

보도를 보면 이번에 모두 3문이 훈련에 참가하여 총 54발의 로켓탄을 쏘아 관람객들의 탄성을 자아내었다고 하는데, 구룡은 국방과학연구소 주관으로 1970년대 후반에 개발되어 1981년에 제식화되었기 때문에 사실 최신식 장비로 보기는 힘들다. 구룡이 이처럼 최신예 무기는 아니지만 공개훈련에 등장하는 것도 그리 흔한 일은 아닌데, 아마도 연평도 포격과 상당히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예전 국군의 날 퍼레이드에 등장한 K-136 구룡
 

왜냐하면 지난 11월 23일 북한이 연평도를 기습하였을 때 사용한 주력 무기가 122mm방사포였는데 이것이 바로 다연장로켓이다. 그동안 북한의 방사포는 안보를 상당히 위협하는 전력으로 알려졌고 실제로 도발이 이루어지자, 우리에게도 북한의 방사포를 압도하는 무기가 있음을 알릴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특히 구룡은 개발 초기부터 북한의 122mm방사포를 염두에 두고 개발된 무기다.
 

                               연평도에 발사된 북한의 122mm 방사포탄
 

사실 1939년 배치된 소련의 BM-13(이른바 Katyusha)를 현대식 다연장로켓의 원조로 보는 것처럼 다연장로켓은 공산권에서 주로 애용하던 무기체계였다.  이에 대응하여 미국이 다연장로켓 개발에 나선 것이 1976년이었으니 상당히 늦은 편이었고 따라서 우리가 1970년대 들어서 본격적으로 국산무기개발에 나섰을 때 참고할만한 서방측의 다연장로켓이 전무한 상태였다.
 

                 이른바 카츄사로 불린 BM-13은 현대 다연장로켓의 원조로 본다
 

그러다보니 구룡을 처음 설계할 때 유일하게 현존하던 소련의 방사포를 참조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외형상으로 비슷하게 되었다. 하지만 냉전이 첨예하던 1970년대에 공산권 장비의 획득은 불가능하였으므로 단지 외관상으로 비슷하다고 구룡을 무조건 카피한 무기라 단정할 수 없다. 이것은 세계적인 군사전문지인 제인연감(Jane's Yearbooks)이 독창적인 무기로 인정하여 최초로 수록한 한국산 무기라는 사실(국방과 기술 381호 p.45)에서도 알 수 있다.
 

                                 K-136 포대의 호쾌한 일제 사격모습
 

우리는 무기 개발초기에 먼저 면허생산을 하였고, 여기서 기술력을 쌓아 각종 무기를 만들어 내었지만 그것도 모두 완전히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현재 국군의 주력인 K-1전차도 미군의 주력인 M-1전차를 만든 크라이슬러 디펜스(Chrysler Defence)사의 기술 제휴로 만들어 진 것이다.  2000년대 이후 본격 제식화되기 시작한 K-9자주포, K-2전차 등이 순수하게 우리의 기술력으로 만든 무기들이다.
 

             M-270 MLRS를 능가하는 차세대 다연장로켓의 개발 성공을 기원한다
 

그렇다보니 초창기라 할 수 있는 1970년대에 자력으로 만들어낸 구룡은 초기 국산 무기를 대표하는 명작이 되었다. 그래서 국산 무기개발사에서 구룡의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직접 도움을 받을 만한 기술기반도 전무한 어려운 여건에도 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구룡을 만들어낸 당시의 기술진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현재 구룡을 대체하기 위해 개발 중에 있는 것으로 알려진 차세대 다연장로켓의 성공도 기원하는 바이다.



 


신고
Posted by 열혈국방 트랙백 0 : 댓글 0






올해를 마무리하는 국방정책 이야기
에는 무엇,무엇이 있을까요... 


그중 오늘은 국방부 예비역 정책고객 소식지 '단비'를, 정책고객서비스 메일보다 먼저 보내드립니다.

2010년 전사자 유해발굴과 새해 병복무기간 단축 등 이야기 go!





신고
Posted by 열혈국방 트랙백 1 : 댓글 3



                 
                 크리스마스의 자유를 지킨 이들
 
 
 
우리 역사에서 1950년 크리스마스는 상당히 고통스러웠던 시기였다. 눈앞을 가리는 눈보라를 동반한 엄청난 혹한도 몸을 힘들게 만들었지만 더욱 아픔으로 다가왔던 것은 갑작스런 중공군의 출현과 더불어 통일의 꿈이 좌절되었기 때문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탈환한 서울을 불과 석 달 만에 다시 적에게 내어주어야 했고 수십만의 병력과 피난민이 흥남항구를 통해 공산치하를 빠져나와야 했다.

 
                               1.4후퇴 당시 영등포역에서 남행열차에 오르는 피난민들
 

하지만 여러 차례의 패배와 후퇴를 거듭하면서 겪은 아픔과 절망의 반대급부로 중공군의 약점을 알게 되면서 고난은 정지될 수 있었다. 우리가 강하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단지 중공군을 몰랐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어쩌면 너무 단순한 사실을 확인한 이후부터 전세는 또 다시 바뀌었고 어느덧 전쟁이 발발한지 1년이 경과하였을 때 전선은 전쟁 발발 전에 남북을 나누던 38선 일대에서 고착화되었다.

 
                                 한강을 도하하여 서울을 재탈환하는 국군 제1사단
 

그런데 이러한 전선의 정체는 의도적인 결과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전쟁이 장기화되고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자 전쟁을 주도하던 미군과 중공군, 양측 모두는 이기겠다는 의지보다는 지지 않고 전쟁을 끝내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휴전협상이 시작되었고 그러는 동안 양측 모두 지난 1년 동안 보여준 거대한 공세를 심정적으로 중단한 상태가 되었다.

 
                       1951년 여름을 넘기며 전선이 38선 일대에서 고착화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선이 평화로웠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왜냐하면 군사분계선을 염두에 두고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 국지적으로는 더욱 치열해지는 양상으로 전쟁의 패턴이 바뀌었던 것이다. 그 결과 고지쟁탈전이 격화되었고 이것은 한국전쟁 후반부를 대변하는 단어가 되었는데, 경우에 따라서 너무 많은 희생이 벌어져 군 수뇌부를 당혹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한국전쟁 발발이후 두 번째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수 있었다.

 
                        1951년 크리스마스를 맞아 트리를 만드는 미 10군단 통신대대원들
 

후퇴의 악몽으로 가득한 지난 번 한국전쟁 첫 째 크리스마스도 피와 눈물로 얼룩졌지만 두메산골에서 벌어지는 피비린내 나는 끓임 없는 격전으로 말미암아 이번 크리스마스도 이에 못지않게 고통스러웠다.  그중에서도 동부전선의 어은산 일대에서 1951년 12월 25일부터 벌어진 1090고지 전투는 크리스마스가 결코 평화와 사랑이 가득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증거였다.

 
                      크리스마스 날 중공군은 1090고지를 피탈하기 위해 공세를 개시하였다
 

휴전협상에 의해 1951년 11월 군사분계선을 가조인하고 후속합의를 이끌기 위해 1개월간의 한시적 휴전이 결정되었으나 중공군은 이를 어기고 북쪽으로 돌출되어 있는 국군 제7사단의 전초진지 일대에 은밀히 전력을 증강시켜 크리스마스에 기습공격을 감행하였다. 참전이후 계속된 패턴대로 중공군은 포격을 집중하여 아군 진지를 타격한 후 심야에 압도적인 병력으로 고지위로 다가오면서 격전은 시작되었다.
 

              국군 7사단은 고지를 사수하였고 이후 1090고지는 크리스마스 고지로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전쟁발발이후 산전수전을 다 겪은 국군은 어느덧 쉽게 물러서지 않는 용맹한 군대로 바뀌어 있었다. 압도적인 적의 심야공격에 일시적으로 진지를 피탈당하기도 하였지만 날이 밝자 곧바로 반격에 나서 적을 압박하였다. 결국 아군의 강력한 응전에 엄청난 사상자를 남긴 체 12월 28일 중공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이를 기념하여 1090고지는 크리스마스 고지로 불리게 되었다. (중공군은 1952년과 1953년에 걸쳐 크리스마스 고지에 대하여 3차례의 공세를 감행하였지만 모두 좌절되었다)

 
                         지금 누리는 크리스마스의 즐거움은 결코 그냥 얻어진 것은 아니다
 

전쟁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크리스마스로 명명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이를 지키기 위하여 쏟아 부은 국군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이 담겨져 있다. 비단 그것은 크리스마스 고지뿐만 아니라 휴전선 일대에 연이어 솟아있는 모든 고지가 마찬가지다. 단장의 능선처럼 고통스러운 이름이건 크리스마스 고지처럼 아름다운 이름이건 그곳 모두에는 조국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였던 모든 이들의 영혼이 담겨있고 그분들의 노고 덕에 우리는 다시 크리스마스를 평화롭게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신고
Posted by 열혈국방 트랙백 0 : 댓글 0


                       
                     그래서 그들은 뛰었다 !
 
 

요즘 자가운전자들의 공통적인 고민이라면 비싼 기름 값 일 것이다. 더불어 혹한기에 접어들면서 유류로 난방을 하는 가정의 주름살도 깊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보니 오래 동안 잊혀 진 연탄이 최근 몇 년 전부터 각광을 받고 있다. 관련 전문가들의 말을 빌리자면 "1990년대 같은 저유가시대로의 회귀는 원유의 수요와 공급 상관관계로 볼 때 불가능하다."고 하니 이런 고유가는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라 생각된다.
 

               현재의 유류 수급관계로 볼 때 고유가는 계속될 것으로 예측 된다 (사진-중앙일보)
 

더불어 저유가로 인한 풍요로움을 느낄 수는 없겠지만 우리나라의 경제규모가 커져서 이 정도의 유가 수준은 충분히 충격을 흡수 할 수 있으므로 오일쇼크(Oil Shock) 당시 같은 어려움을 겪기는 않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그렇다면 고유가시대의 어려움은 있겠지만 예전의 오일쇼크 당시처럼 경제가 완전히 마비 될 정도는 아니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 하다.

 
                 원유가 한정된 자원이지만 다양한 노력을 병행하면 고유가 시대를 극복할 수 있다.
 

아마 40대 이하에게는 오일쇼크라는 단어가 상당히 생소하겠지만, 1974년과 1979년에 있었던 국제유가급등은 세계경제를 순식간 공황상태로 빠뜨리는 엄청난 충격파를 가져왔다. 특히 1974년 1월 1일을 기점으로 배럴 당 3달러 하던 유가가 14달러(지금 물가 수준으로는 140달러 정도라고 한다.)로 폭등한 제1차 오일쇼크는 성장 초기에 있었고 경제규모도 작았던 우리나라의 생활방식을 순식간 바꿀 정도로 말 그대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1974년 오일쇼크 당시 석유를 얻기 위해 줄 선 모습
 

차량운행 제한, 연탄공급 확대 같은 원론적인 대책 외에도 요즘에는 상상하기 힘든 다음과 같은 대책도 실시되었다. 평일 오후 6시 이전 TV 방송이 금지되었고, 네온사인 간판도 사라졌으며 운동경기의 나이트 게임이 금지되었는데, 이런 조치가 단계적으로 해제된 것이 1980년대 중반 들어서부터다. 이런 고난의 시대(?)에 군이라고 예외 일수는 없었다. 다음은 오일쇼크 당시였던 1974년에 전차병으로 근무하였던 J씨의 경험담이다.
 

                                 한때 국군의 주력이었으나 현재는 퇴역한 M-47전차


그의 회고에 따르면 계속하여 이런 식으로 훈련 했던 것은 아니지만 오일쇼크가 닥치자 당시 전차병들은 훈련장을 뛰는 것으로 기동훈련을 많이 대체하였다고 했다. 5인 1조로 구성된 M-47 전차병들이 한데 모여 자신들의 전차가 기동한다고 가정하고 예정방향으로 깃발을 들고 구보하는 식으로 훈련을 하였던 것인데, 알다시피 지상의 왕자인 전차들이 엄청난 연료를 소모하지만 그렇다고 훈련을 중단할 수 없어서 선택하였던 고육책이었다.

 
                                전차병들이 마치 보병처럼 뛰어다니며 훈련하여야 했다
 

최근 벌어진 북한의 연평도 도발에서 연평부대 K-9 자주포대원들이 보여준 투혼은 평소 실전과 같은 훈련을 거듭하였기 때문에 즉각 대응할 수 있었던 증거다. 훈련은 모든 것이 충분히 지원되는 좋은 환경 하에 이루어지는 것이 좋겠지만 혹시 그렇지 못하더라도 결코 중단될 수는 없다. 오일쇼크 당시 전차병들은 위에 언급한 예처럼 훈련량을 늘이는 방법으로 질적 부족분을 보충하려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던 것이다.

 
                             철저한 훈련 덕분에 위기의 순간에도 즉각 대응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전차에 탑승하였다고 가정하고 전차병들이 무리지어 깃발 들고 뛰어다닌다고 상상하면 웃음이 나오지만, 당시 나라전체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훈련을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을까 하고 숙연해 지기도 하다. 그 어려웠던 시기에 이런 식으로나마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이들은 애썼던 것이었고 그들의 노고덕분에 대한민국은 발전을 중단하지 않았던 것이다.

 
                                              제2차 오일쇼크 당시의 신문보도
 

사실 오일쇼크는 에너지의 대외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의 경우 언제든지 닥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비록 그 당시처럼 고통스런 경험이 반복되어서는 곤란하겠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대비를 철저히 하여야 할 것이다. 먼저 사용하지 않는 전원의 코드를 뽑는 사소한 일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신고
Posted by 열혈국방 트랙백 0 : 댓글 0


 





"우리 상 먹었어!!!   얏호!"

바로, 아랫분들이 타셨습니다. 상. 


                                                                 우수부대 22보병사단


               최우수 부대가 한껏 여유있는 미소를 즐기고 있다.(그동안 밤샜으면서, 아닌척...)



바야흐로,  자랑스러운 분들은 '하버드' 그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역대 우수교관!"   어디 교관님들 이십니까??






바로 '이곳'의 교관님들!





고궁?  공원??  아닙니다. 여기는 대전 자운대.
살려야 한다!'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게~", 당황스럽고도 강렬한..)  

12월 15일 수요일, 저는 대전 자운대 국군의무학교에 착륙! 하였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당황스러운 멘트가,,,    있었으니....


                            누군가 벽타기가 가능한...'괴력'이 있는가 봅니다.(의료실습실1) --;


                                               토르소....'미술실' 이었나?


                           국군의무학교의 자랑 "SAVE CENTER" 내 벽면에는...뜨악~~~  


'10년 군 응급처치 경연대회'가 개최되었는데요, '살려야 한다!'는 구호를 주제로 말입니다. ^^


경연대회는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습니다. (아주 긴장감 있고도, 엄숙하게.)



                          "어제, 밤 새셨습니까?  이 눈은... 충혈??"(대회 참가자들 대기중.)


'10년 군 응급처치 경연대회는 병원급 부대와 각군 야전부대가 함께 참여한 가운데, 응급처치 능력 향상과 극대화를 위해 거행되었습니다.


특별히, 금년에는 대회를 '방부 장관배' 격상시키고 포상금과 우승기 수여 등 군내 '붐'을 조성하고자 하였고요, 기존의 개인평가 일색에서 '단체평가'부문이 추가되었다는 점 등이 아주~  인상적이죠.

병원 위주로 실시되던 지난 대회들과는 달리, '10년 경연대회는 육,해,공군 전군을 대표하는 의무부대들이 대거 참여, 최우수 부대에는 대회 최초로 국방부장관 상장을 수여하는 등 명실공히 '국군 응급처치분야 최고의 경연대회'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단체평가부문 중 '구급차 응급조치 평가' 현장을 보실까요?


                             컴퓨터 모니터상의 '평가문제'를 조심스럽게 읽습니다.


                                                 응급 의료도구를 확인하고...


                                            
구급차에 이송전 응급조치를 합니다.


'인간 마네팅'....이거 무지하게 비싸답니다...



                                 환자를 구급차로 빠르고 조심스럽게 이송중입니다.


                           구급차내의 응급처치 를 평가하는 평가위원들의 고뇌....


 

이번 대회는 각종 응급상황에 따른 응급처치 숙달과 조치능력을 평가하고자 하였습니다. 육군 22사단, 해군 2함대사,공군 3훈련비행단 등 총 17개부대가 참가하였구요, 측정관은 의무학교 시뮬레이션 센타 교관들로 하였습니다.

특별히 금년 대회는, 작년 새로 건립한 국군의무사령부의 자랑, "SAVE CENTER"를 100분 활용하여 시뮬레이터를 적극 활용한 과학적 평가를 실시하였습니다. '08년 대회에 비한다면, 금년에는 평가인원을 확대, 단체부문 평가방법 또한 컴퓨터 시뮬레이터를 활용, 측정의 정확성을 높여 보다 사실적인 평가를 실시하였다고나 할까요?

'개인평가'는 1)군의관  2) 의무부사관 및 의무병 으로 나누어, 필기평가 및 실기평가(응급처치 : 심폐소생술, 컴퓨터 시뮬레이션, 골절/부목 등.   간호업무 : 활력징후)를 실시하였고, 단체평가는 시뮬레이션 응급처치 등을 실시하였습니다.   



                                 개인평가(골절/부목) 부문  실시중. 진지한 모습들...


포상은, 단체부문(국방부장관상+의무사령관상을 병원 3개 부대, 사단급 3개 부대에)과 개인부문(의무사령관상)으로 나누어 시상하였구요, 


국군의무사령관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금번 대회는 최초로 육,해,공군 전 부대가 참여하는 높은 관심 속에 진행된 만큼, 장병들이 '반드시 내손으로 살릴 수 있다'는 소명의식과 자신감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번 대회는 군 의료서비스가 더욱더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도록 장병들의 실전적 응급처치 능력 구비를 독려하는 데에 있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    


    


신고
Posted by 열혈국방 트랙백 0 : 댓글 0



         
           잊혀지지 않을 귀신잡는 용사들의 이야기
 
 

지난 1999년에 들어 북한이 서해에 새로운 군사분계선을 전격 선언하고 난 이후 연쇄적으로 벌인 일련의 군사도발로 인하여 NLL(북방한계선)을 서해 5도에 연한 군사분계선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동해바다에서의 군사분계선 또한 NLL이다. 다만 동해안의 NLL은 DMZ을 직선으로 바다 쪽으로 확장한 모양새이고 더불어 인근에 도서가 없기 때문에 서해 쪽과 지리적 여건이 다를 뿐이다.

 
                           보통 많이 간과하지만 NLL은 동해안의 군사분계선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동해에서 북한의 해상 도발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지금보다 더 극렬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1967년 작전 도중 북한 해안포의 포격에 의해 침몰하여 39명이 전사한 당포함 피격사건이나 이듬해 벌어진 미군 정보수집함인 푸에블로호(USS PUEBLO) 피납사건 그리고 1969년에 31명 탑승원 전원이 사망한 미군 정찰기 EC-121 격추사건이 모두 동해의 NLL 또는 북한 영해 부근에서 발생하였다.

 
                                  천안함 사건 이전 최악의 격침 사고인 당포함 사건
 

다만 적극적으로 분쟁지역으로 각인시키고자하는 서해에 비해서 동해의 NLL은 북한이 트집을 잡을 만한 이슈가 그다지 많지 않은데,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서해 5도 같이 북한이 껄끄러워 할 만한 전략요충지가 동해 NLL 인근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고 서해안의 석도나 초도보다 더 위협적인 위치에 있던 동해안의 여러 섬들을 휴전 직전까지 아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북한의 포격으로 파괴된 연평도 (사진-연합뉴스)
 

사실 해병대의 전략도서 확보작전은 서해보다 동해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신편 된 해병대 독립 제42중대는 1951년 2월 14일 초대 중대장 심희택(沈熙澤) 중위의 지휘 하에 원산 앞바다의 여도(麗島)를 거점으로 하여 주변의 신도(新島), 대도(大島), 모도(茅島), 사도(砂島), 황토도(黃土島) 등 총 6개 섬을 기습 점령하였다. 때문에 북한 측 동해안의 최대 요충지인 원산항은 전략적으로 봉쇄당한 입장이었다.

 
                           해병대는 여도를 비롯한 원산 앞바다의 주요 도서를 점령하였다
 

하지만 북한 입장에서 이보다 더 치욕스러운 사건은 해병대의 독립 제43중대에 의해 이루어졌다.  함경남도 명천이 고향인 최청송(崔靑松) 중위가 지휘한 제43중대는 그해 8월 28일, 명천군 상가면 앞바다의 양도(洋島)를 기습 점령하였다.  양도는 3개 섬으로 이루어진 소규모의 제도였지만 이곳의 점령은 북한입장에서 함경도 해안의 연해 길목을 차단당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여도에 상륙하는 해병대원의 모습
 

막강한 제해권을 발판으로 요충지 섬들을 해병대가 점령하자 북한은 이곳 섬들의 대안에 5배 이상의 병력을 증강시켜 배치하여야만 했고 그 만큼 최전선에 가해진 압박을 돌릴 수 있었다.  섬을 점거한 소수의 해병대가 육지로 진격할 수는 없었지만 북한 측의 공세에 수시로 격렬한 교전이 벌이지고는 하였다.  경우에 따라 일시적으로 외부와 연결이 단절된 해병대원들이 섬 안에 갇혀 산화하는 불상사도 있었지만 그러한 상황에서도 그들은 끝까지 최선을 다하였다.

 
                  동해 도서작전에서도 해병대는 불굴의 투혼을 보여 주었다 (사진-영화 스틸컷)
 

이처럼 동해안의 여도와 양도를 근거지로 하여 적의 배후를 양도부대로 개칭되었고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휴전 때까지 현 진지를 사수하였다.위협하고 적 보급차단 및 연안봉쇄에 혁혁한 전공을 세운 제42중대와 제43중대는 1952년 10월 여도부대와   비록 이들 부대의 도서작전은 전술적인 측면에서 중대규모가 펼친 작은 규모의 후방작전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눈엣 가시처럼 적에게 끼친 전략적인 효과는 엄청나게 컸다.

 
만일 원산만과 양도 일대에 NLL이 설정 되었다면 적들이 느낄 곤혹감은 대단하였을 것이다. 영흥만의 경우는 말할 필요조차 없지만 양도는 현재 북한의 미사일 기지로 유명한 무수단리및 핵 실험 장소 부근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러한 전과가 그동안 소홀하게 취급되어 왔던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휴전과 동시에 이들 요충지 섬들을 포기하고 철수하여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만일 이 섬들을 아직까지 우리가 장악하고 있고 이곳까지 NLL이 선포되었다면 과연 어떠하였을까?  서해 5도가 현재 대한민국 안보에서 차지하는 전략적 위치를 고려한다면 쉽게 답이 나올만한 이슈가 아닌가 생각된다.





신고
Posted by 열혈국방 트랙백 0 : 댓글 0


                     
                     백령도가 끝이 아니었다
 
 

'서해 최북단'
흔히 신문보도나 방송 매체에서 백령도를 지칭할 때 쓰는 표현인데, 백령도가 군사분계선의 가장 서북쪽 끝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휴전이후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군사분계선은 육상을 가로지르는 DMZ(비무장지대)와 바다의 경계선인 NLL(북방한계선)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철책으로 명확히 구분된 DMZ와 달리 NLL은 서해 5도의 북쪽 해상을 연결하는 바다 위의 가상 선이므로 육안으로 구별하기는 힘들다.
 

                   현재 서해 최북단인 백령도 (천연비행장으로도 유명한 백령도의 사곶 해변)
 

그런데 우리가 좀 더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면 서해 최북단의 섬은 백령도가 아닐 수도 있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당시에 유엔군사령관 클라크(Mark Clark)장군은 서해 5도의 북쪽인 북위 37도 35부와 북한의 점령지인 옹진반도 남단의 북위 38도 03부 사이의 중간 해역을 연결하여 NLL을 선포하면서 그 이북에 아군이 점령하고 있던 섬에서 철수하였기 때문이다.

 
                                         북한이 도발의 빌미로 삼고자하는 NLL
 

이때 해병대가 적의 도발을 물리치고 강고하게 점령하고 있던 동서해의 여러 섬들을 부득이 포기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서해의 석도(席島)와 초도(椒島)는 그야말로 요충지 중의 요충지였다. 석도와 초도는 평안남도와 황해도를 가로지르는 대동강하구의 광량만에 위치한 섬들인데, 북한 서해의 최대항구인 진남포와는 30킬로미터의 거리이고 평양까지도 70킬로미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북한의 심장부를 겨냥하는 위치인 석도와 초도
 

최근 연평도에 MLRS가 배치된 것과 관련하여 서해 5도를 방어기지가 아닌 유사시에 적 후방을 타격하는 전략 거점으로 육성하면 북한이 상당히 곤혹스러워 할 것이라는 의견에서 알 수 있듯이, 만일 현재까지도 석도나 초도를 우리가 장악하고 이곳에 장거리 타격무기를 전진 배치한다면 북한이 느낄 압박감은 이루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한 것은 석도나 초도의 점령은 북한이 서해바다를 포기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NLL이 석도까지 연결되었다면 북한의 서해는 완전히 고립되는 형국이다
 

NLL을 초도와 석도까지 연결한다면 북한의 서해바다는 완전히 봉쇄되는 형국이다. 현재 서해 5도로 인하여 주요 항구인 해주가 제 기능을 십분 발휘하지 못하는 것만 보아도 충분히 유추 가능한 부분이다. 지난 천안함 사태로 인하여 북한군 잠수함대가 전개하고 있는 해군기지로 알려진 비파곶이 바로 석도 맞은편에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위치의 전략적 가치를 충분히 알 수 있다.
 

                                  북한의 잠수함기지인 비파곶이 바로 앞에 있을 만큼
                               석도와 초도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교동도를 거쳐 백령도 점령을 완수한 해병대 독립 제41중대가 1951년 5월 7일 기습 상륙하여 석도와 초도를 장악하자 북한은 경악하였다. 북한이 얼마나 위기의식을 느꼈는지는 한 개 중대가 점령한 석도와 초도를 경계하기 위해 무려 2개 사단을 맞은편 대안에 이동 전개 시켰던 사례에서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다. 당연히 섬을 재 장악하기 위한 북한의 도발은 집요하였고 그 과정에서 철수 전까지 수많은 격전이 벌어졌다.
 

                           1951년 12월 21일 병력교대를 위해 초도에 상륙하는 해병대원
 

해병대는 압도적인 해군의 화력 지원 하에 적의 접근을 거부시키는데 성공하였지만, 소수의 부대가 적진 한가운데에 동 떨어져 벌이는 작전은 항상 많은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었다. 예를 들어 1952년 3월에 석도 앞의 작은 무인도인 호도에서 벌어진 격전에서 악천후로 인하여 외부지원이 끈긴 해병대 1개 소대가 5배나 많은 적의 공격을 끝내 격퇴시켰지만 소대원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실종당하는 참사를 겪기도 하였다. 이처럼 해병대는 피와 눈물로 서해의 요충지를 지켜내었다.
 
 
                            서해의 요충지를 소수의 해병대원들은 피와 눈물로 사수하였다
                             (석도에서 교전 중 부상당한 병사를 후방으로 이송하는 모습)
 

하지만 앞에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휴전협정 체결 후 유엔군은 원격지라 판단한 석도와 초도를 전격 포기하였다. 따라서 우리가 서해 5도에만 준하여 NLL을 설정한 것은 북한에게 커다란 은혜를 베푼 것과 다름없었고 사실 북한도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못하고 전후 20년간 엄중하게 이를 지켜왔다. 하지만 최근 방자하게도 이를 망각하고 도발을 일삼는 것을 보면 석도와 초도를 너무 쉽게 포기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신고
Posted by 열혈국방 트랙백 1 : 댓글 0


                       
                         그대들이 있기에
 
 

북한의 연평도 급습 당시의 생생한 모습을 담은 몇 장의 사진들이 공개 되었다. 특히 포진지가 적의 피격으로 불타는 위급한 순간임에도 침착하게 K-9자주포를 전개하는 해병대원들의 처절한 사투와 철모가 불타고 얼굴에 화상을 입는 와중에도 맡은바 임무를 다한 임준영 상병의 모습은 보는 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어 주었다.

 
                                   철모가 불타는 순간에도 최선을 다한 임준영 상병
 

그러한 연평부대의 처절했던 11월 23일 전투의 모습에서 지난 60년 전 기습남침을 감행한 압도적인 북괴군에 맞서며 살신성인의 분투를 보여 주었던 제18포병대대의 모습이 떠올랐다. 시대와 환경이 다르지만 이번 해병대 연평부대의 투혼은 지난 한국전쟁 당시 제8사단 18포병대대(현 제2사단 예하)의 모습을 반추하는데 결코 모자람이 없고 생각되어 소개한다.

 
                                        적의 기습으로 탄흔이 가득한 포진지의 모습
 

1950년 6월 27일 새벽 4시, 그동안 국군 제8사단의 강력한 저항으로 진격이 지체되었던 북한군은 5배나 많은 전력을 앞세워 공격을 재개하였고 결국 국군 제5사단 10연대가 담당하던 연곡천 방어선을 돌파하였다. 이때 10연대의 급작스런 붕괴로 말미암아 최전방 배후까지 올라와 화력 지원을 하던 제18포병대대의 포진지도 동시에 적의 전면에 노출되는 위기에 빠졌다.
 

                                      창군 초기 국군의 유일 중화기였던 M-3곡사포
 

만일 이 상태에서 무작정 후퇴한다면 이동속도가 느린 포병대대 전체가 적에게 추월당하여 포위될 가능성이 농후하였다. 따라서 포병대대는 정면에서 교전하여 적의 진격속도를 누그러뜨리면서 후방으로 이동하기로 하였다. 장병들의 생사도 물론 중요하지만 아군의 유일중화기와 다름없는 M-3곡사포를 최대한 보존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이처럼 단 한 문의 포도 쉽게 포기할 수 없었을 만큼 한국전쟁 초기에 우리 군의 전력은 부족하였다.

 
                               포병대대는 적을 가시권까지 끌어들여 직접 타격하였다
 

포병대대원들은 옥쇄(玉碎)의 각오로 인식표를 땅에 묻고 포병진지 전방 100미터까지 적들이 다가오도록 기다린 후 수평으로 포신을 낮추어 직접 타격하여 적을 당황하게 만들었고 포진지로 난입한 적과 백병전을 치루며 포들을 이동시켰다. 이러한 급박한 와중에도 2문의 포가 밭에 빠져 회수할 수 없자 적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조치하고 난 후 후퇴하였을 만큼 대대원들은 침착하였다.

 
                                           제18포병대대 순국 3용사 추모행사
 

이때 2번 포차 운전병 심우택 이병은 포 폐쇄기를 안은 채 산화했고, 통신소대 최서종 중사는 와이어 드럼을 회수하기 위해 적진으로 뛰어 들어갔다 돌아오지 못했다. 또한 관측반 한명화 하사는 끝까지 관측소에 남아 임무를 수행하다 순국했다. 이처럼 적에게 포위 될 위기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제18포병대대 병사들이 보여준 이러한 분전은 전쟁 당일 강릉을 점령하려던 북한의 계획을 무려 사흘간이나 지체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힘이 되었다.

 
                                          그대들의 분투에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이번 적의 연평도 도발에서 압도적인 적 해안포 세력에 비해 불리한 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연평부대가 보여준 놀라운 사투는 밤하늘의 별처럼 국군의 자존심을 세워 준 모습이 아닐까도 생각되며 60년 전 제18포병대대가 보여준 용전과 비교하여 결코 모자람이 없다. 선배들 못지않은 투혼을 보여준 연평부대원들의 노고에 감사의 말을 전한다.





신고
Posted by 열혈국방 트랙백 0 : 댓글 0




11월 27일(토) 오전, 국방부 브리핑룸에서는 최근 논란이 되고있는 '방사포탄(로켓트 탄) 추진체 1번' 과 관련하여 합참공보실의 브리핑이 있었습니다.

 

                                    합참공보실 주관으로 브리핑을 진행하였습니다.


                                         금번 발견된 '북한 방사포탄 추진체 꼬리날개 부분'


이것(위의 사진)이 바로! 연평부대 EOD(폭발물 처리반)반장이 발견,  연평도를 공격한 '북한 방사포탄 추진체' 입니다. 정말 동그라미 '1'이 있군요! 날개부분에는 동그라미 5번 등 숫자들이 있고요.

위의 방사포탄과 관련하여 국방부조사본부에서는 현재 계속하여 조사를 진행 중입니다.


         아래가운데 '1번'은 천안함 어뢰에서 발견된 것, 아래오른쪽 '1'번은 방사포탄 추진체에서 발견


지금까지의 국방부조사본부의 조사 결과, 북한은 포탄의 부품분류를 위해 숫자를 사용한다는 것이 거듭 확인되었습니다.

천안함 피격사건에 사용된 북한어뢰는 청색유성매직으로 '1번'이라 씌여 있었으며, 이번 연평도를 공격한 122mm 방사포 노즐조립체 상의 1번도 색깔만 다른(검정색) 유성매직으로 수기 작성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날개부분에 있는 동그라미 5,6번은 기계로 찍은 숫자로 보고 있습니다. 


                                     조사결과를 브리핑하는 국방부조사본부 관계자

이번 발견된 포탄은 '열압력탄'이 아닌 것으로 보이며, 북한이 그보다 더 위력을 키워 제조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TOD등에 알루미늄 등을 섞으면 폭발력이 커지는데, 그런 것이 아닌가 조사를 계속 진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백린'도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국방부 조사본부'에서는 계속하여 연평도를 공격한 방사포탄 등을 조사하고 있으니, 네티즌들을 비롯한 국민들께서는 현재의 어려움을 증폭시킬 수 있는 논란은 가급적 자제하여 주셨으면 하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 열혈국방 생각 -



  





신고
Posted by 열혈국방 트랙백 0 : 댓글 0






11월23일 연평도에 대한 북한의 무력도발이 있었으나, 우리군은 계획대로 한미 '연합군사훈련'을 실시할 것입니다.  


'한미 연합훈련'에 참가할 미 항공모함 조지워싱턴 함(가운데)이 지난 7.26일 ‘불굴의 의지’ 연합훈련의 일환으로 독도함(1만4000톤급), 한국형 구축함(4500톤급), 미 이지스 구축함 등과 함께 항진하는 모습



우리군은 미국과의 안보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11월 28일~12월 1일 '연합군사훈련'을 실시하고 훈련 강도를 더욱 높이기로 하였습니다.


김태영 국방부장관은, 미 국방장관과 전화를 통해 '북한의 연평도 포격도발'은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되었던 의도적 도발로 평가하고 현상황 평가와 대책을 논의하였으며,

11월 23일 한민구 합참의장은, 월터 샤프 연합사령관과 화상회의를 갖고 북한의 추가 도발 방지를 위한 한미 간 공조체제를 논의하였습니다.

오는 11월 28일~12월1일, 서해상에서 미국 항공모함 조지워싱턴 함(9만7000톤급)이 참가한 가운데 연합훈련이 실시될 것입이다.

핵잠수함을 제외한 한측 구축함 · 초계함ㆍ호위함 · 군수지원함 · 대잠항공기 등과, 미측 순양함 카우펜스 함(CG62·9600톤급), 구축함 샤일로 함(DDG67ㆍ9750톤급)을 비롯한 스테담 함(DDG63), 피츠제럴드 함(DDG62) 등이 참가할 것입니다. 


방어적 성격으로 실시되는 이번훈련은 북한의 해안포 도발 이전에 이미 계획되었던 것으로, 억제력 강화와 역내 안정을 증진시킬 것이며 양국군의 상호운용성 향상과 한미동맹 결의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금번 한미 연합훈련 일정은, 중국에 이미 통보하였으며, 북한에도 통보 예정입니다.






 


신고
Posted by 열혈국방 트랙백 0 : 댓글 0






북한군의 연평도에 대한 무자비한 포사격에 대응하던 중, 우리 해병 2명이 전사하였습니다.




故 서정우 하사(해병 1088기).... 마지막 병장휴가를 위해 육지로 향하던 중, 포탄 낙하상황이 북의 기습포격임을 듣고 전투에 임하기위해 부대에 복귀하던 중 포탄 피해를 입고 전사하였습니다. 
故 서정우 하사는 연평부대 중화기 중대의 공용화기 사수로서, 다양한 공용화기를 운용할 수 있는 최고의 전투력을 지닌 해병이었습니다.

 
전사한 故 문광욱 일병(해병 1124기)은 연평부대 본부 중대 수송반에 배치되어 서북도서 수호에 최선을 다하며 신병답지 않은 능숙한 임무 수행으로 훌륭한 해병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고 합니다. 
故 문광욱 일병은, 사고 당일 포병 사격훈련장 임무를 수행하던 중 기습 포격 속에서 그 누구보다도 먼저 달려나가 전투준비를 하던 중 무자비한 북한군의 포격에 파편상을 입어 전사하였습니다.



 
갑작스런 포탄 피격 속에, 연평부대원 절반 이상이 직접 나서서 주민들의 대피를 도왔으며 주민들중 잔류인원을 확인하는 등 군인본분을 다하여 피해를 최소화하였습니다. 피해를 입은 연평전투 부상자들은 후송되어 국군수도통합 병원에서 치료 중에 있으며, 해병대 사령부는 전사자들에 대하여 최대한의 예우를 갖추어 장례절차를 진행하고 있으며 화랑무공훈장을 추서할 예정입니다.




현재 해병대사령부는 해병대사령관 주관 협조회의를 통해 연평도 상황을 예의주시하면서 연평도 내 장병과 주민들에 대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대피호 피신 주민들을 위해서는 모포 400장, 컵라면 2,500개, 식수, 전투식량, 건빵, 음료수 등을 지원하였으며 언제 어디서나 출동 가능한 상륙군의 특징을 살려 연평도 피해복구를 위해 신속하게 대응하고 있습니다. 

 




신고
Posted by 열혈국방 트랙백 0 : 댓글 2




           실패와 눈물 없이 성공은 없다
 
 

1980년대가 끝나갈 무렵, 미국의 신형 전략폭격기 B-2 Spirit가 세상에 처음으로 모습을 보였을 때 많은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적의 방공감시망을 피해 목표지점까지 은밀히 다가갈 수 있는 스텔스(Stealth) 성능도 경이로웠지만, 그러한 자세한 성능은 차치하고도 우선 눈에 보이는 비행기의 모양새만 가지고도 상대의 기를 죽일 정도였다.

 
                          경이롭다 못해 괴기스럽기까지 한 B-2 전략폭격기
 

지금까지 보아왔던 비행체와 확연히 차이가나는 전익기(Flying Wing) 형상 때문이었는데, 이러한 혁신적인 모습을 빗대어 "저것은 지구인이 만든 것이 아니라 외계인이 선물한 것" 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한마디로 겉으로 보여 지는 외형만으로도 최첨단의 무기임을 자랑하는데 결코 모자람이 없었다.

 
                  여타 전략폭격기와 비교하여도 확연히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좌에서 우로 B-2, B-52, B-1B)
 

그런데 상상을 뛰어넘는 혁신적인 디자인의 전익기는 사실 하루아침에 만들어 진 것은 아니고 그 역사가 의외로 오래 된 형태의 비행체다. 흔히 저런 비행체를 보았을 때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이라면 비록 실용화까지는 이르지 못하였지만 혁신적인 구상을 많이 남겨 이후 호사가들에게 많이 회자되는 나치의 비밀병기다. 그렇다면 나치 독일이 저런 비행체를 연구 하였던 것일까?

 
                          마치 UFO같은 나치 독일의 Sack AS-6 실험기
 

다음 사진은 1942년 말 독일의 글라이더 제작사인 호르텐(Horten)이 설계한 Ho-7 실험기다. 이를 바탕으로 제2차 대전 종전 직전에 아래 사진처럼 제트엔진을 장착한 Ho-229까지 제작하였으나 전쟁이 종결 되고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 지금보아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뛰어난 모습인데 무려 65년 전에 전익기는 이미 실용화직전까지 제작이 이루어졌다.

 
                              혁신적인 모습의 Ho-7의 1940년 비행모습 
 

연과 같은 모습인 전익기는 체공에 상당히 적합한 구조지만 자세제어에 상당한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이 때문에 컴퓨터와 같은 전자 제어기술이 부족하였던 당시에 완벽한 전익기의 완성은 상당히 어려웠다. 그런데 독일이 이러한 전익기 개발 유일국가는 결코 아니었다. 단지 선도국가들 중 하나였을 뿐이고, 개발과 적용에 있어 빛을 발 한 나라는 미국이었다.

 

               개발도중 종전으로 완성되지 못한 Ho-229(上)와 최근 재현한 목업
 

아래 사진은 1929년 미국 노드롭(Northrop)의 실험기인 X-216H다. 완전한 전익기로 볼 수 없는 실험기였는데, 1940년에는 N-1M처럼 보다 발전된 단계까지 제작이 이루어졌다. 우연이었는지 독일의 Ho와 거의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독일이 패전하고 난후 노드롭은 전후에도 이 분야 연구의 선도적 역할을 계속 담당하였다.

 
                              1929년 비행에 나선 노드롭의 X-216H
 

이런 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노드롭은 실험용 차세대 전략폭격기인 XB-35을 제작하여 비행에 성공하였는데 그때가 1946년 6월 25일이었다. 비록 B-36이나 B-52같은 차세대 전략폭격기에 밀려서 제식화되지 않았지만 4톤의 폭장을 하고 무려 12,000Km를 비행할 수 있는 성능을 자랑하였다. 일설에는 시대를 앞서는 너무 혁신적인 모습이 오히려 채택되지 못한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고 할 정도였다. 
 

                            1946년에 제작된 실험용 전략폭격기 XB-35
 

비록 군에서 거부당하였지만 XB-35는 이듬해 제트엔진을 장착한 실험기인 YB-49로 진화를 거듭하여 비행 실험까지 완료하였다. 그런데 YB-49에서 B-2의 모습을 엿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이처럼 최신 전략폭격기 B-2의 제작사인 노드롭(현재의 노드롭그루먼)은 이미 수 십 년 전부터 전익기와 관련한 노하우를 축적하여 왔기에 B-2가 탄생한 것이었다.

 
                                      제트 엔진을 장착한 YB-49
 

이처럼 혁신적인 비행체가 외계인의 도움이 있어서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그 동안 계속된 연구와 축적된 기술 그리고 장기간에 걸친 꾸준한 도전으로 탄생한 것이다. 당연히 그러한 과정 중에는 무수한 실패와 난관이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사실 이것은 무기의 개발사뿐만 아니라 모든 일상사에 해당되는 이야기다.  혹시 그동안 남의 성공 뒤에 숨어있던 실패와 눈물은 보지 않고 결과만 부러워만 하지 않았는지...






신고
Posted by 열혈국방 트랙백 0 : 댓글 0




             전쟁으로 불참한 제1회 대회
 
 
 
1948년 7월 29일 제2차 대전에서 입은 피해가 완전히 복구되지 않은 영국의 런던에서 제14회 올림픽이 개최되었다. 지난 1936년 제11회 베를린 대회 이후 무려 12년 만에 부활한 평화의 제전이었다. 이 대회는 전후의 시대상을 반영하듯 독일, 일본과 같은 패전국들의 참가가 불허되었던 반면, 우후죽순처럼 탄생한 많은 신생 독립국들이 올림픽 무대에 새롭게 얼굴을 내밀었다.

 
             제14회 런던 올림픽에서 대한민국 최초로 메달을 획득한 김성집 선생
 

그러한 국가들 중에는 대한민국도 있었는데, 엄밀히 말해 대한민국은 폐막식 다음날인 1948년 8월 15일에 정부가 수립하였으므로 공식적으로는 아직 국가의 실체가 존재하기 전이었다. 하지만 그런 형식적인 문제는 차치하고 오랜 압제로부터 해방을 맞은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은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세계무대를 내달렸다.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웠다는 이유만으로 고초를 겪었던 시절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런던 올림픽에서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경기에 임하는 축구 국가대표
 

바로 그 대회에서 열강의 식민지로 수많은 고초를 겪었던 아시아의 신생 독립국들은 지역 내의 단결을 목적으로 하는 별도의 지역제전을 만들기로 의견을 모았다. 인도의 IOC위원인 손디(Guru Dutt Sondhi)가 제창한 의견에 대한민국, 인도, 필리핀, 버마(현 미얀마), 중국(현 대만), 실론(현 스리랑카)의 6개국이 동의하였고 이듬해 창설된 아시안게임연맹(AGF)이 제1회 대회를 1950년 인도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제1회 아시안게임 엠블램

 
이것이 바로 올림픽 중간 해에 4년마다 개최되는 아시안게임(Asian Games)이다. 이렇게 작지만 원대한 꿈을 가지고 시작한 아시안게임은 어느덧 중국의 광저우에서 제16회 대회를 개최하게 되었을 만큼 연륜이 쌓였다. 이번 대회에는 45개국의 9,700여명의 선수들이 참여하여 모두 42개 경기의 476개 세부종목에서 열띤 경쟁을 펼치는 거대한 축제의 장으로 변하였는데, 이것은 종합경기대회로는 올림픽 다음가는 거대한 규모다.

 
       제16회 광저우 아시안게임 개막식에 입장하는 대한민국 선수단 (사진-Mydaily)
 

우리나라 선수단은 대회 초반부터 다양한 종목에서 골고루 선전을 펼치며 국민들을 즐겁게 하여 주고 있다. 중국의 독주가 두드러지지만 대한민국은 아시안게임에서 항상 선두권에 드는 경기력을 유지하고 있는데, 특히 지난 1994년 일본의 히로시마에서 개최 된 제12회 대회를 제외하고는 제10대회 이후 계속하여 전통의 체육 강국인 일본보다 앞선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다.

 
          놀라운 경기력을 선보여 국민에게 기쁨을 선사한 박태환 선수 (사진-Osen)
 

이처럼 항상 대회의 주역으로 커다란 활약을 보여주는 대한민국은 아시안게임의 창설에부터 적극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2번의 대회를 개최(1986년 서울, 2002년 부산)하였고 제17회 차기대회(2014년 인천)도 개최할 예정으로 있는 핵심 중의 핵심국가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그 의의가 컸던 제1회 대회에 우리나라가 참석하지 못한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아시안게임의 주역인 우리나라는 전쟁으로 제1회 대회에 참석할 수 없었다
.
 

원래 제1회 대회는 1950년 인도의 뉴델리에서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준비가 부족하여 1년이 연기된 1951년 3월 4일에 열렸다. 11개에서 온 489명의 선수들이 6개 경기의 57개 세부종목에서 열띤 경쟁을 벌였는데 올해 대회와 비교하면 상당히 소박한 대회였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대회 창설의 주역이었던 대한민국은 전쟁으로 말미암아 참가할 수 없었다. 당시는 1.4후퇴 이후 공방전이 치열하게 벌어졌던 시기라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오늘의 환호와 감격 속에서도 과거의 아픔을 잊지 말아야한다
 

신생독립국으로 지역 내 평화구현에 적극적으로 앞장서려고 하였고 이를 적극 추구하고자 노력한 대한민국이 막상 침략을 당하여 제1회 대회에 불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진정 가슴 아픈 과거라 아니할 수 없다. 어느덧 오랜 시간이 흘러 오늘의 환호와 감격 뒤에서 이런 흔적을 찾기는 힘든 시절이 되었지만 잊지 말고 기억하여야 할 분명한 역사가 아닌가 생각한다.




 
신고
Posted by 열혈국방 트랙백 0 : 댓글 0



                        바다를 건너 재탄생한 전투기들 [ 上 ]
 
                                              
                                            승자의 권리
 
 
"귤이 회수를 건너가면 탱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어떤 생물이나 물건이라도 환경이 바뀌면 이에 맞춰 변화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격언인데, 탱자가 귤보다 맛이 없는지는 모르겠으나 본고장을 떠나면 아무래도 품질이 나빠진다는 의미가 내포 되어 있는 말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본고장을 떠나면 그 모습이 변하기 마련이다
                                            (김치를 탱자로 만들어 버린 기무치)
 
 

그런데 반드시 그런 것이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속담이기도 하다. 귤이 강을 건너면 탱자가 될 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반대로 오렌지가 될 수도 있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말이 있듯이 오리지널보다 나중에 나온 파생형이 좀 더 업그레이드 될 가능성도 충분히 많기 때문이다.

 
                              비보이는 한국으로 건너 와서 탱자가 아니라 오렌지가 되었다

 
특히, 무기의 경우가 그러한데 90퍼센트 이상은 시간이 갈수록 오리지널보다 훨씬 성능이 우수한 놈들이 나온다. 그 이유는 최신 무기가 기존 것보다는 성능이 좋아야 이길 수 있다는 단순한 논리 때문이다. 처음에는 상대편 것이 좋다면 비록 카피를 하여 우선 탱자라도 만들겠지만 개발에 관한 노하우가 쌓이면 오렌지를 만들 수 있는 것이 바로 무기 체계다.

                       독일의 보병휴대용 대전차무기인 팬저파우스트를 카피하여 탄생한 RPG-7은 
                  지금도 사용 중인 베스트셀러다.

 

1945년, 연합군이 독일 영토내로 진입하고 제3제국의 멸망이 가시화 되자 품질 좋은 무기를 개발하였던 독일의 수많은 엔지니어들이 살길을 찾아서 갈 길을 가게 되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자의든, 타의든 어쩔 수 없이 미국이나 소련으로 갈 길을 정하였고, 이들이 적국의 엔지니어지만 적극 스카우트하는데 미국과 소련 또한 주저하지 않았다.


                             전쟁말기 앞선 무기체계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였다
                                      (노르트란트의 V-1 제조시설을 점령한 미군)
 

특히 이들 중 미국이나 소련의 목표가 되었던 엔지니어들은 독일이 독보적으로 앞서있던 로켓과 제트기관련 종사자들이었다. 이들은 독일에서 연구하다가 종전으로 중단되었던 프로젝트를 새롭게 자리잡은 미국과 소련에서 재개하였고, 냉전이 본격 개시되자 최신무기를 앞다투어 만들어 내었다.


                             V-2 개발의 중추로 전후 미국으로 건너가 그 명성을 꽃 피운 폰 브라운
 

이런 이유 때문에 로켓이나 제트전투기 분야에서 새롭게 등장한 동서 양진영의 무기들은 유사하게 닮아있다. 당사자들은 독창적으로 개발 하였다고 강변 할지 모르겠지만 기본적인 구조뿐만 아니라 외양까지도 흡사 할 정도였다. 특히 이들 중 백미인 F-86과 MiG-15는 형제지간이라고 불러도 별다른 이의를 제기 하지 못할 만큼 외양이나 성능이 막상막하였다.


                      독일의 패전으로 제작이 중단 된 차세대 제트전투기의 목업인 P.1101

 
F-86과 MiG-15은 패전으로 중단 되었던 메셔슈미트의 P.1101프로젝트와 포커울프가 심혈을 기울여 제작하였던 Ta-183의 아류작들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유사하다. 후퇴익 주익과 동체에 삽입시킨 인테이크와 노즐은 제1세대 제트기들의 기본모양이 되었다. 따라서 P.1101은 F-86에 Ta-183은 MiG-15의 등장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다.

 
                      냉전시기 제1세대 전투기였던 F-86과 MiG-15는 독일의 오렌지들이었다.


 
이처럼 제2차 대전 후에 곧바로 다가온 온 냉전으로 말미암아 이후 미국과 소련의 무기가 세계시장을 순식간 양분하게 되면서 본의 아니게 독일의 귤은 전쟁 당시의 적들에 의해 오렌지로 변화하였다. 그런데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미국과 소련 외에 의외의 장소에서 오렌지가 되었던 경우도 있었다. (계속)



신고
Posted by 열혈국방 트랙백 0 : 댓글 2





국방부!  그 고지식하고 꽉막히기로 유명한('열혈국방'은 절대 인정 안합니다.ㅋㅋ) 우리의 국방부가..  '트윗벙개'를 하였습니다.

때는, 7월 14일 점심시간! 찌는듯한 했볕을 맞으며, 그렇게 우리는 그분들을 만나러 갔습니다.. '
국방부는 총 5명이 벙개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리고, 트위터리안들을 만났죠.



                           

                                                  역시 먹을 것이 있어야 대화가 즐겁줘~ 


                                                    


그러면, 우리의 아름다운 만남에는 과연 무엇이 있었을까요??

우선, 탕수육과 자장면 그리고 짬뽕이 있어, 만남은 무르익어 갔습니다. 현장에서 찰칵!  정책홍보담당관님 제일 안나오신 사진으로 한장!ㅋㅋ


                                                        삼각지에서 제일 유명한 중국집


식사 간, 마치 10년지기 친구를 만난 것처럼 우리는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답니다.


    o  참석 트위터 : " 청와대하고 농림부, 마사회의 트윗벙개 때에도 참석했었어요~...."   
     
    o  참석 트위터 : "일전에 병무청 팀블로그 기자 활동을 했었는데요, 그곳 활동은 취재범위가 군부대
        로만 제한이 되어있어서 만족스럽지 못하였답니다....   저는 국방 전체를 취재하고 싶었거든요...그래서
        그곳 활동을 그만두었습니다. 국방부 직업군인블로그('군화신꼬') 기자가 될 수는 없나요?"

    o  국방부 참석자 : "적극 환영입니다!~ 제가 말씀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o  참석 트위터 : "저는 00에서 블로그와 트위터를 함께 운영하고 있는데, 국방부는 어떤 
        방식으로 운영하는 지 무척 궁금했습니다...그래서, 이렿게 벙개에.."   모두들 쫑알쫑알쫑알...


그리고, 저희 국방부에서 가장 가까우면서도 영양가 있는 장소, '전쟁기념관'으로 모두들 향하였지요.


                                                                      전쟁기념관 전경



   o  참석 트위터 : "이곳, 전쟁기념관내 '참수리 357호'를 보게되니, 천안함 사건과 관련하여 후배들 생각에 다시금
       마음이 아파옵니다. 저도 해군에서 군복무를 했었거든요..." 
       "그리고, 군 복무를 생각하니... 신기한 것이, 군복무 전에는 정말 생각의 중심이 '나' 하나에만 집중되어 있었
       는데요, 군에 복무중에는 부대내 정신교육 때문인지??  정말 나라를 위해 훈련도 하고, 전쟁이 나면 전쟁도
       하며, 전투하다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을 갖게되더라고요... 물론 민간으로 돌아오니, 다시 '나'중심
       주의로 돌아갔지만요...ㅋㅋ"

   o  국방부 참석자 : "모든 조직이 그렇듯이 '군'도 조직의 목표가 있고, 군에 온 장병들에게는 당연히 '국방의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조직 목표를 명확히 인식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o  참석 트위터 : 물론.. 그렇겠죠? 

    

                                            전쟁기념관내 참수리 357호를 향하여, 앞으로~갓! 


  o  참석 트위터 : "참수리357호, 이거 진짜를 갖다 놓은 건가요??"

  o  국방부 참석자 : "어디, 진짜 배인지, 모형인지, 한번 올라가 보실까요? 호호호.."


                                               멋진 포즈 잡아주세요~(참수리357호 모형위에서)


                                                '이 배를 조종하려면, 어케 해야하나...궁금하다.'


그리고, 우리는 전쟁기념관내 6.25 특별사진전 '감상파'와 '비감상파(일전에 보신 분들)'로 나뉘었습니다.('감상파'들은 사진전을 감상하였지요~)
국방부 , 오신분들께 사진전 입장권을 드렸어요.


       사진전 입장권을 드리니, 참석 트위터 말씀하시길, "다음에 우리 애인하고 와야~쥐. 오늘은 이만!"



                                 전쟁기념관 '6.25 특별사진전' 관람 전 '빠이빠이-픽쳐' 한 컷!


그리고, 그들은 전쟁기념관내 6.25 특별사진전에서 '3D입체사진'을 보기위해 영화'메트릭스'에 나오는, 그 비슷한 안경을 쓰셨습니다. 요렇게!


                                     영화 '메트릭스'를 연상케 하시는, 트위터리안들.^^  


그분들...  다음 '트윗벙개'때 또 뵙죠.

담에 또 만나요!~~~   트위터리안, 안녕!   


   그리고, 저희 국방부 정책홍보담당관께서는 7월 26일이면 '보건정책과장'이 되십니다. '열혈국방'과 '국방부 
   트위터 대변인', 그리고 '동고동락', '군화신꼬' 등등등을 모~두 낳으신(?) 다산의 여왕!  "사랑합니다!" ^^ 
                                                                        
                                                                                              - 국방부 정책홍보과원 일동 올림 -
  





신고
Posted by 열혈국방 트랙백 0 : 댓글 2


국방부는 민군 합동조사단에 의해 천안함 침몰사건의 결정적 증거(Smoking Gun)인 북한의 어뢰 추진부와 날개가 발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관련 의혹이 온*오프라인에서 계속 제기되고 있어, 제한적이나마 일반인들에게 천안함을 공개할 예정입니다.




그동안 국방부는 국회 국방위 관련 정치인, 신문 방송사, 인터넷 매체, 예비역 군인 및 국방 및 안보관련 자문위원단에 천암함을 공개해, 사건 경과를 설명하였습니다.

하지만 지난 20~1일 양일간 동아일보와 코리아리서치센터의 주관으로 실시된 전화여론조사(성인 남녀 700명)에서는 응답자의 72%만이 합조단의 발표대로 "북한 소행이 분명하다"고 답변했고, "신뢰할 수 없다"는 응답은 21%에 달했습니다.

따라서 국방부 원태재 대변인은 "인터넷에 떠도는 루머를 해소시키고, 민군 합동조사단의 최종결과를 정확히 설명하기 위해,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기로 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 시간 및 장소
 
 ⊙ 2010년 6월 8일 화요일 오전 9시~ 16시 (오전 8시 40분까지 국방부 서문으로 집결)
 ⊙ 국방부 브리핑룸 및 해군 2함대사령부 (버스로 이동 예정)

▶ 대상 
 
 ⊙ 대학생 기자(30명)
 ⊙ 밀리터리 분야 파워블로거 (10명)
 ⊙ 트위터 이용자 (20명)
 ⊙ 인터넷 포털 미디어 담당자 (5명) 등 총 70여명을 대상으로 합니다.

▶ 내용 
 
 ⊙ 민군 합동조사단 관계자의 브리핑 
 ⊙ 천안함 절단면 공개
 ⊙ 식사 및 Q&A

▶ 준비물
 
 ⊙ 디지털 카메라, DSLR, 캠코더, 스마트폰 등 천안함을 촬영 및 기록할 수 있는 장비 휴대 가능
       (단, 천안함에 승선은 불가하며, 
        기존 언론사에 공개한 수준(5m 앞 포토라인)으로 촬영 및 기록이 가능 합니다.)
 ⊙ 천안함과 관련된 질문을 준비해오시면 답변을 드릴 예정입니다.

▶ 유의사항
 
 ⊙ 천안함에 관련된 촬영은 허가되나, 국방부 및 부대(2함대)내 촬영은 제한되니 양해바랍니다.
 ⊙ 트위터 이용자 중 해당 공지를 RT(ReTweet)한 사람들 중 무작위로 선발하며, 
     선발자의 타임라인과 Followers수는 고려하지 않습니다. 
      (단, 정당인과 언론인으로 추정되는 이용자는 배제하며,
            트위터에 본인소개가 정확하지 않은 경우도 선발에서 배제할 예정입니다.)
 ⊙ 점심식사는 해군 2함대에서 제공할 예정입니다.
 ⊙ 국방부 영내에 주차는 불가합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주세요.^^ 



민군합동조사단 결과 발표 이후에 국방부는 각계 각층의 국민들에게 정책설명회를 하고 있습니다. 천안함 절단면 공개와 함께 이번 대학생들 및 네티즌들을 대상으로 한 정책설명회도 그 일환의 하나입니다.

그럼 6월달에 뵙겠습니다.





신고
Posted by 박비 트랙백 0 : 댓글 0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