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부 정책 블로그'에 해당되는 글 87건

  1. 2011.06.09 '열혈국방'과 '군화신꼬'가 6월 9일 통합됩니다!!
  2. 2010.11.26 해병, "실전에 두려움은 없다!"
  3. 2010.11.16 신념에찬 지휘관, 이를믿는 부대원들 작품,'장진호 전투'!
  4. 2010.11.11 정밀타격 순항미사일의 원조, 독일 V-1
  5. 2010.11.11 '장진호 전투'를 기억합니다.('전쟁기념관' 기념식) (1)
  6. 2010.11.10 우리군, 'UAE 파견'해도 되겠습니까? (1)
  7. 2010.11.08 UAE 파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4)
  8. 2010.11.05 G20 경호 및 대테러 작전은, 누규~ ? (1)
  9. 2010.11.03 외제 전투기와 국방,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5)
  10. 2010.11.03 외제 전투기와 국방,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11. 2010.11.01 [3화] '국방의학원', 이래서 필요합니다. (3)
  12. 2010.10.29 변신의 명수, 전투기 (2)
  13. 2010.10.18 K-2전차, 어려움을 극복하기 바랍니다.
  14. 2010.10.08 [4회] 특수부대의 임무(2) : 특수정찰
  15. 2010.10.07 6.25 전쟁 당시, 9.28수복의 숭고한 가치
  16. 2010.10.04 "위국헌신상" 제정 - 안중근 장군을 닮자! (1)
  17. 2010.10.04 해군 정비창에, 축구와 초콜릿의 나라 '가나'가 왔다?
  18. 2010.10.01 축하비행, 시가행진, 6.25참전용사들께 감사를! (1)
  19. 2010.09.27 역전의 용사, 한국 여자축구! 그리고 기관포.
  20. 2010.09.24 '미사일'이 '기관포'를 대체할 수 있을까? (1)
  21. 2010.09.18 '천안함 조사결과', 전쟁기념관에서 다시 보자. (2)
  22. 2010.09.17 '세기의 도박'- <인천상륙작전>을 바라본다. (2)
  23. 2010.09.14 천안함의 진실! 'CCTV도 보고 있었다...' (2)
  24. 2010.09.08 6.25 전사자의 귀향을 바랍니다. : '추석'에 즈음하여
  25. 2010.09.06 '첨단무기'와 '사진전'이 같이 있어요! : 코엑스(9.9~11)
  26. 2010.09.03 '태풍' 피해에도 역시, 우리 '군'이죠~(군 대민지원)
  27. 2010.09.01 비둘기에서 스마트폰까지! : 전쟁터 통신의 역사 (3)
  28. 2010.08.31 'G20과 아시아 안보'를 생각한다.(1) : 국제안보학술회의 (1)
  29. 2010.08.30 최강 독일에 맞선, 위대한 폴란드 기병대여! (3)
  30. 2010.08.27 지상의 왕자 -'전차'의 성장통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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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혈국방' 입니다. 오늘은 11월 23일 북한의 연평도 포격도발에 맞선던 우리 해병들의 모습을 보여드립니다. 


누구나... 우리군에 대해, 남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너무나 쉽습니다만, 정작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적은 것이 아쉬운 때입니다...


         11월25일 북한 연평도 포격도발로 우리해병대의 사격훈련이 순식간에 실전으로 전환되었다.


우리해병은 빗발치는 포탄 속에서, 전우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며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정비소대 조수원 일병".... 북한의 1차 피폭시 부상을 당해 구급차 후송을 대기하고 있었으나, 승차인원이 제한되어 자신보다는 전우를 위해 나중에 탑승 하였습니다. 심각한 조일병의 부상을 목격한 동료해병 4명(일병 조다형 외 3명)은 조일병을 들것에 싣고 포격을 피해가며 의무대로 후송, 조일병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조일병은, 반드시 그분들을 찾아 보답하겠노라고 말합니다.


"중화기 중대 김지용 상병"은...... 동료 해병들과 북한군의 포격간 마을주민을 대피시키고 잠시 소강상태가 된 사이 부대로 복귀, 곧 2차 폭격이 시작되었으나 파편으로 인해 목 파편상을 입었음에도 중대 관측담당관 김종선 상사가 김상병의 목을 지혈하며, "넌 반드시 내가 살린다."는 약속으로 안전해 보이는 건물외부 탄약고로 피신을 시켰습니다. 이후 몸을 추스린 김상병은 절친했던 동료해병의 인기척이 없음을 김종선 상사에게 보고했고, 김상사는 포격이 쏟아지는 건물로 되돌아가 피폭된 건물 속에 피신하고 있던 두명의 해병을 구해냈습니다.  


                           북한의 도발이후 연평도 도로에 뒹굴고 있는 북의 포탄 잔해물들 


"포7중대 상병 박진관"은 최초 1포대 포상이 피격당하자, 자기 한몸의 피신보다는 오로지 K-9자주포로 즉각 대응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근처 소화기를 사용하여 자주포 주변의 모든 화염을 완전히 소화시킨 후에야 안전한 곳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경상자로 분류되었다가 중상자로 재분류되어 수도통합병원으로 후송된 "공병소대 박봉현 일병"은 끝까지 전우와 싸우겠다며 군의관에게 고집을 피워, 심한 골절로 더이상 걷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서야 눈물을 머금고 뒤늦게 국군수도통합병원으로 후송되었다고 합니다.


                                         해병대 '불굴의 감투정신'을 발휘한 포7중대 임준영 상병 


철모가 녹아내리는 가운데에도 즉각 대응사격을 실시한 해병대원의 이야기를 아십니까?
"포7중대 임준영 상병"...평소처럼 교육훈련에 매진하던 중 갑작스런 북한군의 포격을 맞이하고서도 자신의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는 일념하에 중대장의 지시에 따라 무작정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고 합니다. 임상병 철모에 붙은 불길은, 그의 전투복과 철모턱끈을 타고내려와 화상을 입혔으나, 임상병은 뜨거움을 느낄 여유도 없이 북한군 포격에 응사하였습니다. 이후에도 임상병은 불에탄 철모를 쓰고 복구작업에 임하였습니다. 그는 해병대 감투정신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11월 25일 오전, 해병대 장병들이 인천에서 백령을 향해 승선하는 모습

해병대 정신과 전우애는 남다르다 더니, 빗말은 아닌가 봅니다.... 이 상황에, 너무 감성적인 이야기라고요?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현재 이같은 모습으로 대한민국을 위해 북한에 맞서고있는 우리해병 이야기가 듣고 싶습니다. 


                              북의 도발에 대응 준비를 하고있는 백령도 주둔 해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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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뒤로 돌아 공격한다.

 
 
G-20정상회담 때문에 자세히 보도되지는 않았지만, 지난 11월 10일 중요한 행사가 전쟁기념관에서 벌어졌다. 6.25전쟁 당시에 벌어진 가장 극적이었던 전투 중 하나였던 장진호(長津湖)전투 제60주년 기념행사였다. 함경남도의 장진호에서 함흥에 이르는 첩첩산중의 가도에서 벌어진 이 전투는 세계전투사에서 전설로 전해질 만큼 기념비적인 전투였다.

 
                                                장진호전투 60주년 기념식
 

전투는 1950년 10월 말부터 장진호일대로 진격하던 미 해병 제1사단이 험준한 산악 사이에 매복해 있던 약 10배 가까이 많은 중공군 제9병단이 포위당하면서 벌어졌다. 전투 중  영하 30도까지 떨어지는 혹한의 날씨가 연일 계속되었는데, 이런 악천후에서 미군이 전투를 치러본 것은 처음이었고 이후 이것은 미군 당국이 동계전투연구에 대대적으로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
 

                                                치열했던 장진호전투의 모습
 

백과사전처럼 전투결과만을 간략히 기술한 단편적인 내용에만 따르면 장진호전투를 중공군의 승리, 미군의 패배라고 기록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지리적 점령만을 승패의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비록 미군은 피해를 많이 입었지만 승자로 기록된 중공군의 피해는 참혹할 정도였다. 미군은 전사 393명, 부상 2,152명, 실종 76명의 피해를 입었지만 반면 중공군은 5만 여명이 전사상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포위당한 이들에게 찾아 와 스스로 항복한 중공군 포로들
 

흔히 1.4후퇴로 잘 알려진 중공군의 제3차 공세에 이처럼 처참하게 무너진 제9병단이 동원될 수 없었다. 때문에 이 전투로 인하여 미군이 함경도 일대에서 후퇴하게 되었으므로 전략적으로 중공군이 승리한 것은 맞는데, 중공군이 전투력을 상실할 만큼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기 때문에 전술적으로는 미군의 대승으로 언급되고 있다. 따라서 미군, 특히 이 전투의 주역이었던 미 해병 제1사단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장진호전투 당시의 미 해병 제1사단
 

미 해병 제1사단의 자랑이 된 이 전투에서 사단장이던 스미스(Oliver P. Smith) 소장(훗날 대장으로 예편)의 리더십은 상당히 유명한데, 오늘날도 그가 보여준 지휘능력은 상당한 반면교사가 된다.


                                          장진호 전투를 승리로 이끈 올리버 미 제1해병사단장
 

우선 올리버는 무리한 진격을 삼가 했다. 그는 아군이 대공세에 나섰던 1950년 10월 북진당시에 UN군부대 중 거의 유일하게 배후의 안전을 확보하고 난 후 사단을 이동시키는 신중함을 보였다. 비록 진출은 더딜 수밖에 없었지만 이러한 철저한 준비는 중공군의 출몰이후 대책 없이 무너져 내린 여타부대들과 달리 후퇴시기에도 미 해병 제1사단이 놀라운 전투력을 유지시켜 주었던 힘이 되었다.
 
                                     험로를 통하여 철수하는 미 제1해병사단 병사들
 

다음으로 그는 위기의 순간에도 전부를 구해내는 용기를 보였다. 애당초 안전한 철수가 불가능해 보이자 상부로부터 병력만이라도 항공편으로 철수시키라는 제의가 들어왔다. 하지만 스미스는 본대철수를 위해 비행장을 확보하려면 일부 병력이 적지에 낙오될 수 있고 또한  장비가 중공군에 넘어가면 나중에 더 큰 위험이 되므로 그는 4,300명의 부상자만 항공편으로 철수시키기로 결정하고 적과 교전하며 육로로 탈출하는 길을 택하였다.

 
                                           전우의 시신을 수습하여 탈출하는 모습
 

해병대는 하나이며 결코 좌절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전 예하장병에게 전하여 사기를 북돋은 후 전 병력과 장비는 물론 전사자의 시신까지 수거하여 적진을 돌파하여 탈출하였다. 당시 그가 부대원들에게 "우리는 철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적을 격멸하고 후방을 향하여 새롭게 공격하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훈시를 내렸고 이것은 전설이 되었다.
 

                                      기념식에 참석한 역전의 용사들 (사진-세계일보)
 

이처럼 신념 있는 지휘관의 용기와 이를 믿는 부대원들이 함께 이루어낸 장진호전투는 비록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전투였다. 따라서 말년에 접어든 많은 참전 용사들이 노구를 이끌고 행사에 방문하였을 만큼 장진호전투 참전용사들이 갖고 있는 자부심은 그야말로 대단하다. 가장 무섭고 어려웠던 시기에 보여주었던 그들의 진정한 용기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많은 교훈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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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항미사일에 관한 작은 이야기
 
 
 

제2차 대전 말에 등장하여 세상을 놀라게 한 대표적인 비밀무기 중에 이른바 독일의 유명한 V병기가 있다. 그중 독일 공군이 운용하였다던 V-1은 오늘날 대표적인 장거리 정밀 타격 무기인 순항미사일(Cruise Missile)의 원조로 손꼽는데, 특히 초기의 공중발사 순항미사일(ALCM)인 AGM-86C를 보면 V-1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다.
 

                        지금 봐도 그 모습이 어설프지 않은 V-1과 이를 요격하는 스핏화이어
 

V-1은 펄스제트(Pulse-Jet) 추진으로 무유도 비행을 하여 적진을 타격하는 무인자폭비행기에 가까운 형태였는데, 오늘날 순항미사일과 비교한다면 정밀타격능력, 비행능력 등에서 평면적으로 비교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당시 연합군을 공포로 몰아넣는데 결코 부족함이 없었다. 호되게 당한 영국도 여러 번의 실패 끝에 스핏화이어로 근접 요격하는 방법을 겨우 터득 하였을 정도였다.

 
                                     V-1은 사출기와 이륙난간을 이용하여 발사되었다
 

V-1은 미리 제작된 거대한 사출기를 겸한 이륙난간을 이용하여 발사하는 체계여서 사실 운용하는 입장에서 볼 때는 상당히 제약사항이 많았던 무기였다. 독일 공군 또한 V-1을 보다 쉽고 편리하게 발사가 가능하게끔 많은 시도를 하였으나 전쟁이 종결되어 이를 실현하지는 못하였다. 전후에 V-1을 노획한 미국은 비행기에 장착하여 공중발사실험을 하는 등, 좀 더 정밀한 타격무기로 V-1을 개량하기 위해 힘썼다.

 
                                     전후 노획한 V-1을 공중발사 실험하는 모습
 

이런 시험결과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이른바 외과수술폭격(Surgical Strike)의 표본이라 불리는 토마호크(Tomahawk)순항미사일이 나타난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자체개발한 현무3 순항미사일을 보유하고 있고 그 외에도 많은 군사강국들이 다양한 종류의 순항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는데 그 기술적 기반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독일의 V-1과 만나게 된다.

 
                                       오늘날 순항미사일의 대명사가 된 토마호크
 

그런데 독일이 오늘날 순항미사일의 개념에 대해서 생각하였던 것은 V-1 훨씬 이전이었다. 이미 독일은 제1차 대전에 당시에 다음 사진과 같은 공중투하폭탄을 개발하였다. 무인비행기에 폭탄을 장착하여 적진을 습격하는 단순한 형태의 비행체였는데 실전에 적용하였는지의 여부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부에서는 이를 최초의 순항 미사일로 볼 정도다.
 

                              제1차 대전 당시 프랑스 신문에 보도 된 독일의 무인 자폭기
 

물론 당시의 기술로 무인자폭기가 원격제어나 자동제어를 통한 정밀한 순항능력을 갖추기는 어려웠겠지만 이런 이론적 바탕이 있었기 때문에 독일은 이후 V-1을 개발 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최초의 순항미사일이라는 명예를 가지고 있는 V-1도 어느 날 갑자기 툭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이처럼 오래전부터 꾸준히 연구하여온 기술력이 집합된 결과였다.

 
                    태평양 전쟁에서 광기에 사로잡힌 이들의 인간순항미사일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런데 전사에는 마구잡이 순항미사일을 등장하였던 경우가 있었다. 바로 가미카제(神風)라고 불리던 일본의 자폭기다. 순전히 희생을 전제로 한 인간의 조종능력에 의존하여 목표까지 날아가는 단순한(?)구조였는데 연합군에게 많은 공포를 유발하였다. 사실 공포가 컸던 이유는 그 폭발력보다 광기에 사로잡힌 인간들의 모습 때문이었다.

 
                              지금도 반복되는 자폭테러를 보면 가미카제가 연상된다
 

그런데 이것을 단순히 과거의 일만으로 치부하기는 힘든 것 같다. 미사일이건 비행체이건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구 어디에서인가 계속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느덧 일상화 된 무차별 자폭 테러를 보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인간’이라는 격언이 맞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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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혈국방'입니다. ^^ 오늘은 특별히 파워블로거 '울프독'님께서 제공해주신 글을 포스팅합니다.



11월 10일 서울 용산 전쟁 기념관에서 60년전
장진호 전투를 기념하고  미 참전 용사들을 환영하는 행사가 있었다.

한미 양국의 많은 내빈들이 참석했었고 양국군
의장대와 군악대가 출연하였다.

이어서 열린 오찬에는  김태영 국방부 장관과
월터 샤프 주한 유엔군 사령관이 축사를 했다.


                                                         한[좌측] 미[우측] 해병대 의장대

 

       
                                                                참석한 한미 양국의 관중



                                                  평화 웨딩홀에서 열린 오찬


                                                                김 태영 국방 장관의 축배


                            김태영 장관의 축사에 이은 주한 유엔군 사령관 월터 샤프 대장의 축사




미군 뿐만 아니라 터키군 참전병들도 초청되었다.
우리는 형제국이라는 말에 진심으로 동감을 표한다.
1개 대대를 파병한  벨기에에서 오신 분들도 있었다.


                                                     위키페디아에 소개된 카페레타 일병.
                                                   Hector A.Caffereta.


장진호 전투에서 최다의 해병 영웅들이 배출되었다.
특히 중공군이 미 해병을 차단하고자 중간의 요지
덕동고개에서 닷새간 해병 1개 중대가 적 1개 연대를
상대로 벌인 위대한 방어전투는 장진호 전투의 크라이막스였다.

그중 중대 전방 진지에서  다른 해병 전우  네 명과 함께
적 60여명을 사살하고 진지를  고수한 헥터 A.카베레타 일병은 
미 최고 무공 훈장인 명예훈장을 받았다.


                        미 명예훈장을 목에 걸으시고 포즈를 취해 주시는 카베레타 할아버지.                  
                      지금은 플로리다에서 은거하고 계시다.


1921년생.
고교 졸업후 뉴욕주에서 세미 풋볼팀에서 뛰다가
해병에 입대해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장진호 전투에서 다른 세 명의 전우들과 적 1개 중대의
야간 공격에 맞섰다.
실명한 전우가 땅바닥을 더듬어서 찾아 건네주는 실탄 틀립들을
M1 소총에 연달아 장진해가며 기관총처럼 쏘아댔다.
전투내내 자신의 안전을 돌보지 않고 상체를 내놓고 적에게
정확한 사격을 퍼부었다.

육박한 적들이 던지는 수류탄을 M1총의 개머리 판으로 되 받아
치기도 했는데 던진 수류탄을 여러발 되 집어 던지다가
한 발이 폭발하여 손과 상체에 큰 부상을 입고 다음 해
의병 제대를 했다.

중공군은 네 명이 방어한 이 진지 앞에 60명의 사체를
남기고 후퇴 했다.



오찬동안 미군 장성들과 한국군 장성들이 연달아 찾아와서
최고의 경의를 표했다.

사관 생도들이 초대되어 할아버지 참전용사들을 돌보면서
행사를  같이 하던데 교육적으로 참 좋은 아이디어로 생각된다.


                                   방한한 장진호 참전용사 대표님이 답사후 건배했다.


생각해보니 60년전 오늘, 미 해병은 그 열흘전인 1950년
11월 1일  장진호 입구 황초령 남방 수동 전투에서 적
124사단을 격파하고 장진호반에 도착했지만 점점 증강하는
적의 병력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대책를 준비하던
때이다.

바야흐로 풍운 급박하던 60년전 오늘을 생각하는
할아버지들은 감회가 남다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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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11월 9일(화) 국방장관은 'UAE 파견'에 대하여 언론사 논,해설위원 대상 설명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오찬전 국방장관과 언론사 논,해설위원간 담소~ 

오신분들은 아래!^^


                                                   국방장관 인사말씀 하셨고요,

                                         국방부 대변인 사회, 정책기획관님 인사!

오찬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의 UAE파견 관련 설명이 있었습니다.

                                           발표하고 계신 분이 정책기획관님.^^


"우리국군의 UAE 파견은 국익 증진을 위한 것입니다. 
UAE에 우리군을 파견하는 것은 혜성처럼 나타난 사건이 아닙니다.
'06년 11월 15일 한-UAE는 이미 '군사협력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였고 당시 UAE는 우리측에 각종 군사협력을 요청하였으나, 당시 우리측은 파견문제는 추후 논의하는 선에서 협의한 바 있습니다.

이후, '10년 2월 UAE군 총참모장 방한으로 협력방안이 폭넓게 논의된 이후, 양국간 군사협력 관계가 급속히 발전, '10년 8월 우리 국방장관 UAE방문시에는 UAE 왕제자 등이 한국군의 UAE 파견 및 긴밀한 훈련 협력을 요청하여 지난 2개월간 현지 여건 조사와 파견 여부를 검토하였고, 검토 결과 기본적 주둔 여건이 매우 양호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우리부대가 파견되면 그 임무는, UAE군 특수전 부대 교육훈련 지원, 연합연습, 유사시 우리 국민 보호가 될 것입니다.


                                   파견 예정 지역 : 아부다비주 Al Ain(알 아인) 소재 특수전학교


우리군의 UAE 파견은, 헌법 제5조 '국제평화 유지 노력'의 일환이며, 제60조 2항에 따라 국회 동의과정을 거칠 예정에 있습니다. '06년 11월 양국간 체결한 '대한민국 정부와 아랍에미레이트연합국 정부간 군사협력에 관한 협정 제2조'와 '헌법 6조 1항'에 근거하고 있고요. 또한, 대통령령 '군인복무규율' 제4조에 '국군의 사명은...국제평화의 유지에 이바지하는 데 있음'에 근거하며, 대통령훈령 '국가안보전략지침'에 '국가안보목표를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유지 및 국제적 역량과 위상 제고'에 두는 것과 '국가안보전략 3대 기조' 중 '세계로 나가는 선진안보 추구'는 '대한민국의 위상을 제고하고 국익창출에 기여하도록 적극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우리군의 UAE 파견 효과는, 검토 결과 다음과 같습니다. 
1) 양국간 국방분야 협력으로 에너지 안보, 걸프지역 안정에 기여할 것입니다.
2) 중동지역 방산수출의 전진기지로 활용 가능하며, 한국군 예비역과 민간 전문인력 취업진출을 지원, 국가차원의 경제협력 확대(UAE 원전 수주 등)에 긍정적 역할을 할 것입니다.  
3) 중동지역 해외 전지 적응훈련 정례화 및 UAE의 첨단 대테러 장비와 훈련시설 활용 및 현지 주둔 선진국 군대와 임무수행 능력 배양 등 전투력 향상에도 기여할 것입니다. 

이어 국방부장관의 말씀이 이어졌습니다.




" 우리군은 UAE가 요구한다고 끌려 우리군을 파견하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전 UAE방문시 느낀 것인데 그곳은 매우 선진화되어 있고 국민들의 영어실력도 대단합니다. 사실, UAE는 14차례나 한국을 방문할 정도로 우리 군의 시스템, 방산 수출 등에 매우 관심이 많습니다. 이번 우리군의 UAE파견 계획은 북한의 위협 등 남북관계와는 거리가 있는 새로운 방향의 군 파견 계획입니다. 현재 우리 국민들의 '우려'와 '기대'가 공존하고 있음을 알고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번 파견계획은 헌법 등 규정에 근거한 것으로서 군 본연의 의무에 부합한다는 점을 이해해 주셨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UAE 파견, 국방부는 국가안보와 국익증진에 기여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 열혈국방 생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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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는 연말 UAE에 우리 특전부대를 파견할 계획입니다.

원전수주 댓가냐, 우리군을 팔아먹는다... 국익을 위해서는 반드시 군을 파견해야한다 등등등... 참 의견들이 분분하신데요,
 
국방부는 대한민국 방위의 의무가 있고, 또한 우리군을 누구보다 아끼는 조직입니다.

그럼, 오늘은 UAE파견에 대해 한말씀 올려보겠습니다.^^


              우리 국민들께서 아까워하시는(?^^) '육군 특전사' 비호부대의 수색정찰 훈련 모습  


우리정부는 UAE측 요청과 협의에 따라, 특전부대 130여명을 연내 국회 동의를 받아 금년말까지 UAE에 파견할 계획입니다.

 
   
'대한민국과 UAE' 도대체 어떤 관계인가요?



'09년, 양국간 원전수주 추진과 관련하여 UAE측은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걸맞은 군사협력 관계를 상호 긴밀히 협력해 나갈것을 제안한 바 있습니다.

'10년 2월에는 UAE군 총참모장이 방한, 협력방안을 폭 넓게 논의한 결과 방산‧군수 협력이 확대되고 가시적 성과가 달성되었습니다. 경계용 장비, 탄약, 차량, 장구류 등 방산물자 2,006만 달러어치의 수출‧계약을 약속하였고, 20미리 발칸, K-11 복합소총, 차륜형장갑차, KCTC (과학화전투훈련체계), 항만방어체계, 공동연구개발기구 설립 등 방산협력 방안 세부를 검토 하였으며, 고위급 상호 방문, 군사교육훈련, 정보교류 등 모든 군사협력분야로 발전시킬 것을 협의하였습니다.


                  5월 27일에는, 모하매드 UAE왕세자가 방한, 우리 특전사를 방문하였습니다.


10년 5월에는 UAE왕세자가 방한, 우리 특전사 방문시 한국군의 우수성을 높이 평가하면서 군사 교육 및 훈련 지원 등 세부협력 방안 발전을 요청하였습니다. 그 세부내용을 살펴보면, UAE는 한국군 예비역‧민간 전문인력의 UAE내 특정직위로의 취업을 제안, 1차로 연내 53개 직종 70명, 연간 185억 원의 일자리 창출을 추진할 것과 향후 2∼3년간 500∼700명의 인력 추가소요를 예상하면서 한국의 동원‧병역제도 경험의 전수를 희망하고 자료제공과 현지실사 협조를 제안한 바 있습니다.

10년 7월에는 UAE 각 군 및 총참모부 기능별 대표자들이 한국을 방문하여 전 분야에 대한 협력 가능성을 확인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럼, 과연 UAE는 한국을 어떻게 보고있을까요?


UAE는 한국이 많은 부분에서 자국의 안보환경과 유사하다고 보고있습니다.

군사 강대국과 이웃하고 있는 지정학적 환경, 짧은 전략적 종심으로 적의 기습공격에 취약하며 지역 요충지로서 테러 등 비군사적‧초국가적 위협에 취약한 것 등.
UAE는 한국군이 지속적 안보위협 속에서도 강군으로 성장하고 있음(세계적 수준의 연합작전능력, 첨단무기 자체 개발, 선진화 경험, 국방운영 기법 등) 을 높이 평가하며, 우리의 군사능력을 UAE와 함께 나누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10.8월, 우리 국방장관이 UAE를 방문했을 때에는, UAE 왕세자와 총참모장이 한국군 최정예부대인 특전부대의 UAE 파견과 긴밀한 훈련협력을 강력히 요청하였습니다.

현재 UAE에는 미국, 프랑스, 호주, 영국 등 10개국 군대 3,000여 명이 주둔하고 있으며, 미국 등 선진국들은 국익지원 차원에서 자국군을 주둔시키고 UAE군의 교육훈련을 지원하고 연합훈련을 실시하고 있다고 합니다.....<내일 계속!>

내일은,  UAE 현지상황 및 우리군을 파견했을 때의 효과에 대해 계속 이야기 나누시겠습니다.  이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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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안남았지요?  
11월 11~12일 있을 'G20 서울 정상회의' 로 온나라가 흥분 속에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완벽한 준비, 찬반논란, 각종회의, 연설 등등등... 다각도로 관심들이 많으시지요. 

국제적으로 그 중요성을 더해가고 있는 'G20 summit'!   이렇게 중요한 일에는 늘 우리군이 함께한다는 사실, 다들 아시는지요?


그렇다면, 우리군은 과연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 한번 알아볼까요? 


먼저, 우리군 '수도방위사령부' 입니다.  6월부터 대테러 시범식 교육을 하고 있다는 사실, 다들 모르고 계셨지요?

 

                        6월 1일 국제행사의 안전보장을 위해 육군 수도방위사령부가 대테러
                        훈련을 실시. 헌병 특임대 대원들이 테러범에게 점거당한 건물로 
                        돌입 중 한컷!  


레펠 기술로 미끄러지듯 벽을 타고 내려오는헌병 특수임무대 대원들, 무수한 폭음과 총성속에 순식간에 테러범들을 제압, 인질들을 무사히 건물에서 구출합니다.


육군수도방위사령부는 6월 1일 G20 정상회의의 안전 보장을 위해 ‘대테러 시범식 교육’을 실시하였답니다.

정영환(중령) 특공대대장은 “천안함 사태 이후 장병들이 현존하는 적 위협을 강하게 인식하고 훈련에 매진하고 있다”고 하시는군요. 


이뿐일까요?  지난 8월 2일 공군 15혼비도 경호유관기관 세미나를 개최, G20 정상회의 경호작전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  아래!




공군15혼성비행단은 7월 29일 서울공항 일대에서 민·군·경 합동세미나를 개최하고 경호·경비작전에 대한 발전방안을 모색하였습니다.

이 자리에는 방포사·육군특전사·55사단·317기무부대·기무사와 공항 인근 경찰서 등 경호유관기관 관계관 50여 명이 함께하였답니다.

지난 제4차 G20 정상회의 개최지 캐나다 토론토의 피어슨공항 행사 영상을 토대로, 서울공항 경호 시뮬레이션을 시현, 경호방침에 대한 의견도 나누고, 금속탐지기(MD), 사각지역 검측장비, 검측헬기, 로보캠 등 첨단 장비들도 선보였지요.


나라 '안'에서만이 아닙니다.
  국제적인 군사협력 노력도 기울이고 있지요. 지난 10월 25일에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 26개국 군 최고위급들이 참가한 제13차 군 고위급 회의(CHOD : Chiefs Of Defense)가 있었습니다.


          국방부 합참의장이 공동기자회견에서 로버트 윌라드 미 태평양사령관과 함께 회의 성과를
          설명하였습니다.


한민구 합참의장은 서울하얏트호텔에서 열린 공동기자회견에서  “이번 회의 참가국들은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책임을 분담해야 함을 공감하였고, 지역의 안정과 세계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공조체계와 군사협력 강화에 적극 동참할 것을 약속했다”고 하였습니다.

회의 기간 중 한미일 다자회담에서는 천안함 피격사건, 북한의 핵ㆍ미사일 위협 등에 대한 공동의 인식을 재확인하고,북한 위협에 대한 긴밀한 공조에 공감하기도 하였지요.  

이번 제13차 군 고위급 회의는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행사인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세계 주요국 군 수뇌부에게 한국의 발전된 모습을 선보일 수 있는 기회였다고 하네요.


한편, '육군특수전사령부' 10월 26일 북한의 비대칭 위협 증가와 같은 미래 특수전 환경 변화를 전망하고 이에 대한 다양한 대응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특수전 전투발전 세미나’를 개최,  특수전 그룹의 대테러와 평화유지군(PKO), 재난구조 역할 확대에 따라 신속기동군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주장 등이 전개되었습니다.

11사단도!  대테러훈련을 하였습니다.

이날 훈련에는 화학대와 헌병 특수임무대를 지원해 화학물질로 오염된 현장을 제독하고 경찰특공대와 함께 인질극을 벌이는 테러범을 제압하는 임무를 맡아 군의 테러 대응 능력을 선보이기도 하였습니다.


         대테러 훈련에서 11사단 헌병대원들이 진압작전 중 부상한 테러분자를 구급차로 이송 중.


         2010화랑훈련에 참가한 육군36사단 헌병대 특수임무대원들이 11월 2일 원주공항 횡성터미널에
         침투한 테러분자를 제압하기 위해 건물 안으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11월 1일부터는 강원 전역에서 ‘2010 화랑훈련’이 펼쳐지고 있는 가운데 각급 부대들이 실전 같은 야외기동훈련(FTX:Field Training Exercise)을 전개, 민·관·군·경 통합방위태세를 확립하고 있답니다.


'해군1함대사령부'
도 이날 육·공군, 해경 등 유관기관과 합동으로 해상 대테러 훈련을 강도 높게 실시했고요. 동해 군항에서 열린 합동훈련에는 1함대를 비롯해 육군23사단·공군18전투비행단·해군6항공전단·해군특수전여단(UDT) 등 군부대와 동해지방해양경찰청·동해지방항만청 등 유관기관이 참가하였답니다.


훈련은 불순 세력이 군항 위병소에 폭탄테러를 가하자 대테러 초동조치부대가 출동하면서 시작됐습니다.  이어 사상자를 긴급 구조하고 동시에 현장지휘본부를 설치, 유관부대(기관)에 상황을 전파하고 도주로 차단훈련도 실시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쭈욱~~~~~


어떠세요,  우리군 믿음직스럽지 않습니까? ^^  G20 정상회의 개최, 이상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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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를 건너 재탄생한 전투기들 [ 下 ]
 
 
                             타향에서 출현한 후계자들
 
 
그런데 한국전쟁 휴전당시에 남북 중 하나를 선택하여 돌아가거나 전향하는 것을 거부하고 인도나 브라질 같은 제3국으로 망명한 많은 전쟁 포로들이 있었던 것처럼,  패전 직후 미국이나 소련이 아닌 중립지역의 국가들로 망명하였던 독일의 엔지니어들이 있었다. 이들은 망명국으로부터 많은 환대를 받으며 독일에서 연구하였던 프로젝트를 계속 수행하였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미국으로 옮겨 온 독일의 V-2 팀
 

때문에 미소의 제1세대 제트전투기들이 등장하였을 때 그 동안 항공산업이 특별히 앞서 있거나 기술적 기반이 충분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던 국가들에서 F-86, MiG-15와 맞먹는 제트기들이 생산되기도 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전쟁당시 중립국이었던 스웨덴의 J-29 Tunnan전투기였다.

 
                    제1세대 전투기로 홀연히 등장한 스웨덴의 J-29 Tunnan
                    독일의 귤이 회수를 건너 오렌지가 된 부인 할 수 없는 증거다
 

그 모양은 오히려 오리지날 베이스로 생각하던 Ta-183의 재현이 아닌가 할 정도로 똑 같았다.  스웨덴이 독자적으로 개발하여 어느 날 뚝딱하고 만들었다고는 절대로 상상 할 수 없을 만큼 닮아 있다.  부인 할 수 없지만 이것은 귤이 발트해라는 회수를 건너 오렌지가 된 경우였다.

 
                영락없이 J-29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Ta-183의 상상도(上)와
                전후 소련에서 노획물을 이용하여 카피 개발한 Ta-183의 희귀한 모습
                독일의 귤이 전후 소련 오렌지의 기반이 되었음을 입증하는 증거다
 

그런데 귤이 강을 건너는 정도가 아니고 대양을 건넌 경우가 있었는데 바로 대서양을, 그것도 밤낯은 물론 계절도 정반대인 곳까지 멀리 이동하여 오렌지가 되었던 경우가 있었다. 남미의 아르헨티나는 전쟁 중 미국의 압력으로 외형적으로는 중립을 유지하였지만 전쟁기간 내내 상당히 친독적인 정책을 유지하였던 국가였다.

 
         친독적이었던 아르헨티나에는 전쟁 후 독일의 많은 전범들이 도피해 있었다
            ( 아르헨티나에서 모사드에 의해 납치 체포 된 아이히만의 재판모습 )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많은 독일 엔지니어들이 아르헨티나로 망명하였고 SS나 게쉬타포처럼 처벌을 두려워한 많은 전범들도 이 대열에 합류 하였다. 그중에는 포커울프의 유명한 엔지니어로 불세출의 전투기인 Fw-190와 Ta-152시리즈를 제작 하였던 탕크(Kurt W. Tank 1898~1983)도 있었다.
 

                                도살새 FW-190의 아버지 쿠르드 탕크
 

그는 1947년 아르헨티나 정부의 지원 하에 코르도바에 옛 포커울프 직원들을 규합하여 종전으로 중단된 제트전투기 연구를 재개하였다. 탕크는 Ta-183를 프로토타입으로 하여 MiG-15에도 채택된 영국의 롤스로이스 Nene II엔진을 장착한 제트전투기를 만들었는데 비행에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아르헨티나 군부와 자리를 함께 하고 있는 탕크
 

이 전투기는 비록 실전에 데뷔한 기록이 없지만 나타난 성능만으로도 F-86이나 MiG-15와 맞먹는 성능을 보여 주었다.  이로써 아르헨티나는 미국, 소련 등과 더불어 초기 제트전투기 개발의 주역으로 당당히 자리매김 할 수 있었다.  그 전투기의 이름이 Pulqui II였다.  귤이 또 하나의 오렌지가 되었던 것이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진화한 또 하나의 오렌지인 Pulqui II
 

회수를 건너온 귤이 퇴보하여 탱자가 될지 아니면 오렌지가 될 지는 결국은 받아들이는 당사자가 하기 나름이고 또한 이러한 사례는 결코 남의 일만이라 할 수는 없다. 비단 무기뿐만 아니라 국가 방위와 관련한 모든 분야가 우리나라에 와서는 오렌지가 될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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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를 건너 재탄생한 전투기들 [ 下 ]
 
 
                             타향에서 출현한 후계자들
 
 
그런데 한국전쟁 휴전당시에 남북 중 하나를 선택하여 돌아가거나 전향하는 것을 거부하고 인도나 브라질 같은 제3국으로 망명한 많은 전쟁 포로들이 있었던 것처럼,  패전 직후 미국이나 소련이 아닌 중립지역의 국가들로 망명하였던 독일의 엔지니어들이 있었다. 이들은 망명국으로부터 많은 환대를 받으며 독일에서 연구하였던 프로젝트를 계속 수행하였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미국으로 옮겨 온 독일의 V-2 팀
 

때문에 미소의 제1세대 제트전투기들이 등장하였을 때 그 동안 항공산업이 특별히 앞서 있거나 기술적 기반이 충분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던 국가들에서 F-86, MiG-15와 맞먹는 제트기들이 생산되기도 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전쟁당시 중립국이었던 스웨덴의 J-29 Tunnan전투기였다.

 
                    제1세대 전투기로 홀연히 등장한 스웨덴의 J-29 Tunnan
                    독일의 귤이 회수를 건너 오렌지가 된 부인 할 수 없는 증거다
 

그 모양은 오히려 오리지날 베이스로 생각하던 Ta-183의 재현이 아닌가 할 정도로 똑 같았다.  스웨덴이 독자적으로 개발하여 어느 날 뚝딱하고 만들었다고는 절대로 상상 할 수 없을 만큼 닮아 있다.  부인 할 수 없지만 이것은 귤이 발트해라는 회수를 건너 오렌지가 된 경우였다.

 
                영락없이 J-29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Ta-183의 상상도(上)와
                전후 소련에서 노획물을 이용하여 카피 개발한 Ta-183의 희귀한 모습
                독일의 귤이 전후 소련 오렌지의 기반이 되었음을 입증하는 증거다
 

그런데 귤이 강을 건너는 정도가 아니고 대양을 건넌 경우가 있었는데 바로 대서양을, 그것도 밤낯은 물론 계절도 정반대인 곳까지 멀리 이동하여 오렌지가 되었던 경우가 있었다. 남미의 아르헨티나는 전쟁 중 미국의 압력으로 외형적으로는 중립을 유지하였지만 전쟁기간 내내 상당히 친독적인 정책을 유지하였던 국가였다.

 
         친독적이었던 아르헨티나에는 전쟁 후 독일의 많은 전범들이 도피해 있었다
            ( 아르헨티나에서 모사드에 의해 납치 체포 된 아이히만의 재판모습 )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많은 독일 엔지니어들이 아르헨티나로 망명하였고 SS나 게쉬타포처럼 처벌을 두려워한 많은 전범들도 이 대열에 합류 하였다. 그중에는 포커울프의 유명한 엔지니어로 불세출의 전투기인 Fw-190와 Ta-152시리즈를 제작 하였던 탕크(Kurt W. Tank 1898~1983)도 있었다.
 

                                도살새 FW-190의 아버지 쿠르드 탕크
 

그는 1947년 아르헨티나 정부의 지원 하에 코르도바에 옛 포커울프 직원들을 규합하여 종전으로 중단된 제트전투기 연구를 재개하였다. 탕크는 Ta-183를 프로토타입으로 하여 MiG-15에도 채택된 영국의 롤스로이스 Nene II엔진을 장착한 제트전투기를 만들었는데 비행에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아르헨티나 군부와 자리를 함께 하고 있는 탕크
 

이 전투기는 비록 실전에 데뷔한 기록이 없지만 나타난 성능만으로도 F-86이나 MiG-15와 맞먹는 성능을 보여 주었다.  이로써 아르헨티나는 미국, 소련 등과 더불어 초기 제트전투기 개발의 주역으로 당당히 자리매김 할 수 있었다.  그 전투기의 이름이 Pulqui II였다.  귤이 또 하나의 오렌지가 되었던 것이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진화한 또 하나의 오렌지인 Pulqui II
 

회수를 건너온 귤이 퇴보하여 탱자가 될지 아니면 오렌지가 될 지는 결국은 받아들이는 당사자가 하기 나름이고 또한 이러한 사례는 결코 남의 일만이라 할 수는 없다. 비단 무기뿐만 아니라 국가 방위와 관련한 모든 분야가 우리나라에 와서는 오렌지가 될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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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22(금)에 포스팅된 '국방의학원은 왜 필요한가요?' 중 '군의관의 96%가 임상경험이 부족한 단기 군의관
      으로 오진과 의료사고 발생' 부분은 '군 의료의 서비스, 시설, 장비 등에 관한 종합적 불만'으로 수정하였습니다.

      당초 내용은 '군병원의 의료 수준을 높이기 위한 한가지 방법으로 장기 군의관 확보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
      국방의학원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는 점을 쉽게 설명하고자 하는 취지였으나

      본래 의도와는 다르게 '단기 군의관의 미흡한 점으로 인해 군내 우수 의료인력 확보가 필요하다'는 것으로 오해
      할 소지가 있어 이를 수정하여 게재하였습니다.

      성실하게 군복무 중인 단기군의관들에게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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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를 건너 재탄생한 전투기들 [ 上 ]
 
                                              
                                            승자의 권리
 
 
"귤이 회수를 건너가면 탱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어떤 생물이나 물건이라도 환경이 바뀌면 이에 맞춰 변화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격언인데, 탱자가 귤보다 맛이 없는지는 모르겠으나 본고장을 떠나면 아무래도 품질이 나빠진다는 의미가 내포 되어 있는 말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본고장을 떠나면 그 모습이 변하기 마련이다
                                            (김치를 탱자로 만들어 버린 기무치)
 
 

그런데 반드시 그런 것이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속담이기도 하다. 귤이 강을 건너면 탱자가 될 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반대로 오렌지가 될 수도 있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말이 있듯이 오리지널보다 나중에 나온 파생형이 좀 더 업그레이드 될 가능성도 충분히 많기 때문이다.

 
                              비보이는 한국으로 건너 와서 탱자가 아니라 오렌지가 되었다

 
특히, 무기의 경우가 그러한데 90퍼센트 이상은 시간이 갈수록 오리지널보다 훨씬 성능이 우수한 놈들이 나온다. 그 이유는 최신 무기가 기존 것보다는 성능이 좋아야 이길 수 있다는 단순한 논리 때문이다. 처음에는 상대편 것이 좋다면 비록 카피를 하여 우선 탱자라도 만들겠지만 개발에 관한 노하우가 쌓이면 오렌지를 만들 수 있는 것이 바로 무기 체계다.

                       독일의 보병휴대용 대전차무기인 팬저파우스트를 카피하여 탄생한 RPG-7은 
                  지금도 사용 중인 베스트셀러다.

 

1945년, 연합군이 독일 영토내로 진입하고 제3제국의 멸망이 가시화 되자 품질 좋은 무기를 개발하였던 독일의 수많은 엔지니어들이 살길을 찾아서 갈 길을 가게 되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자의든, 타의든 어쩔 수 없이 미국이나 소련으로 갈 길을 정하였고, 이들이 적국의 엔지니어지만 적극 스카우트하는데 미국과 소련 또한 주저하지 않았다.


                             전쟁말기 앞선 무기체계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였다
                                      (노르트란트의 V-1 제조시설을 점령한 미군)
 

특히 이들 중 미국이나 소련의 목표가 되었던 엔지니어들은 독일이 독보적으로 앞서있던 로켓과 제트기관련 종사자들이었다. 이들은 독일에서 연구하다가 종전으로 중단되었던 프로젝트를 새롭게 자리잡은 미국과 소련에서 재개하였고, 냉전이 본격 개시되자 최신무기를 앞다투어 만들어 내었다.


                             V-2 개발의 중추로 전후 미국으로 건너가 그 명성을 꽃 피운 폰 브라운
 

이런 이유 때문에 로켓이나 제트전투기 분야에서 새롭게 등장한 동서 양진영의 무기들은 유사하게 닮아있다. 당사자들은 독창적으로 개발 하였다고 강변 할지 모르겠지만 기본적인 구조뿐만 아니라 외양까지도 흡사 할 정도였다. 특히 이들 중 백미인 F-86과 MiG-15는 형제지간이라고 불러도 별다른 이의를 제기 하지 못할 만큼 외양이나 성능이 막상막하였다.


                      독일의 패전으로 제작이 중단 된 차세대 제트전투기의 목업인 P.1101

 
F-86과 MiG-15은 패전으로 중단 되었던 메셔슈미트의 P.1101프로젝트와 포커울프가 심혈을 기울여 제작하였던 Ta-183의 아류작들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유사하다. 후퇴익 주익과 동체에 삽입시킨 인테이크와 노즐은 제1세대 제트기들의 기본모양이 되었다. 따라서 P.1101은 F-86에 Ta-183은 MiG-15의 등장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다.

 
                      냉전시기 제1세대 전투기였던 F-86과 MiG-15는 독일의 오렌지들이었다.


 
이처럼 제2차 대전 후에 곧바로 다가온 온 냉전으로 말미암아 이후 미국과 소련의 무기가 세계시장을 순식간 양분하게 되면서 본의 아니게 독일의 귤은 전쟁 당시의 적들에 의해 오렌지로 변화하였다. 그런데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미국과 소련 외에 의외의 장소에서 오렌지가 되었던 경우도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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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부터 무적의 독일전차는 없었다.
 



흔히 독일 축구국가대표팀을 '전차군단'이라 언급하는 것처럼 제2차 대전 당시에 독일이 만든 전차는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이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는데, 바로 독일의 전차들이 처음부터 뛰어난 성능을 보유하였다고 생각하는 점이다. 즉, 독일은 전쟁 내내 뛰어난 전차를 생산, 보유하였고 이 때문에 무적 독일기갑부대 신화가 쓰여 졌다고 믿고 있는 이들이 많다.


                                제2차 대전 독일군하면 무적의 기갑부대가 뚜렷이 각인되어 있다
 

지금까지도 명성이 자자한 5호전차 팬터(Panther), 6호전차 티거(Tiger), 쾨히니스티거 (Königstiger) 같은 고성능의 전차들은 이러한 상식을 확고하게 해주는 증거들로 거론된다. 또한 지금도 그렇고 당시에도 세계 최고였던 독일의 기계공업 수준이 이러한 믿음을 확고하게 뒷받침하여 준다. 하지만 각론으로 들어가 살펴보면 결코 그런 것은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당대 최강으로 평가받는 6호전차 쾨히니스티거
 

우선 전쟁 초반기부터 독일이 팬터, 티거같은 중전차로 유럽대륙을 마구 휘젓고 다니면서 전격전(Blitzkrieg)의 신화를 만든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때는 이들이 전선에 등장하기 전이었다. 따라서 이들 전차들은 결코 신화를 만든 주역이 아니었다. 독일의 극성기를 가져온 전격전은 유능한 장군들이 구사한 작전이라는 소프트웨어를 기반으로 얻은 승리였지 결코 하드웨어 때문이 아니었다.

 
                                    장난감 같은 1호 전차가 전격전의 신화를 만들었다
 

독일의 최대팽창기였던 1941년도까지 전선을 휘 젖고 다닌 것은 1~4호전차들이었는데 이들의 성능은 당시 연합군의 전차에 비해 결코 좋지 않았다. 먼저 1, 2호전차는 전차라고 부르기에 민망한 수준이었고, 개발사상이 훌륭하여 현대전차의 시작이라 평가되는 3, 4호전차 또한 1:1로 프랑스나 소련의 중전차들과 맞서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더구나 전쟁 내내 독일의 전차는 수량으로 상대를 압도한 적도 없었다.
 

                               3,4호전차는 훌륭하였지만 상대를 입도할 정도는 아니었다.
 

앞서 언급한 팬터나 티거 같은 전차는 전쟁 중반이후에 등장하였는데 이때는 독일이 쇠퇴기에 접어들어 방어에 급급하던 시기였다. 다시 말해 이들은 전격전이라는 신화가 창조된 1941년 이전에는 아직 전선에 데뷔도 못하였다. 오히려 전선에서 부딪힌 T-34나 KV처럼 성능이 좋은 소련전차에 놀라 개발 도중에 있던 이들이 완벽하지 못한 상태에서 서둘러 전선에 등장한 측면이 있을 정도였다.

 
               전쟁 초기에 독일전차의 성능이 미흡하여 체코제 전차들 대거 사용하였을 정도였다.
 
뒤늦게 개발된 만큼 이들은 목표로 하였던 기본적 성능은 좋았지만 가격이 비쌌으며 생산성도 좋지 못하였다. 또한 구조가 너무 복잡하여 유지보수에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서둘러 전선에 투입되다보니 기계적 신뢰수준도 떨어져 처음에는 야전에서 가동률이 급격히 저하되었다. 이들은 보급이나 유지보수 등 비전투외적인 요인 때문에 많은 수가 전장에서 비전투 손실로 유기되었을 정도였다.

 
                   독일 중전차들은 유지 보수가 상당히 어려웠다 (야전에서 정비 중인 티거)
 

비록 이후 이들은 두고두고 이야기 될 만큼 훌륭한 전투력을 발휘하였는데, 여기에 전쟁 초반기의 독일군 기갑부대의 전과가 자연스럽게 오버랩되면서 독일 전차는 좋다는 막연한 인식이 에스컬레이트 되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독일군의 신화는 뛰어난 전차들을 앞세워 이룬 결과가 아니었고 후반기에 등장한 전차들도 너무 서둘러 투입된 관계로 처음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독일의 기술력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최근 공개된 레오파드2A7)
 
시행착오와 실전결과를 바탕으로 독일의 전차들은 천하무적의 위치까지 올라갔지만 이때는 전쟁말기였고 전쟁의 흐름을 바꾸지도 못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습득한 엄청난 노하우는 아직까지도 독일의 전차가 최고의 위치를 고수하도록 만든 가장 큰 자산이다. 냉전시대에 서방세계 최고의 전차였던 레오파드(Leopard)나 현재 탑클라스로 평가받는 레오파드2(Leopard 2)는 바로 이러한 밑거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K-2가 만난의 어려움을 극복하기를 기대합니다.
 

이러한 독일의 사례는 좋은 무기가 온갖 실패와 어려움을 극복하고 얻은 결과임을 증명하는 반면교사다. 최근 K-2 흑표전차가 파워팩 문제로 제식화에 애를 먹고 있다는 뉴스는 뼈를 깎는 아픔을 딛고서야 명품이 탄생할 수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문제를 극복하여야 진정한 명품은 탄생할 수 있고 그것은 역사가 가르쳐 준다.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는 관계당국에 격려의 말을 전하며 분발을 촉구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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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도 모르게 귀신처럼 왔다간다!




 

               <4-01: 정찰임무는 모든 부대의 기본이지만, 특수부대는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갑니다.>

 

 


어느 단위의 부대이건 간에 부대가 움직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정찰이지요.

그래서 사단에 수색대대란 것이 있고, 군단에는 특공연대가 있죠.

 

그런데 정찰임무가 국가적인 중요성을 지니게 되면 이것은 '특수정찰'에 해당됩니다.

'특수정찰'이라고 하면 전군 단위에서 요구되는 첩보와 제원을 수집하기 위해

특수부대가 실시하는 활동을 말합니다.

 

그래서 아군의 본진에서 몇 킬로미터 내지는

몇 십 킬로미터 이내에서 작전하는 정찰부대와는 달리

특수정찰임무는 수백 킬로미터의 거리를 적진 깊숙이 침투합니다.

 

이렇게 깊숙이 들어가려면 단지 행군만으로는 안 되겠죠?

HALO(고고도 강하 저고도 산개)/HAHO(고고도 강하 고고도 산개) 같은

특출난 기술을 연마해야 합니다.




            <4-02: 깊숙히 들어가는 만큼 특수부대는 고공강하와 같은 전문기술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거리만이 구별기준이라고 한다면

장거리 정찰과 '특수정찰'은 별 차이가 없습니다.

 

보통의 정찰부대는 정찰에서 그 임무가 끝이지만

'특수정찰'이라면 정찰뿐만 아니라 필요하다면

독립적인 직접타격임무수행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대원들의 전문성과 함께

팀단위의 독립작전능력이 필수입니다.

 

예를 들어보죠. 1991년 제1차 걸프전 당시

이라크 군의 스커드 미사일을 탐지하기 위해 영국 육군 SAS(공수특전단)와

미 육군 델타포스가 이라크의 영토 내에 깊숙이 침투했었죠.

 

이들의 주요임무는 스커드 미사일이 어디 있는지 사령부로 알려서

공군 전투기들이 정밀하게 폭격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죠.

하지만 폭격이 여의치 않을 경우

이들은 스스로 미사일을 파괴하는 임무를 수행해야 했습니다.

이쯤되야 '특수정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4-03: 1991년 사막의폭풍 작전 당시 다국적군 특수부대는 스커드사냥임무에 나섭니다.

             '특수정찰'의 전형적인 예이지요.>

 



'특수정찰' 임무에 나선 제대는 보통 적과의 교전이나 적으로부터의 탐지를 회피하면서

작전지역의 환경, 표적제원, 지역평가, 폭격피해평가, 정보감지장치의 설치 및 회수,

그리고 인간정보 및 신호정보의 지원작전 등을 실시한답니다.

 

말이 너무 복잡하죠?

일단 정찰에 나선 특수부대원들은 람보가 아닙니다.

이들은 귀신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들이 왔는지 전혀 알 수 없게 몰래 잠입해서 정보를 수집해서는

귀신처럼 빠져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성공적인 정찰일수록 적이 왔다갔는지 모르게 해야 합니다.

어떤 흔적도 남기지 말아야 하기에,

심지어는 대자연의 부르심을 받아 ‘큰일’을 보고도

그냥 땅에 묻는 것이 아니라 비닐봉투에 받아다가 처분해야 합니다.

적군의 군견이 신선한 인분을 찾아내면 대략 곤란하니까요. -_-;;



 

               <4-04: 걸프전 당시 스커드사냥에 나섰던 SAS팀을 다룬 영화의 한 장면입니다.

                비닐봉투를 들고 동료를 부르는 애절한 장면이죠. ㅠㅠ>



 

'특수정찰'은 전쟁의 전략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기에

실은 인간정보의 수집활동과 밀접합니다.

그렇다고 특수정찰대원이 첩보원은 아닙니다.

 

1949년의 제네바 협약에 의하면 대원들이 군복을 입고 있는 한

이들은 군인으로 취급받지 간첩으로 취급받지 않습니다.




         <4-05: '특수정찰'은 외롭고 힘든 임무입니다. 그런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전사를 만들기 위해
          
전 세계의 군대는 노력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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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켜 낸 숭고한 가치
(9.28수복)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인 1950년 9월 28일 중앙청(지금은 철거된 옛 조선총독부관저)에 태극기가 게양됨으로써 서울 도심의 공방전은 종결되었고 지금까지 격렬하게 저항하던 적은 전의를 상실하고 북으로 패주하였다.  이로써 수도 서울은 6월 28일 적에게 피탈된 지 정확히 3개월 만에 수복되었다.

 
                                1954년 9월28일 4주년 행사 당시의 태극기게양 재현모습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지난 9월 28일 대대적인 경축행사가 서울중심부 일원에서 벌어졌다.  특히 이번에는 10월 1일 국군의 날 기념식도 앞당겨 함께 개최되어 다채로운 각종 행사가 열렸다.  특히 서울 도심에서는 여간해서 보기 힘든 각종 군용기들의 시범 비행이 선보여 많은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하여 주었다.
 

                                      지난 9월 28일에 열린 서울수복 60주년 행사

 
이처럼 9.28수복은 엄청난 의의가 있는 사건인데, 6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 막상 그 뜻을 제대로 아는 이들이 드문 것 같다.  9.28수복의 의의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일상(日常)으로의 회귀라 표현할 수 있다.  산소가 부족한 곳에 가서야 그 고마움을 뼈저리게 느끼듯 당연하게 대하여 오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9.28수복은 똑똑히 알려준다.

 
                             너무 시간이 흘러서인지 9.28수복의 진정한 의의를 잊고 있다

 
일상이라 표현하였지만 사실 그것은 자유를 뜻한다.  서울이 피탈된 후 적 치하에 남겨진 150만의 서울 시민들은 곧바로 무시무시한 폭력과 공포를 겪으며 극심한 통제와 탄압을 받았다.  그것은 남북 간의 이념과 체제차이에 따른 갈등을 뛰어넘어 힘을 가지고 있는 자가 한 없이 약한 이들을 상대로 자행한 무자비한 테러라 단언 할 수 있을 정도다.  다음은 이에 대한 생생한 증언들이다.


                                      남로당의 환영을 받으며 서울로 진입하는 북한군 전차부대
                         이후 점령 북한군과 남로당은 서울을 공포의 공간으로 만들어버렸다
 

곳곳에서 ‘반동’으로 몰아 즉석 처형하는 인민재판이 열렸다. 김원일 씨는 “민심이 너무 나빠져 인민재판이 점령 3일 만에 중단됐다”고 말했으나, 이현희 교수와 이원경 씨는 “7, 8월에도 계속됐다”고 회고했다. 인민재판은 잔인성 못지않게 일관성 없는 기준으로 반발을 샀다. (2010년 9월 27일 동아일보)

 
                         시민들을 인민재판한 후 총살을 위해 집행장으로 끌고 가는 모습
 

한번 내몰린 적들은 도망가기에 바빴고 이를 본 시민들은 기쁨의 눈물로 국군을 맞았다고 노병은 기억합니다. <인터뷰> 강동구(예비역 준위) : "그 때 왜 이제 오느냐 울면서 울며불며 그랬는데 우리도 같이 따라 울었어요. 울면서 전투한 거 에요." (2010년 9월 28일 KBS 뉴스)

 
                              서울 점령기간 동안 벌어진 정치 선동행사 (사진-동아일보)
 

숨어서 지낸 3개월이 마치 30년 같았다는 이야기도 흔하게 찾아 볼 수 있을 정도다.  그만큼 무차별 학살과 탄압이 자행되던 이른바 ‘인공(人共)통치 3개월’이라 언급되는 이 시기는 우리에게 씻기 힘든 커다란 상처를 안겨주었고 이것은 이후 전쟁 그 자체보다 더 크게 남북 간을 심리적으로 멀리 갈라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인공치하 3개월간의 폭압 통치는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남겨 주었고
                         이것은 남북 간을 심리적으로 멀어지게 만든 결정적 이유가 되었다
 

인공통치 3개월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알려주는 결정적인 증거가 석 달 뒤에 있었던 1.4후퇴다
.  서울이 공산군에게 재점령 될 위기에 놓였을 때 혹한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서울시민들은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 피난길에 올랐다.  중공군이 폐허가 된 도시를 재점령 했을 때 서울은 거동이 불편한 일부 노약자들만 남아있던 텅 빈 도시였다.
 

                                혹한도 자유를 찾아 떠나는 서울시민들을 막지 못하였다
                                지난 인공통치기간 동안의 악몽 때문이었다 (사진-LIFE)
 
몇 십 년 만의 혹한이라는 1950년의 추위도 자유라는 일상을 또다시 포기할 수 없었던 서울시민들의 탈출을 가로막을 수 없었다.  그만큼 1950년 여름에 있었던 북한의 서울 점령 3개월은 너무나 잔혹한 기억이었고 그러한 공포로부터 일상을 회복시켜준 9.28수복의 의의는 실로 대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9.28수복은 숭고한 가치를 지켜낸 역사적인 사건이다 (사진-뉴스엔)
 

바로 폭력과 공포로부터의 해방을 이끈 9.28수복을 경축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6.25전쟁에서 수많은 피와 눈물을 바쳐가며 끝까지 우리가 지키고자 하였던 지고지순한 가치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러한 가치는 앞으로도 소중히 지켜야 할 유산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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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국헌신 군인본분" - 안중근장군 유묵 >

 

지난 9월 30일, 국방부 대회의실에서는 '제1회 위국헌신상 수상식'있었습니다.

'위국헌신상'이란, 안중근 장군 순국 100주년을 맞아 "강한 군대와 일류 국방경영, 국민의 국방을 위해 묵묵히 본분을 다하고 있는 군 모범장병을 선발 포상"하기 위한 상으로, 그간 각 군별로는 '모범장병 포상제도'가 있었으나 국방부 차원의 모범장병 포상제도로는 이 상이 처음입니다.


                        < 상자 해군5전단 김진황 중령 : 해난구조전문가 >


상의
명칭은, 안중근 장군이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기 직전에 쓴 유묵,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에서 따왔으며
, ‘충성’ ‘용기’ ‘책임’ ‘헌신’ ‘창의’의 5대 덕목으로 구분하여 시상하기로 하였습니다.

수상은, 나라를 지키는 데 기여한 중령 이하 전 장병과 4급 이하 군무원, 국방분야 발전에 기여한 군 관련 연구소의 선임연구원 이하 연구원을 대상으로 하며,
국방부는 '위국헌신상 포상시행 지침'을 제정하여 9월 3일 제1회 포상 심사를 완료, 9월 30일 첫 시상을 하였습니다. 제1회 위국헌신상 수상대상자 각군별 추천을 받았으나 최종 수상자(총 11명) 선정과정에서는 군이나 계급별 안배없이 오직 수상할 만한 자격이 있는지 여부만을 따져 상의 공정성과 권위를 높였습니다.


                               < 수상자 공군6탐색구조전대 강용수 준위 >

                                  < 한미연합군사령부 에스카미아 중령 >


김태영 국방부장관은 제1회 위국헌신상 시상식에서 “위국헌신의 정신은 군인의 당연한 본분이자 오늘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있게 한 최고의 가치였다”면서 “위국헌신상은 우리 장병들로 하여금 군 복무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선진강군 육성에 진력하도록 만드는 밑바탕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 자랑스런 제1회 '위국헌신상' 수상자들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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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에 해군 정비창에 눈에 띄는 손님 10여 명이 한꺼번에 방문을 했습니다. 다음날부터 휴식시간이나 식사시간 틈틈이 검은 피부를 가진 군인들을 마주치게 되고, 어색한 Good Morning! 인사를 나누고서도 이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무슨 목적으로 머나먼 아침의 나라에까지 와 있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답니다.



                                                            <이순신 장군 유적지 순례>


누구일까요. 이 사람들은?

이들은 바로 아프리카 서부의 가나에서 온 해군들이랍니다. 곧 한국에서 가나로 양도될 고속정을 인수하여 운용할 사람들인데, 10주간의 정비와 운용교육을 받기 위해서 미리 한국을 방문한 것이지요.

 
가나하면 무엇이 생각나세요? 가나 초콜릿? 가나에서 초콜릿의 원료인 카카오가 생산되긴 하지만 가나초콜릿은 가나에서 만든 게 아니랍니다. 하지만 가나사람들은 초콜릿 덕분에 한국에서 가나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 때문에 가나초콜릿 만드는 회사에 무척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네요.



 


저는 가나하면 축구가 생각납니다. 올해 월드컵 바로 직전에 우리나라와 평가전을 치렀는데 우리가 아쉽게 2 :1로 패배를 했었지요. 아마 축구광팬들께서는 에시엔 등 가나의 스타플레이어들의 이름을 기억하실 겁니다.





가나는 국토면적이 우리 남한과 거의 비슷하고 구 영연방에 속했다가 1957년에 독립한 나라입니다. 국민소득이 800달러 남짓하여 아직은 빈국에 속하지만 풍부한 지하자원과 영미권 국가들의 지원에 힘입어 앞으로 무한한 발전가능성을 가진 나라이기도 하지요.

 
바다와 해안의 지하자원을 지키고, 한 때 빈번하게 문제가 되기도 했던 밀수행위를 근절하기 위해 2008년도에 우리나라에 함정양도를 요청했고, 금년 초에 우리 정부에서 이를 수락함으로써 곧 우리 바다를 지키던 고속정이 아프리카 바다로 둥지를 옮겨서 임무를 수행하게 된 것입니다.


고속정 참수리호 아시죠? 연평해전에서 활약했던 우리 해군의 날쌘돌이...





이들은 바로 우리나라가 곧 가나측에 무상으로 양도할 예정인 고속정 참수리 237호에 대한 정비 및 운용교육을 받기 위해 한국에 온 가나 군인들입니다.  학생장인 티오 해군 대위를 비롯하여 앞으로 우리 측이 양도할 고속정을 책임지고 운용할 사람들이지요. 

이들을 맞기 위해 해군정비창은 한참동안 부산했습니다. 그들이 묵을 숙소준비부터 교육장소, 교육준비, 식사문제까지 준비해야할 사항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으니까요. 해군 정비창의 교육원 직원들을 중심으로 손님맞이 준비를 하는데 거의 한달이 걸렸답니다. 

7월 중순에 마침내 아프리카의 귀중한 손님들이 인천공항에 도착했고 이들은 KTX를 타고 진해로 왔습니다. 엄청 빠른 고속열차에 생각에 빼앗겼는지 몇 사람은 미처 내려야 할 구포역에서 꾸물거리다 문이 닫히는 바람에 내리지 못하고 부산까지 곧장 가버리는 바람에 버스를 몰고 부산역까지 가서 데려오는 해프닝도 있었답니다.

도착한 다음날부터 빡빡한 일정에 따라 교육이 진행되었습니다. 짧은 기간에 필요한 내용을 전부 전달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므로 교육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한 여름의 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들 교육에 몰입했습니다.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의사소통문제였습니다. 영어로 모든 강의를 진행할 정도의 강사는 구하기 어려웠기에 통역을 한 명 고용했지만 모든 의사소통을 한 사람에게 의존할 수 만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만국 공통어 ‘바디 랭귀지’에 모두들 능숙해질 수 밖에 없었다나요!



                                                <장비 및 운용 교육 현장>



처음에는 서로간의 문화차이로 인하여 재미있는 일도 있었습니다. 도착한 다음 날부터 가나사람들이 점심식사를 거르는 것을 보고 아마도 돈이 없어서 그런가보다 지례 짐작하고 교관들을 비롯한 정비창 직원들이 십시일반으로 얼마씩 걷어서 점심값을 마련해 주었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가나는 적도 근처에 있는 매우 더운 나라라서 오전부터 오후 2시까지만 일한답니다. 그래서 별도로 점심시간이 없고 간단한 티 정도로 점심은 때우고 저녁식사를 맛있게 먹는다네요. 

그걸 오해하고서 돈을 걷어 건네주려는 직원들에게 자신들을 무시하는 것 아니냐며 서운해 하기도 했다지만, 결국 인정 많은 한국 사람들의 인심과 문화를 이해하고 나서는 크게 감동을 받았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교육은 8주 동안의 정비교육과 2주간의 운용교육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기관, 전기, 무장, 전자 등 분야별 실습위주로 진행이 되었는데, 통역을 통하여 교육이 진행되어야 하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교관들이 학생들보다 많았다고 합니다.

총 124개 과목을 이수했다고 하니 이를 단기간에 습득한 가나학생들도 대단하지만 이를 준비한 해군정비창 교관들의 고생도 짐작할 만 하지 않습니까?    


                                                                  <삼성테크윈 방문>


교육뿐만이 아닙니다. 빡빡한 일정 속에서도 몇 차례 주변에 있는 이순신장군의 승전 유적지를 방문하여 우리 역사에 대한 인식을 높여주기도 했고, 몇몇 방산업체를 방문하여 대한민국의 기술력을 그들에게 각인시켜 주기도 했답니다. 

또한 가나학생들과 교관들을 1 : 1로 맺어주어 휴일에도 직접 쇼핑 등 개인적인 일상을 돌봐주거나 교관들의 집으로 직접 초청해서 돼지삼겹살과 전통 한국식 가정백반을 대접하며 정을 나누기도 했답니다.



                                    <교관 가정에서 가나 해군들 초청, 한국음식 대접>


가나 해군에서 가장 붙임성이 좋은 멘사 상사는 한국 교관들과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들의 한명이었습니다. 그에게 한국에서의 10주 동안 가장 인상에 남는 일이 무었이었냐고 물어보았습더니 한국 교관들과과의 축구시합이었다고 하네요.

 
가나 측이 1명이 모자라는 바람에 최성규 제독(해군 정비창장)이 배신을 때리고 가나선수로 뛰었는데 결과는 축구에서 가장 재미있다는 3 : 2 스코어로 가나해군이 승리했답니다. 정말 한마음 한뜻으로 뭉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입을 모았으며 특히 경기 후에 마신 한국의 전통주인 막걸리 맛은 고국에 가서도 잊지 못할 거라나요.



                                          <해군 교관 대 가나 해군 축구시합>


교육이 한창 진행 중이던 지난 7월 말경에는 주한 가나대사가 직접 진해로 내려와서 가나측에 양도될 고속정도 둘러보고 교육과정을 참관하였으며, 교육에 고생하는 가나 해군에게 양념 치킨도 사주고 같이 식사하며 격려하였답니다. 가나 학생들과 면담을 마친 가나대사는 군수사령관을 만난 자리에서 정비창측의 교육에 대한 열의와 가나학생들에 대한 마음에서 우러난 배려에 거듭 거듭 감사를 표했다고 합니다. 



                                                   <주한 가나대사 양도대상 고속정 실사>


이번 정비교육 실무적인 책임을 담당했던 해군정비창 연수원의 김규동 서기관은 이번 일을 통하여 군사 및 민간외교의 위력과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며 준비나 교육과정은 힘들었지만 정말 보람이 컸다고 말합니다. 가나 교육생들에게 큰 형님처럼 모든 걸 챙겨주었던 김서기관은 마음에서 우러난 작은 친절이 정말로 우리나라를 세계인에게 선진국가로 각인시키고 나아가 우리나라의 국격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첫걸음임을 느꼈으며, 다음에 또 이런 기회가 있다면 더 열심히 해보겠다는 각오를 보여주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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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9월 14일 우리 해군의 요람 진해에서 드디어 고속정을 공식적으로 가나측에 넘겨주는 행사가 드디어 거행되었습니다. 이제 10월 초 고속정과 도자들을 배에 싣고 가나로 출발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국방부의 이선철 전력자원관리실장님과 가나의 멋쟁이 클라크 퀘시에 대사님께서 양도약정서에 서명하셨는데, 뒤에 도열해 있는 해군 분들의 얼굴에 딸을 시집보내는 아빠의 마음처럼 서운함이 언뜻 스쳐 지나가는 것같이 보이네요. 반대로 가나 해군들의 얼굴에는 예쁜 신부를 맞이한 신랑의 기쁨이 우러나오는 것처럼 보이는 건 저만의 느낌일까요? 

  지금까지는 아프리카 지역 국가와의 군사 교류 및 방산협력은 미미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금번 국방부의 가나에 대한 불용장비 지원을 통해 가나뿐만 아니라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우호 증진, 군사교류 및 방산협력 관계 강화의 첫 모델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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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광화문광장입니다. 
9월28일 화요일 해군 627대대 등의 헬기선도비행, 특전사 1여단의 공중탈출, 
공군 11비행단(F-15K), 17비행단(F-4E), 1비행단(T-50) 등의 축하비행이 이어졌습니다.

(그들은 왜 '비행?!'을 저질렀을까?? ㅋㅋ)  



                                                
                       광화문광장 시민분들과 함께 '서울수복과 국군의 날'을 축하하였습니다. 




                                              '와~ 시민분들 정말 많이 오셨네~'
                                  우리군 의장대입니다. 헌병을 앞세워 시가행진을 준비중이고요,


"둥둥둥둥!!!!   둥  두둥~ 두둥!" 우렁차게 울려퍼지는 우리 육군의 북소리와 함께, '10. 9. 28(화요일) 경복궁 홍례문 앞 광장에서는 '6.25전쟁 60년 서울수복기념 국군의 날 행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번에도  '열혈국방'이 직접 현장취재하였습니다!




행사장에는 4,500여 명이 참석하였는데요, 국내/외 참전용사(국내 : 700명, 해외 300명), 21개 참전국 정부대표, 각급 단체인사, 주한외교사절 등이 함께 하셨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입장,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께 묵념과...




이어, 참전21개국과 UN 기 게양, 우리군이 참여한 '김운미무용단' 70명의 기념공연 등이 있었습니다.





이번엔 무공수훈자(이등중사 강귀선, 일등중사 김두석 등 4명)와 유공부대(육군 5사단, 해군 교육사령부, 공군 20전투비행단 등 10개 부대)에 대한 대통령 포상입니다. 무엇보다 감격스러웠던 것은, 수상자 포상시 거침없는 거수경례로 전우에 대한 존경과 축하를 보내신 참석자분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수상자들에 대한 존경과 축하를 담아.'


이어, 이명박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 ....6.25에 참전하여 서울수복과 승리를 이끌어낸 우리국군은, 더욱 국민들의 신뢰와 사랑을 얻을 수 있도록 '군인정신'을 새롭게 해야하며, 오늘날 대한민국이 세계에 우뚝 설 수 있도록 기꺼이 6.25전쟁에 참전해 주신 해외참전용사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 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기념식이 끝나고...







                                참석 어머니 단체와 어린이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았던 인순이 공연


기념식 후, 인순이 공연 등을 보시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계신, 이날의 주인공 6.25참전 용사와 유가족분들...  생사를 넘나들며, 민족상잔의 6.25전쟁터에서 대한민국의 자유 수호를 위해 온몸을 내던지셨던 이 분들....  이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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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전의 용사, 기관포에 관한 이야기 [ 下 ]
 
 
                                  
                           최신식만으로 극복하기 힘든 것

 
 
항공모함 탑재용 전투기로 개발하였으나 그 어마어마한 성능에 놀라 자존심 강한 미 공군도 군말 없이 주력기로 채택한 괴물이 있었으니, 바로 도깨비 F-4 팬텀이었다. 이놈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속도, 고도, 항속거리, 작전반경 등의 비행능력은 물론이거니와 제2차 대전 당시 맹활약한 B-17 중폭격기와 맞먹는 엄청난 폭장량을 자랑하는 당대 최고의 전투기였다.
 

                                    허술해 보이는 팬텀의 모습. 하지만 전설이 된다
 

그런데 팬텀은 적외선유도방식의 AIM-9 사이드와인더 4발과 레이더유도방식의 중거리 유도탄 AIM-7 스패로우 4발로 중무장하면서 전통적인 공대공무장인 기관포를 과감히 제거한 최초의 전투기였다. 팬텀은 바로 미사일 만능주의를 맹신하였던 시대사상에 맞추어 탄생한 미국의 자만심이었고 그만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강의 전투기로 자타가 공인하였다.

 
                                        스패로우 공대공 유도탄을 발사하는 팬텀
 

이러한 팬텀은 그동안 야심만만하게 제작하였던 미 공군의 전투기들이 월남전에서 그리 신통치 않은 성과를 보이자 필승카드로서 당당히 참전하게 되었다. 그런데 수치상으로는 당대 최고의 성능을 지니고 있었고 미사일로만 중무장한 기관포 없는 최초의 전투기라는 최첨단을 대표하는 명성과는 달리 공대공전투에서 처음부터 애를 먹었다.

 
                              월남전초기 미 공군의 주력전투기였던 F-105 썬더치프
 

BVR(비가시거리 전투)의 장점을 살리지 못하는, '육안으로 적기를 식별한 후 교전에 임하라'는 미 정부의 정치적 교전규칙 때문에 발생한 일이기도 하였지만, 선회력이 좋은 월맹의 MiG기들과 가시권 내에서 공대공 대결을 하였을 때 막상 기관포가 없는 전투기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적에게 꼬리를 물리지 않도록 줄기차게 회피기동을 하는 것 밖에는 없었다.

 
                       예상과 달리 기관포가 없던 팬텀이 근접전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미사일을 사용할 수 없을 만큼 근접하여 선회전으로 치고 올라오는 MiG기를 뻔히 보면서 팬텀기들은 어찌 할 바를 몰랐다. 만약 기관포가 장착되었다면 과감히 독파이팅으로 치고 나갔을텐데 주렁주렁 달려있는 미사일은 근접전에서는 사용할 수가 없었고 오히려 기동전의 방해물로 존재하였다. 즉 넘치는 자신감과는 달리 실전에서는 많은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미국은 뼈저리게 실감하였다.

 
                                        베트남에서 호적수였던 F-4E 와 MiG-17
 

결국 적기를 공격할 방법이 없어 속수무책으로 쳐다만 보아야만 한다는 일선의 불평이 계속되자 M-61A1 기관포포드를 장착한 F-4D가 출현하기에 이르렀고 F-4E에 와서는 기관포가 공대공 고정무장으로 내장되었다. 보이지 않는 자존심 경쟁을 벌이던 해군의 F-4B는 끝까지 기관포를 장착하지 않았지만 해군 조종사들이 기관포가 장착된 F8U를 매우 선호하였다는 증언만 보더라도 미사일로만 공대공전투를 치루기에는 분명히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
 

                       해군 조종사들이 선호하였던 F8U, 흔히 Final Gun Fighter로 불렸다
 

1960년대와 비교할 때 지금의 공대공미사일은 비약적인 성능 향상을 이루었다. 공대공미사일의 대명사인 사이드와인더만 하더라도 초기형의 경우는 적의 배기구를 정면으로 마주 본 12시 방향에서만 그것도 유도가 가능한 충분한 거리를 떼어놓고야 사용할 수 있는 병기였으나 최신의 AIM-9X는 그야말로 전후좌우를 가리지 않는 전천후 미사일로 불릴 만큼 비약적인 성능개량이 이루어졌을 정도다.
 

                                                F/A-18에 장착된 M-61A1 벌컨포
 

이러한 자신감 때문인지 앞글에서 소개한 것처럼 F-35의 등장과 더불어 그동안 코피를 흘린 후 까먹고 있던 미사일 만능주의가 다시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전투기 등장 이래 계속하여 고정무장의 두목으로 군림하던 기관포는 미사일로 결코 대체할 수 없는 그 나름대로의 효과가 있기 때문에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을 것이다.

 
                     궁여지책으로 SUU-16/A 포드를 개발하여 기관포를 장착한 팬텀의 모습 
                       미사일 만능주의는 환상이었고 이런 현실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기관포는 감히 미사일과 비교하기 힘든 어쩌면 가장 단순한 무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하늘의 제왕이라 평가되는 F-22를 비롯한 최신예 전투기 대부분이 처음부터 기관포를 장착한 것만 보아도 쉽게 기관포를 대체할 만한 것도 없는 것 같다. 그런데 고려청자처럼 무기뿐만 아니라 아무리 첨단의 기술이 등장하여도 결코 극복하기 힘든 그런 경우가 세상사에는 많다. 최신 유행을 쫓는 것도 좋지만 한번 정도는 뒤를 돌아보는 여유가 항상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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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전의 용사, 기관포에 관한 이야기 [ 上 ]
 
 

                          미사일 만능주의 ?
 


미국의 전투기 획득사업인 JSF(Joint Strike Fighter-3군 합동타격기)에 따라 개발 중인 F-35 Lightning II의 경우 기체가 작은 관계로 고정무장인 기관포에 관한 상반된 소식이 종종 들려오는데, 당연히 기관포가 장착될 것이라는 설부터 과감히 기관포를 생략하고 오로지 미사일로만 공대공무장을 할 것이다 하는 등의 여러 이야기가 분분할 정도다.
 

                                공중급유 시험 중인 공군형 F-35A 실험기
 

미국이 만든 전투기에 장착되는 대표적 기관포라면 M-61A1인데, 일설에 따르면 JSF에는 소형인 마우저 27mm기관포나 25mm벌컨포 등이 장착될 가능이 크다고 한다. 그런데 최신예 전투기인 F-22도 기관포를 장착하였을 만큼 전통적으로 전투기의 고정무장으로 기관포를 고수하고 있는 미 공군의 경우를 보면 JSF의 여러 변형기종 중 적어도 공군형인 F-35A에는 기관포가 장착될 가능성이 큰 것 같다.
 

                                           마우저 27mm기관포
 

다만 확실하게 추론하여 볼 수 있는 것은 기관포 장착문제로 많은 말이 오고간다는 사실 자체가 역으로 생각하면 애당초 JSF 구상 시에 기관포를 고려하고 있지는 않았다는 반증이다. 장차 대부분의 공중전은 상대방을 보지 않고 공대공미사일로만 벌어지는 BVR(Beyond-Visual-Range 가시권 밖)전투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이러한 구상은 일견 타당한 측면도 있다.
 

       해병대형인 F-35B의 구조도인데 수직이착륙장치 탑재로 기관포 수납공간이 없다
 

BVR과 이를 뒷받침하는 고성능의 레이더 및 조기경보기술 그리고 미사일의 획기적인 성능 향상은 더 이상 기관포로 적기와 근접하여 교전하는 상황이 없도록 바꾸었다. 그런데도 미 공군이 기관포를 고집하는 이유는 과거의 경험 때문이다. 사실 미사일 만능주의는 최근에 나온 현상은 아니고 이미 오래전 이야기의 리바이벌에 불과하다.
 

                        중거리 공대공미사일인 AIM-120 AMRAAM의 발사모습
 

최초의 공대공 미사일이며 열 추적 유도탄의 대명사이기도 한 AIM-9 사이드와인더가 실전에 첫 선을 보인 것은 1958년이다. 첨예한 냉전시기에 대만해협을 사이에 두고 발생한 대만군과 중공군 간의 충돌 당시 대만공군의 F-86은 미국이 개발하여 비밀리에 실전에 배치한 사이드와인더를 장착하고 있었다.
 

                          초기 사이드와인더인 AIM-9A 형을 장착하고 있는 F9F
 

반면 중공군의 MiG-15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독파이팅(Dog Fighting-근접 공중전)만을 할 수 있는 무장만 갖추고 있었으며, 당연히 미국 측이 제공한 사이드와인더의 존재를 몰랐다. 그 이전에 벌어졌던 형식대로 공대공 전투는 개시되었고 후위가 상대에게 물린 전투기는 급강하 기동 등을 통하여 상대의 사정권을 벗어나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공대공미사일을 장착한 대만군의 F-86
 

중공군의 MiG-15 조종사들이 F-86의 기관포 사정권을 벗어났다고 안심해하는 순간 F-86이 발사한 사이드와인더들이 순식간 다가와 후위를 강타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피격 된 수많은 중공의 MiG기들은 차례차례 대만해협으로 추락하였다. 공대공미사일의 대명사가 된 사이드와인더의 성공적인 데뷔 모습이었다.

 
            1958년에 있었던 대만해협전투에서 공대공미사일이 찬란하게 데뷔하였다
 

이런 일방적인 결과는 소련에게는 충격을, 미국에게는 자만심을 가지게 만들어 버렸는데 특히 미국의 자만심은 차후의 공대공전투전술을 미사일을 기반으로 하는 체계로 급속히 변화시켰다. 공대공미사일이 이제 하늘의 주역으로 등장하였음은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과도하게 맹신하는 것은 너무 성급한 결단이었다. 미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코피가 터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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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9월 13일(월), 국방부는 <천안함 피격사건 조사결과 보고서>의 발간과 내용을 기자들 앞에 공개하였다.

(9.14일 포스팅 한 '천안함의 진실! 'CCTV도 보고 있었다...(열혈국방)'을 보시라.)






하지만, "그래도 난 못믿겠다!" 라고 하시는 분들이 계신것 같다.
그렇다면, 이제 서울 '전쟁기념관'내에 9월 15일~11월 말까지 일반에 공개될, 특별전시 '천안함 피격사건 관련 자료들'을 직접 보러가자.  먼저 '열혈국방'과 함께.





                                             전쟁기념관은, 국방부 맞은 편에 위치

                                                        
                               전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최첨단 수중유도무기'이다.  









                         천안함 피격사건 관련 자료 전시는, '6.25 특별사진전' 안으로 가시면 있다. 










               
북한의 공격임을 증명하는 결정적 증거물인 '어뢰추진동력장치'가 전시되어 있고,







                                              조사중 검출된 화약과 파편들이 있다.






                       
                            
                                               시뮬레이션도 직접 보실 수 있으며,






                                 천안함 피격사건 전개과정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국방부에게 '천안함 피격사건'은 아픔이며, 치욕이다. 조사의 투명성과 신뢰성 제고를 위해 구성한 천안함 민,군 합동조사단의 조사결과 보고서와 전쟁기념관내 전시되는 증거물들이 국민의 아픈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드릴 수 있었으면 한다. 또한,


이번 천안함 사태를 거울삼아 다시는 북한의 기습 도발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우리 국민의 확고한 안보의식과 안보문제에는 어떠한 개인,집단적 이해도 개입될 수 없음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우리군은 다시, 국민여러분의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계속하여 노력할 것이다.


                                     
                                                   전쟁기념관내 전시중인 우리 군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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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5일, 그제 였습니다.  제60주년 '인천상륙작전 기념식과 그 재현행사'를 다녀왔습니다.
우선, 해상에서 있었던 재현행사가 궁금하시죠?
그래서, 열혈국방이 대신 가서 동영상을 녹화해 왔습니다. 보시죠!  충성!







                                                   인천상륙작전 재연은 맥아더 장군과 함께!

                                          재연행사의 마무리는 역시 맥아더의 멋진 퇴장! ㅋㅋㅋ 


자~ 이제 그럼, 인천상륙작전 재현행사 바로 전에 있었던 '6.25 60주년 기념식'을 만나보시죠!^^


                       행사시작 20분전. 월미도입니다. 무더운 햇볕을 맞으며 기념식장으로 가는 길



                                     인천 월미도 앞바다에 준비된 기념식장 전경이에요.



                                     '인천상륙작전 해병대참전용사'분들 오셨구요,



          따가운 햇볕, 합참의장님,연합사령관님,국외 참전용사 대표님(빨간 옷) 등이 함께하셨어요.


                         세계 곳곳에서 UN군 참전용사들과 그 가족 분들도 오셨습니다.


기념식 사회자의 개식사로 기념식이 시작되자, UN기와 참전국 국기들 입장합니다.


                                        

이어 UN군 참전용사 대표분들께서 입장하셨고요.


                         각국의 UN군 참전용사들이 우리 해병대 전차를 타고 식장으로 입장!




이어, 국방부장관의 대통령 축사 대독과 주요인사들의 영상 메시지 상영이 진행되었습니다.


                                              국방부장관의 대통령 축사 대독


기념식이 끝나고, 월미도 앞 해상에서 인천상륙작전 재연이 있은 후(앞쪽에 동영상!), 국내외 참전용사분들을 모시고 참전용사 격려연이 진행되었어요. 

격려연 행사장 한쪽에서는 해군의 '바다사진전'과 '인천상륙작전 전승기념 미술대전'이 동시에 진행되었는데요,



 


                    귀여우신(? ㅋㅋ) 우리 해군의장대 사진도 눈에띄네요.  "찰칵!"
 


이렇게, 인천상륙작전 행사장면만을 보신다면.....정말 멋지지 않습니까? 


하지만, 행사에 참석하신 6.25 참전 한국군과 UN군 용사들의 모습 속에서, 열혈국방은.. 잊혀지지 않은 전쟁의 아픔과 승리의 자부심이 교차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              

                                                                          
                                                                                 <열혈국방 생각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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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도대체 그 진실이 뭐야??..'  아직도 많은 분들께서 궁금해 하시는데요, 그래서...

'10. 9.13(월) 국방부는 '천안함 피격사건 합동조사결과 보고서'를 발간하고, 그 내용을 공개하였습니다.




우리 열방님들이 이해하시기 쉽도록, 조사결과 보고서가 이렇게 '만화본'으로도 발간되었구요, (
http://www.cheonan46.go.kr/96  클릭하세요! ) 







영어를 좋아하시는 열방님들을 위해~(어떠세요? 술~술 읽히시지 않습니까? ㅎㅎㅎ.. 믿거나 말거나죠~ㅋㅋㅋ), 국제사회의 이해를 돕기위해, 위와같이 '영문본'으로도 조사결과 보고서가 나왔습니다.  (
http://www.cheonan46.go.kr/attachment/cfile2.uf@126B00264C8E149D327A7E.pdf  클릭! 하시면, '영문본' 을 보실수 있어요. ^^) 

그렇다면, '한글본'도 당연~히 있겠지요? 
여러분들께서 그토록 궁금해하시는 진실! 진실!!  조사결과 보고서의 일부를 공개하는 바입니다. 아래! (위의 '영문본' 내용을 한글본으로 풀어봅니다.) 



 
    - CCTV가 밝힌다, 천안함의 진실!- 




아시는 바와 같이, 천안함 내부에는 11개소에 CCTV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그 CCTV 분석을 위해 설치업체와 협조하여 , 먼저 '통제 컴퓨터'의 위치(사관실), 카메라 내/외부 설치 위치와 수량 등을 확인하였고요, 침몰원인 파악에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 현문과 가스터빈실 녹화자료 중 사건 당일 21:00 이후의 CCTV영상을 우선 복원한다는 계획 하에, 4월 24일 함수 인양시 'CCTV 통제 컴퓨터'를 최우선으로 채증하여 하드디스크 복원 전문업체에 의뢰한 바 있습니다. 


CCTV 복원절차는 아래와 같았고요,


 

CCTV 복원 결과, 천안함 CCTV는 11개소 카메라 각각의 시계와 통제 컴퓨터상의 시계에서 발생하는 일반적 기간 오차가 있고 촬영범위 내의 움직임이 감지될 경우에만 촬영하며, 촬영영상은 1분후 저장되는 특성과 생존자 진술을 토대로 분석한 결과, 최종 촬영된 CCTV는 가스터빈실 CCTV로서 21:21경(CCTV상 21:17:03) 작동을 멈춘 것으로 추정하였습니다.

또한, 가스터빈실과 디젤기관실의 모습, 안전당직자 순찰 모습, 후타실에서 체력단련 중인 모습이 확인되었으며, 승조원들의 복장과 표정, 함정의 안정적 운항상태 등을 볼 때, 천안함은 사건 발생 직전까지 좌초 등의 비상상황 없이 정상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다가 갑작스런 폭발로 선체가 절단되어 침몰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이렇듯, 국방부는 민,군합동조사단 조사위원들과 함께 '10. 9.13(월) 국방부 브리핑룸에서 언론 앞에 '천안함 피격사건 조사결과 보고서'의 내용을 공개한 바 있습니다.


                                                                 
                       '10.9.13(월) 국방부와 민군합동조사단 발표를 진지하게 청취하시는 기자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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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향에는 유효기간이 없다
 
 
 
다음의 기사는 조금 오래전의 내용인데,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어 그 일부를 간략히 소개한다.

   ( 2004년 8월 24일 연합뉴스 )
    제1차 세계대전 때 사망한 오스트리아 군인의 시신 3구가 지난 20일 이탈리아 알프스 산맥의 빙하에서 거의 완벽
    하게 보존된 채 발견됐다 ... (중략) ... 역사학자들은 이들이 1918년 9월 3일 전투 중에 수류탄에 의해 사망한 것
    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날 이탈리아군과 호주군(*주 - 기자가 오스트리아를 오스트레일리아로 착각하여 번역한
    듯
) 은 '대전투'라고 불리는 교전을 벌였으며 오스트리아군이 11명의 사망자를 내고 승리했다. 이들의 장례식은  
    24일 오후 치러지며 사망한 지 86년 만에 지역 군인 공동묘지에 묻히게 된다
.
 

                  제1차 대전 당시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간에 있었던 알프스 전선의 극적인 모습
 

이 기사를 보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세월이 너무 많이 흘러 그 유족들이라도 찾을 수 있을 지가 궁금하였다. 아마도 망자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보존되어 있다면 직계 또는 방계 유족들을 찾았을 가능성도 있었겠지만, 설사 유족들을 찾았어도 거의 90년이 다 되었기 때문에 망자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생존 후손들은 없을 것이다.

 
                                        알프스 고산 준령을 행군하는 오스트리아군

                      이런 곳까지 올라와 싸울 생각을 하는 것은 아마 인간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더욱 가슴 깊게 느껴지던 것은 국가가 잊지 않고 전사자의 마지막 길을 살펴 주었다는 것이다. 사망자들은 국가의 부름을 받아 최선을 다해 전투에 임하였고 그러한 그들의 노고를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국가가 잊지 않고 챙겨주었다는 것은 한마디로 국가가 부를 때 국민이 나서야 하는 이유이자 동기가 되기 때문이다.

 
                               산악진지에서 이탈리아군을 격퇴하는 오스트리아 척탄병
 

제1차 대전은 오스트리아 역사에서 지우고 싶은 아픈 기억이라 할 수 있다. 패전으로 말미암아 전쟁 전 유럽의 5대 강국으로 군림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한순간에 군소국가로 몰락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 이후 나치에게 강제 합병되고 제2차 대전 후에는 국토가 분단당하는 치욕까지도 겪었다.

 
                                                부상병을 하산시키는 모습
 

이처럼 제1차 대전은 되새기고 싶지 않은 역사의 시작이었지만 오스트리아는 그것을 절대로 외면하고, 부인하고, 왜곡하지도 않고 분명한 그들의 사실로 인식하고 있다. 또한 그러한 과정에서 희생당한 자국국민들의 노고를 결코 잊지않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전사자들이라 할지라도 대우에 극진한 것이다.

 
                         정밀한 기법을 동원하여 6.25전쟁 전사자 발굴 사업이 진행중이다.
 

그런데 이것은 결코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올해는 6.25전쟁이 발발한지 60주년이 되는 해다. 60년 전 일일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무명의 대한민국 국민들이 국가의 부름을 받고 거대한 전쟁에 뛰어들었고 작전 도중 실종되거나 행방불명 된 이들도 부지기수다. 만시지탄이지만 본격적인 발굴사업이 시작된 것이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고 그것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마지막 한명의 용사를 발견하는 그날까지 사업은 계속되어야 한다
 

국민은 국가의 부름이 있다면 의무를 다하여야 한다. 하지만 국가 또한 나라를 위해 그 의무를 다한 국민을 끝까지 책임지는 모습을 보일 때 진정으로 국민들도 그 의무를 다하기 위해 노력 할 것이다. 실종 병사의 귀향에는 결코 유효기간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은 6.25전쟁이 결코 과거의 사실이 아닌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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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굿 뉴~스! 입니다.
    태풍으로 을시년스러운 마음을 달래드릴,  멋진 전시회가 있습니다.

    "2010 국제 최첨단 군 전자장비 · 시스템 산업전(IDIF)!"
    각종 통신 · 정보 · 전자전 무기체계와 전장 무인화 장비(전투용 로봇기술 및 UAV) 등도 보실 수가 있습니다.
 

    또, 국방부 특별 사진전 "전쟁이후(after war)" : 코엑스 Hall D 도 빠질 수 없죠~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 있어요. (9.9.목~9.11.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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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열혈국방'입니다.^^


요즘, 태풍때문에 출퇴근시 지하철 운행중단에, 아름드리 나무도 뽑혀나갔고, 날씬한 우리의 몸도 바람따라 구름따라 날아가 버릴 뻔 했잖아요? ㅎㅎㅎ... 아닌가요??


                                             태풍땜에, 나무도 울고, 나도 울고..흑! 흑! 흑!

 
요즘, 사실 좀 섬찟! 하셨을 겁니다. "태풍이 무서워!~"   그러나,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일이 생기면~짜짜짜짜, 짜짱~가  엄청난~   바로! 우리 '군'이 있지요. " 
그 누구도 못막는 자연재해 때마다! 그 복구현장에는 늘 우리 군이 있었다는 사실!


                                          정말 멋져요~ 우리 육군71사단 오빠들~
   

때는, 금번 9월 2일이었습니다. 10년만에 최대 강풍을 몰고 온 제7호 태풍 '곤파스' 때문에 우리는 인명과 재산 피해를 입고 말았습니다. 
태풍이 한반도를 빠져나가기가 무섭게 피해복구에 뛰어든 이들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육군 57사단, 71사단과 해군 3함대사령부, 해병대 청룡부대였습니다.

특히, 육군57사단은 경기 구리 토평교 인근에서 태풍으로 쓰러진 비닐하우스 10여 동을 치우는 등 대민지원을 하였고요. 71사단은, 40년된 나무도 쓰러져버린 경기 남양주 시내의 도로 복구에 앞장 서기도 하였답니다.


                                       태풍으로 찢어진 비닐하우스의 비닐 제거중입니다. 충성!


"육군만 군인이냐?"

아... 그렇지요? ^^;

우리 해군 3함대는요, 전남 신안군 흑산면으로 달려가 도로 시설물 복구에 최선을 다하였고요, 해병대청룡부대는 경기 김포시 침수지역에서 토사제거와 침수민가 자재도구 정리 등 재난피해 복구에 앞장서기도 하였습니다.   등등등... 

정말 아름답지 않습니까?  호호호~   사실, 아예 재해가 없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요....

제 이름이 '열혈국방'이라서 그런건가요?  하루하루 시간이 갈수록, 왠지~ 우리 '군'에 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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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둘기로 전쟁하던 시절 그리고 지금

 

 
전화가 희귀했던 예전에는 전화의 보유 유무가 부의 상징이었으며 또한 재산이었던 시대가 있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아주 오래전도 아닌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통신 인프라가 열악하여 전화 개통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청색전화니 백색전화니 해서 통신권 자체가 프리미엄이 붙어 거래되기도 하였다.

 
                           한때 전화 (엄밀히 말해 통신권)가 고가로 거래되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전철역이나 터미널처럼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공공장소에는 대규모의 공중전화 부스가 있었다. 지금은 길거리에서 공중전화를 찾기가 힘든 시대가 되었지만 그 때만 해도 공중전화가 설치된 곳에는 전화를 걸기 위해서 항상 사람들이 길게 줄 서있는 모습이 일상이었다. 때문에 지금 같으면 상상하지도 못할 어처구니없는 사고도 종종 일어났다.

 
              예전에는 공공장소에 대규모 공중전화부스가 있었고 항상 사람들이 길게 대기하였다
 

워낙 줄이 길다보니 통화를 간단명료하게 하는 것이 예의였는데 경우에 따라 앞사람의 통화가 길어지면 급한 통화를 하여야 할 뒷사람이 전화를 빨리 끓으라고 재촉하여 트러블이 발생한 적이 흔했다. 대부분 말싸움으로 끝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주먹다짐까지 오고가는 경우도 많았고 심한 경우에는 앞사람의 통화가 길다고 살인까지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날, 뒤 사람 배려안하고 통화를 하다가는 싸움이 벌어질 지 모른다 
 

핸드폰이 대중화된 이후의 좋은 점 중 하나는 이런 모습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예처럼 통신 때문에 살인사건까지 발생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통신과 우리 삶이 동떨어져 있지 않음을 반증하고 있다. 그 만큼 통신은 교통과 더불어 인간사의 흐름을 지속적으로 연결해주는 중요 사회간접자본이다.

 
                                          통신은 인간사를 연결하는 중요 수단이다

 
통신의 중요성은 군에서 특히 더한데 전쟁의 승패에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 할 정도다. 통신이 차단된 백만 대군을 정예 십만 군대가 이길 수도 있는 것처럼 통신망이 승패의 결정적 요소로 작용한 예를 전사에서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처럼 전쟁터에서 통신은 과거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당연히 중요하다.

 
                                         통신이 가장 중요한 곳이 바로 전쟁터다

 
지금이야 생필품화 된 핸드폰을 다들 가지고 있겠지만 이동통신의 필요성이 제일 먼저 제기되고 이동통신 수단을 제일 먼저 실용화한 곳도 사실 군이고 역사도 오래되었다. 그 중에서 현대의 휴대폰은 커녕 무전기 개념조차 희미했던 제1차 대전 당시까지만 해도 전서구(傳書鳩-Homing Pigeon)는 전장에서 유용하게 쓰였던 이동통신 수단이었다.

 
                                 정찰기에서 전서구를 이용하여 정보를 보내는 모습

 
비둘기는 자기가 살던 곳으로 회귀하는 성질이 강하고 사육하기도 쉬운 편이라 유무선 통신이 실용화되기 전까지 가장 빠른 통신수단으로 애용되었다. 기원이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을 만큼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왔기에 당연히 전쟁과도 관련이 많은데 별도의 전서구 관리부대도 있었고 애니메이션 발리언트(Valiant)처럼 제2차 대전 당시에도 종종 사용되었다.

 
                                             제1차 대전 당시의 전서구 관리부대

 
그 만큼 전쟁은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이 동원되는 치열한 경쟁의 장이다. 그런데 요즘 통신업계의 무한경쟁은 전쟁보다 오히려 더 무서운 속도인 것 같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덕분에 문명의 혜택으로 요즘처럼 사람과 사람간의 통신이 원활한 적이 유사 이래 없게 되었고 오히려 최근 열풍이 부는 스마트폰처럼 단순히 통신을 넘어서 그 이상이 가능한 세상이 되어 버렸다.

 
                    이제는 알고싶지 않은 타인의 통화내용까지 강제로 듣게되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너무 편해서 그런가?  핸드폰을 비롯한 통신수단의 대중화와 다양화는 예전에는 없던 새로운 예의가 요구될 만큼 또 다른 많은 문제를 양산하였다. 문명의 이기를 사용하면서 남을 배려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느낌이다. 전서구를 이용하여 전쟁을 하던 시절보다 통신이 자유로운 지금이 더 삭막하다면 그것은 좋은 수단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인간들이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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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위기는???
  

아! 꼬인다 꼬여, 몸이......이 곳은, '영어학원'인가요? 아님, '공인중개사' 학원??
이 적응안되는 열공의 분위기란.... 정말 적응 안되시죠?  아니, 본인은 항상 공부만 하신다고요??   설..마~


                                                           태극전사에 쏠린 눈


'미술관'인가요?

 
                                       "안녕하세요, 김정남입니다." 에구구구....빛 들어왔네요.


                  마지막 입맞춤...'천안함, 우리는 그들의 희생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또, 기술부족..


월드컵, 북한, 천안함 이야기까지... 이곳은,




광화문에 위치한 한국프레스센터!  금빛 엘리베이터를 타고 19층가지 올라가십니다.

바로 이곳에서, 8월30일 월요일 국방대 안보문제연구소 주관으로 '제28회 국제안보학술회의'가 개최되었는데요,

제목은, "G20, Middle Powers, and Global Korea" 였지요.  "뭐, 이정도는 다 해석되시잖아요?  기본영어 잖아요? " 호호호^^  제목은 "G-20, 중견국가 그리고 글로벌 코리아". 내용이 무지 어려웠을 것 같죠?  네, 맞습니다. 어려웠습니다. 특히, 발표와 토론하시는 박사님들께서 영어를 정말 유창하게 하시더라고요.  동시통역사를 동원할 정도의 어려운 영어들을... 그래서, 바로 제일 위의 사진과 같은 광경이 연출되었던 거죠~ 모두들 매우 열심히 듣는듯 보이지만, 왠지 몸이 꼬이는 분위기랄까요? 하지만, 아~주 중요한 내용이죠. 

그럼 이제, 제가 원어로 들을 수 있었던 내용을 소개해 드립니다!(사실, 동시통역사의 도움을 아주 조금! 얻을 수 있었죠~).

최근, 새로운 시장으로 부상한 '중견국가'들이 G-20정상회의 회원국으로서 선진국이 주도하던 세계경제 질서에 영향력을 증가시키고 있는데요, 특히 한국은 오는 11월 G20정상회의 개최국이자 의장국으로서 중요 역할을 맡게되었죠. 'G20회의'는 '세계경제안정화문제'를 주요 의제로 다룬답니다.


                                                 G20 회원국들....(이미 다 알고 계셨다고요?)

안보문제 전문가들 사이에는 G20정상회의가 '안보문제'도 의제로 다루어야 한다는 의견이 많습니다만, G20은 경제문제 해결에 집중하기 위해 안보문제는 논의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견국가들의 경제적 영향력과 함께 안보역할도 확대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따라서 현 시점에서 대표적 중견국가인 호주, 인도네시아, 한국이 스스로의 안보역할을 논의하는 이 학술회의는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지요. 




학술회의는 크게 3개의 회의로 나뉘어 진행되었답니다. '제1회의' : G-2 리더십, '제2회의 : 중견국가들의 영향력 증대', '제3회의 : G-20과 한국의 국가안보전략' 이렇게죠. 모든회의는 발표후 토론의 형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제1회의 : G-2 리더십>
 - Richard Hermann(Mershon Center, U.S,) :  "미국이 아시아에서 중요 역할을 지속할 것은 분명합니다. 관심을 가져야 할 점은, 과연 어떤 요소들이 미국의 정책을  결정하게 될 것인가? 하는 점이지요. 누구나 예상하듯이 '중국의 리더십'이 미국의 정책결정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며, 일본과 한국의 정치리더십의 성격도 상당히 영향력을 끼칠 것으로 예상됩니다. 현재 중국이 한국과 미국을 분열시킬 것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생각해볼 문제라고는 하겠습니다."

- Xiaohe Cheng( Renmin University, China) : "중국이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일본을 따라잡음에 따라 더욱 큰 글로벌 역할을 해야한다는 기대가 높은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본인은 중국이 글로벌 리더십을 추구하는 데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이 국제정세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고자 하는 야심은 다음의 장애요인들로 인해 방해를 받게될 것입니다. 중국은 정체성에 대하여 국내적 합의가 부재합니다. 어떤이들은 중국을 제3세계 회원국으로 여기며, 어떤이들은 중국을 이미 글로벌파워의 최상국으로, 또 어떤이는 중국을 미국 다음으로 세계정세를 좌우하는 'G-2'로 여기기도 합니다. 이같은 중국내 정체성 합의 부재는 중국의 대외정책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중국이 글로벌 리더십을 추구하는 데에 또다른 장애물이 있다면, '미국중심의 동맹시스템'의 존재와 결정적 시점에 '중국을 전략적으로 지지할 연합의 부재'를 들수 있겠습니다."

다음에 계속....^^                                                                                     - 열혈국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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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연 그들은 바보들이었나?

 
 
일본이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을 일으켰을 때를 제2차 대전 개시일로 보자는 일부의 의견도 있지만, 역사교과서나 백과사전 같은 많은 공인된 자료에는 독일이 폴란드를 기습 침공한 1939년 9월 1일을 제2차 대전의 시작으로 본다. 아마도 당시까지 세계사의 주역이었던 서구를 위주로 역사를 기록하다가 보니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폴란드를 전격 침공한 독일군

 
따라서 제2차 대전과 관련한 대부분의 서적들은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전쟁사를 기술한다. 독일의 침공을 받은 폴란드는 불과 한 달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고 이것은 독일의 급속한 팽창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승자인 독일군의 전과는 상세히 설명하는 반면 순식간 몰락한 폴란드군에 대해서는 무능함을 묘사한 내용이 많다.
 

                     많은 자료가 폴란드군의 무능함을 묘사하고 있다 (포로가 된 폴란드군)
 

다음은 이와 관련하여 가장 많이 알려진 대표적인 내용이다.
 
독일 대 폴란드 전쟁에서 가망이 없음을 알면서도 월등히 우수한 독일 기갑부대와 맞서 싸우는 폴란드 기병대의 모습은 전쟁 장면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면서도 시대가 바뀌었음을 알려주는 비극적인 장면이었다. ( 폴 콜리어 외, 「제2차세계대전」, 2008 )
 
SF영화 속의 한 장면이라면 또 모를까, 전쟁이 장난도 아니고 이게 무슨 황당한 시추에이션? 전차의 위력을 전혀 알지 못하는 기마병들은 승리를 다짐하며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고 있다. 보나마나 지는 전쟁인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전쟁이 아니라 일방적인 학살이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다.  ( 리젠, 「CEO의 원가 자르기 비법」, 2007 )
 

                              폴란드 기병대는 바보 같은 돌격의 대명사로 회자되었다
 

제2차 대전사를 읽다보면 이처럼 폴란드 기병대가 독일 기갑부대를 향하여 창을 꼬나 잡고 돌격하였다가 전멸한 이야기가 자주 인용된다. 이때 군사에 대해 별반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라도 이렇게 생각하였을 것이다. ' 무식한 것들이 용감하다라고 ...'
 
그런데 그것만이 진실일까? 과연 그들은 창으로 전차의 장갑을 뚫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단순, 무식하게 전차를 향하여 돌격하였을까? 폴란드인들은 후진국이라서 전차의 존재를 까맣게 모르고 있었을까?
 

                      과연 그들은 창으로 전차를 뚫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바보들이었을까?
 

영광의 16세기 폴란드를 이끌었던 주역으로, 이른바 윙드 후사르(Winged Hussar)로 알려진 기병부대는 폴란드에서 최고의 정예부대로 자랑스럽게 생각되고 있으며 현재도 의전용 기병대를 운용하고 있을 정도다. 제2차 대전 발발 당시에 폴란드의 기병대는 비록 시대에 뒤쳐졌지만 엄연한 전투병과였다. 따라서 전사를 보면 기병대가 개전 첫날부터 독일군과 격전을 벌인 사실을 종종 찾아 볼 수 있다.
 

                         기병대에 대한 폴란드의 자부심은 크다 (최근 폴란드 기병대의 모습)
 

그러한 전투 중에서 위에 언급하였듯이 오해를 불러왔던 것은 9월 19일 볼카 베그로바(Wolka Weglowa)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제9 마로폴스키(Malopolski) 기병연대가 독일 기갑부대와 격전을 벌여 순식간 100여명이 전사하는 커다란 패배를 당하였는데, 마침 이를 목도한 이탈리아 기자가 '바보 같은 폴란드 기병들의 돌격' 이라고 기사를 작성하면서 이 같은 사실이 널리 알려지고 이후 왜곡정도가 더욱 증폭되었다. 그런데 본질은 결코 그것이 아니었다.
 

                                   전선으로 달려가는 폴란드 기병대의 역동적인 모습

 
우선 독일에 비해 열세여서 그렇지 당시에 폴란드도 엄연히 기갑부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사실 독일의 전차부대가 폴란드를 앞선 것은 재군비를 선언한 이후부터이므로 불과 3~4년 밖에 되지 않았다. 따라서 폴란드군들이 전차를 창으로 뚫을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바보들이라는 말은 성립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을 뻔히 아는 폴란드 기병대는 왜 무모하게 기갑부대를 향해 돌격하였을까?
 

                 폴란드군도 전차를 보유하고 있어 결코 생소하지 않았다 (폴란드 제10기갑여단)
 

당시 폴란드 기병대는 함락 위기에 빠진 수도 바르샤바를 방어하기 위해 이동 중이었는데 우연하게도 대규모의 독일 전차부대와 조우하게 되었다. 진지를 구축하여 방어선을 설정하고 말고 할 수도 없을 만큼 허허벌판에서 순식간 독일군 전차들에게 포위당한 그들이 살 수 있는 길은 항복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망설임 없이 돌격을 선택하였다. 전차를 향해 돌격하는 행위는 정녕 무모하였지만 굴종보다 영예로운 군인의 길을 선택하였다.
 

                           그들은 바보가 아니라 침략자에 굴복하지 않았던 용사들이었다
 

그들은 결코 멍청한 바보들이 아닌 당시의 상황에서 가장 군인답게 취할 수 있던 행동을 망설이지 않고 실시한 영웅들이었다. 전쟁터에서 폴란드 기병대와 마주한 독일군들은 그들에 대해 경외감을 가질 정도였는데, 9월 1일 폴란드 기병대와 격돌하여 승리를 이끈 독일의 명장 구데리안(Heinz Guderian)은 전쟁이후 저술한 저서에서 그들이 보여준 용기와 신념에 대해 찬사를 남겼을 정도였다.
 

                       만일 누가 우리 선배들의 육탄공격을 우화한다면 과연 어떠하겠는가?
                                           (춘천전투 당시 육탄전 재현행사)
 

이처럼 전쟁과 관련된 이야기는 단지 쓰여진 것만이 진실은 아니다. 만일 6.25전쟁 당시에 침략자를 막으려 육탄으로 전차에 돌격하였던 우리선배들을 제3자가 무모한 바보들이라 우화시키고 그것을 남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일까? 우리가 왜곡된 정보만으로 남을 잘못 평가 하는 일은 다시는 없어야 한다. 그러면 남들도 우리를 왜곡하여 우습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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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전차를 만든다는 것이
 
 

전차(Tank)를 전쟁에 데뷔시킨 것은 영국이었고 이를 효과적인 전쟁도구로 승화시킨 것은 독일이었다. 하지만 제2차 대전 이후 지금까지 최강의 기갑전력을 보유한 나라는 소련-러시아라 할 수 있다. 특히 냉전 시기에 소련이 보유하였던 기갑전력은 양과 질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냉전 당시 서유럽을 위협한 소련의 기갑부대

 
특히 1950년대 제1세대 전차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T-54T-55는 무려 15만 여대 이상이 소련 및 동맹국들에서 생산되어 서방을 위협하는 지상군 전력의 중핵을 담당하였다. 우리에게 너무 큰 아픔을 주었지만 전차 개발사에서 최고 성공작으로 평가받는 T-34의 뒤를 이어 T-54, T-55가 대성공을 거두자 이에 자신감을 얻은 소련은 계속하여 기갑전력의 우위를 확보할 제2세대 전차의 개발에 나섰다.

 
                             명품이었으나 우리에게 유쾌하지 않은 기억을 안겨준 T-34
 

이때 개발한 전차가 우랄설계국의 주도로 T-55를 개량한 T-62다. 동시대에 서방의 주력이었던 M-60, 레오파트, 치프텐, AMX-30등과 충분히 맞설 수 있을 만큼 대구경 115mm 활강포를 채택한 T-62는 1978년까지 소련 및 동맹국에서 2만5천대 이상 생산되어 동구권의 주력전차로 자리매김하였다. 현재 북한의 주력전차로 알려진 천마호나 폭풍호도 T-62의 파생형이다.

 
                                           소련 제2세대 전차의 효시인 T-62

 
그런데 유독 기갑전력에 욕심이 많은 소련은 T-62가 막 일선 부대에 배치되기 시작할 시점에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차세대 전차를 이미 구상하고 있었다. 키로프설계국의 주도로 Object 430로 명명된 전차개발안은 한마디로 기존의 상식을 깨는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우선 115mm 활강포(이후 125mm로 대체)를 채택하여 화력을 대폭 증강시킨 것 가지고도 모자라 일발필살의 9M112 대전차미사일을 장착하여 공격력을 극대화하려 하였다.

 
                                                 Object 430 개발시안
 

거기에다가 기존 전차에서 흔히 사용하는 주조장갑이 아닌 세라믹을 이용한 새로운 개념의 복합장갑을 도입하여 방어력도 크게 강화시키려 하였으며, 파워가 향상 된 차세대엔진과 자동장전장치 등을 도입하여 기동력과 전투력을 획기적으로 개선한 한마디로 기존의 상식 틀을 깨는 당대 최고의 전차 개발을 목표로 하였는데, 소련은 이것을 T-64로 명명하였다.

 
                                    T-64는 소련의 야심이 담겨있는 차세대 전차였다
 

그런데 당대의 기술력을 너무 앞선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오히려 T-64의 개발을 더디게 만들었다. 더불어 야심만만하게 먼저 데뷔시킨 T-62가 예상과 달리 중동전에서 서방측 전차에 비해 열세인 것으로 나타났다. 조급해진 소련은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 T-64의 개발과는 별도로 T-62를 우선 개량하는 프로젝트를 시급히 진행하기로 하였다.

 
                           T-64의 개발이 난항을 겪자 T-62를 개량한 T-72가 탄생하였다
 

우랄설계국
은 T-55에서 T-62로 이어진 신뢰성 높았던 플랫폼을 최대한 이용하여 새로운 전차개발에 나서게 되었다. 결국 개발에 난항을 겪고 있던 T-64와 전반적인 성능은 비슷하지만 개발 및 제작이 훨씬 유리한 전차를 개발해 내는데 성공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제2세대 동구권 전차의 대명사가 되는 T-72다. 이후 무려 2만대 이상이 생산 된 T-72는 소련 및 동맹국에 공급되었고 우크라이나에서 현재도 생산중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T-72는 동구권의 주력전차로 급속히 자리 잡았다

 
절치부심하던 키로프설계국이 T-64를 간신히 개발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소련군에만 3,600여대가 배치되는 것으로 생산이 종결되었다. 비록 동맹국에게 공여를 거부하고 소련만이 보유한 최신예 전차였지만 사실 대타로 나선 T-72가 먼저 소련의 주력전차로 자리매김하게 되자 T-64가 대량배치 되기에 상황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비록 T-64는 계륵과 같은 신세로 전락하나 후계자인 T-80의 탄생을 가져왔다
 

참고로 T-72는 이후 한 번 더 변신을 하여 T-90으로 발전하였고 야심만만한 출발과 달리 소련의 주력 전차로 등극하지 못하는 굴욕을 맛보았던 T-64는 개량이 되어 현재 러시아 최강의 전차로 평가받는 T-80으로 발전하였다. T-80이 T-64의 경우와 다른 점이라면 우리나라를 포함한 여러 국가에 수출되어 각국의 주력 전차로 활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K-2 흑표가 최근 밝혀진 난관을 극복하고 최고의 전차가 되기를 기원한다.

 
30여년을 매달리다가 개발포기를 선언한 인도의 ARJUN전차도 그렇지만 T-64는 최고의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소련(러시아)조차도 전혀 새로운 개념의 전차를 만드는 것이 상당히 어려운 일임을 알려준 예라 할 수 있다. 많은 기대 속에 개발을 완료하였지만 본격 제식화를 앞두고 동력계통의 일부문제로 애를 먹고 있다는 K-2 흑표의 최근 소식은 어쩌면 한 번 정도 겪어야 할 성장통일지도 모른다. 만난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K-2가 진정한 지상의 왕자가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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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열혈국방 트랙백 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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