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에 해당되는 글 28건

  1. 2011.02.07 "0"세대 전투기를 아시나요?
  2. 2011.02.04 해적국가 소말리아는, 우리 최초의 파병국가였다.
  3. 2011.01.27 '아덴만 여명작전' (언론사 초청 정책설명회)
  4. 2011.01.24 여명작전의 UDT대원은 최영 장군과 같았다.
  5. 2011.01.19 날씨 무시하면, 전쟁에서 망신당한다. (1)
  6. 2011.01.17 무기, 신세대가 구세대를 이길까?
  7. 2011.01.17 [전투형 군대?] 제1탄. 현빈도 간다.
  8. 2011.01.12 6.25전쟁 당시엔 몰랐던, 위기(下)
  9. 2011.01.12 천안함, 연평도 그리고 북한이 '서울광장' 에!
  10. 2011.01.11 한-일 국방장관, 국민이 싫다는데 왜 만났나?
  11. 2011.01.11 6.25전쟁 당시엔 몰랐던, 위기 (上)
  12. 2011.01.05 멋진 '나치 친위대'보다는, 평범한 사람이 낫다.
  13. 2011.01.03 '워커 힐'과 6.25전쟁 영웅
  14. 2010.12.31 '2011년 국방의 새로운 각오!' 대통령께 보고드렸습니다.
  15. 2010.12.27 다연장로켓 K-136 구룡, 북한 122mm방사포에 대응하다.
  16. 2010.12.24 2010년 전사자 유해발굴과 새해 병복무기간 단축 이야기 (3)
  17. 2010.12.22 6.25당시 크리스마스를 지켜낸 우리군
  18. 2010.12.20 훈련은, 어떠한 여건에서도 중단될 수 없다.
  19. 2010.12.19 생생! '10년 응급처치 경연대회("살려야 한다!")
  20. 2010.12.16 귀신잡는 해병대, 동해 NLL도 지켰다.
  21. 2010.12.13 서해 최북단은 백령도가 아닌, '석도와 초도'였다.
  22. 2010.12.09 서해 5도를 지켰던, 1950년대 소녀시대(여고생들)
  23. 2010.11.24 연평도를 지키고 싶었던, 우리 해병..., (2)
  24. 2010.11.23 첨단무기개발 성공에는 실패와 눈물이 있었다.
  25. 2009.08.18 <두아내>가 있는 남편, 연금은 어떻게 될까?
  26. 2009.08.11 "아가씨 군인이세요?" (7)
  27. 2009.06.04 [3]국방 의학전문대학원이 왜 필요한가? - 좌담회 첫번째 (2)
  28. 2009.06.02 견습 공무원의 국방부 적응기 -"인생이란 전쟁에서 승리하겠다" (2)





                         잃어버린 세대 ?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지구의 역사는 약 40억년이지만 이에 비하여 인류가 출현한 것은 약 400만 년 전이라 한다. 그리고 글로써 역사를 기록한 것은 약 3,000여 년 전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지구의 역사에 비하면 상당히 짧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이 막연히 체감하고 있는 역사는 불과 2,000년 정도 밖에는 되지 않는다.

 
                                     인류의 역사는 지구 역사에 비하면 티끌과 같다
 

그 이유는 서양력 때문이다. 지구상 모든 국가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국가에서 사용하는 서양력은 역사를 BC(기원전)과 AD(기원후)로 나누어서 표기한다. 이런 통상적인 표기방식 때문에 기원전 시대의 많은 역사적 기록과 유물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기원후 역사가 느낌상으로 더 큰 비중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서기 1년 이전의 모든 역사를 비슷한 시기로 보는 착시현상이 벌어진다.
 

그래서인지 막상 기원전 시기를 모두 비슷한 동시대로 인식하는 오류를 범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석기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만화에 공룡이 등장하는 것처럼 말도 안 돼는 허무맹랑한 내용들이 종종 묘사되고는 한다. 극화니까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단지 기원전이라는 이유 때문에 10만 년 전과 1억 년 전이 비슷한 시기로 연관 지어지는 것은 그만큼 어느 정도 이전의 과거를 정확히 느끼기 어려워서다.
 

                             인간과 공룡이 공존한 이런 장면은 한마디로 어불성설이다
 

무기사에도 이와 비슷한 경우가 종종 있는데 대표적으로 전투기의 세대구분이 그렇다. 누가 그런 구분법을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이전의 역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트시대가 도래하면부터를 제1세대 전투기시대로 구분하고 있다. 따라서 제트기 등장 전에 있던 시기는 마치 BC처럼 취급받는다. 다음은 1940년대 이후의 전투기 구분법인데 대략 다음과 같다.


   제1세대 - 제트전투기 최초 등장시기  Me-262, F-86, MiG-15 등
  제2세대 - 초음속 돌파시기  F-104, MiG-19, MiG-21, Mirage 3 등
  제3세대 - 레이더 및 기본유도무기탑재시기  F-4, MiG-25 등
  제4세대 - 고성능 전자장비 및 정밀유도무기탑재시기  F-15, F-14, Su-27 등
  제5세대 - 스텔스 및 차세대전투 기능  F-22, F-35 등


                                        제1세대 전투기인 Me-262와 제5세대로 인정받는 F-22
 

사람의 주관적 기준이 관여할 수도 있겠지만 위의 구분은 많은 자료에서 통용되는 기준이다. 그런데 이러다보니 전사의 큰 획을 장식한 불멸의 프로펠러전투기들이 황당하게도 단지 제트세대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BC시기의 역사처럼 도매 급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같은 전장에서 활약하였지만 P-40과 P-51는 세대가 다를 만큼 현격한 성능차이를 보인
             전투기들이다. 하지만 지금의 구분으로는 제1세대 이전 전투기들로 구분된다.
 

프로펠러 전투기라도 매니아들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의 전투기로 활약한 P-40과 P-51의 성능차이가 엄청나게 크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굳이 매니아가 아니더라도 제1차 대전 당시의 복엽기와 제2차 대전 당시의 전투기를 같은 세대로 뭉뚱그려 표현하는 것이 이상하다고들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도 제트기 시대부터 1세대로 하다 보니 이들 모두가 엉뚱하게도 전투기 시대의 BC가 되어 버린 것이다.

 
                    프로펠러 전투기라는 이유만으로 이들을 동급의 전투기로 묶기는 곤란하다
 

전투기도입 당시부터 시기를 구분한다면 너무 구분이 많이 갈 것 같아서 그렇게 표현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제트전투기의 등장을 마치 AD로 하고 그 이전 전투기의 역사를 하나의 역사로 몰아넣은 것은 공룡시대와 석기시대를 같은 시기로 표현한 만화영화를 보는 것처럼 왠지 불편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사실 전투기가 가장 멋있게 하늘의 주역으로 활약하였던 시기는 제트기 등장이전인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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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로 평화유지군이 파견되었던 바로 그곳
 


극적인 ‘아덴만 여명 작전’과 관련하여 소말리아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마치 국가가 직접 나서서 해적질을 하는 것으로 착각이 될 만큼 소말리아하면 해적이 떠오를 정도인데, 일부 언론 매체에서는 해적질이 소말리아의 가장 큰 산업이라고 비하할 정도다. 도대체 나라가 어떠하기에 자국민들이 전 세계로부터 비난받는 해적질을 거리낌 없이 자행하도록 방치하고 있다는 말인가?
 

                           청해부대의 작전과 더불어 소말리아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현재 각종 통계자료에 따르면 소말리아는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다. 국토의 대부분이 건조지대라 유목 외에 별다른 산업기반도 없으며 이 마저도 생산 활동이 미미하다. 따라서 종종 대량의 아사자가 속출하는 끔직한 기아사태가 발생하여 국민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 더구나 장기간의 내전으로 인하여 그나마 형식상 존재하는 정부도 어느 누구도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상태인 사실상 무정부국가이다.
 

                            몇 십 년간 이어진 내전으로 국가의 기능이 완전 마비되었다


그렇다보니 해적질이 이 나라의 산업 아닌 산업이 되어버린 형국이고 해적들은 먹고살기 위한 수단이라고 주장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해적들과 이를 뒤에서 비호하는 군벌들이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핑계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사익을 채우기 위해 온갖 나쁜 짓도 마다하지 않는 이들의 존재가 나라의 발전을 가로막고 대부분의 선량한 소말리아 국민들을 도탄에 빠뜨린 가장 큰 주범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어떤 반론도 있을 수 없다.

 
                                   가난하다는 사유로 해적질이 정당화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소말리아가 원래부터 이토록 비참한 국가는 아니었다. 제국주의 시대에 공식적으로 서구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던 아프리카의 유일 지역이었을 만큼 역사적 자부심이 큰 나라였다. 오늘날 해적질의 주 활동무대인 이른바 ‘아프리카의 뿔(Horn of Africa)’이라 불리는 동아프리카 반도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어 유사 이래 오래동안 아랍, 아프리카, 인도를 연결하는 무역의 중심지로 영화를 누리기도 했다.


                                             우주에서 바라 본 아프리카의 뿔


그러나 국민들이 단결하여 국가를 발전시키지 못하였고 1991년 이후 내전이 발발한 이후 국가의 몰락이 가속화되면서 오늘날 이러한 지경까지 이르고 말았다. 수백만의 난민이 발생하고 무고한 인명이 희생되자 유엔은 1992년 12월 치안유지를 위한 개입결의안(제794호)을 채택하여 평화유지군(PKO)을 파견하였는데 바로 이때 우리나라도 유엔의 요청을 받아들여 대한민국 수립 후 최초의 평화유지군을 파견하였다. 바로 ‘상록수부대’다.


                                            태극기가 선명한 상록수부대의 군복


국군의 해외 파병은 월남전과 1991년에 있었던 걸프전도 있었지만 이들 사례는 연합군의 일원으로 파병된 경우이고 국제기구의 요청에 따라 평화유지군으로 해외로 나간 것은 1993년 7월 소말리아 파병이 최초였다. 당시 공병대대를 주축으로 창설된 상록수부대는 1995년까지 2차례에 걸쳐 연 인원 516명을 파견하여 지역 재건, 의료 지원 등 인도적 활동을 중심으로 평화정착 지원임무를 수행하였다.


                                             소말리아 현지에서 활동하는 모습


그런데 이처럼 우리도 참여한 유엔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소말리아의 평화회복은 실패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현재는 AU(아프리카 연합) 주축의 평화유지군이 소말리아의 치안 확보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지만 공공연히 백주에 테러행위가 자행 될 만큼 아직까지도 소말리아의 항구적인 평화는 요원해 보인다. 따라서 해적 문제 또한 가까운 시일 내에 해결 될 가능성마저 희박하다. 국제사회는 물론 소말리아 국민들에게도 안타까운 일이라 할 수 있다.

 
                                            1995년 귀국 보고를 하는 상록수부대


해적 사건 때문에 부각되었지만 이처럼 소말리아는 국군과 인연이 많은 곳이었다. 어느덧 상록수부대의 파병은 과거의 일이 되었지만 이것은 대한민국이 세계 평화의 일익을 담당하는 책임 있는 국가로 자리매김하는 기폭제였다. 현재 우리는 평화유지군을 세계의 여러 분쟁 또는 재해 지역에 파견하여 훌륭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1993년 소말리아 파병은 그 의미가 크다 할 수 있다. 소말리아에 하루 빨리 평화가 정착하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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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6일 수요일이었습니다.  국방부내 '국방회관' 이죠.
국방부 대변인실에서는, 이번 '아덴만 여명작전'과 관련하여 작전에 적극 동참해 주신 주요 17개 언론사(국방담당 부장) 초청 정책설명회를 개최하였는데요,  


                            참석하신 17개 언론사 국방담당부장님들과 정책설명회 전 환담의 시간


                            작전을 함께 승리로 이끌어 주신 언론사 부장님들, 만나뵙고 싶었습니다! 


설명회 전 환담자리에서, 국방부장관은 '아덴만 여명작전' 설명에 앞서 우리군 2011년 실천목표인 '임무형 지휘' 관하여 말씀드렸는데요,

"'임무형 지휘'는, 상부가 세세한 지시를 하지 않고 현장지휘관이 작전상황을 능동적으로 주도하며 전투력을 상시 발휘할 수 있도록 하여, 결과적으로는 싸워이길 수 있는 지휘방식입니다. 아덴만 여명작전도 임무형 지휘 방식으로 싸워 이긴 것입니다." 

 
                         싸워이기는'강한군대' 육성을 위한 '임무형 지휘'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테이블은 지저분한 것이 절대! 아니고요^^ 단지 광이 좀 나는 스타일이라..) 


이번 정책설명회는, '아덴만 여명 작전'에 애국심으로 적극 동참해주신 주요 언론사에 감사의 말씀를 전하고 여명작전에 대한 이해를 도와드리고자 진행되었습니다.


                                                                 국방부장관  인사말씀


아덴만 여명작전의 준비, 경과와 결과에 대한 합참의 설명이 있었으며, 참석 언론사별 궁금증도 질의 응답식으로 풀어드렸는데요, (물론 비밀 사항은 제외죠~) 우리 해군의 치밀한 작전!..이 자리에서 설명드릴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 작전 시행으로 우리측이 입게될 피해와 성공가능성을 현장에서 판단하시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네, 그것이 가장 큰 고민이었고 인질들을 반드시 구출해야 하는 부담감이 컷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성공을 예감했고 작전을 시행하였습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진행된 언론사 초청 정책설명회


                             설명자료를 뚫어지게 살펴보시며 설명을 듣고계신 '모?' 언론사 부장님


청해부대에 대한 믿음과 애국심으로 여명작전에 함께 동참해주신 언론사 여러분들께 다시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 우리군이 더욱 강해지고 작전에서 반드시 승리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응원해 주실꺼죠? ^^  

강한군대!   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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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덴만에서 부활한 명장
 
 

지난 2011년 1월 21일, 우리군은 역사에 길이 빛날 쾌거를 이루었다. 해적에게 피랍된 '삼호주얼리호'의 인질 구출 작전에서 우리군은 세계 대테러전 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대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비록 피랍선박 선장 석해균 씨와 UDT대원 3명이 부상을 당하였지만 21명의 인질들과 이번 작전에 투입된 해군요원들 모두가 완벽할 정도로 무사했다는 점은 격찬을 받을 만 했다.

 
                                        함교로 진입을 시도하는 해군 UDT대원들
 

항상 세계 최고 수준의 특수전 부대를 보유하고 있다고 자부하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해외에서 벌어진 테러작전에 투입된 경험이 일천하기 때문에 청해부대가 이 정도로 멋지게 활약할 줄 예상했던 이들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이번의 업적은 이스라엘 특공대가 지난 1976년 실시하여 이제는 인질 구출 작전의 전설이 된 엔테베 작전과 견주어도 결코 손색이 없을 정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엔테베 공항에 억류되었다가 무사히 구출된 인질들
 

인질 구출 작전이 어려운 이유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생명을 우습게 아는 흉포한 테러범의 위협 하에 인질들이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선박이나 항공기 피랍의 경우는 좁은 공간 안에 테러범들이 인질들과 뒤섞여 있어 이들을 구분하여 테러범을 일일이 제거하고 인질을 구해내기가 상당히 힘들다. 따라서 격렬한 교전이 벌어졌음에도 모든 인질들의 생명을 구하고 해적들을 완벽하게 제압한 이번 작전이 더욱 빛나는 것이다.

 
                            격렬한 총격전 와중에도 무사히 구출된 삼호주얼리호 선원들
 

이것은 마음 한 구석에 가졌던 모든 염려를 일순간 종식시키는 것을 넘어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무한한 자부심을 가지게 만들었다. 또한 지난해 우환이 연이어 발생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던 국군의 사기를 단 번에 회복시켜주었다. 더불어 우리를 만만하게 보았던 국제 테러조직에 엄중한 경고를 주었고 앞으로 도발이 반복될 경우 어떻게 응징을 받게 될 것인지 확실히 알려주었다.

 
                                             청해부대 UDT대원들의 훈련모습
 

우리나라는 소말리아 해적의 위협으로부터 선박들을 보호하기 위한 '항구적 자유 작전-아프리카의 뿔(Operation Enduring Freedom-Horn of Africa)'에 참여하기 위해 지난 2009년 3월 청해부대를 창설하여 현지에 파견하기 시작하였다. 4,500톤급 한국형 구축함을 기반으로 1기의 슈퍼링스 헬기와 특수전 임무를 수행할 30여명의 UDT대원으로 구성된 청해부대는 4개월을 주기로 교대되고 있는데 금번에 활약한 최영함은 제6진이다.

 
                                        청해부대 1진으로 파견되었던 문무대왕함
 

다음은 그동안 항구적 자유 작전에 파견되어 총 15회의 해적 퇴치 작전을 실시한 청해부대의 일지다.
 
1진 2009년 3월 13일 문무대왕함
2진 2009년 7월 17일 대조영함
3진 2009년 11월 20일 충무공 이순신함
4진 2010년 4월 2일 강감찬함 (CTF-151 연합해군 기함)
5진 2010년 7월 9일 왕건함
6진 2010년 12월 29일 최영함

 
                                           6진으로 파견된 최영함의 출항모습
 

이번 작전의 주인공인 최영함은 지난 해 12월 29일 파견되었기 때문에 현지에 도착하자마자 작전에 투입된 경황없는 상황이었지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작전을 성공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번에 '아덴만 여명 작전'에서 최영함이 보여준 모습은 640여 년 전 홍산대첩(鴻山)을 이끌어 이후 왜구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던 백수최만호(白首崔萬戶)의 재림이라 하여도 결코 모자람이 없다.

 
                                백수최만호로 불린 최영장군의 묘 (출처-Wikimedia)
 

백수(白首)는 백발을 뜻하고 만호(萬戶)는 대장군이라는 뜻을 지닌 몽골말에서 유래된 고려의 관직이다. 즉, 백수최만호는 멋진 백발을 휘날리며 전투를 지휘하던 고려말의 명장 최영(崔瑩, 1316~1388)을 왜구들이 두려워하면서 부르던 별명이었다. 이름을 물려받은 구축함답게 최영함은 너무나 멋진 서전을 장식하였다. 앞으로 남은 임무기간 동안에도 왜구에게 죽음의 사신이었던 백수최만호의 혼이 항상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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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씨는 아무리 대비해도 모자람이 없다
.
 
 
히틀러는 소련침공을 바로 앞에 두고도 이탈리아가 망신을 당하고 있던 북아프리카와 발칸반도 전선에 전력을 나누어 개입하였을 만큼 자신만만하였다. 지난 1939년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대전이 발발한 이래 독일군은 패배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특히 1940년 여름에 유럽 최고의 육군을 보유한 프랑스를 불과 7주 만에 무너뜨려 세계를 놀라게 하면서 더 이상 유럽에서 독일을 맞상대할 나라가 없어 보였다.

 
              히틀러는 소련 침공을 앞두고 북아프리카 전선에도 개입하였을 만큼 자신만만하였다
                                     (사막을 가로질러 전진하는 독일 아프리카군단)
 

반면 소련군은 지난 1939년 겨울, 7배가 넘은 병력을 앞세워 핀란드를 쳐들어갔다가 겨울 추위와 핀란드군의 격렬한 대응에 무너져버린 한심한 군대의 표상이었다. 비록 강화조약을 맺고 승리를 거두었지만 소련군이 입은 인명 피해가 핀란드군의 10배가 넘는 엄청난 규모였다. 이런 사실을 목도한 히틀러는 독일군보다 규모에서 컸던 소련군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독일에서 모두가 그렇게 낙관적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소련은 지난 핀란드 침공에서 역사에 길이 남는 망신을 당하였다.
                                   (핀란드군의 유격전술에 전멸한 소련군 기갑부대)
 

결국 일부의 우려대로 전쟁은 독일의 의도대로 진행되지 않았고 4년간의 격전 끝에 패배하였다. 결론적으로 독일이 좌절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예상을 뛰어넘는 소련군의 끈질긴 저항이었지만 여기에 덧붙여 겨울 혹한도 크게 한 몫 하였다. 소련과의 전쟁을 앞두고 혹한을 대비하여 했음에도 제대로 된 설상복이나 부동액도 준비하지 않고 전쟁을 벌였을 만큼 날씨에 대한 독일의 준비는 상당히 미흡하였다.

 
                          1941년 12월 모스크바 전투 당시 소련군 진지로 투항하는 독일군
                  소련군과 달리 제대로 된 방한 장비와 설상복이 준비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열대지방에 전혀 생각지 못한 한파가 닥친 것도 아니고 소련의 겨울 날씨가 춥다는 것은 상식인데도 독일의 준비 상태는 왜 그토록 엉망이었을까? 130년 전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하였다가 어떻게 무너져 내렸는지는 히틀러는 물론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최근 혹한보다 보급의 문제였다고 보는 경향이 크지만 나폴레옹이 폴란드로 도망쳐 나왔던 12월 초에 영하 35도까지 떨어졌을 만큼 그해 겨울은 추웠다.

 
                       겨울에 소련과 벌이는 전쟁이 어떠할지는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모스크바에서 후퇴하는 나폴레옹)
 

그런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 있었음에도 독일은 어처구니없게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였다. 그것은 바로 모든 것을 자기식대로 해석해 버린 히틀러와 그를 일방적으로 떠받들던 추종자들 때문이었다. 소련을 침공한 1941년 6월, 독일군 기상전대는 이번 겨울 날씨가 상대적으로 따뜻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그러했던 이유는 1939, 40년의 겨울이 30년 만의 혹한이었는데, 20세기 들어 2년 이상의 추위 다음에는 통상 날씨가 온화하였기 때문에 내린 결론이었다.

 
                                    제2차 대전 당시 사용한 이동 기상관측장비 Kurt
 

그러나 가을이 되자 기상전대는 상층대기의 순환이 예년과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을 관측하였고 이를 근거로 1941년 겨울은 유래가 없을 만큼 강한 추위가 몰려 올 것으로 예보를 변경하였는데 그때는 독일이 소련을 신나게 몰아붙이던 중이었다. 히틀러는 전황에 고무되어 자신은 나폴레옹과 다르다고 진작 결론을 내려버렸고 괴링은 한술 더 떠 ‘영하 15도 이하로 절대 내려갈리 없다’고 단언하면서 보고를 묵살하였다.
 

                              자신들의 입맛대로 날씨를 제단 하여 버린 히틀러와 괴링
 

하지만 1941년 겨울은 영하 30~40도의 혹한이 계속된 100년만의 혹한으로 기록되었고 독일의 진격은 결국 멈출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날씨를 자기편으로 이용한 소련군도 지난 핀란드 침공당시 혹한으로 엄청난 수가 전사상한 경험이 있어 이를 교훈 삼아 동계전투 준비를 철저히 하여 독일의 진격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누가 추위를 잘 참느냐가 아니고 누가 대비를 잘하고 있느냐의 문제였다.

 
                                동계전투는 대비를 튼튼히 한 자가 승리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역사의 교훈이다.
 

사실 괴링이 주장한 영하 15도도 보온대책 없이는 편안히 버티기에 매우 힘든 혹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한에 대한 충분히 대비도 없이 전쟁을 벌인 행위는 만용이라 할 수 있다. 실력만 과신하여 과거의 교훈을 무시한 독일과, 반대로 전에 있었던 비참함에서 교훈을 얻은 소련과의 전쟁은 어쩌면 이미 승패가 갈렸던 것일지도 모른다. 상대뿐만 아니라 자연까지 과소평가해서 승리를 얻은 예는 없다. 그것은 역사의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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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 몇 살이냐 ?
 
 

과학기술의 발전은 그야말로 눈이 부실 지경이다. 특히 어느덧 우리 삶과 가장 밀접하게 된  IT분야는 일일이 쫓아다니기 힘들 정도인데, 그렇다보니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다. 불과 10년 전에 이동통신과 결합한 손바닥만 한 컴퓨터로 언제어디서나 필요한 내용을 실시간 검색을 할 수 있게 되리라고 확신한 이들은 그리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불과 10년 전만해도 이런 모습을 상상하기는 힘들었다 (사진-fnnews)
 

사실 새로운 기술이 가장 빨리 실용화되는 분야 중 하나가 바로 무기인데 그 이유는 단순명료하다. 남이 보유하지 못한 기술을 이용한 무기가 장차에 있을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것은 굳이 일일이 역사적 사례를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단순히 예를 하나만 든다면 총의 등장은 화살의 필요이유를 상실하게 만들어 버렸다. 화살을 아무리 업그레이드하여도 총 앞에서 무기로써의 가치가 무의미하게 된 것이다.

 
    온갖 폼을 잡는 칼잡이를 총으로 순식간 제압하는 인디아나 존스 (레이더스 스틸컷)
 

그런데 이런 당연한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무기가 하나있다. 이른바 콜트 45구경(Colts .45)으로 불리는 M1911권총이다. 제식번호에서 알 수 있듯이 올해가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인데 놀랍게도 아직도 일선에서 애용되고 있다. 국군도 지난 1988년 자체 개발한 K5권총을 제식화하기 전까지 사용하였고 미군은 1985년 M9권총을 채택하기 전까지 사용했고 일부에서는 아직도 쓰고 있다.

 
                          탄생 100주년이 된 M1911 콜트 45구경 권총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다른 무기들과 비교한다면 M1911의 위대함이 어떠한지 쉽게 이해 될 수 있다. 지금은 최신 스텔스전투기인 F-22가 하늘의 제왕으로 군림하고 있지만 100년 전에는 나무골격에 헝겊으로 동체를 감싼 복엽기가 날아다녔다. 1916년 전차가 처음 등장하였을 때 모습은 마치 물탱크 같아 암호명도 Tank로 정해졌고 결국 일반명사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그때 탄생한 무기가 박물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살아서 사용되고 있다.

 
                        1916년 탄생한 최초의 전차인 Mk1의 조악한 모습
                         M1911의 유구한 역사가 경탄스러울 수밖에 없다
.
 

총기의 보유와 사용이 엄격히 제한되고 있는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 같은 나라는 개인의 총기 보유가 자유롭고 총기수집이 취미인 사람들도 많은 편이다. 이들에게 M1911는 상당히 인기가 있고 특히 생산 년대가 오래된 기종은 콜렉터들에게 비싼 가격에 거래되고 있을 정도다. 오죽하면 미국의 프로야구팀인 휴스턴 애스트로스(Houston Astros)가 창탄하였던 1962년 당시 처음 이름이 휴스턴 콜트45(Houston Colts .45s)였다.
 

                                      휴스턴 콜트45의 팀 로고
 

흔히 '자동화기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존 브라우닝(John Browning)이 제작한 M1911이 아직까지도 질긴 생명력을 이어가는 가장 큰 이유는 더 이상의 개량이나 업그레이드가 필요 하지 않았을 만큼 완성도가 높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무기로써 권총이라는 물건은 그 용도가 극히 제한적이므로 어느 정도 이상의 성능만 달성하면 충분히 사용가치가 있다는 의미다.

 
                                 전설적인 총기 발명가인 존 브라우닝
 

M1911의 명성이 어떠했는지 알려주는 일화가 2차대전 당시 독일이 이를 사용했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다. 지금도 세계적인 방산 업체인 노르웨이의 콩스버그 그루펜(Kongsberg Gruppen)이 2차대전 전에 M1911을 라이센스 생산하고 있었다. 그런데 1940년 독일이 노르웨이를 점령하자 소량이기는 하였지만 제작시설을 이용하여 독일군 용도로 M1911을 생산하여 공급하였다.
 

                           독일육군병기국 마크가 각인된 희귀한 M1911
 

그런데 새롭게 독일육군병기국(Waffenamt)의 주관 하에 제작하였다는 표식과 더불어 미국 콜트 사가 원 저작자라는 문구는 그대로 새겨 넣어, 아무리 전시라 해도 저작권은 보호된다는 전통을 지켜 주었다. 오래 동안 존재하다보니 M1911은 이처럼 재미있는 일화가 많이 따라다닌다. 일천한 국산 무기 개발사를 뒤돌아보면 어쩌면 부러운 부분인데 우리에게도 M1911처럼 세대를 뛰어넘는 국산 무기가 탄생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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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투형 군대?] 

                                   제1탄.  현빈도 간다.



'시크릿00'의 차도남 현빈이 '해병대'를 지원하셨다는 사실, 모두들 알고 계시죠?    
"부디 선발되소~서!! ^^ "


                    '빤짝이 트레이닝복'을 입고, 현빈은 그렇게 해병대를 준비하였나보다.??? ^^



                           현빈은 '빤짝이'츄리닝, 해병대는 '빨간'추리닝! 우왕~닯았다.


우리의 네티즌님들, 현빈이 복무할 지도 모를 '해병대'.  과연 어떤 곳인지? 아니, 부대는 어떤지? (특히 여자분들.) 무척 궁금하실텐데요,  2011년 현빈이 입대할 군대는 '전투형 군대'!!!

아니, 전투형 군대는 뭥미??  ㅇㅇ;



          너무나 '귀여운 모습'이라 '해병대'가 아니라고요? 겨울이면 가뿐하게! 폭설피해 복구작전.


'전투형 군대'의 탄생은.. 작년, 아니 지금까지 계속되어온 '북한의 무자비한 도발'에 기인한다고 하겠습니다. 끊임 없이 '적화통일'을 꿈꾸는 북한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우리군은 고민,고민 하였드랬습니다.
'강한 대응'으로 감히 북한이 도발을 꿈꾸지 못하도록 해주자!  아자! 아자! 아자 ~~~~!!!
그래서, 국방부와 군은 2011년형 '전투형 군대' 준비하였습니다.
그럼, '전투형 군대'를 솜솜 뜯어 보실까요?


                                                                                                                                                                                    
     
    군 간부의 능력을 제고하고, 장병 정신교육과 교육/훈련을 강화하는 등 현존하는 전력을 극대화하여 현장에서 
   반드시 싸워 이기는 '군대다운 군대'로 재탄생하겠다 것이지요. 

   기존의 전력구조를 원점에서 검토하고 재설계하여, 우리군을 네트워크중심전(NCW)에서 합동성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는 군대로 만들겠다~ 이말씀!

    또, 이를 위한 많은 정책들을 추진하겠다는 것입니다.
 

 
20만 명 대 2만명???

남한 대 북한의 특수부대 병력이라지요? 끊임없이 적화통일 야욕을 불태우고 있는 '이글이글~~아이!!!  북한'. 북한의 특수전 전력은 세계 최대 규모로 평가받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남한 특수부대의 병력증강과 장비보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요...


                                         지금도 적화야욕에 불타고 있는 '이글아이' 김정일


다시, 현빈의 해병대 이야기!
직업군인 중심인 '특전사'와는 달리 '해병대'는 병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유사시 전략 타격부대 역할을 담당해야할 우리 군의 최정예 부대랍니다. (현빈님이 바로 이곳을 가고자 하신다는 거~ ! ) 또, 해병대는 통일 과정과 통일 이후에도 핵심역할을 담당하게 될 전략부대이기도 합니다.

'전투형 군대'! 더 알고 싶으시다고요?


            공군은 1월 11일부터 4일간 국산항공기 TA-50 최초전력화에 대비하여 부대 지휘관,참모 
            대상으로 시뮬레이터 처험을 실시하였습니다.



<제2탄>에 계속됩니다..       2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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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위험했던 순간 [ 下 ]
 
 
 


아군은 지난 한달 동안 무려 300여 킬로미터를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퇴하고 있었는데, 특히 12월 5일 평양을 내준 이후부터는 제대로 된 교전도 없이 도망간 다닌 형편이었다. 이어서 서울마저 포기한 아군은 37도선에서 전열을 일단 재정비하고 있었으나 적극적인 항전의지가 없어서 만일 중공군의 공세가 재개된다면 결국 다시 낙동강방어선까지 철수 할 것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아군은 중공군의 공격이 재개되면 또 다시 후퇴할 생각이었다
 

따라서 일선 부대나 장병들은 평택-삼척을 연결하는 북위 37도선 바로 뒤에 있는 금강은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막연한 예상과 달리 불과 50킬로미터만 더 밀린다면 유엔군은 즉시 철군할 예정이었고 그것은 대한민국의 종말과도 같은 의미였다. 결과적으로 1951년 1월 10일을 전후한 시기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한 이래 최대의 위기상황이었다.

 
                     북풍한설을 무릅쓰고 자유를 찾아 떠나는 피난민들
                     자칫하면 이들의 이런 노고도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천만다행히도 중공군은 이러한 유엔군의 절박한 상황을 몰랐고 일단 진격을 서울에서 멈추었다. 서울 점령 후 중공군은 더 이상 공세를 유지할 수 없었을 만큼 힘이 완전히 소진된 상태였는데, 사실 중공군은 보급에 문제가 있어 공세를 일주일이상 지속하기 힘들었던 군대였다. 따라서 5일 정도 적의 공세를 막아낸다면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지만 적의 이러한 치명적인 약점을 아직까지는 몰랐다.

 
                  중공군의 제한적인 보급능력은 상당히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만일 그 당시 상황에서 공세까지는 아니더라도 중공군이 공격하려는 시늉만 하였더라도 아군은 후퇴할 가능성이 컸다. 그랬다면 그것으로 전쟁은 끝이었고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상황이었다. 유엔군은 중공군을 과대평가하여 회피만 하였지만, 막상 적도 아군의 위기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던 것이었다. 결국 이러한 미세한 서로의 판단착오가 위험천만한 순간을 너무 조용하게 넘어가게 만들었다.

 
                   1951년 1월 중순은 서로에 대해 제대로 모르던 시기였다.
 

이처럼 앞으로 어떻게 싸워야할지 막막해 하던 유엔군의 생각과 달리 중공군이 추격을 멈추고 전선이 고요해지자 신임 미 8군사령관으로 부임한 리지웨이(Matthew Ridgway)는 소규모라도 승리를 얻기 위한 국지전인 교전을 구상하였다. 전세를 뒤집겠다는 의도는 전혀 아니었고 중공군 참전이후 계속된 연이은 패배와 그로인한 후퇴로 곤두박질치고 있는 아군의 전투의지를 회복하기 위해서 당장의 작은 승리가 절실히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기회를 만든 신임 미 8군사령관 리지웨이(좌)
 

리지웨이는 소규모의 선공을 결심하고 갑자기 움직임이 둔화 된 중공군을 찾아 나서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1개 전차대대와 포병 및 공병을 증강한 미 25사단 27연대 전투단이 투입되었고 이를 울프하운드(Wolfhound) 작전으로 명명하였다. 하지만 말이 선공이지 수색에 가까운 소극적인 작전이었다. 그런데 혹시나 하는 조바심에서 실시한 작은 작전이었지만 이는 한국전쟁의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울프하운드 작전에 나선 27연대 전투단
 

1월 15일 항공기의 엄호를 받으며 평택-오산을 연결하는 1번 국도를 따라 수원방향으로 개시된 이틀간의 수색작전의 결과는 상당히 고무적이었다. 수원 부근에 조우한 중공군은 상상이상으로 보급수준이 매우 열악하여 가까운 시일 내에 공세를 재개할 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던 것이었다. 이제까지 신비스러운 군대로 여겨졌던 중공군의 취약점을 적나라하게 파악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면서 아군에게 싸워볼만하다는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었다.

 
                            극적으로 대한민국은 되살아 날 수 있었다.
                                       (서울을 재탈환한 국군)
 

공교롭게도 이 작전은 철군을 기정사실화하고 후속대책을 위해 방한한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Lawton Collins) 대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실시되었는데, 이 작전으로 중공군과 그들이 사용한 전술이 낯설었을 뿐이지 결코 미국보다 강하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인지하게 되면서 현 전선에서 반격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벼랑 끝에 몰려있던 대한민국이 극적으로 살아나고 한국전쟁 당시에 최고로 위험했던 시간이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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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서울광장'에 오세요!



지금 이시각! 12월 25일부터(이미 시작되었죠?) '11년 1월 8일까지 서울광장에서는 '천안함, 연평도 그리고 북한'이라는 기획사진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시청역 서울광장에 기획사진전이 있네요~>



올 한해는 북한의 천안함 피격사건과 연평도 포격도발로 온 국민들이 분노와 참담함 속에 있었고, 국방부와 군도 어려움을 겪었던 한해였습니다.

그런데, 국내외 주요 언론들이 '지금은 정전 이후 최대 안보위기'라고 평가하고 있음에도 금년 12월중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는 우리 청소년들을 비롯한 사회전체에 심각한 안보불감증과 취약한 안보관이 만연해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국방부는 기획사진전을 마련하여, 국민들이 북한의 실체를 바로보고 굳건한 안보의식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하였습니다. 



직접 와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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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1월10일 월요일) 국방부에는 일본 방위대신이 제15차  '한-일 국방장관회담' 갖기 위해 방문하였습니다. 


아니, "과거사 청산도 끝나지 않았는데, 독도 영유권 문제도 해결 안 됐는데, '한일 군사협력'이라  고라고라고라???" 또, 식민지가 그리도 되고 싶나?  우리의 네티즌님들!  거품 잔뜩무신 심정, 이해가 안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놈의 국방부는 "왜?  Why?"  일본하고 군사협력을 하자는 '알수 없는 태도'취하는 거냐구?


                                               '시크릿 00' 의 박상무님 曰, "와~~이?"


회담 시작 전에서 끝난 후까지, 바로 지금 이순간에도 우리의 네티즌들은 끊임없는 찬반토론으로 속을 끓이고 계신 중인데 말입니다.  
그럼, 국방부가 도대체 왜 그랬는지 한번 들어나 보실까요?
이번 회담은 천안함 사태, 연평도 포격도발 등 지역 안보정세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자리였습니다.


                                 북한의 도발은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도발과 우라늄 농축시설 공개 등 도발행위가,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를 심각하게 저해하고 있어  한일 양국은 긴밀한 공조를 약속하였습니다.

한-일은 이미, 해외에서의 유엔 평화유지활동(PKO), 인도적 지원과 재난구호활동, 해외파병 현장에서 군사적 우호관계를 다져 나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양국의 국방은, 국내 외에서 양국 간 물자ㆍ식량ㆍ연료 등을 상호 지원할 수 있는 '상호군수지원협정' 등 교류 협력의 심화, 확대가 더욱 필요해질 것입니다.


                                              파병현지의 우리 단비부대와 일본 파병부대



또한, 향후 정보의 공유가 중요해질 것을 공감하며 '정보보호에 관한 협정'에 관해서도 협의해 나갈 것과,  군 고위급 인사교류를 활성화'하고, 부대와 교육 교류, 수색 구조훈련 등 국방교류/협력을 발전시켜 나가기에 합의하기도 하였습니다.


                      더 큰 대한민국을 위해, '성숙한 동반자 관계'로의 발전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과거 일제의 침략에 분노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북아와 나아가 세계 속의 '더 큰 대한민국'으로의 발전과 미래전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한-일간 '성숙한 동반자관계'를 모색해 나아가는 것도 우리에게 의미가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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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위험했던 순간
[ ]



오래 동안
"한국전쟁 당시에 대한민국이 가장 위기였던 순간이 언제였는가?" 한다면 열이면 열 19507월부터 9월 사이에 벌어진 '낙동강방어선전투'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된다. 총 연장 200여 킬로미터의 낙동강방어선의 일각이라도 북한군에게 돌파되어 부산이 점령당한다면 그것으로 전쟁이 끝나는 상황이었으므로 상당한 위기의 순간이었음에는 틀림없다.


                                낙동강방어선전투를 가장 위기의 순간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영천전투에서 파괴된 북한군 T-34)



부산에서 가장 가까웠던 마산은 불과
40여 킬로미터에 불과했고 가장 먼 대구도 100여 킬로미터 남짓하였다. 일단 지도상으로 한반도의 90퍼센트 이상을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국부와 인구의 90퍼센트를 북한이 차지하고 있다는 의미와 같았다. 하지만 낙동강방어선은 시간을 얻기 위해 대신 공간을 내어주고 유엔군 스스로 선택한 방어선이었다.



                               지도상으로 본다면 우리가 가장 밀렸던 시기이기는 하다



개전이후 전력이 압도적이었던 북한군이 쉽게 우회 돌파할 수 있었을 만큼 전선이 연결되어 있지 않아 금강방어선까지는 쉽게 무너져 내렸다
. 결국 아군은 증원군이 도착하여 전력의 균형을 맞추어야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고 따라서 시간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런 복합적인 요인을 고려하여 유엔군은 전략적 방어물이 불비한 호남지역을 과감히 포기하고 낙동강을 교두보 삼아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낙동강방어선은 군사전략상 아군이 선택한 상황이기도하다

                                        (부산항을 통해 속속 증원되는 유엔군)



그리고 예상대로 전선이 촘촘히 연결되자 북한군은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었고 서서히 전력을 증강시킨 아군은 반격에 나설 수 있었다. 경우에 따라 위기의 순간도 다가왔지만
, 사실 19508월이 경과하면서 북한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이것은 지도상으로 낙동강방어선이 위기임에는 맞지만 군사전략상으로는 적의 공세를 막아낼 수 있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선택한 방법이었다는 의미다.



                             낙동강이 철옹성으로 변하자 아군은 반격에 나설 수 있었다

                                            (인천에 상륙하는 미 해병1사단)



그렇다면
6.25전쟁 기간 중 대한민국 최대의 위기는 언제였을까? 지난 1990년대 들어 미국에서 비밀이 해제된 여러 가지 문서가 공개되기 시작하면서 많은 사실이 새로 밝혀졌는데 이중에는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하던 것과 달리 진정으로 위기였던 순간이 따로 있었다. 19511월초, 미국이 전쟁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즉 대한민국을 포기하고 한반도에서 물러날 준비를 하였던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진정한 위기의 순간은 따로 있었다

                                (전쟁 초의 급박한 순간을 웅변하고 있는 폭파된 한강교)



1950
1025일 중공군이 등장한 후 계속된 두 차례의 공세에 놀라 유엔군은 황급히 38선 일대로 도망쳐 내려왔다. 지연전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중공군과의 접촉을 거부하고 일사천리로 달려왔을 만큼 유엔군은 처음 접해본 중공군을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38선 일대에서도 적의 남진이 멈출 가능성은 그리 커 보이지 않았고 미군 당국은 또 다시낙동강까지 물러날 의사를 표시하여 이승만 대통령을 크게 실망시켰을 정도였다.


                                    중공군의 참전이후 전쟁의 양상은 급격해 바뀌었다

                                         (195114일 서울에 진입하는 중공군)



하지만 더 무서운 계획이 준비 중에 있었다
. 1222일 미군 합동참모본부는 "중공의 참전 의도가 북한회복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유엔군을 완전히 몰아내려는 것임이 명백해 진다면, 유엔군은 한반도를 포기하고 가능한 빨리 철수 한다"는 경악할만한 결정을 하였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중공군이 금강까지 진출하면 제주도에 약 이백 여만의 한국인을 소개시켜 망명정부를 수립하고 유엔군은 한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나간다는 계획이었다.


                                   한국을 완전히 포기하고 철군할 계획이 수립되었다

                                             (흥남철수 당시 후퇴하는 유엔군)



더구나 이 계획은 동요를 우려해 한국정부에는 정식통보하지 않아 우리 정부는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었다
. 바로 그 상태에서 중공군의 제3차 공세가 시작되었고 아군은 195114일 서울을 다시 내주고 110일경 평택-삼척을 잇는 37도선까지 후퇴하였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금강까지는 불과 50킬로미터였다. 여기서 조금만 더 후퇴한다면 그것은 대한민국의 종말이었다. 바로 그때 작은 반전의 기회가 찾아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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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은 평범한 이들이 만들어 나간다

 
 
외모가 뛰어난, 특히 호감을 불러일으킬 만큼 멋진 모습을 지닌 사람들은 일단 점수를 따고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지 극심한 취업난과 겹쳐서 성형이다 다이어트다 하고 남녀노소불문하고 난리 떠는 것도 아마 이런 이유도 한 몫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결코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지만 어느덧 엄연한 사회현상으로 자리 잡은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외모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그런데 "멀쩡하게 생긴 놈이"라는 말이 있다. 겉모습은 아무 문제도 없는데, 아니 오히려 남들보다 뛰어난데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짓이 영 딴판일 때 사용하는 관용어다.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 하는 것처럼 가장 먼저 외형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겉모습과 달리 정반대로 행동한다면 좋은 첫인상을 느꼈던 이들의 실망은 클 수밖에 없다.

 
                                 종종 멋진 이들이 실망시키는 행동을 범하고는 한다
 

군대가 멋있을 필요까지는 없으나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말처럼 멋있어서 나쁠 것도 없다. 군대가 멋있다는 것은 한편으로 군기가 확립되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당연히 패전한 군대에게서 멋을 발견할 수도 없다. 그런데 밀리터리 역사를 보면 '멀쩡하게 생긴 놈'이라는 관용어가 너무 잘 어울릴 만큼 진짜 멋있게 생긴 부대가 가장 나쁜 짓만 하고 다녔던 기록이 있다.

 
                    겉모습만으로는 가장 멋있게 생긴 부대라 해도 모자람이 없는 나치 친위대
 

히틀러의 사병들과 다름없던 나치 친위대(SS-Schutzstaffel)가 거기에 가장 걸 맞는 예다. 친위대는 정규군이 아닌 별개의 무력집단이었지만 전쟁말기에 최대 90만 명을 상회하는 병력으로 구성된 38개 사단을 운용하였을 만큼 거대한 군사조직이었다. 전사를 살펴보면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많은 친위대원들이 편협적인 나치의 이념에 광적이라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충실하였다.
 

            친위대원들이 나쁜 짓을 서슴지 않게 자행했던 것은 편협된 이념에 매몰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정신무장 덕분에 나름대로 전쟁에서 뛰어난 전투력을 보여주었던 예도 있었다. 하지만 게슈타포와 더불어 친위대는 나치의 조직 중 가장 극단적이고 폭력적이며 광신적인 활동으로 악명이 높았다. 이들은 게르만족 우월주의와 타 인종 증오 교육을 받았기에 점령지역의 유대인, 집시, 전쟁포로들을 대량 학살하는 주역이 되어 전후 전범재판에서 부인할 수 없는 범죄단체로 선언되었을 정도였다.

 
                           친위대에 의해 주민 전체가 잔인하게 학살당하고 폐허로 변한
                           프랑스의 소도시인 오라두르-쉬르-글란.
                           현재도 제2차 대전의 비극을 상징하는 사적지로 보존되고 있다.
 

이런 무시무시한 악행에 그 누구보다도 앞 장 섰지만, 멋있는 겉모습 때문에 나치의 선전매체에서 선전도구로 많이 등장하였다. 특히 절도 있는 열병식 모습은 당시 최전선의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보통의 독일 국민들에게 이들이 얼마나 나쁜 일만 저지르고 다니는 집단인지 상상도 못하게 하였을 정도였다. 한마디로 규정한다면 단지 멋진 옷을 입은 악마들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점령지역 유태인을 희롱하며 웃고 있는 친위대원
                                    겉만 멋진 악마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
 

친위대를 극단적인 예로 들었지만 사회생활 중에도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이들이 나쁜 짓을 하였던 사례를 발견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진정한 사람의 가치는 멋이 아니라 참된 인격에 의해서 확인될 수 있다. 따라서 처음 언급한 신언서판의 순서는 결코 사람의 인격을 가리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즉, 사람의 가치는 겉모습이 아닌 함께 부대끼고 겪어봐야 할 내면의 모습으로 판단하여야 한다.

 
                  진정한 멋은 겉모습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이다(사진-애니메이션 미녀와 야수)
 

언젠가부터 성형과 과도한 다이어트가 정상적인 것처럼 여겨지는 시대가 되었지만 결코 이것이 사람의 가치를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다. 잘생기고 멋있는 것이 항상 올바른 것은 아니고 그들이 나쁜 짓을 하면 오히려 더욱 실망스럽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해 준다. 세상은 평범하고 잘 생기지 못하지만 건강한 사고방식을 가진 보통의 수많은 사람들이 만들어 나간다. 이것은 불변의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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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이 들었지만 제대로 모르는 장군의 이름
 

 

중공군의 갑작스런 등장은 자신만만하게 북진을 이끌던 미 8군 사령관 월튼 워커(Walton H. Walker 1889~1950)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적의 공세는 거셌고 지금까지의 북진하였던 길을 뒤돌아 후퇴하여야 했을 만큼, 명령을 내린다고 중공군을 막을 수 있던 상황은 아니었다. 이제 워커에게 부여된 임무는 단 하나, 최대한 후퇴 속도를 조절해 전선을 최대한 빨리 고착화시키는 것이었다.
 

                                     한국전쟁 초기 미 8군 사령관이었던 월튼 워커
 

후방에 튼튼한 방어선을 만들려면 우선 중공군의 남진을 최대한 지연시켜 시간을 벌어야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중공군에 놀라 후퇴하기 바쁜 일선 부대의 분투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워커는 바닥까지 떨어진 예하부대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제일선을 찾아다니며 동분서주하였다. 원래 워커는 야전을 돌아다니며 직접 상황을 파악하는 것을 즐겼지만 지금은 더욱 열심히 돌아 다녀야 할 상황이었다.
 

                      그는 전선을 직접 순시하며 현장에서 지휘하는 저돌적인 지휘관이었다
 

1950년 12월 23일, 워커는 경원축선에서 중공군과 맞서 방어전을 펼치던 미 24사단과 영 27여단을 방문하기 위해 의정부 북방으로 출발했다. 당시 상황으로는 서울을 다시 포기하여야 했는데, 군은 물론 민간인도 함께 안전하게 소개하려면 이들 부대가 좀 더 오래 동안 이곳을 방어해내야 했다. 또한 그는 이번 기회에 미 24사단에서 중대장으로 근무하는 외아들 샘 워커(Sam S. Walker 1925~)대위도 오랜만에 만나려 했다.
 

          방한한 콜린스 미 합참의장에게 아들 샘 워커 대위를 소개하는 월튼 워커 미 8군사령관. 그는 
          대를 이어 군인이 된 아들을 상당히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그런데 오전 11시 경 워커를 태운 지프가 현재의 서울 도봉동 596-5번지 지점을 통과하여  의정부로 향할 때 반대편에서 남하하던 트럭과 정면으로 충돌했고 이 사고로 그는 현장에서 사망했다. 비록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에 비하여 세인들에게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유엔군 지상군의 주력인 미 8군을 이끌며 최전선을 종횡무진 활약하던 명장의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사망 60주년을 맞아 최근 사고현장에서 벌어진 추모제(사진-연합뉴스)
 

이를 안타까워한 미군 당국은 한국에 있던 외아들 샘 워커 대위로 하여금 아버지의 시신을 미국으로 운구토록 조치하였다. 그런데 샘은 남아서 싸우겠다고 고집하여 결국 맥아더가 직접 불러 운구지시 명령을 내렸다. 강골이었던 그의 아버지처럼 전형적인 무인이었던 샘 워커는 이후 최연소 미 육군 대장에 올랐고 이것은 아직까지 미군 역사상 부자가 대장에 오른 두 차례 밖에 없는 희귀한 예가 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 훗날 미 육군대장에 오른 아들 샘 워커
 

월튼 워커의 이름은 한국인들에게 많이 알려진 편인데 그 이유는 사실 호텔 때문
이다. 국내에 변변한 시설이 없어 휴가 때마다 일본이나 태국으로 놀러 가는 주한미군들을 유치할 목적으로 1963년 4월 한강변에 설립한 호텔을 워커 장군으로 이름을 따서 워커 힐(Walker Hill)로 명명하였는데 그 이유는 전쟁 영웅에 대한 사랑이 남다른 미국인들의 감성을 자극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지금은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급 호텔로 자리매김한 워커힐
 

하지만 그는 지난 한국전쟁 당시 가장 위태로웠던 낙동강전선을 성공적으로 사수한 맹장이었다. 그가 지휘한 미 8군과 국군의 분투가 있었기 때문에 아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역전타를 날리고 감격스런 북진을 할 수 있었다. 비록 중공군의 참전으로 통일의 꿈이 무산되고 그 또한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감하였지만 한국전쟁 초창기에 그가 남긴 족적은 두 말할 나위 없이 컸다.

 
                  지난 6월에 미 8군 영내에서 있었던 워커 장군 동상 제막식 (사진-연합뉴스)
 

그런데 호텔명 때문에 흔하게 불려지는 것과는 별개로 그가 이러한 인물이었는지 제대로 아는 이들은 사실 그리 많지 않다. 그를 기리기 위해 지난 6월 23일, 사망한지 60년이 지나고 나서야 용산 미 8군 사령부내에서 동상이 제막되었지만 이 또한 일반인들이 접하기는 힘든 위치이다.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애쓰다 바로 이맘 때 이국땅에서 생을 마감한 그를 한국전쟁 60주년인 2010년을 돌아보며 다시 한 번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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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해가 밝아오고 있습니다!

                       
                              
한해동안 사랑 많이 주셔서 감사드리고요,

                                  
                                         
새해 복 마니마니~~~받으세요!           <열혈국방 올림>
 
    
           
                                                                         
                                                                               

12.29(수)  국방부는, 대통령께 2011년 추진할 업무에 대해 보고를 드렸답니다.

   

                      12.29(수) 국방부 대회의실에서는 대통령 연두업무보고가 있었습니다. 

 
2010년 한해를 돌아보면... 북한의 도발 등으로 우리군도 국민들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한해였습니다.

이제, 국방부와 군은 2011년 새로운 각오로,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국민의 사랑과 신뢰를 받는 군'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고자 한답니다.

이를 위한 2011년 시스템 합리화와 제도개선!  한번 보실까요?


1.
병 복무기간이? 


  육군기준 6개월(24⇨18개월) 단축에서 3개월(24⇨21개월) 단축되고, 육군‧해병대(전투‧의무
  경찰, 경비교도, 상근예비역)는 21개월, 해군(해양경찰, 의무소방원)은 23개월, 공군(공익근무
  요원 중 사회서비스 및 행정 업무를 지원하는 자)은 24개월로 조정됩니다.

  * 시행은, 복무형태별로 2011년 1월 1일에서 2월 27일까지 조정 완료!

  일반 병역의무자(의 입영의무 면제연령을 현행 31세에서 36세로 하고, 병역기피자 등의 경우
  현행 36세에서 38세부터 면제처분토록하여
입영의무 등의 면제 연령을 상향 조정했습니다.




2.
6・25 전사자 유가족 유전자 샘플채취 방법을?

  기존 '혈액채취'에서 특수카드를 이용한 '구강(口腔) 내 분비물을 채취' 방법으로 전환
  하였고요,



3.  국가시책인 출산율 향상 대책의 일환으로 군인 가족 중 셋째 이상의 자녀가?


  군병원에서 진료를 받는 때엔 의료비
전액 감면!
  여군이 불임치료 시술을 받기 위해 휴직이 필요한 경우엔 최대 1년간 분할하여 불임
  휴직을 사용, 이 기간 동안 봉급의 절반을 지급하고요,
 
  장교 및 부사관 후보생의 교육의욕 고취 및 우수자원 유인
을 위해 봉급을 ‘10년 대비 10%
  인상, 위험근무수당, 특수지근무수당 등
각종 수당을 인상
합니다.




4. 
정예신병 육성을 위하여 신병 교육기간을?


  현행 5주에서 8주로 연장합니다.
  * 시행시기 : 2011년 1월 1일부터 시행
    
  ‘군인・군무원신분증’의 재질을 ‘종이’에서 IC칩이 내장된 PVC(polyvinylchloride)의 ‘전자
  공무원증’으로
개선하였습니다.




5.  전투복을 디지털 5도색 화강암무늬로 개선?


  위장효과를 극대화 하고 신소재 채택으로 신축성, 쾌적성, 항균성의 기능을 부여, 상의 내어
  입기, 사선형 주머니 등 인체공학적 디자인으로 미국, 일본 등 선진국 전투복에 뒤지지
  않으며, 전투력 극대화에 기여할 것입니다.


  전투화 조달방법을 수의계약에서 경쟁계약으로
, 기존 전투화보다 가볍고, 착용감과 충격흡수
  기능, 미끄럼방지 기능, 방수 및 땀 배출 기능 등이 강화된
기능성 전투화를 ‘11년부터 3년간
  확대 보급하여
전투력 극대화 기여할 것입니다.

     
  산정(算定) 위주의 원가관리 체계를 검증(檢證) 중심으로 전환하기 위하여 원가관리부를 원가
  회계검증단으로 개편하고 국방통합원가시스템을 운영할 것입니다.




6. 
기초생활수급자의 생계보장을 위해 예비군훈련을 보류하고?


  예비군훈련장 화장실 개선 및 동원훈련 입소시간을 1시간 늦추는(08:00→09:00) 등 예비군
  훈련 관련 불편사항을 개선
것입니다.
    
  예비군대원이 공무상 사망했을 경우 보상금 최저 기준액을 상향조정함으로써(중사 1호봉
  (약 3천6백만원)→상사 18호봉(약 9천만원))
국가책임을 강화
하고 대원의 권리를 보장할
  것입니다.




7. 
기존에 5개 부대를 군 책임운영기관으로 지정,업무성과가 향상되어?


  국군 대전병원, 육군 특수무기정비단, 제3보급단, 해군 제1함대 정비대대,공군 제83정보통신
  정비창 5개 부대를 추가로 지정・운영합니다.
    
  국방정보화법을 본격적으로 시행(’11.1.1일부), 국방정보화 추진체계를 정립하고 산ㆍ학ㆍ연
  협력을 통한 국방정보기술 선진화
및 국방정보화 수준을 제고합니다.



네티즌 여러분, 새해에도 '열혈국방' 많이많이 방문해 주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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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136 구룡의 역사적 의의
 
 

지난 12월 23일 포천에 위치한 승진훈련장에서 열린 대규모의 공지합동훈련이 언론 매체를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원래 이번 훈련은 내년 초에 실시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북한의 연평도 기습도발에 따라 그 시기가 앞당겨졌다. 특히 북한의 기습 공격이 있을 경우 즉시 자위권을 행사하여 대규모의 보복 타격하겠다는 국군의 의지를 담은 무력과시 목적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공지합동훈련 중인 국군의 멋진 모습 (사진-KODEF 손민석)
 

따라서 국군이 보유한 다양한 종류의 장비들이 투입되었는데, 국군 주력 기갑장비인 K-1전차와 K-200장갑차는 물론 이번 연평도 포격사건으로 잘 알려진 K-9자주포 등의 포병장비 그리고 공대지 타격에 나선 공군의 최신예 전폭기 F-15K와 육군 항공대의 500MD 및 AH-1S헬기 등도 선을 보였다. 그런데 이번 훈련에서 특히 시선을 끌었던 장비가 있었는데, 바로 국군의 다연장로켓 K-136 구룡이다.
 

                     금번 훈련에서 로켓탄을 발사하는 구룡 (사진-조선일보)
 

보도를 보면 이번에 모두 3문이 훈련에 참가하여 총 54발의 로켓탄을 쏘아 관람객들의 탄성을 자아내었다고 하는데, 구룡은 국방과학연구소 주관으로 1970년대 후반에 개발되어 1981년에 제식화되었기 때문에 사실 최신식 장비로 보기는 힘들다. 구룡이 이처럼 최신예 무기는 아니지만 공개훈련에 등장하는 것도 그리 흔한 일은 아닌데, 아마도 연평도 포격과 상당히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예전 국군의 날 퍼레이드에 등장한 K-136 구룡
 

왜냐하면 지난 11월 23일 북한이 연평도를 기습하였을 때 사용한 주력 무기가 122mm방사포였는데 이것이 바로 다연장로켓이다. 그동안 북한의 방사포는 안보를 상당히 위협하는 전력으로 알려졌고 실제로 도발이 이루어지자, 우리에게도 북한의 방사포를 압도하는 무기가 있음을 알릴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특히 구룡은 개발 초기부터 북한의 122mm방사포를 염두에 두고 개발된 무기다.
 

                               연평도에 발사된 북한의 122mm 방사포탄
 

사실 1939년 배치된 소련의 BM-13(이른바 Katyusha)를 현대식 다연장로켓의 원조로 보는 것처럼 다연장로켓은 공산권에서 주로 애용하던 무기체계였다.  이에 대응하여 미국이 다연장로켓 개발에 나선 것이 1976년이었으니 상당히 늦은 편이었고 따라서 우리가 1970년대 들어서 본격적으로 국산무기개발에 나섰을 때 참고할만한 서방측의 다연장로켓이 전무한 상태였다.
 

                 이른바 카츄사로 불린 BM-13은 현대 다연장로켓의 원조로 본다
 

그러다보니 구룡을 처음 설계할 때 유일하게 현존하던 소련의 방사포를 참조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외형상으로 비슷하게 되었다. 하지만 냉전이 첨예하던 1970년대에 공산권 장비의 획득은 불가능하였으므로 단지 외관상으로 비슷하다고 구룡을 무조건 카피한 무기라 단정할 수 없다. 이것은 세계적인 군사전문지인 제인연감(Jane's Yearbooks)이 독창적인 무기로 인정하여 최초로 수록한 한국산 무기라는 사실(국방과 기술 381호 p.45)에서도 알 수 있다.
 

                                 K-136 포대의 호쾌한 일제 사격모습
 

우리는 무기 개발초기에 먼저 면허생산을 하였고, 여기서 기술력을 쌓아 각종 무기를 만들어 내었지만 그것도 모두 완전히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현재 국군의 주력인 K-1전차도 미군의 주력인 M-1전차를 만든 크라이슬러 디펜스(Chrysler Defence)사의 기술 제휴로 만들어 진 것이다.  2000년대 이후 본격 제식화되기 시작한 K-9자주포, K-2전차 등이 순수하게 우리의 기술력으로 만든 무기들이다.
 

             M-270 MLRS를 능가하는 차세대 다연장로켓의 개발 성공을 기원한다
 

그렇다보니 초창기라 할 수 있는 1970년대에 자력으로 만들어낸 구룡은 초기 국산 무기를 대표하는 명작이 되었다. 그래서 국산 무기개발사에서 구룡의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직접 도움을 받을 만한 기술기반도 전무한 어려운 여건에도 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구룡을 만들어낸 당시의 기술진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현재 구룡을 대체하기 위해 개발 중에 있는 것으로 알려진 차세대 다연장로켓의 성공도 기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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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를 마무리하는 국방정책 이야기
에는 무엇,무엇이 있을까요... 


그중 오늘은 국방부 예비역 정책고객 소식지 '단비'를, 정책고객서비스 메일보다 먼저 보내드립니다.

2010년 전사자 유해발굴과 새해 병복무기간 단축 등 이야기 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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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마스의 자유를 지킨 이들
 
 
 
우리 역사에서 1950년 크리스마스는 상당히 고통스러웠던 시기였다. 눈앞을 가리는 눈보라를 동반한 엄청난 혹한도 몸을 힘들게 만들었지만 더욱 아픔으로 다가왔던 것은 갑작스런 중공군의 출현과 더불어 통일의 꿈이 좌절되었기 때문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탈환한 서울을 불과 석 달 만에 다시 적에게 내어주어야 했고 수십만의 병력과 피난민이 흥남항구를 통해 공산치하를 빠져나와야 했다.

 
                               1.4후퇴 당시 영등포역에서 남행열차에 오르는 피난민들
 

하지만 여러 차례의 패배와 후퇴를 거듭하면서 겪은 아픔과 절망의 반대급부로 중공군의 약점을 알게 되면서 고난은 정지될 수 있었다. 우리가 강하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단지 중공군을 몰랐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어쩌면 너무 단순한 사실을 확인한 이후부터 전세는 또 다시 바뀌었고 어느덧 전쟁이 발발한지 1년이 경과하였을 때 전선은 전쟁 발발 전에 남북을 나누던 38선 일대에서 고착화되었다.

 
                                 한강을 도하하여 서울을 재탈환하는 국군 제1사단
 

그런데 이러한 전선의 정체는 의도적인 결과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전쟁이 장기화되고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자 전쟁을 주도하던 미군과 중공군, 양측 모두는 이기겠다는 의지보다는 지지 않고 전쟁을 끝내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휴전협상이 시작되었고 그러는 동안 양측 모두 지난 1년 동안 보여준 거대한 공세를 심정적으로 중단한 상태가 되었다.

 
                       1951년 여름을 넘기며 전선이 38선 일대에서 고착화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선이 평화로웠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왜냐하면 군사분계선을 염두에 두고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 국지적으로는 더욱 치열해지는 양상으로 전쟁의 패턴이 바뀌었던 것이다. 그 결과 고지쟁탈전이 격화되었고 이것은 한국전쟁 후반부를 대변하는 단어가 되었는데, 경우에 따라서 너무 많은 희생이 벌어져 군 수뇌부를 당혹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한국전쟁 발발이후 두 번째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수 있었다.

 
                        1951년 크리스마스를 맞아 트리를 만드는 미 10군단 통신대대원들
 

후퇴의 악몽으로 가득한 지난 번 한국전쟁 첫 째 크리스마스도 피와 눈물로 얼룩졌지만 두메산골에서 벌어지는 피비린내 나는 끓임 없는 격전으로 말미암아 이번 크리스마스도 이에 못지않게 고통스러웠다.  그중에서도 동부전선의 어은산 일대에서 1951년 12월 25일부터 벌어진 1090고지 전투는 크리스마스가 결코 평화와 사랑이 가득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증거였다.

 
                      크리스마스 날 중공군은 1090고지를 피탈하기 위해 공세를 개시하였다
 

휴전협상에 의해 1951년 11월 군사분계선을 가조인하고 후속합의를 이끌기 위해 1개월간의 한시적 휴전이 결정되었으나 중공군은 이를 어기고 북쪽으로 돌출되어 있는 국군 제7사단의 전초진지 일대에 은밀히 전력을 증강시켜 크리스마스에 기습공격을 감행하였다. 참전이후 계속된 패턴대로 중공군은 포격을 집중하여 아군 진지를 타격한 후 심야에 압도적인 병력으로 고지위로 다가오면서 격전은 시작되었다.
 

              국군 7사단은 고지를 사수하였고 이후 1090고지는 크리스마스 고지로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전쟁발발이후 산전수전을 다 겪은 국군은 어느덧 쉽게 물러서지 않는 용맹한 군대로 바뀌어 있었다. 압도적인 적의 심야공격에 일시적으로 진지를 피탈당하기도 하였지만 날이 밝자 곧바로 반격에 나서 적을 압박하였다. 결국 아군의 강력한 응전에 엄청난 사상자를 남긴 체 12월 28일 중공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이를 기념하여 1090고지는 크리스마스 고지로 불리게 되었다. (중공군은 1952년과 1953년에 걸쳐 크리스마스 고지에 대하여 3차례의 공세를 감행하였지만 모두 좌절되었다)

 
                         지금 누리는 크리스마스의 즐거움은 결코 그냥 얻어진 것은 아니다
 

전쟁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크리스마스로 명명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이를 지키기 위하여 쏟아 부은 국군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이 담겨져 있다. 비단 그것은 크리스마스 고지뿐만 아니라 휴전선 일대에 연이어 솟아있는 모든 고지가 마찬가지다. 단장의 능선처럼 고통스러운 이름이건 크리스마스 고지처럼 아름다운 이름이건 그곳 모두에는 조국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였던 모든 이들의 영혼이 담겨있고 그분들의 노고 덕에 우리는 다시 크리스마스를 평화롭게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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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그들은 뛰었다 !
 
 

요즘 자가운전자들의 공통적인 고민이라면 비싼 기름 값 일 것이다. 더불어 혹한기에 접어들면서 유류로 난방을 하는 가정의 주름살도 깊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보니 오래 동안 잊혀 진 연탄이 최근 몇 년 전부터 각광을 받고 있다. 관련 전문가들의 말을 빌리자면 "1990년대 같은 저유가시대로의 회귀는 원유의 수요와 공급 상관관계로 볼 때 불가능하다."고 하니 이런 고유가는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라 생각된다.
 

               현재의 유류 수급관계로 볼 때 고유가는 계속될 것으로 예측 된다 (사진-중앙일보)
 

더불어 저유가로 인한 풍요로움을 느낄 수는 없겠지만 우리나라의 경제규모가 커져서 이 정도의 유가 수준은 충분히 충격을 흡수 할 수 있으므로 오일쇼크(Oil Shock) 당시 같은 어려움을 겪기는 않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그렇다면 고유가시대의 어려움은 있겠지만 예전의 오일쇼크 당시처럼 경제가 완전히 마비 될 정도는 아니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 하다.

 
                 원유가 한정된 자원이지만 다양한 노력을 병행하면 고유가 시대를 극복할 수 있다.
 

아마 40대 이하에게는 오일쇼크라는 단어가 상당히 생소하겠지만, 1974년과 1979년에 있었던 국제유가급등은 세계경제를 순식간 공황상태로 빠뜨리는 엄청난 충격파를 가져왔다. 특히 1974년 1월 1일을 기점으로 배럴 당 3달러 하던 유가가 14달러(지금 물가 수준으로는 140달러 정도라고 한다.)로 폭등한 제1차 오일쇼크는 성장 초기에 있었고 경제규모도 작았던 우리나라의 생활방식을 순식간 바꿀 정도로 말 그대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1974년 오일쇼크 당시 석유를 얻기 위해 줄 선 모습
 

차량운행 제한, 연탄공급 확대 같은 원론적인 대책 외에도 요즘에는 상상하기 힘든 다음과 같은 대책도 실시되었다. 평일 오후 6시 이전 TV 방송이 금지되었고, 네온사인 간판도 사라졌으며 운동경기의 나이트 게임이 금지되었는데, 이런 조치가 단계적으로 해제된 것이 1980년대 중반 들어서부터다. 이런 고난의 시대(?)에 군이라고 예외 일수는 없었다. 다음은 오일쇼크 당시였던 1974년에 전차병으로 근무하였던 J씨의 경험담이다.
 

                                 한때 국군의 주력이었으나 현재는 퇴역한 M-47전차


그의 회고에 따르면 계속하여 이런 식으로 훈련 했던 것은 아니지만 오일쇼크가 닥치자 당시 전차병들은 훈련장을 뛰는 것으로 기동훈련을 많이 대체하였다고 했다. 5인 1조로 구성된 M-47 전차병들이 한데 모여 자신들의 전차가 기동한다고 가정하고 예정방향으로 깃발을 들고 구보하는 식으로 훈련을 하였던 것인데, 알다시피 지상의 왕자인 전차들이 엄청난 연료를 소모하지만 그렇다고 훈련을 중단할 수 없어서 선택하였던 고육책이었다.

 
                                전차병들이 마치 보병처럼 뛰어다니며 훈련하여야 했다
 

최근 벌어진 북한의 연평도 도발에서 연평부대 K-9 자주포대원들이 보여준 투혼은 평소 실전과 같은 훈련을 거듭하였기 때문에 즉각 대응할 수 있었던 증거다. 훈련은 모든 것이 충분히 지원되는 좋은 환경 하에 이루어지는 것이 좋겠지만 혹시 그렇지 못하더라도 결코 중단될 수는 없다. 오일쇼크 당시 전차병들은 위에 언급한 예처럼 훈련량을 늘이는 방법으로 질적 부족분을 보충하려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던 것이다.

 
                             철저한 훈련 덕분에 위기의 순간에도 즉각 대응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전차에 탑승하였다고 가정하고 전차병들이 무리지어 깃발 들고 뛰어다닌다고 상상하면 웃음이 나오지만, 당시 나라전체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훈련을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을까 하고 숙연해 지기도 하다. 그 어려웠던 시기에 이런 식으로나마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이들은 애썼던 것이었고 그들의 노고덕분에 대한민국은 발전을 중단하지 않았던 것이다.

 
                                              제2차 오일쇼크 당시의 신문보도
 

사실 오일쇼크는 에너지의 대외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의 경우 언제든지 닥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비록 그 당시처럼 고통스런 경험이 반복되어서는 곤란하겠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대비를 철저히 하여야 할 것이다. 먼저 사용하지 않는 전원의 코드를 뽑는 사소한 일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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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상 먹었어!!!   얏호!"

바로, 아랫분들이 타셨습니다. 상. 


                                                                 우수부대 22보병사단


               최우수 부대가 한껏 여유있는 미소를 즐기고 있다.(그동안 밤샜으면서, 아닌척...)



바야흐로,  자랑스러운 분들은 '하버드' 그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역대 우수교관!"   어디 교관님들 이십니까??






바로 '이곳'의 교관님들!





고궁?  공원??  아닙니다. 여기는 대전 자운대.
살려야 한다!'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게~", 당황스럽고도 강렬한..)  

12월 15일 수요일, 저는 대전 자운대 국군의무학교에 착륙! 하였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당황스러운 멘트가,,,    있었으니....


                            누군가 벽타기가 가능한...'괴력'이 있는가 봅니다.(의료실습실1) --;


                                               토르소....'미술실' 이었나?


                           국군의무학교의 자랑 "SAVE CENTER" 내 벽면에는...뜨악~~~  


'10년 군 응급처치 경연대회'가 개최되었는데요, '살려야 한다!'는 구호를 주제로 말입니다. ^^


경연대회는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습니다. (아주 긴장감 있고도, 엄숙하게.)



                          "어제, 밤 새셨습니까?  이 눈은... 충혈??"(대회 참가자들 대기중.)


'10년 군 응급처치 경연대회는 병원급 부대와 각군 야전부대가 함께 참여한 가운데, 응급처치 능력 향상과 극대화를 위해 거행되었습니다.


특별히, 금년에는 대회를 '방부 장관배' 격상시키고 포상금과 우승기 수여 등 군내 '붐'을 조성하고자 하였고요, 기존의 개인평가 일색에서 '단체평가'부문이 추가되었다는 점 등이 아주~  인상적이죠.

병원 위주로 실시되던 지난 대회들과는 달리, '10년 경연대회는 육,해,공군 전군을 대표하는 의무부대들이 대거 참여, 최우수 부대에는 대회 최초로 국방부장관 상장을 수여하는 등 명실공히 '국군 응급처치분야 최고의 경연대회'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단체평가부문 중 '구급차 응급조치 평가' 현장을 보실까요?


                             컴퓨터 모니터상의 '평가문제'를 조심스럽게 읽습니다.


                                                 응급 의료도구를 확인하고...


                                            
구급차에 이송전 응급조치를 합니다.


'인간 마네팅'....이거 무지하게 비싸답니다...



                                 환자를 구급차로 빠르고 조심스럽게 이송중입니다.


                           구급차내의 응급처치 를 평가하는 평가위원들의 고뇌....


 

이번 대회는 각종 응급상황에 따른 응급처치 숙달과 조치능력을 평가하고자 하였습니다. 육군 22사단, 해군 2함대사,공군 3훈련비행단 등 총 17개부대가 참가하였구요, 측정관은 의무학교 시뮬레이션 센타 교관들로 하였습니다.

특별히 금년 대회는, 작년 새로 건립한 국군의무사령부의 자랑, "SAVE CENTER"를 100분 활용하여 시뮬레이터를 적극 활용한 과학적 평가를 실시하였습니다. '08년 대회에 비한다면, 금년에는 평가인원을 확대, 단체부문 평가방법 또한 컴퓨터 시뮬레이터를 활용, 측정의 정확성을 높여 보다 사실적인 평가를 실시하였다고나 할까요?

'개인평가'는 1)군의관  2) 의무부사관 및 의무병 으로 나누어, 필기평가 및 실기평가(응급처치 : 심폐소생술, 컴퓨터 시뮬레이션, 골절/부목 등.   간호업무 : 활력징후)를 실시하였고, 단체평가는 시뮬레이션 응급처치 등을 실시하였습니다.   



                                 개인평가(골절/부목) 부문  실시중. 진지한 모습들...


포상은, 단체부문(국방부장관상+의무사령관상을 병원 3개 부대, 사단급 3개 부대에)과 개인부문(의무사령관상)으로 나누어 시상하였구요, 


국군의무사령관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금번 대회는 최초로 육,해,공군 전 부대가 참여하는 높은 관심 속에 진행된 만큼, 장병들이 '반드시 내손으로 살릴 수 있다'는 소명의식과 자신감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번 대회는 군 의료서비스가 더욱더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도록 장병들의 실전적 응급처치 능력 구비를 독려하는 데에 있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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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잊혀지지 않을 귀신잡는 용사들의 이야기
 
 

지난 1999년에 들어 북한이 서해에 새로운 군사분계선을 전격 선언하고 난 이후 연쇄적으로 벌인 일련의 군사도발로 인하여 NLL(북방한계선)을 서해 5도에 연한 군사분계선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동해바다에서의 군사분계선 또한 NLL이다. 다만 동해안의 NLL은 DMZ을 직선으로 바다 쪽으로 확장한 모양새이고 더불어 인근에 도서가 없기 때문에 서해 쪽과 지리적 여건이 다를 뿐이다.

 
                           보통 많이 간과하지만 NLL은 동해안의 군사분계선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동해에서 북한의 해상 도발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지금보다 더 극렬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1967년 작전 도중 북한 해안포의 포격에 의해 침몰하여 39명이 전사한 당포함 피격사건이나 이듬해 벌어진 미군 정보수집함인 푸에블로호(USS PUEBLO) 피납사건 그리고 1969년에 31명 탑승원 전원이 사망한 미군 정찰기 EC-121 격추사건이 모두 동해의 NLL 또는 북한 영해 부근에서 발생하였다.

 
                                  천안함 사건 이전 최악의 격침 사고인 당포함 사건
 

다만 적극적으로 분쟁지역으로 각인시키고자하는 서해에 비해서 동해의 NLL은 북한이 트집을 잡을 만한 이슈가 그다지 많지 않은데,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서해 5도 같이 북한이 껄끄러워 할 만한 전략요충지가 동해 NLL 인근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고 서해안의 석도나 초도보다 더 위협적인 위치에 있던 동해안의 여러 섬들을 휴전 직전까지 아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북한의 포격으로 파괴된 연평도 (사진-연합뉴스)
 

사실 해병대의 전략도서 확보작전은 서해보다 동해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신편 된 해병대 독립 제42중대는 1951년 2월 14일 초대 중대장 심희택(沈熙澤) 중위의 지휘 하에 원산 앞바다의 여도(麗島)를 거점으로 하여 주변의 신도(新島), 대도(大島), 모도(茅島), 사도(砂島), 황토도(黃土島) 등 총 6개 섬을 기습 점령하였다. 때문에 북한 측 동해안의 최대 요충지인 원산항은 전략적으로 봉쇄당한 입장이었다.

 
                           해병대는 여도를 비롯한 원산 앞바다의 주요 도서를 점령하였다
 

하지만 북한 입장에서 이보다 더 치욕스러운 사건은 해병대의 독립 제43중대에 의해 이루어졌다.  함경남도 명천이 고향인 최청송(崔靑松) 중위가 지휘한 제43중대는 그해 8월 28일, 명천군 상가면 앞바다의 양도(洋島)를 기습 점령하였다.  양도는 3개 섬으로 이루어진 소규모의 제도였지만 이곳의 점령은 북한입장에서 함경도 해안의 연해 길목을 차단당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여도에 상륙하는 해병대원의 모습
 

막강한 제해권을 발판으로 요충지 섬들을 해병대가 점령하자 북한은 이곳 섬들의 대안에 5배 이상의 병력을 증강시켜 배치하여야만 했고 그 만큼 최전선에 가해진 압박을 돌릴 수 있었다.  섬을 점거한 소수의 해병대가 육지로 진격할 수는 없었지만 북한 측의 공세에 수시로 격렬한 교전이 벌이지고는 하였다.  경우에 따라 일시적으로 외부와 연결이 단절된 해병대원들이 섬 안에 갇혀 산화하는 불상사도 있었지만 그러한 상황에서도 그들은 끝까지 최선을 다하였다.

 
                  동해 도서작전에서도 해병대는 불굴의 투혼을 보여 주었다 (사진-영화 스틸컷)
 

이처럼 동해안의 여도와 양도를 근거지로 하여 적의 배후를 양도부대로 개칭되었고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휴전 때까지 현 진지를 사수하였다.위협하고 적 보급차단 및 연안봉쇄에 혁혁한 전공을 세운 제42중대와 제43중대는 1952년 10월 여도부대와   비록 이들 부대의 도서작전은 전술적인 측면에서 중대규모가 펼친 작은 규모의 후방작전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눈엣 가시처럼 적에게 끼친 전략적인 효과는 엄청나게 컸다.

 
만일 원산만과 양도 일대에 NLL이 설정 되었다면 적들이 느낄 곤혹감은 대단하였을 것이다. 영흥만의 경우는 말할 필요조차 없지만 양도는 현재 북한의 미사일 기지로 유명한 무수단리및 핵 실험 장소 부근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러한 전과가 그동안 소홀하게 취급되어 왔던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휴전과 동시에 이들 요충지 섬들을 포기하고 철수하여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만일 이 섬들을 아직까지 우리가 장악하고 있고 이곳까지 NLL이 선포되었다면 과연 어떠하였을까?  서해 5도가 현재 대한민국 안보에서 차지하는 전략적 위치를 고려한다면 쉽게 답이 나올만한 이슈가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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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령도가 끝이 아니었다
 
 

'서해 최북단'
흔히 신문보도나 방송 매체에서 백령도를 지칭할 때 쓰는 표현인데, 백령도가 군사분계선의 가장 서북쪽 끝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휴전이후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군사분계선은 육상을 가로지르는 DMZ(비무장지대)와 바다의 경계선인 NLL(북방한계선)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철책으로 명확히 구분된 DMZ와 달리 NLL은 서해 5도의 북쪽 해상을 연결하는 바다 위의 가상 선이므로 육안으로 구별하기는 힘들다.
 

                   현재 서해 최북단인 백령도 (천연비행장으로도 유명한 백령도의 사곶 해변)
 

그런데 우리가 좀 더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면 서해 최북단의 섬은 백령도가 아닐 수도 있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당시에 유엔군사령관 클라크(Mark Clark)장군은 서해 5도의 북쪽인 북위 37도 35부와 북한의 점령지인 옹진반도 남단의 북위 38도 03부 사이의 중간 해역을 연결하여 NLL을 선포하면서 그 이북에 아군이 점령하고 있던 섬에서 철수하였기 때문이다.

 
                                         북한이 도발의 빌미로 삼고자하는 NLL
 

이때 해병대가 적의 도발을 물리치고 강고하게 점령하고 있던 동서해의 여러 섬들을 부득이 포기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서해의 석도(席島)와 초도(椒島)는 그야말로 요충지 중의 요충지였다. 석도와 초도는 평안남도와 황해도를 가로지르는 대동강하구의 광량만에 위치한 섬들인데, 북한 서해의 최대항구인 진남포와는 30킬로미터의 거리이고 평양까지도 70킬로미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북한의 심장부를 겨냥하는 위치인 석도와 초도
 

최근 연평도에 MLRS가 배치된 것과 관련하여 서해 5도를 방어기지가 아닌 유사시에 적 후방을 타격하는 전략 거점으로 육성하면 북한이 상당히 곤혹스러워 할 것이라는 의견에서 알 수 있듯이, 만일 현재까지도 석도나 초도를 우리가 장악하고 이곳에 장거리 타격무기를 전진 배치한다면 북한이 느낄 압박감은 이루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한 것은 석도나 초도의 점령은 북한이 서해바다를 포기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NLL이 석도까지 연결되었다면 북한의 서해는 완전히 고립되는 형국이다
 

NLL을 초도와 석도까지 연결한다면 북한의 서해바다는 완전히 봉쇄되는 형국이다. 현재 서해 5도로 인하여 주요 항구인 해주가 제 기능을 십분 발휘하지 못하는 것만 보아도 충분히 유추 가능한 부분이다. 지난 천안함 사태로 인하여 북한군 잠수함대가 전개하고 있는 해군기지로 알려진 비파곶이 바로 석도 맞은편에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위치의 전략적 가치를 충분히 알 수 있다.
 

                                  북한의 잠수함기지인 비파곶이 바로 앞에 있을 만큼
                               석도와 초도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교동도를 거쳐 백령도 점령을 완수한 해병대 독립 제41중대가 1951년 5월 7일 기습 상륙하여 석도와 초도를 장악하자 북한은 경악하였다. 북한이 얼마나 위기의식을 느꼈는지는 한 개 중대가 점령한 석도와 초도를 경계하기 위해 무려 2개 사단을 맞은편 대안에 이동 전개 시켰던 사례에서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다. 당연히 섬을 재 장악하기 위한 북한의 도발은 집요하였고 그 과정에서 철수 전까지 수많은 격전이 벌어졌다.
 

                           1951년 12월 21일 병력교대를 위해 초도에 상륙하는 해병대원
 

해병대는 압도적인 해군의 화력 지원 하에 적의 접근을 거부시키는데 성공하였지만, 소수의 부대가 적진 한가운데에 동 떨어져 벌이는 작전은 항상 많은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었다. 예를 들어 1952년 3월에 석도 앞의 작은 무인도인 호도에서 벌어진 격전에서 악천후로 인하여 외부지원이 끈긴 해병대 1개 소대가 5배나 많은 적의 공격을 끝내 격퇴시켰지만 소대원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실종당하는 참사를 겪기도 하였다. 이처럼 해병대는 피와 눈물로 서해의 요충지를 지켜내었다.
 
 
                            서해의 요충지를 소수의 해병대원들은 피와 눈물로 사수하였다
                             (석도에서 교전 중 부상당한 병사를 후방으로 이송하는 모습)
 

하지만 앞에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휴전협정 체결 후 유엔군은 원격지라 판단한 석도와 초도를 전격 포기하였다. 따라서 우리가 서해 5도에만 준하여 NLL을 설정한 것은 북한에게 커다란 은혜를 베푼 것과 다름없었고 사실 북한도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못하고 전후 20년간 엄중하게 이를 지켜왔다. 하지만 최근 방자하게도 이를 망각하고 도발을 일삼는 것을 보면 석도와 초도를 너무 쉽게 포기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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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해 5도를 사수한 소녀시대
 
 
1951년 4월 2일, 해병대 독립 제41중대는 강화도 서북단에 위치한 교동도를 기습 점거하였다. 당시 피아가 한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중이었기 때문에 강화도, 황해도 연백, 경기도 개풍을 동시에 감제할 수 있는 교동도를 확보하였다는 것은 한강 하구를 우리의 의도대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찬란했던 서해 5도 확보 작전의 시작이기도 하였다.

 
                                             교동도는 지금도 전략 요충지다
 

아군의 점령 전까지 교동도는 군사적으로 무주공산이었지만 강 건너 연백에는 대규모의 북한군 8사단 2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이들은 군사적으로 교동도를 점령하는 것이 불가능하더라도 순순히 내어주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지난 연평도 포격 사건처럼 교동도에 수시로 포격을 가하여 위협을 가하는 것과 동시에 간첩을 침투시켜 후방을 교란하는 양동 작전을 구사하였다.

 
                                   북한은 교동도에 대한 다양한 공세를 지속하였다
 

원래 작은 교동도에는 2천여 명의 원주민이 살고 있었지만 전쟁 통에 외지에서 유입된 피난민들로 인하여 거주인구가 1만을 상회하면서 간첩들이 활동하기에 좋은 여건이 조성된 상태였다. 따라서 제41중대는 교동도를 선점한 후, 진지 구축 같은 군사작전 외에도 적극적인 대민교육활동을 벌여 전선 바로 뒤를 혼란시키려는 북한군의 기도를 일거에 제압하였다.

 
                          피난민들이 몰려든 틈을 이용한 북한의 후방 작전은 집요하였다
 

이와 관련한 재미있는 한 가지 일화가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교동도를 점령한 독립 제41중대는 군목이었던 신성국 소위가 정훈조를 조직하여 간첩 색출과 더불어 거주민들을 상대로 한 방첩교육 같은 민사작전을 벌였다. 그런데 병력이 부족하다 보니 현지에 거주하던 많은 민간인들이 부대활동에 자진 참여하여 해병대의 활동을 적극 도왔고 그중에는 5명의 여고생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인천상륙작전 당시에 후방작전을 펼치는 해병대의 모습 (사진-Getty Images)
 

원래 교동도에 고등학교가 없기 때문에 그녀들이 진짜 여고생이었는지 아니면 학정을 피해 이북에서 피난 온 학생들이었는지는 모르지만, 포탄이 날아다니는 최전선 일대에서 중요한 활동을 벌이기에는 너무나 어린 소녀들이었음은 확실하다. 따라서 해병대는 위험을 경고하며 이들의 활동을 만류하였는데, 소녀들의 결심을 바꿀 수 없어 결국 민간인 계도 활동에 투입하였다.

 
                        전쟁 전 옹진반도에 주둔한 국군 제17연대를 위문한 여고생들의 모습
                        서해 5도에서 활약한 여고생들도 이와 비슷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사실 오늘날과 달리 당시에 여고생이라면 상당한 인텔리 계층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한마디로 지식과 미모를 겸비한 여고생들의 적극적인 정훈작전이 후방 대민계몽에 상당히 효과적이었던 것으로 해병대 전사에는 소개되고 있다. 굳이 언급하자면 그녀들을 당대의 소녀시대라 칭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소녀들의 활동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당시 여고생들은 상당한 지식인 계층이었다. (휴전 반대 데모를 하던 당시의 여고생)
 

제41중대는 다음 목표인 백령도를 점거할 예정이었고 당연히 소녀들의 동행을 거부하였다. 그러자 여고생들이 몇 날을 울고불고 애원하였고, 결국 무지막지한 떼쓰기 전술로 귀신 잡는 해병대를 처참하게 굴복시킨(?) 여고생들은 백령도까지 동행하여 멋진 후방 작전을 계속하였다. 해병대 전사를 살펴보면 그녀들은 이후 해병대와 함께 대동강 하구의 석도까지 침투하여 후방작전에 종사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란 속에 활약한 수많은 소녀시대가 대한민국을 수호하였다 (최초의 여성 해병인 문인순 여사)
 

아쉽게도 현재 여고생들의 정확한 신상이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분명한 것은 그녀들도 서해 도서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숨어있는 해병대원들임에 틀림없다는 점이다. 전란 속에 활약한 그녀들의 노고로 지켜낸 서해 5도와 NLL은 오늘날 대한민국을 지탱하는 힘이 되었다. 해병대의 서해 5도 사수에 기여를 아끼지 않은 당대의 소녀시대에게 진심으로 존경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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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의 연평도에 대한 무자비한 포사격에 대응하던 중, 우리 해병 2명이 전사하였습니다.




故 서정우 하사(해병 1088기).... 마지막 병장휴가를 위해 육지로 향하던 중, 포탄 낙하상황이 북의 기습포격임을 듣고 전투에 임하기위해 부대에 복귀하던 중 포탄 피해를 입고 전사하였습니다. 
故 서정우 하사는 연평부대 중화기 중대의 공용화기 사수로서, 다양한 공용화기를 운용할 수 있는 최고의 전투력을 지닌 해병이었습니다.

 
전사한 故 문광욱 일병(해병 1124기)은 연평부대 본부 중대 수송반에 배치되어 서북도서 수호에 최선을 다하며 신병답지 않은 능숙한 임무 수행으로 훌륭한 해병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고 합니다. 
故 문광욱 일병은, 사고 당일 포병 사격훈련장 임무를 수행하던 중 기습 포격 속에서 그 누구보다도 먼저 달려나가 전투준비를 하던 중 무자비한 북한군의 포격에 파편상을 입어 전사하였습니다.



 
갑작스런 포탄 피격 속에, 연평부대원 절반 이상이 직접 나서서 주민들의 대피를 도왔으며 주민들중 잔류인원을 확인하는 등 군인본분을 다하여 피해를 최소화하였습니다. 피해를 입은 연평전투 부상자들은 후송되어 국군수도통합 병원에서 치료 중에 있으며, 해병대 사령부는 전사자들에 대하여 최대한의 예우를 갖추어 장례절차를 진행하고 있으며 화랑무공훈장을 추서할 예정입니다.




현재 해병대사령부는 해병대사령관 주관 협조회의를 통해 연평도 상황을 예의주시하면서 연평도 내 장병과 주민들에 대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대피호 피신 주민들을 위해서는 모포 400장, 컵라면 2,500개, 식수, 전투식량, 건빵, 음료수 등을 지원하였으며 언제 어디서나 출동 가능한 상륙군의 특징을 살려 연평도 피해복구를 위해 신속하게 대응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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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패와 눈물 없이 성공은 없다
 
 

1980년대가 끝나갈 무렵, 미국의 신형 전략폭격기 B-2 Spirit가 세상에 처음으로 모습을 보였을 때 많은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적의 방공감시망을 피해 목표지점까지 은밀히 다가갈 수 있는 스텔스(Stealth) 성능도 경이로웠지만, 그러한 자세한 성능은 차치하고도 우선 눈에 보이는 비행기의 모양새만 가지고도 상대의 기를 죽일 정도였다.

 
                          경이롭다 못해 괴기스럽기까지 한 B-2 전략폭격기
 

지금까지 보아왔던 비행체와 확연히 차이가나는 전익기(Flying Wing) 형상 때문이었는데, 이러한 혁신적인 모습을 빗대어 "저것은 지구인이 만든 것이 아니라 외계인이 선물한 것" 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한마디로 겉으로 보여 지는 외형만으로도 최첨단의 무기임을 자랑하는데 결코 모자람이 없었다.

 
                  여타 전략폭격기와 비교하여도 확연히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좌에서 우로 B-2, B-52, B-1B)
 

그런데 상상을 뛰어넘는 혁신적인 디자인의 전익기는 사실 하루아침에 만들어 진 것은 아니고 그 역사가 의외로 오래 된 형태의 비행체다. 흔히 저런 비행체를 보았을 때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이라면 비록 실용화까지는 이르지 못하였지만 혁신적인 구상을 많이 남겨 이후 호사가들에게 많이 회자되는 나치의 비밀병기다. 그렇다면 나치 독일이 저런 비행체를 연구 하였던 것일까?

 
                          마치 UFO같은 나치 독일의 Sack AS-6 실험기
 

다음 사진은 1942년 말 독일의 글라이더 제작사인 호르텐(Horten)이 설계한 Ho-7 실험기다. 이를 바탕으로 제2차 대전 종전 직전에 아래 사진처럼 제트엔진을 장착한 Ho-229까지 제작하였으나 전쟁이 종결 되고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 지금보아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뛰어난 모습인데 무려 65년 전에 전익기는 이미 실용화직전까지 제작이 이루어졌다.

 
                              혁신적인 모습의 Ho-7의 1940년 비행모습 
 

연과 같은 모습인 전익기는 체공에 상당히 적합한 구조지만 자세제어에 상당한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이 때문에 컴퓨터와 같은 전자 제어기술이 부족하였던 당시에 완벽한 전익기의 완성은 상당히 어려웠다. 그런데 독일이 이러한 전익기 개발 유일국가는 결코 아니었다. 단지 선도국가들 중 하나였을 뿐이고, 개발과 적용에 있어 빛을 발 한 나라는 미국이었다.

 

               개발도중 종전으로 완성되지 못한 Ho-229(上)와 최근 재현한 목업
 

아래 사진은 1929년 미국 노드롭(Northrop)의 실험기인 X-216H다. 완전한 전익기로 볼 수 없는 실험기였는데, 1940년에는 N-1M처럼 보다 발전된 단계까지 제작이 이루어졌다. 우연이었는지 독일의 Ho와 거의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독일이 패전하고 난후 노드롭은 전후에도 이 분야 연구의 선도적 역할을 계속 담당하였다.

 
                              1929년 비행에 나선 노드롭의 X-216H
 

이런 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노드롭은 실험용 차세대 전략폭격기인 XB-35을 제작하여 비행에 성공하였는데 그때가 1946년 6월 25일이었다. 비록 B-36이나 B-52같은 차세대 전략폭격기에 밀려서 제식화되지 않았지만 4톤의 폭장을 하고 무려 12,000Km를 비행할 수 있는 성능을 자랑하였다. 일설에는 시대를 앞서는 너무 혁신적인 모습이 오히려 채택되지 못한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고 할 정도였다. 
 

                            1946년에 제작된 실험용 전략폭격기 XB-35
 

비록 군에서 거부당하였지만 XB-35는 이듬해 제트엔진을 장착한 실험기인 YB-49로 진화를 거듭하여 비행 실험까지 완료하였다. 그런데 YB-49에서 B-2의 모습을 엿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이처럼 최신 전략폭격기 B-2의 제작사인 노드롭(현재의 노드롭그루먼)은 이미 수 십 년 전부터 전익기와 관련한 노하우를 축적하여 왔기에 B-2가 탄생한 것이었다.

 
                                      제트 엔진을 장착한 YB-49
 

이처럼 혁신적인 비행체가 외계인의 도움이 있어서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그 동안 계속된 연구와 축적된 기술 그리고 장기간에 걸친 꾸준한 도전으로 탄생한 것이다. 당연히 그러한 과정 중에는 무수한 실패와 난관이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사실 이것은 무기의 개발사뿐만 아니라 모든 일상사에 해당되는 이야기다.  혹시 그동안 남의 성공 뒤에 숨어있던 실패와 눈물은 보지 않고 결과만 부러워만 하지 않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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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모 방송국에서 <두아내>라는 드라마를 하고 있습니다. 남편 철수(김호진)가 지숙(손태영)과 불륜에 빠져 조강지처 영희(김지영)와 친자식 한별이를 버리고 지숙과 재혼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드라마 속에서는 철수가 기억상실증에 걸려 자기가 한 대로 전처에게 당하고 있는데... 만약 철수가 직업군인이고 그 사고로 죽었다면 연금은 어떻게 될까요?


 철수가 군인이라 가정하고 하는 애기니깐 '국민연금'이라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결론적으로 연금을 못받습니다. (허무개그 같군요 ^^;;;)


극중 철수는 30대로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연금대상자가 아닙니다. 군인연금은 19년 6개월 이상 복무한 사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연금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개인적인 일로 사고를 당한 것이기 때문에 순직 유족연금의 대상도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아내뿐만 아니라 자녀, 부모 모두 연금을 못받습니다.


만약 철수가 19년 6개월 이상 복무한 군인이고 죽었다면 어떻게 될까요?

 

먼저 전처인 영희는 연금을 받을 수 없습니다. 군인연금법에서 배우자는 61세 이전에 혼인을 하고 계속 혼인관계를 유지해야 수급권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혼하여 혼인관계가 종료된 영희에게는 수급권이 없습니다.



현 배우자인 지숙은 당연히 연금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설사 시간적으로 두사람이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상태였다 할지라도 결혼식을 올리는 등 사실상 혼인관계로 인정되기 때문에 철수의 배우자로서 유족연금 수급권이 있습니다. 다만 영희와 이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철수가 죽었다면 사실상 혼인관계라고 해도 인정받지 못합니다. 법률혼이 있는 상태에서의 사실혼, 이른바 "중혼적 사실혼"은 제외되거든요.


전처와 사이에서 태어난 한별이도 연금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한별이의 경우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법정대리인의 영희가 한별이 이름으로 된 통장으로 연금을 수령하게 되겠죠. 다만, 군인연금법에서 자녀의 경우에는 18세 미만이거나 장애가 있는 경우로 한정하고 있기 때문에 한별이는 18세가 되면 연금을 받을 수 없답니다.


지숙의 딸인 소리도 연금을 받을 수 있습니다. 친생자는 아니지만, 철수가 61세 이전에 본인의 자녀로 입양했기 때문에 연금을 받게 되죠. (소리의 친부가 친권을 주장한다면 조금 복잡해집니다.) 소리 역시 한별이와 마찬가지로 18세가 될 때까지만 연금을 받게 됩니다.


최근에 보니 지숙이 복중 아이를 유산했더군요. 출생하게 되면 유복자인 이 아이에게도 연금수급권이 있었을텐데(군인연금법에서는 60세 이전 당시의 태아는 복무중 출생한 자녀로 간주합니다.)...지숙 입장에서는 유산으로 인한 여러 충격 외에도 경제적인 손실이 있어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


 자녀의 경우 가족관계증명서에 기록되어 있으면 문제가 없지만 아니라면 부양사실에 관한 다른 요건을 충족해야 하기 때문에 개별적인 판단이 필요합니다



부모의 경우에는 상속받을 자녀가 없을 경우에만 연금을 받을 수 있으므로 2순위자인 철수의 어머니에게는 수급권이 없습니다.




따라서 지금 드라마와 같은 상황이라면 철수의 유족연금은 지숙, 한별, 소리가 받을 수 있으며 지숙이 소리의 친권자로 연금의 2/3, 영희가 한별의 친권자로 연금의 1/3을 받게 되겠네요.

 ★ 민법상 상속의 순위 (민법 제1000조 및 제1003조)에 따른 유족연금 수급 우선순위

자녀(퇴직 후 61세 이후에 출생 또는 입양한 자녀를 제외하되, 퇴직 후 60세 당시의 태아는 복무 중 출생한 자녀로 간주) - 18세 미만이거나 장애가 있는 경우
손자녀(퇴직 후 61세 이후에 출생 또는 입양한 자녀를 제외하도, 퇴직 후 60세 당시의 태아는 복무 중 출생한 자녀로 간주) - 18세 미만이거나 장애가 있으며, 아버지가 없거나 아버지가 장애가 있는 경우로 한함.
부모(퇴직일 이후의 입양된 경우의 부모를 제외)
조부모(퇴직일 이후에 입양된 경우의 조부모 제외)

         배우자 (사실상 혼인관계에 있던 자를 포함하며 퇴직 후 61세 이후에 혼인한 배우자를 제외함) - 배우자는 위의 우선순위 상속인과 공동상속인이 되고 그 상속인이 없을경우에만 단독 상속 가능
         유족연금을 받으려면 상기인으로서 군인의 사망 당시 그에 의해 부양되고 있어야 함.

중요한건 철수가 사망 전에 법적 관계가 모두 정리된 상황이라는 겁니다. 즉, 드라마 제목은 <두아내>지만 법적으로는 두아내가 아닌 상태라는 게 핵심이지요. 국방부에서 연금 관련된 상담을 하다 보면 법적 아내가 있는 상태에서 '사실혼'의 관계를 내세워 유족연금을 청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혼은 법률혼이 없는 상태에서만 소극적으로 인정되는 것입니다. 법적인 아내가 있다면 그 관계가 형식뿐일지라도 내연녀는 법적으로 아내의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답니다.





장은영 주무관은
국방부 군인연금과에서 연금정책부분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다소 까다로운 군인연금의 정책적 부분을 드라마 <두여자>에 빗대어 감각있게 잘 풀어쓰셨죠.~


 앞으로 6개월간 군인연금의 이모저모를 재미있게 잘 소개해주실겁니다. 기대해주세요

'열혈3인방 1기 팀블로거'들은 군비통제과 김종덕 사무관을 시작으로 운영지원과 배인영 사무관, 군인연금과 장은영 주무관, 복지정책과 민인영 사무관, 자원동원과 유영일 사무관으로 구성되어져  국방 정책 이슈를 쉽고 재미있게 국방정책블로그 '열혈3인방' 통해 여러분들에게 전해드릴 예정입니다.




대한민국 군인, 그리고 가족 여러분!
본인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사실상의 '두아내'는 피해주세요~

(재미있으셨다면 ^^* 추천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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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아침 일찍 출근할 일이 있어 오랜만에 택시를 탔습니다.

택시를 국방부 민원실 앞에서 내리며 요금을 내려는데
기사님께서 "아가씨 군인이세요?"라고 물으셨어요.

"아닌데요"라고 하니
"그런데 여기서 왜 내려요?"하시더군요.

예전같으면 그런 질문에

"아니 공무원이에요. 국방부는 중앙행정부처라서 공무원이 근무하고 있어요."라고 일일이 다 답을 해 드렸을텐데

아침에 바쁘기도 했고, 그런 질문에 일일이 답변하는 것도 이젠 귀찮아서 그냥 씩 웃고 말았습니다.^^*




배인영 사무관은 국방부 운영지원과 행정사무관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8월말에 결혼을 앞둔 예비신부이기도 합니다.^^*

국방부 정책블로그 '열혈3인방 1기 여성 블로거'인 배인영 사무관의 앞으로의 활약 기대하시길~




제가 국방부에 근무한다고 하면, 많은 분들이 "군인이에요?"
혹은 군에 대해 좀 더 아시는 분들이나,
저의 체형(?)으로 도저히 군인이면 국가안보에 위협이다 생각하시는 분들은
"군무원이에요?"라고 물으시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가끔 저희 부모님 친구분들 중에서도...제가 군대간 줄 아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ㅡ.ㅡ

제가 근무하고 있는 서울 용산의 국방부 본부에는
                                               공무원이 약 70%, 군인이 약 30%정도 근무하고 있습니다.
저같은 여자공무원도 약 250명 정도 근무하고 있습니다.
                                       
                                           국방부 모부서의 과원들입니다.^^
      <국방부에서는 군인도, 공무원도 모두 사복(?)을 입고 있기 때문에
                           누가 군인이고, 공무원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위 사진에서 군인은 몇 명일까요?>

일본의 방위성에는 100% 공무원이 근무한다고 합니다만,
전범국가의 특성이 반영된 것이므로, 우리와의 비교는 맞지 않을 것 같구요.

미국 국방부 본부
민간인력(공무원)의 비율이 78%, 프랑스는 80%라고 합니다.
(사실 우리처럼 군의 행정에만 종사하는 군무원이라는 개념이 있는 나라는 드뭅니다.
                   위에서 편의상 공무원이라고 표시했지만, 민간인력이 더 맞는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일본     미국    프랑스    독일
 민간인력      100%      78%      80%      63%
 군인         0%      22%      20%      37%

2005년까지만 해도, 한국 국방부엔 공무원이 약 52%, 군인이 48% 정도 근무했는데요.
지속적으로 국방개혁을 추진하면서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죠.

국방부는 당연히 군인이 근무해야 전문성이 있는 것 아니냐고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지만 일반행정분야, 국제정책분야 등 민간인력으로 대체할 수 있는 보직이 있다면 지속적으로 대체해 나가야 그야말로 전투분야에 집중하는 정예화된 강군을 만들 수 있는 거겠죠?

최근 세계적인 추세도 병력을 감축하되, 군사력은 증강하려는 추세인데요,

프랑스도 병력을 감축하는 대신 민간인력의 활용을 확대하여 실질적인 군사력 증강과 업무 효율성 증진을 도모하고 있고, 독일 역시 방만한 군 조직 축소와 함께, 핵심전투분야를 제외한 비군사적 분야에 민간 경영기법을 도입하여 군의 효율성 극대화를 꾀하고 있다고 합니다.

국방부 특성상 본부 공무원들도 업무 수행과 함께, 군인 못지 않은 군사업무의 전문성 강화를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습니다. 

관련된 이야기는  다음번에 기회가 되면 포스팅 하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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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군은 국방의학전문대학원이 왜 필요한지를 설명하면서 1.군의관 인력 수급의 질 저하, 2.군 특수(화)의학의 안정적 연구기반 확보에 관해 포커스를 두고 설명해드렸습니다. 이제 국방의학원 건립 문제에 관한 국내 최고 권위자이신 전 국립암센타 원장이자 서울대병원 교수이신 박재갑 교수님과 국군 서울지구병원장이신 강철환 대령님, 국방부 보건정책과 김은성 사무관님을 모시고 국방의학전문대학원이 왜 필요한가?에 대해 국방부 대변인실에서 좌담회를 열었습니다. 두번에 걸쳐 좌담회를 간추려 싣습니다.  

관련글 참조 : [2] 국방 의학전문대학원이 왜 필요한가? http://v.daum.net/link/3190652
                   [1] 국방 의학전문대학원이 왜 필요한가? http://v.daum.net/link/3167243
                   국군 수도병원의 격리병동을 찾아           http://v.daum.net/link/322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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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갑 교수
국립 암센터 1,2대 원장  
(현)서울대 의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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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환 대령
육사 46기
자이툰 부대 병원장
(현)국군 서울지구병원장


김은성 사무관
행시 44회
(현)국방부 보건정책사무관



 "제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군의료체계가
        잘 될수 있도록 모든 역량을 발휘해야"

김은성 사무관: 안녕하세요. 국방부 보건정책과 김은성 사무관입니다. 교수님께서는 의료계의 큰 원로이며, 군과의 특별한 인연을 많이 가지고 계십니다.젊은 장병들에게 금연관련 교육도 많이 해주고 계신데요. 언제부터 군과 인연을 맺으셨고, 군의료에는 어떻게 관심을 가지게 되셨나요?.

박재갑 교수:
예 저는 3년의 군복무중 1년은 동해안 경비사령부 88여단 의무중대장(78년)으로 동해안의 GP 10개를 커버하는 최전방 부대에서 보병장교로서 보냈고, 소령이 되어서는 등천동에 수도통합병원에서 나머지 2년간 근무를 했습니다. 이후 전역 한뒤 85년에서 87년까지 2년간 미 해군병원과 업무교류가 잦은 미 국립암연구소의 연구원으로 파견을 다녀왔습니다.

2000년에 국립 암센타 원장이 되어서는 당시 이준, 윤광웅 국방장관에게 군에서 대대적으로 금연운동을 펼쳐 주실 것을 부탁드렸습니다. 과거에는 장병들이 군에 가서 담배를 배워 왔는데, 이제는 군에 가면 모두 담배를 끊을 수 있는 조치를 해주셨으면 좋겠다는 건의가 받아드려져 결국 2009년 1월 1일부터 군에서 면세 담배가 지급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또한 2005년쯤 말기 위암환자인데도 군병원에서 진단을 못하고, 계속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음에도 아무 문제없던 사람이 제대후 3개월후에 말기 위암으로 죽는 그런 사건이 몇차례 일어나게 되었죠. 그래서 당시 윤광웅 장관이 심각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당시 국방부 공무원들을 저에게 보내 군 의료를 어떻게 개선하면 되겠느냐? 며 질문을 주셔서 그때부터 제가 그동안 잊고 있었던 군의료체계 개편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은 제가 국립암센타 원장으로 금연운동만 생각하다가 이때부터 우리나라 군의료개편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같은 경우는 국가의 혜택을 많이 본 사람들인데, 군의료가 낙후된 것은 그동안 우리같은 사람들이 신경을 안써서 저렇게 되지 않았나 싶어 제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군의료체계가 잘 될수 있도록 모든 역량을 발휘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게 된거죠.
 

  "그동안에 민간의료는 천지개벽할 정도로
      좋아졌는데, 군의료는 거꾸로 역행한거죠"


김은성 사무관:
 교수님께서 지적했다시피 국방부도 내부적으로 군의료가 낙후된 것에 대해 많이 반성 하고 있습니다. 민간 의료의 전문가로서 현재 군의료의 문제점은 뭐가 있을까요?

박재갑 교수: 군의료의 문제는 누구의 잘못이라 할 수 없는 구조적인 개혁을 못했다는것에 있습니다. 그동안에 민간의료는 천지개벽할 정도로 좋아졌는데, 군의료는 거꾸로 역행한거죠. 낙후된 부분에 대해서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습니다. 군의료가 낙후되어 있으면 발전되어 있는 민간병원으로 가는 길을 열어두면 되지 않겠나?라고 말이죠. 거기서 정책적 실수가 있었다고 봅니다. 군의료를 민간의료와 같이 개선을 해놓고 선택할 수 있게 했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군의료도 좋지만 당사자들이 본인 돈 내고 민간병원 가고 싶으면 갈 수 있게 시스템을 만들었어야 합니다. 군의료가 낙후되어 있기 때문에 본인 돈 내고 민간병원 갈려는 것 막지 않겠다는 정책은 정부가 의무적으로 군복무를 하는 국민들을 무책임하게 버려두는거라 생각합니다.

 의료라는 것은 숙련된 사람들과 함께 팀이 이루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군의료계는 경험이 많고 쉽게 애기하면 명의에 해당하는 사람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쉰살만 넘으면 남아 있을 수가 없는 시스템을 만들어놨단 말이죠. 국군 의무 사령관 나이가 50대이니 무슨 말이 필요하겠어요? 거기다 더 심각한 문제는 보수의 문제입니다. 군인의 보수체계는 공무원 보수체계인데, 민간 의료인들과 비교해보면 군의관의 보수수준은 민간의 50~60%입니다. 국립대학병원들이 이런 부족한 보수체계 때문에 수당을 추가로 지금할 수 있는 특수법인 병원으로 탈바꿈해 있는데, 군 병원은 민간 및 국공립의료기관들이 이렇게 변화하는걸 20~30년동안 그냥 눈 감고 있었다는겁니다.

 결론적으로 대한민국의 공무원 보수를 군의관만을 위해 바꿀수는 없는일이죠. 그러니깐 한마디로 그동안 국방부는 군의료계에 경험있고 실력있는 사람은 하나도 남아 있지 못하는 시스템을 만들어놓고 누구도 개선을 안한거죠. 거기에 가장 핵심적 문제가 있었던거죠.
 

사용자 삽입 이미지



     "군병원은 지금까지  의사들의 대한
         투자를 소홀히 했고, 가르치지도 않아"


김은성 사무관: 교수님께서 너무 뼈아픈 지적을 많이 해주셔서 저희들로서도 시사하는바가 큽니다.

강철환 대령: 선생님 말씀 하신 것 중에서 저희가 군병원장입장에서 생각해볼 때 병원건물을 새로짓고 CT/MRI 같은 장비는 구입해 왔지만, 정말 병원의 핵심이 되는 의료인력 그중에서도 의사들에 대한 투자를 소홀히 했고 가르치지도 않아 지금의 이런 결과가 초래된 것 같습니다.

김은성 사무관: 강철환 대령님은 사관학교 출신으로 의과대학 위탁교육으로 군의관으로 생활하고 계십니다. 현재 군에서 활용해야될 군의관 자원들은 의무복무기간만 채우고 다 떠나버리고 있는 실정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민간의료계에서는 의사들을 자체적 교육을 통해서 채용하라는 말하고 있습니다. 강대령님은 군도 경험해보고 위탁교육도 받아보셨는데 군의관들의 인력 불균형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십니까?

강철환 대령: 좀전에 박재갑 교수님이 말씀하셨지만, 민간의료기관에 있는 의사들에게 군 복무를 애기하면 진지하게 고민할 의사들은 거의 없을겁니다. 현재 군의관들의 급여수준은민간의료기관들과 비교해도 형편없는 수준이지만, 근무여건도 예를 들면 수도권에 있는 의사들은 그곳에서 평생 진료할 수 있지만, 군 병원은 전국에 흩어져 있고 군의료 조직에서는 지리적 여건이 좋은곳에 특정인을 머물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순환보직을 하다보면 비용측면을 떠나서 복지 및 교육여건이 열악해져서 힘들어집니다.

또 하나는 의사들 한테는 임상 환자를 보는게 소망이고 보람인데, 현재의 군의료 여건하에서는 장기복무 군의관들 대부분이 병원장을 맡게된다던지 정책부서에 가게 되기때문에 의료기술을 발전시킬 여건자체도 매우 열악합니다. 저는 국가에서 혜택을 받아 의대 위탁교육 혜택을 받게 되어서 지금까지 굉장히 감사한 마음으로 군생활을 하고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군의관 수급제도를 위탁교육 형태로 운영하는건 반대입니다. 물론 미군같은 경우는 소수 인력자체을 교육시켜서 군의관으로 활용하며 운영을 하고 있지만, 우리가 이런 위탁교육 제도로 전체 군의관을 확보하다는 것은 비용측면에서 효과적이지 않다고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군의관들의 능력은 인턴, 레지던트만
     마치고 군에 와 수술경험도 별로 없는 수준"


김은성 사무관:
지금 우리가 군의관에 대해서 애기를 안할 수가 없는데요. 군병원의 의료시스템은 97%이상이 단기복무 군의관에 모든 진료를 의존하고 있습니다. 군 병원장으로서는 그런 군 의료체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강철환 대령: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현 시스템으로는 국민들 및 군 복무중의 병사들의 요구사항을 충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현재도 상당히 많은 수의 환자 및 보호자들이 병원을 찾아와서 애기를 하고 있습니다.

실례를 들자면 제가 국군 춘천병원장 시절에 주된 업무중에 하나가, 환자 보호자분들이 밖에 나가서 수술을 해달라는 부탁을 조율하는 것이었습니다. 단기 군의관들의 의료능력은 인턴, 레지던트만 마치고 군에 와서 수술경험도 별로 없는 수준이죠. 특히 수술하다가 약간 어렵거나 실수를 했을 때 민간의 대학병원들은 경험의 많은 선생님들이 해결해주시는데 군병원에서는 전혀 그렇게 할 수 있는 백업시스템이 없습니다.

따라서, 제가 군 병원장을 하고 있고 군의관이 수술한다고 할 때, 그 수술이 보편타당한 흔한 수술이 아니라면, 특히 군의관이 하고 싶어서 욕심이 나서 하는 수술이라면 저는 당연히 못하게 합니다. 그건 당연히 우리가 해서도 안되는 일이고, 또 담당 군의관들이 그렇게 할 수 있을만한 충분한 경험을 많이 갖고 있지 못하고, 백업도 지원받지 못하기 때문에 병원장으로서는 허락 하기 어려운 사례가 많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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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암센타도 건물 지어놓고
   10년에 걸쳐서 좋은 인력들을 모았습니다."

김은성 사무관: 그럼 민간쪽에서 조언하길 그러면 단기 군의관만을 쓰지 말고 민간에서 우수한 인력을 월급을 많이 줘서 채용하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냐! 추가해서 군병원에서 할 수 없는 치료분야를 민간병원을 활용하면 될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박재갑 교수: 예를 들어보면, 우리 국군 수도병원에 전문계약직 의사를 파격적으로 그래도 예산을 줘서 한다고 하는데, 우선 보수도 두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현재 군의료기관들은 민간의료기관만큼 보수를 지급할 여건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것, 두번째는 설사 급여를 충분히 지급한다 할지라도 민간의료기관의 의사가 열악한 근무여건이 개선되고 있지 않은 수도병원으로 지원하겠냐?는 두가지입니다.

가 봐도 똘똘하고 앞으로 커가고 꿈이 있는 사람은 군 병원으로 왜 지원해서 갑니까? 그래서 국방부와 서울대학병원이 전문계약직 군의관 수급을 위해 협약을 하게 한겁니다. 지금은 몇몇 젊은 의사들이 지원해서 오는데 이런 지원자들은 국방의학원이 생긴다고 하니깐 몇 년만 참으면 앞으로 국방의학원이 학교가 되고 교수직을 보장해주는 등 근무여건이 좋아질거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지원하는거죠. 또 내가 추천하니깐 나 같은 의료계 선배들을 믿고 오는거죠. 하지만 수도병원에 우수한 인력들을 구성하는건 국방의학원 건물이 지어져도 100% 충족될순 없을겁니다.

국립암센타도 건물 지어놓고 10년에 걸쳐서 좋은 인력들을 모았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국방의학원 인력들을 하나하나 모아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국방의학원이 건립된다는 전제하에 의료계에 누가 우수한지 알기 때문에 핵심인력들에게 계속 애기를 하고 있습니다. 어느시점이 되었을 때 어디 가지말고 국방의학원에 가게되면 보람도 있고 그럴거다 라고 말이죠.

예를 들면 현재 수도병원 최강원 감염내과 과장이 신종플루 관련해서 수도병원 이름으로 방송에 나와 있을 때 그 사람이 미치는 국민들에 대한 군의료의 홍보효과와 수도병원의 네임브랜드는 수천억원의 이상의 효과가 있을겁니다. 그래야 국민들이 군병원에 대해 무한한 믿음을 보낼수 있는거죠.

  "국방의학원 법안 정부입법인지,
                 의원입법인지 따지지 말아야"


김은성 사무관:
작년 연말에 한나라당 박진 의원등 105명이 발의한 국방의학원 법이 검토중입니다. 법안의 내용을 간단히 말씀드리면, 장기군의관을 안정적으로 국방의학원에서 배출하는 의학전문대학원 과정을 운행하며, 그 학생들을 위한 기반병원을 운영하며, 군에 필요한 특수의학을 중점적으로 연구 발전할 수 있게 지원하는 법안입니다. 이런 것들이 항간에서 많이 우려하는건 국방의학원이 된다고해서 군의료쳬계가 얼마나 달라지고 얼마만큼의 파급효과가 있는지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국방의학원 법안에 의해 국방의학원이 잘 운영될수 있는 묘안이 있으신가요?

박재갑 교수: 예! 아마도 박진의원께서 대통령직 인수위에 계실 때 간사로서 이런 내용을 알았고, 같은 선상에서 대표발의를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국방의학원법의 요체가 잘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3차 의료기관은 다 대학병원이고, 특수의료법인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국방의학원이 성공을 하려면 우수인력 확보인데, 우수인력을 구할려면 2가지를 요구합니다. 하나는 보수입니다. 근데 돈을 부족함 없이 지급하는건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의료관련자 보수를 국가기관이 통제를 하기 때문입니다. 보수라는건 어느 국공립 의료기관이나 다 같다는거죠. 두 번째는 명예입니다. 기본적으로 국내에는 42개 의과대학이 있기 때문에, 우수 인력에게 대학교수 신분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면, 젊은 인재를 모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학교는 기본 필수에요. 그러니깐 젊은 친구들이 어디 지원할경우 교수직을 제공하냐 안하냐를 많이 따진다고 봐야죠. 그렇다고 그걸 제공하지 못하면 인재들이 빠져 나가니 유지가 안되죠. 특히 국방의학연구원에서 지금 해양의학이나 잠수의학이나 항공의학 등 해야될 일이 수없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한마디로 아무것도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근무하는 군의관들은 행정 및 의료 장교등 자리만 지키고 있지 진짜 연구는 하나도 못하고 있어요. 이건 한마디로 직무유기죠. 그리고 국방 의료원은 특수법인 형태인 국방의학원에 학교와 연구소와 병원이 효율적으로 들어간다고 하니 그 법안 자체는 상당히 잘되어 있는겁니다.

그 다음에 정부입법이 아니라 의안입법이냐가 논란인걸로 아는데. 이건 정부입법이 수십년간 못한겁니다. 그걸 국회의 105명의 의원들이 힘을 합쳐서 의원입법을 한것입니다. 근데 이 부분에 예산이 많이 들기 때문에 아주 민감한 사안이라, 어느 정부 부처 하나의 힘으로는 새로운 조직과 예산을 뒷받침하기에는 우리나라 현 시스템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기본법이 없어가지고서는 국가 예산을 투여할 수가 없고, 그러면 그 법을 만드는 국회가 뒤늦었지만 이제라도 나서는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국방부도 적극 호응하니깐 경제부처나 이런곳에서도 적극호응을 해서 이게 왜 정부입법이지, 왜 의원입법이냐? 따지지 말고 오히려 정부입법을 의원들이 나섰으니깐 빨리 집행할 수 있도록 도와줬으면 좋겠습니다.

 김은성 사무관: 네 기본법을 만들어서 시행하다 보면, 앞으로 중 장기적으도 추진 동력을 얻을수 있을 것 같고, 민간 병원 시스템처럼 군의료도 대학병원 체계가 되면서, 학교와 병원과 연구소가 한 울타리 안에서 그런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국방의학원 사업이 성공할 수 있는 가장 큰 요인이 아닐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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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내용은 좌담회 두번째에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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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제4회 지역인재추천채용제도에 당당히 합격하여 올해 2월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의 교육을 시작으로 4월 중순 국방부에 첫 발을 딛게 되었다. 내가 스스로 선택해서 오게 된 국방부였지만,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 국방부는 나의 관심대상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군대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어서 인 것 같다.

  대한민국 건강한 남자라면 누구나 가는 군대, 그 속에서 울고 웃으며 많은 경험을 함께 한 대한민국 남자들에게 군대라는 곳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의 장소일 것이다.
처음 부처 발령을 받고 국방부에 왔을 때 나도 모르게 많이 움츠려 있고 긴장하고 있음을 느꼈다. 물론 첫 발령에 대한 긴장감도 있었을 테지만, 그 긴장감 보다 더 큰 긴장과 두려움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 바로 내가 국방부라는 단어 속에서 느낀 군대와 같을 것이라는 착각이었다.

   국방부라는 방대한 조직에는 약65%의 일반직공무원과 약35%의 군인들로 이루어져있다. 하지만 이게 웬걸?! 처음 가서 본 국방부에서는 군인들이 너무 많이 보이던 게 아닌가? 허나 그것도 군 생활 중에 자주 보는 계급들이 아닌 대부분이 영관급들이었다. 간혹 장군들도 보였다. 그러한 분들이 지나가거나 마주치게 될 때면 나도 모르게 오른 손이 움찔움찔 거렸다. 꼭 경례를 해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재빨리 속으로 ‘나는 군인이 아니야’ 라 외치며 움찔거리는 오른손이 무안하지 않게 간단하게 목례로 인사를 대신했다. 합참본부가 국방부 내에 함께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 국방부에 근무하는 수치상의 군인보다 보여 지는 즉, 눈으로 마주치는 군인들이 훨씬 많았던 것이다.

  이
렇게 시작된 국방부와의 첫 만남은 나에게는 다소 두려움의 대상이자 호기심을 자극하는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허나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면서 위계질서가 엄격한 군대가 아닐까? 하는 의문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따뜻하고 순수한 사람들로 가득 찬 사무실에서 가족 같은 정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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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견습직원 조화진 주무관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사회 초년생으로서 국방부는 더할 나위 없는 매력적인 곳이다. 외적인 강한 카리스마 속에 숨어있는 내면적인 부드러운 심성을 가진 군인과 겉으로는 관료적이고 딱딱해 보이지만 인간다운 정과 활력이 넘치는 공무원이라는 서로 다른 두 집단이 모여 국방부라는 하나의 큰 조직을 형성해 이끌어 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환상적이며, 어느 곳에서도 결코 접해 볼 수 없는 특별한 행운인 것이다.

   국가안보를 책임지는 대한민국 국방부는 군대가 아닌 정부의 행정부처이며 이를 위해 구성원 모두가 열심히 활기차게 업무에 정진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나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나 또한 국민과 함께 하는 국민의 군대와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대한민국 국방부의 공무원으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힘차게 전진해 인생이란 큰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하겠다. 끝으로 견습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국방부에서의 삶이란 바로 ‘행복’이다.

   
※ 지역인재 추천 채용제도
  2005년 공무원 균형인사의 일환으로 처음 시작된 제도로서 공무원들의 지역편중현상 해소를 위하여 각 대학 총장이 추천한 학생을 대상으로 서류전형(학과상위 5%이내의 성적, 토익 775점이상), PSAT(공직적격성평가) 및 심층면접을 거쳐서 총 50명의 견습직원을 선발하고 3년의 견습근무기간을 거쳐 일반직 6급 공무원으로 임용하는 제도이다.
  하지만 6회 (2010년 선발예정자)부터 서류전형의 지원자격이 (과상위 10%이내의 성적, 영어는 동일) 다소 완화되는 대신, 1년간의 견습기간 후 일반직 7급 공무원으로 임용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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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비 트랙백 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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