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 대전 전쟁사 (독일 만슈타인 장군)
-제1편-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전격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영국의 전략가 바실 H.리델하트 경은 독일을 여러번 방문, 2차 세계 대전에서 싸웠던 독일 장군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를 책에 담았다.


독일군의 탄생에서 여러 전투를 거쳐 소멸되기까지를 여러 단계로 나누어, 독일 장군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회고담과 평가와 의견을 기록한 것이다.


그가 인터뷰한 독일 장군 중에는 거물 룬드스테드 원수에서부터 동부전선에서 싸운 크라이스트 원수, 북 아프리카 사막전에서
영국군에게 포로가 되었던 토마 장군, 그리고 히틀러가 무리하게 전개했던 발지 전투의 독일군 사령관 만토이펠 대장도 있었다.


이 글의 주인공이 되는 만슈타인 장군은 인터뷰 대상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가 전범으로 몰려 영국군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신임하던 구데리안 장군이 리델하트 경의 "간접 접근 이론"을
읽고 이에 감동을 받아 적극적으로 받아 들여서 독일 군대를 기계화 했고, 전격 전략을 실행했었기 때문에 그가 그의 제자격인 독일 장군들을 만나서 인터뷰한 내용도 전격전의 체험과 제언에 관한 것들이 많았다.

“The German general talks"라는 이 책은 1948년 최초로 발간되었는데 이후 19개국에 번역되어 출판되었을 정도로 2차 세계 대전 명 군사 저서의 하나다.



                                      바실 H,리델하트
기습과 기동에 중점을 두는 "간접 접근 이론"을 개발했다. 독일은 이 이론을 실전에 대입해서 전격전의 신화를 만들었다.


이 책의 존재는 이미 알았었고 리델하트의 전략에 관심이
많았던터라 오랜 노력 끝에 이 책을 구해볼 수가 있었다.


책의 63 페이지에 이런 글이 있다.
만슈타인을 소개하는 대목에서다.


“ 독일 장군 중에서 최고로 유능한 장군은 에
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일 것이다. 이 
 사실은 내가 인터뷰했던 대부분의 독일 장군들, 룬드스테드 장군에서 부터 아래 모든 장군들의 공통된 평가이기도 하다.“


리델하트는 이 의견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글을 이 책뿐만 아니라
그 뒤에도 자주 썼었다. 리델하트는 자주 만슈타인이 위대한 명장이었을뿐더러 부하들이 존경하는 위대한 지휘관이었음을 서술하고 있다.


한 저명한 전쟁사가는 2차 세계 대전에서 명장이라고 타이틀을
붙여줄만한 장군들은 대부분 독일에서 배출되었다고 했었다.


미국의 패턴이나 영국의 몽고메리 등 다른 나라의 명장들도
있었지만 독일에서 배출된 명장들은 전쟁 중 타 국가들의 명장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도 더 많았다는 것이다.


2차 세계 대전사를 지휘관 평가 위주로 분석하면서 읽어보면
단연코 일리가 있는 말이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만슈타인 원수에 필적할만한 장군은 역시 독일
장군인 롬멜 원수나 소련의 쥬코프 원수 정도가 아닐까 한다.
[아이젠하우어 원수가 세계 최고의 명장으로 쥬코프를 지목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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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만슈타인을 격찬한 이 책에서 리델하트는
롬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냉혹한 평가를 했다.

지금 한국의 일부 밀리터리 블로거들 사이에는 롬멜이 원수의 그릇이
아니라 대대장이나 연대장급의 인물이라는 잘못된 평가 절하의 인식이 있는데, 이의 출발점 중에 리델하트의 평가가
있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롬멜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아주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은 후에
이 블로그에서 밝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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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 대전 최고의 명장이라는 평가를 받은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에 대해서 글을 써본다.


만슈타인[1887년 11월 24-1973년 6월9일]은 원래 만슈타인 가문의
출신이 아니었다.


그는 1887년 프러시아 군의 포병 장군이었던 프릿츠 에리히 폰 르윈스키의 열 번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어머니 헤렌 폰 스페링의 막내 여동생이자 이모인 헤트빅 폰 스펠링과 그의 남편으로 역시 귀족 출신 장군인 게오르그 폰 만슈타인
중장에게 바로 양자로 입양이 되었다.


그가 르윈스키라는 이름 대신 만슈타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내력이었다.


만슈타인의 양부모는 오랫동안 자식이 없었기에 두 가족 사이에는
만슈타인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열 번째 아들은 만슈타인 가문에
양자로 보내기로 결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친부모와 양부모 모두 무인 가족이었기에 그가 군인의 길을 가는 것은
숙명이었다.
그는 열 세 살 때부터 6년간 유년학교[Kadettenanstalt]에서 수학한 뒤 1906년 소위로 임관하였다.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실전을 겪으면서 중상을 입기도 했던 그는
종전이 될 때 대위였었다. 전후 대폭 축소된 독일군에 계속 남아서 근무했었던 그는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고 독일의 재군비를 서둘렀을 때 독일 참모 본부에 있었다.

그는 1935년 참모 본부의 작전 국장을 맡게 되었다. 그는 이 직에 있을 때 중요한 프로젝트 하나를 완성했다. 보병 지원 전문의 돌격포[sturmgeschutze-자주포] 개발을 제안해서 완성시킨 것이다.

자주포는 1차 세계 대전 때 영국이 완성시켰지만 전차의 개념보다도 문자 그대로 자주 포병의 개념이 강했었다. 만슈타인은 이 자주포에 전차를 대신하는 장갑 돌격포의 새로운 개념을 부여해서 제안했었다.


                                          

                                        전쟁중 최대로 양산되었던 3호 돌격포


전차의 성능을 발휘하되 복잡한 포탑을 제거해서 생산 단가를 대폭 낮춘 이 돌격포 개념은 나중에 소련과 미국 등에서도 채택되었을 정도로 아주 성공적인 독일 무기 개발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폴란드 침공 작전>

히틀러가 주도한 2차 세계 대전의 서곡인 폴란드 침공 시 1939년 8월 18일 8사단의 사단장의 직책을 마친 만슈타인은 남부 집단군 사령관 게르드 폰 룬드스테드의 참모장이 되었다.


 

                           독일 보전 합동의 공격 -전쟁 후반의 사진이다.


그는 유능한 작전참모 군테르 브루멘트릿과 함께 폴란드
침공 작전을 입안했었다.


만슈타인은 이 때부터 기갑 부대의 돌파력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집단군이 가진 기갑 부대를 모두 발터 폰 레이케나우 장군의 10군에 집중해서 10군을 선봉으로 폴란드의 대군을 비즐라 강 서쪽에 포위할 돌파 작전을 입안했고 룬드스테드의 승인으로 이 작전 계획에 따른 폴란드 침공 작전이 1939년 9월 1일 감행되었다.


폴란드 남부의 대 포위 전략이 성공하여 남부의 폴란드 군은 완전 포위되었고 이들을 가두어 놓은 독일군은 거칠 것 없이
쾌속으로 전진했다.


1939년 9월 27일 폴란드는 항복하였다.
만슈타인은 폴란드를 잠재적인 큰 적인 소련을 상대하기 위한 완충지대로 남겨 놓는 것이 상책이라는 개인적인 생각을 했었지만 전쟁광 히틀러에게는 통하지 않는 개념이었다.


폴란드에서 선보인 독일의 기계화 부대와 항공대의 번개 같은 진격은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독일이 폴란드 전역에서의 거둔 대승리는 만슈타인이라는 천재가
입안을 주도했었던 '기갑부대의
집중 사용에 의한 돌파'라는 혁명적인 전략 개념이 큰 역할을 하였던 것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전차라는 것은 포병과 같은 보병의 지원수단이었고
전차 부대의 집중 사용이라는 것은 아주 새로운 개념이었다. 리델하트가 제창하고 독일 구데리안이 추종했었지만 이를 적극 채택해서 실전에서 시도해본 사람은 아직 없었다. 


만슈타인의 작전 입안으로 독일에 의해서 폴란드 전선에서 최초로 시도되었고, 대성공한 이 전략은 전격전[blitzkrieg]라는
이름으로 세계 전사에 최초로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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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열혈국방 트랙백 0 : 댓글 0


세계적 제약회사 화이자(Pfizer)는 협심증 환자들에게 흔하게 발생하는 질환인 흉통의 완화제로 기존에 많이 사용하던 니트로글리세린계 약을 대체할 신약 개발을 완료하고 병원에서 환자들을 상대로 임상 실험 중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험도중 유독 남성 환자들에게서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이상증세를 발견하였습니다.


                                         다국적 제약회사인 화이자
                         제약산업은 아직까지 한국이 세계적 수준에 뒤진 분야 중 하나입니다.


환자 A  "마님 앞에서 마구 마구 도끼질을 하면서 장작을 패고 싶다는..."

환자 B "오! 마이 갓뜨 ~ 내 나이 70인데 고목나무에 꽃이 피고 있다는..."

환자 C "아무래도 협심증 때문이 아니고 엉뚱한 곳에서 돌연사 할 것 같다는..."


                           임상실험 중 환자들로부터 엉뚱한 푸념을 듣게 됩니다.


본래 약의 개발 목적과는 달리 남성에게만 나타나는 곤란한 부작용과 이러한 부작용에 어쩔줄 모르고 난감해하던 남성 환자들의 푸념(?)에 화이자는 약의 개발 방향을 180도 돌려 전혀 다른 곳으로 전환합니다. 이 약은 결국 다른 용도의 치료제로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자신감을 상실한 남성을 위한 약으로 개발방향이 바뀝니다.


이 약의 효능은 시판 이전부터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판매소식이 뉴스를 통해서 적극 알려질 만큼 세계 제약시장에 찬란하게 데뷔합니다. 그것은 신체의 노화나 각종 질환으로 자신감을 잃고 있던 세계의 수많은 남성들에게 한줄기 복음이었습니다. 바로 특유의 파란색으로 널리 알려진 비아그라입니다.


                            처음 목적과 달리 우연히 비아그라가 탄생을 하였고,
                      약으로는 보기 드물게 짝퉁까지 양산 될 정도로 히트를 쳤습니다.


비아그라는 주객전도라는 말이 너무나 어울릴 만큼 본래 개발 목적과는 다른 용도로 세상에 등장했고, 약으로는 보기 드물게 짝퉁까지 대량 생산되어 은밀히 유통 할 정도로 베스트 셀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무기의 역사를 살펴보면 비아그라처럼 본연의 목적과는 달리 엉뚱한(?)곳에서 빛을 발한 무기들도 많습니다.


                                  아직도 그 명성을 전하는 88mm Flak


1933년 정권을 잡은 히틀러는 베르사유조약을 일방적으로 폐기하고 공개적으로 독일의 재 군비를 추진하였습니다. 당시 독일군이 방공포로 사용하던 것이 75mm Flak이었는데 조약폐기 후 이를 대체할 새로운 대구경의 대공포를 비밀리에 개발 완료하고 이를 실전 배치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무기의 역사에 길이 명성을 남기게 된 88mm Flak 대공포였습니다.


                               적기를 격추하기 위해 작렬하는 88mm Flak


이 대공포는 제2차 세계대전 개전 초기부터 독일의 무조건 항복으로 종전 할 때까지 독일의 영공을 방어하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였던 훌륭한 대공포였습니다. 그런데 많은 매니아들은 88mm Flak을 본연의 목적인 대공포보다는 연합군 전차에게 가장 무서운 저승사자였던 명품 대전차포로 기억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88mm Flak은 명품 대전차포로도 그 명성이 자자합니다.


전사를 읽어보면 이놈이 본래의 용도를 벗어나 대전차포로 사용되게 된 것도 비아그라처럼 극적이었는데 시작이 다음과 같이 알려져 있습니다. 독일 전격전의 신화가 만들어진 1940년 서부전선에서의 일이었습니다. 아라스(Arras)에서 신나게 진군하던 독일 기갑부대가 갑자기 등장한 마틸다 重전차로 중무장한 영국군에 의해서 진격이 멈추어지게 되었습니다.


                    마틸다전차를 요격하면서 신화가 시작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당시 독일의 주력이었던 1,2호 전차나 보유하고 있던 대전차 화기로 마틸다 전차를 파괴할 수 없자 다급히 대공포로 사용하던 대구경의 88mm Flak로 마틸다 전차를 요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독일군도 놀랄 만큼 적전차를 손쉽게 격퇴하였고, 이때부터 이놈이 자기의 본분을 망각(?)하고 대전차포로도 사용 되었다고 합니다. (* 스페인 내전에서 처음 사용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대전차포 용도로 사용되었는지에 대해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무수한 탱크 킬 마크 (Kill Mark)만으로도 그 명성을 유추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아프리카 전선에서 롬멜 (Erwin Rommel 1891~ 1944)이 지휘하던 독일 아프리카 원정군은 이몬을 이용하여 무려 200여대의 전차를 격파하여 연합군으로 하여금 88mm의 공포라는 소리가 나오게 만들었습니다. 이후 대공포로써의 임무도 물론 성실히 하였지만 독일군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다니며 최고 저격수의 임무도 수행하였습니다. 더욱이 최고의 전차인 티이거나 쾨니히스티이거의 주포로도 채택되어 그 명성을 길이 전하고 있습니다.


                                 88mm Flak은 전선의 비아그라였습니다.


개발 목적과는 달리 오히려 엉뚱한 (?) 곳에서 더 효과적인 약발을 보인 88mm Flak은 실의에 빠져 있던 남성들의 구세주로 탄생한 비아그라처럼 독일군을 구원하는 수호신이 도었고 그 명성을 길이 남겼습니다. 따라서 88mm Flak을 전선의 비아그라라 칭하여도 결코 모자람이 없다 할 것입니다.


           좌절하지 마십시오. 우리 인생에도 88mm Flak이나 비아그라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일생도 그런 것 같습니다. 사는 도중 어렵고 실패의 과정도 분명히 있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더 큰 성과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혹시 일시적으로 어렴움을 겪거나 곤란한 점이 있더라도 좌절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우리 삶에도 전혀 생각지도 못한 88mm Flak이나 비아그라가 분명히 생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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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비 트랙백 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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