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 전쟁사 (독일 만슈타인 장군) -제4편-


                                                만슈타인


히틀러에게는 호전적인 독재자들에게 나타나는 공통적인
병리현상인 과대 망상증이 있었다.

리델하트의 책에서 밝히지는 않았지만 바로 이 무렵 히틀러는
“내 주위에 문관이건 무관이건 나보다 나은 인간이 한 명도 없다!”라고 큰 소리친 일이 있었다.

만슈타인의 전략으로 성공한 아르덴느 숲 돌파 작전을 자신의
능력에 의한 것임으로 착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까 히틀러의 과도한 작전 개입은 만슈타인의
천재성이 가져온 괴상한 산물(産物)일 수도 있다.

전쟁 지휘를 일선 지휘관에게 맡기라는 만슈타인의
고언은
히틀러와 그의 주변 나치 간신들이 듣지 않았다.

만약 그렇게 해주면 히틀러에 대한 불신감이 짙어져 가는 군부를
통제하기가 힘들다는 것이었다. 히틀러가 적극 공감하는 소리였다.

만슈타인은 몇 번이고 진언했고 히틀러는 몇 번이고 거부했다.
속 좁은 히틀러는 불쾌했을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이런 명장을 물리치기가 너무 아까워서 차마 그를 해직시키지 못하고 연기해 왔다.


                                              독일의 돌격포


게슈타포 사령관 히믈러, 그리고 선전상 겝벨스들이 거들며
만슈타인을 모략해댔다.

히틀러는 1944년 3월 31일 만슈타인을 파면하고 이틀 뒤에 그 자리에 그의 말을 잘 듣는 모델 장군을 임명했다.

같은 시기 히틀러의 과도한 작전 개입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크라이스트 원수도 해직되었다.

만슈타인은 그의 저서의 대미(大尾)를 부하들과 이별할 때의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모델 장군과 인수인계를 마친 그는 4월 3일 정든 부하 전우들과
이별을 고하고 남부군 사령부가 있던 르보프를 떠났다. 그가 사랑했던 부하들은 모두 기차 역까지 나와 아쉬워하며 그와 석별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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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누가 열차 밖에서 나를 불렀다

나의 전용기 Ju-52의 조종사였던 렝거 중위였다. 그는 갖가지 악천후와 어려운 비행 조건에서도 나를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었던 유능한 조종사였다.

그는 이미 전투기 부대로의 전출을 상신해 놓은 상태였다.
중위 계급의 조종사는 최전선에 보내져서 전사율 높은 출격에 내보내지는 그런 다급한 상황이었다.

달리는 열차 창문에 대고 그가 외친 말이 부하들이 존경하는 사령관에게 보내는 마지막 고별사였다.

“원수님 ! 오늘 제 비행기에서 크리미아 방패 표식  -히틀러가 수여한 크리미아 전투 참전 기장- 을 떼어 버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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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U-52. 독일군 소속이 아니라 현재 루프트한자 소유로 민간 비행기다.



말단 장교인 중위가 만슈타인을 해고한 히틀러에 대한 원망을
표시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방법 밖에 없었을 것이다.

만슈타인은 독일로 돌아와서 군을 떠나 조용히 은거생활에 들어갔다.
그가 해임된 후 1944년 7월 슈타이펜베르그 대령에 의한 히틀러 제거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다.

수 십 명의 장교들이 이 계획에 동조했다가 죽임을
당했다. 롬멜 원수도 그 중 하나였다.

만슈타인도 이미 그 전 해에 이 계획에 참여하도록
부탁을 받았었지만 그는 무슨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취지에는 공감한다면서도 참여를 거절했었다.


"Preussische Feldmarschalle meutern nicht!“
[“프러시아의 원수는 반역 같은 짓을 하지 않네!”]

히틀러가 엉망진창의 전쟁을 하는 것을 알면서도 만슈타인의 프러시아 적인 군인 정신은 감히 최고 사령관에게 반란을 꾀하는 것을 생각지도 못하게 했던 것이다.

독일이 패하자 그는 접근해오는 소련군을 피해 가족을 데리고 서부 전선의 영국군 몽고메리 원수에게 직접 항복했다.

소련은 영국에게 만슈타인의 인계를 집요하게 요청해왔다. 영국이 소련의 압력에 응하지 않으려면 그를 직접 재판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말단 부하가 전쟁 상황에서 저지른 학살 사건에 책임을 지고 법정에 섰다.

만슈타인은 18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그에게 호의적인
영국 여론의 압력에 의해 12년으로 감형되었다.

그가 훌륭한 장군이었음을 알아 주는 처칠 수상과 몽고메리 원수,
그리고 리델하트가 그를 공공연하게 옹호하였다. 수상에서 물러나 재야인이 된 처칠은 그의 변호사 비용까지 후원해 주었다.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영국군에게 비참한 대패를 연달아
안겨 준 롬멜에 대한 인식이 별로 좋지 않았던 영국에서 만슈타인에 대한 인식만은 아주 좋았던 것이 이색적이다.

영국군 형무소에 구금되었던 그는 4년 후에 석방되었다. 서독군이 재무장하게 되자 그는 당시 수상이던 콘라드 아데나우어 원수에게 초빙 받아 군의 조직 편성과 나토군 편입에 관한 조언과
입안을 했었다.

이 일이 끝나자 그는 바바리아 주로 이주해서 조용히 살았다.
명장이며 청렴했고 부하들의 존경을 받았던 그를 숭배하는 서독군 장교들과 나토군의 각 군 지도자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았다.

독일 연방군[BUNDESWEHR,히틀러 시절 독일 국방군은 WERCHMACHT다]에서는
만슈타인이 실질적인 참모총장이라는 우스개 소리까지 나왔었다.

그는 1973년 85세에 심장마비로 작고해서 그의 큰 아들의 곁으로 갔다.
큰 아들 게로 중위는 1942년 이미 동부 전선에서 전사했었다.

그는 1953년 전범으로 수감되었던 영국군 형무소에서 석방되자
1955년 '잃어버린 승리[Verlorene Siege]'라는 제목의 책을 집필했다.


                                                잃어버린 승리


이 책은 1958년도에 미국에서 'Lost Victory'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는데 세계에 이 영어제목으로 널리 알려지고 세계의 군사 전문가들 사이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동부 전선의 불리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승리를 잃지 않았던 만슈타인이
히틀러의 과도한 간섭과 미친 전쟁 지도만 없었더라면 자신을 비롯한 전문적인 군사 지식을 가진 독일 장군들이 틀림없이 승리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나타나는 제목이었다.

리델하트가 독일 장군들을 인터뷰했을 때도 꼭 같은 말을
들었는데 이는 만슈타인의 책 출간보다 앞선 것이었다.

만슈타인의 개인적인 자신감이 아니라 대 소련전의 최전선에서
싸웠던 독일 장군들이 공통으로 갖는 인식이었기에 이런 제목을 붙였을 듯하다.

자신이 명장이라는 과대망상에 빠져 마구잡이 간섭으로 전쟁을 망친 히틀러는 그에게 엉뚱한 자신감을 가지게 만든 아르덴느 숲에서 또 한 번 자신의 군사적 재능을 도박 해보고자 했다.

아르덴느 2차 작전이 그것이다. 우리들한테는 발지 전투로 알려졌다. 독일군 총사령관 룬드스탠드 전투라는 이름도 있다. 만슈타인이 제안했고 히틀러가 승인했던 1차 아르덴느 돌파작전을 그대로 답습한것이다.

숲을 관통해서 미군과 영국군을 양분하고 벨기에 안트워프 항까지 직통하는
작전이었는데
망해가는 독일이 가진 전투 자원을 모두 동원해서 정면의 미군을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아르덴느 숲의 미군


전투 자원을 다 써버린 독일은 연합군의 진격을 제대로 제지할 힘이 없어서 1945년 5월 히틀러는 자살하고 전쟁은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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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 대전 전쟁사 (독일 만슈타인 장군) -제 3 편-



                                    만슈타인의 작전회의


스타린그라드 6군 구출 작전

1943년 2월 17일. 히틀러가 갑자기 소련 전선으로 날아왔다. 우크라이나의 남부 집단군 사령부를 방문한 히틀러는 간부 회의를 소집하고 만슈타인을 새로 구성한 돈[DON] 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그에게 '겨울 폭풍 작전'을 맡을 것을 명하였다. 겨울 폭풍 작전은 스타린그라드에서 엄청난 소련군의 대병력에 포위 된 프레드리히 폰 파우루스의 6군을 구하는 것이었다.

겨울 폭풍 작전은 그 이전인 1942년 12월 12일 헤르만 호드 장군의 제 4 판저 군과 루마니아 군이 이미 시도 했었지만 스타린그라드를 겹겹이 둘러싼 소련 쥬코프 원수의 강력한 외곽 포위망을 뚫지 못했었다.

만슈타인이 새로 구성한 돈 집단군의 단위부대들은 오랜 전쟁으로 지치고 장비 손실도 많아 이런 막중한 작전을 실행하기가 무리였다.

그런 제약에도 불구하고 만슈타인은 세 개의 판저 사단과 57군단 예비 부대로서 소련군의 막강한 포위망을 뚫고 또 뚫어 스타린그라드의 파우루스 6군 30마일 지점까지 진격할 수가 있었지만 그것이 한계였다.

만슈타인 군은 1942년 12월 20일 스타린그라드 인접 아크사이라는 작은 시골 읍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한 소련군을 돌파 할 수가 없었다.



                             스타린그라드의 폐허가 된 거리에서 돌격하는 소련군

 

만슈타인은 스타린그라드에 포위된 6군 사령관 파우루스에게 포위망을 뚫어서 만슈타인의 57판저 군단과 링크하라고 권고했지만 파우루스는 준비만 한 채 주저하다가 이 유일한 탈출의 기회를 그냥 흘려 버렸다.

탄약과 연료 부족이 그 이유였다지만 스타린그라드를 사수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이 파우루스를 그렇게 우유부단하게 행동하게 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우루스가 우물쭈물하고 있는 사이 소련의 대군은 스타린그라드 외곽에 간신히 진출했던 만슈타인의 구원군을 격퇴하였다.



하르코프 전투


스타린그라드 함락이후 전면적으로 전황이 뒤 바뀌어서 소련은
공격을 하고 독일은 후퇴하는 양상이 되었다.

1943년 2월 히틀러는 소련군이 대공세를 취하는 소련 남부 전선의
전방 부대를 재편성해서 남부 집단군이라고 명명하고 만슈타인 원수를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만슈타인 원수는 소련군이 남부군의 북방에서 100km나
독일군 후방으로
밀고 들어온 것을 지켜보았다.

만슈타인은 기회를 보다가 1943년 2월 21일 승승장구하는 소련군의 남쪽 측면은 강하게 들이쳤다.
 

         하르코프 돌출부에 대한 만슈타인의 측면 급습. 독일에서 증원된 SS 군단이 큰 활약을 하였다.

유명한 하르코프 전투의 시작이었다. 독일군 측에서는 이 지역이 도네츠 분지였었기 때문에
도네츠 전투라고 호칭한다.

소련군은 너무 진출한 격이었던지라 측면을
두들겨 맞고 큰 혼란에 빠졌다.

만슈타인의 남부 집단군의 공격은 새로 배속 받은
SS 판저 군단의 지원과 호드 장군의 4 전차군의 지원에 힘입어 큰 포위망을 형성하였고 마침내 하르코프와 벨고라드를 점령하였다.

3월 16일까지 계속된 이 전투에서 1943년 2월 21일 만슈타인의
집단군은 로코프스키 원수가 지휘하던 소련군의 52개 사단을 와해시켜 버리고 70,000-80,000명의 소련군과 소련군 전차 615량을 섬멸하였다.

이 전투는 독일군이 대소 전선에서 거둔 마지막 대승이었다.



쿠르스크 전투


히틀러가 열세였던 소련과의 전쟁을 결정적으로 뒤엎을 야심으로 추진한
다음의 쿠르스크 전투에서 만슈타인이 남부 공격군으로 참여하였다.

쿠르스크는 독일군 지역으로 혹처럼 툭 튀어 나온 소련군의 점령지였다.
이 혹부리 부분을 남쪽과 북쪽 양면에서 집게 작전으로 공격하여 소련군의 연결부분을 절단하고 전방에 포위 된 소련군을 격멸하자는 계획이었다.

시타델[CITADEL-성채] 작전이었다.
그러나 신형 자주포의 출고를 기다리느라 작전이 무한정 연기되었다. - 이 아이디어는 북부에서 공격했던 모델 장군의 건의였다고 한다. 큰 실책이었다- 소련군은 작전이 연기 된 틈을 타 쿠르스크를 막강한 요새로 변화시켰다.



비록 독일이 돌격포의 원조였지만 소련도 대량 생산했었다. 이 돌격포는 152mm 포 -전차 보다도 자주포에 가깝지만 장갑이 있다. 스타린 탱크의 차체를 기본으로 제작되었다.


쿠르스크 방어 소련군 사령관은 로코프스키와 바투틴이었지만 모스크바 방어 사령관이었던 게오르규 쥬코프 원수가 후방에서 막강한 예비 병력을 거느리고 대기하고 있었다.

기습의 효과를 잃었다고 생각한 만슈타인은 히틀러에게 작전 취소를
건의했지만 히틀러는 그대로 강행하였다.

1943년 7월 5일 독일군은 작전을 미리 알아챈 소련군의
선제 포병 사격을 무릅쓰고 공격을 개시했었다.

남부 방향의 공격을 담당한 만슈타인은 예정대로 소련군의
거센 저항을 분쇄하면서 진격하였다. 그러나 북부 방향의 공격을 책임진 크루게와 모델 군의 진격이 소련군의 강한 저항으로 지지부진하였다.

집게 포위가 형성되지도 않았고 미군이 지중해 시시리 섬에
상륙하자 히틀러는 서둘러 시타델 작전 중지를 명령했다.

만슈타인은 힘들더라도 전 러시아군이 이 쿠르스크에 집결해있는 만큼
전세를 뒤집을 호기이니 힘들더라도 전투를 계속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소련군은 쿠르스크에서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즉각 반격으로
전환해서 전 소련의 대지를 비질하는 듯한 대공세를 강화했다.

비록 미완성으로 끝났지만 남부 공격을 했던 만슈타인 군은
자기들이 입었던 손실보다 훨씬 많은 피해를 소련군에게 주었다.

전후 쿠르스크 방어 사령관 게오르그 쥬코프 원수는 만슈타인의
지휘 능력을 크게 평가하는 발언을 했었다.



드니에퍼 강 철수 전투


1943년 9월 만슈타인 군은 추격하는 소련군에게 연속적인
타격을 주면서 드니에퍼 강의 서쪽으로 축차 후퇴하였다.

1943년 10월부터 1944년 1월 중순까지 만슈타인의 남부군은 유럽에서
세 번째로 긴 드니에퍼 강의 천연 장벽에 의지해서 소련군의 공세를 막아 내며 대소 전선의 남부를 안정시켰었다.

1943년 겨울부터 소련군의 대공세가 계속되었고 소련군은
드니에퍼 강의 상류 지역 도강에 성공하여 주요 도시인 키에프를 탈환하였다.



                                       소련군의 드니에퍼 강 도강작전


1944년 만슈타인은 소련의 거센 공세를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철수를 개시했다.독일의 약해진 국력은 그에게 버틸 병력도 화력도 지원해 줄 여력이 없었다.

히틀러가 만리장성과 같은 방벽으로 삼으려던 드니에퍼 방어선은
이렇게 해서 무너져 버렸다.

1944년 2월 중순 만슈타인은 히틀러가 무슨 일이 있어도 사수(死守)하라고 지시했던 코르순 포켓에서 포위 될 위험에 처해있던 그의 휘하 11군과 42군의 6개 사단, 56,000명을 철수시켰다.

히틀러 말대로 그대로 있었으면 이 병력은 스타린그라드의
6군과 같은 꼴이 되었을 것이다.

히틀러는 불같이 화를 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인지라
마지 못해
추인하였다.

철수한 만슈타인과 히틀러의 불화가 이때부터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무조건 사수를 명령하며 점령지역 고수에 집착한 히틀러와 달리 만슈타인은 그런 고정 방어는 전력이 약해진 독일군에게 무의미하니 대신 독일군의 주특기인 기동력을 활용한 기동 방어를 해야 한다고 주장해왔었다.

즉 영토 확보에 신경을 쓰지 말고 소련군이 몰려오게 유인하고
후퇴하면서 계속 기회를 보다가 측면에서 크게 한 방을 먹여 괴멸적인 타격을 입히자는 것이 만슈타인의 기동 방어 개념이었다.

불화가 계속되자 만슈타인은 그 간 독일 장군들이 내면에
품어왔던 불만을 자신이 나서서 표출하기 시작했다.

그 불만은 히틀러의 도를 넘는 작전 개입에 대한 불만이었다.
리델 하트는 책에서 그는 한 독일 장군에게 독일군이 몰락한 동부 전선에서 혹시 독일군이 승리했을 가능성이 있었는지를 물어 보았을 때 그 장군이 했던 확신에 찬 대답을 소개했다.

그 장군은 히틀러의 과도한 개입만 없었으면 소련 전선에서
독일군은 틀림없이 승리했을 가능성이 있었다고 대답했다.

군사적인 기초 지식도 없었고 전선 정보도 어두운 히틀러는
먼 후방에서 계속 현지 사령관이 받아들이기 함든 무리한 요구를 해서 전쟁을 엉망으로 만들어왔다.

앞 뒤 생각하지 않고 사수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히틀러의
전매특허식 전략이었다.
[영어로 말하면 "Victory or Death! -그의 유명한 단골 구호다.]

                                                   히틀러와 만슈타인


스타린그라드에서 6군을 다 소멸시켜 버린 것은 히틀러의
이런 무리한 명령의 결과였다.

는 사수라는 무리한 명령을 너무 쉽게 남발해댔다. 리델하트가 인터뷰했었던 한 독일 장군은 히틀러에게 '전략’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욕심’만 있었을 따름이었다라고 평했었다.

리델하트의 책은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켰지만 폴란드 침공이나
프랑스 침공 전까지는 과도하게 작전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프랑스 침공 때부터 간섭을 시작하더니
러시아 침공 때부터 과도하게 전쟁 수행에 끼어들어 일일이 콩 놓아라 팥 놓아라 하며 아예 일선 지휘관들을 제쳐놓고 전쟁 지휘를 직접하기 시작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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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 대전 전쟁사 (독일 만슈타인 장군) -제2편-


                                       만슈타인 원수


아르덴느 돌파 작전


폴란드를 항복시킨 독일의 다음 목표는 프랑스였다.
원래 독일에는 프랑스를 침공할 때 북쪽의 벨기에, 네델란드 등을 유린해버리고 프랑스의 측면을 침공한다는 슐리히펜 플랜이라는 것이 있었다.

어차피 독일과 프랑스의 국경에는 프랑스가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부어서 만든 마지노 요새 선이 있어서 정면 돌파가 힘들었었다.

이 슐리히펜에 계획에 따라서 fall gelb(황색 작전) 계획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만슈타인은 이 작전의 입안에 관여했으면서도 이미 세계에 널리 알려진 슐리히펜 계획에 따라 그대로 벨기에를 침공한다는 것은 현명한 작전이라고 보지 않았다.

이미 영국과 함께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한 프랑스는 프랑스와 벨기에 국경에 대군을 집결해놓고 독일군의 공격을 대비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는 독일 기갑부대의 창시자 하인즈 구데리안 장군과 함께 의논하여
공격 예정 지역인 독일-벨기에 국경 아래에 있는 프랑스령 아르덴느 숲의 우회 침투를 조사해본 후 이 작전을 상신했다.

이 곳은 삼림이 울창하여 통과 불능지역이라고 판단한 프랑스가 아무런 방어 준비를 해놓지 않은 지역이었다.

이 곳만 통과하면 뮤즈강까지는 거칠 것이 없이 진격할 수가 있었다.
벨기에와 프랑스 지역에서 슐리히펜 계획에 따라 밀집한 영불군과 남프랑스의 병력을 양분한 후 기갑 부대를 진격시켜 덩케르크로 직행한다는 작전이었다.

하지만 그의 의견은 이미 히틀러가 결정한 작전을 뒤집을 의사가
없었던 간부들에 의해 배척 당했다.

하지만 그는 룬드스테드 참모장에서 동부 전선의 38군 사령관으로
전임하면서 히틀러에게 신고하는 기회를 이용해서 이 계획을 강하게 상신했다.

히틀러는 원래 귀족 출신에 지적(知的)인 이미지가 강한
만슈타인을 도도하다고 보고 별로 좋아 하지 않았었다.[귀족은 이름에 폰-von-이 붙는다.]

히틀러가 자신처럼 평민 출신인 에르빈 롬멜 원수와
하인즈 구데리안 대장을 좋아했던 사실과 대조된다.

만슈타인이 끝까지 나치당에 입당하지 않았던 것도
히틀러가 그를 싫어했던 이유중의 하나였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심 더 기발하고 공격적인 작전 계획을 찾던 
히틀러는 이 작전 계획에 흥미를 가지고 검토해 본 뒤에 기존 작전 계획을 포기하고 이 공격적인 계획을 받아 들였다.

결국 이 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어서 프랑스는 항복하였고, 영국군은 덩케르크에서
장비를 몽땅 잃고 영국으로 철수하는 참패를 당했다.

만슈타인의 작전 계획은 만슈타인 계획이라는 공식 명칭이 있지만
후에 식클 플랜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지게 된다.[Sichelschnitt -sickle cut-] 식클은 유럽의 농기구인 낫을 말한다. 밀 보리같은 농작물을 베듯 프랑스를 두 쪽으로 베어서 두 동강이 낸다는 뜻으로 붙인 것이리라.

유럽의 석권에 성공한 히틀러는 기분이 좋아져서 이 아이디어를 낸
만슈타인을 대장으로 진급시키고 그에게 훈장을 수여하였다.


1941년 2월.
만슈타인은 56 판저[panzer; 기갑부대]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히틀러는 그해 6월 22일 대군을 동원해서 소련을 침공하였다.

그의 몰락을 가져다 준 치명적인 실수였었던 이 소련 침공 작전은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명명되었다.

독일 참모 본부나 일선 장군 대다수가 이 침공계획을 반대했었지만 이미 정신이 이상해진 히틀러는 병참이나 보급 또는 수송 등의 문제를 가볍게 무시해버렸다.

세계의 강대국인 미영[미국은 아직 참전전]과 겨루고 있는 판에
또 광활한 영토와 자원을 가진 소련과 또 다른 전선을 만든다는 것은 지각없는 짓이었지만 독일 장군들이 히틀러의 장기인 말솜씨와 그의 카리스마에 눌려 전쟁에 끌려 들어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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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독일군이 박살 난 것은 영미가 공격했던 서부전선이 아니라
소련과 겨루었던 동부전선에서였다.

이 전쟁에서 독일군 손실 병력의 70퍼센트가 발생했었다.
소련은 줄기차게 자기들이 독일을 쳐부순 주인공이라고 했었다. 요즈음은 사가들이 이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해주는 추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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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이미 두 번의 서부 전선 전역(戰役)에서 두각을 보인 
만슈타인은 대 소련 전에서 유감없는 천재 명장의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공격의 포문이 열리자 마자 단 이틀 사이에 100마일을 진격해서
두 개의 결정적인 전략 목표인 드비나 강의 두 다리를 점령하였다.

1941년 9월 그는 11군 사령관으로 승진 발령되었다. 전 사령관이었던 쇼베르트 장군은 이 블로그 앞에서 소개한 바 대로 그의 연락기가 지뢰 밭에 내리는 바람에 횡사하였다.




크리미아 -세바스토폴 요새 공성 전투


전투 지휘관으로서의 그의 눈부신 전공은
크리미아 반도 점령 - 세바스토폴 공성 작전에서 크게 꽃을 폈다.

크리미아 반도는 소련 영토가 흑해로 뻗어 나온 반도이며
소련 침공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었다.

만슈타인의 11군은 41년 10월 28일 소련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이어서
크리미아 반도 전역을 휩쓸며 10여일 만에 석권해버렸다.

그러나 견고한 요새로 둘러싸인 세바스토폴 항구는 맹렬히
저항하며 버티었다.

이 곳을 점령하지 않고서는 크리미아 점령이 의미가 없다고 본
만슈타인은 점령 작전을 추진하였다.

1941년 10월 30일 시작한 공성전은 의외로 고전하면서 두달이나
허비하였다.

1941년 12월 26일 크리미아 반도의 목 부분에 해당하는 케르크 해협의
테오도시아에 소련군이 기습 상륙해서 만슈타인 군을 위협하였다.

이 기습 상륙 작전은 독일군이 모스크바 교외에서 공격의 기세가 꺽였던
겨울 위기 때 찾아왔는데 적의 반격은 대규모였고 매우 거셌다.

이 생각지도 않았던 배후 기습에 만슈타인은 세바스토폴 공략을
중지하고
대부분의 부대를 크리미아에 상륙한 소련군을 공격하는데 투입하였다.



                                                크리미아 전투
               왼쪽 아래에 세바스토폴이 보이고
오른쪽 육지에 가까운 쪽에 케르크 항이 보인다.


다음해 5월 18일 소련군은 결국 17,600명의 전사자와 347량의 전차, 그리고 3,500문의 야포를 유기하고 상륙하였던 케르크 해협을 되건너 패주하였다.

배후의 소련군을 평정한 만슈타인은 다시 세바스토폴 공략을
준비하였다.

세바스토폴 요새를 재 공략하면서 만슈타인은
독일 본토에서 긴급히 수송해온 800mm 대구경 열차포 '구스타프'를 사용했다. 이 포는 프랑스의 마지노 요새를 부수기 위해서 특별히 만든것이었지만 소련 전선으로 출동했다.



                                        거대 폭탄 45발을 발사했었다.


1904년 여순 공략전에서 일본군이 280mm 요새포를
요새화한 여순항에 사용했던 것에서 영감을 받았는지 모른다.

독일 공군의 맹폭하에 5월 18일 요새 공격이 다시 개시되었다.
세바스토폴 외곽 방어선이 6월 16일 돌파되었고 치열한 전투가 잇따른 뒤인 7월 4일 드디어 세바스토폴이 점령되었다.

히틀러는 이 소식에 기분이 좋아져서 만슈타인을 세바스토폴의
정복자라고 치켜세우며 만슈타인을 원수로 특진시켰다.




레닌그라드 포위 전투


그가 난공불락인 세바스토폴의 점령에 성공한 것을 본
독일 참모 본부는 그 때까지 점령당하지 않고 버티고 있던 북쪽 발틱 해의 레닌그라드 공격을 그에게 맡겼다.

만슈타인은 그의 군대 일부와 참모들을 인솔하고
남부 전선에서 북부 전선으로 이동하였다.

레닌그라드 공격은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갑자기 외부의 소련군이 휠씬 우세한 병력으로
만슈타인 군을 공격했다. 만슈타인은 소련의 압도적인 군세를 교묘한 기동으로 피해가며 연속적인 반격을 가했다.




                                      모스크바 기념관에 있는 레닌그라드 항쟁기록화


몇 달간의 전투에서 소련군은 무려 6만 명이나
잃는 참패를 당했다.

그러나 레닌그라드 외부에서 소련군과의 힘에 부치는 전투를 치룬
만슈타인 군은 힘을 소진하여 레닌그라드 공략 작전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레닌그라드 포위전은 1943년까지 계속되었지만 독일이 점령을 포기한
결과로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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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침공로가 되다.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 후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기 때문에 또 다시 독불간에 전쟁이 발생하리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 되었습니다. 긴장된 포니워(Phoney War)기간동안 독일과 프랑스 모두 장차전에 대한 세밀한 구상에 돌입하였습니다. 이때 그들의 공통점은 바로 벨기에로 귀착됩니다.


                                다시 벨기에는 독일과 프랑스의 전쟁터가 되려 하였습니다.


독일은 만슈타인(Erich von Manstein)의 입안으로 마지노선이 끝나는 벨기에의 아르덴느(Ardennes)를 돌파하여 프랑스를 섬멸할 기상천외한 계획을 세웠는데 반하여 프랑스는 다일- 브레다 계획(Dyle-Breda Plan)이라는 오늘날 이스라엘이 자주 사용하는 공세적 방어개념과 비슷한 대응전략을 구상 합니다.


                             1) 1차 대전 당시 독일의 침공로 (슐리펜 계획)
                       2) 2차 대전 당시 프랑스의 방어 게획 (다일-브레다 계획)
                       3)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침공로 (만슈타인 계획 - 낫질 작전)
                       독일, 프랑스 모두 벨기에를 장차 전쟁터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프랑스의 계획은 한마디로 방전으로 승리를 쟁취한 1차대전의 경험이 기반이 되었는데 그 개요는 다음과 같이 요약 할 수 있습니다.

첫째, 독불국경간은 마지노선으로 충분히 방어 할 수 있고, 또한 독일도 이곳으로 주력을 투입하여 침공하지는 않을 것이다.

둘째, 때문에 독일은 1차대전 때와 같이 벨기에 평원을 이용한 침공을 감행 할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 에방에말요새에 막혀 돌파에 어려움은 있을 것이다.

셋째, 이때 연합국 주력(프랑스 1집단군 및 영국 대륙원정군)을 벨기에-프랑스 국경 근처에 배치하였다가 독일이 벨기에를 침공하자마자 즉시 벨기에 영토내로 진입하여 벨기에와 연합하여 독일의 주력을 섬멸한다.


       독일은 앞만 보고 있던 프랑스의 배후를 단절하려 하였습니다. (2차 대전 당시 프랑스군)


이 얼마나 약소국 벨기에를 하찮게 생각하는 발상입니까? 독일은 침공로로, 프랑스는 자국에서의 전투를 회피하고자 약소국 영토를 전장터로 삼고자 하였으니 말입니다. 만에 하나 프랑스가 독일-폴란드 전쟁직후 대독 선전포고를 한 이상 독불전선에서 침공전을 하여야 하는데, 이를 외면하고 자국 내에서의 전투만 회피만 하려는 소극적 대응전략으로 시간이나 보내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당시 벨기에 국민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을까요?


짧은 침략, 긴 고통

드디어 세기의 악당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1940년 5월 서부전선의 전투가 시작 됩니다. 또다시 벨기에는 프랑스를 공격하려는 독일의 침공로에 놓이게 됩니다. 굳이 1차대전 때와 다른 점이 있었다면 이번에는 벨기에 평원이 아닌 아르덴 산악지대가 독일 기갑부대가 지나가는 주 침공로가 되었다는 사실 일 뿐입니다.


                              아르덴의 삼림지대가 독일의 침고로로 예정되었습니다.


벨기에 국민들이 철석같이 믿던 에방에말요새이었지만 독일의 독창적인 공수 특공에 의해 불과 10분 만에 엎어진 거북이 꼴이 되고 맙니다. 단지 85명의 팔슈름야거(Fllschirmjager-제2차 대전 당시 독일의 공수부대)의 특공작전에 의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사전에 은밀히 개척하여 놓은 통로를 지나 독일군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순식간에 벨기에를 석권하여 통과하면서 프랑스로 물밀듯이 들어갑니다.


                               에방에말을 점령한 전설적인 독일의 공수부대 팔슈름야거


그것도 독일 주력도 아닌 기만전술을 썼던 B집단군의 페이트모션에 의해서 말입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이러한 독일 책략에 속아 프랑스군 총사령관 가믈랭(Maurice Gamelin)은 연합군 주력인 프랑스 제1집단군과 영국원정군을 벨기에 영토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명분은 벨기에 구원, 독일을 응징한다는 것이었지만, 진짜 속뜻은 프랑스 영토 내에서 전쟁을 피하고자 함이었습니다.



                                              덩케르크에서 후퇴하는 연합군


물론 결과는 아시다시피 기습적으로 연합군의 배후를 치고 들어가는데 성공한 독일의 포위망에 걸려 나룻배라고 얻어 타고 영국으로 도망가기 급급하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벨기에는 독일의 전광석화 같은 기습에 의해서 장기화된 1차 대전 때보다 물적 피해가 적었다면 그나마 다행(?)이라고나 할 만큼 아주 짧게 침략을 당합니다.


                                                    전쟁으로 사망한 벨기에인들


하지만 이후 점령지로써 독일 전쟁 수행을 위한 수탈을 당하게 되고 대영 전쟁을 전초기지 역할을 하느라 전 국토가 군사기지 노릇을 하게 됩니다. 이웃 네덜란드와 더불어 벨기에는 현재도 집집마다 식량비축 창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독일의 수탈기간 동안 워낙 배가 고팠던 쓰라린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며 벨기에 국민으로 살던 28,000여 유태인들이 가스실로 끌려가게 됩니다.

(계속됩니다.~ 명절 잘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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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비 트랙백 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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