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그들은 뛰었다 !
 
 

요즘 자가운전자들의 공통적인 고민이라면 비싼 기름 값 일 것이다. 더불어 혹한기에 접어들면서 유류로 난방을 하는 가정의 주름살도 깊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보니 오래 동안 잊혀 진 연탄이 최근 몇 년 전부터 각광을 받고 있다. 관련 전문가들의 말을 빌리자면 "1990년대 같은 저유가시대로의 회귀는 원유의 수요와 공급 상관관계로 볼 때 불가능하다."고 하니 이런 고유가는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라 생각된다.
 

               현재의 유류 수급관계로 볼 때 고유가는 계속될 것으로 예측 된다 (사진-중앙일보)
 

더불어 저유가로 인한 풍요로움을 느낄 수는 없겠지만 우리나라의 경제규모가 커져서 이 정도의 유가 수준은 충분히 충격을 흡수 할 수 있으므로 오일쇼크(Oil Shock) 당시 같은 어려움을 겪기는 않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그렇다면 고유가시대의 어려움은 있겠지만 예전의 오일쇼크 당시처럼 경제가 완전히 마비 될 정도는 아니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 하다.

 
                 원유가 한정된 자원이지만 다양한 노력을 병행하면 고유가 시대를 극복할 수 있다.
 

아마 40대 이하에게는 오일쇼크라는 단어가 상당히 생소하겠지만, 1974년과 1979년에 있었던 국제유가급등은 세계경제를 순식간 공황상태로 빠뜨리는 엄청난 충격파를 가져왔다. 특히 1974년 1월 1일을 기점으로 배럴 당 3달러 하던 유가가 14달러(지금 물가 수준으로는 140달러 정도라고 한다.)로 폭등한 제1차 오일쇼크는 성장 초기에 있었고 경제규모도 작았던 우리나라의 생활방식을 순식간 바꿀 정도로 말 그대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1974년 오일쇼크 당시 석유를 얻기 위해 줄 선 모습
 

차량운행 제한, 연탄공급 확대 같은 원론적인 대책 외에도 요즘에는 상상하기 힘든 다음과 같은 대책도 실시되었다. 평일 오후 6시 이전 TV 방송이 금지되었고, 네온사인 간판도 사라졌으며 운동경기의 나이트 게임이 금지되었는데, 이런 조치가 단계적으로 해제된 것이 1980년대 중반 들어서부터다. 이런 고난의 시대(?)에 군이라고 예외 일수는 없었다. 다음은 오일쇼크 당시였던 1974년에 전차병으로 근무하였던 J씨의 경험담이다.
 

                                 한때 국군의 주력이었으나 현재는 퇴역한 M-47전차


그의 회고에 따르면 계속하여 이런 식으로 훈련 했던 것은 아니지만 오일쇼크가 닥치자 당시 전차병들은 훈련장을 뛰는 것으로 기동훈련을 많이 대체하였다고 했다. 5인 1조로 구성된 M-47 전차병들이 한데 모여 자신들의 전차가 기동한다고 가정하고 예정방향으로 깃발을 들고 구보하는 식으로 훈련을 하였던 것인데, 알다시피 지상의 왕자인 전차들이 엄청난 연료를 소모하지만 그렇다고 훈련을 중단할 수 없어서 선택하였던 고육책이었다.

 
                                전차병들이 마치 보병처럼 뛰어다니며 훈련하여야 했다
 

최근 벌어진 북한의 연평도 도발에서 연평부대 K-9 자주포대원들이 보여준 투혼은 평소 실전과 같은 훈련을 거듭하였기 때문에 즉각 대응할 수 있었던 증거다. 훈련은 모든 것이 충분히 지원되는 좋은 환경 하에 이루어지는 것이 좋겠지만 혹시 그렇지 못하더라도 결코 중단될 수는 없다. 오일쇼크 당시 전차병들은 위에 언급한 예처럼 훈련량을 늘이는 방법으로 질적 부족분을 보충하려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던 것이다.

 
                             철저한 훈련 덕분에 위기의 순간에도 즉각 대응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전차에 탑승하였다고 가정하고 전차병들이 무리지어 깃발 들고 뛰어다닌다고 상상하면 웃음이 나오지만, 당시 나라전체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훈련을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을까 하고 숙연해 지기도 하다. 그 어려웠던 시기에 이런 식으로나마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이들은 애썼던 것이었고 그들의 노고덕분에 대한민국은 발전을 중단하지 않았던 것이다.

 
                                              제2차 오일쇼크 당시의 신문보도
 

사실 오일쇼크는 에너지의 대외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의 경우 언제든지 닥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비록 그 당시처럼 고통스런 경험이 반복되어서는 곤란하겠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대비를 철저히 하여야 할 것이다. 먼저 사용하지 않는 전원의 코드를 뽑는 사소한 일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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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상 먹었어!!!   얏호!"

바로, 아랫분들이 타셨습니다. 상. 


                                                                 우수부대 22보병사단


               최우수 부대가 한껏 여유있는 미소를 즐기고 있다.(그동안 밤샜으면서, 아닌척...)



바야흐로,  자랑스러운 분들은 '하버드' 그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역대 우수교관!"   어디 교관님들 이십니까??






바로 '이곳'의 교관님들!





고궁?  공원??  아닙니다. 여기는 대전 자운대.
살려야 한다!'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게~", 당황스럽고도 강렬한..)  

12월 15일 수요일, 저는 대전 자운대 국군의무학교에 착륙! 하였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당황스러운 멘트가,,,    있었으니....


                            누군가 벽타기가 가능한...'괴력'이 있는가 봅니다.(의료실습실1) --;


                                               토르소....'미술실' 이었나?


                           국군의무학교의 자랑 "SAVE CENTER" 내 벽면에는...뜨악~~~  


'10년 군 응급처치 경연대회'가 개최되었는데요, '살려야 한다!'는 구호를 주제로 말입니다. ^^


경연대회는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습니다. (아주 긴장감 있고도, 엄숙하게.)



                          "어제, 밤 새셨습니까?  이 눈은... 충혈??"(대회 참가자들 대기중.)


'10년 군 응급처치 경연대회는 병원급 부대와 각군 야전부대가 함께 참여한 가운데, 응급처치 능력 향상과 극대화를 위해 거행되었습니다.


특별히, 금년에는 대회를 '방부 장관배' 격상시키고 포상금과 우승기 수여 등 군내 '붐'을 조성하고자 하였고요, 기존의 개인평가 일색에서 '단체평가'부문이 추가되었다는 점 등이 아주~  인상적이죠.

병원 위주로 실시되던 지난 대회들과는 달리, '10년 경연대회는 육,해,공군 전군을 대표하는 의무부대들이 대거 참여, 최우수 부대에는 대회 최초로 국방부장관 상장을 수여하는 등 명실공히 '국군 응급처치분야 최고의 경연대회'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단체평가부문 중 '구급차 응급조치 평가' 현장을 보실까요?


                             컴퓨터 모니터상의 '평가문제'를 조심스럽게 읽습니다.


                                                 응급 의료도구를 확인하고...


                                            
구급차에 이송전 응급조치를 합니다.


'인간 마네팅'....이거 무지하게 비싸답니다...



                                 환자를 구급차로 빠르고 조심스럽게 이송중입니다.


                           구급차내의 응급처치 를 평가하는 평가위원들의 고뇌....


 

이번 대회는 각종 응급상황에 따른 응급처치 숙달과 조치능력을 평가하고자 하였습니다. 육군 22사단, 해군 2함대사,공군 3훈련비행단 등 총 17개부대가 참가하였구요, 측정관은 의무학교 시뮬레이션 센타 교관들로 하였습니다.

특별히 금년 대회는, 작년 새로 건립한 국군의무사령부의 자랑, "SAVE CENTER"를 100분 활용하여 시뮬레이터를 적극 활용한 과학적 평가를 실시하였습니다. '08년 대회에 비한다면, 금년에는 평가인원을 확대, 단체부문 평가방법 또한 컴퓨터 시뮬레이터를 활용, 측정의 정확성을 높여 보다 사실적인 평가를 실시하였다고나 할까요?

'개인평가'는 1)군의관  2) 의무부사관 및 의무병 으로 나누어, 필기평가 및 실기평가(응급처치 : 심폐소생술, 컴퓨터 시뮬레이션, 골절/부목 등.   간호업무 : 활력징후)를 실시하였고, 단체평가는 시뮬레이션 응급처치 등을 실시하였습니다.   



                                 개인평가(골절/부목) 부문  실시중. 진지한 모습들...


포상은, 단체부문(국방부장관상+의무사령관상을 병원 3개 부대, 사단급 3개 부대에)과 개인부문(의무사령관상)으로 나누어 시상하였구요, 


국군의무사령관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금번 대회는 최초로 육,해,공군 전 부대가 참여하는 높은 관심 속에 진행된 만큼, 장병들이 '반드시 내손으로 살릴 수 있다'는 소명의식과 자신감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번 대회는 군 의료서비스가 더욱더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도록 장병들의 실전적 응급처치 능력 구비를 독려하는 데에 있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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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잊혀지지 않을 귀신잡는 용사들의 이야기
 
 

지난 1999년에 들어 북한이 서해에 새로운 군사분계선을 전격 선언하고 난 이후 연쇄적으로 벌인 일련의 군사도발로 인하여 NLL(북방한계선)을 서해 5도에 연한 군사분계선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동해바다에서의 군사분계선 또한 NLL이다. 다만 동해안의 NLL은 DMZ을 직선으로 바다 쪽으로 확장한 모양새이고 더불어 인근에 도서가 없기 때문에 서해 쪽과 지리적 여건이 다를 뿐이다.

 
                           보통 많이 간과하지만 NLL은 동해안의 군사분계선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동해에서 북한의 해상 도발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지금보다 더 극렬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1967년 작전 도중 북한 해안포의 포격에 의해 침몰하여 39명이 전사한 당포함 피격사건이나 이듬해 벌어진 미군 정보수집함인 푸에블로호(USS PUEBLO) 피납사건 그리고 1969년에 31명 탑승원 전원이 사망한 미군 정찰기 EC-121 격추사건이 모두 동해의 NLL 또는 북한 영해 부근에서 발생하였다.

 
                                  천안함 사건 이전 최악의 격침 사고인 당포함 사건
 

다만 적극적으로 분쟁지역으로 각인시키고자하는 서해에 비해서 동해의 NLL은 북한이 트집을 잡을 만한 이슈가 그다지 많지 않은데,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서해 5도 같이 북한이 껄끄러워 할 만한 전략요충지가 동해 NLL 인근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고 서해안의 석도나 초도보다 더 위협적인 위치에 있던 동해안의 여러 섬들을 휴전 직전까지 아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북한의 포격으로 파괴된 연평도 (사진-연합뉴스)
 

사실 해병대의 전략도서 확보작전은 서해보다 동해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신편 된 해병대 독립 제42중대는 1951년 2월 14일 초대 중대장 심희택(沈熙澤) 중위의 지휘 하에 원산 앞바다의 여도(麗島)를 거점으로 하여 주변의 신도(新島), 대도(大島), 모도(茅島), 사도(砂島), 황토도(黃土島) 등 총 6개 섬을 기습 점령하였다. 때문에 북한 측 동해안의 최대 요충지인 원산항은 전략적으로 봉쇄당한 입장이었다.

 
                           해병대는 여도를 비롯한 원산 앞바다의 주요 도서를 점령하였다
 

하지만 북한 입장에서 이보다 더 치욕스러운 사건은 해병대의 독립 제43중대에 의해 이루어졌다.  함경남도 명천이 고향인 최청송(崔靑松) 중위가 지휘한 제43중대는 그해 8월 28일, 명천군 상가면 앞바다의 양도(洋島)를 기습 점령하였다.  양도는 3개 섬으로 이루어진 소규모의 제도였지만 이곳의 점령은 북한입장에서 함경도 해안의 연해 길목을 차단당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여도에 상륙하는 해병대원의 모습
 

막강한 제해권을 발판으로 요충지 섬들을 해병대가 점령하자 북한은 이곳 섬들의 대안에 5배 이상의 병력을 증강시켜 배치하여야만 했고 그 만큼 최전선에 가해진 압박을 돌릴 수 있었다.  섬을 점거한 소수의 해병대가 육지로 진격할 수는 없었지만 북한 측의 공세에 수시로 격렬한 교전이 벌이지고는 하였다.  경우에 따라 일시적으로 외부와 연결이 단절된 해병대원들이 섬 안에 갇혀 산화하는 불상사도 있었지만 그러한 상황에서도 그들은 끝까지 최선을 다하였다.

 
                  동해 도서작전에서도 해병대는 불굴의 투혼을 보여 주었다 (사진-영화 스틸컷)
 

이처럼 동해안의 여도와 양도를 근거지로 하여 적의 배후를 양도부대로 개칭되었고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휴전 때까지 현 진지를 사수하였다.위협하고 적 보급차단 및 연안봉쇄에 혁혁한 전공을 세운 제42중대와 제43중대는 1952년 10월 여도부대와   비록 이들 부대의 도서작전은 전술적인 측면에서 중대규모가 펼친 작은 규모의 후방작전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눈엣 가시처럼 적에게 끼친 전략적인 효과는 엄청나게 컸다.

 
만일 원산만과 양도 일대에 NLL이 설정 되었다면 적들이 느낄 곤혹감은 대단하였을 것이다. 영흥만의 경우는 말할 필요조차 없지만 양도는 현재 북한의 미사일 기지로 유명한 무수단리및 핵 실험 장소 부근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러한 전과가 그동안 소홀하게 취급되어 왔던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휴전과 동시에 이들 요충지 섬들을 포기하고 철수하여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만일 이 섬들을 아직까지 우리가 장악하고 있고 이곳까지 NLL이 선포되었다면 과연 어떠하였을까?  서해 5도가 현재 대한민국 안보에서 차지하는 전략적 위치를 고려한다면 쉽게 답이 나올만한 이슈가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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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령도가 끝이 아니었다
 
 

'서해 최북단'
흔히 신문보도나 방송 매체에서 백령도를 지칭할 때 쓰는 표현인데, 백령도가 군사분계선의 가장 서북쪽 끝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휴전이후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군사분계선은 육상을 가로지르는 DMZ(비무장지대)와 바다의 경계선인 NLL(북방한계선)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철책으로 명확히 구분된 DMZ와 달리 NLL은 서해 5도의 북쪽 해상을 연결하는 바다 위의 가상 선이므로 육안으로 구별하기는 힘들다.
 

                   현재 서해 최북단인 백령도 (천연비행장으로도 유명한 백령도의 사곶 해변)
 

그런데 우리가 좀 더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면 서해 최북단의 섬은 백령도가 아닐 수도 있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당시에 유엔군사령관 클라크(Mark Clark)장군은 서해 5도의 북쪽인 북위 37도 35부와 북한의 점령지인 옹진반도 남단의 북위 38도 03부 사이의 중간 해역을 연결하여 NLL을 선포하면서 그 이북에 아군이 점령하고 있던 섬에서 철수하였기 때문이다.

 
                                         북한이 도발의 빌미로 삼고자하는 NLL
 

이때 해병대가 적의 도발을 물리치고 강고하게 점령하고 있던 동서해의 여러 섬들을 부득이 포기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서해의 석도(席島)와 초도(椒島)는 그야말로 요충지 중의 요충지였다. 석도와 초도는 평안남도와 황해도를 가로지르는 대동강하구의 광량만에 위치한 섬들인데, 북한 서해의 최대항구인 진남포와는 30킬로미터의 거리이고 평양까지도 70킬로미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북한의 심장부를 겨냥하는 위치인 석도와 초도
 

최근 연평도에 MLRS가 배치된 것과 관련하여 서해 5도를 방어기지가 아닌 유사시에 적 후방을 타격하는 전략 거점으로 육성하면 북한이 상당히 곤혹스러워 할 것이라는 의견에서 알 수 있듯이, 만일 현재까지도 석도나 초도를 우리가 장악하고 이곳에 장거리 타격무기를 전진 배치한다면 북한이 느낄 압박감은 이루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한 것은 석도나 초도의 점령은 북한이 서해바다를 포기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NLL이 석도까지 연결되었다면 북한의 서해는 완전히 고립되는 형국이다
 

NLL을 초도와 석도까지 연결한다면 북한의 서해바다는 완전히 봉쇄되는 형국이다. 현재 서해 5도로 인하여 주요 항구인 해주가 제 기능을 십분 발휘하지 못하는 것만 보아도 충분히 유추 가능한 부분이다. 지난 천안함 사태로 인하여 북한군 잠수함대가 전개하고 있는 해군기지로 알려진 비파곶이 바로 석도 맞은편에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위치의 전략적 가치를 충분히 알 수 있다.
 

                                  북한의 잠수함기지인 비파곶이 바로 앞에 있을 만큼
                               석도와 초도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교동도를 거쳐 백령도 점령을 완수한 해병대 독립 제41중대가 1951년 5월 7일 기습 상륙하여 석도와 초도를 장악하자 북한은 경악하였다. 북한이 얼마나 위기의식을 느꼈는지는 한 개 중대가 점령한 석도와 초도를 경계하기 위해 무려 2개 사단을 맞은편 대안에 이동 전개 시켰던 사례에서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다. 당연히 섬을 재 장악하기 위한 북한의 도발은 집요하였고 그 과정에서 철수 전까지 수많은 격전이 벌어졌다.
 

                           1951년 12월 21일 병력교대를 위해 초도에 상륙하는 해병대원
 

해병대는 압도적인 해군의 화력 지원 하에 적의 접근을 거부시키는데 성공하였지만, 소수의 부대가 적진 한가운데에 동 떨어져 벌이는 작전은 항상 많은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었다. 예를 들어 1952년 3월에 석도 앞의 작은 무인도인 호도에서 벌어진 격전에서 악천후로 인하여 외부지원이 끈긴 해병대 1개 소대가 5배나 많은 적의 공격을 끝내 격퇴시켰지만 소대원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실종당하는 참사를 겪기도 하였다. 이처럼 해병대는 피와 눈물로 서해의 요충지를 지켜내었다.
 
 
                            서해의 요충지를 소수의 해병대원들은 피와 눈물로 사수하였다
                             (석도에서 교전 중 부상당한 병사를 후방으로 이송하는 모습)
 

하지만 앞에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휴전협정 체결 후 유엔군은 원격지라 판단한 석도와 초도를 전격 포기하였다. 따라서 우리가 서해 5도에만 준하여 NLL을 설정한 것은 북한에게 커다란 은혜를 베푼 것과 다름없었고 사실 북한도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못하고 전후 20년간 엄중하게 이를 지켜왔다. 하지만 최근 방자하게도 이를 망각하고 도발을 일삼는 것을 보면 석도와 초도를 너무 쉽게 포기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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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해 5도를 사수한 소녀시대
 
 
1951년 4월 2일, 해병대 독립 제41중대는 강화도 서북단에 위치한 교동도를 기습 점거하였다. 당시 피아가 한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중이었기 때문에 강화도, 황해도 연백, 경기도 개풍을 동시에 감제할 수 있는 교동도를 확보하였다는 것은 한강 하구를 우리의 의도대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찬란했던 서해 5도 확보 작전의 시작이기도 하였다.

 
                                             교동도는 지금도 전략 요충지다
 

아군의 점령 전까지 교동도는 군사적으로 무주공산이었지만 강 건너 연백에는 대규모의 북한군 8사단 2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이들은 군사적으로 교동도를 점령하는 것이 불가능하더라도 순순히 내어주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지난 연평도 포격 사건처럼 교동도에 수시로 포격을 가하여 위협을 가하는 것과 동시에 간첩을 침투시켜 후방을 교란하는 양동 작전을 구사하였다.

 
                                   북한은 교동도에 대한 다양한 공세를 지속하였다
 

원래 작은 교동도에는 2천여 명의 원주민이 살고 있었지만 전쟁 통에 외지에서 유입된 피난민들로 인하여 거주인구가 1만을 상회하면서 간첩들이 활동하기에 좋은 여건이 조성된 상태였다. 따라서 제41중대는 교동도를 선점한 후, 진지 구축 같은 군사작전 외에도 적극적인 대민교육활동을 벌여 전선 바로 뒤를 혼란시키려는 북한군의 기도를 일거에 제압하였다.

 
                          피난민들이 몰려든 틈을 이용한 북한의 후방 작전은 집요하였다
 

이와 관련한 재미있는 한 가지 일화가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교동도를 점령한 독립 제41중대는 군목이었던 신성국 소위가 정훈조를 조직하여 간첩 색출과 더불어 거주민들을 상대로 한 방첩교육 같은 민사작전을 벌였다. 그런데 병력이 부족하다 보니 현지에 거주하던 많은 민간인들이 부대활동에 자진 참여하여 해병대의 활동을 적극 도왔고 그중에는 5명의 여고생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인천상륙작전 당시에 후방작전을 펼치는 해병대의 모습 (사진-Getty Images)
 

원래 교동도에 고등학교가 없기 때문에 그녀들이 진짜 여고생이었는지 아니면 학정을 피해 이북에서 피난 온 학생들이었는지는 모르지만, 포탄이 날아다니는 최전선 일대에서 중요한 활동을 벌이기에는 너무나 어린 소녀들이었음은 확실하다. 따라서 해병대는 위험을 경고하며 이들의 활동을 만류하였는데, 소녀들의 결심을 바꿀 수 없어 결국 민간인 계도 활동에 투입하였다.

 
                        전쟁 전 옹진반도에 주둔한 국군 제17연대를 위문한 여고생들의 모습
                        서해 5도에서 활약한 여고생들도 이와 비슷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사실 오늘날과 달리 당시에 여고생이라면 상당한 인텔리 계층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한마디로 지식과 미모를 겸비한 여고생들의 적극적인 정훈작전이 후방 대민계몽에 상당히 효과적이었던 것으로 해병대 전사에는 소개되고 있다. 굳이 언급하자면 그녀들을 당대의 소녀시대라 칭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소녀들의 활동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당시 여고생들은 상당한 지식인 계층이었다. (휴전 반대 데모를 하던 당시의 여고생)
 

제41중대는 다음 목표인 백령도를 점거할 예정이었고 당연히 소녀들의 동행을 거부하였다. 그러자 여고생들이 몇 날을 울고불고 애원하였고, 결국 무지막지한 떼쓰기 전술로 귀신 잡는 해병대를 처참하게 굴복시킨(?) 여고생들은 백령도까지 동행하여 멋진 후방 작전을 계속하였다. 해병대 전사를 살펴보면 그녀들은 이후 해병대와 함께 대동강 하구의 석도까지 침투하여 후방작전에 종사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란 속에 활약한 수많은 소녀시대가 대한민국을 수호하였다 (최초의 여성 해병인 문인순 여사)
 

아쉽게도 현재 여고생들의 정확한 신상이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분명한 것은 그녀들도 서해 도서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숨어있는 해병대원들임에 틀림없다는 점이다. 전란 속에 활약한 그녀들의 노고로 지켜낸 서해 5도와 NLL은 오늘날 대한민국을 지탱하는 힘이 되었다. 해병대의 서해 5도 사수에 기여를 아끼지 않은 당대의 소녀시대에게 진심으로 존경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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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LL 그리고 해병대

 
 
금번에 발생한 연평도 포격사건으로 인하여 NLL(북방한계선)이 국가 방위에 엄청난 역할을 하고 있음이 다시 한 번 부각되었다. 지리적 여건으로 말미암아 NLL에 배치된 우리 해병대의 전력이 북한군에 비해 절대 열세인 사실이 우려스럽게 다가왔지만, 그것을 역으로 생각하면 아군의 10배가 넘는 북한 4군단을 DMZ으로 전개되지 못하도록 잡아놓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리적 여건으로 말미암아 NLL의 아군이 열세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대규모의 북한군을 
             잡아놓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림-연합뉴스)

 
서해바다에 이렇게 전략적으로 놀라운 군사분계선이 위치하게 된 것은 백령, 대청, 소청, 연평, 우도로 점점이 흩어져 있는 서해 5도를 휴전당시 아군이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북한이 무효화를 주장하면서 NLL 자체를 인정하려 들지 않지만 막상 NLL을 선포하였을 때 북한은 가만히 있었다. 그러했던 이유는 한마디로 그것이 그들에게 유리하였기 때문이었다.

 
                               서해 최북단 백령도에서 바라본 장산곶 (사진-연합뉴스)
 

1953년 휴전직후 유엔군사령부는 휴전 당시에 별도의 논의가 없었던 해상 분계선과 관련하여 NLL을 선포하고 즉시 북한에 통보하였다. 그것은 NLL을 넘어서 우리 해군이 작전을 펼치지 않겠다는 의미였는데, 북한군이 이곳 아래로 내려오지 말라는 경고의 뜻보다 우리가 이곳을 넘어 북쪽으로 가지 않겠다는 통보에 가까웠다.

 
                        휴전협정 조인 당시의 모습 그런데 해상 경계에 대한 논의가 없었다
 

현재 NLL은 북한의 군사적 도발을 억제하는 최전선이 되었지만, 휴전 당시에는 오히려 북한이 얻는 이익이 컸다. 바로 전쟁 내내 그들을 공포로 몰아넣으며 괴롭혀온 유엔군 해군의 공격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즉 유엔군 해군이 알아서 어느 선 이상으로 올라오지 않겠다고 스스로 선언하였으니 너무 반가웠던 것이었다. 그만큼 그들은 바다를 심정적으로 포기한 상태였다.

 
                        한국전쟁 당시 적진을 향해 날리는 전함 미주리의 가공할 포격 장면
 

NLL 설정 당시에 아군이 장악하고 있는 도서를 연결하여 바다위에 분계선을 긋는 것은 너무 당연하였다. 국경이 아닌 군사분계선은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있는 곳을 연결하는 것이 불문율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NLL을 다행스럽게 생각한 북한은 휴전 직후에 어떠한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그런데 1973년 이후부터 북한은 서해 5도 주변수역을 연해라고 주장하면서 긴장을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제1차 연평해전 당시의 긴박한 모습
 

계속적인 군비증강으로 우리를 앞섰다고 판단한 북한은 이때부터 노골적인 도발야욕을 표출하였다. 당시는 월남전이 격화되어 가고 있었고 더불어 한반도 방위의 한 축을 담당하던 미 7사단이 철수하는 등 주변정세가 좋지 않게 돌아가던 중이었다. 더불어 오일쇼크에 따른 극심한 경제 침체도 우리를 어렵게 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침략의 명분을 잡기위해 NLL에 대한 북한의 트집이 시작되었던 것이었다.

 
                             철수 전 미 제7사단이 주둔하였던 레드크라우드 기지 정문
 

지금은 그때와 안보환경이 많이 바뀌었지만 서해에서 벌어진 여러 차례의 교전이나 연평도 포격처럼 북한이 아직도 NLL에 목을 매는 이유는 NLL의 철폐보다 긴장감을 조성하여 북한내부의 동요를 단속하려는 목적과 동시에 대한민국의 내부분열을 노리기 때문이다. 사실 처음 언급한 것처럼 오래되었지만 생소했던 단어인 NLL이 최근 들어 누구나 알게 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해병대 제6여단과 연평부대의 선배인 독립 41중대를 포함한 도서방어부대기
 

이렇게 현재도 우리 안보를 굳건히 지키는 최전선인 NLL이 성립될 수 있도록 서해 5도를 확보하게 된 것은 전쟁이라는 혼란한 상황 중에도 그 전략적 위치를 미리 인지하고 전광석화 같은 도서 확보작전을 펼쳤던 해병대 독립 41중대를 비롯한 도서방어부대의 분투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곳을 이제는 후배들인 해병대 제6여단과 연평부대가 굳건히 지키고 있다. 변함없는 당신들의 투혼에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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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군 합동조사단은,

국내 10개 전문기관의 전문가 25명과 군 전문가 22명, 국회추천 전문위원 3명, 미국․호주․영국․스웨덴 등 4개국 전문가 24명이 참여한 가운데 과학수사, 폭발유형분석, 선체구조관리, 정보분석 등 4개 분과로 나누어 조사활동을 실시하였습니다.

오늘(5월20일) 발표내용은, 조사단에 참여한 국내․외 전문가들이 과학적․객관적 접근방법을 통한 조사활동과 검증과정을 거쳐 도출한 결과입니다.

천안함 선체의 변형형태와 사고해역에서 수거한 증거물들을 조사 및 분석한 결과를 보면,
천안함은 감응어뢰의 강력한 수중폭발에 의해 선체가 절단되어 침몰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민군합동조사단 발표와 발견된 북한 어뢰

                       

침몰원인을 어뢰피격으로 판단한 이유는, 선체손상 부위를 정밀계측하고 분석해 보았을 때, 충격파와 버블효과로 인하여, 선체의 용골이 함정 건조 당시와 비교하여 위쪽으로 크게 변형되었고, 외판은 급격하게 꺾이고 선체에는 파단된 부분이 있었습니다.주갑판은 가스터빈실내 장비의 정비를 위한 대형 개구부 주위를 중심으로 파단되었고, 좌현측이 위쪽으로 크게 변형되었으며, 절단된 가스터빈실 격벽은 크게 훼손되고 변형되었습니다.
함수, 함미의 선저가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꺾인 것도 수중폭발이 있었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함정 내․외부의 표면을 면밀히 조사한 결과,함정이 좌우로 심하게 흔들리는 것을 방지해주는 함안정기에 나타난 강력한 압력흔적, 선저부분의 수압 및 버블흔적, 열흔적이 없는 전선의 절단 등은 수중폭발에 의한 강력한 충격파와 버블효과가 함정의 절단 및 침몰의 원인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좌현 선저부에서 발견된 알루미늄 조각

                       

생존자와 백령도 해안 초병의 진술내용을 분석한 결과,생존자들은 거의 동시적인 폭발음을 1~2회 청취하였으며, 충격으로 쓰러진 좌현 견시병의 얼굴에 물이 튀었다는 진술과,백령도 해안 초병이 2~3초간 높이 약100m의 백색 섬광 기둥을 관측했다는 진술내용 등은 수중폭발로 발생한 물기둥
현상과 일치하였습니다.

또한, 사체검안 결과 파편상과 화상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고, 골절과 열창 등이
관찰되는 등 충격파 및 버블효과의 현상과 일치하였습니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의 지진파와 공중음파를 분석한 결과,지진파는 4개소에서 진도 1.5규모로 감지되었으며, 공중음파는 11개소에서 1.1초 간격으로 2회 감지되었습니다.지진파와 공중음파는 동일 폭발원이었으며,이것은 수중폭발에 의한 충격파와 버블효과의 현상과 일치합니다.


수차례에 걸친 시뮬레이션 결과에 의하면 수심 약 6~9미터, 스터빈실 중앙으로부터 대략 좌현 3미터의 위치에서 총 폭발량 200~300kg
규모의 폭발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되었습니다.


시뮬레이션 결과 발표

                              

백령도 근해 조류를 분석해 본 결과, 어뢰를 활용한 공격에
제한을 받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였습니다.

침몰해역에서 어뢰로 확증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물로 어뢰의 추진동력부인 프로펠러를 포함한 추진모터와 조종장치 등을 수거하였습니다.이 증거물은 북한이 해외로 수출할 목적으로 배포한 어뢰 소개 자료의 설계도에 명시된 크기와 형태가 일치하였으며, 추진부 뒷부분 안쪽에 “1번” 이라는 한글표기는 우리가 확보하고 있는 북한의 어뢰 표기방법과도 일치합니다. 이러한 모든 증거는 수거한 어뢰 부품이 북한에서 제조되었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또한, 이러한 결과는 일부에서 지속적으로 제기해 온 좌초나 피로파괴, 충돌, 내부폭발과는 전혀 관련이 없음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폭발 원점에서 채증한 북 어뢰 샤프트

                      


결론적으로, 침몰해역에서 수거된 결정적 증거물과 선체의 변형형태, 관련자들의 진술내용, 사체 검안결과, 지진파 및 공중음파 분석결과, 수중폭발의 시뮬레이션 결과, 백령도 근해 조류분석결과, 수집한 어뢰 부품들의 분석결과에 대한 국내․외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천안함은 어뢰에 의한 수중 폭발로 발생한 충격파와 버블효과에 의해 절단되어 침몰되었고, 폭발위치는 가스터빈실 중앙으로부터 좌현 3m, 수심 6~9m정도이며, 무기체계는 북한에서 제조한 고성능폭약 250kg규모의 어뢰로
확인되었습니다.


연돌 연통내부 화약 검출

                       

울러 지난 5월 4일부터 운영해 온 미국, 호주, 캐나다, 영국 등 5개국의 '다국적 연합정보분석TF'에 의해 확인된 사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북한군은 로미오급 잠수함(1,800톤급) 20여척, 상어급 잠수함 (300톤급) 40여척과 연어급(130톤급)을 포함한 소형 잠수정 10여척 등 총 70여척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번에 천안함이 받은 피해와 동일한 규모의 충격을 줄 수 있는 총 폭발량 약 200~300kg 규모의 직주어뢰, 음향 및
항적유도어뢰 등 다양한 성능의 어뢰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북 연습용 어뢰(스크류 부위)

                         

와 같은 사실과 사건 발생해역의 작전환경 등을 고려해 볼 때, 이러한 작전환경 조건에서 운용하는 수중무기체계는 소형잠수함정으로단됩니다. 또한 서해의 북한 해군기지에서 운용되던 일부 소형잠수함정과 이를 지원하는 모선이 천안함 공격 2~3일전에 서해 북한 해군기지를 이탈하였다가 천안함 공격 2~3일후에 기지로 복귀한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또한, 다른 주변국의 잠수함정은 모두 자국의 모기지 또는 그 주변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5월15일 폭발 지역 인근에서 쌍끌이 어선에 의해 수거된 어뢰의 부품들, 즉 각각 5개의 순회전 및 역회전 프로펠러, 추진모터와 조종장치는 북한이 해외로 무기를 수출하기 위해 만든 북한산 무기소개책자에 제시되어 있는 CHT-02D 어뢰의 설계 도면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이 어뢰의 후부 추진체 내부에서 발견된 “1번”이라는 한글 표기는 우리가 확보하고 있는 또 다른 북한산 어뢰의 표기방법과도 일치합니다. 러시아산 어뢰나 중국산 어뢰는 각기 그들 나라의 언어로 표기합니다.

북한산 CHT-02D 어뢰는 음향항적 및 음향 수동추적방식을 사용하며 직경이 21인치이고 무게가 1.7톤으로 폭발장약이 250Kg에 달하는 重어뢰입니다.

이러한 모든 관련사실과 비밀자료 분석에 근거하여, 천안함은
북한제 어뢰에 의한 외부 수중폭발의 결과로 침몰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또한, 이상의 증거들을 종합하여 볼 때 이 어뢰는 북한의 소형 잠수함정으로부터 발사되었다는 것 이외에 달리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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