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 번 참화를 겪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후 연합군은 베를린으로의 진격을 개시 합니다. 이때 독일은 영국 본토와 가까운 벨기에의 해변 도시에서 다량의 V1와 V2를 영국으로 발사하였고 연합국은 이를 격멸하고자 공습을 단행 합니다. 덕분에 벨기에의 곳곳은 연합국의 폭탄에 의하여 멍들게 됩니다. 하지만 벨기에의 영토가 아작 난 것은 제3제국의 패망을 목전에 둔 시점에서 보여준 히틀러의 똥고집에 의해서입니다.


                 전쟁 말기에 영국을 공격하기 위한 독일의 비밀병기가 벨기에에서 발사됩니다.


결과적으로 독일의 패망을 6개월 앞당겼다는 발지 전투(Battle of Bulge)때문입니다. 제2차 대전 사가들로 부터는 독소전의 다른 전투에 비해서 과장되게 알려 졌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서부전선에서 독일과 연합군의 피 튀기는 마지막 대회전이 벌어진 곳은 바로 약소국 벨기에 영토입니다. 그래서 전쟁 말기에 마지막으로 쑥대밭이 됩니다.


                    벨기에 영토에서 벌어진 발지 전투는 서부전선 마지막 대회전이었습니다.


어쨌든 전쟁은 독일의 패망으로 끝나고 벨기에는 해방이 되나 침략도 해방도 자국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단지 침공로에 놓였다는 이유만으로 국토가 망가지고 국민은 피폐해 집니다. 그것도 30여 년 동안 두 번씩이나 같은 강대국 때문에 말입니다. 아니 처음부터 주변 강대국 사이에서 벨기에의 안위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역사에 비추어


지난 우리역사를 돌아볼 때 벨기에가 겪었던 참화와 비슷했던 치욕의 역사가 계속 반복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마다 목적은 항상 우리를 침탈하는 것이었지만 침략자들의 대외적인 명분은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떠들곤 하였습니다.


                                       임진왜란에서 일본의 명분은 정명가도였습니다.


몽고가 일본진출을 계획 하였을 때도 고려를 짓밟고 황폐화 시켰습니다. 전혀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말입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내세웠던 명분은 정명가도(征明假道)였습니다. 이런 교활한 명분하에 우리는 침략을 받았고 이를 구원한다며 명과 일본은 우리나라 국토를 황폐화시키며 백성을 수탈하며 신나게 피를 흘립니다.


                                청일전쟁 당시 평양전투에서 포획된 청군 포로


근대에 들어와 청과 일본은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제국주의 전쟁을 우리 땅에서 벌입니다. 이 역시 우리와의 의지와 상관없이 말입니다. 역시 황폐화 되는 것은 우리 국토이고, 수탈되는 덧은 우리 민중이었습니다. 우리가 침탈되었을 때의 공통점은 우리 스스로 지킬 힘이 없었을 때나 스스로 태평성대라고 생각하고 국방을 게을리 하였을 때라는 점입니다.
                           

현재의 벨기에와 우리

벨기에는 두 번의 전쟁 결과 어정쩡한 중립이 냉혹한 국제정세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음을 깨닫고 독일과 프랑스로 부터의 위험을 제거하고자, 2차 대전 후 오히려 냉전체제에 능동적으로 참여합니다. NATO 본부를 자국에 유치한 것만 보아도 벨기에의 의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벨기에는 어설픈 중립을 포기하고 국제질서에 능동적으로 참여합니다.
                                       (벨기에에 있는 NATO  본부)


벨기에는 지난 세기에 있었던 두 차례의 연속된 경험으로 독일이나 프랑스로 부터의 침공이 있을 때 자력방위가 힘들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고 소극적인 중립이 아닌 적극적인 동맹에 참여 하여 국가의 안보를 지키려 하였던 것이었습니다.


                               힘을 기르지 않고 국제 질서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체
                                       말로만 평화를 지킬 수 는 없습니다.


우리가 벨기에만큼 인구나 국력이 작은 나라는 아니지만 우리 주변의 국가들이 무시할 수 없는 강대국임을 깨닫고 말만 앞서는 어설픈 자주를 외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국제적 힘의 균형을 이루는 데 참여하여 그 일익을 담당하여야 할 것이며 한편으로는 우리 스스로를 충분히 자위 할 수 있는 잠재적인 능력을 키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침략을 당했을 때 "나가 싸우란 말이야! 제발"이라는 절박한 호소는 냉정한 국제 현실에 절대 통용 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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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대밭이 된 약소국

독일은 계획대로 벨기에를 돌파하여 노도와 같이 북부 프랑스로 쇄도하여 들어갔으나,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필히 우익을 강화시켜라"라는 유언을 남긴 슐리펜(Alfred Graf von Schlieffen)의 의도와 달리 병력을 우익에 집중하지 못한 당시 독일 육군 참모총장 小몰트케(Helmuth von Moltke)의 실책으로 마른전투(Battle of Marne)에서 독일군의 진격이 멈추게 되고 이후 종전까지 무시무시한 참호전에 돌입하게 됩니다.


                                   마른에서 프랑스는 독일의 진격을 극적으로 막아내었고
                                 이후 서부전선은 참호전으로 변모하였습니다.


이후 지옥으로 변한 참호전은 후방에 앉아있는 지휘관들이 상황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체로, 이전 전쟁과는 비교 할 수 없는 엄청난 살상무기로 무장한 상대편 진지로 나폴레옹 전잰당시처럼 무조건 병력을 돌격시켜 말 할 수 없는 인적피해를 야기한 그야말로 무식한 전쟁의 표본이 됩니다. 때문에 이런 결과 참호로 연결된 전선부근은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됩니다.


               혼히 No Man's Land 라고 표현할 만큼 전선은 살아있는 지옥이었습니다.


전쟁 참여국의 국토가 유린된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 일 수 있겠지만 고착된 전선 한 가운데 놓여있던 벨기에는 남의 나라 전쟁 때문에 국토가 박살(?)나게 됩니다. 전사에는 벨기에가 제1차 대전 때 연합국 편이라고 단순히 설명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중립을 짓밟은 독일의 침략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택할 수 밖에 없었던 차선책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강대국 간의 전쟁으로 벨기에 영토는 풍비박산 났습니다.


특히, 그 악명 높은 독가스가 최초로 사용 된 곳도 벨기에의 이프르(Ypres)입니다. 1915년 4월말에 독일은 병력 이동을 은폐하기 위한 수단으로 약 5천 개의 가스통을 열어 연합군측으로 염소가스를 흘려보냈고, 예상치 못한 독가스에 연합군은 1만 5천명이 중독되고 5천명이 사망하는 큰 타격을 입게 됩니다. 덩달아 벨기에 또한 본의 아닌 가스피해를 입게 됨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악명 높은 독가스도 벨기에 영토에서 처음 살포됩니다.


1차대전 서부전선에서는 누가 누가 많이 죽나하고 경쟁을 벌인 많은 무서운 싸움이 있었지만 1917년 제3차 이프르 전투의 일부였던 파스샹달(Passchendaele)전투는 연합군과 독일군 양측이 성과 없이 참호와 진흙탕 속에서 고귀한 인명을 무자비하게 희생한 서부 전선에서 가장 끔찍했던 기억으로 남게 된 전투로 기록되며 영불해협에 자리 잡은 벨기에의 아름다운 도시는 지동에서 없어진 것과 같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잠시 동안의 평화


1918년 전쟁이 끝났을 때 서부전선기준으로 패전국 독일은 자국 영토에는 폭탄한방 맞지 않았지만, 막상 승전국 벨기에는 그 참상이 얼마 심하였는지 국제올림픽 위원회(IOC)에서 평화를 열망하는 마음으로 1차대전 후 최초의 올림픽을 1920년 벨기에의 앤트워프(Antwerp)에서 개최하도록 조치합니다. 당시 IOC의 생각으로는 이것보다 더 확실하게 평화를 어필하는 대안이 없었다고 합니다.


                                          1920년 제7회 앤트워프 올림픽 개막식


제1차 대전의 교훈으로 독일은 고착된 전선을 돌파하는 전격전의 교리를 가열 차게 연구하고 호된 경험을 얻은 프랑스는 공격자가 때리다 때리다 지쳐 쓰러 질만한 완벽한 요새를 꿈꾸게 됩니다. 1927년에 착수하여 10년 뒤인 1936년에 완성한 바로 마지노선(Maginot Line)입니다. 마지노선은 총연장이 약 750km로서, 북서부 벨기에 국경에서 남동부 스위스의 국경까지 이르고, 중심부는 독일과 프랑스의 국경을 따라 이어진 영구 요새선이었습니다.


                                              프랑스 방어 전략의 상징인 마지노선


당시 벨기에는 제1차 대전의 결과로 프랑스와 긴밀한 관계를 이루고 있었고, 프랑스 마지노선의 축성에 자극받아 벨기에-독일 국경에 1932년부터 1935년 사이에 에방에말 요새(Fort Eben-Emae)를 구축 합니다. 당시에는 마지노선보다 더 견고하고 강력한 요새로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 요새는 다시는 자국의 영토가 강대국의 싸움에 유린되지 않을 거라는 벨기에 국민의 믿음을 대변한 건축물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벨기에의 자부심인 에방에말 요새
                            마지노선보다 훌륭한 방벽으로 소문이 자자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약소국 벨기에가 그들의 앞에 있던 독일의 위협만 대비ㅏ고 있었지만 위협은 또 다른 곳에서도 잠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우방이라 믿고 있던 프랑스도 만일 독일과의 전쟁이 재발한다면 벨기에를 전쟁터로 이용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무서운 사실을 벨기에는 제대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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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국의 이름으로


독일과 이탈리아의 통일이후 현재까지 유럽의 역사를 살펴보면 5개의 강국이 있음을 알게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후 미국과 소련이라는 초강대국의 등장과는 별개로 이들 5개국은 아직까지도 역사의 주역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열거하면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그리고 이탈리아인데 이들은 서로간의 견제와 균형을 이뤄가며 이합집산을 하였고, 20세기 들어 발생한 두 차례 세계대전의 주역이기도 합니다.


                                   영국의 제국주의 침탈을 풍자한 독일신문의 삽화
                           하지만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것과 같았습니다.


흔히, 세계대전을 이야기 할 때 몇 개국이 참전하고 몇 명이 죽고 등의 통계자료가 나오곤 하는데, 실제 위에서 언급한 국가들 외에 자의적으로 대전에 참전한 국가는 극히 들물다고 단언 할 수 있겠습니다. 굳이 예를 든다면 지금은 사라졌으나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강대국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정도였다고나 할까요? 나머지 국가들은 이들 강대국 간의 이합집산에 따라 마지못해, 어쩔수 없이 전쟁의 폭풍에 휘말리게 되었다고 생각 합니다.


                                        지금은 그저 그런 중부유럽의 약소국이지만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유럽의 강대국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훈련모습)


특히, 독일과 독일의 東西에 접하여 있던 러시아와 프랑스는 이러한 충돌의 중심이었으며, 어쩔 수 없이 이들 사이에 끼인 여러 약소국가들이 전화에 휘 말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동유럽 쪽은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 그리고 냉전종식 후 지도제작 업자들이 호황을 맞을 정도로 국가 및 국경의 변동이 심하여 딱히 어떤 나라가 원하지 않는 전화의 피해를 많이 입었나 판단하기조차 어려운 점도 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직전의 유럽지도
                                       중동부 유럽이 오늘날과 차이가 많습니다.


서부전선으로만 시야를 돌려보면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벨기에, 네덜란드, 록셈부르크의 3개국이 있는데 이들 국가들은 고래싸움에 새우 등이 터지는 꼴로 20세기에 들어 원하지도 않는 참화를 입게 됩니다. 그중 양차 세계대전에서 그들의 의사와 아무런 상관없이 최대의 격전지가 되었던 약소국 벨기에(Belgium)의 눈물에 대해 몇 회에 걸쳐 알아보고자 합니다.


예고된 전쟁터


제1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독일은 언젠가 보불전쟁의 패전국으로 이빨을 갈고 있던 프랑스와 일전이 있을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준비성 강한 독일인답게 구체적인 對프랑스전쟁 계획 또한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른바 슐리펜 계획(Schlieffen Plan)입니다. 최단시간(계획상 6주) 내 프랑스를 쳐부수고 난 후, 러시아를 징벌한다는 한마디로 내륙국 독일이 가장 회피하고 싶은 양면 전쟁 거부책입니다.


                           죽기 전에 장차 독일의 전쟁 해법을 연구했던 참모총장 슐리펜


그런데 이 계획은 독일주력이 독불국경에서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고 중립국인 벨기에를 돌파하여 프랑스 북부로 진공 후 파리를 대포위함으로써 프랑스의 조기 항복을 유도 한다는 점이 핵심 이었습니다. 단지 독불국경보다 벨기에가 평야지대인 관계로 대규모 부대의 기동이 용이하여 파리에 쉽게 근접 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영세중립을 표명하던 약소국의 주권을 철저히 무시한 상태로 계획은 입안되었습니다.


                      슐리펜 계획에 의거 독일은 벨기에를 거쳐 프랑스를 침공할 예정이었습니다.


즉, 전쟁이전 부터 약소국의 주권은 전혀 안중에도 없이 단지 침공의 편이만을 위하여 이나라를 전쟁터로 삼을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인데 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어쨌든 사전에 치밀하게 수립되어 있던 슐리펜 계획에 의거 독일은 1914년 8월 3일 프랑스에 선전포고와 함께 벨기에를 침공합니다.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을 점령한 독일군



프랑스, 러시아와 군사적 협력을 약속한 3국 협상국이기는 하였으나 최초 전쟁발발 당시에는 중립을 표명하였던 영국이 1914년 8월 4일 독일에게 즉각 선전포고를 하게 되었던 명분이 바로 중립국 벨기에를 독일이 치범한 것을 이유로 들었을 정도로 당시 세계는 독일의 기습적인 침공에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였습니다.   

(august의 전쟁사 시리즈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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