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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2.21 부족한 훈련과 엉터리 정보로 인한 북한의 작전 실패 - 1.21사태









1.21사태 북 공비 두목 김종웅의 최후.

 
1968년 1월 26일 오전 0시 25분경.

그 나흘 전인 1.21일 청와대를 기습하려다
세검정에서 경찰의 불심검문에 발각되어 흩어져 도주하던
북 124군 부대 소속 공비들을 차단하기 위해서 양주군 광적면 비암2리 애기수 바위 근처에 설치한
육군 26사단 00연대 잠복 초소 앞에 수상한 그림자가 어른 거렸다.
 
잠복선의 분대장은 천 모 하사로서 월남전 참전 용사였다.
노련한 그는 전방의 기척을 살펴보다가 정확한 사격을 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다고 판단하고
옆 분대원의 M-79유탄 발사기를 빌어 40mm 유탄 1발을 사격하였다.
 

 
                                                                  M-79유탄 발사기



사격과 동시에 전방에서 섬광과 함께, 폭음과 사람의 비명이 섞여 들려왔다.
이 시각에 그런 장소에 나타날 사람은 한창 북으로 분산 도주하고 있는 북한 124군 부대원 즉, 공비일수밖에 없었다.

사건 발생후 언론에서 이들을 북한 특공대,또는 유격대라고 불렀으나,
정부에서 며칠후 공비(共匪)라는 호칭으로 통일했었다.
공비는 한국 전쟁 전후 많이 사용되던 호칭이었는데 다시 등장한 것이다.

천 하사 분대는 그 방향에 추가 소총사격을 가 했다.
그러나 조금 뒤 천 하사는 전방에서 수류탄을 까들고 돌격해 들어오는 괴한을 목격하고 아연 긴장하였다.
그 괴한은 천 하사 분대의 일제 사격에 다시 쓰려져 일어나지 못했다.
 
날이 밝자 상대 괴한의 시체를 수색한 분대원들은
그의 한 팔이 유탄 폭발로 날아 간 것을 보고 그런 중상을 입고도 수류탄을 까들고 최후의 돌격을 했던 공비의 끈질김에 혀를 내둘렀다.
 
그 이틀 뒤 6군단 0p에서 사살 공비 시체들 확인차 나온 생포 된 124군 부대원 김 신조는
이 시신이 1월 17일 밤 공비 31명으로 구성된 청와대 습격대를 이끌고 임진강을 건너온
공비들의 총조장 김종웅 상위[上尉-24세]의 것임을 확인했다.
김종웅은 124 청와대 기습대원 중에 키가 제일 커서 쉽게 식별이 가능했다.
 
군 당국은 김신조의 증언에 의해서
그가 그 작년에 서울에 한번 침투했다는 사실을 알고 조사해본바,
그는 그 작년인 1967년 1월 20일 다른 간첩 2명과 함께 서울역 앞 양동 사창가에서 하룻밤을 잤던
간첩과 유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육군 방첩대[현 보안대]의 조사에 따르면 이들 3인조가 그 다음날 코로나 택시를 타고 고양군 대자리 검문소를 통과하다가 검문에 걸려 그중 두 명은 체포하였으나,
한 명은 북으로 도주했는데, 그 자가 김종웅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김종웅은 한국 역사에 깊이 각인된 1.21사태에서
이들 공비 부대가 임진강을 은밀히 도강하여 법원리 산에서 나무꾼 4형제를 붙잡았다가 풀어준 인물로 등장한다.
 
그는 나무꾼 4형제에게 일제 세이코 시계를 선물하고 당국에 고발하지 말라고 했지만 형제들은 풀려난 직후
즉각 경찰에 신고했다.
 
청와대를 기습해서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접근하던 이들이 발각된 것은
1월 21일 밤 세검정에서 종로署 형사들에게 검문 당했을 때였다.
 
공비들은 자신들이 방첩대[현 보안대] 소속으로서 훈련을 마치고 귀대 중이라고 답하며
동행을 요구하는 형사들과 거칠게 시비를 벌였다.
 
종로 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이 직접 나타나서
이들에게 신분을 밝히라고 하자 그 자리에서 기관단총을 난사해서 그를 살해한 사람이 김종웅이었다.



                                                          최 규식 서장 동상-중앙일보-
      현재 청와대 정문에서 좌회전하여 자하문 쪽으로 가다보면 세검정 길옆에 건립 된 최 규식 서장의 동상이 있다.

 

                                           공비들이 소지했던 PPSH -43기관단총[7.62mm]
                                           2차 세계대전 중에 탄생한 최고의 기관단총으로 꼽는
                                           무기 전문가도 있었다. 김 신조씨는 이 기관단총 30발로
                                           돌연 표적 15개를 제압하는 능력이 갖출 때까지 훈련을
                                           받았다고 했었다.


1.21 사태 때 포로가 되어서 살아남은 김 신조 씨는 지금은 목사가 되어 교회를 이끌고 있다.

 

                       일선 부대를 방문하여 자기가 뚫었던 철조망을 돌아보는 김 신조 목사 -연합 뉴스 사진
                      (이 분은 자서전에서 남한의 경계태세도 허술했지만 청와대 기습 124 군부대의 작전
                       계획도 매우 허술했었다고 술회했었다. 우리는 124군 부대원들이 받았다는 훈련이
                       인간의 한계를 넘나드는 혹독한 사실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북한 대남 기관이
                       세운 청와대 기습 작전의 ‘질’을 살펴보는 것은 조금 소홀히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부대의 작전 실패와 김종웅의 죽음은
1월 17일 법원리 산에서 나무꾼 형제를 잡아 놓고 북한에 ‘ 민간인에게 발견되었다! 지시 바란다!’라는 무선을 보냈을 때 이미 결정되었었다.
 
타전 후 잠시 후 북한 본부에서 답신이 왔는데
무선 담당 공비는 난수표를 가지고도 이 통신문을 해독하지 못할 정도로 엉터리였다.
 
이후 공비들은 본부와 한 번도 제대로 교신하지 않았다.
적진 침투 비밀 작전에서 통신의 중요성이야말로 더 강조하기가 불필요한 것인데 이를 무시하고 제대로 숙련되지도
않은 무선담당을 동행시켰던 것이다.
 
김 신조씨가 체포된 후 이 사실을 털어놓자
군 정보 부대 통신 전문가는 사살된 공비들로부터 입수한 난수표로 이 통신을 단숨에 해독해냈다.
 
민간인에게 발각되었으니 지시 바란다는 공비들의 발신에 북에서 보내온 답신은
“원대 복귀하라!”라는 것이었다.
 
무전 담당이 잘 훈련되어서 지령문만 잘 풀었더라면
청와대 기습도 없었을 것이고 김 종웅을 비롯한 공비들도 무모한 작전을 중단하고 무사히 북으로 귀환했을 것이다.
 
김 종웅은 나무꾼들을 놓아주고 불안한 생각이 들어
단숨에 장거리를 주파해서 군의 예상 차단선을 돌파는 했지만 하늘에 수색 헬리콥터들이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것을 보고 나무꾼들이 신고했다는 것을 알았었다.
 
 
 
                                                              통칭 김 신조 부대의 침투로


그럼에도 그는 기습 작전을 강행했었다.
이런 경우에 대한 별다른 훈련이나 지시가 없었기 때문이다.
세검정에서 최규식 서장을 살해하고 자신들이 노출되자 그들 중에 청와대를 향해 돌격하는 잠꼬대 같은 명령을 하는 조장도 있었으나, 공비들은 이 돌발 상황에서 돌격은 커녕 모두 뿔뿔이 흩어져서도망치기에 바빴다.[이 것도 역시 아무런 훈련이 안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민간인에게 발각되거나 남한 군경과의 교전 가능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이에 대비한 훈련을 충분히 거듭했더라면
이런 부대 전멸의 일은 없었을 것이다.
  
노련한 침투 전문가가 작전을 세웠다면
바로 이런 돌발 급변 상황을 충분히 인지하고 이에 대처하는준비나 훈련을 시켰을텐데
북의 124군 부대에는 이런 치밀한 작전 수립체계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청와대 습격 공비들이 휴대했던 토카레프 TT -33권총

 
작전은 정보를 토대로 수립하는 것인데 이 정보가 또한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공비들은 청와대 경호는 빈약해서 정문의 단 2명의 보초만 처치하면 대통령 사저까지 아무 거리낌없이 접근할 수가 있다는 가정하에 작전 계획을 세웠었다.

그래서 단 5분 안에 대통령을 암살하고, 청와대 트럭을 탈취하여 통일로를 질주해서 임진강을 건너 복귀하라는 명령이 작전의 골자였다.
 
당시 통일로 검문소간 통신 상태와 각 검문소가 장비한 차량 통행 차단 시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작전을 꾸민듯하다.

124군 부대장 이재형 대좌는
1964년 송추에서 접선 시도중 경찰들과 격투를 벌이다가 복부에 총상을 입고도 북으로 복귀해서 이중 영웅 칭호를 받은 대남 침투의 경험이 풍부한자이다.
 
그가 처음 세운 작전은
70여명을 동원해서 서울의 청와대, 육군 본부, 서대문 구치소, 미 대사관, 서빙고 방첩대 등 5개의 목표를 일시에 치겠다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러나, 정찰국장 김정태가 청와대 하나만 작전하라는 명을 내렸었다.
 
그런 경험자가 지휘관으로 있는 부대에서 이런 엉성한 작전을 입안하고 수행한 것은 그가 만용스럽고 무모한 영웅주의적 인물이라는 것을 입증해준다고 하겠다.
 
하여튼 124군 부대의 그런 엉터리 작전 수립이 남한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이런 부대의 최고 사령관인 정찰국장 김정태는
대 실패로 끝난 1.21 침투 사태 후에도 목이 그냥 붙어 있었고
다시 그 해 10월 무지하고 무모했었던 울진 삼척지구 침투 작전을 또 지휘해서 침투 병력 120여명중 5명을 제외하고
모두 전멸당하는 참변을 겪었다.
 
태백산 산간에 친공 세력을 구축하라는 꿈같은 목표를 세웠던 것 자체부터가 현실성없는 소리였다.
 
 
청와대를 기습 획책했던 군부대가 124부대 1기였었고, 울진 삼척지구 침투 부대가 2기였으니
124부대 창설 두 기 모두 무지한 정보와 엉터리 작전 실패의 참혹한 희생양이 되었다.
청와대는 막강한 경호실외에 수경사 소속 1개 대대가 경복궁에 주둔하며 전담했었으니
북한 정보 수집의 비현실성을 알만하다.
당시의 대대장은 전 두환 중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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