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로 전쟁하던 시절 그리고 지금

 

 
전화가 희귀했던 예전에는 전화의 보유 유무가 부의 상징이었으며 또한 재산이었던 시대가 있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아주 오래전도 아닌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통신 인프라가 열악하여 전화 개통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청색전화니 백색전화니 해서 통신권 자체가 프리미엄이 붙어 거래되기도 하였다.

 
                           한때 전화 (엄밀히 말해 통신권)가 고가로 거래되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전철역이나 터미널처럼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공공장소에는 대규모의 공중전화 부스가 있었다. 지금은 길거리에서 공중전화를 찾기가 힘든 시대가 되었지만 그 때만 해도 공중전화가 설치된 곳에는 전화를 걸기 위해서 항상 사람들이 길게 줄 서있는 모습이 일상이었다. 때문에 지금 같으면 상상하지도 못할 어처구니없는 사고도 종종 일어났다.

 
              예전에는 공공장소에 대규모 공중전화부스가 있었고 항상 사람들이 길게 대기하였다
 

워낙 줄이 길다보니 통화를 간단명료하게 하는 것이 예의였는데 경우에 따라 앞사람의 통화가 길어지면 급한 통화를 하여야 할 뒷사람이 전화를 빨리 끓으라고 재촉하여 트러블이 발생한 적이 흔했다. 대부분 말싸움으로 끝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주먹다짐까지 오고가는 경우도 많았고 심한 경우에는 앞사람의 통화가 길다고 살인까지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날, 뒤 사람 배려안하고 통화를 하다가는 싸움이 벌어질 지 모른다 
 

핸드폰이 대중화된 이후의 좋은 점 중 하나는 이런 모습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예처럼 통신 때문에 살인사건까지 발생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통신과 우리 삶이 동떨어져 있지 않음을 반증하고 있다. 그 만큼 통신은 교통과 더불어 인간사의 흐름을 지속적으로 연결해주는 중요 사회간접자본이다.

 
                                          통신은 인간사를 연결하는 중요 수단이다

 
통신의 중요성은 군에서 특히 더한데 전쟁의 승패에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 할 정도다. 통신이 차단된 백만 대군을 정예 십만 군대가 이길 수도 있는 것처럼 통신망이 승패의 결정적 요소로 작용한 예를 전사에서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처럼 전쟁터에서 통신은 과거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당연히 중요하다.

 
                                         통신이 가장 중요한 곳이 바로 전쟁터다

 
지금이야 생필품화 된 핸드폰을 다들 가지고 있겠지만 이동통신의 필요성이 제일 먼저 제기되고 이동통신 수단을 제일 먼저 실용화한 곳도 사실 군이고 역사도 오래되었다. 그 중에서 현대의 휴대폰은 커녕 무전기 개념조차 희미했던 제1차 대전 당시까지만 해도 전서구(傳書鳩-Homing Pigeon)는 전장에서 유용하게 쓰였던 이동통신 수단이었다.

 
                                 정찰기에서 전서구를 이용하여 정보를 보내는 모습

 
비둘기는 자기가 살던 곳으로 회귀하는 성질이 강하고 사육하기도 쉬운 편이라 유무선 통신이 실용화되기 전까지 가장 빠른 통신수단으로 애용되었다. 기원이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을 만큼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왔기에 당연히 전쟁과도 관련이 많은데 별도의 전서구 관리부대도 있었고 애니메이션 발리언트(Valiant)처럼 제2차 대전 당시에도 종종 사용되었다.

 
                                             제1차 대전 당시의 전서구 관리부대

 
그 만큼 전쟁은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이 동원되는 치열한 경쟁의 장이다. 그런데 요즘 통신업계의 무한경쟁은 전쟁보다 오히려 더 무서운 속도인 것 같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덕분에 문명의 혜택으로 요즘처럼 사람과 사람간의 통신이 원활한 적이 유사 이래 없게 되었고 오히려 최근 열풍이 부는 스마트폰처럼 단순히 통신을 넘어서 그 이상이 가능한 세상이 되어 버렸다.

 
                    이제는 알고싶지 않은 타인의 통화내용까지 강제로 듣게되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너무 편해서 그런가?  핸드폰을 비롯한 통신수단의 대중화와 다양화는 예전에는 없던 새로운 예의가 요구될 만큼 또 다른 많은 문제를 양산하였다. 문명의 이기를 사용하면서 남을 배려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느낌이다. 전서구를 이용하여 전쟁을 하던 시절보다 통신이 자유로운 지금이 더 삭막하다면 그것은 좋은 수단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인간들이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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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는 자 그리고 찾는 자 [2]


                              초기의 모습

 
대잠초계기는 그 특성상 장시간 하늘에 체공하여야 하지만 기동이 날렵하거나 속도가 빠를 필요까지는 없다. 때문에 플랫폼이 되는 비행기들은 전투기와는 달리 굳이 기체가 고성능일 필요까지는 없다. 그러나 대잠작전 및 해상초계에 필요한 각종 센서(Sensor)류가 워낙 고가의 장비다 보니 이러한 장비들이 탑재된 대잠초계기 한 기의 가격은 보통 고성능 전투기의 그것을 능가하고는 한다.


            오늘날 대잠초계기는 육상발진형, 항모탑재형, 헬기형 등 여러 형태가 있다
 

초계 임무를 실질적으로 좌우하는 각종 센서류는 그 자체만으로도 고도의 전략물자인데, 수요처도 한정되어 있고 제작에도 정밀한 기술력이 요구되어 이를 생산하는 나라도 얼마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막강한 해군력을 보유하였던 나라들이 자신들의 해상지배력을 계속 유지하려는 필요에 의해서 장기간의 노력과 개발로 이루어진 성과물이기 때문에 이 분야의 기술은 미국과 영국이 선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계기는 플랫폼 자체가 고성능은 아니지만 센서류가 고가인 무기체계다

 
잠수함의 무서움이 널리 알려진 시기는 앞글에서 설명한 것처럼 유보트의 신화가 처음 등장한 제1차 대전부터인데, 당시에는 주로 사람의 오감에 의해서 잠수함의 탐지가 이루어졌다. 오늘날 보편적인 대잠초계 장비로 사용되는 소나(Sonar)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ASDIC 같은 초보적인 초계장비가 개발되기도 하였지만 당시 기술 여건상 그리 좋은 성능은 아니었다고 전해진다.

 
         오늘날 소나의 기술은 어군탐지에도 이용되는 등 여러 목적으로 사용 중이다
 

독일의 유보트들이 충전 등을 위하여 수시로 수면 위로 부상하였지만 연합군은 수상함만으로 이들을 발견하기 매우 힘들었다. 이때 하늘에서 잠수함을 감시하는 방법을 생각하게 되었는데 비행선(Airship)이 적당한 플랫폼으로 떠올랐다. 제1차 대전은 본격적으로 비행기가 실전에 본격 투입된 무기사적으로 혁명적인 시기였지만, 넓은 바다 위에서 잠수함을 탐색하기에는 체공시간이나 비행반경 등을 고려 할 때 그리 적합하지는 않았다.

 
     제1차 대전은 비행기가 본격적으로 무기로 활용된 시기였으나 항속거리 등이 짧아
             넓은 지역을 장시간 초계할 플랫폼으로 사용하기는 곤란 하였다

 
그래서 비행선이 적합한 초계도구로 사용된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센서에 해당되는 부분은 오로지 비행선에 탑승한 인간의 눈(眼) 밖에는 없었다. 비행선이 비록 장시간 체공은 가능하였지만 속도가 느리고 거대한 동체를 이착륙시키기 위해서는 해안주변의 연근해에서만 활동이 가능하였고, 당시의 통신기술을 고려할 때 잠수함을 발견하였어도 이를 해군 구축함에 즉시 통보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비행선이 최초 초계용 항공 플랫폼으로 등장하였다

 
더구나 마땅한 자체 대잠공격 능력을 보유하지 못하여 부상한 잠수함을 바로 아래에서 발견 하였다 하더라도 손가락만 빨았을 뿐이었끼 때문에 비행선은 전술적으로 뛰어난 효과는 발휘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하늘에서 잠수함의 출몰을 감시하는 것은 망망대해를 수십 척의 수상함 들이 떼를 지어 헤집고 다니는 것보다는 분명히 효과적이었다.

 
                 하늘에서 해상을 감시하는 것이 효과적 방법임이 입증되었다


 
오늘날 고성능 PC와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인 APLLE ][ 를 단순히 성능만 가지고 비교를 할 수는 없지만, 컴퓨터는 반드시 집체만한 대형이고 여러 명의 전문가들만이 사용한다는 고정관념을 무너뜨린 APLLE ][ 와 같은 선구자의 등장 없었다면 오늘날의 정보화 사회를 만든 기술적 발전과 진보도 없었을 것이다. 요즘 스마트폰의 열풍도 이미 이를 시대를 앞서보고 사전에 차근차근 준비한 기술적 기반이 있었기에 탄생한 것이다.

 
                    비행선에 의한 초계활동은 보잘 것 없는 시작이었지만 
                          오늘날 해상초계기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관점으로 본다면 제1차 대전 당시에 인간의 감각에 의지하여 적 잠수함을 발견하는 한 없이 보잘 것 없어 보이던 초보적인 형태의 공중초계 활동을 결코 우습게 볼 수는 없다.  ( 사실 '견시'는 오늘날에도 중요한 초계수단이다 ) 그러한 하나하나의 시도와 시행착오가 쌓여서 오늘날의 고성능의 대잠초계기가 탄생되고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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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드리지 말고 신고하세요!

 
 
대부분의 무기는 상대를 공격하는데 사용되는데, 특이하게도 지뢰(地雷)는 방어용으로 사용되는 무기라 할 수 있습니다.  지뢰는 외부에서 가해지는 압력이나 충격으로 뇌관을 작동시켜 폭발하는 원리로 작동하므로 주로 상대의 공격이 예상되는 통로지역에 대설하여 놓습니다.  사실 이러한 방식은 역사가 상당히 오래된 편인데 화약을 이용한 현대적 의미의 지뢰는 제1차 세계대전 때 탄생하였습니다.
 

                                          여러 종류의 지뢰들
      (좌에서 시계방향으로 M-15 대전차지뢰, M-14 대인지뢰, KM-14 대인지뢰)

 
지뢰는 상대방의 눈에 잘 띄지 않도록 땅에 파묻힌 채로 살포되므로 상당히 발견하기가 힘듭니다.  따라서 지뢰가 폭발하여 피해를 입게 된 뒤에야 발견되는 경우가 흔하고 지뢰의 매설이 예상되는 지형을 통과하여 공격할 때는 공병대등이 먼저 탐색하여 공격로를 사전에 개척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지뢰는 비인도적 무기의 대표로 손꼽힙니다.


                          매설된 지뢰는 발견하고 제거하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사실 모든 무기가 인도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특별히 지뢰가 비인도적인 무기로 꼽히는 이유는 피해 대상이 무차별적이라는 점 때문입니다.  비록 나를 방어하기 위한 무기지만 적들만 골라 선별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고 경우에 따라서는 지뢰를 매설한 측에게도 피해를 입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전진과 후퇴가 반복되어 전선의 등락이 심한 경우에 이런 경향이 많습니다.

 
                                 대전차지뢰에 의해 피폭된 M1A1전차

 
하지만 그보다도 지뢰가 비인도적인 이유는 전쟁이 종결된 이후에 발생하는 폭발사고 때문입니다.  전쟁이 끝나면 무기를 사용할 일이 급격히 감소되지만 지뢰는 제거되지 않는 한 계속하여 작동합니다.  더구나 발견하기도 어렵고 제거에도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므로 평화가 정착된 이후에도 본의 아니게 폭발사고가 자주 일어나고 이 경우 피해를 입는 이들의 대부분은 민간인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최근 전방지역에 출몰한 북한의 목함지뢰(木函地雷)가 문제가 되는 부분도 바로 이점입니다.  군의 작전 통제구역뿐만 아니라 여름 휴가철에 민간인의 접근이 가능한 하천 인근에 무차별적으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북한 측 지뢰가 어떠한 경위에 의해서 흘러 들어왔는지 아직까지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지만 8월 3일까지 총 76발의 목함지뢰가 출몰하였고 그중 하나는 지난 7월 31일 폭발사고를 일으켜 민간인이 희생되기도 하였습니다.


 
                            최근 전방지역에서 발견되는 북한 제 목함지뢰

 

현재 발견 된 목함지뢰는 우리 측에서는 생소한 방식인 나무상자 안에 TNT같은 폭발물이 들어있는 형태의 대인 살상용 지뢰입니다.  제2차 대전 당시에 소련이 주변의 재료를 이용하여 값싸고 신속하게 만든 것이 시초라고 하는데, 이 때문에 북한에서는 러시아말로 '고체폭약'이라는 의미의 '뜨로찔'이라고도 부르고 6.25전쟁 당시에도 폭 넓게 사용된 것으로 전해집니다.

 

                                             목함지뢰 구조도

 
외피가 나무다 보니 쉽게 썩어서 매설 이후 5~7년마다 교체하여야 하지만, 반면 제작이 쉽고 금속탐지를 피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또한 투박한 겉모양과 달리 상당히 강한 폭발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밟는 것처럼 외부의 압력이 있어도 터지고 부비트랩식으로 줄을 건드리거나 뚜껑을 열어도 폭발하는데 안전핀이 제거된 상태에서는 불과 1kg 정도의 작은 압력에도 터질 수 있어 상당히 위험합니다.


 
                 현재 군은 최선을 다해 지뢰를 수색하고 제거 중에 있습니다
.


 
보도에 따르면 군 당국은 지난달 17~23일 개성지역에 내린 많은 비로 인해 유실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보고 북측에 재발방지를 위한 전화통지문을 발송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유일하게 목함지뢰만 떠내려 온 점을 들어 민간인 피서객을 노린 의도적인 방출가능성도 진지하게 제기하고 있습니다.  다만 현 시점에서 원인이야 어떠하든 발견된 것만도 70개가 넘을 만큼 다량의 지뢰가 살포되어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목함지뢰 발견 시 신고를 부탁하는 안내문

 

현재 군 당국에서는 한강하류와 임진강 등 북한과 연결된 하천 주변에서 대대적인 수색작업을 벌이고 이들을 제거하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깊숙한 풀밭이나 모래톱, 수면 하에 목함지뢰가 매몰되어 있을 가능성이 상당히 큽니다.  따라서 해당 지역에 가게 될 경우 주의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물론이고 만일 발견하였다면 절대로 건드리지 말고 군경에 즉시 신고하여야 하겠습니다.  안전을 위한 철저한 준비는 결코 과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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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훈을 얻고 대비를 하라


 
 
<사례 1> 1935년 10월 30일, 차세대 폭격기로 개발 중인 모델번호 299실험기가 최종평가 시험비행을 벌이던 도중 추락하였는데 어처구니 없게도 조종사 과실에 의한 사고였습니다.  결과는 참혹하여 조종사를 비롯하여 비행기에 탑승하였던 수많은 관계자들이 모두 숨지는 끔직한 참사가 되었습니다.  비록 299실험기는 여타 경쟁기종에 비해 성능이 앞선다고 사전 평가를 받았음에도 정식 도입 여부가 불투명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추락하여 불타는 299실험기
 

<사례 2>
1943년 2월 18일, XB-29실험기로 명명되어 제작 중이던 차세대 폭격기가 최초 실험비행에 나섰습니다.  군 관계자와 기술자들을 태우고 40여 분 동안 비행했을 때 갑자기 엔진에서 불이 났고 이로 인해 비행기가 공장지대에 추락하여 탑승자 전원 및 공장 관계자 등 총 31명이 사망하는 초유의 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결국 XB-29실험기의 본격 제식화는 유보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장지대에 추락하여 엄청난 인명피해가 발생한 XB-29실험기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은 무지막지한 전략폭격을 실시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적 후방을 공습하여 상대의 전쟁수행 능력과 의지를 꺾어버린 전략폭격은 한마디로 전쟁의 패러다임을 새롭게 바꾼 거대한 군사전략이었습니다.  이때 미국은 유럽전선과 태평양전선에 각기 다른 4발 중(重)폭격기를 투입하였는데 유럽에서는 하늘의 요새(Flying Fortress)라고 불린 B-17이, 태평양에서는 최강요새(Superfortress)로 알려진 B-29가 활약하였습니다.

 
          제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폭격기로 명성이 자자한 B-17(좌)와 B-29
 

그런데 B-17은 <사례 1>에서 소개한 모델번호 299실험기가, B-29는 <사례 2>의 XB-29실험기가 바로 원형기입니다.  이처럼 무기 개발사는 물론 전쟁사에 커다란 발자국을 남긴 뛰어난 전략폭격기들이었던 B-17과 B-29의 명성은 엄청난 실수에 의한 실패와 기술부족에 의한 시련을 극복하였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B-29는 6.25전쟁에서도 맹활약하였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완벽하게 만들어져 문제없이 사용되는 것이 가장 좋고 누구나 바랍니다.  하지만 무기 개발사를 살펴보면 이처럼 실패와 좌절을 극복한 예를 발견하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복잡하고 정밀한 기술이 요구되는 무기일수록 이런 실패의 예는 흔하고 드러나지 않는 소소한 문제점까지 고려한다면 처음 무기를 만들었을 때 처음 구상한대로 완벽하게 작동하는 무기를 만들기란 어쩌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보아야 합니다.

 
                공포의 비밀무기로 유명한 V-2 로켓도 엄청난 실패를 겪었습니다.
 

따라서 본격 제식화 된 이후에도 사용도중 발견 된 여러 문제점을 지속적인 개량이나 개선을 거쳐 고쳐나가면서 사용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사실 이것은 비단 무기류뿐만 아니라 상업제품에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이제는 당연시 되는 각종 제품의 리콜제도의 대상에는 베스트셀러로 많이 팔리고 사용되는 제품들도 포함되고는 합니다.

 
                          리콜은 흔한 일상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지난 7월 29일 장갑차 도하훈련 도중 침수사고가 발생하여 조종사가 순직하는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
하였습니다.  더구나 사고가 발생한 장갑차는 많은 기대 속에 최근 제식화되어 추후 국군의 주력이 될 K-21장갑차였습니다.  곧바로 사고의 발생 원인을 밝히기 위해 대대적인 조사가 벌어지겠지만 신형 장비를 가지고 훈련 도중 사고가 발생하였고 더구나 인명 피해까지 있었기 때문에 국민들의 충격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사고 후 인양된 K-21장갑차 (사진-뉴시스)
 
만일 기계적 결함에 의한 사고라면 조속히 개선이 이루어져야 사고의 재발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전술한바와 같이 새로운 무기나 장비가 완벽하게 제작되어 별다른 문제가 없이 완벽하게 작동하면 가장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최대한의 노력을 경주하여 다시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철저히 개선하여야겠습니다.

 
                조속히 원인이 규명 되어 사고가 반복되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인간의 실수에 의해 실패한 B-17이나 결함으로 사고를 겪은 B-29도 뼈아픈 실패를 극복하고 마침내 무기사에 길이 남는 성공한 명품무기가 되었듯이 K-21장갑차도 이러한 뼈아픈 사고를 잊지 말고 이를 반면교사의 사례로 삼아서 훌륭한 무기로 조속히 자리 잡도록 당국과 제작업체에게 노력을 촉구합니다.  반드시 교훈을 얻어 사고의 재발이 없도록 대비하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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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의 수퍼캐리어에 대한 이야기
 
 

최고의 전략 병기 중 하나로 평가받는 항공모함은 이미 실전에 등장한지 100년 가까이 되었을 만큼 생각보다는 오래전에 개발된 무기입니다.  한마디로 비행기가 무기로 사용되자마자 항공모함이 등장하였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항공모함은 여러 나라에서 여러 형태로 개발되어 사용하다가 제2차 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등을 거치면서 어느 정도 정형화된 모양으로 개념이 정립되어졌습니다.
 

                               최근 부산에 입항한 조지 워싱턴의 모습 (사진-조선일보)
 

현대 항공모함의 표준처럼 여겨지는 슈퍼캐리어(Super Carrier-초대형 항공모함)은 현재 미국만이 운용 중인데, 지난 7월 21일 한-미 연합훈련을 부산에 입항하여 언론에 공개된 배수량 9만 7천 톤의 핵추진 항공모함 CVN-73 조지 워싱턴 (USS George Washington)호도 거기에 해당됩니다.  최초의 슈퍼캐리어의 영예를 가지고 있는 항공모함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건조에 착수하여 1955년 취역한 CV-59 포레스탈(Forrestal)입니다.

 
                                               최초의 슈퍼캐리어인 포레스탈

 
사실 슈퍼캐리어의 명확한 정의가 내려져 있는 것도 아니지만, 배수량기준으로 적어도 7만 톤이 넘고, 경사활주로(Angled Deck)가 장착된 총 길이 300미터가 넘는 갑판, 4개의 사출기 및 엘리베이터 등을 그 외형적인 특징으로 손꼽을 수 있습니다.  즉, 제트화로 대형화된 60여기 이상의 전술기를 탑재하여 최대 한개 편대를 동시에 이함 시킬 수 있거나 이론상으로 함재기를 동시에 이착함을 동시에 시킬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륙하는 다양한 종류의 함재기들
 

이에 부합된 능력을 처음으로 보유한 항모가 바로 포레스탈인데 이후 등장한 미국의 항모들을 통상적으로 슈퍼캐리어라 지칭합니다.  현재도 이 정도 규모의 항모를 실전 운용하는 나라는 미국밖에는 없는데, 최근 취역 한 CVN-77 부시(George H.W.Bush)호까지 이러한 구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정도로 포레스탈은 기념비적 작품이었습니다.  굳이 차이라면 시대의 기술이 접목된 동력, 아일랜드구조, 엘리베이터 위치, 무장이나 센서류 정도라고나 할 정도입니다.
 

           포레스탈의 개념도인데, 최근 항공모함과 비교하여 엘리베이터 위치 등이 차이가 있습니다.
 
 

포레스탈의 등장이전까지 미국이 운용하였던 최대 규모의 항모가 배수량 5만 톤 정도였던 미드웨이급(Midway Class)이었으며, 현재 미국의 항모 이외에 최대 규모인 러시아의 쿠즈네쵸프(Kuznetsov)나 영국의 도입예정인 CVF급 항모도 이착함 능력 및 배수량 기준으로도 60년 전 등장한 포레스탈에 미치지 못합니다.  단지 배수량으로만 따진다면 이에 필적할 만한 항모는 제2차 대전 당시 일본해군의 시나노 정도 밖에는 없습니다.

 
                  러시아 유일 항공모함인 쿠즈네쵸프는 사출기가 없어 운용능력이 부족합니다.
 

포레스탈이 최초로 제식화한 슈퍼캐리어는 맞지만 서류상으로는 제2차 대전 직후 연구된 CV-58 유나이티드 스태이츠(Uniter States)의 개념이 정립된 최초의 슈퍼캐리어이었습니다.  하지만 장거리 전략폭격기, 핵미사일 등의 이유로 항모무용론이 제기되자 개발이 취소되었는데 그 구조가 현대의 항모와 많은 차이를 보이며 오히려 태평양 전쟁 중 일본 항모와 닮았다는 느낌이 들게 합니다.
 

                                  서류상의 계획되다 폐기된 CV-58 유나이티드 스태이츠 
                                경사활주로가 없는 등 현대의 항공모함과 차이가 많습니다
 

이처럼 용도가 폐기 될 운명에 처했던 슈퍼캐리어가 포레스탈로 부활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제트기 시대의 도래에 따른 함재기의 대형화 때문입니다.  오래 동안 대양의 주인이었던 전함(Battleship)이 그 덩치로 인하여 사라진데 비하여 오히려 항공모함이 덩치를 더 키우게 된 이유가 바로 항모의 존재 이유였던 함재기의 크기가 커졌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퇴역한 F-14함재기의 멋진 이함 모습
                       슈퍼캐리어의 등장으로 고성능 대형 함재가의 운용이 가능해졌습니다
 

이전 항공모함은 크기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여기에 탑재하여 운용할 수 있는 함재기가 공군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성능 상 핸디캡을 가질 수밖에 없었으나 슈퍼캐리어의 등장은 F-4, F-14, FA-18같은 대형 함재기의 운용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영국이 수직이착륙기를 이용한 경항모 시대를 개막하였으나 결국 다시 중형 항모정책으로 회귀한 가장 큰 이유는 수직이착륙기와 경항모 자체가 가질 수 밖에 없는 작전능력의 한계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의 항공모함과 작전 중인 영국의 경항공모함
                                  한눈에 보이는 크기만큼 작전 능력의 차이가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미국도 이러한 공룡을 만들어 놓고 그 능력을 제대로 몰라 여러 가지 실험을 하였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으로 이전의 미드웨이급에서는 상상도 못 할 거대비행체의 이착함실험 등이 그것입니다.  비록 시범적으로 KC-130F 수송기의 이착함에는 성공하였지만 대형 수송기도 할 수는 있다 정도만 증명하였을 뿐 갑판 운영에 있어서의 비효율성 등으로 단지 실험으로만 끝납니다.


                              포레스탈 갑판에서 이함대기 중인 KC-130F의 실험 모습
 

이처럼 새롭게 시도할 연구가 많았을 만큼 슈퍼캐리어는 군사 패러다임의 정립에 많은 변혁을 불러왔고 이때부터 무서운 전략 병기로 본격적으로 진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처럼 새로운 장을 개척한 포레스탈은 1993년 퇴역하여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무기사적 의의는 크고 영원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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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평양을 왕복하는 총기들
 

 
우리나라에서는 수렵용 엽총이나 사격장 용도로 허가를 받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개인이 총기를 보유하는 것이 불법입니다.  때문에 총기와 관련한 사고가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없다고 보아야 할 정도로 적고 이것은 앞으로도 계속하여 지켜져야 할 원칙이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범죄율이 높은 여러 나라에서 법으로 총기 보유를 강제하고 싶어도 어느덧 하나의 문화가 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경찰의 단속에 적발된 불법 사제 총
 

이러한 딜레마를 가지고 가장 크게 체감하고 고민하는 나라가 아마도 미국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서부개척 시대를 거치면서 민병대의 전통을 하나의 자랑이자 역사로 생각하는 미국은 현재도 총기의 보유가 자유롭고 총기의 수집이 하나의 취미로도 정착되었을 정도입니다.  금연자도 담배 수집을 취미로 가질 수 있듯이 총기의 사용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도 총기 컬렉션을 할 만큼 총기와 그와 관련된 문화가 관대한 나라가 바로 미국입니다.

 
                  잦은 총기사고에도 불구하고 총기를 규제하지 못하는 것이 미국의 고민입니다
 

국가의 역사가 짧은 탓도 있겠지만 미국은 유별나게도 지나간 물건에 대한 가치를 상당히 높게 쳐줍니다. 골동품이라기보다는 폐품에 가까운 불과 십여 년 밖에 되지 않은 아주 가까운 과거의 물건도 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다보니 시골 동네에도 골동품가게(Antique Shop)를 쉽게 찾아 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렇다보니 단지 예전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생판 모르는 남의 사진첩도 거래되는 경우까지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골동품 점인데 남의 사진까지 거래가 됩니다
 

그런 점은 총기와 관련하여서도 마찬가지며 실제로 실전경험이 있는 총기를 역사적인 소장품으로 간직하려는 사람이 많은 것이 당연할 정도입니다.  따라서 제2차 대전, 한국전쟁을 거쳐 월남전 초기까지 사용된 M1과 M1카빈소총(이하 카빈)은 상당히 소장가치로써의 인기가 높습니다.  이들 소총은 총 1000만정 가까이 생산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생산국인 미국뿐만 아니라 수많은 여러 나라에서 주력 제식소총으로 사용되었습니다.

 
                                                      M1소총(상)과 카빈
 

하지만 거대한 전쟁에 가장 많이 사용된 주력 소총이었던 관계로 아직까지 제대로 작동하는 M1과 카빈이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전 세계에서 아직까지 보관상태가 양호하여 작동되는 M1과 카빈의 대부분은 우리나라에 있다입니다.  얼마 전까지 예비군용으로 사용되었을 만큼 상당량의 작동한 소총이 보관 중입니다.  그러나 부품조달, 보관비용 등의 여러 문제로 실전용으로 사용하기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예비군 훈련에 사용된 카빈
 

마침 이렇게 우리나라에서도 애물단지가 되어가던 이들 소총들이 미국 호사가들을 위해 다시 바다를 건넜습니다.  지난 2009년 말 예비군용 총기로 보관되어 있던 M1과 카빈 중 상태가 양호한 12만 2천정 (M1 7만5천정, 카빈 3만 5천정)의 소총들이 미국의 민간판매용으로 방출되기로 결정된 것이었습니다.  외화를 획득할 수 있는데다가 구형총기에 대한 재고관리 부담을 줄일 수 있어서 한마디로 일석이조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미국의 민간인이 취미로 사용 중인 M1
 

전술한 것처럼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인마살상용 총기의 개인 보유가 허용이 되지 않기 때문에 M1이나 카빈 같은 고성능소총(총 자체가 구형이지만 총기로써의 성능은 상당히 좋은 편으로 현재도 평가되고 있음)의 국내 소비가 불가능하므로 전량 비용을 들여 자체 폐기하여야 되는데 그런 점에서 볼 때 이러한 대외 재판매 방식은 상당히 좋은 정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6.25전쟁 당시 미 해병대가 사용 중인 카빈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을 구하러 미국에서 한국으로 태평양을 건너왔던 귀중한 무기들이 그동안 소중하게 사용되고 보관되다가 이제는 미국의 호사가들을 만족시켜 주기위해 반대로 태평양을 건너가게 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재미있는 역사적인 사건이 아닌가도 생각됩니다.  아마 이들이 생명체였다면 많은 생각이 들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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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적이었던 대한민국 공군의 분투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최근 각종 매체를 통해 극이나 다큐멘터리가 방송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개전 초기의 참담했던 상황을 묘사하는데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북한군 전차다.
국군이 용감하게 육탄방어에 나섰지만 전차를 앞세운 북한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다.
당시에 국군이 보유하지 못한 전차는 6.25전쟁 발발 당시의 현격한 전력차이를 한 번에 알려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북한군 전차를 육탄공격 중인 국군을 묘사한 TV 드라마 (사진-MBC)
 

그런데 이처럼 전차로 대표되는 기갑전력 외에도 국군은 거의 모든 부분에서 북에 비해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엄청난 열세를 보이고 있었다.
병력으로는 1 : 2 수준이었지만 화력까지 계량화한다면 전쟁 발발 당시에 남북 간의 전력차이는 약 1 : 5 정도까지 벌어져 있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그중에서도 사실 가장 전력차이가 심했던 것은 항공전력이었다.
전차의 경우라면 비록 북한군의 T-34를 막는데 무용지물이었지만 2.36인치 로켓포나 57밀리 대전차포처럼 형식적이나마 대전차무기를 보유하였던 것에 비한다면 전쟁 발발 당시의 항공전력은 그야말로 비교불가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출격준비에 나선 북한 공군기

 
당시에 북한군은 야크(YAK)전투기 외 160여기의 작전기를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총 200여기의 군용기로 구성된 항공사단을 보유하였다.
하지만 당시 국군은 단지 L-4, L-5, T-6 훈련기 23기 만 보유하여 전투력은 전무한 상태여서 공대공전투로 적기와 맞상대할 수 없었다.
당연히 개전하자마자 북한기가 서울 상공에 나타났을 만큼 제공권은 북한군이 장악하였다.

 
                                         적 전차를 향해 육탄 돌격하는 L-5 훈련기
 

그러나 단지 공대공전투가 불가능하다고 국군은 그냥 손을 놓고만 있지는 않았다.
후방석에 정비사들이 급조폭탄을 휴대하고 있다가 눈으로 조준하여 손으로 투하하는 공대지 육탄작전을 펼치기 위해 당시 하늘의 용사들은 망설임 없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비록 이러한 육탄공격은 미미한 성과밖에 기록하지는 못하였지만 보유한 274개의 폭탄마저 개전 3일 만에 바닥이 나자 더 이상 작전을 진행 할 수도 없었다.
쉽게 극복할 수 없었던 현격한 전력차이에 하늘의 용사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 바로 1950년 6월의 모습이었다.


                                선명한 태극 마크를 붙이고 현해탄을 건너오는 최초의 F-51편대
 

그러한 국군에게 미국의 즉각적인 참전과 원조는 어둠을 밝히는 빛줄기가 되었다.
미국은 한국 공군에게 10기의 전투기를 공급하는 바우트원(Bout One) 계획을 실시하였고 이에 따라 전쟁 발발 하루 뒤인 6월 26일 이근석 대령을 비롯한 10명의 국군 조종사들이 F-51 전투기를 인수받기 위해 일본 이타즈케의 미 공군기지로 도착했다.
일본에 도착한 조종사들은 즉각 전투기 전환 훈련에 돌입했으나 악천후 등으로 인해 나흘 동안 1인당 20~30분 정도의 훈련비행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급박한 전황 소식을 접한 조종사들은 즉각 귀국을 요청하여 7월 2일, 10기로 이루어진 F-51 전투기 편대가 대구에 도착하였고 다음날부터 출격에 나서 적에 대한 공대지 작전에 투입되었다.

 
                        지난 7월 1일 제11전투비행단에서 열린 F-51 전투기 인수 재현행사
 

세계 항공전사에서 보기 힘든 극적인 광경이라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닌 순간이었다.
전투기를 다뤄 본적이 없었던 조종사들이 불과 나흘간의 급박한 훈련을 거친 후 실전에 투입되어 전과를 올린다는 것은 거의 기적과 다름없다.
그들은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기 위해 모든 위험을 무릅쓴 것이었고 그러한 분투는 국난 극복의 커다란 힘이 되었다.
한국 공군의 선구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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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둠을 밝힌 용전분투

 
 
1950년 6월 25일 새벽 5시, 해군본부로부터의 긴급출동 명령을 받은 YMS-509 경비정이 동해의 묵호항을 빠져나와 북상하였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명령을 내린 해군본부나 정장이었던 김상도 소령도 전면전 발발사실은 몰랐다.
북상하던 509정은 7시 20분경 옥계 인근 해상에서 북한군 상륙부대를 이동하던 북한군 소형 포함을 발견하고 즉시 교전을 벌였는데 이것은 6.25전쟁 최초의 남북 해군간의 교전이었다.

 
                                           YMS-509와 동급의 미 해군 소해정
 

비록 적함을 침몰시키지는 못하였으나 50여 분간의 교전 끝에 북한군 함정을 북으로 패주시켰다.
그리고 509정은 당일 오후 3시에 또 다른 북한군 상륙부대 함정들과 교전을 벌여 상륙정 1척을 격파하고 발동선 1척을 나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당시 북한은 남침과 동시에 동해안 후방에 특작부대를 상륙시켜 국군 제8사단의 배후를 단절시키는 작전을 구사하였는데 509정의 분투로 많은 차질을 빚었다.

 
                          후방으로 침투하던 북한군을 차단하는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대한민국 해군의 지략은 같은 날 서해바다에서도 빛을 발하였다.
전면전임이 확인되자 해군본부는 유일한 상륙함 LST-801 천안함을 옹진반도로 급파하였다.
원래 전면전이 발발할 경우 고립된 옹진반도에 주둔한 제17연대를 후방으로 철수시키기로 계획은 되어 있었지만 해군은 육군의 요청을 기다리지 않고 인천경비부 사령관 유해거 중령에게 명령을 즉각 하달하였다.
 

                                제17연대를 구출하기 위해 출동한 LST-801 천안함
 

이때 천안함 하나로 부족할지 모른다는 판단에 따라 경비부가 보유한 모든 소해정들과 인근의 민간 선박을 징발하여 급조된 철수 선단을 구성하는 치밀함을 해군은 발휘하였다.
그 결과 적에게 함락될 위기의 상황에서 성공적으로 해상철수한 제17연대는 즉시 국군의 예비대가 되어 전쟁 초기의 피 말리는 지연전에 투입되었고, 이후 인천상륙작전에도 참여하여 반격전의 선봉장으로 맹활약하였다.

 
                                                  옹진반도 전투 상황도
 

하지만 전쟁 초기의 대한민국 해군이 보여준 최대의 하이라이트는 남해바다에서 있었다.
전면전 발발 소식을 접한 해군본부는 당시 우리 해군이 보유한 최대 전투함인 PC-701백두산함에게 출동 명령을 내렸다.
백두산함은 변변한 전투함정이 한 척도 없음을 한탄한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이하 모든 해군 장병들이 월급을 털어 마련한 기금에다가 국민의 성금 등이 모여 어렵게 장만한 함이었다.

 
                                          하와이에서 포탑을 장착하는 PC-701함
 

사실 함이라고 이름을 붙였지만 미 해군에서 퇴역하여 해양대학의 실습선으로 활용하던 구현 선박에 3인치 포를 장착한 450톤 규모의 소형 함정이었다.
하지만 태평양을 가로질러 태극기를 게양한 백두산함이 1950년 4월 10일 모항인 진해에 입항하였을 때 국민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 만큼 한국 해군에게 귀중한 전투함이었다.
바로 이러한 한국 해군의 자랑이 조국을 구하기 위해 출동한 것이었다.

 
                                                      작전 중인 백두산함
 

진해기지를 출항한 백두산함은 25일 18시경, 급속히 남하하던 미확인 괴선박을 발견하고 추격에 나섰는데 이 괴선박이 약 600명의 무장병력을 탑승시킨 북한의 1,000톤급 수송선임을 알게 되었다.
백두산함은 유리한 위치에서 교전을 벌이고자 일단 현장에서 이탈한 후 통제부의 명령을 받아 26일 0시 10분경 다시 근접 접근하여 공격을 개시하였다.
북한군이 격렬한 저항이 있었지만 이 전투 결과 아군은 전사와 부상이 각각 2명인 피해를 입었지만 적선을 격파하여 침몰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대한해협전투 상황도
 

전사에는 이를 대한해협전투라고 표기하는데 그 의의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북한 무장선의 임무는 부산항 점거를 위해 북한군을 상륙시키기 위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만일 그렇게 되었다면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의 유일 생명선이 조기에 차단될 수도 있었던 아찔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백두산함은 그러한 절체절명의 위기로부터 대한민국을 구한 것이었다.
 

                                           전쟁 직전 촬영된 백두산함의 장병들
 

이처럼 개전 초에 압도적인 적에게 밀려 고전을 거듭하였던 지상의 상황과 달리 대한민국 해군은 서전부터 상당한 전과를 올렸고 그것은 암울했던 시기에 어둠을 밝혀준 횃불과 같았다.
비록 최근에 발생한 천안함 사태와 관련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대한민국 해군은 이처럼 자랑스러운 전통을 가진 대한민국의 보루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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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해안 기록된 남침증거
 

 
흔히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38선 일대의 모든 북한군부대에 '폭풍'이라는 남침 암호가 하달되면서 04시에 일제히 포격을 개시하면서 발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모든 남침 준비를 완료한 북한군이 전면남침을 개시한 시간이 04시였고 이것은 6.25전쟁 발발의 개시 시간으로 알려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북한군이 38선 이남으로 월경하여 도발을 개시한 것을 전쟁 개시시점으로 본다면 실제로 전쟁은 그보다 1시간 앞선 03시에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새벽 4시에 북한군의 포격이 개시되면서 6.25전쟁이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왜냐하면 비록 38선 전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북한군 일부가 6월 25일 03시에 38선을 넘어 이미 남침을 개시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6.25전쟁 당시 상륙작전하면 인천상륙작전을 먼저 떠올리고 전사에 대해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통영상륙작전, 원산상륙작전 등도 생각이 날 것이다.전쟁 중 상륙작전의 대부분은 위에 언급한 예처럼 제해권을 확보한 유엔군의 주도로 이루어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막연한 상상과 달리 6.25전쟁 중 최초로 벌어진 상륙작전은 북한군이 시도 하였는데, 이것은 전쟁 개시시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북한이 주장하는 6.25전쟁 북침설이 허구임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이기도 하다.

 
                       북한군의 동해안 상륙과 강릉전투 상황도
 

1950년 6월 25일 03시 북한군 제766부대(최근 개봉한 영화  '포화 속으로' 에서 차승원이 지휘관으로 나온 부대)가 동해안의 임원진으로 그리고 제945부대(오래동안 제549부대로 알려졌었다)가 인근의 정동진으로 기습 상륙하였다. 그리고 기록을 살펴보면 북한 스스로도 이것은 성공적인 기습작전이었다고 자화자찬하고 있다.03시에 동해안에 상륙한 북한군은 연대규모의 경무장부대들로 해당 지역에 상륙한 후 현지에서 암약하던 공비 세력과 연결하여 국군을 분리하고 고립시키는 임무에 투입되었다.당시에 동해안을 담당하던 국군 제8사단은 38선 일대의 주문진에 제10연대, 강릉에는 사단사령부를 그리고 후방인 삼척에 제21연대를 배치해 놓고 있었는데 북한군이 중간에 상륙하여 제8사단의 연결을 끓고 제10연대와 사단사령부의 배후를 차단하였다. 따라서 국군 제8사단은 개전 첫날 38선을 돌파하여 남진하는 북한군 주력과 배후를 압박하던 이들 상륙부대에 의해 순식간 고립된 형국이었다.

 
                      영화 '포화 속으로'에 묘사된 북한군 제766부대
 

다행히도 국군 제8사단은 놀라운 투혼을 발휘하여 전면의 적을 막고 대관령쪽 퇴로를 확보하여 무사히 철수를 단행할 수 있었고 이것은 6.25전쟁사에 있어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거론된다.
그런데 동해안에서 벌어진 바로 이러한 숨막히는 개전 초기의 상황에서 중요한 의의를 그동안 많이 간과하였다.
우선 03시에 북한군 정규군이 동해안에 상륙하였다는 점이다.
이미 북한은 38선 일대에 포격을 날리기 이전에 그들의 정규군을 우리 후방으로 침투시켜 도발을 감행했고 그렇다면 6.25전쟁 개시시간을 03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03시에 전쟁이 벌어졌음을 기록한 남침사적비
 

이것은 또한 6.25전쟁을 지금까지도 북침이라 왜곡 선전하는 북한의 주장이 거짓임을 입증하는 증거다.
개전 당일 국군 후방으로 대규모 병력을 상륙시킨다는 자체가 벌써 북한군의 남침을 입증한다.
상륙작전은 규모의 대소 여부를 떠나서 사전에 충분한 사전준비를 마친 후에나 실시할 수 있는 군사작전이기 때문이다.
도발을 받자마자 즉각 반격하여 상대의 배후로 연대규모의 부대가 상륙을 펼친다는 자체가 우선 말이 되지 않는다.

 
         사전 준비가 필요한 상륙작전은 즉시 반격에 사용할 수 없는 군사작전이다.



비교적 소규모였던 통영상륙작전 당시의 해병대도 사전에 많은 준비를 하였다. 따라서 북한의 북침설은 개전 당일 동해안에서 벌어진 상륙작전만으로도 부인할 수 없는 거짓임이 여실히 입증된다. 1950년 6월 25일 03시 동해안에서 벌어진 북한의 기습상륙작전은 개전 시기에 대하여 한 번 정도 생각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북한의 남침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증거로 적극 활용될만한 역사적 사실이라 할 수 있다.

 
                                     제8사단 강릉전투 승전비
 

그런데 야심만만하게 후방에 상륙한 북한군 부대는 이후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하였다.비록 전쟁 발발 당일 동해안 국군 제8사단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지만 방어에 나선 민관군의 노력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 전사에 일일이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무명 사병들과 민초들의 노력이 위기를 기회로 승화시킨 주역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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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이 없다고 실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 5월 28일 북한의 국방위원회가 이례적으로 기자회견을 자청하여 관심을 끌었다.
천안함 사태와 관련한 국제정세가 북한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그만큼 다급했던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물론 철저한 부인과 책임회피로 일관하였는데 지금까지의 행태를 보아 그리 놀랄만한 사실도 아니었다.
우리 국방부는 이에 대해 5월 31일, 조목조목 과학적 근거를 들어 반론을 제시하여 북한측 주장의 허구성을 입증하였다.
 

철저한 부인으로 일관된 북한 국방위원회의 기자회견

 

이와 관련하여 당시 북한의 회견 내용 중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었다.
"우리에게는 연어급 잠수정이요, 무슨 상어급 잠수정이 없고 130t짜리 잠수정도 없다"
이러한 주장은 일반인들도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구글어스(Google Earth)에 등장한 잠수정의 위성사진만 가지고도 쉽게 거짓임이 입증되었다.
그런데 이중 연어급, 상어급이라는 명칭이 북한에 없다는 점은 사실(?)이다.

 

연어급 잠수정 제작공장과 진수장소로 알려진 구글어스의 사진모습



최근 공개된 연어급 잠수정

 

전 북한 잠수함대원이던 이광수씨를 대담한 동아일보 2010년 6월 2일자 기사에 의하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이광수씨는 "로미오급, 상어급, 연어급, 유고급이라고는 안 하고 톤(t)수에 따라 대형 중형 소형 극소형으로 분류한다. 1000t급 이상은 대형, 300t급 이상은 중형 하는 식이다." 라고 하였다.
사실 함정의 급(Class)은 동일한 함정들을 다른 종류의 함정과 구분하기 위해 붙이는 편의상 구분법인데 보통 초도함의 이름을 따서 정해진다.
예를 들어 천안함은 동종 첫째 함정이었던 포항함의 이름을 따서 포항급 초계함으로 구분된다.

 

로미오급으로 알려진 잠수함. 이 이름 또한 서방에서 부여한 코드네임이다.


     
반면 동구권은 무기의 이름을 스스로 공개한 적이 별로 없었는데, 이때 서방에서 편의를 위해 코드네임을 부여하였고 이것은 당연히 무기 제작국의 의사와 관련이 없다.
예를 들어 동구권의 대표적 전투기인 MIG기 시리즈에 대해 서방은 전투기를 의미하는 F로 시작되는 타칭을 부여하였는데, MIG-15 Fagot, MIG-17 Fresco, MIG-19 Farmer, MIG-21 Fishbed, MIG-23 Frog Foot, MIG-25 Foxbat 등이다.

 

농부(Farmer)라 불리는 MIG-19. 제작국에서 부여한 애칭이 아니라 서방측에서 부여한 코드네임이다

 

당연히 연어급처럼 새롭게 알려진 북한 잠수함의 구분명칭은 북한 스스로 정한 것이 아니라 한미정보 당국이 부여한 명칭인 것이다.
세계적인 전략정보 싸이트인 Globalsecurity 에서도 연어급의 이란 버전인 가디르급과 함께 Yono Class / Ghadir Class  Submarine 으로 표시할 정도이고 북한도 우리가 붙인 이런 구분법을 당연히 인지하고 있다.

 

Globalsecurity 에 소개 된 연어급 잠수정



동급 잠수정으로 알려진 이란의 가디르급

 

사실 정보당국이 연어급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은 이미 오래전이었고 일부 실제 제작 중인 사진이 공개되기도 하였다.
결론적으로 자신들이 부여한 이름이 아니기 때문에 모르는 것인 것처럼 주장하는 북한의 교묘한 말장난은 통용될 수가 없다.
그들이 보유하고 있고 객관적으로 검증되는 무기체계마저도 공공연히 부인하는 자세에서부터가 그들의 주장이 받아들여 질 수 없는 이유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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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코 작지 않았던 커다란 은혜

 
 
전투병을 파병한 16개 참전 국가를 포함하여 6.25전쟁 당시에 무려 40여 개의 나라들이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을 위해서 직간접적인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어려웠을 때 도움을 주었던 이들 국가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은 두고두고 되새기고 기억하여도 결코 모자람이 없을듯하다.
 

6.25전에서 맹활약하는 필리핀군

                             
 
이들 국가들 중에는 전투병력 및 무기는 물론이거니와 경제적으로도 가장 많은 도움을 주었던 미국과 같은 나라는 물론 의료용 알콜과 혈청 같은 특정물품을 보내주었던 쿠바 같은 생소한 나라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하나라도 아쉬웠던 당시 우리나라의 입장을 고려할 때 도움을 주었던 나라들의 경중을 일일이 따지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다.
 

우리가 많은 도움을 받은 것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를 지원한 40여 국가 중 굳이 참전 16개국을 자주 언급하는 것은 다른 가치로는 도저히 환산 할 수 없는 고귀한  인명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참전 UN군 병사들 대부분에게 극동의 신생국 코리아는 평생 듣도 보도 못한 이역만리 타국이었다.
이처럼 생소한 곳에 와서 많은 나라의 젊은이들이 귀한 생을 마감하거나 아니면 평생을 가지고 갈 부상을 당하였다.

 

많은 외국의 젊은이들이 사상당하였다.

                                 
 
이런 너무나 고마웠던 16개 참전국 중에는 룩셈부르크대공국 ( Grand Duchy of Luxembourg ) 도 있다.
흔히 베네룩스 3국이라는 단어처럼 많이 들어는 보았지만 의외로 제대로 알지는 못하는 나라가 바로 룩셈부르크인데 유럽 중부의 프랑스, 독일, 벨기에 사이에 있는 입헌군주국으로 서울시의 4배 정도 되는 크기에 약 45만의 국민이 사는 미니국가다.
 

유럽의 소국 룩셈부르크

                                   
 
룩셈부르크는 1867년의 런던조약으로 영세중립이 보장되었던 국가였다.
그러나 이웃 벨기에와 더불어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본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독일에게 점령당하여 수많은 희생자와 국토의 황폐를 초래했기 때문에 소극적인 중립을 포기하고 1948년 북대서양조약기구 NATO의 창설국이 되어 집단 안보체계를 통한 국가의 안전을 담보하는 정책 전환을 하게 되었다.
 

중립을 포기하고 집단안보 체제에 가담한다.(전쟁 당시 룩셈부르크를 점령한 독일군)

  
 
중립을 포기한 룩셈부르크는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최초 44명의 자원자들로 구성 된 소대규모의 부대를 1950년 11월 한국에 파병하였고 이후 연인원 89명의 용사들이 지구 반 바퀴 건너에서 벌어진 전쟁에 참전하였다.
워낙 작은 규모라서 단독적인 작전은 펼치지는 못하였고 미 제3사단 예하의 벨기에대대에 편입되어 휴전 후까지 전선에서 활동을 하였다.
 

6.25전쟁에 참전한 룩셈부르크소대 (사진출처-동아일보)

                
 
하지만 룩셈부르크군이 소규모라 하더라도 후방에서 편하게 작전을 펼쳤던 것은 아니었다.
전사 및 실종자 7명에 21명의 용사들이 부상당하였을 정도로 전투에 적극적으로 임하였는데 이러한 규모를 분석하면 룩셈부르크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모든 참전국들 중 총 인구 대비 참전 병력 비율 및 전사상자 비율이 1위를 하였을 만큼 대한민국에게 최선의 도움을 우리에게 주었던 국가다.

 

룩셈부르크와 그 국민들께 감사를 전한다(유럽연합군의 일원인 현재 룩셈부르크군의 멋진 모습)

 

룩셈부르크는 냉전이 끝난 현재 안보적으로 가장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서유럽에 있으면서도 2개 대대 900명의 상비군을 운영하고 있는 국가다.
유럽 주요국가들 사이에 있으면서도 워낙 나라가 작아 의외로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룩셈부르크는 한국전 당시 이처럼 귀한 피를 받쳐가며 그 어느 나라보다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룩셈부르크와 그 국민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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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전의 시작을 알린 전차
 


 1945년 5월 7일, 프랑스 랭스(Rheims)에 있는 연합군사령부에서 독일의 항복조인식이 열렸다.
하지만 소련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독일을 겁박하여 다음날 베를린에서 그들의 주도 하에 별도의 항복조인식을 실시하였다.
이처럼 전쟁의 끝을 상징하는 행사는 새로운 대립과 갈등의 시작을 알리는 선전의 장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바로 냉전(Cold War)의 시작이었다.

 

전날 미-영 주도하에 벌어진 항복조인식에 반발한 소련은 1945년 5월8일 별도의 행사를 가졌다.

 

그리고 1945년 9월, 패전국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서 연합군의 전승기념 퍼레이드가 벌어졌다.
명목상으로는 승리를 자축하는 연합국들의 합동행사였지만 베를린을 점령한 소련군의 축제에 서방측 연합군 관계자가 옵서버로 참관한 것과 다름없었다.
비록 겉으로는 화기애애하였지만, 행사에 참가한 군의 고위 책임자들은 앞으로 서방측과 소련은 한 배를 탈 수 없는 상대임을 잘 알고 있었다.


승리 직후 함께 행진하는 미국과 소련의 병사들

 

사실 전쟁 내내 소련군과 칼을 섞었던 것은 독일이었으므로, 서방측과 소련은 군사적으로 낯선 상대였다.
따라서 이번 퍼레이드는 소련군의 위용을 미영의 관계자들이 가까이서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던 서방측 참관단은 브란덴부르크문을 지나 행진하던 소련의 전차대열을 보고 경악하였다.
사전에 정보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최신형 전차가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 전차의 모습을 보고 경악하였다.

 
 
현대 소련전차의 어머니라고도 불려진 JS-3(또는 IS-3) 중(重)전차가 세상에 선보인 것이었다.
IS는 스탈린의 이름(Iosif Stalin)을 딴 것인데, 때문에 흔히 소련의 IS중전차를 스탈린전차라고 부른다.
서방측 관계자들은 당시 서방측 전차들이 흉내 낼 수조차 없을 만큼 탁월한 JS-3의 외형만으로도 압도당하고 있었다.

 

외형에서부터 IS-3는 탁월하였다.



JS-3는 아름다운 곡선형태의 터렛(포탑)과 조종사가 위치하는 동체의 전면장갑을 V자 형태로 제작하여 피탄 면적을 최소화하였다.
더구나 최신 장갑형태인 공간장갑을 사용하여 방어력을 배가하였다.
이러한 장갑방식은 현대 전차들의 대부분이 기초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구조인데, 이것은 다시 말해 당대 기술수준을 뛰어넘는 구조였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런 방어에 적합한 구조는 1940년대 기술로 구현하기 힘든 것이었다.


 
당시에도 이런 구조가 상당히 뛰어난 형태임은 다들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이렇게 전차를 제작하는 것은 보통의 기술력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 전차를 보자마자 경악하였던 것이다.
JS-3는 장갑능력 뿐만 아니라 122mm 43구경포를 장비한 화력도 감히 비교상대가 없을 정도였다.
그 만큼 소련은 기술적으로 매우 진보한 이 중전차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다.

 

최신 전차에 대한 소련의 자부심은 하늘을 찔렀다.


 
JS-3는 기존에 사용하던 JS-2를 개량하여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말, 체르야빈스크(Chelyabinsk)에 있는 제100공장에서 생산을 시작하였다.
제2차 대전 참전기록이 없이 전후 행사에서 처음으로 목격되었던 이유에 대하여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굳이 다 이긴 전쟁에 투입하여 장차 대립할 미국에게 사전에 신기술을 누출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 정설로 굳어져 있다.

 

전쟁 전 트랙터를 생산하던 체르야빈스크 제100공장


 
소련에 명품 T-34중형(中型)전차가 있었음에도, 자신들이 원조한 전차로 전쟁을 치렀다고 거만하게 생각하고 있던 미국은 이 전차의 등장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으며 차세대 전차 개발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리고 JS-3는 소련의 중전차 시리즈 프로젝트의 효시인 T-10의 원조가 되었다.
한마디로 그날의 놀라운 등장은 동서냉전을 예고하는 상징적인 모습이었다.

 

공여 받은 미제 M-3전차로 전투를 하는 소련군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소련의 전차개발 사상이 중전차와 중형전차를 함께 제식화하여 기갑전력을 구성하였던 기존방식을 제2차 대전 후 폐기하고 T-54/55로 대표되는 중형전차 정책으로만 진행되면서 IS-3로 대표되는 소련의 중전차 개발 프로젝트는 중단되었다.
아마도 당시 서방측 전차가 소련 측 전차에 절대열세 때문에 굳이 중전차개발에까지 자원을 투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냉전 시기 소련을 대표한 T형 전차


 
사실 미국이 소련을 능가하는 전차를 개발하여 제식화한 것은 1980년부터 본격 배치된  M-1전차이후부터다.
이것은 T시리즈로 대변되는 소련의 전차를 월등히 능가하는 전차를 만드는데 그만큼 오랜 기간이 걸렸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실, 냉전기간 동안 미국을 포함한 서방측 스스로도 독일제 레오파드(Leopard)를 최고의 전차로 평가하였을 정도였다.

 

IS-3이 처음 등장한 1945년 9월의 행사는 냉전의 시작을 알리는 자리였다.


 
 혹자는 중동전 때 이스라엘이 사용하던 미제 전차가 아랍 국가들이 보유한 소련제 T시리즈 전차에 일방적으로 승리를 거두지 않았냐고 반문 할지 모르겠지만, 전차성능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사실 전술 및 훈련의 차이였다.
비록 IS-3는 소련의 정책 전환으로 전차개발사에 아주 잠시만 등장하는 전차가 되었지만 냉전의 개막을 알리는 무시무시한 발자국을 역사에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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