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방에말 요새'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9.10.01 나가 싸우란 말이야! 제발 [3]
  2. 2009.09.28 나가 싸우란 말이야! 제발 [2]

또다시 침공로가 되다.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 후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기 때문에 또 다시 독불간에 전쟁이 발생하리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 되었습니다. 긴장된 포니워(Phoney War)기간동안 독일과 프랑스 모두 장차전에 대한 세밀한 구상에 돌입하였습니다. 이때 그들의 공통점은 바로 벨기에로 귀착됩니다.


                                다시 벨기에는 독일과 프랑스의 전쟁터가 되려 하였습니다.


독일은 만슈타인(Erich von Manstein)의 입안으로 마지노선이 끝나는 벨기에의 아르덴느(Ardennes)를 돌파하여 프랑스를 섬멸할 기상천외한 계획을 세웠는데 반하여 프랑스는 다일- 브레다 계획(Dyle-Breda Plan)이라는 오늘날 이스라엘이 자주 사용하는 공세적 방어개념과 비슷한 대응전략을 구상 합니다.


                             1) 1차 대전 당시 독일의 침공로 (슐리펜 계획)
                       2) 2차 대전 당시 프랑스의 방어 게획 (다일-브레다 계획)
                       3)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침공로 (만슈타인 계획 - 낫질 작전)
                       독일, 프랑스 모두 벨기에를 장차 전쟁터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프랑스의 계획은 한마디로 방전으로 승리를 쟁취한 1차대전의 경험이 기반이 되었는데 그 개요는 다음과 같이 요약 할 수 있습니다.

첫째, 독불국경간은 마지노선으로 충분히 방어 할 수 있고, 또한 독일도 이곳으로 주력을 투입하여 침공하지는 않을 것이다.

둘째, 때문에 독일은 1차대전 때와 같이 벨기에 평원을 이용한 침공을 감행 할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 에방에말요새에 막혀 돌파에 어려움은 있을 것이다.

셋째, 이때 연합국 주력(프랑스 1집단군 및 영국 대륙원정군)을 벨기에-프랑스 국경 근처에 배치하였다가 독일이 벨기에를 침공하자마자 즉시 벨기에 영토내로 진입하여 벨기에와 연합하여 독일의 주력을 섬멸한다.


       독일은 앞만 보고 있던 프랑스의 배후를 단절하려 하였습니다. (2차 대전 당시 프랑스군)


이 얼마나 약소국 벨기에를 하찮게 생각하는 발상입니까? 독일은 침공로로, 프랑스는 자국에서의 전투를 회피하고자 약소국 영토를 전장터로 삼고자 하였으니 말입니다. 만에 하나 프랑스가 독일-폴란드 전쟁직후 대독 선전포고를 한 이상 독불전선에서 침공전을 하여야 하는데, 이를 외면하고 자국 내에서의 전투만 회피만 하려는 소극적 대응전략으로 시간이나 보내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당시 벨기에 국민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을까요?


짧은 침략, 긴 고통

드디어 세기의 악당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1940년 5월 서부전선의 전투가 시작 됩니다. 또다시 벨기에는 프랑스를 공격하려는 독일의 침공로에 놓이게 됩니다. 굳이 1차대전 때와 다른 점이 있었다면 이번에는 벨기에 평원이 아닌 아르덴 산악지대가 독일 기갑부대가 지나가는 주 침공로가 되었다는 사실 일 뿐입니다.


                              아르덴의 삼림지대가 독일의 침고로로 예정되었습니다.


벨기에 국민들이 철석같이 믿던 에방에말요새이었지만 독일의 독창적인 공수 특공에 의해 불과 10분 만에 엎어진 거북이 꼴이 되고 맙니다. 단지 85명의 팔슈름야거(Fllschirmjager-제2차 대전 당시 독일의 공수부대)의 특공작전에 의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사전에 은밀히 개척하여 놓은 통로를 지나 독일군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순식간에 벨기에를 석권하여 통과하면서 프랑스로 물밀듯이 들어갑니다.


                               에방에말을 점령한 전설적인 독일의 공수부대 팔슈름야거


그것도 독일 주력도 아닌 기만전술을 썼던 B집단군의 페이트모션에 의해서 말입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이러한 독일 책략에 속아 프랑스군 총사령관 가믈랭(Maurice Gamelin)은 연합군 주력인 프랑스 제1집단군과 영국원정군을 벨기에 영토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명분은 벨기에 구원, 독일을 응징한다는 것이었지만, 진짜 속뜻은 프랑스 영토 내에서 전쟁을 피하고자 함이었습니다.



                                              덩케르크에서 후퇴하는 연합군


물론 결과는 아시다시피 기습적으로 연합군의 배후를 치고 들어가는데 성공한 독일의 포위망에 걸려 나룻배라고 얻어 타고 영국으로 도망가기 급급하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벨기에는 독일의 전광석화 같은 기습에 의해서 장기화된 1차 대전 때보다 물적 피해가 적었다면 그나마 다행(?)이라고나 할 만큼 아주 짧게 침략을 당합니다.


                                                    전쟁으로 사망한 벨기에인들


하지만 이후 점령지로써 독일 전쟁 수행을 위한 수탈을 당하게 되고 대영 전쟁을 전초기지 역할을 하느라 전 국토가 군사기지 노릇을 하게 됩니다. 이웃 네덜란드와 더불어 벨기에는 현재도 집집마다 식량비축 창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독일의 수탈기간 동안 워낙 배가 고팠던 쓰라린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며 벨기에 국민으로 살던 28,000여 유태인들이 가스실로 끌려가게 됩니다.

(계속됩니다.~ 명절 잘보내세요)
신고
Posted by 박비 트랙백 0 : 댓글 0

쑥대밭이 된 약소국

독일은 계획대로 벨기에를 돌파하여 노도와 같이 북부 프랑스로 쇄도하여 들어갔으나,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필히 우익을 강화시켜라"라는 유언을 남긴 슐리펜(Alfred Graf von Schlieffen)의 의도와 달리 병력을 우익에 집중하지 못한 당시 독일 육군 참모총장 小몰트케(Helmuth von Moltke)의 실책으로 마른전투(Battle of Marne)에서 독일군의 진격이 멈추게 되고 이후 종전까지 무시무시한 참호전에 돌입하게 됩니다.


                                   마른에서 프랑스는 독일의 진격을 극적으로 막아내었고
                                 이후 서부전선은 참호전으로 변모하였습니다.


이후 지옥으로 변한 참호전은 후방에 앉아있는 지휘관들이 상황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체로, 이전 전쟁과는 비교 할 수 없는 엄청난 살상무기로 무장한 상대편 진지로 나폴레옹 전잰당시처럼 무조건 병력을 돌격시켜 말 할 수 없는 인적피해를 야기한 그야말로 무식한 전쟁의 표본이 됩니다. 때문에 이런 결과 참호로 연결된 전선부근은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됩니다.


               혼히 No Man's Land 라고 표현할 만큼 전선은 살아있는 지옥이었습니다.


전쟁 참여국의 국토가 유린된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 일 수 있겠지만 고착된 전선 한 가운데 놓여있던 벨기에는 남의 나라 전쟁 때문에 국토가 박살(?)나게 됩니다. 전사에는 벨기에가 제1차 대전 때 연합국 편이라고 단순히 설명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중립을 짓밟은 독일의 침략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택할 수 밖에 없었던 차선책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강대국 간의 전쟁으로 벨기에 영토는 풍비박산 났습니다.


특히, 그 악명 높은 독가스가 최초로 사용 된 곳도 벨기에의 이프르(Ypres)입니다. 1915년 4월말에 독일은 병력 이동을 은폐하기 위한 수단으로 약 5천 개의 가스통을 열어 연합군측으로 염소가스를 흘려보냈고, 예상치 못한 독가스에 연합군은 1만 5천명이 중독되고 5천명이 사망하는 큰 타격을 입게 됩니다. 덩달아 벨기에 또한 본의 아닌 가스피해를 입게 됨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악명 높은 독가스도 벨기에 영토에서 처음 살포됩니다.


1차대전 서부전선에서는 누가 누가 많이 죽나하고 경쟁을 벌인 많은 무서운 싸움이 있었지만 1917년 제3차 이프르 전투의 일부였던 파스샹달(Passchendaele)전투는 연합군과 독일군 양측이 성과 없이 참호와 진흙탕 속에서 고귀한 인명을 무자비하게 희생한 서부 전선에서 가장 끔찍했던 기억으로 남게 된 전투로 기록되며 영불해협에 자리 잡은 벨기에의 아름다운 도시는 지동에서 없어진 것과 같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잠시 동안의 평화


1918년 전쟁이 끝났을 때 서부전선기준으로 패전국 독일은 자국 영토에는 폭탄한방 맞지 않았지만, 막상 승전국 벨기에는 그 참상이 얼마 심하였는지 국제올림픽 위원회(IOC)에서 평화를 열망하는 마음으로 1차대전 후 최초의 올림픽을 1920년 벨기에의 앤트워프(Antwerp)에서 개최하도록 조치합니다. 당시 IOC의 생각으로는 이것보다 더 확실하게 평화를 어필하는 대안이 없었다고 합니다.


                                          1920년 제7회 앤트워프 올림픽 개막식


제1차 대전의 교훈으로 독일은 고착된 전선을 돌파하는 전격전의 교리를 가열 차게 연구하고 호된 경험을 얻은 프랑스는 공격자가 때리다 때리다 지쳐 쓰러 질만한 완벽한 요새를 꿈꾸게 됩니다. 1927년에 착수하여 10년 뒤인 1936년에 완성한 바로 마지노선(Maginot Line)입니다. 마지노선은 총연장이 약 750km로서, 북서부 벨기에 국경에서 남동부 스위스의 국경까지 이르고, 중심부는 독일과 프랑스의 국경을 따라 이어진 영구 요새선이었습니다.


                                              프랑스 방어 전략의 상징인 마지노선


당시 벨기에는 제1차 대전의 결과로 프랑스와 긴밀한 관계를 이루고 있었고, 프랑스 마지노선의 축성에 자극받아 벨기에-독일 국경에 1932년부터 1935년 사이에 에방에말 요새(Fort Eben-Emae)를 구축 합니다. 당시에는 마지노선보다 더 견고하고 강력한 요새로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 요새는 다시는 자국의 영토가 강대국의 싸움에 유린되지 않을 거라는 벨기에 국민의 믿음을 대변한 건축물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벨기에의 자부심인 에방에말 요새
                            마지노선보다 훌륭한 방벽으로 소문이 자자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약소국 벨기에가 그들의 앞에 있던 독일의 위협만 대비ㅏ고 있었지만 위협은 또 다른 곳에서도 잠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우방이라 믿고 있던 프랑스도 만일 독일과의 전쟁이 재발한다면 벨기에를 전쟁터로 이용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무서운 사실을 벨기에는 제대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계속됩니다.^^)
신고
Posted by 열혈아 트랙백 0 : 댓글 0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