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거스트'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09.12.09 왜 ? 예비군복만 입으면 ...
  2. 2009.12.04 군인도 때로는 멋있고 싶다.! (2)
  3. 2009.10.19 전설로 남은 별
  4. 2009.10.09 화랑농장에는 농장이 없다! (1)
  5. 2009.09.16 Holly Wood의 존재이유? (2)
                                                             군복이야기 [끝] 
                    이제는 말 할 수 있다
 

혹시 똘망똘망하던 신입사원 미스터 김이, 평소에 예의바르던 모범맨 이주임이, 골부처같이 묵묵하던 박대리가 갑자기 몸에 탈이 나거나 술 먹고 취하지도 않았는데 한순간에 이성을 잃어버린 것처럼 어떻게 저렇게 바뀔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만큼 완전히 변한 모습을 느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

 
                                  종종 완전히 돌변한 사람들을 보고는 합니다
 

바로 예비군 훈련에 소집된 자원들에게 발견할 수 있는 흔한 모습입니다.  양복이나 작업복만 입혀놓으면, 근무처에서 오다가다 만나게 되면 앞에서 말한 것처럼 흠잡을 데 없이 멀쩡하던 사람들이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 군복만 입혀놓으면 순식간 눈빛이 개심치레해면서 최대한 불량한 모습으로 급속히 변화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멀쩡한 사람이 군복만 입혀 놓으면 순식간에 돌변합니다.
 
따듯한 봄날에 예비군 훈련 중에도 야전상의까지 껴입고도 추워서 몸을 웅크리고 틈 만나면 졸면서도, 막상 식사시간 때가 되면 마치 걸신들린 것처럼 식당을 향해 우사인 볼트를 능가할 만큼 전력 질주하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아시겠지만 군대의 3고가 춥고, 배고프고, 졸립고인데 이것은 예비역이건 현역 ( 특히 고참순 ) 이건 군복만 입혀놓으면 생기는 무시무시한 병입니다.

 
                               군복을 입으면 춥고, 배고프고 졸립니다.
 

이 병의 구체적인 증세는 한겨울에 반바지만 입는 불끈남이라도 군복은 아무리 껴입어도 춥고, 평소에 다이어트하느라 적게 먹는 신중남도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픕니다. 더불어 전날 충분히 잤어도 틈 만나면 졸기 바쁩니다. 거기에 더해 아무데나 침 뱉고 건덩건덩 대며 무기도 제대로 관리하지 않고 지나가는 아줌마만 보아도 자동으로 고개가 돌아가고 틈 만나면 짤짤이를 하려드는데, 이거 참 이상한 증세 아닙니까?

 
                               


그렇다면 군복과 군대 3고 및 자세불량과의 상관관계를 조사하지 않을 수 없는데, 틀림없이 우리군의 전투 능력을 반감시키기 위하여 가상적국의 스파이들이 군복제조과정에 몰래 침투하여 특수한 약품을 첨가한 것이라는 결론에 도출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복을 입었을 때는 허우대 멀쩡한 사람들이 군복을 입고 이렇듯 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전투력을 무력화 시키는 약품이 첨가되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새 군복을 입은 신병 때는 전혀 약효가 보이지 않다가 고참을 거쳐 예비역이 되어 무시무시한 증세가 절정에 이르는 것을 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그 약발이 강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초강력 세제로 빨아도, 무수한 시간이 흘러도 그 약효가 없어지지 않고 잠복하고 있다가 어쩌다 예비군 훈련 때 군복만 입으면 즉시 무서운 병이 도지게 만들어 버립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이 예비군의 본 모습은 아닙니다
 

원래 군이라는 조직은 고참으로 갈수록 전투력이 뛰어나고 예비역은 훌륭한 전략 전투자원이 되는 법인데 이렇듯 군 전력의 중추인 고참과 예비역들의 영혼을 좀먹도록 암약하는 스파이들의 활동이 계속된다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철저하게 막아야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니면 하루속히 군복에 침투한 무시무시한 독극물을 제거하는 해독제를 만들어야 되지 않을까요?

 
          전략 예비전력인 멋진 예비군들은 실제 훈련에 들어가면 진정한 포스가 작열합니다.

 

만일 군 당국에서 힘들다면 이제는 이런 공공연한 군사비밀을 국민들에게 솔직히 공표하여 군복 공장에서 암약하는 간첩을 잡아내거나 해독제 개발에 모든 역량을 결집하여 적극적으로 해결하여야 하겠습니다. 네? 그런데 죽어도 스파이를 못 잡고 해독제도 만들 수 없을 것이라고요? 왜요? 이렇게 증거가 충분한데 왜 못 잡죠?  이상도 하여라 ~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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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복이야기 [ 3 ] 
              패션 디자이너가 만들었던 군복

               
 
남자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군대이야기를 싫어하는 여자들처럼 설령 밀리터리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척 보면 ‘ 아! 저것은 어느 나라 군대 ’ 라고 쉽게 알아 볼 수 있는 군대가 있습니다. 바로 제2차 대전 당시 독일군입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만큼 인상적인 독일군의 군복 때문이기도 합니다.

 
                         제2차 대전 당시 독일군 군복은 특징적인 멋이 있습니다
 

비록 인류사에 기록 된 나치의 용서받지 못할 범죄 행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제2차 대전 당시의 독일군이 뚜렷하게 기억되는 이유는 일당백의 전투력을 발휘하였던 뛰어난 작전능력과 프라모델의 단골로 등장하는 멋있는 각종 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불어서 너무나 멋있는 군복이 독일군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디자인 측면에서 여타 군대와 구별되는 뭔가 독특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제2차 대전 당시의 독일군복이 지금의 군복과 비교해 봐도 전혀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더 멋있어 보이는 이유는 나름대로 디자인에 신경을 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나폴레옹 시대 이후 제1차 대전까지 사용된 시각적으로만 화려한 울긋불긋한 군복처럼 비실용적인 군복도 아니었습니다. 한마디로 외형은 물론 기능까지도 훌륭하였던 시대를 초월한 명품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단지 행사용 복장도 아니었습니다
 

1923년 독일의 메트징겐(Metzingen)에서 디자이너 겸 의류제작자인 휴고 페르디난트 보스(Hugo Ferdinand Boss 1885~1948)는 몇몇의 직원들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딴 휴고보스AG(Hugo Boss AG)라는 조그만 의류 업체를 설립하였는데, 우연한 기회에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 전부터 이미 나치의 사병이 되다시피 한 돌격대(SA)에게 유니폼을 공급하여 주게 되었습니다.

 
                    SA유니폼을 공급하면서 휴고보스AG는 나치와 관련을 맺습니다

 
정권을 잡은 후 베르사유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재군비를 선언한 나치는 새롭게 군대를 재건하면서 독일국민들에게는 자신감을 심어줌과 동시에 잠재적 적국들에게는 강력한 인상을 안겨줄 수 있는 상징이 필요하였습니다. 바로 이때 휴고보스AG가 납품한 SA유니폼에 크게 만족하였던 나치는 재건된 독일군의 군복을 휴고보스AG에게 제작 의뢰하였습니다.

 
                      휴고보스의 군복은 강렬한 이미지를 심어주는데 성공합니다

 
단순하면서 실용적이고 인상적인 남성복 디자인에 일가견이 있던 휴고보스AG는 독일군, 친위대(SS)는 물론 정부기관의 각종 유니폼을 만들어 공급하였고 이것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제2차 대전의 독일군을 특징하는 이미지로 남게 되었습니다. 아래 사진처럼 패션의 나라라는 프랑스의 당시 군복과 비교하여 보아도 하늘과 땅차이의 멋있고도 특징적인 디자인이었습니다.

 
         1930년대 독일 친위대(上)와 프랑스 군대의 모습인데 확연한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휴고보스AG는 전쟁 중 어마어마한 군복을 공급하느라 수많은 유태인, 적군포로 및 점령지역의 외국인 등을 강제로 동원하였는데, 이러한 점이 종전 후 전범으로 기소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비록 휴고 페르디난트 보스가 나치의 수혜를 많이 입은 기업인으로 재판을 받았지만 전쟁의 발발이나 전쟁범죄와 그리 관련이 없었던 관계로 80,000마르크의 벌금만으로 면죄 받았습니다.

 
                             휴고보스AG도 전후 처벌을 피하기 힘들었습니다.
 

전쟁과 관련이 많았던 벤츠, BMW, 크룹, 라인메탈 등 독일의 수많은 기업들이 현재도 세계 일류의 기업으로 남아서 명성을 떨치는 것처럼 휴고보스AG 또한 세계적인 패션기업으로 존속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의류뿐만 아니라 시계, 향수 등 여러 패션 관련분야에 진출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남성복에 특히 강점이 있다고 알려져 있는 것을 보면 그 유구한 전통이 살아 있는 것 같습니다.

 

                               현재도 휴고보스AG는 세계적인 패션기업입니다

 
이와 비교하면 우리나라의 군복은 현역군인, 매니아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로부터도 그다지 멋있다는 평가를 받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august가 군복무를 하던 오래전의 밋밋한 군복에 비하면 그래도 많이 좋아지기는 한 것 같은데, 아쉽게도 실용적이거나 상무정신을 드높일 만큼 위엄 있는 모습을 보이는 데는 2% 부족한 것 같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국군에게 멋있고 기능도 좋은 군복이 공급되기를 기원합니다
 

기능이 최우선 선택기준인 군복이 반드시 멋있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시대를 초월한 명품으로 손색없는 휴고보스AG의 군복처럼 착용한 군인들에게는 자부심을, 국민들에게는 자긍심을, 상대에게는 두려움을 느끼게 해줄 수 있는 군복이 국군에게 보급되기를 바랍니다. 뛰어난 디자이너들이 많은 섬유산업의 강자인 우리나라에서 결코 하지 못할 일은 아니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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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설로 남은 별
 


1960년 9월 26일, 홈구장인 펜웨이 파크(Fenway Park)에서 홈팀 보스턴 레드삭스( Boston Red Sox)가 볼티모어 오리올즈(Baltimore Orioles)와 경기를 벌이고 있었는데 바로 이 경기를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 42살의 老타자가 타석에 들어섰습니다.  그가 날카롭게 휘두른 방망이에 공은 커다란 궤적을 남기고 홈런이 되었고 모든 관중의 기립환호와 아쉬움 속에 통산 521홈런을 기록한 이 타자는 야구복을 벗고 은퇴하였습니다.

 
                          마지막 타석을 홈런으로 장식하고 老타자는 은퇴합니다
.

 
바로 메이저리그의 전설로 남은 위대한 야구선수 테드 윌리엄스(Ted Williams 1918~2002)의 은퇴 경기 당시의 장면입니다.  1941년 시즌 그가 기록한 0.406 (456타수 185안타)의 타율은 역대 8위의 기록이지만 이 기록을 마지막으로 메이저리그에서 아직까지 4할 대 타율 기록이 나오지 않는 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위대한 야구선수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전설의 강타자 테드 윌리엄스


 
20년간 오로지 보스턴 레드삭스 소속으로 있었으면서 통산 0.344타율, 2654안타, 521홈런, 1839타점의 놀라운 성적을 기록한 그를 평가할 때 반드시 따라다니는 하나의 가정이 있습니다. 바로 전쟁에 참전하지 않고 계속하여 운동을 하였다면 과연 어떤 기록을 남겼을까 하는 가정입니다.


 
                                 그의 백넘버는 당연히 영구결번입니다.

 
윌리엄스는 선수생활 중 제2차 대전과 한국전쟁에 현역으로 참전하여 무려 5년이라는 공백 기간이 있었습니다. 호사가들이 컴퓨터로 분석하여보니 공백 기간 동안 그가 선수생활을 계속하였을 경우 222개의 홈런을 더 쳐냈을 것이고, 그렇다면 통산 743개의 홈런을 기록하여 행크 애런보다 앞서 베이브 루스의 통산 714홈런 기록을 경신했을 것이라고 분석하였을 정도였습니다.
 

                       베이브 루스의 기록을 먼저 갱신하였을 지도 몰랐습니다.


 
역사적인 4할 타율을 기록한 그는 이듬해인 1942년 타율 0.356, 36홈런, 137타점으로 타격부문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였으나 시즌 도중 전쟁에 참전하라는 영장이 떨어졌습니다. 그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시즌을 끝마치기 전에 해군에 입영신청을 하고 해병대 조종사로 태평양전쟁에 참전하여 맹활약하였습니다.


 
                          1942년 시즌을 완전히 마치지 못하고 참전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3년간의 공백 끝에 1946년 야구장으로 돌아온 윌리엄스는 타율 0.342와 38홈런, 123타점의 맹타를 휘둘러 공백 기간의 우려를 무색하게 만들어 버렸고 1947년에는 리그 MVP에 오르는 등 참전 이전과 다르지 않은 훌륭한 기량을 팬들에게 선보였습니다. 통상 군복무기간 동안 경기력이 하락된다고 여겨지는데 그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은 이야기였습니다.


 
                       제2차 대전 후 야구장으로 복귀하여 변함없이 맹타를 날립니다.


 
그런데 절정기의 기량을 선보이던 1952년, 그에게 또 한 번의 징집영장이 전달되었습니다.  즉시 현역으로 복귀하여 한국전에 참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에도 윌리엄스는 망설임 없이 현역으로 다시 복귀하였고 1952년 겨울 "이번에는 죽을지도 모른다." 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듣도 보도 못한 극동의 한국으로 떠납니다.

 
                          다시 한국전에 참전하여 최전선에서 활약합니다.


 
이전 참전 때도 그랬지만 윌리엄스는 유명세를 이용하여 후방에서 시간이나 보내는 그런 군인이 아니었습니다.  1953년 2월 16일 평양 남쪽 폭격작전에서 그의 애기가 공산군의 대공포에 맞아 추락당할 절체절명의 위기를 당하기도 하였으나 수원기지까지 날아와 동체착륙을 하였을 정도로 군인 윌리엄스대위는 최전선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던 역전의 용사였습니다.


 
           1999년 보스턴에서 열린 올스타전의 히어로는 바로 테드 윌리엄스였습니다.
 

      메이저리그의 현역 올스타들조차 그의 옆에 한 번 서 보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1953년 휴전까지 총 39번의 출격작전을 수행한 그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레드삭스의 중심타자로 맹활약하였습니다. 윌리엄스는 수차례의 참전기간에도 기량이 전혀 녹슬지 않았고 1957시즌과 1958시즌에 리그 타격왕에 올랐는데 1958시즌의 40세 최고령 타격왕 기록은 앞으로도 깨지지 어려운 불멸의 기록입니다.

 
                           경기 전 추모행사와 펜 웨이 파크에 서있는 동상
 

2002년 7월, 그가 84세로 숨을 거두자 메이저리그는 경기 전 그를 추념하는 행사를 가지고 게임을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기록한 놀라운 성적도 그를 신화의 반열에 올려놓는데 결코 모자람은 없지만 거기에 더해서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모범적인 태도로 인하여 테드 윌리엄스는 모든 미국민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대중적인 인기는 물론 진심어린 존경까지 받을 수 인물이 우리나라에도 많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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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모 방송국의 인기드라마 선덕여왕과 관련하여 신라의 여러 제도와 문화가 자연스럽게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군주였던 선덕여왕 자체도 그렇지만 신라의 독특한 군사제도이자 교육시스템이기도 하였던 화랑(化郞)에 대해서도 관심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군의 상무정신을 대표하는 단어이기도 한 화랑과 관련된 잊혀진 이야기가 있는데 이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최근 인기리에 방송 중인 드라마 선덕여왕


1953년 휴전이라는 이름으로 치열했던 한국전은 일단 숨고르기에 들어갑니다. 전선이 고착화 된 후 대부분의 전투가 현재의 DMZ 인근에서 이루어졌지만, 초기 1년은 낙동강에서 두만강까지 정신없이 남북으로 전선이 왔다 갔다 하였기 때문에 한반도 전체가 전쟁의 화마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습니다.


                                      한국전의 비참함을 알려주는 유명한 사진입니다.
                           사진의 모습으로 보아 인천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휴전으로 전쟁이 일단 멈추자 피해를 복구하는 일은 남이던 북이던 제1의 과업이 되었고 더불어 전쟁으로부터 사상을 당한 많은 참전군인들에 대한 보상 또한 커다란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하지만 전쟁 전부터 이미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대한민국이 이들 전사상자에 대해 즉각적이고 충분한 보상을 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전쟁은 필연적으로 많은 전사상자를 양산하였습니다.


차라리 전사자의 경우는 시간을 두고 유가족에게 보상을 해 주어도 되었지만 전투로 인하여 몸이 불구가 된 상이용사들은 당장의 호구지책을 걱정할 딱한 처지였습니다. 국가나 사회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없기는 매한가지여서 상이용사들의 처절한 절규에 당장 도와줄 방법이 사실 없었습니다.


                나라 전체가 초토화되어 상이용사에 대한 구호도 제대로 이뤄질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전후에 사회로 복귀한 제대군인 특히 경제적으로 자활이 어려웠던 상이용사들의 불만은 사회적으로 커다란 문제가 되었습니다. 더구나 우리사회의 병폐중 하나가 선천적이던 후천적이던 신체적으로 불편한 사람을 깔보고 비하하는 이상한 못된 풍조가 있는데, 국가를 위해 희생한 상이군인들을 속어로 깨진바리라고 불렀을 정도로 차별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상이용사들이 생계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도 많지 않았고, 사회의 냉대도 있었습니다.


결국 국가가 즉각적인 보상이나 구호를 하기 힘들면 이들이 스스로 자활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도움을 주어야 했는데 이러한 사업의 시범으로 실시되었던 대책 중 하나가 화랑농장사업이었습니다. 사회적응이 힘들었던 상이용사와 가족들이 모여 살 수 있도록 거주지와 함께 인근에 자립할 수 있는 농장터를 제공하여 경작하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국가를 위해 희생한 분들을 위해 자활 시범 사업이 실시됩니다.


한미재단의 도움을 받아 상이용사 출신인 김국환(金國煥)씨와 진상구(陳相龜)씨의 주도로 인천시 산곡동 369번지 일대에 화랑농장이 조성되었는데, 1955년 3월 5일에 있던 화랑농장 개소식에 당시 최재유 보건부장관, 이익흥 경기도지사는 물론 맥카오 주한미군 후방지원 사령관등이 참석하였을 만큼 성황리에 사업이 개시되었습니다.


         당시 관영 매체에서 대대적인 보도를 하였을 정도로 성황리에 사업이 개시되었습니다.


화랑농장이 들어섰던 곳은 원래 구한말 장끝말이라는 이름의 한적한 동네였습니다. 일제가 중일전쟁을 시작하면서 현재 인천시 부평구 일대에 조병창이라는 군수기지를 만들 때 이곳에 거주하던 20여 가국의 원주민들을 내쫒으면서 마을도 사라졌습니다. 이후 한국전을 거치면서 일본의 조병창터에 미군부대가 주둔하게 되었는데 현재도 일부 시설이 남아있습니다.


                      반원으로 표시한 지역이 화랑농장인데 경인전철 백운역 인근입니다.


화랑농장은 미군기지터 일부를 환수 받아 설립되었는데 이후 정부의 지원 없이 자립적으로 운영되다보니 얼마못가 심각한 자금난에 봉착하게 되었고 1950년대 말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이후 다시 폐허가 된 농장에 많은 외지인들이 정착하게 되었는데 대부분이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물자를 유통하거나 미군부대 군속으로 근무하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금난으로 농장은 폐쇄되고 인근 미군부대 관련하여
                      생계를 이어가려는 많은 외지인들이 화랑농장지역으로 유입됩니다.
                             (현재도 화랑농장 인근에 일부 남아있는 미군기지)



이후 이곳은 농장이 아닌 좁은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옹기종기 주택들이 모여 앉은 전형적인 구식 주택가의 모습으로 급속하게 변하게 되었으나 일대를 아직도 화랑농장이라 부를 만큼 공공지명화 되어있습니다. 현재도 경인전철 부평, 백운역에서 산곡동 방향으로 가는 버스의 노선판을 보면 화랑농장이라 쓰여 있을 정도이고 마을로 들어가는 도로의 명칭도 화랑로입니다.


         현재 문서에 표기될 만큼 화랑농장은 공공지명화 되었습니다(부평신문 보도내용)


현재 이곳에 사는 분들 중에도 아마 이러한 마을의 유래를 아시는 분들이 그리 많지는 않을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근처는 이미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을 만큼 발전이 되었지만 화랑농장은 최근에야 재개발 예정지역으로 되었을 만큼 발전이 상당히 더딘 지역인데 앞으로 개발이 완료 후에는 어떻게 변모할지 궁금합니다.


                           현재 화랑농장의 모습인데 재개발지역으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현재 부평인근에 사는 사람조차도 화랑농장을 주말농장이나 도심인근의 가든 식 숯불갈비집으로 잘못 아는 분들도 꽤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만, 그 낭만적인 이름이면에는 국가를 위해 몸을 바쳤지만 제대로 보상도 받지 못하여 스스로 자활의 길로 나설 수밖에 없었던 상이용사분들의 처절한 피눈물이 담겨져 있습니다.


                낭만적인 화랑농장이라는 명칭은 어려웠던 시절 조국을 위하여 몸 바쳤음에도
             전쟁 후 어려움을 겪은 많은 상이용사들의 절규가 담긴 역사적인 이름입니다.


100년 전에는 장끝말로 불린 한적한 산골마을 이었지만 외세의 침략야욕에 의해 사라진 이름이 되었듯이 지난 50여 년간 계속되어온 화랑농장의 이름도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바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곳을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는 이상 그곳에 짧게나마 있었던 우리 현대사의 아픈 역사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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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Holly Wood)는 잘 아시다시피 로스앤젤레스 인근에 있습니다. 1911년 네스터(Nester)라는 영화사가 처음으로 영화촬영소를 건설한 것을 시초로 하여 이곳의 영화산업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전에는 뉴욕 같은 동부지역에서 많은 영화촬영이 이루어졌으나 갈수록 할리우드의 영화제작 여건이 좋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그 명성을 얻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영화산업은 세트를 벗어나 대규모 해외로케나 컴퓨터그래픽 등을 많이 이용하여 영화를 제작하는 관계로 더 이상 할리우드의 촬영장만을 고집하지는 않지만, 아직도 이곳 인근에 많은 영화관련 산업체가 포진하고 있으며 그 명성 때문에 할리우드 자체만으로도 세계적인 훌륭한 관광지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대작 전쟁영화들도 할리우드에서 제작되었습니다.


오래전 미국에 갔을 때 세계 영화산업의 메카라는 이곳에 가 본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을 안내하던 분이 이런 질문을 하더군요.

안내인   august님 왜 할리우드에 영화산업이 발달 하였을까요?
august  글쎄요?... 혹시, 대도시 인근이어서 사람이나 돈을 구하기 편리해서요?

안내인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august   그게 뭡니까?

안내인    바로 비가오지 않는 건조한 이곳의 날씨 때문입니다.
august   날씨요?

안내인    영화를 제작하는데 있어 맑은 날시가 많아야 촬영하기가 좋습니다. 촬영스케쥴을 잡아 놓았는데 비가 오면 계획이 어긋날 수밖에 없습니다. 날씨가 맑더라도 비 오는 장면은 물을 뿌려 인공으로 쉽게 만들 수 있지만, 반대로 비가 오는 날씨를 맑게 할 방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august    아! 그렇군요. (믿거나 말거나) 


                                        비하면 생각나는 명화 Singing In The Rain


영화정도는 소방호스를 이용하여 비 오는 장면을 연출 할 수 있지만 오늘날의 과학 기술은 인공강우를 이용하여 극심한 가뭄지대에 비를 만드는 것이 일부 가능 할 정도 (물론 많은 전제 조건이 따르기는 합니다만) 까지 발달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할리우드의 존재 이유처럼 오는 비를 멈추게 하는 것은 그리 쉽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비 오는 장면은 쉽게 연출할 수 있지만 반대로 비가 오면 촬영이 취소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공기후의 연구와 실용에 있어 앞선 나라가 러시아인데 처음에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연구하였다고 합니다. 전사를 살펴보면 날씨로 인하여 작전 차질을 겪은 예를 찾아보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닐 만큼 기후와 군사는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군사 분야 또한 날씨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러시아-소련이 그 동안 비밀리에 갈고 닦은 날씨 제어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던 적이 두번 있었는데, 두 번의 경우 모두 세계인의 주목 속에 러시아에서 개최 된 국제적인 행사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서였습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개막식 당시 스타디움 인근만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1980년 7월 19일 소련의 수도인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22회 하계올림픽이 개최 되었습니다. 개막식 당일 일기예보로는 모스크바에 폭우가 쏟아지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소련 당국의 비밀작전에 의거 주경기장인 레닌스타디움 반경 500m 이내에 내리는 폭우를 개막식이 진행되는 동안 막아버립니다. 개막식이 끝난 후 폭우가 쏟아 졌다고 하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이러한 소련의 과학기술은 극비에 붙여졌습니다.


                         2005년 승전 60주년 기념식에서도 행사장 인근의 비를 멈추었습니다.


지난 2005년 5월 9일 러시아는 옛 영광을 재현하고자 모스크바에 세계 54개국 정상들과 VIP 들을 초청한 가운데 제2차 세계대전 승전 60주년 기념행사를 성대히 개최하였습니다. 간간히 비가 쏟아지는 날씨에 호스트인 푸틴 대통령 내외가 우산을 쓴 채 내외귀빈을 맞이하였는데 행사의 절정인 군사 퍼레이드가 개시 되자 특수 화학약품을 살포할 11기의 비행기가 투입돼 모스크바 상공의 비구름을 없애는 작전을 실시하여 성대히 기념식을 치룹니다.


                        이런 기술이 복지가 아닌 살상의 도구로 사용된다면 무서운 일이겠죠?




위와 같이 비록 특정 행사를 위해 강우를 제어하는 기술이 선보이기는 하였지만 이러한 기술이 군사적인 부분이 아니고 인류의 복지를 위해서 광범위하게 쓰일 수 있는 시대가 오면 참으로 좋은 일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살상을 위한 도구로 이용된다면 상당히 무서운 일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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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비 트랙백 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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