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 대공 탄막에 스스로 뛰어든 조종사



전폭기가 폭탄을 무장하고 출격했을 때, 적기에게 요격을 당할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되면 조종사는 무장한 폭탄을 모두 버리고 회피 기동을 하는 것이 상식이다.



                                           F 105 기의 편대 비행


이 지경이 되면 출격 목표는 자연히 포기하게 된다. 하지만 후미를 물고 추격하는 적기가 있는 위기 상황에서도 주어진 출격 목표를 반드시 달성해야겠다고 다짐한 한 조종사가 폭탄을 버리고 이탈하는 대신,
 
적기를 끌고 적 대공 포화가 치열한
화망(火網) 속에 스스로 뛰어 들어 겁을 먹은 적기가 추격을 포기하게 만들고 자신은 화망을 통과하면서 손상을 입은 전투기를 끝까지 조종하여서 임무를 완수한 사례를 소개한다.


보통의 사람들이 갖기 힘든 용기를 발휘했던 이 조종사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 최고의 무공훈장인 명예 훈장[MEDAL OF HONOR]을 수여 받았다.



                                            멀린 데스레프센 대위


그는 미 공군의 멀린 데스레프센 대위였다.
데스레프센 대위는 1934년 아이오아 주에서 태어나 1955년 군에 몸을 담았다. 1967년 그는 월남 전선에서 F 105 기를 조종하는 대위였다.


F 105 기는 월남전 초기 월맹 폭격을 전담했던
미 공군의 주력기였다. F 105 기는 핵전쟁을 상정한 50년대의 설계 개념으로 만들어진 전폭기였는데이 전폭기는 대형이어서 크기가 어지간한 소형 여객기 수준이었다.


하지만 20mm 벌칸 포도 있고 음속의 두 배가 넘는 속도도 낼 수 있어서 전투기는 아니지만 일부
공중전도 가능했는데 실제 월맹 기 28기를 격추하기도 했으며, 한편으로는 월남전 최초로 미그기에 격추 당한 미군기가 되는 불명예를 기록하기도 했다.


                                       공중 급유를 받는 F 105 기


그러나 이 전폭기는 조준 시스템이 핵폭격을 위주로 설계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밀 폭격을 하기 위해서는 급강하 폭격을 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식의 급강하 폭격은 적의 밀집된 대공포화에 길게 노출되는 문제점이 있었다.

그래서 월남 참전 F 105 기들은 극심한 피해를 입었었다. F
105 기는 총 833기가 생산되었는데 이중 월남전에서 무려 382기가 격추 등으로 손실되었다.

F 105 기가 단발기였던 사실도 이 손실에 기여했다.
월남전에서 극심한 피해를 입은 F 105 기는 나중에 쌍발의 F 4 기로 교체되었다.


1967년 3월 10일, 72기나 되는 대규모 전폭기들이 월맹
타이구엔 제철소 폭격 작전에 전위 편대로서 출격했다. 타이구엔 제철소는 월맹의 중요한 산업 시설로 폭격에 동원된 대규모의 전폭기들은 이 제철소의 크기를 말해준다.


데스레프센 대위의 편대는 링컨 편대로서 그는 3번 위치에서 비행했다.
72기의 대 편대는 F 105 기와 F 4 팬텀 기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월남전 폭격의 후기 주역 F 4 팬텀 기 - 와일드 위즐형임


F 105 기들은 태국의 코라트와 타키리 기지에서 출격했었고
신형 팬텀기는 태국의 우본 기지에서 출격했는데, 링컨 편대는 이들 본 편대가 출격하기 전에 먼저 이륙해서 목표 지역으로 향했다.


전위 편대에 주어진 임무는 아주 위험하고 중요한 것이었다.
타이구엔 제철소의 하늘을 방어하고 있는 샘[SAM -2]미사일 포대, 대공 포와 대공 기관포들을 가능한 최대로 파괴하는 것이었다. 특히 샘 미사일은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기 때문에 대 편대의 출격에 앞서 반드시 파괴해야 했다.


타이구엔 제철소의 상공에 진입한 링컨 편대는
선두 편대장 기부터
기수를 내리고 목표에 돌입하였다. 편대장 기는 두 사람이 타는 복좌의 F 105 F 기였다.


적의 대공 포대를 공격하는 전폭기들은 와일드 위즐[족제비]
이라고
불렸다. 와일드 위즐은 제일 먼저 적 목표에 도착해서 적 대공 포화와 정면으로 맞서야 했으며, 마지막으로 폭격 성과를 확인한 후 이탈해야 하는 고되고 위험한 임무를 수행했다.


이 임무를 맡은 F 105 F 와일드 위즐기는 조종을 담당하는 전방석과
전자 장치 조작을 담당하는 후방석의 조종사 2명이 탑승하는 복좌형이다.
 


                                      F 105 F 복좌 와일드 위즐 기



F 105 F 기로만 편성된 편대로 출격하기도 했지만 단좌형인
F 105 D 기와 혼성한 편대로 출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편대장 데이비드 에버슨 소령과 후방석의 호세 루나 대위가
조종하는 편대장 기는 적 85mm 대공 포에 맞아 격추되었다. 두 사람은 비상 탈출에 성공했지만 모두 포로가 되었다. 편대장 기의 다른 동료 기 역시 적 대공 포화에 큰 손상을 입고 임무에서 이탈하여 기지로 귀환해야 했다.



                                            소련제 85mm 대공포
                                   북한도 한국 전쟁중 대규모로 사용했다.



이제 중요한 대공 화력 파괴 임무는 3번기 데스레프센 대위의 어깨에 걸려있게 되었다. 그가 공격을 위한 기동 비행을 하는 동안 월맹의 최신 미그 21 기가 그의 후방에 나타났지만, 적 대공 포대들을 격파하겠다는 결심을 단단히하고 있던 델스레프텐 대위는 폭탄을 버리고 회피 기동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후미에 붙은 미그기를 그대로 이끌고 적의 대공 화망이 치열한 상공으로 뛰어 들었다. 미그 21 기는 아군의 대공 포화에 피격당할까 봐 겁을 먹고 추격을 포기했다.



                                             F 105 기의 무장
               2차 세계대전 때의 4발 폭격기 B 17이나 B 24보다
더 많은 폭탄 무장이 가능하다. 


적기를 떨어냈지만 대공 화망을 통과하면서 데스레프센  대위의 F 105 기도 피탄 되어 기체에 큰 손상을 입었다. 다른 조종사가 그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면 언제 추락할지 모르는 공포심에 시달리면서 한시 바삐 기지로의 귀환을 서둘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느 순간 엔진이 정지하거나 화재가
발생할지도 모르는 기체를 그대로 조종하며 적의 대공 미사일 포대 공격을 시도 하였다.



                            SAM 2 가이드 대공 미사일- 소련 원명은 S-75 드비나다.


하지만 대공 미사일 포대 자체가 대공 기관포로 중무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관포의 치열한 탄막 사격을 뚫고 접근하기가 쉽지가 않았다. 더구나 목표 상공에 퍼진 안개 같은 구름과 폭격으로 생긴 연기로 인해 대공 포대를 발견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그는 윙맨인 케네스 벨 소령과 함께 여러 번의 급강하 폭격으로 대공 포대들을 파괴하면서 기회를 보았다. 그때 데스레프센 대위에게 다시 미그 21 기가 따라 붙었지만 그는 안개 같이 뿌연 구름 속으로 급강하해서 미그 21 기의 공격을 피했다.


그런데 그가 구름 속에서 벗어났을 때 바로 아래 직하방에
대공 미사일 포대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절호의 기회였다. 그는 급강하를 지속하면서 대공 미사일 포대에 폭탄을 투하했고 동시에 벌컨포를 발사했다.


두어 번 통과하며 20mm 기관포로서 미사일 발사 기지를 초토화 시켰다.
두 기의 미사일 포대를 파괴한 것을 확인한 그는 언제 추락할지 모르는 불안한 상태의 피격된 전폭기를 몰고 800 킬로를 날아 아슬아슬하게 태국 기지에 귀환하였다.



                                             태국의 타키리 기지 
                                월맹과의 거리가 멀어 공중급유를 받아야
했다
                        이 장거리를 대파된 전폭기를 몰고 돌아 온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링컨 편대의 활약으로 대공 화력이 약화 된 타이구엔 제철소에 후속 출격한 전폭기 대 편대들은 팬텀 기 두 기를 잃었지만 타이구엔 제철소가 단시간에 복구되기 힘들 정도로 큰 피해를 입혀 작전을 성공시켰다.


데스레프센은 1968년 2월 1일 린든 B 존슨 대통령으로부터
명예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는 1977년 대령으로 군에서 은퇴한 뒤에 민간인 생활을 하다가 1987년 12 월 14일 53세의 나이로 작고하고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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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 아쉬웠던 부분들

 
 
6.25전쟁 제60주년을 맞이하여 각종 매체에서 특집 프로그램이 상영되고 있고 당국도 이와 관련한 다양한 행사를 벌이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당시의 기록필름을 이용한 시사프로그램과 달리 당시의 상황을 재현한 최근의 극화나 행사를 보면 고증과 관련하여 자못 아쉬운 부분이 있는데 이에 관하여 몇 가지 이야기하고자 한다.

 
                  참전 영국군을 초청하여 4월 17일 개최 된 임진강전투 기념식 (사진-뉴시스)
 

우선 시청자들로부터 가장 질타를 많이 받은 부분이 당시 사용한 무기나 장비에 대한 묘사가 적절하지 않다는 점이다.
극화니까 내용은 별개로 하고 사실 6.25전쟁에 실제로 사용된 장비를 소품으로 구하는데 상당한 무리가 따른다는 점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 밴드 오브 브라더스(Band of Brothers) ’ 같이 사소한 부분까지 정확히 고증을 거쳐 재현된 전쟁영화나 드라마에 이미 눈높이가 맞추어져 있는 상태다.
따라서 눈에 거슬릴 정도로 고증이 잘못된 부분에 대한 불만이 클 수 밖에 없는데 그것은 우리나라에도 이에 관한 정보를 아는 이들이 많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전쟁 극화의 모범으로 불리는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한 장면
 

가장 대표적으로 거론 된 것이 신작 드라마 ‘ 전우 ’ 에 등장한 헬리콥터다.
헬리콥터가 6.25전쟁에 처음 등장한 것은 맞지만 드라마에 나온 헬리콥터는 월남전에 사용된 UH-1H 기종이었다.
비록 이 부분이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고 질타도 받았지만 개인적으로는 굳이 헬리콥터라는 피사체를 극에 등장시키고자 하였다면 어쩔 수 없었던 차선책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 드라마가 실제로 있었던 전쟁사를 재현한 것이 아니라 재미를 추구하는 가상의 극화이고 내용 전개상 헬리콥터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우에 등장한 UH-1H 헬리콥터 (사진-KBS)
 

하지만 또 다른 극화인 ‘ 로드 넘버 원 ’ 에 등장한 북한군 T-34전차는 정말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방송 전에 1억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북한군 전차를 재현하였다고 선전하였는데 문제는 엉뚱하게 재현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사용된 전차를 재현하려는 시도는 칭찬받을 만한 일이지만 이왕 거금을 들여 할 것이면 제대로 해야 했는데 전혀 그러지 못하였다.
전쟁당시에 북한군이 사용한 T-34는 85형인데 방송국에서 재현한 모조전차는 제2차 대전 당시에 소련군이 사용한 외형부터 차이가 많이 나는 76형이었다.
한마디로 힘은 힘대로 쓰고 욕은 욕대로 먹은 부분으로 조금만 신경을 썼으면 충분히 재현 가능하였는데 대충하다보니 벌어진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조금만 더 신경 썼으면 제대로 재현할 수 있었던 T-34 (사진-MBC)
 

사실 여기까지는 아마추어(?)가 벌인 일이고 드라마는 아무래도 장비나 소품보다 극 전개가 우선이니 그냥 넘어갈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막상 6.25전쟁 60주년을 기념하여 당국에서 개최한 재현행사에서도 아쉬운 부분이 등장하였다.
지난 6월 28일에 6.25전쟁 초기 대한민국을 구한 위대한 전투로 평가되는 ‘ 춘천전투 ’ 재현행사가 제2군단 주도로 현지에서 열렸다.
당시 민관군이 혼연일체가 되어 맹활약한 국군 제6사단의 선전을 재현하였는데 제16포병대대의 포격장면과 북한군 자주포에 대한 육탄공격 장면이 행사의 하이라이트였다.
 
                            제6사단의 선전을 표현한 춘천전투 재현행사 (사진-연합뉴스)
 

당시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기 위해 주체측이 많은 애를 썼음에도 연출 병사들이 사용한 소총이 K-2였던 것처럼 아쉬웠던 부분이 종종 눈에 띠었지만 크게 문제될 부분은 아니라 생각한다.
하지만 적의 SU-76 자주포를 국군이 현재 보유한 M-48 전차로 재현하였다는 점은 커다란 실수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실제 있었던 전투의 재현이라면 적어도 자주포는 자주포로 재현하는 것이 옳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비슷한 시기에 열렸던 ' 지평리전투 ' 재현행사와 비교하여 아쉬운 점이라 할 수 있다.

 
                             적의 자주포를 전차로 재현 한 것으로 못내 아쉬운 부분이다.
 

지난 5월 27일에 참전 유엔군 노병을 초청하여 현지에서 제7기동군단 주체로 지평리전투가 재현되었다.
미 제2사단 마크를 군복에 부착하고 M-1 카빈 소총을 소품으로 섰으며 마지막에 전차를 앞세운 크롬베즈 전투단의 돌격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여 호평을 받았다.
다만 중공군이 사용한 소총을 나무모형로 깎았는데 아쉽게도 6.25전쟁 당시에 사용하지 않은 AK 소총 모양으로 만들었다는 점이 옥에 티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평리전투 재현행사 (사진-뉴시스)


하지만 개인적으로 위에서 일일이 언급한 부족한 점들은 아픈 과거사를 상기하려는 노력과정에서 벌어진 작은 에피소드라고 그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어느덧 6.25전쟁을 서서히 먼 과거의 기억이 되어가고 있고 그것을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세대가 더 많아진 이때에 그러한 과거사를 잊지 않게 노력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비록 아쉬운 많은 부분이 있었지만 이런 부분은 차차 개선될 것이라 생각하며 비극의 과거사를 잊지 않고 새롭게 각인시켜주려 노력하는 많은 이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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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의 소지가 다분하지만 개인적 생각에 제복이 가지고 있는 의미 중에서 기능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수행해야할 업무와 그 업무가 주로 이뤄지는 환경을 고려해서 최적의 결과를 얻어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제복의 모양이나 형태, 재질이 가능성을 저해한다면 제복으로서의 가치를 잃는다. 그런데 제복은 고유의 기능성 말고도 그 제복을 입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영향을 주는데,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정체성의 부여이다. 오늘 설명할 파병복도 마찬가지다. 파병복은 그 제복을 입고 근무할 환경과 업무를 꼼꼼하게 고려해서 만드는데, 그 옷을 입고 임무를 수행할 사람들의 정체성을 배제할 수 없다.


                         파병복이라고 뭐가 달라?


평소 작전을 수행하는 지역과는 환경이 다른 곳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장병들에게는 그에 맞는 군복이 필요하다. 그런데 고대사에는 파병 당시 어떠한 옷을 입고 임무를 수행했는지 세밀한 사항이 적혀 있지는 않아 당시의 표준 군복에 대한 기록으로 유추할 수 밖에 없다. 자료를 보면 고려나 조선시대 병사의 복장이라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만든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경번갑, 일본원정 당시 유사한 복장을 했으리라 추측해 본다.


                                               조선 수군의 임무 모습을 담은 그림


       얼핏보면 그냥 평범한 천으로 만든 것 같지만 천 안쪽에 흉갑을 대고 누벼 방탄복의 기능


월남전부터는 우리에게 익숙한 전투복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아래의 사진에서 보이는 장병들의 복장을 살펴보면 임무수행지역의 특성을 반영했지만 당시 우리 군 장병들의 기본 복장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확인하기 힘들다.


                                                     월남으로 향하는 청륭부대원


                                                   월남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장병들



위의 사진이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월남전에 파병되었던 백마부대 장병의 왼쪽 어개에 부대마크가 희미하게 보인다. 사진만으로도 어느 곳에서 임무를 수행한 어떤 부대인지 알아낼 수 있다. 파병부대의 마크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뭔가 조금씩 달라보여


천편일률적이던 전투복도 최근 임무수행지역이 다양화 되면서 단순함에서 벗어나 파병복이라는 이름으로 조금씩 변해갔다. 가장 먼저 변한 것이 해당지역의 환경을 고려한 무늬와 색깔이다. 사막, 열대우림, 산악지형 등 한국과는 전형 다른 곳에서 임무를 수행할 장병들에게는 개별 환경에 어울리는 복장이 만들어져 지급되었다.


                               지난 번 퀴즈의 정답이기도 한 공군 수송단원의 복장.
                                사막이라는 환경과 어울리도록 고안되었다
.


                 유사한 지역으로 가는 장병들의 복장은 비슷한 색깔과 무늬를 하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뭔가 부족하다. 아직까지는 서두에서 이야기한 정체성을 파병복에서 찾아보기가 어렵다.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서 과거 파병복들과는 다른 것이 생겨난다. 바로 자랑스러운 태극기다.


                앙골라로 파병되었던 공병부대의 복장이다. 왼쪽 가슴에 태극기가 붙어 있다.
                        그리고 잘 보이지는 않지만 왼쪽 어깨에 태극모양도 보인다.


                                         이 사진에서는 태극 모양이 조금 더 자세히 보인다.


나중에는 가슴에 붙은 태극기와 왼쪽 어깨의 태극모양이 하나로 통일된다.



왼쪽 어께에 태극기와 korea라는 글자를 붙이고 있는 자이툰 부대원의 사진. 사막이라는 지역적 특색으로 색깔과 무늬가 달라졌다. 그런데 위의 사진과 비교하면 뭔가 다른 점이 있다. 위의 공병대대원은 하늘색에 가까운 Blue Helmet을 착용하고 있고 자이툰 부대원은 전투복과 동일한 색깔의 방탄모를 착용하고 있다. 그 차이는 UN PKO의 이름으로 근무하느냐 아니냐에서 비롯된다.



위 사진을 보면 우리나라 파병장병과 임무교대를 하는 부대원, 그리고 임무기를 수여하는 지휘관의 복장이 모두 다르지만 하늘색 베레모를 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최근에는 지역적 구분없이 인공위성으로 전 세계 지형의 색깔과 모양을 분석해내서 반영한 일명 '디지털 전투복'이 파병복장으로 사용된다.


                                                아이티 PKO 파병장병인 이선희 소령


                              아이티 파병 선발대가 인천공항에서 출국하는 장면이다. 
                  위의 이선희 소령 사진과 동일한 모양과 무늬의 파병복을 하고 있다.


 어떠한 복장을 했건, 어떤 모자를 쓰건 사실 파병장병들에게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떨어져 낯선 곳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장병들이 몸과 마음을 추스르며 바로 설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왼쪽 감슴에 달려있는 태극기이다. 필자도 과거 1년 동안 파병부대원으로 근무했는데, 힘든 순간이 다가올 때마다 되새겼던 말이 있다. 바로 "당신이 대한민국입니다."라는 문구다. "내가 아니면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책임감도 컸지만 태극기가 붙어 있는 파병복을 입는 순간 나는 단순한 개인이 아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장병이 된다. 우리가 해외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국군 장병들을 무조건 응원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기 자신이 아닌 대한민국을 위해 그곳에서 땀을 흘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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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의 라이벌[ 3 ] 경쟁자, 하지만 사랑하는 전우

 
                                                        누가 최강인가 ?
 
월남전의 교훈으로 미국은 다기능 다목적 전투기보다 뛰어난 기동력으로 공대공전투에서 적을 완벽하게 제압할 수 있는 차세대 초강력 전투기를 개발하게 되었고 공군과 해군이 각각 별도의 프로젝트를 진행하였습니다. 그 결과 현재도 최강 전투기들로 인정받는 두 놈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등장합니다.
 
   
                                               공군 F-15 Eagle
 

공군은 최강의 기동능력과 공대공 능력을 갖추었다고 자화자찬하고 대외적으로도 최고의 전투기로 인정받는 F-15 Eagle을, 해군은 장거리 요격능력으로 더 이상 따라 올 수 없다고 자부하는 F-14 Tomcat을 개발하여 제식화하였습니다. 아마도 P-51 과 F4U 이후 최강의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해군 F-14 Tomcat
 

F-15는 실전에서 피격추율 0퍼센트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가지고 있을 만큼 그 성능이 입증된 당대 최강의 파이터로 계속적인 진화를 거듭하며 여러나라에서 아직도 최고의 전투기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반면 특징적인 가변익 형태를 가진 F-14는 이란에게 소수가 공급된 적이 있었지만 주로 미 해군만 사용되었고 최근 완전히 퇴역하였습니다.
 

                                       너무 비싸서 
 
F-15와 F-14가 최강임은 맞지만 강한만큼 비싼 것이 흠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돈 많은 미국이라도 마구 구입하지 못할 정도여서 이들을 보조하는 전력으로 가격은 저렴한 또 다른 경량전투기들을 개발하여 제식화 하는데 이놈들이 의외로 뛰어난 성능을 보여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공군 F-16 Fighting Falcon

 
바로 공군의 F-16 Fighting Falcon과 해군의 F/A-18 Hornet입니다. 그런데 F/A-18은 처음 F-16 도입당시 함께 제안되었던 YF-17를 베이스로 하여 개발된 전투기였습니다. YF-17의 인상적인 능력에 주목하였던 해군은 비록 공군기 채택경쟁에서 탈락한 이를 좀 더 개량 발전하여 F/A-18 이라는 또 다른 명품전투기를 만들어 내었던 것이었습니다.

 
                                              해군 F/A-18 Hornet
 

비록 F-16과 F/A-18은 공군과 해군의 보조전력 개념에서 채택하였지만 오히려 눈부신 진화를 거듭하여 F-15나 F-14와는 차별된 또 다른 다양한 능력을 선보이면서 미국 외 여러 나라의 주력전투기로도 채용되었습니다.  F-16과 F/A-18은 분명히 또 다른 멋진 라이벌이었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로 그리고 .. 
 
최근 막대하게 소요되는 전투기개발비의 부담과 냉전시대의 해체로 인하여 미국은 외국자본 및 기술을 처음부터 끌어 들여 해군, 해병대, 공군이 함께 사용할 플랫폼을 개발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JSF(합동타격기)로 알려진 F-35 Lightning II입니다. 비록 공군이 F/A-22이라는 괴물을 독자 채택하고는 있지만 이것으로 해공군의 라이벌 관계는 끝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F-35 Lightning II
 

지금까지 알아본 것처럼 공군과 해군과의 이러한 자존심 경쟁이 어쩌면 한심하고 우습게 보이기도 하지만 과연 이것이 미군의 모습일까요?
 
아마도 그들의 진짜 모습은 전황이 어려웠던 태평양전쟁 초기에 도쿄 공습을 위해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는 육군의 특공폭격비행대를 항모에 탑재하고 위험을 무릅쓴 체 적진 깊숙이 항해하였던 해군의 모습이 바로 진정한 라이벌의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미드웨이 해전에서 고군분투하는 해군 항공대를 돕기 위해 뻔히 안 맞을 줄 알면서도 일본 항모를 격침하려 호위 전투기도 없이 제로기가 우글대는 적진으로 망설임 없이 날아가 고공폭격을 감행하였던 미 육군의 B-17 폭격기 편대들도 진정 멋진 라이벌의 모습이었습니다.

 
 

이처럼 평소에는 자존심을 세우며 으르렁대다가도 국가가 위기에 닥쳤을 때 힘을 합하여 난관을 헤쳐 나가는 모습이 바로 맞수의 진정한 멋진 모습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 육해공군도 겉으로는 가장 멋있는 군대라고 치열하게 경쟁은 하되 위기의 순간이 닥치면 일사분란하게 행동할 줄 아는 멋진 라이벌로 자리매김 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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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의 라이벌 [ 2 ] 

제트시대에 재현된 개구리들


                                                  공군 F-80 Shooting Star



제2차 대전 후 제트시대가 도래하면서 공군(이때부터 육군 항공대에서 공군으로 독립)의 F-80 Shooting Star와 해군의 F2H Banshee가 최초로 공군과 해군의 제트전투기로 각각 제식화됩니다. 이 당시 미국은 유럽과 태평양에서 사상 최대의 전쟁을 승리하였다는 자신감에 가득 차 전후 세계최강의 위용을 뽐내며 감히 누가 내게 맞서랴하는 자만심이 충만하였던 시기였습니다.


                                         해군의 F2H Banshee


그러다가 선배들인 P40과 F4F의 꼴을 답습하게 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한국 하늘에 제트 1세대의 최강 전투기 중 하나로 인정받는 소련의 MiG-15의 갑작스런 등장으로 말미암아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꼬리를 내리게 됩니다. 결국 이들은 또 한 번 서로 간에 잘난 척만 하다가 곧바로 사라진 그저 그런 전투기들이 되었습니다.


                                      공군의 승리  


6.25전쟁에서 갑작스런 MiG-15의 등장에 그나마 미 공군은 F-86 Sabre라는 회심의 후속대타가 있었고 이후 MiG-15와 F-86은 항공전사에 길이 남는 인상적인 공중전을 펼쳐 보이며 세기의 라이벌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반면 해군은 사실 손가락만 빨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 같은 침울한 시간을 보냅니다.

 

                                          공군 F-86 Sabre 


시급히 도입한 F9F Cougar 등을 써보기도 하였지만 사실 적기는 물론이거니와 철천지원수인 공군의 F-86의 능력과 맞먹는 놈을 쉽게 제식화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사실, 함재기들은 항공모함 탑재를 위하여 공군기에 비해 기체구조에 제약사항이 많을 수 밖에 없었고 때문에 능력의 제한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 제트시대에 와서는 이러한 제약이 더욱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F-86의 해군용 버전인 FJ Fury
 

해군은 결국 자존심을 뭉개가며 울며 겨자 먹기로 공군의 F-86을 함재기로 재설계하여 FJ Fury 라는 이름으로 항공모함에 탑재하게 됩니다. 하지만 앞에서도 설명하였던 이유로 함재기로 재설계하면서 F-86 고유의 능력을 많이 상실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그저 그런 평범한 전투기가 되며 별다른 인상적인 활약을 보이지 못합니다. 제트시대에 와서 해군은 더 이상 공군의 상대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해군의 절치부심 
 

F-86의 성공에 자부심이 하늘을 찌른 공군은 1950년대 일련의 제트기시리즈를 개발합니다. 이른바 센추리시리즈 (Century Series)라고 불리던 F-100 이후의 전투기들이었습니다. 그 첫째 작품이 세이버의 닉네임을 계승한 F-100 Super Sabre로 제식화 된 최초의 초음속 전투기였습니다. 이때만 해도 소련 최초의 초음속 전투기 MiG-19를 충분히 대적 할 수 있으리라 판단  하였습니다.
 

                                                   공군 F-100 Super Sabre


반면 해군은 F-100과 동일한 엔진을 장착하였으나 기동성과 맷집능력이 뛰어난 F8U Crusader를 제식화하였고 이들은 동시에 월남전에 참전합니다. 자만하였던 공군은 MiG-17 과 MiG-21에 믿었던 F-100이 혼쭐이 나자 곧바로 일선에서 후퇴시킵니다. 그러면서 마구 개발 하였던 전투기들을 이것저것 되는대로 참전시키기 시작하였습니다. 


                                            해군 F8U Crusader
 

사실 월남전은 미공군기의 능력이 나빠서라기보다는 정치적 입김에 가해진 교전규칙 때문에 특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던 경우가 많았습니다. 반면 같은 제약이 있기는 하였지만 그동안 절치부심하며 내공을 키워왔던 해군은 F8U의 뛰어난 기동력으로 공대공전투에서 짭짤한 성과를 얻어내었고 서서히 공군의 망신살이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공군의 박탈당한 자존심 
 
 

센추리씨리즈를 개발한다고 난리치던 공군이 많은 전투기를 만들어내었음에도 실전에서 뾰족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사이에 내공을 키워온 해군은 희대의 도깨비 F4H Phanthom II를 함재기로 제식화 하였습니다.  그동안 센추리씨리즈가 월남전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초초해진 공군은 평판이 자자한 도깨비를 해군으로부터 빌려서 시험                  

                                             해군 F4H Phanthom II

 
그 결과 지금까지 공군이 개발하였던 모든 전투기들의 능력을 초과한다는 사실에 경악하였고 비록 자존심상하는 일이었지만 눈물을 머금고(?) 이를 공군전투기로 제식화하기로 합니다. 여담으로 공군기를 함재기로 만들기는 힘들지만 함재기를 공군기로 전환하기는 상당히 쉽습니다.

 

                                           F4H의 공군용 버전인 F-110 Spectre
 

최초에는 공군 제식부호인 F-110 Spectre 라고 명명하였으나 이마저도 1962년 시행된 국방성의 제식화 부호 통일계획에 따라 F-4 Phanthom II라는 해군의 명칭을 그대로 가져다 쓰게 되었습니다. 굳이 공군이 살린 마지막 자존심이라면 기관포를 장착하고 공중 급유구를 해군과 다르게 설치하였던 점 정도라 할 만큼 공군은 라이벌 해군에게 굴욕을 겪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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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에 대한 글을 쓰려고 컴퓨터 앞에 처음 앉았을 때 막막했다. 자이툰이나 다이만처럼 직접 경험한 것에 대해서 글을 쓰라면 정말 자신이 있는데 (정말 그 이야기는 책으로 한 번 써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렇지 않은 다른 파병 역사를 소개하는 글은 정말 자신이 없다. 당연하지 않은가?

난 시오노 나나미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이 없다고 해서 열혈국방 식구들에게 대충 짜깁기 한 글을 보여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우선 우리나라 파병사를 담은 두툼한 책 몇 권을 빌려 옆에 쌓아 두고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읽어 봐도 답이 안나오기는 마찬가지. 역사책이 재미있을 리가 없다. 매력적인 소재가 머리에 떠오르지 않아 한참을 고민했다.

         (괜히 쓴다고 그랬어, 괜히 쓴다고 그랬어......뾰로롱~ 블로그에 올려만 주세요~~.^^)

뭐가 좋을까? 뭔가 독특한 것? 아니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진실들? 일단 도전하기로 했다.

우리나라의 파병사(派兵史)에 대한 기록을 정리해 놓은 책은 그리 다양하지 않다. 못믿겠다면 대형서점의 인터넷 사이트나 학교 도서관 홈페이지로 들어가 검색해 보라. “파병”을 키워드로 넣었을 때 나오는 책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아마 대중의 관심에서도, 학자들의 관심에서도 멀어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단순한 戰史가 아닌 파병사이기 때문이거나, 연구할 자료에 대한 접근이 어려워서 일지도 모른다.

각설하고, 앞으로 파병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하도록 노력하겠다. 다른 곳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것, 우리나라의 국익을 위해 해외에서 헌신해 온,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각지에서 땀을 흘리고 있는 戰士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그들이 왜 그곳에 가있는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글을 말이다.


               파병의 기원


우리 군은 베트남에 전투 및 전투지원 부대 파병부터 최근의 유엔 평화유지활동에 이르기까지 세계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임무와 역할을 수행해 오고 있다. 때론 일부 여론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파병은 여러 가지 고려요소를 두고 고민한 결과 국익에 적합하다고 판단해서 내린 결정들이었다.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그 덕분에 우리가 세계 속에 어깨를 펴고 자랑스럽게 우뚝 설 수 있다고 할 수 있는 것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는 언제부터 다른 나라에 파병하기 시작했을까? 우리나라가 언제부터 해외에 병력을 보내기 시작했는지 그 파병의 기원에 대한 것은 학자에 따라서 다소 논란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앞에서 베트남부터라고 이야기한 건 뭐고 지금 다시 기원을 따지는 건 뭐야?’ 라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범위로만 우리의 지식을 한정짓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어리석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조금만 참고 우리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생각해보자.

파병은 우리의 전쟁이 아닌 타국의 요청에 의해 군대를 파견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그대로 적용하여 고대사까지 그 영역을 확대한다면 최초의 파병 기록은 신라 현덕왕 때인 서기 8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사기 본기를 보면 “현덕왕 11년 7월, 당나라 군주절도사 이사도가 반란을 일으켰다. 당의 현종은 이를 토벌하기 위해 양주절도사인 조공을 보내 우리 군사들을 징발해 주도록 했으므로 왕은 순천군(順天軍) 장군 김웅원에게 군사 3만을 거느리고 가서 돕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신라가 3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파병을 했던 당나라에 대한 보답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글쓴이는 해외파병 관련 부서에 근무하고 있는 현직 군인입니다. 「라라라」라는 필명으로 온라인에서 활동하고 있는 파워블로거이기도 하고요.^^  『열혈국방의 Blue Helmet(블루헬멧)』을 통해 넘쳐 흐르는 문학적 소양과 전문적인 군사지식을 접목해 해외파병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정기적으로 기고할 예정입니다.



파병에 대한 세밀한 절차 등이 문헌 자료로 남아있는 것은 고려시대부터이다. 고려는 일본을 공격하기 위해 고려를 원정기지로 삼겠다는 원나라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나 대규모 원정군을 꾸려 파병했다. 1차 원정 때는 9백척의 전선(戰船)과 1만 5천여명을 지원했고, 2차 원정 때도 역시 9백척의 전선과 2만 5천여명이 동원되었다. 물론 원나라 군사 1만 5천여명에 대한 군수지원은 제외하고 말이다.


고려 2차 일본원정 요도

고려시대 전투장면을 묘사한 그림



조선시대에도 역시 유사한 사례가 있다. 명나라로부터 1467년과 1479년 각각 여진족 토벌의 요청을 받고 대규모의 병력을 보냈다. 2차 파병 때는 1만명을 파병했다가 회군했으나, 이로 인해 명과의 관계가 악화될 수 있다는 의견이 대두되자 변방수비부대 3천명을 다시 급파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여진정벌 당시 전투를 묘사한 그림

조선의 2차 여진정벌 요도



조선이 두 차례나 정벌했던 여진은 임진왜란 후에 급격히 성장하여 부족을 통일하고 후금을 세웠는데, 이들이 요동으로 진출하자 명나라는 다시 조선에 정벌군 파병을 요청해 왔다. 조선은 임진왜란에 명나라가 군을 파병한 보답으로 1619년 다시 후금정벌을 위해 파병을 했다. 그런데 파병군을 이끌었던 강홍립은 주력군을 이끌고 홍경 근교 심하전투에서 후금군에게 투항했는데, 이는 광해군은 세력이 성장하고 있는 후금의 보복 침공을 예방하면서 동시에 대의명분도 지킬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파병은 청의 요청에 의한 1654년, 1658년 러시아 정벌이 마지막이었다.


조선의 1차 나진정벌 요도

후금정벌 당시 진군을 묘사한 그림



우리 한민족의 파병역사를 살펴보면 대체로 우리에게 군사적인 지원을 해주었던 주변국의 요청에 따라 정치․외교적인 차원에서 국익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추진된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파병과는 여러 측면에서 많은 차이가 있겠지만, 나름대로 국익증진과 민족자존을 위한 최선의 방안을 모색하려고 노력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현대의 파병



우리 군, 그러니까 대한민국 국군의 이름으로 태극기를 달고 나간 파병의 시작은 월남전이다. 1964년 9월 11일부터 73년 3월 23일까지 총 8년 6개월 동안 연인원 31만여 명이 577,476회의 작전을 수행했다. 월남전에 파병한 부대만도 주월사령부, 맹호부대, 백마부대, 청룡부대, 십자성부대, 비둘기부대, 백구부대, 은마부대 등 총 8개 부대에 이른다. 이 가운데는 해병대(청룡), 해군(백구), 공군(은마)도 포함되어 있다. 1991년 걸프전에 국군 의료지원단(사우디)과 수송단(아랍에미레이트)을 보내기도 했으며, 2001년부터 아프간에서의 항구적 자유작전에는 해군 수송지원단 해성부대와 공군 수송지원단 청마부대를 비롯해 동의․다산부대를 파병해 2007년 12월 14일까지 임무를 수행했다. 이후 이라크 자유작전에도 건설공병지원단인 서희부대와 의료지원단인 제마부대를 보냈으며(2003년 4월 30일~2004년 4월 30일), 2004년 8월 3일부터는 자이툰과 다이만부대를 이라크와 쿠웨이트로 2008년 12월 19일까지 파병했다.

그 이외에도 우리 군은 1993년부터 소말리아, 앙골라, 동티모르 등 다양한 지역에 UN PKO의 이름으로 파병활동을 했으며, 2010년 현재 레바논을 비롯한 전 세계 17개 지역에 약800여 명을 보내 임무를 수행중이다.



<퀴즈>

열혈국방 식구들을 위해서 상품이 걸린 Mini Quiz를 준비했다. 일정병력을 부대 단위로 파병하게 될 경우에는 부대의 임무와 성격을 나타내는 부대명과 부대마크 등을 제작해 사용한다. 그 중 부대마크는 각각의 구성요소가 나름대로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럼 문제 들어갑니다.

Q> 아래의 그림은 어느 파병부대의 마크입니다.
     그 부대의 부대명(OO부대)과 파병했던 곳은 어디인가요?




정답(부대명과 파병 장소)을 비밀댓글로 남겨주시면 정답자 1명을 선정하여 해외파병부대 장병들의 어깨에 붙이는 태극마크 패치와 레바논 동명부대 기념품인 멋진 볼펜을 상품으로 증정하겠습니다.




다음에는 파병복에 관한 에피소드로 만나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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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 국군포로 이야기-
 

7월 22일 수요일 아침, 출근해서 신문을 보니 '안학수 하사' 애기가 쫙 깔려 있었다.


기사의 제목은 다소 자극적으로 되어 있었지만, 
                                       사건의 내막을 잘 아는 필자에게는 매우 감동적인 스토리로 다가왔다.





 사건은 이렇습니다.

안학수 하사는 63년 9월 30일 입대한 뒤, 월남전에 파병되었다. 매사에 적극적이고 현지어(베트남어)에 잘 하였던 안학수 하사는 지휘관들의 신임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현지에서 필요했던 공적 심부름을 도맡아 했었다.

귀국 일주일을 앞두고 귀국준비를 위해 외출했던 어느날(66년 9월 9일), 안학수 하사는 어쩐일인지 부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전쟁터에서 미귀대는 탈영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그는 독립투사 집안의 자손이자, 교육자(아버지가 교장선생님)의 아들로서 탈영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67년 3월 25일' 북한방송에 출연하여,
자진 월북하였다고 북한체제를 선전하고 나섰다.

당시 우리 정보당국은 이를 포착하고, 안학수 하사를 '탈영 월북자'로 처리했다.

이로 인해 안학수 하사 집안의 불행이 시작되었다.

'월북자 안학수 하사'로 인해...

아버지는 교직을 그만둬야 했고, 안학수 하사의 동생 안용수씨는 결국 조국을 떠나 영국으로 이주해야 했다.

안용수(목사)씨는 간헐적으로 계속 정부당국에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한 번 낙인 찍힌 월북자의 꼬리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기를 43년...
작년(08년) 9월 이었다.

안학수 하사의 동생 안용수 목사가 국방부를 방문했다.

당시 안목사를 접견했던 필자와 조소영 사무관은 안목사의 애달픈 사연을 가감없이 들었다. 안목사는 자신이 국방부에 와서 담당자들에게 "이런 애기를 다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감격스럽다"고 소회를 밝혔다.

안목사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형님이 월북을 결심했을 리가 없다고 하였다.
무언가 피칠 못할 사정이 있어 북한에 끌려간 것이 틀림없으니, 형님은 납북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마땅히 형님은 '월남전 국군포로'로서 대우받아야 한다며 형님의 명예회복이 자신의 일생의 소원이라고 하였다.

필자와 조소영 사무관은 안목사의 탄원이 진정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처리방향을 고심했다.

일단, 우리는 인사기획관실 오명 대령님, 강창구 중령님과 논의 끝에, 안하사를 국군포로로 인정하기 위해서는'탈영 월북자'로 되어 있는 부분을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데 인식을 같이했다.

안하사 문제에 적극적 관심을 가지고 있던 또 한 사람,
통일부 남북 피해자 지원단의 김영숙 주무관이 주도하여, 베트남 현지조사부터 하게 되었다.

그래서, 08년 11월 '국방부*통일부*국정원*육군본부'로 구성된 정부합동 조사단이 베트남으로 급파되었다.

국방부에서는 인사기획관실 강창구 중령이 참가했다. 그들은 치열한 조사 끝에 안학수 하사의 흔적들을 추적했다.

결론은 '월북으로 단정할 근거가 없다'였다.



비로소, 43년 해묵은 동생 안용수씨의 한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현지조사와 아울러 수 개월간의 옛 기록조사를 거쳐 09년 4월 28일 통일부는 "안학수 하사를 납북자로 간주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09년 5월 19일 육군은 안학수 하사의 병적기록표를 '무단이탈(월북)'에서 '외출미귀 및 납북'으로 정정했다.

최종적으로 09년 6월 22일 국방부는 안학수 하사를 최초의 '월남전 미귀한 국군포로 추정자'로 결정하게 되었다.



숱한 고난과 좌절속에서 그냥 묻혀 버릴 수도 있었던, 월남전 국군포로 안학수 하사의 사건!!!

안용수 목사의 끈질긴 집념과 적극적 입장변화를 주도한 국방부와 통일부 담당자들의 노력이 융합되어, 분단이 낳은 슬픈 가족사를 이제는 더 이상 슬프지 않게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보람찬 일이었다.

안용수 목사는 이번 일을 적극적으로 처리해준 국방부와 통일부 담당자들에게 깊은 감사의 뜻을 전했다.

현 정부는 출발서부터 '국가를 위해 희생한 장병들을 국가는 절대 잊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국방부 또한 제2의 안학수 하사와 같은 희생이 나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필자는 올해 1월까지는 이 사건과 관련된 업무를 수행하였으나, 지금은 다른 업무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 사건이 잘 해결되었다는 애기를 들으니 기분이 매우 좋네요.^^


김종덕 사무관은 "국방부 정책블로그 열혈3인방 1기 팀블로거"로, 국방부 군비통제과 행정사무관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열혈3인방 1기 팀블로거'인 김종덕 사무관의 활약 기대하시길 바랍니다.^^*  From 강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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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비 트랙백 0 :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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