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위험했던 순간 [ 下 ]
 
 
 


아군은 지난 한달 동안 무려 300여 킬로미터를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퇴하고 있었는데, 특히 12월 5일 평양을 내준 이후부터는 제대로 된 교전도 없이 도망간 다닌 형편이었다. 이어서 서울마저 포기한 아군은 37도선에서 전열을 일단 재정비하고 있었으나 적극적인 항전의지가 없어서 만일 중공군의 공세가 재개된다면 결국 다시 낙동강방어선까지 철수 할 것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아군은 중공군의 공격이 재개되면 또 다시 후퇴할 생각이었다
 

따라서 일선 부대나 장병들은 평택-삼척을 연결하는 북위 37도선 바로 뒤에 있는 금강은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막연한 예상과 달리 불과 50킬로미터만 더 밀린다면 유엔군은 즉시 철군할 예정이었고 그것은 대한민국의 종말과도 같은 의미였다. 결과적으로 1951년 1월 10일을 전후한 시기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한 이래 최대의 위기상황이었다.

 
                     북풍한설을 무릅쓰고 자유를 찾아 떠나는 피난민들
                     자칫하면 이들의 이런 노고도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천만다행히도 중공군은 이러한 유엔군의 절박한 상황을 몰랐고 일단 진격을 서울에서 멈추었다. 서울 점령 후 중공군은 더 이상 공세를 유지할 수 없었을 만큼 힘이 완전히 소진된 상태였는데, 사실 중공군은 보급에 문제가 있어 공세를 일주일이상 지속하기 힘들었던 군대였다. 따라서 5일 정도 적의 공세를 막아낸다면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지만 적의 이러한 치명적인 약점을 아직까지는 몰랐다.

 
                  중공군의 제한적인 보급능력은 상당히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만일 그 당시 상황에서 공세까지는 아니더라도 중공군이 공격하려는 시늉만 하였더라도 아군은 후퇴할 가능성이 컸다. 그랬다면 그것으로 전쟁은 끝이었고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상황이었다. 유엔군은 중공군을 과대평가하여 회피만 하였지만, 막상 적도 아군의 위기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던 것이었다. 결국 이러한 미세한 서로의 판단착오가 위험천만한 순간을 너무 조용하게 넘어가게 만들었다.

 
                   1951년 1월 중순은 서로에 대해 제대로 모르던 시기였다.
 

이처럼 앞으로 어떻게 싸워야할지 막막해 하던 유엔군의 생각과 달리 중공군이 추격을 멈추고 전선이 고요해지자 신임 미 8군사령관으로 부임한 리지웨이(Matthew Ridgway)는 소규모라도 승리를 얻기 위한 국지전인 교전을 구상하였다. 전세를 뒤집겠다는 의도는 전혀 아니었고 중공군 참전이후 계속된 연이은 패배와 그로인한 후퇴로 곤두박질치고 있는 아군의 전투의지를 회복하기 위해서 당장의 작은 승리가 절실히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기회를 만든 신임 미 8군사령관 리지웨이(좌)
 

리지웨이는 소규모의 선공을 결심하고 갑자기 움직임이 둔화 된 중공군을 찾아 나서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1개 전차대대와 포병 및 공병을 증강한 미 25사단 27연대 전투단이 투입되었고 이를 울프하운드(Wolfhound) 작전으로 명명하였다. 하지만 말이 선공이지 수색에 가까운 소극적인 작전이었다. 그런데 혹시나 하는 조바심에서 실시한 작은 작전이었지만 이는 한국전쟁의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울프하운드 작전에 나선 27연대 전투단
 

1월 15일 항공기의 엄호를 받으며 평택-오산을 연결하는 1번 국도를 따라 수원방향으로 개시된 이틀간의 수색작전의 결과는 상당히 고무적이었다. 수원 부근에 조우한 중공군은 상상이상으로 보급수준이 매우 열악하여 가까운 시일 내에 공세를 재개할 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던 것이었다. 이제까지 신비스러운 군대로 여겨졌던 중공군의 취약점을 적나라하게 파악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면서 아군에게 싸워볼만하다는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었다.

 
                            극적으로 대한민국은 되살아 날 수 있었다.
                                       (서울을 재탈환한 국군)
 

공교롭게도 이 작전은 철군을 기정사실화하고 후속대책을 위해 방한한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Lawton Collins) 대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실시되었는데, 이 작전으로 중공군과 그들이 사용한 전술이 낯설었을 뿐이지 결코 미국보다 강하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인지하게 되면서 현 전선에서 반격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벼랑 끝에 몰려있던 대한민국이 극적으로 살아나고 한국전쟁 당시에 최고로 위험했던 시간이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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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어있는 전적지 답사하기
 
 

그동안 무심코 간과하던 주변을 탐사하는 작은 여행이 최근 들어 인기를 끌고 있다.  너무 바쁘게 살아오고 유명한 명승지를 찾는 것이 여행의 전부인 줄 알았기 때문에 새롭게 발견한 이런 방법이 더욱 신선하게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대상은 상당히 다양한데 올레길처럼 한적한 시골길을 걷는 것도 있지만 재래시장 답사처럼 우리의 삶이 이뤄지던 오래된 공간을 찾아보는 것까지 포함한다.
 

                    최근 도시 주변을 가볍게 떠나는 여행이 인기를 끌고 있다 (북촌 한옥마을)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전적지도 좋은 여행 코스가 된다.  남한산성, 행주산성처럼 이제는 사적지로 취급 받는 곳도 있지만 6.25전쟁과 관련한 장소도 분명히 탐사 해 볼 가치가 있는 여행지라 할 수 있다.  6.25전쟁은 가장 가까운 시점에 있었던 비극이었고 그 여파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으므로 그와 관련된 전적지는 충분히 여행의 의의를 살릴 수 있다.
 

                             간과하지만 6.25전쟁과 관련한 전적지도 좋은 답사코스인데
                           예를 들어 지금도 이용 중인 한강철교도 중요한 역사의 현장이다
 

그런데 6.25전쟁 관련 전적지라면 먼저 휴전선 일대를 생각하기 때문에 지레 포기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하지만 한반도 대부분이 전쟁터였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지도 못하는 곳곳에서도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그중 한반도에서 가장 인구가 집중된 경인지역에도 우리가 모르던 숨어있는 전적지가 많다.  하늘이 높아지는 풍성한 가을을 맞아 부담 없이 찾아 볼 수 있는 인천의 관광지 겸 전적지를 답사 순서대로 소개한다.
 

                                                     인천전적지 탐사도
 
 
                                         월미도

 
아직도 섬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지만 월미도가 육지와 연결된 지 90년 가까이 되었다.  선착장 부근에 인천상륙작전 당시에 유엔군이 처음 상륙한 녹색해안(Green Beach)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지만 사실 북쪽에 매립된 현재의 공장지대가 녹색해안이다.  월미도는 해변이 원래부터 소문이 난 관광지였지만 군부대 주둔지였다가 2001년에 개방된 월미산 공원이 최근에는 오히려 각광받고 있다.
 

                                        1950년 9월 15일 월미산을 점령한 유엔군


                                   현재 전망대가 자리잡은 월미산 정상 부근의 모습
 

                                         북성부두

 
인천사람들도 잘 모르는 사실인데 경인선 종점인 인천역 뒤편의 고가도로 북쪽 끝에 북성부두라 불리는 조그만 포구가 있다.  도심에서 보기 힘든 포구여서 그 자체만으로도 좋은 구경거리가 되고 배가 들어오는 물때마다 번개장이 선다.  그런데 이 부두의 석축 일부가 인천상륙작전 당시의 상륙하는 해병대의 모습이 생생한 사진에 나와 있는 바로 그곳으로 이른바 적색해안(Red Beach)이다.

 
                                    인천상륙당시 레드비치 제방으로 상륙하는 유엔군


               인천역 뒤에 숨어 있는 북성부두에서 유일하게 예전 레드비치의 제방을 볼 수 있다.
 
 
                                       자유공원

 
인천역 바로 앞은 국내에서 가장 큰 차이나타운으로 한국화한 자장면이 처음으로 모습을 보인 곳이기도 하다.  오래 동안 쇠락하였는데 한중간 뱃길이 열린 1990년 이후 관광지로 재정비되면서 각광을 받고 있다.  상륙당일 이곳 뒤의 응봉산을 유엔군이 점령하면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였는데 맥아더 장군 동상으로 유명한 자유공원이 바로 이곳이다.  자유공원은 개화기 당시에 만들어진 한반도 최초의 근대식 공원으로 원래 이름은 각국공원이었다.

 
                    인천상륙당시의 응봉산 일대 (고지위의 건물이 현재도 남아있는 기상청)


                                        응봉상 정상에 조성된 자유공원의 최근모습
 
 
                                           해안동

 
자유공원에서 해안동 방향으로 계단을 따라 하산하는 것이 좋다.  원래 이곳은 부두창고들만 있던 외진 곳이었는데, 최근 이를 재개발하여 근대식 예술관인 인천아트플랫폼으로 만들어 새로운 구경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그런데 계단 양쪽의 석등모습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이 계단을 중심으로 청국조계지와 일본조계지가 나뉘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자유공원과 그 일대는 구한말 국권이 침탈당하였을 당시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교훈의 장소이기도 하다.
 

                                   최근 새롭게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인천아트플래폼


                        좌우의 석등 모습이 다른 자유공원에서 해안동으로 내려오는 계단
 
 
                                          홍예문

 
인천아트플랫폼을 관람하고 신포동으로 가는 길은 근대 건축학의 보고와 같은 곳이다.  한식 구옥은 물론 일본식, 중국식, 서양식 고택과 각종 상업용 건물들이 아직도 무수히 남아있다.  예전에는 도시 개발을 가로막는 구조물로 여겼지만 지금은 보존가치가 큰 역사적 건축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이 일대를 거쳐 다시 위로 올라가 기상대 부근으로 가면 1908년 만들어진 홍예문이 있는데 각종 영화나 드라마의 배경에 자주 등장하였고 부근에 있던 인천중학(현재 제물포고등학교)는 전쟁 기간 동안 야전병원으로 사용되었다.

 
                       전쟁 중 야전병원으로 사용된 인천중학교 (뒤에 보이는 것이 기상청)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한 홍예문
 
 

지금까지 설명한 곳들은 운동화 질끈 동여매고 천천히 도보로 관광하면 약 5~6시간 정도면 충분히 관람할 수 있는데, 자연 풍경보다는 그곳에 담겨있는 사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 코스가 되었다.  그런데 의외로 6.25전쟁 당시에 가장 거대했던 작전이 펼쳐진 곳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은 것 같다.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그러한 흔적을 찾아 주말여행을 떠나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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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에 대한 글을 쓰려고 컴퓨터 앞에 처음 앉았을 때 막막했다. 자이툰이나 다이만처럼 직접 경험한 것에 대해서 글을 쓰라면 정말 자신이 있는데 (정말 그 이야기는 책으로 한 번 써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렇지 않은 다른 파병 역사를 소개하는 글은 정말 자신이 없다. 당연하지 않은가?

난 시오노 나나미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이 없다고 해서 열혈국방 식구들에게 대충 짜깁기 한 글을 보여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우선 우리나라 파병사를 담은 두툼한 책 몇 권을 빌려 옆에 쌓아 두고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읽어 봐도 답이 안나오기는 마찬가지. 역사책이 재미있을 리가 없다. 매력적인 소재가 머리에 떠오르지 않아 한참을 고민했다.

         (괜히 쓴다고 그랬어, 괜히 쓴다고 그랬어......뾰로롱~ 블로그에 올려만 주세요~~.^^)

뭐가 좋을까? 뭔가 독특한 것? 아니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진실들? 일단 도전하기로 했다.

우리나라의 파병사(派兵史)에 대한 기록을 정리해 놓은 책은 그리 다양하지 않다. 못믿겠다면 대형서점의 인터넷 사이트나 학교 도서관 홈페이지로 들어가 검색해 보라. “파병”을 키워드로 넣었을 때 나오는 책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아마 대중의 관심에서도, 학자들의 관심에서도 멀어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단순한 戰史가 아닌 파병사이기 때문이거나, 연구할 자료에 대한 접근이 어려워서 일지도 모른다.

각설하고, 앞으로 파병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하도록 노력하겠다. 다른 곳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것, 우리나라의 국익을 위해 해외에서 헌신해 온,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각지에서 땀을 흘리고 있는 戰士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그들이 왜 그곳에 가있는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글을 말이다.


               파병의 기원


우리 군은 베트남에 전투 및 전투지원 부대 파병부터 최근의 유엔 평화유지활동에 이르기까지 세계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임무와 역할을 수행해 오고 있다. 때론 일부 여론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파병은 여러 가지 고려요소를 두고 고민한 결과 국익에 적합하다고 판단해서 내린 결정들이었다.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그 덕분에 우리가 세계 속에 어깨를 펴고 자랑스럽게 우뚝 설 수 있다고 할 수 있는 것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는 언제부터 다른 나라에 파병하기 시작했을까? 우리나라가 언제부터 해외에 병력을 보내기 시작했는지 그 파병의 기원에 대한 것은 학자에 따라서 다소 논란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앞에서 베트남부터라고 이야기한 건 뭐고 지금 다시 기원을 따지는 건 뭐야?’ 라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범위로만 우리의 지식을 한정짓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어리석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조금만 참고 우리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생각해보자.

파병은 우리의 전쟁이 아닌 타국의 요청에 의해 군대를 파견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그대로 적용하여 고대사까지 그 영역을 확대한다면 최초의 파병 기록은 신라 현덕왕 때인 서기 8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사기 본기를 보면 “현덕왕 11년 7월, 당나라 군주절도사 이사도가 반란을 일으켰다. 당의 현종은 이를 토벌하기 위해 양주절도사인 조공을 보내 우리 군사들을 징발해 주도록 했으므로 왕은 순천군(順天軍) 장군 김웅원에게 군사 3만을 거느리고 가서 돕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신라가 3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파병을 했던 당나라에 대한 보답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글쓴이는 해외파병 관련 부서에 근무하고 있는 현직 군인입니다. 「라라라」라는 필명으로 온라인에서 활동하고 있는 파워블로거이기도 하고요.^^  『열혈국방의 Blue Helmet(블루헬멧)』을 통해 넘쳐 흐르는 문학적 소양과 전문적인 군사지식을 접목해 해외파병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정기적으로 기고할 예정입니다.



파병에 대한 세밀한 절차 등이 문헌 자료로 남아있는 것은 고려시대부터이다. 고려는 일본을 공격하기 위해 고려를 원정기지로 삼겠다는 원나라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나 대규모 원정군을 꾸려 파병했다. 1차 원정 때는 9백척의 전선(戰船)과 1만 5천여명을 지원했고, 2차 원정 때도 역시 9백척의 전선과 2만 5천여명이 동원되었다. 물론 원나라 군사 1만 5천여명에 대한 군수지원은 제외하고 말이다.


고려 2차 일본원정 요도

고려시대 전투장면을 묘사한 그림



조선시대에도 역시 유사한 사례가 있다. 명나라로부터 1467년과 1479년 각각 여진족 토벌의 요청을 받고 대규모의 병력을 보냈다. 2차 파병 때는 1만명을 파병했다가 회군했으나, 이로 인해 명과의 관계가 악화될 수 있다는 의견이 대두되자 변방수비부대 3천명을 다시 급파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여진정벌 당시 전투를 묘사한 그림

조선의 2차 여진정벌 요도



조선이 두 차례나 정벌했던 여진은 임진왜란 후에 급격히 성장하여 부족을 통일하고 후금을 세웠는데, 이들이 요동으로 진출하자 명나라는 다시 조선에 정벌군 파병을 요청해 왔다. 조선은 임진왜란에 명나라가 군을 파병한 보답으로 1619년 다시 후금정벌을 위해 파병을 했다. 그런데 파병군을 이끌었던 강홍립은 주력군을 이끌고 홍경 근교 심하전투에서 후금군에게 투항했는데, 이는 광해군은 세력이 성장하고 있는 후금의 보복 침공을 예방하면서 동시에 대의명분도 지킬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파병은 청의 요청에 의한 1654년, 1658년 러시아 정벌이 마지막이었다.


조선의 1차 나진정벌 요도

후금정벌 당시 진군을 묘사한 그림



우리 한민족의 파병역사를 살펴보면 대체로 우리에게 군사적인 지원을 해주었던 주변국의 요청에 따라 정치․외교적인 차원에서 국익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추진된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파병과는 여러 측면에서 많은 차이가 있겠지만, 나름대로 국익증진과 민족자존을 위한 최선의 방안을 모색하려고 노력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현대의 파병



우리 군, 그러니까 대한민국 국군의 이름으로 태극기를 달고 나간 파병의 시작은 월남전이다. 1964년 9월 11일부터 73년 3월 23일까지 총 8년 6개월 동안 연인원 31만여 명이 577,476회의 작전을 수행했다. 월남전에 파병한 부대만도 주월사령부, 맹호부대, 백마부대, 청룡부대, 십자성부대, 비둘기부대, 백구부대, 은마부대 등 총 8개 부대에 이른다. 이 가운데는 해병대(청룡), 해군(백구), 공군(은마)도 포함되어 있다. 1991년 걸프전에 국군 의료지원단(사우디)과 수송단(아랍에미레이트)을 보내기도 했으며, 2001년부터 아프간에서의 항구적 자유작전에는 해군 수송지원단 해성부대와 공군 수송지원단 청마부대를 비롯해 동의․다산부대를 파병해 2007년 12월 14일까지 임무를 수행했다. 이후 이라크 자유작전에도 건설공병지원단인 서희부대와 의료지원단인 제마부대를 보냈으며(2003년 4월 30일~2004년 4월 30일), 2004년 8월 3일부터는 자이툰과 다이만부대를 이라크와 쿠웨이트로 2008년 12월 19일까지 파병했다.

그 이외에도 우리 군은 1993년부터 소말리아, 앙골라, 동티모르 등 다양한 지역에 UN PKO의 이름으로 파병활동을 했으며, 2010년 현재 레바논을 비롯한 전 세계 17개 지역에 약800여 명을 보내 임무를 수행중이다.



<퀴즈>

열혈국방 식구들을 위해서 상품이 걸린 Mini Quiz를 준비했다. 일정병력을 부대 단위로 파병하게 될 경우에는 부대의 임무와 성격을 나타내는 부대명과 부대마크 등을 제작해 사용한다. 그 중 부대마크는 각각의 구성요소가 나름대로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럼 문제 들어갑니다.

Q> 아래의 그림은 어느 파병부대의 마크입니다.
     그 부대의 부대명(OO부대)과 파병했던 곳은 어디인가요?




정답(부대명과 파병 장소)을 비밀댓글로 남겨주시면 정답자 1명을 선정하여 해외파병부대 장병들의 어깨에 붙이는 태극마크 패치와 레바논 동명부대 기념품인 멋진 볼펜을 상품으로 증정하겠습니다.




다음에는 파병복에 관한 에피소드로 만나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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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희 소령 아이티서 헌신적 구호"

국방일보나 한국신문에 소개된 내용이 아닙니다. 지난 17일 브라질의 유력 일간지 폴랴 데 상파울루에서는 아이티 유엔안정화지원단(MINUSTAH)에서 근무중인 이 선희 소령(여군 35기)의 활동을 자세히 소개했습니다.

 

폴랴 데 상파울루 신문에 소개된 이선희 소령 기사



신문은 MINUSTAH에 참여하고 잇는 유일한 한국 군인인 이 소령이 MINUSTAH의 브라질 군 캠프에 임시 숙소를 마련해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쉴새 없이 아이티 재건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신문에서는 "전투화를 3일동안 벗지 않고, 앉아서 잔걸"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도 이소령의 헌신적인 모습이 예상되시죠.!!!




이 소령은 09년 11월, 1년의 기간으로 파견되었으며, 평화유지군에 소속된 군 및 경찰의 유류, 식량, 식수 등을 담당하는 군수 담당 장교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티 재건을 돕기 위해 근무기간 연장을 신청할 계획이라고 하니, 이소령의 군인정신에 고개가 숙여 지네요. 한편, 개인 및 부대별로 세계에 파병나가 있는 한국군은 14개국 700여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유엔군 통수권자인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유엔기지내 기자회견장에서 이소령을 만나 "이 소령이 여기서 근무한다는 애길 듣고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면서 "앞으로도 열심히 해달라"고 격려하셨다고 합니다.

사실 이선희 소령의 경우는 운이 좋은 케이스랍니다. 

이소령은 지진이 발생한 지난 12일 오후 유엔 사무실로 사용 중이던 시내 몬타나호텔에 있다가, 잠시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사이 대지진으로 인해 호텔 건물이 팬케익처럼 차례차례 모두 무너져 내렸고, 호텔 외부에 있던 이소령은 극적으로 살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곳에 근무하던 유엔 직원 40여명은 건물잔해에 깔려 사망했고, 190여명의 직원들은 실종된 상태라고 하니 안타까움이 이루말할 수 없네요. 파견된 우리 119 구조대원들의 활약에 조그만 기대를 걸어봐야 겠습니다.



   




유엔이 현재의 인력으로는 부족해 각국에 치안유지 병력을 아이티에 추가로 보내 달라고 요청함에 따라 정부에서도 PKO 파병을 적극 검토하고 있습니다. 국회의 동의와 유엔과의 조정이 필요한 부분이라 시간은 다소 걸리겠지만, 사안이 시급한만큼 긴급히 편성될 수 있겠죠.!!!




우리 정부는 아이티에 천만 달러 규모로 지원을 계획하고 있는 등, 아이티에 대한 구호의 손길을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선희 소령을 위시한 우리 민관군의 구조 및 구호활동이 대지진으로 인해 상심해 있는 아이티인들에게 조그만 희망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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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바논 지역주민 안보투어 현장 취재기 2 (인터뷰)

이번 레바논 지역주민 안보투어 방문단중 유독 한 여대생이 강군에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아니다 다를까 동명부대 관계자분께 물어보니 이 여대생은 동명부대 자체에서 추천해 이번에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여대생의 이름은 말라크 디브인데, 동명부대에서 주최하는 교육이라던지 행사에 항상 적극적으로 참여해 부대원들에게도 인기가 좋다고 그러네요. 그래서 강군이 간곡히 인터뷰를 요청해 여러분들에게 소개해드립니다.



레바논에 한국의 동명부대가 파견된지도 이제 2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말라크 디브는 레바논인으로서 동명부대를 어떻게 바라보시나요?


일단 제소개를 하자면 저는 레바논 국제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재학중인 말라크 디브라고 합니다. 대학생인 제게 동명부대에서 제공하는 교육적 혜택은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컴퓨터 수업을 체계적으로 들을 수 있었고, 태권도 같은 동양무예를 무료로 배울 수 있어서 동명부대와 한국에게 항상 감사하게 생각한답니다.


또한 한국사람들이 레바논 사람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너무 따뜻한것 같아요. 예전에는 저희 지역에 유럽의 모부대가 주둔했었는데, 동명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지금과는 너무나 달랐답니다. 지금까지 저를 비롯한 주변사람들 모두 동명부대는 레바논에 있는 다른 나라 부대와는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최고라고 말이죠.^^

동명부대의 나라인 한국을 방문해본 소감은 어떤지요?


한국은 정리가 참 잘 되어있는 나라인것 같아요. 어른들 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들도 사소한 규칙이라도 잘지키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어요. 꼬마 아이가 음료수 캔을 길가가 아닌 꼭 쓰레기통에 버린다던지 등등..

그리고 누군가에게 한국사람들이 무척이나 친절하다고 하니깐, 한국에서는 그걸 정이라고 부른다고 가르쳐 줬어요. 이러한 정이 있는 한국의 따뜻한 민족성 때문에 이곳에 살고 싶어 진답니다.


  강군은 2개국어(한국어, 경상도사투리)밖에 못하는지라^^;; 말라크 드브양과의 인터뷰는 동명부대의 아랍어 통역병인 김양섭 병장의 도움을 받아 진행하였습니다.

  김양섭 병장은 요르단에서 대학을 나와 현재 아랍어 통역병으로 동명부대에 파병 근무중이며 이제 갓 병장을 단 새내기 병장입니다.^^

  김병장은 제대후 다시 중동지역으로 직장을 잡을 예정이며, 동명부대 생활을 통해서 본인이 가진 어학능력을 발전시킬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부대 관계자분들에게 감사함을 전했습니다.

  영어와 아랍어에 능통하며 인상도 서글서글해서 강군은 같은 남자로서 많이 부럽더군요.^^


오늘로 한국에 온지 4일째인데, 재미있는 에피소드 같은건 있나요?



한국말로 한국인들과 대화 하고 싶은데 막상 애길하려면 어렵고 부끄러워서 말은 잘 못하고 그냥 웃기만 했어요. 다른 레바논 친구들에게 이 애기를 했더니 자기들도 그렇다면서 같이 맞장구를 쳤지요.^^*

혹시 좋아하는 한국 연예인이 있나요?


레바논에서는 한국의 아리랑TV가 나와요. 음악프로를 통해 비, 동방신기, 먼데이키즈 같은 남자 가수들을 좋아하요. 언제 한번 만나봤으면 좋겠어요.^^*


말라크 디브는 대학을 졸업하고 장래에는 무엇이 되고 싶나요?
 

지금 대학교 2학년인데, 2년후 졸업하게 되면 레바논 한국 대사관에서 일하고 싶어요. 그래서 지금 영어와 한국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어요. 근데 한국어가 많이 어렵네요.^^*
만약 희망대로 레바논 대사관에 일하게 된다면 자상한 한국남자와도 결혼도 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애기가 있나요?


아직 여행 일정이 몇일 더 남았지만, 레바논에 돌아가면 한국에서 만든 추억들때문에 ROK BATT(동명부대)를 더 좋아하고 사랑할것 같아요. 감사해요.




이번 레바논 한국방문단은 8월 4일 18:30분 비행기로 레바논 티르로 떠났습니다.

동명부대 파병 기념주화




지난번 포스팅에서 설명했다시피 레바논에 파병된 동명부대는 그곳에서 주둔하고 있는 외국 군대중 가장 모범적인 군대로 소문이 나있다고 합니다. 혹 어떤 나라의 부대가 실수를 하거나 잘 모르면 동명부대를 보고 그대로 따라하라는 농담도 한다고 합니다.

모래바람이 부는 중동에서 국위선양하며 고생하는 동명부대원들에게 힘찬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몸 건강히 임무 완수하고 귀대하시길 바랍니다.
                                                                                           FROM MND 강군

추천 잊으시면 안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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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열혈아 트랙백 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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