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 5도를 사수한 소녀시대
 
 
1951년 4월 2일, 해병대 독립 제41중대는 강화도 서북단에 위치한 교동도를 기습 점거하였다. 당시 피아가 한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중이었기 때문에 강화도, 황해도 연백, 경기도 개풍을 동시에 감제할 수 있는 교동도를 확보하였다는 것은 한강 하구를 우리의 의도대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찬란했던 서해 5도 확보 작전의 시작이기도 하였다.

 
                                             교동도는 지금도 전략 요충지다
 

아군의 점령 전까지 교동도는 군사적으로 무주공산이었지만 강 건너 연백에는 대규모의 북한군 8사단 2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이들은 군사적으로 교동도를 점령하는 것이 불가능하더라도 순순히 내어주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지난 연평도 포격 사건처럼 교동도에 수시로 포격을 가하여 위협을 가하는 것과 동시에 간첩을 침투시켜 후방을 교란하는 양동 작전을 구사하였다.

 
                                   북한은 교동도에 대한 다양한 공세를 지속하였다
 

원래 작은 교동도에는 2천여 명의 원주민이 살고 있었지만 전쟁 통에 외지에서 유입된 피난민들로 인하여 거주인구가 1만을 상회하면서 간첩들이 활동하기에 좋은 여건이 조성된 상태였다. 따라서 제41중대는 교동도를 선점한 후, 진지 구축 같은 군사작전 외에도 적극적인 대민교육활동을 벌여 전선 바로 뒤를 혼란시키려는 북한군의 기도를 일거에 제압하였다.

 
                          피난민들이 몰려든 틈을 이용한 북한의 후방 작전은 집요하였다
 

이와 관련한 재미있는 한 가지 일화가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교동도를 점령한 독립 제41중대는 군목이었던 신성국 소위가 정훈조를 조직하여 간첩 색출과 더불어 거주민들을 상대로 한 방첩교육 같은 민사작전을 벌였다. 그런데 병력이 부족하다 보니 현지에 거주하던 많은 민간인들이 부대활동에 자진 참여하여 해병대의 활동을 적극 도왔고 그중에는 5명의 여고생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인천상륙작전 당시에 후방작전을 펼치는 해병대의 모습 (사진-Getty Images)
 

원래 교동도에 고등학교가 없기 때문에 그녀들이 진짜 여고생이었는지 아니면 학정을 피해 이북에서 피난 온 학생들이었는지는 모르지만, 포탄이 날아다니는 최전선 일대에서 중요한 활동을 벌이기에는 너무나 어린 소녀들이었음은 확실하다. 따라서 해병대는 위험을 경고하며 이들의 활동을 만류하였는데, 소녀들의 결심을 바꿀 수 없어 결국 민간인 계도 활동에 투입하였다.

 
                        전쟁 전 옹진반도에 주둔한 국군 제17연대를 위문한 여고생들의 모습
                        서해 5도에서 활약한 여고생들도 이와 비슷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사실 오늘날과 달리 당시에 여고생이라면 상당한 인텔리 계층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한마디로 지식과 미모를 겸비한 여고생들의 적극적인 정훈작전이 후방 대민계몽에 상당히 효과적이었던 것으로 해병대 전사에는 소개되고 있다. 굳이 언급하자면 그녀들을 당대의 소녀시대라 칭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소녀들의 활동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당시 여고생들은 상당한 지식인 계층이었다. (휴전 반대 데모를 하던 당시의 여고생)
 

제41중대는 다음 목표인 백령도를 점거할 예정이었고 당연히 소녀들의 동행을 거부하였다. 그러자 여고생들이 몇 날을 울고불고 애원하였고, 결국 무지막지한 떼쓰기 전술로 귀신 잡는 해병대를 처참하게 굴복시킨(?) 여고생들은 백령도까지 동행하여 멋진 후방 작전을 계속하였다. 해병대 전사를 살펴보면 그녀들은 이후 해병대와 함께 대동강 하구의 석도까지 침투하여 후방작전에 종사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란 속에 활약한 수많은 소녀시대가 대한민국을 수호하였다 (최초의 여성 해병인 문인순 여사)
 

아쉽게도 현재 여고생들의 정확한 신상이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분명한 것은 그녀들도 서해 도서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숨어있는 해병대원들임에 틀림없다는 점이다. 전란 속에 활약한 그녀들의 노고로 지켜낸 서해 5도와 NLL은 오늘날 대한민국을 지탱하는 힘이 되었다. 해병대의 서해 5도 사수에 기여를 아끼지 않은 당대의 소녀시대에게 진심으로 존경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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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어있는 전적지 답사하기
 
 

그동안 무심코 간과하던 주변을 탐사하는 작은 여행이 최근 들어 인기를 끌고 있다.  너무 바쁘게 살아오고 유명한 명승지를 찾는 것이 여행의 전부인 줄 알았기 때문에 새롭게 발견한 이런 방법이 더욱 신선하게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대상은 상당히 다양한데 올레길처럼 한적한 시골길을 걷는 것도 있지만 재래시장 답사처럼 우리의 삶이 이뤄지던 오래된 공간을 찾아보는 것까지 포함한다.
 

                    최근 도시 주변을 가볍게 떠나는 여행이 인기를 끌고 있다 (북촌 한옥마을)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전적지도 좋은 여행 코스가 된다.  남한산성, 행주산성처럼 이제는 사적지로 취급 받는 곳도 있지만 6.25전쟁과 관련한 장소도 분명히 탐사 해 볼 가치가 있는 여행지라 할 수 있다.  6.25전쟁은 가장 가까운 시점에 있었던 비극이었고 그 여파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으므로 그와 관련된 전적지는 충분히 여행의 의의를 살릴 수 있다.
 

                             간과하지만 6.25전쟁과 관련한 전적지도 좋은 답사코스인데
                           예를 들어 지금도 이용 중인 한강철교도 중요한 역사의 현장이다
 

그런데 6.25전쟁 관련 전적지라면 먼저 휴전선 일대를 생각하기 때문에 지레 포기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하지만 한반도 대부분이 전쟁터였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지도 못하는 곳곳에서도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그중 한반도에서 가장 인구가 집중된 경인지역에도 우리가 모르던 숨어있는 전적지가 많다.  하늘이 높아지는 풍성한 가을을 맞아 부담 없이 찾아 볼 수 있는 인천의 관광지 겸 전적지를 답사 순서대로 소개한다.
 

                                                     인천전적지 탐사도
 
 
                                         월미도

 
아직도 섬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지만 월미도가 육지와 연결된 지 90년 가까이 되었다.  선착장 부근에 인천상륙작전 당시에 유엔군이 처음 상륙한 녹색해안(Green Beach)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지만 사실 북쪽에 매립된 현재의 공장지대가 녹색해안이다.  월미도는 해변이 원래부터 소문이 난 관광지였지만 군부대 주둔지였다가 2001년에 개방된 월미산 공원이 최근에는 오히려 각광받고 있다.
 

                                        1950년 9월 15일 월미산을 점령한 유엔군


                                   현재 전망대가 자리잡은 월미산 정상 부근의 모습
 

                                         북성부두

 
인천사람들도 잘 모르는 사실인데 경인선 종점인 인천역 뒤편의 고가도로 북쪽 끝에 북성부두라 불리는 조그만 포구가 있다.  도심에서 보기 힘든 포구여서 그 자체만으로도 좋은 구경거리가 되고 배가 들어오는 물때마다 번개장이 선다.  그런데 이 부두의 석축 일부가 인천상륙작전 당시의 상륙하는 해병대의 모습이 생생한 사진에 나와 있는 바로 그곳으로 이른바 적색해안(Red Beach)이다.

 
                                    인천상륙당시 레드비치 제방으로 상륙하는 유엔군


               인천역 뒤에 숨어 있는 북성부두에서 유일하게 예전 레드비치의 제방을 볼 수 있다.
 
 
                                       자유공원

 
인천역 바로 앞은 국내에서 가장 큰 차이나타운으로 한국화한 자장면이 처음으로 모습을 보인 곳이기도 하다.  오래 동안 쇠락하였는데 한중간 뱃길이 열린 1990년 이후 관광지로 재정비되면서 각광을 받고 있다.  상륙당일 이곳 뒤의 응봉산을 유엔군이 점령하면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였는데 맥아더 장군 동상으로 유명한 자유공원이 바로 이곳이다.  자유공원은 개화기 당시에 만들어진 한반도 최초의 근대식 공원으로 원래 이름은 각국공원이었다.

 
                    인천상륙당시의 응봉산 일대 (고지위의 건물이 현재도 남아있는 기상청)


                                        응봉상 정상에 조성된 자유공원의 최근모습
 
 
                                           해안동

 
자유공원에서 해안동 방향으로 계단을 따라 하산하는 것이 좋다.  원래 이곳은 부두창고들만 있던 외진 곳이었는데, 최근 이를 재개발하여 근대식 예술관인 인천아트플랫폼으로 만들어 새로운 구경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그런데 계단 양쪽의 석등모습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이 계단을 중심으로 청국조계지와 일본조계지가 나뉘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자유공원과 그 일대는 구한말 국권이 침탈당하였을 당시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교훈의 장소이기도 하다.
 

                                   최근 새롭게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인천아트플래폼


                        좌우의 석등 모습이 다른 자유공원에서 해안동으로 내려오는 계단
 
 
                                          홍예문

 
인천아트플랫폼을 관람하고 신포동으로 가는 길은 근대 건축학의 보고와 같은 곳이다.  한식 구옥은 물론 일본식, 중국식, 서양식 고택과 각종 상업용 건물들이 아직도 무수히 남아있다.  예전에는 도시 개발을 가로막는 구조물로 여겼지만 지금은 보존가치가 큰 역사적 건축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이 일대를 거쳐 다시 위로 올라가 기상대 부근으로 가면 1908년 만들어진 홍예문이 있는데 각종 영화나 드라마의 배경에 자주 등장하였고 부근에 있던 인천중학(현재 제물포고등학교)는 전쟁 기간 동안 야전병원으로 사용되었다.

 
                       전쟁 중 야전병원으로 사용된 인천중학교 (뒤에 보이는 것이 기상청)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한 홍예문
 
 

지금까지 설명한 곳들은 운동화 질끈 동여매고 천천히 도보로 관광하면 약 5~6시간 정도면 충분히 관람할 수 있는데, 자연 풍경보다는 그곳에 담겨있는 사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 코스가 되었다.  그런데 의외로 6.25전쟁 당시에 가장 거대했던 작전이 펼쳐진 곳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은 것 같다.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그러한 흔적을 찾아 주말여행을 떠나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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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5일, 그제 였습니다.  제60주년 '인천상륙작전 기념식과 그 재현행사'를 다녀왔습니다.
우선, 해상에서 있었던 재현행사가 궁금하시죠?
그래서, 열혈국방이 대신 가서 동영상을 녹화해 왔습니다. 보시죠!  충성!







                                                   인천상륙작전 재연은 맥아더 장군과 함께!

                                          재연행사의 마무리는 역시 맥아더의 멋진 퇴장! ㅋㅋㅋ 


자~ 이제 그럼, 인천상륙작전 재현행사 바로 전에 있었던 '6.25 60주년 기념식'을 만나보시죠!^^


                       행사시작 20분전. 월미도입니다. 무더운 햇볕을 맞으며 기념식장으로 가는 길



                                     인천 월미도 앞바다에 준비된 기념식장 전경이에요.



                                     '인천상륙작전 해병대참전용사'분들 오셨구요,



          따가운 햇볕, 합참의장님,연합사령관님,국외 참전용사 대표님(빨간 옷) 등이 함께하셨어요.


                         세계 곳곳에서 UN군 참전용사들과 그 가족 분들도 오셨습니다.


기념식 사회자의 개식사로 기념식이 시작되자, UN기와 참전국 국기들 입장합니다.


                                        

이어 UN군 참전용사 대표분들께서 입장하셨고요.


                         각국의 UN군 참전용사들이 우리 해병대 전차를 타고 식장으로 입장!




이어, 국방부장관의 대통령 축사 대독과 주요인사들의 영상 메시지 상영이 진행되었습니다.


                                              국방부장관의 대통령 축사 대독


기념식이 끝나고, 월미도 앞 해상에서 인천상륙작전 재연이 있은 후(앞쪽에 동영상!), 국내외 참전용사분들을 모시고 참전용사 격려연이 진행되었어요. 

격려연 행사장 한쪽에서는 해군의 '바다사진전'과 '인천상륙작전 전승기념 미술대전'이 동시에 진행되었는데요,



 


                    귀여우신(? ㅋㅋ) 우리 해군의장대 사진도 눈에띄네요.  "찰칵!"
 


이렇게, 인천상륙작전 행사장면만을 보신다면.....정말 멋지지 않습니까? 


하지만, 행사에 참석하신 6.25 참전 한국군과 UN군 용사들의 모습 속에서, 열혈국방은.. 잊혀지지 않은 전쟁의 아픔과 승리의 자부심이 교차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              

                                                                          
                                                                                 <열혈국방 생각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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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둠을 밝힌 용전분투

 
 
1950년 6월 25일 새벽 5시, 해군본부로부터의 긴급출동 명령을 받은 YMS-509 경비정이 동해의 묵호항을 빠져나와 북상하였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명령을 내린 해군본부나 정장이었던 김상도 소령도 전면전 발발사실은 몰랐다.
북상하던 509정은 7시 20분경 옥계 인근 해상에서 북한군 상륙부대를 이동하던 북한군 소형 포함을 발견하고 즉시 교전을 벌였는데 이것은 6.25전쟁 최초의 남북 해군간의 교전이었다.

 
                                           YMS-509와 동급의 미 해군 소해정
 

비록 적함을 침몰시키지는 못하였으나 50여 분간의 교전 끝에 북한군 함정을 북으로 패주시켰다.
그리고 509정은 당일 오후 3시에 또 다른 북한군 상륙부대 함정들과 교전을 벌여 상륙정 1척을 격파하고 발동선 1척을 나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당시 북한은 남침과 동시에 동해안 후방에 특작부대를 상륙시켜 국군 제8사단의 배후를 단절시키는 작전을 구사하였는데 509정의 분투로 많은 차질을 빚었다.

 
                          후방으로 침투하던 북한군을 차단하는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대한민국 해군의 지략은 같은 날 서해바다에서도 빛을 발하였다.
전면전임이 확인되자 해군본부는 유일한 상륙함 LST-801 천안함을 옹진반도로 급파하였다.
원래 전면전이 발발할 경우 고립된 옹진반도에 주둔한 제17연대를 후방으로 철수시키기로 계획은 되어 있었지만 해군은 육군의 요청을 기다리지 않고 인천경비부 사령관 유해거 중령에게 명령을 즉각 하달하였다.
 

                                제17연대를 구출하기 위해 출동한 LST-801 천안함
 

이때 천안함 하나로 부족할지 모른다는 판단에 따라 경비부가 보유한 모든 소해정들과 인근의 민간 선박을 징발하여 급조된 철수 선단을 구성하는 치밀함을 해군은 발휘하였다.
그 결과 적에게 함락될 위기의 상황에서 성공적으로 해상철수한 제17연대는 즉시 국군의 예비대가 되어 전쟁 초기의 피 말리는 지연전에 투입되었고, 이후 인천상륙작전에도 참여하여 반격전의 선봉장으로 맹활약하였다.

 
                                                  옹진반도 전투 상황도
 

하지만 전쟁 초기의 대한민국 해군이 보여준 최대의 하이라이트는 남해바다에서 있었다.
전면전 발발 소식을 접한 해군본부는 당시 우리 해군이 보유한 최대 전투함인 PC-701백두산함에게 출동 명령을 내렸다.
백두산함은 변변한 전투함정이 한 척도 없음을 한탄한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이하 모든 해군 장병들이 월급을 털어 마련한 기금에다가 국민의 성금 등이 모여 어렵게 장만한 함이었다.

 
                                          하와이에서 포탑을 장착하는 PC-701함
 

사실 함이라고 이름을 붙였지만 미 해군에서 퇴역하여 해양대학의 실습선으로 활용하던 구현 선박에 3인치 포를 장착한 450톤 규모의 소형 함정이었다.
하지만 태평양을 가로질러 태극기를 게양한 백두산함이 1950년 4월 10일 모항인 진해에 입항하였을 때 국민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 만큼 한국 해군에게 귀중한 전투함이었다.
바로 이러한 한국 해군의 자랑이 조국을 구하기 위해 출동한 것이었다.

 
                                                      작전 중인 백두산함
 

진해기지를 출항한 백두산함은 25일 18시경, 급속히 남하하던 미확인 괴선박을 발견하고 추격에 나섰는데 이 괴선박이 약 600명의 무장병력을 탑승시킨 북한의 1,000톤급 수송선임을 알게 되었다.
백두산함은 유리한 위치에서 교전을 벌이고자 일단 현장에서 이탈한 후 통제부의 명령을 받아 26일 0시 10분경 다시 근접 접근하여 공격을 개시하였다.
북한군이 격렬한 저항이 있었지만 이 전투 결과 아군은 전사와 부상이 각각 2명인 피해를 입었지만 적선을 격파하여 침몰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대한해협전투 상황도
 

전사에는 이를 대한해협전투라고 표기하는데 그 의의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북한 무장선의 임무는 부산항 점거를 위해 북한군을 상륙시키기 위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만일 그렇게 되었다면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의 유일 생명선이 조기에 차단될 수도 있었던 아찔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백두산함은 그러한 절체절명의 위기로부터 대한민국을 구한 것이었다.
 

                                           전쟁 직전 촬영된 백두산함의 장병들
 

이처럼 개전 초에 압도적인 적에게 밀려 고전을 거듭하였던 지상의 상황과 달리 대한민국 해군은 서전부터 상당한 전과를 올렸고 그것은 암울했던 시기에 어둠을 밝혀준 횃불과 같았다.
비록 최근에 발생한 천안함 사태와 관련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대한민국 해군은 이처럼 자랑스러운 전통을 가진 대한민국의 보루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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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해안 기록된 남침증거
 

 
흔히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38선 일대의 모든 북한군부대에 '폭풍'이라는 남침 암호가 하달되면서 04시에 일제히 포격을 개시하면서 발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모든 남침 준비를 완료한 북한군이 전면남침을 개시한 시간이 04시였고 이것은 6.25전쟁 발발의 개시 시간으로 알려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북한군이 38선 이남으로 월경하여 도발을 개시한 것을 전쟁 개시시점으로 본다면 실제로 전쟁은 그보다 1시간 앞선 03시에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새벽 4시에 북한군의 포격이 개시되면서 6.25전쟁이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왜냐하면 비록 38선 전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북한군 일부가 6월 25일 03시에 38선을 넘어 이미 남침을 개시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6.25전쟁 당시 상륙작전하면 인천상륙작전을 먼저 떠올리고 전사에 대해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통영상륙작전, 원산상륙작전 등도 생각이 날 것이다.전쟁 중 상륙작전의 대부분은 위에 언급한 예처럼 제해권을 확보한 유엔군의 주도로 이루어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막연한 상상과 달리 6.25전쟁 중 최초로 벌어진 상륙작전은 북한군이 시도 하였는데, 이것은 전쟁 개시시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북한이 주장하는 6.25전쟁 북침설이 허구임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이기도 하다.

 
                       북한군의 동해안 상륙과 강릉전투 상황도
 

1950년 6월 25일 03시 북한군 제766부대(최근 개봉한 영화  '포화 속으로' 에서 차승원이 지휘관으로 나온 부대)가 동해안의 임원진으로 그리고 제945부대(오래동안 제549부대로 알려졌었다)가 인근의 정동진으로 기습 상륙하였다. 그리고 기록을 살펴보면 북한 스스로도 이것은 성공적인 기습작전이었다고 자화자찬하고 있다.03시에 동해안에 상륙한 북한군은 연대규모의 경무장부대들로 해당 지역에 상륙한 후 현지에서 암약하던 공비 세력과 연결하여 국군을 분리하고 고립시키는 임무에 투입되었다.당시에 동해안을 담당하던 국군 제8사단은 38선 일대의 주문진에 제10연대, 강릉에는 사단사령부를 그리고 후방인 삼척에 제21연대를 배치해 놓고 있었는데 북한군이 중간에 상륙하여 제8사단의 연결을 끓고 제10연대와 사단사령부의 배후를 차단하였다. 따라서 국군 제8사단은 개전 첫날 38선을 돌파하여 남진하는 북한군 주력과 배후를 압박하던 이들 상륙부대에 의해 순식간 고립된 형국이었다.

 
                      영화 '포화 속으로'에 묘사된 북한군 제766부대
 

다행히도 국군 제8사단은 놀라운 투혼을 발휘하여 전면의 적을 막고 대관령쪽 퇴로를 확보하여 무사히 철수를 단행할 수 있었고 이것은 6.25전쟁사에 있어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거론된다.
그런데 동해안에서 벌어진 바로 이러한 숨막히는 개전 초기의 상황에서 중요한 의의를 그동안 많이 간과하였다.
우선 03시에 북한군 정규군이 동해안에 상륙하였다는 점이다.
이미 북한은 38선 일대에 포격을 날리기 이전에 그들의 정규군을 우리 후방으로 침투시켜 도발을 감행했고 그렇다면 6.25전쟁 개시시간을 03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03시에 전쟁이 벌어졌음을 기록한 남침사적비
 

이것은 또한 6.25전쟁을 지금까지도 북침이라 왜곡 선전하는 북한의 주장이 거짓임을 입증하는 증거다.
개전 당일 국군 후방으로 대규모 병력을 상륙시킨다는 자체가 벌써 북한군의 남침을 입증한다.
상륙작전은 규모의 대소 여부를 떠나서 사전에 충분한 사전준비를 마친 후에나 실시할 수 있는 군사작전이기 때문이다.
도발을 받자마자 즉각 반격하여 상대의 배후로 연대규모의 부대가 상륙을 펼친다는 자체가 우선 말이 되지 않는다.

 
         사전 준비가 필요한 상륙작전은 즉시 반격에 사용할 수 없는 군사작전이다.



비교적 소규모였던 통영상륙작전 당시의 해병대도 사전에 많은 준비를 하였다. 따라서 북한의 북침설은 개전 당일 동해안에서 벌어진 상륙작전만으로도 부인할 수 없는 거짓임이 여실히 입증된다. 1950년 6월 25일 03시 동해안에서 벌어진 북한의 기습상륙작전은 개전 시기에 대하여 한 번 정도 생각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북한의 남침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증거로 적극 활용될만한 역사적 사실이라 할 수 있다.

 
                                     제8사단 강릉전투 승전비
 

그런데 야심만만하게 후방에 상륙한 북한군 부대는 이후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하였다.비록 전쟁 발발 당일 동해안 국군 제8사단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지만 방어에 나선 민관군의 노력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 전사에 일일이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무명 사병들과 민초들의 노력이 위기를 기회로 승화시킨 주역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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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전쟁 UDT 참전사
 
 
작금의 천안함 구난활동과 관련하여 그 역할이 자주 거론되는 부대가 UDT (Underwater Demolition Team) / SEAL(Sea Air Land) 이다.
이들 부대의 대원들은 최악의 조건에서 작전을 펼칠 수 있도록 특화된 정예요원들이다보니 이번 천안함 사태처럼 위험한 해상수색, 구난임무에 투입이 되고는 한다.

 

구조,구난활동에 투입 중인 UDT/SEAL

 


하지만 해군 특수전여단 소속임에서 알 수 있듯이 UDT/SEAL은 수중파괴임무와 육해공 전천후 타격임무, 폭발물처리임무, 해상대테러에 특화된 전투부대로 대한민국 최강의 부대라고 자타가 공인할 정도다.
이 부대는 작전자체가 비밀이다 보니 공식적으로 국군 UDT/SEAL의 실전 활약상을 알기는 힘들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해상 재난사고의 구조, 구난에서만 대중이 그들의 활약상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점은 외국의 특수부대도 마찬가지다.

 

UDT/SEAL은 자타가 공인하는 최강의 특수부대다.



다만 우리나라에서 UDT의 실전 투입기록은 있다. 6.25전쟁 기간 중 미 해군 UDT (미국 UDT는 1983년 해체되어 현재 SEAL이 임무를 대신한다)의 괄목할 만한 작전이 한반도 곳곳에서 벌어졌다.
미국 UDT는 제2차 대전 당시에 상륙전이 빈번하게 벌어지자 통로개척 임무 등을 위해 1942년 8월에 창설되었고 이후 타라와전투 같은 여러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6.25전쟁 발발 초기부터 유엔군 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가 처음부터 상륙전을 구상하자 한반도에 즉시 투입이 되었다.
6.25전사를 살펴보면 총 4회에 걸쳐 미군 UDT는 의미 있는 작전을 수행하였다.

 

6.25전쟁에 투입되었던 미 해군 UDT부대

 

 
1. 인천상륙작전 1950년 9월
인천 앞바다는 갯벌이 많고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여 수로가 극히 좁은 해역이다.
따라서 상륙함대가 진입할 수로일대에 기뢰 부설 여부 등을 사전에 확인하고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이 작전에 미 본토에서 긴급 전개한 10명의 UDT 3팀이 투입되어 맡은 바 임무를 다하였다.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된 UDT 3팀



2. 대천특공작전 1950년 9월 22일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적 후방 정찰을 위해 충남 대천에 8명의 요원으로 구성된 UDT대원들이 심야에 5대의 고무보트를 나눠 타고 상륙하여 적진을 성공적으로 정찰하였다.

 

고무보트를 이용하여 해안가로 침투하는 모습(원산상륙작전 당시)


 
 
3. 원산상륙작전 1950년 10월
미 제10군단이 원산에 상륙하려 하였지만 소련의 원조로 북한이 설치한 3000여발의 기뢰가 원산만을 가득 채워 동해바다 위에 묶여 있게 되자, 이를 제거하기 위해 UDT가 투입되었다.
급거 투입된 UDT대원들은 현지 주민의 협조를 받아 기뢰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여 이들을 성공적으로 제거하면서 2주 만에 미 제10군단은 상륙할 수 있었다.

 

원산 앞바다에서 기뢰에 의해 폭발당하는 한국해군 YMS-516 소해정


 
 
4. 흥남철수작전 1950년 12월
원래 흥남은 북진당시 유엔군이 거점으로 삼았던 항구는 아니었지만 중공군이 원산을 조기 함락시키자 함경도 일대에 고립된 10만여 명의 아군과 수많은 장비들이 철수할 항구로 선택되어졌다.
따라서 사전에 탈출로로 사용될 수로에 대한 안전 확보가 필요하였고 이를 위해 미군 UDT가 투입되었다.
이것은 UDT가 공식적으로 6.25전쟁에 투입된 마지막 작전이었다.

 

작전 투입전 장비를 입는 모습(원산상륙작전 당시)


 
미군 UDT는 휴전 후 1954년 철수하였고 임무를 대신하기 위해 장인표 대위 외 해군장교 7명이 미국 해군 UDT 과정을 수료한 후 귀국하여 1955년 11월 25일 1기 교육생 25명을 훈련시켜서 한국 해군 UDT를 창설했다.
당시 1기 교육생도로 300여 명이 지원했고 그중 25명이 수료한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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