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1.04.11 조선의 해외 무기 획득 사업-제2편- (2)
  2. 2011.04.07 조선의 해외 무기 획득 사업-제1편-








조선의 해외 무기 획득 사업-제2편-
 

    

1624년 4월 24일.조선왕조 실록에,

일본의 도쿠카와 이에미쓰의 습직(襲職; 직무를 이어 맡음)을 축하해주려 파견하는 회답사(回答使)의 파견을 앞두고 비변사에서 조선 특산 비단을 가져가서 일본 시장에 팔고 그 대금으로 일본제 조총을 사오자고 건의하는 기록이 보인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경기의 군사가 가장 정예하고 건장하므로 안을 지키고
밖을
막는 데에 관계되는 바가 매우 중대합니다. 그러나 경기의 물력이 피폐하여 기계를 마련하여 줄 수 없습니다. 이 번에 일본으로 회답사가 가는 편에 호조로 하여금 화사주(花絲紬) 수천 필을 장만해 보내어 수천 자루의 조총을 사오게 하여서 경기 군사에게 나누어 주어 교련(敎鍊)하여 성취하게 하소서. ”

※화사주(花絲紬)는 일본에서 인기 있었던 조선 특산 비단이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라. 환도(環刀-일본도)도 사오도록 하라.”하였다.


                                 임금님 어가를 호위하는 어영청 조총병들


인조의 신정권이 비록 친명 반 후금 정책을 취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북방의 심상치 않은 정세에 대비해서 소멸해 버린 조총대를 다시 만들자는 비변사 내면의 의도가 있었다는 사실이 이 건의에서 보인다,


이괄의 난에 혼난 인조의 심기에 맞추어, 왕실 근위대격인
어영청 소속 경기 병사들을 품질 좋은 일본의 조총으로 장비 시키자는 건의였다.

당시 후금국은 초반부터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인조 정권에 심사가 잔뜩 뒤틀어져 있을 때였다.


후금국이 조만간 손을 보려고 벼르고 있는 상황에서 그 전 군주 광해군
같았으면 미리 앞장서서 일본에서 조총을 구해왔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회답사로 임명되어 일본에 가는 정립이 아래와 같이 무기 구입을 뒤틀어 버리는
한심한 건의를 한다.


무기 구입을 건의하는 비변사의 건의가 재가(裁可) 된 후 보름이
지나지도 않아서였다.


1624 5월 11일,

정립, 강홍중, 신계영을 보내어 일본(日本)에 회답하였다.

정립 등이 떠나려 할 때에 아뢰기를,

중국은 부모의 나라로서 혹 유무(有無)를 무역해도 본디 크게 해로울리 없는데도 오히려 수검(搜檢;금제품(禁制品) 따위를 수색하여 검사함.)하는 법이 있습니다. 

더구나 왜노(倭奴)는 원수의 나라로서 사신을 보내어 회답하는 것은 실로 부득이한 상황에서 나왔는데, 재화(財貨)를 가져가서 이익을 꾀하는 일이 있다면 사신이 모욕을 당하고 나라의 체모가 손상되어 관계되는 것이 작지 않을 것입니다.

비국(備局-비변사)의 공사(公事)에 따라 화사주 수천 필로 조총, 환도를 사오게 하셨는데, 이 성명(盛名)의 시대에 처음 사신을 보내면서 버젓이 재화를 가져가 무역의 길을 열게 하면, 도이(島夷)에게 깔보이고 나라의 체모를 손상시킬 듯합니다.”


하니, 인조가 답하기를,


아뢴대로 하라. 수검하는 일은 사신이 엄금하면 절로 그 폐단이 없을 것인데 어찌하여 반드시 따로 경관을 보내야 하겠는가.”

험악해져가는 국제 정세는 외면하고 명분론에 젖어 후금에 적대하다가
재앙을 불러온 인조의 신하답다.


답답한 인조는 보름 전에 비변사에 내린 전교를
뒤집어 버리고 정립의 건의를 따른다.


국제 정세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 이렇게 명분을
따지는 허황된 인식이 인조 정권에 통하고 있었으니 청[후금국]이 인조를 손보려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은 일으킨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인조가 국방을 게을리 했던 댓가는 엄혹했다.
1638년 12월 1일 용골대와 마부대가 인솔하는 기습대가 압록강을 건너 단 3일 만에 왕실의 피난지인 강화도로 들어가는 길을 차단하고 인조의 조정을 남한산성으로 몰아 넣었다.


이어서 청 태종이 거느린 15만 명의 청군이 후속하여
침공, 남한산성을 물샐 틈 없이 포위하고 공격해 들어왔다.


공성전(戰; 성이나 요새를 빼앗기 위하여 벌이는 싸움)47일간 계속되었다.
수비대는 식량 부족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식량이 떨어지고 더 버티지 못했던 인조는 결국 1638년 2월 1일 성을 내려와 송파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진흙 바닥에서 세 번이나 절하고 머리를 아홉 번이나 조아려야 하는 삼궤구고두의 수모를 겪으며 한국 역사 최악의 수치스런 항복을 하게 된다.



                                                남한 산성


광해군과 달리 아무런 국방의 준비도 안하고 있으면서, 외교적으로는
신생 강국 청에 뻣뻣하게 대응한 인조에게 이러한 결과는 어쩌면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엄청난 정월의 추위 속에서 47일간 진행 된 공성전은 치열하였다.
후금 군은 대포까지 동원해서 남한산성을 파상적으로 공격했다.


그래도 1만 명의 방어 군이 지키던 남한산성이 15만 대군의
청에게 함락되지 않고 방어 해냈던 것은 조총병의 분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총에 이은 다른 해외 도입 무기를 소개한다.

이 것은 무기가 아니라 조총의 필수품인 화약의 원료 '염초(焰硝)'이다.

우리는 고려 때 최무선이 원나라 상인 이원에게서 화약의
제조법을 입수했고 한국 최초의 화포도 제조한 것으로만 알고 있다.[1377년]


그러나 조총에 사용하는 화약의 기초 핵심 성분인
염초는 300년 넘게 국내 생산이 되지가 않았었다.


그 긴 세월 고려나 조선의 화약은 중국이나 일본에서
수입한 염초로 제조해야 했다.

[최무선이 이원에게서 염초의 제조법을 배웠다고 쓴 기록도 있는데 이는 신뢰하기 어렵다. 300년이 넘는 염초 수입이 이를 뒷받침한다.]


염초는 폭발력이 강한 성분으로 오늘날 번개탄의
기본 성분이 되는 초석과  같은 것이다.


염초에 유황이니 숯가루니 하는 성분들을 섞어서
화포나 화승총에 쓰는 흑색 화약을 만드는 것이다.


옛 염초는 오래된 건물의 천정이나 대들보 마루 사이에 
쌓인 고은 먼지를 모아 끓이는 등의 몇 가지 공정을 거치면 생성이 된다.


일본의 각 영주들은 농민들에게 이 먼지를 공출하여
조총용 화약을 만들었다.


중국은 별로 어렵게 보이지도 않는 이 염초 제조 비법을 조선에
전해 주지 않아 조선은 전량 중국이나 일본에서 수입해서 써야했다. 그 세월이 무려 300 년이나 된다.


임진왜란 해전 때마다 일본의 선단을 격멸했던 충무공 이순신 함
대의 각종 함포[총통]들도 수입한 염초로 만든 화약을 사용했었다.


믿어 지지 않는 사실이지만 조선왕조실록에 이를 증명하는
기록들이 보인다.


앞서 인조에게 '일본에 비단을 수출하고 그 대금으로
조총을 사오자'는 상서문에 이런 구절이 뒤이어 붙어있다.


“... 그리고 염초를 사오는데 편리하기는 중국만한 데가
없으니, 이번 사은사가 가는 편에 역시 해조로 하여금 수만 근을 살 수 있는 값을 주어 사오게 하소서.“


염초가 국내 생산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또 다른 사실이 이 보다 앞서 임진왜란 중인 1593년의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다.


비변사가 조우여문이라는 왜군 포로가 염초를
만드는 기술이 있다고 보고하자 선조가 지시를 하면서


“...
이 포로가 조총과 염초의 기술을 안다고 하니 잡아 두고서 우리 군사에게 이 기술을 전수하게 하라.“ 했다.


하지만 다른 신하가 간사한 왜인은 믿을 바 없다고 처형을 건의해서
염초 제조 기술이 전수되지 않았다.


염초 제조 기술이 국내에 도입된 것은 왜란과 호란을 겪고
세월이 한참 지난 숙종 때가 다 되어서였다.


숙종 때 역관 김지남[1654-1718]이 사신 판서 민취도를 수행하여
연경에 사행(使行)갔다가 이의 제조 비법을 알아냈다.


그가 중국에서 입수한 비법대로 염초를 만들어 실험해보니
매우 성공적인 결과가 나왔다.


김지남이 이를 조정에 보고하니 재상 남구만이 숙종에게 계청(啓請;임금에게 아뢰어 청하던 일)하여
군기시(軍器寺)에게 실험해보게 하고 마침내 이를 대량 생산하는데 성공했다.


김지남은 1698[숙종 24년]년, 신전차초방[新傳煮硝方]이라는
염초 제조법을 책으로 간행하여 전국에 널리 보급하였다.


이 때부터 염초 제조법은 군대는 물론 민간에도 퍼져
포수들 까지 염초를 직접 제조해서 100% 국산 화약을 활용하게 되었다.


그의 업적을 인정한 조정은 그를 정3품 통정대부에 승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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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문의 아들 김경문도 역관(譯官)이었다. 1718년 국경 분쟁을 조정하기 위해서 청나라에서
목극등이 오자 김지문 부자는 조선 측 대표 박권과 백두산에 방문하였다.

고지대 국경선 실제 조사에는 박권이나 김지문은 고령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김지문의 아들 김경문이 목극등을 수행하고 올라갔다.


그가 현명하게 대처해서 국경선이 우리 주장대로 되고
백두산에 정계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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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문은 300년 숙원 문제를 해소하여 병기의 완전한 
국내 생산을 성공시켜 자주 국방의 기본 토대를 열었다.


그의 공로는 최무선이나 문익점의 공로에 못지않은 것인데
현대에 그의 공로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없으니 유감스럽다.


한 때 적국이었던 일본으로부터 도입한 조총이 정작 대 활약을 해야 했을 전쟁은 광해군이 준비했던 후금국과의 전쟁이었는데, 광해군이 준비한 조총과 조총대는 오히려 후금을 위해서 싸우는 기구한 운명이 되어 버렸고, 청 태종이 침공한 병자호란 때도 국운을 건져내는 대승리는 아쉽게도 이루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조선의 조총, 또는 조총병의 운명이 그렇게
기대 밖이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세계 전사에 특기되는 일본 오다 노부나가의 삼단 사격에
의한 대승과 비슷한 승리가 병자호란 때 있었다. 남한산성에 포위 된 인조를 구하기 위해서 출동했던 평안도 병력이 강원도 김화 탑골에서 승리를 거둔 것이다.



                   나가시노 전투의 다른 그림. 김화 탑골 싸움을 연상해볼만한 단서를 준다.


나가시노 전투 보다 규모는 훨씬 작았지만 명군을 연파했던 철기병이 조선의 조총대에게 맥을 못 추고 대패 당한 전투였다.


김화의 탑골 전투는 평안 병마사 유림과 평안 관찰사
홍명구가 지휘했다.


전투가 개시되자 청군은 전매 특허격인 기병 돌격으로 쇄도해왔다.
산기슭에 진을 쳤던 홍명구의 조선군은 청군 철기병들의 공격에 와해되어 전멸하다시피 했고 홍 명구도 전사했다. 사르호에서 철기병에게 당했던 조선군의 참패를 닮은 전투였다.


그러나 병마사 유림은 전술적으로 철기군이 활동할 수 없는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고 있었다.


산의 능선을 차지했는데 앞에 잣나무 숲이 있었다.
이 지리적 위치를 이용해서 유림은 대단히 능란한 전투 지휘를 했었다.


나가시노에서의 다케다군과 같이 청 군의 철기병은 파상공격을
해왔다.


           앞편의 그림 다시 올린다. 총이 풍부했었던 노부나가 부대와 달리 조선군은 총수와 궁수가
           혼성 편성되어있다.



유림은 위의 그림에서와 같이 총수와 궁수가 혼합된 사격진을 갖추어놓고, 적을 불과 몇 십 보 앞까지 유인한 후 깃발 신호에 따라 총과 활을 일제 사격으로 발사하는 사격 지휘 방법을 사용했다.


이 일사분란하게 통제된 집중 사격에 후금 군은 수차례의
기병 돌파를 시도하다가 무더기로 시체가 되었다.


이 전투에서 조총병들에게 대어가 낚였다.
임진왜란의 전투 중에도 이런 대어가 낚인 일은 없었다.


전투 도중에 유림이 내려다보니 한 청군 장수가 말을 타고
산 위 아래를 달리면서 악을 쓰며 병사들의 돌격을 독려하고 있었다.


유림은 저격병 열 명을 엄선해서 적 기병을 차단하기위해
만들어 놓은 목책을 넘어 숲 사이로 빠져나가 이 자에게 접근했다.

[이 대목에서 조선군이 나가시노 전투와 같이 마방진지(馬防 陣地)를 구축해놓은 사실이 드러나 보인다.]


사거리 내에 몰래 접근한 저격대는 침착하게 조준을 하고
유림의 사격 명령에 일제 사격을 가했다. 청 장수는 말에서 고꾸라지며 굴러 떨어져 죽었다.


전쟁이 끝나서 그의 신원이 알려 졌는데
그는 누르하치의 매부가 되는 왕족이었다


이날 교전에서 총과 활의 조합된
사격으로 청군이 입은 피해가 막대하였는데, 그날 밤 적진에 몰래 접근한 조선 정찰병이 관찰한 바 통곡 소리가 진내에 가득했다고 한다.


유림이 지휘했던 조총수들은 별도 파견된 어영청 휘하의
정예 부대였었다.


비록 앞에서 말한 비변사의 비단 판매와 조총 구입이
실행되지 않았었다해도, 그 이후 10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임금을 모시는 정예 어영청 부대는 대마도를 경유해서 수입 된 조총들을 최우선적으로 장비했을 것이다.


선조가 시작했었던 해외 병기 취득 사업이 몇십년만에 조그만 결실을
맺은 전투라고도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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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해외 무기 획득 사업-제1편-




첨단 무기의 해외 도입 사업은 한국 국방 정책에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고 매년 엄청난 예산이 해외 무기 획득에 지출되고 있다.


조선 시대에도 국왕이 직접 챙기던 해외 무기 획득 사업이
있었다.


아래는 해외 무기 획득사업이 증오나 체면이나 또는 명분을
떠나서 국익만을 따져서 결정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입증해주는 조선의 국방 구매 사업사의 한 사례를 소개한 것이다.


조선이 해외에서 구매해오던 무기는 두 종류이다.
그 하나가 임진왜란 7년의 전란동안 조선군에게 큰 괴로움을 주던 일본군의 조총이었다.


다른 하나는 300여년의 세월동안 국산화를 하지 못해 외국산
수입해야 했던 화약의 원료인 염초다. 사실로 받아 들이기 힘든 분들이 많을 것이다.


--- 임란 전부터 조선의 무반(武班)사이에 명품으로 통하던
왜검[일본도]도 있으나 이는 이 글에서 생략하고자 한다. ---


조총부터 살펴보자.

조총은 일본이 원산지가 아니라 1543년 일본 남단
다네카시마[현재는 가고시마현]에 표착한 포르투갈 인들이 전래 해준 것이다. 덕분에 조총은 일본에서 한 때 다네카시마라는 명칭으로 통했었다. 현재 다네카시마에는 일본 우주 개발 로케트 발사 기지가 있다.


다네카시마의 16세 젊은 도주[島主]는 중국 배를 타고 표착해온 포르투갈인들로부터 2,000량이나 되는 거금을 주고[현재 시세로 10여억 원의 대금]을 지불하고 총과 그 제조 기술을 전수받았다.


젊은 도주는 조총을 새나 잡는 스포츠의 도구로 생각하고
그런 목적으로 조총 사격을 즐겼는데 옆 섬과 벌어진 전투에서 조총을 사용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일본의 조총


이 소문이 전해지면서 조총은 삽시간에 일본 전국에 퍼졌다.
당시는 일본이 60여개의 국가로 나뉘어져 밤낮없이 싸움질을 하는 전국시대였었다.


오닌의 난이래 백여년간 싸움이 그치지 않고 계속되는
시대였었기 때문에 신병기인 조총은 너도나도 찾는 인기 상품이었고 값도 무척 올랐다.


한마디로 전란의 시대에 돈벌이 잘 되는 대박
상품이 되었다.


이에 창안한 오사카 부근 사카이의 상인들은 숙련된
대장장이들을 불러 모아 조총을 대량으로 생산하였다.


자본의 지원을 받는 대량 생산에 힘입어 조총의
제조 기술은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원래 세계가 알아주던 도검 제조 기술을 보유했었던 일본의 장인들은 그 기술을 조총 제조에 그대로 응용했다.


사카이 장인들이 만든 조총은 원산지인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제 보다도
더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일본인들은 조총을 대개 철포[鐵砲]라고 불렀고 조총 부대도
철포대[鐵砲隊]라고 불렀다.


이 철포부대를 대규모로 운용해서 역사의 방향을 전환시킨 사람이 전국
시대를 거의 마감시킨 오다 노부나가다.


그는 1575 년 6월 29일 나가시노 전투에서 3,000명의 철포부대를
전개시켜 3단 사격이라는 연속 사격 전술로서 영주 다케다 가쓰요리의 12,000 정예 기병대를 전멸시키고 다케다 가문을 멸망시켰다.

 

                                      1575년 나가시노 전투
             왼쪽이 노부나가 철포부대, 노부나가 군은 통나무를
병사 개인들이 운반해와서 기병대를
             저지하는 마방진지를 구축했었다.



임진왜란 때 탄금대에서 신립의 조선군과 격돌한 일본군은 나가시노에서 써 먹은 일제사격 전술로 조선군을 대파하였고 신립은 강에 뛰어들어 자살 하였다.


임진란 내내 조총이 조선군에게 가하는 타격은 실로 컸다.
조총에 크게 당한 조선의 군주 선조는 조총에 큰 관심을 가지고 이를 모방한 조총의 생산을 직접 독려하였다. 그러나 조선이 제조한 조총은 그 품질이 별로 좋지 않았었다.


조선제 조총의 품질이 안 좋았다는 기록이
조선 왕조 실록 여기저기에 보인다.


1607년 일본으로 출발하는 사신에게 선조가 전교하는 내용의 일부다.


“... 또 적을 막는 병기로는 왜(倭)의 조총만한 것이 없다. 우리나라가 대략 만드는 법을 배워 만들기는 하였으나 모두 쓸 수 없었다. 얼마 전에 함경 감사가 은자(銀子)를 모아 올려 보내서 조총을 사가기까지 하였었다.”
※위에서 함경감사가 한양에 와서 사간 조총은 일본제이다.※


선조의 교시는 국산 조총은 아예 쓸 수가 없는 불량품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조선의 기술로 화약의 폭발력을 견디어 내는 강도 높은 조총을
만드는 기술이 아직 개발 되지 않았다는 말인 듯하다.

--- 조선 말 화승총[火繩銃-조총]으로 사냥하던 포수들은 사용 중 화승총이 폭발하여 실명하거나 손가락이 잘려지는 사고를 상당히 많이 당하였다. 산간 부락에서는 애꾸눈이나 손가락 없는 포수를 자주 접할 수가 있었다. ---


위의 교시에 이어진 선조의 지시는 조총을 일본에서
수입해오라는 명령이었다.


“...만일 이번 회답사의 사행에 해조[該曹,공조- 재무와
 상공 담당 부서]에게 물건 값을 헤아려 주게 하여 조총을 편리한 대로 다수 사들여 오게 한다면 적국의 병기를 배에 가득히 싣고 돌아온다 해도 참으로 방애스러울 것이 없을 것이다. 이 또한 한 가지 이로운 일이니 아울러 의논하여 시행하도록 비변사에 말하라.”


1618년 북방에 흥기한 누루하치의 후금국 철기병 부대와
전쟁을 하던 명나라의 장수 유정이 조선에 각종 군수물자의 지원을 강청(强請)해왔다.


이에 거절하지 못한 병조에서 광해군에게 건의한다.


“... 그리고 환도와 조총은 우리나라에서 만든 것이 비록 매우 거칠고
엉성하기는 하나 훈련도감과 군기시에게 정밀하고 좋은 것을 특별히 가려 숫자대로 미리 준비하게 하소서.“


조총을 생산한지 20여년이 흘렀어도 그 질이 그닥 좋아 지지 않았다는 것을
위의 기록이 말해준다.


조총에 한이 맺혀 증오와 체면을 내던지고 일본의 조총 제작은
물론 수입까지 추진했던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조총부대의 육성에 총력을 기울였다.


국토가 결단 나고 백성의 삶이 도탄에 빠지는 왜란이
겨우 지나고 나니, 북방의 여진족들이 무서운 기세로 일어나서 조선의 안전을 위협하는 상황이 왔었기 때문이었다.

실로 그 기세는 대단해서 대국 명나라의 군대는 연패를 거듭하고 있었다.


여진족이 세운 후금국의 군력의 핵심은 철기병이라 불리던
기병대였다.


기병대에게는 조총의 일제 사격이 특효약이라는 사실은 이미
일본의 오다 노부나가가 증명해 보인바 있어 동양 병학계의 상식이 된지 오래였다.


철기병을 격파할 수있는
강한 조총부대의 육성을 추진하던 광해군은 조총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다. 화기도감을 세우고 조총의 대량 생산에 박차를 가했는가 하면 대마도를 통한 일본제 조총과 왜검의 수입량을 대폭 늘였다.


대마도는 조선과의 조총 장사로 짭짤한 재미를 보았다.
대마도가 조총 100여정을 보내 주면서 일본에서 금값으로 팔리는 조선 인삼을 500근이나 청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광해군이 즉위할 무렵의 조선이 보유한 조총 숫자는 1610년[광해군 2년]
1월 12일 광해군에게 올리는 보고문에서 나타나있다.


“... 도감의 조총은 비축하여 두고 사용할 때를 기다리는 도구가 아니라
본래 초군(哨軍)의 평상시 사용을 위한 물품이므로 만드는 대로 지급하여 망가지면 대용하게 하였으니, 도감의 각군으로서 소지한 자가 지금 거의 1천 9백 7십여 명입니다.”


광해군은 이 1,970정의 소총에 더해서 추가 생산과 수입을 통해 조총을 계속 늘려갔으며,
7년 뒤에는 5,000명의 조총대를 육성해냈다.


조선이 강력한 조총대를 보유한 것을 알게 된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것을 들먹이며 대 후금전쟁에 이 조총대를 파병하라고 압력을 가해왔다.


명분따위 보다도 백성의 안녕을 위해서 후금의 비위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던 광해군은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파병을 미루었으나 계속 된 압력에 버티지 못하고 1619년 추운 정월 5.000명의 조총대를 주축으로 하고 기타 병력을 증강한 10.000명의 원정 부대를 파견하였다.


1만명의 원정군은 평안도 3,500명, 전라도 2,500명,
황해도 2,000명 충청도 2,000명 등으로 구성되었다.


임진란의 재앙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해 빈궁하기 짝이 없는
조선이 젖 먹던 힘을 다해서 모은 병력이었다.

[출발 전 강홍립은 광해군으로부터 상황을 보아 잘 알아서 처신하라는 비밀 지령을 받았다.]


원정 조선군은 1619년 2월 1일 압록강을 건넜다.


그러나 조선의 조총대는 1619년 3월 심하 부근 사르흐에서 명나라 장수
유정을 후속하다가 유정의 군과 함께 철기병의 연달은 기습을 받고 큰 피해를 입었다.


봄철이면 부는 만주의 모래 바람을 틈타 철기병들이
폭풍처럼 덮치는 바람에 조총대는 단 한번의 일제 사격을 해보았을 뿐,그대로 와해되고 말았다. 광해군의 밀지를 받고 기회를 보던 도원수 강홍립은 후금 군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후금의 철기병들과 맞서는 조선의 조총대. 조총과 활이 교대로 배치된것에 유의.


파견한 1만 명의 병사 중 그 해 안으로 조선으로
도망쳐 돌아 온 조선군은 1,40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후금에게 조선군들은 호박이 넝쿨 채 굴러 들어온 보물들이었다.
후금은 조선군 병사들을 일일이 심사해서 튼튼한 자는 조총대를 주력으로 해서 편성한 부대에 편입시켰다,


그리고 나머지 신체 조건이 부족한 병사들은 각 여진족 부락에 나누어
농사일을 하도록 했다.


청태조 누르하치는 비록 강제 동원한 것이기는 하지만 조선 조총병들을
잘 대우해주었고, 명나라와의 전투에 투입해서 큰 재미를 보았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물러나고 인조가 왕좌에 앉았다.
그리고 인조가 이괄의 난을 겪고 가까스로 정권이 안정이 된 뒤 점검해보니 군기감에 조총이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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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4년 인조 2년 4월 25일. 특진관 이서(李曙)가 아뢰기를,“도감(都監)의 군기(軍器)는 변란을 겪은 뒤에 아주 없는데, 근래 저자에서 산 것은 겨우 2백여 자루의 조총뿐입니다. 쌀을 마련하여 지금 더 사들인다면 많은 수량을 장만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조로 하여금 쌀을 지급하여 사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결국 광해군이 조선의 국방을 위해서 막대한 국가 재정을 투입,
생산하고 수입해서 가까스로 확보한 조선의 조총 5,000정은 타 민족끼리의 엉뚱한 전쟁에서 전량 소멸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제2편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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