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의 국군 기갑사(機甲史) [ 2 ]
 
 
장갑대대의 주력 M-8 장갑차
 
한국전쟁 직전 '기갑연대'에서도 핵심전력은 국군 유일의 기계화장비 완비부대인 장갑대대였다. 미군정이 물러나면서 인도한 장비를 인수하여 창설된 부대였는데, 당시 국군의 모든 대대급 부대 중 최강의 전력을 갖춘 부대로 평가를 받았지만 이는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국군의  무장이 얼마나 빈약하였는지 반증 할 수 있는 자료이기도하다.
 


                          항복한 일본군의 안내를 받아 서울로 진입한 미군의 M-8 장갑차
 

3개 중대로 구성된 장갑대대는 M-8 정찰 장갑차 27대, M-2/M-3 반궤도 차량 24대 그리고 20여대의 무장 짚(Jeep) 차를 보유하였다. 부대 명칭대로 기갑연대 예하의 장갑대대라 칭하기에 부끄러운 수준이었지만 이것이 창군 초기에 국군이 보유한 모든 기동 전투장비였다. 오늘날 국군의 기갑부대와 비교한다면 상당히 민망한 수준에서 국군의 기갑부대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시가행진 중인 기갑연대 소속의 M-8 장갑차
 

당시 사료를 보면 이들 장비가 혼재된 형태로 중대가 편성되지 않고 M-8 중대, M-2/M-3 중대 그리고 무장 짚 중대로 각각 개별 편성된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후방임무가 아닌 정규전에서는 각 중대별로 분리되어 작전을 펼치기 보다는 대대 전체가 작전에 투입되어야 효과적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주력이라 할 수 있는 M-8 중대조차도 소대별로 나누어 전방의 각 사단에 배속하여 운용하였다.
 

                              M-8 장갑차는 부득이한 사유로 소대별로 나뉘어 배치되었다
 

지금이야 통신강국 KOREA지만, 해방 후 우리나라의 통신사정은 몹시 열악하였고 군도 예외는 아니었다. M-8에 장착된 SCR-506 무전기는 장거리 통신에 적합하여 남산통신소를 키스테이션으로 하여 육군본부와 전방 사단의 통신에 유효 적절히 사용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강릉의 8사단에 배속한 M-8 장갑차에서 송신한 육성이 서울 남산 통신소에서 수신되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귀중한 자산을 통신용 목적으로 뿔뿔이 나눈 것이었다.
 


                             창군 초기 국군의 기간 통신망 역할을 담당한 SCR-506 무전기
 

이미 제2차대전을 통하여 집단화된 기갑부대가 효과적임은 입증된 사실이었지만, 사실 장갑중대의 전력으로는 굳이 집단화고 뭐고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자 M-8을 통신용으로만 운용할 수는 없었다. 북한군 T-34 전차에 전방의 부대들이 유린되자 M-8은 출동하였다. 명령을 내린 상부나 이를 운용하던 병사 모두가 계란으로 바위치기인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망설일 수 없었다.
 

                  창군 초기  M-8 장갑차는 국민들에게 국군의 위용을 어필하는 최고의 무기였다
 

M-8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에서 정찰용으로 개발된 경장갑차였지만 건군 초기에 국군이 유일하게 운용한 중장비여서 시가행진 등 공개 행사에서 국군의 위용을 국민에게 어필하였다. 당시 북한군은 M-8과 비슷한 성능의 BA-64 정찰 장갑차 54대를 정찰 및 수색 용도로 운용하였지만 M-8이 전쟁 초기에 달려 나가 막으려 하였던 상대는 북한의 T-34 전차였다. 화력이나 장갑능력에서 정면으로 맞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M-8이 상대할 적수라면  BA-64 장갑차가 맞지만
                          T-34 전차의 남진을 막기 위해 출동하여야 했다. (노획한 BA-64)

 
의정부축선을 방어하던 7사단을 돕기 위해 출동한 M-8의 37mm 주포가 불을 뿜어 수많은 철갑탄을 적 전차에 명중시켰지만 대부분 튕겨 나가는 참담함과 함께 차례차례 적 전차의 희생양이 되어 갔다. 이런 수모에도 불구하고 M-8 장갑차는 김포와 영등포 일대에서 북한군 6사단을 상대로 지연전을 펼칠 때 큰 활약을 하였고, 옥천 지연전에서는 적 전차의 무한궤도를 끊어 전차 공포증에 빠져있던 아군에게 용기를 불어 넣기도 하였다.

 

                M-8 장갑차의 모습을 일부 확인 할 수 있는 M-20 장갑차 (사진-4.19 민주혁명회)
 

이렇듯 개전 초 성능 이상의 활약을 펼친 M-8 장갑차는 여러 전투에서 차례로 파괴되었고, 북진 시 청진부근에서 전투하였다는 기록은 있으나, 흥남철수 적재품목에서 발견 되지 않아 결국 1950년 말 국군 전력에서 사라졌다.  4.19 당시의 사진을 보면 M-8과 동일한 차체를 쓰던 M-20 장갑차를 볼 수 있는데, 이 또한 현재 보존되어 있지 않고 있다. 아쉽지만 사진으로나마 용감했던 M-8 중대원들의 무용담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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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획무기의 재활용 사례 [ 下 ]

 

  

전차의 탄생 이후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며 체득한 한 가지 법칙이 있는데, 전차가 아무리 강력하더라도 보병의 지원 없이 단독으로 작전을 벌이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행위라는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보병이 아무리 빨리 뛰어도 전차의 속도를 맞출 수 없다는 새로운 고민이 생겨났다. 이때 해결책으로 등장한 것이 보병을 소화기로부터 보호하고 빠르게 이동시킬 수 있는 장갑차다.


 

                                        장갑차의 중요성은 점점 증대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장갑차의 종류도 상당히 세분화 되었는데, 보병병력을 전투지역까지 안전하고 빠르게 이동시키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는 보병수송차량(APC; Armoured personnel carrier)과 보병이 탑승한 상태로도 일부 전투를 수행하거나, 하차하여 전투중인 보병에 대한 화력지원을 목적으로 하는 보병 전투차량(IFV; Infantry Fighting Vehicle)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때문에 APC에 비해 최전선에서 직접 전투를 벌이도록 설계된 IFV가 화력과 장갑이 뛰어날 수밖에 없다.

 


                             2차대전 당시 대량 사용된 하프트랙은 APC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일부 IFV는 예전에 사용하던 경전차와 맞먹는 성능을 자랑하기도 하는데 그렇다하더라도 장갑차는 장갑차이기 때문에 화력과 방어력에서 주력전차(MBT; Main Battle Tank)를 능가할 수는 없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다음과 같은 장갑차의 태생적 한계 때문 이다.

 


장갑차는 적 전차나 진지가 목표가 아닌 탑승한 보병을 최대한 보호하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이므로 적의 소화기로부터 보호 할 정도의 장갑이면 된다. 전차의 경우는 대 전차전을 염두에 두고 설계 되므로 당연히 상대의 공격을 막아낼 방어력이 필요하다. 이런 이유로 전차의 방어력이 장갑차보다 강력 할 수밖에 없다. 장갑차의 과도한 장갑은 필연적으로 기동력의 약화를 불러 올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IFV인 M-2전투장갑차. 그렇다고 전차의 성능을 능가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최근 무기 발달사를 보면 기갑장비의 성능 향상 못지않게 PZF-3, RPG-7과 같은 대전차무기의 발달도 눈에 뜨인다. 휴대 및 사용이 간편한 이들 무기는 전차의 취약 부분에 명중하면 심각한 타격을 줄 정도로 위력이 있다. 그런 이유로 소화기로부터의 방어력만 갖춘 장갑차가 이들로부터 공격을 당한다면 그야말로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대전차무기의 성능 향상으로 장갑차의 안전도 위협받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도 이스라엘은 전차의 장갑능력을 가지고 있는 괴물 같은 장갑차를 보유하고 있는데 바로 아크자리트(Achzarit)라고 불리는 IFV다. 그런데 아크자리트는 앞서 소개한 타이란 전차만큼이나 주변 아랍국들을 배 아프게 만든 장갑차이다. 왜냐하면 타이란 전차처럼 아랍 측으로부터 노획한 T-54/ 55전차를 개조하여 만들어낸 장갑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갑차임에도 전차의 장갑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노획전차를 개조하여 만든 IFV인 아크자리트

 


노획한 적의 무기를 굳이 사용하지 않는다면 차후 적이 재 노획하지 못 하도록 완전히 폐기하는 것이 원칙이다. 사실 서방측과 소련측 무기는 구경을 비롯한 많은 부분이 상이하기 때문에 노획하였다 하더라도 포탄 등이 소모된다면 계속 사용하기 어려워 처음부터 폐기하는 것이 유리한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노획한 T-54/ 55를 자신들이 두고두고 사용할 수 있도록 개량한 것이었다.

 


                                  개조를 하였음에도 T-54/ 55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타이란 전차인데 사실 당시에 이스라엘은 메르카바(Merkava) 전차의 개발을 추진 중이었기 때문에 노획된 적 전차를 모두 개조할 필요는 없었다. 한마디로 그만큼 노획한 적 전차가 부지기수로 많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멀쩡한 노획 전차를 버리기도 싫었던 이스라엘은 이들을 장갑차로 만들기로 발상의 전환을 하였던 것이다.

 

                       1개 분대가 탑승 할 수 있고 탑승상태로 전투 가능하게 개조되었는데,
                                   
노획무기 재사용의 모범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200여대의 T-54/55 전차에서 포탑을 제거하고 엔진과 변속장치를 교체한 후, 장갑을 증강하고 후방부에 출입구를 설치하여 RPG같은 대전차무기의 공격을 막아낼 육중한 IFV인 아크자리트가 탄생한 것이었다. 무게가 45톤에 육박하여 도하가 불가능하고 기동성이 떨어지는 면도 있으나 보다 안전하게 보병을 최전선까지 수송 할 수 있게 되었다. 한마디로 노획무기 재사용의 모범이라 할 만한 사례가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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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전의 시작을 알린 전차
 


 1945년 5월 7일, 프랑스 랭스(Rheims)에 있는 연합군사령부에서 독일의 항복조인식이 열렸다.
하지만 소련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독일을 겁박하여 다음날 베를린에서 그들의 주도 하에 별도의 항복조인식을 실시하였다.
이처럼 전쟁의 끝을 상징하는 행사는 새로운 대립과 갈등의 시작을 알리는 선전의 장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바로 냉전(Cold War)의 시작이었다.

 

전날 미-영 주도하에 벌어진 항복조인식에 반발한 소련은 1945년 5월8일 별도의 행사를 가졌다.

 

그리고 1945년 9월, 패전국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서 연합군의 전승기념 퍼레이드가 벌어졌다.
명목상으로는 승리를 자축하는 연합국들의 합동행사였지만 베를린을 점령한 소련군의 축제에 서방측 연합군 관계자가 옵서버로 참관한 것과 다름없었다.
비록 겉으로는 화기애애하였지만, 행사에 참가한 군의 고위 책임자들은 앞으로 서방측과 소련은 한 배를 탈 수 없는 상대임을 잘 알고 있었다.


승리 직후 함께 행진하는 미국과 소련의 병사들

 

사실 전쟁 내내 소련군과 칼을 섞었던 것은 독일이었으므로, 서방측과 소련은 군사적으로 낯선 상대였다.
따라서 이번 퍼레이드는 소련군의 위용을 미영의 관계자들이 가까이서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던 서방측 참관단은 브란덴부르크문을 지나 행진하던 소련의 전차대열을 보고 경악하였다.
사전에 정보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최신형 전차가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 전차의 모습을 보고 경악하였다.

 
 
현대 소련전차의 어머니라고도 불려진 JS-3(또는 IS-3) 중(重)전차가 세상에 선보인 것이었다.
IS는 스탈린의 이름(Iosif Stalin)을 딴 것인데, 때문에 흔히 소련의 IS중전차를 스탈린전차라고 부른다.
서방측 관계자들은 당시 서방측 전차들이 흉내 낼 수조차 없을 만큼 탁월한 JS-3의 외형만으로도 압도당하고 있었다.

 

외형에서부터 IS-3는 탁월하였다.



JS-3는 아름다운 곡선형태의 터렛(포탑)과 조종사가 위치하는 동체의 전면장갑을 V자 형태로 제작하여 피탄 면적을 최소화하였다.
더구나 최신 장갑형태인 공간장갑을 사용하여 방어력을 배가하였다.
이러한 장갑방식은 현대 전차들의 대부분이 기초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구조인데, 이것은 다시 말해 당대 기술수준을 뛰어넘는 구조였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런 방어에 적합한 구조는 1940년대 기술로 구현하기 힘든 것이었다.


 
당시에도 이런 구조가 상당히 뛰어난 형태임은 다들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이렇게 전차를 제작하는 것은 보통의 기술력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 전차를 보자마자 경악하였던 것이다.
JS-3는 장갑능력 뿐만 아니라 122mm 43구경포를 장비한 화력도 감히 비교상대가 없을 정도였다.
그 만큼 소련은 기술적으로 매우 진보한 이 중전차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다.

 

최신 전차에 대한 소련의 자부심은 하늘을 찔렀다.


 
JS-3는 기존에 사용하던 JS-2를 개량하여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말, 체르야빈스크(Chelyabinsk)에 있는 제100공장에서 생산을 시작하였다.
제2차 대전 참전기록이 없이 전후 행사에서 처음으로 목격되었던 이유에 대하여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굳이 다 이긴 전쟁에 투입하여 장차 대립할 미국에게 사전에 신기술을 누출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 정설로 굳어져 있다.

 

전쟁 전 트랙터를 생산하던 체르야빈스크 제100공장


 
소련에 명품 T-34중형(中型)전차가 있었음에도, 자신들이 원조한 전차로 전쟁을 치렀다고 거만하게 생각하고 있던 미국은 이 전차의 등장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으며 차세대 전차 개발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리고 JS-3는 소련의 중전차 시리즈 프로젝트의 효시인 T-10의 원조가 되었다.
한마디로 그날의 놀라운 등장은 동서냉전을 예고하는 상징적인 모습이었다.

 

공여 받은 미제 M-3전차로 전투를 하는 소련군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소련의 전차개발 사상이 중전차와 중형전차를 함께 제식화하여 기갑전력을 구성하였던 기존방식을 제2차 대전 후 폐기하고 T-54/55로 대표되는 중형전차 정책으로만 진행되면서 IS-3로 대표되는 소련의 중전차 개발 프로젝트는 중단되었다.
아마도 당시 서방측 전차가 소련 측 전차에 절대열세 때문에 굳이 중전차개발에까지 자원을 투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냉전 시기 소련을 대표한 T형 전차


 
사실 미국이 소련을 능가하는 전차를 개발하여 제식화한 것은 1980년부터 본격 배치된  M-1전차이후부터다.
이것은 T시리즈로 대변되는 소련의 전차를 월등히 능가하는 전차를 만드는데 그만큼 오랜 기간이 걸렸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실, 냉전기간 동안 미국을 포함한 서방측 스스로도 독일제 레오파드(Leopard)를 최고의 전차로 평가하였을 정도였다.

 

IS-3이 처음 등장한 1945년 9월의 행사는 냉전의 시작을 알리는 자리였다.


 
 혹자는 중동전 때 이스라엘이 사용하던 미제 전차가 아랍 국가들이 보유한 소련제 T시리즈 전차에 일방적으로 승리를 거두지 않았냐고 반문 할지 모르겠지만, 전차성능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사실 전술 및 훈련의 차이였다.
비록 IS-3는 소련의 정책 전환으로 전차개발사에 아주 잠시만 등장하는 전차가 되었지만 냉전의 개막을 알리는 무시무시한 발자국을 역사에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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