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평범한 이들이 만들어 나간다

 
 
외모가 뛰어난, 특히 호감을 불러일으킬 만큼 멋진 모습을 지닌 사람들은 일단 점수를 따고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지 극심한 취업난과 겹쳐서 성형이다 다이어트다 하고 남녀노소불문하고 난리 떠는 것도 아마 이런 이유도 한 몫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결코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지만 어느덧 엄연한 사회현상으로 자리 잡은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외모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그런데 "멀쩡하게 생긴 놈이"라는 말이 있다. 겉모습은 아무 문제도 없는데, 아니 오히려 남들보다 뛰어난데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짓이 영 딴판일 때 사용하는 관용어다.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 하는 것처럼 가장 먼저 외형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겉모습과 달리 정반대로 행동한다면 좋은 첫인상을 느꼈던 이들의 실망은 클 수밖에 없다.

 
                                 종종 멋진 이들이 실망시키는 행동을 범하고는 한다
 

군대가 멋있을 필요까지는 없으나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말처럼 멋있어서 나쁠 것도 없다. 군대가 멋있다는 것은 한편으로 군기가 확립되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당연히 패전한 군대에게서 멋을 발견할 수도 없다. 그런데 밀리터리 역사를 보면 '멀쩡하게 생긴 놈'이라는 관용어가 너무 잘 어울릴 만큼 진짜 멋있게 생긴 부대가 가장 나쁜 짓만 하고 다녔던 기록이 있다.

 
                    겉모습만으로는 가장 멋있게 생긴 부대라 해도 모자람이 없는 나치 친위대
 

히틀러의 사병들과 다름없던 나치 친위대(SS-Schutzstaffel)가 거기에 가장 걸 맞는 예다. 친위대는 정규군이 아닌 별개의 무력집단이었지만 전쟁말기에 최대 90만 명을 상회하는 병력으로 구성된 38개 사단을 운용하였을 만큼 거대한 군사조직이었다. 전사를 살펴보면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많은 친위대원들이 편협적인 나치의 이념에 광적이라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충실하였다.
 

            친위대원들이 나쁜 짓을 서슴지 않게 자행했던 것은 편협된 이념에 매몰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정신무장 덕분에 나름대로 전쟁에서 뛰어난 전투력을 보여주었던 예도 있었다. 하지만 게슈타포와 더불어 친위대는 나치의 조직 중 가장 극단적이고 폭력적이며 광신적인 활동으로 악명이 높았다. 이들은 게르만족 우월주의와 타 인종 증오 교육을 받았기에 점령지역의 유대인, 집시, 전쟁포로들을 대량 학살하는 주역이 되어 전후 전범재판에서 부인할 수 없는 범죄단체로 선언되었을 정도였다.

 
                           친위대에 의해 주민 전체가 잔인하게 학살당하고 폐허로 변한
                           프랑스의 소도시인 오라두르-쉬르-글란.
                           현재도 제2차 대전의 비극을 상징하는 사적지로 보존되고 있다.
 

이런 무시무시한 악행에 그 누구보다도 앞 장 섰지만, 멋있는 겉모습 때문에 나치의 선전매체에서 선전도구로 많이 등장하였다. 특히 절도 있는 열병식 모습은 당시 최전선의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보통의 독일 국민들에게 이들이 얼마나 나쁜 일만 저지르고 다니는 집단인지 상상도 못하게 하였을 정도였다. 한마디로 규정한다면 단지 멋진 옷을 입은 악마들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점령지역 유태인을 희롱하며 웃고 있는 친위대원
                                    겉만 멋진 악마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
 

친위대를 극단적인 예로 들었지만 사회생활 중에도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이들이 나쁜 짓을 하였던 사례를 발견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진정한 사람의 가치는 멋이 아니라 참된 인격에 의해서 확인될 수 있다. 따라서 처음 언급한 신언서판의 순서는 결코 사람의 인격을 가리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즉, 사람의 가치는 겉모습이 아닌 함께 부대끼고 겪어봐야 할 내면의 모습으로 판단하여야 한다.

 
                  진정한 멋은 겉모습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이다(사진-애니메이션 미녀와 야수)
 

언젠가부터 성형과 과도한 다이어트가 정상적인 것처럼 여겨지는 시대가 되었지만 결코 이것이 사람의 가치를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다. 잘생기고 멋있는 것이 항상 올바른 것은 아니고 그들이 나쁜 짓을 하면 오히려 더욱 실망스럽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해 준다. 세상은 평범하고 잘 생기지 못하지만 건강한 사고방식을 가진 보통의 수많은 사람들이 만들어 나간다. 이것은 불변의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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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령도가 끝이 아니었다
 
 

'서해 최북단'
흔히 신문보도나 방송 매체에서 백령도를 지칭할 때 쓰는 표현인데, 백령도가 군사분계선의 가장 서북쪽 끝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휴전이후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군사분계선은 육상을 가로지르는 DMZ(비무장지대)와 바다의 경계선인 NLL(북방한계선)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철책으로 명확히 구분된 DMZ와 달리 NLL은 서해 5도의 북쪽 해상을 연결하는 바다 위의 가상 선이므로 육안으로 구별하기는 힘들다.
 

                   현재 서해 최북단인 백령도 (천연비행장으로도 유명한 백령도의 사곶 해변)
 

그런데 우리가 좀 더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면 서해 최북단의 섬은 백령도가 아닐 수도 있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당시에 유엔군사령관 클라크(Mark Clark)장군은 서해 5도의 북쪽인 북위 37도 35부와 북한의 점령지인 옹진반도 남단의 북위 38도 03부 사이의 중간 해역을 연결하여 NLL을 선포하면서 그 이북에 아군이 점령하고 있던 섬에서 철수하였기 때문이다.

 
                                         북한이 도발의 빌미로 삼고자하는 NLL
 

이때 해병대가 적의 도발을 물리치고 강고하게 점령하고 있던 동서해의 여러 섬들을 부득이 포기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서해의 석도(席島)와 초도(椒島)는 그야말로 요충지 중의 요충지였다. 석도와 초도는 평안남도와 황해도를 가로지르는 대동강하구의 광량만에 위치한 섬들인데, 북한 서해의 최대항구인 진남포와는 30킬로미터의 거리이고 평양까지도 70킬로미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북한의 심장부를 겨냥하는 위치인 석도와 초도
 

최근 연평도에 MLRS가 배치된 것과 관련하여 서해 5도를 방어기지가 아닌 유사시에 적 후방을 타격하는 전략 거점으로 육성하면 북한이 상당히 곤혹스러워 할 것이라는 의견에서 알 수 있듯이, 만일 현재까지도 석도나 초도를 우리가 장악하고 이곳에 장거리 타격무기를 전진 배치한다면 북한이 느낄 압박감은 이루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한 것은 석도나 초도의 점령은 북한이 서해바다를 포기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NLL이 석도까지 연결되었다면 북한의 서해는 완전히 고립되는 형국이다
 

NLL을 초도와 석도까지 연결한다면 북한의 서해바다는 완전히 봉쇄되는 형국이다. 현재 서해 5도로 인하여 주요 항구인 해주가 제 기능을 십분 발휘하지 못하는 것만 보아도 충분히 유추 가능한 부분이다. 지난 천안함 사태로 인하여 북한군 잠수함대가 전개하고 있는 해군기지로 알려진 비파곶이 바로 석도 맞은편에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위치의 전략적 가치를 충분히 알 수 있다.
 

                                  북한의 잠수함기지인 비파곶이 바로 앞에 있을 만큼
                               석도와 초도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교동도를 거쳐 백령도 점령을 완수한 해병대 독립 제41중대가 1951년 5월 7일 기습 상륙하여 석도와 초도를 장악하자 북한은 경악하였다. 북한이 얼마나 위기의식을 느꼈는지는 한 개 중대가 점령한 석도와 초도를 경계하기 위해 무려 2개 사단을 맞은편 대안에 이동 전개 시켰던 사례에서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다. 당연히 섬을 재 장악하기 위한 북한의 도발은 집요하였고 그 과정에서 철수 전까지 수많은 격전이 벌어졌다.
 

                           1951년 12월 21일 병력교대를 위해 초도에 상륙하는 해병대원
 

해병대는 압도적인 해군의 화력 지원 하에 적의 접근을 거부시키는데 성공하였지만, 소수의 부대가 적진 한가운데에 동 떨어져 벌이는 작전은 항상 많은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었다. 예를 들어 1952년 3월에 석도 앞의 작은 무인도인 호도에서 벌어진 격전에서 악천후로 인하여 외부지원이 끈긴 해병대 1개 소대가 5배나 많은 적의 공격을 끝내 격퇴시켰지만 소대원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실종당하는 참사를 겪기도 하였다. 이처럼 해병대는 피와 눈물로 서해의 요충지를 지켜내었다.
 
 
                            서해의 요충지를 소수의 해병대원들은 피와 눈물로 사수하였다
                             (석도에서 교전 중 부상당한 병사를 후방으로 이송하는 모습)
 

하지만 앞에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휴전협정 체결 후 유엔군은 원격지라 판단한 석도와 초도를 전격 포기하였다. 따라서 우리가 서해 5도에만 준하여 NLL을 설정한 것은 북한에게 커다란 은혜를 베푼 것과 다름없었고 사실 북한도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못하고 전후 20년간 엄중하게 이를 지켜왔다. 하지만 최근 방자하게도 이를 망각하고 도발을 일삼는 것을 보면 석도와 초도를 너무 쉽게 포기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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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해 5도를 사수한 소녀시대
 
 
1951년 4월 2일, 해병대 독립 제41중대는 강화도 서북단에 위치한 교동도를 기습 점거하였다. 당시 피아가 한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중이었기 때문에 강화도, 황해도 연백, 경기도 개풍을 동시에 감제할 수 있는 교동도를 확보하였다는 것은 한강 하구를 우리의 의도대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찬란했던 서해 5도 확보 작전의 시작이기도 하였다.

 
                                             교동도는 지금도 전략 요충지다
 

아군의 점령 전까지 교동도는 군사적으로 무주공산이었지만 강 건너 연백에는 대규모의 북한군 8사단 2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이들은 군사적으로 교동도를 점령하는 것이 불가능하더라도 순순히 내어주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지난 연평도 포격 사건처럼 교동도에 수시로 포격을 가하여 위협을 가하는 것과 동시에 간첩을 침투시켜 후방을 교란하는 양동 작전을 구사하였다.

 
                                   북한은 교동도에 대한 다양한 공세를 지속하였다
 

원래 작은 교동도에는 2천여 명의 원주민이 살고 있었지만 전쟁 통에 외지에서 유입된 피난민들로 인하여 거주인구가 1만을 상회하면서 간첩들이 활동하기에 좋은 여건이 조성된 상태였다. 따라서 제41중대는 교동도를 선점한 후, 진지 구축 같은 군사작전 외에도 적극적인 대민교육활동을 벌여 전선 바로 뒤를 혼란시키려는 북한군의 기도를 일거에 제압하였다.

 
                          피난민들이 몰려든 틈을 이용한 북한의 후방 작전은 집요하였다
 

이와 관련한 재미있는 한 가지 일화가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교동도를 점령한 독립 제41중대는 군목이었던 신성국 소위가 정훈조를 조직하여 간첩 색출과 더불어 거주민들을 상대로 한 방첩교육 같은 민사작전을 벌였다. 그런데 병력이 부족하다 보니 현지에 거주하던 많은 민간인들이 부대활동에 자진 참여하여 해병대의 활동을 적극 도왔고 그중에는 5명의 여고생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인천상륙작전 당시에 후방작전을 펼치는 해병대의 모습 (사진-Getty Images)
 

원래 교동도에 고등학교가 없기 때문에 그녀들이 진짜 여고생이었는지 아니면 학정을 피해 이북에서 피난 온 학생들이었는지는 모르지만, 포탄이 날아다니는 최전선 일대에서 중요한 활동을 벌이기에는 너무나 어린 소녀들이었음은 확실하다. 따라서 해병대는 위험을 경고하며 이들의 활동을 만류하였는데, 소녀들의 결심을 바꿀 수 없어 결국 민간인 계도 활동에 투입하였다.

 
                        전쟁 전 옹진반도에 주둔한 국군 제17연대를 위문한 여고생들의 모습
                        서해 5도에서 활약한 여고생들도 이와 비슷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사실 오늘날과 달리 당시에 여고생이라면 상당한 인텔리 계층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한마디로 지식과 미모를 겸비한 여고생들의 적극적인 정훈작전이 후방 대민계몽에 상당히 효과적이었던 것으로 해병대 전사에는 소개되고 있다. 굳이 언급하자면 그녀들을 당대의 소녀시대라 칭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소녀들의 활동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당시 여고생들은 상당한 지식인 계층이었다. (휴전 반대 데모를 하던 당시의 여고생)
 

제41중대는 다음 목표인 백령도를 점거할 예정이었고 당연히 소녀들의 동행을 거부하였다. 그러자 여고생들이 몇 날을 울고불고 애원하였고, 결국 무지막지한 떼쓰기 전술로 귀신 잡는 해병대를 처참하게 굴복시킨(?) 여고생들은 백령도까지 동행하여 멋진 후방 작전을 계속하였다. 해병대 전사를 살펴보면 그녀들은 이후 해병대와 함께 대동강 하구의 석도까지 침투하여 후방작전에 종사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란 속에 활약한 수많은 소녀시대가 대한민국을 수호하였다 (최초의 여성 해병인 문인순 여사)
 

아쉽게도 현재 여고생들의 정확한 신상이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분명한 것은 그녀들도 서해 도서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숨어있는 해병대원들임에 틀림없다는 점이다. 전란 속에 활약한 그녀들의 노고로 지켜낸 서해 5도와 NLL은 오늘날 대한민국을 지탱하는 힘이 되었다. 해병대의 서해 5도 사수에 기여를 아끼지 않은 당대의 소녀시대에게 진심으로 존경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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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열혈국방입니다.^^  오늘은 6.25 60주년을 맞은 2010년 한해동안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진행한 '6.25전사자 유해발굴사업'에 관해 전해드려요.




6·25전쟁 60주년이기도 한 올해가 어느덧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2010년 6·25전사자 유해발굴도 11월30일 마무리되었습니다.

   1. 2010년 발굴실적은?

2010년 한 해 동안 전국 55개 지역 산야에서 유해발굴감식단과 지역부대 장병 10만여 명이 함께 땀흘려 1,331위의 호국용사를 조국의 품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2. 2010년 전사자 신원확인

발굴된 유해와 유가족의 DNA검사로 5위의 호국용사 신원을 확인해 2000년 이후 현재까지 60명을 국립현충원에 모실 수 있었습니다.

60년전 전쟁 당시 돌아오지 못한 전사자를 찾기 위해 많은 유가족들이 DNA샘플 채취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요, 이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혈육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더 많은 유가족들의 참여가 절실히 요구되는 실정입니다. 주변의 전사자 유가족에 대한 참여 홍보를 당부드립니다.    ※ 문의 : 1577 - 5625(오! 6·25)

2010년의 사업은 마무리 됐지만, 내년에도 더 많은 전사자 유해를 발굴하고 신원을 확인하여 조국과 가족의 품으로 모실 수 있도록 더욱 활발히 추진할 것입니다. 지속적인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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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LL 그리고 해병대

 
 
금번에 발생한 연평도 포격사건으로 인하여 NLL(북방한계선)이 국가 방위에 엄청난 역할을 하고 있음이 다시 한 번 부각되었다. 지리적 여건으로 말미암아 NLL에 배치된 우리 해병대의 전력이 북한군에 비해 절대 열세인 사실이 우려스럽게 다가왔지만, 그것을 역으로 생각하면 아군의 10배가 넘는 북한 4군단을 DMZ으로 전개되지 못하도록 잡아놓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리적 여건으로 말미암아 NLL의 아군이 열세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대규모의 북한군을 
             잡아놓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림-연합뉴스)

 
서해바다에 이렇게 전략적으로 놀라운 군사분계선이 위치하게 된 것은 백령, 대청, 소청, 연평, 우도로 점점이 흩어져 있는 서해 5도를 휴전당시 아군이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북한이 무효화를 주장하면서 NLL 자체를 인정하려 들지 않지만 막상 NLL을 선포하였을 때 북한은 가만히 있었다. 그러했던 이유는 한마디로 그것이 그들에게 유리하였기 때문이었다.

 
                               서해 최북단 백령도에서 바라본 장산곶 (사진-연합뉴스)
 

1953년 휴전직후 유엔군사령부는 휴전 당시에 별도의 논의가 없었던 해상 분계선과 관련하여 NLL을 선포하고 즉시 북한에 통보하였다. 그것은 NLL을 넘어서 우리 해군이 작전을 펼치지 않겠다는 의미였는데, 북한군이 이곳 아래로 내려오지 말라는 경고의 뜻보다 우리가 이곳을 넘어 북쪽으로 가지 않겠다는 통보에 가까웠다.

 
                        휴전협정 조인 당시의 모습 그런데 해상 경계에 대한 논의가 없었다
 

현재 NLL은 북한의 군사적 도발을 억제하는 최전선이 되었지만, 휴전 당시에는 오히려 북한이 얻는 이익이 컸다. 바로 전쟁 내내 그들을 공포로 몰아넣으며 괴롭혀온 유엔군 해군의 공격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즉 유엔군 해군이 알아서 어느 선 이상으로 올라오지 않겠다고 스스로 선언하였으니 너무 반가웠던 것이었다. 그만큼 그들은 바다를 심정적으로 포기한 상태였다.

 
                        한국전쟁 당시 적진을 향해 날리는 전함 미주리의 가공할 포격 장면
 

NLL 설정 당시에 아군이 장악하고 있는 도서를 연결하여 바다위에 분계선을 긋는 것은 너무 당연하였다. 국경이 아닌 군사분계선은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있는 곳을 연결하는 것이 불문율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NLL을 다행스럽게 생각한 북한은 휴전 직후에 어떠한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그런데 1973년 이후부터 북한은 서해 5도 주변수역을 연해라고 주장하면서 긴장을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제1차 연평해전 당시의 긴박한 모습
 

계속적인 군비증강으로 우리를 앞섰다고 판단한 북한은 이때부터 노골적인 도발야욕을 표출하였다. 당시는 월남전이 격화되어 가고 있었고 더불어 한반도 방위의 한 축을 담당하던 미 7사단이 철수하는 등 주변정세가 좋지 않게 돌아가던 중이었다. 더불어 오일쇼크에 따른 극심한 경제 침체도 우리를 어렵게 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침략의 명분을 잡기위해 NLL에 대한 북한의 트집이 시작되었던 것이었다.

 
                             철수 전 미 제7사단이 주둔하였던 레드크라우드 기지 정문
 

지금은 그때와 안보환경이 많이 바뀌었지만 서해에서 벌어진 여러 차례의 교전이나 연평도 포격처럼 북한이 아직도 NLL에 목을 매는 이유는 NLL의 철폐보다 긴장감을 조성하여 북한내부의 동요를 단속하려는 목적과 동시에 대한민국의 내부분열을 노리기 때문이다. 사실 처음 언급한 것처럼 오래되었지만 생소했던 단어인 NLL이 최근 들어 누구나 알게 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해병대 제6여단과 연평부대의 선배인 독립 41중대를 포함한 도서방어부대기
 

이렇게 현재도 우리 안보를 굳건히 지키는 최전선인 NLL이 성립될 수 있도록 서해 5도를 확보하게 된 것은 전쟁이라는 혼란한 상황 중에도 그 전략적 위치를 미리 인지하고 전광석화 같은 도서 확보작전을 펼쳤던 해병대 독립 41중대를 비롯한 도서방어부대의 분투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곳을 이제는 후배들인 해병대 제6여단과 연평부대가 굳건히 지키고 있다. 변함없는 당신들의 투혼에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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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들이 있기에
 
 

북한의 연평도 급습 당시의 생생한 모습을 담은 몇 장의 사진들이 공개 되었다. 특히 포진지가 적의 피격으로 불타는 위급한 순간임에도 침착하게 K-9자주포를 전개하는 해병대원들의 처절한 사투와 철모가 불타고 얼굴에 화상을 입는 와중에도 맡은바 임무를 다한 임준영 상병의 모습은 보는 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어 주었다.

 
                                   철모가 불타는 순간에도 최선을 다한 임준영 상병
 

그러한 연평부대의 처절했던 11월 23일 전투의 모습에서 지난 60년 전 기습남침을 감행한 압도적인 북괴군에 맞서며 살신성인의 분투를 보여 주었던 제18포병대대의 모습이 떠올랐다. 시대와 환경이 다르지만 이번 해병대 연평부대의 투혼은 지난 한국전쟁 당시 제8사단 18포병대대(현 제2사단 예하)의 모습을 반추하는데 결코 모자람이 없고 생각되어 소개한다.

 
                                        적의 기습으로 탄흔이 가득한 포진지의 모습
 

1950년 6월 27일 새벽 4시, 그동안 국군 제8사단의 강력한 저항으로 진격이 지체되었던 북한군은 5배나 많은 전력을 앞세워 공격을 재개하였고 결국 국군 제5사단 10연대가 담당하던 연곡천 방어선을 돌파하였다. 이때 10연대의 급작스런 붕괴로 말미암아 최전방 배후까지 올라와 화력 지원을 하던 제18포병대대의 포진지도 동시에 적의 전면에 노출되는 위기에 빠졌다.
 

                                      창군 초기 국군의 유일 중화기였던 M-3곡사포
 

만일 이 상태에서 무작정 후퇴한다면 이동속도가 느린 포병대대 전체가 적에게 추월당하여 포위될 가능성이 농후하였다. 따라서 포병대대는 정면에서 교전하여 적의 진격속도를 누그러뜨리면서 후방으로 이동하기로 하였다. 장병들의 생사도 물론 중요하지만 아군의 유일중화기와 다름없는 M-3곡사포를 최대한 보존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이처럼 단 한 문의 포도 쉽게 포기할 수 없었을 만큼 한국전쟁 초기에 우리 군의 전력은 부족하였다.

 
                               포병대대는 적을 가시권까지 끌어들여 직접 타격하였다
 

포병대대원들은 옥쇄(玉碎)의 각오로 인식표를 땅에 묻고 포병진지 전방 100미터까지 적들이 다가오도록 기다린 후 수평으로 포신을 낮추어 직접 타격하여 적을 당황하게 만들었고 포진지로 난입한 적과 백병전을 치루며 포들을 이동시켰다. 이러한 급박한 와중에도 2문의 포가 밭에 빠져 회수할 수 없자 적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조치하고 난 후 후퇴하였을 만큼 대대원들은 침착하였다.

 
                                           제18포병대대 순국 3용사 추모행사
 

이때 2번 포차 운전병 심우택 이병은 포 폐쇄기를 안은 채 산화했고, 통신소대 최서종 중사는 와이어 드럼을 회수하기 위해 적진으로 뛰어 들어갔다 돌아오지 못했다. 또한 관측반 한명화 하사는 끝까지 관측소에 남아 임무를 수행하다 순국했다. 이처럼 적에게 포위 될 위기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제18포병대대 병사들이 보여준 이러한 분전은 전쟁 당일 강릉을 점령하려던 북한의 계획을 무려 사흘간이나 지체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힘이 되었다.

 
                                          그대들의 분투에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이번 적의 연평도 도발에서 압도적인 적 해안포 세력에 비해 불리한 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연평부대가 보여준 놀라운 사투는 밤하늘의 별처럼 국군의 자존심을 세워 준 모습이 아닐까도 생각되며 60년 전 제18포병대대가 보여준 용전과 비교하여 결코 모자람이 없다. 선배들 못지않은 투혼을 보여준 연평부대원들의 노고에 감사의 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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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7일(토) 오전, 국방부 브리핑룸에서는 최근 논란이 되고있는 '방사포탄(로켓트 탄) 추진체 1번' 과 관련하여 합참공보실의 브리핑이 있었습니다.

 

                                    합참공보실 주관으로 브리핑을 진행하였습니다.


                                         금번 발견된 '북한 방사포탄 추진체 꼬리날개 부분'


이것(위의 사진)이 바로! 연평부대 EOD(폭발물 처리반)반장이 발견,  연평도를 공격한 '북한 방사포탄 추진체' 입니다. 정말 동그라미 '1'이 있군요! 날개부분에는 동그라미 5번 등 숫자들이 있고요.

위의 방사포탄과 관련하여 국방부조사본부에서는 현재 계속하여 조사를 진행 중입니다.


         아래가운데 '1번'은 천안함 어뢰에서 발견된 것, 아래오른쪽 '1'번은 방사포탄 추진체에서 발견


지금까지의 국방부조사본부의 조사 결과, 북한은 포탄의 부품분류를 위해 숫자를 사용한다는 것이 거듭 확인되었습니다.

천안함 피격사건에 사용된 북한어뢰는 청색유성매직으로 '1번'이라 씌여 있었으며, 이번 연평도를 공격한 122mm 방사포 노즐조립체 상의 1번도 색깔만 다른(검정색) 유성매직으로 수기 작성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날개부분에 있는 동그라미 5,6번은 기계로 찍은 숫자로 보고 있습니다. 


                                     조사결과를 브리핑하는 국방부조사본부 관계자

이번 발견된 포탄은 '열압력탄'이 아닌 것으로 보이며, 북한이 그보다 더 위력을 키워 제조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TOD등에 알루미늄 등을 섞으면 폭발력이 커지는데, 그런 것이 아닌가 조사를 계속 진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백린'도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국방부 조사본부'에서는 계속하여 연평도를 공격한 방사포탄 등을 조사하고 있으니, 네티즌들을 비롯한 국민들께서는 현재의 어려움을 증폭시킬 수 있는 논란은 가급적 자제하여 주셨으면 하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 열혈국방 생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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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3일 연평도에 대한 북한의 무력도발이 있었으나, 우리군은 계획대로 한미 '연합군사훈련'을 실시할 것입니다.  


'한미 연합훈련'에 참가할 미 항공모함 조지워싱턴 함(가운데)이 지난 7.26일 ‘불굴의 의지’ 연합훈련의 일환으로 독도함(1만4000톤급), 한국형 구축함(4500톤급), 미 이지스 구축함 등과 함께 항진하는 모습



우리군은 미국과의 안보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11월 28일~12월 1일 '연합군사훈련'을 실시하고 훈련 강도를 더욱 높이기로 하였습니다.


김태영 국방부장관은, 미 국방장관과 전화를 통해 '북한의 연평도 포격도발'은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되었던 의도적 도발로 평가하고 현상황 평가와 대책을 논의하였으며,

11월 23일 한민구 합참의장은, 월터 샤프 연합사령관과 화상회의를 갖고 북한의 추가 도발 방지를 위한 한미 간 공조체제를 논의하였습니다.

오는 11월 28일~12월1일, 서해상에서 미국 항공모함 조지워싱턴 함(9만7000톤급)이 참가한 가운데 연합훈련이 실시될 것입이다.

핵잠수함을 제외한 한측 구축함 · 초계함ㆍ호위함 · 군수지원함 · 대잠항공기 등과, 미측 순양함 카우펜스 함(CG62·9600톤급), 구축함 샤일로 함(DDG67ㆍ9750톤급)을 비롯한 스테담 함(DDG63), 피츠제럴드 함(DDG62) 등이 참가할 것입니다. 


방어적 성격으로 실시되는 이번훈련은 북한의 해안포 도발 이전에 이미 계획되었던 것으로, 억제력 강화와 역내 안정을 증진시킬 것이며 양국군의 상호운용성 향상과 한미동맹 결의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금번 한미 연합훈련 일정은, 중국에 이미 통보하였으며, 북한에도 통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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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의 연평도에 대한 무자비한 포사격에 대응하던 중, 우리 해병 2명이 전사하였습니다.




故 서정우 하사(해병 1088기).... 마지막 병장휴가를 위해 육지로 향하던 중, 포탄 낙하상황이 북의 기습포격임을 듣고 전투에 임하기위해 부대에 복귀하던 중 포탄 피해를 입고 전사하였습니다. 
故 서정우 하사는 연평부대 중화기 중대의 공용화기 사수로서, 다양한 공용화기를 운용할 수 있는 최고의 전투력을 지닌 해병이었습니다.

 
전사한 故 문광욱 일병(해병 1124기)은 연평부대 본부 중대 수송반에 배치되어 서북도서 수호에 최선을 다하며 신병답지 않은 능숙한 임무 수행으로 훌륭한 해병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고 합니다. 
故 문광욱 일병은, 사고 당일 포병 사격훈련장 임무를 수행하던 중 기습 포격 속에서 그 누구보다도 먼저 달려나가 전투준비를 하던 중 무자비한 북한군의 포격에 파편상을 입어 전사하였습니다.



 
갑작스런 포탄 피격 속에, 연평부대원 절반 이상이 직접 나서서 주민들의 대피를 도왔으며 주민들중 잔류인원을 확인하는 등 군인본분을 다하여 피해를 최소화하였습니다. 피해를 입은 연평전투 부상자들은 후송되어 국군수도통합 병원에서 치료 중에 있으며, 해병대 사령부는 전사자들에 대하여 최대한의 예우를 갖추어 장례절차를 진행하고 있으며 화랑무공훈장을 추서할 예정입니다.




현재 해병대사령부는 해병대사령관 주관 협조회의를 통해 연평도 상황을 예의주시하면서 연평도 내 장병과 주민들에 대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대피호 피신 주민들을 위해서는 모포 400장, 컵라면 2,500개, 식수, 전투식량, 건빵, 음료수 등을 지원하였으며 언제 어디서나 출동 가능한 상륙군의 특징을 살려 연평도 피해복구를 위해 신속하게 대응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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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으로 불참한 제1회 대회
 
 
 
1948년 7월 29일 제2차 대전에서 입은 피해가 완전히 복구되지 않은 영국의 런던에서 제14회 올림픽이 개최되었다. 지난 1936년 제11회 베를린 대회 이후 무려 12년 만에 부활한 평화의 제전이었다. 이 대회는 전후의 시대상을 반영하듯 독일, 일본과 같은 패전국들의 참가가 불허되었던 반면, 우후죽순처럼 탄생한 많은 신생 독립국들이 올림픽 무대에 새롭게 얼굴을 내밀었다.

 
             제14회 런던 올림픽에서 대한민국 최초로 메달을 획득한 김성집 선생
 

그러한 국가들 중에는 대한민국도 있었는데, 엄밀히 말해 대한민국은 폐막식 다음날인 1948년 8월 15일에 정부가 수립하였으므로 공식적으로는 아직 국가의 실체가 존재하기 전이었다. 하지만 그런 형식적인 문제는 차치하고 오랜 압제로부터 해방을 맞은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은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세계무대를 내달렸다.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웠다는 이유만으로 고초를 겪었던 시절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런던 올림픽에서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경기에 임하는 축구 국가대표
 

바로 그 대회에서 열강의 식민지로 수많은 고초를 겪었던 아시아의 신생 독립국들은 지역 내의 단결을 목적으로 하는 별도의 지역제전을 만들기로 의견을 모았다. 인도의 IOC위원인 손디(Guru Dutt Sondhi)가 제창한 의견에 대한민국, 인도, 필리핀, 버마(현 미얀마), 중국(현 대만), 실론(현 스리랑카)의 6개국이 동의하였고 이듬해 창설된 아시안게임연맹(AGF)이 제1회 대회를 1950년 인도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제1회 아시안게임 엠블램

 
이것이 바로 올림픽 중간 해에 4년마다 개최되는 아시안게임(Asian Games)이다. 이렇게 작지만 원대한 꿈을 가지고 시작한 아시안게임은 어느덧 중국의 광저우에서 제16회 대회를 개최하게 되었을 만큼 연륜이 쌓였다. 이번 대회에는 45개국의 9,700여명의 선수들이 참여하여 모두 42개 경기의 476개 세부종목에서 열띤 경쟁을 펼치는 거대한 축제의 장으로 변하였는데, 이것은 종합경기대회로는 올림픽 다음가는 거대한 규모다.

 
       제16회 광저우 아시안게임 개막식에 입장하는 대한민국 선수단 (사진-Mydaily)
 

우리나라 선수단은 대회 초반부터 다양한 종목에서 골고루 선전을 펼치며 국민들을 즐겁게 하여 주고 있다. 중국의 독주가 두드러지지만 대한민국은 아시안게임에서 항상 선두권에 드는 경기력을 유지하고 있는데, 특히 지난 1994년 일본의 히로시마에서 개최 된 제12회 대회를 제외하고는 제10대회 이후 계속하여 전통의 체육 강국인 일본보다 앞선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다.

 
          놀라운 경기력을 선보여 국민에게 기쁨을 선사한 박태환 선수 (사진-Osen)
 

이처럼 항상 대회의 주역으로 커다란 활약을 보여주는 대한민국은 아시안게임의 창설에부터 적극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2번의 대회를 개최(1986년 서울, 2002년 부산)하였고 제17회 차기대회(2014년 인천)도 개최할 예정으로 있는 핵심 중의 핵심국가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그 의의가 컸던 제1회 대회에 우리나라가 참석하지 못한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아시안게임의 주역인 우리나라는 전쟁으로 제1회 대회에 참석할 수 없었다
.
 

원래 제1회 대회는 1950년 인도의 뉴델리에서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준비가 부족하여 1년이 연기된 1951년 3월 4일에 열렸다. 11개에서 온 489명의 선수들이 6개 경기의 57개 세부종목에서 열띤 경쟁을 벌였는데 올해 대회와 비교하면 상당히 소박한 대회였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대회 창설의 주역이었던 대한민국은 전쟁으로 말미암아 참가할 수 없었다. 당시는 1.4후퇴 이후 공방전이 치열하게 벌어졌던 시기라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오늘의 환호와 감격 속에서도 과거의 아픔을 잊지 말아야한다
 

신생독립국으로 지역 내 평화구현에 적극적으로 앞장서려고 하였고 이를 적극 추구하고자 노력한 대한민국이 막상 침략을 당하여 제1회 대회에 불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진정 가슴 아픈 과거라 아니할 수 없다. 어느덧 오랜 시간이 흘러 오늘의 환호와 감격 뒤에서 이런 흔적을 찾기는 힘든 시절이 되었지만 잊지 말고 기억하여야 할 분명한 역사가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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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뒤로 돌아 공격한다.

 
 
G-20정상회담 때문에 자세히 보도되지는 않았지만, 지난 11월 10일 중요한 행사가 전쟁기념관에서 벌어졌다. 6.25전쟁 당시에 벌어진 가장 극적이었던 전투 중 하나였던 장진호(長津湖)전투 제60주년 기념행사였다. 함경남도의 장진호에서 함흥에 이르는 첩첩산중의 가도에서 벌어진 이 전투는 세계전투사에서 전설로 전해질 만큼 기념비적인 전투였다.

 
                                                장진호전투 60주년 기념식
 

전투는 1950년 10월 말부터 장진호일대로 진격하던 미 해병 제1사단이 험준한 산악 사이에 매복해 있던 약 10배 가까이 많은 중공군 제9병단이 포위당하면서 벌어졌다. 전투 중  영하 30도까지 떨어지는 혹한의 날씨가 연일 계속되었는데, 이런 악천후에서 미군이 전투를 치러본 것은 처음이었고 이후 이것은 미군 당국이 동계전투연구에 대대적으로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
 

                                                치열했던 장진호전투의 모습
 

백과사전처럼 전투결과만을 간략히 기술한 단편적인 내용에만 따르면 장진호전투를 중공군의 승리, 미군의 패배라고 기록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지리적 점령만을 승패의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비록 미군은 피해를 많이 입었지만 승자로 기록된 중공군의 피해는 참혹할 정도였다. 미군은 전사 393명, 부상 2,152명, 실종 76명의 피해를 입었지만 반면 중공군은 5만 여명이 전사상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포위당한 이들에게 찾아 와 스스로 항복한 중공군 포로들
 

흔히 1.4후퇴로 잘 알려진 중공군의 제3차 공세에 이처럼 처참하게 무너진 제9병단이 동원될 수 없었다. 때문에 이 전투로 인하여 미군이 함경도 일대에서 후퇴하게 되었으므로 전략적으로 중공군이 승리한 것은 맞는데, 중공군이 전투력을 상실할 만큼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기 때문에 전술적으로는 미군의 대승으로 언급되고 있다. 따라서 미군, 특히 이 전투의 주역이었던 미 해병 제1사단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장진호전투 당시의 미 해병 제1사단
 

미 해병 제1사단의 자랑이 된 이 전투에서 사단장이던 스미스(Oliver P. Smith) 소장(훗날 대장으로 예편)의 리더십은 상당히 유명한데, 오늘날도 그가 보여준 지휘능력은 상당한 반면교사가 된다.


                                          장진호 전투를 승리로 이끈 올리버 미 제1해병사단장
 

우선 올리버는 무리한 진격을 삼가 했다. 그는 아군이 대공세에 나섰던 1950년 10월 북진당시에 UN군부대 중 거의 유일하게 배후의 안전을 확보하고 난 후 사단을 이동시키는 신중함을 보였다. 비록 진출은 더딜 수밖에 없었지만 이러한 철저한 준비는 중공군의 출몰이후 대책 없이 무너져 내린 여타부대들과 달리 후퇴시기에도 미 해병 제1사단이 놀라운 전투력을 유지시켜 주었던 힘이 되었다.
 
                                     험로를 통하여 철수하는 미 제1해병사단 병사들
 

다음으로 그는 위기의 순간에도 전부를 구해내는 용기를 보였다. 애당초 안전한 철수가 불가능해 보이자 상부로부터 병력만이라도 항공편으로 철수시키라는 제의가 들어왔다. 하지만 스미스는 본대철수를 위해 비행장을 확보하려면 일부 병력이 적지에 낙오될 수 있고 또한  장비가 중공군에 넘어가면 나중에 더 큰 위험이 되므로 그는 4,300명의 부상자만 항공편으로 철수시키기로 결정하고 적과 교전하며 육로로 탈출하는 길을 택하였다.

 
                                           전우의 시신을 수습하여 탈출하는 모습
 

해병대는 하나이며 결코 좌절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전 예하장병에게 전하여 사기를 북돋은 후 전 병력과 장비는 물론 전사자의 시신까지 수거하여 적진을 돌파하여 탈출하였다. 당시 그가 부대원들에게 "우리는 철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적을 격멸하고 후방을 향하여 새롭게 공격하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훈시를 내렸고 이것은 전설이 되었다.
 

                                      기념식에 참석한 역전의 용사들 (사진-세계일보)
 

이처럼 신념 있는 지휘관의 용기와 이를 믿는 부대원들이 함께 이루어낸 장진호전투는 비록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전투였다. 따라서 말년에 접어든 많은 참전 용사들이 노구를 이끌고 행사에 방문하였을 만큼 장진호전투 참전용사들이 갖고 있는 자부심은 그야말로 대단하다. 가장 무섭고 어려웠던 시기에 보여주었던 그들의 진정한 용기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많은 교훈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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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항미사일에 관한 작은 이야기
 
 
 

제2차 대전 말에 등장하여 세상을 놀라게 한 대표적인 비밀무기 중에 이른바 독일의 유명한 V병기가 있다. 그중 독일 공군이 운용하였다던 V-1은 오늘날 대표적인 장거리 정밀 타격 무기인 순항미사일(Cruise Missile)의 원조로 손꼽는데, 특히 초기의 공중발사 순항미사일(ALCM)인 AGM-86C를 보면 V-1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다.
 

                        지금 봐도 그 모습이 어설프지 않은 V-1과 이를 요격하는 스핏화이어
 

V-1은 펄스제트(Pulse-Jet) 추진으로 무유도 비행을 하여 적진을 타격하는 무인자폭비행기에 가까운 형태였는데, 오늘날 순항미사일과 비교한다면 정밀타격능력, 비행능력 등에서 평면적으로 비교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당시 연합군을 공포로 몰아넣는데 결코 부족함이 없었다. 호되게 당한 영국도 여러 번의 실패 끝에 스핏화이어로 근접 요격하는 방법을 겨우 터득 하였을 정도였다.

 
                                     V-1은 사출기와 이륙난간을 이용하여 발사되었다
 

V-1은 미리 제작된 거대한 사출기를 겸한 이륙난간을 이용하여 발사하는 체계여서 사실 운용하는 입장에서 볼 때는 상당히 제약사항이 많았던 무기였다. 독일 공군 또한 V-1을 보다 쉽고 편리하게 발사가 가능하게끔 많은 시도를 하였으나 전쟁이 종결되어 이를 실현하지는 못하였다. 전후에 V-1을 노획한 미국은 비행기에 장착하여 공중발사실험을 하는 등, 좀 더 정밀한 타격무기로 V-1을 개량하기 위해 힘썼다.

 
                                     전후 노획한 V-1을 공중발사 실험하는 모습
 

이런 시험결과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이른바 외과수술폭격(Surgical Strike)의 표본이라 불리는 토마호크(Tomahawk)순항미사일이 나타난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자체개발한 현무3 순항미사일을 보유하고 있고 그 외에도 많은 군사강국들이 다양한 종류의 순항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는데 그 기술적 기반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독일의 V-1과 만나게 된다.

 
                                       오늘날 순항미사일의 대명사가 된 토마호크
 

그런데 독일이 오늘날 순항미사일의 개념에 대해서 생각하였던 것은 V-1 훨씬 이전이었다. 이미 독일은 제1차 대전에 당시에 다음 사진과 같은 공중투하폭탄을 개발하였다. 무인비행기에 폭탄을 장착하여 적진을 습격하는 단순한 형태의 비행체였는데 실전에 적용하였는지의 여부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부에서는 이를 최초의 순항 미사일로 볼 정도다.
 

                              제1차 대전 당시 프랑스 신문에 보도 된 독일의 무인 자폭기
 

물론 당시의 기술로 무인자폭기가 원격제어나 자동제어를 통한 정밀한 순항능력을 갖추기는 어려웠겠지만 이런 이론적 바탕이 있었기 때문에 독일은 이후 V-1을 개발 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최초의 순항미사일이라는 명예를 가지고 있는 V-1도 어느 날 갑자기 툭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이처럼 오래전부터 꾸준히 연구하여온 기술력이 집합된 결과였다.

 
                    태평양 전쟁에서 광기에 사로잡힌 이들의 인간순항미사일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런데 전사에는 마구잡이 순항미사일을 등장하였던 경우가 있었다. 바로 가미카제(神風)라고 불리던 일본의 자폭기다. 순전히 희생을 전제로 한 인간의 조종능력에 의존하여 목표까지 날아가는 단순한(?)구조였는데 연합군에게 많은 공포를 유발하였다. 사실 공포가 컸던 이유는 그 폭발력보다 광기에 사로잡힌 인간들의 모습 때문이었다.

 
                              지금도 반복되는 자폭테러를 보면 가미카제가 연상된다
 

그런데 이것을 단순히 과거의 일만으로 치부하기는 힘든 것 같다. 미사일이건 비행체이건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구 어디에서인가 계속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느덧 일상화 된 무차별 자폭 테러를 보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인간’이라는 격언이 맞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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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혈국방'입니다. ^^ 오늘은 특별히 파워블로거 '울프독'님께서 제공해주신 글을 포스팅합니다.



11월 10일 서울 용산 전쟁 기념관에서 60년전
장진호 전투를 기념하고  미 참전 용사들을 환영하는 행사가 있었다.

한미 양국의 많은 내빈들이 참석했었고 양국군
의장대와 군악대가 출연하였다.

이어서 열린 오찬에는  김태영 국방부 장관과
월터 샤프 주한 유엔군 사령관이 축사를 했다.


                                                         한[좌측] 미[우측] 해병대 의장대

 

       
                                                                참석한 한미 양국의 관중



                                                  평화 웨딩홀에서 열린 오찬


                                                                김 태영 국방 장관의 축배


                            김태영 장관의 축사에 이은 주한 유엔군 사령관 월터 샤프 대장의 축사




미군 뿐만 아니라 터키군 참전병들도 초청되었다.
우리는 형제국이라는 말에 진심으로 동감을 표한다.
1개 대대를 파병한  벨기에에서 오신 분들도 있었다.


                                                     위키페디아에 소개된 카페레타 일병.
                                                   Hector A.Caffereta.


장진호 전투에서 최다의 해병 영웅들이 배출되었다.
특히 중공군이 미 해병을 차단하고자 중간의 요지
덕동고개에서 닷새간 해병 1개 중대가 적 1개 연대를
상대로 벌인 위대한 방어전투는 장진호 전투의 크라이막스였다.

그중 중대 전방 진지에서  다른 해병 전우  네 명과 함께
적 60여명을 사살하고 진지를  고수한 헥터 A.카베레타 일병은 
미 최고 무공 훈장인 명예훈장을 받았다.


                        미 명예훈장을 목에 걸으시고 포즈를 취해 주시는 카베레타 할아버지.                  
                      지금은 플로리다에서 은거하고 계시다.


1921년생.
고교 졸업후 뉴욕주에서 세미 풋볼팀에서 뛰다가
해병에 입대해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장진호 전투에서 다른 세 명의 전우들과 적 1개 중대의
야간 공격에 맞섰다.
실명한 전우가 땅바닥을 더듬어서 찾아 건네주는 실탄 틀립들을
M1 소총에 연달아 장진해가며 기관총처럼 쏘아댔다.
전투내내 자신의 안전을 돌보지 않고 상체를 내놓고 적에게
정확한 사격을 퍼부었다.

육박한 적들이 던지는 수류탄을 M1총의 개머리 판으로 되 받아
치기도 했는데 던진 수류탄을 여러발 되 집어 던지다가
한 발이 폭발하여 손과 상체에 큰 부상을 입고 다음 해
의병 제대를 했다.

중공군은 네 명이 방어한 이 진지 앞에 60명의 사체를
남기고 후퇴 했다.



오찬동안 미군 장성들과 한국군 장성들이 연달아 찾아와서
최고의 경의를 표했다.

사관 생도들이 초대되어 할아버지 참전용사들을 돌보면서
행사를  같이 하던데 교육적으로 참 좋은 아이디어로 생각된다.


                                   방한한 장진호 참전용사 대표님이 답사후 건배했다.


생각해보니 60년전 오늘, 미 해병은 그 열흘전인 1950년
11월 1일  장진호 입구 황초령 남방 수동 전투에서 적
124사단을 격파하고 장진호반에 도착했지만 점점 증강하는
적의 병력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대책를 준비하던
때이다.

바야흐로 풍운 급박하던 60년전 오늘을 생각하는
할아버지들은 감회가 남다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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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11월 9일(화) 국방장관은 'UAE 파견'에 대하여 언론사 논,해설위원 대상 설명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오찬전 국방장관과 언론사 논,해설위원간 담소~ 

오신분들은 아래!^^


                                                   국방장관 인사말씀 하셨고요,

                                         국방부 대변인 사회, 정책기획관님 인사!

오찬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의 UAE파견 관련 설명이 있었습니다.

                                           발표하고 계신 분이 정책기획관님.^^


"우리국군의 UAE 파견은 국익 증진을 위한 것입니다. 
UAE에 우리군을 파견하는 것은 혜성처럼 나타난 사건이 아닙니다.
'06년 11월 15일 한-UAE는 이미 '군사협력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였고 당시 UAE는 우리측에 각종 군사협력을 요청하였으나, 당시 우리측은 파견문제는 추후 논의하는 선에서 협의한 바 있습니다.

이후, '10년 2월 UAE군 총참모장 방한으로 협력방안이 폭넓게 논의된 이후, 양국간 군사협력 관계가 급속히 발전, '10년 8월 우리 국방장관 UAE방문시에는 UAE 왕제자 등이 한국군의 UAE 파견 및 긴밀한 훈련 협력을 요청하여 지난 2개월간 현지 여건 조사와 파견 여부를 검토하였고, 검토 결과 기본적 주둔 여건이 매우 양호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우리부대가 파견되면 그 임무는, UAE군 특수전 부대 교육훈련 지원, 연합연습, 유사시 우리 국민 보호가 될 것입니다.


                                   파견 예정 지역 : 아부다비주 Al Ain(알 아인) 소재 특수전학교


우리군의 UAE 파견은, 헌법 제5조 '국제평화 유지 노력'의 일환이며, 제60조 2항에 따라 국회 동의과정을 거칠 예정에 있습니다. '06년 11월 양국간 체결한 '대한민국 정부와 아랍에미레이트연합국 정부간 군사협력에 관한 협정 제2조'와 '헌법 6조 1항'에 근거하고 있고요. 또한, 대통령령 '군인복무규율' 제4조에 '국군의 사명은...국제평화의 유지에 이바지하는 데 있음'에 근거하며, 대통령훈령 '국가안보전략지침'에 '국가안보목표를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유지 및 국제적 역량과 위상 제고'에 두는 것과 '국가안보전략 3대 기조' 중 '세계로 나가는 선진안보 추구'는 '대한민국의 위상을 제고하고 국익창출에 기여하도록 적극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우리군의 UAE 파견 효과는, 검토 결과 다음과 같습니다. 
1) 양국간 국방분야 협력으로 에너지 안보, 걸프지역 안정에 기여할 것입니다.
2) 중동지역 방산수출의 전진기지로 활용 가능하며, 한국군 예비역과 민간 전문인력 취업진출을 지원, 국가차원의 경제협력 확대(UAE 원전 수주 등)에 긍정적 역할을 할 것입니다.  
3) 중동지역 해외 전지 적응훈련 정례화 및 UAE의 첨단 대테러 장비와 훈련시설 활용 및 현지 주둔 선진국 군대와 임무수행 능력 배양 등 전투력 향상에도 기여할 것입니다. 

이어 국방부장관의 말씀이 이어졌습니다.




" 우리군은 UAE가 요구한다고 끌려 우리군을 파견하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전 UAE방문시 느낀 것인데 그곳은 매우 선진화되어 있고 국민들의 영어실력도 대단합니다. 사실, UAE는 14차례나 한국을 방문할 정도로 우리 군의 시스템, 방산 수출 등에 매우 관심이 많습니다. 이번 우리군의 UAE파견 계획은 북한의 위협 등 남북관계와는 거리가 있는 새로운 방향의 군 파견 계획입니다. 현재 우리 국민들의 '우려'와 '기대'가 공존하고 있음을 알고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번 파견계획은 헌법 등 규정에 근거한 것으로서 군 본연의 의무에 부합한다는 점을 이해해 주셨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UAE 파견, 국방부는 국가안보와 국익증진에 기여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 열혈국방 생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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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는 연말 UAE에 우리 특전부대를 파견할 계획입니다.

원전수주 댓가냐, 우리군을 팔아먹는다... 국익을 위해서는 반드시 군을 파견해야한다 등등등... 참 의견들이 분분하신데요,
 
국방부는 대한민국 방위의 의무가 있고, 또한 우리군을 누구보다 아끼는 조직입니다.

그럼, 오늘은 UAE파견에 대해 한말씀 올려보겠습니다.^^


              우리 국민들께서 아까워하시는(?^^) '육군 특전사' 비호부대의 수색정찰 훈련 모습  


우리정부는 UAE측 요청과 협의에 따라, 특전부대 130여명을 연내 국회 동의를 받아 금년말까지 UAE에 파견할 계획입니다.

 
   
'대한민국과 UAE' 도대체 어떤 관계인가요?



'09년, 양국간 원전수주 추진과 관련하여 UAE측은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걸맞은 군사협력 관계를 상호 긴밀히 협력해 나갈것을 제안한 바 있습니다.

'10년 2월에는 UAE군 총참모장이 방한, 협력방안을 폭 넓게 논의한 결과 방산‧군수 협력이 확대되고 가시적 성과가 달성되었습니다. 경계용 장비, 탄약, 차량, 장구류 등 방산물자 2,006만 달러어치의 수출‧계약을 약속하였고, 20미리 발칸, K-11 복합소총, 차륜형장갑차, KCTC (과학화전투훈련체계), 항만방어체계, 공동연구개발기구 설립 등 방산협력 방안 세부를 검토 하였으며, 고위급 상호 방문, 군사교육훈련, 정보교류 등 모든 군사협력분야로 발전시킬 것을 협의하였습니다.


                  5월 27일에는, 모하매드 UAE왕세자가 방한, 우리 특전사를 방문하였습니다.


10년 5월에는 UAE왕세자가 방한, 우리 특전사 방문시 한국군의 우수성을 높이 평가하면서 군사 교육 및 훈련 지원 등 세부협력 방안 발전을 요청하였습니다. 그 세부내용을 살펴보면, UAE는 한국군 예비역‧민간 전문인력의 UAE내 특정직위로의 취업을 제안, 1차로 연내 53개 직종 70명, 연간 185억 원의 일자리 창출을 추진할 것과 향후 2∼3년간 500∼700명의 인력 추가소요를 예상하면서 한국의 동원‧병역제도 경험의 전수를 희망하고 자료제공과 현지실사 협조를 제안한 바 있습니다.

10년 7월에는 UAE 각 군 및 총참모부 기능별 대표자들이 한국을 방문하여 전 분야에 대한 협력 가능성을 확인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럼, 과연 UAE는 한국을 어떻게 보고있을까요?


UAE는 한국이 많은 부분에서 자국의 안보환경과 유사하다고 보고있습니다.

군사 강대국과 이웃하고 있는 지정학적 환경, 짧은 전략적 종심으로 적의 기습공격에 취약하며 지역 요충지로서 테러 등 비군사적‧초국가적 위협에 취약한 것 등.
UAE는 한국군이 지속적 안보위협 속에서도 강군으로 성장하고 있음(세계적 수준의 연합작전능력, 첨단무기 자체 개발, 선진화 경험, 국방운영 기법 등) 을 높이 평가하며, 우리의 군사능력을 UAE와 함께 나누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10.8월, 우리 국방장관이 UAE를 방문했을 때에는, UAE 왕세자와 총참모장이 한국군 최정예부대인 특전부대의 UAE 파견과 긴밀한 훈련협력을 강력히 요청하였습니다.

현재 UAE에는 미국, 프랑스, 호주, 영국 등 10개국 군대 3,000여 명이 주둔하고 있으며, 미국 등 선진국들은 국익지원 차원에서 자국군을 주둔시키고 UAE군의 교육훈련을 지원하고 연합훈련을 실시하고 있다고 합니다.....<내일 계속!>

내일은,  UAE 현지상황 및 우리군을 파견했을 때의 효과에 대해 계속 이야기 나누시겠습니다.  이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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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안남았지요?  
11월 11~12일 있을 'G20 서울 정상회의' 로 온나라가 흥분 속에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완벽한 준비, 찬반논란, 각종회의, 연설 등등등... 다각도로 관심들이 많으시지요. 

국제적으로 그 중요성을 더해가고 있는 'G20 summit'!   이렇게 중요한 일에는 늘 우리군이 함께한다는 사실, 다들 아시는지요?


그렇다면, 우리군은 과연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 한번 알아볼까요? 


먼저, 우리군 '수도방위사령부' 입니다.  6월부터 대테러 시범식 교육을 하고 있다는 사실, 다들 모르고 계셨지요?

 

                        6월 1일 국제행사의 안전보장을 위해 육군 수도방위사령부가 대테러
                        훈련을 실시. 헌병 특임대 대원들이 테러범에게 점거당한 건물로 
                        돌입 중 한컷!  


레펠 기술로 미끄러지듯 벽을 타고 내려오는헌병 특수임무대 대원들, 무수한 폭음과 총성속에 순식간에 테러범들을 제압, 인질들을 무사히 건물에서 구출합니다.


육군수도방위사령부는 6월 1일 G20 정상회의의 안전 보장을 위해 ‘대테러 시범식 교육’을 실시하였답니다.

정영환(중령) 특공대대장은 “천안함 사태 이후 장병들이 현존하는 적 위협을 강하게 인식하고 훈련에 매진하고 있다”고 하시는군요. 


이뿐일까요?  지난 8월 2일 공군 15혼비도 경호유관기관 세미나를 개최, G20 정상회의 경호작전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  아래!




공군15혼성비행단은 7월 29일 서울공항 일대에서 민·군·경 합동세미나를 개최하고 경호·경비작전에 대한 발전방안을 모색하였습니다.

이 자리에는 방포사·육군특전사·55사단·317기무부대·기무사와 공항 인근 경찰서 등 경호유관기관 관계관 50여 명이 함께하였답니다.

지난 제4차 G20 정상회의 개최지 캐나다 토론토의 피어슨공항 행사 영상을 토대로, 서울공항 경호 시뮬레이션을 시현, 경호방침에 대한 의견도 나누고, 금속탐지기(MD), 사각지역 검측장비, 검측헬기, 로보캠 등 첨단 장비들도 선보였지요.


나라 '안'에서만이 아닙니다.
  국제적인 군사협력 노력도 기울이고 있지요. 지난 10월 25일에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 26개국 군 최고위급들이 참가한 제13차 군 고위급 회의(CHOD : Chiefs Of Defense)가 있었습니다.


          국방부 합참의장이 공동기자회견에서 로버트 윌라드 미 태평양사령관과 함께 회의 성과를
          설명하였습니다.


한민구 합참의장은 서울하얏트호텔에서 열린 공동기자회견에서  “이번 회의 참가국들은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책임을 분담해야 함을 공감하였고, 지역의 안정과 세계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공조체계와 군사협력 강화에 적극 동참할 것을 약속했다”고 하였습니다.

회의 기간 중 한미일 다자회담에서는 천안함 피격사건, 북한의 핵ㆍ미사일 위협 등에 대한 공동의 인식을 재확인하고,북한 위협에 대한 긴밀한 공조에 공감하기도 하였지요.  

이번 제13차 군 고위급 회의는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행사인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세계 주요국 군 수뇌부에게 한국의 발전된 모습을 선보일 수 있는 기회였다고 하네요.


한편, '육군특수전사령부' 10월 26일 북한의 비대칭 위협 증가와 같은 미래 특수전 환경 변화를 전망하고 이에 대한 다양한 대응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특수전 전투발전 세미나’를 개최,  특수전 그룹의 대테러와 평화유지군(PKO), 재난구조 역할 확대에 따라 신속기동군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주장 등이 전개되었습니다.

11사단도!  대테러훈련을 하였습니다.

이날 훈련에는 화학대와 헌병 특수임무대를 지원해 화학물질로 오염된 현장을 제독하고 경찰특공대와 함께 인질극을 벌이는 테러범을 제압하는 임무를 맡아 군의 테러 대응 능력을 선보이기도 하였습니다.


         대테러 훈련에서 11사단 헌병대원들이 진압작전 중 부상한 테러분자를 구급차로 이송 중.


         2010화랑훈련에 참가한 육군36사단 헌병대 특수임무대원들이 11월 2일 원주공항 횡성터미널에
         침투한 테러분자를 제압하기 위해 건물 안으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11월 1일부터는 강원 전역에서 ‘2010 화랑훈련’이 펼쳐지고 있는 가운데 각급 부대들이 실전 같은 야외기동훈련(FTX:Field Training Exercise)을 전개, 민·관·군·경 통합방위태세를 확립하고 있답니다.


'해군1함대사령부'
도 이날 육·공군, 해경 등 유관기관과 합동으로 해상 대테러 훈련을 강도 높게 실시했고요. 동해 군항에서 열린 합동훈련에는 1함대를 비롯해 육군23사단·공군18전투비행단·해군6항공전단·해군특수전여단(UDT) 등 군부대와 동해지방해양경찰청·동해지방항만청 등 유관기관이 참가하였답니다.


훈련은 불순 세력이 군항 위병소에 폭탄테러를 가하자 대테러 초동조치부대가 출동하면서 시작됐습니다.  이어 사상자를 긴급 구조하고 동시에 현장지휘본부를 설치, 유관부대(기관)에 상황을 전파하고 도주로 차단훈련도 실시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쭈욱~~~~~


어떠세요,  우리군 믿음직스럽지 않습니까? ^^  G20 정상회의 개최, 이상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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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군은 국방의학전문대학원이 왜 필요한지를 설명하면서 1.군의관 인력 수급의 질 저하, 2.군 특수(화)의학의 안정적 연구기반 확보에 관해 포커스를 두고 설명해드렸습니다. 이제 국방의학원 건립 문제에 관한 국내 최고 권위자이신 전 국립암센타 원장이자 서울대병원 교수이신 박재갑 교수님과 국군 서울지구병원장이신 강철환 대령님, 국방부 보건정책과 김은성 사무관님을 모시고 국방의학전문대학원이 왜 필요한가?에 대해 국방부 대변인실에서 좌담회를 열었습니다. 두번에 걸쳐 좌담회를 간추려 싣습니다.  

관련글 참조 : [2] 국방 의학전문대학원이 왜 필요한가? http://v.daum.net/link/3190652
                   [1] 국방 의학전문대학원이 왜 필요한가? http://v.daum.net/link/3167243
                   국군 수도병원의 격리병동을 찾아           http://v.daum.net/link/322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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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갑 교수
국립 암센터 1,2대 원장  
(현)서울대 의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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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환 대령
육사 46기
자이툰 부대 병원장
(현)국군 서울지구병원장


김은성 사무관
행시 44회
(현)국방부 보건정책사무관



 "제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군의료체계가
        잘 될수 있도록 모든 역량을 발휘해야"

김은성 사무관: 안녕하세요. 국방부 보건정책과 김은성 사무관입니다. 교수님께서는 의료계의 큰 원로이며, 군과의 특별한 인연을 많이 가지고 계십니다.젊은 장병들에게 금연관련 교육도 많이 해주고 계신데요. 언제부터 군과 인연을 맺으셨고, 군의료에는 어떻게 관심을 가지게 되셨나요?.

박재갑 교수:
예 저는 3년의 군복무중 1년은 동해안 경비사령부 88여단 의무중대장(78년)으로 동해안의 GP 10개를 커버하는 최전방 부대에서 보병장교로서 보냈고, 소령이 되어서는 등천동에 수도통합병원에서 나머지 2년간 근무를 했습니다. 이후 전역 한뒤 85년에서 87년까지 2년간 미 해군병원과 업무교류가 잦은 미 국립암연구소의 연구원으로 파견을 다녀왔습니다.

2000년에 국립 암센타 원장이 되어서는 당시 이준, 윤광웅 국방장관에게 군에서 대대적으로 금연운동을 펼쳐 주실 것을 부탁드렸습니다. 과거에는 장병들이 군에 가서 담배를 배워 왔는데, 이제는 군에 가면 모두 담배를 끊을 수 있는 조치를 해주셨으면 좋겠다는 건의가 받아드려져 결국 2009년 1월 1일부터 군에서 면세 담배가 지급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또한 2005년쯤 말기 위암환자인데도 군병원에서 진단을 못하고, 계속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음에도 아무 문제없던 사람이 제대후 3개월후에 말기 위암으로 죽는 그런 사건이 몇차례 일어나게 되었죠. 그래서 당시 윤광웅 장관이 심각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당시 국방부 공무원들을 저에게 보내 군 의료를 어떻게 개선하면 되겠느냐? 며 질문을 주셔서 그때부터 제가 그동안 잊고 있었던 군의료체계 개편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은 제가 국립암센타 원장으로 금연운동만 생각하다가 이때부터 우리나라 군의료개편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같은 경우는 국가의 혜택을 많이 본 사람들인데, 군의료가 낙후된 것은 그동안 우리같은 사람들이 신경을 안써서 저렇게 되지 않았나 싶어 제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군의료체계가 잘 될수 있도록 모든 역량을 발휘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게 된거죠.
 

  "그동안에 민간의료는 천지개벽할 정도로
      좋아졌는데, 군의료는 거꾸로 역행한거죠"


김은성 사무관:
 교수님께서 지적했다시피 국방부도 내부적으로 군의료가 낙후된 것에 대해 많이 반성 하고 있습니다. 민간 의료의 전문가로서 현재 군의료의 문제점은 뭐가 있을까요?

박재갑 교수: 군의료의 문제는 누구의 잘못이라 할 수 없는 구조적인 개혁을 못했다는것에 있습니다. 그동안에 민간의료는 천지개벽할 정도로 좋아졌는데, 군의료는 거꾸로 역행한거죠. 낙후된 부분에 대해서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습니다. 군의료가 낙후되어 있으면 발전되어 있는 민간병원으로 가는 길을 열어두면 되지 않겠나?라고 말이죠. 거기서 정책적 실수가 있었다고 봅니다. 군의료를 민간의료와 같이 개선을 해놓고 선택할 수 있게 했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군의료도 좋지만 당사자들이 본인 돈 내고 민간병원 가고 싶으면 갈 수 있게 시스템을 만들었어야 합니다. 군의료가 낙후되어 있기 때문에 본인 돈 내고 민간병원 갈려는 것 막지 않겠다는 정책은 정부가 의무적으로 군복무를 하는 국민들을 무책임하게 버려두는거라 생각합니다.

 의료라는 것은 숙련된 사람들과 함께 팀이 이루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군의료계는 경험이 많고 쉽게 애기하면 명의에 해당하는 사람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쉰살만 넘으면 남아 있을 수가 없는 시스템을 만들어놨단 말이죠. 국군 의무 사령관 나이가 50대이니 무슨 말이 필요하겠어요? 거기다 더 심각한 문제는 보수의 문제입니다. 군인의 보수체계는 공무원 보수체계인데, 민간 의료인들과 비교해보면 군의관의 보수수준은 민간의 50~60%입니다. 국립대학병원들이 이런 부족한 보수체계 때문에 수당을 추가로 지금할 수 있는 특수법인 병원으로 탈바꿈해 있는데, 군 병원은 민간 및 국공립의료기관들이 이렇게 변화하는걸 20~30년동안 그냥 눈 감고 있었다는겁니다.

 결론적으로 대한민국의 공무원 보수를 군의관만을 위해 바꿀수는 없는일이죠. 그러니깐 한마디로 그동안 국방부는 군의료계에 경험있고 실력있는 사람은 하나도 남아 있지 못하는 시스템을 만들어놓고 누구도 개선을 안한거죠. 거기에 가장 핵심적 문제가 있었던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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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병원은 지금까지  의사들의 대한
         투자를 소홀히 했고, 가르치지도 않아"


김은성 사무관: 교수님께서 너무 뼈아픈 지적을 많이 해주셔서 저희들로서도 시사하는바가 큽니다.

강철환 대령: 선생님 말씀 하신 것 중에서 저희가 군병원장입장에서 생각해볼 때 병원건물을 새로짓고 CT/MRI 같은 장비는 구입해 왔지만, 정말 병원의 핵심이 되는 의료인력 그중에서도 의사들에 대한 투자를 소홀히 했고 가르치지도 않아 지금의 이런 결과가 초래된 것 같습니다.

김은성 사무관: 강철환 대령님은 사관학교 출신으로 의과대학 위탁교육으로 군의관으로 생활하고 계십니다. 현재 군에서 활용해야될 군의관 자원들은 의무복무기간만 채우고 다 떠나버리고 있는 실정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민간의료계에서는 의사들을 자체적 교육을 통해서 채용하라는 말하고 있습니다. 강대령님은 군도 경험해보고 위탁교육도 받아보셨는데 군의관들의 인력 불균형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십니까?

강철환 대령: 좀전에 박재갑 교수님이 말씀하셨지만, 민간의료기관에 있는 의사들에게 군 복무를 애기하면 진지하게 고민할 의사들은 거의 없을겁니다. 현재 군의관들의 급여수준은민간의료기관들과 비교해도 형편없는 수준이지만, 근무여건도 예를 들면 수도권에 있는 의사들은 그곳에서 평생 진료할 수 있지만, 군 병원은 전국에 흩어져 있고 군의료 조직에서는 지리적 여건이 좋은곳에 특정인을 머물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순환보직을 하다보면 비용측면을 떠나서 복지 및 교육여건이 열악해져서 힘들어집니다.

또 하나는 의사들 한테는 임상 환자를 보는게 소망이고 보람인데, 현재의 군의료 여건하에서는 장기복무 군의관들 대부분이 병원장을 맡게된다던지 정책부서에 가게 되기때문에 의료기술을 발전시킬 여건자체도 매우 열악합니다. 저는 국가에서 혜택을 받아 의대 위탁교육 혜택을 받게 되어서 지금까지 굉장히 감사한 마음으로 군생활을 하고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군의관 수급제도를 위탁교육 형태로 운영하는건 반대입니다. 물론 미군같은 경우는 소수 인력자체을 교육시켜서 군의관으로 활용하며 운영을 하고 있지만, 우리가 이런 위탁교육 제도로 전체 군의관을 확보하다는 것은 비용측면에서 효과적이지 않다고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군의관들의 능력은 인턴, 레지던트만
     마치고 군에 와 수술경험도 별로 없는 수준"


김은성 사무관:
지금 우리가 군의관에 대해서 애기를 안할 수가 없는데요. 군병원의 의료시스템은 97%이상이 단기복무 군의관에 모든 진료를 의존하고 있습니다. 군 병원장으로서는 그런 군 의료체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강철환 대령: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현 시스템으로는 국민들 및 군 복무중의 병사들의 요구사항을 충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현재도 상당히 많은 수의 환자 및 보호자들이 병원을 찾아와서 애기를 하고 있습니다.

실례를 들자면 제가 국군 춘천병원장 시절에 주된 업무중에 하나가, 환자 보호자분들이 밖에 나가서 수술을 해달라는 부탁을 조율하는 것이었습니다. 단기 군의관들의 의료능력은 인턴, 레지던트만 마치고 군에 와서 수술경험도 별로 없는 수준이죠. 특히 수술하다가 약간 어렵거나 실수를 했을 때 민간의 대학병원들은 경험의 많은 선생님들이 해결해주시는데 군병원에서는 전혀 그렇게 할 수 있는 백업시스템이 없습니다.

따라서, 제가 군 병원장을 하고 있고 군의관이 수술한다고 할 때, 그 수술이 보편타당한 흔한 수술이 아니라면, 특히 군의관이 하고 싶어서 욕심이 나서 하는 수술이라면 저는 당연히 못하게 합니다. 그건 당연히 우리가 해서도 안되는 일이고, 또 담당 군의관들이 그렇게 할 수 있을만한 충분한 경험을 많이 갖고 있지 못하고, 백업도 지원받지 못하기 때문에 병원장으로서는 허락 하기 어려운 사례가 많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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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암센타도 건물 지어놓고
   10년에 걸쳐서 좋은 인력들을 모았습니다."

김은성 사무관: 그럼 민간쪽에서 조언하길 그러면 단기 군의관만을 쓰지 말고 민간에서 우수한 인력을 월급을 많이 줘서 채용하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냐! 추가해서 군병원에서 할 수 없는 치료분야를 민간병원을 활용하면 될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박재갑 교수: 예를 들어보면, 우리 국군 수도병원에 전문계약직 의사를 파격적으로 그래도 예산을 줘서 한다고 하는데, 우선 보수도 두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현재 군의료기관들은 민간의료기관만큼 보수를 지급할 여건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것, 두번째는 설사 급여를 충분히 지급한다 할지라도 민간의료기관의 의사가 열악한 근무여건이 개선되고 있지 않은 수도병원으로 지원하겠냐?는 두가지입니다.

가 봐도 똘똘하고 앞으로 커가고 꿈이 있는 사람은 군 병원으로 왜 지원해서 갑니까? 그래서 국방부와 서울대학병원이 전문계약직 군의관 수급을 위해 협약을 하게 한겁니다. 지금은 몇몇 젊은 의사들이 지원해서 오는데 이런 지원자들은 국방의학원이 생긴다고 하니깐 몇 년만 참으면 앞으로 국방의학원이 학교가 되고 교수직을 보장해주는 등 근무여건이 좋아질거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지원하는거죠. 또 내가 추천하니깐 나 같은 의료계 선배들을 믿고 오는거죠. 하지만 수도병원에 우수한 인력들을 구성하는건 국방의학원 건물이 지어져도 100% 충족될순 없을겁니다.

국립암센타도 건물 지어놓고 10년에 걸쳐서 좋은 인력들을 모았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국방의학원 인력들을 하나하나 모아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국방의학원이 건립된다는 전제하에 의료계에 누가 우수한지 알기 때문에 핵심인력들에게 계속 애기를 하고 있습니다. 어느시점이 되었을 때 어디 가지말고 국방의학원에 가게되면 보람도 있고 그럴거다 라고 말이죠.

예를 들면 현재 수도병원 최강원 감염내과 과장이 신종플루 관련해서 수도병원 이름으로 방송에 나와 있을 때 그 사람이 미치는 국민들에 대한 군의료의 홍보효과와 수도병원의 네임브랜드는 수천억원의 이상의 효과가 있을겁니다. 그래야 국민들이 군병원에 대해 무한한 믿음을 보낼수 있는거죠.

  "국방의학원 법안 정부입법인지,
                 의원입법인지 따지지 말아야"


김은성 사무관:
작년 연말에 한나라당 박진 의원등 105명이 발의한 국방의학원 법이 검토중입니다. 법안의 내용을 간단히 말씀드리면, 장기군의관을 안정적으로 국방의학원에서 배출하는 의학전문대학원 과정을 운행하며, 그 학생들을 위한 기반병원을 운영하며, 군에 필요한 특수의학을 중점적으로 연구 발전할 수 있게 지원하는 법안입니다. 이런 것들이 항간에서 많이 우려하는건 국방의학원이 된다고해서 군의료쳬계가 얼마나 달라지고 얼마만큼의 파급효과가 있는지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국방의학원 법안에 의해 국방의학원이 잘 운영될수 있는 묘안이 있으신가요?

박재갑 교수: 예! 아마도 박진의원께서 대통령직 인수위에 계실 때 간사로서 이런 내용을 알았고, 같은 선상에서 대표발의를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국방의학원법의 요체가 잘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3차 의료기관은 다 대학병원이고, 특수의료법인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국방의학원이 성공을 하려면 우수인력 확보인데, 우수인력을 구할려면 2가지를 요구합니다. 하나는 보수입니다. 근데 돈을 부족함 없이 지급하는건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의료관련자 보수를 국가기관이 통제를 하기 때문입니다. 보수라는건 어느 국공립 의료기관이나 다 같다는거죠. 두 번째는 명예입니다. 기본적으로 국내에는 42개 의과대학이 있기 때문에, 우수 인력에게 대학교수 신분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면, 젊은 인재를 모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학교는 기본 필수에요. 그러니깐 젊은 친구들이 어디 지원할경우 교수직을 제공하냐 안하냐를 많이 따진다고 봐야죠. 그렇다고 그걸 제공하지 못하면 인재들이 빠져 나가니 유지가 안되죠. 특히 국방의학연구원에서 지금 해양의학이나 잠수의학이나 항공의학 등 해야될 일이 수없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한마디로 아무것도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근무하는 군의관들은 행정 및 의료 장교등 자리만 지키고 있지 진짜 연구는 하나도 못하고 있어요. 이건 한마디로 직무유기죠. 그리고 국방 의료원은 특수법인 형태인 국방의학원에 학교와 연구소와 병원이 효율적으로 들어간다고 하니 그 법안 자체는 상당히 잘되어 있는겁니다.

그 다음에 정부입법이 아니라 의안입법이냐가 논란인걸로 아는데. 이건 정부입법이 수십년간 못한겁니다. 그걸 국회의 105명의 의원들이 힘을 합쳐서 의원입법을 한것입니다. 근데 이 부분에 예산이 많이 들기 때문에 아주 민감한 사안이라, 어느 정부 부처 하나의 힘으로는 새로운 조직과 예산을 뒷받침하기에는 우리나라 현 시스템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기본법이 없어가지고서는 국가 예산을 투여할 수가 없고, 그러면 그 법을 만드는 국회가 뒤늦었지만 이제라도 나서는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국방부도 적극 호응하니깐 경제부처나 이런곳에서도 적극호응을 해서 이게 왜 정부입법이지, 왜 의원입법이냐? 따지지 말고 오히려 정부입법을 의원들이 나섰으니깐 빨리 집행할 수 있도록 도와줬으면 좋겠습니다.

 김은성 사무관: 네 기본법을 만들어서 시행하다 보면, 앞으로 중 장기적으도 추진 동력을 얻을수 있을 것 같고, 민간 병원 시스템처럼 군의료도 대학병원 체계가 되면서, 학교와 병원과 연구소가 한 울타리 안에서 그런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국방의학원 사업이 성공할 수 있는 가장 큰 요인이 아닐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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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내용은 좌담회 두번째에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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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비 트랙백 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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