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영웅, 헥터 카페라타 일병이 들려 주는
"장진호 덕동 고개 전투" 이야기..

                             

 
작년 11월 말 서울 전쟁기념관에서 장진호 전투에 참전했던 미국 노병들을 모시고 기념식이 있었다. 60년 전 눈보라치는 장진호에서 혈투와 혈투를 되풀이 하며 겹겹이 둘러싼 중공군 9병단 6만 명의 포위망을 뚫고 흥남으로 탈출했던 미 해병 1사단 장병들과 참전 해공군 용사들이 지금은 팔순 어르신들이 되어 감회어린 표정으로 자기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던 옛 국가를 다시 방문했다.
 
 
                                                                     장진호 전장


한국 측에서는 김 태영 국방부 장관과 미국 측에서는 샤프 유엔군사령관 등이 참석해서 이들 노병을 반겼다. 기념식에 이어 오찬이 있었다. 나는 장진호 최대의 혈전이었고 미 최고 무공훈장 수여자를세 명이나 배출한 덕동 고개 전투의 F 중대 지휘관 바버 대위를 만날 수 있을까하는 기대를 하고 F중대 용사를 찾았더니 바버 대위는 오지 않았지만 그 분만큼 유명하고 역시 같은 명예 훈장 수여자인 카페라타 일병을 만날 수가 있었다. 
※명예훈장[MEDAL OF HONOR]은 한국의 태극 무공훈장과 같은 미 최고 무공훈장이다. 나는 나중에야 바버 대위가 2002년 골수암으로 사망했음을 알게 되었다.※
 
 
                                                                       
미 명예훈장
                                                               [MEDAL OF HONOR]




넓은 만찬장 구석 테이블에 앉아 있는 그 분을 뵈었을 때 마침 미 육군 소장이 찾아와서 정중히 인사를 드리고 있었다. 알고 보니 샤프 사령관 이하 여러 명의 장군들이이 전쟁 영웅을 찾아뵙고 문안 인사를드렸다고 한다.
 
60년이나 지난 전투의 영웅인데도 노영웅 모시기가 각별하다. 플로리다 주 케이프 코랄에는 그의 이름을 딴 초등학교도 있고 몬트빌이라는 작은 도시에는 그의 이름을 명명한 도로도 있다. 부러운 영웅 섬기기 문화라고 하겠다,
 
 
                                       헥터 카페레타 초등학교를 방문한 카페라타씨



생각지도 않은 한국인의 방문을 받자 카페라타씨는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곧 명예훈장을 꺼내 목에 걸고 포즈를 취해주었다.
 
 
                                                                      헥터 카페라타씨
                                            이날 필자도 말로만 듣던
미 명예훈장을 처음 보았다.


여기서 그가 싸웠던 1950년 11월 28일 덕동 고개의 방어전을 소개한다.

장진호 호반 산길로 접어든 해병들은 한반도를 가로질러 가 평안북도에서 진격하고 있던 미 1 기병사단과 링크하는 작전을 전개했었다.
 
이를 눈치 챈 모 택동은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9병단장 송시륜에게 병단 전 병력[6만명]을 동원해서 장진호반의 해병들을 섬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중공군이 진격하는 해병들을 포위하는 매복을 완료했을 당시 장진호 좌측 유담리 지역에 미 5연대와 7연대 2개 연대가 있었고, 후방 하갈우리에 해병 1사단 본부가, 그 후방 고토리에 해병 11연대가 있었다.
 
중공군이 엄청난 병력으로 매복하고 있음을 알게 된 미 해병사단 본부는 유담리와 장진호 건너 신흥리의 병력을 모두 사단 본부가 있는 후방 하갈우리로 철수시킬 계획을 세웠다.

  
                                                       장진호 전투 상황도 -덕동 고개도 보인다.



이 계획에 따라 장진호 좌측의 두 개 해병 연대의 철수를 엄호하기 위해서 유담리와 하갈우리와 덕동 고개에 해병 7사단 5연대 2대대의 소속의 F 중대를 파견하였다.  F 중대의 중대장은 유황도 참전 경험이 있던 베테랑 윌리엄 바버 대위였다.
 
 
 
                                                                  
                                                     덕동 고개 F 중대장 윌리엄 바버 대위


두 연대의 철수와 동시에 F 중대도 철수할 계획이었으니 원래 계획대로 하면 하루나 이틀만 고지에 머물러 있으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날 밤 중공군은 유담리에 거친 공격을 개시하였다. F 중대는 거대한 사람의 바다에 떠있는 고도와 같은 신세가 되었다.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F 중대는 11월 27일부터 12월 1일까지 야간마다 파도처럼 가해지는 4,000여명의 중공군 공격을 단 200여명의 병력으로 장렬한 전투를 거듭해서 격퇴한 위대한 전공을 미 해병대 전사에 남겼다. 전투는 주야 닷새간이나 지속되었다.
 
F 중대에 전사 26명, 실종자 3명, 부상 118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덕동 고개에 F 중대가 배치되었을 때는 237명이었으나 닷새 뒤 해병 7연대 2대대가 F 중대를 구원했을 때는 단지 86명만이 전투력을 견지 하고 있었다. 이 고개를 공격했던 중공군 59사단은 2,000명의사상자를 냈다.
 
카페라타 일병이 문자 그대로 귀신 같은 투혼을 발휘하여 싸웠던 덕동 고개 전투를 현장에서 부터 살펴보자. 마틴 러스의 “브레이크 아웃[임 상균 옮김]”에  카페라타 일병의 활약이 잘 소개되어 있다.
 
덕동 고개는 유담리-하갈우리를 연결하는 중요한 도로가 통과하는 요지(要地)였다. 고개 옆에 높은 덕동산이 있어서 여기서 갈라져 나온한 민둥산 줄기가 도로로 뻗어있었다.
 
이 산줄기는 능선 좌우 사면이 경사가 급한 미니 산맥이었다. 이 이름없는 민둥산 산줄기는 나중에 이곳에서 장진호 최대의 공훈을 세운 F-중대의 이름을 따서 F0X HILL이라는 별칭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F 중대가 고개에 도착해서 배치를 한 날은 1950년 11월 27일 오후였다. 바버 대위는 덕동 고개를 방어하기 위해서 덕동 고개로 뻗어 나온 이 작은 민둥산 산맥을 중요한 방어 거점으로 판단하였다.
 
도로로 뻗은 산줄기의 능선 좌우에 각각 일개 소대를 배치하고 세로로 배치한 두 부대를 연결하듯이 한 개 소대를 상부에 가로로 배치해서 덕동 고개 제압을 위한 적의 공격을 분쇄하기로 하였다. 로버트 C.맥카시 중위 소대가 중대 중앙을, 그리고 존 M. 던 중위의 소대가 오른 쪽을, 앨모 G.피터슨 중위가 왼 쪽을 각각 담당하였다.
 
즉, 도로를 향하여 입을 벌린 U자형 진지를 구성한 것이다. 중대 방어선이 입을 벌린 도로 옆에 두 채의 빈집이 있었다. 바버 대위는 이 집을 중대 본부로 쓰기로 하였다.
 
중대가 하갈우리에서 덕동 고개로 이동하고 배치가 끝나자, 바버 대위는 전 중대원들에게 호를 파게 했다. 이 선견지명이 F 중대를 구하게 된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다음날 철수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호를 파라고 하니 중대원들은 불평을 했지만 바버 대위는 용의주도하게 호를 파고 치밀한 화력 계획을 세웠다.
 
그 날 밤 유담리에 먼저 중공군의 대공세가 있었다. 덕동 고개에서도 유담리의 하늘이 붉게 물드는 것과 폭발음이 들리는 것을 감지할 수가 있었다.
 
 
 
                                    유담리 전투 -기와집의 5 연대 본부를 습격했다가 실패한 중공군.



F 중대원들은 경계와 취침으로 불안한 하룻밤을 보냈다. F 중대에 대한 중공군 59사단의 파도 같은 공격은 다음날 28일 새벽 오전4시, 영하 26도의 얼어 붙은 공기를 뚫고 개시되었다.이때부터 나흘 간 기필코 덕동 고개를 점령하겠다는 중공군과 이를 거부하는 F 중대의 혈전이 시작되었다.
 
 첫날 격전에서 분투한 카페라타는 방어선의 중앙 소대인 맥카시 중위 소대 소속이었다. 대 병력의 중공군은 사방에서 중대 방어선을 공격해왔다. 중공군의 첫 공격에 맥카시 소대는 큰 피해를 입었다. 소대는 일선에서 후퇴해서 예비진지로 이동하였다.
 
전투가 시작되기 한참 전 헥터 카페레타[HECTOR CAFFERATA]일병과 케네스 벤슨[KENNETH BENSON]일병은 다른 두 명의 해병과 함께 맥카시 소대의 진지에서 20m 떨어진 전방에 배치되었다.
 
카페라타는 이렇게 회상하였다. “잠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았지만 시끄러운 총소리 때문에  잠에서 깨었는데 눈을 뜨자마자 중공군이 쌓여있는 눈 위를 넘어 접근해 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너무 가까이 다가와 총을 조준할 필요도 없었지요.“

중공군이 진지를 통과 한 뒤에 지형지물에  가리어 모습이 안 보이자 벤슨과 카페레타는 운반할 수있는  탄약은 모두 들고 나머지 대원들이 간신히 버티고  있는 진지로 달려갔다.
 
“벤슨이 내가 군화를 두고 왔다고 알려 주었지만 그것을  가지러 돌아가지는 않았습니다.도처에 중공군이 널려 있었거든요.”
 
해리슨 포머스 일병과 제랄드 스미스[GERALD SMITH]일병이 벤슨과 카페라타가 뛰어든 참호를 지키고 있었는데 그 참호는 중공군이 맥카시 소대와 피터슨 소대를 분리시킬 목적으로엄청난 압력을 가하고 있던 F 중대 진지의 요충(要衝)이었다.
 
포머스는 회상했다. “그때 장교들이 해병들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한 진지의  공백을 메우려고 병력을 이리저리로 옮겨 배치하고 있는  있었는데 카페라타와 벤슨이 때마침 나타나 주어 도움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아군의 숫자가 너무 적었고 적군은  너무 많아 보였거든요.
  
수류탄이 빗발처럼 많이 날아왔고,  한 발이 우리 참호에  떨어져 내가 몸으로 수류탄을 덮쳤는데 쾅하고 터져  그 충격으로 몸이 튕겨져 나가 참호 맞은 편 벽에 부딪히면서  철모가 벗겨졌습니다. 그 뒤에 바로 다른 수류탄이 쾅하고 또 터졌습니다.
 
“포머스! 야! 포머스!”하고  누가 불렀지만 나는 입을 열고 대답을 할 수가 없었고,  한쪽 팔은 움직일 수가 있어서 손으로 문질렀더니 피가 흐르고  있더군요. 철모를 다시 썼는데 귀가 전혀 들리지 않으면서  양쪽 귀애서 윙윙 소리가 났고 누군가가 내 이름을  계속 부르더군요.
 
 위생병이 내 옆에 쭈그리고 앉아 머리를 눈으로 씻어 주면서 “괜찮아?”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그때까지도 머리가 멍했지만 소총을 쥐고서 간신히 카페라타에게 포복해 갔습니다.“
 
“네가 심하게 다친 줄 알았어.”라고 그가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세열 수류탄이 아니라 폭풍수류탄이었던 것이 행운이었다. “후아, 저 개자식들이 또 오네!” 사격을 할 때마다 카페라타는 상반신을 노출시켰는데 그는 기적을 연출하는 것 같았다.
 
 
                                                                     카페라타 일병


“카페라타가 소대에서 가장 덩치가 크고 또 제일 골치 덩어리였다는 것을 말했나요? 여하튼 벤슨과 나는 그가 참호 속에 떨어진 수류탄을 집어 들어 중공군에게 되던지는 것을 보고 있었는데, 수류탄 한 개가 참호 바로 앞에 떨어져 그가 몸을 앞으로 기우려 그 수류탄을 집어 비스듬히 던지려했지만 행동이 조금 못 미쳐 수류탄이 폭발하는 바람에 손의 일부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손이 불구가 되었는데도 카페라타는 욕을 퍼붓기 시작하면서 소총에 실탄을 재장진하여 클립이 빌 때까지 사격을 했습니다.
 
 실탄이 떨어지자 소총을 마치 야구 방망이 흐르듯 잡고는 날아오는 수류탄을 야구공을 맞추듯이 맞추어 날려버렸습니다. 대단했습니다!“
 
수류탄이 벤슨 옆에 떨어져 폭발하면서 그의 안경을 날려 보내 잠시 앞을 볼 수 없었다. 그는 자동소총을 사용할 수가 없자 참호 바닥에 널려 있는 소총의 실탄 클립을 손으로 더듬어 주워서 카페라타의 M1 소총에서 빈 클립이 튀어 나오는 소리가 날 때마다 그 클립들을 카페라타에게 전달해 주었다. “이제 보이나?” “아니!”
 
동쪽 하늘이 훤하게 밝아오자 중공군은 덕동 고개 공격을 중단하고 후퇴하였다. 카페라타 일병의 참호 앞에는 60여명의 중공군 시체가 쓰러져 있었다.
 
공식적인 해병대 기록에는 중공군이 압도적인 공격에도 그 요충인 해병 진지 점령에 실패한 것은 거의 헥터 카페라타와 케네스 벤슨, 그리고 스미스 3인의 영웅적인 전투 때문이었고 그들 세명은 “적 2개 소대 병력을 전멸시킨 공로를 인정받았다.”고 씌여 있다. 
 
밤 데이비스 중령이 지휘하는 7연대 1대대가 유담리를 출발하여 중공군의 배후로 침투해서 F 중대를 구출해냈고 이 링크 성공 직후에 유담리의 해병 2개 연대 병력은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철수하여 하갈우리의 사단본부 병력과 합류했다.
 
카페라타씨는 미국 위키페디아 백과 사전에도 소개되어있다. 그는 이 덕동 고개 전투 후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고 다음해 9월에 해병대에서 의병 제대를 했다. 그해 11월 트루만 대통령은 그에게 명예훈장을 수여하였다.
 
 
                                                        오바마 대통령과 만나는 카페라타씨


나의 방문에 훈장을 걸고 포즈를 취한 카페라타씨는 수류탄에 날아간 자신의 손도 보여주었다. 손가락 두어 개가 안 보였다

부상 직후 그런 손으로 어떻게 무거운 M1 총을 들고 연발 사격을 하고 또 그 총을 야구 방망이처럼 휘둘러 날아오는 수류탄을 다시 날려 보낼 수가 있었을까?
 
그는 내가 “참호를 공격한 중공군의 병력 규모가 어느 정도였나요?“하고 물었더니 간단히 대답했다. “몰라! 엄청나게 많았어!” 대화 도중 그는 내내 근엄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 F 중대를 공격한 중공군은 연대 병력으로 알려져 있다.
 
기념식 오찬장에는 경험도 쌓고 귀빈도 접대할 겸 각 사관학교에서 파견된 생도들이 합석했었다. 카페라타씨의 식탁에는 간호 사관학교에서 파견 나온 두 명의 여성 생도가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엄청난 거구에 과묵하고 근엄한 표정의 서양 할아버지와 동석해서 잔뜩 주눅이 들어있던 두 여성 생도는 내가 “이 분은 장진호 전투 최고의 전쟁 영웅일세!“ 했더니 그제야 신세대답게 환호하면서 이 영웅 할아버지에게 박수를 보냈다.
 
미국 장군이 와서 인사를 올려도 웃음기 없는 근엄한 표정을 짓던 카페라타씨는 그제야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젊은 시절 목숨을 내던져 싸운 나라의 손녀딸들이 올리는 찬사의 박수가 흐뭇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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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뒤로 돌아 공격한다.

 
 
G-20정상회담 때문에 자세히 보도되지는 않았지만, 지난 11월 10일 중요한 행사가 전쟁기념관에서 벌어졌다. 6.25전쟁 당시에 벌어진 가장 극적이었던 전투 중 하나였던 장진호(長津湖)전투 제60주년 기념행사였다. 함경남도의 장진호에서 함흥에 이르는 첩첩산중의 가도에서 벌어진 이 전투는 세계전투사에서 전설로 전해질 만큼 기념비적인 전투였다.

 
                                                장진호전투 60주년 기념식
 

전투는 1950년 10월 말부터 장진호일대로 진격하던 미 해병 제1사단이 험준한 산악 사이에 매복해 있던 약 10배 가까이 많은 중공군 제9병단이 포위당하면서 벌어졌다. 전투 중  영하 30도까지 떨어지는 혹한의 날씨가 연일 계속되었는데, 이런 악천후에서 미군이 전투를 치러본 것은 처음이었고 이후 이것은 미군 당국이 동계전투연구에 대대적으로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
 

                                                치열했던 장진호전투의 모습
 

백과사전처럼 전투결과만을 간략히 기술한 단편적인 내용에만 따르면 장진호전투를 중공군의 승리, 미군의 패배라고 기록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지리적 점령만을 승패의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비록 미군은 피해를 많이 입었지만 승자로 기록된 중공군의 피해는 참혹할 정도였다. 미군은 전사 393명, 부상 2,152명, 실종 76명의 피해를 입었지만 반면 중공군은 5만 여명이 전사상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포위당한 이들에게 찾아 와 스스로 항복한 중공군 포로들
 

흔히 1.4후퇴로 잘 알려진 중공군의 제3차 공세에 이처럼 처참하게 무너진 제9병단이 동원될 수 없었다. 때문에 이 전투로 인하여 미군이 함경도 일대에서 후퇴하게 되었으므로 전략적으로 중공군이 승리한 것은 맞는데, 중공군이 전투력을 상실할 만큼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기 때문에 전술적으로는 미군의 대승으로 언급되고 있다. 따라서 미군, 특히 이 전투의 주역이었던 미 해병 제1사단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장진호전투 당시의 미 해병 제1사단
 

미 해병 제1사단의 자랑이 된 이 전투에서 사단장이던 스미스(Oliver P. Smith) 소장(훗날 대장으로 예편)의 리더십은 상당히 유명한데, 오늘날도 그가 보여준 지휘능력은 상당한 반면교사가 된다.


                                          장진호 전투를 승리로 이끈 올리버 미 제1해병사단장
 

우선 올리버는 무리한 진격을 삼가 했다. 그는 아군이 대공세에 나섰던 1950년 10월 북진당시에 UN군부대 중 거의 유일하게 배후의 안전을 확보하고 난 후 사단을 이동시키는 신중함을 보였다. 비록 진출은 더딜 수밖에 없었지만 이러한 철저한 준비는 중공군의 출몰이후 대책 없이 무너져 내린 여타부대들과 달리 후퇴시기에도 미 해병 제1사단이 놀라운 전투력을 유지시켜 주었던 힘이 되었다.
 
                                     험로를 통하여 철수하는 미 제1해병사단 병사들
 

다음으로 그는 위기의 순간에도 전부를 구해내는 용기를 보였다. 애당초 안전한 철수가 불가능해 보이자 상부로부터 병력만이라도 항공편으로 철수시키라는 제의가 들어왔다. 하지만 스미스는 본대철수를 위해 비행장을 확보하려면 일부 병력이 적지에 낙오될 수 있고 또한  장비가 중공군에 넘어가면 나중에 더 큰 위험이 되므로 그는 4,300명의 부상자만 항공편으로 철수시키기로 결정하고 적과 교전하며 육로로 탈출하는 길을 택하였다.

 
                                           전우의 시신을 수습하여 탈출하는 모습
 

해병대는 하나이며 결코 좌절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전 예하장병에게 전하여 사기를 북돋은 후 전 병력과 장비는 물론 전사자의 시신까지 수거하여 적진을 돌파하여 탈출하였다. 당시 그가 부대원들에게 "우리는 철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적을 격멸하고 후방을 향하여 새롭게 공격하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훈시를 내렸고 이것은 전설이 되었다.
 

                                      기념식에 참석한 역전의 용사들 (사진-세계일보)
 

이처럼 신념 있는 지휘관의 용기와 이를 믿는 부대원들이 함께 이루어낸 장진호전투는 비록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전투였다. 따라서 말년에 접어든 많은 참전 용사들이 노구를 이끌고 행사에 방문하였을 만큼 장진호전투 참전용사들이 갖고 있는 자부심은 그야말로 대단하다. 가장 무섭고 어려웠던 시기에 보여주었던 그들의 진정한 용기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많은 교훈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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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혈국방'입니다. ^^ 오늘은 특별히 파워블로거 '울프독'님께서 제공해주신 글을 포스팅합니다.



11월 10일 서울 용산 전쟁 기념관에서 60년전
장진호 전투를 기념하고  미 참전 용사들을 환영하는 행사가 있었다.

한미 양국의 많은 내빈들이 참석했었고 양국군
의장대와 군악대가 출연하였다.

이어서 열린 오찬에는  김태영 국방부 장관과
월터 샤프 주한 유엔군 사령관이 축사를 했다.


                                                         한[좌측] 미[우측] 해병대 의장대

 

       
                                                                참석한 한미 양국의 관중



                                                  평화 웨딩홀에서 열린 오찬


                                                                김 태영 국방 장관의 축배


                            김태영 장관의 축사에 이은 주한 유엔군 사령관 월터 샤프 대장의 축사




미군 뿐만 아니라 터키군 참전병들도 초청되었다.
우리는 형제국이라는 말에 진심으로 동감을 표한다.
1개 대대를 파병한  벨기에에서 오신 분들도 있었다.


                                                     위키페디아에 소개된 카페레타 일병.
                                                   Hector A.Caffereta.


장진호 전투에서 최다의 해병 영웅들이 배출되었다.
특히 중공군이 미 해병을 차단하고자 중간의 요지
덕동고개에서 닷새간 해병 1개 중대가 적 1개 연대를
상대로 벌인 위대한 방어전투는 장진호 전투의 크라이막스였다.

그중 중대 전방 진지에서  다른 해병 전우  네 명과 함께
적 60여명을 사살하고 진지를  고수한 헥터 A.카베레타 일병은 
미 최고 무공 훈장인 명예훈장을 받았다.


                        미 명예훈장을 목에 걸으시고 포즈를 취해 주시는 카베레타 할아버지.                  
                      지금은 플로리다에서 은거하고 계시다.


1921년생.
고교 졸업후 뉴욕주에서 세미 풋볼팀에서 뛰다가
해병에 입대해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장진호 전투에서 다른 세 명의 전우들과 적 1개 중대의
야간 공격에 맞섰다.
실명한 전우가 땅바닥을 더듬어서 찾아 건네주는 실탄 틀립들을
M1 소총에 연달아 장진해가며 기관총처럼 쏘아댔다.
전투내내 자신의 안전을 돌보지 않고 상체를 내놓고 적에게
정확한 사격을 퍼부었다.

육박한 적들이 던지는 수류탄을 M1총의 개머리 판으로 되 받아
치기도 했는데 던진 수류탄을 여러발 되 집어 던지다가
한 발이 폭발하여 손과 상체에 큰 부상을 입고 다음 해
의병 제대를 했다.

중공군은 네 명이 방어한 이 진지 앞에 60명의 사체를
남기고 후퇴 했다.



오찬동안 미군 장성들과 한국군 장성들이 연달아 찾아와서
최고의 경의를 표했다.

사관 생도들이 초대되어 할아버지 참전용사들을 돌보면서
행사를  같이 하던데 교육적으로 참 좋은 아이디어로 생각된다.


                                   방한한 장진호 참전용사 대표님이 답사후 건배했다.


생각해보니 60년전 오늘, 미 해병은 그 열흘전인 1950년
11월 1일  장진호 입구 황초령 남방 수동 전투에서 적
124사단을 격파하고 장진호반에 도착했지만 점점 증강하는
적의 병력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대책를 준비하던
때이다.

바야흐로 풍운 급박하던 60년전 오늘을 생각하는
할아버지들은 감회가 남다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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