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송가[Battle Hymn] 헤스 대령의 숨겨진 전공  -제2편-


 

이것은 마치 서부영화에서 인디언들에게 둘러싸인 포장마차들이 기병대의 구원을 기다리는 것과 흡사했다.


영화에서는 으레 기병대가 극적으로 제 시간에 나타나기 마련이었다.
두 곳에 교신이 된 나는 공격대가 오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미 공군의 항공 공격으로 파괴 된 북한군 T-34


공산군 기계화 부대는 어차피 길에 갇혀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였기 때문이었다. 30분쯤 뒤에 우리 대구 주둔 Bout -1 부대 소속 미군 조종사들이 모는 무스탕 기들이 나타났다.


나는 그들에게 적군의 상공을 선회하면서 우리가 했던대로 
계속 적 부대가 전진을 못하도록 하고 있으라고 일러놓았다.


나와 팀버레이크 중위는 대구 기지로 돌아가 연료와 탄약을
보충하고 다시 현장에 나가 일본에서 날아 올 공격대를 기다렸다.


드디어 일본 기지에서 F-82, F-80, B-26 등이 대거 출동했다.
이들 공격대는 도착과 동시 도로에 늘어선 기계화 부대를 공격했다. 각종 포탄과 기총탄들이 길게 늘어선 기계화 부대에 죽음의 불벼락을 안겼다.


                   한국전 최초로 적기를 격추했던 F-82기, 무스탕. 두 기를 쌍둥이로 합성한 기체를 가지고 있다.


나는 그 날 현장에 3회 출격하였는데 마지막 출격 때 보니 그 산등성이
길에 앞 뒤가 막혀서 늘어섰던 북한군 전차와 차량들이 모두 불타고 있었다.


마침 그 때는 바람도 불지 않아 연기가 수마일 상공으로 치솟고 있었다.
어두워지기 시작할 때는 적군의 기계화 부대 전체가 파괴되고 말았다.


미 극동 사령관 파트릿지 대장은 이날의 성공적인 공습 작전이
위기의 한국 전쟁 초반 전황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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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공군의 무스탕 기 - 헤스 대령이나 다른 교관들도 태극 마크를 단 무스탕기로 출격했었다.

이 공격으로 북한군 105 전차 사단 전차 38량, 자주포 7문, 그리고 트럭 117대가 파괴되고 북한군 다수가 섬멸당했다.

개전이래 유엔군의 항공 공격을 자주 받았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대규모 주간 행군을 했던 북한군은 대 타격을 받은 이 공습 이후 기계화 부대는 철저히 밤에만 기동하는 행군 방법으로 작전을 바꾸었다. 하지만 기계화 부대의 야간 기동이나 전투는 그 효율성을 크게 약화시키고
전진을 대폭 느리게 만든다.


앞에서 말했듯이 기계화 부대는 일본에서 출격했던 
대규모의 항공력 없이는 전부 섬멸하기가 힘들 정도의 대부대였었다.


헤스 대령이 단 두 기의 전투기만으로 출격했지만 좁은 국도에서
앞과 뒤의 차량들을 공격해서 이들을 가두어놓고 일본으로부터 대 규모 항공력이 출격할 때까지 장시간 잡아 놓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기계화 부대는 신속하게 기동해서 촌락이나 조치원 같은 도시로 흩어져 은신처로 피신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점으로 보아 단 두 기로 출격했었던 헤스 대령의 대담하고 지혜있는 대처가 큰 역할을 했다고 보아야 한다.


긴 도로에서 적 기계화 부대가 섬멸된 사례가 또 있다. 한달 뒤인 1950년 8월11일
경남 고성 사천 도로에서 105 전차 사단의 83 기계화 연대가 진격하는 미 해병을 피하여 도주하다가 미 해병 F-4U 전투기들에게 섬멸되었는데 함께 행군 중이던 대 병력도 함께 섬멸되었다. 

고성의 공습에서 83 기계화 연대의 차량 45량과
모터 사이클 55량이 박살나고 북한군 200명이 사살되었는데 평택에서는 덤벼들다가 두들겨 맞은 것이고 고성에서는 도망가다가 두들겨 맞았다는 차이가 있다.

울프 독이 항상  하는 이야기지만 한국 기계화 부대는 도로를 따라 공격과 기동을 해야 하는 근본적 취약점이 있다는
것을 이 북한 기계화 부대의 섬멸이 간접적으로 잘 보여준다.


                                                   대전 시가로 행진해 들어오는 105 여단 부대.
운좋게도 평택의 대폭격에서
섬멸된 부대와 따로 기동했었기 때문에 살아 남은 부대였다. 모터 싸이클을 모는 북한군은 모택동 군에서 넘어온 중국 동포들로 구성된 정예 부대였었다. 그러나 이 부대는 경남 고성에서 미 해병의 진격을 피해 도주하다가 모두 섬멸되고 말았다.


역시 같은 맥락이지만 산길에 기계화 부대를 몰아 넣지 말라는 한국 전쟁의 교훈을 북한 측이 여실히 보여준 사례이기도 하다.

평북 운산의 1 기병사단이나 장진호반의 미 7 사단 32 연대, 서울 북방 고양의 해피 밸리 전투에서의 영국군 얼스터 연대의 경우 중공군이 선두와 후미를 대거 인력으로 막은 다음 공격해서 섬멸당했는데 북한군은 단 두대의 무스탕 전투기에
앞뒤를 막히고 섬멸당한 것이 특색이다.


1951년 1월 3-4일 야간에 있었던 해피 밸리 전투를 아는 분은 극 소수였다. 좁은 논길에서  방망이 수류탄만으로 무장한 중공군에 의해 파괴된 얼스터 연대 배속의 쿠퍼 부대 크롬웰 전차 중 하나. 쿠퍼 부대 14량 전차 모두 수류탄에 궤도가 파괴 되어서 기동 불능상태로 포기되었다.



만약에 이 기계화 부대가 미 공군의 맹습에 섬멸당하지
않고 살아남았더라면 전황이 어떻게 흘러갔을까 한번 생각해보자.


북한 기계화 부대가 그대로 남하했더라면 대전에서 비록 대패했겠지만
7월 20일까지 버티었던 미 24사단의 지연전은 불가능했을 것이고 북한군은 그 보다 훨씬 먼저 대전을 함락하고 남진했을 것이다.



                            1950년 7월 20일 24사단장 딘 소장이 로케트 포로 직접 파괴한 T-34탱크
      딘 소장은 워커 중장으로 부터 7월 20일 까지 버티라는 명령을 받고있었고 부대 붕괴를 무릅쓰고 이를 수행했다.


최악의 경우 일본에서 급파된 미 1 기병사단이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 여유를
박탈하고 낙동강까지 몰아 붙였을지도 모른다.


가능성 높았던 다른 시나리오도 있을 수 있다.
앞에서 말한 바 대로 경부 축선의 빠른 돌파 가능성도 있겠지만, 차량이나 전차 등에서 여유가 있었던 105 전차 사단이 호남 지방으로 우회했었던 북한군 6사단에 차량과 전차등을 배속시켜 이들의 신속한 이동을 크게 도왔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한국전쟁 중 북한군 최대 명장이라는 방호산이 지휘했던 북한군 6사단은
모택동 군 출신으로 구성된 정예 부대로서 유엔군이 눈치채기 전 호남 지방을 급속히 우회해서 낙동강 교두보의 서쪽에 나타나 측면을 크게 위협했었다.


북한군은 뒤 늦게야 하동 전투에서 미군 350명을 사살한
이 부대에 105 전차 여단 소속 83 기계화 연대를 급파했었다. 시간적으로 상당히 늦은 배치였다. 이 연대가 앞에서 소개한 고성 사천 가도에서 미 해병대의 콜세어 부대에게 전멸당한 부대다.


방호산의 6사단은 북한군 부대 중에 유일하게 남해안에
도달한 부대이기도 했지만 인천 상륙 후 낙동강에 전개된 북한군 사단들이 모두 붕괴 분산 도주했는데도 건재 순을 유지하고서 태백산을 따라
북한 지역 집결지로 무사히 도주한 유일한 부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방호산은 전후 1954년 김일성에게 숙청당했다.


북한군 6사단은 순전히 도보로만 이런 신속한 측면 기동을 했었다. 포차(砲車)가 피스톤 수송( 차량이나 선박 지점왕복하면서 사람이나 물건계속 태워 나르거나 실어 나르는 .)을 해서 기동을 했었다지만 거의 도보로만 기동을 했었다.

만약에 김일성이 이들 사단의 가능성을 내다보고 평택 남방에서 파괴된 탱크나 트럭 중 일부라도 지원해주었더라면 휠씬 빠른 속도로 급습해와 낙동강 방어선의 측면이 빨리 붕괴되고 유엔군은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미군의 폭격으로 불타는 북한 유조차


또 평택에서의 폭격은 북한군의
기본 전력을 군수 보급면에서도 크게 약화시켰다는 점에서 그 성과를 평가할 수 있다.


개전 초 소련은 장비 공급에 늦장을 부려서 북한군은
가지고 있는 장비가 파괴되면 보충하기가 쉽지 않았었다.


1950년 7월 2일 충북 충주시 외곽 동락리에서 국군 6사단 7연대에게
전멸당한 북한군 15사단 48연대는 800명의 전사자를 내고 트럭도 60 대나 빼앗겼다. 그런데 이 트럭이 이 연대가 가진 전체 자산이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전투가 있었다.

북한군 연대장
김치구가 지휘하는 이 연대는 다시 남하하다가 경북 상주 화령장에서 국군 17연대에게 기습당해 전멸의
대패를 당해야했다.


특기할 것은 김치구 중좌가 지휘하는 이 연대는 동락리에서
손실당한 차량을 보충하지 못하고 소가 끄는 달구지로서 군수품을 운반하며 남하했었다는 사실이다.

두 번에 걸쳐 치뤼진 화령장 전투에서 김치구의 연대는 단 한량의 차량도 보유하지 않아 국군에게 노획당한 것이 없었다. 동락리에서 대패하고 장비 보충없이 급히 손실 인원만 보충한 채 남진했다는
이야기다.


이 사실은 전투
에서 손실당한 장비를 비교적 수월하게 미군으로부터 보충 받았던 국군과 대비된다.


북한군은 헤스가 주도했던 공습으로 손실당한 장비들을
후의 낙동강 방어전에서도 결코 보충할 수 없었다. 이 공습으로 북한은 전투력의 약화라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던 것이다.


                         금강 방어선에서의 미군 포병 -암담한 시기에 북한군 기계화 부대가 섬멸되었다.


미국이나 한국에서 작전의 명칭조차 없이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
이 폭격 작전에 명칭만이라도 부여해서 한국전쟁의 한 페이지에 의미 있게 평가되었으면 한다.


헤스 대령은 1951년 250회 출격을 끝으로
한국 근무를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헤스 대령과 원장 황온순 여사와 고아.  황온순 여사는 후란체스카 여사가 추천했다고 한다.


그의 고아 공수작전이 크게 보도되자 그의 자서전 집필 의뢰가
쇄도해서 그는 전송가[Battle hymn]라는 제목의 책을 집필해서 출판했다.


그 책이 인기를 끌자 영화계에서도 의뢰가 와 1957년
전송가는 당시 최고 스타 록 허드슨 주연으로 영화화 되었다.


헤스 대령은 자서전과 영화에서 받은 인세를 한 푼도 쓰지
않고 자신이 설립하고 황온순 여사가 책임자로 있던 고아원에 모두 기부하였다.


이 고아원은 후에 서울로 이전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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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가[Battle Hymn]주인공 헤스 대령의 숨겨진 전공 -제1편-



나이 드신 독자 분 중에 전송가(戰頌歌- Battle Hymn)라는 영화와 실제 주인공 딘. 헤스 대령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록 허드슨 주연의 전송가 -1957년-
그러나 사실과 너무 다른 스토리로 비판을 받았었다. 흥행을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이었는데 하여튼 히트를 쳤다.


헤스 대령은 목사 안수를 받고도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 후에
입대해서 전투기 조종사가 특이한 이력을 가졌다. 2차 세계 대전시에는 유럽에서 P-47 전투기를 몰고  63회 전투 출격하는 전적을 쌓기도 했었다.


                      딘 헤스 대령의 한국 참전때의 모습 - F 51 무스탕 조종석에서

그는 한국 전쟁 직전 일본으로 파견되었다가 한국전에 참전하게 되었는데 참전 당시 계급은 소령이었고  한국 근무 중 중령으로 진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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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매니아를 위한 사족이다.

그는 자서전에서 독일 항복 후 기네스 북에도 오른 독일 공군
최고 전사인 한스 유리히 루델 대령이 그의 부대에 투항했었음을 쓰고 있다.


루델 대령은 동부 전선에서 소련을 상대로 슈투카 조종사로 싸웠는데 2,530회나  전투 출격을 했었다.[한국 공군은 유치곤 대위의 203회]

적 전차 격파 519량, 차량 800량, 장갑열차 4량, 적 해군 전함 [32,000톤급의 마라트]격침, 순양함 두척, 구축함 한 척을 격침했었다. 적기 12기 격추, 열두번이나 격추당했었고 세 번 포로가 되었지만 모두 탈출했었다. 폭격기를 몰던 그가 격추시킨 소련 전투기 조종사 중에 레프 세스코프라는 항공 영웅도 있었다.

그는 다리 하나를 잃고서도 외다리로 계속 출격해서  러시아군을 공격했었는데
전쟁 마지막 동부[소련] 전선에서 싸웠던 그는 혹독한 취급을 당할 소련군에 항복하는 것을 거부하고 부하들과 FW-190을 몰고 두시간을 비행하여 서부 전선으로  탈출해서 연합군에 항복하였다. 

전송가에 묘사된 독일 전투기들의 항복 착륙 순간이 어쩐지 낯익어서 루델 대령의  슈투카 파이럿이라는 자서전을 찾아 보니 그가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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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스 대령에게 주어진 미션은 아직도 걸음마 단계인 한국 공군의
조종사들을 훈련시키고 공군을 크게 육성하는 BOUT 1 이라는 명칭의 프로젝트 추진이었다.


그는 미군 장교 4명과 100여명의 병사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왔다.


물자와 장비가 턱없이 부족했었고 고정된 훈련 비행장도 없어서
이 비행장 저 비행장을 전전하였는데, 이처럼 어려운 여건에서도  한국군과 고락을 함께하며 한국 전투기 조종사 훈련에 최선을 다했다.


그의 열성에 힘입어 전투기 한 대 없던 한국 공군은
3년도 안되어 75기의 무스탕 전투기에 자체 출격이 가능한 근대 공군으로 성장했다.


                         전쟁이 발발한 다음날 일본에 F-51(무스탕)기를 인수하러 간 한국 공군 조종사들.
이착륙 훈련만 받고 돌아와 바로 출격했었다. 일본 육군 항공대의 베테랑 조종사들이었지만 익숙치 않은 무스탕기를 조종하다가 이근석 대령이 전사했다. 그는 일본 육군 항공대의 조종사로서 연합군기 23기를 격추했던 조종사였었다. 한국 조종사들은 전쟁의 위기를 넘기자 헤스 대령의 교관들로 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다시 이수했었다.


그는 한국 공군을 훈련시키면서도 수시로 미군
또는 한국 공군 조종사들과 동반 출격해서 250회 출격 기록을 남겼다.



                                                                   100회 출격의 축하식


그러나 헤스 대령은 이런 군사적인 면보다도, 그가 한국 고아들을
위해서 고아원을 세우고 중공군의 남하로 인해 후퇴하던 1950년 12월 14일 미 공군 수송기를 동원해서 1,000명의 전쟁 고아들을 모두 제주도로  피난시킨 대 수송 작전이 매스컴에 알려지면서 크게 이름을 알렸었다.

 

                                                          헤스 대령이 몰던 무스탕 18번기.
한국 공군의 태극기 기체 표시가 있다. 그의 한국어 번역 로고인 신념의 조인이라는 글이 써있다. 목사인 헤스 대령이 결정한 By faith, I fly.의 한국어 번역이었다. [믿음으로 비행한다는 원래의 뜻이 조금  왜곡 된 느낌이 든다.]


그는 한국에서 근무하는 동안은 물론 임기를 끝내고 미국에
돌아 간 뒤에도 계속 자금을 모아 고아원을 돌봤었다. 이승만 박사 내외와도 아주 가까웠던 그는 한국 역사에서 가장 유명하고 한국 민족에 가까웠던 미 공군 조종사로 남아있다.



           그는 이승만 박사를 아주 존경했었고 이승만 박사 내외는 그를 아들처럼 아꼈다. 훈장 포상식 뒤의 촬영.


한국을 자주 방문했던 헤스 대령은 93세의 나이에도
아직 생존해있다.


                                                C-54 수송기 10대로 단행한 1,000명 고아의 제주도 공수
장난감 자동차 공수 작전이라는 명칭이 붙어있다. 옆의 원장 황온순여사는 전쟁중 아들을 잃었었다.이화 여전을 나왔고 영국 유학을  다녀와 영어가 능숙했었다. 2003년 작고.


그러나 헤스 대령이 한국 전쟁 중에 전투기를 몰고 츨격하여
큰 전공을 세웠던
사실은 군이나 언론에서 잘 몰라주고 있다.

평택 남방 도로에서 적 기계화 부대의 등뼈를 부러뜨린 폭격 작전인데 전쟁 초기 극히 불리했던 한국전의 전황 극복에 엄청나게 기여한 항공 공격이었다.


그 때 한국군은 북한의 기습으로 입은 심적 물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한국 전선에 투입되었던 미군들도 7월 5일 오산 죽미령 전투에서 대패한 후 계속 밀리기만 하던 터였다.


오산 죽미령 공격은 북한군 최정예 4사단 18연대가
실행했었고 105전차 사단은 33량의 T-34 전차를 동원하여 오산  방어선의 중앙 도로를 돌파하여 공격의 예봉을 담당했었다.


그런 때에 딘 소장은 제 24사단을 재편하여 대전 북방에 방어선을 구축하고자
했다.

아래는 헤스 대령의 저서 전송가에서 빌려온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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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은 마침 일요일이었는데 아침 날씨가 너무 흐려서 우리 훈련단은 그냥 죽치고 앉아 있었다.

[이 날은 오산 죽미령 전투에서 패배한지 닷새 되는 7월 10일이었다. 이 무렵은 장마철이어서 계속 비가 왔었고 한반도 전역의 기상이 좋지 않았었다. 1950년 7월 10일은 일요일이 아니었는데 헤스 대령이나 작가가 착각을 한 듯하다.]
 

마침 통신 정비병 하나가 F-51 무전기를 작동시켜려고 만지작 거리고 있었는데 미 24사단 21연대에 배속된 공군 항공 통제단[FAC] 짚차의 무선을 통해 비상 항공 지원의 요청이 수신되었다.


이 불순한 날씨에 일본에서 전투기가 급히 온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현실적으로 우리 Bout-1 훈련단 비행기가 비교적 가까이 있던 셈이었다. 그런데 우리의 활주로는 연일 쏟아지는 비 때문에 절반 정도는 6인치 되는 깊이의 물에 잠겨 있었다.
 

허나 비상 지원 요청을 받은 이상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조종사들한테 모두 출격하라고 명령하는 것 역시 정당한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누구 지원자가 있나 물었더니 그 당시 10여명의 
미군 조종사 가운데 한 사람인 팀버레이크 중위가 나섰다.

우리 둘은 무스탕기를 서서히 활주로로 몰고 나가 신속하게 폭탄과 기총탄을 무장할 만큼 무장하였다. 우리는 완전 무장으로 무거워진 기체를 가까스로 활주시켜 이륙하였다.


상공에 오르자 나는 지원 요청을 한 전방의 FAC에게 무선을 보냈다.
그랬더니 전방에서 국도를 따라 내려오는 기계화 부대를 공격해달라는 것이었다. 상군은 기계화 부대에 대해서 속수무책이었다. 우리 육군에게는 적 탱크를 파괴시킬 중무기가 없었다.[최선의 대전차 무기인 3.5로케트 포는 대전 전투 때부터 사용되었다.]


우리가 목표물을 향하여 날아가자 하늘이 맑아졌고 적의
기계화 부대가 환히 내려다 보였다. 이것을 보자 나는 전율을 느꼈다.


                                                          한국 공군 F-51(무스탕)기 편대의 출격



탱크, 트럭, 기타 별별 차량들이 10-15마일 가량 되는 비포장 도로에
줄을 지어 가고 있었는데 높은 상공에서 보니 부대 행군 간격 때문에 마치 중간 중간 토막 난 뱀처럼 보였다.


전방 항공 통제단에서 보낸 무선으로 들려오던 경악이 섞여있던
목소리를 이제 충분히 이해 할만했다.


상황이 이러했으니 F-51 2대 가지고는 어림도 없었다.
그 때에 내 비행기는 무선이 가능했으나 팀버레이크 중위의 비행기와는 교신이 안 되었다.


나는 손짓으로 그에게 이 기계화 부대의 후미를 공격하라고 
일러 놓은 다음 나는 부대의 선두로 가서 타격을 가하기로 하였다. 우리는 기계화 부대 양 끝에 급강하 하면서 기총탄을 퍼붓고 폭탄 세례를 가했다.


다행히도 우리의 폭탄들이 목표했던 곳들에 모두 명중했다.
선두와 후미의 차량들을 폭파시키는 동시에 목표에 커다란 구덩이를 만들어 놓았으니 북한군들은 행열 앞과 뒤 어디로건 빠져 나갈 길이
없이 도로에 고정되고 말았다.


이들을 가두어 놓은 다음 나는 긴급 호출 신호인 메이데이를
기지 사령부로 날렸다.


                                                              장마철의 F-51(무스탕) 출격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답신이 없었다. 바로 아래에 대물 표적을 놔둔 나는 단념할 수가 없었다. 이런 대물 표적을 처분하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항공 공격대의 출격이 필요하였다.

[
당시 한국에는 미 공군의 대부대가 없었다. 아직도 일본의 공군기지에서 한반도로 출격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헤스 대령은 일본 기지를 호출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답신이 올 때까지 30-40분 간격으로 반복 호출을 하면서
차량 대열에서 쏘아 올리는 대공 사격을 제압하는 기총 사격을 되풀이 하였다.


적군의 대열 자체는 그대로 놓아둔 채 적군 차량 중에서 대열 옆길로
빠져나와 탈출하려는 새치기 차량들을 보이는대로 공격했다.


드디어 나의 메이데이 신호가 마침 일본 상공에서 불순한 기후 때문에
이다쓰케 공군기지에 비상 착륙하려던 어느 미 공군 비행기에 포착되었다.



헤스 대령이 한국 참전시 그의 오른 팔 역할을 했던 크레이그웰 중위. 혹심한 미군 내부의 인종 차별을 이겨냈고 아주 유능한 조종사였었다.


목마르게 기다리던 답신이 있자 나는 이 쪽 상황을 설명하고
올 수 있는 모든 전투기들은 다 와주기를 청하였다.

일본 교신 후 대구 소재 미 육군 통신대와도 교신이 트여 대구 비행장에 있는 나의 부대 비행기들도 모두 출동하도록 연락해줄 것을 부탁했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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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마스 이야기 [ 3 ]

                  1950년 ( 서울 ) 에피소드


 

AIDS로 유명을 달리 하기는 하였지만, 명화 자이언트(Giants)에 출연 하였던 당대의 미남배우 록 허드슨 (Rock Hudson) 입니다. 지금 봐도 참 잘생겼군요.

 
 

마릴린 먼로만큼은 아니지만 당대의 섹스심벌인 마사 헤이어 (Martha Hyer) 입니다.

 
 

인도 출신으로 말론 브란도의 첫 번째 아내이기도 했던 안나 카슈피 (Anna Kashfi) 입니다. 여담으로 브란도가 바람 핀 것에 분노하여 이혼 법정에서 브란도의 귀 방망이를 날린 에피소드로도 유명합니다. ( 갑자기 골프채로 얻어맞으며 도망 다닌 '숲속의 호랑이'가 생각난다는 -.- ; )

 
 

이분은 한국계인 필립 안 (Philip Ahn) 으로 안창호 선생님의 첫째 아드님이기도 합니다.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동양계 영화인의 대부역할을저 하였는데 참고로 배역 중 " 일본인 악당으로 연기하여 비참하게 최후를 맞는 역할이 제일 재미있다, " 라고 하였습니다. ^^

 
 

위 배우들은 1957년 미국 유니버설 영화사에서 제작한 전송가 (Battle Hymn) 에 같이 출연 하였는데, 전송가는 실존 인물인 딘 헤스 (Dean Hess) 대령의 동명 자서전에 기반을 두고 제작한 영화로 할리우드 영화로는 보기 드물게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외국영화에 우리나라의 이미지가 잘못 묘사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당시에는  더더욱 한국에 대해 알려진 것이 없어 태국식불상이 소품으로 나오는 등 고증이 잘못된 점도 있고, 더구나 전쟁을 배경으로 하다보니 어둡고 비참한 면이 나오는데 이것은 당시의 제작 여건상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영화 속에 묘사된 서울 거리

 
주인공 헤스 (록 허드슨 분) 대령은 제6146기지 부대장으로 1950년 7월 부임하여 최초의 한국공군 전투기조종사들을 훈련시켜 배출한 교관이었으며, 또한 직접 전투기를 몰고 2백50여 차례나 출격하기도 한 용맹한 파이터였습니다. 이러한 전과로 그는 미국 공로훈장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무공훈장도 수여 받았습니다.

 
                                이승만 전대통령으로부터 무공훈장을 수여받은 헤스

 
특히 그가 조종한 F51 무스탕 제18번기는 동체에 信念의 鳥人이 새겨져있어 더욱 유명한데 현재도 한국공군의 모토가 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실질적인 한국공군의 아버지라 불릴 만한 군사적 업적을 이룬 인물입니다. 그렇지만 헤스대령은 한국전쟁 고아들을 전쟁의 위기에서 극적으로 구출하는데 도움을 준 인물로 더욱 유명하고 영화는 이런 내용을 각색한 것입니다.

 
                              한국 공군의 모토가 된 헤스의 18번기 '신념의 조인'

 
전쟁고아들을 돌보던 황온순 (극중 양은순, 안나 카슈피 분) 원불교 보살은 우연한 기회에 제5공군사령부에 군목인 러셀 브레이즈델 (Rusell Blaisdell) 중령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한국보육원 설립자인 황온순 보살은 한국전쟁 고아들의 어머니이시고 이를 도운 브레이즈델 목사는 한국전쟁의 쉰들러로 추앙받는 분입니다.)

 
                     2001년 한국보육원에서 재회 한 황온순 보살과 브레이즈델 목사

 
그러던 중 중공군의 개입으로 1950년 12월 아군의 후퇴와 서울소개가 결정되자 황온순 보살과 브레이즈델 목사는 고아들을 인천에서 배편으로 피난시키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선편이 부족하여 일부 어린이만 배를 탈 수 있었고 907명의 어린이가 적진에 고립될 위기에 빠졌습니다.

 
                                         수송기에서 내리는 전쟁고아들
                                 (사진은 전송가 촬영을 위해 미국 방문 중의 모습)

 
바로 그때 이런 사정을 접한 헤스 대령이 16기의 C-54수송기를 확보하여 김포공항에서 제주도로 고아들을 공수하는 계획을 실시하였습니다. 중공군이 서울에 입성하기 바로 전인 1950년 12월 20일, 모든 전쟁고아들이 안전하게 제주도로 탈출할 수 있었고 그해 크리스마스를 안전하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작전명 Kiddy Car Airlift로 미군 전사에도 기록된 보기 드문 인도주의 작전이었습니다.

 
                                           황온순 보살과 헤스 대령
 

이러한 내용을 극화 한 것이 바로 영화 전송가인데 영화 속에서 당대 미남 배우 록 허드슨이 어눌한 한국말로 인사하는 것과 은순(황온순 보살)역을 열연 하였던 안나 카슈피 역시 우리말로 전쟁고아들에게 노래를 불러 주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또 영화 속에 고아로 출연한 어린이들 대부분이 영화 촬영을 위해 직접 미국에까지 갔던 한국보육원의 전쟁고아들이었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황온순 보살과 고아들
 

당시의 전쟁고아들 대부분이 지금은 70세 가까이 되거나 고인이 되셨을 만큼 오래전의 일이 되었지만,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 전쟁의 폐허 속에 내버려졌던 수많은 고아들이 급박한 상황에서도 안전한 곳으로 극적으로 이동하여 따듯한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는 기적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은 결코 영화 속의 모습이 아니라 바로 지금 살고 있는 이 땅에서 벌어졌던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의 가슴 아픈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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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비 트랙백 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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