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에는 유효기간이 없다
 
 
 
다음의 기사는 조금 오래전의 내용인데,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어 그 일부를 간략히 소개한다.

   ( 2004년 8월 24일 연합뉴스 )
    제1차 세계대전 때 사망한 오스트리아 군인의 시신 3구가 지난 20일 이탈리아 알프스 산맥의 빙하에서 거의 완벽
    하게 보존된 채 발견됐다 ... (중략) ... 역사학자들은 이들이 1918년 9월 3일 전투 중에 수류탄에 의해 사망한 것
    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날 이탈리아군과 호주군(*주 - 기자가 오스트리아를 오스트레일리아로 착각하여 번역한
    듯
) 은 '대전투'라고 불리는 교전을 벌였으며 오스트리아군이 11명의 사망자를 내고 승리했다. 이들의 장례식은  
    24일 오후 치러지며 사망한 지 86년 만에 지역 군인 공동묘지에 묻히게 된다
.
 

                  제1차 대전 당시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간에 있었던 알프스 전선의 극적인 모습
 

이 기사를 보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세월이 너무 많이 흘러 그 유족들이라도 찾을 수 있을 지가 궁금하였다. 아마도 망자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보존되어 있다면 직계 또는 방계 유족들을 찾았을 가능성도 있었겠지만, 설사 유족들을 찾았어도 거의 90년이 다 되었기 때문에 망자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생존 후손들은 없을 것이다.

 
                                        알프스 고산 준령을 행군하는 오스트리아군

                      이런 곳까지 올라와 싸울 생각을 하는 것은 아마 인간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더욱 가슴 깊게 느껴지던 것은 국가가 잊지 않고 전사자의 마지막 길을 살펴 주었다는 것이다. 사망자들은 국가의 부름을 받아 최선을 다해 전투에 임하였고 그러한 그들의 노고를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국가가 잊지 않고 챙겨주었다는 것은 한마디로 국가가 부를 때 국민이 나서야 하는 이유이자 동기가 되기 때문이다.

 
                               산악진지에서 이탈리아군을 격퇴하는 오스트리아 척탄병
 

제1차 대전은 오스트리아 역사에서 지우고 싶은 아픈 기억이라 할 수 있다. 패전으로 말미암아 전쟁 전 유럽의 5대 강국으로 군림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한순간에 군소국가로 몰락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 이후 나치에게 강제 합병되고 제2차 대전 후에는 국토가 분단당하는 치욕까지도 겪었다.

 
                                                부상병을 하산시키는 모습
 

이처럼 제1차 대전은 되새기고 싶지 않은 역사의 시작이었지만 오스트리아는 그것을 절대로 외면하고, 부인하고, 왜곡하지도 않고 분명한 그들의 사실로 인식하고 있다. 또한 그러한 과정에서 희생당한 자국국민들의 노고를 결코 잊지않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전사자들이라 할지라도 대우에 극진한 것이다.

 
                         정밀한 기법을 동원하여 6.25전쟁 전사자 발굴 사업이 진행중이다.
 

그런데 이것은 결코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올해는 6.25전쟁이 발발한지 60주년이 되는 해다. 60년 전 일일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무명의 대한민국 국민들이 국가의 부름을 받고 거대한 전쟁에 뛰어들었고 작전 도중 실종되거나 행방불명 된 이들도 부지기수다. 만시지탄이지만 본격적인 발굴사업이 시작된 것이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고 그것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마지막 한명의 용사를 발견하는 그날까지 사업은 계속되어야 한다
 

국민은 국가의 부름이 있다면 의무를 다하여야 한다. 하지만 국가 또한 나라를 위해 그 의무를 다한 국민을 끝까지 책임지는 모습을 보일 때 진정으로 국민들도 그 의무를 다하기 위해 노력 할 것이다. 실종 병사의 귀향에는 결코 유효기간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은 6.25전쟁이 결코 과거의 사실이 아닌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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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구전쟁 [上]


 
 
2010년은 4년마다 열리는 지구촌의 대제전인 월드컵(FIFA World Cup)의 해로 이번 제19회 대회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6월 11일 개최될 예정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의 개최는 경합에 의해 결정되었다기보다는 사상 최초로 아프리카대륙에서, 그것도 한때 흑백 갈등의 상징이었던 비극의 땅에서 세계적 행사를 개최함으로써 평화를 어필하려는 국제축구연맹(FIFA)의 의도에 따라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금번 월드컵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그런데 평화의 제전이라는 모토와는 전혀 동떨어진 사건이 월드컵의 역사에 있었다.
그것도 모든 나쁜 것들 중의 최악이라 할 수 있는 전쟁이 바로 월드컵 때문에 벌어진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니 당대의 기준으로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는데,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도 아닌 불과 한 세대 전의 이야기로 흔히 축구전쟁(Soccer War)로 통칭한다.  

월드컵과 관련하여 월드컵 역사에 있어 유명한, 하지만 창피한 사건이기도 했던 축구전쟁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전쟁의 포연속에서도 열리는 것이 축구경기이지만 어처구니없게 축구가 전쟁을 촉발시킨 역사가 있었다.


 
한 세기 전의 영국이나 현재의 미국 정도가 아니면 대양을 건너가서 외국과 전쟁을 벌일 나라는 사실 없다고 보아야 한다.
때문에 대부분 국가 간의 충돌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나라 사이에서 발생한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고 역사적으로 보면 대부분 국경을 접하고 있는 나라간의 사이가 좋았던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반대로 멀리 떨어져 있는 국가들끼리는 사이가 나쁠 일도 없고, 혹시 사이가 나빠진다하여도 전쟁까지 벌어지기는 사실 힘들다.
예를 들어 쿠바가 한때 우리나라의 적성국이었지만 적대국이라 하기에 곤란하였던 이유도 사실 너무 많이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전쟁은 인접국 사이에서 벌어진다.

 

우리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고만고만한 나라들이 몰려있는 중미(Central America)의 경우만 해도 역사적, 인종적, 언어적, 종교적, 문화적으로 많은 공통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웃간의 사이가 좋지 않은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그 중에서 비슷한 시기에 독립한 국가들로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엘살바도르온두라 사이에서 전쟁이 발발하였던 적이 있었는데, 그 직접적인 원인은 어처구니없게도 축구 때문이었다.
축구전쟁이라는 명칭처럼 축구가 양국간 전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기는 하였지만, 이면에는 전쟁이 발발할 수 밖에 없었던 내재적 요인이 축적되어 폭발할 순간만 기다리고 있었던 상태였다.
마치 호시탐탐 전쟁을 개시할 구실만 찾고있다가 사라예보의 총소리로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국경을 서로 맞대고 있는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 모두 독립 이후 계속해서 반복된 정변으로 해가 뜨고 질 정도로 정부가 안정되지 못한 전형적인 중미 국가들이었다.
여담으로 중미에서 정치적으로 안정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는 나라라면 코스타리카 정도가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이 지역은 정치적 안정을 찾아보기가 상당히 힘들다. 
그런데 일본의 통일을 이룬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군부가 군부통치하던 아르헨티나가 내부의 불만을 외부로 표출하여 무마하기 위해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켰던 것처럼, 1960년대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의 정부 모두는 국가 이익을 위해 타국의 이익을 침해하는 정책을 용인하고는 하였다.

많이 닮은 엘살바도르(좌)와 온두라스 국기

 
 
20세기 초부터 약 30만 명의 엘살바도르 국민들이 국경을 넘어 온두라스(인구는 양국이 얼추 비슷한데 국토는 온두라스가 8배 정도 크다)로 이주하였는데 이들이 온두라스의 경제권을 급속히 장악하고 사회의 상층부를 이루게 되었지만 온두라스 국민들에게는 배타적인 모습을 보여 왔다.
그러자 1969년 온두라스정부가 새로이 농지개혁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눈에 가시같던 엘살바도르인 수만 명을 국외로 추방하자 두 나라 사이의 감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두 나라 관계가 악화되던중 월드컵예선전이 열렸다.(1970년 멕시코월드컵 포스터)


 
바로 이런 와중에 1970년 제9회 멕시코월드컵 중미예선에서 두 나라가 맞서게 되었다. 홈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치루어진 예선전이 벌어져 온두라스에서 1969년 6월 8일 경기가 먼저 열렸는데, 이 경기에서는 일방적으로 응원을 받은 홈팀 온두라스가 1-0으로 승리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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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노선?
 
 
신문이나 방송에서 자주 인용되고 표현인데 많이 접하였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오늘 국제유가가 마지노선으로 여겨지던 배럴당 XX달러를 넘어섰습니다.
여야는 올해 말을 마지노선으로 정하고 원내 통과를 완료하기로 합의 하였습니다.
 
흔히 위기감을 나타내기 위해 마지노선 (Maginot Line) 이 인용되는데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최후의 한계를 은유적으로 표현합니다.  다시 말해 더 이상 양보하기 힘든, 또는 최후의 보루로 반드시 고수하여야 할 목표임을 의미하며 또한 그 만큼 돌파하기 힘든 든든한 방어막이라는 뜻도 함께 내포하고 있습니다.

 
                      막아야 할 위기의 한계점으로 마지노선이라는 말이 종종 인용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참으로 잘못된 표현이라고 생각 됩니다.  戰史에 있어 마지노선은 최후의 보루가 아닌 적을 가장 앞에서 방어하는 최전선의 방어물이었습니다.  또한 뚫릴 수 없다는, 또는 뚫려서는 곤란하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대명사와 달리 실제로는 나라를 구하지 못하고 너무나 허무하게 종말을 맞이하였습니다.

 
                                 하지만 마지노선은 허무하게 종말을 맞이하였습니다.
                                     (독일군에게 항복한 마지노선의 프랑스군)

 
참호를 깊게 파고 일진일퇴 피 말리는 대치 끝에 제1차 대전에서 결국 승리를 거머쥔 프랑스는 방어가 최고라는 생각이 뇌리에 각인되어 버렸습니다.  따라서 참호를 더욱 깊게 파고 이를 더욱 단단한 보호물로 막아버리면 어떠한 적의 공격도 물리치고 최후의 승리를 얻게 된다는 믿음은 맹신이 되어버렸고 전후 많은 논란 끝에 엄청난 비용을 들여 독불국경에 마지노 요새선을 건설하였습니다.

 
                   참호전의 끔찍했던 기억은 전후 거대한 요새선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

 
장차전에서는 고정화된 요새가 그리 효과적이지 않을 것이라는 일부의 반대도 있었지만 프랑스 젊은이의 40퍼센트가 사상 당하였을 만큼 제1차 대전의 상처가 워낙 깊어 거금을 들여 방어막은 근대과학의 정수를 모아 구축 될 수 있었습니다. 1927년부터 1930년까지 약 200억 프랑이라는 막대한 비용을 들어갔는데 이 때문에 공군력 확충 등에 실패하였다는 평가까지 나올 정도였습니다.

 
                               독불국경을 따라 어마어마한 요새선이 만들어졌습니다.

 
건설은 베르덩 전투에서 부상까지 당한 당시 육군장관 마지노 (Andre Maginot) 의 주도로 스위스부터 룩셈부르크에 이르는 프랑스와 독일의 국경 750킬로미터를 따라 건설되었고 그의 이름을 따서 이 장대한 요새선의 이름이 명명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노라는 이름은 어떠한 외침으로부터도 안전하게 프랑스를 보호할 수호천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고 국민들도 그렇게 믿었습니다.

 
                     프랑스국민들은 마지노선이 그들을 지켜줄 것으로 맹신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위대한 군사 건축물의 결정체가 한심한 콘크리트임이 판명 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1940년 독일침공군은 이곳을 우회하여 연합군을 던커크해변에 고립시켜 버리면서 전쟁을 순식간 끝내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움직일 수 없는 요새에 안전하게 틀어 박혀 있던 수십만의 프랑스군은 뒤로 돌아 나타난 독일에게 얌전히 항복하는 것으로 임무를 끝냈습니다.

 
                  하지만 배후를 돌파 당한 마지노선은 콘크리트 덩어리에 불과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악몽 같은 참호전이 재발되더라도 완벽하게 자국의 병사들을 보호 할 수 있다면 최종 승자가 된다는 고루한 교리에 집착하여 나타난 결과였고 이 때문에 마지노선은 전사에 지상 최대의 삽질로 표기되었습니다. 물론 마지노선 자체가 뚫린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이를 회피하여  승부수를 띄운 독일의 전략 때문에 무용지물이 되어버렸습니다.

 
                           1944년 프랑스를 회복한 미군이 마지노선을 바라보는 모습

                   가장 중요할 때 하나도 쓸모없던 공룡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였을지요?

 
때문에 마지노선은 굳건한 방어막이나 반드시 지켜내겠다는 의지를 표현하는 말로는 부적합 합니다.  결론적으로 나라를 구하지 못한 방어막은 결코 최후의 보루를 의미하는 중요한 의미로 쓰여서는 곤란합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마지노선은 무용지물이나 미래를 제대로 내다보지 못하고 현실에만 안주하려는 단순한 생각이 낳은 한심한 결과의 대명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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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된장!  우리 이긴 것 맞아?
 
 
 
지난 11월 11일은 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제1차 세계 대전이 종전한지 91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와 관련한 작은 생각입니다.

 
                     우리에게 낯설지만 제1차 세계대전은 지옥의 전쟁이었습니다.
 

이렇게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격투기 선수인 추성훈과 최홍만이 경기를 벌였습니다. 추성훈이 경기개시와 더불어 최홍만을 흠씬 두들겨 팹니다. 최홍만이 종종 반격을 하였지만 라운드가 계속 될수록 추성훈의 일방적인 우세 속에 경기가 진행되었고 결국 최홍만은 너무 맞아서 두 눈이 부어서 감길 정도로 수세에 몰렸습니다.

 
         실컷 몰리다가 회심의 반격을 하려는데 상대가 기권하여 버리면 조금 황당하겠죠?
 

그런데 최홍만을 때리다 때리다 추성훈이 지쳐버리고, 이틈을 노려 뚝심의 최홍만이 반격을 하려는데 갑자기 추성훈이 타월을 던지고 기권을 합니다. 물론 이렇게 되면 최홍만은 기권승을 거두는 것이지만, 온몸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추성훈을 제대로 때려 보지도 못하였으니 얼마나 약이 오를까요? 차라리 패했으면 그러려니 할 텐데, 이런 경우라면 승리를 얻은 것이 실감도 나지 않고 그리 기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쟁에서도 그런 경우가 왕왕 있었습니다.
 

전사를 살펴보면 이런 황당한 승리를 거둔(?)전쟁이 있었습니다. 서양에서는 대전쟁(Great War)이라고 더 많이 불리는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그러합니다. 세계대전으로 호칭될 만큼 서류상으로는 여러 나라가 참전 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 독일과 러시아의 동부전선과 독일과 영국, 프랑스 연합군이 싸웠던 서부전선의 전쟁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제1차 대전의 최대 격전지였던 서부전선
 

그런데 이 전쟁의 패자(敗子)가 다 아시다시피 독일입니다. 외부와 고립된 상태로 장기간의 총력전을 펼친 결과, 독일 경제가 파탄에 이르러 더 이상 감내할 수 없는 지경에 다다르자 결국 항복하였지만, 사실 단지 물적, 인적 손실의 관점에서 볼 때 바다 건너와서 싸운 영국과 뒤 늦게 참전한 미국을 제외하고는 독일의 손실은 제1주적이었던 프랑스나 러시아 보다 적었습니다.

 
            독일도 많은 희생을 겪었지만 오히려 승자인 프랑스의 피해가 더 컸습니다.
                                   (베르덩전투의 독일군 집단묘지 )
 

오히려 브레스트-리토프스크조약에 의거 휴전한 동부전선은 제정러시아의 많은 영토를 전리품으로 얻은 독일이 승자의 입장이었습니다. 서부전선으로만 축소한다면 프랑스와 벨기에영토에서 대부분의 전쟁행위가 벌어졌습니다. 다시 말해 99% 이상의 물적, 인적 피해가 프랑스와 벨기에 영토에서 발생하였던 것입니다.

 
                   서부전선에서 지옥이 재현된 곳은 프랑스와 벨기에의 영토였습니다.
                                        (서부전선 주요 전투지역도)
 

연합군이 쏘았던, 독일군이 응사했던 간에 상관없이 포탄들은 프랑스나 벨기에 땅에서 폭발하였고 이 때문에 이들 국가의 영토의 물질적 피해는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심하였습니다. 이른바 현실에 등장한 지옥으로 표현되는 마른, 이프르, 솜므, 베르덩 전투 등의 일련의 대회전으로 인하여 서부전선은 말 그대로 No Man's Land가 되었던 것 입니다.

 
                   항공촬영한 전선의 피탄공 인데 마치 스펀지 같은 모습입니다.
                               과연 저곳에서 살아날 수 있었을까요?
 

원래 사이도 나빴고 감정도 좋지 않은 사이였지만, 전쟁 내내 이처럼 무서운 피해를 겪었기 때문에 프랑스가 종전 후, 베르사유조약으로 독일을 철저하게 망가뜨리는데 기를 쓰고 앞장섰던 것은 한편으로 충분히 이해할만한 합니다. 문서상으로는 항복을 받았지만 독일영토에 제대로 총알 한발 날려보지 못하고 전쟁을 끝내었기 때문에 프랑스는 얼마나 약이 올랐을까요?

 
            승자가 얻은 것은 황당한 폐허뿐이었는데 이런 것을 승리라 할 수 있는지요?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어 독일이 항복을 하고 두 손을 들었을 때, 물론 지긋지긋한 전쟁이 드디어 끝나서 좋기는 하였겠지만 막상 독일을 제대로 때려보지도 못하고 막아내기만 급급하였던 프랑스는 이렇게 이야기 하였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된장, 아니 케챱! 우리 이긴 것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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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대밭이 된 약소국

독일은 계획대로 벨기에를 돌파하여 노도와 같이 북부 프랑스로 쇄도하여 들어갔으나,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필히 우익을 강화시켜라"라는 유언을 남긴 슐리펜(Alfred Graf von Schlieffen)의 의도와 달리 병력을 우익에 집중하지 못한 당시 독일 육군 참모총장 小몰트케(Helmuth von Moltke)의 실책으로 마른전투(Battle of Marne)에서 독일군의 진격이 멈추게 되고 이후 종전까지 무시무시한 참호전에 돌입하게 됩니다.


                                   마른에서 프랑스는 독일의 진격을 극적으로 막아내었고
                                 이후 서부전선은 참호전으로 변모하였습니다.


이후 지옥으로 변한 참호전은 후방에 앉아있는 지휘관들이 상황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체로, 이전 전쟁과는 비교 할 수 없는 엄청난 살상무기로 무장한 상대편 진지로 나폴레옹 전잰당시처럼 무조건 병력을 돌격시켜 말 할 수 없는 인적피해를 야기한 그야말로 무식한 전쟁의 표본이 됩니다. 때문에 이런 결과 참호로 연결된 전선부근은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됩니다.


               혼히 No Man's Land 라고 표현할 만큼 전선은 살아있는 지옥이었습니다.


전쟁 참여국의 국토가 유린된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 일 수 있겠지만 고착된 전선 한 가운데 놓여있던 벨기에는 남의 나라 전쟁 때문에 국토가 박살(?)나게 됩니다. 전사에는 벨기에가 제1차 대전 때 연합국 편이라고 단순히 설명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중립을 짓밟은 독일의 침략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택할 수 밖에 없었던 차선책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강대국 간의 전쟁으로 벨기에 영토는 풍비박산 났습니다.


특히, 그 악명 높은 독가스가 최초로 사용 된 곳도 벨기에의 이프르(Ypres)입니다. 1915년 4월말에 독일은 병력 이동을 은폐하기 위한 수단으로 약 5천 개의 가스통을 열어 연합군측으로 염소가스를 흘려보냈고, 예상치 못한 독가스에 연합군은 1만 5천명이 중독되고 5천명이 사망하는 큰 타격을 입게 됩니다. 덩달아 벨기에 또한 본의 아닌 가스피해를 입게 됨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악명 높은 독가스도 벨기에 영토에서 처음 살포됩니다.


1차대전 서부전선에서는 누가 누가 많이 죽나하고 경쟁을 벌인 많은 무서운 싸움이 있었지만 1917년 제3차 이프르 전투의 일부였던 파스샹달(Passchendaele)전투는 연합군과 독일군 양측이 성과 없이 참호와 진흙탕 속에서 고귀한 인명을 무자비하게 희생한 서부 전선에서 가장 끔찍했던 기억으로 남게 된 전투로 기록되며 영불해협에 자리 잡은 벨기에의 아름다운 도시는 지동에서 없어진 것과 같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잠시 동안의 평화


1918년 전쟁이 끝났을 때 서부전선기준으로 패전국 독일은 자국 영토에는 폭탄한방 맞지 않았지만, 막상 승전국 벨기에는 그 참상이 얼마 심하였는지 국제올림픽 위원회(IOC)에서 평화를 열망하는 마음으로 1차대전 후 최초의 올림픽을 1920년 벨기에의 앤트워프(Antwerp)에서 개최하도록 조치합니다. 당시 IOC의 생각으로는 이것보다 더 확실하게 평화를 어필하는 대안이 없었다고 합니다.


                                          1920년 제7회 앤트워프 올림픽 개막식


제1차 대전의 교훈으로 독일은 고착된 전선을 돌파하는 전격전의 교리를 가열 차게 연구하고 호된 경험을 얻은 프랑스는 공격자가 때리다 때리다 지쳐 쓰러 질만한 완벽한 요새를 꿈꾸게 됩니다. 1927년에 착수하여 10년 뒤인 1936년에 완성한 바로 마지노선(Maginot Line)입니다. 마지노선은 총연장이 약 750km로서, 북서부 벨기에 국경에서 남동부 스위스의 국경까지 이르고, 중심부는 독일과 프랑스의 국경을 따라 이어진 영구 요새선이었습니다.


                                              프랑스 방어 전략의 상징인 마지노선


당시 벨기에는 제1차 대전의 결과로 프랑스와 긴밀한 관계를 이루고 있었고, 프랑스 마지노선의 축성에 자극받아 벨기에-독일 국경에 1932년부터 1935년 사이에 에방에말 요새(Fort Eben-Emae)를 구축 합니다. 당시에는 마지노선보다 더 견고하고 강력한 요새로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 요새는 다시는 자국의 영토가 강대국의 싸움에 유린되지 않을 거라는 벨기에 국민의 믿음을 대변한 건축물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벨기에의 자부심인 에방에말 요새
                            마지노선보다 훌륭한 방벽으로 소문이 자자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약소국 벨기에가 그들의 앞에 있던 독일의 위협만 대비ㅏ고 있었지만 위협은 또 다른 곳에서도 잠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우방이라 믿고 있던 프랑스도 만일 독일과의 전쟁이 재발한다면 벨기에를 전쟁터로 이용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무서운 사실을 벨기에는 제대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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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국의 이름으로


독일과 이탈리아의 통일이후 현재까지 유럽의 역사를 살펴보면 5개의 강국이 있음을 알게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후 미국과 소련이라는 초강대국의 등장과는 별개로 이들 5개국은 아직까지도 역사의 주역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열거하면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그리고 이탈리아인데 이들은 서로간의 견제와 균형을 이뤄가며 이합집산을 하였고, 20세기 들어 발생한 두 차례 세계대전의 주역이기도 합니다.


                                   영국의 제국주의 침탈을 풍자한 독일신문의 삽화
                           하지만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것과 같았습니다.


흔히, 세계대전을 이야기 할 때 몇 개국이 참전하고 몇 명이 죽고 등의 통계자료가 나오곤 하는데, 실제 위에서 언급한 국가들 외에 자의적으로 대전에 참전한 국가는 극히 들물다고 단언 할 수 있겠습니다. 굳이 예를 든다면 지금은 사라졌으나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강대국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정도였다고나 할까요? 나머지 국가들은 이들 강대국 간의 이합집산에 따라 마지못해, 어쩔수 없이 전쟁의 폭풍에 휘말리게 되었다고 생각 합니다.


                                        지금은 그저 그런 중부유럽의 약소국이지만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유럽의 강대국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훈련모습)


특히, 독일과 독일의 東西에 접하여 있던 러시아와 프랑스는 이러한 충돌의 중심이었으며, 어쩔 수 없이 이들 사이에 끼인 여러 약소국가들이 전화에 휘 말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동유럽 쪽은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 그리고 냉전종식 후 지도제작 업자들이 호황을 맞을 정도로 국가 및 국경의 변동이 심하여 딱히 어떤 나라가 원하지 않는 전화의 피해를 많이 입었나 판단하기조차 어려운 점도 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직전의 유럽지도
                                       중동부 유럽이 오늘날과 차이가 많습니다.


서부전선으로만 시야를 돌려보면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벨기에, 네덜란드, 록셈부르크의 3개국이 있는데 이들 국가들은 고래싸움에 새우 등이 터지는 꼴로 20세기에 들어 원하지도 않는 참화를 입게 됩니다. 그중 양차 세계대전에서 그들의 의사와 아무런 상관없이 최대의 격전지가 되었던 약소국 벨기에(Belgium)의 눈물에 대해 몇 회에 걸쳐 알아보고자 합니다.


예고된 전쟁터


제1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독일은 언젠가 보불전쟁의 패전국으로 이빨을 갈고 있던 프랑스와 일전이 있을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준비성 강한 독일인답게 구체적인 對프랑스전쟁 계획 또한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른바 슐리펜 계획(Schlieffen Plan)입니다. 최단시간(계획상 6주) 내 프랑스를 쳐부수고 난 후, 러시아를 징벌한다는 한마디로 내륙국 독일이 가장 회피하고 싶은 양면 전쟁 거부책입니다.


                           죽기 전에 장차 독일의 전쟁 해법을 연구했던 참모총장 슐리펜


그런데 이 계획은 독일주력이 독불국경에서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고 중립국인 벨기에를 돌파하여 프랑스 북부로 진공 후 파리를 대포위함으로써 프랑스의 조기 항복을 유도 한다는 점이 핵심 이었습니다. 단지 독불국경보다 벨기에가 평야지대인 관계로 대규모 부대의 기동이 용이하여 파리에 쉽게 근접 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영세중립을 표명하던 약소국의 주권을 철저히 무시한 상태로 계획은 입안되었습니다.


                      슐리펜 계획에 의거 독일은 벨기에를 거쳐 프랑스를 침공할 예정이었습니다.


즉, 전쟁이전 부터 약소국의 주권은 전혀 안중에도 없이 단지 침공의 편이만을 위하여 이나라를 전쟁터로 삼을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인데 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어쨌든 사전에 치밀하게 수립되어 있던 슐리펜 계획에 의거 독일은 1914년 8월 3일 프랑스에 선전포고와 함께 벨기에를 침공합니다.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을 점령한 독일군



프랑스, 러시아와 군사적 협력을 약속한 3국 협상국이기는 하였으나 최초 전쟁발발 당시에는 중립을 표명하였던 영국이 1914년 8월 4일 독일에게 즉각 선전포고를 하게 되었던 명분이 바로 중립국 벨기에를 독일이 치범한 것을 이유로 들었을 정도로 당시 세계는 독일의 기습적인 침공에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였습니다.   

(august의 전쟁사 시리즈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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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열혈아 트랙백 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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