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건너 재탄생한 전투기들 [ 上 ]
 
                                              
                                            승자의 권리
 
 
"귤이 회수를 건너가면 탱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어떤 생물이나 물건이라도 환경이 바뀌면 이에 맞춰 변화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격언인데, 탱자가 귤보다 맛이 없는지는 모르겠으나 본고장을 떠나면 아무래도 품질이 나빠진다는 의미가 내포 되어 있는 말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본고장을 떠나면 그 모습이 변하기 마련이다
                                            (김치를 탱자로 만들어 버린 기무치)
 
 

그런데 반드시 그런 것이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속담이기도 하다. 귤이 강을 건너면 탱자가 될 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반대로 오렌지가 될 수도 있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말이 있듯이 오리지널보다 나중에 나온 파생형이 좀 더 업그레이드 될 가능성도 충분히 많기 때문이다.

 
                              비보이는 한국으로 건너 와서 탱자가 아니라 오렌지가 되었다

 
특히, 무기의 경우가 그러한데 90퍼센트 이상은 시간이 갈수록 오리지널보다 훨씬 성능이 우수한 놈들이 나온다. 그 이유는 최신 무기가 기존 것보다는 성능이 좋아야 이길 수 있다는 단순한 논리 때문이다. 처음에는 상대편 것이 좋다면 비록 카피를 하여 우선 탱자라도 만들겠지만 개발에 관한 노하우가 쌓이면 오렌지를 만들 수 있는 것이 바로 무기 체계다.

                       독일의 보병휴대용 대전차무기인 팬저파우스트를 카피하여 탄생한 RPG-7은 
                  지금도 사용 중인 베스트셀러다.

 

1945년, 연합군이 독일 영토내로 진입하고 제3제국의 멸망이 가시화 되자 품질 좋은 무기를 개발하였던 독일의 수많은 엔지니어들이 살길을 찾아서 갈 길을 가게 되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자의든, 타의든 어쩔 수 없이 미국이나 소련으로 갈 길을 정하였고, 이들이 적국의 엔지니어지만 적극 스카우트하는데 미국과 소련 또한 주저하지 않았다.


                             전쟁말기 앞선 무기체계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였다
                                      (노르트란트의 V-1 제조시설을 점령한 미군)
 

특히 이들 중 미국이나 소련의 목표가 되었던 엔지니어들은 독일이 독보적으로 앞서있던 로켓과 제트기관련 종사자들이었다. 이들은 독일에서 연구하다가 종전으로 중단되었던 프로젝트를 새롭게 자리잡은 미국과 소련에서 재개하였고, 냉전이 본격 개시되자 최신무기를 앞다투어 만들어 내었다.


                             V-2 개발의 중추로 전후 미국으로 건너가 그 명성을 꽃 피운 폰 브라운
 

이런 이유 때문에 로켓이나 제트전투기 분야에서 새롭게 등장한 동서 양진영의 무기들은 유사하게 닮아있다. 당사자들은 독창적으로 개발 하였다고 강변 할지 모르겠지만 기본적인 구조뿐만 아니라 외양까지도 흡사 할 정도였다. 특히 이들 중 백미인 F-86과 MiG-15는 형제지간이라고 불러도 별다른 이의를 제기 하지 못할 만큼 외양이나 성능이 막상막하였다.


                      독일의 패전으로 제작이 중단 된 차세대 제트전투기의 목업인 P.1101

 
F-86과 MiG-15은 패전으로 중단 되었던 메셔슈미트의 P.1101프로젝트와 포커울프가 심혈을 기울여 제작하였던 Ta-183의 아류작들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유사하다. 후퇴익 주익과 동체에 삽입시킨 인테이크와 노즐은 제1세대 제트기들의 기본모양이 되었다. 따라서 P.1101은 F-86에 Ta-183은 MiG-15의 등장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다.

 
                      냉전시기 제1세대 전투기였던 F-86과 MiG-15는 독일의 오렌지들이었다.


 
이처럼 제2차 대전 후에 곧바로 다가온 온 냉전으로 말미암아 이후 미국과 소련의 무기가 세계시장을 순식간 양분하게 되면서 본의 아니게 독일의 귤은 전쟁 당시의 적들에 의해 오렌지로 변화하였다. 그런데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미국과 소련 외에 의외의 장소에서 오렌지가 되었던 경우도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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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연 그들은 바보들이었나?

 
 
일본이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을 일으켰을 때를 제2차 대전 개시일로 보자는 일부의 의견도 있지만, 역사교과서나 백과사전 같은 많은 공인된 자료에는 독일이 폴란드를 기습 침공한 1939년 9월 1일을 제2차 대전의 시작으로 본다. 아마도 당시까지 세계사의 주역이었던 서구를 위주로 역사를 기록하다가 보니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폴란드를 전격 침공한 독일군

 
따라서 제2차 대전과 관련한 대부분의 서적들은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전쟁사를 기술한다. 독일의 침공을 받은 폴란드는 불과 한 달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고 이것은 독일의 급속한 팽창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승자인 독일군의 전과는 상세히 설명하는 반면 순식간 몰락한 폴란드군에 대해서는 무능함을 묘사한 내용이 많다.
 

                     많은 자료가 폴란드군의 무능함을 묘사하고 있다 (포로가 된 폴란드군)
 

다음은 이와 관련하여 가장 많이 알려진 대표적인 내용이다.
 
독일 대 폴란드 전쟁에서 가망이 없음을 알면서도 월등히 우수한 독일 기갑부대와 맞서 싸우는 폴란드 기병대의 모습은 전쟁 장면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면서도 시대가 바뀌었음을 알려주는 비극적인 장면이었다. ( 폴 콜리어 외, 「제2차세계대전」, 2008 )
 
SF영화 속의 한 장면이라면 또 모를까, 전쟁이 장난도 아니고 이게 무슨 황당한 시추에이션? 전차의 위력을 전혀 알지 못하는 기마병들은 승리를 다짐하며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고 있다. 보나마나 지는 전쟁인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전쟁이 아니라 일방적인 학살이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다.  ( 리젠, 「CEO의 원가 자르기 비법」, 2007 )
 

                              폴란드 기병대는 바보 같은 돌격의 대명사로 회자되었다
 

제2차 대전사를 읽다보면 이처럼 폴란드 기병대가 독일 기갑부대를 향하여 창을 꼬나 잡고 돌격하였다가 전멸한 이야기가 자주 인용된다. 이때 군사에 대해 별반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라도 이렇게 생각하였을 것이다. ' 무식한 것들이 용감하다라고 ...'
 
그런데 그것만이 진실일까? 과연 그들은 창으로 전차의 장갑을 뚫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단순, 무식하게 전차를 향하여 돌격하였을까? 폴란드인들은 후진국이라서 전차의 존재를 까맣게 모르고 있었을까?
 

                      과연 그들은 창으로 전차를 뚫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바보들이었을까?
 

영광의 16세기 폴란드를 이끌었던 주역으로, 이른바 윙드 후사르(Winged Hussar)로 알려진 기병부대는 폴란드에서 최고의 정예부대로 자랑스럽게 생각되고 있으며 현재도 의전용 기병대를 운용하고 있을 정도다. 제2차 대전 발발 당시에 폴란드의 기병대는 비록 시대에 뒤쳐졌지만 엄연한 전투병과였다. 따라서 전사를 보면 기병대가 개전 첫날부터 독일군과 격전을 벌인 사실을 종종 찾아 볼 수 있다.
 

                         기병대에 대한 폴란드의 자부심은 크다 (최근 폴란드 기병대의 모습)
 

그러한 전투 중에서 위에 언급하였듯이 오해를 불러왔던 것은 9월 19일 볼카 베그로바(Wolka Weglowa)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제9 마로폴스키(Malopolski) 기병연대가 독일 기갑부대와 격전을 벌여 순식간 100여명이 전사하는 커다란 패배를 당하였는데, 마침 이를 목도한 이탈리아 기자가 '바보 같은 폴란드 기병들의 돌격' 이라고 기사를 작성하면서 이 같은 사실이 널리 알려지고 이후 왜곡정도가 더욱 증폭되었다. 그런데 본질은 결코 그것이 아니었다.
 

                                   전선으로 달려가는 폴란드 기병대의 역동적인 모습

 
우선 독일에 비해 열세여서 그렇지 당시에 폴란드도 엄연히 기갑부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사실 독일의 전차부대가 폴란드를 앞선 것은 재군비를 선언한 이후부터이므로 불과 3~4년 밖에 되지 않았다. 따라서 폴란드군들이 전차를 창으로 뚫을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바보들이라는 말은 성립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을 뻔히 아는 폴란드 기병대는 왜 무모하게 기갑부대를 향해 돌격하였을까?
 

                 폴란드군도 전차를 보유하고 있어 결코 생소하지 않았다 (폴란드 제10기갑여단)
 

당시 폴란드 기병대는 함락 위기에 빠진 수도 바르샤바를 방어하기 위해 이동 중이었는데 우연하게도 대규모의 독일 전차부대와 조우하게 되었다. 진지를 구축하여 방어선을 설정하고 말고 할 수도 없을 만큼 허허벌판에서 순식간 독일군 전차들에게 포위당한 그들이 살 수 있는 길은 항복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망설임 없이 돌격을 선택하였다. 전차를 향해 돌격하는 행위는 정녕 무모하였지만 굴종보다 영예로운 군인의 길을 선택하였다.
 

                           그들은 바보가 아니라 침략자에 굴복하지 않았던 용사들이었다
 

그들은 결코 멍청한 바보들이 아닌 당시의 상황에서 가장 군인답게 취할 수 있던 행동을 망설이지 않고 실시한 영웅들이었다. 전쟁터에서 폴란드 기병대와 마주한 독일군들은 그들에 대해 경외감을 가질 정도였는데, 9월 1일 폴란드 기병대와 격돌하여 승리를 이끈 독일의 명장 구데리안(Heinz Guderian)은 전쟁이후 저술한 저서에서 그들이 보여준 용기와 신념에 대해 찬사를 남겼을 정도였다.
 

                       만일 누가 우리 선배들의 육탄공격을 우화한다면 과연 어떠하겠는가?
                                           (춘천전투 당시 육탄전 재현행사)
 

이처럼 전쟁과 관련된 이야기는 단지 쓰여진 것만이 진실은 아니다. 만일 6.25전쟁 당시에 침략자를 막으려 육탄으로 전차에 돌격하였던 우리선배들을 제3자가 무모한 바보들이라 우화시키고 그것을 남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일까? 우리가 왜곡된 정보만으로 남을 잘못 평가 하는 일은 다시는 없어야 한다. 그러면 남들도 우리를 왜곡하여 우습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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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전차를 만든다는 것이
 
 

전차(Tank)를 전쟁에 데뷔시킨 것은 영국이었고 이를 효과적인 전쟁도구로 승화시킨 것은 독일이었다. 하지만 제2차 대전 이후 지금까지 최강의 기갑전력을 보유한 나라는 소련-러시아라 할 수 있다. 특히 냉전 시기에 소련이 보유하였던 기갑전력은 양과 질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냉전 당시 서유럽을 위협한 소련의 기갑부대

 
특히 1950년대 제1세대 전차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T-54T-55는 무려 15만 여대 이상이 소련 및 동맹국들에서 생산되어 서방을 위협하는 지상군 전력의 중핵을 담당하였다. 우리에게 너무 큰 아픔을 주었지만 전차 개발사에서 최고 성공작으로 평가받는 T-34의 뒤를 이어 T-54, T-55가 대성공을 거두자 이에 자신감을 얻은 소련은 계속하여 기갑전력의 우위를 확보할 제2세대 전차의 개발에 나섰다.

 
                             명품이었으나 우리에게 유쾌하지 않은 기억을 안겨준 T-34
 

이때 개발한 전차가 우랄설계국의 주도로 T-55를 개량한 T-62다. 동시대에 서방의 주력이었던 M-60, 레오파트, 치프텐, AMX-30등과 충분히 맞설 수 있을 만큼 대구경 115mm 활강포를 채택한 T-62는 1978년까지 소련 및 동맹국에서 2만5천대 이상 생산되어 동구권의 주력전차로 자리매김하였다. 현재 북한의 주력전차로 알려진 천마호나 폭풍호도 T-62의 파생형이다.

 
                                           소련 제2세대 전차의 효시인 T-62

 
그런데 유독 기갑전력에 욕심이 많은 소련은 T-62가 막 일선 부대에 배치되기 시작할 시점에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차세대 전차를 이미 구상하고 있었다. 키로프설계국의 주도로 Object 430로 명명된 전차개발안은 한마디로 기존의 상식을 깨는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우선 115mm 활강포(이후 125mm로 대체)를 채택하여 화력을 대폭 증강시킨 것 가지고도 모자라 일발필살의 9M112 대전차미사일을 장착하여 공격력을 극대화하려 하였다.

 
                                                 Object 430 개발시안
 

거기에다가 기존 전차에서 흔히 사용하는 주조장갑이 아닌 세라믹을 이용한 새로운 개념의 복합장갑을 도입하여 방어력도 크게 강화시키려 하였으며, 파워가 향상 된 차세대엔진과 자동장전장치 등을 도입하여 기동력과 전투력을 획기적으로 개선한 한마디로 기존의 상식 틀을 깨는 당대 최고의 전차 개발을 목표로 하였는데, 소련은 이것을 T-64로 명명하였다.

 
                                    T-64는 소련의 야심이 담겨있는 차세대 전차였다
 

그런데 당대의 기술력을 너무 앞선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오히려 T-64의 개발을 더디게 만들었다. 더불어 야심만만하게 먼저 데뷔시킨 T-62가 예상과 달리 중동전에서 서방측 전차에 비해 열세인 것으로 나타났다. 조급해진 소련은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 T-64의 개발과는 별도로 T-62를 우선 개량하는 프로젝트를 시급히 진행하기로 하였다.

 
                           T-64의 개발이 난항을 겪자 T-62를 개량한 T-72가 탄생하였다
 

우랄설계국
은 T-55에서 T-62로 이어진 신뢰성 높았던 플랫폼을 최대한 이용하여 새로운 전차개발에 나서게 되었다. 결국 개발에 난항을 겪고 있던 T-64와 전반적인 성능은 비슷하지만 개발 및 제작이 훨씬 유리한 전차를 개발해 내는데 성공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제2세대 동구권 전차의 대명사가 되는 T-72다. 이후 무려 2만대 이상이 생산 된 T-72는 소련 및 동맹국에 공급되었고 우크라이나에서 현재도 생산중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T-72는 동구권의 주력전차로 급속히 자리 잡았다

 
절치부심하던 키로프설계국이 T-64를 간신히 개발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소련군에만 3,600여대가 배치되는 것으로 생산이 종결되었다. 비록 동맹국에게 공여를 거부하고 소련만이 보유한 최신예 전차였지만 사실 대타로 나선 T-72가 먼저 소련의 주력전차로 자리매김하게 되자 T-64가 대량배치 되기에 상황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비록 T-64는 계륵과 같은 신세로 전락하나 후계자인 T-80의 탄생을 가져왔다
 

참고로 T-72는 이후 한 번 더 변신을 하여 T-90으로 발전하였고 야심만만한 출발과 달리 소련의 주력 전차로 등극하지 못하는 굴욕을 맛보았던 T-64는 개량이 되어 현재 러시아 최강의 전차로 평가받는 T-80으로 발전하였다. T-80이 T-64의 경우와 다른 점이라면 우리나라를 포함한 여러 국가에 수출되어 각국의 주력 전차로 활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K-2 흑표가 최근 밝혀진 난관을 극복하고 최고의 전차가 되기를 기원한다.

 
30여년을 매달리다가 개발포기를 선언한 인도의 ARJUN전차도 그렇지만 T-64는 최고의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소련(러시아)조차도 전혀 새로운 개념의 전차를 만드는 것이 상당히 어려운 일임을 알려준 예라 할 수 있다. 많은 기대 속에 개발을 완료하였지만 본격 제식화를 앞두고 동력계통의 일부문제로 애를 먹고 있다는 K-2 흑표의 최근 소식은 어쩌면 한 번 정도 겪어야 할 성장통일지도 모른다. 만난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K-2가 진정한 지상의 왕자가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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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의 수퍼캐리어에 대한 이야기
 
 

최고의 전략 병기 중 하나로 평가받는 항공모함은 이미 실전에 등장한지 100년 가까이 되었을 만큼 생각보다는 오래전에 개발된 무기입니다.  한마디로 비행기가 무기로 사용되자마자 항공모함이 등장하였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항공모함은 여러 나라에서 여러 형태로 개발되어 사용하다가 제2차 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등을 거치면서 어느 정도 정형화된 모양으로 개념이 정립되어졌습니다.
 

                               최근 부산에 입항한 조지 워싱턴의 모습 (사진-조선일보)
 

현대 항공모함의 표준처럼 여겨지는 슈퍼캐리어(Super Carrier-초대형 항공모함)은 현재 미국만이 운용 중인데, 지난 7월 21일 한-미 연합훈련을 부산에 입항하여 언론에 공개된 배수량 9만 7천 톤의 핵추진 항공모함 CVN-73 조지 워싱턴 (USS George Washington)호도 거기에 해당됩니다.  최초의 슈퍼캐리어의 영예를 가지고 있는 항공모함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건조에 착수하여 1955년 취역한 CV-59 포레스탈(Forrestal)입니다.

 
                                               최초의 슈퍼캐리어인 포레스탈

 
사실 슈퍼캐리어의 명확한 정의가 내려져 있는 것도 아니지만, 배수량기준으로 적어도 7만 톤이 넘고, 경사활주로(Angled Deck)가 장착된 총 길이 300미터가 넘는 갑판, 4개의 사출기 및 엘리베이터 등을 그 외형적인 특징으로 손꼽을 수 있습니다.  즉, 제트화로 대형화된 60여기 이상의 전술기를 탑재하여 최대 한개 편대를 동시에 이함 시킬 수 있거나 이론상으로 함재기를 동시에 이착함을 동시에 시킬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륙하는 다양한 종류의 함재기들
 

이에 부합된 능력을 처음으로 보유한 항모가 바로 포레스탈인데 이후 등장한 미국의 항모들을 통상적으로 슈퍼캐리어라 지칭합니다.  현재도 이 정도 규모의 항모를 실전 운용하는 나라는 미국밖에는 없는데, 최근 취역 한 CVN-77 부시(George H.W.Bush)호까지 이러한 구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정도로 포레스탈은 기념비적 작품이었습니다.  굳이 차이라면 시대의 기술이 접목된 동력, 아일랜드구조, 엘리베이터 위치, 무장이나 센서류 정도라고나 할 정도입니다.
 

           포레스탈의 개념도인데, 최근 항공모함과 비교하여 엘리베이터 위치 등이 차이가 있습니다.
 
 

포레스탈의 등장이전까지 미국이 운용하였던 최대 규모의 항모가 배수량 5만 톤 정도였던 미드웨이급(Midway Class)이었으며, 현재 미국의 항모 이외에 최대 규모인 러시아의 쿠즈네쵸프(Kuznetsov)나 영국의 도입예정인 CVF급 항모도 이착함 능력 및 배수량 기준으로도 60년 전 등장한 포레스탈에 미치지 못합니다.  단지 배수량으로만 따진다면 이에 필적할 만한 항모는 제2차 대전 당시 일본해군의 시나노 정도 밖에는 없습니다.

 
                  러시아 유일 항공모함인 쿠즈네쵸프는 사출기가 없어 운용능력이 부족합니다.
 

포레스탈이 최초로 제식화한 슈퍼캐리어는 맞지만 서류상으로는 제2차 대전 직후 연구된 CV-58 유나이티드 스태이츠(Uniter States)의 개념이 정립된 최초의 슈퍼캐리어이었습니다.  하지만 장거리 전략폭격기, 핵미사일 등의 이유로 항모무용론이 제기되자 개발이 취소되었는데 그 구조가 현대의 항모와 많은 차이를 보이며 오히려 태평양 전쟁 중 일본 항모와 닮았다는 느낌이 들게 합니다.
 

                                  서류상의 계획되다 폐기된 CV-58 유나이티드 스태이츠 
                                경사활주로가 없는 등 현대의 항공모함과 차이가 많습니다
 

이처럼 용도가 폐기 될 운명에 처했던 슈퍼캐리어가 포레스탈로 부활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제트기 시대의 도래에 따른 함재기의 대형화 때문입니다.  오래 동안 대양의 주인이었던 전함(Battleship)이 그 덩치로 인하여 사라진데 비하여 오히려 항공모함이 덩치를 더 키우게 된 이유가 바로 항모의 존재 이유였던 함재기의 크기가 커졌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퇴역한 F-14함재기의 멋진 이함 모습
                       슈퍼캐리어의 등장으로 고성능 대형 함재가의 운용이 가능해졌습니다
 

이전 항공모함은 크기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여기에 탑재하여 운용할 수 있는 함재기가 공군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성능 상 핸디캡을 가질 수밖에 없었으나 슈퍼캐리어의 등장은 F-4, F-14, FA-18같은 대형 함재기의 운용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영국이 수직이착륙기를 이용한 경항모 시대를 개막하였으나 결국 다시 중형 항모정책으로 회귀한 가장 큰 이유는 수직이착륙기와 경항모 자체가 가질 수 밖에 없는 작전능력의 한계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의 항공모함과 작전 중인 영국의 경항공모함
                                  한눈에 보이는 크기만큼 작전 능력의 차이가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미국도 이러한 공룡을 만들어 놓고 그 능력을 제대로 몰라 여러 가지 실험을 하였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으로 이전의 미드웨이급에서는 상상도 못 할 거대비행체의 이착함실험 등이 그것입니다.  비록 시범적으로 KC-130F 수송기의 이착함에는 성공하였지만 대형 수송기도 할 수는 있다 정도만 증명하였을 뿐 갑판 운영에 있어서의 비효율성 등으로 단지 실험으로만 끝납니다.


                              포레스탈 갑판에서 이함대기 중인 KC-130F의 실험 모습
 

이처럼 새롭게 시도할 연구가 많았을 만큼 슈퍼캐리어는 군사 패러다임의 정립에 많은 변혁을 불러왔고 이때부터 무서운 전략 병기로 본격적으로 진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처럼 새로운 장을 개척한 포레스탈은 1993년 퇴역하여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무기사적 의의는 크고 영원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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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티오피아의 용맹한 사자들

 
 
조금 오래전인 2007년 3월 7일, 강원도 춘천에서 뜻 깊은 행사가 열린 적이 있었다.
에티오피아(Ethiopia) 한국전 참전 기념관의 개관식이었는데, 참전 당시 에티오피아군의 활약상은 물론 현재 에티오피아의 물산 등을 상설 전시하는 복합공간이다.
의외지만 6.25전쟁에 참전한 UN군 국가의 기념관 중 이런 형식의 다목적 복합공간은 이것이 최초라고 하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만시지탄(晩時之歎)이라는 생각이 든다.

 
                                에티오피아 참전기념관 개관행사 당시
 

현재 지구상에 있는 200여 국가들 중 경제적으로 어려운 나라로 손꼽히는 곳이 에티오피아다.
따라서 기아와 빈곤 타파를 위해 많은 비정부 구호단체들이 활동을 벌이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모든 세상사가 흥망성쇠를 겪듯이 기록으로 남겨진 역사만 3,000년이 넘는 에티오피아가 처음부터 못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보다 우위에 있어 6.25전쟁 당시에는 군대를 파견하여 우리를 도와준 국가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세계 최고(最古) 교회 중 하나인 베트 지요르기스 교회 유적지
 

만세일계(萬世一係)를 자랑할 만큼 역사가 깊은 독립 국가였지만 에티오피아는 제2차 대전 직전 이탈리아의 침략으로 고초를 겪은 역사가 있었다.
당시 집권층에게 망명지를 제공하고 침략자 이탈리아군을 격퇴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영국의 영향으로 전후, 적극적인 친서방주의 정책을 취한 셀라시에(Haile Selassie 1892~1975) 황제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즉시 파병을 결정하였다.

 
                                 파병을 주도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
 

아마도 잠시나마 국권을 잃었던 쓰라린 경험 때문이었는지, 그는 동서냉전시기가 도래하자 어느 한편에 확실히 가담하여야 차후에도 국가의 주권을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전격적으로 파병이 결정되었는데, 1950년 8월 당시 에티오피아군은 황실근위를 담당하던 10개 대대밖에 없었다.
결국 이들 중에서 자원자들을 차출하여 1개 대대규모의 신편 파병부대를 창설하였다.

 
                          파병 직전 카그뉴대대를 사열하는 셀라시에 황제
 

이 부대는 카그뉴(Kagnew) 대대라고 명명되었는데, 황실근위대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였으나 사실 현대적 교리에 따른 대대급 전술훈련 경험도 없었던 전근대적인 군대였다.
하지만 파견 나온 영국군 교관의 지도하에 강도 높은 전투훈련을 받아 얼마 지나지 않아 용맹스러운 군대로 탈바꿈을 하였고, 1951년 5월 6일 파견사령관 게브레(Kebbede Guebre) 대령의 지휘 하에 부산에 도착하였다.

 
                           모자에 국기가 선명한 부산도착 직후의 모습
 

카그뉴대대는 부대정비 후 7월 11일, 가평으로 이동하여 종전 시까지 미 제7사단에 배속되어 전투에 참전하였다.
여타 UN군에 비교한다면 부대편성 및 교육훈련 등의 여러 가지 이유로 비록 참전은 늦은 편이었지만, 1951년 9월 적근산전투를 필두로 1952년 10월 김화고지전투, 1953년 5월 요크, 엉클고지전투 등에 연이어 참가하면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용맹한 아프리카 사자들인 카그뉴대대의 전투 모습
 

이들이 전투를 벌인 곳은 오늘날 에티오피아군 참전비와 최근 건립된 기념관이 있는 춘천 일대의 중동부전선 일대였는데, 고원지대 출신들답게 고지전에서 탁월한 전과를 벌여서 용맹한 아프리카의 사자들답게 한번 피탈된 고지는 반드시 탈환하는 괴력을 선보였고 종전 시까지 적에게 포로가 된 에티오피아군 병사가 한명도 없다는 무서운 신화를 창조하였다.

 
           아프리카의 용맹한 사자들은 민사작전을 벌일 때 순한양들로 돌변하였다
                       ( 에티오피아군이 설립한 고아 보호시설인 보화원 )
 

연인원 총 3,518명이 이역만리 한반도에서 발발한 전쟁에 참전하여 전사 120명, 부상 536명 등의 피해를 당한 에티오피아군은 1965년까지 순차적으로 철군하였다.
엘리트 집단인 황실근위대원이자 파병경력 때문에 병사들은 귀국하여 영웅대접을 받았으나, 1974년 멩기스투(Mengistu Haile Mariam 1937~)가 이끄는 쿠데타세력이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한 후 단지 북한과 싸우는데 이들이 자원하였다는 이유만으로 갖은 핍박을 받기도 하였다.

 
                                       전적지를 방문한 참전용사들
 

사회주의 정권의 탄압으로 탄압을 받은 6.25전쟁 참전 용사들은 수도인 아디스아바바 외곽에 한국촌(Korea Village)을 형성하여 어려운 삶을 살고 있었으나, 다행히도 최근 한국 구호단체의 참여로 참전용사 및 그 후손들에 대하여 지원이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다.
비록 늦었지만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라 생각되고 우리가 어려울 때 목숨을 주었던 그분들에게 더욱 많은 도움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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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의 라이벌 [ 2 ] 

제트시대에 재현된 개구리들


                                                  공군 F-80 Shooting Star



제2차 대전 후 제트시대가 도래하면서 공군(이때부터 육군 항공대에서 공군으로 독립)의 F-80 Shooting Star와 해군의 F2H Banshee가 최초로 공군과 해군의 제트전투기로 각각 제식화됩니다. 이 당시 미국은 유럽과 태평양에서 사상 최대의 전쟁을 승리하였다는 자신감에 가득 차 전후 세계최강의 위용을 뽐내며 감히 누가 내게 맞서랴하는 자만심이 충만하였던 시기였습니다.


                                         해군의 F2H Banshee


그러다가 선배들인 P40과 F4F의 꼴을 답습하게 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한국 하늘에 제트 1세대의 최강 전투기 중 하나로 인정받는 소련의 MiG-15의 갑작스런 등장으로 말미암아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꼬리를 내리게 됩니다. 결국 이들은 또 한 번 서로 간에 잘난 척만 하다가 곧바로 사라진 그저 그런 전투기들이 되었습니다.


                                      공군의 승리  


6.25전쟁에서 갑작스런 MiG-15의 등장에 그나마 미 공군은 F-86 Sabre라는 회심의 후속대타가 있었고 이후 MiG-15와 F-86은 항공전사에 길이 남는 인상적인 공중전을 펼쳐 보이며 세기의 라이벌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반면 해군은 사실 손가락만 빨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 같은 침울한 시간을 보냅니다.

 

                                          공군 F-86 Sabre 


시급히 도입한 F9F Cougar 등을 써보기도 하였지만 사실 적기는 물론이거니와 철천지원수인 공군의 F-86의 능력과 맞먹는 놈을 쉽게 제식화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사실, 함재기들은 항공모함 탑재를 위하여 공군기에 비해 기체구조에 제약사항이 많을 수 밖에 없었고 때문에 능력의 제한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 제트시대에 와서는 이러한 제약이 더욱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F-86의 해군용 버전인 FJ Fury
 

해군은 결국 자존심을 뭉개가며 울며 겨자 먹기로 공군의 F-86을 함재기로 재설계하여 FJ Fury 라는 이름으로 항공모함에 탑재하게 됩니다. 하지만 앞에서도 설명하였던 이유로 함재기로 재설계하면서 F-86 고유의 능력을 많이 상실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그저 그런 평범한 전투기가 되며 별다른 인상적인 활약을 보이지 못합니다. 제트시대에 와서 해군은 더 이상 공군의 상대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해군의 절치부심 
 

F-86의 성공에 자부심이 하늘을 찌른 공군은 1950년대 일련의 제트기시리즈를 개발합니다. 이른바 센추리시리즈 (Century Series)라고 불리던 F-100 이후의 전투기들이었습니다. 그 첫째 작품이 세이버의 닉네임을 계승한 F-100 Super Sabre로 제식화 된 최초의 초음속 전투기였습니다. 이때만 해도 소련 최초의 초음속 전투기 MiG-19를 충분히 대적 할 수 있으리라 판단  하였습니다.
 

                                                   공군 F-100 Super Sabre


반면 해군은 F-100과 동일한 엔진을 장착하였으나 기동성과 맷집능력이 뛰어난 F8U Crusader를 제식화하였고 이들은 동시에 월남전에 참전합니다. 자만하였던 공군은 MiG-17 과 MiG-21에 믿었던 F-100이 혼쭐이 나자 곧바로 일선에서 후퇴시킵니다. 그러면서 마구 개발 하였던 전투기들을 이것저것 되는대로 참전시키기 시작하였습니다. 


                                            해군 F8U Crusader
 

사실 월남전은 미공군기의 능력이 나빠서라기보다는 정치적 입김에 가해진 교전규칙 때문에 특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던 경우가 많았습니다. 반면 같은 제약이 있기는 하였지만 그동안 절치부심하며 내공을 키워왔던 해군은 F8U의 뛰어난 기동력으로 공대공전투에서 짭짤한 성과를 얻어내었고 서서히 공군의 망신살이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공군의 박탈당한 자존심 
 
 

센추리씨리즈를 개발한다고 난리치던 공군이 많은 전투기를 만들어내었음에도 실전에서 뾰족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사이에 내공을 키워온 해군은 희대의 도깨비 F4H Phanthom II를 함재기로 제식화 하였습니다.  그동안 센추리씨리즈가 월남전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초초해진 공군은 평판이 자자한 도깨비를 해군으로부터 빌려서 시험                  

                                             해군 F4H Phanthom II

 
그 결과 지금까지 공군이 개발하였던 모든 전투기들의 능력을 초과한다는 사실에 경악하였고 비록 자존심상하는 일이었지만 눈물을 머금고(?) 이를 공군전투기로 제식화하기로 합니다. 여담으로 공군기를 함재기로 만들기는 힘들지만 함재기를 공군기로 전환하기는 상당히 쉽습니다.

 

                                           F4H의 공군용 버전인 F-110 Spectre
 

최초에는 공군 제식부호인 F-110 Spectre 라고 명명하였으나 이마저도 1962년 시행된 국방성의 제식화 부호 통일계획에 따라 F-4 Phanthom II라는 해군의 명칭을 그대로 가져다 쓰게 되었습니다. 굳이 공군이 살린 마지막 자존심이라면 기관포를 장착하고 공중 급유구를 해군과 다르게 설치하였던 점 정도라 할 만큼 공군은 라이벌 해군에게 굴욕을 겪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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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의 라이벌 [1]  
                        
                        아군을 깨부수자?



아래 사진은 현재 모두 퇴역한 미 해군의 제공전투기인 F-14의 편대 비행 모습이니, 조금 오래 된 사진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래 사진을 보면 조금 황당한 구석이 있습니다. 동체에 ' 해군 힘내라! 육군을 깨부수자! ' 라고 쓰여 있는데 만일 평소에 저렇게 글씨를 써 놓고 날아다닌다면 육군의 항의는 그만 두고라도 언론에서 먼저 두들겨 맞지 않을까요?

 

 
아마도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육군과 해군의 정기 미식축구경기(아니면 이와 비스무리 한 행사 때)에서 육군을 약 올리고 해군을 응원하기 위한 비행이 아닐까하고 추측됩니다. 그렇다면 고정익 항공 전력이 전무한 육군은 아파치 헬기나 M1A1 전차에다가 ' 해군을 깨부수자! ' 라고 비슷한 응원 문구를 썼을지 모르겠습니다. ^^
 
그런데 사실 삼군병립체제가 확고한 미군에서 최고의 라이벌을 뛰어넘어 각 군 간에 거의 원수지간으로 경쟁하는 분야라면 해군항공대공군(전신 육군항공대 포함)의 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공군을 육군항공대의 연장으로 본다면 해군과 육군이 직접적으로 경쟁 할 곳은 사실 하늘밖에는 없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미국의 해군항공대와 공군(육군항공대)의 자존심 경쟁, 그중에서도 특히, 공통 영역이라 할 수 있는 제공전투기분야의 경쟁은 하나의 연속된 에피소드로 볼 만큼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간략히 알아보고자 합니다.


                           우물 안 개구리들  

 
제2차 대전 발발당시 전운이 감돌던 유라시아로부터 지리적으로 멀찍이 떨어져 있던 미국은 폭격기분야에 주력하여왔던 관계로 당시의 경쟁 군사열강과 비교하여 보았을 때 공대공 전투에 뛰어난 전투기가 없었다고 보아야 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육군 P-40 Warhawk

 
유럽공군이 Me-109, 스핏화이어 등을 제식화 하고 일본해군이 제로라는 명품을 가지고 있었던데 비한다면 당시 주력이었던 미 육군의 P-40 Warhawk와 해군의 F4F Wildcat는 사실 그저 그런 보통 성능의 전투기였습니다. 참전초기에 코피가 터져 본 후에 1:1로 적기와 맞서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을 정도였습니다.

 
                                                해군 F4F Wildcat


하지만 전쟁 전에 하와이같이 양군의 주둔지가 겹친 곳에서는 서로가 잘났다고 상대군 기지상공에서 위협비행, 곡예비행등을 하면서 잘난 척하였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도토리 키 재기, 우물 안 개구리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맷집으로 승부한 놈들

 
제2차 대전 당시 미군 프로펠러기들의 특징 중 하나가 못생긴 돌쇠스타일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돌쇠스타일의 전투기들은 기동능력 등에서 상대적으로 열세를 보였지만 반면 스타일에 걸맞게 단단한 맷집을 겸비하여 공중전을 벌이기에 나름대로 적합한 장점은 있었습니다.

 
                                             육군 P-47 Thunderbolt

 
거의 동시대에 제식화 되어 우물 안 개구리들을 급속히 대체한 육군의 P-47 Thunderbolt와 해군의 F6F Hellcat는 그런 점에서 기동능력이 적기보다 뒤쳐지기는 하였지만, 든든한 기체 골격을 바탕으로 급강하능력과 맷집이 뛰어나 적기와 맞서 승리를 이끌어 내었던 공통점을 가진 전투기들이었습니다.

 
                                               해군의 F6F Hellcat


항공 전사를 살펴보면 이들은 꼬랑지를 물려 적기가 총알이 떨어질 때까지 때려도 살아남아 상대방 조종사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던 전설이 아직까지도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돌쇠들은 육해군간 선의의 경쟁보다도 다음에 소개 할 자군 내의 다른 전투기들과 묘한 경쟁을 벌이게 됩니다.


                          프로펠러 전투기의 지존들  

 
제트시대가 본격 도래하였던 1950년대 초기까지 살아남았던 (비록 전투기에서 대지공격 임무로 업종은 변경 하였지만) 명실공이 프로펠러 전투기의 지존들이 바로 육군의 P-51 Mustang과 해군의 F4U Corsair였습니다. 미군 전투기답지 않게 날렵한 자태와 뛰어난 능력으로 인하여 사상 최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한마디로 당대 하늘의 최고봉이라 칭하여도 손색이 없는 천하의 명품이었고 지금도 이들을 능가하는 프로펠러기는 없습니다.

 
                                             육군 P-51 Mustang

 
앞서 설명한 P-47과 F6F도 그랬지만 이들 또한 참전하였던 전역이 서로 달랐습니다.  육군 전투기의 경우는 거의 유럽전선에서 해군전투기는 태평양전선에서 각각 다른 적들을 상대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직접적인 전력 비교는 사실 힘듭니다. P-51 예찬자들은 최강 독일공군과의 경쟁에서 이겼다는 사실을, F4U 지지자들은 상대적으로 뛰어난 맷집 등을 예로 들며 지금도 설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해군의 F4U Corsair

 
그런데 역사상 P-51과 F4U가 직접 실전을 벌인 예가 한번 있었습니다. 1969년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사이에 벌어진 전쟁 당시였는데, 흔히 월드컵 예선전 때문에 전쟁이 촉발되었다고 해서 축구전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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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平和를 거저 얻을 수는 없다.
 

각종 군비관련 자료를 보게 되면 최근 스위스의 총병력은 12만 명에다가 즉시동원가능 예비군도 약 10만 명 정도로 나와 있습니다. 거기에다가 최강의 MBT로 평가받는 레오파드2 전차 같은 최신예 무기로 충실히 무장하고 있습니다. 인구 800만, 우리나라의 반 정도 되는 작은 국토에 그것도 주변에 위협을 줄 만한 잠재적국도 많지 않은 나라가 이렇게 많은 군비를 갖추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스위스 육군의 날렵한 훈련모습

 
사실 이 정도도 대규모 감군이 단행된 1990년대 말까지 유지되던 현역 30만, 예비군 30만에 비하면 많이 축소된 숫자입니다. 이웃한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같은 강대국이 약 30만 내외의 군대를 보유하고 항상 준 전시상태인 이스라엘이 15만 정도의 현역을 보유하고 있는 것과 비교한다면 결코 밀리지 않는 전력입니다. 막연히 연상하는 평화이미지가 큰 영세중립국이 이렇다고 하니 언 듯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기동 훈련 중인 스위스 육군의 레오파드2전차

 
하지만 스위스의 평화는 절대로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영세중립은 다자간의 국제 조약에 의해서 외교적으로 인정받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외부의 침략이 있을 때 반드시 남들이 와서 도와준다고 담보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중립국이니 침략하지 말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소용없었던 양차 세계대전 당시의 베네룩스3국 예만 봐도 스스로 중립을 보존 할 수 있는 능력과 자신감이 있어야 평화가 지켜지는 것입니다.

 
                             제1차 대전 당시 영세중립국인 벨기에를 점령한 독일군

 
현재 시점에서나 스위스 주변에 적대 세력이 없어 보이는 것뿐이지, 역사적으로 스위스는 주변 강대국들로부터의 침탈을 피하기 힘든 지정학적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때문에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잊지 않고 엄격한 무장을 통하여 중립과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스위스 인들이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다음은 이러한 노력을 보여주는 스위스 국민들의 찬란한 기록입니다.
 
* 모르가르텐 Morgarten 전투 (1315년)
전투 외세의 지배를 벗어나고자 독립을 선언한 4개 칸톤으로 구성된 스위스 동맹군이 오스트리아 레오폴드 1세의 대군을 모르가르텐 계속 인근의 애게리 호수에 수장시킨 전투로 스위스 최초의 승리였고 이후 무장을 통한 적극적 자위정책이 시작됩니다.

 
                                           모르가르텐 전투 기록화
 

* 셈파흐 Sempach 전투 (1386년)
4개 칸톤이 자치권을 획득하자 이에 고무된 주변지역이 연방에 합세하려 하였고 이를 막으려는 오스트리아와 충돌이 벌어졌습니다. 연방의 대승으로 전투는 종결되었고 그 결과 대략적인 오늘날 스위스모습이 이뤄지게 됩니다.

 
                                       셈파흐전투 600주년 기념주화

 
* 낭시 Nancy 전투 (1477년)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더불어 스위스의 독립을 방해하던 전통적 외세였습니다. 현재 프랑스의 일부인 당대 지역의 패자 보로고뉴왕국이 스위스의 합병을 노리고 침략을 개시하여 2년간 전쟁이 벌어졌는데 스위스는 낭시에서 침략군을 전멸시켜 버렸습니다.

 
                                           낭시 전투 기록화
 

* 30년 전쟁 (17세기)
신성로마제국을 중심으로 신구교간에 벌어진 세계대전이었는데 비록 당시 스위스도 신교와 구교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이런 거대한 전쟁에 휩쓸리지 않고자 대외중립을 표명하고 군대를 국경으로 보내어 철통경비를 하여 전화를 차단하였고 이때부터  무장중립의 전통을 세우게 됩니다.
 
* 뒤프르 (Henri Dufour) 장군의 통일전쟁 ( 1847년 )
 앙리 뒤프르는 나폴레옹시대의 몰락 후 스위스의 통일을 이룩한 군사영도자입니다. 그는 전투 중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이 외세인 오스트리아-프로이센세력을 무력으로 축출하여 분열된 스위스를 통일하고 독립을 수호한 스위스의 이순신 장군입니다.

 
                                       앙리 뒤프르 장군의 동상
 

* 보불전쟁 (1870년)
 스위스는 무력의 대부분을 프랑스-독일-스위스 국경에 집중배치 하여 외세의 침탈에 대비하였습니다. 실제로 파리가 독일에 포위되자 프랑스는 스위스를 통과하여 독일의 배후를 치고자하였으나 자국의 영토가 전쟁터가 되는 것을 피하려는 스위스의 강력한 반대에 눌려 실패하였고 그 결과 스위스는 중립을 지켜냅니다.
 
* 제1차 대전 (1914년~1918년)
보불전쟁당시처럼 프랑스-독일-스위스 국경에 배치하여 중립을 지켜냅니다. 영세중립을 표방하다 독일의 침략으로 국토가 쑥대밭이 되어버린 벨기에와 극명히 대비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 제2차 대전 (1939년~1945년)
히틀러가 동맹국 이탈리아로의 최단 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스위스를 접수하려 생각하자 스위스 국민들은 앙리 기상 ( Henri Guisan ) 장군의 영도 하에 똘똘 뭉쳐 최악의 경우 터널과 도로를 파괴하면서 강력하게 저항하겠다는 의지를 보임으로써 히틀러의 침략욕구를 포기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접경지역에 배치된 스위스군을 시찰하는 앙리 기상의 모습
 

사실 위에서 열거한 전투나 에피소드는 오늘날까지도 단단한 자위 무장을 통하여 중립을 지켜온 스위스의 피나는 수많은 투쟁 중 극히 일부이며 오늘날도 무장중립의 정책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실 스위스의 역사를 살펴 볼 때 지금까지 자국을 침략한 외세에 대해서 끝까지 저항하였고, 대부분 승리를 거두어 주변의 외세도 스위스의 무장중립을 인정하게끔 만들 수밖에 없는 피의 투쟁을 벌여 왔습니다.
 
평화는 결코 거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준비된 힘이 있어야 지킬 수 있는 것 입니다. 고려에 대한 거란의 침략 야욕을 결정적으로 포기 하게 만든 것은 서희의 입이 아니라 '강감찬의 힘'이었습니다. 물론 서희의 입은 힘으로도 대적 할 수도 있다는 자신감이 내포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지만 결국 최종적으로 힘으로써 의지를 보여주자 평화는 찾아왔습니다.

 
                 준비를 소홀히 한 결과가 어떠하였는지는 역사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병자호란 때처럼 힘도 없으면서 모화사상에 물들어 입으로만 평화를 원한다고 해보았자 그 결과는 어떠하였는지 역사가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지난 역사를 반추하고 여기에 평화를 지키기 위해 중립을 표명하면서도 철저한 무장을 통해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던 스위스의 노력은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나가야할지를 알려주는 반면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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