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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4.07 조선의 해외 무기 획득 사업-제1편-










조선의 해외 무기 획득 사업-제1편-




첨단 무기의 해외 도입 사업은 한국 국방 정책에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고 매년 엄청난 예산이 해외 무기 획득에 지출되고 있다.


조선 시대에도 국왕이 직접 챙기던 해외 무기 획득 사업이
있었다.


아래는 해외 무기 획득사업이 증오나 체면이나 또는 명분을
떠나서 국익만을 따져서 결정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입증해주는 조선의 국방 구매 사업사의 한 사례를 소개한 것이다.


조선이 해외에서 구매해오던 무기는 두 종류이다.
그 하나가 임진왜란 7년의 전란동안 조선군에게 큰 괴로움을 주던 일본군의 조총이었다.


다른 하나는 300여년의 세월동안 국산화를 하지 못해 외국산
수입해야 했던 화약의 원료인 염초다. 사실로 받아 들이기 힘든 분들이 많을 것이다.


--- 임란 전부터 조선의 무반(武班)사이에 명품으로 통하던
왜검[일본도]도 있으나 이는 이 글에서 생략하고자 한다. ---


조총부터 살펴보자.

조총은 일본이 원산지가 아니라 1543년 일본 남단
다네카시마[현재는 가고시마현]에 표착한 포르투갈 인들이 전래 해준 것이다. 덕분에 조총은 일본에서 한 때 다네카시마라는 명칭으로 통했었다. 현재 다네카시마에는 일본 우주 개발 로케트 발사 기지가 있다.


다네카시마의 16세 젊은 도주[島主]는 중국 배를 타고 표착해온 포르투갈인들로부터 2,000량이나 되는 거금을 주고[현재 시세로 10여억 원의 대금]을 지불하고 총과 그 제조 기술을 전수받았다.


젊은 도주는 조총을 새나 잡는 스포츠의 도구로 생각하고
그런 목적으로 조총 사격을 즐겼는데 옆 섬과 벌어진 전투에서 조총을 사용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일본의 조총


이 소문이 전해지면서 조총은 삽시간에 일본 전국에 퍼졌다.
당시는 일본이 60여개의 국가로 나뉘어져 밤낮없이 싸움질을 하는 전국시대였었다.


오닌의 난이래 백여년간 싸움이 그치지 않고 계속되는
시대였었기 때문에 신병기인 조총은 너도나도 찾는 인기 상품이었고 값도 무척 올랐다.


한마디로 전란의 시대에 돈벌이 잘 되는 대박
상품이 되었다.


이에 창안한 오사카 부근 사카이의 상인들은 숙련된
대장장이들을 불러 모아 조총을 대량으로 생산하였다.


자본의 지원을 받는 대량 생산에 힘입어 조총의
제조 기술은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원래 세계가 알아주던 도검 제조 기술을 보유했었던 일본의 장인들은 그 기술을 조총 제조에 그대로 응용했다.


사카이 장인들이 만든 조총은 원산지인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제 보다도
더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일본인들은 조총을 대개 철포[鐵砲]라고 불렀고 조총 부대도
철포대[鐵砲隊]라고 불렀다.


이 철포부대를 대규모로 운용해서 역사의 방향을 전환시킨 사람이 전국
시대를 거의 마감시킨 오다 노부나가다.


그는 1575 년 6월 29일 나가시노 전투에서 3,000명의 철포부대를
전개시켜 3단 사격이라는 연속 사격 전술로서 영주 다케다 가쓰요리의 12,000 정예 기병대를 전멸시키고 다케다 가문을 멸망시켰다.

 

                                      1575년 나가시노 전투
             왼쪽이 노부나가 철포부대, 노부나가 군은 통나무를
병사 개인들이 운반해와서 기병대를
             저지하는 마방진지를 구축했었다.



임진왜란 때 탄금대에서 신립의 조선군과 격돌한 일본군은 나가시노에서 써 먹은 일제사격 전술로 조선군을 대파하였고 신립은 강에 뛰어들어 자살 하였다.


임진란 내내 조총이 조선군에게 가하는 타격은 실로 컸다.
조총에 크게 당한 조선의 군주 선조는 조총에 큰 관심을 가지고 이를 모방한 조총의 생산을 직접 독려하였다. 그러나 조선이 제조한 조총은 그 품질이 별로 좋지 않았었다.


조선제 조총의 품질이 안 좋았다는 기록이
조선 왕조 실록 여기저기에 보인다.


1607년 일본으로 출발하는 사신에게 선조가 전교하는 내용의 일부다.


“... 또 적을 막는 병기로는 왜(倭)의 조총만한 것이 없다. 우리나라가 대략 만드는 법을 배워 만들기는 하였으나 모두 쓸 수 없었다. 얼마 전에 함경 감사가 은자(銀子)를 모아 올려 보내서 조총을 사가기까지 하였었다.”
※위에서 함경감사가 한양에 와서 사간 조총은 일본제이다.※


선조의 교시는 국산 조총은 아예 쓸 수가 없는 불량품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조선의 기술로 화약의 폭발력을 견디어 내는 강도 높은 조총을
만드는 기술이 아직 개발 되지 않았다는 말인 듯하다.

--- 조선 말 화승총[火繩銃-조총]으로 사냥하던 포수들은 사용 중 화승총이 폭발하여 실명하거나 손가락이 잘려지는 사고를 상당히 많이 당하였다. 산간 부락에서는 애꾸눈이나 손가락 없는 포수를 자주 접할 수가 있었다. ---


위의 교시에 이어진 선조의 지시는 조총을 일본에서
수입해오라는 명령이었다.


“...만일 이번 회답사의 사행에 해조[該曹,공조- 재무와
 상공 담당 부서]에게 물건 값을 헤아려 주게 하여 조총을 편리한 대로 다수 사들여 오게 한다면 적국의 병기를 배에 가득히 싣고 돌아온다 해도 참으로 방애스러울 것이 없을 것이다. 이 또한 한 가지 이로운 일이니 아울러 의논하여 시행하도록 비변사에 말하라.”


1618년 북방에 흥기한 누루하치의 후금국 철기병 부대와
전쟁을 하던 명나라의 장수 유정이 조선에 각종 군수물자의 지원을 강청(强請)해왔다.


이에 거절하지 못한 병조에서 광해군에게 건의한다.


“... 그리고 환도와 조총은 우리나라에서 만든 것이 비록 매우 거칠고
엉성하기는 하나 훈련도감과 군기시에게 정밀하고 좋은 것을 특별히 가려 숫자대로 미리 준비하게 하소서.“


조총을 생산한지 20여년이 흘렀어도 그 질이 그닥 좋아 지지 않았다는 것을
위의 기록이 말해준다.


조총에 한이 맺혀 증오와 체면을 내던지고 일본의 조총 제작은
물론 수입까지 추진했던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조총부대의 육성에 총력을 기울였다.


국토가 결단 나고 백성의 삶이 도탄에 빠지는 왜란이
겨우 지나고 나니, 북방의 여진족들이 무서운 기세로 일어나서 조선의 안전을 위협하는 상황이 왔었기 때문이었다.

실로 그 기세는 대단해서 대국 명나라의 군대는 연패를 거듭하고 있었다.


여진족이 세운 후금국의 군력의 핵심은 철기병이라 불리던
기병대였다.


기병대에게는 조총의 일제 사격이 특효약이라는 사실은 이미
일본의 오다 노부나가가 증명해 보인바 있어 동양 병학계의 상식이 된지 오래였다.


철기병을 격파할 수있는
강한 조총부대의 육성을 추진하던 광해군은 조총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다. 화기도감을 세우고 조총의 대량 생산에 박차를 가했는가 하면 대마도를 통한 일본제 조총과 왜검의 수입량을 대폭 늘였다.


대마도는 조선과의 조총 장사로 짭짤한 재미를 보았다.
대마도가 조총 100여정을 보내 주면서 일본에서 금값으로 팔리는 조선 인삼을 500근이나 청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광해군이 즉위할 무렵의 조선이 보유한 조총 숫자는 1610년[광해군 2년]
1월 12일 광해군에게 올리는 보고문에서 나타나있다.


“... 도감의 조총은 비축하여 두고 사용할 때를 기다리는 도구가 아니라
본래 초군(哨軍)의 평상시 사용을 위한 물품이므로 만드는 대로 지급하여 망가지면 대용하게 하였으니, 도감의 각군으로서 소지한 자가 지금 거의 1천 9백 7십여 명입니다.”


광해군은 이 1,970정의 소총에 더해서 추가 생산과 수입을 통해 조총을 계속 늘려갔으며,
7년 뒤에는 5,000명의 조총대를 육성해냈다.


조선이 강력한 조총대를 보유한 것을 알게 된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것을 들먹이며 대 후금전쟁에 이 조총대를 파병하라고 압력을 가해왔다.


명분따위 보다도 백성의 안녕을 위해서 후금의 비위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던 광해군은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파병을 미루었으나 계속 된 압력에 버티지 못하고 1619년 추운 정월 5.000명의 조총대를 주축으로 하고 기타 병력을 증강한 10.000명의 원정 부대를 파견하였다.


1만명의 원정군은 평안도 3,500명, 전라도 2,500명,
황해도 2,000명 충청도 2,000명 등으로 구성되었다.


임진란의 재앙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해 빈궁하기 짝이 없는
조선이 젖 먹던 힘을 다해서 모은 병력이었다.

[출발 전 강홍립은 광해군으로부터 상황을 보아 잘 알아서 처신하라는 비밀 지령을 받았다.]


원정 조선군은 1619년 2월 1일 압록강을 건넜다.


그러나 조선의 조총대는 1619년 3월 심하 부근 사르흐에서 명나라 장수
유정을 후속하다가 유정의 군과 함께 철기병의 연달은 기습을 받고 큰 피해를 입었다.


봄철이면 부는 만주의 모래 바람을 틈타 철기병들이
폭풍처럼 덮치는 바람에 조총대는 단 한번의 일제 사격을 해보았을 뿐,그대로 와해되고 말았다. 광해군의 밀지를 받고 기회를 보던 도원수 강홍립은 후금 군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후금의 철기병들과 맞서는 조선의 조총대. 조총과 활이 교대로 배치된것에 유의.


파견한 1만 명의 병사 중 그 해 안으로 조선으로
도망쳐 돌아 온 조선군은 1,40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후금에게 조선군들은 호박이 넝쿨 채 굴러 들어온 보물들이었다.
후금은 조선군 병사들을 일일이 심사해서 튼튼한 자는 조총대를 주력으로 해서 편성한 부대에 편입시켰다,


그리고 나머지 신체 조건이 부족한 병사들은 각 여진족 부락에 나누어
농사일을 하도록 했다.


청태조 누르하치는 비록 강제 동원한 것이기는 하지만 조선 조총병들을
잘 대우해주었고, 명나라와의 전투에 투입해서 큰 재미를 보았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물러나고 인조가 왕좌에 앉았다.
그리고 인조가 이괄의 난을 겪고 가까스로 정권이 안정이 된 뒤 점검해보니 군기감에 조총이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1
624년 인조 2년 4월 25일. 특진관 이서(李曙)가 아뢰기를,“도감(都監)의 군기(軍器)는 변란을 겪은 뒤에 아주 없는데, 근래 저자에서 산 것은 겨우 2백여 자루의 조총뿐입니다. 쌀을 마련하여 지금 더 사들인다면 많은 수량을 장만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조로 하여금 쌀을 지급하여 사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결국 광해군이 조선의 국방을 위해서 막대한 국가 재정을 투입,
생산하고 수입해서 가까스로 확보한 조선의 조총 5,000정은 타 민족끼리의 엉뚱한 전쟁에서 전량 소멸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제2편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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