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오늘 천안함은 평소와 다름없이 서해바다를 항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다음날 자신에게 다가올 운명을 모른채..




그리고 2010년 3월 26일 밤, 천안함의 침몰 소식을 전하는 뉴스 속보가 TV에서 흘러나왔다..

 



 "백령도 인근에서 경비중이던 우리 해군 초계함 천안함이 침몰하고 있어서 긴급 구조작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합동 참모본부는 어제 밤 9시 20분 쯤 백령도 서남방 해상에서 임무수행 중이던 해군 초계함 천안함의 바닥에 구멍이 생겨 침수되기 시작하면서 구조작업이 진행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밤 11시 현재까지 구조된 인원은 58명이며.."

 

처음 뉴스를 듣고는 믿기지가 않았다. 군함이 침몰하다니? 그것도 1,200톤급 초계함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있을 것 같지 않은 뉴스였기에 화면을 통해 보이는 엄연한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고, 모든 것이 불분명한 상황에서 의구심만 커질뿐  앞으로 다가올 충격과 고통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천안함 침몰의 원인으로 북한 잠수함의 공격 가능성이 언급되고, 천안함과 함께 사라진 장병들의 이름이 하나 둘 발표되면서, 사건의 심각성을 실감하게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충격은 점점 더 거세게 밀려왔다. 
 
단 한명이라도 살아 있기를 바라는 간절한 희망에 말그대로 목숨을 건 실종 장병 수색작업이 전개되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희박해지는 생존가능성에 절망하게되었고, 오히려 수색작업에 참여했던 한주호 준위의 사망과 금양호의 침몰로 안타까운 희생 소식이 잇따르면서 하루하루가 지날 수록 고통은 점점더 커져만 갔다. 결국 그 실낱 같은 희망의 끈을 결코 놓을 수 없을 것 같던 실종 장병 가족들마저 사랑하는 아들, 남편을 스스로 포기하는 비극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가까스로 천안함이 인양되고, 차가운 주검으로 돌아온 46명의 장병을 온 국민이 추모하며 떠나 보냈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천안함의 침몰 원인을 둘러싼 논쟁은 우리 사회를 또 다른 혼란에 빠트리며 흔들어 놓았다. 

결국 북한의 비열한 만행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충격과 슬픔에 분노까지 더해져...
그렇게 온 나라가 거의 패닉에 빠진 상태에서 언제, 어떻게 끝날지 모를 것 같던 시간을 견뎌내야만 했다.



(시간이 흘러)
 
이제 그 아픈 기억이 시간의 한바퀴를 돌아와 다시금 천안함을 떠올리게 한다. 아픔의 크기가 망각의 속도를 늦춰 놓는 걸까?  바로 어제의 일 같은데 벌써 일년이란 세월이 지났다니 믿기지 않는다.  

천안함 1주기를 맞아 천안함 1주기 추모식, 유가족 위로행사, 46용사 위령탑과 한주호 준위 동상 제막식, 추모 음악회 등 군과 정부 그리고 여러 단체에서 주관하는 공식적인 추모행사가 많이 준비되고 진행될 예정이다. 



뿐만아니라 많은 일반 국민들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추모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편으로 언론보도를 통해 전해지는 희생 장병 가족들의 사연을 접할 때면, 그때의 슬픔이 여전히 진행형으로 남아있음을 보게되어 다시금 마음이 아파오고, 그 분들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함께 나누기 위해 무엇인가 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지 고민하게 된다.




어쩌면 천안함 사건은 차라리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될 기억임을 알기에, 1년이 지난 지금 다시 아픈 기억을 들춰내어
떠나간 장병과 그 가족을 다시한번 애도하고 위로하며, 또 우리 스스로에게 다시는 똑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한다는 반성과 다짐을 마음에 새기고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천안함은 이제 평택 2함대 한 켠에 조용히 자리잡고,
그날을 기억하며 찾아오는 이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비록 바다를 누비는 임무는 종결되었으나,
우리 군에게는 한치의 방심과 실수도 허용하지 않는 강한 군대로 거듭나야 한다는 뼈아픈 자성을 심어주고,
국민들에게는 우리의 안보현실이 어떠한 상황인지를 다시금 일깨워 주는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도 어둡고 검푸른 바다의 거친 파도를 두려움 없이 당당한 모습으로 헤쳐나가며 우리의 바다를 지키던 저 배가... 이제 여러 겹의 철골에 몸을 의지한 채 땅위에 박제처럼 덩그러니 서있는 모습을 대하니 왠지모를 분노와 자책이 밀려든다.




천안함은 낮은 목소리로 울부짖으며 말하고 있는 것 같다.
 " 미안하다고,, 우리의 바다를 온전히 지키지 못해서..."


그에게 우리가 마음속으로 답해줘야 하지 않을까?
 "편히 쉬라고... 우리는 그동안 네가 최선을 다해 조국의 바다를 지켜왔음을 알고있고, 또 왜 지금 그자리에 있게 되었는지도 알고있다고"

 그리고 "너와 운명을 같이한 46명의 장병들과 함께 항상 우리 곁에 있어 달라고..,그러면 너는 영원히 침몰하지 않는 것이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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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일 
'프레스센터'에서 천안함 폭침 1주년을 회고하는 특별 심포지엄이 있었습니다.

천안함 1주기를 맞아 천안함 사태가 남긴 교훈과 앞으로 우리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토론하는 자리였는데요..

이번 회의는 천안함 사태 이후 연평도 포격 도발까지 계속되는 북한의 도발로 인해 어느때 보다  국가안보에 대한 우려와 관심이 커지고있는 시점에서, 우리의 안보실태를 되짚어보고 대처방안을 고민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다하겠습니다.

국방대학교 안보문제연구소, 한국국방정책학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심포지엄에는 한국국방연구원, 통일연구원 등 4개 기관의 국방분야 전문가가 발제자로 참여하였고, 토론자로는 외국어대학교, 경남대학교, 평화네트워크 등 민간분야와 국방부 관계자 등이 참여하였습니다. 그리고 회의장에는 준비된 자리가 모자랄 정도로 많은 일반 시민들이 찾아와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회의는 『한국의 군사적 대응과 안보』, 『한국사회의 변화와 민군관계』를 주제로 각 발표자가 발제하고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는데요.. 토론의 주요 발제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의 군사적 대응과 안보』를 논하는 제1회의 에서는

먼저, '천안함 피격사건의 군사적 교훈과 한국의 대응방향'이
라는 주제에 대해 한국국방연구원 박창권 책임연구위원이 발제하였습니다. 
                                          

 

" 천안함 피격 사건은 북한의 실체를 정확히 보여주었던 중요한 사건으로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과 시사점은 관점에 따라 다양할 수 있겠지만, 국방구조적 측면, 군사전략·작전·능력의 측면, 그리고 한·미동맹 및 안보협력 차원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을 분석해 보았습니다.


먼저 국방 구조적인 측면에서는
위기상황이 발생할 경우 적시에 보고 및 대처를 위한 위기대응 체제와 육·해·공군의 작전을 효과적으로 지휘통제할 수 있는 합동작전체제의 확립이 필요하고, 실질적인 적 위협에 대한 선별적인 정보제공과 이를 적시에 작전에 반영하기 위한 정보·작전 간의 유기적 협력체제가 구축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탐색 및 구조작전 과정에서 나타난 민군협력체제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여야하며,  사실을 신속 정확하게 전달하고 정보의 공개 범위를 정립하여야 하는 국방 커뮤니케이션의 개선도 이루어져야할 것입니다.


군사 전략·작전·능력 측면에서는
북한의 국지도발을 안보의 핵심적 위협으로 중요시하는 전략개념을 정립하고, 북한의 기습적 군사도발을 응징할 수 있는 능력을 발전시키며, 잠수함/잠수정 등 비대칭 위협에 대한 대응능력을 강화하고, 탐색 및 구조작전 능력 등을 향상시킬 필요성이 중시되었습니다.


그리고 북한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한·미동맹을 기반으로 한·미·일 안보 협력체제를 발전시키고, 중국·러시아와의 군사협력 관계를 개선하며, 특히 중국이 안보문제에 대해 한국을 지원하고 협력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해 나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앞서 언급한 교훈과 최근 발표된 국방개혁안을 토대로 한국의 정치·군사적 대응조치와 향후 발전 방향에 대해서 크게 다섯 가지 정책방향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첫째, 위기대응체제의 강화를 위해서는 기존에 사건 발생 후 사후 처방식으로 단편적인 조직정비만 실시해왔던 차원에서 벗어나, 사전에 다양한 위기상황을 대비하고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위기의 특성과 조직의 특성을 함께 고려한 체제를 준비하여야 할 것입니다.

둘째, 합동성 강화를 위한 군 구조 개혁은 전문성과 통합성이 조화와 균형을 이룬 합동성 개념에 대한 명확한 이해, 군의 문화와 업무행태, 책임과 권한의 위임과 분담, 합동 작전과 관련한 지휘관과 참모의 능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발전시켜야 할 것입니다.


세째, 천안함 피격과 연평도 포격 이후 도입한 적극적 억제전략은 강력한 응징능력을 통해 북한이 군사도발을 포기토록하고 북한의 무력도발 징후 시 이를 사전에 방지하고 응징하기 위한 강력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전략적 개념으로 정의할 수 있으며, 이를 실제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전략적 개념을 한미간 합의를 통해 전쟁 및 작전개념에 반영하고, 군사행동을 뒷받침할 정보능력과 타격능력을 확보하는 등 후속조치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넷째, 북의 비대칭위협에 대한 대비능력은 현재 추진되고 있는 대잠능력 강화, 서북도서 전력 증강 등을 계속 추진하되, 보다 공세적인 전략 추진 방안, 북의 비대칭 무기 및 핵을 포함한 대량살상 무기 위협에 대한 한미 협력체제 구축, 그리고 미래 안보위협까지 고려한 정책적 고려가 반영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섯째, 한국을 지원할 수 있는 지역 안보여건 조성을 위해 한·미·일 안보협력체제를 발전시키고, 한·중, 한·러 관계를 개선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끝으로 군사적 대응방안과는 별도로 북한 위협을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한 남북간 대화 추진 등 정치적 방안과 북한을 압박하기 위한 국제적 협력 메카니즘 작동도 동시에 강구할 필요가 있다 하겠습니다."


두번째로, '천안함 피격사건 이후 남북관계의 변화' 에 대해 전성훈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의 발제가 있었습니다. 
 
"천안함 사건은 북한의 전략적 판단에 의한 것으로, 북한은 완전범죄는 아니더라도 확증을 찾지 못하는 영구미제 사건이 될 것으로 기대했을 것입니다. 또한 사건 이후 발생한 사고 원인 관련 국내의 심각한 국론분열도 북한이 의도했던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천안함 공격과 연평도 포격 사태에서 보듯이 한반도에서는 냉전시대와 다름없이 분쟁이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남북 분단과 대결의 원인인 사상 문제와 군사문제, 즉 체제 대결과 군사적 대치 상태가 해소되지 않고 있기 때문 입니다.

그런데 사상과 군사문제에 대해 더 투철한 쪽은 북한이며,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체제대결에서의 승리를 위해 남한을 사상적으로 무장해제 시키고 군사적으로 제압하기 위한 그들의 노력은 지금 이순간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니다.
 
남북관계를 관리하는데 있어 감상적인 기대나 순진한 기대를 따르기 보다는 마치 칼날위를 걷듯이 조심스럽게, 그리고 확고하고 원칙적인 대응자세를 견지해야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이어서, 잠시 휴식을 가진 후 제2회의에서는 『한국사회의 변화와 민군관계』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먼저, '천안함 피격사건에 대한 국론분열 양상과 원인분석'
 대해 국방대학교 김병조 교수가 발제하였습니다.  

"천안함 침몰은 
한국 군사안보의 허술함을 드러낸 사건이지만 한편으로는 사건 전개과정에서 국론분열이라는 국가안보상의 또다른 취약점을 노정하게 되었습니다.

국론분열의 원인은 "시민사회 요인"과 "군/정부 요인" 그리고 "북한 요인"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시민사회 요인으로는 군사안보에 대한 낮은 이해, 군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 조사결과의 정치적 해석, 맹목적 과학주의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군/정부 요인으로는 허술한 위기관리·초기대응 및 정보관리의 소홀, 조사결과의 정치적 이용 등을 추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북한의 개입이 국론분열의 또다른 원인입니다. 남북 대치상황에서 북한의 개입은 통상적 국론분열이 국가안보적 국론분열로 전환되는 데 결정적 원인이 됩니다. 북한이 개입하기 힘든 국론형성구조를 구축해야 할 것입니다.

시민사회와 군/정부는 모두 자신들이 원인이되어 국론분열을 야기한 측면을 보다 정밀하게 분석하고 개선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이러한 국론분열 과정에서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의 역할을 어디에서도 찾아볼수 없었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앞으로 시민사회와 군/정부의  불필요한 대립을 줄이기 위해서는 국회가 국론통합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천안함 피격사건 이후 군의 대응 및 대군 신뢰' 대해 육군사관학교 온만금 교수가 발제하였습니다. 

"천안함 피격사건 이후 아덴만 인질 구출작전에 이르기 까지 군과 정부가 어떻게 대처하였으며, 이것을 국민들이 어떻게 인식하고 평가하고 있는 지 규명하고자 합니다.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천안함 피침과 연평도 포격도발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던 반면, 연평도 사격훈련 재개와 아덴만 인질구출 작전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긍정적이있습니다. 

이렇듯 정부와 군에대한 인식과 평가가 시기별로 뚜렷이 구별되는 배경에는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사건 시에는 대비태세가 갖추어져 있지 않았고, 각 상황 발생시 드러난 혼란상 그리고 각 사건에 대한 소극적 대응에 국민들이 실망했던 반면, 연평도 사격훈련 재개와 아덴만 인질구출작전에서는 정부와 군이 철저한 대비태세와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하였다는 점에 국민들이 긍정적으로 평가하였고 만족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상은 토론회의 발제 내용이었는데요, 발표가 끝난 후 종합토론 시간에는 천안함 사태에 대한 실질적인 교훈과 처방에 대해 발표자와 토론자 그리고 참석한 많은 일반 시민간에 다양한 의견 제시와 토론이 있었습니다.



온 국민을 충격과 슬픔에 몰아넣으며 국가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 천안함 사건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 당시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우리가 반성하고 고쳐야 할 점을 다양하고 냉철한 시각에서 되짚어보는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할 것입다.

회의가 끝난뒤..
우리의 안보는 단순히 군사적인 측면의 문제일 뿐만아니라, 정치적·사회적으로도 많은 요인이 충족될 때 비로소 공고해 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결국 군과 정부 뿐만아니라 모든 국민 개개인이 안보문제에 대해 설마..하거나 방관하지 않으며, 보다 성숙된 자세와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것이 그 바탕이 될 것이라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도 우리의 안보에 대해 지금 어떤 고민을 갖고 계실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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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을 망각하고 앞으로 나갈 수는 없다
 
 
지난 2004년 2월 초, 러시아 태평양함대 소속의 미사일 순양함 바르야그(Varyag)가 이끄는 일단의 군함들이 인천항을 방문하였다. 양국 해군의 친선도모 등 여러 목적이 있었지만, 한반도를 빙 돌아 인천을 방문한 가장 큰 이유는 정확히 100년 전 러일전쟁 당시에 인천 앞바다에서 전사한 제정러시아 함대 소속 장병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였다.


                                             러시아의 미사일 순양함 바르야그
 

1904년 1월 27일, 일본함대가 당시 러시아의 조계지였던 뤼순(현 따롄)항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함대를 급습하여 러시아 군함 3척을 침몰시키면서 러일전쟁이 발발하였는데, 이 와중에서 두 척의 러시아 순양함이 극적으로 항구를 탈출하였다. 하지만 제물포(현재 인천항) 앞 팔미도 부근에서 추격에 나선 14척의 일본 군함들에 의해 엄중히 포위당하는 위기에 빠졌다.


                                      뤼순항에서 탈출한 바르야그(右)와 까레예쯔
 

14대 2라는 엄청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군함들은 항복 대신 교전을 선택하였다. 용감하게 포탄을 일본 함대에 발사하여 2척의 일본 순양함을 침몰시키면서 분전하였으나 포위망을 벗어나지 못한 채 일본 함대의 집중 공격을 받아 침몰 당하였다(이상 제물포해전).  그런데 당시에 침몰하여 수많은 수병이 목숨을 잃은 러시아 군함들의 이름이 바르야그까레예쯔(Koreyets-한국이라는 뜻)였다.

 

                        제물포 해전에서 일본 해군의 압도적인 공격으로 침몰당한 바르야그
 

이때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일부 러시아 수병들은 일본의 포로가 되었다가 강화조약 성립 후 본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는데, 제물포 해전에서 보여 준 죽음을 불사한 저항 때문에 영웅으로서 열렬히 환영 받았다. 이처럼 비록 비참한 최후를 당했지만 바르야그와 까레예쯔는 러시아 해군의 역사에서 영원히 기억되어야 할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지난 2004년 인천을 방문한 러시아함대 지휘관의 모습
 
 
그래서 100년이 지난 2004년, 같은 이름을 승계 받은 바르야그함이 역사적인 패전의 장소를 방문하여 추모행사를 벌였던 것이었고, 인천 연안부두 친수공원에 추모비까지 세웠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는데, 구 소련 해군이나 지금의 러시아 해군 함정들은 대한해협을 통과할 때마다 반드시 러일전쟁 당시에 산화한 러시아 해군 전몰용사들에 대한 추모행사를 벌인다는 것이다.


                                              연안부두 친수공원 내 추모비
 
위에서 언급한 내용은 러시아가 세계사에서 참패로 기록된 러일전쟁 당시의 치욕을 결코 잊지 않고 있음을 의미하는 중요한 예라 할 수 있다. 비록 바르야그가 적의 공격으로 침몰 당해 러시아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안겨주었지만, 현재 최신 전투함의 이름을 바르야그로 명명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습공격한 적과 중과부적의 상태에서도 당당히 맞섰다는 사실 또한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비참한 최후를 당했지만 바르야그는 영원히 기억될 이름이다
 

러시아 해군이 정작 치욕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적을 얕보고 방심하였던 사실이다. 즉 패배 그 자체보다 상대를 무시하였던 자체가 바로 치욕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교훈을 잊지 않기 위해 오래전 산화한 장병들을 추모하면서 역사적 과오를 다시 한 번 성찰하는 것이다. 이처럼 치욕은 아픔이지만 회피하여야 할 과거의 유산은 결코 아닌 것이다.
 


                                                      합동영결식

 
지난해 5월 4일 국방부 대회의실에서 열린 대통령 주재 전군 주요 지휘관회의에서 천안함이 침몰한 3월 26일을 '국군 치욕의 날'로 인식하고 기억할 것이라고 밝혔는데, 당시에 치욕이라는 단어를 쓰면서 까지 자책하였던 것은 그만큼 결의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다. 적의 기습에 의해 꽃다운 수많은 장병들이 희생당한 엄청난 사실을 단지 아픈 기억이라고 회피할 수는 없다.

 

                                치욕을 결코 잊지 말고 와신상담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결과가 치욕스럽다고 이를 무조건 감추거나 숨길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러한 자세가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치욕을 깊이 되새기고 반성의 기회로 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3월 26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여야 하며, 이런 일이 다시는 재발하지 않도록 되새기는 반면교사의 시간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천안함과 순국장병들을 잊지 말아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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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음향 어뢰 해전-인도·파키스탄 전쟁





천암함 사건 1주년이 되어 간다.

북한은 이 천인공노할 만행에 음향 어뢰를 사용한 사실이 밝혀졌다. 
[음향 어뢰는 배의 엔진 소음 등을 따라 추적하는 수중의 유도탄형 어뢰를 말한다.]

 

                    천암함 - 비열한 만행이 발생한지 일년이 되어간다. 2010년 3월 26일 침몰.


세계 해전사에서 음향 어뢰가 사용된 사례가 딱 한 번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의 이야기다.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때 파키스탄 해군
잠수함이 음향 어뢰로 인도 프리게이트함 한 척을 격침한 해전을 소개한다.


원래 인도는 영국 통치 때까지 파키스탄, 인도, 방글라데시로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국가
였는데 독립되면서 종교에 따라 인도[힌두교]와 파키스탄[이슬람교]로 분리 되었다.


이슬람교는 공교롭게도 인도 대륙의 동쪽과 서쪽 양쪽에
퍼져있어, 파키스탄은 국토가 동 파키스탄과 서 파키스탄으로 분리된 상태로 독립하였다.


그러나 동서로 분리된 파키스탄은
여러 갈등이 발생했는데, 결국은 동 파키스탄의 독립선언과 서 파키스탄 주민간 무력 충돌의 정치 갈등으로 비화했다.


이에 인도가 개입하면서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하였다.
결과 파키스탄이 패배하고 동 파키스탄은 독립하여 오늘날의 방글라데시가 되었다.


1971년 12월 3일부터 12월 16일까지 발생했던 인도·파키스탄 전쟁
동안 양국 사이에 발생했던 해전은 상당한 규모였다.


12월 4일 야간에 인도 해군이 파키스탄 해군에 선공을 가했다.
인도 함대가 파키스탄의 카라치 항을 기습하여 구축함 한 척을 격침시키고 기뢰 제거함 두 척을 대파하고 육상 정유 시설을 파괴하였다. 파키스탄 해군의 전사자만도 720명이나 발생하였다.


동 파키스탄의 벵갈만에서도 인도 해군은 항공모함까지 동원하여
파키스탄 해군을 완전히 봉쇄하고 제해권을 확보했다.


파키스탄 해군은 전쟁 전, 정세가 험악해지고 전운이 감돌자
잠수함 한 척에 기뢰를 적재하고인도 해역으로 출동시켰었다.


은밀한 임무에 동원된 파키스탄 잠수함은 1944년 미국에서
진수한 텐크급 디아블로 함이었는데,


                                  카지 함, 1570톤 - 파키스탄 최초의 잠수함.


1963년 파키스탄에 양도 되어 그 이름이‘카지’함으로 바뀌었다.
1967 파키스탄은 이 잠수함을 터키로 보내 기뢰 설치 시설을 추가하는 개수를 했다.


서 파키스탄을 떠난 카지는 3,000마일이나 항해해서 벵갈만으로 들어왔다.

카지는 벵갈만 인도 동부에 위치한 비샤카파트남 항으로 출입하는 항로에 기뢰를 설치하라는 명을 받았었다. 이 항구는 인도의 해군 기지가 있는 곳이다


그러나 이 잠수함은 기뢰를 부설하는 작업을 시작한지 몇 분 만에
초계하던 인도 해군 구축함 라쥐푸트 함에게 폭뢰 공격을 받고 격침당했다. 자파르 무하마드 칸 함장 이하 승무원 92명 전원이 사망했다.


인도 해군의 발표에 의하면 이 잠수함이 동 파키스탄 치타공의
파키스탄 해군 기지와 교신하는 무선을 감청하고 이에 대응 출동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파키스탄은 잠수함 내부의 적재 기뢰 폭발로 침몰했다고 주장한다.
이 설은 중립적인 여러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있다.
[인도는 카지 함을 인양해서 격침 원인을 조사해보자는 몇 외국 단체의 요청을 거절하고 있다.]


파키스탄 해군은 잇따른 패배 소식에 맥을 추지 못하며
절망감을 참아야 했다.


                        한고르 함 -프랑스 다프네이급 잠수함, 860톤. 장보고 함보다 작다.



그러나 파키스탄 해군의 최신 잠수함 한고르함
인도 해군의 프리게이트함 쿠크리를 뇌격해서 격침시키는 개가를 거두어 파키스탄 해군의 우울한 사기를 일신했다.


해전은 12월 8일 밤에 발생했다.
파키스탄 해군의 최신예함이었던 한고르함은 1968년 프랑스에서 건조한 프랑스 다프네이급 잠수함이다.


전쟁 1년 전인 1970년에 파키스탄에 인도되었었다.
정세가 험해지자 한고르함은 1971년 11월 21일 파키스탄의 기지에서 출항했다. 주어진 임무는 인도 대륙의 카티와 해안 초계였다.


1971년 12월 2일 한고르는 봄베이 항[뭄바이 항] 앞 바다에
잠복 감시하고 있다가 인도 서부 함대의 다수 함정들이 출동하는 것을 탐지했다.


이 함대에 인도의 대형 순양함 미소르도 있었다.


인도 함대는 앞서 소개한 파키스탄의 카라치 항을 급습할
목적으로 출동하고 있는 중이었다.


함대는 수중에 잠복한 한고르함의 전방을 아주 근접해서
지나갔다.


한고르함은 무선 폐쇄를 하고 죽은 듯이 엎드려
있었다. 인도 함대가 통과하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 부상한 한고르함은 인도의 대규모 함대가 출동했다는 정보를 카라치에 보고했다.


보고는 곧 닥쳐올 인도 해군의 파키스탄 카라치 항 기습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였지만 이 중요한 메시지 발신은 인도 해군 통신 정보대에게 감청 당하고 말았다.


무선이 파키스탄 해군의 잠수함에서 발신된 것임을
파악한 인도 해군은 다음날인 12월 3일 서부함대 14전단 소속 프리게이트함 두 척을 인근 해역으로 급파했다.


두 프리게이트함들은 쿠크리키르판이었다.
[쿠타르라는 함도 출동했다는 설도 있다.]
모두 인도 고유의 칼 이름을 딴 함명(艦名)을 가지고 있다.


미국이나 일본같이 대잠 항공 초계 능력이 뛰어난 나라라면
대잠기를 즉각 파견했겠지만 인도 해군은 이런 항공 초계 능력이 턱없이 부족했었다,


출동한 두 척의 군함은 며칠간 전파 발신 주변 해역을 수색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했다.


한편 12월 9일, 한고르함의 전파 탐색기에는 인도 해군 함정들이 발신하는
무선 신호로 추측되는 여러 개의 전파가 감지되었다.


한고르함의 능동 소나 분석 결과, 무선 발신체 두 개는 확실히 인도 해군 전투함에서 발신하는 것임을 알수 있었다.


바로 한고르함을 잡기 위해서 출동했던 쿠크리와 키르판이
서로 주고 받는 무선이었다.


한고르함은 발신 추정 해역을 탐색하기 위해서 북쪽으로 항로를 잡았다.
한고르함의 함장 타스님 중령은 이를 추적해서 발견하면 격침하기로 결심했다.


이 때 목표와의 거리는 6-8마일이었다.
그러나 느리게 수중 항해를 하는 한고르함의 속도보다 적 전투함의 수상 항해 속도가 훨씬 더  빨랐다.


한고르함은 뒤로 처져서 빠르게 앞으로 빠지는 두 함들과 
더 이상 접촉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고르함은 적의 항로를 예상하고 앞질러가서
잠복할 위치로 직행하였다. 저녁 7시경이었다.


1971년 12월 9일 자정 무렵 적함에 접근한 한고르함은
깊숙이 잠항하였다. 이제부터 접근과 뇌격은 오직 소나만을 이용한 맹목 항해에 의해서 행해 질 것이었다.


두 척의 인도 해군함들이 점점 한고르함에 가까워 옴을 탐지 할 수있었다.
사거리 내에 두 척이 들어오자 40미터의 해저에 있던 한고르함은 선두의 키르판에게 음향 어뢰 한 발을 발사했다.


하지만 손에 땀을 쥐고 기다리던 한고르함 소나 병에게
아무런 폭발음도 들려오지 않았다. 어뢰가 목표를 명중시키지 못했던 것이었다.


                          쿠크리는 영국이 건조한 블랙우드급 프리게이트 함.-1,456톤
                                 
사진은 쿠크리와 같은 급의 익스마우스 함.
 

어뢰가 명중하지 못했지만 키르판은 어뢰가 스쳐 지나갔음을 알아챘다.


키르판의 함장은 자신의 함이 적 잠수함의 공격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자마자 함수를 돌려 최대 속도로 도주해 버렸다.


키르판은 대피했지만 그 남쪽에 있던 쿠크리는 도주하지 않고
반대로 어뢰가 달려 온 방향을 파악하고 함수를 한고르함을 향하여 역시 최대 전투 속도로 정면 육박해왔다.


한고르함은 전속력으로 덤비는 쿠크리로 함수를 전환하고
응전에 나섰다.


발사 제원을 입력하고 조준한 한고르함은 두 번째의 어뢰를 발사했다.
한고르함 소나 병의 이어폰에 음향 어뢰가 달리는 소음과 이어서 엄청난 폭발음이 잡혔다. 쿠크리에게 명중한 것이다.


폭발음이 들리기 직전 힌고르함의 소나 병은 쿠크리의
마드라 나태뮤라 함장이 즉시 어뢰 회피 기동을 명령하는 것을 감지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늦었다.


간발의 차이로 음향 어뢰는 쿠크리의 엔진 소리를 쫓아와 폭발했다.
한고르함은 전투후 부상해서 생존자를 찾았지만 아무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음향 어뢰에 명중한 쿠크리는 단 2분 만에침몰하고 18명의 장교를 포함한 176명의 전 승무원이 침몰하는 함과 함께 운명을 같이했다. 인도 구지라트 주 디우 해안 앞 바다에서의 해전이었다.


                                      뇌격 순간의 긴장한 한고르함 내부 그림.
                  중앙에 서 있는 사람이 타스님 함장.
나중에 쓰리 스타 제독으로 진급했다.


일설에 의하면 함장이 구명 조끼를 부하 장교에게 건네주고 침몰하는 함과 함께 운명을 같이 했다고 하는데 이 말은 신빙성이 없다.[생존자가 한 명도 없었는데 누가 목격하고 이런 소리를 했는지 궁금하다.]

한고르함의 첫 뇌격에 놀라서 도주하던 키르판은 동료함이 침몰
되는 것을 보고 크게 분격해서 다시 되돌아와 급하게 폭뢰 공격을 가했다.


키르판은 이 폭뢰 공격에 한고르함이 격침되던가 또는 최소한 위협을 느껴
철수하기를 기대했지만, 한고르함은 피하지 않고 기회를 엿보다가 폭뢰를 뿌리는 키르판의 함미에 음향 어뢰를 한 발 더 쏘았다.


한고르함이 발사한 세 번째 음향 어뢰였다.


키르판은 한고르함이 어뢰를 발사하자마자 이를 발견하고 빠른
회피 기동과 함께 다시 최고 속력으로 도주하였다.


한고르함도 함수를 서쪽으로 돌리고 더 깊은 바다 속으로 잠항해서 다시
있을지 모르는 키르판의 역습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키르판은 그대로 철수하고 말았다.


한고르함은 나흘간 그 해역을 어슬렁거리며 추가 먹잇감을 찾았으나
인도 해군은 잠수함 출몰 해역으로 다시 출동하지 않았다. 한고르함은 12월 13일 서 파키스탄 해군기지로 귀항하였다.


인도·파키스탄 전쟁은 12월 16일 인도의 승리로 종식되었고
동 파키스탄에서는 라만 수상을 수반으로한 방글라데시 정부가 수립되어 방글라데시 국의 탄생을 선포하였다.


한고르함은 파키스탄 해군에서 30년 이상을 활동하다가
2006년에 퇴역하였다.


천안함 사건을 바탕으로 음향 어뢰가 사용되었던
인도 해군과 파키스탄 해군의 해전 상황을 살펴보면 두 가지의 특성에 눈길이 간다.


첫째는 음향 어뢰의 명중률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사실이다.
세 발 쏘아서 한 발이 명중했는데 유도 무기의 명중률로는 아무래도 시원치 않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어뢰가 사용된 해전은
두 번 있었다.


첫 번이 인도·파키스탄 전쟁이고 다음이 1982년의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전쟁이다.


포클랜드 전쟁에서 1982년 5월 2일 영국 핵잠수함 콘쿼러함이
아르헨티나 순양함 벨그라노함을 격침했다.


                                    영국 핵잠 콘쿼러 함-4,000톤급 대형함.


영국 잠수함은 유도 장치가 없는 재래식 어뢰
세 발을 발사해서 그중 두 발을 명중시켰다.


함장 크리스 레포드 브라운 중령은 장비했던 음향 어뢰를
사용하지 않았던 이유로 그 신뢰성에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었다.


40년의 세월이 지나 정밀 공업이 별로 발달하지도 못한 북한의 음향 어뢰가 천암함을 명중했는데, 그 간 세계적으로 음향 어뢰 제작 기술이 크게 발전하였고 북한도
이 방면에 기술을 상당히 축적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하다.

두 번째는 통신 보안의 문제이다. 인도·파키스탄 해전이 의미하는 또 다른 것은 전쟁 중의 해군 함정들의 통신 보안 문제이다.


                           격침되는 아르헨티나 순양함 벨그라노[9,575톤].323명 사망 


앞에서 소개했다시피 양쪽 해군은 상대방 함정의
무선을 감청해서 정보를 얻고 이에 대응하는 작전을 전개했었다.


인도·파키스탄의 잠수함 해전사가 주는 또다른 중요한 교훈은 해전에서
무선 통신 보안의 중요성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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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열혈국방 트랙백 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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