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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4.28 일본 해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미 군함의 해상 육탄돌격










해상의 육탄 돌격


태평양 전쟁이 개전하면서 일본은 미국의 과학 기술과 생산 경제력을
두려워했지만, 막상 전투에서 맞 부닥치면 용맹함과 강인함에서는 미군이 일본군을 압도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미군은 무사의 나라인 일본 병사들처럼 죽음을 초개와 같이 알고
육박전이나 돌격전을 감행하는 것을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이는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군과 전투해본 경험에 비춰 백인종이란 뒤가 무르고
악착같지 못하다는 인상을 가진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진주만 기습과 함께 말레이지아로, 필리핀으로 몰고 들어가 영국군이나 미군 등과 싸워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둔 일본군은 허망하게 패퇴하는 미·영군을 보고‘그러면 그렇지... 제까짓 코쟁이들이’하였었다.


그러나 미군의 반격이 시작되고 과달카날에서 미군 해병대들과
대결 해본 일본군은 그 생각을 깨끗이 버려야 했다.


미 해병들도 일본군 못지않게 총검 돌격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육박전도 사양하지 않았다.


일본군은 놀랄 수 밖에 없었는데 예상치 않던 미군들의 용감성은 바다에서도
발휘되어 일본 해군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1942년 과달카날 근해에서
일본 해군의 거함 히에이에게 육박해서 히에이 함장을 비롯해서 다수를 살상하고 큰 피해를 준 미 구축함이 있었다.


구축함 라피[USS Laffey DD-459]다.
구축함 라피는 1941년 10월 31일 진수한 비교적 새로운 함정이었다. 이 함정은 나중에 크게 활약한 프레처나 기어링급 보다는 조금 작고 구형인 벤슨 급으로서 1,620톤의 크기에 5인치 주포 4문과 5문의 20mm 기관포가 있었다. 그래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여러 전장에서 활약하였다.



                                           미 구축함 라피


미국이 반격을 개시했던 과달카날 전역에서 치열했던 육상전과 마찬가지로 해전도 자주 발생했었다.


1942년 11월 13일.
구축함 라피는 대니얼 캘라한 제독이 지휘하는 다섯 척의 순양함과 여덟 척의 구축함 초계선을 따라 야간 순항하고 있었다.


과달카날의 핸더슨 비행장을 야간 포격하러 내침하는
일본 함대나 과달카날 일본군 보급함대를 경계하는 초계 임무를 수행중이었다.


라피는 다섯 척의 구축함 중 구축함 쿠싱의 뒤에,
그리고 스테렛과 오배넌의 앞의 2번 위치였다.


자정 무렵 레이다 견시는 적함 출현을 보고했다.
후에 '과달카날 해전'이라는 이름이 주어진 해전이 시작된 것이다. 야간을 이용해서 내습한 일본 함대는 아베 히로아키 중장이 지휘하는 두 척의 전함, 한 척의 경순양함, 그리고 열 네 척의 구축함이었다.



                                            아베 히로아키 중장
                                 야마모토의 전쟁 지도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두 척의 일본 전함은 히에이와 기리시마로 미군 함대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세력이었다. 미 함대가 누릴 수 있는 강점은 단지 함들이 장비하고 있었던 레이다들 뿐이었다.


적이 포사격 거리에 이르자 즉시 교전이 벌어졌다.
조용했던 해상에 포성이 진동하고 각 함의 포에서 토하는 섬광과 서치 라이트 불빛이 난무했다. 구축함 라피도 전투에 뛰어들어 적함들에 포사격과 어뢰 발사를 되풀이 하였다.


이 치열한 해전 중에 적 기함 히에이가 갑자기
어둠을 뚫고  라피의 좌현 측방에 나타났다.


두 군함은 불과 몇 분 내에 충돌이 확실한 전방의 한 방향을 
향하여 서로 가까워지며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전함 히에이와 구축함 라피는 불과 6미터 내로 육박했다.
충돌하면 장갑이 두꺼운 히에이는 무사하지만 라피는 침몰을 피치 못 할 것이었다.


그 때 라피의 위치는 절망적이었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적 함대의 본진에 뛰어 든 것이다. 바로 뒤에 일본 전함이 있었고 다른 전함이 바로 좌현 쪽에 있었고 좌현 함미 쪽에서 일본 해군 구축함 두 척이 항해 중이었다.



                                                전함 히에이
       일왕 히로히도가 가장 좋아 했던 군함으로서 관함식때 자주
사용하였다. 1913년 건조시 세계 최강의
       함으로서 두어번의 개장으로
현대화 되었다. 사진은 마지막 개장후인 1942년 사진 36,600톤


이제 다른 방법은 없었다.
아수라(불교, 싸우기를 좋아하는 귀신..)와 같이 싸우고 혼란을 틈타서 도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라피는 회피 기동을 하면서 바로 지척에 다가온 산더미 같이 거대하게 보이는 히에이에 가지고 있던 모든 화력을 집중했다.


높이 보이는 함교가 주 목표였다.
여섯 문의 20mm 기관포가 일본 함대 지휘소인 함교를 비질하듯 두들겼다. 여기에 4 문의 5인치 주포도 거의 영(零)거리에서 히에이에게 불을 뿜었다.

당황했던 히에이도 응전했다. 전함의 주포인 14인치 포탄 한 발이 라피를 때렸다. 라피가 이 거대한 탄의 충격에 휘청거릴 때 뒤에서 따라오던 일본 구축함 데루즈키가 부채 살처럼 여러 발 발사한 어뢰 중 한 발이 라피의 함미에 명중하였다.



                               구축합 데루즈키, 후에 어뢰정 PT에게 격침당했다. 


함미에는 탄약고가 있었다. 함장은 이미 항해 능력을 잃은 배를 버리고 탈출하라는 총원 퇴함의 명령을 내렸다.


퇴함 명령이 내려지던 순간 함미의 탄약고가 대 폭발을 일으키며
라피는 두 조각이 나서 급속히 침몰했다.


승무원중 함장을 비롯해서 59명이 전사했고 116명 부상한채 구조되었다.
일본 구축함 데루즈키는 한달 뒤 과달카날 근해에서 미 해군 어뢰정 PT 37과 PT 40에게 뇌격을 당하고 역시 발화한 불이 폭뢰에 번져 폭발과 함께 침몰했다.


1992년 과달카날 해저에서 라피의 함체가 발견되었는데 후반부
삼분지 일은 흔적도 없었지만 전반부는 히에이의 주포에 맞은 함교 아래 부분의 커다란 파괴공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깨끗한 상태였다.


네 문의 주포와 기관포들은 모두 좌현으로 돌려져 있었다.
격침 될 때까지 히에이에게 화력을 퍼부었던 사실을 증명해주는 것이었다.


사지에 몰려서 필사적으로 발휘한 용감함이라지만
구축함 라피의 분전과 희생은 예상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이날 과달카날 해전에서 미 함대는 참패를 당했다.


함대 사령관 캘라한 제독과 차석 지휘관 스코트 제독도
전사했고 다량의 전투함을 상실했다. 전투뒤 온전하게 작전을 계속할만한 전투함은 중순양함 헤레나와 구축함 한 척 뿐이었다.


                           일본 해군의 포격이 함교에 명중하여 전사한 캘라한 제독
                             후에 미국 최고 무공 훈장인 명예훈장이 추서되었다.


이에 비해서 일본 함대의 손실은 상대적으로 경미했다. 히에이가 세 척의 미군 구축함의 공격으로 피해를 입어 대파되었지만 기리시마와 경순양함 나가라 그리고 네 척의 구축함이 온전해서 지척에 있는 과달카날 섬의 헨더슨 비행장에 폭격을 할 수가 있었다.


과달카날 섬의 해병들은 이날 밤 천지를 진동하는 해전의
포사격 소리로 잠을 이루지 못했었다.


일함들은 그대로 항진해서 과달카날로 돌격하여 함포사격을 할
전력이 충분했었다.
그러나 라피의 돌발적인 공격으로 부상을 입고, 자기 눈앞에서 부하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는 것을 보고 간담이 서늘해진 함대 사령관 아베 제독은 작전 중지를 명하고 철수하고 말았다.


평소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함대 사령관과 사이도
안 좋았고 과달카날을 사수하려는 해군 전략을 반대하고 있었지만, 피투성이가 된 자신과 부하들의 피해에 그만 마음이 약해진 것이 틀림없었을 것이다.



          손상을 입고 귀환 중 미군기의 공습을 받고 최후의 회피 기동을 하는 히에이-결국 격침되었다.


그가 지휘했던 히에이는 귀항 중 미군의 항공 공격으로 침몰 당했고, 그는 야마모토에게 해임 당한 후 3 개월 뒤 불명예 제대나 다름없는 강제 퇴역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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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열혈국방 트랙백 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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