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의 육탄 돌격


태평양 전쟁이 개전하면서 일본은 미국의 과학 기술과 생산 경제력을
두려워했지만, 막상 전투에서 맞 부닥치면 용맹함과 강인함에서는 미군이 일본군을 압도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미군은 무사의 나라인 일본 병사들처럼 죽음을 초개와 같이 알고
육박전이나 돌격전을 감행하는 것을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이는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군과 전투해본 경험에 비춰 백인종이란 뒤가 무르고
악착같지 못하다는 인상을 가진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진주만 기습과 함께 말레이지아로, 필리핀으로 몰고 들어가 영국군이나 미군 등과 싸워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둔 일본군은 허망하게 패퇴하는 미·영군을 보고‘그러면 그렇지... 제까짓 코쟁이들이’하였었다.


그러나 미군의 반격이 시작되고 과달카날에서 미군 해병대들과
대결 해본 일본군은 그 생각을 깨끗이 버려야 했다.


미 해병들도 일본군 못지않게 총검 돌격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육박전도 사양하지 않았다.


일본군은 놀랄 수 밖에 없었는데 예상치 않던 미군들의 용감성은 바다에서도
발휘되어 일본 해군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1942년 과달카날 근해에서
일본 해군의 거함 히에이에게 육박해서 히에이 함장을 비롯해서 다수를 살상하고 큰 피해를 준 미 구축함이 있었다.


구축함 라피[USS Laffey DD-459]다.
구축함 라피는 1941년 10월 31일 진수한 비교적 새로운 함정이었다. 이 함정은 나중에 크게 활약한 프레처나 기어링급 보다는 조금 작고 구형인 벤슨 급으로서 1,620톤의 크기에 5인치 주포 4문과 5문의 20mm 기관포가 있었다. 그래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여러 전장에서 활약하였다.



                                           미 구축함 라피


미국이 반격을 개시했던 과달카날 전역에서 치열했던 육상전과 마찬가지로 해전도 자주 발생했었다.


1942년 11월 13일.
구축함 라피는 대니얼 캘라한 제독이 지휘하는 다섯 척의 순양함과 여덟 척의 구축함 초계선을 따라 야간 순항하고 있었다.


과달카날의 핸더슨 비행장을 야간 포격하러 내침하는
일본 함대나 과달카날 일본군 보급함대를 경계하는 초계 임무를 수행중이었다.


라피는 다섯 척의 구축함 중 구축함 쿠싱의 뒤에,
그리고 스테렛과 오배넌의 앞의 2번 위치였다.


자정 무렵 레이다 견시는 적함 출현을 보고했다.
후에 '과달카날 해전'이라는 이름이 주어진 해전이 시작된 것이다. 야간을 이용해서 내습한 일본 함대는 아베 히로아키 중장이 지휘하는 두 척의 전함, 한 척의 경순양함, 그리고 열 네 척의 구축함이었다.



                                            아베 히로아키 중장
                                 야마모토의 전쟁 지도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두 척의 일본 전함은 히에이와 기리시마로 미군 함대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세력이었다. 미 함대가 누릴 수 있는 강점은 단지 함들이 장비하고 있었던 레이다들 뿐이었다.


적이 포사격 거리에 이르자 즉시 교전이 벌어졌다.
조용했던 해상에 포성이 진동하고 각 함의 포에서 토하는 섬광과 서치 라이트 불빛이 난무했다. 구축함 라피도 전투에 뛰어들어 적함들에 포사격과 어뢰 발사를 되풀이 하였다.


이 치열한 해전 중에 적 기함 히에이가 갑자기
어둠을 뚫고  라피의 좌현 측방에 나타났다.


두 군함은 불과 몇 분 내에 충돌이 확실한 전방의 한 방향을 
향하여 서로 가까워지며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전함 히에이와 구축함 라피는 불과 6미터 내로 육박했다.
충돌하면 장갑이 두꺼운 히에이는 무사하지만 라피는 침몰을 피치 못 할 것이었다.


그 때 라피의 위치는 절망적이었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적 함대의 본진에 뛰어 든 것이다. 바로 뒤에 일본 전함이 있었고 다른 전함이 바로 좌현 쪽에 있었고 좌현 함미 쪽에서 일본 해군 구축함 두 척이 항해 중이었다.



                                                전함 히에이
       일왕 히로히도가 가장 좋아 했던 군함으로서 관함식때 자주
사용하였다. 1913년 건조시 세계 최강의
       함으로서 두어번의 개장으로
현대화 되었다. 사진은 마지막 개장후인 1942년 사진 36,600톤


이제 다른 방법은 없었다.
아수라(불교, 싸우기를 좋아하는 귀신..)와 같이 싸우고 혼란을 틈타서 도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라피는 회피 기동을 하면서 바로 지척에 다가온 산더미 같이 거대하게 보이는 히에이에 가지고 있던 모든 화력을 집중했다.


높이 보이는 함교가 주 목표였다.
여섯 문의 20mm 기관포가 일본 함대 지휘소인 함교를 비질하듯 두들겼다. 여기에 4 문의 5인치 주포도 거의 영(零)거리에서 히에이에게 불을 뿜었다.

당황했던 히에이도 응전했다. 전함의 주포인 14인치 포탄 한 발이 라피를 때렸다. 라피가 이 거대한 탄의 충격에 휘청거릴 때 뒤에서 따라오던 일본 구축함 데루즈키가 부채 살처럼 여러 발 발사한 어뢰 중 한 발이 라피의 함미에 명중하였다.



                               구축합 데루즈키, 후에 어뢰정 PT에게 격침당했다. 


함미에는 탄약고가 있었다. 함장은 이미 항해 능력을 잃은 배를 버리고 탈출하라는 총원 퇴함의 명령을 내렸다.


퇴함 명령이 내려지던 순간 함미의 탄약고가 대 폭발을 일으키며
라피는 두 조각이 나서 급속히 침몰했다.


승무원중 함장을 비롯해서 59명이 전사했고 116명 부상한채 구조되었다.
일본 구축함 데루즈키는 한달 뒤 과달카날 근해에서 미 해군 어뢰정 PT 37과 PT 40에게 뇌격을 당하고 역시 발화한 불이 폭뢰에 번져 폭발과 함께 침몰했다.


1992년 과달카날 해저에서 라피의 함체가 발견되었는데 후반부
삼분지 일은 흔적도 없었지만 전반부는 히에이의 주포에 맞은 함교 아래 부분의 커다란 파괴공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깨끗한 상태였다.


네 문의 주포와 기관포들은 모두 좌현으로 돌려져 있었다.
격침 될 때까지 히에이에게 화력을 퍼부었던 사실을 증명해주는 것이었다.


사지에 몰려서 필사적으로 발휘한 용감함이라지만
구축함 라피의 분전과 희생은 예상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이날 과달카날 해전에서 미 함대는 참패를 당했다.


함대 사령관 캘라한 제독과 차석 지휘관 스코트 제독도
전사했고 다량의 전투함을 상실했다. 전투뒤 온전하게 작전을 계속할만한 전투함은 중순양함 헤레나와 구축함 한 척 뿐이었다.


                           일본 해군의 포격이 함교에 명중하여 전사한 캘라한 제독
                             후에 미국 최고 무공 훈장인 명예훈장이 추서되었다.


이에 비해서 일본 함대의 손실은 상대적으로 경미했다. 히에이가 세 척의 미군 구축함의 공격으로 피해를 입어 대파되었지만 기리시마와 경순양함 나가라 그리고 네 척의 구축함이 온전해서 지척에 있는 과달카날 섬의 헨더슨 비행장에 폭격을 할 수가 있었다.


과달카날 섬의 해병들은 이날 밤 천지를 진동하는 해전의
포사격 소리로 잠을 이루지 못했었다.


일함들은 그대로 항진해서 과달카날로 돌격하여 함포사격을 할
전력이 충분했었다.
그러나 라피의 돌발적인 공격으로 부상을 입고, 자기 눈앞에서 부하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는 것을 보고 간담이 서늘해진 함대 사령관 아베 제독은 작전 중지를 명하고 철수하고 말았다.


평소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함대 사령관과 사이도
안 좋았고 과달카날을 사수하려는 해군 전략을 반대하고 있었지만, 피투성이가 된 자신과 부하들의 피해에 그만 마음이 약해진 것이 틀림없었을 것이다.



          손상을 입고 귀환 중 미군기의 공습을 받고 최후의 회피 기동을 하는 히에이-결국 격침되었다.


그가 지휘했던 히에이는 귀항 중 미군의 항공 공격으로 침몰 당했고, 그는 야마모토에게 해임 당한 후 3 개월 뒤 불명예 제대나 다름없는 강제 퇴역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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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략자의 마지막 도박, 복제 전투기 [下]
 
 
태평양전쟁 말기에 미 해군이 주력으로 사용하던 전투기는 F4U와 F6F였다. 전쟁 초기에는 일본의 제로기가 구닥다리 미군 전투기를 압도하였지만 얼마가지 않아 새롭게 등장한 위 전투기들에 몰려 도망 다니기에 급급한 실정으로 역전 당하였고, 일본은 이런 격차를  극복할 수 없었다. 일본 군부는 이러한 암울한 상황을 다시 바꾸고자 하였다.
 
                               시범비행중인 미군의 F6F(아래)와 일본의 제로전투기(위)
                                          하지만 제로기는 F6F와 맞서기 힘들었다.
 

마침내 1944년 중순경, 만난을 무릅쓰고 잠수함으로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서 독일로부터  얻게 된 최신 군사지원 자료에는 전편에 소개한 Me-163외에도 세계최초로 제식화한 제트전투기 Me-262에 관한 귀중한 자료도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귀한 자료를 입수한 일본은 이를 Ki-201로 명명하고 나까지마사에 즉시 제작하도록 지시하였다.
 
                                            최초의 제트 전투기인 독일의 Me-262
 

그런데 제2차 대전 당시 일본 군부는 육군과 해군이 서로 협력하기 보다는 권력을 분점하고 경쟁하던 사이였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전사나 무기개발 과정을 살펴보면 자존심을 내세워 쓸데없이 경쟁을 하고는 하였는데, 그러한 와중에 일본식 Me-262 또한 처음부터 육군용과 해군용으로 나뉘어 개발되었다.

 
                                      일본판 Me-262인 Ki-201 제작 중 모습
 

물론 전투기가 육군용과 해군용이 기능이나 성능이 차이가 많이 날 수밖에는 없지만 1945년에 와서 일본 해군은 더 이상 항공모함을 운용할 여력이 되지 못한 상태였다. 더구나 한곳으로 자원을 집중하여 무기를 개발해도 부족할 판에 굳이 각 군별로 자원을 나누어 신무기 개발에 나선 것은 한마디로 말해 무모한 도전이었다.

 
                                                  나까지마 제작공장
 
어쨌든 설계도를 바탕으로 일본은 육군용인 카류해군용 기까의 동시 개발에 착수 하였다. 비행체로써의 기본구조는 육군용 해군용이 별로 차이가 없었지만, 이를 사용하고자하는 목적은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해군은 적의 폭격기를 요격하는 제공 전투기로 개발에 나섰지만 육군은 폭탄을 탑재 할 수 있는 전폭기로써 개발방향을 잡았다.
 
                                                    엔진장착부
 

사실 Ki-201의 원형인 Me-262도 히틀러의 간섭으로 인하여 폭격기로 개발되는 잘못된 길을 갔었다. 당시 독일이건 일본이건  본토가 무차별적으로 폭격을 당하던 와중이었기 때문에 연합군의 공습을 저지하는 것이 우선의 당면 과제였다. 따라서 단 한기의 고성능 요격기가 아쉬운 형편이었는데 프로펠러기가 감히 추격하기 어려운 속도를 자랑하는 제트기는 이에 적합한 물건이었다.

 
                                                  지상시험 중인 모습

 
하지만 즉시 보복을 외치던 위정자들의 편협한 발상에 제트기의 이런 장점은 묻혀버렸다. 지상공격은 비행기의 속도보다 저공에서의 선회력과 대공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내구성이 좋아야하는데 초기의 제트기는 그런 임무에 부적합하였다. 결론적으로 자신들의 처지를 직시하지 못한 히틀러나 일본 육군의 한심한 발상은 인류사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전체 도색이 완료된 Ki-201


어쨌든 카류를 기준으로 일본 군부는 제작사에 운항속도가 최고시속 852km, 상승한도는 12,000m 그리고 항속거리는 980km가 되며 주무장으로 30mm기관포 2문과 보조무장으로 20mm기관포 2문 그리고 500~800Kg의 폭탄 1발을 장착할 수 있도록 요구하였는데 이는 오리지널인 Me-262의 성능을 웃도는 것으로 당시 일본 항공업계에서 실현 불가능한 가혹한 것이었다.

 
                                 일본의 인기 애니메이션인 마징가에 등장한 Ki-201

 
제작사는 1946년 3월까지 원형기를 포함하여 총 18기의 초도기를 만들 예정이었지만 종전으로 개발은 중단되었다. 비록 이들이 완성되었어도 전쟁의 향방을 바꿀 수는 없었겠지만 연합군은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는데 조금 더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우리 입장에서는 미완성으로 끝난 이러한 시도가 다행이라 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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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비사(秘史) - 소.일 잠수함 해전


 
소련과 일본은 1905년 쓰시마 근해에서 큰 해전을 치른 뒤 수 십 년 동안 바다에서 크게 격돌한 일은없었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기까지 소련과 일본은 동해에서 서로 경계하는 불편한 대치 상태를 유지했지만 실제로 전투를 한 일은 없었다.
 
그런데 태평양 전쟁이 터지고 그 다음해 일본의 잠수함이 소련 잠수함을 뇌격해서 격침시킨 작은 소.일 해전이 발생했다.
 
그런데 이 해전은 이런 격돌이 발생했을법한 동해가 아니라 태평양을 가로 질러 머나먼 미국 서해안 해역에서 발생했었다는 점이 특색이다. 그리고 두 격돌 상대는 서로 상대가 누군지를 몰랐다는 것도 또 다른 특색이다.
 
가격자인 일본 해군은 자신들이 뇌격한 것이 미국 잠수함이라고 단정했었고, 피격자인 소련 해군 역시 가격자로 미 해군을 의심했었다.
 
미 근해에서 소련 잠수함을 뇌격한 일본 잠수함은 해전사에 상당히 유명한 존재로 기록되어 내려온다. 이 잠수함은 I-25잠수함으로은 정찰기를 탑재한 특수 목적의 잠수함이다. I-25잠수함은 2,344톤의 크기에 6문의 어뢰 발사관과 140mm 함포를 장비하고 있다.
 

                                                              I-25 수상기 탑재 잠수함


잠수함 사령탑 앞에 작은 격납고가 있어서 여기에 날개를 분해한 정찰기를 싣고 항해하다가 목적지 부근 해상에서 날개를 다시 결합하여 출격시킨다.

미군들이 그렌[glen]이라고 부르는 이 복좌 수상 정찰기에는 푸로트[float]가 붙어 있어서 해상에서 이착륙을 할 수가 있다.

일본의 제식 명칭은 영(zero)식 소형 수상 정찰기이며 340 마력의 엔진을 가진 소형기로서 880 킬로 미터를 비행할 수가 있다.
 

                                                    영식 소형 수상 정찰기 - 아이치 사 제작


일본 잠수함 I-25에서 발진한 정찰기가 미 본토를 최초로 폭격했었고, 잠수함도 함포로 미 본토를 최초로 직접 포격했었다. 함장은 다카미 메이지 중좌였는데 부하들에게도 상당한 존경을 받는 유능한 함장이었다.

정찰기 조종사는 후지다 노부오 준위였다. 1932년 해군에  입대하여 1933년 조종사가 된 그는 일본 해군 항공대의 고참 조종사였다. 

그의 이름이 진주만 기습 항공대장 후지다 미쓰오 중좌와 비슷해서 두 사람을 혼동하는 미국 관련 서적을 본 일이 있다. 그는 나중에 최초 미 본토 폭격에 대한 책을 써서 상당한 유명 인물이 되었다.
 
 
                                                                 후지다 노부오 준위


그의 잠수함 I-25는 일본 해군의 진주만 기습 때부터 출동해서 전쟁 초기 남태평양을 가로 지르며 내내 정찰 활동을 했다.
 
1942년 2월 17일 시드니 항 정찰을 시작으로 호주의 멜번 항, 호바트 항의 상공을 유유히 나르며 사진을 촬영 했다. I-25는 활동을 계속해서 3월 8일에는 뉴질랜드의 웰링턴 항을 정찰했으며, 그 후에 더 이동해서 피지 섬의 상공을 정찰 비행했다.
 
남태평양 쪽의 활동을 마치고 요코스카로 귀항한 I-25는 도크 정비 후 다시 출항하여 그 함수를 서쪽으로 향했다.
 

                                                            후지다 준위와 그의 수상 정찰기


1942년 은밀하게 미 서해안에 접근한 I-25는 잠수함 함포로 아스토리아 근처 포트 스티븐스의 해안포대를 포격하였다. 그해 9월 I-25는 더 야심찬 작전 계획을 가지고 다시 미 본토로 출항하였다.
 
일본 해군이 원래 잠수함에 항공기를 탑재하는 개념 개발 단계에서 염두에 두었던 제일 큰 목표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는 파나마 운하의 폭격과 폐쇄였었다.
 
하지만 미국도 이를 알고 파나마 운하 양 입구에 엄청난 해상 및 공중 대잠 초계 자원을 집중시켜 놓아서 접근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다음 단계로 선택한 임무가 미국 본토 서해안 산림 지대를 폭격해서 큰 산불을 내는 것이었다.
 
1942년 9월 9일 미 서해안 오레곤주에 은밀히 접근한 I-25는 후지다와 오쿠다 쇼지 하사가 탑승한 수상기를 발진시켰다.
 
후지다는 오레곤 주의 에밀리 산 상공에 진입하여 소이 폭탄을 두 발을 투하했다. 한 발은 행방이 불명이 되었지만 한 발은 그럭저럭 작은 산불을 일으켰다. 그러나 전날 비가 온데다가 숲이 습해서 금방 저절로 꺼지고 말았다.
 
9월29일 후지다는 다시 출격해서 케이프 블랑코 부근 산에 폭탄을 투하했으나 이 폭탄들은 산불도 일으키지 못했고 미 당국에도 발견되지 못한 채 미궁 속으로 사라졌다.
 
 
                                                                  영식 소형 수상 정찰기


하여튼 태평양 전쟁 중에 일본군이 저질렀던 여러 멍청한 짓 중의 하나였던 미 본토에 산불내기 임무를 그런대로 완수한 I-25는 미 연안을 따라 초계 항해를 하다가 유조선들인 SS 캄덴과 SS 래리 도흐니들을 발견하고 어뢰로서 격침시켰다.
 
그러나 진짜 먹음직한 먹잇감은 10월11일 발견하였다. I -25잠수함 견시가 종대로 항해하고 있는 두 척의 잠수함을 목격한 것이다.
 
위치는 오레곤 앞바다 800마일 해역이었다.
 
급속 잠항한 I-25는 접근해서 그 중 앞서 가던 한 척에게 어뢰를 발사했다. 두 발의 대형 어뢰에 맞은 선두의 적 잠수함은 격심한 폭발음을 내고 그대로 격침되었다.
 
I-25는 격침 된 잠수함이 당연히 미 해군 소속의 것으로 판단해서 일본의 해군 사령부에도 미 잠수함을 격침하였다고 보고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잠수함들은 미 해군이 아니라 소련 해군 소속이었다.


 
소련 잠수함을 격침한 순간부터는 소련 측의 기록을 인용해보기로 한다.

이들 잠수함들은 소련 해군의 ‘L'형 잠수함들이었다.
 
당시 전황으로서는 소련 잠수함들이 미국 해안에 나타난다는 것은 상상하기가 힘든 일이지만 두 척의 잠수함은 블라디보스톡 해군 기지에 소속된 7척의 잠수함 중 일부였다.
 

                                                            소련 레니넷츠 급 잠수함  -1,123톤


비록 소련과 일본은 불안하지만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소련 대륙의 반대편 북해는 전황이 심각했다.
 
북해의 소련 항 무르만스크는 미영 서구진영에서 소련으로 보내는 모든 전쟁 물자가 유입되는 유일한 입구였다.
 
독일 해군은 미영의 보급 수송 선단을 차단하기 위해서 북해에 강한 해군력을 집중해서 선단과 호위 함대들을 공격했었다.
 
소련 해군은 블라디보스톡 해군기지 소속 잠수함 6척을 무르만스크로 이동 배치하기로 결정하고 이동 명령을 내렸다. 블라디보스톡 기지에는 L급과 S급 두 가지 잠수함이 배속되어 있었다. L급 잠수함 두 척을 먼저 보내기로 했었다.
 
이동 경로는 북태평양과 미 서해안을 거쳐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고 대서양을 횡단해서 북해를 통해 무르만스크로 향하는 것이었다.
 
미국과 영국에 지원을 요청해서 이들로부터 긍정적인 대답을 확보한 소련은 1942년 9월 24일 먼저 L-15과 L-16을 출항시켰다.
 
L-15의 함장은 코마로프 대위, L-16의 함장은 블라디보스톡 잠수함대 최연장자인 구마로프 대위였다.
 
레니넷츠급인 L-16은 1,100톤으로 비교적 소형 잠수함이며, 이 레니넷츠급 잠수함 중 16번째로 건조된 잠수함이다.
 
두 함은 먼저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항해를 계속, 알래스카 앞 알류산 열도의 더치 하버에 기항해서 미 해군으로부터 재급유와 재보급을 받고 10월 6일 다시 출항했다
 
다음 기항 예정지는 미국 서해안의 샌프란시스코였다. 출항한지 6일 후인 10월 11일, 잠수함 견시 당직 교대 시각인 오전 11시 15분, L-15의 함교에 있던 코마로프 함장과 신호병 스몰니코프는 전방에서 들려오는 두 개의 큰 폭음에 놀랐다.

폭음의 방향을 바라본 두 사람은 앞서 가던 동료함 L-16에서 터져 나오는 화염과 연기를 발견했다.
 
같은 순간에 L-15의 통신장교는 L-16으로부터 평문의 다급한 무선을 수신했다.
 
“우리는 ---”으로 시작한 전문은 위의 말만 남기고 중단되었다.
 
함교의 코마로프 함장은 L-16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을 목격하였다. 같이 함교에 있던 스몰니코프 수병은 다른 방향의 파도 사이로 수상한 잠망경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함장에게 보고했다.

코마로프는 잠수함의 포수들을 즉시 전투 배치하고 잠망경이 나타나면 포격하라고 명령했으나 잠망경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코마로프는 L-16함이 침몰한 전방 위치로 빠르게 이동해서 주변 해면을 살폈지만 아무런 생존자를발견할 수가 없었다. 코마로프는 자신들이 두 번째 표적이 될 위험성을 감지하고 비상 급속 잠항을 했다.
 
L-15는 그날 하루 종일 총원 전투 배치를하고 공격에 대비하며 위험 수역에서 빠져 나와야만 했다.
 
소련은 이 비극이 있었는데도 이어서 10월 6일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한 4척의 S형 잠수함에게 그대로 항해를 계속하도록 명령했다.
 
네 척의 잠수함은 여러 어려움을 겪었지만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너 북해의 무르만스크에 도착하였다.
 
 
                                                소련 S 급 잠수함- 840톤 , L급 보다 더 작고 구형이다.


L-16함의 격침 사고에 소련은 오랫동안 이것을 미 해군이 저지른 것으로 의심하였다고 한다.
 
L-15가 알류샨 열도의 더치 하버에 기항해서 그곳 미 해군 측과 앞으로의 항해 계획을 상의했을 때미 해군은 추가 파견 소련 S급 잠수함대의 출발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를 L-15 코마로프 함장에게  알려주지 않았었다.
- 미 해군에 복무하는 러시아 이민 출신 수병이 추가 파견 잠수함대가 출발했음을 코마로프 함장에게 귀뜸 해 주었다고 한다. -
 
당연히 소련 잠수함장에게 알려 주어야 할 정보를 감추고 있는 미 해군 측에 석연치 않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미 해군이 의심 받을 일은 또 있었다. 미 해군 장교는 소련 잠수함장에게 미 해안에 접근하면서 샌 프란시스코 미 해군 기지와는 항해 정보를 평문으로 교신하라는 지침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 것은 잠수함대의 위치를 공공연히 알려주는 것과도 같았다.
 
이 두 가지 이유로 전쟁이 끝나고 사실이 규명될 때까지 소련은 미 해군에 대한 의심의 눈길을 멈추지 않았었다.
 ※ 미 소 냉전시대 조작된 말같기도 하다. 격침된 L-16함에는 미 해군에서 파견한 러시아 이민자 출신의 미 해군장교 한명이 연락 장교겸 통역장교로 승함했었다.※
 
I-25 잠수함의 운항으로 경험을 얻은 일본 해군은 신형 수상기를 탑재한 대형함인 5,223톤 급의 I -400 시리즈 잠수함을 개발했다. 역시 제일 큰 목적은 파나마 운하 폭격이었다. 원래는 18척 건조 계획을 했지만 3척만 진수하였다. 
  

                          I-400시리즈 대형 잠수함 , 2차 세계대전에 출현한 잠수함중 최대 크기를 지녔다.


기술적으로 상당히 발전한 잠수함이었는데 종전 후 미국 해군은 이를 탐내는 소련의 손에 넘어 갈 것을 염려해서 한 척은 나가사키 앞 바다에서, 두 척은 하와이로 가져와 모두 침몰시켰다. 
 
 
                                                    I-400형 잠수함에 탑재했던 세이란 신형 정찰기


소련 해군은 이 신형 잠수함 대신 의문의 뇌격을 가한 잠수함이 미 해군이 아니라 일본 해군의 I-25라는 사실만을 얻게 되었을 뿐이었다.
 
후지다는 종전 후 고향인 이바라키 현에서 철물점을 하다가 한 전선 만드는 회사에서 입사해서 평범한 살길을 찾아 갔다.
 
1962년 그는 자신이 폭격했던 오레곤 주 브루킹 시의 주민들 초대로 현장을 방문하고 자기 집에 400년간 전해오던 일본도를 브루킹스 시에 기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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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열혈국방 트랙백 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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