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에 해당되는 글 25건

  1. 2011.05.19 전송가[Battle Hymn]의 주인공 헤스 대령의 숨겨진 전공 -제1편-
  2. 2011.05.18 영광의 국군 기갑사(機甲史) [ 5 ]
  3. 2011.05.13 영광의 국군 기갑사(機甲史) [4]
  4. 2011.05.11 영광의 국군 기갑사(機甲史) [ 2 ]
  5. 2011.03.07 105mm 곡사포 이야기[下] (1)
  6. 2011.03.03 한국 전쟁 이야기-장진호 덕동 고개 전투 (1)
  7. 2011.02.25 영국 항공모함 테세우스의 한국전쟁 출동기-제3편-
  8. 2011.02.25 영국 항공모함 테세우스의 한국전쟁 출동기-제2편-
  9. 2011.02.25 영국 항공모함 테세우스의 한국전쟁 출동기-제1편-
  10. 2011.02.10 6.25 전쟁사 - 북 대화도 상공의 폭격기 대 섬멸전(제2편)
  11. 2011.02.09 6.25전쟁사-북 대화도 상공의 폭격기 대 섬멸전 (제1편)
  12. 2011.01.12 6.25전쟁 당시엔 몰랐던, 위기(下)
  13. 2011.01.11 6.25전쟁 당시엔 몰랐던, 위기 (上)
  14. 2010.12.07 서해 5도 NLL, 역사와 의미를 돌아본다. (2)
  15. 2010.11.22 아시안게임 제1회 대회, 한국전쟁으로 불참하다.
  16. 2010.11.03 외제 전투기와 국방,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5)
  17. 2010.11.03 외제 전투기와 국방,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18. 2010.07.27 '한미 연합훈련'의 수퍼캐리어(초대형 항공모함) 이야기
  19. 2010.07.22 태평양을 왕복하는 6.25당시 총기들
  20. 2010.07.20 대림 미술관(6.25 특별사진전), 함께 가시죠!
  21. 2010.05.12 전장스트레스 관리, 그 중요성에 관하여
  22. 2010.05.07 단비부대 파병, 70일간의 일기 (13)
  23. 2009.12.22 크리스마스 공수작전 (1)
  24. 2009.10.21 A 특공대의 잊혀진 비사 (秘史)
  25. 2009.06.24 각종 권총을 종류별로 보고싶다면? (전쟁기념관, 이야기가 있는 권총 기획전) (4)








전송가[Battle Hymn]주인공 헤스 대령의 숨겨진 전공 -제1편-



나이 드신 독자 분 중에 전송가(戰頌歌- Battle Hymn)라는 영화와 실제 주인공 딘. 헤스 대령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록 허드슨 주연의 전송가 -1957년-
그러나 사실과 너무 다른 스토리로 비판을 받았었다. 흥행을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이었는데 하여튼 히트를 쳤다.


헤스 대령은 목사 안수를 받고도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 후에
입대해서 전투기 조종사가 특이한 이력을 가졌다. 2차 세계 대전시에는 유럽에서 P-47 전투기를 몰고  63회 전투 출격하는 전적을 쌓기도 했었다.


                      딘 헤스 대령의 한국 참전때의 모습 - F 51 무스탕 조종석에서

그는 한국 전쟁 직전 일본으로 파견되었다가 한국전에 참전하게 되었는데 참전 당시 계급은 소령이었고  한국 근무 중 중령으로 진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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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매니아를 위한 사족이다.

그는 자서전에서 독일 항복 후 기네스 북에도 오른 독일 공군
최고 전사인 한스 유리히 루델 대령이 그의 부대에 투항했었음을 쓰고 있다.


루델 대령은 동부 전선에서 소련을 상대로 슈투카 조종사로 싸웠는데 2,530회나  전투 출격을 했었다.[한국 공군은 유치곤 대위의 203회]

적 전차 격파 519량, 차량 800량, 장갑열차 4량, 적 해군 전함 [32,000톤급의 마라트]격침, 순양함 두척, 구축함 한 척을 격침했었다. 적기 12기 격추, 열두번이나 격추당했었고 세 번 포로가 되었지만 모두 탈출했었다. 폭격기를 몰던 그가 격추시킨 소련 전투기 조종사 중에 레프 세스코프라는 항공 영웅도 있었다.

그는 다리 하나를 잃고서도 외다리로 계속 출격해서  러시아군을 공격했었는데
전쟁 마지막 동부[소련] 전선에서 싸웠던 그는 혹독한 취급을 당할 소련군에 항복하는 것을 거부하고 부하들과 FW-190을 몰고 두시간을 비행하여 서부 전선으로  탈출해서 연합군에 항복하였다. 

전송가에 묘사된 독일 전투기들의 항복 착륙 순간이 어쩐지 낯익어서 루델 대령의  슈투카 파이럿이라는 자서전을 찾아 보니 그가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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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스 대령에게 주어진 미션은 아직도 걸음마 단계인 한국 공군의
조종사들을 훈련시키고 공군을 크게 육성하는 BOUT 1 이라는 명칭의 프로젝트 추진이었다.


그는 미군 장교 4명과 100여명의 병사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왔다.


물자와 장비가 턱없이 부족했었고 고정된 훈련 비행장도 없어서
이 비행장 저 비행장을 전전하였는데, 이처럼 어려운 여건에서도  한국군과 고락을 함께하며 한국 전투기 조종사 훈련에 최선을 다했다.


그의 열성에 힘입어 전투기 한 대 없던 한국 공군은
3년도 안되어 75기의 무스탕 전투기에 자체 출격이 가능한 근대 공군으로 성장했다.


                         전쟁이 발발한 다음날 일본에 F-51(무스탕)기를 인수하러 간 한국 공군 조종사들.
이착륙 훈련만 받고 돌아와 바로 출격했었다. 일본 육군 항공대의 베테랑 조종사들이었지만 익숙치 않은 무스탕기를 조종하다가 이근석 대령이 전사했다. 그는 일본 육군 항공대의 조종사로서 연합군기 23기를 격추했던 조종사였었다. 한국 조종사들은 전쟁의 위기를 넘기자 헤스 대령의 교관들로 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다시 이수했었다.


그는 한국 공군을 훈련시키면서도 수시로 미군
또는 한국 공군 조종사들과 동반 출격해서 250회 출격 기록을 남겼다.



                                                                   100회 출격의 축하식


그러나 헤스 대령은 이런 군사적인 면보다도, 그가 한국 고아들을
위해서 고아원을 세우고 중공군의 남하로 인해 후퇴하던 1950년 12월 14일 미 공군 수송기를 동원해서 1,000명의 전쟁 고아들을 모두 제주도로  피난시킨 대 수송 작전이 매스컴에 알려지면서 크게 이름을 알렸었다.

 

                                                          헤스 대령이 몰던 무스탕 18번기.
한국 공군의 태극기 기체 표시가 있다. 그의 한국어 번역 로고인 신념의 조인이라는 글이 써있다. 목사인 헤스 대령이 결정한 By faith, I fly.의 한국어 번역이었다. [믿음으로 비행한다는 원래의 뜻이 조금  왜곡 된 느낌이 든다.]


그는 한국에서 근무하는 동안은 물론 임기를 끝내고 미국에
돌아 간 뒤에도 계속 자금을 모아 고아원을 돌봤었다. 이승만 박사 내외와도 아주 가까웠던 그는 한국 역사에서 가장 유명하고 한국 민족에 가까웠던 미 공군 조종사로 남아있다.



           그는 이승만 박사를 아주 존경했었고 이승만 박사 내외는 그를 아들처럼 아꼈다. 훈장 포상식 뒤의 촬영.


한국을 자주 방문했던 헤스 대령은 93세의 나이에도
아직 생존해있다.


                                                C-54 수송기 10대로 단행한 1,000명 고아의 제주도 공수
장난감 자동차 공수 작전이라는 명칭이 붙어있다. 옆의 원장 황온순여사는 전쟁중 아들을 잃었었다.이화 여전을 나왔고 영국 유학을  다녀와 영어가 능숙했었다. 2003년 작고.


그러나 헤스 대령이 한국 전쟁 중에 전투기를 몰고 츨격하여
큰 전공을 세웠던
사실은 군이나 언론에서 잘 몰라주고 있다.

평택 남방 도로에서 적 기계화 부대의 등뼈를 부러뜨린 폭격 작전인데 전쟁 초기 극히 불리했던 한국전의 전황 극복에 엄청나게 기여한 항공 공격이었다.


그 때 한국군은 북한의 기습으로 입은 심적 물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한국 전선에 투입되었던 미군들도 7월 5일 오산 죽미령 전투에서 대패한 후 계속 밀리기만 하던 터였다.


오산 죽미령 공격은 북한군 최정예 4사단 18연대가
실행했었고 105전차 사단은 33량의 T-34 전차를 동원하여 오산  방어선의 중앙 도로를 돌파하여 공격의 예봉을 담당했었다.


그런 때에 딘 소장은 제 24사단을 재편하여 대전 북방에 방어선을 구축하고자
했다.

아래는 헤스 대령의 저서 전송가에서 빌려온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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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은 마침 일요일이었는데 아침 날씨가 너무 흐려서 우리 훈련단은 그냥 죽치고 앉아 있었다.

[이 날은 오산 죽미령 전투에서 패배한지 닷새 되는 7월 10일이었다. 이 무렵은 장마철이어서 계속 비가 왔었고 한반도 전역의 기상이 좋지 않았었다. 1950년 7월 10일은 일요일이 아니었는데 헤스 대령이나 작가가 착각을 한 듯하다.]
 

마침 통신 정비병 하나가 F-51 무전기를 작동시켜려고 만지작 거리고 있었는데 미 24사단 21연대에 배속된 공군 항공 통제단[FAC] 짚차의 무선을 통해 비상 항공 지원의 요청이 수신되었다.


이 불순한 날씨에 일본에서 전투기가 급히 온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현실적으로 우리 Bout-1 훈련단 비행기가 비교적 가까이 있던 셈이었다. 그런데 우리의 활주로는 연일 쏟아지는 비 때문에 절반 정도는 6인치 되는 깊이의 물에 잠겨 있었다.
 

허나 비상 지원 요청을 받은 이상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조종사들한테 모두 출격하라고 명령하는 것 역시 정당한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누구 지원자가 있나 물었더니 그 당시 10여명의 
미군 조종사 가운데 한 사람인 팀버레이크 중위가 나섰다.

우리 둘은 무스탕기를 서서히 활주로로 몰고 나가 신속하게 폭탄과 기총탄을 무장할 만큼 무장하였다. 우리는 완전 무장으로 무거워진 기체를 가까스로 활주시켜 이륙하였다.


상공에 오르자 나는 지원 요청을 한 전방의 FAC에게 무선을 보냈다.
그랬더니 전방에서 국도를 따라 내려오는 기계화 부대를 공격해달라는 것이었다. 상군은 기계화 부대에 대해서 속수무책이었다. 우리 육군에게는 적 탱크를 파괴시킬 중무기가 없었다.[최선의 대전차 무기인 3.5로케트 포는 대전 전투 때부터 사용되었다.]


우리가 목표물을 향하여 날아가자 하늘이 맑아졌고 적의
기계화 부대가 환히 내려다 보였다. 이것을 보자 나는 전율을 느꼈다.


                                                          한국 공군 F-51(무스탕)기 편대의 출격



탱크, 트럭, 기타 별별 차량들이 10-15마일 가량 되는 비포장 도로에
줄을 지어 가고 있었는데 높은 상공에서 보니 부대 행군 간격 때문에 마치 중간 중간 토막 난 뱀처럼 보였다.


전방 항공 통제단에서 보낸 무선으로 들려오던 경악이 섞여있던
목소리를 이제 충분히 이해 할만했다.


상황이 이러했으니 F-51 2대 가지고는 어림도 없었다.
그 때에 내 비행기는 무선이 가능했으나 팀버레이크 중위의 비행기와는 교신이 안 되었다.


나는 손짓으로 그에게 이 기계화 부대의 후미를 공격하라고 
일러 놓은 다음 나는 부대의 선두로 가서 타격을 가하기로 하였다. 우리는 기계화 부대 양 끝에 급강하 하면서 기총탄을 퍼붓고 폭탄 세례를 가했다.


다행히도 우리의 폭탄들이 목표했던 곳들에 모두 명중했다.
선두와 후미의 차량들을 폭파시키는 동시에 목표에 커다란 구덩이를 만들어 놓았으니 북한군들은 행열 앞과 뒤 어디로건 빠져 나갈 길이
없이 도로에 고정되고 말았다.


이들을 가두어 놓은 다음 나는 긴급 호출 신호인 메이데이를
기지 사령부로 날렸다.


                                                              장마철의 F-51(무스탕) 출격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답신이 없었다. 바로 아래에 대물 표적을 놔둔 나는 단념할 수가 없었다. 이런 대물 표적을 처분하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항공 공격대의 출격이 필요하였다.

[
당시 한국에는 미 공군의 대부대가 없었다. 아직도 일본의 공군기지에서 한반도로 출격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헤스 대령은 일본 기지를 호출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답신이 올 때까지 30-40분 간격으로 반복 호출을 하면서
차량 대열에서 쏘아 올리는 대공 사격을 제압하는 기총 사격을 되풀이 하였다.


적군의 대열 자체는 그대로 놓아둔 채 적군 차량 중에서 대열 옆길로
빠져나와 탈출하려는 새치기 차량들을 보이는대로 공격했다.


드디어 나의 메이데이 신호가 마침 일본 상공에서 불순한 기후 때문에
이다쓰케 공군기지에 비상 착륙하려던 어느 미 공군 비행기에 포착되었다.



헤스 대령이 한국 참전시 그의 오른 팔 역할을 했던 크레이그웰 중위. 혹심한 미군 내부의 인종 차별을 이겨냈고 아주 유능한 조종사였었다.


목마르게 기다리던 답신이 있자 나는 이 쪽 상황을 설명하고
올 수 있는 모든 전투기들은 다 와주기를 청하였다.

일본 교신 후 대구 소재 미 육군 통신대와도 교신이 트여 대구 비행장에 있는 나의 부대 비행기들도 모두 출동하도록 연락해줄 것을 부탁했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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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국군 기갑사(機甲史) [5]
 

잊혀 지지 않을 소년전차병의 기록
 
 
 
기갑부대라고 칭하기 부끄러운 기갑연대를 보유한 상태에서 전쟁을 맞은 국군은 200여대의 T-34 전차를 앞세우고 남침을 감행한 북한군의 기습에 일방적으로 밀려 후퇴 할 수밖에 없었다. 탱크를 막을 제대로 된 무기도 없었고 대전차 전술 또한 부재하여 설령 기습이 아니었다하더라도 침략자를 격퇴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전쟁 초기 크나큰 아픔을 안겨 준 북한의 T-34
 
울분에 찬 병사들이 여러 전투에서 육탄으로 적 전차를 막아냈으나 이 또한 한계가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국군은 극심한 전차 공포증에 빠질 수밖에 없었고 이와 반대로 전차의 보유를 더욱 갈망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미군의 참전으로 아군에게도 기갑부대의 지원이 가능하게 되었지만 국군이 본격적으로 기갑장비를 갖추게 된 것은 좀 더 시간이 흐른 이후다.
 

                                     낙동강 방어전 당시에 투입된 미군의 M-26 전차

 
1950년 11월 29일, M-36 전차 6대가 훈련목적으로 도입되고 동래에 위치한 육군종합학교에 전차병과가 설치됨으로써 국군은 그렇게 소원하던 전차를 보유한 진정한 기갑부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준비과정을 거쳐 1년이 지난 1951년 10월 5일 국군 최초의 전차부대인 제51, 제52전차중대가 창설되어 국군은 제대로 된 기갑부대를 보유하는 감격의 순간을 맞이하였다.

 

                                                국군이 최초로 도입한 M-36
 

그런데 이때 장비한 M-36은 85mm 포를 갖춘 북한군 T-34를 충분히 능가하는 90mm의 대구경 포를 장비하였지만 이른 바 오픈 탑(Open Top) 구조의 포탑을 가진 보병 화력지원용 구축전차(Tank destroyer)였다. 얼핏 모양은 전차에 가까웠지만 실질적으로는 자주포로 볼 수 있는 장비여서 부족한 방어력을 보강하기 위해 철판을 포탑에 덧대거나 심지어 샌드백을 쌓아 놓기도 했다.

 

                개방된 포탑 구조에서 알 수 있듯이 M-36은 전차라기보다는 자주포에 가까웠다.
 

하지만 반궤도차량을 장갑차로 취급하고 M-8을 국군 최고의 중화기로 여겼던 창군 초기처럼, M-36은 국군 기갑사에 있어 최초의 전차로 귀하게 여겨지고 운용되기 시작하였다. 참전용사의 증언에 따르면 "보병을 지원하기 위해 M-36을 몰고 가서 90mm 주포를 사격하면 보병들의 사기가 오르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고 하였을 정도로 전쟁 초기 북한 전차에 일방적으로 치욕을 당할 수 밖에 없었던 국군에게 M-36은 사기앙양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한국전쟁 당시 활약한 M-36의 귀한 컬러사진
 

그런데 M-36과 관련하여 많이 알려지지 않은 학도병 이야기가 있다. 1952년 4월, 16~18세의 학생 120여명으로 구성되었던 제57 전차중대의 소년 전차병들이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소년들은 일본에서 6개월 동안 기술교육을 받은 후에 하사관으로 복무시켜준다는 구두약속을 받고 입대하였으나, 논산훈련소와 전차교육대에서 3개월 동안만 훈련을 받은 뒤 학도병 신분으로 곧바로 최전방 연천 지역에 투입되었다.
 

                  출동하는 소년 전차병 부대인 제57 전차중대의 M-36 (사진-오명섭 참전용사)


제57 전차중대는 연천 지역에서 제1사단을 지원하며 혁혁한 전과를 올렸지만 아쉽게도 이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고 있다. 노병의 증언에 따르면 "고지에서 밀려 퇴각할 땐 탱크 뒤에 아군의 시체를 십여 구씩 매달고 내려왔다"고 당시를 회상하였을 정도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그들의 피눈물은 단지 학도병이라는 이유로 제외되어 오래 동안 기억에서 사라진 이야기가 되었던 것이었다.
 

                     늦게나마 명예를 되찾은 소년 전차병 참전 기념탑 (사진-오명섭 참전용사)
 

당시 M-36은 주로 5대로 편성된 소대 급 단위로, 보병의 돌격 시 배후에서 화력을 지원하는 형태로 운용되었을 뿐 공산군 전차 부대와 직접 교전을 벌이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전쟁에 본격 참전한 전차 부대의 주력으로 M-36은 그 용맹을 다하였고 이와 더불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소년 전차병들의 피눈물은 이제 새롭게 밝혀져 자랑스러운 국군 기갑사에서 중요한 장을 차지하고 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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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국군 기갑사(機甲史) [4]
 

또 다른 주먹들
 
 
기갑연대에는 기마 300필을 보유한 2개 중대 규모로 이뤄진 기병대대가 있었다. 요즘 일부국가의 산악부대 외에는 전투부대로 기병대를 별도로 운용하는 나라는 더 이상 없으리라 생각 되지만 당시에는 엄연한 전투부대였다. 장갑대대가 전쟁초기 서서히 각개 격파 되었던 것에 비한다면 기병대대는 낙동강 방어선까지 편제를 그대로 유지하였으며 전쟁초기 기갑연대의 제 부대들 중 최고의 전과를 올린 부대였다.
 

                               기갑연대 소속이었던 기병대대의 검열 모습

 
1950년 7월 말 경북 청송까지 후퇴한 기갑연대는 워낙 소모가 심하여 그 전력이 미약한 상태였다. 도보대대는 김포전투에서 상실되었고 장갑대대는 각 전선에서 거의 격파되어 M-8 장갑차 4대만이 청송으로 이동하였다. 반면 당시까지 200여명의 병력을 유지한 기병대대는 편제를 대부분 유지하면서 기갑연대의 주력으로써 맹활약 하였다.
 

                                       시가행진 중인 기병대대
 

오늘날 제1사단을 최고의 상승부대(常勝部隊)로 꼽는 이유 중 하나에는 전쟁 내내 편제를 유지하였다는 사실도 포함되어 있다. 수많은 부대들이 전쟁 중 해체 및 재창설의 과정 등을 겪고는 하였는데 제1사단은 후퇴 시기에도 대부분의 편제와 장비를 보존하였고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훌륭한 전과를 올렸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기갑연대 중에서도 최후까지 전력을 보존하여 방어전을 펼쳤던 기병대대의 노력은 영웅적이라 할만 했다.
 

                    1950년 7월초에 촬영된 기병대대원들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
 

1950년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7월 초 한강도하를 감행하였다. 이때 긴급하게 시흥전투사령부를 구성하여 한강 남쪽에서 북한군을 방어하던 혼성 부대 중에는 기병대대도 있었는데 천호동에서 한남동 대안에 이르기까지 넓은 정면을 방어하였다. 한강을 방패막이 삼아 적의 공격을 막아냈고 후퇴 시에는 기병대의 기동력을 이용하여 아군의 최후 철수부대를 엄호하는 작전을 펼쳤다.
 

                                     전선으로 향하는 기병대대
 

특히 미군 전사에는 7월 초순 경북 구미 부근에서 미 제24사단 63포병대대 B포대가 1개 대대병력의 북한군에 포위되어 몰살 당할 위험에 처했을 때 홀연히 나타난 기병대대 2개 소대가 적 배후를 급습하여 이들을 구출한 전과가 상세하게 나오기도 한다. 이후 북진에도 참여하였던 것으로 기록이 나와 있지만 1.4 후퇴 후 더 이상의 기록을 발견 할 수 없는데 아마도 기병대가 더 이상 전장상황에 맞지 않다고 판단되어 해체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북진 당시의 모습인데 이후 기병대대는 국군 역사에서 사라진다
 

도보대대는 2개 중대 규모로 구성된 경무장 보병대대
였는데 오늘날 수색대와 비슷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전쟁 개전 시에는 기갑연대의 본부 및 남산 송신소 등을 방어하다가 한강 이남으로 후퇴하여 김포지구방어사령부 소속으로 방어전에 나섰다. 전쟁 초기에 당시 북한군 중 최고의 기동을 보여주었다는 북한군 제6사단의 김포 반도 도하 작전으로 국군의 배후가 노출될 위험에 처하자 도보대대가 긴급 투입되었다.
 

                                  이동 중 휴식을 취하는 국군 보병부대
 

약간의 M-8 장갑차의 지원을 받아 부천 및 오류동 방향으로 진출하여 방어선을 구축한 도보대대는 병력과 화력의 절대 열세에도 불구하고 전쟁 초기 북한군 최강으로 평가되던 6사단과 혈전을 벌여 상상 외의 타격을 입힘으로써 영등포 진출을 지연시켰다. 하지만 김포 공항 탈환에 실패하며 부대가 해체 될 만큼의 타격을 입었고 지휘관은 자결을 하였다.

 

                      도보대대의 살신성인 정신은 국군의 귀감으로 남아있다
 

비록 도보대대는 기갑연대의 제 부대들 중 가장 먼저 산화한 부대가 되었지만 중과부적의 상태에서도 최선을 다한 그들의 용맹으로 말미암아 시흥전투사령부의 각 부대가 수원 이남으로 안전하게 후퇴 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되었다. 도보대대의 용맹함은 오늘날 국군 수색대대나 수색중대와 같은 첨병부대들이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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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국군 기갑사(機甲史) [ 2 ]
 
 
장갑대대의 주력 M-8 장갑차
 
한국전쟁 직전 '기갑연대'에서도 핵심전력은 국군 유일의 기계화장비 완비부대인 장갑대대였다. 미군정이 물러나면서 인도한 장비를 인수하여 창설된 부대였는데, 당시 국군의 모든 대대급 부대 중 최강의 전력을 갖춘 부대로 평가를 받았지만 이는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국군의  무장이 얼마나 빈약하였는지 반증 할 수 있는 자료이기도하다.
 


                          항복한 일본군의 안내를 받아 서울로 진입한 미군의 M-8 장갑차
 

3개 중대로 구성된 장갑대대는 M-8 정찰 장갑차 27대, M-2/M-3 반궤도 차량 24대 그리고 20여대의 무장 짚(Jeep) 차를 보유하였다. 부대 명칭대로 기갑연대 예하의 장갑대대라 칭하기에 부끄러운 수준이었지만 이것이 창군 초기에 국군이 보유한 모든 기동 전투장비였다. 오늘날 국군의 기갑부대와 비교한다면 상당히 민망한 수준에서 국군의 기갑부대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시가행진 중인 기갑연대 소속의 M-8 장갑차
 

당시 사료를 보면 이들 장비가 혼재된 형태로 중대가 편성되지 않고 M-8 중대, M-2/M-3 중대 그리고 무장 짚 중대로 각각 개별 편성된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후방임무가 아닌 정규전에서는 각 중대별로 분리되어 작전을 펼치기 보다는 대대 전체가 작전에 투입되어야 효과적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주력이라 할 수 있는 M-8 중대조차도 소대별로 나누어 전방의 각 사단에 배속하여 운용하였다.
 

                              M-8 장갑차는 부득이한 사유로 소대별로 나뉘어 배치되었다
 

지금이야 통신강국 KOREA지만, 해방 후 우리나라의 통신사정은 몹시 열악하였고 군도 예외는 아니었다. M-8에 장착된 SCR-506 무전기는 장거리 통신에 적합하여 남산통신소를 키스테이션으로 하여 육군본부와 전방 사단의 통신에 유효 적절히 사용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강릉의 8사단에 배속한 M-8 장갑차에서 송신한 육성이 서울 남산 통신소에서 수신되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귀중한 자산을 통신용 목적으로 뿔뿔이 나눈 것이었다.
 


                             창군 초기 국군의 기간 통신망 역할을 담당한 SCR-506 무전기
 

이미 제2차대전을 통하여 집단화된 기갑부대가 효과적임은 입증된 사실이었지만, 사실 장갑중대의 전력으로는 굳이 집단화고 뭐고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자 M-8을 통신용으로만 운용할 수는 없었다. 북한군 T-34 전차에 전방의 부대들이 유린되자 M-8은 출동하였다. 명령을 내린 상부나 이를 운용하던 병사 모두가 계란으로 바위치기인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망설일 수 없었다.
 

                  창군 초기  M-8 장갑차는 국민들에게 국군의 위용을 어필하는 최고의 무기였다
 

M-8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에서 정찰용으로 개발된 경장갑차였지만 건군 초기에 국군이 유일하게 운용한 중장비여서 시가행진 등 공개 행사에서 국군의 위용을 국민에게 어필하였다. 당시 북한군은 M-8과 비슷한 성능의 BA-64 정찰 장갑차 54대를 정찰 및 수색 용도로 운용하였지만 M-8이 전쟁 초기에 달려 나가 막으려 하였던 상대는 북한의 T-34 전차였다. 화력이나 장갑능력에서 정면으로 맞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M-8이 상대할 적수라면  BA-64 장갑차가 맞지만
                          T-34 전차의 남진을 막기 위해 출동하여야 했다. (노획한 BA-64)

 
의정부축선을 방어하던 7사단을 돕기 위해 출동한 M-8의 37mm 주포가 불을 뿜어 수많은 철갑탄을 적 전차에 명중시켰지만 대부분 튕겨 나가는 참담함과 함께 차례차례 적 전차의 희생양이 되어 갔다. 이런 수모에도 불구하고 M-8 장갑차는 김포와 영등포 일대에서 북한군 6사단을 상대로 지연전을 펼칠 때 큰 활약을 하였고, 옥천 지연전에서는 적 전차의 무한궤도를 끊어 전차 공포증에 빠져있던 아군에게 용기를 불어 넣기도 하였다.

 

                M-8 장갑차의 모습을 일부 확인 할 수 있는 M-20 장갑차 (사진-4.19 민주혁명회)
 

이렇듯 개전 초 성능 이상의 활약을 펼친 M-8 장갑차는 여러 전투에서 차례로 파괴되었고, 북진 시 청진부근에서 전투하였다는 기록은 있으나, 흥남철수 적재품목에서 발견 되지 않아 결국 1950년 말 국군 전력에서 사라졌다.  4.19 당시의 사진을 보면 M-8과 동일한 차체를 쓰던 M-20 장갑차를 볼 수 있는데, 이 또한 현재 보존되어 있지 않고 있다. 아쉽지만 사진으로나마 용감했던 M-8 중대원들의 무용담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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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mm 곡사포 이야기 [下]
  - 위대한 국군 포병의 시작 M-3
 
 
5,400여 문에 이르는 국군의 포병 전력은 서방 세계 최대로 평가받지만 우리와 대적 중인 북한의 포병 전력은 과하다
싶을 정도인 13,000여 문으로 추정될 만큼 엄청난 규모다. 한마디로 한반도는 단위 면적당 야포 밀집도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포병 전력에서 이처럼 현격한 양적 격차가 지속되었음에도 단 한 번도 북한에 주눅 들었던 적이 없었다.


               북한의 포병은 양적으로 엄청난 규모지만 우리는 이런 양적 차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잘 알다시피 한국전쟁 발발 당시에 단 한대도 없던 전차에 비한다면 그나마 양호한 편이었지만 포병전력도 엄청나게 차이가 벌어져 있었다. 자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개전 전에 남북 포병간의 전력비는 약 1:4 정도로 추정될 만큼 지금보다 더 큰 격차를 보였다. 하지만 놀라운 투혼과 뛰어난 작전으로 아군은 이러한 차이를 상쇄하면서 당당하게 맞서왔다.
 
                                   창군 초기 국군의 가장 강력한 화력이었던 M-3 곡사포
 

창군 당시 국군이 보유한 야포는 M-3 105mm 견인곡사포
였는데 이것은 당시 미군이 표준으로 사용하던 M-2 105mm 곡사포를 공수부대용으로 축소 제작한 것으로 사거리가 M-2의 60퍼센트 수준이었고 화력도 약하였다. 따라서 종전 후 많은 수가 폐기되거나 여러 나라에 공여되었는데 이때 국군도 이를 수령했다. 이처럼 미군에게는 보잘 것 없는 무기였지만 M-3는 신생 대한민국 육군에게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미 공수부대에서 사용하던 당시의 모습
 

하지만 국군이 인계받은 91문은 겨우 오늘날 1개 포병연대의 수준이었다. 당시 국군은 총 8개 사단과 2개 독립연대로 편제되어 있었는데 야포가 모자라 38선을 지키던 제1, 6, 7, 8사단과 독립 제17연대에만 포병대대가 배치되었다. 반면 북한은 각 사단별로 122mm 곡사포와 76mm 곡사포가 혼성 편재된 포병연대를 구축하고 있었고 별도로 Su-76 자주포도 운용해 총 400여 문의 야포를 장비하고 있었다.

 
                                       북한군이 남침의 선봉에 내세웠던 Su-76 자주포
 

지금은 K-9처럼 세계 최고 수준으로 중무장하고 있지만 여타 분야처럼 국군의 포병도 그 시작은 미약했다. 하지만 6.25전쟁에서 포병의 신화는 양적으로 압도한 북한군이 아니라 부족한 장비를 갖춘 국군이 써내려갔다. 평소 훈련을 거듭하며 실력을 배양해 온 아군의 포병들은 전선을 가리지 않고 맹활약을 펼치면서 침략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M-3 곡사포대의 훈련 중 모습
 

옹진반도를 지킨 제17연대가 3배가 넘는 북한군의 공격으로 부대가 분리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틀간 적의 남진을 막고 연대 전력의 90퍼센트가 해상으로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도록 최후까지 교두보를 확보한 것은 제7포병대대의 활약 덕분이었다. 특히 포병대대장 박정호(朴廷鎬) 소령은 마지막 포탄까지 완전 소모시킨 후 적의 노획을 우려해 야포를 파괴한 후 맨 마지막으로 해상 철수했다.

 
                                                작전 중인 국군의 M-3 곡사포
 

문산 축선을 방어하던 제1사단은 편제를 6.25전쟁 내내 유지했던 유일한 국군 사단이었다. 한마디로 적들이 도저히 이길 수 없었던 강철 철벽과도 같은 부대였고 이런 전통은 전쟁 개전 직후 전략적으로 아군이 가장 불리하였던 1950년 6월에도 그러했다. 고랑포 인근 357고지 전투와 봉일천 전투처럼 개활지로 나온 적 주력의 남진을 피로 막은 제6포병대대의 활약으로 제1사단은 방어전을 펼칠 수 있었다.

 
                            북한은 월등한 포병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아군에 압도당하였다.
                              (직사화기로도 사용한 북한군의 KS-12 85밀리미터 대공포)
 

의정부 축선은 잘못된 방어 전략으로 아군의 몰락을 가져온 실패의 반면교사가 되었지만 그러한 패배 속에는 육군포병학교 교도2대대장으로 긴급 투입된 김풍익(金豊益) 중령처럼 제로 거리에서 직사사격으로 적의 전차 부대를 저지한 살신성인의 노고도 숨겨져 있었다. 비록 꽃처럼 산화하면서 유명을 달리하였지만 이들의 투혼은 득의만만하게 남진하던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김풍익 중령
 

동부전선에서 아군 포병의 분투는 한국전쟁 초반의 물줄기를 바꿔놓는 결정타였다. 춘천 지구를 방어한 제6사단 16포병대대와 강릉 지구의 제8사단 18포병대대는 한마디로 아군 포병사의 신화가 되었다. 제16포병대대의 놀라운 선전을 발판으로 제6사단은 북한군 2군단을 궁지에 몰아붙였고 제18포병대대는 백병전까지 마다하지 않으며 진지를 고수하여 아군 주력이 안전하게 후퇴할 수 있도록 퇴로를 확보해 주었다.

 
                                   자랑스러운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국군 포병부대
 

이처럼 미약한 장비를 이끌고 한국전쟁 초기에 인상적인 승리를 이끌어 온 선배 포병부대와 용사들의 무용담은 단지
수적 열세가 전력의 우열을 가르는 것이 아님을 입증해 주었다. 따라서 지금도 수적으로는 북한의 포병전력이 우리를 앞서지만 그것이 결코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이미 자랑스러운 전통은 국군 포병의 자부심으로 자리 잡았고 앞으로도 길이 전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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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영웅, 헥터 카페라타 일병이 들려 주는
"장진호 덕동 고개 전투" 이야기..

                             

 
작년 11월 말 서울 전쟁기념관에서 장진호 전투에 참전했던 미국 노병들을 모시고 기념식이 있었다. 60년 전 눈보라치는 장진호에서 혈투와 혈투를 되풀이 하며 겹겹이 둘러싼 중공군 9병단 6만 명의 포위망을 뚫고 흥남으로 탈출했던 미 해병 1사단 장병들과 참전 해공군 용사들이 지금은 팔순 어르신들이 되어 감회어린 표정으로 자기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던 옛 국가를 다시 방문했다.
 
 
                                                                     장진호 전장


한국 측에서는 김 태영 국방부 장관과 미국 측에서는 샤프 유엔군사령관 등이 참석해서 이들 노병을 반겼다. 기념식에 이어 오찬이 있었다. 나는 장진호 최대의 혈전이었고 미 최고 무공훈장 수여자를세 명이나 배출한 덕동 고개 전투의 F 중대 지휘관 바버 대위를 만날 수 있을까하는 기대를 하고 F중대 용사를 찾았더니 바버 대위는 오지 않았지만 그 분만큼 유명하고 역시 같은 명예 훈장 수여자인 카페라타 일병을 만날 수가 있었다. 
※명예훈장[MEDAL OF HONOR]은 한국의 태극 무공훈장과 같은 미 최고 무공훈장이다. 나는 나중에야 바버 대위가 2002년 골수암으로 사망했음을 알게 되었다.※
 
 
                                                                       
미 명예훈장
                                                               [MEDAL OF HONOR]




넓은 만찬장 구석 테이블에 앉아 있는 그 분을 뵈었을 때 마침 미 육군 소장이 찾아와서 정중히 인사를 드리고 있었다. 알고 보니 샤프 사령관 이하 여러 명의 장군들이이 전쟁 영웅을 찾아뵙고 문안 인사를드렸다고 한다.
 
60년이나 지난 전투의 영웅인데도 노영웅 모시기가 각별하다. 플로리다 주 케이프 코랄에는 그의 이름을 딴 초등학교도 있고 몬트빌이라는 작은 도시에는 그의 이름을 명명한 도로도 있다. 부러운 영웅 섬기기 문화라고 하겠다,
 
 
                                       헥터 카페레타 초등학교를 방문한 카페라타씨



생각지도 않은 한국인의 방문을 받자 카페라타씨는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곧 명예훈장을 꺼내 목에 걸고 포즈를 취해주었다.
 
 
                                                                      헥터 카페라타씨
                                            이날 필자도 말로만 듣던
미 명예훈장을 처음 보았다.


여기서 그가 싸웠던 1950년 11월 28일 덕동 고개의 방어전을 소개한다.

장진호 호반 산길로 접어든 해병들은 한반도를 가로질러 가 평안북도에서 진격하고 있던 미 1 기병사단과 링크하는 작전을 전개했었다.
 
이를 눈치 챈 모 택동은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9병단장 송시륜에게 병단 전 병력[6만명]을 동원해서 장진호반의 해병들을 섬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중공군이 진격하는 해병들을 포위하는 매복을 완료했을 당시 장진호 좌측 유담리 지역에 미 5연대와 7연대 2개 연대가 있었고, 후방 하갈우리에 해병 1사단 본부가, 그 후방 고토리에 해병 11연대가 있었다.
 
중공군이 엄청난 병력으로 매복하고 있음을 알게 된 미 해병사단 본부는 유담리와 장진호 건너 신흥리의 병력을 모두 사단 본부가 있는 후방 하갈우리로 철수시킬 계획을 세웠다.

  
                                                       장진호 전투 상황도 -덕동 고개도 보인다.



이 계획에 따라 장진호 좌측의 두 개 해병 연대의 철수를 엄호하기 위해서 유담리와 하갈우리와 덕동 고개에 해병 7사단 5연대 2대대의 소속의 F 중대를 파견하였다.  F 중대의 중대장은 유황도 참전 경험이 있던 베테랑 윌리엄 바버 대위였다.
 
 
 
                                                                  
                                                     덕동 고개 F 중대장 윌리엄 바버 대위


두 연대의 철수와 동시에 F 중대도 철수할 계획이었으니 원래 계획대로 하면 하루나 이틀만 고지에 머물러 있으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날 밤 중공군은 유담리에 거친 공격을 개시하였다. F 중대는 거대한 사람의 바다에 떠있는 고도와 같은 신세가 되었다.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F 중대는 11월 27일부터 12월 1일까지 야간마다 파도처럼 가해지는 4,000여명의 중공군 공격을 단 200여명의 병력으로 장렬한 전투를 거듭해서 격퇴한 위대한 전공을 미 해병대 전사에 남겼다. 전투는 주야 닷새간이나 지속되었다.
 
F 중대에 전사 26명, 실종자 3명, 부상 118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덕동 고개에 F 중대가 배치되었을 때는 237명이었으나 닷새 뒤 해병 7연대 2대대가 F 중대를 구원했을 때는 단지 86명만이 전투력을 견지 하고 있었다. 이 고개를 공격했던 중공군 59사단은 2,000명의사상자를 냈다.
 
카페라타 일병이 문자 그대로 귀신 같은 투혼을 발휘하여 싸웠던 덕동 고개 전투를 현장에서 부터 살펴보자. 마틴 러스의 “브레이크 아웃[임 상균 옮김]”에  카페라타 일병의 활약이 잘 소개되어 있다.
 
덕동 고개는 유담리-하갈우리를 연결하는 중요한 도로가 통과하는 요지(要地)였다. 고개 옆에 높은 덕동산이 있어서 여기서 갈라져 나온한 민둥산 줄기가 도로로 뻗어있었다.
 
이 산줄기는 능선 좌우 사면이 경사가 급한 미니 산맥이었다. 이 이름없는 민둥산 산줄기는 나중에 이곳에서 장진호 최대의 공훈을 세운 F-중대의 이름을 따서 F0X HILL이라는 별칭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F 중대가 고개에 도착해서 배치를 한 날은 1950년 11월 27일 오후였다. 바버 대위는 덕동 고개를 방어하기 위해서 덕동 고개로 뻗어 나온 이 작은 민둥산 산맥을 중요한 방어 거점으로 판단하였다.
 
도로로 뻗은 산줄기의 능선 좌우에 각각 일개 소대를 배치하고 세로로 배치한 두 부대를 연결하듯이 한 개 소대를 상부에 가로로 배치해서 덕동 고개 제압을 위한 적의 공격을 분쇄하기로 하였다. 로버트 C.맥카시 중위 소대가 중대 중앙을, 그리고 존 M. 던 중위의 소대가 오른 쪽을, 앨모 G.피터슨 중위가 왼 쪽을 각각 담당하였다.
 
즉, 도로를 향하여 입을 벌린 U자형 진지를 구성한 것이다. 중대 방어선이 입을 벌린 도로 옆에 두 채의 빈집이 있었다. 바버 대위는 이 집을 중대 본부로 쓰기로 하였다.
 
중대가 하갈우리에서 덕동 고개로 이동하고 배치가 끝나자, 바버 대위는 전 중대원들에게 호를 파게 했다. 이 선견지명이 F 중대를 구하게 된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다음날 철수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호를 파라고 하니 중대원들은 불평을 했지만 바버 대위는 용의주도하게 호를 파고 치밀한 화력 계획을 세웠다.
 
그 날 밤 유담리에 먼저 중공군의 대공세가 있었다. 덕동 고개에서도 유담리의 하늘이 붉게 물드는 것과 폭발음이 들리는 것을 감지할 수가 있었다.
 
 
 
                                    유담리 전투 -기와집의 5 연대 본부를 습격했다가 실패한 중공군.



F 중대원들은 경계와 취침으로 불안한 하룻밤을 보냈다. F 중대에 대한 중공군 59사단의 파도 같은 공격은 다음날 28일 새벽 오전4시, 영하 26도의 얼어 붙은 공기를 뚫고 개시되었다.이때부터 나흘 간 기필코 덕동 고개를 점령하겠다는 중공군과 이를 거부하는 F 중대의 혈전이 시작되었다.
 
 첫날 격전에서 분투한 카페라타는 방어선의 중앙 소대인 맥카시 중위 소대 소속이었다. 대 병력의 중공군은 사방에서 중대 방어선을 공격해왔다. 중공군의 첫 공격에 맥카시 소대는 큰 피해를 입었다. 소대는 일선에서 후퇴해서 예비진지로 이동하였다.
 
전투가 시작되기 한참 전 헥터 카페레타[HECTOR CAFFERATA]일병과 케네스 벤슨[KENNETH BENSON]일병은 다른 두 명의 해병과 함께 맥카시 소대의 진지에서 20m 떨어진 전방에 배치되었다.
 
카페라타는 이렇게 회상하였다. “잠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았지만 시끄러운 총소리 때문에  잠에서 깨었는데 눈을 뜨자마자 중공군이 쌓여있는 눈 위를 넘어 접근해 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너무 가까이 다가와 총을 조준할 필요도 없었지요.“

중공군이 진지를 통과 한 뒤에 지형지물에  가리어 모습이 안 보이자 벤슨과 카페레타는 운반할 수있는  탄약은 모두 들고 나머지 대원들이 간신히 버티고  있는 진지로 달려갔다.
 
“벤슨이 내가 군화를 두고 왔다고 알려 주었지만 그것을  가지러 돌아가지는 않았습니다.도처에 중공군이 널려 있었거든요.”
 
해리슨 포머스 일병과 제랄드 스미스[GERALD SMITH]일병이 벤슨과 카페라타가 뛰어든 참호를 지키고 있었는데 그 참호는 중공군이 맥카시 소대와 피터슨 소대를 분리시킬 목적으로엄청난 압력을 가하고 있던 F 중대 진지의 요충(要衝)이었다.
 
포머스는 회상했다. “그때 장교들이 해병들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한 진지의  공백을 메우려고 병력을 이리저리로 옮겨 배치하고 있는  있었는데 카페라타와 벤슨이 때마침 나타나 주어 도움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아군의 숫자가 너무 적었고 적군은  너무 많아 보였거든요.
  
수류탄이 빗발처럼 많이 날아왔고,  한 발이 우리 참호에  떨어져 내가 몸으로 수류탄을 덮쳤는데 쾅하고 터져  그 충격으로 몸이 튕겨져 나가 참호 맞은 편 벽에 부딪히면서  철모가 벗겨졌습니다. 그 뒤에 바로 다른 수류탄이 쾅하고 또 터졌습니다.
 
“포머스! 야! 포머스!”하고  누가 불렀지만 나는 입을 열고 대답을 할 수가 없었고,  한쪽 팔은 움직일 수가 있어서 손으로 문질렀더니 피가 흐르고  있더군요. 철모를 다시 썼는데 귀가 전혀 들리지 않으면서  양쪽 귀애서 윙윙 소리가 났고 누군가가 내 이름을  계속 부르더군요.
 
 위생병이 내 옆에 쭈그리고 앉아 머리를 눈으로 씻어 주면서 “괜찮아?”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그때까지도 머리가 멍했지만 소총을 쥐고서 간신히 카페라타에게 포복해 갔습니다.“
 
“네가 심하게 다친 줄 알았어.”라고 그가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세열 수류탄이 아니라 폭풍수류탄이었던 것이 행운이었다. “후아, 저 개자식들이 또 오네!” 사격을 할 때마다 카페라타는 상반신을 노출시켰는데 그는 기적을 연출하는 것 같았다.
 
 
                                                                     카페라타 일병


“카페라타가 소대에서 가장 덩치가 크고 또 제일 골치 덩어리였다는 것을 말했나요? 여하튼 벤슨과 나는 그가 참호 속에 떨어진 수류탄을 집어 들어 중공군에게 되던지는 것을 보고 있었는데, 수류탄 한 개가 참호 바로 앞에 떨어져 그가 몸을 앞으로 기우려 그 수류탄을 집어 비스듬히 던지려했지만 행동이 조금 못 미쳐 수류탄이 폭발하는 바람에 손의 일부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손이 불구가 되었는데도 카페라타는 욕을 퍼붓기 시작하면서 소총에 실탄을 재장진하여 클립이 빌 때까지 사격을 했습니다.
 
 실탄이 떨어지자 소총을 마치 야구 방망이 흐르듯 잡고는 날아오는 수류탄을 야구공을 맞추듯이 맞추어 날려버렸습니다. 대단했습니다!“
 
수류탄이 벤슨 옆에 떨어져 폭발하면서 그의 안경을 날려 보내 잠시 앞을 볼 수 없었다. 그는 자동소총을 사용할 수가 없자 참호 바닥에 널려 있는 소총의 실탄 클립을 손으로 더듬어 주워서 카페라타의 M1 소총에서 빈 클립이 튀어 나오는 소리가 날 때마다 그 클립들을 카페라타에게 전달해 주었다. “이제 보이나?” “아니!”
 
동쪽 하늘이 훤하게 밝아오자 중공군은 덕동 고개 공격을 중단하고 후퇴하였다. 카페라타 일병의 참호 앞에는 60여명의 중공군 시체가 쓰러져 있었다.
 
공식적인 해병대 기록에는 중공군이 압도적인 공격에도 그 요충인 해병 진지 점령에 실패한 것은 거의 헥터 카페라타와 케네스 벤슨, 그리고 스미스 3인의 영웅적인 전투 때문이었고 그들 세명은 “적 2개 소대 병력을 전멸시킨 공로를 인정받았다.”고 씌여 있다. 
 
밤 데이비스 중령이 지휘하는 7연대 1대대가 유담리를 출발하여 중공군의 배후로 침투해서 F 중대를 구출해냈고 이 링크 성공 직후에 유담리의 해병 2개 연대 병력은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철수하여 하갈우리의 사단본부 병력과 합류했다.
 
카페라타씨는 미국 위키페디아 백과 사전에도 소개되어있다. 그는 이 덕동 고개 전투 후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고 다음해 9월에 해병대에서 의병 제대를 했다. 그해 11월 트루만 대통령은 그에게 명예훈장을 수여하였다.
 
 
                                                        오바마 대통령과 만나는 카페라타씨


나의 방문에 훈장을 걸고 포즈를 취한 카페라타씨는 수류탄에 날아간 자신의 손도 보여주었다. 손가락 두어 개가 안 보였다

부상 직후 그런 손으로 어떻게 무거운 M1 총을 들고 연발 사격을 하고 또 그 총을 야구 방망이처럼 휘둘러 날아오는 수류탄을 다시 날려 보낼 수가 있었을까?
 
그는 내가 “참호를 공격한 중공군의 병력 규모가 어느 정도였나요?“하고 물었더니 간단히 대답했다. “몰라! 엄청나게 많았어!” 대화 도중 그는 내내 근엄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 F 중대를 공격한 중공군은 연대 병력으로 알려져 있다.
 
기념식 오찬장에는 경험도 쌓고 귀빈도 접대할 겸 각 사관학교에서 파견된 생도들이 합석했었다. 카페라타씨의 식탁에는 간호 사관학교에서 파견 나온 두 명의 여성 생도가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엄청난 거구에 과묵하고 근엄한 표정의 서양 할아버지와 동석해서 잔뜩 주눅이 들어있던 두 여성 생도는 내가 “이 분은 장진호 전투 최고의 전쟁 영웅일세!“ 했더니 그제야 신세대답게 환호하면서 이 영웅 할아버지에게 박수를 보냈다.
 
미국 장군이 와서 인사를 올려도 웃음기 없는 근엄한 표정을 짓던 카페라타씨는 그제야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젊은 시절 목숨을 내던져 싸운 나라의 손녀딸들이 올리는 찬사의 박수가 흐뭇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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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항공모함 테세우스의 한국전쟁 출동기 -제 3 편-



테세우스와 호위함들은 사세보 항에서 보급과 정비, 휴식을 끝내고 3월 22일 07시 
아홉번째 출동을 했다. 출동 첫날은 통상적인 정찰 활동과 대지 공격을 위한 출격을 하였다.
 
3월 24일 테세우스의 씨 퓨리기들은 적지에서 공산 차량들의 대규모 집결지를 발견하고 이를 공격해서 다수의 적 차량들을 파괴하였다.
 
고든 스미스 중령기는 적이 쏴 올린 50구경 실탄에 맞아 연료 탱크에 구명이 뚫렸다 .
 
연료탱크는 셀프 씰링 기능이 제대로 되지 않아 다량의 연료가 누출되었다. 스미스 중령은 연료가 다 새어나가서 거의 텅 빈 연료탱크의 씨 퓨리기를 겨우 수원 공군기지로 몰고 가 착륙하였다.
 
이날 공산측의 대공사격이 극심해서 사리원 상공에서 두 기의 화이어플라이기들이 적 40mm 대공포에 명중되었지만 테세우스로 귀함하여 가까스로 착륙하였다,
 
다른 한 기의 조종사 시력이 갑자기 강렬한 햇빛에 손상되어 항모에 착륙이 힘들 것 같자, 수원 미 공군 기지로 가서 역시 연료가 모두 고갈 된 상태에서 가까스로 착륙했다.
 
25일은 악천후로 춭격을 하였지만 26일은 통상적인 정찰과 초계 임무를 수행하는 출격을 하였다.
 
27일에는 출격을 했으나 낮은 구름과 비가 내려 두 기가 영 함 커뮤스의 해안 목표 폭격을 지원하기 위한 비행만 했을 뿐 모두 일찍 임무를 종료하였다.
 
28일은 정비 및 휴식일로 출격이 없었다. 29일에도 통상적인 출격이 있었다.
 
30일 오전에는 북한이 해안에 감추어 둔 적 선박 6척을 발견하고 모두 파괴하였다. 코이 대위의 전투기가 대공포에 맞아 좌측 날개에 구멍이 생겼으나 무사히 귀환하였다.
 
4월 1일 화이어플라이기들은 해주 비행장의 격납고를 공격하였다. 테세우스는 다시 사세보 항으로 함수를 돌려서 4월 2일 오후 무사히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4월 3일 미 해군으로부터 다른 시콜스키 헬리콥터의 교체 승무원의 파견이 있었다. 이 기간 동안 함대 사령관 윌리엄 앤드류스 경이 이임하고 A.K 스코트 몽크리프 소장이 새로 취임해왔다. 그는 새로 극동에 파견한 순양함인 벨파스트에 승함하여 4월 11일 사세보 항에 도착했다.
 
 
                                                             왼쪽이 영 순양함 벨파스트


4월 10일 미그기 한 기가 압록강 앞 바다에 있는 신미도 근해의 얕은 개펄에 추락했다. 미 5공군은 이의 회수를 강하게 추진하였다. 영 순양함 케니아에게 이 회수 임무가 주어졌다. 미 5공군은 항공지원과 수색기, 그리고 헬리콥터 지원을 약속했다. 구난선인 USS 터그가 이 작전에 합류하였다.
  
이 날은 특히 미 공군의 공중작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던 날이었다. B-29기들이 바로 북방의 압록강 철교를 폭격했었고 공산 미그기들이 요격했었다. 2 기의 B-29기가 격추되었다.
 
  
                                                                         신미도


케니아는 최고 속도로 질주하여 이날 오전 10경에 현장에 도착했다. 세 척의 영연방[영국 캐나다] 구축함 누트카, 와라뭉가, 아메티스트도 이 작전에 동행해서 인근 해역을 수색했었다.
 
미그기 잔해는 발견하지 못했으나 격추된 B-29기의 승무원 사체 한 구를 인양하였다. 작전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4월 16일 종료되었다.
 
테세우스의 열번째 출동은 4월 8일이었다. 이번 출동 해역은 황해가 아니라 한국 동해였다. 동해에서 작전하던 미 해군 대형 항모들이 중국의 대만 침공에 대비해서 대만 해협으로 급파되었기 때문에 테세우스와 미 중형항모 바타안이 함께 이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급파 된 것이다.
 
테세우스가 동해에서 작전하는 동안 서해안에서는 미 해군과 영연방 해군함들의 연합 함대가 초계임무를 계속하였다. 이런 연합 작전은 처음 있던 일이었다.
 
테세우스의 수병들이나 조종사들은 경험을 많이 쌓아서 미 해군 항모 바타안의 해병 조종사들보다 월등히 기량이 뛰어났었다.
 
비록 미 항모 바타안의 사출장치가 두 기나 있어서 이론적으로는 영 항모 테세우스보다 더 우수한 기능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으나 사출기가 한 기 밖에 없는 테세우스가 더 앞선 실적을 발휘하였다.
 
동해 작전은 4월 15일까지 일 주일간 행해졌는데, 테세우스는 276회 출격을 기록했는데 비해 바타안은 244회 출격만 기록하였다. 이 일주일간 양 함은 각각 하루 동안씩 정비 휴식일에는 출격을 하지 않았다.
 
작전 기간 중 강한 북동풍이 계속 불어 바다는 황천항해를 내내 해야 했다. 테세우스는 이 불순한 일기 속에서도 단 한건의 이착륙 사고가 없었다. 영 조종사들의 노련한 기술이 이 무사고 이착륙 기록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적의 대공 사격과 불운으로 이 마지막 출동중 5기의 씨 퓨리기와 1기의 화이어플라이기가 손실되거나 대파되었다.
 
4월 9일 화이어플라이기들이 원산의 철도 시설과 창고 그리고 군 부대 사용 빌딩들을 대대적으로 공습하였다. 악명 높은 원산항의 기뢰 설치 기지로 의심되는 시설도 공습하여서 대규모 화재가 발생케 했다.
 
동해안에 대한 공중 정찰도 계속되어 공산 선박과 어선들이 기관포와 로케트로 파괴되었다. 다음날 두 기의 씨 퓨리기들이 미군의 두 콜세어 기들로부터 느닷없는 후방 공격을 받았다.
  
 
                                                        미 콜세어기들-해군과 해병대가 사용했다.
 
 
씨 퓨리기들을 공산기로 오인했었기 때문이다. 한기의 씨 퓨리기가 크게 파괴되었으나 한 기는 격렬한 회피 기동으로 콜세어기의 공격을 따돌리고 피했다. 콜세어 기들은 귀환하자 공산군 LA-9기를 격추했다고 보고했다. 
 
                                                                소련제 LA-9기

함경도 고원 일대에서 정찰 임무와 철도 공격 임무를 수행 중이던 다른 씨 퓨리기들은 콜세어 기에게 피격당한 두 씨 퓨리기들로부터 긴급 지원을 요청받아 달려 가다가 H. 존슨 대위의 씨 퓨리기가 적 37mm 대공포에 명중되었다.

 
그의 씨 퓨리기는 한 계곡 사이에 불시착을 시도했지만 추락하고 말았다. 그는 전사한 것으로 추정했으나 포로 교환 시에 송환 되었다.
 
쥬리안 대위도 추락한 그의 기체 주위 상공을 수색하다가 역시 적 대공화력에 명중되어 크게 손상을 입었다. 그는 겨우 씨 퓨리기를 몰고 남으로 비행하여 강릉 비행장에 비상 착륙하였다. 착륙 중 그의 전투기는 전복되었지만 그는 안전하게 탈출하였다.
 
11일에은 낮은 구름과 시계 불량으로 첫 출격만 빼고 나머지 출격은 모두 취소되었다.
 
다음 날인 12일, 화이어플라이기들은 흥남 지역의 교량을 폭격해서 파괴하였다.
 
베일리의 화이어플라이기가 적탄에 맞아 테세우스에서 40마일 떨어진 바다에 불시착했다. 두 명의 승무원은 해면에서 40분간 표류하다가 테세우스에 파견된 미 해군 헬리콥터에 의해서 구조되었다.
 
씨 퓨리기들은 계속 동해안의 적 탱크들과 다른 군사목표들을 공격했으며, 영 순양함 만체스터와 세인트 폴, 그리고 행크 함들의 해안 포격을 위해 목표 발견과 사격지휘를 위한 관측 활동을 하였다.
 
테세우스는 13일 바다에서 해상 급유를 받았다. 당일 급유가 끝난 11:40분 첫 출격이 있었다.
 
함흥 지역 정찰에 나선 험프리 대위의 기가 대공 사격에 피격되었다. 그의 함재기는 작은 논에 불시착하였고, 그는 항공기를 기술적으로 미끄러지게 해서 논 옆의 물이 마른 개천으로 처박히게 하였다. 이 개천은 지대가 낮아 접근하는 적의 사격으로부터 엄폐되게 하였다.
 
그의 편대기는 공중에서 적의 접근을 차단하였다. 추락기에서 약 40마일 떨어진 해상에 위치해 있던 테세우스에서 구조 헬리콥터가 두 기의 씨 퓨리기의 호위를 받으며 날아 왔고, 38분 뒤 조종사는 구조되었다.
 
그러나 그는 중상을 입고 있었다. 머리의 상처가 무척 컸고 무릎의 상처도 상태가 안 좋았다. 그는 만체스터 함의 솜씨 좋은 외과 전문 군의관으로부터 집중적인 치료를 받았다.
 
그날 오후 화이어플라이기들은 세 개의 교량을 파괴했고 씨 퓨리기들은 송탄리의 창고를 폭격하였다. 더해서 원산 북방 마을에 주둔하고 있던 적 병력 집결지를 기총 소사하였다.
 
 
                                                           미 해군기에게 파괴 된 도곡리 다리


14일 씨 퓨리기들이 정찰 임무를 수행하는 반면 화이어플라이기들은 흥남 지방의 다리들을 폭격하였다. 함재기들은 한반도를 가로질러가 진남포의 군수물자 집적소와 탱크들 그리고 작은 선박들을 공격하였다.
 
 
지역의 밀집한 대공포대들이 작전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보우만 대위의 함재기가 적 대공포화에 명중되어 불시착했으나 역시 접근한 적의 치열한 사격 중에 테세우스의 헬리콥터에 의해 구출되었다. 구출 헬리콥터를 조종한 미 해군 조종사 로저 길은 영국 정부로부터 DSC훈장을 받았다.
 
15일은 짙은 안개로 인해서 단 세 번의 출격만 있을 뿐이었다. 테세우스가 주축이 된 TE95.11 기동함대의 동해 작전은 4월 15일 오후 16:30분 종료 되었다. 미 항모 바타안은 사세보 항으로 돌아가고 테세우스와 호위함들은 한반도 황해로 향했다.
 
16일 극동에 도착한 기동함대 사령관 스코트 몬크리프 제독은 테세우스에 승함하여 기동함대를 지휘했다.
 
17일 북한 지상 목표들이 비행거리에 이르자 테세우스는 공격 함재기들을 발진시켰다. 사리원에 새로 건설한 북한의 비행장은 너무 집중적으로 공격을 당하여 완전 사용 불가능 상태가 되었다. 다시 수리된 교량들도 파괴되었다.
 
해밀턴 대위의 함재기가 대공포화에 맞아 겨우 귀함하다가 함에서 60마일 떨어진 바다에 불시착했다. 그러나 그는 55분간 찬 바다에서 표류하다가 역시 테세우스의 헬리콥터에게 구조되었다.
 
19일 기상이 악화되어 구름이 낮게 깔려 시야를 방해하고 폭우가 내렸다. 이 날 기동함대 TE95.11은 사세보 항으로 귀항하였다.
 
이로서 테세우스의 극동 해역 파견 임무는 끝나고 그 후임을 23일 새로 도착한 영 항모 그로리 함에게 인계하였다.
 
테세우스는 큰 환송 속에 사세보 항을 출항하여 홍콩으로 귀환하였다.

6.25전 참전 기간 동안 테세우스는 86일간의 작전 일에 3,446회 출격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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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항공모함 테세우스의 한국전쟁 출동기 -제 2 편- 
 
 

 
여섯 번째 출동 때 테세우스는 함에 장비했던 구조기 씨 오터를 내리고, 미 해군이 제공하는 헬리콥터를 대신 적재했다. 복엽기인 씨 오터는 지원 항모 HMS 유니콘으로 이동해서 새 엔진으로 교체하는 작업을 받을 터였다
 
 
 
                                                               영 수상 비행정 - 씨 오터
                                                         구식으로 보이지만 전후 탄생하였다.


유니콘은 항모였지만 사세보 항에 정박하여 주로 항공기의 정비나 새 항공기의 공급 및 휴식 공간 제공 등의 지원 업무만을 하였다.
 
1월 25일. 테세우스는 출항해서 다시 한국 해역으로 행했다. 여섯번째 출동이었다. 이날 부로 테세우스는 미 항모 바타안과 임무를 교대 했다. 한국 해역으로 이동 도중 새 조종사들은 항모 갑판 이착륙 훈련을 여러 번 되풀이했다.
 
한국의 서해안에서 미 해군 함정들이 북 해안 봉쇄, 황해 상공에서 탈출한 조종사 구출과 한국 전선의 최서단 적진에 대한 함포 사격의 임무 수행을 하고 있었다.
 
기상은 비행하기에 아주 좋은 쾌청한 날씨였다. 테세우스는 8일간의 여섯번째 출동에서 408 소티를 출격했다. 임무는 전과같이 이 해안지방 초계와 지상지원이었다.
  
26일에 비극적인 사고가 발생했다. 출격했던 A.C 베반 대위의 씨 퓨리기에 갑자기 불꽃이 튀는 것이 보이더니 나선을 그리며 수면을 향해 추락했다. 그 나선은 함재기가 수면에 추락하여 큰 물보라를 만들 때까지 계속되었다. 베반 대위로부터는 아무런 통신이 없었다.
 
추락지점은 테세우스로부터 10마일 북방이었다. 구축함 코삭이 고속으로 항진해서 15분후에 추락 현장에 도착했으나 생존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영 구축함 코삭 1,450톤 
                                                영국 구축함들은 미 구축참들보다 조금 작았다.
 

27일은 테세우스에게 불운한 날이었다. 케이리 피치 대위 기가 지상 작전 지원중 적 25mm 대공포나 소화기 탄에 명중되어 구축함 누트카 옆 해상에 불시착하였다. 다행히 그는 구축함에 의해서 구조되었다.
  
같은 날 케이리 피치 대위의 항공기가 동두천 부근에서 대공화기에 명중되어 좁은 골짜기 사이에 불시착하였다. 그의 동료들이 미 구조 헬기가 올 때가지 90분간 그를 엄호하며 적군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다.
 
불시착한 그의 화이어플라이기를 연소시키려고 했던 씨 퓨리기의 되풀이 된 기총 소사는 수포로 돌아갔지만 기체는 벌집이 되었다. 씨 퓨리기와 화이어플라이기들은 미 해군 포격의 지상 목표를 발견하는 임무에도 출격했다.
 
29일 씨 퓨리기들은 미 순양함 세인트 폴의 포격을 인천 소재 구 일본 자동차 공장 자리로 유도하였다. 세인트 폴의 8인치 포탄 30발이 공장에 낙하하여 몇 채의 빌딩을 파괴하였다.
 
31일은 출격하지 않고 휴식을 취했고, 2월 1일 출격한 씨 퓨리기가 해주 항의 독크 시설을 폭격하였다.
 
2월2일. 항모가 보유했던 1,463시간의 무사고 착륙 기록은 씨 퓨리 한 기가 거친 바다 위에서 상하로 피칭을 하는 항모에 착륙하려다가 타이어가 터지고 착륙장치 부분이 파괴되는 사건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2월 3일 씨 퓨리기들은 영 순양함 씨런의 화력을 인천 서쪽 표적들에게 유도하였다.
 
 
 
                                                             영 경순양함 씨런 8,800톤


영 항모 함재기들의 초계 범위는 수원과 김포 일대를 포함한 서울 북서지방이었으며, 이 지역에 추락한 미 모스키토 기 조종사가 헬기에 구출되는 동안 엄호하기도 했다.
  
2월 3일은 테세우스의 여섯번째 출동의 마지막 출격일이었다. 이날 테세우스가 속한 17항모단은 66회의 기록적인 출격을 하였다. 대잠 초계비행 임무에 동원된 소수의 기를 제외하고 모든 화이어플라이기들이 총 출동하여 수원의 북서쪽 지역의 적 점령 마을과 적 참호, 안양 주변에 설치된 적 대공포대들을 공격하였다. 이 공격후 옹진 반도와 해주 비행장을 정찰 비행하기도 했다,
  
미 항모 바타안과 임무 교대를 한 테세우스는 일본 구레 항으로로 돌아왔다. 테세우스는 48시간동안 구레 항에 정박하면서 귀국 희망자들을 위한 절차를 밟았다.
 
 
                                                                   항진 중인 테세우스


2월 12일 테세우스는 구레 항을 출발하여 한국 해역으로 돌아왔다. 일곱번째 출동이었다. 2월 13일 일곱번째 출동을하면서 새로 부임한 조종사들을 위한 비행 연습을 했다.
 
일곱번째 출동에는 영 연방 해군의 코뮤스, 카유가, 아타바스칸과 누트카등이 호위 함대를 이루어서 동행하였다.
 
다음 날인 14일. 미 5공군은 육상 기지에 낮고 짙게 드리워진 구름때문에 출격을 못하였고, 영 함재기들만이 출격할 수가 있었다.
 
화이어플라이기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서 두 팀은 서울 북서쪽의 지상군 지원임무에 출동하고, 다른 두 팀은 초계 임무에 나섰다.
 
씨 퓨리기들은 서울과 평양사이 도로와 사리원과 해주 일대의 정찰 비행을 실시하면서 의심 목표를 공격하였다.
 
항모에 화이어플라이기들이 착륙하던 중 한 기의 기관포 3문이 오작동으로 발사되어 이착륙 관제사 J. F.위그리 준위를 사망하게 만들었다. 그는 다음 날 정중한 해군 의식으로 수장되었다.
 
2월 15일 진남포항 주변의 바다 얼음들이 녹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 사실은 공산군들이 다시 기뢰 설치를 시도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 해역에 대한 정찰과 감시가 강화되었다.
 
  
                                                              테세우스와 항공대 부대원들


2월 17일. 이틀간 불량한 일기로 출격을 못하다가 출격한 화이어플라이기들은 인천 서북방 구역을 집중적으로 초계하였다. 출동의 마지막 출격 목적은 진남포 일대의 적이 수리한 철도 시설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평양역에서 은폐되어 있다가 파괴 된 북한 기관차


같은 날 화이어플라이기들은 원주에서 미 9군단의 지상 작전을 지원하였다. 일곱번째 출동은 2월 23일부로 종료되고 테세우스는 임무를 미 항모 바타안에게 인계하고 사세보 항으로 향하여 항진, 다음날 저녁에 도착하였다.
 
 3월 4일 테세우스는 사세보 항을 출발하여 여덟번째 출동을 하였다. 
  
해상 작전은 출항 당일부터 개시되었다. 군함 케니아와 그 호위함들이 북한 해안을 포격하는 동안 공중 초계가 진남포에서 구사성까지 집중적으로 행해졌다. 공산 측에게 이북 서해안에 대한 상륙작전이 임박했다는 오판을 하게 만드는 위장작전이었다.
 
화이어플라이기들은 초계와 정찰과 교량 폭격을 했고, 씨 퓨리기들은 케니아의 포격을 집중 지원 하였다. 함재기들은 틈을 내어 옹진반도와 해주의 적 비행 기지들을 정찰했다.
 
3월 6일. 기상이 나빠져서 화이어플라이기와 씨 퓨리기는 제한적인 공중 초계만 할 수가 있었다. 이 날은 씨 퓨리기들만 출격해서 해주 서쪽의 도로에 대한 감시 비행만 했을 따름이었다. 3월 7일 역시 해안 포격을 하는 케니아에 대한 지원과 초계를 하였다.
 
3월 8일. 테세우스 함재기들은 서울 -개성- 신막 지역을 정찰하고 철도역과 화물 집적소를 공격하였다. 이날도 순양함 케니아의 연안 포격을 위한 지원 비행이 있었다. 이어서 미 1기병사단에 대한 지원 지상 공격을 하였다.
 
9일은 출격을 쉬었고 다음날 10일은 기상 악화로 출격이 없었다. 11일은 다른 날과 같은 임무의 출격이 있었다. 
 
12일에 화이어플라이기들은 황해도 장연과 옹진 일대를 정찰 비행 중에 황주 남방에서 공산 측의 심한 대공 사격을 받았다. 이날 제임스 대위는 4,500피트 상공을 비행 중에 적의 대공사격에 피탄 되었다.
 

그는 동료 조종사 존슨 대위와 함께 미 공군 기지가 있는 수원 비행장으로 겨우 비행해서 착륙했다.그는 그 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귀함하였다. 
 
 
 
                                                                  미 공군 수원기지
                  1953년 북한기의 야간 공습으로  9기의 피해를 본 뒤 기체 엄폐를 위한 방벽이 설치되었다.


여덟번째 출동의 마지막 날 함재기들은 강산사와 진남포 사이를 초계하다가 황해도 장연 상공에서 적의 격심한 대공포화를 만났다.겨우 대공사격 지대를 벗어났지만 조금 뒤 G.H 쿨스 대위와 D.W 가이 대위의 화이어플라이기가 추락했다.
 
대공포화나 아니면 장착한 폭탄이 오작동으로 폭발했을 것이었기 때문으로 추측 되었다. 동료들은 추락 현장을 맴돌며 지켜보았으나 아무런 생존자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테세우스의 상공을 나르는 화이어플라이기들


비극적인 함재기의 손실이 있었지만 테세우스는 예정대로 그날 오후 사세보 항으로 회항하여 다음날 오후에 기항하였다. 여덟번째 출동에서 테세우스는 공격성 총 출격 226회 방어성 총 출격 113회를 기록하였다. 
 


<다음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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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항공모함 테세우스의 한국전쟁 출동기(제 1 편) 
 
 
 

                                                              영 항모 테세우스13,400톤


극동 파견의 명을 받고 영국을 떠난 테세우스는 일차 기항지 홍콩에 기항할 때 까지 항해 중에도 부단한 이착륙 훈련과 공중 기동 연습을 해서 전투력의 수준을 더욱 향상시켰다. 함장은 볼트 대령, 항공대장은 스토빈 브래드포드 중령이었다.
 
 
                                                                     함장 볼트 대령


1950년 9월 24일. 항모 테세우스가 개전 초기부터 참전하여 많은 전공을 세우고 귀환하는 영 항모 트라이엄프로부터 임무 교대와 장비 인수를 하는 동안 항모의 항공대는 작업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서 잠깐 홍콩 카이탁 공항으로 이동했다가 그 날 오후 귀함(歸艦)하였다.
  
드디어 1950년 10월 2일 11시 30분. 테세우스는 성대한 환송 속에 홍콩을 출항하여 한국 전장으로 장도에 올랐다. 저녁에 태풍이 찾아 왔으나 태풍은 수요일에 모두 통과하고 바다는 다시 평온해졌다. 
 
테세우스는 항해를 계속해서 그 다음 목요일 한반도를 마주 보고 있는 일본 규우슈의 군항 사세보에 입항하여 영국 군함 와리어의 옆에 정박했다. 사세보 항은 향후 테세우스의 후방 기지를 하게 된다. 테세우스는 한국 해역 출동준비를 위해 바쁜 이틀간을 보냈다.
  
 
                                             6.25중 사세보 항 - 미 대형 항모 밸리 포지와 레이테


함상 전투기나 공격기들이 추가 공급되었고 각 함재기들에게 피아 식별을 위한 줄무늬들이 그려졌다. 전에 작전하던 트라이엄프의 씨 화이어기가 미 공군 B-29 기총수로부터 오인 사격을 받고 격추되었던 쓴 경험으로 인해 인식 줄무늬를 그리게 된 것이다.
 
사세보 항 인근 이와쿠니 기지에는 예비 전투기들과 이를 관리하는 정비요원들이 배치되었다.
 
10월 7일. 극동함대 사령관 앤드류스 제독은 기동부대 TE 95를 7개의 작은 팀으로 나누어서 이 작은 팀들을 TE 95.10에서 TE 95.16까지로 각각 명명하였다.
 
테세우스와 그에게 배속된 구축함들의 함대는 TE 95.11이 되었다. 이번 출동전에 테세우스는 신형 함상 전투기로 장비가 교체 되었다. 한국 참전 동안 호커사가 제작한 씨 퓨리기가 테세우스의 주력 전투기로 활동하게 되었다. 
 
  
                                           씨 퓨리 기 - 미그 15기도 격추했던 성능좋은 영 해군기다.


이전 트라이엄프의 주력기는 육상 전투기 스피트파이어를 함재기화한 씨 화이어였다. 이 전투기는 육상에서는 명전투기였지만 해상 활동에는 여러 문제점을 드러냈었다.
 
직렬 엔진이 달린 긴 기수는 흔들리는 함체의 짧은 활주로에서 뜨고 내리는 데 절대 필요한 시야확보에 제한이 있었고, 육상용이었던 이착륙장치가 거친 함상 사용에 적합하지 않아 착륙시의 충격으로 기체 후부에 주름이 잡히는 금속 피로 현상이 오기도 하였다,
  
 
                  씨 화이어기는 육상의 명기 스피트화이어를 함재기로 개량한 것으로 날개를 접을 수가 있다.
                   그러나 해상 작전에서 여러 문제점을 드러냈다.


씨 퓨리기는 시야가 좋은 성형(星型)엔진을 가졌고 이착륙장치도 해군 전용기답게 무척 크고 단단했다. 새로운 전투기 운영 초기에 자주 일어나는 사고가 이번에도 있을까 하는 염려가 있었으나 다행히 아무런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다.
  
한국 해역으로 가는 동안 공격기인 화이어플라이기 한 기가 함대를 선도하며 대잠 초계 비행을 계속하였다. 북한이 개전 전에 이미 소련으로부터 두 척의 잠수함을 인도받았다는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큰 위협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견들이었지만 하여튼 조심해야 했다. 레이다에 나타난 미확인 적기를 향해 긴급 요격 이륙을 하기도 했었지만 공산기가 아니라 거의 미군기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긴급 발진은 전투기 조종사들에게 유익한 경험 축적이 되었다.
 
  
               영 함상 공격기 화이어플라이 기 - 2인승으로, 동체 후부에 피아인식을 위한 둥근테가 그려져 있다.


테세우스의 함재기들은 육군에 파견된 전방 항공 통제 장교들의 유도에 따라 지상 지원 작전을 할 예정이라는 지시를 받았었다. 지상 공격시 미군의 공격기들은 훨씬 파괴력이 강한 네이팜 탄을 썼지만 영국 해군기들은 주로 통상의 폭탄과 로케트 포, 그리고 기관포탄을 사용 했다.
 
한국은 높은 산들이 많은 산악 국가였기 때문에 구름이 낀 날은 고도의 비행 능력이 요구되어 구름이 낀 날은 긴 산맥을 특히 조심해야 했다.
 
항모의 항공대는 작전 시 통상 하루에 50회(소티)를 출격했었고, 대개 한번 출격에 두 시간 반에서 세 시간이 소비되었다. 그러나 때로는 66회나 출격하기도 하였다.
 
무거운 신형기 씨 퓨리기들은 상황이 급할 때 항모의 캐타펄트[항공기 이륙 사출 장치]가 고장 나면 로케트 이륙 추진 장치인 RATOG를 장착하여 비상 이륙하기도 하였다.
  
화이어플라이기나 씨 퓨리 기들을 발진시킬 때 이 장비가 여러 번 사용되었는데 이 장치를 사용하면 항공기 이륙시 항모에 무리가 가는 22노트의 전속력을 내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 전선에 최초로 출동했던 트라이엄프


1950년 10월9일에서 11일까지 3일 간 테세우스가 첫 실전을 경험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항공 공격의 대상은 적의 대공 포대와 군사 통신 체계였다.
 
10월 9일. 씨 퓨리 전투기 편대와 화이어플라이 공격기 편대는 각각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 대동강 하구 진남포를 공습했다. 적 군사 시설 타격의 공습 작전은 10월 내내 계속되었다.
 
공격 목표들은 주로 적 보급선의 급소들인 교량이나 철도 등이었다. 적의 보급 교통망을 차단하는 공격은 평양-사리원- 황주사이에 북서쪽에 집중되었다.
 
10월 첫 작전 중 항모의 정비팀들은 최고의 능력을 보여 주었다. 적 소화기 대공 사격이나 대구경 고사포탄 파편들에 뚫린 기체의 구멍 정도는 즉시 당일로 수리가 되었다. 때로는 밤을 세워가며 엔진 전체를 교체하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우수한 정비 덕택에 함재기 가동률은 아주 높았다. 항상 탑재 씨 퓨리기 20기 중에 19기, 화이어플라이 12기 중 11기가 출격 가능 상태로 유지되었다,
 
테세우스의 첫 출동은 10월 21일 마감되어[테세우스는 다음해 봄까지 열 번의 출동을 하게 된다.] 정비와 보급을 위해서 일본 사세보 항으로 돌아왔다.
 
첫 작전에서 입증된 테세우스의 새 전투기 씨 퓨리 2기와 새 공격기 화이어플라이 5기의 성능은 영국 해군을 매우 만족하게 만들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한국 전선에 첫 투입된 영 항모 트라이엄프는 스피트화이어 해상형 개조기인 시화이어와 화이어플라이 1형기로 장비되어 있었는데 이들의 가동률은 기대에 못 미치는 것이었다.
 
테세우스의 신형기들은 트라이엄프의 구형기들에 비해서 특히 전투 능력은 물론 가동률도 훨씬 우수하다는 사실을 출격과 정비로서 말해주었다.
 
테세우스의 두 번째 출동은 10월 27일에 있었다. 이날 테세우스는 일본 사세보 항을 출항해서 한국 황해로 향했다. 이번 출동에는 한 손님이 테세우스에 합류했다.
 
미 해군 워세스터 함 탑재 헬기가 진남포 항까지의 해로에 적이 설치한 기뢰발견과 소해(掃海)의 임무를 띄고 테세우스에 파견된 것이다.
 
헬리콥터가 항모 갑판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바람에 테세우스는 여러 제약을 감수해야 했다.
 
함재기 사출 장치(캐타펄트)를 사용할 수가 없었다. 로케트 보조 장치로 이륙하는 항공기들은 로케트나 폭탄 또는 보조탱크를 외장하지 못했다.
 
헬리콥터 활용 면적 확보를 위해서 6기의 화이어플라이기는 당분간 항모를 떠나 사세보의 육상 기지에 머물려 있어야 했다. 바다로 출동한 테세우스의 미 해군 헬리콥터는 10월 29일부터 기뢰 수색 작전을 개시하였다.
 
테세우스의 함재기 씨 퓨리기들은 기관포만 무장하고 주로 함과 헬리콥터의 항공 초계와 호위 임무만 수행하였다. 테세우스가 임무를 끝내고 사세보 항으로 돌아가는 길에 육상 기지에 대기하고 있던 화이어플라이기 6기가 다시 테세우스로 돌아왔다.
 
  
                                         북한 철도 교통망은 끊임없는 유엔 공군의 공격 목표가 되었다.


사세보에 일시 기항했던 테세우스는 홍콩을 향해 출항했다. 홍콩까지의 항해 3일간 함의 정비팀은 캐타펄트 장치의 가속성능과 착륙 속도 지연 로프의 성능을 개량했다. 테세우스는 홍콩에 정박하고 11월 13일 하루 바다로 출항해서 개량한 사출장치의 성능을 시험했다.
  
한국의 전쟁은 북한군이 패주하고 유엔군이 그 뒤를 쫓아 압록강을 향하여 쾌속 진격중이라, 전쟁의 끝이 보이는듯했다. 테세우스의 승조원들은 한국 원정 임무는 이제 다시 없을 것이고 테세우스는 당분간 홍콩에서 활동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중공군의 참전으로 테세우스와 호위함들은 다시 닻을 올리고 집결지 사세보로 긴급 출항했다. 테세우스를 주축으로 한 영연방 기동함대 TG 95.1은 피난민들이 철수하는 진남포 항을 제외하고 전 북한 서해안 쪽의 포구나 항구의 군사 목표 공격 임무를 부여받았다,
 
테세우스의 세 번째 작전 출동은 UN군이 밀리던 12월 4일 있었다. 호위 함정들인 콘코드와 코색, 에버튼 함들을 동행한 테세우스는 사세보를 출항하였다. 테세우스의 씨 퓨리와 화이어플라이기들은 작전지역에 도착하자 곧 집중적인 출격을 개시하였다.
 
함재기들은 전진하는 중공군을 저지하기 위해 적지의 교량, 화차, 군수물자 집합소, 그리고 중공군들을 공격하였다.
 
마침 공군들은 전방 기지들이 폐쇄하고 철수해야 하는 불리한 상황이었다. 이 불리한 시기에 바다의 이동 기지인 테세우스는 공백이 생긴 항공력을 대체하는 능력을 훌륭히 발휘하였다.
 
겨울 바다에서 테세우스 함재기들의 출격은 12월 5일 시작하였다.
첫 임무는 아군들과 피난민이 철수하는 진남포 항으로 진격해오는 중공군들을 공격하는 것이었지만, 전황은 시시각각 악화되고 있었다.
 
12월 8일 두 번째 출격이 있었다. 유엔군을 추격하는 중공군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 날의 총 출격 시간은 무려 115시간으로, 테세우스가 취역한 이래 최대의 기록이었다.
 
10일은 기상이 아주 안 좋아서 김포 기지에 착륙했던 4기의  씨 퓨리기들이 그냥 김포 기지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11일 다시 출격이 있었다. 공격 대상은 전과 같이 적의 보급선인 도로와 철도였다. 적의 철도와 물자 집하장 또는 화차나 도로에서 움직이는 적 차량들이었다.
 
13일 해주와 진남포의 군사 목표들을 공격했다. 함재기들은 진남포 해주 일대 지역에서 대지 공격 임무만  수행한 것이 아니었다.
 
유엔군의 철수로를 따라 지역을 세분해서 저공비행을 하며 혹시 뒤처져서 방황하는 아군이 있는지 확인하는 빗질 수색도 있었다. 낙오되어 헤매는 많은 미군들과 한국군이 목격되었다.
 
14일 테세우스의 함재기들은 처음으로 미그 15 기를 목격했다. 미그 15기는 지상의 낙오병들을 구해서 진남포 앞 바다에 정박한 LST로 이송하던 헬리콥터에 대한 공격을 시도했었다.
 
테세우스는 14일 세 번째 출동을 마치고 다시 사세보를 향하여 함수를 돌렸다. 그러나 귀항 길에 오르고 몇 시간 되지 않아 사령부로부터 황해 북쪽에서 발견된 중국 어선단을 조사하라는 긴급지시를 받았다.
 
그 어선들이 중공군들을 수송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긴급히 발진한 테세우스의 함재기들은 이들 정크선이 단순한 어선임을 확인하고 이를 본부에 보고했다.
 
이번 출동에서 테세우스의 함재기들은 총 338회의 출격과 전투 출격 시간 838시간의 기록을 올렸다.

테세우스는 사세보에서 재급유와 재보급을 완료하자 다시 바다로 나가 네 번째 출동을 하였다.
 
황해 북쪽 작전 해역으로 북상하는 이틀 동안 기상이 너무 불량하여 함재기를 한 번도 이륙시킬 수가 없었다. 작전 해역에 도착 하고 기상이 쾌청해지자 테세우스의 함재기들은 출격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산야는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그런 눈 덮인 지상에서 적의 활발한 움직임이 탐지되었다.
공산군은 남으로 전면 철수하는 유엔군을 추격하고 있었다.
 
  
                                                    압록강을 건너 북한땅으로 들어가는 중공군.
                    이들은 압록강에서 최일선까지 도보로 이동했었기 때문에 주야 항공 공격에 시달려야 핬다.


12월 19일. 테세우스의 씨 퓨리기들은 황주와 사리원 사이 도로에서 이동하는 적 수송대를 네 번에 걸쳐 공격해서 트럭 17량과 적 탱크 3량을 파괴하였다.
 
주로 로케트 탄이 사용되었는데 저공 비행과 로케트 공격은 낮게 깔린 구름과 불량한 시계 때문에 아주 어렵게 실행되었다. 악천후는 계속 되었지만 함재기들은 기회가 될 때마다 출격을 계속하였다.
 
12월 23일. 씨 퓨리기 편대는 평양 서쪽에서 행군 중인 중공군 병력과 차량들을 기총소사해서 타격을 주었다. 장거리 비행이 필요한 평양 동쪽 지역에 대한 초계 비행임무는 미 공군의 전방 활동 기능이 다시 가동 되자 26일부로 종료되었다.
 
평양 동쪽 지역의 장거리 지원에서 630회의 출격이 있었고 총 출격 시간은 1,630분이었다. 영 함재기들이 발사한 로케트탄만 무려 1,400발이나 되었다.
 
테세우스는 12월 28일 오후 사세보로 다시 귀항했다. 여기서 세 명의 새 조종사들이 증원되었고 함은 다시 같은 일본의 다른 항구인 구레 항으로 이동하였다.
 
구레에서 테세우스는 다른 영 항모[航母]인 유니콘 옆에 계류되었다. 테세우스는 유니콘에게 수리가 필요한 두 기의 씨 퓨리기와 두 기의 화이어플라이기를 넘겨주고 대신 정비가 잘 된 세 기의 씨 퓨리기와 한 기의 화이어플라이기를 공급 받았다.
 
 
                                                                영항모 유니콘 14,750톤
                                                        작전 출동보다 주로 지원업무만 했다.


12월 31일 일요일. 테세우스 식구들이 크리스마스 휴가를 즐기는 동안 반년마다 한 번 씩 있는 진급자 명단이 발표되었다. 라르킨 중령과 홉킨스 중령은 대령으로 진급했고 화이트와 콤프톤, 톰슨, 그리고 항공대장 스토빈 브래드포드 소령은 모두 중령으로 진급하였다.
 
구레에서 테세우스는 미 7함대 소속 항모 바동 스트레이츠호 정비진의 도움을 받으며 정밀 장비를 정비를 했다.
 
테세우스의 다섯 번째 출동은 서울을 중공군에게 내준 직후인 1월 5일에 있었다.
 
한국 해역에 도착한 1월 7일에 첫 출격이 있었다. 첫 초계비행의 임무는 최 일선에서부터 진남포까지 해안 지역 정찰, 적 병력의 이동, 선박을 이용한 적 보급 활동의 감시였다.
 
1월의 추운 날씨에 한국 해안의 대부분은 얼어서 얼음으로 덮여 있었다.
 
해안에서 적이 기뢰를 설치하는 등의 특이 동향은 발견되지 않았다.
 
반면 육상 전선에서의 공중 지원 요구는 급증하였다. 영 함대 사령관 앤드류스 제독은 미 5공군 사령관에게 영 해군이 유엔군 지상 병력을 위해서 하루 20 소티 이상의 지상 지원을 해 줄 수 있다고 제안했다.
 
1월 8일 오후 테세우스의 함재기들은 오산 남방에서 미 육군 25사단을 근접 지원하여 적 병력을 기총과 로케트로 공격했다.
 
영 함재기들의 지상 공격은 미 공군 T-6 표적 지시기의 유도를 따라 행해졌다. 영 조종사들은 작전 상공에서는 자기가 공격하고 싶은 목표를 선택해서 공격 할 수 있는 재량권이 주어졌다. 영 해군기들은 지상 지원은 물론 북 서해안 지역과 북한이 패주할 때 폐쇄 했던 북 비행장에 대한 정찰도 게을리 하지는 않았었다.
 


                                                                       씨 퓨리기


1월 13일. 폭설이 출격을 방해했지만 다음 날은 쾌청하여 함재기들의 출격이 가능했다.
 
그러나 몇 기가 출격을 한 뒤 사출 장치가 고장나고 말았다. 이미 상공에는 다른 기들을 기다리며 편대를 짜고 기다리는 씨 퓨리 기들이 있었다.
 
후속기들은 로케트 이륙 보조 장치를 부착하고 이륙할 수는 있었지만 외장(外裝)한 폭탄과 보조 연료탱크는 모두 제거하여야 했다.
 
적 타격에 사용할 무장은 단지 20mm 기관포뿐이었다. 좀 더 가벼운 화이어플라이기는 제대로 무장하고 이륙할 수가 있었지만 씨 퓨리기는 로케트 이륙 보조 장치인 RATOG를 사용하여야 한다.

15일. 묘안을 내서 전투기 계류 위치들을 재조정으로 해서 씨 퓨리기들이 이륙할 수 있었고 화이어플라이 기들도 로케트 이륙 보조 장치로서 이륙할 수가 있었다. 이 날 하이헷트 대위는 1,000번째 무사고 항모 착륙을 기록했다.
 
16일. 테세우스는 새로운 기록인 총 60소티[총출격] 기록을 수립하였다. 미영 합동작전 본부에서는 축하 메시지를 보내 테세우스가 전 미 5공군에서도 하지 못한 위대한 기록을 남겼다고 치하했다. 16일에 다른 중요 한 일도 있었다. 미 소형 항모 바타안 함이 테세우스와 함께 합동 작전을 위해서 영 함대에 증파되었다.
 
 
                                                             미 소형항모 바타안 16,000톤
                                                      조종사들은 해병대에서 파견되었었다


덕분에 앤드류스 함대 사령관은 자기 휘하의 두 척의 항모를 18일간씩 여유있게 교대로 운행할 수가 있었다.
 
이 조치로 영 항모들은 8일이나 9일간 출격하고 하루는 휴식을 취하고, 사세보에 급유와 보급을 위해서 오갈 때 여유 있게 하루를 더 사용할 수가 있었으며 6~7일간 사세보에서 머물러 정비와 휴식을 취할 수가 있었다. 테세우스는 사세보로 귀항하여 휴식과 정비를 했다.
 
이 정박기간 중 "일년 간 최고의 공을 세운" 영국 해군 조종사와 승무원들에게 수여되는 보이드 컵이 테세우스 조종사들에게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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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 적 프로펠러기에 당한 미 최신 제트기-.




                                            윈턴 마셜 소령-너무 말라서 친구 사이에 갈비씨[bones]라는
                                            별명이 이름처럼 통용되었다.

이 폭격기 격추 뒤에 마셜은 전투기의 CAL 50실탄을 모두 소진했음을 발견했다. [적 대형기 격추는 다량의 실탄을 소비하는 집중 사격이 필요하다.]

그는 선도 위치를 즉시 존 호노커에게 양보하고 호위 위치로 옮겨갔다.

이제부터 적기 공격은 존 호노커가 리드 할 것이고 마셜은 엄호만 하게 되었다.

호위 위치로 옮기고 나서 그는 다소 여유를 가지고 수십 개의 공중전이 어지럽게 수놓은 있는 주변 상공을 살펴볼 수가 있었다.

다수의 적 폭격기들이 연기를 뿜고 지상으로 낙하하고 있었다. 잠깐 사이에 여러 기의 LA-9기들도 마셜의 눈앞에서 격추 되었다.

후방 상공에서 편대를 뛰쳐나와 이 난전에 끼어든 수기의 미그기들도 F-86기들과 얽혀들어 치열한 생과 사의 격투를 벌이고 있었다. 후미에 붙은 미군기를 떨쳐 내기 위해서 미그기의 격렬한 기동을 보기에도 장관이었다.

마셜의 상공에서 한 미그기는 이미 피격되어 큰 맴돌이를 하며 추락하고 있었다.

이미 격추된 공산기에서 탈출한 수 십 명의 조종사들을 매단 낙하산들이 낙화처럼 지상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상공은 적 낙하산이 너무 많아 마치 미 육군의 82공수사단의 낙하 훈련 현장같이 보였다. 미 공군의 이런 매서운 공격을 견디며 폭격 목표인 대화도를 향하여 목숨을 건 비행을 견지해왔던 남은 TU-2기들이 섬 상공의 폭격 지점에서 마침내 기수를 북으로 돌려 도주하였다.

마셜 소령은 이들 대화도 상공에 진입했던 몇 기의 TU-2 기들이 폭탄을 투하했던 사실을 기술하지 않았다.공중에 전개된 난전으로 그 폭탄 투하 장면을 보지 못한듯하다.

마셜과 동료 호노커는 도주하는 마지막 적 폭격대를 서둘러 격멸하기로 하고 기수를 돌려 다시 급강하를 시작했다.

바로 이 순간 호노커는 비명에 가까운 경고를 발했다. “대장! 급속 이탈 !-BREAK HARD-!”

BREAK HARD라는 말은 조종사가 모르는 사이 적기가 내습한 위기 상황을 동료기가 알아채고 발하는 경고다.

이 경고가 이어폰에서 울리는 순간 조종사들은 만사 젖히고 무조건 최대로 신속하게 기체와 조종사의 조건이 허용하는 한 급격하게 방향 전환과 다이빙으로 적기의 공격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이 비명의 경고를 듣는 순간 마셜은 격심한 충격에 정신을 잠시 잃고 말았다. 마셜은 나중에야 그가 정면 고공에서 그의 F -86기를 향하여 수직 다이빙으로 기관포 공격을 한 LA-9기를 발견하지 못했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적기는 그에게 일격을 가하고 아래로 다이빙해서 이탈했다. 문자 그대로 일격이탈의 기습에 마셜 소령이 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LA-9는 즉시 추격한 호노커에 격추당했다.

그러나 조종사 왕티안 바오는  살아서 부대로 돌아 갔다. 오히려 마셜 소령의 F-86기를 격추 한것으로 보고하여 대대적으로 선전에 동원되었다.


                                               중국 언론에 프로펠러 기로 미군 최신 전투기를 격추한
                                               영웅으로 대대적으로 선전되던 왕 티안 바오의 사진


적기를 처치한 호노커는 거꾸로 뒤집혀 진채 지상을 향해 나선을 그리고 추락하고 있는 마셜의 전투기를 쫓아왔다.

적 기관포탄은 마셜의 왼쪽 날개를 크게 파손시키고 캐노피[조종석 보호창]를 날려 버렸다.기관포탄 한 발이 조종석 머리 받침대에 뒤에 명중하여 그의 조종 헬멧을 크게 파괴하였다.

머리에 큰 상처를 입어 흐르는 피는 마셜의 얼굴을 뒤덮었다. 그의 전투기는 뒤집어진 채 지상을 향하여 계속 나선을 그리고 추락했다.

그는 정신을 잃어서 조종 불능상태였다. 그러나 캐노피가 날아간 조종석에 세차게 몰아 부친 북한 겨울의 얼어붙은 냉기가 그의 의식을 되찾게 하였다.

뒤집혀 진 기체의 조종석에 거꾸로 매달린 마셜은 지면이 빙글빙글 회전하며 빠르게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정신이 든 마셜의 귀에 들린 것은 호노커가 김포 기지에 다급하게 보고하는 그의 위기 상황이었다.

마셜의 전투기가 추락하고 있고 탈출한 낙하산도 보이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마셜은 조종석을 엄습하는 강풍 속에서 겨우 기체를 다시 잡고 상승해서 호노커와 합류했다. 그의 헬멧을 크게 부서지고 부착된 이어폰이 파괴 되어서 수신은 되었지만 송신은 되지 않았다.

산소 마스크도 얼굴에 밀착되지 않아 한 손으로 조종간을 조작하면서 한 손으로는 산소 마스크를 얼굴에 꼭 대고 있어야 했다. 그의 손과 얼굴은 얼어붙은 대기에 마비가 되었다.

이곳은 적진 깊숙이 있는 격전장이었다. 캐노피마저 날아간 마셜의 전투기를 미그기가 공격한다면이미 날개에 큰 파손을 입은 기체로는 회피 기동마저도 불가능하게 보였다.


                                                        F-86기와 미그 15기들이 격돌하던 유명한
                                                        미그 골목[MIG ALLEY]


더구나 보유한 실탄은 모두 소진한 상태였다. 마셜은 150마일 남쪽의 김포 기지로 방향을 틀고 불안한 귀환 비행을 시작했다.

연료계는 연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부상을 입었고 또 다시 의식을 잃을지도 몰랐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그의 부상이 상당히 심각한 것을 알아차렸다.

폭발한 적 기관포탄 파편들과 파괴된 캐노피에서 비산한 프렉스그라스 조각들이 마셜의 손과 얼굴과 목에 박혀 출혈을 계속하게 했다.

상황은 엄중했고 위기가 찾아왔다. 그는 과연 이런 상황에 전투기를 몰고 남쪽 김포 기지로 귀환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절망적 생각도 들었었다.

이 위기에 믿을 것은 동료 호노커의 호위뿐이었다. 이런 위기상황 대처 능력에서 미 공군에는 호노커보다 더 나은 조종사는 없었다.

그는 적기의 추격을 요격할 후방의 위치에서 계속 마셜을 독려하며 정보를 주고 주변을 경계했다.

존 호노커는 적 기관포탄이 마셜 기체 상부 조종석 후부도 대파시켜 큰 파손 부위가 보인다고 알려주었다.

그는 놀랐다. 그 곳에는 전투기 조종을 통제하는 유압 장치의 중심 부분이 있는 곳이었다.

이 곳이 파괴되어 유압(油壓)이 다 빠져 나간다면 전투기는 조종 불능 상태에 이른다.

마셜은 놀라서 뒤를 돌아보다가 더 놀랄 사실을 보았다. 그가 메고 있는 낙하산의 일부가 파괴되어 흰 천이 길게 빠져나와 흔들거리고 있었다.

아마도 낙하산이 적의 기관포탄이 조종석 후방에 명중했을 때 그 파편을 막아내 그의 목숨을 구했을지 모르지만 낙하산이 파괴된 이상 기체에서 비상탈출도 불가능했다.

호노커는 공중의 격전장을 빠져 비교적 안전지대로 접어들자 걱정스럽게 마셜 소령의 옆으로 다가와 지상 쪽을 가리켰다.

그 곳은 북한 해변의 갯벌이었다. 마셜에게 그 곳에 비상착륙을 생각해보라는 호노커의 제안이었다. 그러나 조종 시스템은 그런대로 아직 말을 듣고 있었고 엔진도 제대로 가동하고 있었다. 더구나 이런 추운 날씨에 신체도 시원치 않은 상태로 동체 착륙을 했다가 더 비극적인 결말을 맺을 가능성도 부정 할 수가 없었다.


                                         소련의 격추왕 에브게니 예브게니 페페리아예프 상좌에게 
                                         격추된 미 공군 가렛트 중위의 F-86기

                                         -청천강 하구 앞 얕은 갯벌에 불시착해서 기체 상태가 비교적
                                          온전했다. 그가 비상탈출한 것이 아니란 것이 손상없이 열린
                                          캐노피가 증명해준다. 소련은 이 기체를 소련으로 가져가
                                          철저 분석해서 미 첨단 기술을 빼냈다. 마셜 소령의 F-86기도
                                          하마트면 이 운명을 거쳤을 가능성이 있다.


마셜 소령의 쉽게 포기 하지 않은 싸움닭 기질은 해볼 때까지 해보자는 오기가 들게 했다.

그는 호노커에게 고개를 가로 지으며 남쪽으로 비행을 계속 하였다. 호노커는 김포 기지에서 구조 헬기가 출동했으니 힘내라는 격려를 했다.

그 말을 들으니 마셜은 기운이 되 살아 나는 것 같았다. 영겁과 같이만 느껴지던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우리는 드디어 엔진이 꺼져도 김포까지 활강할 수 있는 한강 북쪽 지역으로 접어들었다.

호노커와 기지의 분주한 통신을 들어보면 김포 기지에서는 그의 비상착륙에 대비해서 모든 전투기의 이착륙이 금지되고 활주로 옆에는 소방차와 구난차 그리고 앰브란스등이 비상대기 완료했음을 알 수 있었다.

마셜 소령은 그를 위한 긴급조처들이 모두 행해져 그의 무사 귀환을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자 감격의 눈물이 눈에 고였다.

드디어 목마르게 기다렸던 김포 기지 활주로가 보였다. 마셜 소령은 바퀴를 내리고 엔진 출력을 줄이고 착륙 자세로서 활주로로 접근했다.


                                                               전쟁 중의 김포 비행장


그런데 믿지 못할 일이 생겼다. 난데없이 한 F-86기가 나타나 전방 몇 피트 앞에 끼어들더니 마셜 소령의 착륙을 가로막아 방해하며 자기가 먼저 착륙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마셜 소령의 캐노피가 날아간 전투기를 보면 그가 얼마나 비상상황인지를 알았을 텐데 양심도 없는 인간이었다.

관제탑에서도 그 무례한 조종사에게 즉시 상승해서 활주로를 양보하도록 여러 번 경고했고 마셜 소령의 비상착륙을 대기하던 지상 요원은 붉은 경고 신호탄을 쏘며 접근을 막았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마셜 소령은 그 예기치 않은 조종사의 착륙 방해로 성치 않은 기체의 기수를 올리고 마지막 출력을 가했다. 그는 사력을 다해 F86기를 상승시켜서 비행장을 겨우 한 바퀴 선회하고 가까스로 활주로에 착륙할 수가 있었다.

지상요원들은 마셜 소령과 호노커의 안전 착륙을 열렬히 환영했고 마셜 소령은 즉시 대기했던 앰브런스로 응급 구호소로 직행했다.

마셜 소령은 나중에야 그 양심없는 조종사가 그의 친한 친구이기도 했었고 한국전쟁중 최고의 격추 기록들을 보유한 탑 에이스중의 한 명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조종사는 아군 폭격기 편대를 호위하고 출격했다가 무전기가 고장 나고 말았다. 무전기 고장으로 그는 동료기나 기지와 교신을 할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김포기지에 겨우 가까워 오자 엔진이 스톱하고 말았다. 그는 정지된 엔진을 가지고 겨우 활강하여 김포 기지에 비상 착륙을 했던 것이다.

이번 5전투 비행단의 기습작전으로 적 TU-2 폭격기는 불과 수 기만 탈출했고 나머지는 모두 격추당했고 호위하던 LA-9도 거의 섬멸되었다.

미그기도 여러 기가 격추 당했다. 비록 섬은 적에게 점령당했지만 공중에서는 참담한 대패를 겪었던 것이다.

5전투 비행단의 대 승리였지만 베테란 조종사 마셜 소령의 개인적으로는 아찔한 위기의 전투이기도 했다.

적 최신형 미그기와도 여러 번 공중전을 겪었고 다수의 미그기도 격추했던 노련한 마셜 소령이 구식 프로펠러 전투기에 죽었다가 살아났던 것은 6.25전의 아주 이색스런 일이라고 아니 할 수가 없다.

6.25전중 공산군 미그 기가 유엔군 측의 프로펠러기에게 격추 당한 일이 있었던 사례는 두 번이나 있었다.

한 미그기는 대동강 하구 상공에서 미 해병대의 프로펠러 콜세어 기에게 격추 당했었고 다른 한 미그기는 압록강 상공에서 영국 해군 프로펠러 함재기 씨 퓨리에게 격추 당했었다,


                                                       미 해군 및 해병대의 F-4U 콜세어 기


만약 마셜 소령이 프로펠러 기인 LA-9에게 피격당한 뒤 아슬아슬한 귀환 비행에 성공하지 못했더라면 중국 선전대로 공산군 구식기에 미국의 최신 제트기가 당한 경우로 역사에 기록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미 공군이 압도적인 승리를 기록한 6.25 전쟁 항공전사에 작은 오점이 될 수도 있었다.

마지막 사족(蛇足) 한마디.

노련한 마셜 소령은 적 LA-9기의 정면 공격에 당했다. 6.25전중 적 미그기를 격추했던 미 해병대의 콜세어기나 영국 해군의 씨 퓨리기도 성능이 월등했던 공산군 제트 전투기인 미그기와 대결했을 때는 대담하게 정면에서 적을 받아쳐 격추 시켰었다,

추측컨대 프로펠러기가 더 빠른 제트 전투기와 조우하면 결과가 뻔한 회피대신 적이 빠른 속도의 이점을 살리지 못하게 과감한 정면 육박 돌격하라는 생존의 공중전 교리가 그 당시에 개발 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마셜 소령은 후에 월남전에도 참전해서 활약했고 공군 소장으로 은퇴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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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편, 미 F 86기들의 적 쌍발 폭격기대 기습 -



1951년 11월 말 아침. 미 공군 김포 기지의 브리핑 룸에서 출격 조종사들은 한 놀라운 브리핑을 받았다.

브리핑 내용은 압록강 앞 바다 섬을 폭격하러 출격한  공산 공군의 쌍발 폭격기 편대군을 요격하라는 임무 부여와 함께 출격에 필요한 관련 전투 정보들이었다..

이는 공산 측의 최신 미그 15기들을 상대로 하는 공중전을 주 임무로 하고 있는 F-86 전투기 조종사들에게 분명 놀랄 특수 임무였다.


                                                               미공군 F-86기 편대


공산군 공군 쌍발 폭격기들은 소련제 쌍발 프로펠러 엔진의 TU-2기 30기로서 같은 프로펠러 전투기인 소련제 LA-9들이 호위를 맡았다.

적 호위대는 더 있었다. 이들 구식 프로펠러 폭격기와 전투기들은 이 지역 상공에 출몰하는 미 공군 F-86기들의 내습에 대비해서 후방 고공에서 비행하는 소련 공군 미그 15기들의 호위를 받았다.

공산 공군 폭격기들의 작전 임무는 압록강 아래 한 섬에 설치되어 있는 유엔군 전방 비밀 레이다 감시초소를 폭격하는 것이었다.

이 레이다 기지는 중국내 만주 지역에서 출격하는 공산군들의 전투기 자세한 정보를 탐지해서 이 지역까지 출격하는 유엔기들에게 귀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었다.

마셜 소령의 공중전기에는 공중전 외의 배경 설명은 대폭 생략 되었고 오류들도 있어서 아래에 추가적인설명이 필요하다,

위에서 말한 섬은 평안북도 압록강 하구 아래 육지에 인접한 바다에 자리 잡은 대화도가 유력하다. 미국 기록은 이날 폭격이 대동강 하구앞 바다의 초도에 가해 졌다고 하지만 최근에 출판 된 중국 기록은 대화도로 되어 있다. 


                                                  북한 지도-좌측 맨 아래에 대화도가 보인다.


대화도는 평북 철산군 앞바다에 있는 섬으로서 북한 탈출 유격대와 미군과 영국군의 혼성 첩보 부대가 게릴라 활동을 지원하고 있었다.

대화도는 두 번의 공산기 폭격을 받았었다. 한번은 1951년 10월 13일 미그기 4대편대의 호위를 받는 9기의 중공군 중폭격기대가 가한 폭격이었다.

이 예기치 않은 폭격으로 주민과 유격대 69명이 죽고 여러 가옥과 시설들이 대파되었다.

성공적인 첫 폭격이 공산측으로 하여금 더 대규모이고 더 대담한 두 번째 폭격을 시도하게 했다.

두 번째는 같은 해 1951년 11월 30일 오후 6시에 500톤급 8척으로 용암포에서 출발한 중공군 148사단 예하 연대 병력이 섬을 기습 상륙하기전에 가한 사전 폭격이다.

잘 무장한 정규군이 수비하던 상황이 아니었고 섬에 주둔하던 유격대들은 아무런 준비가 없었기 때문에 중공군은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고 손쉽게 상륙하고 말았다.

유격대는 이틀간 저항했지만 다수의 사상자가 났으며 미군 두 명과 영국군 한 명이 포로가 되고 섬은 점령당했다.

이 곳에 마셜 소령의 기록처럼 레이다 기지가 있을 법하지만 다른 기록들은 이 사실을 전하지 않고 있다.[미군 기록의 초도에는 레이다  기지가 있었다.]

시기나 규모로 보아 미군에게 궤멸당한 폭격대는 이 섬 함락 작전 때 동원된 것아 확실하다.

사실 미공군 공격대가 공산군의 폭격대를 조우한 시간은 오후 4시경으로 중공군의 상륙작전 2시간 전으로 대규모 폭격대들이 역시 대화도에 가한 대규모 상륙작전을 지원하기 위한 출격에  나선것임을 강력히 시사한다.

더구나 미국 기록이 말하는 초도는 황해도 앞바다에 있어서 김포나 수원의 미공군  기지와 너무 가깝다.[상식적으로 보아도 속도가 느린 프로펠러기들이 대규모로 접근하기에 아주 위험한 남쪽에 위치해 있다.]

중공군의 폭격이 대화도를 겨냥한것임에도 미공군은 레이다 기지가 있던 초도를 겨냥한 것으로 오인한것이 이런 혼란한 기록이 나오게 만든것으로 판단된다.

마셜 소령의 전투 기록은 이때 출격한 폭격기들이 북한 공군의 TU -2 경폭격기라 했지만 다른 기록은 중공군의 소련제 TU-25 중형 폭격기들이라고 전하고 있다.


                                                                 소련제 TU-2기


그러나 이들 폭격기들을 직접 목격하고 격추했던 마셜 소령의 기종확인이 더 신용할만해서 이를 TU-2기로 하기로 한다.[중국 출판물에도 TU-2기들로 되어있다.]

단 폭격기대 소속은 북한 공군보다도 중국 공군 소속이 더 정확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비밀 작전은 오랫동안 비밀로 보존되어서 정확하고 세밀한 공식 기록을 찾기가 힘들다.

유엔군이 압록강 넘어 중국 땅에서 출격하는 미그기들을 감시하는 레이다 감시 초소로서 공산군에게는 목의 가시였지만 유엔군에게는 생존 정보의 제공자로서 비할 바 없는 중요성이 있는 비밀기지였다.

조종사들에게 전하는 바에 의하며 이 섬의 비밀 레이다 기지를 운영하는 팀은 호주 군이라고 했다.[영국군을 오인했던 듯]

그날 적의 이색적인 이 폭격기 떼를 남김없이 격멸하기 위해서 미 공군 4 전투 비행단의 334 대대, 335 비행대대,336 비행대대의 출격가능한 모든 F -86 전투기들이 동원되었고 조종사들도 모두 비행단의 최고 기술을 가진 노련한 조종사들이 선발되어 편대장이나 선도기들의 위치에서 비행했다.

이 글의 주인공 데이비드 마셜 소령은 335대대를 지휘하였다. 총 지휘는 비행단장 벤 프레스턴 대령이 맡았다. 기습이야 말로 이 비밀 작전 성공의 열쇠였다.


                           한국 전쟁시 미 공군 활약을 소개하는 대표 사진으로 자주 등장하는 사진. 
                           중앙이 이날 공중전을 총 지휘했던 제 4 비행단장 벤 프레스턴 대령, 왼쪽이
                           마셜 소령. 오른쪽은 적기 14기를 격추한 에이스 였지만 전사했던 죠지 데이비
                           스 소령. 대화도 상공의 공중전이 있기 며칠전 마셜 소령과 데이비스 소령이
                           동시에 에이스[5기 격추 이상 조종사에게 주어지는 칭호]가 된 것을 기념하는 
                           사진.


적 폭격기 떼 격멸을 노리고 출격한 미 공군 4 전투 비행단의 F-86기들을 적을 기만하기 위한 위장된 비행 루트를 택했다.

평소에는 연료를 절약하기 위해서 [압록강까지의 출격거리가 너무 멀어서 압록강 상공에서의 전투 체공시간은 단지 20여분에 지나지 않았다.]김포 기지에서 출격하면 연료를 최소한 소비하는 최단거리를 날아 압록강까지 북상했다가 작전이 끝나면 같은 최단거리의 루트로 돌아왔었다.

비행대형 또한 연료를 많이 소요하는 밀집 대형 방식이 아니라 넓게 산개해서 완만한 상승을 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최단거리가 아닌 한반도 남북을 가로 지르는 백두대간의 동해 쪽에 바짝 붙어서 밀집한 대형으로 저공비행을 하였다. 중국에 설치된 공산측의 레이다에게 탐지 되지 않기 위해서 였다.

조종사들은 적과 조우하기 전까지 절대 무전 침묵을 명령받았다. F86편대들은 은밀하게 백두대간의 동쪽에 낮게 붙어 북쪽으로 날다가 적절한 지점에서 왼쪽 산맥을 넘어 서쪽 압록강 하류 아래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산맥을 넘자마자 F 86 편대는 즉시 급상승해서 넓게 산개한 전투 비행 편대를 형성했다. 공산군 레이다들은 바로 이 시점에 불시에 동쪽에 기습한 미군기들의 존재를 탐지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전투 비행편대로 적진에 육박해간 미군기들 앞에 하늘을 가득채운 북한 공군의 거대한 TU -2 폭격기와 호위하는 LA-9 전투기 편대들이 웅웅거리며 접근하고 있었다.

TU- 2 폭격기는 복좌 전투기로서 후방사수는 조종사와 등을 대고 후방을 향해 앉게 되어 있다.

독일의 메사슈미트 110기나 일본의 돈류 경폭격기와 비슷한 개념으로 설계 된 것들이 LA-9기는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7년에 선을 보인 전투기로서 그 성능이 미군의 P-51 무스탕기 수준이었다. 두 기종(機種)들는 북한 공군이 1953년 극심하게 행했던 남한 야간 폭격에 동원되기도 했다.


                                     소련제 LA-9기, -23mm 기관포 4문 장비 어떤 글에는 이날 전투기를
                                      LA-11기라고 설명되어 있으나 원문대로 LA-9기로 한다. 두기는 거의
                                      같은 전투기다.

프로펠러 공산기들이 하늘 넓게 펼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폭격기들은 하늘 넓게 상하와 좌우로 산개하여 날아오는 중이었다.

호위기인 LA-9기들은 더 높은 상공에서 폭격기들의 앞 뒤를 감싸고 호위 비행했다.

아주 높은 후방 상공에는 공산군의 미그기들이 만드는 수십 개의 비행운이 줄무늬를 수놓고 있었다.

중국 출판물에는 소련 미그기들이 상황이 종료되어 가는 시점에 도착해서 별다르게 활약하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더구나 이들 미그기들은 미국과의 전면전을 두려워해서 참전 사실을 적극 부인했던 스탈린의 지시로 바다 상공을 비행하는 것을 억제했었다.

바다에서 격추되면 미군에 의해서 포로가 되고 이들의 참전 사실이 폭로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이 이날 소련공군이 소극적으로 일관하게 했다고 본다.

그들은 미 공군의 F 86기들이 도전해왔음을 지상 레이다의 연락으로 알고는 있었지만 근거리에 육박한 미 전투기들을 발견하지 못하고 아직 우왕좌왕하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들은 F86기들이 그들과 이미 섞여 들었음을 알고 크게 놀라고는 있었을 것이다.

멀리 작게 보이던 공산군 폭격기 떼는 순식간에게 다가왔다. 적 폭격기들은 3기 1개 편대로서 10개 편대로 구성되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북한 폭격기 떼들은 우리와 조우한 지점에서 약 50마일 거리에 있는 황해의 한 섬[대화도]으로 가는 직선 비행 코스에 있었다.

미 F 86 공격대가 이들 폭격대를 공격 일보 직전에 덜미를 잡은 것은 중요한 정보의 사전 입수와 작전의 절묘한 타이밍이라 하겠다.

공격 전략은 334 대대와 335대대가 정면 공격을 가하고 마셜 소령의 335대대는 고공에서 비행중인
적 미그기가 덮칠 경우를 대비한 엄호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마셜 소령의 편대기들은 급상승해서 후방 상공의 미그기들과 전방의 폭격기들의 중간 상공에 위치를 잡고 미그기 들의 공격에 대비한 경계 비행을 시작했다.

그 고공에서 보는 아래 하늘은 공중 살육전의 대장관이 개시되고 있었다.

아래 하늘은 그저 연달은 적기들의 폭발로 터져 나갈 듯했다. 공산 폭격기들은 F 86기들이 내습하자 급히 간격을 좁히며 밀집 비행편대를 만들었다.

적전투기들의 표적 노출을 최소화 하고 후방석의 기총 화력을 활용하기 위한 폭격기들의 전통 방어 전술이다.

호위하던 프로펠러 전투기 LA-9기중에 쇄도하는 미군 F 86기들을 향하여 용감하게 맞서는 것들도 있었다.

불을 뿜는 공중의 열전 공연이 본격적으로 절정으로 가기 시작했다.

마셜은 바로 아래에서 LA-9기가 공격당해 불을 뿜고 격추 당하고 있음을 보았다. 추락하는 적기들에서 비상 탈출한 조종사들을 매단 낙하산이 추락하는 적기들 사이 여기저기에서 마치 꽃이 지듯이 연출되고 있었다.

고공 후방에서 호위 비행을 하던 몇 기의 미그기들도 이 공중의 격전장을 향하여 급강하했다. 그들은 마셜 소령의 편대와 격돌했다.

그러나 미그기들은 경험 많은 F-86기 조종사들에게 모두 후미를 잡히고 말았다. 쫓고 쫓는 F-86기와 미그 15기들이 엮는 장관이 대 공중전의 무대에 추가로 연출 되었다.


                                                                     미그 -15기


그 장관은 영원히 계속 될 것같이 생각되었지만 미군기들의 은밀한 기습은 불과 몇 십 초 만에 공산 기들을 압도하고 말았다.

마침내 상황을 신속히 끝내버리기로 판단한 비행단장 프레스턴 대령은 마셜소령에게 대대를 이끌고 신속히 급강하해서 남은 적 주력 폭격기를 남김없이 섬멸하라고 명령했다.

마셜 소령은 대대를 이끌고 목표 폭격대를 향하여 급강하했다. 사방에서 있는 공중전하는 LA -9 전투기나 미그 15기 F-86기들 사이를 여기 저기 피하며 비집고 급 강하 하는 것이 마치 교통체증으로
악명 높은 타이 방콕의 거리를 어렵게 운전하는 것 같이 느꼈다.

드디어 마셜 소령의 F 86편대는 가로 막아선 적기들의 틈을 누비고 아직도 온전히 밀집 비행중인 잔존 폭격대의 후방에 따라 붙었다.

폭격 목표인 서해의 섬[대화도]이 불과 몇 마일이 떨어지지 않은 아슬아슬한 지점이었다.

마셜은 적 폭격대를 선도하는 대장기로 보이는 TU-2기를 향하여 육박하자마자 CAL 50기관총 6문의 포문을 열었다.

명중한 적 폭격기는 검은 연기를 뿜어내기 시작했지만 한동안 밀집 편대에서 바로 이탈하지는 않았다.

적 폭격대에 쇄도하여 일격을 가한 그의 대대 전투기들은 모두 일차 기습을 완료하자 즉시 재차의 공격을 위해서 기수를 높이 들고 급상승했다 .

그러나 그를 발견한 한 적 LA-9기가 정면에서 도전해왔다, 마셜의 유능한 윙맨 -동료기 조종사-존 호노커는 마셜이 확인하기도 전에 적기를 즉시 공격해도 좋다고 알려왔다. 즉 그의 후미에 아무런 적기도 따라 붙지 않고 있다는 신호였다.

그는 겁 없이 정면으로 덤벼드는 적 LA-9기를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적기는 명중 몇 초 후에 폭발,불덩이가 되어 추락했다. 격추 된 적기에서 탈출하는 낙하산은 보이지 않았다.

공중전에 돌입하면서 공격대는 질서있은 편대 비행 대형을 유지하지 않고 각자의 전투 상황에 따라 모두 흩어졌다. 그러나 2기 1개 조의 기본 전투대형은 모두 견지하고 있었다.

마셜과 호노커는 다시 적 TU-2 폭격대를 향하여 재차 급강하했다.

이미 공산 폭격기들은 다른 F 86기들에 의해서 상당수가 불을 토하며 지상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얼핏 보니 원래 30기 중에서 대 여섯 기만이 살아남아 목표를 향한 끈질긴 비행을 계속하고 있었다.

마셜는 그중 한 기를 골라 급강하 하며 기총사격을 하였다. 마셜의 집중 사격을 받은 적기는 화재가 발생하고 연기를 끌며 지상으로 추락해 갔다.

공산기 승무원들은 격추되는 폭격기에서 낙하산으로 비상 탈출했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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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위험했던 순간 [ 下 ]
 
 
 


아군은 지난 한달 동안 무려 300여 킬로미터를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퇴하고 있었는데, 특히 12월 5일 평양을 내준 이후부터는 제대로 된 교전도 없이 도망간 다닌 형편이었다. 이어서 서울마저 포기한 아군은 37도선에서 전열을 일단 재정비하고 있었으나 적극적인 항전의지가 없어서 만일 중공군의 공세가 재개된다면 결국 다시 낙동강방어선까지 철수 할 것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아군은 중공군의 공격이 재개되면 또 다시 후퇴할 생각이었다
 

따라서 일선 부대나 장병들은 평택-삼척을 연결하는 북위 37도선 바로 뒤에 있는 금강은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막연한 예상과 달리 불과 50킬로미터만 더 밀린다면 유엔군은 즉시 철군할 예정이었고 그것은 대한민국의 종말과도 같은 의미였다. 결과적으로 1951년 1월 10일을 전후한 시기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한 이래 최대의 위기상황이었다.

 
                     북풍한설을 무릅쓰고 자유를 찾아 떠나는 피난민들
                     자칫하면 이들의 이런 노고도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천만다행히도 중공군은 이러한 유엔군의 절박한 상황을 몰랐고 일단 진격을 서울에서 멈추었다. 서울 점령 후 중공군은 더 이상 공세를 유지할 수 없었을 만큼 힘이 완전히 소진된 상태였는데, 사실 중공군은 보급에 문제가 있어 공세를 일주일이상 지속하기 힘들었던 군대였다. 따라서 5일 정도 적의 공세를 막아낸다면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지만 적의 이러한 치명적인 약점을 아직까지는 몰랐다.

 
                  중공군의 제한적인 보급능력은 상당히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만일 그 당시 상황에서 공세까지는 아니더라도 중공군이 공격하려는 시늉만 하였더라도 아군은 후퇴할 가능성이 컸다. 그랬다면 그것으로 전쟁은 끝이었고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상황이었다. 유엔군은 중공군을 과대평가하여 회피만 하였지만, 막상 적도 아군의 위기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던 것이었다. 결국 이러한 미세한 서로의 판단착오가 위험천만한 순간을 너무 조용하게 넘어가게 만들었다.

 
                   1951년 1월 중순은 서로에 대해 제대로 모르던 시기였다.
 

이처럼 앞으로 어떻게 싸워야할지 막막해 하던 유엔군의 생각과 달리 중공군이 추격을 멈추고 전선이 고요해지자 신임 미 8군사령관으로 부임한 리지웨이(Matthew Ridgway)는 소규모라도 승리를 얻기 위한 국지전인 교전을 구상하였다. 전세를 뒤집겠다는 의도는 전혀 아니었고 중공군 참전이후 계속된 연이은 패배와 그로인한 후퇴로 곤두박질치고 있는 아군의 전투의지를 회복하기 위해서 당장의 작은 승리가 절실히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기회를 만든 신임 미 8군사령관 리지웨이(좌)
 

리지웨이는 소규모의 선공을 결심하고 갑자기 움직임이 둔화 된 중공군을 찾아 나서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1개 전차대대와 포병 및 공병을 증강한 미 25사단 27연대 전투단이 투입되었고 이를 울프하운드(Wolfhound) 작전으로 명명하였다. 하지만 말이 선공이지 수색에 가까운 소극적인 작전이었다. 그런데 혹시나 하는 조바심에서 실시한 작은 작전이었지만 이는 한국전쟁의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울프하운드 작전에 나선 27연대 전투단
 

1월 15일 항공기의 엄호를 받으며 평택-오산을 연결하는 1번 국도를 따라 수원방향으로 개시된 이틀간의 수색작전의 결과는 상당히 고무적이었다. 수원 부근에 조우한 중공군은 상상이상으로 보급수준이 매우 열악하여 가까운 시일 내에 공세를 재개할 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던 것이었다. 이제까지 신비스러운 군대로 여겨졌던 중공군의 취약점을 적나라하게 파악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면서 아군에게 싸워볼만하다는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었다.

 
                            극적으로 대한민국은 되살아 날 수 있었다.
                                       (서울을 재탈환한 국군)
 

공교롭게도 이 작전은 철군을 기정사실화하고 후속대책을 위해 방한한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Lawton Collins) 대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실시되었는데, 이 작전으로 중공군과 그들이 사용한 전술이 낯설었을 뿐이지 결코 미국보다 강하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인지하게 되면서 현 전선에서 반격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벼랑 끝에 몰려있던 대한민국이 극적으로 살아나고 한국전쟁 당시에 최고로 위험했던 시간이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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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위험했던 순간
[ ]



오래 동안
"한국전쟁 당시에 대한민국이 가장 위기였던 순간이 언제였는가?" 한다면 열이면 열 19507월부터 9월 사이에 벌어진 '낙동강방어선전투'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된다. 총 연장 200여 킬로미터의 낙동강방어선의 일각이라도 북한군에게 돌파되어 부산이 점령당한다면 그것으로 전쟁이 끝나는 상황이었으므로 상당한 위기의 순간이었음에는 틀림없다.


                                낙동강방어선전투를 가장 위기의 순간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영천전투에서 파괴된 북한군 T-34)



부산에서 가장 가까웠던 마산은 불과
40여 킬로미터에 불과했고 가장 먼 대구도 100여 킬로미터 남짓하였다. 일단 지도상으로 한반도의 90퍼센트 이상을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국부와 인구의 90퍼센트를 북한이 차지하고 있다는 의미와 같았다. 하지만 낙동강방어선은 시간을 얻기 위해 대신 공간을 내어주고 유엔군 스스로 선택한 방어선이었다.



                               지도상으로 본다면 우리가 가장 밀렸던 시기이기는 하다



개전이후 전력이 압도적이었던 북한군이 쉽게 우회 돌파할 수 있었을 만큼 전선이 연결되어 있지 않아 금강방어선까지는 쉽게 무너져 내렸다
. 결국 아군은 증원군이 도착하여 전력의 균형을 맞추어야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고 따라서 시간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런 복합적인 요인을 고려하여 유엔군은 전략적 방어물이 불비한 호남지역을 과감히 포기하고 낙동강을 교두보 삼아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낙동강방어선은 군사전략상 아군이 선택한 상황이기도하다

                                        (부산항을 통해 속속 증원되는 유엔군)



그리고 예상대로 전선이 촘촘히 연결되자 북한군은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었고 서서히 전력을 증강시킨 아군은 반격에 나설 수 있었다. 경우에 따라 위기의 순간도 다가왔지만
, 사실 19508월이 경과하면서 북한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이것은 지도상으로 낙동강방어선이 위기임에는 맞지만 군사전략상으로는 적의 공세를 막아낼 수 있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선택한 방법이었다는 의미다.



                             낙동강이 철옹성으로 변하자 아군은 반격에 나설 수 있었다

                                            (인천에 상륙하는 미 해병1사단)



그렇다면
6.25전쟁 기간 중 대한민국 최대의 위기는 언제였을까? 지난 1990년대 들어 미국에서 비밀이 해제된 여러 가지 문서가 공개되기 시작하면서 많은 사실이 새로 밝혀졌는데 이중에는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하던 것과 달리 진정으로 위기였던 순간이 따로 있었다. 19511월초, 미국이 전쟁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즉 대한민국을 포기하고 한반도에서 물러날 준비를 하였던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진정한 위기의 순간은 따로 있었다

                                (전쟁 초의 급박한 순간을 웅변하고 있는 폭파된 한강교)



1950
1025일 중공군이 등장한 후 계속된 두 차례의 공세에 놀라 유엔군은 황급히 38선 일대로 도망쳐 내려왔다. 지연전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중공군과의 접촉을 거부하고 일사천리로 달려왔을 만큼 유엔군은 처음 접해본 중공군을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38선 일대에서도 적의 남진이 멈출 가능성은 그리 커 보이지 않았고 미군 당국은 또 다시낙동강까지 물러날 의사를 표시하여 이승만 대통령을 크게 실망시켰을 정도였다.


                                    중공군의 참전이후 전쟁의 양상은 급격해 바뀌었다

                                         (195114일 서울에 진입하는 중공군)



하지만 더 무서운 계획이 준비 중에 있었다
. 1222일 미군 합동참모본부는 "중공의 참전 의도가 북한회복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유엔군을 완전히 몰아내려는 것임이 명백해 진다면, 유엔군은 한반도를 포기하고 가능한 빨리 철수 한다"는 경악할만한 결정을 하였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중공군이 금강까지 진출하면 제주도에 약 이백 여만의 한국인을 소개시켜 망명정부를 수립하고 유엔군은 한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나간다는 계획이었다.


                                   한국을 완전히 포기하고 철군할 계획이 수립되었다

                                             (흥남철수 당시 후퇴하는 유엔군)



더구나 이 계획은 동요를 우려해 한국정부에는 정식통보하지 않아 우리 정부는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었다
. 바로 그 상태에서 중공군의 제3차 공세가 시작되었고 아군은 195114일 서울을 다시 내주고 110일경 평택-삼척을 잇는 37도선까지 후퇴하였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금강까지는 불과 50킬로미터였다. 여기서 조금만 더 후퇴한다면 그것은 대한민국의 종말이었다. 바로 그때 작은 반전의 기회가 찾아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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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LL 그리고 해병대

 
 
금번에 발생한 연평도 포격사건으로 인하여 NLL(북방한계선)이 국가 방위에 엄청난 역할을 하고 있음이 다시 한 번 부각되었다. 지리적 여건으로 말미암아 NLL에 배치된 우리 해병대의 전력이 북한군에 비해 절대 열세인 사실이 우려스럽게 다가왔지만, 그것을 역으로 생각하면 아군의 10배가 넘는 북한 4군단을 DMZ으로 전개되지 못하도록 잡아놓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리적 여건으로 말미암아 NLL의 아군이 열세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대규모의 북한군을 
             잡아놓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림-연합뉴스)

 
서해바다에 이렇게 전략적으로 놀라운 군사분계선이 위치하게 된 것은 백령, 대청, 소청, 연평, 우도로 점점이 흩어져 있는 서해 5도를 휴전당시 아군이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북한이 무효화를 주장하면서 NLL 자체를 인정하려 들지 않지만 막상 NLL을 선포하였을 때 북한은 가만히 있었다. 그러했던 이유는 한마디로 그것이 그들에게 유리하였기 때문이었다.

 
                               서해 최북단 백령도에서 바라본 장산곶 (사진-연합뉴스)
 

1953년 휴전직후 유엔군사령부는 휴전 당시에 별도의 논의가 없었던 해상 분계선과 관련하여 NLL을 선포하고 즉시 북한에 통보하였다. 그것은 NLL을 넘어서 우리 해군이 작전을 펼치지 않겠다는 의미였는데, 북한군이 이곳 아래로 내려오지 말라는 경고의 뜻보다 우리가 이곳을 넘어 북쪽으로 가지 않겠다는 통보에 가까웠다.

 
                        휴전협정 조인 당시의 모습 그런데 해상 경계에 대한 논의가 없었다
 

현재 NLL은 북한의 군사적 도발을 억제하는 최전선이 되었지만, 휴전 당시에는 오히려 북한이 얻는 이익이 컸다. 바로 전쟁 내내 그들을 공포로 몰아넣으며 괴롭혀온 유엔군 해군의 공격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즉 유엔군 해군이 알아서 어느 선 이상으로 올라오지 않겠다고 스스로 선언하였으니 너무 반가웠던 것이었다. 그만큼 그들은 바다를 심정적으로 포기한 상태였다.

 
                        한국전쟁 당시 적진을 향해 날리는 전함 미주리의 가공할 포격 장면
 

NLL 설정 당시에 아군이 장악하고 있는 도서를 연결하여 바다위에 분계선을 긋는 것은 너무 당연하였다. 국경이 아닌 군사분계선은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있는 곳을 연결하는 것이 불문율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NLL을 다행스럽게 생각한 북한은 휴전 직후에 어떠한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그런데 1973년 이후부터 북한은 서해 5도 주변수역을 연해라고 주장하면서 긴장을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제1차 연평해전 당시의 긴박한 모습
 

계속적인 군비증강으로 우리를 앞섰다고 판단한 북한은 이때부터 노골적인 도발야욕을 표출하였다. 당시는 월남전이 격화되어 가고 있었고 더불어 한반도 방위의 한 축을 담당하던 미 7사단이 철수하는 등 주변정세가 좋지 않게 돌아가던 중이었다. 더불어 오일쇼크에 따른 극심한 경제 침체도 우리를 어렵게 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침략의 명분을 잡기위해 NLL에 대한 북한의 트집이 시작되었던 것이었다.

 
                             철수 전 미 제7사단이 주둔하였던 레드크라우드 기지 정문
 

지금은 그때와 안보환경이 많이 바뀌었지만 서해에서 벌어진 여러 차례의 교전이나 연평도 포격처럼 북한이 아직도 NLL에 목을 매는 이유는 NLL의 철폐보다 긴장감을 조성하여 북한내부의 동요를 단속하려는 목적과 동시에 대한민국의 내부분열을 노리기 때문이다. 사실 처음 언급한 것처럼 오래되었지만 생소했던 단어인 NLL이 최근 들어 누구나 알게 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해병대 제6여단과 연평부대의 선배인 독립 41중대를 포함한 도서방어부대기
 

이렇게 현재도 우리 안보를 굳건히 지키는 최전선인 NLL이 성립될 수 있도록 서해 5도를 확보하게 된 것은 전쟁이라는 혼란한 상황 중에도 그 전략적 위치를 미리 인지하고 전광석화 같은 도서 확보작전을 펼쳤던 해병대 독립 41중대를 비롯한 도서방어부대의 분투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곳을 이제는 후배들인 해병대 제6여단과 연평부대가 굳건히 지키고 있다. 변함없는 당신들의 투혼에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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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으로 불참한 제1회 대회
 
 
 
1948년 7월 29일 제2차 대전에서 입은 피해가 완전히 복구되지 않은 영국의 런던에서 제14회 올림픽이 개최되었다. 지난 1936년 제11회 베를린 대회 이후 무려 12년 만에 부활한 평화의 제전이었다. 이 대회는 전후의 시대상을 반영하듯 독일, 일본과 같은 패전국들의 참가가 불허되었던 반면, 우후죽순처럼 탄생한 많은 신생 독립국들이 올림픽 무대에 새롭게 얼굴을 내밀었다.

 
             제14회 런던 올림픽에서 대한민국 최초로 메달을 획득한 김성집 선생
 

그러한 국가들 중에는 대한민국도 있었는데, 엄밀히 말해 대한민국은 폐막식 다음날인 1948년 8월 15일에 정부가 수립하였으므로 공식적으로는 아직 국가의 실체가 존재하기 전이었다. 하지만 그런 형식적인 문제는 차치하고 오랜 압제로부터 해방을 맞은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은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세계무대를 내달렸다.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웠다는 이유만으로 고초를 겪었던 시절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런던 올림픽에서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경기에 임하는 축구 국가대표
 

바로 그 대회에서 열강의 식민지로 수많은 고초를 겪었던 아시아의 신생 독립국들은 지역 내의 단결을 목적으로 하는 별도의 지역제전을 만들기로 의견을 모았다. 인도의 IOC위원인 손디(Guru Dutt Sondhi)가 제창한 의견에 대한민국, 인도, 필리핀, 버마(현 미얀마), 중국(현 대만), 실론(현 스리랑카)의 6개국이 동의하였고 이듬해 창설된 아시안게임연맹(AGF)이 제1회 대회를 1950년 인도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제1회 아시안게임 엠블램

 
이것이 바로 올림픽 중간 해에 4년마다 개최되는 아시안게임(Asian Games)이다. 이렇게 작지만 원대한 꿈을 가지고 시작한 아시안게임은 어느덧 중국의 광저우에서 제16회 대회를 개최하게 되었을 만큼 연륜이 쌓였다. 이번 대회에는 45개국의 9,700여명의 선수들이 참여하여 모두 42개 경기의 476개 세부종목에서 열띤 경쟁을 펼치는 거대한 축제의 장으로 변하였는데, 이것은 종합경기대회로는 올림픽 다음가는 거대한 규모다.

 
       제16회 광저우 아시안게임 개막식에 입장하는 대한민국 선수단 (사진-Mydaily)
 

우리나라 선수단은 대회 초반부터 다양한 종목에서 골고루 선전을 펼치며 국민들을 즐겁게 하여 주고 있다. 중국의 독주가 두드러지지만 대한민국은 아시안게임에서 항상 선두권에 드는 경기력을 유지하고 있는데, 특히 지난 1994년 일본의 히로시마에서 개최 된 제12회 대회를 제외하고는 제10대회 이후 계속하여 전통의 체육 강국인 일본보다 앞선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다.

 
          놀라운 경기력을 선보여 국민에게 기쁨을 선사한 박태환 선수 (사진-Osen)
 

이처럼 항상 대회의 주역으로 커다란 활약을 보여주는 대한민국은 아시안게임의 창설에부터 적극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2번의 대회를 개최(1986년 서울, 2002년 부산)하였고 제17회 차기대회(2014년 인천)도 개최할 예정으로 있는 핵심 중의 핵심국가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그 의의가 컸던 제1회 대회에 우리나라가 참석하지 못한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아시안게임의 주역인 우리나라는 전쟁으로 제1회 대회에 참석할 수 없었다
.
 

원래 제1회 대회는 1950년 인도의 뉴델리에서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준비가 부족하여 1년이 연기된 1951년 3월 4일에 열렸다. 11개에서 온 489명의 선수들이 6개 경기의 57개 세부종목에서 열띤 경쟁을 벌였는데 올해 대회와 비교하면 상당히 소박한 대회였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대회 창설의 주역이었던 대한민국은 전쟁으로 말미암아 참가할 수 없었다. 당시는 1.4후퇴 이후 공방전이 치열하게 벌어졌던 시기라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오늘의 환호와 감격 속에서도 과거의 아픔을 잊지 말아야한다
 

신생독립국으로 지역 내 평화구현에 적극적으로 앞장서려고 하였고 이를 적극 추구하고자 노력한 대한민국이 막상 침략을 당하여 제1회 대회에 불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진정 가슴 아픈 과거라 아니할 수 없다. 어느덧 오랜 시간이 흘러 오늘의 환호와 감격 뒤에서 이런 흔적을 찾기는 힘든 시절이 되었지만 잊지 말고 기억하여야 할 분명한 역사가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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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를 건너 재탄생한 전투기들 [ 下 ]
 
 
                             타향에서 출현한 후계자들
 
 
그런데 한국전쟁 휴전당시에 남북 중 하나를 선택하여 돌아가거나 전향하는 것을 거부하고 인도나 브라질 같은 제3국으로 망명한 많은 전쟁 포로들이 있었던 것처럼,  패전 직후 미국이나 소련이 아닌 중립지역의 국가들로 망명하였던 독일의 엔지니어들이 있었다. 이들은 망명국으로부터 많은 환대를 받으며 독일에서 연구하였던 프로젝트를 계속 수행하였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미국으로 옮겨 온 독일의 V-2 팀
 

때문에 미소의 제1세대 제트전투기들이 등장하였을 때 그 동안 항공산업이 특별히 앞서 있거나 기술적 기반이 충분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던 국가들에서 F-86, MiG-15와 맞먹는 제트기들이 생산되기도 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전쟁당시 중립국이었던 스웨덴의 J-29 Tunnan전투기였다.

 
                    제1세대 전투기로 홀연히 등장한 스웨덴의 J-29 Tunnan
                    독일의 귤이 회수를 건너 오렌지가 된 부인 할 수 없는 증거다
 

그 모양은 오히려 오리지날 베이스로 생각하던 Ta-183의 재현이 아닌가 할 정도로 똑 같았다.  스웨덴이 독자적으로 개발하여 어느 날 뚝딱하고 만들었다고는 절대로 상상 할 수 없을 만큼 닮아 있다.  부인 할 수 없지만 이것은 귤이 발트해라는 회수를 건너 오렌지가 된 경우였다.

 
                영락없이 J-29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Ta-183의 상상도(上)와
                전후 소련에서 노획물을 이용하여 카피 개발한 Ta-183의 희귀한 모습
                독일의 귤이 전후 소련 오렌지의 기반이 되었음을 입증하는 증거다
 

그런데 귤이 강을 건너는 정도가 아니고 대양을 건넌 경우가 있었는데 바로 대서양을, 그것도 밤낯은 물론 계절도 정반대인 곳까지 멀리 이동하여 오렌지가 되었던 경우가 있었다. 남미의 아르헨티나는 전쟁 중 미국의 압력으로 외형적으로는 중립을 유지하였지만 전쟁기간 내내 상당히 친독적인 정책을 유지하였던 국가였다.

 
         친독적이었던 아르헨티나에는 전쟁 후 독일의 많은 전범들이 도피해 있었다
            ( 아르헨티나에서 모사드에 의해 납치 체포 된 아이히만의 재판모습 )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많은 독일 엔지니어들이 아르헨티나로 망명하였고 SS나 게쉬타포처럼 처벌을 두려워한 많은 전범들도 이 대열에 합류 하였다. 그중에는 포커울프의 유명한 엔지니어로 불세출의 전투기인 Fw-190와 Ta-152시리즈를 제작 하였던 탕크(Kurt W. Tank 1898~1983)도 있었다.
 

                                도살새 FW-190의 아버지 쿠르드 탕크
 

그는 1947년 아르헨티나 정부의 지원 하에 코르도바에 옛 포커울프 직원들을 규합하여 종전으로 중단된 제트전투기 연구를 재개하였다. 탕크는 Ta-183를 프로토타입으로 하여 MiG-15에도 채택된 영국의 롤스로이스 Nene II엔진을 장착한 제트전투기를 만들었는데 비행에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아르헨티나 군부와 자리를 함께 하고 있는 탕크
 

이 전투기는 비록 실전에 데뷔한 기록이 없지만 나타난 성능만으로도 F-86이나 MiG-15와 맞먹는 성능을 보여 주었다.  이로써 아르헨티나는 미국, 소련 등과 더불어 초기 제트전투기 개발의 주역으로 당당히 자리매김 할 수 있었다.  그 전투기의 이름이 Pulqui II였다.  귤이 또 하나의 오렌지가 되었던 것이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진화한 또 하나의 오렌지인 Pulqui II
 

회수를 건너온 귤이 퇴보하여 탱자가 될지 아니면 오렌지가 될 지는 결국은 받아들이는 당사자가 하기 나름이고 또한 이러한 사례는 결코 남의 일만이라 할 수는 없다. 비단 무기뿐만 아니라 국가 방위와 관련한 모든 분야가 우리나라에 와서는 오렌지가 될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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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를 건너 재탄생한 전투기들 [ 下 ]
 
 
                             타향에서 출현한 후계자들
 
 
그런데 한국전쟁 휴전당시에 남북 중 하나를 선택하여 돌아가거나 전향하는 것을 거부하고 인도나 브라질 같은 제3국으로 망명한 많은 전쟁 포로들이 있었던 것처럼,  패전 직후 미국이나 소련이 아닌 중립지역의 국가들로 망명하였던 독일의 엔지니어들이 있었다. 이들은 망명국으로부터 많은 환대를 받으며 독일에서 연구하였던 프로젝트를 계속 수행하였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미국으로 옮겨 온 독일의 V-2 팀
 

때문에 미소의 제1세대 제트전투기들이 등장하였을 때 그 동안 항공산업이 특별히 앞서 있거나 기술적 기반이 충분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던 국가들에서 F-86, MiG-15와 맞먹는 제트기들이 생산되기도 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전쟁당시 중립국이었던 스웨덴의 J-29 Tunnan전투기였다.

 
                    제1세대 전투기로 홀연히 등장한 스웨덴의 J-29 Tunnan
                    독일의 귤이 회수를 건너 오렌지가 된 부인 할 수 없는 증거다
 

그 모양은 오히려 오리지날 베이스로 생각하던 Ta-183의 재현이 아닌가 할 정도로 똑 같았다.  스웨덴이 독자적으로 개발하여 어느 날 뚝딱하고 만들었다고는 절대로 상상 할 수 없을 만큼 닮아 있다.  부인 할 수 없지만 이것은 귤이 발트해라는 회수를 건너 오렌지가 된 경우였다.

 
                영락없이 J-29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Ta-183의 상상도(上)와
                전후 소련에서 노획물을 이용하여 카피 개발한 Ta-183의 희귀한 모습
                독일의 귤이 전후 소련 오렌지의 기반이 되었음을 입증하는 증거다
 

그런데 귤이 강을 건너는 정도가 아니고 대양을 건넌 경우가 있었는데 바로 대서양을, 그것도 밤낯은 물론 계절도 정반대인 곳까지 멀리 이동하여 오렌지가 되었던 경우가 있었다. 남미의 아르헨티나는 전쟁 중 미국의 압력으로 외형적으로는 중립을 유지하였지만 전쟁기간 내내 상당히 친독적인 정책을 유지하였던 국가였다.

 
         친독적이었던 아르헨티나에는 전쟁 후 독일의 많은 전범들이 도피해 있었다
            ( 아르헨티나에서 모사드에 의해 납치 체포 된 아이히만의 재판모습 )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많은 독일 엔지니어들이 아르헨티나로 망명하였고 SS나 게쉬타포처럼 처벌을 두려워한 많은 전범들도 이 대열에 합류 하였다. 그중에는 포커울프의 유명한 엔지니어로 불세출의 전투기인 Fw-190와 Ta-152시리즈를 제작 하였던 탕크(Kurt W. Tank 1898~1983)도 있었다.
 

                                도살새 FW-190의 아버지 쿠르드 탕크
 

그는 1947년 아르헨티나 정부의 지원 하에 코르도바에 옛 포커울프 직원들을 규합하여 종전으로 중단된 제트전투기 연구를 재개하였다. 탕크는 Ta-183를 프로토타입으로 하여 MiG-15에도 채택된 영국의 롤스로이스 Nene II엔진을 장착한 제트전투기를 만들었는데 비행에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아르헨티나 군부와 자리를 함께 하고 있는 탕크
 

이 전투기는 비록 실전에 데뷔한 기록이 없지만 나타난 성능만으로도 F-86이나 MiG-15와 맞먹는 성능을 보여 주었다.  이로써 아르헨티나는 미국, 소련 등과 더불어 초기 제트전투기 개발의 주역으로 당당히 자리매김 할 수 있었다.  그 전투기의 이름이 Pulqui II였다.  귤이 또 하나의 오렌지가 되었던 것이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진화한 또 하나의 오렌지인 Pulqui II
 

회수를 건너온 귤이 퇴보하여 탱자가 될지 아니면 오렌지가 될 지는 결국은 받아들이는 당사자가 하기 나름이고 또한 이러한 사례는 결코 남의 일만이라 할 수는 없다. 비단 무기뿐만 아니라 국가 방위와 관련한 모든 분야가 우리나라에 와서는 오렌지가 될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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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의 수퍼캐리어에 대한 이야기
 
 

최고의 전략 병기 중 하나로 평가받는 항공모함은 이미 실전에 등장한지 100년 가까이 되었을 만큼 생각보다는 오래전에 개발된 무기입니다.  한마디로 비행기가 무기로 사용되자마자 항공모함이 등장하였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항공모함은 여러 나라에서 여러 형태로 개발되어 사용하다가 제2차 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등을 거치면서 어느 정도 정형화된 모양으로 개념이 정립되어졌습니다.
 

                               최근 부산에 입항한 조지 워싱턴의 모습 (사진-조선일보)
 

현대 항공모함의 표준처럼 여겨지는 슈퍼캐리어(Super Carrier-초대형 항공모함)은 현재 미국만이 운용 중인데, 지난 7월 21일 한-미 연합훈련을 부산에 입항하여 언론에 공개된 배수량 9만 7천 톤의 핵추진 항공모함 CVN-73 조지 워싱턴 (USS George Washington)호도 거기에 해당됩니다.  최초의 슈퍼캐리어의 영예를 가지고 있는 항공모함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건조에 착수하여 1955년 취역한 CV-59 포레스탈(Forrestal)입니다.

 
                                               최초의 슈퍼캐리어인 포레스탈

 
사실 슈퍼캐리어의 명확한 정의가 내려져 있는 것도 아니지만, 배수량기준으로 적어도 7만 톤이 넘고, 경사활주로(Angled Deck)가 장착된 총 길이 300미터가 넘는 갑판, 4개의 사출기 및 엘리베이터 등을 그 외형적인 특징으로 손꼽을 수 있습니다.  즉, 제트화로 대형화된 60여기 이상의 전술기를 탑재하여 최대 한개 편대를 동시에 이함 시킬 수 있거나 이론상으로 함재기를 동시에 이착함을 동시에 시킬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륙하는 다양한 종류의 함재기들
 

이에 부합된 능력을 처음으로 보유한 항모가 바로 포레스탈인데 이후 등장한 미국의 항모들을 통상적으로 슈퍼캐리어라 지칭합니다.  현재도 이 정도 규모의 항모를 실전 운용하는 나라는 미국밖에는 없는데, 최근 취역 한 CVN-77 부시(George H.W.Bush)호까지 이러한 구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정도로 포레스탈은 기념비적 작품이었습니다.  굳이 차이라면 시대의 기술이 접목된 동력, 아일랜드구조, 엘리베이터 위치, 무장이나 센서류 정도라고나 할 정도입니다.
 

           포레스탈의 개념도인데, 최근 항공모함과 비교하여 엘리베이터 위치 등이 차이가 있습니다.
 
 

포레스탈의 등장이전까지 미국이 운용하였던 최대 규모의 항모가 배수량 5만 톤 정도였던 미드웨이급(Midway Class)이었으며, 현재 미국의 항모 이외에 최대 규모인 러시아의 쿠즈네쵸프(Kuznetsov)나 영국의 도입예정인 CVF급 항모도 이착함 능력 및 배수량 기준으로도 60년 전 등장한 포레스탈에 미치지 못합니다.  단지 배수량으로만 따진다면 이에 필적할 만한 항모는 제2차 대전 당시 일본해군의 시나노 정도 밖에는 없습니다.

 
                  러시아 유일 항공모함인 쿠즈네쵸프는 사출기가 없어 운용능력이 부족합니다.
 

포레스탈이 최초로 제식화한 슈퍼캐리어는 맞지만 서류상으로는 제2차 대전 직후 연구된 CV-58 유나이티드 스태이츠(Uniter States)의 개념이 정립된 최초의 슈퍼캐리어이었습니다.  하지만 장거리 전략폭격기, 핵미사일 등의 이유로 항모무용론이 제기되자 개발이 취소되었는데 그 구조가 현대의 항모와 많은 차이를 보이며 오히려 태평양 전쟁 중 일본 항모와 닮았다는 느낌이 들게 합니다.
 

                                  서류상의 계획되다 폐기된 CV-58 유나이티드 스태이츠 
                                경사활주로가 없는 등 현대의 항공모함과 차이가 많습니다
 

이처럼 용도가 폐기 될 운명에 처했던 슈퍼캐리어가 포레스탈로 부활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제트기 시대의 도래에 따른 함재기의 대형화 때문입니다.  오래 동안 대양의 주인이었던 전함(Battleship)이 그 덩치로 인하여 사라진데 비하여 오히려 항공모함이 덩치를 더 키우게 된 이유가 바로 항모의 존재 이유였던 함재기의 크기가 커졌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퇴역한 F-14함재기의 멋진 이함 모습
                       슈퍼캐리어의 등장으로 고성능 대형 함재가의 운용이 가능해졌습니다
 

이전 항공모함은 크기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여기에 탑재하여 운용할 수 있는 함재기가 공군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성능 상 핸디캡을 가질 수밖에 없었으나 슈퍼캐리어의 등장은 F-4, F-14, FA-18같은 대형 함재기의 운용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영국이 수직이착륙기를 이용한 경항모 시대를 개막하였으나 결국 다시 중형 항모정책으로 회귀한 가장 큰 이유는 수직이착륙기와 경항모 자체가 가질 수 밖에 없는 작전능력의 한계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의 항공모함과 작전 중인 영국의 경항공모함
                                  한눈에 보이는 크기만큼 작전 능력의 차이가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미국도 이러한 공룡을 만들어 놓고 그 능력을 제대로 몰라 여러 가지 실험을 하였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으로 이전의 미드웨이급에서는 상상도 못 할 거대비행체의 이착함실험 등이 그것입니다.  비록 시범적으로 KC-130F 수송기의 이착함에는 성공하였지만 대형 수송기도 할 수는 있다 정도만 증명하였을 뿐 갑판 운영에 있어서의 비효율성 등으로 단지 실험으로만 끝납니다.


                              포레스탈 갑판에서 이함대기 중인 KC-130F의 실험 모습
 

이처럼 새롭게 시도할 연구가 많았을 만큼 슈퍼캐리어는 군사 패러다임의 정립에 많은 변혁을 불러왔고 이때부터 무서운 전략 병기로 본격적으로 진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처럼 새로운 장을 개척한 포레스탈은 1993년 퇴역하여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무기사적 의의는 크고 영원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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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평양을 왕복하는 총기들
 

 
우리나라에서는 수렵용 엽총이나 사격장 용도로 허가를 받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개인이 총기를 보유하는 것이 불법입니다.  때문에 총기와 관련한 사고가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없다고 보아야 할 정도로 적고 이것은 앞으로도 계속하여 지켜져야 할 원칙이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범죄율이 높은 여러 나라에서 법으로 총기 보유를 강제하고 싶어도 어느덧 하나의 문화가 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경찰의 단속에 적발된 불법 사제 총
 

이러한 딜레마를 가지고 가장 크게 체감하고 고민하는 나라가 아마도 미국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서부개척 시대를 거치면서 민병대의 전통을 하나의 자랑이자 역사로 생각하는 미국은 현재도 총기의 보유가 자유롭고 총기의 수집이 하나의 취미로도 정착되었을 정도입니다.  금연자도 담배 수집을 취미로 가질 수 있듯이 총기의 사용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도 총기 컬렉션을 할 만큼 총기와 그와 관련된 문화가 관대한 나라가 바로 미국입니다.

 
                  잦은 총기사고에도 불구하고 총기를 규제하지 못하는 것이 미국의 고민입니다
 

국가의 역사가 짧은 탓도 있겠지만 미국은 유별나게도 지나간 물건에 대한 가치를 상당히 높게 쳐줍니다. 골동품이라기보다는 폐품에 가까운 불과 십여 년 밖에 되지 않은 아주 가까운 과거의 물건도 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다보니 시골 동네에도 골동품가게(Antique Shop)를 쉽게 찾아 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렇다보니 단지 예전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생판 모르는 남의 사진첩도 거래되는 경우까지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골동품 점인데 남의 사진까지 거래가 됩니다
 

그런 점은 총기와 관련하여서도 마찬가지며 실제로 실전경험이 있는 총기를 역사적인 소장품으로 간직하려는 사람이 많은 것이 당연할 정도입니다.  따라서 제2차 대전, 한국전쟁을 거쳐 월남전 초기까지 사용된 M1과 M1카빈소총(이하 카빈)은 상당히 소장가치로써의 인기가 높습니다.  이들 소총은 총 1000만정 가까이 생산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생산국인 미국뿐만 아니라 수많은 여러 나라에서 주력 제식소총으로 사용되었습니다.

 
                                                      M1소총(상)과 카빈
 

하지만 거대한 전쟁에 가장 많이 사용된 주력 소총이었던 관계로 아직까지 제대로 작동하는 M1과 카빈이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전 세계에서 아직까지 보관상태가 양호하여 작동되는 M1과 카빈의 대부분은 우리나라에 있다입니다.  얼마 전까지 예비군용으로 사용되었을 만큼 상당량의 작동한 소총이 보관 중입니다.  그러나 부품조달, 보관비용 등의 여러 문제로 실전용으로 사용하기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예비군 훈련에 사용된 카빈
 

마침 이렇게 우리나라에서도 애물단지가 되어가던 이들 소총들이 미국 호사가들을 위해 다시 바다를 건넜습니다.  지난 2009년 말 예비군용 총기로 보관되어 있던 M1과 카빈 중 상태가 양호한 12만 2천정 (M1 7만5천정, 카빈 3만 5천정)의 소총들이 미국의 민간판매용으로 방출되기로 결정된 것이었습니다.  외화를 획득할 수 있는데다가 구형총기에 대한 재고관리 부담을 줄일 수 있어서 한마디로 일석이조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미국의 민간인이 취미로 사용 중인 M1
 

전술한 것처럼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인마살상용 총기의 개인 보유가 허용이 되지 않기 때문에 M1이나 카빈 같은 고성능소총(총 자체가 구형이지만 총기로써의 성능은 상당히 좋은 편으로 현재도 평가되고 있음)의 국내 소비가 불가능하므로 전량 비용을 들여 자체 폐기하여야 되는데 그런 점에서 볼 때 이러한 대외 재판매 방식은 상당히 좋은 정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6.25전쟁 당시 미 해병대가 사용 중인 카빈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을 구하러 미국에서 한국으로 태평양을 건너왔던 귀중한 무기들이 그동안 소중하게 사용되고 보관되다가 이제는 미국의 호사가들을 만족시켜 주기위해 반대로 태평양을 건너가게 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재미있는 역사적인 사건이 아닌가도 생각됩니다.  아마 이들이 생명체였다면 많은 생각이 들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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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현재 서울 대림미술관(경복궁 역쪽)에서는 6.25전쟁 60주년 특별사진전 '경계에서(On the Line)'가  전시 중입니다.


                                                  <6.25 사진전'경계에서(On the Line)...>


'한국전쟁'에 대한 10가지 이야기들을, 구본창, 주명덕, 강운구, 원성원,백승우 등 대한민국 대표작가 10인의 사진을 통해 바라봅니다.

                                                                     구본창 작가와 함께.


                                                                    강운구 작가...


                                                  어머니 그리고 철모.... 구본창 작가 작품들


                                                                    최광호 작가 작품


7월18일 저도, 국방부 특별도슨트 1일 관리자가 되어 대림미술관을 방문했었드랬지요~
매주 수요일과 일요일 10시30분과 12시에 진행되는 '특별 도슨트(이동욱 일병과 이준기 이병)' 신청은, 선착순 사전예약제(신청 사이트 : http://www.ontheline.co.kr )로 운영되고 있답니다. 국방부 6.25 사진전(6.25~8.20)이 열리고 있는 서울 대림미술관으로 오세요~


                                                           '경계에서' 만의 특별도슨트


6.25 전쟁의 가장 치열한 전적지, 다부동 전투의 참전용사 모습, 철책선 주변풍경,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초상과 전쟁유물 등을 사진예술을 통해 이야기 합니다.
 
더운 여름, 시원한 대림미술관에서 6.25전쟁을 생각해보며 사진예술을 즐겨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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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7일, 국회에서 '전장스트레스 실태와 관리 방안'이라는 주제로 정책세미나가 개최되었습니다. 


국회의원회관 1층 소회의실




'전장스트레스'...

우리는, 평소 무수한 종류의 스트레스를 호소하며 살아갑니다. 집에서, 직장에서, 연인과의 갈등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종종 스트레스를 호소하죠.

'전장스트레스'는 우리에게 낯선 개념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국군이 있는 한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될 개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국회 정책세미나에 참석하신 분들을 소개해 드려야지요?


전직 국방부장관 김장수 의원과 김동성 의원...



국민의례..(세미나를 주최한 김정 의원도 보입니다)



국방부장관의 축사가 있었습니다.



전장스트레스란,
전장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말하죠. 
전장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생명을 위협받고 피로와 고통이 강요되는, 장래를 예견할 수 없어 여러가지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 환경이라 하겠습니다. 




전장스트레스에 따른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는 
전쟁, 교통사고, 폭력 등 강한 충격이 있는 사건을 경험한 후 나타나는 장애로서, 조기발견과 치료가 어렵고 발병시기의 예측도 곤란하며 완치 후엔 재발 가능성이 상존하는 증상이라 합니다.  세부 증상으로는, 외상적 사건 재경험에 따른 고통, 정서적 마비, 죄책감, 거부감, 환각 등을 경험하게 되며, 우울감, 자살기도, 공격성, 파괴적 행동 등을 보이기도 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증상은 대개 3개월 이내에 나타나지만, 길게는 30년 후에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장병들은 예기치 못한 시간과 장소에서 직면할 극한의 상황에 대한 블안감으로 극심한 전장스트레스를 체험하게 됩니다. 전장스트레스는, 전투 피로감 증가와 전투의지 파괴를 야기하며, 종국에는 부대 전체의 사기와 전투력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합니다.

미국은, PTSD 국가연구센터를 운영합니다. PTSD의 사전예방-현장관리-전문치료-사후관리를 거쳐 다시 사전관리로 환류하는 PTSD 체계를 갖추고 있다고 하는데요,
'09년 미국 RAND 연구소 보고서에 따르면, 이라크 등 파병 장병 160만 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 25%의 장병이 정신과적 질병을 앓고 있으며, 그 중 56%는 2가지 이상의 증세 진단을 받았다고 합니다. 전장스트레스에 따른 PTSD와 우울증은, 자살, 살인충동으로 인한 인명손실 등을 초래하여 재정 손실로 따지면 약 4억~6억 달러에 달하였다고 합니다. 
 




일본의 경우도, 지진 등 재해가 많은 나라로서 재난/재해 시스템이 발달되어 있습니다. 일본 '효고 외상성스트레스연구소(HITS)'에서는 '재해지역 정신보건의료 활동지침'을 마련하여 체계적 가이드라인을 제공하고 있으며, 군의 요청이 있을시 직접 군에 방문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한답니다.  


대한민국의 해외파병은, 1965년 10월 청룡부대를 베트남에 파병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1991년 국제연합에 가입 이후 다양한 형태로 국군의 해외파병이 실시되고 있는데, 이는 2010년 1월25일 제정된 '국제연합 평화유지활동 참여에 관한 법률'에 따른 파병입니다.

이렇듯 국군의 해외파병 임무가 다양화되는 가운데 해외파병 장병 등의 외상후 스트레스장애(PTSD) 관리에 관한 논의는 매우 시의적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미나를 통해, 전 국방대교수인 정효현님은 연구논문을 통해 국방부, 국가보훈처, 민간단체의 유기적 협조하에 'PTSD종합관리체계'를 구축하는 방안과 의무사령부 내에 미군과 같은 '정신건강증진지원팀'을 공식 설치하는 방안 등을 제안하였습니다.

계요병원 정신과 전문의 박주언님은, 우리나라는 한국전쟁, 베트남전 참전, 급격한 산업화에 따른 부작용으로 사회적으로 높은 스트레스 환경에 직면해 있어 PTSD에 대한 고위험 사회라고 하면서, 군대에서도 PTSD 발병이 증가할 수 있어 관심과 준비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였습니다. '08년 해당기관 연구팀의 사병, 부사관, 장교를 대상으로한 조사에 따르면, 조사 참여자 대부분(83.1%)이 군내 사고후 정신과적 개입과 PTSD 대응관리체계가 우리 군을 위해 필요하다고 응답하였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위상이 격상됨에 따라 UN 등 국제사회의 파병요구는 증가할 것이며, 현재는 국제적 역할과 국격제고를 위해 해외파병을 적극 수용하는 상황으로, 국가적으로 파병의 목적을 달성하고 군과 부대 및 개인차원에서의 성공적 파병을 위해서는 전문적 전장스트레스 관리가 필수적이라고 합니다. 




우리군은 2010년 7월부터 해외파병 전담부대를 운용할 예정으로, 이는 파병전 전장 스트레스에 대비한 철저한 준비로 인명손실 없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한 방안이며, 이에 따라 개인과 군 , 국가차원에서는 파병의 엄청난 부가가치를 성공적으로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됩니다. 

국방이 진정한 의미의 선진화를 달성하려면, 무기체계 등 물리적 영역의 발전 못지않게 장병 개개인의 정신적 영역관리에 대한 업그레이드도 병행되어야 하리라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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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5월 7일로 국회 파병동의안 의결에 따라 우리군이 아이티로 '단비부대'를 파병한 지 70일이 되었습니다.


단비부대 창설식장에서



'단비부대'의 해외파병은 우리군에게 특히 큰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나라 파병 역사상 가장 신속히 이루어진 파병이자, '받는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나라의 국격을 높이는 파병이라는 점이 바로 그러합니다.

대한민국은, 한국전쟁의 아픔을 딛고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하여 '09년 11월 OECD 개발원조위원회(DAC)에 정식 가입함으로써 사상최초로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현지 어린이에게 간식을 나누어주는 단비부대원



'단비부대'는, 2010년 1월 12일 강한 지진으로 모든 것을 잃은 중앙아메리카 국가 '아이티'의 피해복구 및 재건을 위해 2월 17일에 창설되었고, 2차례의 선발대에 이어 2월 27일 본대를 파병, 3월 15일부터는 피해복구 및 재건활동을 본격화하였습니다.


단비부대원들의 아이티 지진피해 복구 활동



'단비부대'는, 그간 다양한 재건 및 봉사활동을 전개하여 지역주민으로부터 '레오간의 희망'이라는 칭송과, 유엔 아이티 안정화 지원단(MIHUSTAH) 및 타 파병국들로부터 'Thunder ENGCOY(번개처럼 빠른 공병부대)라는 평을 받으며 완벽한 임무수행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합니다.


단비부대원들의 건물 복구 작업



그렇다면, 아이티의 현지상황과 단비부대의 활동여건은 과연 어떨까요?

아이티는 한국군이 처음 파병된 국가로서 우리군에게 그 지형과 기후 등이 매우 생소한 것이 사실입니다. 아이티는 1월 12일 대지진 이후 60여 회의 지진이 꾸준히 관측되고 있으며, 5월 현재 낮 최고기온은 43도를 기록, 하루에도 수십 번씩 불어닥치는 모래바람 등 열악한 기후로 인해 향후에도 현지민들의 피해는 가중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치안상황은 호전되고 있고, 적대세력에 의한 테러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나, 납치와 절도가 발생하는 등 어려운 여건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불어닥치는 모래바람



이러한 열악한 환경 속에서, '단비부대'는 주어진 여건을 극복하고 정서적 안정 속에 임무를 완벽히 수행하고자 장병들의 생일축하 행사, 종교활동, 주말 영화상영 등 장병 정서함양과 스트레스 해소 등을 위해 노력하며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제, 단비부대의 70일간의 일기를 살펴볼까요?

1. 단비부대는 첫번째 임무로, 아이티의 중추신경인 204번 도로를 보수, 정비하고 있습니다.
레오간에서 자크멜에 이르는 204번 도로는, 말하자면 우리나라 경부고속도로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현재 204번 도로는 산사태 등으로 인해 급경사와 낭떠러지가 되어 매우 위험한 상태입니다. 204번 도로 공사 임무는 '10년 3월 31일 유엔총회에서 결의한 38억 달러 규모의 기금으로 집행되며 유엔 아이티 안정화 지원단(MIHUSTAH)에서도 가장 중점 추진하고 있는 중요임무입니다. 현재 공사는 20%의 진척을 보이고 있으며, 7월 말까지 진행 예정입니다.  


204번도로 암석 제거 현장



2. 두번째 임무로, 단비부대는 레오간 시내의 모든 건물 및 학교 잔해를 제거하고 있는데요, 5월 초 완료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본 임무는 현지 학생들의 수업여건 보장을 위한 긴급조치 중 하나랍니다.
 

단비부대원의 레오간 시내 건물잔해 제거 임무수행



3. 세번째 임무로, 단비부대는 심정개발 및 급수지원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아이티 레오간에는 주민을 위한 급수시설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주민들은 정수시설 없이 강물 등을 그대로 마시거나 그 물로 빨래와 목욕 등을 하고 있어 각종 수인성 질병 및 피부병 환자들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에, 단비부대는 레오간 곳곳에 심정을 굴착하여 주민들에게 양질의 물을 공급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수맥탐지기를 이용하여 굴착지점을 찾고 있는 단비부대원들



4. 네번째 임무로, NGO단체 구호활동 지원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 파병 역사상 최초로 외국군의 도움없이 정부(KOICA), 민간NGO단체와 연계하여 구호활동시 모든경호와 지원임무를 담당하는 것입니다. 현지인들은 단비부대원들의 인도주의적이며 적극적인 지원활동과 정성에 감동을 받고 있다고 전합니다.


단비부대원의 NGO연계 지원



5. 다섯번째 임무로, 의료지원 활동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아이티의 의료수준은 정치, 경제적 상황과 맞물려 세계에서 가장 낙후되어 있습니다. 즉, 국가차원의 기본적 예방접종과 건강검진 등 서비스조차도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있으며, 의료물품등이 전량 외국에서 수입되어 의료비는 증가하고 현지인 대부분이 의료서비스를 받기가 매우 어렵다고 합니다.
이에, '단비부대'는 22명(군의관 7명, 수의장교 1명, 간호장교 4명, 의무부사관 1명, 의무병 9명)으로 전문 의료팀을 구성하여, 매일 아침 8시~오후 6시까지 정기진료를 실시하며 야간 응급환자 발생에 대비하여 당직군의관을 운영하는 등 24시간 친절하고 수준높은 의료서비스를 제공하여 레오간 전역에 알려지면서 일일 100명 이상의 환자들이 방문, 70일만에 진료환자 3,500명을 돌파하였다고 합니다. 




아이티 현지인들에 대한 의료지원 활동



6. 그리고, 한,일 연합건설 및 복구활동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단비부대는 일본군 파병부대와도 긴밀히 협조하여 건설 및 복구활동을 추진하고 있어 한일 군사교류의 새 장을 열 것으로 기대되고 있습니다. 양국 파병부대는 월 1회 상호방문을 정례화하고 있으며 앞으로 난민촌에 대한 연합 민사활동(의료지원, 구호품 전달)과 MINUSTAH 주요사업(도로복구, 배수로 정비, 건물 잔해제거) 등을 공동 추진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단비부대장이 일본파병부대장에게 부대 활동사항을 설명하는 모습



이렇듯, 대한민국 단비부대의 인도주의적 재건활동은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모범적 실천사례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파병장병들의 안전에 대해 우리 국민들의 우려가 많습니다. 하지만, 선진국으로 진입할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세계 어려운 이웃들을 돕고 그들로부터 칭찬을 받고있는 우리군을 격려해주는 편이 더욱 낫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이티 현지 어린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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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마스 이야기 [ 3 ]

                  1950년 ( 서울 ) 에피소드


 

AIDS로 유명을 달리 하기는 하였지만, 명화 자이언트(Giants)에 출연 하였던 당대의 미남배우 록 허드슨 (Rock Hudson) 입니다. 지금 봐도 참 잘생겼군요.

 
 

마릴린 먼로만큼은 아니지만 당대의 섹스심벌인 마사 헤이어 (Martha Hyer) 입니다.

 
 

인도 출신으로 말론 브란도의 첫 번째 아내이기도 했던 안나 카슈피 (Anna Kashfi) 입니다. 여담으로 브란도가 바람 핀 것에 분노하여 이혼 법정에서 브란도의 귀 방망이를 날린 에피소드로도 유명합니다. ( 갑자기 골프채로 얻어맞으며 도망 다닌 '숲속의 호랑이'가 생각난다는 -.- ; )

 
 

이분은 한국계인 필립 안 (Philip Ahn) 으로 안창호 선생님의 첫째 아드님이기도 합니다.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동양계 영화인의 대부역할을저 하였는데 참고로 배역 중 " 일본인 악당으로 연기하여 비참하게 최후를 맞는 역할이 제일 재미있다, " 라고 하였습니다. ^^

 
 

위 배우들은 1957년 미국 유니버설 영화사에서 제작한 전송가 (Battle Hymn) 에 같이 출연 하였는데, 전송가는 실존 인물인 딘 헤스 (Dean Hess) 대령의 동명 자서전에 기반을 두고 제작한 영화로 할리우드 영화로는 보기 드물게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외국영화에 우리나라의 이미지가 잘못 묘사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당시에는  더더욱 한국에 대해 알려진 것이 없어 태국식불상이 소품으로 나오는 등 고증이 잘못된 점도 있고, 더구나 전쟁을 배경으로 하다보니 어둡고 비참한 면이 나오는데 이것은 당시의 제작 여건상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영화 속에 묘사된 서울 거리

 
주인공 헤스 (록 허드슨 분) 대령은 제6146기지 부대장으로 1950년 7월 부임하여 최초의 한국공군 전투기조종사들을 훈련시켜 배출한 교관이었으며, 또한 직접 전투기를 몰고 2백50여 차례나 출격하기도 한 용맹한 파이터였습니다. 이러한 전과로 그는 미국 공로훈장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무공훈장도 수여 받았습니다.

 
                                이승만 전대통령으로부터 무공훈장을 수여받은 헤스

 
특히 그가 조종한 F51 무스탕 제18번기는 동체에 信念의 鳥人이 새겨져있어 더욱 유명한데 현재도 한국공군의 모토가 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실질적인 한국공군의 아버지라 불릴 만한 군사적 업적을 이룬 인물입니다. 그렇지만 헤스대령은 한국전쟁 고아들을 전쟁의 위기에서 극적으로 구출하는데 도움을 준 인물로 더욱 유명하고 영화는 이런 내용을 각색한 것입니다.

 
                              한국 공군의 모토가 된 헤스의 18번기 '신념의 조인'

 
전쟁고아들을 돌보던 황온순 (극중 양은순, 안나 카슈피 분) 원불교 보살은 우연한 기회에 제5공군사령부에 군목인 러셀 브레이즈델 (Rusell Blaisdell) 중령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한국보육원 설립자인 황온순 보살은 한국전쟁 고아들의 어머니이시고 이를 도운 브레이즈델 목사는 한국전쟁의 쉰들러로 추앙받는 분입니다.)

 
                     2001년 한국보육원에서 재회 한 황온순 보살과 브레이즈델 목사

 
그러던 중 중공군의 개입으로 1950년 12월 아군의 후퇴와 서울소개가 결정되자 황온순 보살과 브레이즈델 목사는 고아들을 인천에서 배편으로 피난시키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선편이 부족하여 일부 어린이만 배를 탈 수 있었고 907명의 어린이가 적진에 고립될 위기에 빠졌습니다.

 
                                         수송기에서 내리는 전쟁고아들
                                 (사진은 전송가 촬영을 위해 미국 방문 중의 모습)

 
바로 그때 이런 사정을 접한 헤스 대령이 16기의 C-54수송기를 확보하여 김포공항에서 제주도로 고아들을 공수하는 계획을 실시하였습니다. 중공군이 서울에 입성하기 바로 전인 1950년 12월 20일, 모든 전쟁고아들이 안전하게 제주도로 탈출할 수 있었고 그해 크리스마스를 안전하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작전명 Kiddy Car Airlift로 미군 전사에도 기록된 보기 드문 인도주의 작전이었습니다.

 
                                           황온순 보살과 헤스 대령
 

이러한 내용을 극화 한 것이 바로 영화 전송가인데 영화 속에서 당대 미남 배우 록 허드슨이 어눌한 한국말로 인사하는 것과 은순(황온순 보살)역을 열연 하였던 안나 카슈피 역시 우리말로 전쟁고아들에게 노래를 불러 주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또 영화 속에 고아로 출연한 어린이들 대부분이 영화 촬영을 위해 직접 미국에까지 갔던 한국보육원의 전쟁고아들이었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황온순 보살과 고아들
 

당시의 전쟁고아들 대부분이 지금은 70세 가까이 되거나 고인이 되셨을 만큼 오래전의 일이 되었지만,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 전쟁의 폐허 속에 내버려졌던 수많은 고아들이 급박한 상황에서도 안전한 곳으로 극적으로 이동하여 따듯한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는 기적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은 결코 영화 속의 모습이 아니라 바로 지금 살고 있는 이 땅에서 벌어졌던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의 가슴 아픈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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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특공대의 잊혀진 비사 (秘史)
 
 

온산이 울긋불긋 불타오르는 늦가을은 산행을 즐기는데 대단히 좋은 계절입니다.  일주일에 산을 한번 정도 가는 인구가 천만 명을 넘었다는 최근의 통계처럼 등산은 온 국민의 스포츠이자 오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즐기면서 산을 올라가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분명히 차이가 있는데 전쟁 중 목숨을 걸고 산에 올라가는 것은 고난의 행로와 다름없습니다.  이와 관련한 에피소드입니다.
 

               이 화려한 가을이 완전히 지나기 전에 산에 한번 다녀오는 것은 어떨지요 ?
 

전쟁의 승패에 있어 병참의 중요성은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한국전쟁 또한 군수지원의 중요성이 입증된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중공이나 소련과 국경을 맞이하고 있는 북한에 비해서 해상을 통한 군수물자를 보급 받아야 하였던 우리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병참요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UN군이 제해권을 확보한 덕분에 안전하게 해상 보급이 이루어 질수 있었고 이것은 고난의 시기에 대한민국을 지탱하여 주었던 힘이기도 하였습니다.
 

                       화물을 열심히 하역하는 한국전 당시 인천항의 모습입니다.
                        UN 군의 해상보급은 자유를 수호하는 원동력이었습니다.
 

한반도는 산악이 70% 이상을 차지하는 지역이라 최전선의 군수지원에 있어서 상당히 불리한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지금은 사통팔달의 도로가 많이 개통되어 평시의 군수지원 환경은 많이 좋아 졌다고 합니다만 동부전선의 산악지역은 아직까지도 폭설이라도 한번 내리면 병참선이 차단 될 정도의 악조건입니다.

 
                    한국전은 초기를 제외하고 대부분 산악전으로 일관하였습니다.
 

하물며 지금도 그러한데 사회적 인프라가 거의 없다시피 한 한국전 당시는 더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특히 1951년 말부터 휴전까지 진행된 참호전은 대부분 고지를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었는데 이러한 고지에 주둔한 제 부대에 대한 병참지원은 상당히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산악전을 지원하기 위한 민간인 부대의 병참지원 모습입니다
.
 

그래서 UN군은 보급품을 운반하는데 일반 노무자들을 활용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민간에게 아웃소싱을 한 것이었는데 전쟁 발발 직후부터 국군을 지원하기 위해 조직된 소위 보국대를 비롯하여 유엔군 참전 이후 만들어진 민간 운반단 ( CTC - Civilian Transport Corps ), 한국근무단 ( 일명 노무단 ), 부두하역단 등이 다양한 형태로 지원 활동을 하였습니다.

 
                  포탄 같은 중량물도 이 분들의 보급 수송에 절대 의존하였습니다.
 

그중 최전선의 산악 고지전을 치르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속칭 지게부대라고 불린 노무대가 있었습니다.  이 노무대는 전쟁 동안 산세가 험한 지역에 위치한 부대에게 포탄, 식량 등의 보급품을 지게에 지고 운반하여 주었는데 대부분이 당장의 호구지책이 어려웠던 월남해 내려 온 청장년들이나 피난민들이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징집으로 충당되기도 하였습니다.
 

                    대오를 갖추어 정렬한 지원단 (上) 과 화물 적재 후의 모습
 

전쟁 당시 노무자들의 규모는 육군 사단에 편성되어 전투근무지원을 직접 수행한 노무단원 9만여 명을 포함하여 약 30여만 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추산되며 공식 기록에 의하면 전쟁 시 임무를 수행하다가 희생당한 노무자들의 규모가 전사 2,064명, 실종 2,448명, 부상 4,282명 등으로 집계하고 있으나, 많은 수의 노무자들이 공식적으로 등록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제 규모는 그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되고 있습니다.
 

                              미군들은 이 분들을  A특공대라고 불렀습니다.
 

노무자들의 지원 수단은 주로 지게였는데 그 모습이 알파벳 A와 흡사하다고 하여 통상 근무단을 ' A Frame Army ' 즉, 지게부대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미 8군 사령관이었던 밴플리트 ( James Van Fleet 1892~1992 ) 장군은 회고록에서 " 만일 노무자들이 없었다면 최소한 10만 명 정도의 미군병력을 추가로 파병했어야 했을 것이다. " 고 이들의 노고를 극찬하였습니다.
 

           이 분들의 노고는 조국을 수호하는 원동력 이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처럼 A 특공대는 戰史의 전면에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아군의 승리를 위하여 묵묵히 맞은바 임무를 다한 최고의 정예 부대였습니다.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음지에서 묵묵히 힘써 주신 A 특공대 선배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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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기념관에서는 6.25전쟁 발발 59주년을 맞아 '나라사랑 함께'라는 주제로 흥미로운 전시회들이 준비 및 기획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눈에 띄는 전시회로는 역사를 바꾼 권총, 영화 속의 권총, 국산 권총, 희귀 권총 등 128점과 관련 영상이 준비되어 있는 "이야기가 있는 권총" 특별기획전으로, 강군이 간략히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이야기가 있는 권총" 특별기획전은 6월 25일 ~9월 15일까지 전쟁기념관 2층 전시실(회랑)에서 열리는 행사로 우리나라 최초의 권총이라 할 수 있는 조선시대 세총통을 비롯해 14세기 초기 권총에서부터 화승식 권총, 수석식 권총, 뇌관식 권총 등 근대 권총과 콜트, 베레타, 브라우닝 등 현대식 권총, K-5 국산 권총 등이 총망라되어, 권총의 발달사를 한 눈에 이해할 수 좋은 기회일것 같습니다. 



영화 ‘석양의 무법자’ 속 권총 (미국․22구경)

김구선생 암살 권총 모델 (미국․45구경)




  특히 1894년 김옥균 암살 권총,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사용했던 권총, 1914년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사라예보 사건의 권총, 1949년 김구 선생 암살 권총 등 역사의 큰 줄기를 바꾼 권총 등을 실제 모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영화 007 시리즈, 석양의 무법자, 쉬리, 투갑스 등에 등장한 권총 모델도 영화와 관련된 이야기와 함께 공개돼 관람객들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즐것으로 보여집니다. 금장 권총, 19세기에 사용했던 호신용 권총 등 희귀 권총도 다수 공개될 예정이라고 하니, 밀리터리 매니아들의 호기심 또한 충족시켜줄 수 있을걸로 기대되네요.

 


호신용 권총 (데린져)

금장 권총 (독일 PPK)




  전쟁기념관 상설 전시장 같은 경우는, 입장료가 3000원~1000원이 책정되어 있으나 6월 25일은 전쟁기념관 전체 상설 전시장이 무료로 개방될 예정이므로, 관심있는 분들에겐 좋은기회가 될것 같습니다. 어린이 및 밀리터리 매니아 관람객들에 대한 서비스로 시뮬레이션으로 권총을 발사하고, 권총을 분해하고 결합하는 전과정을 체험하는 행사도 마련된다고 하니 만족도 또한 높을것으로 예상되네요. 월요일은 휴관일이니 꼭 기억하시길^^* 
(삼각지역 1번, 11번,12번 출구로 나오시면 전쟁기념관이 보이실거에요.)

  
  피에슈(P.
S)
  
 
역사적 전쟁의 교훈과 수준 높은 문화행사를 즐길 수 있는 전쟁기념관은 올해 개관 15주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대표 박물관에서 세계적 군사박물관으로 거듭난 전쟁기념관의 다채로운 모습들과 발전상에 대해 가족과 함께 연인과 친구와 함께 꼭 들러보시길 강군이 추천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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