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송가[Battle Hymn] 헤스 대령의 숨겨진 전공  -제2편-


 

이것은 마치 서부영화에서 인디언들에게 둘러싸인 포장마차들이 기병대의 구원을 기다리는 것과 흡사했다.


영화에서는 으레 기병대가 극적으로 제 시간에 나타나기 마련이었다.
두 곳에 교신이 된 나는 공격대가 오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미 공군의 항공 공격으로 파괴 된 북한군 T-34


공산군 기계화 부대는 어차피 길에 갇혀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였기 때문이었다. 30분쯤 뒤에 우리 대구 주둔 Bout -1 부대 소속 미군 조종사들이 모는 무스탕 기들이 나타났다.


나는 그들에게 적군의 상공을 선회하면서 우리가 했던대로 
계속 적 부대가 전진을 못하도록 하고 있으라고 일러놓았다.


나와 팀버레이크 중위는 대구 기지로 돌아가 연료와 탄약을
보충하고 다시 현장에 나가 일본에서 날아 올 공격대를 기다렸다.


드디어 일본 기지에서 F-82, F-80, B-26 등이 대거 출동했다.
이들 공격대는 도착과 동시 도로에 늘어선 기계화 부대를 공격했다. 각종 포탄과 기총탄들이 길게 늘어선 기계화 부대에 죽음의 불벼락을 안겼다.


                   한국전 최초로 적기를 격추했던 F-82기, 무스탕. 두 기를 쌍둥이로 합성한 기체를 가지고 있다.


나는 그 날 현장에 3회 출격하였는데 마지막 출격 때 보니 그 산등성이
길에 앞 뒤가 막혀서 늘어섰던 북한군 전차와 차량들이 모두 불타고 있었다.


마침 그 때는 바람도 불지 않아 연기가 수마일 상공으로 치솟고 있었다.
어두워지기 시작할 때는 적군의 기계화 부대 전체가 파괴되고 말았다.


미 극동 사령관 파트릿지 대장은 이날의 성공적인 공습 작전이
위기의 한국 전쟁 초반 전황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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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공군의 무스탕 기 - 헤스 대령이나 다른 교관들도 태극 마크를 단 무스탕기로 출격했었다.

이 공격으로 북한군 105 전차 사단 전차 38량, 자주포 7문, 그리고 트럭 117대가 파괴되고 북한군 다수가 섬멸당했다.

개전이래 유엔군의 항공 공격을 자주 받았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대규모 주간 행군을 했던 북한군은 대 타격을 받은 이 공습 이후 기계화 부대는 철저히 밤에만 기동하는 행군 방법으로 작전을 바꾸었다. 하지만 기계화 부대의 야간 기동이나 전투는 그 효율성을 크게 약화시키고
전진을 대폭 느리게 만든다.


앞에서 말했듯이 기계화 부대는 일본에서 출격했던 
대규모의 항공력 없이는 전부 섬멸하기가 힘들 정도의 대부대였었다.


헤스 대령이 단 두 기의 전투기만으로 출격했지만 좁은 국도에서
앞과 뒤의 차량들을 공격해서 이들을 가두어놓고 일본으로부터 대 규모 항공력이 출격할 때까지 장시간 잡아 놓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기계화 부대는 신속하게 기동해서 촌락이나 조치원 같은 도시로 흩어져 은신처로 피신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점으로 보아 단 두 기로 출격했었던 헤스 대령의 대담하고 지혜있는 대처가 큰 역할을 했다고 보아야 한다.


긴 도로에서 적 기계화 부대가 섬멸된 사례가 또 있다. 한달 뒤인 1950년 8월11일
경남 고성 사천 도로에서 105 전차 사단의 83 기계화 연대가 진격하는 미 해병을 피하여 도주하다가 미 해병 F-4U 전투기들에게 섬멸되었는데 함께 행군 중이던 대 병력도 함께 섬멸되었다. 

고성의 공습에서 83 기계화 연대의 차량 45량과
모터 사이클 55량이 박살나고 북한군 200명이 사살되었는데 평택에서는 덤벼들다가 두들겨 맞은 것이고 고성에서는 도망가다가 두들겨 맞았다는 차이가 있다.

울프 독이 항상  하는 이야기지만 한국 기계화 부대는 도로를 따라 공격과 기동을 해야 하는 근본적 취약점이 있다는
것을 이 북한 기계화 부대의 섬멸이 간접적으로 잘 보여준다.


                                                   대전 시가로 행진해 들어오는 105 여단 부대.
운좋게도 평택의 대폭격에서
섬멸된 부대와 따로 기동했었기 때문에 살아 남은 부대였다. 모터 싸이클을 모는 북한군은 모택동 군에서 넘어온 중국 동포들로 구성된 정예 부대였었다. 그러나 이 부대는 경남 고성에서 미 해병의 진격을 피해 도주하다가 모두 섬멸되고 말았다.


역시 같은 맥락이지만 산길에 기계화 부대를 몰아 넣지 말라는 한국 전쟁의 교훈을 북한 측이 여실히 보여준 사례이기도 하다.

평북 운산의 1 기병사단이나 장진호반의 미 7 사단 32 연대, 서울 북방 고양의 해피 밸리 전투에서의 영국군 얼스터 연대의 경우 중공군이 선두와 후미를 대거 인력으로 막은 다음 공격해서 섬멸당했는데 북한군은 단 두대의 무스탕 전투기에
앞뒤를 막히고 섬멸당한 것이 특색이다.


1951년 1월 3-4일 야간에 있었던 해피 밸리 전투를 아는 분은 극 소수였다. 좁은 논길에서  방망이 수류탄만으로 무장한 중공군에 의해 파괴된 얼스터 연대 배속의 쿠퍼 부대 크롬웰 전차 중 하나. 쿠퍼 부대 14량 전차 모두 수류탄에 궤도가 파괴 되어서 기동 불능상태로 포기되었다.



만약에 이 기계화 부대가 미 공군의 맹습에 섬멸당하지
않고 살아남았더라면 전황이 어떻게 흘러갔을까 한번 생각해보자.


북한 기계화 부대가 그대로 남하했더라면 대전에서 비록 대패했겠지만
7월 20일까지 버티었던 미 24사단의 지연전은 불가능했을 것이고 북한군은 그 보다 훨씬 먼저 대전을 함락하고 남진했을 것이다.



                            1950년 7월 20일 24사단장 딘 소장이 로케트 포로 직접 파괴한 T-34탱크
      딘 소장은 워커 중장으로 부터 7월 20일 까지 버티라는 명령을 받고있었고 부대 붕괴를 무릅쓰고 이를 수행했다.


최악의 경우 일본에서 급파된 미 1 기병사단이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 여유를
박탈하고 낙동강까지 몰아 붙였을지도 모른다.


가능성 높았던 다른 시나리오도 있을 수 있다.
앞에서 말한 바 대로 경부 축선의 빠른 돌파 가능성도 있겠지만, 차량이나 전차 등에서 여유가 있었던 105 전차 사단이 호남 지방으로 우회했었던 북한군 6사단에 차량과 전차등을 배속시켜 이들의 신속한 이동을 크게 도왔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한국전쟁 중 북한군 최대 명장이라는 방호산이 지휘했던 북한군 6사단은
모택동 군 출신으로 구성된 정예 부대로서 유엔군이 눈치채기 전 호남 지방을 급속히 우회해서 낙동강 교두보의 서쪽에 나타나 측면을 크게 위협했었다.


북한군은 뒤 늦게야 하동 전투에서 미군 350명을 사살한
이 부대에 105 전차 여단 소속 83 기계화 연대를 급파했었다. 시간적으로 상당히 늦은 배치였다. 이 연대가 앞에서 소개한 고성 사천 가도에서 미 해병대의 콜세어 부대에게 전멸당한 부대다.


방호산의 6사단은 북한군 부대 중에 유일하게 남해안에
도달한 부대이기도 했지만 인천 상륙 후 낙동강에 전개된 북한군 사단들이 모두 붕괴 분산 도주했는데도 건재 순을 유지하고서 태백산을 따라
북한 지역 집결지로 무사히 도주한 유일한 부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방호산은 전후 1954년 김일성에게 숙청당했다.


북한군 6사단은 순전히 도보로만 이런 신속한 측면 기동을 했었다. 포차(砲車)가 피스톤 수송( 차량이나 선박 지점왕복하면서 사람이나 물건계속 태워 나르거나 실어 나르는 .)을 해서 기동을 했었다지만 거의 도보로만 기동을 했었다.

만약에 김일성이 이들 사단의 가능성을 내다보고 평택 남방에서 파괴된 탱크나 트럭 중 일부라도 지원해주었더라면 휠씬 빠른 속도로 급습해와 낙동강 방어선의 측면이 빨리 붕괴되고 유엔군은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미군의 폭격으로 불타는 북한 유조차


또 평택에서의 폭격은 북한군의
기본 전력을 군수 보급면에서도 크게 약화시켰다는 점에서 그 성과를 평가할 수 있다.


개전 초 소련은 장비 공급에 늦장을 부려서 북한군은
가지고 있는 장비가 파괴되면 보충하기가 쉽지 않았었다.


1950년 7월 2일 충북 충주시 외곽 동락리에서 국군 6사단 7연대에게
전멸당한 북한군 15사단 48연대는 800명의 전사자를 내고 트럭도 60 대나 빼앗겼다. 그런데 이 트럭이 이 연대가 가진 전체 자산이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전투가 있었다.

북한군 연대장
김치구가 지휘하는 이 연대는 다시 남하하다가 경북 상주 화령장에서 국군 17연대에게 기습당해 전멸의
대패를 당해야했다.


특기할 것은 김치구 중좌가 지휘하는 이 연대는 동락리에서
손실당한 차량을 보충하지 못하고 소가 끄는 달구지로서 군수품을 운반하며 남하했었다는 사실이다.

두 번에 걸쳐 치뤼진 화령장 전투에서 김치구의 연대는 단 한량의 차량도 보유하지 않아 국군에게 노획당한 것이 없었다. 동락리에서 대패하고 장비 보충없이 급히 손실 인원만 보충한 채 남진했다는
이야기다.


이 사실은 전투
에서 손실당한 장비를 비교적 수월하게 미군으로부터 보충 받았던 국군과 대비된다.


북한군은 헤스가 주도했던 공습으로 손실당한 장비들을
후의 낙동강 방어전에서도 결코 보충할 수 없었다. 이 공습으로 북한은 전투력의 약화라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던 것이다.


                         금강 방어선에서의 미군 포병 -암담한 시기에 북한군 기계화 부대가 섬멸되었다.


미국이나 한국에서 작전의 명칭조차 없이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
이 폭격 작전에 명칭만이라도 부여해서 한국전쟁의 한 페이지에 의미 있게 평가되었으면 한다.


헤스 대령은 1951년 250회 출격을 끝으로
한국 근무를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헤스 대령과 원장 황온순 여사와 고아.  황온순 여사는 후란체스카 여사가 추천했다고 한다.


그의 고아 공수작전이 크게 보도되자 그의 자서전 집필 의뢰가
쇄도해서 그는 전송가[Battle hymn]라는 제목의 책을 집필해서 출판했다.


그 책이 인기를 끌자 영화계에서도 의뢰가 와 1957년
전송가는 당시 최고 스타 록 허드슨 주연으로 영화화 되었다.


헤스 대령은 자서전과 영화에서 받은 인세를 한 푼도 쓰지
않고 자신이 설립하고 황온순 여사가 책임자로 있던 고아원에 모두 기부하였다.


이 고아원은 후에 서울로 이전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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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영웅, 헥터 카페라타 일병이 들려 주는
"장진호 덕동 고개 전투" 이야기..

                             

 
작년 11월 말 서울 전쟁기념관에서 장진호 전투에 참전했던 미국 노병들을 모시고 기념식이 있었다. 60년 전 눈보라치는 장진호에서 혈투와 혈투를 되풀이 하며 겹겹이 둘러싼 중공군 9병단 6만 명의 포위망을 뚫고 흥남으로 탈출했던 미 해병 1사단 장병들과 참전 해공군 용사들이 지금은 팔순 어르신들이 되어 감회어린 표정으로 자기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던 옛 국가를 다시 방문했다.
 
 
                                                                     장진호 전장


한국 측에서는 김 태영 국방부 장관과 미국 측에서는 샤프 유엔군사령관 등이 참석해서 이들 노병을 반겼다. 기념식에 이어 오찬이 있었다. 나는 장진호 최대의 혈전이었고 미 최고 무공훈장 수여자를세 명이나 배출한 덕동 고개 전투의 F 중대 지휘관 바버 대위를 만날 수 있을까하는 기대를 하고 F중대 용사를 찾았더니 바버 대위는 오지 않았지만 그 분만큼 유명하고 역시 같은 명예 훈장 수여자인 카페라타 일병을 만날 수가 있었다. 
※명예훈장[MEDAL OF HONOR]은 한국의 태극 무공훈장과 같은 미 최고 무공훈장이다. 나는 나중에야 바버 대위가 2002년 골수암으로 사망했음을 알게 되었다.※
 
 
                                                                       
미 명예훈장
                                                               [MEDAL OF HONOR]




넓은 만찬장 구석 테이블에 앉아 있는 그 분을 뵈었을 때 마침 미 육군 소장이 찾아와서 정중히 인사를 드리고 있었다. 알고 보니 샤프 사령관 이하 여러 명의 장군들이이 전쟁 영웅을 찾아뵙고 문안 인사를드렸다고 한다.
 
60년이나 지난 전투의 영웅인데도 노영웅 모시기가 각별하다. 플로리다 주 케이프 코랄에는 그의 이름을 딴 초등학교도 있고 몬트빌이라는 작은 도시에는 그의 이름을 명명한 도로도 있다. 부러운 영웅 섬기기 문화라고 하겠다,
 
 
                                       헥터 카페레타 초등학교를 방문한 카페라타씨



생각지도 않은 한국인의 방문을 받자 카페라타씨는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곧 명예훈장을 꺼내 목에 걸고 포즈를 취해주었다.
 
 
                                                                      헥터 카페라타씨
                                            이날 필자도 말로만 듣던
미 명예훈장을 처음 보았다.


여기서 그가 싸웠던 1950년 11월 28일 덕동 고개의 방어전을 소개한다.

장진호 호반 산길로 접어든 해병들은 한반도를 가로질러 가 평안북도에서 진격하고 있던 미 1 기병사단과 링크하는 작전을 전개했었다.
 
이를 눈치 챈 모 택동은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9병단장 송시륜에게 병단 전 병력[6만명]을 동원해서 장진호반의 해병들을 섬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중공군이 진격하는 해병들을 포위하는 매복을 완료했을 당시 장진호 좌측 유담리 지역에 미 5연대와 7연대 2개 연대가 있었고, 후방 하갈우리에 해병 1사단 본부가, 그 후방 고토리에 해병 11연대가 있었다.
 
중공군이 엄청난 병력으로 매복하고 있음을 알게 된 미 해병사단 본부는 유담리와 장진호 건너 신흥리의 병력을 모두 사단 본부가 있는 후방 하갈우리로 철수시킬 계획을 세웠다.

  
                                                       장진호 전투 상황도 -덕동 고개도 보인다.



이 계획에 따라 장진호 좌측의 두 개 해병 연대의 철수를 엄호하기 위해서 유담리와 하갈우리와 덕동 고개에 해병 7사단 5연대 2대대의 소속의 F 중대를 파견하였다.  F 중대의 중대장은 유황도 참전 경험이 있던 베테랑 윌리엄 바버 대위였다.
 
 
 
                                                                  
                                                     덕동 고개 F 중대장 윌리엄 바버 대위


두 연대의 철수와 동시에 F 중대도 철수할 계획이었으니 원래 계획대로 하면 하루나 이틀만 고지에 머물러 있으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날 밤 중공군은 유담리에 거친 공격을 개시하였다. F 중대는 거대한 사람의 바다에 떠있는 고도와 같은 신세가 되었다.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F 중대는 11월 27일부터 12월 1일까지 야간마다 파도처럼 가해지는 4,000여명의 중공군 공격을 단 200여명의 병력으로 장렬한 전투를 거듭해서 격퇴한 위대한 전공을 미 해병대 전사에 남겼다. 전투는 주야 닷새간이나 지속되었다.
 
F 중대에 전사 26명, 실종자 3명, 부상 118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덕동 고개에 F 중대가 배치되었을 때는 237명이었으나 닷새 뒤 해병 7연대 2대대가 F 중대를 구원했을 때는 단지 86명만이 전투력을 견지 하고 있었다. 이 고개를 공격했던 중공군 59사단은 2,000명의사상자를 냈다.
 
카페라타 일병이 문자 그대로 귀신 같은 투혼을 발휘하여 싸웠던 덕동 고개 전투를 현장에서 부터 살펴보자. 마틴 러스의 “브레이크 아웃[임 상균 옮김]”에  카페라타 일병의 활약이 잘 소개되어 있다.
 
덕동 고개는 유담리-하갈우리를 연결하는 중요한 도로가 통과하는 요지(要地)였다. 고개 옆에 높은 덕동산이 있어서 여기서 갈라져 나온한 민둥산 줄기가 도로로 뻗어있었다.
 
이 산줄기는 능선 좌우 사면이 경사가 급한 미니 산맥이었다. 이 이름없는 민둥산 산줄기는 나중에 이곳에서 장진호 최대의 공훈을 세운 F-중대의 이름을 따서 F0X HILL이라는 별칭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F 중대가 고개에 도착해서 배치를 한 날은 1950년 11월 27일 오후였다. 바버 대위는 덕동 고개를 방어하기 위해서 덕동 고개로 뻗어 나온 이 작은 민둥산 산맥을 중요한 방어 거점으로 판단하였다.
 
도로로 뻗은 산줄기의 능선 좌우에 각각 일개 소대를 배치하고 세로로 배치한 두 부대를 연결하듯이 한 개 소대를 상부에 가로로 배치해서 덕동 고개 제압을 위한 적의 공격을 분쇄하기로 하였다. 로버트 C.맥카시 중위 소대가 중대 중앙을, 그리고 존 M. 던 중위의 소대가 오른 쪽을, 앨모 G.피터슨 중위가 왼 쪽을 각각 담당하였다.
 
즉, 도로를 향하여 입을 벌린 U자형 진지를 구성한 것이다. 중대 방어선이 입을 벌린 도로 옆에 두 채의 빈집이 있었다. 바버 대위는 이 집을 중대 본부로 쓰기로 하였다.
 
중대가 하갈우리에서 덕동 고개로 이동하고 배치가 끝나자, 바버 대위는 전 중대원들에게 호를 파게 했다. 이 선견지명이 F 중대를 구하게 된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다음날 철수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호를 파라고 하니 중대원들은 불평을 했지만 바버 대위는 용의주도하게 호를 파고 치밀한 화력 계획을 세웠다.
 
그 날 밤 유담리에 먼저 중공군의 대공세가 있었다. 덕동 고개에서도 유담리의 하늘이 붉게 물드는 것과 폭발음이 들리는 것을 감지할 수가 있었다.
 
 
 
                                    유담리 전투 -기와집의 5 연대 본부를 습격했다가 실패한 중공군.



F 중대원들은 경계와 취침으로 불안한 하룻밤을 보냈다. F 중대에 대한 중공군 59사단의 파도 같은 공격은 다음날 28일 새벽 오전4시, 영하 26도의 얼어 붙은 공기를 뚫고 개시되었다.이때부터 나흘 간 기필코 덕동 고개를 점령하겠다는 중공군과 이를 거부하는 F 중대의 혈전이 시작되었다.
 
 첫날 격전에서 분투한 카페라타는 방어선의 중앙 소대인 맥카시 중위 소대 소속이었다. 대 병력의 중공군은 사방에서 중대 방어선을 공격해왔다. 중공군의 첫 공격에 맥카시 소대는 큰 피해를 입었다. 소대는 일선에서 후퇴해서 예비진지로 이동하였다.
 
전투가 시작되기 한참 전 헥터 카페레타[HECTOR CAFFERATA]일병과 케네스 벤슨[KENNETH BENSON]일병은 다른 두 명의 해병과 함께 맥카시 소대의 진지에서 20m 떨어진 전방에 배치되었다.
 
카페라타는 이렇게 회상하였다. “잠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았지만 시끄러운 총소리 때문에  잠에서 깨었는데 눈을 뜨자마자 중공군이 쌓여있는 눈 위를 넘어 접근해 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너무 가까이 다가와 총을 조준할 필요도 없었지요.“

중공군이 진지를 통과 한 뒤에 지형지물에  가리어 모습이 안 보이자 벤슨과 카페레타는 운반할 수있는  탄약은 모두 들고 나머지 대원들이 간신히 버티고  있는 진지로 달려갔다.
 
“벤슨이 내가 군화를 두고 왔다고 알려 주었지만 그것을  가지러 돌아가지는 않았습니다.도처에 중공군이 널려 있었거든요.”
 
해리슨 포머스 일병과 제랄드 스미스[GERALD SMITH]일병이 벤슨과 카페라타가 뛰어든 참호를 지키고 있었는데 그 참호는 중공군이 맥카시 소대와 피터슨 소대를 분리시킬 목적으로엄청난 압력을 가하고 있던 F 중대 진지의 요충(要衝)이었다.
 
포머스는 회상했다. “그때 장교들이 해병들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한 진지의  공백을 메우려고 병력을 이리저리로 옮겨 배치하고 있는  있었는데 카페라타와 벤슨이 때마침 나타나 주어 도움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아군의 숫자가 너무 적었고 적군은  너무 많아 보였거든요.
  
수류탄이 빗발처럼 많이 날아왔고,  한 발이 우리 참호에  떨어져 내가 몸으로 수류탄을 덮쳤는데 쾅하고 터져  그 충격으로 몸이 튕겨져 나가 참호 맞은 편 벽에 부딪히면서  철모가 벗겨졌습니다. 그 뒤에 바로 다른 수류탄이 쾅하고 또 터졌습니다.
 
“포머스! 야! 포머스!”하고  누가 불렀지만 나는 입을 열고 대답을 할 수가 없었고,  한쪽 팔은 움직일 수가 있어서 손으로 문질렀더니 피가 흐르고  있더군요. 철모를 다시 썼는데 귀가 전혀 들리지 않으면서  양쪽 귀애서 윙윙 소리가 났고 누군가가 내 이름을  계속 부르더군요.
 
 위생병이 내 옆에 쭈그리고 앉아 머리를 눈으로 씻어 주면서 “괜찮아?”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그때까지도 머리가 멍했지만 소총을 쥐고서 간신히 카페라타에게 포복해 갔습니다.“
 
“네가 심하게 다친 줄 알았어.”라고 그가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세열 수류탄이 아니라 폭풍수류탄이었던 것이 행운이었다. “후아, 저 개자식들이 또 오네!” 사격을 할 때마다 카페라타는 상반신을 노출시켰는데 그는 기적을 연출하는 것 같았다.
 
 
                                                                     카페라타 일병


“카페라타가 소대에서 가장 덩치가 크고 또 제일 골치 덩어리였다는 것을 말했나요? 여하튼 벤슨과 나는 그가 참호 속에 떨어진 수류탄을 집어 들어 중공군에게 되던지는 것을 보고 있었는데, 수류탄 한 개가 참호 바로 앞에 떨어져 그가 몸을 앞으로 기우려 그 수류탄을 집어 비스듬히 던지려했지만 행동이 조금 못 미쳐 수류탄이 폭발하는 바람에 손의 일부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손이 불구가 되었는데도 카페라타는 욕을 퍼붓기 시작하면서 소총에 실탄을 재장진하여 클립이 빌 때까지 사격을 했습니다.
 
 실탄이 떨어지자 소총을 마치 야구 방망이 흐르듯 잡고는 날아오는 수류탄을 야구공을 맞추듯이 맞추어 날려버렸습니다. 대단했습니다!“
 
수류탄이 벤슨 옆에 떨어져 폭발하면서 그의 안경을 날려 보내 잠시 앞을 볼 수 없었다. 그는 자동소총을 사용할 수가 없자 참호 바닥에 널려 있는 소총의 실탄 클립을 손으로 더듬어 주워서 카페라타의 M1 소총에서 빈 클립이 튀어 나오는 소리가 날 때마다 그 클립들을 카페라타에게 전달해 주었다. “이제 보이나?” “아니!”
 
동쪽 하늘이 훤하게 밝아오자 중공군은 덕동 고개 공격을 중단하고 후퇴하였다. 카페라타 일병의 참호 앞에는 60여명의 중공군 시체가 쓰러져 있었다.
 
공식적인 해병대 기록에는 중공군이 압도적인 공격에도 그 요충인 해병 진지 점령에 실패한 것은 거의 헥터 카페라타와 케네스 벤슨, 그리고 스미스 3인의 영웅적인 전투 때문이었고 그들 세명은 “적 2개 소대 병력을 전멸시킨 공로를 인정받았다.”고 씌여 있다. 
 
밤 데이비스 중령이 지휘하는 7연대 1대대가 유담리를 출발하여 중공군의 배후로 침투해서 F 중대를 구출해냈고 이 링크 성공 직후에 유담리의 해병 2개 연대 병력은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철수하여 하갈우리의 사단본부 병력과 합류했다.
 
카페라타씨는 미국 위키페디아 백과 사전에도 소개되어있다. 그는 이 덕동 고개 전투 후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고 다음해 9월에 해병대에서 의병 제대를 했다. 그해 11월 트루만 대통령은 그에게 명예훈장을 수여하였다.
 
 
                                                        오바마 대통령과 만나는 카페라타씨


나의 방문에 훈장을 걸고 포즈를 취한 카페라타씨는 수류탄에 날아간 자신의 손도 보여주었다. 손가락 두어 개가 안 보였다

부상 직후 그런 손으로 어떻게 무거운 M1 총을 들고 연발 사격을 하고 또 그 총을 야구 방망이처럼 휘둘러 날아오는 수류탄을 다시 날려 보낼 수가 있었을까?
 
그는 내가 “참호를 공격한 중공군의 병력 규모가 어느 정도였나요?“하고 물었더니 간단히 대답했다. “몰라! 엄청나게 많았어!” 대화 도중 그는 내내 근엄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 F 중대를 공격한 중공군은 연대 병력으로 알려져 있다.
 
기념식 오찬장에는 경험도 쌓고 귀빈도 접대할 겸 각 사관학교에서 파견된 생도들이 합석했었다. 카페라타씨의 식탁에는 간호 사관학교에서 파견 나온 두 명의 여성 생도가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엄청난 거구에 과묵하고 근엄한 표정의 서양 할아버지와 동석해서 잔뜩 주눅이 들어있던 두 여성 생도는 내가 “이 분은 장진호 전투 최고의 전쟁 영웅일세!“ 했더니 그제야 신세대답게 환호하면서 이 영웅 할아버지에게 박수를 보냈다.
 
미국 장군이 와서 인사를 올려도 웃음기 없는 근엄한 표정을 짓던 카페라타씨는 그제야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젊은 시절 목숨을 내던져 싸운 나라의 손녀딸들이 올리는 찬사의 박수가 흐뭇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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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항공모함 테세우스의 한국전쟁 출동기 -제 3 편-



테세우스와 호위함들은 사세보 항에서 보급과 정비, 휴식을 끝내고 3월 22일 07시 
아홉번째 출동을 했다. 출동 첫날은 통상적인 정찰 활동과 대지 공격을 위한 출격을 하였다.
 
3월 24일 테세우스의 씨 퓨리기들은 적지에서 공산 차량들의 대규모 집결지를 발견하고 이를 공격해서 다수의 적 차량들을 파괴하였다.
 
고든 스미스 중령기는 적이 쏴 올린 50구경 실탄에 맞아 연료 탱크에 구명이 뚫렸다 .
 
연료탱크는 셀프 씰링 기능이 제대로 되지 않아 다량의 연료가 누출되었다. 스미스 중령은 연료가 다 새어나가서 거의 텅 빈 연료탱크의 씨 퓨리기를 겨우 수원 공군기지로 몰고 가 착륙하였다.
 
이날 공산측의 대공사격이 극심해서 사리원 상공에서 두 기의 화이어플라이기들이 적 40mm 대공포에 명중되었지만 테세우스로 귀함하여 가까스로 착륙하였다,
 
다른 한 기의 조종사 시력이 갑자기 강렬한 햇빛에 손상되어 항모에 착륙이 힘들 것 같자, 수원 미 공군 기지로 가서 역시 연료가 모두 고갈 된 상태에서 가까스로 착륙했다.
 
25일은 악천후로 춭격을 하였지만 26일은 통상적인 정찰과 초계 임무를 수행하는 출격을 하였다.
 
27일에는 출격을 했으나 낮은 구름과 비가 내려 두 기가 영 함 커뮤스의 해안 목표 폭격을 지원하기 위한 비행만 했을 뿐 모두 일찍 임무를 종료하였다.
 
28일은 정비 및 휴식일로 출격이 없었다. 29일에도 통상적인 출격이 있었다.
 
30일 오전에는 북한이 해안에 감추어 둔 적 선박 6척을 발견하고 모두 파괴하였다. 코이 대위의 전투기가 대공포에 맞아 좌측 날개에 구멍이 생겼으나 무사히 귀환하였다.
 
4월 1일 화이어플라이기들은 해주 비행장의 격납고를 공격하였다. 테세우스는 다시 사세보 항으로 함수를 돌려서 4월 2일 오후 무사히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4월 3일 미 해군으로부터 다른 시콜스키 헬리콥터의 교체 승무원의 파견이 있었다. 이 기간 동안 함대 사령관 윌리엄 앤드류스 경이 이임하고 A.K 스코트 몽크리프 소장이 새로 취임해왔다. 그는 새로 극동에 파견한 순양함인 벨파스트에 승함하여 4월 11일 사세보 항에 도착했다.
 
 
                                                             왼쪽이 영 순양함 벨파스트


4월 10일 미그기 한 기가 압록강 앞 바다에 있는 신미도 근해의 얕은 개펄에 추락했다. 미 5공군은 이의 회수를 강하게 추진하였다. 영 순양함 케니아에게 이 회수 임무가 주어졌다. 미 5공군은 항공지원과 수색기, 그리고 헬리콥터 지원을 약속했다. 구난선인 USS 터그가 이 작전에 합류하였다.
  
이 날은 특히 미 공군의 공중작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던 날이었다. B-29기들이 바로 북방의 압록강 철교를 폭격했었고 공산 미그기들이 요격했었다. 2 기의 B-29기가 격추되었다.
 
  
                                                                         신미도


케니아는 최고 속도로 질주하여 이날 오전 10경에 현장에 도착했다. 세 척의 영연방[영국 캐나다] 구축함 누트카, 와라뭉가, 아메티스트도 이 작전에 동행해서 인근 해역을 수색했었다.
 
미그기 잔해는 발견하지 못했으나 격추된 B-29기의 승무원 사체 한 구를 인양하였다. 작전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4월 16일 종료되었다.
 
테세우스의 열번째 출동은 4월 8일이었다. 이번 출동 해역은 황해가 아니라 한국 동해였다. 동해에서 작전하던 미 해군 대형 항모들이 중국의 대만 침공에 대비해서 대만 해협으로 급파되었기 때문에 테세우스와 미 중형항모 바타안이 함께 이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급파 된 것이다.
 
테세우스가 동해에서 작전하는 동안 서해안에서는 미 해군과 영연방 해군함들의 연합 함대가 초계임무를 계속하였다. 이런 연합 작전은 처음 있던 일이었다.
 
테세우스의 수병들이나 조종사들은 경험을 많이 쌓아서 미 해군 항모 바타안의 해병 조종사들보다 월등히 기량이 뛰어났었다.
 
비록 미 항모 바타안의 사출장치가 두 기나 있어서 이론적으로는 영 항모 테세우스보다 더 우수한 기능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으나 사출기가 한 기 밖에 없는 테세우스가 더 앞선 실적을 발휘하였다.
 
동해 작전은 4월 15일까지 일 주일간 행해졌는데, 테세우스는 276회 출격을 기록했는데 비해 바타안은 244회 출격만 기록하였다. 이 일주일간 양 함은 각각 하루 동안씩 정비 휴식일에는 출격을 하지 않았다.
 
작전 기간 중 강한 북동풍이 계속 불어 바다는 황천항해를 내내 해야 했다. 테세우스는 이 불순한 일기 속에서도 단 한건의 이착륙 사고가 없었다. 영 조종사들의 노련한 기술이 이 무사고 이착륙 기록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적의 대공 사격과 불운으로 이 마지막 출동중 5기의 씨 퓨리기와 1기의 화이어플라이기가 손실되거나 대파되었다.
 
4월 9일 화이어플라이기들이 원산의 철도 시설과 창고 그리고 군 부대 사용 빌딩들을 대대적으로 공습하였다. 악명 높은 원산항의 기뢰 설치 기지로 의심되는 시설도 공습하여서 대규모 화재가 발생케 했다.
 
동해안에 대한 공중 정찰도 계속되어 공산 선박과 어선들이 기관포와 로케트로 파괴되었다. 다음날 두 기의 씨 퓨리기들이 미군의 두 콜세어 기들로부터 느닷없는 후방 공격을 받았다.
  
 
                                                        미 콜세어기들-해군과 해병대가 사용했다.
 
 
씨 퓨리기들을 공산기로 오인했었기 때문이다. 한기의 씨 퓨리기가 크게 파괴되었으나 한 기는 격렬한 회피 기동으로 콜세어기의 공격을 따돌리고 피했다. 콜세어 기들은 귀환하자 공산군 LA-9기를 격추했다고 보고했다. 
 
                                                                소련제 LA-9기

함경도 고원 일대에서 정찰 임무와 철도 공격 임무를 수행 중이던 다른 씨 퓨리기들은 콜세어 기에게 피격당한 두 씨 퓨리기들로부터 긴급 지원을 요청받아 달려 가다가 H. 존슨 대위의 씨 퓨리기가 적 37mm 대공포에 명중되었다.

 
그의 씨 퓨리기는 한 계곡 사이에 불시착을 시도했지만 추락하고 말았다. 그는 전사한 것으로 추정했으나 포로 교환 시에 송환 되었다.
 
쥬리안 대위도 추락한 그의 기체 주위 상공을 수색하다가 역시 적 대공화력에 명중되어 크게 손상을 입었다. 그는 겨우 씨 퓨리기를 몰고 남으로 비행하여 강릉 비행장에 비상 착륙하였다. 착륙 중 그의 전투기는 전복되었지만 그는 안전하게 탈출하였다.
 
11일에은 낮은 구름과 시계 불량으로 첫 출격만 빼고 나머지 출격은 모두 취소되었다.
 
다음 날인 12일, 화이어플라이기들은 흥남 지역의 교량을 폭격해서 파괴하였다.
 
베일리의 화이어플라이기가 적탄에 맞아 테세우스에서 40마일 떨어진 바다에 불시착했다. 두 명의 승무원은 해면에서 40분간 표류하다가 테세우스에 파견된 미 해군 헬리콥터에 의해서 구조되었다.
 
씨 퓨리기들은 계속 동해안의 적 탱크들과 다른 군사목표들을 공격했으며, 영 순양함 만체스터와 세인트 폴, 그리고 행크 함들의 해안 포격을 위해 목표 발견과 사격지휘를 위한 관측 활동을 하였다.
 
테세우스는 13일 바다에서 해상 급유를 받았다. 당일 급유가 끝난 11:40분 첫 출격이 있었다.
 
함흥 지역 정찰에 나선 험프리 대위의 기가 대공 사격에 피격되었다. 그의 함재기는 작은 논에 불시착하였고, 그는 항공기를 기술적으로 미끄러지게 해서 논 옆의 물이 마른 개천으로 처박히게 하였다. 이 개천은 지대가 낮아 접근하는 적의 사격으로부터 엄폐되게 하였다.
 
그의 편대기는 공중에서 적의 접근을 차단하였다. 추락기에서 약 40마일 떨어진 해상에 위치해 있던 테세우스에서 구조 헬리콥터가 두 기의 씨 퓨리기의 호위를 받으며 날아 왔고, 38분 뒤 조종사는 구조되었다.
 
그러나 그는 중상을 입고 있었다. 머리의 상처가 무척 컸고 무릎의 상처도 상태가 안 좋았다. 그는 만체스터 함의 솜씨 좋은 외과 전문 군의관으로부터 집중적인 치료를 받았다.
 
그날 오후 화이어플라이기들은 세 개의 교량을 파괴했고 씨 퓨리기들은 송탄리의 창고를 폭격하였다. 더해서 원산 북방 마을에 주둔하고 있던 적 병력 집결지를 기총 소사하였다.
 
 
                                                           미 해군기에게 파괴 된 도곡리 다리


14일 씨 퓨리기들이 정찰 임무를 수행하는 반면 화이어플라이기들은 흥남 지방의 다리들을 폭격하였다. 함재기들은 한반도를 가로질러가 진남포의 군수물자 집적소와 탱크들 그리고 작은 선박들을 공격하였다.
 
 
지역의 밀집한 대공포대들이 작전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보우만 대위의 함재기가 적 대공포화에 명중되어 불시착했으나 역시 접근한 적의 치열한 사격 중에 테세우스의 헬리콥터에 의해 구출되었다. 구출 헬리콥터를 조종한 미 해군 조종사 로저 길은 영국 정부로부터 DSC훈장을 받았다.
 
15일은 짙은 안개로 인해서 단 세 번의 출격만 있을 뿐이었다. 테세우스가 주축이 된 TE95.11 기동함대의 동해 작전은 4월 15일 오후 16:30분 종료 되었다. 미 항모 바타안은 사세보 항으로 돌아가고 테세우스와 호위함들은 한반도 황해로 향했다.
 
16일 극동에 도착한 기동함대 사령관 스코트 몬크리프 제독은 테세우스에 승함하여 기동함대를 지휘했다.
 
17일 북한 지상 목표들이 비행거리에 이르자 테세우스는 공격 함재기들을 발진시켰다. 사리원에 새로 건설한 북한의 비행장은 너무 집중적으로 공격을 당하여 완전 사용 불가능 상태가 되었다. 다시 수리된 교량들도 파괴되었다.
 
해밀턴 대위의 함재기가 대공포화에 맞아 겨우 귀함하다가 함에서 60마일 떨어진 바다에 불시착했다. 그러나 그는 55분간 찬 바다에서 표류하다가 역시 테세우스의 헬리콥터에게 구조되었다.
 
19일 기상이 악화되어 구름이 낮게 깔려 시야를 방해하고 폭우가 내렸다. 이 날 기동함대 TE95.11은 사세보 항으로 귀항하였다.
 
이로서 테세우스의 극동 해역 파견 임무는 끝나고 그 후임을 23일 새로 도착한 영 항모 그로리 함에게 인계하였다.
 
테세우스는 큰 환송 속에 사세보 항을 출항하여 홍콩으로 귀환하였다.

6.25전 참전 기간 동안 테세우스는 86일간의 작전 일에 3,446회 출격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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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항공모함 테세우스의 한국전쟁 출동기 -제 2 편- 
 
 

 
여섯 번째 출동 때 테세우스는 함에 장비했던 구조기 씨 오터를 내리고, 미 해군이 제공하는 헬리콥터를 대신 적재했다. 복엽기인 씨 오터는 지원 항모 HMS 유니콘으로 이동해서 새 엔진으로 교체하는 작업을 받을 터였다
 
 
 
                                                               영 수상 비행정 - 씨 오터
                                                         구식으로 보이지만 전후 탄생하였다.


유니콘은 항모였지만 사세보 항에 정박하여 주로 항공기의 정비나 새 항공기의 공급 및 휴식 공간 제공 등의 지원 업무만을 하였다.
 
1월 25일. 테세우스는 출항해서 다시 한국 해역으로 행했다. 여섯번째 출동이었다. 이날 부로 테세우스는 미 항모 바타안과 임무를 교대 했다. 한국 해역으로 이동 도중 새 조종사들은 항모 갑판 이착륙 훈련을 여러 번 되풀이했다.
 
한국의 서해안에서 미 해군 함정들이 북 해안 봉쇄, 황해 상공에서 탈출한 조종사 구출과 한국 전선의 최서단 적진에 대한 함포 사격의 임무 수행을 하고 있었다.
 
기상은 비행하기에 아주 좋은 쾌청한 날씨였다. 테세우스는 8일간의 여섯번째 출동에서 408 소티를 출격했다. 임무는 전과같이 이 해안지방 초계와 지상지원이었다.
  
26일에 비극적인 사고가 발생했다. 출격했던 A.C 베반 대위의 씨 퓨리기에 갑자기 불꽃이 튀는 것이 보이더니 나선을 그리며 수면을 향해 추락했다. 그 나선은 함재기가 수면에 추락하여 큰 물보라를 만들 때까지 계속되었다. 베반 대위로부터는 아무런 통신이 없었다.
 
추락지점은 테세우스로부터 10마일 북방이었다. 구축함 코삭이 고속으로 항진해서 15분후에 추락 현장에 도착했으나 생존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영 구축함 코삭 1,450톤 
                                                영국 구축함들은 미 구축참들보다 조금 작았다.
 

27일은 테세우스에게 불운한 날이었다. 케이리 피치 대위 기가 지상 작전 지원중 적 25mm 대공포나 소화기 탄에 명중되어 구축함 누트카 옆 해상에 불시착하였다. 다행히 그는 구축함에 의해서 구조되었다.
  
같은 날 케이리 피치 대위의 항공기가 동두천 부근에서 대공화기에 명중되어 좁은 골짜기 사이에 불시착하였다. 그의 동료들이 미 구조 헬기가 올 때가지 90분간 그를 엄호하며 적군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다.
 
불시착한 그의 화이어플라이기를 연소시키려고 했던 씨 퓨리기의 되풀이 된 기총 소사는 수포로 돌아갔지만 기체는 벌집이 되었다. 씨 퓨리기와 화이어플라이기들은 미 해군 포격의 지상 목표를 발견하는 임무에도 출격했다.
 
29일 씨 퓨리기들은 미 순양함 세인트 폴의 포격을 인천 소재 구 일본 자동차 공장 자리로 유도하였다. 세인트 폴의 8인치 포탄 30발이 공장에 낙하하여 몇 채의 빌딩을 파괴하였다.
 
31일은 출격하지 않고 휴식을 취했고, 2월 1일 출격한 씨 퓨리기가 해주 항의 독크 시설을 폭격하였다.
 
2월2일. 항모가 보유했던 1,463시간의 무사고 착륙 기록은 씨 퓨리 한 기가 거친 바다 위에서 상하로 피칭을 하는 항모에 착륙하려다가 타이어가 터지고 착륙장치 부분이 파괴되는 사건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2월 3일 씨 퓨리기들은 영 순양함 씨런의 화력을 인천 서쪽 표적들에게 유도하였다.
 
 
 
                                                             영 경순양함 씨런 8,800톤


영 항모 함재기들의 초계 범위는 수원과 김포 일대를 포함한 서울 북서지방이었으며, 이 지역에 추락한 미 모스키토 기 조종사가 헬기에 구출되는 동안 엄호하기도 했다.
  
2월 3일은 테세우스의 여섯번째 출동의 마지막 출격일이었다. 이날 테세우스가 속한 17항모단은 66회의 기록적인 출격을 하였다. 대잠 초계비행 임무에 동원된 소수의 기를 제외하고 모든 화이어플라이기들이 총 출동하여 수원의 북서쪽 지역의 적 점령 마을과 적 참호, 안양 주변에 설치된 적 대공포대들을 공격하였다. 이 공격후 옹진 반도와 해주 비행장을 정찰 비행하기도 했다,
  
미 항모 바타안과 임무 교대를 한 테세우스는 일본 구레 항으로로 돌아왔다. 테세우스는 48시간동안 구레 항에 정박하면서 귀국 희망자들을 위한 절차를 밟았다.
 
 
                                                                   항진 중인 테세우스


2월 12일 테세우스는 구레 항을 출발하여 한국 해역으로 돌아왔다. 일곱번째 출동이었다. 2월 13일 일곱번째 출동을하면서 새로 부임한 조종사들을 위한 비행 연습을 했다.
 
일곱번째 출동에는 영 연방 해군의 코뮤스, 카유가, 아타바스칸과 누트카등이 호위 함대를 이루어서 동행하였다.
 
다음 날인 14일. 미 5공군은 육상 기지에 낮고 짙게 드리워진 구름때문에 출격을 못하였고, 영 함재기들만이 출격할 수가 있었다.
 
화이어플라이기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서 두 팀은 서울 북서쪽의 지상군 지원임무에 출동하고, 다른 두 팀은 초계 임무에 나섰다.
 
씨 퓨리기들은 서울과 평양사이 도로와 사리원과 해주 일대의 정찰 비행을 실시하면서 의심 목표를 공격하였다.
 
항모에 화이어플라이기들이 착륙하던 중 한 기의 기관포 3문이 오작동으로 발사되어 이착륙 관제사 J. F.위그리 준위를 사망하게 만들었다. 그는 다음 날 정중한 해군 의식으로 수장되었다.
 
2월 15일 진남포항 주변의 바다 얼음들이 녹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 사실은 공산군들이 다시 기뢰 설치를 시도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 해역에 대한 정찰과 감시가 강화되었다.
 
  
                                                              테세우스와 항공대 부대원들


2월 17일. 이틀간 불량한 일기로 출격을 못하다가 출격한 화이어플라이기들은 인천 서북방 구역을 집중적으로 초계하였다. 출동의 마지막 출격 목적은 진남포 일대의 적이 수리한 철도 시설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평양역에서 은폐되어 있다가 파괴 된 북한 기관차


같은 날 화이어플라이기들은 원주에서 미 9군단의 지상 작전을 지원하였다. 일곱번째 출동은 2월 23일부로 종료되고 테세우스는 임무를 미 항모 바타안에게 인계하고 사세보 항으로 향하여 항진, 다음날 저녁에 도착하였다.
 
 3월 4일 테세우스는 사세보 항을 출발하여 여덟번째 출동을 하였다. 
  
해상 작전은 출항 당일부터 개시되었다. 군함 케니아와 그 호위함들이 북한 해안을 포격하는 동안 공중 초계가 진남포에서 구사성까지 집중적으로 행해졌다. 공산 측에게 이북 서해안에 대한 상륙작전이 임박했다는 오판을 하게 만드는 위장작전이었다.
 
화이어플라이기들은 초계와 정찰과 교량 폭격을 했고, 씨 퓨리기들은 케니아의 포격을 집중 지원 하였다. 함재기들은 틈을 내어 옹진반도와 해주의 적 비행 기지들을 정찰했다.
 
3월 6일. 기상이 나빠져서 화이어플라이기와 씨 퓨리기는 제한적인 공중 초계만 할 수가 있었다. 이 날은 씨 퓨리기들만 출격해서 해주 서쪽의 도로에 대한 감시 비행만 했을 따름이었다. 3월 7일 역시 해안 포격을 하는 케니아에 대한 지원과 초계를 하였다.
 
3월 8일. 테세우스 함재기들은 서울 -개성- 신막 지역을 정찰하고 철도역과 화물 집적소를 공격하였다. 이날도 순양함 케니아의 연안 포격을 위한 지원 비행이 있었다. 이어서 미 1기병사단에 대한 지원 지상 공격을 하였다.
 
9일은 출격을 쉬었고 다음날 10일은 기상 악화로 출격이 없었다. 11일은 다른 날과 같은 임무의 출격이 있었다. 
 
12일에 화이어플라이기들은 황해도 장연과 옹진 일대를 정찰 비행 중에 황주 남방에서 공산 측의 심한 대공 사격을 받았다. 이날 제임스 대위는 4,500피트 상공을 비행 중에 적의 대공사격에 피탄 되었다.
 

그는 동료 조종사 존슨 대위와 함께 미 공군 기지가 있는 수원 비행장으로 겨우 비행해서 착륙했다.그는 그 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귀함하였다. 
 
 
 
                                                                  미 공군 수원기지
                  1953년 북한기의 야간 공습으로  9기의 피해를 본 뒤 기체 엄폐를 위한 방벽이 설치되었다.


여덟번째 출동의 마지막 날 함재기들은 강산사와 진남포 사이를 초계하다가 황해도 장연 상공에서 적의 격심한 대공포화를 만났다.겨우 대공사격 지대를 벗어났지만 조금 뒤 G.H 쿨스 대위와 D.W 가이 대위의 화이어플라이기가 추락했다.
 
대공포화나 아니면 장착한 폭탄이 오작동으로 폭발했을 것이었기 때문으로 추측 되었다. 동료들은 추락 현장을 맴돌며 지켜보았으나 아무런 생존자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테세우스의 상공을 나르는 화이어플라이기들


비극적인 함재기의 손실이 있었지만 테세우스는 예정대로 그날 오후 사세보 항으로 회항하여 다음날 오후에 기항하였다. 여덟번째 출동에서 테세우스는 공격성 총 출격 226회 방어성 총 출격 113회를 기록하였다. 
 


<다음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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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항공모함 테세우스의 한국전쟁 출동기(제 1 편) 
 
 
 

                                                              영 항모 테세우스13,400톤


극동 파견의 명을 받고 영국을 떠난 테세우스는 일차 기항지 홍콩에 기항할 때 까지 항해 중에도 부단한 이착륙 훈련과 공중 기동 연습을 해서 전투력의 수준을 더욱 향상시켰다. 함장은 볼트 대령, 항공대장은 스토빈 브래드포드 중령이었다.
 
 
                                                                     함장 볼트 대령


1950년 9월 24일. 항모 테세우스가 개전 초기부터 참전하여 많은 전공을 세우고 귀환하는 영 항모 트라이엄프로부터 임무 교대와 장비 인수를 하는 동안 항모의 항공대는 작업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서 잠깐 홍콩 카이탁 공항으로 이동했다가 그 날 오후 귀함(歸艦)하였다.
  
드디어 1950년 10월 2일 11시 30분. 테세우스는 성대한 환송 속에 홍콩을 출항하여 한국 전장으로 장도에 올랐다. 저녁에 태풍이 찾아 왔으나 태풍은 수요일에 모두 통과하고 바다는 다시 평온해졌다. 
 
테세우스는 항해를 계속해서 그 다음 목요일 한반도를 마주 보고 있는 일본 규우슈의 군항 사세보에 입항하여 영국 군함 와리어의 옆에 정박했다. 사세보 항은 향후 테세우스의 후방 기지를 하게 된다. 테세우스는 한국 해역 출동준비를 위해 바쁜 이틀간을 보냈다.
  
 
                                             6.25중 사세보 항 - 미 대형 항모 밸리 포지와 레이테


함상 전투기나 공격기들이 추가 공급되었고 각 함재기들에게 피아 식별을 위한 줄무늬들이 그려졌다. 전에 작전하던 트라이엄프의 씨 화이어기가 미 공군 B-29 기총수로부터 오인 사격을 받고 격추되었던 쓴 경험으로 인해 인식 줄무늬를 그리게 된 것이다.
 
사세보 항 인근 이와쿠니 기지에는 예비 전투기들과 이를 관리하는 정비요원들이 배치되었다.
 
10월 7일. 극동함대 사령관 앤드류스 제독은 기동부대 TE 95를 7개의 작은 팀으로 나누어서 이 작은 팀들을 TE 95.10에서 TE 95.16까지로 각각 명명하였다.
 
테세우스와 그에게 배속된 구축함들의 함대는 TE 95.11이 되었다. 이번 출동전에 테세우스는 신형 함상 전투기로 장비가 교체 되었다. 한국 참전 동안 호커사가 제작한 씨 퓨리기가 테세우스의 주력 전투기로 활동하게 되었다. 
 
  
                                           씨 퓨리 기 - 미그 15기도 격추했던 성능좋은 영 해군기다.


이전 트라이엄프의 주력기는 육상 전투기 스피트파이어를 함재기화한 씨 화이어였다. 이 전투기는 육상에서는 명전투기였지만 해상 활동에는 여러 문제점을 드러냈었다.
 
직렬 엔진이 달린 긴 기수는 흔들리는 함체의 짧은 활주로에서 뜨고 내리는 데 절대 필요한 시야확보에 제한이 있었고, 육상용이었던 이착륙장치가 거친 함상 사용에 적합하지 않아 착륙시의 충격으로 기체 후부에 주름이 잡히는 금속 피로 현상이 오기도 하였다,
  
 
                  씨 화이어기는 육상의 명기 스피트화이어를 함재기로 개량한 것으로 날개를 접을 수가 있다.
                   그러나 해상 작전에서 여러 문제점을 드러냈다.


씨 퓨리기는 시야가 좋은 성형(星型)엔진을 가졌고 이착륙장치도 해군 전용기답게 무척 크고 단단했다. 새로운 전투기 운영 초기에 자주 일어나는 사고가 이번에도 있을까 하는 염려가 있었으나 다행히 아무런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다.
  
한국 해역으로 가는 동안 공격기인 화이어플라이기 한 기가 함대를 선도하며 대잠 초계 비행을 계속하였다. 북한이 개전 전에 이미 소련으로부터 두 척의 잠수함을 인도받았다는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큰 위협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견들이었지만 하여튼 조심해야 했다. 레이다에 나타난 미확인 적기를 향해 긴급 요격 이륙을 하기도 했었지만 공산기가 아니라 거의 미군기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긴급 발진은 전투기 조종사들에게 유익한 경험 축적이 되었다.
 
  
               영 함상 공격기 화이어플라이 기 - 2인승으로, 동체 후부에 피아인식을 위한 둥근테가 그려져 있다.


테세우스의 함재기들은 육군에 파견된 전방 항공 통제 장교들의 유도에 따라 지상 지원 작전을 할 예정이라는 지시를 받았었다. 지상 공격시 미군의 공격기들은 훨씬 파괴력이 강한 네이팜 탄을 썼지만 영국 해군기들은 주로 통상의 폭탄과 로케트 포, 그리고 기관포탄을 사용 했다.
 
한국은 높은 산들이 많은 산악 국가였기 때문에 구름이 낀 날은 고도의 비행 능력이 요구되어 구름이 낀 날은 긴 산맥을 특히 조심해야 했다.
 
항모의 항공대는 작전 시 통상 하루에 50회(소티)를 출격했었고, 대개 한번 출격에 두 시간 반에서 세 시간이 소비되었다. 그러나 때로는 66회나 출격하기도 하였다.
 
무거운 신형기 씨 퓨리기들은 상황이 급할 때 항모의 캐타펄트[항공기 이륙 사출 장치]가 고장 나면 로케트 이륙 추진 장치인 RATOG를 장착하여 비상 이륙하기도 하였다.
  
화이어플라이기나 씨 퓨리 기들을 발진시킬 때 이 장비가 여러 번 사용되었는데 이 장치를 사용하면 항공기 이륙시 항모에 무리가 가는 22노트의 전속력을 내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 전선에 최초로 출동했던 트라이엄프


1950년 10월9일에서 11일까지 3일 간 테세우스가 첫 실전을 경험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항공 공격의 대상은 적의 대공 포대와 군사 통신 체계였다.
 
10월 9일. 씨 퓨리 전투기 편대와 화이어플라이 공격기 편대는 각각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 대동강 하구 진남포를 공습했다. 적 군사 시설 타격의 공습 작전은 10월 내내 계속되었다.
 
공격 목표들은 주로 적 보급선의 급소들인 교량이나 철도 등이었다. 적의 보급 교통망을 차단하는 공격은 평양-사리원- 황주사이에 북서쪽에 집중되었다.
 
10월 첫 작전 중 항모의 정비팀들은 최고의 능력을 보여 주었다. 적 소화기 대공 사격이나 대구경 고사포탄 파편들에 뚫린 기체의 구멍 정도는 즉시 당일로 수리가 되었다. 때로는 밤을 세워가며 엔진 전체를 교체하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우수한 정비 덕택에 함재기 가동률은 아주 높았다. 항상 탑재 씨 퓨리기 20기 중에 19기, 화이어플라이 12기 중 11기가 출격 가능 상태로 유지되었다,
 
테세우스의 첫 출동은 10월 21일 마감되어[테세우스는 다음해 봄까지 열 번의 출동을 하게 된다.] 정비와 보급을 위해서 일본 사세보 항으로 돌아왔다.
 
첫 작전에서 입증된 테세우스의 새 전투기 씨 퓨리 2기와 새 공격기 화이어플라이 5기의 성능은 영국 해군을 매우 만족하게 만들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한국 전선에 첫 투입된 영 항모 트라이엄프는 스피트화이어 해상형 개조기인 시화이어와 화이어플라이 1형기로 장비되어 있었는데 이들의 가동률은 기대에 못 미치는 것이었다.
 
테세우스의 신형기들은 트라이엄프의 구형기들에 비해서 특히 전투 능력은 물론 가동률도 훨씬 우수하다는 사실을 출격과 정비로서 말해주었다.
 
테세우스의 두 번째 출동은 10월 27일에 있었다. 이날 테세우스는 일본 사세보 항을 출항해서 한국 황해로 향했다. 이번 출동에는 한 손님이 테세우스에 합류했다.
 
미 해군 워세스터 함 탑재 헬기가 진남포 항까지의 해로에 적이 설치한 기뢰발견과 소해(掃海)의 임무를 띄고 테세우스에 파견된 것이다.
 
헬리콥터가 항모 갑판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바람에 테세우스는 여러 제약을 감수해야 했다.
 
함재기 사출 장치(캐타펄트)를 사용할 수가 없었다. 로케트 보조 장치로 이륙하는 항공기들은 로케트나 폭탄 또는 보조탱크를 외장하지 못했다.
 
헬리콥터 활용 면적 확보를 위해서 6기의 화이어플라이기는 당분간 항모를 떠나 사세보의 육상 기지에 머물려 있어야 했다. 바다로 출동한 테세우스의 미 해군 헬리콥터는 10월 29일부터 기뢰 수색 작전을 개시하였다.
 
테세우스의 함재기 씨 퓨리기들은 기관포만 무장하고 주로 함과 헬리콥터의 항공 초계와 호위 임무만 수행하였다. 테세우스가 임무를 끝내고 사세보 항으로 돌아가는 길에 육상 기지에 대기하고 있던 화이어플라이기 6기가 다시 테세우스로 돌아왔다.
 
  
                                         북한 철도 교통망은 끊임없는 유엔 공군의 공격 목표가 되었다.


사세보에 일시 기항했던 테세우스는 홍콩을 향해 출항했다. 홍콩까지의 항해 3일간 함의 정비팀은 캐타펄트 장치의 가속성능과 착륙 속도 지연 로프의 성능을 개량했다. 테세우스는 홍콩에 정박하고 11월 13일 하루 바다로 출항해서 개량한 사출장치의 성능을 시험했다.
  
한국의 전쟁은 북한군이 패주하고 유엔군이 그 뒤를 쫓아 압록강을 향하여 쾌속 진격중이라, 전쟁의 끝이 보이는듯했다. 테세우스의 승조원들은 한국 원정 임무는 이제 다시 없을 것이고 테세우스는 당분간 홍콩에서 활동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중공군의 참전으로 테세우스와 호위함들은 다시 닻을 올리고 집결지 사세보로 긴급 출항했다. 테세우스를 주축으로 한 영연방 기동함대 TG 95.1은 피난민들이 철수하는 진남포 항을 제외하고 전 북한 서해안 쪽의 포구나 항구의 군사 목표 공격 임무를 부여받았다,
 
테세우스의 세 번째 작전 출동은 UN군이 밀리던 12월 4일 있었다. 호위 함정들인 콘코드와 코색, 에버튼 함들을 동행한 테세우스는 사세보를 출항하였다. 테세우스의 씨 퓨리와 화이어플라이기들은 작전지역에 도착하자 곧 집중적인 출격을 개시하였다.
 
함재기들은 전진하는 중공군을 저지하기 위해 적지의 교량, 화차, 군수물자 집합소, 그리고 중공군들을 공격하였다.
 
마침 공군들은 전방 기지들이 폐쇄하고 철수해야 하는 불리한 상황이었다. 이 불리한 시기에 바다의 이동 기지인 테세우스는 공백이 생긴 항공력을 대체하는 능력을 훌륭히 발휘하였다.
 
겨울 바다에서 테세우스 함재기들의 출격은 12월 5일 시작하였다.
첫 임무는 아군들과 피난민이 철수하는 진남포 항으로 진격해오는 중공군들을 공격하는 것이었지만, 전황은 시시각각 악화되고 있었다.
 
12월 8일 두 번째 출격이 있었다. 유엔군을 추격하는 중공군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 날의 총 출격 시간은 무려 115시간으로, 테세우스가 취역한 이래 최대의 기록이었다.
 
10일은 기상이 아주 안 좋아서 김포 기지에 착륙했던 4기의  씨 퓨리기들이 그냥 김포 기지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11일 다시 출격이 있었다. 공격 대상은 전과 같이 적의 보급선인 도로와 철도였다. 적의 철도와 물자 집하장 또는 화차나 도로에서 움직이는 적 차량들이었다.
 
13일 해주와 진남포의 군사 목표들을 공격했다. 함재기들은 진남포 해주 일대 지역에서 대지 공격 임무만  수행한 것이 아니었다.
 
유엔군의 철수로를 따라 지역을 세분해서 저공비행을 하며 혹시 뒤처져서 방황하는 아군이 있는지 확인하는 빗질 수색도 있었다. 낙오되어 헤매는 많은 미군들과 한국군이 목격되었다.
 
14일 테세우스의 함재기들은 처음으로 미그 15 기를 목격했다. 미그 15기는 지상의 낙오병들을 구해서 진남포 앞 바다에 정박한 LST로 이송하던 헬리콥터에 대한 공격을 시도했었다.
 
테세우스는 14일 세 번째 출동을 마치고 다시 사세보를 향하여 함수를 돌렸다. 그러나 귀항 길에 오르고 몇 시간 되지 않아 사령부로부터 황해 북쪽에서 발견된 중국 어선단을 조사하라는 긴급지시를 받았다.
 
그 어선들이 중공군들을 수송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긴급히 발진한 테세우스의 함재기들은 이들 정크선이 단순한 어선임을 확인하고 이를 본부에 보고했다.
 
이번 출동에서 테세우스의 함재기들은 총 338회의 출격과 전투 출격 시간 838시간의 기록을 올렸다.

테세우스는 사세보에서 재급유와 재보급을 완료하자 다시 바다로 나가 네 번째 출동을 하였다.
 
황해 북쪽 작전 해역으로 북상하는 이틀 동안 기상이 너무 불량하여 함재기를 한 번도 이륙시킬 수가 없었다. 작전 해역에 도착 하고 기상이 쾌청해지자 테세우스의 함재기들은 출격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산야는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그런 눈 덮인 지상에서 적의 활발한 움직임이 탐지되었다.
공산군은 남으로 전면 철수하는 유엔군을 추격하고 있었다.
 
  
                                                    압록강을 건너 북한땅으로 들어가는 중공군.
                    이들은 압록강에서 최일선까지 도보로 이동했었기 때문에 주야 항공 공격에 시달려야 핬다.


12월 19일. 테세우스의 씨 퓨리기들은 황주와 사리원 사이 도로에서 이동하는 적 수송대를 네 번에 걸쳐 공격해서 트럭 17량과 적 탱크 3량을 파괴하였다.
 
주로 로케트 탄이 사용되었는데 저공 비행과 로케트 공격은 낮게 깔린 구름과 불량한 시계 때문에 아주 어렵게 실행되었다. 악천후는 계속 되었지만 함재기들은 기회가 될 때마다 출격을 계속하였다.
 
12월 23일. 씨 퓨리기 편대는 평양 서쪽에서 행군 중인 중공군 병력과 차량들을 기총소사해서 타격을 주었다. 장거리 비행이 필요한 평양 동쪽 지역에 대한 초계 비행임무는 미 공군의 전방 활동 기능이 다시 가동 되자 26일부로 종료되었다.
 
평양 동쪽 지역의 장거리 지원에서 630회의 출격이 있었고 총 출격 시간은 1,630분이었다. 영 함재기들이 발사한 로케트탄만 무려 1,400발이나 되었다.
 
테세우스는 12월 28일 오후 사세보로 다시 귀항했다. 여기서 세 명의 새 조종사들이 증원되었고 함은 다시 같은 일본의 다른 항구인 구레 항으로 이동하였다.
 
구레에서 테세우스는 다른 영 항모[航母]인 유니콘 옆에 계류되었다. 테세우스는 유니콘에게 수리가 필요한 두 기의 씨 퓨리기와 두 기의 화이어플라이기를 넘겨주고 대신 정비가 잘 된 세 기의 씨 퓨리기와 한 기의 화이어플라이기를 공급 받았다.
 
 
                                                                영항모 유니콘 14,750톤
                                                        작전 출동보다 주로 지원업무만 했다.


12월 31일 일요일. 테세우스 식구들이 크리스마스 휴가를 즐기는 동안 반년마다 한 번 씩 있는 진급자 명단이 발표되었다. 라르킨 중령과 홉킨스 중령은 대령으로 진급했고 화이트와 콤프톤, 톰슨, 그리고 항공대장 스토빈 브래드포드 소령은 모두 중령으로 진급하였다.
 
구레에서 테세우스는 미 7함대 소속 항모 바동 스트레이츠호 정비진의 도움을 받으며 정밀 장비를 정비를 했다.
 
테세우스의 다섯 번째 출동은 서울을 중공군에게 내준 직후인 1월 5일에 있었다.
 
한국 해역에 도착한 1월 7일에 첫 출격이 있었다. 첫 초계비행의 임무는 최 일선에서부터 진남포까지 해안 지역 정찰, 적 병력의 이동, 선박을 이용한 적 보급 활동의 감시였다.
 
1월의 추운 날씨에 한국 해안의 대부분은 얼어서 얼음으로 덮여 있었다.
 
해안에서 적이 기뢰를 설치하는 등의 특이 동향은 발견되지 않았다.
 
반면 육상 전선에서의 공중 지원 요구는 급증하였다. 영 함대 사령관 앤드류스 제독은 미 5공군 사령관에게 영 해군이 유엔군 지상 병력을 위해서 하루 20 소티 이상의 지상 지원을 해 줄 수 있다고 제안했다.
 
1월 8일 오후 테세우스의 함재기들은 오산 남방에서 미 육군 25사단을 근접 지원하여 적 병력을 기총과 로케트로 공격했다.
 
영 함재기들의 지상 공격은 미 공군 T-6 표적 지시기의 유도를 따라 행해졌다. 영 조종사들은 작전 상공에서는 자기가 공격하고 싶은 목표를 선택해서 공격 할 수 있는 재량권이 주어졌다. 영 해군기들은 지상 지원은 물론 북 서해안 지역과 북한이 패주할 때 폐쇄 했던 북 비행장에 대한 정찰도 게을리 하지는 않았었다.
 


                                                                       씨 퓨리기


1월 13일. 폭설이 출격을 방해했지만 다음 날은 쾌청하여 함재기들의 출격이 가능했다.
 
그러나 몇 기가 출격을 한 뒤 사출 장치가 고장나고 말았다. 이미 상공에는 다른 기들을 기다리며 편대를 짜고 기다리는 씨 퓨리 기들이 있었다.
 
후속기들은 로케트 이륙 보조 장치를 부착하고 이륙할 수는 있었지만 외장(外裝)한 폭탄과 보조 연료탱크는 모두 제거하여야 했다.
 
적 타격에 사용할 무장은 단지 20mm 기관포뿐이었다. 좀 더 가벼운 화이어플라이기는 제대로 무장하고 이륙할 수가 있었지만 씨 퓨리기는 로케트 이륙 보조 장치인 RATOG를 사용하여야 한다.

15일. 묘안을 내서 전투기 계류 위치들을 재조정으로 해서 씨 퓨리기들이 이륙할 수 있었고 화이어플라이 기들도 로케트 이륙 보조 장치로서 이륙할 수가 있었다. 이 날 하이헷트 대위는 1,000번째 무사고 항모 착륙을 기록했다.
 
16일. 테세우스는 새로운 기록인 총 60소티[총출격] 기록을 수립하였다. 미영 합동작전 본부에서는 축하 메시지를 보내 테세우스가 전 미 5공군에서도 하지 못한 위대한 기록을 남겼다고 치하했다. 16일에 다른 중요 한 일도 있었다. 미 소형 항모 바타안 함이 테세우스와 함께 합동 작전을 위해서 영 함대에 증파되었다.
 
 
                                                             미 소형항모 바타안 16,000톤
                                                      조종사들은 해병대에서 파견되었었다


덕분에 앤드류스 함대 사령관은 자기 휘하의 두 척의 항모를 18일간씩 여유있게 교대로 운행할 수가 있었다.
 
이 조치로 영 항모들은 8일이나 9일간 출격하고 하루는 휴식을 취하고, 사세보에 급유와 보급을 위해서 오갈 때 여유 있게 하루를 더 사용할 수가 있었으며 6~7일간 사세보에서 머물러 정비와 휴식을 취할 수가 있었다. 테세우스는 사세보로 귀항하여 휴식과 정비를 했다.
 
이 정박기간 중 "일년 간 최고의 공을 세운" 영국 해군 조종사와 승무원들에게 수여되는 보이드 컵이 테세우스 조종사들에게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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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류로 보아 1950년, 북한은 모든 군 교육훈련을 6.24일에 완료한것으로 보여집니다. 이것은 북한이 6.25전쟁에서 남한을 침략하여 승리하기 위해 매우 치밀히 준비했던 결정적 증거중 하나이지요."



국방부의 원태재 대변인은 정책블로그 팀에게 [한국전쟁사]라는 책속에 책갈피처럼 보관되어 있는 몇장의 서류를 보여줍니다. (포스팅꺼리를 찾던 강군의 눈이 번뜩거립니다.ㅎ)



  
  이 문서는 한국전쟁 발발전 북한군 '6월분 공작 일정표'로 1980년대초 육군사관학교의 모 교수가 미국으로부터 가져와 공개한 자료를 카피한 복사본이라고 합니다.



  6월분 공작 일정표라는 정확하게 무엇인지 강군을 비롯한 정책블로그팀은 매우 궁금했습니다.ㅡㅡ;; (그때도 간첩이 있었나!! 공작이 뭐지)
 
  원 대변인은 "공작일정표라는게 우리 한국군의 교육훈련 일정표라고 보면 됩니다. 그러니깐 이 문서는 정확하게 애기하면 '북한군 6월 교육훈련 일정표'입니다."
 
  원 대변인은 설명을 계속 이어갑니다.

  "이 문서를 보면 요일별로 일정이 나와있습니다. 1950년 6월 24일에 모든 교육훈련이 완료가 되고, 25일 이후로는 아무런 일정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 문서는 1950년 5월 23일에 작성하고 결제를 받은걸로 봐선 적어도 한달전부터 이미 북한군은 6월 25일을 남침일자로 정해놓고 치밀하게 준비했던 것이죠"
 "그리고 표지에 당시 북한군 포병사령관 김무정의 이름도 선명하게 보입니다."



  한편, 이 서류는 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다가 육군사관학교의 모교수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으나, 세월이 오래된 탓인지 서류 곳곳에 6.25전쟁의 치열했던 상혼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위의 사진을 자세히 보시면 요일 일정표가 약간 삐뚤어지게 복사되어 있는데, 이건 총알이 서류뭉치를 관통하면서 남긴 흔적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보이시죠? 오른쪽이 사선들이 삐둘어진 모습들)

 



   올해는 6.25전쟁 발발 59주년입니다. 얼마전 조사에 의하면 초등학생들의 35% 이상이 6.25 전쟁이 남침이 아니라 북침(남한의 침략)이라 생각하며, 국민 5명중 2명이 6.25전쟁이 언제 일어났는지를 모른다고 합니다. 또한 6.25 전쟁 60주년 기념사업단 관계자의 애기로는 "앞으로 10년 후면 6.25 참전 용사들중 살아서 증언을 해주실 분들이 거의 안계실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중국의 학자 사마양은 "천하가 비록 평안하다 할지라도, 전쟁에 대비할 것을 잊어버리면 반드시 위태롭게 된다."고 했습니다. 6.25라는 비싼 대가를 치르면서 우리는 이 말을 뻐저리게 배웠기에, 이제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될 것 입니다

 


   4월부터 연이은 핵실험, 장단거리 미사일 발사 등, 북한의 도박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제59주년 6.25 기념일을 맞이하여 우리 모두 북한의 실체를 좀 더 정확히 알고 대비해야겠다고 다짐을 해봅니다. 
  
  오늘은 6월 25일...평일이라 시간이 여의치 않다면, 주말이라도 삼각지역 전쟁기념관을 방문해보는것 어떨까? 재미있는 행사도 많다고 하니 어제에 이어 오늘도 강군이 강추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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