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형 군대?] 

                                   제1탄.  현빈도 간다.



'시크릿00'의 차도남 현빈이 '해병대'를 지원하셨다는 사실, 모두들 알고 계시죠?    
"부디 선발되소~서!! ^^ "


                    '빤짝이 트레이닝복'을 입고, 현빈은 그렇게 해병대를 준비하였나보다.??? ^^



                           현빈은 '빤짝이'츄리닝, 해병대는 '빨간'추리닝! 우왕~닯았다.


우리의 네티즌님들, 현빈이 복무할 지도 모를 '해병대'.  과연 어떤 곳인지? 아니, 부대는 어떤지? (특히 여자분들.) 무척 궁금하실텐데요,  2011년 현빈이 입대할 군대는 '전투형 군대'!!!

아니, 전투형 군대는 뭥미??  ㅇㅇ;



          너무나 '귀여운 모습'이라 '해병대'가 아니라고요? 겨울이면 가뿐하게! 폭설피해 복구작전.


'전투형 군대'의 탄생은.. 작년, 아니 지금까지 계속되어온 '북한의 무자비한 도발'에 기인한다고 하겠습니다. 끊임 없이 '적화통일'을 꿈꾸는 북한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우리군은 고민,고민 하였드랬습니다.
'강한 대응'으로 감히 북한이 도발을 꿈꾸지 못하도록 해주자!  아자! 아자! 아자 ~~~~!!!
그래서, 국방부와 군은 2011년형 '전투형 군대' 준비하였습니다.
그럼, '전투형 군대'를 솜솜 뜯어 보실까요?


                                                                                                                                                                                    
     
    군 간부의 능력을 제고하고, 장병 정신교육과 교육/훈련을 강화하는 등 현존하는 전력을 극대화하여 현장에서 
   반드시 싸워 이기는 '군대다운 군대'로 재탄생하겠다 것이지요. 

   기존의 전력구조를 원점에서 검토하고 재설계하여, 우리군을 네트워크중심전(NCW)에서 합동성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는 군대로 만들겠다~ 이말씀!

    또, 이를 위한 많은 정책들을 추진하겠다는 것입니다.
 

 
20만 명 대 2만명???

남한 대 북한의 특수부대 병력이라지요? 끊임없이 적화통일 야욕을 불태우고 있는 '이글이글~~아이!!!  북한'. 북한의 특수전 전력은 세계 최대 규모로 평가받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남한 특수부대의 병력증강과 장비보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요...


                                         지금도 적화야욕에 불타고 있는 '이글아이' 김정일


다시, 현빈의 해병대 이야기!
직업군인 중심인 '특전사'와는 달리 '해병대'는 병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유사시 전략 타격부대 역할을 담당해야할 우리 군의 최정예 부대랍니다. (현빈님이 바로 이곳을 가고자 하신다는 거~ ! ) 또, 해병대는 통일 과정과 통일 이후에도 핵심역할을 담당하게 될 전략부대이기도 합니다.

'전투형 군대'! 더 알고 싶으시다고요?


            공군은 1월 11일부터 4일간 국산항공기 TA-50 최초전력화에 대비하여 부대 지휘관,참모 
            대상으로 시뮬레이터 처험을 실시하였습니다.



<제2탄>에 계속됩니다..       2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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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잊혀지지 않을 귀신잡는 용사들의 이야기
 
 

지난 1999년에 들어 북한이 서해에 새로운 군사분계선을 전격 선언하고 난 이후 연쇄적으로 벌인 일련의 군사도발로 인하여 NLL(북방한계선)을 서해 5도에 연한 군사분계선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동해바다에서의 군사분계선 또한 NLL이다. 다만 동해안의 NLL은 DMZ을 직선으로 바다 쪽으로 확장한 모양새이고 더불어 인근에 도서가 없기 때문에 서해 쪽과 지리적 여건이 다를 뿐이다.

 
                           보통 많이 간과하지만 NLL은 동해안의 군사분계선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동해에서 북한의 해상 도발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지금보다 더 극렬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1967년 작전 도중 북한 해안포의 포격에 의해 침몰하여 39명이 전사한 당포함 피격사건이나 이듬해 벌어진 미군 정보수집함인 푸에블로호(USS PUEBLO) 피납사건 그리고 1969년에 31명 탑승원 전원이 사망한 미군 정찰기 EC-121 격추사건이 모두 동해의 NLL 또는 북한 영해 부근에서 발생하였다.

 
                                  천안함 사건 이전 최악의 격침 사고인 당포함 사건
 

다만 적극적으로 분쟁지역으로 각인시키고자하는 서해에 비해서 동해의 NLL은 북한이 트집을 잡을 만한 이슈가 그다지 많지 않은데,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서해 5도 같이 북한이 껄끄러워 할 만한 전략요충지가 동해 NLL 인근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고 서해안의 석도나 초도보다 더 위협적인 위치에 있던 동해안의 여러 섬들을 휴전 직전까지 아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북한의 포격으로 파괴된 연평도 (사진-연합뉴스)
 

사실 해병대의 전략도서 확보작전은 서해보다 동해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신편 된 해병대 독립 제42중대는 1951년 2월 14일 초대 중대장 심희택(沈熙澤) 중위의 지휘 하에 원산 앞바다의 여도(麗島)를 거점으로 하여 주변의 신도(新島), 대도(大島), 모도(茅島), 사도(砂島), 황토도(黃土島) 등 총 6개 섬을 기습 점령하였다. 때문에 북한 측 동해안의 최대 요충지인 원산항은 전략적으로 봉쇄당한 입장이었다.

 
                           해병대는 여도를 비롯한 원산 앞바다의 주요 도서를 점령하였다
 

하지만 북한 입장에서 이보다 더 치욕스러운 사건은 해병대의 독립 제43중대에 의해 이루어졌다.  함경남도 명천이 고향인 최청송(崔靑松) 중위가 지휘한 제43중대는 그해 8월 28일, 명천군 상가면 앞바다의 양도(洋島)를 기습 점령하였다.  양도는 3개 섬으로 이루어진 소규모의 제도였지만 이곳의 점령은 북한입장에서 함경도 해안의 연해 길목을 차단당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여도에 상륙하는 해병대원의 모습
 

막강한 제해권을 발판으로 요충지 섬들을 해병대가 점령하자 북한은 이곳 섬들의 대안에 5배 이상의 병력을 증강시켜 배치하여야만 했고 그 만큼 최전선에 가해진 압박을 돌릴 수 있었다.  섬을 점거한 소수의 해병대가 육지로 진격할 수는 없었지만 북한 측의 공세에 수시로 격렬한 교전이 벌이지고는 하였다.  경우에 따라 일시적으로 외부와 연결이 단절된 해병대원들이 섬 안에 갇혀 산화하는 불상사도 있었지만 그러한 상황에서도 그들은 끝까지 최선을 다하였다.

 
                  동해 도서작전에서도 해병대는 불굴의 투혼을 보여 주었다 (사진-영화 스틸컷)
 

이처럼 동해안의 여도와 양도를 근거지로 하여 적의 배후를 양도부대로 개칭되었고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휴전 때까지 현 진지를 사수하였다.위협하고 적 보급차단 및 연안봉쇄에 혁혁한 전공을 세운 제42중대와 제43중대는 1952년 10월 여도부대와   비록 이들 부대의 도서작전은 전술적인 측면에서 중대규모가 펼친 작은 규모의 후방작전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눈엣 가시처럼 적에게 끼친 전략적인 효과는 엄청나게 컸다.

 
만일 원산만과 양도 일대에 NLL이 설정 되었다면 적들이 느낄 곤혹감은 대단하였을 것이다. 영흥만의 경우는 말할 필요조차 없지만 양도는 현재 북한의 미사일 기지로 유명한 무수단리및 핵 실험 장소 부근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러한 전과가 그동안 소홀하게 취급되어 왔던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휴전과 동시에 이들 요충지 섬들을 포기하고 철수하여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만일 이 섬들을 아직까지 우리가 장악하고 있고 이곳까지 NLL이 선포되었다면 과연 어떠하였을까?  서해 5도가 현재 대한민국 안보에서 차지하는 전략적 위치를 고려한다면 쉽게 답이 나올만한 이슈가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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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령도가 끝이 아니었다
 
 

'서해 최북단'
흔히 신문보도나 방송 매체에서 백령도를 지칭할 때 쓰는 표현인데, 백령도가 군사분계선의 가장 서북쪽 끝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휴전이후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군사분계선은 육상을 가로지르는 DMZ(비무장지대)와 바다의 경계선인 NLL(북방한계선)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철책으로 명확히 구분된 DMZ와 달리 NLL은 서해 5도의 북쪽 해상을 연결하는 바다 위의 가상 선이므로 육안으로 구별하기는 힘들다.
 

                   현재 서해 최북단인 백령도 (천연비행장으로도 유명한 백령도의 사곶 해변)
 

그런데 우리가 좀 더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면 서해 최북단의 섬은 백령도가 아닐 수도 있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당시에 유엔군사령관 클라크(Mark Clark)장군은 서해 5도의 북쪽인 북위 37도 35부와 북한의 점령지인 옹진반도 남단의 북위 38도 03부 사이의 중간 해역을 연결하여 NLL을 선포하면서 그 이북에 아군이 점령하고 있던 섬에서 철수하였기 때문이다.

 
                                         북한이 도발의 빌미로 삼고자하는 NLL
 

이때 해병대가 적의 도발을 물리치고 강고하게 점령하고 있던 동서해의 여러 섬들을 부득이 포기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서해의 석도(席島)와 초도(椒島)는 그야말로 요충지 중의 요충지였다. 석도와 초도는 평안남도와 황해도를 가로지르는 대동강하구의 광량만에 위치한 섬들인데, 북한 서해의 최대항구인 진남포와는 30킬로미터의 거리이고 평양까지도 70킬로미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북한의 심장부를 겨냥하는 위치인 석도와 초도
 

최근 연평도에 MLRS가 배치된 것과 관련하여 서해 5도를 방어기지가 아닌 유사시에 적 후방을 타격하는 전략 거점으로 육성하면 북한이 상당히 곤혹스러워 할 것이라는 의견에서 알 수 있듯이, 만일 현재까지도 석도나 초도를 우리가 장악하고 이곳에 장거리 타격무기를 전진 배치한다면 북한이 느낄 압박감은 이루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한 것은 석도나 초도의 점령은 북한이 서해바다를 포기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NLL이 석도까지 연결되었다면 북한의 서해는 완전히 고립되는 형국이다
 

NLL을 초도와 석도까지 연결한다면 북한의 서해바다는 완전히 봉쇄되는 형국이다. 현재 서해 5도로 인하여 주요 항구인 해주가 제 기능을 십분 발휘하지 못하는 것만 보아도 충분히 유추 가능한 부분이다. 지난 천안함 사태로 인하여 북한군 잠수함대가 전개하고 있는 해군기지로 알려진 비파곶이 바로 석도 맞은편에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위치의 전략적 가치를 충분히 알 수 있다.
 

                                  북한의 잠수함기지인 비파곶이 바로 앞에 있을 만큼
                               석도와 초도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교동도를 거쳐 백령도 점령을 완수한 해병대 독립 제41중대가 1951년 5월 7일 기습 상륙하여 석도와 초도를 장악하자 북한은 경악하였다. 북한이 얼마나 위기의식을 느꼈는지는 한 개 중대가 점령한 석도와 초도를 경계하기 위해 무려 2개 사단을 맞은편 대안에 이동 전개 시켰던 사례에서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다. 당연히 섬을 재 장악하기 위한 북한의 도발은 집요하였고 그 과정에서 철수 전까지 수많은 격전이 벌어졌다.
 

                           1951년 12월 21일 병력교대를 위해 초도에 상륙하는 해병대원
 

해병대는 압도적인 해군의 화력 지원 하에 적의 접근을 거부시키는데 성공하였지만, 소수의 부대가 적진 한가운데에 동 떨어져 벌이는 작전은 항상 많은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었다. 예를 들어 1952년 3월에 석도 앞의 작은 무인도인 호도에서 벌어진 격전에서 악천후로 인하여 외부지원이 끈긴 해병대 1개 소대가 5배나 많은 적의 공격을 끝내 격퇴시켰지만 소대원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실종당하는 참사를 겪기도 하였다. 이처럼 해병대는 피와 눈물로 서해의 요충지를 지켜내었다.
 
 
                            서해의 요충지를 소수의 해병대원들은 피와 눈물로 사수하였다
                             (석도에서 교전 중 부상당한 병사를 후방으로 이송하는 모습)
 

하지만 앞에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휴전협정 체결 후 유엔군은 원격지라 판단한 석도와 초도를 전격 포기하였다. 따라서 우리가 서해 5도에만 준하여 NLL을 설정한 것은 북한에게 커다란 은혜를 베푼 것과 다름없었고 사실 북한도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못하고 전후 20년간 엄중하게 이를 지켜왔다. 하지만 최근 방자하게도 이를 망각하고 도발을 일삼는 것을 보면 석도와 초도를 너무 쉽게 포기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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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해 5도를 사수한 소녀시대
 
 
1951년 4월 2일, 해병대 독립 제41중대는 강화도 서북단에 위치한 교동도를 기습 점거하였다. 당시 피아가 한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중이었기 때문에 강화도, 황해도 연백, 경기도 개풍을 동시에 감제할 수 있는 교동도를 확보하였다는 것은 한강 하구를 우리의 의도대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찬란했던 서해 5도 확보 작전의 시작이기도 하였다.

 
                                             교동도는 지금도 전략 요충지다
 

아군의 점령 전까지 교동도는 군사적으로 무주공산이었지만 강 건너 연백에는 대규모의 북한군 8사단 2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이들은 군사적으로 교동도를 점령하는 것이 불가능하더라도 순순히 내어주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지난 연평도 포격 사건처럼 교동도에 수시로 포격을 가하여 위협을 가하는 것과 동시에 간첩을 침투시켜 후방을 교란하는 양동 작전을 구사하였다.

 
                                   북한은 교동도에 대한 다양한 공세를 지속하였다
 

원래 작은 교동도에는 2천여 명의 원주민이 살고 있었지만 전쟁 통에 외지에서 유입된 피난민들로 인하여 거주인구가 1만을 상회하면서 간첩들이 활동하기에 좋은 여건이 조성된 상태였다. 따라서 제41중대는 교동도를 선점한 후, 진지 구축 같은 군사작전 외에도 적극적인 대민교육활동을 벌여 전선 바로 뒤를 혼란시키려는 북한군의 기도를 일거에 제압하였다.

 
                          피난민들이 몰려든 틈을 이용한 북한의 후방 작전은 집요하였다
 

이와 관련한 재미있는 한 가지 일화가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교동도를 점령한 독립 제41중대는 군목이었던 신성국 소위가 정훈조를 조직하여 간첩 색출과 더불어 거주민들을 상대로 한 방첩교육 같은 민사작전을 벌였다. 그런데 병력이 부족하다 보니 현지에 거주하던 많은 민간인들이 부대활동에 자진 참여하여 해병대의 활동을 적극 도왔고 그중에는 5명의 여고생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인천상륙작전 당시에 후방작전을 펼치는 해병대의 모습 (사진-Getty Images)
 

원래 교동도에 고등학교가 없기 때문에 그녀들이 진짜 여고생이었는지 아니면 학정을 피해 이북에서 피난 온 학생들이었는지는 모르지만, 포탄이 날아다니는 최전선 일대에서 중요한 활동을 벌이기에는 너무나 어린 소녀들이었음은 확실하다. 따라서 해병대는 위험을 경고하며 이들의 활동을 만류하였는데, 소녀들의 결심을 바꿀 수 없어 결국 민간인 계도 활동에 투입하였다.

 
                        전쟁 전 옹진반도에 주둔한 국군 제17연대를 위문한 여고생들의 모습
                        서해 5도에서 활약한 여고생들도 이와 비슷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사실 오늘날과 달리 당시에 여고생이라면 상당한 인텔리 계층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한마디로 지식과 미모를 겸비한 여고생들의 적극적인 정훈작전이 후방 대민계몽에 상당히 효과적이었던 것으로 해병대 전사에는 소개되고 있다. 굳이 언급하자면 그녀들을 당대의 소녀시대라 칭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소녀들의 활동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당시 여고생들은 상당한 지식인 계층이었다. (휴전 반대 데모를 하던 당시의 여고생)
 

제41중대는 다음 목표인 백령도를 점거할 예정이었고 당연히 소녀들의 동행을 거부하였다. 그러자 여고생들이 몇 날을 울고불고 애원하였고, 결국 무지막지한 떼쓰기 전술로 귀신 잡는 해병대를 처참하게 굴복시킨(?) 여고생들은 백령도까지 동행하여 멋진 후방 작전을 계속하였다. 해병대 전사를 살펴보면 그녀들은 이후 해병대와 함께 대동강 하구의 석도까지 침투하여 후방작전에 종사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란 속에 활약한 수많은 소녀시대가 대한민국을 수호하였다 (최초의 여성 해병인 문인순 여사)
 

아쉽게도 현재 여고생들의 정확한 신상이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분명한 것은 그녀들도 서해 도서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숨어있는 해병대원들임에 틀림없다는 점이다. 전란 속에 활약한 그녀들의 노고로 지켜낸 서해 5도와 NLL은 오늘날 대한민국을 지탱하는 힘이 되었다. 해병대의 서해 5도 사수에 기여를 아끼지 않은 당대의 소녀시대에게 진심으로 존경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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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LL 그리고 해병대

 
 
금번에 발생한 연평도 포격사건으로 인하여 NLL(북방한계선)이 국가 방위에 엄청난 역할을 하고 있음이 다시 한 번 부각되었다. 지리적 여건으로 말미암아 NLL에 배치된 우리 해병대의 전력이 북한군에 비해 절대 열세인 사실이 우려스럽게 다가왔지만, 그것을 역으로 생각하면 아군의 10배가 넘는 북한 4군단을 DMZ으로 전개되지 못하도록 잡아놓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리적 여건으로 말미암아 NLL의 아군이 열세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대규모의 북한군을 
             잡아놓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림-연합뉴스)

 
서해바다에 이렇게 전략적으로 놀라운 군사분계선이 위치하게 된 것은 백령, 대청, 소청, 연평, 우도로 점점이 흩어져 있는 서해 5도를 휴전당시 아군이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북한이 무효화를 주장하면서 NLL 자체를 인정하려 들지 않지만 막상 NLL을 선포하였을 때 북한은 가만히 있었다. 그러했던 이유는 한마디로 그것이 그들에게 유리하였기 때문이었다.

 
                               서해 최북단 백령도에서 바라본 장산곶 (사진-연합뉴스)
 

1953년 휴전직후 유엔군사령부는 휴전 당시에 별도의 논의가 없었던 해상 분계선과 관련하여 NLL을 선포하고 즉시 북한에 통보하였다. 그것은 NLL을 넘어서 우리 해군이 작전을 펼치지 않겠다는 의미였는데, 북한군이 이곳 아래로 내려오지 말라는 경고의 뜻보다 우리가 이곳을 넘어 북쪽으로 가지 않겠다는 통보에 가까웠다.

 
                        휴전협정 조인 당시의 모습 그런데 해상 경계에 대한 논의가 없었다
 

현재 NLL은 북한의 군사적 도발을 억제하는 최전선이 되었지만, 휴전 당시에는 오히려 북한이 얻는 이익이 컸다. 바로 전쟁 내내 그들을 공포로 몰아넣으며 괴롭혀온 유엔군 해군의 공격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즉 유엔군 해군이 알아서 어느 선 이상으로 올라오지 않겠다고 스스로 선언하였으니 너무 반가웠던 것이었다. 그만큼 그들은 바다를 심정적으로 포기한 상태였다.

 
                        한국전쟁 당시 적진을 향해 날리는 전함 미주리의 가공할 포격 장면
 

NLL 설정 당시에 아군이 장악하고 있는 도서를 연결하여 바다위에 분계선을 긋는 것은 너무 당연하였다. 국경이 아닌 군사분계선은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있는 곳을 연결하는 것이 불문율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NLL을 다행스럽게 생각한 북한은 휴전 직후에 어떠한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그런데 1973년 이후부터 북한은 서해 5도 주변수역을 연해라고 주장하면서 긴장을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제1차 연평해전 당시의 긴박한 모습
 

계속적인 군비증강으로 우리를 앞섰다고 판단한 북한은 이때부터 노골적인 도발야욕을 표출하였다. 당시는 월남전이 격화되어 가고 있었고 더불어 한반도 방위의 한 축을 담당하던 미 7사단이 철수하는 등 주변정세가 좋지 않게 돌아가던 중이었다. 더불어 오일쇼크에 따른 극심한 경제 침체도 우리를 어렵게 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침략의 명분을 잡기위해 NLL에 대한 북한의 트집이 시작되었던 것이었다.

 
                             철수 전 미 제7사단이 주둔하였던 레드크라우드 기지 정문
 

지금은 그때와 안보환경이 많이 바뀌었지만 서해에서 벌어진 여러 차례의 교전이나 연평도 포격처럼 북한이 아직도 NLL에 목을 매는 이유는 NLL의 철폐보다 긴장감을 조성하여 북한내부의 동요를 단속하려는 목적과 동시에 대한민국의 내부분열을 노리기 때문이다. 사실 처음 언급한 것처럼 오래되었지만 생소했던 단어인 NLL이 최근 들어 누구나 알게 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해병대 제6여단과 연평부대의 선배인 독립 41중대를 포함한 도서방어부대기
 

이렇게 현재도 우리 안보를 굳건히 지키는 최전선인 NLL이 성립될 수 있도록 서해 5도를 확보하게 된 것은 전쟁이라는 혼란한 상황 중에도 그 전략적 위치를 미리 인지하고 전광석화 같은 도서 확보작전을 펼쳤던 해병대 독립 41중대를 비롯한 도서방어부대의 분투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곳을 이제는 후배들인 해병대 제6여단과 연평부대가 굳건히 지키고 있다. 변함없는 당신들의 투혼에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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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연평도 포격도발' vs. '우리군의 대응'
                           
 




북한은 '천안함 폭침사태' 이후 8개월 만에, 1953년 '정전협정 체결 이후 최초'로  대한민국 영토를 직접 포격하였습니다. 북한의 170여발의 포탄중, 80여발이 육상에 떨어졌으며, 이들 중 상당수가 연평부대에 떨어졌다고 합니다.

이러한 불법적, 기습적 무력도발에도 북한은 그 책임을 우리측에 전가하고 있습니다.
입으로는 '우리민족'을 내세우나, 이번 연평도 포격도발은 대한민국 국민 전체를 적으로 삼고있음을 명맥히 보여주었습니다.


이에 우리군은 '강한 억제'와 '보복응징 태세'를 재확립하고 있습니다.


     1. 북한 사격 후 13분만에 대응사격, 너무 소극적이지 않았나?


당시 우리군은 통상적 해상사격 훈련을 시행하고 있었으며, NLL지역으로는 단 한발도 지향하지 않았습니다.  

"왜 북한이 사격을 개시한 지 13분 뒤에 대응사격을 했는가?", "왜 80여 발만 사격했는가", 그리고 "공군 전투기로 보복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등등등 국민들의 우려가 많습니다. 


                                          북한의 포격 도발로 검은 연기에 휩싸인 연평도 모습


그러나, 사건 당시 사격진지에는 적의 포탄이 떨어져 포진지 내에 화재가 발생한 상태였고, 그 불길이 탄약고 쪽으로 번지자 포반 장병들은 직접 불길도 진압해야 했으며 생존성도 보장해야만 하는 상황이었기에, 13분 만에 첫발 사격은 연평부대가 잘 훈련된 부대였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K-9 자주포는 포사격 훈련 중이었기에 남서쪽을 향하고 있었고, 사격 준비에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으며, 연평부대가 북한의 사격이 끝나기 전부터 준비하여 사격종료 직후 곧바로 반격한 것은 오히려 우리 해병용사들이 평소에 잘 훈련되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2. 북한포격 절반수준의 대응사격은 교전규칙상 ‘비례성의 원칙’을 어겼다?


당시 우리 군은 북한의 포탄 중 부대 내에 떨어진 것만을 확인 가능하였고 민간에 떨어진 것은 확인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기에 적 포탄의 절반 이상이 해상에 떨어졌다는 것을 감안하면, 현장 지휘관은 사실상 두 배 정도로 대응수준을 결정하였던 것으로, 적절하였다는 평가를 받고있습이다. 북한이 사격한 170여 발은 최종적으로 확인된 육상 및 해상에 떨어진 모든 포탄의 수효입니다.


                                                                 자주포 실사격 모습


   3. 왜 공대지 사격을 실시하지 않았나?    


이는 UN사 교전규칙과 관계가 있습니다. 1953년 유엔사가 만든 교전규칙은, 확전방지를 위해 필요성과 비례성, UN헌장에 규정된 자위권 차원에서 대응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교전규칙이 과연 현실에 적절한가의 논란은 있을 수 있으며, 우리 대통령과 국방부장관도 유엔사와 협의하여 교전규칙을 수정, 보완해 나가겠다고 한 바 있습니다.

북한은 군 장병뿐만 아니라 민간인의 희생이 있었음에도 사태의 엄중함을 외면하고, 유엔군사령부가 제의한 ‘유엔사-북한군 간 장성급회담’ 개최도 거부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민간인에 대한 공격'은, '국제법상 금지된 중대 범죄'입니다. 민간인 피해가 나면 전쟁 중이라도 상대방 국가와 국제사회에 사과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하는 것이 국제사회의 준칙입니다. 

우리군은 북한의 재도발 의지를 꺾고 대한민국을 지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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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들이 있기에
 
 

북한의 연평도 급습 당시의 생생한 모습을 담은 몇 장의 사진들이 공개 되었다. 특히 포진지가 적의 피격으로 불타는 위급한 순간임에도 침착하게 K-9자주포를 전개하는 해병대원들의 처절한 사투와 철모가 불타고 얼굴에 화상을 입는 와중에도 맡은바 임무를 다한 임준영 상병의 모습은 보는 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어 주었다.

 
                                   철모가 불타는 순간에도 최선을 다한 임준영 상병
 

그러한 연평부대의 처절했던 11월 23일 전투의 모습에서 지난 60년 전 기습남침을 감행한 압도적인 북괴군에 맞서며 살신성인의 분투를 보여 주었던 제18포병대대의 모습이 떠올랐다. 시대와 환경이 다르지만 이번 해병대 연평부대의 투혼은 지난 한국전쟁 당시 제8사단 18포병대대(현 제2사단 예하)의 모습을 반추하는데 결코 모자람이 없고 생각되어 소개한다.

 
                                        적의 기습으로 탄흔이 가득한 포진지의 모습
 

1950년 6월 27일 새벽 4시, 그동안 국군 제8사단의 강력한 저항으로 진격이 지체되었던 북한군은 5배나 많은 전력을 앞세워 공격을 재개하였고 결국 국군 제5사단 10연대가 담당하던 연곡천 방어선을 돌파하였다. 이때 10연대의 급작스런 붕괴로 말미암아 최전방 배후까지 올라와 화력 지원을 하던 제18포병대대의 포진지도 동시에 적의 전면에 노출되는 위기에 빠졌다.
 

                                      창군 초기 국군의 유일 중화기였던 M-3곡사포
 

만일 이 상태에서 무작정 후퇴한다면 이동속도가 느린 포병대대 전체가 적에게 추월당하여 포위될 가능성이 농후하였다. 따라서 포병대대는 정면에서 교전하여 적의 진격속도를 누그러뜨리면서 후방으로 이동하기로 하였다. 장병들의 생사도 물론 중요하지만 아군의 유일중화기와 다름없는 M-3곡사포를 최대한 보존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이처럼 단 한 문의 포도 쉽게 포기할 수 없었을 만큼 한국전쟁 초기에 우리 군의 전력은 부족하였다.

 
                               포병대대는 적을 가시권까지 끌어들여 직접 타격하였다
 

포병대대원들은 옥쇄(玉碎)의 각오로 인식표를 땅에 묻고 포병진지 전방 100미터까지 적들이 다가오도록 기다린 후 수평으로 포신을 낮추어 직접 타격하여 적을 당황하게 만들었고 포진지로 난입한 적과 백병전을 치루며 포들을 이동시켰다. 이러한 급박한 와중에도 2문의 포가 밭에 빠져 회수할 수 없자 적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조치하고 난 후 후퇴하였을 만큼 대대원들은 침착하였다.

 
                                           제18포병대대 순국 3용사 추모행사
 

이때 2번 포차 운전병 심우택 이병은 포 폐쇄기를 안은 채 산화했고, 통신소대 최서종 중사는 와이어 드럼을 회수하기 위해 적진으로 뛰어 들어갔다 돌아오지 못했다. 또한 관측반 한명화 하사는 끝까지 관측소에 남아 임무를 수행하다 순국했다. 이처럼 적에게 포위 될 위기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제18포병대대 병사들이 보여준 이러한 분전은 전쟁 당일 강릉을 점령하려던 북한의 계획을 무려 사흘간이나 지체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힘이 되었다.

 
                                          그대들의 분투에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이번 적의 연평도 도발에서 압도적인 적 해안포 세력에 비해 불리한 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연평부대가 보여준 놀라운 사투는 밤하늘의 별처럼 국군의 자존심을 세워 준 모습이 아닐까도 생각되며 60년 전 제18포병대대가 보여준 용전과 비교하여 결코 모자람이 없다. 선배들 못지않은 투혼을 보여준 연평부대원들의 노고에 감사의 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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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혈국방' 입니다. 오늘은 11월 23일 북한의 연평도 포격도발에 맞선던 우리 해병들의 모습을 보여드립니다. 


누구나... 우리군에 대해, 남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너무나 쉽습니다만, 정작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적은 것이 아쉬운 때입니다...


         11월25일 북한 연평도 포격도발로 우리해병대의 사격훈련이 순식간에 실전으로 전환되었다.


우리해병은 빗발치는 포탄 속에서, 전우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며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정비소대 조수원 일병".... 북한의 1차 피폭시 부상을 당해 구급차 후송을 대기하고 있었으나, 승차인원이 제한되어 자신보다는 전우를 위해 나중에 탑승 하였습니다. 심각한 조일병의 부상을 목격한 동료해병 4명(일병 조다형 외 3명)은 조일병을 들것에 싣고 포격을 피해가며 의무대로 후송, 조일병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조일병은, 반드시 그분들을 찾아 보답하겠노라고 말합니다.


"중화기 중대 김지용 상병"은...... 동료 해병들과 북한군의 포격간 마을주민을 대피시키고 잠시 소강상태가 된 사이 부대로 복귀, 곧 2차 폭격이 시작되었으나 파편으로 인해 목 파편상을 입었음에도 중대 관측담당관 김종선 상사가 김상병의 목을 지혈하며, "넌 반드시 내가 살린다."는 약속으로 안전해 보이는 건물외부 탄약고로 피신을 시켰습니다. 이후 몸을 추스린 김상병은 절친했던 동료해병의 인기척이 없음을 김종선 상사에게 보고했고, 김상사는 포격이 쏟아지는 건물로 되돌아가 피폭된 건물 속에 피신하고 있던 두명의 해병을 구해냈습니다.  


                           북한의 도발이후 연평도 도로에 뒹굴고 있는 북의 포탄 잔해물들 


"포7중대 상병 박진관"은 최초 1포대 포상이 피격당하자, 자기 한몸의 피신보다는 오로지 K-9자주포로 즉각 대응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근처 소화기를 사용하여 자주포 주변의 모든 화염을 완전히 소화시킨 후에야 안전한 곳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경상자로 분류되었다가 중상자로 재분류되어 수도통합병원으로 후송된 "공병소대 박봉현 일병"은 끝까지 전우와 싸우겠다며 군의관에게 고집을 피워, 심한 골절로 더이상 걷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서야 눈물을 머금고 뒤늦게 국군수도통합병원으로 후송되었다고 합니다.


                                         해병대 '불굴의 감투정신'을 발휘한 포7중대 임준영 상병 


철모가 녹아내리는 가운데에도 즉각 대응사격을 실시한 해병대원의 이야기를 아십니까?
"포7중대 임준영 상병"...평소처럼 교육훈련에 매진하던 중 갑작스런 북한군의 포격을 맞이하고서도 자신의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는 일념하에 중대장의 지시에 따라 무작정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고 합니다. 임상병 철모에 붙은 불길은, 그의 전투복과 철모턱끈을 타고내려와 화상을 입혔으나, 임상병은 뜨거움을 느낄 여유도 없이 북한군 포격에 응사하였습니다. 이후에도 임상병은 불에탄 철모를 쓰고 복구작업에 임하였습니다. 그는 해병대 감투정신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11월 25일 오전, 해병대 장병들이 인천에서 백령을 향해 승선하는 모습

해병대 정신과 전우애는 남다르다 더니, 빗말은 아닌가 봅니다.... 이 상황에, 너무 감성적인 이야기라고요?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현재 이같은 모습으로 대한민국을 위해 북한에 맞서고있는 우리해병 이야기가 듣고 싶습니다. 


                              북의 도발에 대응 준비를 하고있는 백령도 주둔 해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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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3일 연평도에 대한 북한의 무력도발이 있었으나, 우리군은 계획대로 한미 '연합군사훈련'을 실시할 것입니다.  


'한미 연합훈련'에 참가할 미 항공모함 조지워싱턴 함(가운데)이 지난 7.26일 ‘불굴의 의지’ 연합훈련의 일환으로 독도함(1만4000톤급), 한국형 구축함(4500톤급), 미 이지스 구축함 등과 함께 항진하는 모습



우리군은 미국과의 안보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11월 28일~12월 1일 '연합군사훈련'을 실시하고 훈련 강도를 더욱 높이기로 하였습니다.


김태영 국방부장관은, 미 국방장관과 전화를 통해 '북한의 연평도 포격도발'은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되었던 의도적 도발로 평가하고 현상황 평가와 대책을 논의하였으며,

11월 23일 한민구 합참의장은, 월터 샤프 연합사령관과 화상회의를 갖고 북한의 추가 도발 방지를 위한 한미 간 공조체제를 논의하였습니다.

오는 11월 28일~12월1일, 서해상에서 미국 항공모함 조지워싱턴 함(9만7000톤급)이 참가한 가운데 연합훈련이 실시될 것입이다.

핵잠수함을 제외한 한측 구축함 · 초계함ㆍ호위함 · 군수지원함 · 대잠항공기 등과, 미측 순양함 카우펜스 함(CG62·9600톤급), 구축함 샤일로 함(DDG67ㆍ9750톤급)을 비롯한 스테담 함(DDG63), 피츠제럴드 함(DDG62) 등이 참가할 것입니다. 


방어적 성격으로 실시되는 이번훈련은 북한의 해안포 도발 이전에 이미 계획되었던 것으로, 억제력 강화와 역내 안정을 증진시킬 것이며 양국군의 상호운용성 향상과 한미동맹 결의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금번 한미 연합훈련 일정은, 중국에 이미 통보하였으며, 북한에도 통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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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의 연평도에 대한 무자비한 포사격에 대응하던 중, 우리 해병 2명이 전사하였습니다.




故 서정우 하사(해병 1088기).... 마지막 병장휴가를 위해 육지로 향하던 중, 포탄 낙하상황이 북의 기습포격임을 듣고 전투에 임하기위해 부대에 복귀하던 중 포탄 피해를 입고 전사하였습니다. 
故 서정우 하사는 연평부대 중화기 중대의 공용화기 사수로서, 다양한 공용화기를 운용할 수 있는 최고의 전투력을 지닌 해병이었습니다.

 
전사한 故 문광욱 일병(해병 1124기)은 연평부대 본부 중대 수송반에 배치되어 서북도서 수호에 최선을 다하며 신병답지 않은 능숙한 임무 수행으로 훌륭한 해병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고 합니다. 
故 문광욱 일병은, 사고 당일 포병 사격훈련장 임무를 수행하던 중 기습 포격 속에서 그 누구보다도 먼저 달려나가 전투준비를 하던 중 무자비한 북한군의 포격에 파편상을 입어 전사하였습니다.



 
갑작스런 포탄 피격 속에, 연평부대원 절반 이상이 직접 나서서 주민들의 대피를 도왔으며 주민들중 잔류인원을 확인하는 등 군인본분을 다하여 피해를 최소화하였습니다. 피해를 입은 연평전투 부상자들은 후송되어 국군수도통합 병원에서 치료 중에 있으며, 해병대 사령부는 전사자들에 대하여 최대한의 예우를 갖추어 장례절차를 진행하고 있으며 화랑무공훈장을 추서할 예정입니다.




현재 해병대사령부는 해병대사령관 주관 협조회의를 통해 연평도 상황을 예의주시하면서 연평도 내 장병과 주민들에 대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대피호 피신 주민들을 위해서는 모포 400장, 컵라면 2,500개, 식수, 전투식량, 건빵, 음료수 등을 지원하였으며 언제 어디서나 출동 가능한 상륙군의 특징을 살려 연평도 피해복구를 위해 신속하게 대응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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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5일, 그제 였습니다.  제60주년 '인천상륙작전 기념식과 그 재현행사'를 다녀왔습니다.
우선, 해상에서 있었던 재현행사가 궁금하시죠?
그래서, 열혈국방이 대신 가서 동영상을 녹화해 왔습니다. 보시죠!  충성!







                                                   인천상륙작전 재연은 맥아더 장군과 함께!

                                          재연행사의 마무리는 역시 맥아더의 멋진 퇴장! ㅋㅋㅋ 


자~ 이제 그럼, 인천상륙작전 재현행사 바로 전에 있었던 '6.25 60주년 기념식'을 만나보시죠!^^


                       행사시작 20분전. 월미도입니다. 무더운 햇볕을 맞으며 기념식장으로 가는 길



                                     인천 월미도 앞바다에 준비된 기념식장 전경이에요.



                                     '인천상륙작전 해병대참전용사'분들 오셨구요,



          따가운 햇볕, 합참의장님,연합사령관님,국외 참전용사 대표님(빨간 옷) 등이 함께하셨어요.


                         세계 곳곳에서 UN군 참전용사들과 그 가족 분들도 오셨습니다.


기념식 사회자의 개식사로 기념식이 시작되자, UN기와 참전국 국기들 입장합니다.


                                        

이어 UN군 참전용사 대표분들께서 입장하셨고요.


                         각국의 UN군 참전용사들이 우리 해병대 전차를 타고 식장으로 입장!




이어, 국방부장관의 대통령 축사 대독과 주요인사들의 영상 메시지 상영이 진행되었습니다.


                                              국방부장관의 대통령 축사 대독


기념식이 끝나고, 월미도 앞 해상에서 인천상륙작전 재연이 있은 후(앞쪽에 동영상!), 국내외 참전용사분들을 모시고 참전용사 격려연이 진행되었어요. 

격려연 행사장 한쪽에서는 해군의 '바다사진전'과 '인천상륙작전 전승기념 미술대전'이 동시에 진행되었는데요,



 


                    귀여우신(? ㅋㅋ) 우리 해군의장대 사진도 눈에띄네요.  "찰칵!"
 


이렇게, 인천상륙작전 행사장면만을 보신다면.....정말 멋지지 않습니까? 


하지만, 행사에 참석하신 6.25 참전 한국군과 UN군 용사들의 모습 속에서, 열혈국방은.. 잊혀지지 않은 전쟁의 아픔과 승리의 자부심이 교차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              

                                                                          
                                                                                 <열혈국방 생각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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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열혈국방'입니다.^^


요즘, 태풍때문에 출퇴근시 지하철 운행중단에, 아름드리 나무도 뽑혀나갔고, 날씬한 우리의 몸도 바람따라 구름따라 날아가 버릴 뻔 했잖아요? ㅎㅎㅎ... 아닌가요??


                                             태풍땜에, 나무도 울고, 나도 울고..흑! 흑! 흑!

 
요즘, 사실 좀 섬찟! 하셨을 겁니다. "태풍이 무서워!~"   그러나,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일이 생기면~짜짜짜짜, 짜짱~가  엄청난~   바로! 우리 '군'이 있지요. " 
그 누구도 못막는 자연재해 때마다! 그 복구현장에는 늘 우리 군이 있었다는 사실!


                                          정말 멋져요~ 우리 육군71사단 오빠들~
   

때는, 금번 9월 2일이었습니다. 10년만에 최대 강풍을 몰고 온 제7호 태풍 '곤파스' 때문에 우리는 인명과 재산 피해를 입고 말았습니다. 
태풍이 한반도를 빠져나가기가 무섭게 피해복구에 뛰어든 이들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육군 57사단, 71사단과 해군 3함대사령부, 해병대 청룡부대였습니다.

특히, 육군57사단은 경기 구리 토평교 인근에서 태풍으로 쓰러진 비닐하우스 10여 동을 치우는 등 대민지원을 하였고요. 71사단은, 40년된 나무도 쓰러져버린 경기 남양주 시내의 도로 복구에 앞장 서기도 하였답니다.


                                       태풍으로 찢어진 비닐하우스의 비닐 제거중입니다. 충성!


"육군만 군인이냐?"

아... 그렇지요? ^^;

우리 해군 3함대는요, 전남 신안군 흑산면으로 달려가 도로 시설물 복구에 최선을 다하였고요, 해병대청룡부대는 경기 김포시 침수지역에서 토사제거와 침수민가 자재도구 정리 등 재난피해 복구에 앞장서기도 하였습니다.   등등등... 

정말 아름답지 않습니까?  호호호~   사실, 아예 재해가 없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요....

제 이름이 '열혈국방'이라서 그런건가요?  하루하루 시간이 갈수록, 왠지~ 우리 '군'에 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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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링크 : http://mnd.go.kr/policyFocus/reform/outline/index.jsp?submenu=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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