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 전쟁사 (독일 만슈타인 장군) -제4편-


                                                만슈타인


히틀러에게는 호전적인 독재자들에게 나타나는 공통적인
병리현상인 과대 망상증이 있었다.

리델하트의 책에서 밝히지는 않았지만 바로 이 무렵 히틀러는
“내 주위에 문관이건 무관이건 나보다 나은 인간이 한 명도 없다!”라고 큰 소리친 일이 있었다.

만슈타인의 전략으로 성공한 아르덴느 숲 돌파 작전을 자신의
능력에 의한 것임으로 착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까 히틀러의 과도한 작전 개입은 만슈타인의
천재성이 가져온 괴상한 산물(産物)일 수도 있다.

전쟁 지휘를 일선 지휘관에게 맡기라는 만슈타인의
고언은
히틀러와 그의 주변 나치 간신들이 듣지 않았다.

만약 그렇게 해주면 히틀러에 대한 불신감이 짙어져 가는 군부를
통제하기가 힘들다는 것이었다. 히틀러가 적극 공감하는 소리였다.

만슈타인은 몇 번이고 진언했고 히틀러는 몇 번이고 거부했다.
속 좁은 히틀러는 불쾌했을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이런 명장을 물리치기가 너무 아까워서 차마 그를 해직시키지 못하고 연기해 왔다.


                                              독일의 돌격포


게슈타포 사령관 히믈러, 그리고 선전상 겝벨스들이 거들며
만슈타인을 모략해댔다.

히틀러는 1944년 3월 31일 만슈타인을 파면하고 이틀 뒤에 그 자리에 그의 말을 잘 듣는 모델 장군을 임명했다.

같은 시기 히틀러의 과도한 작전 개입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크라이스트 원수도 해직되었다.

만슈타인은 그의 저서의 대미(大尾)를 부하들과 이별할 때의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모델 장군과 인수인계를 마친 그는 4월 3일 정든 부하 전우들과
이별을 고하고 남부군 사령부가 있던 르보프를 떠났다. 그가 사랑했던 부하들은 모두 기차 역까지 나와 아쉬워하며 그와 석별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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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누가 열차 밖에서 나를 불렀다

나의 전용기 Ju-52의 조종사였던 렝거 중위였다. 그는 갖가지 악천후와 어려운 비행 조건에서도 나를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었던 유능한 조종사였다.

그는 이미 전투기 부대로의 전출을 상신해 놓은 상태였다.
중위 계급의 조종사는 최전선에 보내져서 전사율 높은 출격에 내보내지는 그런 다급한 상황이었다.

달리는 열차 창문에 대고 그가 외친 말이 부하들이 존경하는 사령관에게 보내는 마지막 고별사였다.

“원수님 ! 오늘 제 비행기에서 크리미아 방패 표식  -히틀러가 수여한 크리미아 전투 참전 기장- 을 떼어 버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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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U-52. 독일군 소속이 아니라 현재 루프트한자 소유로 민간 비행기다.



말단 장교인 중위가 만슈타인을 해고한 히틀러에 대한 원망을
표시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방법 밖에 없었을 것이다.

만슈타인은 독일로 돌아와서 군을 떠나 조용히 은거생활에 들어갔다.
그가 해임된 후 1944년 7월 슈타이펜베르그 대령에 의한 히틀러 제거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다.

수 십 명의 장교들이 이 계획에 동조했다가 죽임을
당했다. 롬멜 원수도 그 중 하나였다.

만슈타인도 이미 그 전 해에 이 계획에 참여하도록
부탁을 받았었지만 그는 무슨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취지에는 공감한다면서도 참여를 거절했었다.


"Preussische Feldmarschalle meutern nicht!“
[“프러시아의 원수는 반역 같은 짓을 하지 않네!”]

히틀러가 엉망진창의 전쟁을 하는 것을 알면서도 만슈타인의 프러시아 적인 군인 정신은 감히 최고 사령관에게 반란을 꾀하는 것을 생각지도 못하게 했던 것이다.

독일이 패하자 그는 접근해오는 소련군을 피해 가족을 데리고 서부 전선의 영국군 몽고메리 원수에게 직접 항복했다.

소련은 영국에게 만슈타인의 인계를 집요하게 요청해왔다. 영국이 소련의 압력에 응하지 않으려면 그를 직접 재판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말단 부하가 전쟁 상황에서 저지른 학살 사건에 책임을 지고 법정에 섰다.

만슈타인은 18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그에게 호의적인
영국 여론의 압력에 의해 12년으로 감형되었다.

그가 훌륭한 장군이었음을 알아 주는 처칠 수상과 몽고메리 원수,
그리고 리델하트가 그를 공공연하게 옹호하였다. 수상에서 물러나 재야인이 된 처칠은 그의 변호사 비용까지 후원해 주었다.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영국군에게 비참한 대패를 연달아
안겨 준 롬멜에 대한 인식이 별로 좋지 않았던 영국에서 만슈타인에 대한 인식만은 아주 좋았던 것이 이색적이다.

영국군 형무소에 구금되었던 그는 4년 후에 석방되었다. 서독군이 재무장하게 되자 그는 당시 수상이던 콘라드 아데나우어 원수에게 초빙 받아 군의 조직 편성과 나토군 편입에 관한 조언과
입안을 했었다.

이 일이 끝나자 그는 바바리아 주로 이주해서 조용히 살았다.
명장이며 청렴했고 부하들의 존경을 받았던 그를 숭배하는 서독군 장교들과 나토군의 각 군 지도자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았다.

독일 연방군[BUNDESWEHR,히틀러 시절 독일 국방군은 WERCHMACHT다]에서는
만슈타인이 실질적인 참모총장이라는 우스개 소리까지 나왔었다.

그는 1973년 85세에 심장마비로 작고해서 그의 큰 아들의 곁으로 갔다.
큰 아들 게로 중위는 1942년 이미 동부 전선에서 전사했었다.

그는 1953년 전범으로 수감되었던 영국군 형무소에서 석방되자
1955년 '잃어버린 승리[Verlorene Siege]'라는 제목의 책을 집필했다.


                                                잃어버린 승리


이 책은 1958년도에 미국에서 'Lost Victory'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는데 세계에 이 영어제목으로 널리 알려지고 세계의 군사 전문가들 사이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동부 전선의 불리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승리를 잃지 않았던 만슈타인이
히틀러의 과도한 간섭과 미친 전쟁 지도만 없었더라면 자신을 비롯한 전문적인 군사 지식을 가진 독일 장군들이 틀림없이 승리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나타나는 제목이었다.

리델하트가 독일 장군들을 인터뷰했을 때도 꼭 같은 말을
들었는데 이는 만슈타인의 책 출간보다 앞선 것이었다.

만슈타인의 개인적인 자신감이 아니라 대 소련전의 최전선에서
싸웠던 독일 장군들이 공통으로 갖는 인식이었기에 이런 제목을 붙였을 듯하다.

자신이 명장이라는 과대망상에 빠져 마구잡이 간섭으로 전쟁을 망친 히틀러는 그에게 엉뚱한 자신감을 가지게 만든 아르덴느 숲에서 또 한 번 자신의 군사적 재능을 도박 해보고자 했다.

아르덴느 2차 작전이 그것이다. 우리들한테는 발지 전투로 알려졌다. 독일군 총사령관 룬드스탠드 전투라는 이름도 있다. 만슈타인이 제안했고 히틀러가 승인했던 1차 아르덴느 돌파작전을 그대로 답습한것이다.

숲을 관통해서 미군과 영국군을 양분하고 벨기에 안트워프 항까지 직통하는
작전이었는데
망해가는 독일이 가진 전투 자원을 모두 동원해서 정면의 미군을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아르덴느 숲의 미군


전투 자원을 다 써버린 독일은 연합군의 진격을 제대로 제지할 힘이 없어서 1945년 5월 히틀러는 자살하고 전쟁은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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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마의 세 가지 유산 중 하나였던 올림픽 성화
 
 
 
제2차 대전이 끝난 지 반세기가 지났지만 히틀러라는 희대의 독재자와 나치라는 전범 집단을 긍정적으로 볼만한 요소는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인류사에 끼친 악행이 쉽게 치유되기 힘들만큼 너무나 컸기 때문입니다.  독일에서 조차 동동장소에서 나치와 히틀러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금기시되고 법적으로도 나치에 대한 모든 것이 부인되고 부정될 정도입니다.

 
                          히틀러와 나치는 두말할 필요 없는 인류사의 악입니다
 

하지만 한 시대를 좌지우지하였던 인물과 집단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아직도 음으로 양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는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시대에 뒤진 인종주의를 찬양하는 네오나치 ( Neo NAZI ) 같은 극소수의 추종세력들에게 히틀러와 나치는 아직도 영웅시되고 본받아야 할 교범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경우는 인간세계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가끔 어처구니없는 극소수의 추종세력이 아직도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이들 악마들이 남긴 유산 중에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좋은 전통이나 문명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있습니다.  애써 부인하고 싶지만 이것들을 악마의 긍정적 유산으로 지칭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세 가지 예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첫째 유산 - 폭스바겐 비틀 (Volkswagen Beetle)
 

모든 국민들이 차를 소유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하며 1933년 정권을 잡은 히틀러는 차량 설계자인 페르난트 포르쉐에게 다음과 같은 조건을 만족하는 새로운 개념의 차, 즉 국민차의 개발을 의뢰합니다.


                                           히틀러와 폭스바겐 비틀
 

어른 두 명과 어린이 세 명이 탈수 있고, 1리터의 연료로 14.5km이상 달릴 수 있으며, 최대시속은 100km의 고성능이지만 정비하기 쉬어야하되, 값은 1천 마르크 이하(당시 1천 마르크는 오토바이 한대의 가격이었음)로 저렴해야 한다는 까다로운 조건이었습니다.
 
                                 현재도 명성을 이어가고 있는 New Beetle
 

불가능할 것 같은 이러한 어려운 조건을 만족시키며 탄생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딱정벌레(Beetle) 였습니다.  하지만 1939년 제2차 대전의 시작으로 공장에서 조립 중이던 국민차는 대중에게 공급되지 못하고 급히 군용차로 변경되었습니다.  전쟁을 염두에 두었던 히틀러의 전략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폭스바겐 비틀의 명성은 아직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둘째 유산 - 아우토반 (Autobahn)
 
                                   아우토반 기공식에 참석한 히틀러와 나치 간부

 
아우토반은 독일이 건설한 자동차 전용도로였는데, 진정한 세계 최초의 현대식고속도로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히틀러 집권 전 일부구간이 개통하기는 하였으나 나치가 정권을 장악한 후, 독일의 동서의 주요구간을 가로지르는 총연장 7,000Km에 달하는 통합 간선도로망 건설에 착수합니다.

 
                              현재도 최고의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아우토반

 
초기에는 대공황에 따른 실업자구제 및 국가물류망의 확충 등이 그 목적이었으나 완공초기라 할 수 있는 1930년대 말부터 이미 독일은 전시 상황에 돌입중이어서 군대 및 군수물자의 이동에 더 적절히 쓰였습니다.  즉, 침략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토반은 현재도 세계최고의 고속도로라는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독일의 자랑거리입니다.
 
 
셋째 유산 - 올림픽 성화 봉송 (Olympic Torch Relay)

 
올림픽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아이콘 중 하나인 성화는 1928년 제9회 암스테르담대회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그리스의 올림피아에서 고대의식에 따라 불을 채화하여 세계 각국을 거치는 장거리 릴레이를 거쳐 개최도시까지 불씨를 봉송하고 개막식에서 성대히 성화대에 불을 밝히는 행사는 1936년 제11회 베를린대회부터 실시되었습니다.

 
                             베를린 올림픽 개막식 당시의 성화 최종 주자

 
세계만방에 히틀러와 나치를 자랑하기 위한 선전수단의 일환으로 올림픽을 개최하였던 독일은 개막식의 극적효과를 높이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베를린올림픽 조직위원장이었던 칼 다임의 의견을 히틀러가 수용하여 성화 봉송을 실시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계획에 걸맞게 행사가 성대히 그리고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대회의 극적 효과를 증대시켰습니다.

 
                                     밴쿠버 동계올림픽 개막식의 성화

 
그런데 올림피아에서 베를린까지의 성화 봉송루트가 이후 제2차 대전 당시에 발칸반도를 향한 독일군의 진격로가 되었습니다. 평화의 제전을 위하여 실행하였던 행사가 처음부터 전쟁을 염두에 두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를 철저히 전쟁에 이용한 것을 보면 히틀러와 나치는 진정한 악마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올림픽 성화 봉송 릴레이 행사는 범지구적인 중요한 전통행사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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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비 트랙백 0 : 댓글 1


세계적 제약회사 화이자(Pfizer)는 협심증 환자들에게 흔하게 발생하는 질환인 흉통의 완화제로 기존에 많이 사용하던 니트로글리세린계 약을 대체할 신약 개발을 완료하고 병원에서 환자들을 상대로 임상 실험 중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험도중 유독 남성 환자들에게서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이상증세를 발견하였습니다.


                                         다국적 제약회사인 화이자
                         제약산업은 아직까지 한국이 세계적 수준에 뒤진 분야 중 하나입니다.


환자 A  "마님 앞에서 마구 마구 도끼질을 하면서 장작을 패고 싶다는..."

환자 B "오! 마이 갓뜨 ~ 내 나이 70인데 고목나무에 꽃이 피고 있다는..."

환자 C "아무래도 협심증 때문이 아니고 엉뚱한 곳에서 돌연사 할 것 같다는..."


                           임상실험 중 환자들로부터 엉뚱한 푸념을 듣게 됩니다.


본래 약의 개발 목적과는 달리 남성에게만 나타나는 곤란한 부작용과 이러한 부작용에 어쩔줄 모르고 난감해하던 남성 환자들의 푸념(?)에 화이자는 약의 개발 방향을 180도 돌려 전혀 다른 곳으로 전환합니다. 이 약은 결국 다른 용도의 치료제로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자신감을 상실한 남성을 위한 약으로 개발방향이 바뀝니다.


이 약의 효능은 시판 이전부터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판매소식이 뉴스를 통해서 적극 알려질 만큼 세계 제약시장에 찬란하게 데뷔합니다. 그것은 신체의 노화나 각종 질환으로 자신감을 잃고 있던 세계의 수많은 남성들에게 한줄기 복음이었습니다. 바로 특유의 파란색으로 널리 알려진 비아그라입니다.


                            처음 목적과 달리 우연히 비아그라가 탄생을 하였고,
                      약으로는 보기 드물게 짝퉁까지 양산 될 정도로 히트를 쳤습니다.


비아그라는 주객전도라는 말이 너무나 어울릴 만큼 본래 개발 목적과는 다른 용도로 세상에 등장했고, 약으로는 보기 드물게 짝퉁까지 대량 생산되어 은밀히 유통 할 정도로 베스트 셀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무기의 역사를 살펴보면 비아그라처럼 본연의 목적과는 달리 엉뚱한(?)곳에서 빛을 발한 무기들도 많습니다.


                                  아직도 그 명성을 전하는 88mm Flak


1933년 정권을 잡은 히틀러는 베르사유조약을 일방적으로 폐기하고 공개적으로 독일의 재 군비를 추진하였습니다. 당시 독일군이 방공포로 사용하던 것이 75mm Flak이었는데 조약폐기 후 이를 대체할 새로운 대구경의 대공포를 비밀리에 개발 완료하고 이를 실전 배치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무기의 역사에 길이 명성을 남기게 된 88mm Flak 대공포였습니다.


                               적기를 격추하기 위해 작렬하는 88mm Flak


이 대공포는 제2차 세계대전 개전 초기부터 독일의 무조건 항복으로 종전 할 때까지 독일의 영공을 방어하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였던 훌륭한 대공포였습니다. 그런데 많은 매니아들은 88mm Flak을 본연의 목적인 대공포보다는 연합군 전차에게 가장 무서운 저승사자였던 명품 대전차포로 기억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88mm Flak은 명품 대전차포로도 그 명성이 자자합니다.


전사를 읽어보면 이놈이 본래의 용도를 벗어나 대전차포로 사용되게 된 것도 비아그라처럼 극적이었는데 시작이 다음과 같이 알려져 있습니다. 독일 전격전의 신화가 만들어진 1940년 서부전선에서의 일이었습니다. 아라스(Arras)에서 신나게 진군하던 독일 기갑부대가 갑자기 등장한 마틸다 重전차로 중무장한 영국군에 의해서 진격이 멈추어지게 되었습니다.


                    마틸다전차를 요격하면서 신화가 시작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당시 독일의 주력이었던 1,2호 전차나 보유하고 있던 대전차 화기로 마틸다 전차를 파괴할 수 없자 다급히 대공포로 사용하던 대구경의 88mm Flak로 마틸다 전차를 요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독일군도 놀랄 만큼 적전차를 손쉽게 격퇴하였고, 이때부터 이놈이 자기의 본분을 망각(?)하고 대전차포로도 사용 되었다고 합니다. (* 스페인 내전에서 처음 사용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대전차포 용도로 사용되었는지에 대해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무수한 탱크 킬 마크 (Kill Mark)만으로도 그 명성을 유추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아프리카 전선에서 롬멜 (Erwin Rommel 1891~ 1944)이 지휘하던 독일 아프리카 원정군은 이몬을 이용하여 무려 200여대의 전차를 격파하여 연합군으로 하여금 88mm의 공포라는 소리가 나오게 만들었습니다. 이후 대공포로써의 임무도 물론 성실히 하였지만 독일군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다니며 최고 저격수의 임무도 수행하였습니다. 더욱이 최고의 전차인 티이거나 쾨니히스티이거의 주포로도 채택되어 그 명성을 길이 전하고 있습니다.


                                 88mm Flak은 전선의 비아그라였습니다.


개발 목적과는 달리 오히려 엉뚱한 (?) 곳에서 더 효과적인 약발을 보인 88mm Flak은 실의에 빠져 있던 남성들의 구세주로 탄생한 비아그라처럼 독일군을 구원하는 수호신이 도었고 그 명성을 길이 남겼습니다. 따라서 88mm Flak을 전선의 비아그라라 칭하여도 결코 모자람이 없다 할 것입니다.


           좌절하지 마십시오. 우리 인생에도 88mm Flak이나 비아그라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일생도 그런 것 같습니다. 사는 도중 어렵고 실패의 과정도 분명히 있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더 큰 성과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혹시 일시적으로 어렴움을 겪거나 곤란한 점이 있더라도 좌절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우리 삶에도 전혀 생각지도 못한 88mm Flak이나 비아그라가 분명히 생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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