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 대전 전쟁사 (독일 만슈타인 장군) -제2편-


                                       만슈타인 원수


아르덴느 돌파 작전


폴란드를 항복시킨 독일의 다음 목표는 프랑스였다.
원래 독일에는 프랑스를 침공할 때 북쪽의 벨기에, 네델란드 등을 유린해버리고 프랑스의 측면을 침공한다는 슐리히펜 플랜이라는 것이 있었다.

어차피 독일과 프랑스의 국경에는 프랑스가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부어서 만든 마지노 요새 선이 있어서 정면 돌파가 힘들었었다.

이 슐리히펜에 계획에 따라서 fall gelb(황색 작전) 계획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만슈타인은 이 작전의 입안에 관여했으면서도 이미 세계에 널리 알려진 슐리히펜 계획에 따라 그대로 벨기에를 침공한다는 것은 현명한 작전이라고 보지 않았다.

이미 영국과 함께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한 프랑스는 프랑스와 벨기에 국경에 대군을 집결해놓고 독일군의 공격을 대비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는 독일 기갑부대의 창시자 하인즈 구데리안 장군과 함께 의논하여
공격 예정 지역인 독일-벨기에 국경 아래에 있는 프랑스령 아르덴느 숲의 우회 침투를 조사해본 후 이 작전을 상신했다.

이 곳은 삼림이 울창하여 통과 불능지역이라고 판단한 프랑스가 아무런 방어 준비를 해놓지 않은 지역이었다.

이 곳만 통과하면 뮤즈강까지는 거칠 것이 없이 진격할 수가 있었다.
벨기에와 프랑스 지역에서 슐리히펜 계획에 따라 밀집한 영불군과 남프랑스의 병력을 양분한 후 기갑 부대를 진격시켜 덩케르크로 직행한다는 작전이었다.

하지만 그의 의견은 이미 히틀러가 결정한 작전을 뒤집을 의사가
없었던 간부들에 의해 배척 당했다.

하지만 그는 룬드스테드 참모장에서 동부 전선의 38군 사령관으로
전임하면서 히틀러에게 신고하는 기회를 이용해서 이 계획을 강하게 상신했다.

히틀러는 원래 귀족 출신에 지적(知的)인 이미지가 강한
만슈타인을 도도하다고 보고 별로 좋아 하지 않았었다.[귀족은 이름에 폰-von-이 붙는다.]

히틀러가 자신처럼 평민 출신인 에르빈 롬멜 원수와
하인즈 구데리안 대장을 좋아했던 사실과 대조된다.

만슈타인이 끝까지 나치당에 입당하지 않았던 것도
히틀러가 그를 싫어했던 이유중의 하나였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심 더 기발하고 공격적인 작전 계획을 찾던 
히틀러는 이 작전 계획에 흥미를 가지고 검토해 본 뒤에 기존 작전 계획을 포기하고 이 공격적인 계획을 받아 들였다.

결국 이 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어서 프랑스는 항복하였고, 영국군은 덩케르크에서
장비를 몽땅 잃고 영국으로 철수하는 참패를 당했다.

만슈타인의 작전 계획은 만슈타인 계획이라는 공식 명칭이 있지만
후에 식클 플랜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지게 된다.[Sichelschnitt -sickle cut-] 식클은 유럽의 농기구인 낫을 말한다. 밀 보리같은 농작물을 베듯 프랑스를 두 쪽으로 베어서 두 동강이 낸다는 뜻으로 붙인 것이리라.

유럽의 석권에 성공한 히틀러는 기분이 좋아져서 이 아이디어를 낸
만슈타인을 대장으로 진급시키고 그에게 훈장을 수여하였다.


1941년 2월.
만슈타인은 56 판저[panzer; 기갑부대]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히틀러는 그해 6월 22일 대군을 동원해서 소련을 침공하였다.

그의 몰락을 가져다 준 치명적인 실수였었던 이 소련 침공 작전은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명명되었다.

독일 참모 본부나 일선 장군 대다수가 이 침공계획을 반대했었지만 이미 정신이 이상해진 히틀러는 병참이나 보급 또는 수송 등의 문제를 가볍게 무시해버렸다.

세계의 강대국인 미영[미국은 아직 참전전]과 겨루고 있는 판에
또 광활한 영토와 자원을 가진 소련과 또 다른 전선을 만든다는 것은 지각없는 짓이었지만 독일 장군들이 히틀러의 장기인 말솜씨와 그의 카리스마에 눌려 전쟁에 끌려 들어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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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독일군이 박살 난 것은 영미가 공격했던 서부전선이 아니라
소련과 겨루었던 동부전선에서였다.

이 전쟁에서 독일군 손실 병력의 70퍼센트가 발생했었다.
소련은 줄기차게 자기들이 독일을 쳐부순 주인공이라고 했었다. 요즈음은 사가들이 이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해주는 추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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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이미 두 번의 서부 전선 전역(戰役)에서 두각을 보인 
만슈타인은 대 소련 전에서 유감없는 천재 명장의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공격의 포문이 열리자 마자 단 이틀 사이에 100마일을 진격해서
두 개의 결정적인 전략 목표인 드비나 강의 두 다리를 점령하였다.

1941년 9월 그는 11군 사령관으로 승진 발령되었다. 전 사령관이었던 쇼베르트 장군은 이 블로그 앞에서 소개한 바 대로 그의 연락기가 지뢰 밭에 내리는 바람에 횡사하였다.




크리미아 -세바스토폴 요새 공성 전투


전투 지휘관으로서의 그의 눈부신 전공은
크리미아 반도 점령 - 세바스토폴 공성 작전에서 크게 꽃을 폈다.

크리미아 반도는 소련 영토가 흑해로 뻗어 나온 반도이며
소련 침공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었다.

만슈타인의 11군은 41년 10월 28일 소련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이어서
크리미아 반도 전역을 휩쓸며 10여일 만에 석권해버렸다.

그러나 견고한 요새로 둘러싸인 세바스토폴 항구는 맹렬히
저항하며 버티었다.

이 곳을 점령하지 않고서는 크리미아 점령이 의미가 없다고 본
만슈타인은 점령 작전을 추진하였다.

1941년 10월 30일 시작한 공성전은 의외로 고전하면서 두달이나
허비하였다.

1941년 12월 26일 크리미아 반도의 목 부분에 해당하는 케르크 해협의
테오도시아에 소련군이 기습 상륙해서 만슈타인 군을 위협하였다.

이 기습 상륙 작전은 독일군이 모스크바 교외에서 공격의 기세가 꺽였던
겨울 위기 때 찾아왔는데 적의 반격은 대규모였고 매우 거셌다.

이 생각지도 않았던 배후 기습에 만슈타인은 세바스토폴 공략을
중지하고
대부분의 부대를 크리미아에 상륙한 소련군을 공격하는데 투입하였다.



                                                크리미아 전투
               왼쪽 아래에 세바스토폴이 보이고
오른쪽 육지에 가까운 쪽에 케르크 항이 보인다.


다음해 5월 18일 소련군은 결국 17,600명의 전사자와 347량의 전차, 그리고 3,500문의 야포를 유기하고 상륙하였던 케르크 해협을 되건너 패주하였다.

배후의 소련군을 평정한 만슈타인은 다시 세바스토폴 공략을
준비하였다.

세바스토폴 요새를 재 공략하면서 만슈타인은
독일 본토에서 긴급히 수송해온 800mm 대구경 열차포 '구스타프'를 사용했다. 이 포는 프랑스의 마지노 요새를 부수기 위해서 특별히 만든것이었지만 소련 전선으로 출동했다.



                                        거대 폭탄 45발을 발사했었다.


1904년 여순 공략전에서 일본군이 280mm 요새포를
요새화한 여순항에 사용했던 것에서 영감을 받았는지 모른다.

독일 공군의 맹폭하에 5월 18일 요새 공격이 다시 개시되었다.
세바스토폴 외곽 방어선이 6월 16일 돌파되었고 치열한 전투가 잇따른 뒤인 7월 4일 드디어 세바스토폴이 점령되었다.

히틀러는 이 소식에 기분이 좋아져서 만슈타인을 세바스토폴의
정복자라고 치켜세우며 만슈타인을 원수로 특진시켰다.




레닌그라드 포위 전투


그가 난공불락인 세바스토폴의 점령에 성공한 것을 본
독일 참모 본부는 그 때까지 점령당하지 않고 버티고 있던 북쪽 발틱 해의 레닌그라드 공격을 그에게 맡겼다.

만슈타인은 그의 군대 일부와 참모들을 인솔하고
남부 전선에서 북부 전선으로 이동하였다.

레닌그라드 공격은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갑자기 외부의 소련군이 휠씬 우세한 병력으로
만슈타인 군을 공격했다. 만슈타인은 소련의 압도적인 군세를 교묘한 기동으로 피해가며 연속적인 반격을 가했다.




                                      모스크바 기념관에 있는 레닌그라드 항쟁기록화


몇 달간의 전투에서 소련군은 무려 6만 명이나
잃는 참패를 당했다.

그러나 레닌그라드 외부에서 소련군과의 힘에 부치는 전투를 치룬
만슈타인 군은 힘을 소진하여 레닌그라드 공략 작전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레닌그라드 포위전은 1943년까지 계속되었지만 독일이 점령을 포기한
결과로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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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 대전 전쟁사 (독일 만슈타인 장군)
-제1편-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전격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영국의 전략가 바실 H.리델하트 경은 독일을 여러번 방문, 2차 세계 대전에서 싸웠던 독일 장군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를 책에 담았다.


독일군의 탄생에서 여러 전투를 거쳐 소멸되기까지를 여러 단계로 나누어, 독일 장군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회고담과 평가와 의견을 기록한 것이다.


그가 인터뷰한 독일 장군 중에는 거물 룬드스테드 원수에서부터 동부전선에서 싸운 크라이스트 원수, 북 아프리카 사막전에서
영국군에게 포로가 되었던 토마 장군, 그리고 히틀러가 무리하게 전개했던 발지 전투의 독일군 사령관 만토이펠 대장도 있었다.


이 글의 주인공이 되는 만슈타인 장군은 인터뷰 대상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가 전범으로 몰려 영국군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신임하던 구데리안 장군이 리델하트 경의 "간접 접근 이론"을
읽고 이에 감동을 받아 적극적으로 받아 들여서 독일 군대를 기계화 했고, 전격 전략을 실행했었기 때문에 그가 그의 제자격인 독일 장군들을 만나서 인터뷰한 내용도 전격전의 체험과 제언에 관한 것들이 많았다.

“The German general talks"라는 이 책은 1948년 최초로 발간되었는데 이후 19개국에 번역되어 출판되었을 정도로 2차 세계 대전 명 군사 저서의 하나다.



                                      바실 H,리델하트
기습과 기동에 중점을 두는 "간접 접근 이론"을 개발했다. 독일은 이 이론을 실전에 대입해서 전격전의 신화를 만들었다.


이 책의 존재는 이미 알았었고 리델하트의 전략에 관심이
많았던터라 오랜 노력 끝에 이 책을 구해볼 수가 있었다.


책의 63 페이지에 이런 글이 있다.
만슈타인을 소개하는 대목에서다.


“ 독일 장군 중에서 최고로 유능한 장군은 에
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일 것이다. 이 
 사실은 내가 인터뷰했던 대부분의 독일 장군들, 룬드스테드 장군에서 부터 아래 모든 장군들의 공통된 평가이기도 하다.“


리델하트는 이 의견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글을 이 책뿐만 아니라
그 뒤에도 자주 썼었다. 리델하트는 자주 만슈타인이 위대한 명장이었을뿐더러 부하들이 존경하는 위대한 지휘관이었음을 서술하고 있다.


한 저명한 전쟁사가는 2차 세계 대전에서 명장이라고 타이틀을
붙여줄만한 장군들은 대부분 독일에서 배출되었다고 했었다.


미국의 패턴이나 영국의 몽고메리 등 다른 나라의 명장들도
있었지만 독일에서 배출된 명장들은 전쟁 중 타 국가들의 명장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도 더 많았다는 것이다.


2차 세계 대전사를 지휘관 평가 위주로 분석하면서 읽어보면
단연코 일리가 있는 말이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만슈타인 원수에 필적할만한 장군은 역시 독일
장군인 롬멜 원수나 소련의 쥬코프 원수 정도가 아닐까 한다.
[아이젠하우어 원수가 세계 최고의 명장으로 쥬코프를 지목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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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만슈타인을 격찬한 이 책에서 리델하트는
롬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냉혹한 평가를 했다.

지금 한국의 일부 밀리터리 블로거들 사이에는 롬멜이 원수의 그릇이
아니라 대대장이나 연대장급의 인물이라는 잘못된 평가 절하의 인식이 있는데, 이의 출발점 중에 리델하트의 평가가
있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롬멜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아주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은 후에
이 블로그에서 밝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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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 대전 최고의 명장이라는 평가를 받은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에 대해서 글을 써본다.


만슈타인[1887년 11월 24-1973년 6월9일]은 원래 만슈타인 가문의
출신이 아니었다.


그는 1887년 프러시아 군의 포병 장군이었던 프릿츠 에리히 폰 르윈스키의 열 번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어머니 헤렌 폰 스페링의 막내 여동생이자 이모인 헤트빅 폰 스펠링과 그의 남편으로 역시 귀족 출신 장군인 게오르그 폰 만슈타인
중장에게 바로 양자로 입양이 되었다.


그가 르윈스키라는 이름 대신 만슈타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내력이었다.


만슈타인의 양부모는 오랫동안 자식이 없었기에 두 가족 사이에는
만슈타인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열 번째 아들은 만슈타인 가문에
양자로 보내기로 결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친부모와 양부모 모두 무인 가족이었기에 그가 군인의 길을 가는 것은
숙명이었다.
그는 열 세 살 때부터 6년간 유년학교[Kadettenanstalt]에서 수학한 뒤 1906년 소위로 임관하였다.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실전을 겪으면서 중상을 입기도 했던 그는
종전이 될 때 대위였었다. 전후 대폭 축소된 독일군에 계속 남아서 근무했었던 그는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고 독일의 재군비를 서둘렀을 때 독일 참모 본부에 있었다.

그는 1935년 참모 본부의 작전 국장을 맡게 되었다. 그는 이 직에 있을 때 중요한 프로젝트 하나를 완성했다. 보병 지원 전문의 돌격포[sturmgeschutze-자주포] 개발을 제안해서 완성시킨 것이다.

자주포는 1차 세계 대전 때 영국이 완성시켰지만 전차의 개념보다도 문자 그대로 자주 포병의 개념이 강했었다. 만슈타인은 이 자주포에 전차를 대신하는 장갑 돌격포의 새로운 개념을 부여해서 제안했었다.


                                          

                                        전쟁중 최대로 양산되었던 3호 돌격포


전차의 성능을 발휘하되 복잡한 포탑을 제거해서 생산 단가를 대폭 낮춘 이 돌격포 개념은 나중에 소련과 미국 등에서도 채택되었을 정도로 아주 성공적인 독일 무기 개발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폴란드 침공 작전>

히틀러가 주도한 2차 세계 대전의 서곡인 폴란드 침공 시 1939년 8월 18일 8사단의 사단장의 직책을 마친 만슈타인은 남부 집단군 사령관 게르드 폰 룬드스테드의 참모장이 되었다.


 

                           독일 보전 합동의 공격 -전쟁 후반의 사진이다.


그는 유능한 작전참모 군테르 브루멘트릿과 함께 폴란드
침공 작전을 입안했었다.


만슈타인은 이 때부터 기갑 부대의 돌파력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집단군이 가진 기갑 부대를 모두 발터 폰 레이케나우 장군의 10군에 집중해서 10군을 선봉으로 폴란드의 대군을 비즐라 강 서쪽에 포위할 돌파 작전을 입안했고 룬드스테드의 승인으로 이 작전 계획에 따른 폴란드 침공 작전이 1939년 9월 1일 감행되었다.


폴란드 남부의 대 포위 전략이 성공하여 남부의 폴란드 군은 완전 포위되었고 이들을 가두어 놓은 독일군은 거칠 것 없이
쾌속으로 전진했다.


1939년 9월 27일 폴란드는 항복하였다.
만슈타인은 폴란드를 잠재적인 큰 적인 소련을 상대하기 위한 완충지대로 남겨 놓는 것이 상책이라는 개인적인 생각을 했었지만 전쟁광 히틀러에게는 통하지 않는 개념이었다.


폴란드에서 선보인 독일의 기계화 부대와 항공대의 번개 같은 진격은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독일이 폴란드 전역에서의 거둔 대승리는 만슈타인이라는 천재가
입안을 주도했었던 '기갑부대의
집중 사용에 의한 돌파'라는 혁명적인 전략 개념이 큰 역할을 하였던 것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전차라는 것은 포병과 같은 보병의 지원수단이었고
전차 부대의 집중 사용이라는 것은 아주 새로운 개념이었다. 리델하트가 제창하고 독일 구데리안이 추종했었지만 이를 적극 채택해서 실전에서 시도해본 사람은 아직 없었다. 


만슈타인의 작전 입안으로 독일에 의해서 폴란드 전선에서 최초로 시도되었고, 대성공한 이 전략은 전격전[blitzkrieg]라는
이름으로 세계 전사에 최초로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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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베강에서 벌어진 냉전의 역사 [ 上 ]

 

 

1945년 4월, 전 세계를 전쟁의 불길로 뒤덮으며 지긋지긋하게 타오르던 제2차대전도 서서히 그 끝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패배를 인정할 줄 모르는 고집불통의 히틀러가 소년병까지 동원하며 최후의 발악을 해보았지만, 노도와 같이 동서 양쪽에서 독일의 마지막 숨통을 끊기 위해 진격하는 연합군과 소련군을 막을 방법은 사실 없었다.

 


 

              이 정도라면 전쟁을 포기 하는 게 맞지만 히틀러는 국민들을 계속 사지로 몰아넣었다.

 


동부전선은 독일과 소련의 완충지대였던 동유럽을 석권한 후 독일 본토로 계속해서 밀려들어오는 엄청난 규모의 소련군에 의해 철저히 유린당하고 있는 와중이었고,
서부전선 또한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구성된 연합군이 독일의 천연요새 지대인 라인강을 도하하여 진군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라인강을 도하하는 미군과 베를린을 점령한 소련군

 


이렇게 동과 서에서 독일의 중심부를 향해 달려 온 소련군과 연합군이 조우한 역사적인 장소가 독일 본토의 중심부를 흐르는 엘베강(Elbe River)이다. 엘베강은 체코에서 발원하여 독일을 가로질러 북해로 빠지는 1,000Km가 넘는 강으로 오래전부터 내륙수운에 사용된 독일의 주요 교통로이기도 하다.

 


 

                                              독일 본토를 가로지르는 엘베강

 


이렇게 독일 한가운데를 상징하는 엘베강변의 토르가우(Torgau)에서 1945년 4월 25일, 미 1군과 소련 코네프(Konev)군이 만나며 더 이상 진격할 곳이 없어지게 되었고, 유럽에서의 전쟁은 그것으로 사실상 종말을 고하였다. 비록 단말마적인 저항이 독일의 곳곳에서 간간이 벌어졌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토르가우에서 조우한 미소 양국 병사들

 


사진처럼 최전선에서 전쟁을 경험했던 미국과 소련의 병사들은 승리의 기쁨과 살아서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는 즐거움으로 말미암아 쉽게 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말단병사들의 기쁨과 기대와 달리 공통의 적이었던 나치 독일이 사라지자 이들은 앞으로 이 강의 동서 양편으로 나뉘어 서로 적으로 지내게 될 운명이었다.

 


 

                                    그들은 이 순간을 즐겼지만 적이 될 운명이었다.

 


이렇게 역사적 현장이었던 엘베강은 전후 독일을 동서로 분단하는 경계선이자 이데올로기로 나뉘어 동서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냉전시기에 유럽의 최전선이 되었다. 마치 한강 하구처럼 전쟁 전에 내륙수운으로 번창하였던 엘베강 일대는 팽팽한 군사적 대치가 이뤄지면서 침묵의 강이 되어 버렸다.


 

 

                                         냉전의 상징이었던 찰리검문소 경고판

 


그리고 이러한 동서의 첨예한 대치는 사상 최대의 전쟁인 제2차대전이 끝난 지 불과 5년 만에 지구반대편 한반도에서 결국 무력 충돌을 불러와 국제전으로 비화하였으며, 곧이어 베트남 전쟁과 세계를 핵전쟁의 공포로 몰아넣은 쿠바사태 같은 위기의 순간을 만들어 내었다. 어쩌면 인류사에 가장 무서웠던 시기가 바로 이때였을지도 모른다.

 


 

                      쿠바사태는 어쩌면 인류사에 있어 가장 초조했던 순간이었을지 모른다.
                                   (쿠바로 향하는 소련 선박을 감시하는 미국 정찰기)

 


1970년대 들어서 조금씩 이러한 긴장상태를 극복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는데 이를 데탕트(Detente)시대라 한다. 동서를 대표하는 미국과 소련 양쪽 모두 핵무장을 통한 무한경쟁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고, 차라리 경쟁이 아닌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는 선에서 공존의 길을 걷고자 하는 사고의 전환을 이루게 된 것이다.

 


 

                                무한 경쟁이 부담스러웠던 미소는 데탕트시대를 열었다

 


미국과 소련은 서로에게 부담이 되었지만 포기할 수 없었던 핵무기를 감축하는 방법으로 군축을 통한 실질적인 동서 긴장완화를 시도하였다. 그러면서 이벤트적인 성격의 깜짝쇼를 연출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 깜짝쇼의 배경으로 독일패전과 분단 그리고 동서 냉전의 상징인 엘베강이 역사에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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