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송가[Battle Hymn] 헤스 대령의 숨겨진 전공  -제2편-


 

이것은 마치 서부영화에서 인디언들에게 둘러싸인 포장마차들이 기병대의 구원을 기다리는 것과 흡사했다.


영화에서는 으레 기병대가 극적으로 제 시간에 나타나기 마련이었다.
두 곳에 교신이 된 나는 공격대가 오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미 공군의 항공 공격으로 파괴 된 북한군 T-34


공산군 기계화 부대는 어차피 길에 갇혀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였기 때문이었다. 30분쯤 뒤에 우리 대구 주둔 Bout -1 부대 소속 미군 조종사들이 모는 무스탕 기들이 나타났다.


나는 그들에게 적군의 상공을 선회하면서 우리가 했던대로 
계속 적 부대가 전진을 못하도록 하고 있으라고 일러놓았다.


나와 팀버레이크 중위는 대구 기지로 돌아가 연료와 탄약을
보충하고 다시 현장에 나가 일본에서 날아 올 공격대를 기다렸다.


드디어 일본 기지에서 F-82, F-80, B-26 등이 대거 출동했다.
이들 공격대는 도착과 동시 도로에 늘어선 기계화 부대를 공격했다. 각종 포탄과 기총탄들이 길게 늘어선 기계화 부대에 죽음의 불벼락을 안겼다.


                   한국전 최초로 적기를 격추했던 F-82기, 무스탕. 두 기를 쌍둥이로 합성한 기체를 가지고 있다.


나는 그 날 현장에 3회 출격하였는데 마지막 출격 때 보니 그 산등성이
길에 앞 뒤가 막혀서 늘어섰던 북한군 전차와 차량들이 모두 불타고 있었다.


마침 그 때는 바람도 불지 않아 연기가 수마일 상공으로 치솟고 있었다.
어두워지기 시작할 때는 적군의 기계화 부대 전체가 파괴되고 말았다.


미 극동 사령관 파트릿지 대장은 이날의 성공적인 공습 작전이
위기의 한국 전쟁 초반 전황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


               한국 공군의 무스탕 기 - 헤스 대령이나 다른 교관들도 태극 마크를 단 무스탕기로 출격했었다.

이 공격으로 북한군 105 전차 사단 전차 38량, 자주포 7문, 그리고 트럭 117대가 파괴되고 북한군 다수가 섬멸당했다.

개전이래 유엔군의 항공 공격을 자주 받았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대규모 주간 행군을 했던 북한군은 대 타격을 받은 이 공습 이후 기계화 부대는 철저히 밤에만 기동하는 행군 방법으로 작전을 바꾸었다. 하지만 기계화 부대의 야간 기동이나 전투는 그 효율성을 크게 약화시키고
전진을 대폭 느리게 만든다.


앞에서 말했듯이 기계화 부대는 일본에서 출격했던 
대규모의 항공력 없이는 전부 섬멸하기가 힘들 정도의 대부대였었다.


헤스 대령이 단 두 기의 전투기만으로 출격했지만 좁은 국도에서
앞과 뒤의 차량들을 공격해서 이들을 가두어놓고 일본으로부터 대 규모 항공력이 출격할 때까지 장시간 잡아 놓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기계화 부대는 신속하게 기동해서 촌락이나 조치원 같은 도시로 흩어져 은신처로 피신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점으로 보아 단 두 기로 출격했었던 헤스 대령의 대담하고 지혜있는 대처가 큰 역할을 했다고 보아야 한다.


긴 도로에서 적 기계화 부대가 섬멸된 사례가 또 있다. 한달 뒤인 1950년 8월11일
경남 고성 사천 도로에서 105 전차 사단의 83 기계화 연대가 진격하는 미 해병을 피하여 도주하다가 미 해병 F-4U 전투기들에게 섬멸되었는데 함께 행군 중이던 대 병력도 함께 섬멸되었다. 

고성의 공습에서 83 기계화 연대의 차량 45량과
모터 사이클 55량이 박살나고 북한군 200명이 사살되었는데 평택에서는 덤벼들다가 두들겨 맞은 것이고 고성에서는 도망가다가 두들겨 맞았다는 차이가 있다.

울프 독이 항상  하는 이야기지만 한국 기계화 부대는 도로를 따라 공격과 기동을 해야 하는 근본적 취약점이 있다는
것을 이 북한 기계화 부대의 섬멸이 간접적으로 잘 보여준다.


                                                   대전 시가로 행진해 들어오는 105 여단 부대.
운좋게도 평택의 대폭격에서
섬멸된 부대와 따로 기동했었기 때문에 살아 남은 부대였다. 모터 싸이클을 모는 북한군은 모택동 군에서 넘어온 중국 동포들로 구성된 정예 부대였었다. 그러나 이 부대는 경남 고성에서 미 해병의 진격을 피해 도주하다가 모두 섬멸되고 말았다.


역시 같은 맥락이지만 산길에 기계화 부대를 몰아 넣지 말라는 한국 전쟁의 교훈을 북한 측이 여실히 보여준 사례이기도 하다.

평북 운산의 1 기병사단이나 장진호반의 미 7 사단 32 연대, 서울 북방 고양의 해피 밸리 전투에서의 영국군 얼스터 연대의 경우 중공군이 선두와 후미를 대거 인력으로 막은 다음 공격해서 섬멸당했는데 북한군은 단 두대의 무스탕 전투기에
앞뒤를 막히고 섬멸당한 것이 특색이다.


1951년 1월 3-4일 야간에 있었던 해피 밸리 전투를 아는 분은 극 소수였다. 좁은 논길에서  방망이 수류탄만으로 무장한 중공군에 의해 파괴된 얼스터 연대 배속의 쿠퍼 부대 크롬웰 전차 중 하나. 쿠퍼 부대 14량 전차 모두 수류탄에 궤도가 파괴 되어서 기동 불능상태로 포기되었다.



만약에 이 기계화 부대가 미 공군의 맹습에 섬멸당하지
않고 살아남았더라면 전황이 어떻게 흘러갔을까 한번 생각해보자.


북한 기계화 부대가 그대로 남하했더라면 대전에서 비록 대패했겠지만
7월 20일까지 버티었던 미 24사단의 지연전은 불가능했을 것이고 북한군은 그 보다 훨씬 먼저 대전을 함락하고 남진했을 것이다.



                            1950년 7월 20일 24사단장 딘 소장이 로케트 포로 직접 파괴한 T-34탱크
      딘 소장은 워커 중장으로 부터 7월 20일 까지 버티라는 명령을 받고있었고 부대 붕괴를 무릅쓰고 이를 수행했다.


최악의 경우 일본에서 급파된 미 1 기병사단이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 여유를
박탈하고 낙동강까지 몰아 붙였을지도 모른다.


가능성 높았던 다른 시나리오도 있을 수 있다.
앞에서 말한 바 대로 경부 축선의 빠른 돌파 가능성도 있겠지만, 차량이나 전차 등에서 여유가 있었던 105 전차 사단이 호남 지방으로 우회했었던 북한군 6사단에 차량과 전차등을 배속시켜 이들의 신속한 이동을 크게 도왔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한국전쟁 중 북한군 최대 명장이라는 방호산이 지휘했던 북한군 6사단은
모택동 군 출신으로 구성된 정예 부대로서 유엔군이 눈치채기 전 호남 지방을 급속히 우회해서 낙동강 교두보의 서쪽에 나타나 측면을 크게 위협했었다.


북한군은 뒤 늦게야 하동 전투에서 미군 350명을 사살한
이 부대에 105 전차 여단 소속 83 기계화 연대를 급파했었다. 시간적으로 상당히 늦은 배치였다. 이 연대가 앞에서 소개한 고성 사천 가도에서 미 해병대의 콜세어 부대에게 전멸당한 부대다.


방호산의 6사단은 북한군 부대 중에 유일하게 남해안에
도달한 부대이기도 했지만 인천 상륙 후 낙동강에 전개된 북한군 사단들이 모두 붕괴 분산 도주했는데도 건재 순을 유지하고서 태백산을 따라
북한 지역 집결지로 무사히 도주한 유일한 부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방호산은 전후 1954년 김일성에게 숙청당했다.


북한군 6사단은 순전히 도보로만 이런 신속한 측면 기동을 했었다. 포차(砲車)가 피스톤 수송( 차량이나 선박 지점왕복하면서 사람이나 물건계속 태워 나르거나 실어 나르는 .)을 해서 기동을 했었다지만 거의 도보로만 기동을 했었다.

만약에 김일성이 이들 사단의 가능성을 내다보고 평택 남방에서 파괴된 탱크나 트럭 중 일부라도 지원해주었더라면 휠씬 빠른 속도로 급습해와 낙동강 방어선의 측면이 빨리 붕괴되고 유엔군은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미군의 폭격으로 불타는 북한 유조차


또 평택에서의 폭격은 북한군의
기본 전력을 군수 보급면에서도 크게 약화시켰다는 점에서 그 성과를 평가할 수 있다.


개전 초 소련은 장비 공급에 늦장을 부려서 북한군은
가지고 있는 장비가 파괴되면 보충하기가 쉽지 않았었다.


1950년 7월 2일 충북 충주시 외곽 동락리에서 국군 6사단 7연대에게
전멸당한 북한군 15사단 48연대는 800명의 전사자를 내고 트럭도 60 대나 빼앗겼다. 그런데 이 트럭이 이 연대가 가진 전체 자산이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전투가 있었다.

북한군 연대장
김치구가 지휘하는 이 연대는 다시 남하하다가 경북 상주 화령장에서 국군 17연대에게 기습당해 전멸의
대패를 당해야했다.


특기할 것은 김치구 중좌가 지휘하는 이 연대는 동락리에서
손실당한 차량을 보충하지 못하고 소가 끄는 달구지로서 군수품을 운반하며 남하했었다는 사실이다.

두 번에 걸쳐 치뤼진 화령장 전투에서 김치구의 연대는 단 한량의 차량도 보유하지 않아 국군에게 노획당한 것이 없었다. 동락리에서 대패하고 장비 보충없이 급히 손실 인원만 보충한 채 남진했다는
이야기다.


이 사실은 전투
에서 손실당한 장비를 비교적 수월하게 미군으로부터 보충 받았던 국군과 대비된다.


북한군은 헤스가 주도했던 공습으로 손실당한 장비들을
후의 낙동강 방어전에서도 결코 보충할 수 없었다. 이 공습으로 북한은 전투력의 약화라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던 것이다.


                         금강 방어선에서의 미군 포병 -암담한 시기에 북한군 기계화 부대가 섬멸되었다.


미국이나 한국에서 작전의 명칭조차 없이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
이 폭격 작전에 명칭만이라도 부여해서 한국전쟁의 한 페이지에 의미 있게 평가되었으면 한다.


헤스 대령은 1951년 250회 출격을 끝으로
한국 근무를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헤스 대령과 원장 황온순 여사와 고아.  황온순 여사는 후란체스카 여사가 추천했다고 한다.


그의 고아 공수작전이 크게 보도되자 그의 자서전 집필 의뢰가
쇄도해서 그는 전송가[Battle hymn]라는 제목의 책을 집필해서 출판했다.


그 책이 인기를 끌자 영화계에서도 의뢰가 와 1957년
전송가는 당시 최고 스타 록 허드슨 주연으로 영화화 되었다.


헤스 대령은 자서전과 영화에서 받은 인세를 한 푼도 쓰지
않고 자신이 설립하고 황온순 여사가 책임자로 있던 고아원에 모두 기부하였다.


이 고아원은 후에 서울로 이전했다.  //끝//





신고
Posted by 열혈국방 트랙백 0 : 댓글 0








전송가[Battle Hymn]주인공 헤스 대령의 숨겨진 전공 -제1편-



나이 드신 독자 분 중에 전송가(戰頌歌- Battle Hymn)라는 영화와 실제 주인공 딘. 헤스 대령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록 허드슨 주연의 전송가 -1957년-
그러나 사실과 너무 다른 스토리로 비판을 받았었다. 흥행을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이었는데 하여튼 히트를 쳤다.


헤스 대령은 목사 안수를 받고도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 후에
입대해서 전투기 조종사가 특이한 이력을 가졌다. 2차 세계 대전시에는 유럽에서 P-47 전투기를 몰고  63회 전투 출격하는 전적을 쌓기도 했었다.


                      딘 헤스 대령의 한국 참전때의 모습 - F 51 무스탕 조종석에서

그는 한국 전쟁 직전 일본으로 파견되었다가 한국전에 참전하게 되었는데 참전 당시 계급은 소령이었고  한국 근무 중 중령으로 진급했다.



-------------------------------------------

밀리터리 매니아를 위한 사족이다.

그는 자서전에서 독일 항복 후 기네스 북에도 오른 독일 공군
최고 전사인 한스 유리히 루델 대령이 그의 부대에 투항했었음을 쓰고 있다.


루델 대령은 동부 전선에서 소련을 상대로 슈투카 조종사로 싸웠는데 2,530회나  전투 출격을 했었다.[한국 공군은 유치곤 대위의 203회]

적 전차 격파 519량, 차량 800량, 장갑열차 4량, 적 해군 전함 [32,000톤급의 마라트]격침, 순양함 두척, 구축함 한 척을 격침했었다. 적기 12기 격추, 열두번이나 격추당했었고 세 번 포로가 되었지만 모두 탈출했었다. 폭격기를 몰던 그가 격추시킨 소련 전투기 조종사 중에 레프 세스코프라는 항공 영웅도 있었다.

그는 다리 하나를 잃고서도 외다리로 계속 출격해서  러시아군을 공격했었는데
전쟁 마지막 동부[소련] 전선에서 싸웠던 그는 혹독한 취급을 당할 소련군에 항복하는 것을 거부하고 부하들과 FW-190을 몰고 두시간을 비행하여 서부 전선으로  탈출해서 연합군에 항복하였다. 

전송가에 묘사된 독일 전투기들의 항복 착륙 순간이 어쩐지 낯익어서 루델 대령의  슈투카 파이럿이라는 자서전을 찾아 보니 그가 틀림없었다.

--------------------------------------------------------------------------------------


헤스 대령에게 주어진 미션은 아직도 걸음마 단계인 한국 공군의
조종사들을 훈련시키고 공군을 크게 육성하는 BOUT 1 이라는 명칭의 프로젝트 추진이었다.


그는 미군 장교 4명과 100여명의 병사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왔다.


물자와 장비가 턱없이 부족했었고 고정된 훈련 비행장도 없어서
이 비행장 저 비행장을 전전하였는데, 이처럼 어려운 여건에서도  한국군과 고락을 함께하며 한국 전투기 조종사 훈련에 최선을 다했다.


그의 열성에 힘입어 전투기 한 대 없던 한국 공군은
3년도 안되어 75기의 무스탕 전투기에 자체 출격이 가능한 근대 공군으로 성장했다.


                         전쟁이 발발한 다음날 일본에 F-51(무스탕)기를 인수하러 간 한국 공군 조종사들.
이착륙 훈련만 받고 돌아와 바로 출격했었다. 일본 육군 항공대의 베테랑 조종사들이었지만 익숙치 않은 무스탕기를 조종하다가 이근석 대령이 전사했다. 그는 일본 육군 항공대의 조종사로서 연합군기 23기를 격추했던 조종사였었다. 한국 조종사들은 전쟁의 위기를 넘기자 헤스 대령의 교관들로 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다시 이수했었다.


그는 한국 공군을 훈련시키면서도 수시로 미군
또는 한국 공군 조종사들과 동반 출격해서 250회 출격 기록을 남겼다.



                                                                   100회 출격의 축하식


그러나 헤스 대령은 이런 군사적인 면보다도, 그가 한국 고아들을
위해서 고아원을 세우고 중공군의 남하로 인해 후퇴하던 1950년 12월 14일 미 공군 수송기를 동원해서 1,000명의 전쟁 고아들을 모두 제주도로  피난시킨 대 수송 작전이 매스컴에 알려지면서 크게 이름을 알렸었다.

 

                                                          헤스 대령이 몰던 무스탕 18번기.
한국 공군의 태극기 기체 표시가 있다. 그의 한국어 번역 로고인 신념의 조인이라는 글이 써있다. 목사인 헤스 대령이 결정한 By faith, I fly.의 한국어 번역이었다. [믿음으로 비행한다는 원래의 뜻이 조금  왜곡 된 느낌이 든다.]


그는 한국에서 근무하는 동안은 물론 임기를 끝내고 미국에
돌아 간 뒤에도 계속 자금을 모아 고아원을 돌봤었다. 이승만 박사 내외와도 아주 가까웠던 그는 한국 역사에서 가장 유명하고 한국 민족에 가까웠던 미 공군 조종사로 남아있다.



           그는 이승만 박사를 아주 존경했었고 이승만 박사 내외는 그를 아들처럼 아꼈다. 훈장 포상식 뒤의 촬영.


한국을 자주 방문했던 헤스 대령은 93세의 나이에도
아직 생존해있다.


                                                C-54 수송기 10대로 단행한 1,000명 고아의 제주도 공수
장난감 자동차 공수 작전이라는 명칭이 붙어있다. 옆의 원장 황온순여사는 전쟁중 아들을 잃었었다.이화 여전을 나왔고 영국 유학을  다녀와 영어가 능숙했었다. 2003년 작고.


그러나 헤스 대령이 한국 전쟁 중에 전투기를 몰고 츨격하여
큰 전공을 세웠던
사실은 군이나 언론에서 잘 몰라주고 있다.

평택 남방 도로에서 적 기계화 부대의 등뼈를 부러뜨린 폭격 작전인데 전쟁 초기 극히 불리했던 한국전의 전황 극복에 엄청나게 기여한 항공 공격이었다.


그 때 한국군은 북한의 기습으로 입은 심적 물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한국 전선에 투입되었던 미군들도 7월 5일 오산 죽미령 전투에서 대패한 후 계속 밀리기만 하던 터였다.


오산 죽미령 공격은 북한군 최정예 4사단 18연대가
실행했었고 105전차 사단은 33량의 T-34 전차를 동원하여 오산  방어선의 중앙 도로를 돌파하여 공격의 예봉을 담당했었다.


그런 때에 딘 소장은 제 24사단을 재편하여 대전 북방에 방어선을 구축하고자
했다.

아래는 헤스 대령의 저서 전송가에서 빌려온 대목이다.

----------------------------------------------------------------------------------------


그 날은 마침 일요일이었는데 아침 날씨가 너무 흐려서 우리 훈련단은 그냥 죽치고 앉아 있었다.

[이 날은 오산 죽미령 전투에서 패배한지 닷새 되는 7월 10일이었다. 이 무렵은 장마철이어서 계속 비가 왔었고 한반도 전역의 기상이 좋지 않았었다. 1950년 7월 10일은 일요일이 아니었는데 헤스 대령이나 작가가 착각을 한 듯하다.]
 

마침 통신 정비병 하나가 F-51 무전기를 작동시켜려고 만지작 거리고 있었는데 미 24사단 21연대에 배속된 공군 항공 통제단[FAC] 짚차의 무선을 통해 비상 항공 지원의 요청이 수신되었다.


이 불순한 날씨에 일본에서 전투기가 급히 온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현실적으로 우리 Bout-1 훈련단 비행기가 비교적 가까이 있던 셈이었다. 그런데 우리의 활주로는 연일 쏟아지는 비 때문에 절반 정도는 6인치 되는 깊이의 물에 잠겨 있었다.
 

허나 비상 지원 요청을 받은 이상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조종사들한테 모두 출격하라고 명령하는 것 역시 정당한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누구 지원자가 있나 물었더니 그 당시 10여명의 
미군 조종사 가운데 한 사람인 팀버레이크 중위가 나섰다.

우리 둘은 무스탕기를 서서히 활주로로 몰고 나가 신속하게 폭탄과 기총탄을 무장할 만큼 무장하였다. 우리는 완전 무장으로 무거워진 기체를 가까스로 활주시켜 이륙하였다.


상공에 오르자 나는 지원 요청을 한 전방의 FAC에게 무선을 보냈다.
그랬더니 전방에서 국도를 따라 내려오는 기계화 부대를 공격해달라는 것이었다. 상군은 기계화 부대에 대해서 속수무책이었다. 우리 육군에게는 적 탱크를 파괴시킬 중무기가 없었다.[최선의 대전차 무기인 3.5로케트 포는 대전 전투 때부터 사용되었다.]


우리가 목표물을 향하여 날아가자 하늘이 맑아졌고 적의
기계화 부대가 환히 내려다 보였다. 이것을 보자 나는 전율을 느꼈다.


                                                          한국 공군 F-51(무스탕)기 편대의 출격



탱크, 트럭, 기타 별별 차량들이 10-15마일 가량 되는 비포장 도로에
줄을 지어 가고 있었는데 높은 상공에서 보니 부대 행군 간격 때문에 마치 중간 중간 토막 난 뱀처럼 보였다.


전방 항공 통제단에서 보낸 무선으로 들려오던 경악이 섞여있던
목소리를 이제 충분히 이해 할만했다.


상황이 이러했으니 F-51 2대 가지고는 어림도 없었다.
그 때에 내 비행기는 무선이 가능했으나 팀버레이크 중위의 비행기와는 교신이 안 되었다.


나는 손짓으로 그에게 이 기계화 부대의 후미를 공격하라고 
일러 놓은 다음 나는 부대의 선두로 가서 타격을 가하기로 하였다. 우리는 기계화 부대 양 끝에 급강하 하면서 기총탄을 퍼붓고 폭탄 세례를 가했다.


다행히도 우리의 폭탄들이 목표했던 곳들에 모두 명중했다.
선두와 후미의 차량들을 폭파시키는 동시에 목표에 커다란 구덩이를 만들어 놓았으니 북한군들은 행열 앞과 뒤 어디로건 빠져 나갈 길이
없이 도로에 고정되고 말았다.


이들을 가두어 놓은 다음 나는 긴급 호출 신호인 메이데이를
기지 사령부로 날렸다.


                                                              장마철의 F-51(무스탕) 출격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답신이 없었다. 바로 아래에 대물 표적을 놔둔 나는 단념할 수가 없었다. 이런 대물 표적을 처분하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항공 공격대의 출격이 필요하였다.

[
당시 한국에는 미 공군의 대부대가 없었다. 아직도 일본의 공군기지에서 한반도로 출격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헤스 대령은 일본 기지를 호출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답신이 올 때까지 30-40분 간격으로 반복 호출을 하면서
차량 대열에서 쏘아 올리는 대공 사격을 제압하는 기총 사격을 되풀이 하였다.


적군의 대열 자체는 그대로 놓아둔 채 적군 차량 중에서 대열 옆길로
빠져나와 탈출하려는 새치기 차량들을 보이는대로 공격했다.


드디어 나의 메이데이 신호가 마침 일본 상공에서 불순한 기후 때문에
이다쓰케 공군기지에 비상 착륙하려던 어느 미 공군 비행기에 포착되었다.



헤스 대령이 한국 참전시 그의 오른 팔 역할을 했던 크레이그웰 중위. 혹심한 미군 내부의 인종 차별을 이겨냈고 아주 유능한 조종사였었다.


목마르게 기다리던 답신이 있자 나는 이 쪽 상황을 설명하고
올 수 있는 모든 전투기들은 다 와주기를 청하였다.

일본 교신 후 대구 소재 미 육군 통신대와도 교신이 트여 대구 비행장에 있는 나의 부대 비행기들도 모두 출동하도록 연락해줄 것을 부탁했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신고
Posted by 열혈국방 트랙백 0 : 댓글 0








영광의 국군 기갑사(機甲史) [5]
 

잊혀 지지 않을 소년전차병의 기록
 
 
 
기갑부대라고 칭하기 부끄러운 기갑연대를 보유한 상태에서 전쟁을 맞은 국군은 200여대의 T-34 전차를 앞세우고 남침을 감행한 북한군의 기습에 일방적으로 밀려 후퇴 할 수밖에 없었다. 탱크를 막을 제대로 된 무기도 없었고 대전차 전술 또한 부재하여 설령 기습이 아니었다하더라도 침략자를 격퇴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전쟁 초기 크나큰 아픔을 안겨 준 북한의 T-34
 
울분에 찬 병사들이 여러 전투에서 육탄으로 적 전차를 막아냈으나 이 또한 한계가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국군은 극심한 전차 공포증에 빠질 수밖에 없었고 이와 반대로 전차의 보유를 더욱 갈망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미군의 참전으로 아군에게도 기갑부대의 지원이 가능하게 되었지만 국군이 본격적으로 기갑장비를 갖추게 된 것은 좀 더 시간이 흐른 이후다.
 

                                     낙동강 방어전 당시에 투입된 미군의 M-26 전차

 
1950년 11월 29일, M-36 전차 6대가 훈련목적으로 도입되고 동래에 위치한 육군종합학교에 전차병과가 설치됨으로써 국군은 그렇게 소원하던 전차를 보유한 진정한 기갑부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준비과정을 거쳐 1년이 지난 1951년 10월 5일 국군 최초의 전차부대인 제51, 제52전차중대가 창설되어 국군은 제대로 된 기갑부대를 보유하는 감격의 순간을 맞이하였다.

 

                                                국군이 최초로 도입한 M-36
 

그런데 이때 장비한 M-36은 85mm 포를 갖춘 북한군 T-34를 충분히 능가하는 90mm의 대구경 포를 장비하였지만 이른 바 오픈 탑(Open Top) 구조의 포탑을 가진 보병 화력지원용 구축전차(Tank destroyer)였다. 얼핏 모양은 전차에 가까웠지만 실질적으로는 자주포로 볼 수 있는 장비여서 부족한 방어력을 보강하기 위해 철판을 포탑에 덧대거나 심지어 샌드백을 쌓아 놓기도 했다.

 

                개방된 포탑 구조에서 알 수 있듯이 M-36은 전차라기보다는 자주포에 가까웠다.
 

하지만 반궤도차량을 장갑차로 취급하고 M-8을 국군 최고의 중화기로 여겼던 창군 초기처럼, M-36은 국군 기갑사에 있어 최초의 전차로 귀하게 여겨지고 운용되기 시작하였다. 참전용사의 증언에 따르면 "보병을 지원하기 위해 M-36을 몰고 가서 90mm 주포를 사격하면 보병들의 사기가 오르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고 하였을 정도로 전쟁 초기 북한 전차에 일방적으로 치욕을 당할 수 밖에 없었던 국군에게 M-36은 사기앙양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한국전쟁 당시 활약한 M-36의 귀한 컬러사진
 

그런데 M-36과 관련하여 많이 알려지지 않은 학도병 이야기가 있다. 1952년 4월, 16~18세의 학생 120여명으로 구성되었던 제57 전차중대의 소년 전차병들이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소년들은 일본에서 6개월 동안 기술교육을 받은 후에 하사관으로 복무시켜준다는 구두약속을 받고 입대하였으나, 논산훈련소와 전차교육대에서 3개월 동안만 훈련을 받은 뒤 학도병 신분으로 곧바로 최전방 연천 지역에 투입되었다.
 

                  출동하는 소년 전차병 부대인 제57 전차중대의 M-36 (사진-오명섭 참전용사)


제57 전차중대는 연천 지역에서 제1사단을 지원하며 혁혁한 전과를 올렸지만 아쉽게도 이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고 있다. 노병의 증언에 따르면 "고지에서 밀려 퇴각할 땐 탱크 뒤에 아군의 시체를 십여 구씩 매달고 내려왔다"고 당시를 회상하였을 정도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그들의 피눈물은 단지 학도병이라는 이유로 제외되어 오래 동안 기억에서 사라진 이야기가 되었던 것이었다.
 

                     늦게나마 명예를 되찾은 소년 전차병 참전 기념탑 (사진-오명섭 참전용사)
 

당시 M-36은 주로 5대로 편성된 소대 급 단위로, 보병의 돌격 시 배후에서 화력을 지원하는 형태로 운용되었을 뿐 공산군 전차 부대와 직접 교전을 벌이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전쟁에 본격 참전한 전차 부대의 주력으로 M-36은 그 용맹을 다하였고 이와 더불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소년 전차병들의 피눈물은 이제 새롭게 밝혀져 자랑스러운 국군 기갑사에서 중요한 장을 차지하고 있다.  ( 계속 )





신고
Posted by 열혈국방 트랙백 0 : 댓글 0







영광의 국군 기갑사(機甲史) [4]
 

또 다른 주먹들
 
 
기갑연대에는 기마 300필을 보유한 2개 중대 규모로 이뤄진 기병대대가 있었다. 요즘 일부국가의 산악부대 외에는 전투부대로 기병대를 별도로 운용하는 나라는 더 이상 없으리라 생각 되지만 당시에는 엄연한 전투부대였다. 장갑대대가 전쟁초기 서서히 각개 격파 되었던 것에 비한다면 기병대대는 낙동강 방어선까지 편제를 그대로 유지하였으며 전쟁초기 기갑연대의 제 부대들 중 최고의 전과를 올린 부대였다.
 

                               기갑연대 소속이었던 기병대대의 검열 모습

 
1950년 7월 말 경북 청송까지 후퇴한 기갑연대는 워낙 소모가 심하여 그 전력이 미약한 상태였다. 도보대대는 김포전투에서 상실되었고 장갑대대는 각 전선에서 거의 격파되어 M-8 장갑차 4대만이 청송으로 이동하였다. 반면 당시까지 200여명의 병력을 유지한 기병대대는 편제를 대부분 유지하면서 기갑연대의 주력으로써 맹활약 하였다.
 

                                       시가행진 중인 기병대대
 

오늘날 제1사단을 최고의 상승부대(常勝部隊)로 꼽는 이유 중 하나에는 전쟁 내내 편제를 유지하였다는 사실도 포함되어 있다. 수많은 부대들이 전쟁 중 해체 및 재창설의 과정 등을 겪고는 하였는데 제1사단은 후퇴 시기에도 대부분의 편제와 장비를 보존하였고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훌륭한 전과를 올렸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기갑연대 중에서도 최후까지 전력을 보존하여 방어전을 펼쳤던 기병대대의 노력은 영웅적이라 할만 했다.
 

                    1950년 7월초에 촬영된 기병대대원들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
 

1950년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7월 초 한강도하를 감행하였다. 이때 긴급하게 시흥전투사령부를 구성하여 한강 남쪽에서 북한군을 방어하던 혼성 부대 중에는 기병대대도 있었는데 천호동에서 한남동 대안에 이르기까지 넓은 정면을 방어하였다. 한강을 방패막이 삼아 적의 공격을 막아냈고 후퇴 시에는 기병대의 기동력을 이용하여 아군의 최후 철수부대를 엄호하는 작전을 펼쳤다.
 

                                     전선으로 향하는 기병대대
 

특히 미군 전사에는 7월 초순 경북 구미 부근에서 미 제24사단 63포병대대 B포대가 1개 대대병력의 북한군에 포위되어 몰살 당할 위험에 처했을 때 홀연히 나타난 기병대대 2개 소대가 적 배후를 급습하여 이들을 구출한 전과가 상세하게 나오기도 한다. 이후 북진에도 참여하였던 것으로 기록이 나와 있지만 1.4 후퇴 후 더 이상의 기록을 발견 할 수 없는데 아마도 기병대가 더 이상 전장상황에 맞지 않다고 판단되어 해체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북진 당시의 모습인데 이후 기병대대는 국군 역사에서 사라진다
 

도보대대는 2개 중대 규모로 구성된 경무장 보병대대
였는데 오늘날 수색대와 비슷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전쟁 개전 시에는 기갑연대의 본부 및 남산 송신소 등을 방어하다가 한강 이남으로 후퇴하여 김포지구방어사령부 소속으로 방어전에 나섰다. 전쟁 초기에 당시 북한군 중 최고의 기동을 보여주었다는 북한군 제6사단의 김포 반도 도하 작전으로 국군의 배후가 노출될 위험에 처하자 도보대대가 긴급 투입되었다.
 

                                  이동 중 휴식을 취하는 국군 보병부대
 

약간의 M-8 장갑차의 지원을 받아 부천 및 오류동 방향으로 진출하여 방어선을 구축한 도보대대는 병력과 화력의 절대 열세에도 불구하고 전쟁 초기 북한군 최강으로 평가되던 6사단과 혈전을 벌여 상상 외의 타격을 입힘으로써 영등포 진출을 지연시켰다. 하지만 김포 공항 탈환에 실패하며 부대가 해체 될 만큼의 타격을 입었고 지휘관은 자결을 하였다.

 

                      도보대대의 살신성인 정신은 국군의 귀감으로 남아있다
 

비록 도보대대는 기갑연대의 제 부대들 중 가장 먼저 산화한 부대가 되었지만 중과부적의 상태에서도 최선을 다한 그들의 용맹으로 말미암아 시흥전투사령부의 각 부대가 수원 이남으로 안전하게 후퇴 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되었다. 도보대대의 용맹함은 오늘날 국군 수색대대나 수색중대와 같은 첨병부대들이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 계속 )






신고
Posted by 열혈국방 트랙백 0 : 댓글 0









영국 항공모함 테세우스의 한국전쟁 출동기 -제 3 편-



테세우스와 호위함들은 사세보 항에서 보급과 정비, 휴식을 끝내고 3월 22일 07시 
아홉번째 출동을 했다. 출동 첫날은 통상적인 정찰 활동과 대지 공격을 위한 출격을 하였다.
 
3월 24일 테세우스의 씨 퓨리기들은 적지에서 공산 차량들의 대규모 집결지를 발견하고 이를 공격해서 다수의 적 차량들을 파괴하였다.
 
고든 스미스 중령기는 적이 쏴 올린 50구경 실탄에 맞아 연료 탱크에 구명이 뚫렸다 .
 
연료탱크는 셀프 씰링 기능이 제대로 되지 않아 다량의 연료가 누출되었다. 스미스 중령은 연료가 다 새어나가서 거의 텅 빈 연료탱크의 씨 퓨리기를 겨우 수원 공군기지로 몰고 가 착륙하였다.
 
이날 공산측의 대공사격이 극심해서 사리원 상공에서 두 기의 화이어플라이기들이 적 40mm 대공포에 명중되었지만 테세우스로 귀함하여 가까스로 착륙하였다,
 
다른 한 기의 조종사 시력이 갑자기 강렬한 햇빛에 손상되어 항모에 착륙이 힘들 것 같자, 수원 미 공군 기지로 가서 역시 연료가 모두 고갈 된 상태에서 가까스로 착륙했다.
 
25일은 악천후로 춭격을 하였지만 26일은 통상적인 정찰과 초계 임무를 수행하는 출격을 하였다.
 
27일에는 출격을 했으나 낮은 구름과 비가 내려 두 기가 영 함 커뮤스의 해안 목표 폭격을 지원하기 위한 비행만 했을 뿐 모두 일찍 임무를 종료하였다.
 
28일은 정비 및 휴식일로 출격이 없었다. 29일에도 통상적인 출격이 있었다.
 
30일 오전에는 북한이 해안에 감추어 둔 적 선박 6척을 발견하고 모두 파괴하였다. 코이 대위의 전투기가 대공포에 맞아 좌측 날개에 구멍이 생겼으나 무사히 귀환하였다.
 
4월 1일 화이어플라이기들은 해주 비행장의 격납고를 공격하였다. 테세우스는 다시 사세보 항으로 함수를 돌려서 4월 2일 오후 무사히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4월 3일 미 해군으로부터 다른 시콜스키 헬리콥터의 교체 승무원의 파견이 있었다. 이 기간 동안 함대 사령관 윌리엄 앤드류스 경이 이임하고 A.K 스코트 몽크리프 소장이 새로 취임해왔다. 그는 새로 극동에 파견한 순양함인 벨파스트에 승함하여 4월 11일 사세보 항에 도착했다.
 
 
                                                             왼쪽이 영 순양함 벨파스트


4월 10일 미그기 한 기가 압록강 앞 바다에 있는 신미도 근해의 얕은 개펄에 추락했다. 미 5공군은 이의 회수를 강하게 추진하였다. 영 순양함 케니아에게 이 회수 임무가 주어졌다. 미 5공군은 항공지원과 수색기, 그리고 헬리콥터 지원을 약속했다. 구난선인 USS 터그가 이 작전에 합류하였다.
  
이 날은 특히 미 공군의 공중작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던 날이었다. B-29기들이 바로 북방의 압록강 철교를 폭격했었고 공산 미그기들이 요격했었다. 2 기의 B-29기가 격추되었다.
 
  
                                                                         신미도


케니아는 최고 속도로 질주하여 이날 오전 10경에 현장에 도착했다. 세 척의 영연방[영국 캐나다] 구축함 누트카, 와라뭉가, 아메티스트도 이 작전에 동행해서 인근 해역을 수색했었다.
 
미그기 잔해는 발견하지 못했으나 격추된 B-29기의 승무원 사체 한 구를 인양하였다. 작전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4월 16일 종료되었다.
 
테세우스의 열번째 출동은 4월 8일이었다. 이번 출동 해역은 황해가 아니라 한국 동해였다. 동해에서 작전하던 미 해군 대형 항모들이 중국의 대만 침공에 대비해서 대만 해협으로 급파되었기 때문에 테세우스와 미 중형항모 바타안이 함께 이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급파 된 것이다.
 
테세우스가 동해에서 작전하는 동안 서해안에서는 미 해군과 영연방 해군함들의 연합 함대가 초계임무를 계속하였다. 이런 연합 작전은 처음 있던 일이었다.
 
테세우스의 수병들이나 조종사들은 경험을 많이 쌓아서 미 해군 항모 바타안의 해병 조종사들보다 월등히 기량이 뛰어났었다.
 
비록 미 항모 바타안의 사출장치가 두 기나 있어서 이론적으로는 영 항모 테세우스보다 더 우수한 기능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으나 사출기가 한 기 밖에 없는 테세우스가 더 앞선 실적을 발휘하였다.
 
동해 작전은 4월 15일까지 일 주일간 행해졌는데, 테세우스는 276회 출격을 기록했는데 비해 바타안은 244회 출격만 기록하였다. 이 일주일간 양 함은 각각 하루 동안씩 정비 휴식일에는 출격을 하지 않았다.
 
작전 기간 중 강한 북동풍이 계속 불어 바다는 황천항해를 내내 해야 했다. 테세우스는 이 불순한 일기 속에서도 단 한건의 이착륙 사고가 없었다. 영 조종사들의 노련한 기술이 이 무사고 이착륙 기록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적의 대공 사격과 불운으로 이 마지막 출동중 5기의 씨 퓨리기와 1기의 화이어플라이기가 손실되거나 대파되었다.
 
4월 9일 화이어플라이기들이 원산의 철도 시설과 창고 그리고 군 부대 사용 빌딩들을 대대적으로 공습하였다. 악명 높은 원산항의 기뢰 설치 기지로 의심되는 시설도 공습하여서 대규모 화재가 발생케 했다.
 
동해안에 대한 공중 정찰도 계속되어 공산 선박과 어선들이 기관포와 로케트로 파괴되었다. 다음날 두 기의 씨 퓨리기들이 미군의 두 콜세어 기들로부터 느닷없는 후방 공격을 받았다.
  
 
                                                        미 콜세어기들-해군과 해병대가 사용했다.
 
 
씨 퓨리기들을 공산기로 오인했었기 때문이다. 한기의 씨 퓨리기가 크게 파괴되었으나 한 기는 격렬한 회피 기동으로 콜세어기의 공격을 따돌리고 피했다. 콜세어 기들은 귀환하자 공산군 LA-9기를 격추했다고 보고했다. 
 
                                                                소련제 LA-9기

함경도 고원 일대에서 정찰 임무와 철도 공격 임무를 수행 중이던 다른 씨 퓨리기들은 콜세어 기에게 피격당한 두 씨 퓨리기들로부터 긴급 지원을 요청받아 달려 가다가 H. 존슨 대위의 씨 퓨리기가 적 37mm 대공포에 명중되었다.

 
그의 씨 퓨리기는 한 계곡 사이에 불시착을 시도했지만 추락하고 말았다. 그는 전사한 것으로 추정했으나 포로 교환 시에 송환 되었다.
 
쥬리안 대위도 추락한 그의 기체 주위 상공을 수색하다가 역시 적 대공화력에 명중되어 크게 손상을 입었다. 그는 겨우 씨 퓨리기를 몰고 남으로 비행하여 강릉 비행장에 비상 착륙하였다. 착륙 중 그의 전투기는 전복되었지만 그는 안전하게 탈출하였다.
 
11일에은 낮은 구름과 시계 불량으로 첫 출격만 빼고 나머지 출격은 모두 취소되었다.
 
다음 날인 12일, 화이어플라이기들은 흥남 지역의 교량을 폭격해서 파괴하였다.
 
베일리의 화이어플라이기가 적탄에 맞아 테세우스에서 40마일 떨어진 바다에 불시착했다. 두 명의 승무원은 해면에서 40분간 표류하다가 테세우스에 파견된 미 해군 헬리콥터에 의해서 구조되었다.
 
씨 퓨리기들은 계속 동해안의 적 탱크들과 다른 군사목표들을 공격했으며, 영 순양함 만체스터와 세인트 폴, 그리고 행크 함들의 해안 포격을 위해 목표 발견과 사격지휘를 위한 관측 활동을 하였다.
 
테세우스는 13일 바다에서 해상 급유를 받았다. 당일 급유가 끝난 11:40분 첫 출격이 있었다.
 
함흥 지역 정찰에 나선 험프리 대위의 기가 대공 사격에 피격되었다. 그의 함재기는 작은 논에 불시착하였고, 그는 항공기를 기술적으로 미끄러지게 해서 논 옆의 물이 마른 개천으로 처박히게 하였다. 이 개천은 지대가 낮아 접근하는 적의 사격으로부터 엄폐되게 하였다.
 
그의 편대기는 공중에서 적의 접근을 차단하였다. 추락기에서 약 40마일 떨어진 해상에 위치해 있던 테세우스에서 구조 헬리콥터가 두 기의 씨 퓨리기의 호위를 받으며 날아 왔고, 38분 뒤 조종사는 구조되었다.
 
그러나 그는 중상을 입고 있었다. 머리의 상처가 무척 컸고 무릎의 상처도 상태가 안 좋았다. 그는 만체스터 함의 솜씨 좋은 외과 전문 군의관으로부터 집중적인 치료를 받았다.
 
그날 오후 화이어플라이기들은 세 개의 교량을 파괴했고 씨 퓨리기들은 송탄리의 창고를 폭격하였다. 더해서 원산 북방 마을에 주둔하고 있던 적 병력 집결지를 기총 소사하였다.
 
 
                                                           미 해군기에게 파괴 된 도곡리 다리


14일 씨 퓨리기들이 정찰 임무를 수행하는 반면 화이어플라이기들은 흥남 지방의 다리들을 폭격하였다. 함재기들은 한반도를 가로질러가 진남포의 군수물자 집적소와 탱크들 그리고 작은 선박들을 공격하였다.
 
 
지역의 밀집한 대공포대들이 작전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보우만 대위의 함재기가 적 대공포화에 명중되어 불시착했으나 역시 접근한 적의 치열한 사격 중에 테세우스의 헬리콥터에 의해 구출되었다. 구출 헬리콥터를 조종한 미 해군 조종사 로저 길은 영국 정부로부터 DSC훈장을 받았다.
 
15일은 짙은 안개로 인해서 단 세 번의 출격만 있을 뿐이었다. 테세우스가 주축이 된 TE95.11 기동함대의 동해 작전은 4월 15일 오후 16:30분 종료 되었다. 미 항모 바타안은 사세보 항으로 돌아가고 테세우스와 호위함들은 한반도 황해로 향했다.
 
16일 극동에 도착한 기동함대 사령관 스코트 몬크리프 제독은 테세우스에 승함하여 기동함대를 지휘했다.
 
17일 북한 지상 목표들이 비행거리에 이르자 테세우스는 공격 함재기들을 발진시켰다. 사리원에 새로 건설한 북한의 비행장은 너무 집중적으로 공격을 당하여 완전 사용 불가능 상태가 되었다. 다시 수리된 교량들도 파괴되었다.
 
해밀턴 대위의 함재기가 대공포화에 맞아 겨우 귀함하다가 함에서 60마일 떨어진 바다에 불시착했다. 그러나 그는 55분간 찬 바다에서 표류하다가 역시 테세우스의 헬리콥터에게 구조되었다.
 
19일 기상이 악화되어 구름이 낮게 깔려 시야를 방해하고 폭우가 내렸다. 이 날 기동함대 TE95.11은 사세보 항으로 귀항하였다.
 
이로서 테세우스의 극동 해역 파견 임무는 끝나고 그 후임을 23일 새로 도착한 영 항모 그로리 함에게 인계하였다.
 
테세우스는 큰 환송 속에 사세보 항을 출항하여 홍콩으로 귀환하였다.

6.25전 참전 기간 동안 테세우스는 86일간의 작전 일에 3,446회 출격하였다.  <끝> 


신고
Posted by 열혈국방 트랙백 0 : 댓글 0










영국 항공모함 테세우스의 한국전쟁 출동기 -제 2 편- 
 
 

 
여섯 번째 출동 때 테세우스는 함에 장비했던 구조기 씨 오터를 내리고, 미 해군이 제공하는 헬리콥터를 대신 적재했다. 복엽기인 씨 오터는 지원 항모 HMS 유니콘으로 이동해서 새 엔진으로 교체하는 작업을 받을 터였다
 
 
 
                                                               영 수상 비행정 - 씨 오터
                                                         구식으로 보이지만 전후 탄생하였다.


유니콘은 항모였지만 사세보 항에 정박하여 주로 항공기의 정비나 새 항공기의 공급 및 휴식 공간 제공 등의 지원 업무만을 하였다.
 
1월 25일. 테세우스는 출항해서 다시 한국 해역으로 행했다. 여섯번째 출동이었다. 이날 부로 테세우스는 미 항모 바타안과 임무를 교대 했다. 한국 해역으로 이동 도중 새 조종사들은 항모 갑판 이착륙 훈련을 여러 번 되풀이했다.
 
한국의 서해안에서 미 해군 함정들이 북 해안 봉쇄, 황해 상공에서 탈출한 조종사 구출과 한국 전선의 최서단 적진에 대한 함포 사격의 임무 수행을 하고 있었다.
 
기상은 비행하기에 아주 좋은 쾌청한 날씨였다. 테세우스는 8일간의 여섯번째 출동에서 408 소티를 출격했다. 임무는 전과같이 이 해안지방 초계와 지상지원이었다.
  
26일에 비극적인 사고가 발생했다. 출격했던 A.C 베반 대위의 씨 퓨리기에 갑자기 불꽃이 튀는 것이 보이더니 나선을 그리며 수면을 향해 추락했다. 그 나선은 함재기가 수면에 추락하여 큰 물보라를 만들 때까지 계속되었다. 베반 대위로부터는 아무런 통신이 없었다.
 
추락지점은 테세우스로부터 10마일 북방이었다. 구축함 코삭이 고속으로 항진해서 15분후에 추락 현장에 도착했으나 생존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영 구축함 코삭 1,450톤 
                                                영국 구축함들은 미 구축참들보다 조금 작았다.
 

27일은 테세우스에게 불운한 날이었다. 케이리 피치 대위 기가 지상 작전 지원중 적 25mm 대공포나 소화기 탄에 명중되어 구축함 누트카 옆 해상에 불시착하였다. 다행히 그는 구축함에 의해서 구조되었다.
  
같은 날 케이리 피치 대위의 항공기가 동두천 부근에서 대공화기에 명중되어 좁은 골짜기 사이에 불시착하였다. 그의 동료들이 미 구조 헬기가 올 때가지 90분간 그를 엄호하며 적군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다.
 
불시착한 그의 화이어플라이기를 연소시키려고 했던 씨 퓨리기의 되풀이 된 기총 소사는 수포로 돌아갔지만 기체는 벌집이 되었다. 씨 퓨리기와 화이어플라이기들은 미 해군 포격의 지상 목표를 발견하는 임무에도 출격했다.
 
29일 씨 퓨리기들은 미 순양함 세인트 폴의 포격을 인천 소재 구 일본 자동차 공장 자리로 유도하였다. 세인트 폴의 8인치 포탄 30발이 공장에 낙하하여 몇 채의 빌딩을 파괴하였다.
 
31일은 출격하지 않고 휴식을 취했고, 2월 1일 출격한 씨 퓨리기가 해주 항의 독크 시설을 폭격하였다.
 
2월2일. 항모가 보유했던 1,463시간의 무사고 착륙 기록은 씨 퓨리 한 기가 거친 바다 위에서 상하로 피칭을 하는 항모에 착륙하려다가 타이어가 터지고 착륙장치 부분이 파괴되는 사건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2월 3일 씨 퓨리기들은 영 순양함 씨런의 화력을 인천 서쪽 표적들에게 유도하였다.
 
 
 
                                                             영 경순양함 씨런 8,800톤


영 항모 함재기들의 초계 범위는 수원과 김포 일대를 포함한 서울 북서지방이었으며, 이 지역에 추락한 미 모스키토 기 조종사가 헬기에 구출되는 동안 엄호하기도 했다.
  
2월 3일은 테세우스의 여섯번째 출동의 마지막 출격일이었다. 이날 테세우스가 속한 17항모단은 66회의 기록적인 출격을 하였다. 대잠 초계비행 임무에 동원된 소수의 기를 제외하고 모든 화이어플라이기들이 총 출동하여 수원의 북서쪽 지역의 적 점령 마을과 적 참호, 안양 주변에 설치된 적 대공포대들을 공격하였다. 이 공격후 옹진 반도와 해주 비행장을 정찰 비행하기도 했다,
  
미 항모 바타안과 임무 교대를 한 테세우스는 일본 구레 항으로로 돌아왔다. 테세우스는 48시간동안 구레 항에 정박하면서 귀국 희망자들을 위한 절차를 밟았다.
 
 
                                                                   항진 중인 테세우스


2월 12일 테세우스는 구레 항을 출발하여 한국 해역으로 돌아왔다. 일곱번째 출동이었다. 2월 13일 일곱번째 출동을하면서 새로 부임한 조종사들을 위한 비행 연습을 했다.
 
일곱번째 출동에는 영 연방 해군의 코뮤스, 카유가, 아타바스칸과 누트카등이 호위 함대를 이루어서 동행하였다.
 
다음 날인 14일. 미 5공군은 육상 기지에 낮고 짙게 드리워진 구름때문에 출격을 못하였고, 영 함재기들만이 출격할 수가 있었다.
 
화이어플라이기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서 두 팀은 서울 북서쪽의 지상군 지원임무에 출동하고, 다른 두 팀은 초계 임무에 나섰다.
 
씨 퓨리기들은 서울과 평양사이 도로와 사리원과 해주 일대의 정찰 비행을 실시하면서 의심 목표를 공격하였다.
 
항모에 화이어플라이기들이 착륙하던 중 한 기의 기관포 3문이 오작동으로 발사되어 이착륙 관제사 J. F.위그리 준위를 사망하게 만들었다. 그는 다음 날 정중한 해군 의식으로 수장되었다.
 
2월 15일 진남포항 주변의 바다 얼음들이 녹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 사실은 공산군들이 다시 기뢰 설치를 시도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 해역에 대한 정찰과 감시가 강화되었다.
 
  
                                                              테세우스와 항공대 부대원들


2월 17일. 이틀간 불량한 일기로 출격을 못하다가 출격한 화이어플라이기들은 인천 서북방 구역을 집중적으로 초계하였다. 출동의 마지막 출격 목적은 진남포 일대의 적이 수리한 철도 시설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평양역에서 은폐되어 있다가 파괴 된 북한 기관차


같은 날 화이어플라이기들은 원주에서 미 9군단의 지상 작전을 지원하였다. 일곱번째 출동은 2월 23일부로 종료되고 테세우스는 임무를 미 항모 바타안에게 인계하고 사세보 항으로 향하여 항진, 다음날 저녁에 도착하였다.
 
 3월 4일 테세우스는 사세보 항을 출발하여 여덟번째 출동을 하였다. 
  
해상 작전은 출항 당일부터 개시되었다. 군함 케니아와 그 호위함들이 북한 해안을 포격하는 동안 공중 초계가 진남포에서 구사성까지 집중적으로 행해졌다. 공산 측에게 이북 서해안에 대한 상륙작전이 임박했다는 오판을 하게 만드는 위장작전이었다.
 
화이어플라이기들은 초계와 정찰과 교량 폭격을 했고, 씨 퓨리기들은 케니아의 포격을 집중 지원 하였다. 함재기들은 틈을 내어 옹진반도와 해주의 적 비행 기지들을 정찰했다.
 
3월 6일. 기상이 나빠져서 화이어플라이기와 씨 퓨리기는 제한적인 공중 초계만 할 수가 있었다. 이 날은 씨 퓨리기들만 출격해서 해주 서쪽의 도로에 대한 감시 비행만 했을 따름이었다. 3월 7일 역시 해안 포격을 하는 케니아에 대한 지원과 초계를 하였다.
 
3월 8일. 테세우스 함재기들은 서울 -개성- 신막 지역을 정찰하고 철도역과 화물 집적소를 공격하였다. 이날도 순양함 케니아의 연안 포격을 위한 지원 비행이 있었다. 이어서 미 1기병사단에 대한 지원 지상 공격을 하였다.
 
9일은 출격을 쉬었고 다음날 10일은 기상 악화로 출격이 없었다. 11일은 다른 날과 같은 임무의 출격이 있었다. 
 
12일에 화이어플라이기들은 황해도 장연과 옹진 일대를 정찰 비행 중에 황주 남방에서 공산 측의 심한 대공 사격을 받았다. 이날 제임스 대위는 4,500피트 상공을 비행 중에 적의 대공사격에 피탄 되었다.
 

그는 동료 조종사 존슨 대위와 함께 미 공군 기지가 있는 수원 비행장으로 겨우 비행해서 착륙했다.그는 그 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귀함하였다. 
 
 
 
                                                                  미 공군 수원기지
                  1953년 북한기의 야간 공습으로  9기의 피해를 본 뒤 기체 엄폐를 위한 방벽이 설치되었다.


여덟번째 출동의 마지막 날 함재기들은 강산사와 진남포 사이를 초계하다가 황해도 장연 상공에서 적의 격심한 대공포화를 만났다.겨우 대공사격 지대를 벗어났지만 조금 뒤 G.H 쿨스 대위와 D.W 가이 대위의 화이어플라이기가 추락했다.
 
대공포화나 아니면 장착한 폭탄이 오작동으로 폭발했을 것이었기 때문으로 추측 되었다. 동료들은 추락 현장을 맴돌며 지켜보았으나 아무런 생존자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테세우스의 상공을 나르는 화이어플라이기들


비극적인 함재기의 손실이 있었지만 테세우스는 예정대로 그날 오후 사세보 항으로 회항하여 다음날 오후에 기항하였다. 여덟번째 출동에서 테세우스는 공격성 총 출격 226회 방어성 총 출격 113회를 기록하였다. 
 


<다음편에 계속됩니다..>


신고
Posted by 열혈국방 트랙백 0 : 댓글 0

 

 








영국 항공모함 테세우스의 한국전쟁 출동기(제 1 편) 
 
 
 

                                                              영 항모 테세우스13,400톤


극동 파견의 명을 받고 영국을 떠난 테세우스는 일차 기항지 홍콩에 기항할 때 까지 항해 중에도 부단한 이착륙 훈련과 공중 기동 연습을 해서 전투력의 수준을 더욱 향상시켰다. 함장은 볼트 대령, 항공대장은 스토빈 브래드포드 중령이었다.
 
 
                                                                     함장 볼트 대령


1950년 9월 24일. 항모 테세우스가 개전 초기부터 참전하여 많은 전공을 세우고 귀환하는 영 항모 트라이엄프로부터 임무 교대와 장비 인수를 하는 동안 항모의 항공대는 작업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서 잠깐 홍콩 카이탁 공항으로 이동했다가 그 날 오후 귀함(歸艦)하였다.
  
드디어 1950년 10월 2일 11시 30분. 테세우스는 성대한 환송 속에 홍콩을 출항하여 한국 전장으로 장도에 올랐다. 저녁에 태풍이 찾아 왔으나 태풍은 수요일에 모두 통과하고 바다는 다시 평온해졌다. 
 
테세우스는 항해를 계속해서 그 다음 목요일 한반도를 마주 보고 있는 일본 규우슈의 군항 사세보에 입항하여 영국 군함 와리어의 옆에 정박했다. 사세보 항은 향후 테세우스의 후방 기지를 하게 된다. 테세우스는 한국 해역 출동준비를 위해 바쁜 이틀간을 보냈다.
  
 
                                             6.25중 사세보 항 - 미 대형 항모 밸리 포지와 레이테


함상 전투기나 공격기들이 추가 공급되었고 각 함재기들에게 피아 식별을 위한 줄무늬들이 그려졌다. 전에 작전하던 트라이엄프의 씨 화이어기가 미 공군 B-29 기총수로부터 오인 사격을 받고 격추되었던 쓴 경험으로 인해 인식 줄무늬를 그리게 된 것이다.
 
사세보 항 인근 이와쿠니 기지에는 예비 전투기들과 이를 관리하는 정비요원들이 배치되었다.
 
10월 7일. 극동함대 사령관 앤드류스 제독은 기동부대 TE 95를 7개의 작은 팀으로 나누어서 이 작은 팀들을 TE 95.10에서 TE 95.16까지로 각각 명명하였다.
 
테세우스와 그에게 배속된 구축함들의 함대는 TE 95.11이 되었다. 이번 출동전에 테세우스는 신형 함상 전투기로 장비가 교체 되었다. 한국 참전 동안 호커사가 제작한 씨 퓨리기가 테세우스의 주력 전투기로 활동하게 되었다. 
 
  
                                           씨 퓨리 기 - 미그 15기도 격추했던 성능좋은 영 해군기다.


이전 트라이엄프의 주력기는 육상 전투기 스피트파이어를 함재기화한 씨 화이어였다. 이 전투기는 육상에서는 명전투기였지만 해상 활동에는 여러 문제점을 드러냈었다.
 
직렬 엔진이 달린 긴 기수는 흔들리는 함체의 짧은 활주로에서 뜨고 내리는 데 절대 필요한 시야확보에 제한이 있었고, 육상용이었던 이착륙장치가 거친 함상 사용에 적합하지 않아 착륙시의 충격으로 기체 후부에 주름이 잡히는 금속 피로 현상이 오기도 하였다,
  
 
                  씨 화이어기는 육상의 명기 스피트화이어를 함재기로 개량한 것으로 날개를 접을 수가 있다.
                   그러나 해상 작전에서 여러 문제점을 드러냈다.


씨 퓨리기는 시야가 좋은 성형(星型)엔진을 가졌고 이착륙장치도 해군 전용기답게 무척 크고 단단했다. 새로운 전투기 운영 초기에 자주 일어나는 사고가 이번에도 있을까 하는 염려가 있었으나 다행히 아무런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다.
  
한국 해역으로 가는 동안 공격기인 화이어플라이기 한 기가 함대를 선도하며 대잠 초계 비행을 계속하였다. 북한이 개전 전에 이미 소련으로부터 두 척의 잠수함을 인도받았다는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큰 위협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견들이었지만 하여튼 조심해야 했다. 레이다에 나타난 미확인 적기를 향해 긴급 요격 이륙을 하기도 했었지만 공산기가 아니라 거의 미군기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긴급 발진은 전투기 조종사들에게 유익한 경험 축적이 되었다.
 
  
               영 함상 공격기 화이어플라이 기 - 2인승으로, 동체 후부에 피아인식을 위한 둥근테가 그려져 있다.


테세우스의 함재기들은 육군에 파견된 전방 항공 통제 장교들의 유도에 따라 지상 지원 작전을 할 예정이라는 지시를 받았었다. 지상 공격시 미군의 공격기들은 훨씬 파괴력이 강한 네이팜 탄을 썼지만 영국 해군기들은 주로 통상의 폭탄과 로케트 포, 그리고 기관포탄을 사용 했다.
 
한국은 높은 산들이 많은 산악 국가였기 때문에 구름이 낀 날은 고도의 비행 능력이 요구되어 구름이 낀 날은 긴 산맥을 특히 조심해야 했다.
 
항모의 항공대는 작전 시 통상 하루에 50회(소티)를 출격했었고, 대개 한번 출격에 두 시간 반에서 세 시간이 소비되었다. 그러나 때로는 66회나 출격하기도 하였다.
 
무거운 신형기 씨 퓨리기들은 상황이 급할 때 항모의 캐타펄트[항공기 이륙 사출 장치]가 고장 나면 로케트 이륙 추진 장치인 RATOG를 장착하여 비상 이륙하기도 하였다.
  
화이어플라이기나 씨 퓨리 기들을 발진시킬 때 이 장비가 여러 번 사용되었는데 이 장치를 사용하면 항공기 이륙시 항모에 무리가 가는 22노트의 전속력을 내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 전선에 최초로 출동했던 트라이엄프


1950년 10월9일에서 11일까지 3일 간 테세우스가 첫 실전을 경험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항공 공격의 대상은 적의 대공 포대와 군사 통신 체계였다.
 
10월 9일. 씨 퓨리 전투기 편대와 화이어플라이 공격기 편대는 각각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 대동강 하구 진남포를 공습했다. 적 군사 시설 타격의 공습 작전은 10월 내내 계속되었다.
 
공격 목표들은 주로 적 보급선의 급소들인 교량이나 철도 등이었다. 적의 보급 교통망을 차단하는 공격은 평양-사리원- 황주사이에 북서쪽에 집중되었다.
 
10월 첫 작전 중 항모의 정비팀들은 최고의 능력을 보여 주었다. 적 소화기 대공 사격이나 대구경 고사포탄 파편들에 뚫린 기체의 구멍 정도는 즉시 당일로 수리가 되었다. 때로는 밤을 세워가며 엔진 전체를 교체하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우수한 정비 덕택에 함재기 가동률은 아주 높았다. 항상 탑재 씨 퓨리기 20기 중에 19기, 화이어플라이 12기 중 11기가 출격 가능 상태로 유지되었다,
 
테세우스의 첫 출동은 10월 21일 마감되어[테세우스는 다음해 봄까지 열 번의 출동을 하게 된다.] 정비와 보급을 위해서 일본 사세보 항으로 돌아왔다.
 
첫 작전에서 입증된 테세우스의 새 전투기 씨 퓨리 2기와 새 공격기 화이어플라이 5기의 성능은 영국 해군을 매우 만족하게 만들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한국 전선에 첫 투입된 영 항모 트라이엄프는 스피트화이어 해상형 개조기인 시화이어와 화이어플라이 1형기로 장비되어 있었는데 이들의 가동률은 기대에 못 미치는 것이었다.
 
테세우스의 신형기들은 트라이엄프의 구형기들에 비해서 특히 전투 능력은 물론 가동률도 훨씬 우수하다는 사실을 출격과 정비로서 말해주었다.
 
테세우스의 두 번째 출동은 10월 27일에 있었다. 이날 테세우스는 일본 사세보 항을 출항해서 한국 황해로 향했다. 이번 출동에는 한 손님이 테세우스에 합류했다.
 
미 해군 워세스터 함 탑재 헬기가 진남포 항까지의 해로에 적이 설치한 기뢰발견과 소해(掃海)의 임무를 띄고 테세우스에 파견된 것이다.
 
헬리콥터가 항모 갑판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바람에 테세우스는 여러 제약을 감수해야 했다.
 
함재기 사출 장치(캐타펄트)를 사용할 수가 없었다. 로케트 보조 장치로 이륙하는 항공기들은 로케트나 폭탄 또는 보조탱크를 외장하지 못했다.
 
헬리콥터 활용 면적 확보를 위해서 6기의 화이어플라이기는 당분간 항모를 떠나 사세보의 육상 기지에 머물려 있어야 했다. 바다로 출동한 테세우스의 미 해군 헬리콥터는 10월 29일부터 기뢰 수색 작전을 개시하였다.
 
테세우스의 함재기 씨 퓨리기들은 기관포만 무장하고 주로 함과 헬리콥터의 항공 초계와 호위 임무만 수행하였다. 테세우스가 임무를 끝내고 사세보 항으로 돌아가는 길에 육상 기지에 대기하고 있던 화이어플라이기 6기가 다시 테세우스로 돌아왔다.
 
  
                                         북한 철도 교통망은 끊임없는 유엔 공군의 공격 목표가 되었다.


사세보에 일시 기항했던 테세우스는 홍콩을 향해 출항했다. 홍콩까지의 항해 3일간 함의 정비팀은 캐타펄트 장치의 가속성능과 착륙 속도 지연 로프의 성능을 개량했다. 테세우스는 홍콩에 정박하고 11월 13일 하루 바다로 출항해서 개량한 사출장치의 성능을 시험했다.
  
한국의 전쟁은 북한군이 패주하고 유엔군이 그 뒤를 쫓아 압록강을 향하여 쾌속 진격중이라, 전쟁의 끝이 보이는듯했다. 테세우스의 승조원들은 한국 원정 임무는 이제 다시 없을 것이고 테세우스는 당분간 홍콩에서 활동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중공군의 참전으로 테세우스와 호위함들은 다시 닻을 올리고 집결지 사세보로 긴급 출항했다. 테세우스를 주축으로 한 영연방 기동함대 TG 95.1은 피난민들이 철수하는 진남포 항을 제외하고 전 북한 서해안 쪽의 포구나 항구의 군사 목표 공격 임무를 부여받았다,
 
테세우스의 세 번째 작전 출동은 UN군이 밀리던 12월 4일 있었다. 호위 함정들인 콘코드와 코색, 에버튼 함들을 동행한 테세우스는 사세보를 출항하였다. 테세우스의 씨 퓨리와 화이어플라이기들은 작전지역에 도착하자 곧 집중적인 출격을 개시하였다.
 
함재기들은 전진하는 중공군을 저지하기 위해 적지의 교량, 화차, 군수물자 집합소, 그리고 중공군들을 공격하였다.
 
마침 공군들은 전방 기지들이 폐쇄하고 철수해야 하는 불리한 상황이었다. 이 불리한 시기에 바다의 이동 기지인 테세우스는 공백이 생긴 항공력을 대체하는 능력을 훌륭히 발휘하였다.
 
겨울 바다에서 테세우스 함재기들의 출격은 12월 5일 시작하였다.
첫 임무는 아군들과 피난민이 철수하는 진남포 항으로 진격해오는 중공군들을 공격하는 것이었지만, 전황은 시시각각 악화되고 있었다.
 
12월 8일 두 번째 출격이 있었다. 유엔군을 추격하는 중공군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 날의 총 출격 시간은 무려 115시간으로, 테세우스가 취역한 이래 최대의 기록이었다.
 
10일은 기상이 아주 안 좋아서 김포 기지에 착륙했던 4기의  씨 퓨리기들이 그냥 김포 기지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11일 다시 출격이 있었다. 공격 대상은 전과 같이 적의 보급선인 도로와 철도였다. 적의 철도와 물자 집하장 또는 화차나 도로에서 움직이는 적 차량들이었다.
 
13일 해주와 진남포의 군사 목표들을 공격했다. 함재기들은 진남포 해주 일대 지역에서 대지 공격 임무만  수행한 것이 아니었다.
 
유엔군의 철수로를 따라 지역을 세분해서 저공비행을 하며 혹시 뒤처져서 방황하는 아군이 있는지 확인하는 빗질 수색도 있었다. 낙오되어 헤매는 많은 미군들과 한국군이 목격되었다.
 
14일 테세우스의 함재기들은 처음으로 미그 15 기를 목격했다. 미그 15기는 지상의 낙오병들을 구해서 진남포 앞 바다에 정박한 LST로 이송하던 헬리콥터에 대한 공격을 시도했었다.
 
테세우스는 14일 세 번째 출동을 마치고 다시 사세보를 향하여 함수를 돌렸다. 그러나 귀항 길에 오르고 몇 시간 되지 않아 사령부로부터 황해 북쪽에서 발견된 중국 어선단을 조사하라는 긴급지시를 받았다.
 
그 어선들이 중공군들을 수송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긴급히 발진한 테세우스의 함재기들은 이들 정크선이 단순한 어선임을 확인하고 이를 본부에 보고했다.
 
이번 출동에서 테세우스의 함재기들은 총 338회의 출격과 전투 출격 시간 838시간의 기록을 올렸다.

테세우스는 사세보에서 재급유와 재보급을 완료하자 다시 바다로 나가 네 번째 출동을 하였다.
 
황해 북쪽 작전 해역으로 북상하는 이틀 동안 기상이 너무 불량하여 함재기를 한 번도 이륙시킬 수가 없었다. 작전 해역에 도착 하고 기상이 쾌청해지자 테세우스의 함재기들은 출격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산야는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그런 눈 덮인 지상에서 적의 활발한 움직임이 탐지되었다.
공산군은 남으로 전면 철수하는 유엔군을 추격하고 있었다.
 
  
                                                    압록강을 건너 북한땅으로 들어가는 중공군.
                    이들은 압록강에서 최일선까지 도보로 이동했었기 때문에 주야 항공 공격에 시달려야 핬다.


12월 19일. 테세우스의 씨 퓨리기들은 황주와 사리원 사이 도로에서 이동하는 적 수송대를 네 번에 걸쳐 공격해서 트럭 17량과 적 탱크 3량을 파괴하였다.
 
주로 로케트 탄이 사용되었는데 저공 비행과 로케트 공격은 낮게 깔린 구름과 불량한 시계 때문에 아주 어렵게 실행되었다. 악천후는 계속 되었지만 함재기들은 기회가 될 때마다 출격을 계속하였다.
 
12월 23일. 씨 퓨리기 편대는 평양 서쪽에서 행군 중인 중공군 병력과 차량들을 기총소사해서 타격을 주었다. 장거리 비행이 필요한 평양 동쪽 지역에 대한 초계 비행임무는 미 공군의 전방 활동 기능이 다시 가동 되자 26일부로 종료되었다.
 
평양 동쪽 지역의 장거리 지원에서 630회의 출격이 있었고 총 출격 시간은 1,630분이었다. 영 함재기들이 발사한 로케트탄만 무려 1,400발이나 되었다.
 
테세우스는 12월 28일 오후 사세보로 다시 귀항했다. 여기서 세 명의 새 조종사들이 증원되었고 함은 다시 같은 일본의 다른 항구인 구레 항으로 이동하였다.
 
구레에서 테세우스는 다른 영 항모[航母]인 유니콘 옆에 계류되었다. 테세우스는 유니콘에게 수리가 필요한 두 기의 씨 퓨리기와 두 기의 화이어플라이기를 넘겨주고 대신 정비가 잘 된 세 기의 씨 퓨리기와 한 기의 화이어플라이기를 공급 받았다.
 
 
                                                                영항모 유니콘 14,750톤
                                                        작전 출동보다 주로 지원업무만 했다.


12월 31일 일요일. 테세우스 식구들이 크리스마스 휴가를 즐기는 동안 반년마다 한 번 씩 있는 진급자 명단이 발표되었다. 라르킨 중령과 홉킨스 중령은 대령으로 진급했고 화이트와 콤프톤, 톰슨, 그리고 항공대장 스토빈 브래드포드 소령은 모두 중령으로 진급하였다.
 
구레에서 테세우스는 미 7함대 소속 항모 바동 스트레이츠호 정비진의 도움을 받으며 정밀 장비를 정비를 했다.
 
테세우스의 다섯 번째 출동은 서울을 중공군에게 내준 직후인 1월 5일에 있었다.
 
한국 해역에 도착한 1월 7일에 첫 출격이 있었다. 첫 초계비행의 임무는 최 일선에서부터 진남포까지 해안 지역 정찰, 적 병력의 이동, 선박을 이용한 적 보급 활동의 감시였다.
 
1월의 추운 날씨에 한국 해안의 대부분은 얼어서 얼음으로 덮여 있었다.
 
해안에서 적이 기뢰를 설치하는 등의 특이 동향은 발견되지 않았다.
 
반면 육상 전선에서의 공중 지원 요구는 급증하였다. 영 함대 사령관 앤드류스 제독은 미 5공군 사령관에게 영 해군이 유엔군 지상 병력을 위해서 하루 20 소티 이상의 지상 지원을 해 줄 수 있다고 제안했다.
 
1월 8일 오후 테세우스의 함재기들은 오산 남방에서 미 육군 25사단을 근접 지원하여 적 병력을 기총과 로케트로 공격했다.
 
영 함재기들의 지상 공격은 미 공군 T-6 표적 지시기의 유도를 따라 행해졌다. 영 조종사들은 작전 상공에서는 자기가 공격하고 싶은 목표를 선택해서 공격 할 수 있는 재량권이 주어졌다. 영 해군기들은 지상 지원은 물론 북 서해안 지역과 북한이 패주할 때 폐쇄 했던 북 비행장에 대한 정찰도 게을리 하지는 않았었다.
 


                                                                       씨 퓨리기


1월 13일. 폭설이 출격을 방해했지만 다음 날은 쾌청하여 함재기들의 출격이 가능했다.
 
그러나 몇 기가 출격을 한 뒤 사출 장치가 고장나고 말았다. 이미 상공에는 다른 기들을 기다리며 편대를 짜고 기다리는 씨 퓨리 기들이 있었다.
 
후속기들은 로케트 이륙 보조 장치를 부착하고 이륙할 수는 있었지만 외장(外裝)한 폭탄과 보조 연료탱크는 모두 제거하여야 했다.
 
적 타격에 사용할 무장은 단지 20mm 기관포뿐이었다. 좀 더 가벼운 화이어플라이기는 제대로 무장하고 이륙할 수가 있었지만 씨 퓨리기는 로케트 이륙 보조 장치인 RATOG를 사용하여야 한다.

15일. 묘안을 내서 전투기 계류 위치들을 재조정으로 해서 씨 퓨리기들이 이륙할 수 있었고 화이어플라이 기들도 로케트 이륙 보조 장치로서 이륙할 수가 있었다. 이 날 하이헷트 대위는 1,000번째 무사고 항모 착륙을 기록했다.
 
16일. 테세우스는 새로운 기록인 총 60소티[총출격] 기록을 수립하였다. 미영 합동작전 본부에서는 축하 메시지를 보내 테세우스가 전 미 5공군에서도 하지 못한 위대한 기록을 남겼다고 치하했다. 16일에 다른 중요 한 일도 있었다. 미 소형 항모 바타안 함이 테세우스와 함께 합동 작전을 위해서 영 함대에 증파되었다.
 
 
                                                             미 소형항모 바타안 16,000톤
                                                      조종사들은 해병대에서 파견되었었다


덕분에 앤드류스 함대 사령관은 자기 휘하의 두 척의 항모를 18일간씩 여유있게 교대로 운행할 수가 있었다.
 
이 조치로 영 항모들은 8일이나 9일간 출격하고 하루는 휴식을 취하고, 사세보에 급유와 보급을 위해서 오갈 때 여유 있게 하루를 더 사용할 수가 있었으며 6~7일간 사세보에서 머물러 정비와 휴식을 취할 수가 있었다. 테세우스는 사세보로 귀항하여 휴식과 정비를 했다.
 
이 정박기간 중 "일년 간 최고의 공을 세운" 영국 해군 조종사와 승무원들에게 수여되는 보이드 컵이 테세우스 조종사들에게 수여되었다.

신고
Posted by 열혈국방 트랙백 0 : 댓글 0
 


-제 2 , 적 프로펠러기에 당한 미 최신 제트기-.




                                            윈턴 마셜 소령-너무 말라서 친구 사이에 갈비씨[bones]라는
                                            별명이 이름처럼 통용되었다.

이 폭격기 격추 뒤에 마셜은 전투기의 CAL 50실탄을 모두 소진했음을 발견했다. [적 대형기 격추는 다량의 실탄을 소비하는 집중 사격이 필요하다.]

그는 선도 위치를 즉시 존 호노커에게 양보하고 호위 위치로 옮겨갔다.

이제부터 적기 공격은 존 호노커가 리드 할 것이고 마셜은 엄호만 하게 되었다.

호위 위치로 옮기고 나서 그는 다소 여유를 가지고 수십 개의 공중전이 어지럽게 수놓은 있는 주변 상공을 살펴볼 수가 있었다.

다수의 적 폭격기들이 연기를 뿜고 지상으로 낙하하고 있었다. 잠깐 사이에 여러 기의 LA-9기들도 마셜의 눈앞에서 격추 되었다.

후방 상공에서 편대를 뛰쳐나와 이 난전에 끼어든 수기의 미그기들도 F-86기들과 얽혀들어 치열한 생과 사의 격투를 벌이고 있었다. 후미에 붙은 미군기를 떨쳐 내기 위해서 미그기의 격렬한 기동을 보기에도 장관이었다.

마셜의 상공에서 한 미그기는 이미 피격되어 큰 맴돌이를 하며 추락하고 있었다.

이미 격추된 공산기에서 탈출한 수 십 명의 조종사들을 매단 낙하산들이 낙화처럼 지상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상공은 적 낙하산이 너무 많아 마치 미 육군의 82공수사단의 낙하 훈련 현장같이 보였다. 미 공군의 이런 매서운 공격을 견디며 폭격 목표인 대화도를 향하여 목숨을 건 비행을 견지해왔던 남은 TU-2기들이 섬 상공의 폭격 지점에서 마침내 기수를 북으로 돌려 도주하였다.

마셜 소령은 이들 대화도 상공에 진입했던 몇 기의 TU-2 기들이 폭탄을 투하했던 사실을 기술하지 않았다.공중에 전개된 난전으로 그 폭탄 투하 장면을 보지 못한듯하다.

마셜과 동료 호노커는 도주하는 마지막 적 폭격대를 서둘러 격멸하기로 하고 기수를 돌려 다시 급강하를 시작했다.

바로 이 순간 호노커는 비명에 가까운 경고를 발했다. “대장! 급속 이탈 !-BREAK HARD-!”

BREAK HARD라는 말은 조종사가 모르는 사이 적기가 내습한 위기 상황을 동료기가 알아채고 발하는 경고다.

이 경고가 이어폰에서 울리는 순간 조종사들은 만사 젖히고 무조건 최대로 신속하게 기체와 조종사의 조건이 허용하는 한 급격하게 방향 전환과 다이빙으로 적기의 공격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이 비명의 경고를 듣는 순간 마셜은 격심한 충격에 정신을 잠시 잃고 말았다. 마셜은 나중에야 그가 정면 고공에서 그의 F -86기를 향하여 수직 다이빙으로 기관포 공격을 한 LA-9기를 발견하지 못했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적기는 그에게 일격을 가하고 아래로 다이빙해서 이탈했다. 문자 그대로 일격이탈의 기습에 마셜 소령이 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LA-9는 즉시 추격한 호노커에 격추당했다.

그러나 조종사 왕티안 바오는  살아서 부대로 돌아 갔다. 오히려 마셜 소령의 F-86기를 격추 한것으로 보고하여 대대적으로 선전에 동원되었다.


                                               중국 언론에 프로펠러 기로 미군 최신 전투기를 격추한
                                               영웅으로 대대적으로 선전되던 왕 티안 바오의 사진


적기를 처치한 호노커는 거꾸로 뒤집혀 진채 지상을 향해 나선을 그리고 추락하고 있는 마셜의 전투기를 쫓아왔다.

적 기관포탄은 마셜의 왼쪽 날개를 크게 파손시키고 캐노피[조종석 보호창]를 날려 버렸다.기관포탄 한 발이 조종석 머리 받침대에 뒤에 명중하여 그의 조종 헬멧을 크게 파괴하였다.

머리에 큰 상처를 입어 흐르는 피는 마셜의 얼굴을 뒤덮었다. 그의 전투기는 뒤집어진 채 지상을 향하여 계속 나선을 그리고 추락했다.

그는 정신을 잃어서 조종 불능상태였다. 그러나 캐노피가 날아간 조종석에 세차게 몰아 부친 북한 겨울의 얼어붙은 냉기가 그의 의식을 되찾게 하였다.

뒤집혀 진 기체의 조종석에 거꾸로 매달린 마셜은 지면이 빙글빙글 회전하며 빠르게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정신이 든 마셜의 귀에 들린 것은 호노커가 김포 기지에 다급하게 보고하는 그의 위기 상황이었다.

마셜의 전투기가 추락하고 있고 탈출한 낙하산도 보이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마셜은 조종석을 엄습하는 강풍 속에서 겨우 기체를 다시 잡고 상승해서 호노커와 합류했다. 그의 헬멧을 크게 부서지고 부착된 이어폰이 파괴 되어서 수신은 되었지만 송신은 되지 않았다.

산소 마스크도 얼굴에 밀착되지 않아 한 손으로 조종간을 조작하면서 한 손으로는 산소 마스크를 얼굴에 꼭 대고 있어야 했다. 그의 손과 얼굴은 얼어붙은 대기에 마비가 되었다.

이곳은 적진 깊숙이 있는 격전장이었다. 캐노피마저 날아간 마셜의 전투기를 미그기가 공격한다면이미 날개에 큰 파손을 입은 기체로는 회피 기동마저도 불가능하게 보였다.


                                                        F-86기와 미그 15기들이 격돌하던 유명한
                                                        미그 골목[MIG ALLEY]


더구나 보유한 실탄은 모두 소진한 상태였다. 마셜은 150마일 남쪽의 김포 기지로 방향을 틀고 불안한 귀환 비행을 시작했다.

연료계는 연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부상을 입었고 또 다시 의식을 잃을지도 몰랐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그의 부상이 상당히 심각한 것을 알아차렸다.

폭발한 적 기관포탄 파편들과 파괴된 캐노피에서 비산한 프렉스그라스 조각들이 마셜의 손과 얼굴과 목에 박혀 출혈을 계속하게 했다.

상황은 엄중했고 위기가 찾아왔다. 그는 과연 이런 상황에 전투기를 몰고 남쪽 김포 기지로 귀환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절망적 생각도 들었었다.

이 위기에 믿을 것은 동료 호노커의 호위뿐이었다. 이런 위기상황 대처 능력에서 미 공군에는 호노커보다 더 나은 조종사는 없었다.

그는 적기의 추격을 요격할 후방의 위치에서 계속 마셜을 독려하며 정보를 주고 주변을 경계했다.

존 호노커는 적 기관포탄이 마셜 기체 상부 조종석 후부도 대파시켜 큰 파손 부위가 보인다고 알려주었다.

그는 놀랐다. 그 곳에는 전투기 조종을 통제하는 유압 장치의 중심 부분이 있는 곳이었다.

이 곳이 파괴되어 유압(油壓)이 다 빠져 나간다면 전투기는 조종 불능 상태에 이른다.

마셜은 놀라서 뒤를 돌아보다가 더 놀랄 사실을 보았다. 그가 메고 있는 낙하산의 일부가 파괴되어 흰 천이 길게 빠져나와 흔들거리고 있었다.

아마도 낙하산이 적의 기관포탄이 조종석 후방에 명중했을 때 그 파편을 막아내 그의 목숨을 구했을지 모르지만 낙하산이 파괴된 이상 기체에서 비상탈출도 불가능했다.

호노커는 공중의 격전장을 빠져 비교적 안전지대로 접어들자 걱정스럽게 마셜 소령의 옆으로 다가와 지상 쪽을 가리켰다.

그 곳은 북한 해변의 갯벌이었다. 마셜에게 그 곳에 비상착륙을 생각해보라는 호노커의 제안이었다. 그러나 조종 시스템은 그런대로 아직 말을 듣고 있었고 엔진도 제대로 가동하고 있었다. 더구나 이런 추운 날씨에 신체도 시원치 않은 상태로 동체 착륙을 했다가 더 비극적인 결말을 맺을 가능성도 부정 할 수가 없었다.


                                         소련의 격추왕 에브게니 예브게니 페페리아예프 상좌에게 
                                         격추된 미 공군 가렛트 중위의 F-86기

                                         -청천강 하구 앞 얕은 갯벌에 불시착해서 기체 상태가 비교적
                                          온전했다. 그가 비상탈출한 것이 아니란 것이 손상없이 열린
                                          캐노피가 증명해준다. 소련은 이 기체를 소련으로 가져가
                                          철저 분석해서 미 첨단 기술을 빼냈다. 마셜 소령의 F-86기도
                                          하마트면 이 운명을 거쳤을 가능성이 있다.


마셜 소령의 쉽게 포기 하지 않은 싸움닭 기질은 해볼 때까지 해보자는 오기가 들게 했다.

그는 호노커에게 고개를 가로 지으며 남쪽으로 비행을 계속 하였다. 호노커는 김포 기지에서 구조 헬기가 출동했으니 힘내라는 격려를 했다.

그 말을 들으니 마셜은 기운이 되 살아 나는 것 같았다. 영겁과 같이만 느껴지던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우리는 드디어 엔진이 꺼져도 김포까지 활강할 수 있는 한강 북쪽 지역으로 접어들었다.

호노커와 기지의 분주한 통신을 들어보면 김포 기지에서는 그의 비상착륙에 대비해서 모든 전투기의 이착륙이 금지되고 활주로 옆에는 소방차와 구난차 그리고 앰브란스등이 비상대기 완료했음을 알 수 있었다.

마셜 소령은 그를 위한 긴급조처들이 모두 행해져 그의 무사 귀환을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자 감격의 눈물이 눈에 고였다.

드디어 목마르게 기다렸던 김포 기지 활주로가 보였다. 마셜 소령은 바퀴를 내리고 엔진 출력을 줄이고 착륙 자세로서 활주로로 접근했다.


                                                               전쟁 중의 김포 비행장


그런데 믿지 못할 일이 생겼다. 난데없이 한 F-86기가 나타나 전방 몇 피트 앞에 끼어들더니 마셜 소령의 착륙을 가로막아 방해하며 자기가 먼저 착륙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마셜 소령의 캐노피가 날아간 전투기를 보면 그가 얼마나 비상상황인지를 알았을 텐데 양심도 없는 인간이었다.

관제탑에서도 그 무례한 조종사에게 즉시 상승해서 활주로를 양보하도록 여러 번 경고했고 마셜 소령의 비상착륙을 대기하던 지상 요원은 붉은 경고 신호탄을 쏘며 접근을 막았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마셜 소령은 그 예기치 않은 조종사의 착륙 방해로 성치 않은 기체의 기수를 올리고 마지막 출력을 가했다. 그는 사력을 다해 F86기를 상승시켜서 비행장을 겨우 한 바퀴 선회하고 가까스로 활주로에 착륙할 수가 있었다.

지상요원들은 마셜 소령과 호노커의 안전 착륙을 열렬히 환영했고 마셜 소령은 즉시 대기했던 앰브런스로 응급 구호소로 직행했다.

마셜 소령은 나중에야 그 양심없는 조종사가 그의 친한 친구이기도 했었고 한국전쟁중 최고의 격추 기록들을 보유한 탑 에이스중의 한 명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조종사는 아군 폭격기 편대를 호위하고 출격했다가 무전기가 고장 나고 말았다. 무전기 고장으로 그는 동료기나 기지와 교신을 할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김포기지에 겨우 가까워 오자 엔진이 스톱하고 말았다. 그는 정지된 엔진을 가지고 겨우 활강하여 김포 기지에 비상 착륙을 했던 것이다.

이번 5전투 비행단의 기습작전으로 적 TU-2 폭격기는 불과 수 기만 탈출했고 나머지는 모두 격추당했고 호위하던 LA-9도 거의 섬멸되었다.

미그기도 여러 기가 격추 당했다. 비록 섬은 적에게 점령당했지만 공중에서는 참담한 대패를 겪었던 것이다.

5전투 비행단의 대 승리였지만 베테란 조종사 마셜 소령의 개인적으로는 아찔한 위기의 전투이기도 했다.

적 최신형 미그기와도 여러 번 공중전을 겪었고 다수의 미그기도 격추했던 노련한 마셜 소령이 구식 프로펠러 전투기에 죽었다가 살아났던 것은 6.25전의 아주 이색스런 일이라고 아니 할 수가 없다.

6.25전중 공산군 미그 기가 유엔군 측의 프로펠러기에게 격추 당한 일이 있었던 사례는 두 번이나 있었다.

한 미그기는 대동강 하구 상공에서 미 해병대의 프로펠러 콜세어 기에게 격추 당했었고 다른 한 미그기는 압록강 상공에서 영국 해군 프로펠러 함재기 씨 퓨리에게 격추 당했었다,


                                                       미 해군 및 해병대의 F-4U 콜세어 기


만약 마셜 소령이 프로펠러 기인 LA-9에게 피격당한 뒤 아슬아슬한 귀환 비행에 성공하지 못했더라면 중국 선전대로 공산군 구식기에 미국의 최신 제트기가 당한 경우로 역사에 기록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미 공군이 압도적인 승리를 기록한 6.25 전쟁 항공전사에 작은 오점이 될 수도 있었다.

마지막 사족(蛇足) 한마디.

노련한 마셜 소령은 적 LA-9기의 정면 공격에 당했다. 6.25전중 적 미그기를 격추했던 미 해병대의 콜세어기나 영국 해군의 씨 퓨리기도 성능이 월등했던 공산군 제트 전투기인 미그기와 대결했을 때는 대담하게 정면에서 적을 받아쳐 격추 시켰었다,

추측컨대 프로펠러기가 더 빠른 제트 전투기와 조우하면 결과가 뻔한 회피대신 적이 빠른 속도의 이점을 살리지 못하게 과감한 정면 육박 돌격하라는 생존의 공중전 교리가 그 당시에 개발 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마셜 소령은 후에 월남전에도 참전해서 활약했고 공군 소장으로 은퇴했다.  <<끝>>
신고
Posted by 열혈국방 트랙백 0 : 댓글 0




-제 1 편, 미 F 86기들의 적 쌍발 폭격기대 기습 -



1951년 11월 말 아침. 미 공군 김포 기지의 브리핑 룸에서 출격 조종사들은 한 놀라운 브리핑을 받았다.

브리핑 내용은 압록강 앞 바다 섬을 폭격하러 출격한  공산 공군의 쌍발 폭격기 편대군을 요격하라는 임무 부여와 함께 출격에 필요한 관련 전투 정보들이었다..

이는 공산 측의 최신 미그 15기들을 상대로 하는 공중전을 주 임무로 하고 있는 F-86 전투기 조종사들에게 분명 놀랄 특수 임무였다.


                                                               미공군 F-86기 편대


공산군 공군 쌍발 폭격기들은 소련제 쌍발 프로펠러 엔진의 TU-2기 30기로서 같은 프로펠러 전투기인 소련제 LA-9들이 호위를 맡았다.

적 호위대는 더 있었다. 이들 구식 프로펠러 폭격기와 전투기들은 이 지역 상공에 출몰하는 미 공군 F-86기들의 내습에 대비해서 후방 고공에서 비행하는 소련 공군 미그 15기들의 호위를 받았다.

공산 공군 폭격기들의 작전 임무는 압록강 아래 한 섬에 설치되어 있는 유엔군 전방 비밀 레이다 감시초소를 폭격하는 것이었다.

이 레이다 기지는 중국내 만주 지역에서 출격하는 공산군들의 전투기 자세한 정보를 탐지해서 이 지역까지 출격하는 유엔기들에게 귀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었다.

마셜 소령의 공중전기에는 공중전 외의 배경 설명은 대폭 생략 되었고 오류들도 있어서 아래에 추가적인설명이 필요하다,

위에서 말한 섬은 평안북도 압록강 하구 아래 육지에 인접한 바다에 자리 잡은 대화도가 유력하다. 미국 기록은 이날 폭격이 대동강 하구앞 바다의 초도에 가해 졌다고 하지만 최근에 출판 된 중국 기록은 대화도로 되어 있다. 


                                                  북한 지도-좌측 맨 아래에 대화도가 보인다.


대화도는 평북 철산군 앞바다에 있는 섬으로서 북한 탈출 유격대와 미군과 영국군의 혼성 첩보 부대가 게릴라 활동을 지원하고 있었다.

대화도는 두 번의 공산기 폭격을 받았었다. 한번은 1951년 10월 13일 미그기 4대편대의 호위를 받는 9기의 중공군 중폭격기대가 가한 폭격이었다.

이 예기치 않은 폭격으로 주민과 유격대 69명이 죽고 여러 가옥과 시설들이 대파되었다.

성공적인 첫 폭격이 공산측으로 하여금 더 대규모이고 더 대담한 두 번째 폭격을 시도하게 했다.

두 번째는 같은 해 1951년 11월 30일 오후 6시에 500톤급 8척으로 용암포에서 출발한 중공군 148사단 예하 연대 병력이 섬을 기습 상륙하기전에 가한 사전 폭격이다.

잘 무장한 정규군이 수비하던 상황이 아니었고 섬에 주둔하던 유격대들은 아무런 준비가 없었기 때문에 중공군은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고 손쉽게 상륙하고 말았다.

유격대는 이틀간 저항했지만 다수의 사상자가 났으며 미군 두 명과 영국군 한 명이 포로가 되고 섬은 점령당했다.

이 곳에 마셜 소령의 기록처럼 레이다 기지가 있을 법하지만 다른 기록들은 이 사실을 전하지 않고 있다.[미군 기록의 초도에는 레이다  기지가 있었다.]

시기나 규모로 보아 미군에게 궤멸당한 폭격대는 이 섬 함락 작전 때 동원된 것아 확실하다.

사실 미공군 공격대가 공산군의 폭격대를 조우한 시간은 오후 4시경으로 중공군의 상륙작전 2시간 전으로 대규모 폭격대들이 역시 대화도에 가한 대규모 상륙작전을 지원하기 위한 출격에  나선것임을 강력히 시사한다.

더구나 미국 기록이 말하는 초도는 황해도 앞바다에 있어서 김포나 수원의 미공군  기지와 너무 가깝다.[상식적으로 보아도 속도가 느린 프로펠러기들이 대규모로 접근하기에 아주 위험한 남쪽에 위치해 있다.]

중공군의 폭격이 대화도를 겨냥한것임에도 미공군은 레이다 기지가 있던 초도를 겨냥한 것으로 오인한것이 이런 혼란한 기록이 나오게 만든것으로 판단된다.

마셜 소령의 전투 기록은 이때 출격한 폭격기들이 북한 공군의 TU -2 경폭격기라 했지만 다른 기록은 중공군의 소련제 TU-25 중형 폭격기들이라고 전하고 있다.


                                                                 소련제 TU-2기


그러나 이들 폭격기들을 직접 목격하고 격추했던 마셜 소령의 기종확인이 더 신용할만해서 이를 TU-2기로 하기로 한다.[중국 출판물에도 TU-2기들로 되어있다.]

단 폭격기대 소속은 북한 공군보다도 중국 공군 소속이 더 정확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비밀 작전은 오랫동안 비밀로 보존되어서 정확하고 세밀한 공식 기록을 찾기가 힘들다.

유엔군이 압록강 넘어 중국 땅에서 출격하는 미그기들을 감시하는 레이다 감시 초소로서 공산군에게는 목의 가시였지만 유엔군에게는 생존 정보의 제공자로서 비할 바 없는 중요성이 있는 비밀기지였다.

조종사들에게 전하는 바에 의하며 이 섬의 비밀 레이다 기지를 운영하는 팀은 호주 군이라고 했다.[영국군을 오인했던 듯]

그날 적의 이색적인 이 폭격기 떼를 남김없이 격멸하기 위해서 미 공군 4 전투 비행단의 334 대대, 335 비행대대,336 비행대대의 출격가능한 모든 F -86 전투기들이 동원되었고 조종사들도 모두 비행단의 최고 기술을 가진 노련한 조종사들이 선발되어 편대장이나 선도기들의 위치에서 비행했다.

이 글의 주인공 데이비드 마셜 소령은 335대대를 지휘하였다. 총 지휘는 비행단장 벤 프레스턴 대령이 맡았다. 기습이야 말로 이 비밀 작전 성공의 열쇠였다.


                           한국 전쟁시 미 공군 활약을 소개하는 대표 사진으로 자주 등장하는 사진. 
                           중앙이 이날 공중전을 총 지휘했던 제 4 비행단장 벤 프레스턴 대령, 왼쪽이
                           마셜 소령. 오른쪽은 적기 14기를 격추한 에이스 였지만 전사했던 죠지 데이비
                           스 소령. 대화도 상공의 공중전이 있기 며칠전 마셜 소령과 데이비스 소령이
                           동시에 에이스[5기 격추 이상 조종사에게 주어지는 칭호]가 된 것을 기념하는 
                           사진.


적 폭격기 떼 격멸을 노리고 출격한 미 공군 4 전투 비행단의 F-86기들을 적을 기만하기 위한 위장된 비행 루트를 택했다.

평소에는 연료를 절약하기 위해서 [압록강까지의 출격거리가 너무 멀어서 압록강 상공에서의 전투 체공시간은 단지 20여분에 지나지 않았다.]김포 기지에서 출격하면 연료를 최소한 소비하는 최단거리를 날아 압록강까지 북상했다가 작전이 끝나면 같은 최단거리의 루트로 돌아왔었다.

비행대형 또한 연료를 많이 소요하는 밀집 대형 방식이 아니라 넓게 산개해서 완만한 상승을 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최단거리가 아닌 한반도 남북을 가로 지르는 백두대간의 동해 쪽에 바짝 붙어서 밀집한 대형으로 저공비행을 하였다. 중국에 설치된 공산측의 레이다에게 탐지 되지 않기 위해서 였다.

조종사들은 적과 조우하기 전까지 절대 무전 침묵을 명령받았다. F86편대들은 은밀하게 백두대간의 동쪽에 낮게 붙어 북쪽으로 날다가 적절한 지점에서 왼쪽 산맥을 넘어 서쪽 압록강 하류 아래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산맥을 넘자마자 F 86 편대는 즉시 급상승해서 넓게 산개한 전투 비행 편대를 형성했다. 공산군 레이다들은 바로 이 시점에 불시에 동쪽에 기습한 미군기들의 존재를 탐지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전투 비행편대로 적진에 육박해간 미군기들 앞에 하늘을 가득채운 북한 공군의 거대한 TU -2 폭격기와 호위하는 LA-9 전투기 편대들이 웅웅거리며 접근하고 있었다.

TU- 2 폭격기는 복좌 전투기로서 후방사수는 조종사와 등을 대고 후방을 향해 앉게 되어 있다.

독일의 메사슈미트 110기나 일본의 돈류 경폭격기와 비슷한 개념으로 설계 된 것들이 LA-9기는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7년에 선을 보인 전투기로서 그 성능이 미군의 P-51 무스탕기 수준이었다. 두 기종(機種)들는 북한 공군이 1953년 극심하게 행했던 남한 야간 폭격에 동원되기도 했다.


                                     소련제 LA-9기, -23mm 기관포 4문 장비 어떤 글에는 이날 전투기를
                                      LA-11기라고 설명되어 있으나 원문대로 LA-9기로 한다. 두기는 거의
                                      같은 전투기다.

프로펠러 공산기들이 하늘 넓게 펼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폭격기들은 하늘 넓게 상하와 좌우로 산개하여 날아오는 중이었다.

호위기인 LA-9기들은 더 높은 상공에서 폭격기들의 앞 뒤를 감싸고 호위 비행했다.

아주 높은 후방 상공에는 공산군의 미그기들이 만드는 수십 개의 비행운이 줄무늬를 수놓고 있었다.

중국 출판물에는 소련 미그기들이 상황이 종료되어 가는 시점에 도착해서 별다르게 활약하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더구나 이들 미그기들은 미국과의 전면전을 두려워해서 참전 사실을 적극 부인했던 스탈린의 지시로 바다 상공을 비행하는 것을 억제했었다.

바다에서 격추되면 미군에 의해서 포로가 되고 이들의 참전 사실이 폭로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이 이날 소련공군이 소극적으로 일관하게 했다고 본다.

그들은 미 공군의 F 86기들이 도전해왔음을 지상 레이다의 연락으로 알고는 있었지만 근거리에 육박한 미 전투기들을 발견하지 못하고 아직 우왕좌왕하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들은 F86기들이 그들과 이미 섞여 들었음을 알고 크게 놀라고는 있었을 것이다.

멀리 작게 보이던 공산군 폭격기 떼는 순식간에게 다가왔다. 적 폭격기들은 3기 1개 편대로서 10개 편대로 구성되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북한 폭격기 떼들은 우리와 조우한 지점에서 약 50마일 거리에 있는 황해의 한 섬[대화도]으로 가는 직선 비행 코스에 있었다.

미 F 86 공격대가 이들 폭격대를 공격 일보 직전에 덜미를 잡은 것은 중요한 정보의 사전 입수와 작전의 절묘한 타이밍이라 하겠다.

공격 전략은 334 대대와 335대대가 정면 공격을 가하고 마셜 소령의 335대대는 고공에서 비행중인
적 미그기가 덮칠 경우를 대비한 엄호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마셜 소령의 편대기들은 급상승해서 후방 상공의 미그기들과 전방의 폭격기들의 중간 상공에 위치를 잡고 미그기 들의 공격에 대비한 경계 비행을 시작했다.

그 고공에서 보는 아래 하늘은 공중 살육전의 대장관이 개시되고 있었다.

아래 하늘은 그저 연달은 적기들의 폭발로 터져 나갈 듯했다. 공산 폭격기들은 F 86기들이 내습하자 급히 간격을 좁히며 밀집 비행편대를 만들었다.

적전투기들의 표적 노출을 최소화 하고 후방석의 기총 화력을 활용하기 위한 폭격기들의 전통 방어 전술이다.

호위하던 프로펠러 전투기 LA-9기중에 쇄도하는 미군 F 86기들을 향하여 용감하게 맞서는 것들도 있었다.

불을 뿜는 공중의 열전 공연이 본격적으로 절정으로 가기 시작했다.

마셜은 바로 아래에서 LA-9기가 공격당해 불을 뿜고 격추 당하고 있음을 보았다. 추락하는 적기들에서 비상 탈출한 조종사들을 매단 낙하산이 추락하는 적기들 사이 여기저기에서 마치 꽃이 지듯이 연출되고 있었다.

고공 후방에서 호위 비행을 하던 몇 기의 미그기들도 이 공중의 격전장을 향하여 급강하했다. 그들은 마셜 소령의 편대와 격돌했다.

그러나 미그기들은 경험 많은 F-86기 조종사들에게 모두 후미를 잡히고 말았다. 쫓고 쫓는 F-86기와 미그 15기들이 엮는 장관이 대 공중전의 무대에 추가로 연출 되었다.


                                                                     미그 -15기


그 장관은 영원히 계속 될 것같이 생각되었지만 미군기들의 은밀한 기습은 불과 몇 십 초 만에 공산 기들을 압도하고 말았다.

마침내 상황을 신속히 끝내버리기로 판단한 비행단장 프레스턴 대령은 마셜소령에게 대대를 이끌고 신속히 급강하해서 남은 적 주력 폭격기를 남김없이 섬멸하라고 명령했다.

마셜 소령은 대대를 이끌고 목표 폭격대를 향하여 급강하했다. 사방에서 있는 공중전하는 LA -9 전투기나 미그 15기 F-86기들 사이를 여기 저기 피하며 비집고 급 강하 하는 것이 마치 교통체증으로
악명 높은 타이 방콕의 거리를 어렵게 운전하는 것 같이 느꼈다.

드디어 마셜 소령의 F 86편대는 가로 막아선 적기들의 틈을 누비고 아직도 온전히 밀집 비행중인 잔존 폭격대의 후방에 따라 붙었다.

폭격 목표인 서해의 섬[대화도]이 불과 몇 마일이 떨어지지 않은 아슬아슬한 지점이었다.

마셜은 적 폭격대를 선도하는 대장기로 보이는 TU-2기를 향하여 육박하자마자 CAL 50기관총 6문의 포문을 열었다.

명중한 적 폭격기는 검은 연기를 뿜어내기 시작했지만 한동안 밀집 편대에서 바로 이탈하지는 않았다.

적 폭격대에 쇄도하여 일격을 가한 그의 대대 전투기들은 모두 일차 기습을 완료하자 즉시 재차의 공격을 위해서 기수를 높이 들고 급상승했다 .

그러나 그를 발견한 한 적 LA-9기가 정면에서 도전해왔다, 마셜의 유능한 윙맨 -동료기 조종사-존 호노커는 마셜이 확인하기도 전에 적기를 즉시 공격해도 좋다고 알려왔다. 즉 그의 후미에 아무런 적기도 따라 붙지 않고 있다는 신호였다.

그는 겁 없이 정면으로 덤벼드는 적 LA-9기를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적기는 명중 몇 초 후에 폭발,불덩이가 되어 추락했다. 격추 된 적기에서 탈출하는 낙하산은 보이지 않았다.

공중전에 돌입하면서 공격대는 질서있은 편대 비행 대형을 유지하지 않고 각자의 전투 상황에 따라 모두 흩어졌다. 그러나 2기 1개 조의 기본 전투대형은 모두 견지하고 있었다.

마셜과 호노커는 다시 적 TU-2 폭격대를 향하여 재차 급강하했다.

이미 공산 폭격기들은 다른 F 86기들에 의해서 상당수가 불을 토하며 지상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얼핏 보니 원래 30기 중에서 대 여섯 기만이 살아남아 목표를 향한 끈질긴 비행을 계속하고 있었다.

마셜는 그중 한 기를 골라 급강하 하며 기총사격을 하였다. 마셜의 집중 사격을 받은 적기는 화재가 발생하고 연기를 끌며 지상으로 추락해 갔다.

공산기 승무원들은 격추되는 폭격기에서 낙하산으로 비상 탈출했다.

<2편에 계속...>
신고
Posted by 열혈국방 트랙백 0 : 댓글 0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열혈아 트랙백 0 : 댓글 0


  하늘의 라이벌 [ 2 ] 

제트시대에 재현된 개구리들


                                                  공군 F-80 Shooting Star



제2차 대전 후 제트시대가 도래하면서 공군(이때부터 육군 항공대에서 공군으로 독립)의 F-80 Shooting Star와 해군의 F2H Banshee가 최초로 공군과 해군의 제트전투기로 각각 제식화됩니다. 이 당시 미국은 유럽과 태평양에서 사상 최대의 전쟁을 승리하였다는 자신감에 가득 차 전후 세계최강의 위용을 뽐내며 감히 누가 내게 맞서랴하는 자만심이 충만하였던 시기였습니다.


                                         해군의 F2H Banshee


그러다가 선배들인 P40과 F4F의 꼴을 답습하게 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한국 하늘에 제트 1세대의 최강 전투기 중 하나로 인정받는 소련의 MiG-15의 갑작스런 등장으로 말미암아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꼬리를 내리게 됩니다. 결국 이들은 또 한 번 서로 간에 잘난 척만 하다가 곧바로 사라진 그저 그런 전투기들이 되었습니다.


                                      공군의 승리  


6.25전쟁에서 갑작스런 MiG-15의 등장에 그나마 미 공군은 F-86 Sabre라는 회심의 후속대타가 있었고 이후 MiG-15와 F-86은 항공전사에 길이 남는 인상적인 공중전을 펼쳐 보이며 세기의 라이벌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반면 해군은 사실 손가락만 빨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 같은 침울한 시간을 보냅니다.

 

                                          공군 F-86 Sabre 


시급히 도입한 F9F Cougar 등을 써보기도 하였지만 사실 적기는 물론이거니와 철천지원수인 공군의 F-86의 능력과 맞먹는 놈을 쉽게 제식화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사실, 함재기들은 항공모함 탑재를 위하여 공군기에 비해 기체구조에 제약사항이 많을 수 밖에 없었고 때문에 능력의 제한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 제트시대에 와서는 이러한 제약이 더욱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F-86의 해군용 버전인 FJ Fury
 

해군은 결국 자존심을 뭉개가며 울며 겨자 먹기로 공군의 F-86을 함재기로 재설계하여 FJ Fury 라는 이름으로 항공모함에 탑재하게 됩니다. 하지만 앞에서도 설명하였던 이유로 함재기로 재설계하면서 F-86 고유의 능력을 많이 상실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그저 그런 평범한 전투기가 되며 별다른 인상적인 활약을 보이지 못합니다. 제트시대에 와서 해군은 더 이상 공군의 상대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해군의 절치부심 
 

F-86의 성공에 자부심이 하늘을 찌른 공군은 1950년대 일련의 제트기시리즈를 개발합니다. 이른바 센추리시리즈 (Century Series)라고 불리던 F-100 이후의 전투기들이었습니다. 그 첫째 작품이 세이버의 닉네임을 계승한 F-100 Super Sabre로 제식화 된 최초의 초음속 전투기였습니다. 이때만 해도 소련 최초의 초음속 전투기 MiG-19를 충분히 대적 할 수 있으리라 판단  하였습니다.
 

                                                   공군 F-100 Super Sabre


반면 해군은 F-100과 동일한 엔진을 장착하였으나 기동성과 맷집능력이 뛰어난 F8U Crusader를 제식화하였고 이들은 동시에 월남전에 참전합니다. 자만하였던 공군은 MiG-17 과 MiG-21에 믿었던 F-100이 혼쭐이 나자 곧바로 일선에서 후퇴시킵니다. 그러면서 마구 개발 하였던 전투기들을 이것저것 되는대로 참전시키기 시작하였습니다. 


                                            해군 F8U Crusader
 

사실 월남전은 미공군기의 능력이 나빠서라기보다는 정치적 입김에 가해진 교전규칙 때문에 특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던 경우가 많았습니다. 반면 같은 제약이 있기는 하였지만 그동안 절치부심하며 내공을 키워왔던 해군은 F8U의 뛰어난 기동력으로 공대공전투에서 짭짤한 성과를 얻어내었고 서서히 공군의 망신살이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공군의 박탈당한 자존심 
 
 

센추리씨리즈를 개발한다고 난리치던 공군이 많은 전투기를 만들어내었음에도 실전에서 뾰족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사이에 내공을 키워온 해군은 희대의 도깨비 F4H Phanthom II를 함재기로 제식화 하였습니다.  그동안 센추리씨리즈가 월남전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초초해진 공군은 평판이 자자한 도깨비를 해군으로부터 빌려서 시험                  

                                             해군 F4H Phanthom II

 
그 결과 지금까지 공군이 개발하였던 모든 전투기들의 능력을 초과한다는 사실에 경악하였고 비록 자존심상하는 일이었지만 눈물을 머금고(?) 이를 공군전투기로 제식화하기로 합니다. 여담으로 공군기를 함재기로 만들기는 힘들지만 함재기를 공군기로 전환하기는 상당히 쉽습니다.

 

                                           F4H의 공군용 버전인 F-110 Spectre
 

최초에는 공군 제식부호인 F-110 Spectre 라고 명명하였으나 이마저도 1962년 시행된 국방성의 제식화 부호 통일계획에 따라 F-4 Phanthom II라는 해군의 명칭을 그대로 가져다 쓰게 되었습니다. 굳이 공군이 살린 마지막 자존심이라면 기관포를 장착하고 공중 급유구를 해군과 다르게 설치하였던 점 정도라 할 만큼 공군은 라이벌 해군에게 굴욕을 겪었습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열혈아 트랙백 0 : 댓글 1



                                           크리스마스 이야기 [ 끝 ]
 
                 1950년 ( 흥남 ) 에피소드
 
 
통일의 기대가 한껏 부풀어 올랐던 달콤했던 1950년 10월이 지나가고 찬 서리가 내리던 11월이 되었을 때 전선의 상황은 뭔가 이상해지고 있었습니다. 산속 깊숙한 곳에서 저항하는 적들이 지금까지 상대한 북한군이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한만국경에서 벌어진 우발적인 작은 충돌이 아니라 대규모의 중공군이 개입했다는 사실이 확인된 순간 지금까지의 전쟁은 무효가 되어버렸습니다.

 
                          중공군의 등장은 새로운 전쟁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12월이 되어 속절없이 아군 부대들이 중공군에 각개 격파되어 나가자 후퇴는 결정되었고 지금까지의 진격로를 뒤로 돌아 북한 땅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 동해의 전략거점이자 함경도의 초입인 원산이 12월 7일 중공군에게 점령되자 한반도 동북부 방향으로 진격하여 잘 싸우고 있던 미 10군단, 국군 1군단은 순식간 배후가 절단되면서 적진 한가운데 고립될 위기에 봉착하였습니다.

 
                                          중공군의 포로가 된 미군
 

다행히도 제해권, 제공권을 가지고 있던 UN군은 이를 발판삼아 한반도 동북부의 요충지인 흥남일대로 집결하여 교두보를 설치한 후 바다로 철수할 준비를 하였습니다. 항구도시 흥남에는 병력 10만 5천명에, 차량 1만8,422대 그리고 3만 5천 톤의 각종 군수물자들이 모여들었고 이를 해상으로 이동시키기 위하여 총 125척의 각종 선박이 동원되었습니다. 그리고 미 7함대의 엄청난 화망이 철수작전 동안 흥남항을 향한 중공군의 접근을 거부시켰습니다.

 
                                         1950년 12월 흥남항 전경
 

1940년 프랑스북부의 됭케르크에서 독일군에게 포위된 30만의 연합군이 기적 같은 해상철수에 성공하였던 이후 사상 최대의 해상 철수작전이 한반도에서 이루어지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군이 배를 타기위해 흥남항을 향하여 속속 집결하는 것과 발맞추어 군인들을 능가하는 엄청난 규모의 피난민이 함께 부두로 모여들고 있었는데 바로 자유를 찾아 남으로 가고자 했던 북한주민들이었습니다.

 
                                   철수대기 중인 군인들과 섞여있는 피난민들
 

수많은 사람들이 평생 대대로 살아온 고향을 등지고 간단한 소지품만 챙겨 언제 돌아올지도 모를 남쪽으로 가고자 하였을 만큼 지난 5년간 벌어진 공산학정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극악하였습니다.  그렇게 후퇴하는 아군을 따라 흥남으로 몰려든 한반도 동북부의 주민들은 벌써 20여만 가까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안전하게 탈출시켜 주겠다고 그들에게 사전에 약속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공산학정을 피하여 탈출하려는 민족의 거대한 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철수작전을 총 지휘한 미10군단장 알몬드 (Edward Almond )는 커다란 시름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또한 한국전에 발을 들여 놓고 난 후 한반도 곳곳에서 벌어진 엄청난 학살현장을 익히 보아왔고 흥남항에 모여든 대부분의 피난민들이 그러한 공포가 무서워 피난하고자하였던 사람들이라는 사람을 그 또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이데올로기 전쟁으로 변한 한국전쟁은 후방의 민간인들조차 결코 안전할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흥남철수의 총책임자 알몬드 미 10군단장
 

하지만 알몬드에게는 당연히 군의 철수가 우선이었기 때문에 미 10군단 민사부 고문이자 통역이었던 현봉학 박사에게 3천여 명의 민간인만 소개하겠다는 의중을 밝힙니다.  하지만 북풍한설에도 뜬눈으로 서서 밤을 새며 부두에 몰려든 수십만 피난민의 애끓는 눈초리를 그 누구도 외면하기 힘들었습니다. 이때 국군 1군단장 김백일 장군이 이들의 동반 탈출을 강력히 주장하였고 현봉학 박사도 알몬드를 설득하였습니다.
 
                                          부두에 대기중인 국군 1군단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배의 빈곳이라면 어디건 상관없이 배가 침몰하지 않을 수준까지 피난민을 태우고 철수하라고 명령이 하달되면서 장엄한 인도주의 작전이 12월 12일 시작되었습니다.  영하 20도를 밑도는 맹추위와 더불어 눈보라가 흩날리는 흥남부두는 군인들과 각종 물자를 비롯하여 괴나리봇짐을 짊어진 남녀노소구분 없는 피난민들이 함께 승선을 하였고 그들은 차례차례 자유를 향한 탈출에 오릅니다.

 
                             지휘부의 결단으로 장엄한 탈출극은 시작됩니다.
 

비록 모든 피난민을 다 구할 수는 없었지만 1950년 크리스마스 이브인 12월 24일 마지막 철수선이 불타는 흥남항을 떠나면서 군사적 철수를 완료함과 동시에 총 9만8천명의 피난민들이 함께 북한을 탈출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것은 이후 결과적으로 한민족 역사상 최단 시기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거주지를 옮긴 문화인류학적 기록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탈출선 출항 직후 폭파되는 흥남부두
 

하지만 무엇보다도 1950년 눈보라 속의 크리스마스가 빛났던 이유는 지금까지 인류가 벌여온 수많은 전쟁사를 살펴보아도 찾기 힘든 인도주의 때문이었습니다.  어쩌면 전쟁에서 인간을 생각한다는 점은 사치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장 어려운 여건 하에 벌어진 1950년 크리스마스의 기적은 인간이 가장 중요하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보여준 아름다운 표상이라 생각됩니다.



신고
Posted by 박비 트랙백 0 : 댓글 2

강군이 오늘은 퀴즈를 하나 내봅니다.

국군의 날은 왜 10월 1일까요?

건군 61주년 국군의 날 기념 동영상 시청하시고 생각해보시길~



자!!! 답을 알려드릴께요

국군의 날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강원도 양양 동부전선에서 육군 제3사단이 처음으로 38선을 돌파해 북으로 진격한 날을 기념하고 국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1956년 대통령령으로 제정한 날입니다. (정확하게는 현 육군 3사단 25연대입니다.) 

이후 76년부터 공휴일로 제정되었다가 1990년에 이르러서는 법정공휴일에서 제외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왜 10월 1일이 국군의 날인지 아시겠죠?

그럼 국군의 날이 왜 61주년인가 궁금하실분들이 계시죠? 사실 1948년 광복후 제헌헌법이 만들어지고 난 뒤 육군 및 해군이 창설되고 이후 해병대, 마지막으로 공군(49년)이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때 공군의 창설일이 1949년 10월 1일이 되면서 오해를 하시는분들이 계시죠.^^ 그래서 국군의 올해 나이는 광복을 기점으로 61살이 된답니다.

별안간 강군이 퀴즈를 내고 동영상을 보여드린 이유는 , 이번 건군 61주년 국군의 날 행사를 소개해드릴려고 그럽니다.


작년에는 건군 60주년 행사로 건군 최초로 강남 도심에서 군사 퍼레이드도 하면서 성대하게 개최되었고, 재미있는 행사도 많았답니다. 올해도 여러분의 기대에 부응하는 행사가 많이 열릴예정입니다.

간단하게 소개해 드리자면

올해도 어김없이 시가행진이 대전 둔산대공원을 시작으로 ~ 타임월드~ 보라매 공원으로 이어진답니다.  또한 식전행사로  연예 병사들, 사관생도 연합응원단 등 민*군이 함께 하는 축제를 연출할 예정입니다.


'국민 축하 영상 메시지’도 그 일환으로 6·25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을 비롯한 군 원로와 이장무 서울대 총장, 김인식 한화이글스 야구감독, 금난새 경기도립오케스트라 예술감독 등 학계·예술계·스포츠·연예계 등 각계 저명인사들이 국군의 날을 축하하고 장병들을 격려하는 메시지를 보낼 계획입니다.

국민과 함께하는 선진강군의 모습을 보여드리기 위해 일반인 2,100명을 참관시키기로 하고 국방부 및 육·해·공군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14일부터 다음 달 11일까지 참관신청도 받고 있습니다.

 ○ 참가신청방법
- 신청기간 : '09.9.11(금)까지
- 신청대상 : 대한민국 국민(초등학교 미만 유아 동반 불가)
- 신청방법 : 참가신청 바로가기를 통해 개별신청(양식참조)
※ 참가신청 바로가기 : http://www.army.mil.kr/rok61/input.jsp
※ 신청조회/취소 바로가기 : http://www.army.mil.kr/rok61/login.htm
 - 신청결과 공지 : '09.9.18(금)/국방부 홈페이지 게시판 공시


신종플루가 유행하는 시기와 겹쳐 대규모 행사에 참여하기가 부담스러우시겠지만, 행사장 입구로부터 신종플루 의심환자는 참관이 제한되며, 체온측정도 철처히 한다고 하니 관심 있으신분들은 참여해 보시면 좋을것 같습니다.^^*

가을의 초입이네요. 가을타지 마시고 천고마비의 계절 즐겁게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신고
Posted by 박비 트랙백 0 : 댓글 4



"이 서류로 보아 1950년, 북한은 모든 군 교육훈련을 6.24일에 완료한것으로 보여집니다. 이것은 북한이 6.25전쟁에서 남한을 침략하여 승리하기 위해 매우 치밀히 준비했던 결정적 증거중 하나이지요."



국방부의 원태재 대변인은 정책블로그 팀에게 [한국전쟁사]라는 책속에 책갈피처럼 보관되어 있는 몇장의 서류를 보여줍니다. (포스팅꺼리를 찾던 강군의 눈이 번뜩거립니다.ㅎ)



  
  이 문서는 한국전쟁 발발전 북한군 '6월분 공작 일정표'로 1980년대초 육군사관학교의 모 교수가 미국으로부터 가져와 공개한 자료를 카피한 복사본이라고 합니다.



  6월분 공작 일정표라는 정확하게 무엇인지 강군을 비롯한 정책블로그팀은 매우 궁금했습니다.ㅡㅡ;; (그때도 간첩이 있었나!! 공작이 뭐지)
 
  원 대변인은 "공작일정표라는게 우리 한국군의 교육훈련 일정표라고 보면 됩니다. 그러니깐 이 문서는 정확하게 애기하면 '북한군 6월 교육훈련 일정표'입니다."
 
  원 대변인은 설명을 계속 이어갑니다.

  "이 문서를 보면 요일별로 일정이 나와있습니다. 1950년 6월 24일에 모든 교육훈련이 완료가 되고, 25일 이후로는 아무런 일정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 문서는 1950년 5월 23일에 작성하고 결제를 받은걸로 봐선 적어도 한달전부터 이미 북한군은 6월 25일을 남침일자로 정해놓고 치밀하게 준비했던 것이죠"
 "그리고 표지에 당시 북한군 포병사령관 김무정의 이름도 선명하게 보입니다."



  한편, 이 서류는 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다가 육군사관학교의 모교수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으나, 세월이 오래된 탓인지 서류 곳곳에 6.25전쟁의 치열했던 상혼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위의 사진을 자세히 보시면 요일 일정표가 약간 삐뚤어지게 복사되어 있는데, 이건 총알이 서류뭉치를 관통하면서 남긴 흔적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보이시죠? 오른쪽이 사선들이 삐둘어진 모습들)

 



   올해는 6.25전쟁 발발 59주년입니다. 얼마전 조사에 의하면 초등학생들의 35% 이상이 6.25 전쟁이 남침이 아니라 북침(남한의 침략)이라 생각하며, 국민 5명중 2명이 6.25전쟁이 언제 일어났는지를 모른다고 합니다. 또한 6.25 전쟁 60주년 기념사업단 관계자의 애기로는 "앞으로 10년 후면 6.25 참전 용사들중 살아서 증언을 해주실 분들이 거의 안계실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중국의 학자 사마양은 "천하가 비록 평안하다 할지라도, 전쟁에 대비할 것을 잊어버리면 반드시 위태롭게 된다."고 했습니다. 6.25라는 비싼 대가를 치르면서 우리는 이 말을 뻐저리게 배웠기에, 이제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될 것 입니다

 


   4월부터 연이은 핵실험, 장단거리 미사일 발사 등, 북한의 도박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제59주년 6.25 기념일을 맞이하여 우리 모두 북한의 실체를 좀 더 정확히 알고 대비해야겠다고 다짐을 해봅니다. 
  
  오늘은 6월 25일...평일이라 시간이 여의치 않다면, 주말이라도 삼각지역 전쟁기념관을 방문해보는것 어떨까? 재미있는 행사도 많다고 하니 어제에 이어 오늘도 강군이 강추해드립니다.
 
신고
Posted by 열혈아 트랙백 0 : 댓글 0


  작년 10월 한국정보통계원의 조사에 의하면 대한민국 초등학생의 35.1%6.25전쟁 북침(남한이 북한을 침략)으로, 50.7%가 조선시대에 발발한 과거의 역사로 생각하는 등 자라나는 어린이들이 6.25전쟁에 대한 잘못된 역사인식을 보유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지금 옆에 자녀나 조카가 있다면 한번 물어보시길...저도 약간 충격적이네요.^^;;;)

  또한 행정안전부가 08년 6월에 전국 중고생 1,016명을 상대로 설문조사한 결과 56.8%가 6.25전쟁이 몇년도에 일어났는지 모르고 있었으며, 38%은 전쟁이 나면 싸우지 않겠다고 답변하고 있습니다.

  이는 전쟁 미경험세대(1955년 이후 출생)가 대한민국 전체인구의 80%를 넘고 있고, 6.25참전 용사 대부분이 80대의 고령으로 접어들어, 전후세대들이 6.25전쟁이 얼마나 잔혹했고, 우리 민족에게 끼친 영향이 얼마만큼인지 피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결과로 보여집니다.  




   국방부는 전후세대들에게 올바른 전쟁의 역사를 알려줌으로서 안보관과 역사관을 재정립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지난해 11월 6.25전쟁 제60주년 사업단 발족시켰습니다. 올해는 6.25전쟁이 발발한지 59주년이 되는해로 2010년이면 제60주년이 됩니다.

   혹시 여러분들중 '6.25전쟁 기념 50주년' 행사가 기억나시나요? 강군이 기억하기로도 새로운 천년이 도래하는 시기여서인지, 6.25전쟁을 기념하는 다채로운 행사들이 많이 열렸던것 같습니다. 그럼 60주년 행사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는 걸까요?

  그래서 강군은 6.25전쟁 제60주년 사업단장(오상택 준장)님을 만나 행사준비는 잘되고 있는지 요모저모 물어보고 왔답니다. 정예화양과 같이 만나기로 했으나, 갑자기 장관님과의 미팅약속이 잡혀서 오늘도 저 혼자 다녀왔답니다.ㅜ.ㅜ(장관님과 약속이니...할말없죠.ㅎ)




 
  단장님이 말씀하시길 "6.25전쟁 기념 60주년은 특별한 해일수 밖에 없다"며 이야기 보따리를 푸셨습니다. "20대 초중반에 참전했던 참전용사 대부분이 이제는 80대의 고령으로 10년 단위의 행사시기를 고려하면 내년 60주년이 참전용사들이 참여할 수 있는 마지막 행사로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기념식 준비 소회를 밝히셨습니다.





   올해 7월이 되어야 모든 사업과 예산이 확정되기에, 지금의 계획은 다소 유동적이기는 하지만 이번 6.25전쟁 기념 60주년 사업은 전후세대의 올바른 안보의식 고취의 계기로 삼고, 국내외 6.25전쟁 참전 용사들의 명예를 선양하며, 참전국에 대한 감사와 신의를 통한 국제평화에 기여하여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제고에도 일익을 담당할 예정입니다.

  젋은층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한 계획도 가지고 계셨습니다. 학생들이 6.25전쟁에 대해 쉽게 알 수 있도록  우선 아!6.25 라는 http://blog.naver.com/kimseogk 네이버 블로그를 운용하고 있으며(방문객이 100만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얼마전에 끝났지만 6.25전쟁 기념 사업에 대한 대국민 아이디어 또한 공모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심사중^^)

  이외에도 기념사업단은 또한 국방부가 그동안 연구 축적해 온 6.25전쟁에 대한 자료를 젋은이들이 인터넷으로 쉽게 접하고 이해할 수 있게 6.25 전쟁 사이버기념관을 구측하는 등 다양한 사업을 체계적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1953년 7월 정전협정이 맺어지면서 6.25전쟁의 포성은 멎었지만, 50여년이 지난 지금도 북한의 야욕과 군사적 위협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알버트 아이슈타인은 "사람이 있는한 전쟁은 있을것이다" 라고 애기하고 있습니다만, '좋은 전쟁' '나쁜 평화'는 없다고 봅니다.

   열흘뒤면 6.25 전쟁이 발발한지도 언 59주년이 됩니다. 다시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모두 뼈속깊이 그날의 기억을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60주년, 70주년 행사는 통일된 남북한이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함께 기리는 그날을 꿈꿔 봅니다.


♬ 아~아 잊으리아 어찌우리 그날을 ♪                                       
                                     ♪조국의 원수들이 짖 밟아 오던 날을~♩


     

 

 
 

신고
Posted by 박비 트랙백 0 : 댓글 2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