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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3.30 중국 상공의 대만 비밀 정찰기 (1)







중국 상공의 대만 비밀 정찰기
 

U-2기는 미국이 보유했던 극비 첩보 정찰기였다. 소련 전투기나 샘 미사일이 도저히 올라오기 힘든 20.000미터[7만피트]의 상공을 날며 특수 카메라로 지상 목표물들의 세밀한 사진을 찍는기능이 있는 스파이 기였다.


[그러나 소련은 그들의 SAM -2기의 성능과 사용법을 계속 개량해서 U-2의 격추에 성공했다.]


1960년 U-2기가 소련 상공에서 격추되고 조종사 게리 파워즈가 체포되어
국제적으로 시끄러운 문제를 일으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파워즈의 격추에는 이설이 있다는 것도 밝혀둔다.-



                             소련 수상 니키타 후르시쵸프와 격추 된 U-2기 잔해


그 뒤 미국이 더 신형인 SR-71을 개발했었기 때문에 U-2기는 약간 구식화 되었지만 이 극비 정찰기는 대만 공군에서도 운용하고 있었다.


이 글에서 대만 U-2기의 비밀작전과 격추되어 중국에 억류되었다가 귀국한 두명의 조종사들의 고달펐던 운명을 소개한다.

 


                             박물관 천정에 매달아 전시한 U-2기. 긴 날개가 돋보인다.


1960년 소련에서 격추되어 국제적인 망신을 당했지만 미국 CIA는 파워즈 사건이 나고서도 U-2기의 운용을 중단하지 않고 오히려 확대했었다.


U-2기는 쿠바 위기 때도 첩보 비행에 나섰다가 격추 된 일이 있었지만 월남전 때도 대폭 투입되었었다.


미 CIA는 냉전시대 소련만큼이나 중요한 적성국이었던 중국에 대한 비밀 항공 첩보를 그냥 두고 지나 갈 리가 없었다.



                                   대만 U-2기

미 CIA는 중국 본토에 대한 공중 첩보 작전을 다른 방법으로 추진했다. 대만 공군과 합동 하는 방향으로 추진 한 것이다.


즉 대만 공군이 U-2기를 운용하고 정비와 기술 지원은 미국이 하며 첩보는 공동으로 활용하는 방향이다.


본토 수복을 꿈꾸며 중국과 치열하게 군사 대결 중이던 대만도 이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지금은 상상이 가지 않지만 대만과 미국은 냉전시절 더 이상 좋을 수가 없다고 할만큼 관계가 밀접했다.

한국 공군이 F-86이라는 구식기를 애지중지 하며 사용할 때 대만 공군은 미국이 제공한 최신식F-104 전투기를 몰았었다.

더구나 이들이 한국 내 미공군 기지를 비밀 작전기지로 사용했었던 것이 우리로서는 이색스럽다.

미국과 대만의 비밀 공중 첩보활동은 그 역사가 U-2기 활동 시기보다 더 이른 옛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57년 12월. 미국과 대만은 미 해군 정찰기 P-2 넵츈기를 개조한 비밀 정찰기 다섯대로  동업을 개시했었다.

이 정찰기는 진한 청색으로 칠해져 야간에 잘 보이지 않았다. 대만군이 조종하던 넵츈 정찰기는 야간에 저공으로 침투해서 주로 중국 레이다 망의 전자정보를 수집하고 정보원을 투하하기도 했으며 또 삐라를 뿌리기도 하였다.


                              미 해군 P-2 넵츈 정찰기


창설된 미·대만 합동 부대에게 34중대라는 부대명칭이 주어지고 검은 박쥐 중대라는 별칭도 주어졌다.

검은 박쥐 부대의 운명은 그렇게 좋지가 않았다. 검은 박쥐 부대의 넵츈 정찰기들 중 두 대는 한국에서 추락했었고 세 대는 중국에서 격추되었다. 생존자는 한 명도 없었다. 검은 박쥐 부대는 1967년에 활동을 종료하였다.

U-2기의 활용 범위를 찾던 미국은 대만과 함께 협력할 방법을 찾았다..

넵츈 부대를 운영했던 두 국가는 이 경험을 살려  U-2기를 비밀운용하는 미·대만 합동의 블랙 캣 비행부대를 창설하였다.


대만 공군은 이 U-2기 부대를 넵츈 운용 부대의 뒤를 이어 공군 35중대,또는 
흑묘 중대[黑猫 中隊]라 불렀다.


중요한 임무를 맡은 부대라서 장개석의 아들이자 국방상인 장경국이 자주 방문해서 부대를 점검하고 부대원을 격려했었다.



                                 흑묘 중대의 엠브렘

최초로 먼저 6명의 대만 조종사와 정비 요원이 미국으로 파견되어 극비리에 U-2기 조종 훈련을받았다. U-2기 조종 훈련을 받은 대만 조종사는 15년간 총 28명에 달한다.


1961년에 최초의 U-2기가 대만으로 양도되었으며 미국의
정비 및 첩보 전문가들이 대만의 타요유안 기지로 파견되었다.



                         미국에서 훈련 중인 대만 U-2기 조종사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대만 U-2기 부대는 암호명 레이저 작전[면도칼 작전]이라는 작전에 따라 1974년까지 13년간 중국 본토 상공에 102회 침투하는 비밀 출격을 했었다.


넓은 중국 대륙의 구석구석을 파고들기 위해 대만 첩보기들은 때로는 베트남 상공을, 때로는 북한 상공을 경유하는 침투 비행을 하기도 했었고, 또 양국 상공을 첩보 비행하기도 했었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의 정찰기가 소련 영공내 출격을 25회밖에 하지 않은 것에 비하면 대단히 많은 출격을 했다고 할 것이다. 대만 U-2기 조종사들은 8-9시간의 장시간 비행을 해야하는 힘든 첩보 비행 출격을 잘 견디어 냈다. 


가끔  중소 국경을 넘어 소련 영토로 들어가서
첩보를 수집해 오는 위험한 임무도 수행하였다.

                                   대만 U-2기가 비행했던 첩보 비행 코스
                     중국 방공부대를 혼란시키기 위해서 항상 지그재그 코스로 비행했다.
                     평양 상공을 거쳐 군산 미 공군기지를 경유하는 코스도 보인다.


그러나 대만 공군과 미 CIA가 합동으로 추진한 이 비밀작전에서 희생자가 안 나올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중국도 소련처럼 그들이 보유한 SAM 미사일 발사 기술을 개발하고 추적 기술도 발전시켜서 총 5대의 대만 U-2기를 격추시켰다.


중국은 U-2기에 골머리를 앓았다. 중국은 격추시킨 U-2기의 잔해를 진열해놓고 전시하기도 하였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 중에 3천여 조각이 난 U-2기도 있었다.


더구나 격추된 U-2기의 레이다파 탐색기 시스템 12가 중국에 노획된 뒤
대만 U-2기의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중국에 격추된 다섯 대의 U-2기 대만 조종사 중 세 명이 전사했었다.
다른 두 명은 고공에서 격추되는 U-2기에서 기적적으로 탈출하여 목숨을 건졌으나 중국의 포로가 되었다.


U-2기는 공기가 희박한 상공을 날 수 있게 설계 되었지만 대단히 연약하고[격한 기동을 하면 날개가 펄럭인다.] 조종하기도 까다로워서 격추된 것 말고도 훈련과 중국 연안 정찰 비행중에 7명의 대만 조종사가 목숨을 잃었다.


미국이 순차적으로 공급했던[대만이 항상 두 대만 보유, 작전하게 하였다.] U-2기는 모두 19기였었는데 이중 11기를 상실했던 것이다.


[그러나 촬영한 사진 정보는 모두 오키나와 미군 기지로 가져가고 대만에 공급되지 않았다. 거듭된 대만의 항의로 60년대 말부터 첩보 비행의 정보와 판독 기술이 제공되었다.] 


중국 상공에서 격추된 최초의 대만 조종사는 1963년 11월 1일 출격했다가 격추된 예 창티 소령이다.


그는 중국 북서부 지방의 중국 핵 실험장을 정탐하다가 격추 되었다.


세 발의 샘 미사일이 그에게 발사되었다.



               유명한 SAM-2 대공 미사일- 소련의 정식 명칭은 SR-75드비나다.

그는 첫 번째 샘 미사일을 잘 피했지만 두 번째 쌤 미사일에 피격되어 하반신에 수 십 개의 파편이 박히고 기압복이 다 찢어지는 중상을 입었다.


그가 정신을 차린 곳은 대수술을 받은 중국의 한 병원이었다. 그가 낙하산에 매 달린 채 발견되었을 때 그가 몸에 걸치고 있던 것은 조종화 한 컬레 뿐이었다.


그가 어떻게 그 저온에 산소가 희박한 고공에서 탈출했는지는 의문이다.


1965년 1월 10일 장 리이 소령이 조종하는 대만 U-2기가 내몽골에서 샘 미사일에 격추 되었다.


이 출격이 특별났던 것은 그는 우리나라 군산의 미 공군 기지를 출격해서 산동반도를 거쳐 내몽골로 들어갔다가 격추 되었다는 사실이다.



                                    군산 비행장

대만 U-2기들도 넵츈처럼 우리나라 군산의 미 공군기지를 자주 사용했었다. 미국의 배려가 있었을 것이다.



                        U-2기 조종사 화 쉬춘 소령의 조종복장


두 사람은 중국에서 5년간의 형을 살고 사상 개조 사업이라는 명목으로 집단 농장에 배치되었다.


그 곳의 삶은 가난과 노동의 연속이었다.

더구나 수형 생활 중 문화 혁명이 일어나자 홍위병들에게 지독한 학대와 수모를 당해야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 수모를 잘 버티어 냈다.


한편 대만은 두 조종사의 운명이나 행방을 알아 낼 수가 없었다. 중국이 아무런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결국 고심하던 대만 공군 당국은 1967년 두 조종사를 전사 처리하고
가족들에게 연금을 지급했다.


두 조종사 다 기혼자였는데 부인들은 남편의 전사 통지를 받자 나중에 다 재혼했다.


갖은 고생을 하던 두 사람은 중국이 개방 개혁의 길로 들어섰던 1982년 11월 10일 홍콩으로 추방되었다.


실로 4반세기에 가까운 인고의 생활을 겪었던 이들이 조국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두 사람을 전사 처리했던 대만은 이들이 중국군에 적극 협조했고 공산주의자로 세뇌되었다고 의심하고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 CIA와 여러 정치 단체에서 구명 운동과 압력이 들어가자 할 수없이 귀국을 허락했다.


1950년대 중국에서 포로 생활을 했던 장개석 군대 장군들의 사상개조를 의심해서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던  대만의 속 좁았던  피해 망상증이 80년대에도 여전히 계속되었던 것이다.


중국의 U-2기 요격 방법이 발전하고 피해가 늘어나자 중국 본토에 대한 첩보 비행은 1967년도부터 중단되었다.


첩보 위성이 발달했던 것이나 더 성능 좋고 생존성이 좋은 SR-71이 작전을 왕성하게 하고 있었던 것도 이유가 된다.



                                 음속 3.3배의 SR-71.
              사고로 추락한 적은 있지만 적에게 격추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대만의 U-2기는 중국 해안 루트를  따라가며 측방에서 중국 연안 지방을 엿보는 작전 비행을 1974년까지 계속 하였다.

1974년 2대의 U-2기가 대만을 떠나 미국으로 반납 비행을 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대만 공군 U-2기들의 임무는 종료되었다.


최초로 격추 된 조종사 예 창티는 나중에 대만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했다. 푸대접 하던 조국에게 염증을 느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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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열혈국방 트랙백 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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