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된장!  우리 이긴 것 맞아?
 
 
 
지난 11월 11일은 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제1차 세계 대전이 종전한지 91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와 관련한 작은 생각입니다.

 
                     우리에게 낯설지만 제1차 세계대전은 지옥의 전쟁이었습니다.
 

이렇게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격투기 선수인 추성훈과 최홍만이 경기를 벌였습니다. 추성훈이 경기개시와 더불어 최홍만을 흠씬 두들겨 팹니다. 최홍만이 종종 반격을 하였지만 라운드가 계속 될수록 추성훈의 일방적인 우세 속에 경기가 진행되었고 결국 최홍만은 너무 맞아서 두 눈이 부어서 감길 정도로 수세에 몰렸습니다.

 
         실컷 몰리다가 회심의 반격을 하려는데 상대가 기권하여 버리면 조금 황당하겠죠?
 

그런데 최홍만을 때리다 때리다 추성훈이 지쳐버리고, 이틈을 노려 뚝심의 최홍만이 반격을 하려는데 갑자기 추성훈이 타월을 던지고 기권을 합니다. 물론 이렇게 되면 최홍만은 기권승을 거두는 것이지만, 온몸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추성훈을 제대로 때려 보지도 못하였으니 얼마나 약이 오를까요? 차라리 패했으면 그러려니 할 텐데, 이런 경우라면 승리를 얻은 것이 실감도 나지 않고 그리 기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쟁에서도 그런 경우가 왕왕 있었습니다.
 

전사를 살펴보면 이런 황당한 승리를 거둔(?)전쟁이 있었습니다. 서양에서는 대전쟁(Great War)이라고 더 많이 불리는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그러합니다. 세계대전으로 호칭될 만큼 서류상으로는 여러 나라가 참전 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 독일과 러시아의 동부전선과 독일과 영국, 프랑스 연합군이 싸웠던 서부전선의 전쟁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제1차 대전의 최대 격전지였던 서부전선
 

그런데 이 전쟁의 패자(敗子)가 다 아시다시피 독일입니다. 외부와 고립된 상태로 장기간의 총력전을 펼친 결과, 독일 경제가 파탄에 이르러 더 이상 감내할 수 없는 지경에 다다르자 결국 항복하였지만, 사실 단지 물적, 인적 손실의 관점에서 볼 때 바다 건너와서 싸운 영국과 뒤 늦게 참전한 미국을 제외하고는 독일의 손실은 제1주적이었던 프랑스나 러시아 보다 적었습니다.

 
            독일도 많은 희생을 겪었지만 오히려 승자인 프랑스의 피해가 더 컸습니다.
                                   (베르덩전투의 독일군 집단묘지 )
 

오히려 브레스트-리토프스크조약에 의거 휴전한 동부전선은 제정러시아의 많은 영토를 전리품으로 얻은 독일이 승자의 입장이었습니다. 서부전선으로만 축소한다면 프랑스와 벨기에영토에서 대부분의 전쟁행위가 벌어졌습니다. 다시 말해 99% 이상의 물적, 인적 피해가 프랑스와 벨기에 영토에서 발생하였던 것입니다.

 
                   서부전선에서 지옥이 재현된 곳은 프랑스와 벨기에의 영토였습니다.
                                        (서부전선 주요 전투지역도)
 

연합군이 쏘았던, 독일군이 응사했던 간에 상관없이 포탄들은 프랑스나 벨기에 땅에서 폭발하였고 이 때문에 이들 국가의 영토의 물질적 피해는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심하였습니다. 이른바 현실에 등장한 지옥으로 표현되는 마른, 이프르, 솜므, 베르덩 전투 등의 일련의 대회전으로 인하여 서부전선은 말 그대로 No Man's Land가 되었던 것 입니다.

 
                   항공촬영한 전선의 피탄공 인데 마치 스펀지 같은 모습입니다.
                               과연 저곳에서 살아날 수 있었을까요?
 

원래 사이도 나빴고 감정도 좋지 않은 사이였지만, 전쟁 내내 이처럼 무서운 피해를 겪었기 때문에 프랑스가 종전 후, 베르사유조약으로 독일을 철저하게 망가뜨리는데 기를 쓰고 앞장섰던 것은 한편으로 충분히 이해할만한 합니다. 문서상으로는 항복을 받았지만 독일영토에 제대로 총알 한발 날려보지 못하고 전쟁을 끝내었기 때문에 프랑스는 얼마나 약이 올랐을까요?

 
            승자가 얻은 것은 황당한 폐허뿐이었는데 이런 것을 승리라 할 수 있는지요?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어 독일이 항복을 하고 두 손을 들었을 때, 물론 지긋지긋한 전쟁이 드디어 끝나서 좋기는 하였겠지만 막상 독일을 제대로 때려보지도 못하고 막아내기만 급급하였던 프랑스는 이렇게 이야기 하였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된장, 아니 케챱! 우리 이긴 것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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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특공대의 잊혀진 비사 (秘史)
 
 

온산이 울긋불긋 불타오르는 늦가을은 산행을 즐기는데 대단히 좋은 계절입니다.  일주일에 산을 한번 정도 가는 인구가 천만 명을 넘었다는 최근의 통계처럼 등산은 온 국민의 스포츠이자 오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즐기면서 산을 올라가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분명히 차이가 있는데 전쟁 중 목숨을 걸고 산에 올라가는 것은 고난의 행로와 다름없습니다.  이와 관련한 에피소드입니다.
 

               이 화려한 가을이 완전히 지나기 전에 산에 한번 다녀오는 것은 어떨지요 ?
 

전쟁의 승패에 있어 병참의 중요성은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한국전쟁 또한 군수지원의 중요성이 입증된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중공이나 소련과 국경을 맞이하고 있는 북한에 비해서 해상을 통한 군수물자를 보급 받아야 하였던 우리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병참요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UN군이 제해권을 확보한 덕분에 안전하게 해상 보급이 이루어 질수 있었고 이것은 고난의 시기에 대한민국을 지탱하여 주었던 힘이기도 하였습니다.
 

                       화물을 열심히 하역하는 한국전 당시 인천항의 모습입니다.
                        UN 군의 해상보급은 자유를 수호하는 원동력이었습니다.
 

한반도는 산악이 70% 이상을 차지하는 지역이라 최전선의 군수지원에 있어서 상당히 불리한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지금은 사통팔달의 도로가 많이 개통되어 평시의 군수지원 환경은 많이 좋아 졌다고 합니다만 동부전선의 산악지역은 아직까지도 폭설이라도 한번 내리면 병참선이 차단 될 정도의 악조건입니다.

 
                    한국전은 초기를 제외하고 대부분 산악전으로 일관하였습니다.
 

하물며 지금도 그러한데 사회적 인프라가 거의 없다시피 한 한국전 당시는 더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특히 1951년 말부터 휴전까지 진행된 참호전은 대부분 고지를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었는데 이러한 고지에 주둔한 제 부대에 대한 병참지원은 상당히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산악전을 지원하기 위한 민간인 부대의 병참지원 모습입니다
.
 

그래서 UN군은 보급품을 운반하는데 일반 노무자들을 활용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민간에게 아웃소싱을 한 것이었는데 전쟁 발발 직후부터 국군을 지원하기 위해 조직된 소위 보국대를 비롯하여 유엔군 참전 이후 만들어진 민간 운반단 ( CTC - Civilian Transport Corps ), 한국근무단 ( 일명 노무단 ), 부두하역단 등이 다양한 형태로 지원 활동을 하였습니다.

 
                  포탄 같은 중량물도 이 분들의 보급 수송에 절대 의존하였습니다.
 

그중 최전선의 산악 고지전을 치르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속칭 지게부대라고 불린 노무대가 있었습니다.  이 노무대는 전쟁 동안 산세가 험한 지역에 위치한 부대에게 포탄, 식량 등의 보급품을 지게에 지고 운반하여 주었는데 대부분이 당장의 호구지책이 어려웠던 월남해 내려 온 청장년들이나 피난민들이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징집으로 충당되기도 하였습니다.
 

                    대오를 갖추어 정렬한 지원단 (上) 과 화물 적재 후의 모습
 

전쟁 당시 노무자들의 규모는 육군 사단에 편성되어 전투근무지원을 직접 수행한 노무단원 9만여 명을 포함하여 약 30여만 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추산되며 공식 기록에 의하면 전쟁 시 임무를 수행하다가 희생당한 노무자들의 규모가 전사 2,064명, 실종 2,448명, 부상 4,282명 등으로 집계하고 있으나, 많은 수의 노무자들이 공식적으로 등록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제 규모는 그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되고 있습니다.
 

                              미군들은 이 분들을  A특공대라고 불렀습니다.
 

노무자들의 지원 수단은 주로 지게였는데 그 모습이 알파벳 A와 흡사하다고 하여 통상 근무단을 ' A Frame Army ' 즉, 지게부대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미 8군 사령관이었던 밴플리트 ( James Van Fleet 1892~1992 ) 장군은 회고록에서 " 만일 노무자들이 없었다면 최소한 10만 명 정도의 미군병력을 추가로 파병했어야 했을 것이다. " 고 이들의 노고를 극찬하였습니다.
 

           이 분들의 노고는 조국을 수호하는 원동력 이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처럼 A 특공대는 戰史의 전면에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아군의 승리를 위하여 묵묵히 맞은바 임무를 다한 최고의 정예 부대였습니다.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음지에서 묵묵히 힘써 주신 A 특공대 선배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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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력 향상을 위한 당근

한국이라는 이미지를 세계에 자랑 할 것이 별로 없던 1980년대까지 만하더라도 스포츠는 대내적으로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대외적으로 국위를 선양하는데 많이 이바지 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올림픽 3위 입상이상, 아시안게임 1위처럼 스포츠를 통하여 국위를 선양한 자에 한하여 병역면제 혜택을 주기 시작하였던 것은 1980년대부터 입니다.


                         한국 스포츠의 좋은 성적은 국민을 기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동기는 한국이 올림픽을 유치한 후 대폭적으로 경기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였는데, 사실 1981년 서울이 제24회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은 되었지만 바로 이전까지 해방 후 우리나라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것은 1976년 제21회 몬트리얼 올림픽에서 레슬링 양정모 선수의 단 1개에 불과 하였을 정도로 한국의 경기력은 사실 미약하였습니다.


       지금은 한국이 세계적인 스포츠열강 이었지만 한국의 경기력은 사실 미약 하였습니다
                  (해방 후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된 레슬링의 영웅 양정모 선수)


때문에 자칫하면 서울올림픽이 돈 들여 어렵게 판만 벌여놓고 남의 나라 선수들의 잔치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올림픽 개최국의 자부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선수들에게 동기부여를 할 수 있는 병역면제 같은 특단의 조치가 이루어졌고, 이러한 정책을 병행한 체육 진흥책이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이후 한국은 올림픽과 같은 국제 대회에서 당당히 체육 열강으로 진입하는 결과를 얻었습니다.


즉흥적인 변화와 원칙의 훼손


하지만 이렇게 제정된 법조항을 즉흥적으로 개정하면서까지 선수에게 병역면제 혜택을 부여한 경우가 있었는데 바로 2002년 월드컵 4강의 기적을 이룬 축구 국가대표팀의 성과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거둔 자랑스러운 업적은 단군 이래 최대로 전 세계 한민족을 하나로 뭉치게 만들었고 온 국민들이 행복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올림픽 상위 입상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자격이 충분하였을지 몰랐습니다.


                     2002년 축구 국가대표팀은 우리를 하나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2006년에 있었던 제1회 WBC야구대회에서 한국대표팀이 엄청난 선전을 하여 국민들을 기쁘게 하였습니다. 그때 다시 한 번 병역면제라는 선물이 선수단에 부여가 되었는데 많은 국민들이 긍정적으로 이를 받아들였지만 당시에 이런 예외 규정이 자꾸만 발생한다면 원칙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냐는 반대여론도 많이 나왔습니다.

                         2006년 야구 국가대표팀도 국민을 기쁘게 만들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개인적으로는 국위를 선양하고 국민들을 기쁘게 해준 운동선수들에 대해서 굳이 병역혜택이 아닌 다른 차원에서의 보상이 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국민의 의무인 병역과 관련한 원칙은 되도록 고수되어야 하는 것이 옳고 국민이 열광하는 분위기에 편승하여 그때마다 원칙을 자꾸만 바꾼다면 나중에는 감당하지 못할 상황까지 이를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신성한 병역의 의무에 관한 원칙이 흔들린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연예인들도 병역을 충실히 완수하여야 더욱 인기가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병역면제를 주장하는 이유가 국위선양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가 가장 경기력이 왕성한 시기에 선수들이 군복무를 하면 이후 경기력이 후퇴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시기에 병역면제를 하여주고 선수들로 하여금 더욱 운동에 정진시키자는 의견도 있습니다. 사실 이제는 운동실력으로만 한국을 자랑하던 그런 시기는 솔직히 지난 것 같고 경기력과 관련한 주장과 관련하여 다음의 에피소드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범근 선수의 도전

1978년 12월 방콕에서 열린 제8회 아시안게임 축구 결승전에서 한국은 북한과 연장전까지 치르는 명승부 끝에 0-0으로 공동우승을 합니다. 그 경기직후 한국 최고의 스트라이커였던 차범근 선수는 독일 행 비행기에 오릅니다. 이유는 단하나, 세계 최고의 축구무대에서 뛰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었는데 마침 독일 교민으로부터 분데스리가 팀을 소개해 주겠다는 연락을 받았었습니다.


         1978년 아시안게임 축구 결승은 한국과 북한의 숨 막히는 혈투 끝에 공동우승으로
          막을 내리고 이 경기 직후 스트라이커 차범근 선수는 독일 행 비행기에 오릅니다
.


 하지만 지금처럼 전문 매니저의 도움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서독에 찾아온 축구 변방 아시아의 이방인을 반겨준 팀은 아무 곳도 없었습니다. 조금 먼저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하던 일본인 오쿠데라가 있었고 비록 아시아에서 차범근은 오쿠데라보다 실력이 뛰어난 것으로 자타가 인정하고는 있었지만 차범근도 한국축구도 서독에서는 관심 밖의 대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부 젊은 분들은 차범근 선수를 통신회사 광고에 등장하는 감독 또는 TV 해설자 정도로 알지만 개인적으로 한국 축구사에서 가장 위대한 스트라이커였다고 생각 합니다. 하지만 차범근 선수가 처음 서독에 갔을 때 눈길을 주었던 구단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와중에 겨우 입단 테스트 기회를 준 구단이 있었는데 리그 최하위 다름슈타트였습니다. 하지만 테스트에서 보여준 차범근의 기량은 다름슈타트를 만족시켜 입단계약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다름슈타트는 차범근을 입단 시키자마자 12월 31일 경기에 곧바로 데뷔시켰는데 한국인 운동선수가 세계적인 빅 리그에 데뷔해본 경험이 없던 당시 이러한 소식은 국내에 대서특필되었습니다.


        간신히 분데스리가에 데뷔하였습니다. (사진은 레버쿠젠 소속으로 뛰던 말년의 모습)


박지성선수가 프리미어리그에, 박찬호선수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것 이상으로 당시만 해도 온 국민은 열광을 하였고 기대가 컸으며 당연히 차범근 선수가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좋은 활약을 펼쳐 한국의 명예를 드높여 주기를 고대하였습니다. 그 후 한 두 차례의 경기에서 돋보이던 활약을 보여준 차범근은 곧바로 분데스리가의 관심대상 선수가 되었고 차선수의 선전에 국민들을 기쁘게 하였습니다.


원칙은 원칙


그런데 당시 정부는 차범근 선수에게 소환명령을 내립니다. 그것도 최대한 빨리 귀국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현역 군인 신분으로 당시 성무팀 ( 공군축구팀인데 그 당시는 오늘날 尙武처럼 별도의 국군체육부대가 없이 각 군별로 팀을 운영하였습니다 ) 소속인 차범근 선수가 병역을 완전히 마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고 빨리 와서 군복무를 이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정부는 차범근 선수에게 원칙을 지키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자 사회 일각에서 차범근 선수가 어렵게 분데스리가에 진출하였으니 외국에서 국위를 선양 할 수 있도록 조기 제대를 시켜주어 계속 서독에서 활약 할 수 있도록 하자는 여론이 벌 떼처럼 일어났었습니다. 요즘이라면 바로 직전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였고 사회적 분위기로도 조기제대가 충분히 가능한 일일지도 몰랐는데 당시 정부는 병역에 관한 원칙을 절대로 훼손 할 수 없다고 천명하였습니다. 


병역의무가 경기력을 약화 시킨다?
 

결국 차범근 선수는 추상같은 소환령에 봇짐을 싸들고 돌아와 1979년 5월까지 잔여 군복무를 마친 다음에야 다시 서독으로 향하게 되었고 서독 복귀 후 그의 기량을 눈여겨 본 명문 프랑크푸르트팀에 입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원칙을 고수한 정부의 방침으로 군복무를 완수한 차범근 선수의 경기력이 약화되었을까요?


   원칙을 지켜 의무를 다한 차범근 선수는 다시 독일로 가서 최고 선수의 반열에 오릅니다.

그의 독일 활약상을 대변하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2002년 월드컵 당시 독일 대표팀의 일원으로 한국을 방문한 스트라이커 미하일 발락이 입국 일성으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세계적인 스트라이커 발락의 어릴 적과 최근의 모습) 

차범근 선수는 많은 축구 꿈나무들이 어려서부터 본받고 싶어 하던 영웅이었습니다.

  " 이곳이 정말 차붐의 나라인가요? 어려서부터 저의 우상이었고 영웅이었던 위대한 축구선수 차붐의 나라를 방문하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 (발락)

현역에서 은퇴하였지만 차범근 선수는 분데스리가 최고의 외국인 선수로써 아직도 명성을 남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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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모 방송국의 인기드라마 선덕여왕과 관련하여 신라의 여러 제도와 문화가 자연스럽게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군주였던 선덕여왕 자체도 그렇지만 신라의 독특한 군사제도이자 교육시스템이기도 하였던 화랑(化郞)에 대해서도 관심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군의 상무정신을 대표하는 단어이기도 한 화랑과 관련된 잊혀진 이야기가 있는데 이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최근 인기리에 방송 중인 드라마 선덕여왕


1953년 휴전이라는 이름으로 치열했던 한국전은 일단 숨고르기에 들어갑니다. 전선이 고착화 된 후 대부분의 전투가 현재의 DMZ 인근에서 이루어졌지만, 초기 1년은 낙동강에서 두만강까지 정신없이 남북으로 전선이 왔다 갔다 하였기 때문에 한반도 전체가 전쟁의 화마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습니다.


                                      한국전의 비참함을 알려주는 유명한 사진입니다.
                           사진의 모습으로 보아 인천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휴전으로 전쟁이 일단 멈추자 피해를 복구하는 일은 남이던 북이던 제1의 과업이 되었고 더불어 전쟁으로부터 사상을 당한 많은 참전군인들에 대한 보상 또한 커다란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하지만 전쟁 전부터 이미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대한민국이 이들 전사상자에 대해 즉각적이고 충분한 보상을 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전쟁은 필연적으로 많은 전사상자를 양산하였습니다.


차라리 전사자의 경우는 시간을 두고 유가족에게 보상을 해 주어도 되었지만 전투로 인하여 몸이 불구가 된 상이용사들은 당장의 호구지책을 걱정할 딱한 처지였습니다. 국가나 사회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없기는 매한가지여서 상이용사들의 처절한 절규에 당장 도와줄 방법이 사실 없었습니다.


                나라 전체가 초토화되어 상이용사에 대한 구호도 제대로 이뤄질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전후에 사회로 복귀한 제대군인 특히 경제적으로 자활이 어려웠던 상이용사들의 불만은 사회적으로 커다란 문제가 되었습니다. 더구나 우리사회의 병폐중 하나가 선천적이던 후천적이던 신체적으로 불편한 사람을 깔보고 비하하는 이상한 못된 풍조가 있는데, 국가를 위해 희생한 상이군인들을 속어로 깨진바리라고 불렀을 정도로 차별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상이용사들이 생계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도 많지 않았고, 사회의 냉대도 있었습니다.


결국 국가가 즉각적인 보상이나 구호를 하기 힘들면 이들이 스스로 자활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도움을 주어야 했는데 이러한 사업의 시범으로 실시되었던 대책 중 하나가 화랑농장사업이었습니다. 사회적응이 힘들었던 상이용사와 가족들이 모여 살 수 있도록 거주지와 함께 인근에 자립할 수 있는 농장터를 제공하여 경작하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국가를 위해 희생한 분들을 위해 자활 시범 사업이 실시됩니다.


한미재단의 도움을 받아 상이용사 출신인 김국환(金國煥)씨와 진상구(陳相龜)씨의 주도로 인천시 산곡동 369번지 일대에 화랑농장이 조성되었는데, 1955년 3월 5일에 있던 화랑농장 개소식에 당시 최재유 보건부장관, 이익흥 경기도지사는 물론 맥카오 주한미군 후방지원 사령관등이 참석하였을 만큼 성황리에 사업이 개시되었습니다.


         당시 관영 매체에서 대대적인 보도를 하였을 정도로 성황리에 사업이 개시되었습니다.


화랑농장이 들어섰던 곳은 원래 구한말 장끝말이라는 이름의 한적한 동네였습니다. 일제가 중일전쟁을 시작하면서 현재 인천시 부평구 일대에 조병창이라는 군수기지를 만들 때 이곳에 거주하던 20여 가국의 원주민들을 내쫒으면서 마을도 사라졌습니다. 이후 한국전을 거치면서 일본의 조병창터에 미군부대가 주둔하게 되었는데 현재도 일부 시설이 남아있습니다.


                      반원으로 표시한 지역이 화랑농장인데 경인전철 백운역 인근입니다.


화랑농장은 미군기지터 일부를 환수 받아 설립되었는데 이후 정부의 지원 없이 자립적으로 운영되다보니 얼마못가 심각한 자금난에 봉착하게 되었고 1950년대 말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이후 다시 폐허가 된 농장에 많은 외지인들이 정착하게 되었는데 대부분이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물자를 유통하거나 미군부대 군속으로 근무하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금난으로 농장은 폐쇄되고 인근 미군부대 관련하여
                      생계를 이어가려는 많은 외지인들이 화랑농장지역으로 유입됩니다.
                             (현재도 화랑농장 인근에 일부 남아있는 미군기지)



이후 이곳은 농장이 아닌 좁은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옹기종기 주택들이 모여 앉은 전형적인 구식 주택가의 모습으로 급속하게 변하게 되었으나 일대를 아직도 화랑농장이라 부를 만큼 공공지명화 되어있습니다. 현재도 경인전철 부평, 백운역에서 산곡동 방향으로 가는 버스의 노선판을 보면 화랑농장이라 쓰여 있을 정도이고 마을로 들어가는 도로의 명칭도 화랑로입니다.


         현재 문서에 표기될 만큼 화랑농장은 공공지명화 되었습니다(부평신문 보도내용)


현재 이곳에 사는 분들 중에도 아마 이러한 마을의 유래를 아시는 분들이 그리 많지는 않을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근처는 이미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을 만큼 발전이 되었지만 화랑농장은 최근에야 재개발 예정지역으로 되었을 만큼 발전이 상당히 더딘 지역인데 앞으로 개발이 완료 후에는 어떻게 변모할지 궁금합니다.


                           현재 화랑농장의 모습인데 재개발지역으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현재 부평인근에 사는 사람조차도 화랑농장을 주말농장이나 도심인근의 가든 식 숯불갈비집으로 잘못 아는 분들도 꽤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만, 그 낭만적인 이름이면에는 국가를 위해 몸을 바쳤지만 제대로 보상도 받지 못하여 스스로 자활의 길로 나설 수밖에 없었던 상이용사분들의 처절한 피눈물이 담겨져 있습니다.


                낭만적인 화랑농장이라는 명칭은 어려웠던 시절 조국을 위하여 몸 바쳤음에도
             전쟁 후 어려움을 겪은 많은 상이용사들의 절규가 담긴 역사적인 이름입니다.


100년 전에는 장끝말로 불린 한적한 산골마을 이었지만 외세의 침략야욕에 의해 사라진 이름이 되었듯이 지난 50여 년간 계속되어온 화랑농장의 이름도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바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곳을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는 이상 그곳에 짧게나마 있었던 우리 현대사의 아픈 역사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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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대밭이 된 약소국

독일은 계획대로 벨기에를 돌파하여 노도와 같이 북부 프랑스로 쇄도하여 들어갔으나,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필히 우익을 강화시켜라"라는 유언을 남긴 슐리펜(Alfred Graf von Schlieffen)의 의도와 달리 병력을 우익에 집중하지 못한 당시 독일 육군 참모총장 小몰트케(Helmuth von Moltke)의 실책으로 마른전투(Battle of Marne)에서 독일군의 진격이 멈추게 되고 이후 종전까지 무시무시한 참호전에 돌입하게 됩니다.


                                   마른에서 프랑스는 독일의 진격을 극적으로 막아내었고
                                 이후 서부전선은 참호전으로 변모하였습니다.


이후 지옥으로 변한 참호전은 후방에 앉아있는 지휘관들이 상황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체로, 이전 전쟁과는 비교 할 수 없는 엄청난 살상무기로 무장한 상대편 진지로 나폴레옹 전잰당시처럼 무조건 병력을 돌격시켜 말 할 수 없는 인적피해를 야기한 그야말로 무식한 전쟁의 표본이 됩니다. 때문에 이런 결과 참호로 연결된 전선부근은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됩니다.


               혼히 No Man's Land 라고 표현할 만큼 전선은 살아있는 지옥이었습니다.


전쟁 참여국의 국토가 유린된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 일 수 있겠지만 고착된 전선 한 가운데 놓여있던 벨기에는 남의 나라 전쟁 때문에 국토가 박살(?)나게 됩니다. 전사에는 벨기에가 제1차 대전 때 연합국 편이라고 단순히 설명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중립을 짓밟은 독일의 침략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택할 수 밖에 없었던 차선책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강대국 간의 전쟁으로 벨기에 영토는 풍비박산 났습니다.


특히, 그 악명 높은 독가스가 최초로 사용 된 곳도 벨기에의 이프르(Ypres)입니다. 1915년 4월말에 독일은 병력 이동을 은폐하기 위한 수단으로 약 5천 개의 가스통을 열어 연합군측으로 염소가스를 흘려보냈고, 예상치 못한 독가스에 연합군은 1만 5천명이 중독되고 5천명이 사망하는 큰 타격을 입게 됩니다. 덩달아 벨기에 또한 본의 아닌 가스피해를 입게 됨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악명 높은 독가스도 벨기에 영토에서 처음 살포됩니다.


1차대전 서부전선에서는 누가 누가 많이 죽나하고 경쟁을 벌인 많은 무서운 싸움이 있었지만 1917년 제3차 이프르 전투의 일부였던 파스샹달(Passchendaele)전투는 연합군과 독일군 양측이 성과 없이 참호와 진흙탕 속에서 고귀한 인명을 무자비하게 희생한 서부 전선에서 가장 끔찍했던 기억으로 남게 된 전투로 기록되며 영불해협에 자리 잡은 벨기에의 아름다운 도시는 지동에서 없어진 것과 같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잠시 동안의 평화


1918년 전쟁이 끝났을 때 서부전선기준으로 패전국 독일은 자국 영토에는 폭탄한방 맞지 않았지만, 막상 승전국 벨기에는 그 참상이 얼마 심하였는지 국제올림픽 위원회(IOC)에서 평화를 열망하는 마음으로 1차대전 후 최초의 올림픽을 1920년 벨기에의 앤트워프(Antwerp)에서 개최하도록 조치합니다. 당시 IOC의 생각으로는 이것보다 더 확실하게 평화를 어필하는 대안이 없었다고 합니다.


                                          1920년 제7회 앤트워프 올림픽 개막식


제1차 대전의 교훈으로 독일은 고착된 전선을 돌파하는 전격전의 교리를 가열 차게 연구하고 호된 경험을 얻은 프랑스는 공격자가 때리다 때리다 지쳐 쓰러 질만한 완벽한 요새를 꿈꾸게 됩니다. 1927년에 착수하여 10년 뒤인 1936년에 완성한 바로 마지노선(Maginot Line)입니다. 마지노선은 총연장이 약 750km로서, 북서부 벨기에 국경에서 남동부 스위스의 국경까지 이르고, 중심부는 독일과 프랑스의 국경을 따라 이어진 영구 요새선이었습니다.


                                              프랑스 방어 전략의 상징인 마지노선


당시 벨기에는 제1차 대전의 결과로 프랑스와 긴밀한 관계를 이루고 있었고, 프랑스 마지노선의 축성에 자극받아 벨기에-독일 국경에 1932년부터 1935년 사이에 에방에말 요새(Fort Eben-Emae)를 구축 합니다. 당시에는 마지노선보다 더 견고하고 강력한 요새로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 요새는 다시는 자국의 영토가 강대국의 싸움에 유린되지 않을 거라는 벨기에 국민의 믿음을 대변한 건축물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벨기에의 자부심인 에방에말 요새
                            마지노선보다 훌륭한 방벽으로 소문이 자자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약소국 벨기에가 그들의 앞에 있던 독일의 위협만 대비ㅏ고 있었지만 위협은 또 다른 곳에서도 잠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우방이라 믿고 있던 프랑스도 만일 독일과의 전쟁이 재발한다면 벨기에를 전쟁터로 이용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무서운 사실을 벨기에는 제대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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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제약회사 화이자(Pfizer)는 협심증 환자들에게 흔하게 발생하는 질환인 흉통의 완화제로 기존에 많이 사용하던 니트로글리세린계 약을 대체할 신약 개발을 완료하고 병원에서 환자들을 상대로 임상 실험 중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험도중 유독 남성 환자들에게서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이상증세를 발견하였습니다.


                                         다국적 제약회사인 화이자
                         제약산업은 아직까지 한국이 세계적 수준에 뒤진 분야 중 하나입니다.


환자 A  "마님 앞에서 마구 마구 도끼질을 하면서 장작을 패고 싶다는..."

환자 B "오! 마이 갓뜨 ~ 내 나이 70인데 고목나무에 꽃이 피고 있다는..."

환자 C "아무래도 협심증 때문이 아니고 엉뚱한 곳에서 돌연사 할 것 같다는..."


                           임상실험 중 환자들로부터 엉뚱한 푸념을 듣게 됩니다.


본래 약의 개발 목적과는 달리 남성에게만 나타나는 곤란한 부작용과 이러한 부작용에 어쩔줄 모르고 난감해하던 남성 환자들의 푸념(?)에 화이자는 약의 개발 방향을 180도 돌려 전혀 다른 곳으로 전환합니다. 이 약은 결국 다른 용도의 치료제로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자신감을 상실한 남성을 위한 약으로 개발방향이 바뀝니다.


이 약의 효능은 시판 이전부터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판매소식이 뉴스를 통해서 적극 알려질 만큼 세계 제약시장에 찬란하게 데뷔합니다. 그것은 신체의 노화나 각종 질환으로 자신감을 잃고 있던 세계의 수많은 남성들에게 한줄기 복음이었습니다. 바로 특유의 파란색으로 널리 알려진 비아그라입니다.


                            처음 목적과 달리 우연히 비아그라가 탄생을 하였고,
                      약으로는 보기 드물게 짝퉁까지 양산 될 정도로 히트를 쳤습니다.


비아그라는 주객전도라는 말이 너무나 어울릴 만큼 본래 개발 목적과는 다른 용도로 세상에 등장했고, 약으로는 보기 드물게 짝퉁까지 대량 생산되어 은밀히 유통 할 정도로 베스트 셀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무기의 역사를 살펴보면 비아그라처럼 본연의 목적과는 달리 엉뚱한(?)곳에서 빛을 발한 무기들도 많습니다.


                                  아직도 그 명성을 전하는 88mm Flak


1933년 정권을 잡은 히틀러는 베르사유조약을 일방적으로 폐기하고 공개적으로 독일의 재 군비를 추진하였습니다. 당시 독일군이 방공포로 사용하던 것이 75mm Flak이었는데 조약폐기 후 이를 대체할 새로운 대구경의 대공포를 비밀리에 개발 완료하고 이를 실전 배치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무기의 역사에 길이 명성을 남기게 된 88mm Flak 대공포였습니다.


                               적기를 격추하기 위해 작렬하는 88mm Flak


이 대공포는 제2차 세계대전 개전 초기부터 독일의 무조건 항복으로 종전 할 때까지 독일의 영공을 방어하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였던 훌륭한 대공포였습니다. 그런데 많은 매니아들은 88mm Flak을 본연의 목적인 대공포보다는 연합군 전차에게 가장 무서운 저승사자였던 명품 대전차포로 기억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88mm Flak은 명품 대전차포로도 그 명성이 자자합니다.


전사를 읽어보면 이놈이 본래의 용도를 벗어나 대전차포로 사용되게 된 것도 비아그라처럼 극적이었는데 시작이 다음과 같이 알려져 있습니다. 독일 전격전의 신화가 만들어진 1940년 서부전선에서의 일이었습니다. 아라스(Arras)에서 신나게 진군하던 독일 기갑부대가 갑자기 등장한 마틸다 重전차로 중무장한 영국군에 의해서 진격이 멈추어지게 되었습니다.


                    마틸다전차를 요격하면서 신화가 시작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당시 독일의 주력이었던 1,2호 전차나 보유하고 있던 대전차 화기로 마틸다 전차를 파괴할 수 없자 다급히 대공포로 사용하던 대구경의 88mm Flak로 마틸다 전차를 요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독일군도 놀랄 만큼 적전차를 손쉽게 격퇴하였고, 이때부터 이놈이 자기의 본분을 망각(?)하고 대전차포로도 사용 되었다고 합니다. (* 스페인 내전에서 처음 사용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대전차포 용도로 사용되었는지에 대해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무수한 탱크 킬 마크 (Kill Mark)만으로도 그 명성을 유추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아프리카 전선에서 롬멜 (Erwin Rommel 1891~ 1944)이 지휘하던 독일 아프리카 원정군은 이몬을 이용하여 무려 200여대의 전차를 격파하여 연합군으로 하여금 88mm의 공포라는 소리가 나오게 만들었습니다. 이후 대공포로써의 임무도 물론 성실히 하였지만 독일군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다니며 최고 저격수의 임무도 수행하였습니다. 더욱이 최고의 전차인 티이거나 쾨니히스티이거의 주포로도 채택되어 그 명성을 길이 전하고 있습니다.


                                 88mm Flak은 전선의 비아그라였습니다.


개발 목적과는 달리 오히려 엉뚱한 (?) 곳에서 더 효과적인 약발을 보인 88mm Flak은 실의에 빠져 있던 남성들의 구세주로 탄생한 비아그라처럼 독일군을 구원하는 수호신이 도었고 그 명성을 길이 남겼습니다. 따라서 88mm Flak을 전선의 비아그라라 칭하여도 결코 모자람이 없다 할 것입니다.


           좌절하지 마십시오. 우리 인생에도 88mm Flak이나 비아그라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일생도 그런 것 같습니다. 사는 도중 어렵고 실패의 과정도 분명히 있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더 큰 성과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혹시 일시적으로 어렴움을 겪거나 곤란한 점이 있더라도 좌절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우리 삶에도 전혀 생각지도 못한 88mm Flak이나 비아그라가 분명히 생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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