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는 자 그리고 찾는 자 [3]




                                하늘에 뜬 저승사자
 
레이더가 실용화되어 그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 영국해협전투의 예처럼 제2차 대전은 각종 군사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이 있었던 시기로 대잠초계분야 또한 폭 넓은 진화가 있었다. 각종 탐지장치가 등장하고 무선통신기술이 폭넓게 사용 되는 등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보다 광범위한 범위의 탐색이 가능하여, 제1차 대전 당시와 달리 인간의 시야를 벗어난 지역까지의 초계가 가능하여 지기 시작하였다.

 
           함재기의 발달과 항모의 실용화로 보다 광범위한 해상초계가 가능하여 졌다
 

그리고 제2차 대전, 특히 태평양전역에서 군사적 패러다임의 급격한 변화가 있었는데 바로 항공모함의 본격 실용화와 각종
함재기의 발달이다. 이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원양에서 제한을 받지 않고 자유로운 항공작전이 가능하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항공모함에 탑재한 함재기를 이용하면 함대나 상선의 이동 경로를 미리 탐색하여 적 함대를 사전에 수색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즉시 공격도 이루어지게 되었다.
 

                부상한 잠수함이 해상초계기의 눈을 벗어나기는 힘든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까지의 기술로는 오늘날처럼 하늘에서 수중을 감시하는 정밀한 탐지기기는 아직 실용화되기 전이었다. 그러므로 해상초계활동 중 발견한 적 수상함이나 부상한 잠수함이 아닌 수중에서 잠항하는 잠수함을 탐색하고 공격하는 임무는 바다위의 구축함이 담당하였다. 다시 말해 이때까지는 하늘 위에 떠서 물속에 숨어 있는 잠수함까지 발견하기는 힘들었다. 다만
부상하여 있는 잠수함의 탐색은 이전에 비해 월등히 쉬웠고 공격도 즉시 가능하였다.

 
                           잠수함의 어설픈 부상은 최후를 의미 하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잠수함은 배터리 충전 등을 위하여 부상 할 때 예전보다 더욱 조심하게 되었고 구축함뿐만 아니라 하늘로부터의 감시와 공격에도 항상 대비해야 할 만큼 위험스러운 임무환경을 맞이하였다. 물론 스노클(Snorkel)과 같은 장비의 개발로 이런 위험을 조금 감소 할 수 있었지만 스노클도 작동 시 하늘에서 발견하기 쉬운 흔적을 바다 위에 남기었다. 한마디로
대잠초계기가 잠수함의 천적으로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스노클을 수면 위에 노출하고 잠항 중인 유보트
 

아직은 초보 수준이었던 대잠초계기였지만 제2차 대전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그 위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변모했다. 특히 대서양과 유럽 인근에서 주로 활약하던 독일해군 유보트들의 손실을 보면 대잠초계기의 위력을 여실히 알 수 있다. 당시 연합군함정에 의한 손실이 264척인데 대잠초계기에 의한 손실도 250척이었을 정도였고 결국 하늘로부터의 공격에 진절머리가 난 독일은 대공포를 장착한 초계기 요격잠수함인 U-flak까지 취역시킬 정도였다.

 
                               대잠초계기 공격을 위한 대공화기 탑재 유보트
 

당시의 대잠초계기는 적 잠수함의 출몰이 예상되는 지역을 천천히 초계비행하면서 잠수함의 부상흔적 등을 찾는 형태였는데, 만일 수면위에 잠수함 출현 흔적을 발견하면 근처 아군에게 통보하여 즉시 요격하도록 하거나 만일 적 잠수함이 초계기의 공격 범위 안에 노출되어 있다면 직접폭격 등을 실시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초계기가 직접 공격까지 하였다
 

이와 같은 대잠초계를 위해 제2차 대전 당시 미국은 두 가지 형태의 대잠초계기를 운영하였다. 하나는 항공모함에 탑재한 전투기와 뇌격기(어뢰를 이용하여 적함을 공격하는 전투기)를 하나의 편대로 구성하여 대잠임무를 수행하는 것이었는데, 이런 조합 형태는 아군함대 인근이나 적의 반격이 있을지도 모르는 최전선의 해역에서 이루어지는 작전 형태였다.

 
                             제2차 대전 당시 본격적으로 등장한 초계기는
                                오늘날 초계기의 직접적인 선배가 된다
 

또 하나는 제해권이 장악된 후방 해역에서 적 잠수함의 게릴라식 기습을 막기 위해한 작전 형태였는데,
장거리 항속 및 체공이 가능한 대형수상기를 이용하여 대잠초계 활동을 펼쳤다. 이렇게 소형인 항공모함에 탑재 대잠초계기를 이용한 초계활동과 육상에서 발진 가능한 대형항공기를 이용한 초계활동은 오늘날도 계속 이용하고 있는 일반적인 대잠초계 형태로 자리 잡았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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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마의 세 가지 유산 중 하나였던 올림픽 성화
 
 
 
제2차 대전이 끝난 지 반세기가 지났지만 히틀러라는 희대의 독재자와 나치라는 전범 집단을 긍정적으로 볼만한 요소는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인류사에 끼친 악행이 쉽게 치유되기 힘들만큼 너무나 컸기 때문입니다.  독일에서 조차 동동장소에서 나치와 히틀러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금기시되고 법적으로도 나치에 대한 모든 것이 부인되고 부정될 정도입니다.

 
                          히틀러와 나치는 두말할 필요 없는 인류사의 악입니다
 

하지만 한 시대를 좌지우지하였던 인물과 집단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아직도 음으로 양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는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시대에 뒤진 인종주의를 찬양하는 네오나치 ( Neo NAZI ) 같은 극소수의 추종세력들에게 히틀러와 나치는 아직도 영웅시되고 본받아야 할 교범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경우는 인간세계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가끔 어처구니없는 극소수의 추종세력이 아직도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이들 악마들이 남긴 유산 중에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좋은 전통이나 문명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있습니다.  애써 부인하고 싶지만 이것들을 악마의 긍정적 유산으로 지칭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세 가지 예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첫째 유산 - 폭스바겐 비틀 (Volkswagen Beetle)
 

모든 국민들이 차를 소유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하며 1933년 정권을 잡은 히틀러는 차량 설계자인 페르난트 포르쉐에게 다음과 같은 조건을 만족하는 새로운 개념의 차, 즉 국민차의 개발을 의뢰합니다.


                                           히틀러와 폭스바겐 비틀
 

어른 두 명과 어린이 세 명이 탈수 있고, 1리터의 연료로 14.5km이상 달릴 수 있으며, 최대시속은 100km의 고성능이지만 정비하기 쉬어야하되, 값은 1천 마르크 이하(당시 1천 마르크는 오토바이 한대의 가격이었음)로 저렴해야 한다는 까다로운 조건이었습니다.
 
                                 현재도 명성을 이어가고 있는 New Beetle
 

불가능할 것 같은 이러한 어려운 조건을 만족시키며 탄생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딱정벌레(Beetle) 였습니다.  하지만 1939년 제2차 대전의 시작으로 공장에서 조립 중이던 국민차는 대중에게 공급되지 못하고 급히 군용차로 변경되었습니다.  전쟁을 염두에 두었던 히틀러의 전략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폭스바겐 비틀의 명성은 아직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둘째 유산 - 아우토반 (Autobahn)
 
                                   아우토반 기공식에 참석한 히틀러와 나치 간부

 
아우토반은 독일이 건설한 자동차 전용도로였는데, 진정한 세계 최초의 현대식고속도로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히틀러 집권 전 일부구간이 개통하기는 하였으나 나치가 정권을 장악한 후, 독일의 동서의 주요구간을 가로지르는 총연장 7,000Km에 달하는 통합 간선도로망 건설에 착수합니다.

 
                              현재도 최고의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아우토반

 
초기에는 대공황에 따른 실업자구제 및 국가물류망의 확충 등이 그 목적이었으나 완공초기라 할 수 있는 1930년대 말부터 이미 독일은 전시 상황에 돌입중이어서 군대 및 군수물자의 이동에 더 적절히 쓰였습니다.  즉, 침략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토반은 현재도 세계최고의 고속도로라는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독일의 자랑거리입니다.
 
 
셋째 유산 - 올림픽 성화 봉송 (Olympic Torch Relay)

 
올림픽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아이콘 중 하나인 성화는 1928년 제9회 암스테르담대회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그리스의 올림피아에서 고대의식에 따라 불을 채화하여 세계 각국을 거치는 장거리 릴레이를 거쳐 개최도시까지 불씨를 봉송하고 개막식에서 성대히 성화대에 불을 밝히는 행사는 1936년 제11회 베를린대회부터 실시되었습니다.

 
                             베를린 올림픽 개막식 당시의 성화 최종 주자

 
세계만방에 히틀러와 나치를 자랑하기 위한 선전수단의 일환으로 올림픽을 개최하였던 독일은 개막식의 극적효과를 높이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베를린올림픽 조직위원장이었던 칼 다임의 의견을 히틀러가 수용하여 성화 봉송을 실시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계획에 걸맞게 행사가 성대히 그리고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대회의 극적 효과를 증대시켰습니다.

 
                                     밴쿠버 동계올림픽 개막식의 성화

 
그런데 올림피아에서 베를린까지의 성화 봉송루트가 이후 제2차 대전 당시에 발칸반도를 향한 독일군의 진격로가 되었습니다. 평화의 제전을 위하여 실행하였던 행사가 처음부터 전쟁을 염두에 두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를 철저히 전쟁에 이용한 것을 보면 히틀러와 나치는 진정한 악마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올림픽 성화 봉송 릴레이 행사는 범지구적인 중요한 전통행사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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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노선?
 
 
신문이나 방송에서 자주 인용되고 표현인데 많이 접하였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오늘 국제유가가 마지노선으로 여겨지던 배럴당 XX달러를 넘어섰습니다.
여야는 올해 말을 마지노선으로 정하고 원내 통과를 완료하기로 합의 하였습니다.
 
흔히 위기감을 나타내기 위해 마지노선 (Maginot Line) 이 인용되는데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최후의 한계를 은유적으로 표현합니다.  다시 말해 더 이상 양보하기 힘든, 또는 최후의 보루로 반드시 고수하여야 할 목표임을 의미하며 또한 그 만큼 돌파하기 힘든 든든한 방어막이라는 뜻도 함께 내포하고 있습니다.

 
                      막아야 할 위기의 한계점으로 마지노선이라는 말이 종종 인용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참으로 잘못된 표현이라고 생각 됩니다.  戰史에 있어 마지노선은 최후의 보루가 아닌 적을 가장 앞에서 방어하는 최전선의 방어물이었습니다.  또한 뚫릴 수 없다는, 또는 뚫려서는 곤란하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대명사와 달리 실제로는 나라를 구하지 못하고 너무나 허무하게 종말을 맞이하였습니다.

 
                                 하지만 마지노선은 허무하게 종말을 맞이하였습니다.
                                     (독일군에게 항복한 마지노선의 프랑스군)

 
참호를 깊게 파고 일진일퇴 피 말리는 대치 끝에 제1차 대전에서 결국 승리를 거머쥔 프랑스는 방어가 최고라는 생각이 뇌리에 각인되어 버렸습니다.  따라서 참호를 더욱 깊게 파고 이를 더욱 단단한 보호물로 막아버리면 어떠한 적의 공격도 물리치고 최후의 승리를 얻게 된다는 믿음은 맹신이 되어버렸고 전후 많은 논란 끝에 엄청난 비용을 들여 독불국경에 마지노 요새선을 건설하였습니다.

 
                   참호전의 끔찍했던 기억은 전후 거대한 요새선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

 
장차전에서는 고정화된 요새가 그리 효과적이지 않을 것이라는 일부의 반대도 있었지만 프랑스 젊은이의 40퍼센트가 사상 당하였을 만큼 제1차 대전의 상처가 워낙 깊어 거금을 들여 방어막은 근대과학의 정수를 모아 구축 될 수 있었습니다. 1927년부터 1930년까지 약 200억 프랑이라는 막대한 비용을 들어갔는데 이 때문에 공군력 확충 등에 실패하였다는 평가까지 나올 정도였습니다.

 
                               독불국경을 따라 어마어마한 요새선이 만들어졌습니다.

 
건설은 베르덩 전투에서 부상까지 당한 당시 육군장관 마지노 (Andre Maginot) 의 주도로 스위스부터 룩셈부르크에 이르는 프랑스와 독일의 국경 750킬로미터를 따라 건설되었고 그의 이름을 따서 이 장대한 요새선의 이름이 명명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노라는 이름은 어떠한 외침으로부터도 안전하게 프랑스를 보호할 수호천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고 국민들도 그렇게 믿었습니다.

 
                     프랑스국민들은 마지노선이 그들을 지켜줄 것으로 맹신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위대한 군사 건축물의 결정체가 한심한 콘크리트임이 판명 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1940년 독일침공군은 이곳을 우회하여 연합군을 던커크해변에 고립시켜 버리면서 전쟁을 순식간 끝내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움직일 수 없는 요새에 안전하게 틀어 박혀 있던 수십만의 프랑스군은 뒤로 돌아 나타난 독일에게 얌전히 항복하는 것으로 임무를 끝냈습니다.

 
                  하지만 배후를 돌파 당한 마지노선은 콘크리트 덩어리에 불과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악몽 같은 참호전이 재발되더라도 완벽하게 자국의 병사들을 보호 할 수 있다면 최종 승자가 된다는 고루한 교리에 집착하여 나타난 결과였고 이 때문에 마지노선은 전사에 지상 최대의 삽질로 표기되었습니다. 물론 마지노선 자체가 뚫린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이를 회피하여  승부수를 띄운 독일의 전략 때문에 무용지물이 되어버렸습니다.

 
                           1944년 프랑스를 회복한 미군이 마지노선을 바라보는 모습

                   가장 중요할 때 하나도 쓸모없던 공룡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였을지요?

 
때문에 마지노선은 굳건한 방어막이나 반드시 지켜내겠다는 의지를 표현하는 말로는 부적합 합니다.  결론적으로 나라를 구하지 못한 방어막은 결코 최후의 보루를 의미하는 중요한 의미로 쓰여서는 곤란합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마지노선은 무용지물이나 미래를 제대로 내다보지 못하고 현실에만 안주하려는 단순한 생각이 낳은 한심한 결과의 대명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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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을 지키려던 핀란드의 투쟁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연합국(미국, 영국, 소련, 프랑스 등등)과 추축국(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등)으로 나누어 격전을 펼쳤던 제2차 대전당시에 핀란드는 성격이 조금 애매하였습니다.  전쟁기간 내내 핀란드의 주적은 소련이었지만, 전쟁초기였던 1939년까지만 해도 영국과 프랑스 같은 연합국들이 핀란드를 적으로 대하지 않고 오히려 군사원조를 하면서 소련과의 전쟁을 후원하였습니다.
 

                            1939년 겨울전쟁 당시 수오미살미에서 괴멸당한 소련군
 

그렇다고 애시 당초 처음부터 독일의 동맹국은 아니었고, 1941년 독소전이 발발된 이후 필요에 의해 독일편에 서서 추축국에 가담하게 되었습니다.  독소전 내내 핀란드는 소련의 요충지인 레닌그라드 봉쇄의 한축을 맡아 맹공을 가하였으나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소련 영내로 진입하지는 않고 1939년에 있었던 전쟁에서 소련에게 강탈당한 핀란드 영토를 회복하는 것으로 만족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전쟁 말기에 소련의 우세가 확실하여지자 단독으로 소련과 강화하여 전선에서 이탈함과 동시에 총부리를 뒤로 돌려 핀란드에서 작전 중이던 독일군들을 몰아내었습니다. 사실 제2차 대전에서 핀란드과 소련의 전쟁은 여타 전선과는 별개로 보아야합니다. 연합국대 추축국의 전쟁이 아닌 제정 러시아 때부터 간섭을 하여온 소련의 침략에 대항한 신생 독립국의 해방전쟁이기 때문입니다.

 
                       1943년 계속전쟁 당시 독일장비로 무장한 핀란드군의 모습
 

1941년 독소전 이후 독일편에 섰던 것은 독일이 예뻐서가 아니라 오로지 소련이 미웠기 때문이었고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수단으로 독일의 힘을 빌렸던 것에 불과합니다. 이런 사정 때문에 미국은 처음부터 핀란드를 적으로 간주하지도 않았고 영국은 핀란드에게 외교적으로는 선전포고를 한 적국이었지만 교전을 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펼치지 않았으며 그럴 의사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무기 취득에 어려움을 겪던 핀란드는 겨울전쟁(1939년~1940년)계속전쟁(1941년~1944년)으로 불리는 일련의 대소 전쟁기간 동안 국적을 불문하고 여러 국가의 무기를 운용 하였습니다.  특히, 핀란드 공군의 전투기를 보면 제2차 대전 당시 추축국, 연합국, 중립국은 물론 노획한 소련의 전투기까지 사용하였습니다. 다음은 핀란드가 전쟁 중 사용한 다양한 나라의 전투기들입니다.


 
                                                  미국산 P-40
 


                                               영국산 Hurricane

 

                                                이탈리아산 G50
 


                                                독일산 Me-109
 


                                                  소련산 La-3
 

                                               프랑스산 MS406

 


                                           네덜란드산 Fokker D.XXI
 


                                            스웨덴산 Jaktfalken II
 

독소전 기간 중 히틀러가 핀란드를 방문하였을 때 히틀러의 전용기를 호위하던 핀란드 전투기가 미국제 F2A Buffalo 였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 국적불문, 성능불문하고 여러 나라의 전투기를 사용 할 수밖에 없었던 약소국의 고민을 엿볼 수 있는 예입니다. 사실, 조국의 방위를 위해서 무기의 국적이 무슨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단 한기의 전투기도 아쉬운 형편에서 날아다니는 것이라면 무조건 사용을 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고생고생하면서 나라를 외세로부터 구하고자 노력한 핀란드는 비록 전후 영토의 일부를 소련에게 할양하고 배상금도 지불하는 굴욕을 감내 하였지만, 고슴도치 같은 강열한 저항을 보여주어 소련에게 결코 힘으로는 핀란드를 굴복시키기 불가능하다고 각인시켜 전후, 이웃 발트3국처럼 소련에 편입되거나 동유럽처럼 위성국가가 되지 않고 친소중립을 조건으로 독립국가로 존속할 수 있도록 만듭니다.

 
                                     국제평화유지군 소속의 최근 핀란드군
 

이런 노력으로 인하여 핀란드는 냉전시기에도 동서방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여 고도의 복지국가가 되었습니다.  강대국을 옆에 두고 오랜 기간 침탈과 지배를 받았으면서도 결국 자주 독립을 지켜낸 핀란드 인들의 불굴의 저항 정신에 찬사를 보냅니다.  또한 전쟁 못지않은 살얼음판 같았던 냉전시기에 외세 및 국제환경을 적절히 이용하여 최고의 복지국가를 이룬 노력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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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화와 준비
  


이전까지의 글에서는 해외재해 발생 시 군(軍)이 효과적이고 즉각적으로 구조 활동을 벌일 수 있는 제도가 사전에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점을 언급하였습니다.  어쩌면 이점은 국방의 관점에서 한정하여 바라보기 보다는 거시적으로 정치, 외교 등 모든 부분에서 종합적으로 다루어야 할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해외재해 구호 활동은 우리의 국격(國格)과 관련된 사항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재난 발생 직후부터 참여할 시스템을 준비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제도나 법률 등과 관련한 점은 주로 소프트웨어에 해당되는 문제고 실제로 군이 재해지역에 적시에 투입되기 위해서는 적절한 조직과 장비가 구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조직은 굳이 상시적일 필요까지는 없고 기존의 조직에서 차출하여 즉시 편성이 가능한 형태로 준비태세만 되어 있어도 충분하다고 판단됩니다.  오히려 군은 이런 점에서 탄력적으로 조직을 구성하는데 효율적인 구조이기도 합니다.

 

                       공병부대는 즉시 재난구조에 투입 가능한 군 조직 중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장비인데, 평상시 군이 사용하는 장비를 최대한 이용하는 것이 당연히 바람직합니다.  예를 들어 지난 여러 번의 해외재난 구호에 있어 우리 공군수송기들은 물자수송에 탁월한 실적을 발휘하였습니다.  군 수송기는 일반 민간기와 달리 이착륙거리가 짧고 기동성이 좋아 활주로가 재해로 일부 파손되는 악조건 하에서도 운용이 가능할 수도 있기 때문에 재해지역 투입에 효과적입니다.

 
                                   수송기에 구호품을 적재하는 모습
 

현재 우리 군이 보유한 대표적 수송기로 CN-235C-130기종이 있는데, 훌륭한 수송기이기는 하지만 아쉽게도 화물 탑재용량도 적고 장거리 운송에 제한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C-130은 20여 톤의 화물을 싣고 1,200킬로미터를 비행할 수 있어 아이티(약 15,000km)처럼 멀리 떨어진 재해지역에 투입된다면 여러 차례의 중간 기착지를 거쳐서 비행하여야 하여야 하고 또한 그만큼 운항 시간도 오래 걸립니다.

 
                        쓰나미 재해 당시 스리랑카에 구호품을 운송한 공군 수송기
 

따라서 최대 75톤의 화물을 적재한 상태에서 약 3,700km을 비행할 수 있는 C-17같은 대형수송기의 도입이나 임대도 한번 고려해 볼만합니다.  굳이 해외재난 투입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하더라도 대형수송기의 보유는 군의 전력을 획기적으로 증대시킬 수 있습니다.  특히 국력의 신장과 더불어 앞으로 국군의 해외 평화유지 활동이 더욱 많아질 것이므로 예상되므로 후속 지원을 위한 대형수송기의 역할은 크리라 예상됩니다.

 
                        아이티에 대규모 구호품을 투하하는 미 공군의 C-17 수송기
 

하지만 공수지원은 급박한 시기에 효과적이지만 당연히 경제적이지는 못합니다.  사실 군도 장기간의 평화유지 활동 같은 경우는 부대의 운용 및 지원을 경제적으로 하여야 하므로 해군의 해상능력을 획기적으로 증대시켜야 합니다.  아쉽게도 우리 해군의 경우 현재 아이티 파견이 검토되었던 독도함 같은 대형 함정도 있지만 수량이 부족합니다.

 
                  독도함은 훌륭한 상륙지원용 대형 수송함이지만 수량이 부족합니다
 

우리 해군의 자랑인 독도함 같은 함정은 항구가 파괴 되는 악 조건하에도 일부 화물을 양육시킬 수 있는 능력을 구비하고 있으므로 재난 구조에 상당히 효과적입니다.  또한 해군은 남아시아 쓰나미 사태 당시에도 수송선을 이용하여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해낸 경험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양해군을 지향하는 한국해군 입장에서도 그렇고 해외재해에도 즉시 투입할 수 있기 위해서라도 현재의 수송능력을 좀 더 늘릴 필요는 있어 보입니다.

 
                                    우리군의 적극적인 역할을 기대합니다.
 

우리 군의 전력을 강화하면서도 평화 시에 유효 적절히 전용하여 사용할 수 있는 하드웨어를 사전에 구비하는 것도 좋은 국방정책이자 훌륭한 외교수단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런 희망사항이 쉽게 달성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차근차근 준비해야 된다고 판단됩니다.  우리도 이제는 국제사회에 적극 공헌하여야 할 위치에 올라섰고 이런 변화에 발맞추어 군도 능동적으로 동참할 준비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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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동적인 참여의 필요성
 
 
재해 발생 시 가장 먼저 벌일 활동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인데 이것은 촌각을 다투는 문제입니다.  그러고 나서 다음으로 시설복구에 들어가는 것이 수순인데 이때부터는 어느 정도 시간적 여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대지진 이전부터 유엔 평화유지군이 주둔하고 있었을 만큼 사회가 불안했던 아이티 같은 국가의 경우는 재해 구호와 더불어 치안확보 또한 상당히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강도로부터 상점을 지키는 무장 아이티인
 

굳이 아이티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일거에 엄청난 재해가 닥치면 치안이 불안해지지만, 총기로 무장한 약탈 세력이 준동한다면 일단 최소한의 긴급 구호 체계마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따라서 구조단이 안심하고 활동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치안을 확보하고 유지하는 행위도 당연히 필요한데, 사실 이것은 사회 불안세력이 함부로 준동하지 못하게 만들 정도의 압도적인 능력이 필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지진 전에도 평화유지군이 활동할 만큼 아이티의 치안이 좋지는 않았습니다.
                                 (UN평화유지군으로 파견 근무 중인 이선희 소령)
 

그 정도의 능력이라면 평상시에는 대개 경찰력 정도로 충분하지만, 전쟁과 맞먹는 재해 상황에서는 군의 투입도 고려되어야 합니다.  즉, 분쟁지역처럼 재해지역에서도 일종의 평화유지 활동이 필요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軍은 엄청난 자연재해 시 생명의 구조, 피해의 복구, 사회 안정유지를 동시에 유기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조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미군의 통제 하에 구호 물품을 배급하는 모습

 
이번 아이티지진사태 시 미군이 치안 확보의 일환으로 전격적으로 아이티대통령궁을 점거한 것이 향후 아이티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위한 시도라는 기사도 있었지만,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은 그다지 많지 않고 당연한 민사작전의 일환으로 여기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점은 다시 말해 해외 재해 지역에의 군 투입은 보통의 군사작전과 전혀 다른 개념으로 받아들인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아이티 대통령궁을 장악한 미군

 
우리나라의 경우도 유엔의 요청으로 아이티에 200여명 규모의 병력을 국회의 동의를 얻어 파견키로 하였습니다. 이것은 국제사회에 일정한 부분을 책임져야할 우리나라에게 부과된 당연한 의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병력을 파견하는데 적어도 한 달 이상의 준비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서 지금 당장 활약하는 모습을 보기는 힘들 것이라 생각됩니다.


                       레바논 주둔 UN 평화유지군으로 파견 된 동명부대

 
현재 우리나라는 현재까지 두 차례에 걸쳐 아이티에 구조대를 파견하였는데, 119구조대를 중심으로 구성된 1차 구호대는 인명구조가 주임무였고, 1월 20일 파견된 2차 구호대는 의료지원을 주목적으로 하고 있고 여기에는 공군소속 전문 구조사 1명도 포함되었습니다.  그리고 후속하여 군이 파견될 경우에는 평화유지 활동과 재건활동이 주 임무가 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119구조대를 위주로 파견된 1차 구호대의 활약상

 
사실 우리나라의 국력을 고려할 때 이처럼 순차적인 파견보다 인명구호, 재해복구 그리고 치안확보 활동이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는 종합적인 지원을 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군의 즉각적인 파견도 고려해봄 직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사전에 국민의 절대적인 동의가 반드시 필요하고 관련한 법률도 정비되어 있어야 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국민과 국제사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소말리아 해역으로 파견되는 청해부대의 모습

 
해외재난 사태 발생시 우리나라의 즉각적인 구호참여가 필요할 때, 현재처럼 후방지원도 당연히 수행하여야 할 임무이지만 여기에 더해 우리군도 즉각 해외에 파견되어 구호 활동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제도 및 시스템을 미리미리 갖추는 것이 좋다고 판단됩니다.  적어도 치안 상태 때문에 구호활동이 중단되는 경우가 없도록 처음부터 군이 함께 파견되어 구조단 보호는 물론 직접 긴급 구조임무에도 투입되는 것이 보다 합리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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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같은 재난 그리고 軍

 
 
軍의 존재 목적은 전쟁 때문인데, 엄밀히 말하자면 전쟁을 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전쟁을 막기 위해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할 듯합니다.  그런데 인류사에 있었던 대부분의 전쟁은 당하는 쪽 입장에서 볼 때 예기치 않게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 기습보다 더 좋은 전략은 없다 '는 오래된 진리처럼 당연히 공격을 하는 자들은 상대방이 전혀 준비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전쟁을 개시하기 때문입니다.

 
                                    군은 항상 전쟁을 대비하여야 합니다. 
 

따라서 군은 언제 일어날지도 모를 전쟁에 대해 항상 준비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하며, 또한 그것이 전쟁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당하는 쪽의 입장에서 본다면 전쟁은 자연재해와 상당히 유사합니다.  풍수해처럼 어느 정도 징후를 사전에 예측한 상태에서 전쟁을 벌이는 경우도 있지만 지진처럼 갑자기 침략을 당하여 전쟁이 벌어지는  경우가 많고 그럴수록 피해가 큽니다.

 
                          6.25전쟁도 북한의 기습이었고 우리의 대비가 부족하였습니다.

 
그런데 군은 전쟁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항상 대비하고 있는 조직이다 보니 이를 좀 더 확대해석한다면 자연재해와 같이 생각지도 못한 위난의 시기에도 군은 가장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자원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사실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긴급복구를 위해 군이 제일 먼저 투입되고는 하는데, 이것은 군이 즉시 동원하여 운용하는데 가장 효율적인 집단이라는 증거입니다.

 
                       군의 도움은 100년만의 폭설을 극복하는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비단 우리만의 현상이 아니고 세계 어느 나라나 똑같습니다.  군대아닌 군대라고 칭하는 일본의 자위대도 재해 복구 시 당연 동원 대상이고 미국의 경우는 일종의 예비군인 州방위군까지 동원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이처럼 전쟁처럼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재난이건, 지진이나 해일처럼 자연에 의해 불가피하게 발생한 재해건 간에 상관없이 군은 우선 투입 가능한 훌륭한 자원입니다.

 
                                  허리케인 피해 복구에 투입된 미국 주방위군
 

물론 우리나라의 경우 소방방재청처럼 평소에 국민의 안위를 책임지는 상시 조직이 있지만 대규모의 동시다발적인 재해는 이들 조직만으로 대처하기는 상당히 힘듭니다. 따라서 재해 복구의 전략 예비자원으로써 군의 역할은 큽니다.  하지만 단지 항상 병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군이 재해 대처에 적합하다는 의미는 아니고 그보다는 군이 보유한 많은 자원이 재해 극복에 효과적입니다.

 
        이라크 재건 사업을 지원중인 자이툰부대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긴급 재해 구호와는 구별되는 민사작전입니다
 
예를 들어 상륙전이나 강습전에 사용하는 각종 군사장비들은 교통로가 파괴된 지역에 긴급한 물자나 인원을 투입하는데 상당히 효과적입니다.  사실 전쟁 장비는 예기치 못한 악조건을 가정하고 만들어졌기 때문에 재해에도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여지가 큽니다.  그런데 국내의 경우라면 군이 이러한 장비를 이용하여 재해복구에 참여하는데 크게 문제가 없지만 해외에서 발생한 재해에 투입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상륙전 장비를 이용하면 일부 인력과 물자의 지원이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해외 재해지역의 복구 참가와 분쟁지역의 평화유지참여는 각론적으로 개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원칙적으로 우리의 해외 파견은 국회의 동의와 외교적 관계 등의 다각적인 요소를 고려하여야 하므로 생명 구조에 1초가 급한 해외 재해에 군을 투입하는 것은 현재의 실정상 구조적으로 느릴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티에 긴급 투입되어 구호 활동을 벌이는 미군


우리나라는 현재 해외재난구호 참여시 재해재난구조법과 PKO법에 따라 움직이게 되어 있는데, 여기에 따르면 재해관리체계를 외교부로 일원화하여 예하 한국 국제협력단(KOICA)을 중심으로 소방방재청, 민간구호단체 등이 우선 참여하고 군은 후방지원세력으로 지원하게끔 규정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이번 아이티사태에서 보듯이 일차적으로 군의 즉각 투입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은 조금 아쉬운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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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코 남의 일이 아닌 재해
 

예전에는 지구 반대편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쉽게 알 수도 없었고 설령 알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삶에 즉시 영향을 미치기는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은 우리 삶에서 떼어놓고 이야기하기 힘든 고추와 담배는 원래 남미가 원산지인데 이것이 돌고 돌아 막상 우리가 접하게 된 것이 임진왜란 전후이므로 대략 400여년 내외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고추와 담배가 전세계인의 식품과 기호품이 된 것은 대략 15세기 후반부터입니다. 우리나라가 이들을 접한 것이 임재왜란 당시 일본을 통해서라는 의견이 주류인데, 일본도 네덜란드 상인들을 통해 이를 접한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때가 대략 16세기말 ~ 17세기초이므로 우리는 유럽보다도 100~200여년 뒤진 셈입니다.
 
                                  고춧가루 없는 김치를 상상해 보셨습니까?
                          사실 우리가 고추를 먹은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
 

그러나 아이폰처럼 새로운 이기의 등장이나 순식간에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신종플루 사건에서 보듯이 이제는 어떤 새로운 현상이 전 세계로 확산되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물리적으로 어떤 사실이나 현상을 체감 할 수 있는 거리가 상당히 좁혀들다 보니 아주 먼 곳에서 발생한 일이 어느덧 우리와 무관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 모든 이슈들은 즉시 세계화되는 시대입니다.

 
그것은 전쟁이나 테러 또는 재해 같은 위난의 순간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오래전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제2차 대전 당시에 독일군 군복을 입고 포로가 된 사진이 신기하게 회자되고는 하였을 만큼 우리나라에서 유럽의 전쟁은 아주 먼 나라의 이야기였지만 지금은 지구 구석구석에서 발생하는 전쟁이나 테러 또는 재해에 한국인 피해자가 있는지의 여부가 중요한 뉴스가 되었을 만큼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한국인 여부로 말이 많았던 노르망디에서 포로가 된 독일군
                          그 당시 기준으로 이런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단지 한국인의 관여 여부보다도 이러한 위난에 관한 문제가 순식간에 우리 삶의 가까이 다가오게 된 데는 그것이 바로 ‘ 인간 존엄성 ’ 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지구 한 곳에서 발생한 최악의 상황으로 고통 받는 사람은 1차적으로는 그곳에 사는 국민들이겠지만 전 세계가 서서히 하나의 네트워크로 바뀌어 가는 현대에는  단지 그것으로만 끝날 문제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남아시아 쓰나미 당시 시신 옆에서 오열하는 여인의 모습

 
인간의 생존권을 유지하려는 최소한의 행위는 범지구적인 문제이고 결코 이념이나 체제를 따질 수도 없고 따져서도 안 되는 사안입니다.  때문에 2004년 남부아시아를 강타한 쓰나미, 2008년 중국 쓰찬성 대지진 그리고 아직도 진행중인 아이티 대지진은 결코 한나라의 문제로만 끝날 수는 없을것입니다.  거대한 도시가 일거에 붕괴될 정도라면 의료, 구조, 치안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이고 당연히 외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쓰촨성 대지진 당시 세계를 울린 아이를 앉은 체 발견된 모녀의 시신

 
풍수해처럼 평소에 사전 예보가 가능하여 대책을 세울 수 있는 재해라면 자력으로 위기를 극복할 능력이 있는 나라들도 많지만 지진처럼 전혀 예측 못한 상태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벌어진 재난을 극복하는 것은 아무리 국력이 큰 나라라도 한계가 있습니다.  이런 재난에서 1차적으로 사람의 생명을 구하여야 하는데 위기에 빠진 사람들이 생존할 수 있는 시간은 극히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고 이를 동시에 진행하기는 상당히 힘들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생명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지구촌 어느 곳에서 거대한 재해가 발생하면 국제사회가 나서서 도와주는 것이 당연한 행위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앞에서 구조를 받지 못해 죽어가고 있는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보다 중요한 다른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 차후에 천천히 해도 되는 복구에 비해 인명의 구조는 시간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또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이런 활동에 참여할 권리와 의무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아이티에서 활동 중인 한국구조대

 
최근 아이티에서 벌어진 대 참사와 관련하여 세계 여러 나라들이 구조 활동에 참여하고 있고 우리나라도 한국 국제협력단 (KOICA) 의 주도로 중앙119구조대 25명 등 총 35명으로 구성된 아이티 지진 해외긴급구호대가 파견되어 활동 중에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해외 재난 사태와 관련하여 우리 軍의 적극적인 역할도 필요하리라 생각되는 부분이 있어 여러 사례 등과 비교하면서 여기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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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벽 그리고 인과응보
 
 
요즘 민간인 거주지 인근에서 국경을 나누기 위해 설치된 장벽이라면 팔레스타인 지역을 고립시킬 목적으로 이스라엘이 설치한 거대한 장벽이 이슈화됩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그런 장벽이라면 냉전시대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을 먼저 떠올리시는 분이 많으리라 생각 됩니다. 특히 지난해 말 장벽 붕괴 20주년을 맞이하여 대대적인 행사가 열렸고, 이 때문에 한동안 지나간 역사의 사실로 잊혀져가던 베를린 장벽이 새삼스럽게 부각되었습니다.

 
                    베를린 장벽 제거 후 또 하나의 분단의 상징이 된 팔레스타인 장벽
 

그러나 패전국으로 당연한 응징을 받아 국토가 분단되고 베를린에 장벽이 생기게 되었던 독일과 달리 순전히 타의에 의해 허리가 잘리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동족상잔의 끔직한 전쟁까지 치른 우리에게 있어, 냉전시기에도 그나마 제한적인 통행이 가능했던 베를린 장벽은 그리 커다란 장벽으로 보이지도 않았고 지금은 작은 흔적만 남기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어느덧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 기념식
 

베를린 장벽이 있었을 당시 가장 많이 고초를 겪은 것은 물론 보통의 독일 국민들이었고 어쩌면 이것은 그들이 감수하여야 할 몫이었습니다. 그런데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20세기말 장벽으로 고통 받았던 독일이 베를린처럼 하나의 도시가 아니라 한나라의 국경을 장벽으로 봉쇄하여 약소국 국민들에게 고통을 주었던 가해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사실, 20세기 들어 독일에게 고초를 겪은 약소국이 한둘도 아니기는 합니다만)
 
                           독일은 약소국을 장벽에 가두었던 원죄가 있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은 프랑스 침공을 위해 중립국 벨기에를 점령하였습니다. 그런데 계획과 달리 전선이 고착화, 장기화되자 독일은 전선의 배후에 위치하게 된 벨기에를 손쉽게 통제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즉, 해상을 통한 영국의 상륙전이나 당시 중립국이었던 이웃의 네덜란드를 통한 벨기에와 연합국과의 연결을 막기 위하여 내렸던 결론이 벨기에의 국경을 고압선으로 완전히 봉쇄하여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벨기에와 네덜란드 국경 사이에 설치된 고압선 지도
 

이미 북쪽은 바다, 남쪽은 독일, 서쪽은 전선으로 가로막혀 있던 벨기에에게 동쪽의 중립국 네덜란드는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는데, 독일은 이곳 국경 200킬로미터에 2,000볼트의 고압선을 설치하여 벨기에를 완전히 고립시켜 버렸던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약소국 국민들을 상대로 자행된 욕심 많은 강대국의 천인공노할 만행이었습니다.

 
                             좌측이 중립국 네덜란드 우측이 독일 점령 벨기에
 

독일이 표면적으로 군사적인 명분을 내세웠으나 이로 인하여 독일의 점령지로 추락한 벨기에 국민들은 생필품의 대외 보급로가 봉쇄 (지금도 벨기에의 대외무역은 앤트워프뿐만 아니라 이웃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이나 로테르담을 이용하여 많이 이뤄집니다) 되어 크나큰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배고픔에 못 이겨 피난 가려던 수많은 벨기에 국민들이 이 장벽에서 희생이 됩니다.

 
                                         고압선에 희생된 벨기에 국민
 

이런 봉쇄는 독일이 항복한 1918년까지 계속되었고 그로 인한 고통은 약소국 국민들의 몫이었습니다. 그에 비한다면 20세기 후반에 있었던 베를린 시민들의 고통은 그리 크게 보이지도 않습니다. 자고로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으로 고통을 받는 것은 인과응보이고 동정을 받기 힘든 행위입니다. 남을 괴롭히고 죄짓고 살다가는 후손들이 힘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역사의 교훈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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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방미인의 한계 ?
 
  
소련의 붕괴로 냉전시대가 종식되자 근심이 많아진 집단이 생겼는데 바로 무기를 만드는 군수업체들이었습니다. 소련의 맞상대였던 미국이 군사적 우위를 계속 점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적정수준의 군비가 필요하였지만 막상 가장 큰 주적이 사라진 이상 대규모의 군비증강은 옛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그동안 짭짤한 재미를 보았던 무기제조업체들도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냉전의 종식은 국제정치적으로는 물론이거니와 국방정책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옵니다
.
 

그동안 천문학적인 예산을 국방비로 사용하고 있던 미국이었지만 군비 증강을 명분으로 내세울만한 이슈가 사라지자 정책 담당자들도 한정 된 예산 내에서 최대한 효율적인 방법으로 집행하고자 골머리를 앓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원래가 예산삭감이 가장 큰 주요임무 중 하나인 의회도 행정부가 제출한 국방비에 칼질을 해대기 일 수였습니다.

 
                            이러한 변혁의 시대에 군수업체들의 고민이 생겼습니다.
 

그런 이유로 탄생한 프로젝트가 JSF(Joint Strike Fighter 합동타격기)인데 개념은 상당히 단순합니다. 기존에 전투기를 사용하는 공군, 해군 해병 항공대의 차세대 전투기를 하나의 플랫폼으로 통일하면서 개발초기부터 전투기 교체가 필요한 외국까지 참여시켜 개발비용을 절감하고 대량생산을 통하여 생산단가를 획기적으로 낮추고자 나온 차세대 무기 획득 계획이었습니다.

 
           플랫폼을 통일하고 해외 수요처까지 개발에 참여시켜 생산단가를 낮추려 하였습니다.
 

이때 사운을 건 록히드마틴 콘소시엄과 보잉 콘소시엄의 충돌 결과 승자가 된 록히드마틴 은 프로젝트 제안시 제출한 X-35를 베이스로 해서 공군형 F-35A, 해병대 및 영국군용 F-35B, 미 해군용 F-35C 의 다양한 변형기종으로 개발하였고 일부 모델은 롤아웃 행사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는 각 군에서 요구하였던 다양한 조건을 맞추기가 까다로와 개발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까다로운 조건 때문에 개발에 난항을 겪고 있다는 후문이 있습니다.
 

먼저 공군용으로 제안 된 F-35A는 기존 Low급으로 사용하던 F-16을 대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더해서 군 당국은 CAS를 전담하는 A-10의 임무까지 가능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얼핏 생각하기에도 F-16과 A-10의 임무를 하나의 기종으로 합치는 것이 상당히 어려운 작업으로 생각되는데, 때문에 최근 들리는 소식에 따르자면 F-35A가 A-10를 대체까지는 하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흘러나옵니다.

 
                                                  공군용 F-35A
 
해군용으로 제안 된 F-35C는 기존에 함재기로 사용하던 F/A-18A/C 기종을 대체하기 위해 개발된다고 하는데 문제는 F-35의 기체가 비교적 작아 기존 공격기만큼의 폭장량을 갖추기 힘들 것 이라는 의구심이 증폭되고 있고, 거기에 더해 특별히 쌍발엔진기가 단발엔진기보다 안전하다는 확실한 물증은 없지만 전통적으로 쌍발을 선호하던 해군당국의 입맛에도 맞지 않는다고 합니다.

 
                                                   해군용 F-35C
 

가장 큰 문제는 해병대 및 영국군용으로 제안 된 F-35B형입니다. 이놈은 한마디로 AV-8을 대체하기 위한 기종인데 가장 큰 문제는 수직이착륙이 가능하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VTOL기의 역사가 오래되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제작이 쉬운 것도 아닙니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최근 초도비행에 성공하였다고 하는데 제식 화까지는 많은 보완이 필요하리라 생각됩니다.

 
                               최근 초도 비행에 성공한 해병대 및 영국군용 F-35B
 

지금까지 등장한 VTOL기중 그나마 제대로 성공한 것이 영국이 만든 해리어(Harrier)인데  미국도 이것을 라이센스 제작하여 사용하고 있는 현실만 봐도 VTOL기의 개발이 상당히 어렵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수직이착륙을 돕기 위해 채택한 리프트 팬이 기체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되므로 스텔스 기능을 위하여 내부에 설계된 무장수납공간을 축소 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B형의 경우 수직이착륙 조건 때문에 개발 및 운용에 많은 제약이 따를 전망입니다.

 
무장장착이 외부에 이루어지게 되면 당연히 스텔스기능에 많은 제한이 따르게 되는데 이런 이유로 이 기종의 최대 해외 구매국이자 공동 개발국인 영국도 많은 불만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계획보다 제작단가가 대폭 상승하였고 이런 여러 이유들이 맞물려 수요처인 미군은 물론 각국에서 최초 계획보다 도입 예정물량을 줄인다는 점입니다.

 
                             F-35 Lightning II  시제 1호기의 발표회 모습입니다.
                             과연 팔방미인의 한계를 극복 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결론적으로 돈 좀 절약하기 위한 좋은 기획으로 JSF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기는 한데, 자고로 만병통치약이나 팔방미인이 막상 뭐 하나 특별하게 아주 잘하는 것은 없듯이 F-35도 그럴 가능성이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와서 프로젝트를 물려 예전처럼 각 군이 별도의 기체를 만들 수도 없고 어쨌든 당국의 고민이 큰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과연 이 프로젝트가 소기의 목적대로 완성 될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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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심을 얻는 다양한 방법 PRT [끝]
 
 
앞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나라도 올해 7월에 PRT파견을 계획 중인데, 다른 나라들과 비교하였을 때 PRT운영체계가 조금 차이가 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혹시 이후에 변동 사항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정부관계자를 중심으로 민간인 100여명으로 PRT를 구성하고 300여 군 병력은 PRT를 보호하는 역할을 담당한다고 합니다.

 
                                       PRT참여 계획을 발표하는 모습
 
사실 PRT활동을 벌이려면 군의 보호 하에 함께 행동하여야 하므로 엄밀히 말하면 외국 PRT와 비교할 때 내용상으로는 그다지 차이가 없습니다. 단지 형식이 조금 차이가 날 뿐인데, 民이 주체가 되어 아프가니스탄의 재건을 돕기 때문이 아닌가 판단됩니다. 어쨌든 터키만큼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PRT는 민간의 참여 비율이 상당히 높을 것으로 예정 되어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활동 중인 터키 PRT
 

누차에 걸쳐 언급하였지만 PRT의 목적은 아프가니스탄 스스로 자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때문에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협조가 필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PRT가 아프가니스탄을 도우러 온 조직임을 확실하게 인지시키는 것이 급선무이고 또한 그러한 모습을 제일 먼저 보여주어 현지인들의 신뢰를 얻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民心을 얻는 지름길입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의료 활동을 벌인 동의부대
 

이것은 단지 선전활동과 분명히 대비되는 개념입니다. 선전은 앞으로의 상황에 대해 막연한 기대를 갖도록 만드는 것이지만 단지 허언으로 끝날 경우 오히려 적대감만 커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민심을 얻기 위한 최고의 행동은 즉시 인지할 수 있는 성과를 내는 것입니다. 또한 PRT기간이 무한정 길어질 수도 없으니 되도록이면 짧은 시간 내에 가시적인 성과를 내어야 합니다.

 
                            아프가니스탄 재건 사업에 참여하였던 다산부대
 

통상 저개발 지역에 대한 원조와 관련한 이야기 중 하나가 ' 생선보다는 낚시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좋다 ' 고 하는 것인데, 오랜 전란으로 피폐해진 아프가니스탄 같은 경우는 생선도 함께 주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병원만 지어주고 알아서 하라는 것 보다 진료 행위를 하여 당장 병든 현지인들을 구휼함과 동시에  아프가니스탄 의료인도 함께 양성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입니다.


                       현지인들을 행복하게 도와주는 것이 PRT의 목적입니다
 

무엇보다도 아프가니스탄 현지인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아프가니스탄 스스로 소득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 보다 성과가 좋은 PRT운영방법은 없습니다. 다행히도 아프가니스탄에 PRT를 파견한 국가들 중 우리나라는 부단한 자체 노력과 적절한 외부의 도움에 힘입어 절대 빈곤에서 탈출한 경험이 있는 유일한 나라입니다. 이런 노하우를 체계적으로 전수하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런 폐허와 빈곤을 극복한 경험이 있습니다.
 

물론 PRT의 이러한 활동을 적극 보호하기 위해 군의 역할도 상당히 중요하며, 인근에서 함께 활동하게 될 평화유지군, 아프가니스탄 정부군등과의 유기적인 협조도 반드시 사전에 철저히 준비되어야 할 사항입니다.  더구나 바로 직전 이라크에서 자이툰 부대가 보여 주었던 성공적인 민사작전의 경우에서 보듯이 우리가 현지인의 민심을 얻기 위해 동원하였던 방법은 상당히 우수합니다.

 
                        이라크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성공적인 활동을 기대합니다
 

시사용어로 PRT가 등장한지는 그리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개념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사실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고 여기에 대한 해답은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하여 왔습니다. 그러한 답안을 참고하여 앞으로 파견이 결정 된 대한민국 PRT가 오랜 기간 동안 전쟁에 지친 아프가니스탄 현지인에게 희망을 주고 세계 평화에도 이바지할 수 있도록 성공적으로 활동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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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Winner Takes It All


세상을 살면서 무수히 많은 1등을 보아옵니다. 그리고 저 또한 제가 몸담고 있는 분야에서 1등이 되고 싶다는 욕심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말로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부인하지만 사회가 주목받는 1등 이외의 존재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아마도 그런 이유는 The Winner Takes It All 이라는 병리현상 (?)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한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끝없는 경쟁을 통해 생존할 수 있는 냉정한 현실은 승리한 1등만이 주목을 받고 나머지는 아웃사이더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말로는 올림픽이 참가에 의의가 있다고 하지만 막상 세계 신기록을 세우고 1등한 인물에게만 포커스가 맞춰집니다. 하물며 1등만이 살아남는 각종 선거에서 낙선자의 비애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패자의 눈물은 뭉클하지만 영원히 기억되기 힘듭니다

 
군사 분야에서도 이런 법칙은 철저하게 적용됩니다. 아니 전쟁에서 2등이라는 말 자체가 곧 패배를 의미하기 때문에, 어쩌면 그 어느 분야보다도 1등이 되기를 가장 원하는 분야일 수 있습니다. 더불어 원칙적으로 최고의 성능을 갖춰야 채택될 수 있는 군수 관련시장에서 2등이라는 존재는 곧 사라져야 할 대상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軍事에서 2등은 패배와 다름없습니다. ( 항복조인식에 참석한 일본대표 )
 

군수시장의 규모가 크고 경쟁체제를 통한 개방적 무기 획득 시스템을 가진 미국은 통상 새로운 무기를 도입할 때 다양한 참여업체들의 치열한 경쟁을 거칩니다. 당연히 무기를 제조하여 납품하려는 업체들은 그들이 개발하여 생산한 무기가 채택될 수 있도록 엄청난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경쟁을 통해 살아남은 무기만이 제식화 될 수 있습니다 ( B-17 공장 )
 
그렇다보니 각종 무기 획득 프로그램 중 좋은 성능에도 불구하고 미세한 차이로 1등이 되지 못하여 안타깝게 탈락한 경우가 의외로 많습니다. 다음은 미 공군의 각종 전술기 획득 프로그램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경쟁하다가 아깝게 탈락하여 정식으로 태어나보지 못하고 그 운명을 다한 2등들입니다.

 
                            CAX ( 근접 공격기 프로젝트 ) 에서 A-10에 뒤진 A-9
 
                        ATF ( 차세대 전투기 프로젝트 ) 에서 F-22에 밀린 YF-23
 
                         JSF ( 합동 타격기 프로젝트 ) 에서 F-35에 밀린 X-32
 
이들은 The Winner Takes It All 원칙 때문에 단지 제안단계로만 그 생을 마감하였고 박물관이나 기록에서나 그 존재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쉬운 일은 아니지만 패배자도 멋있게 부활한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미 공군의 거대한 프로젝트였던 LWF ( 경량 전투기 프로젝트 ) 에서 F-16에 밀려났지만, 명품 미 해군 함재기인 F/A-18로 환골탈퇴 하여 멋지게 등장한 YF-17가 바로 그런 예입니다.

 
                                          LWF 경쟁에서 탈락한 YF-17
 
사실 1등이라는 존재는 경쟁에서 뒤쳐진 2등 이하의 수많은 존재가 있기 때문에 돋보이는 것이며 당연히 로빈슨 크로우소의 1등은 돋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1등은 그 노력과 실력으로 인정받아야 합니다. 1등이 아니라는 이유로 경쟁에서 뒤쳐지고 있다는 생각은 절대 하지 마십시오. 소수의 1등 이외 이러한 수많은 하나하나의 존재들 또한 모두 소중합니다.  

 
                               YF-17을 베이스로 멋지게 재탄생한 F/A-18
 

혹시 올 한해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습니까? 결코 좌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 대부분이 1등의 영예를 차지한 A-10, F-22, F-35, F-16이지는 않지만, 언젠가는 멋진 모습으로 재탄생하여 비상 할 수 있는 YF-17이기 때문입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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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침(不沈)의 상징이 된 이름
 
 
밀리터리에 대해 관심이 없는 분이라도 살면서 한 번 정도는 엔터프라이즈(Enterprise)라는 군함의 이름을 들어 보셨을 것 입니다. 재래식 동력함인 CV-63 키티호크 (Kitty Hawk)가 2009년 퇴역하면서 미국의 모든 항공모함들이 핵추진함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을 만큼 이제는 의의가 많이 감소하였지만 엔터프라이즈는 최초의 핵추진 항공모함이라는 명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최초의 핵추진 항모인 엔터프라이즈가 취역 40주년을 자축하던 당시의 모습

 

1961년 취역하였으니 벌써 50여년 가까이 바다를 누비고 있는 셈인데, 수차례에 걸쳐 실전 에 투입되었고 한반도에 군사적 위기가 고조되었을 때에도 등장하여 그 위용을 뽐내고는 하였습니다. 무지막지한 건조비용에 놀란 미 해군 당국이 이후 2척의 항공모함을 재래식 동력함으로 만들었을 만큼 엔터프라이즈는 당대를 앞선 괴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엔터프라이즈인 CVN-65가 미 해군 최초의 엔터프라이즈는 아닙니다.

 
                               현재도 현역으로 활동 중인 CVN-65 엔터프라이즈
 

통상 해군의 군함명은 인물명, 지역명, 역사적 사건명 등 여러 사유로 결정되는데 그렇게 작명된 수많은 선명 중에서도 두고두고 기억하여야 할 가치를 지닌 특별한 선명은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한국 해군의 충무공 또는 이순신과 같은 함명이 바로 그런 경우라 할 수 있는데 이런 영예로운 선명을 지닌 군함이 퇴역하면 새로운 군함이 선명을 승계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아마 한국 해군에게 가장 영광스런 이름이라 할 수 있는 이순신함
 
세계최강 미 해군에서는 엔터프라이즈가 그런 경우에 해당 됩니다. 미 해군 함명들중 가장 많이 계승 되어온 이름이며 또한 이름에 걸맞게 많은 전공을 세웠던 선명입니다. 한마디로 미 해군 불침의 영광이라고나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호 엔터프라이즈
1775년 5월 18일 영국으로부터 노획한 70톤짜리 소형 범선입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노획물인데 독립전쟁당시 미국의 국력을 고려 할 때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생각 됩니다.
 
2호 엔터프라이즈
1776년 12월 20일 역시 영국군으로 부터 나포한 25톤 소형 범선입니다.  1호도 그렇지만 나포된 소형선박이기 때문에 그리 오래 사용 되지는 않은듯합니다.
 
3호 엔터프라이즈
1799년 건조된 125톤 범선이며 엄밀히 말해 이 선박부터 엔터프라이즈의 영광이 시작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 차례의 전투에 참여 하였으며, 특히 미국 연안 해적 소탕에 투입되어 40여척의 해적선을 격멸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립니다.

 
                                    적함 트리폴리를 격파하는 3호 엔터프라이즈
 
4호 엔터프라이즈
1831년 건조된 194톤 범선으로 주로 중남미 지역의 작전에 참여 합니다. 이로써 엔터프라이즈는 미국연안을 벗어난 지역에서 명성을 떨치게 됩니다.
 
5호 엔터프라이즈
1877년 3월 16일 건조된 1,375톤 증기기관 겸용 범선입니다. 기관의 장착과 선체 대형화로 좀 더 넓은 지역에서의 작전을 수행 합니다.

 
                                최초로 기관이 장착된 5호 엔터프라이즈 (1877년)

 
6호 엔터프라이즈
1917년 제작된 1 파운드포 1문을 장비한 SP-790급 소형경비정의 이름 입니다. 오랜만에 엔터프라이즈의 전통을 승계한 선박이 등장하였으나 그동안 추세와 달리 소형선박에 명명됩니다.
 
7호 엔터프라이즈
1938년 5월 12일 취역한 항공모함 CV-6입니다. 흔히 엔터프라이즈의 영광이라면 이놈을 생각 할 정도로 너무나 유명한 전공을 세웠으며 전설이 된 함정입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리의 주역이었고 이후 수차례의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고 수차례의 피격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복하고 침몰당하지 않았던 미 해군의 영광이었습니다.

 
                                  미 해군의 전설이 된 7호 엔터프라이즈 CV-6
 
8호 엔터프라이즈
1961년 11월 25일 취역한 최초의 원자력 추진 항공모함 CVN-65입니다. 현재도 현역에서 활동 중이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많은 활약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무시무시한 초대형항모가 커다란 위험에 빠졌던 적이 있었는데 전투로 인한 것이 아니고 안전사고 때문이었습니다.
 
1969년 1월 14일 하와이 근해에서 훈련도중 갑판을 이동하던 차량의 배기가스에 노출되어 과열되었던 로켓이 갑자기 오작동으로 발사되었고 마침 주기되어 있던 다른 함재기를 피폭시켜 대화재가 발생합니다. 화재는 장장 4시간 동안 계속 되었고 다수의 인명피해가 발생한 미 해군의 비전투 항모사고중 하나로 기록됩니다. 옆에 있던 호위함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항모를 밀어서 다음날 진주만까지 안전하게 귀환시킬 수 있었습니다.

 
                                        사고 당시의 CVN-65 엔터프라이즈
 

그런데 공교롭게도 불멸의 항모 CV-6 엔터프라이즈도 태평양전쟁 당시 동일한 해상에서 크게 타격을 입었으나 안전하게 진주만으로 귀항하였던 적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당시 사고가 제2차 대전 때 죽은 일본군의 원혼 때문이라는 괴담도 있었으나 결론은 엔터프라이즈라는 이름은 불침의 아이콘이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CVN-65가 퇴역해도 이 이름을 승계하는 다른 항정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한국 해군의 레전드가 된 참수리 325호
                             (1999년 제1차 연평해전 당시 북한 경비정을 들이받는 모습)
 

미 해군에 비하면 역사가 일천한 우리 해군은 앞에서 언급한 충무공처럼 역사적인 인물 외에는 승계하여 사용할 만큼 전통 있는 함정명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2009년 비록 함정명은 아니지만 함번으로 한국 해군의 전설이 될 자랑스러운 이름이 등장하였습니다. 1999년 발발한 제1연평해전과 2009년 벌어진 대청해전에서 연거푸 대승을 이끈 참수리 325호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대청해전의 승전을 이끈 참수리 325호 장병들
 

325호가 함번이라서 함명이 되기는 곤란한 점이 있겠지만 이미 325호는 한국 해군에게 함번 이상의 의미가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훗날 퇴역하더라도 미 해군의 엔터프라이즈처럼 후속함정에게 승계되어 계속 사용됨으로써 그 용기와 기백이 영원히 알려지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지난 한해 대한민국 해군 여러분 고생이 많으셨고 그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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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복이야기 [끝] 
                    이제는 말 할 수 있다
 

혹시 똘망똘망하던 신입사원 미스터 김이, 평소에 예의바르던 모범맨 이주임이, 골부처같이 묵묵하던 박대리가 갑자기 몸에 탈이 나거나 술 먹고 취하지도 않았는데 한순간에 이성을 잃어버린 것처럼 어떻게 저렇게 바뀔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만큼 완전히 변한 모습을 느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

 
                                  종종 완전히 돌변한 사람들을 보고는 합니다
 

바로 예비군 훈련에 소집된 자원들에게 발견할 수 있는 흔한 모습입니다.  양복이나 작업복만 입혀놓으면, 근무처에서 오다가다 만나게 되면 앞에서 말한 것처럼 흠잡을 데 없이 멀쩡하던 사람들이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 군복만 입혀놓으면 순식간 눈빛이 개심치레해면서 최대한 불량한 모습으로 급속히 변화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멀쩡한 사람이 군복만 입혀 놓으면 순식간에 돌변합니다.
 
따듯한 봄날에 예비군 훈련 중에도 야전상의까지 껴입고도 추워서 몸을 웅크리고 틈 만나면 졸면서도, 막상 식사시간 때가 되면 마치 걸신들린 것처럼 식당을 향해 우사인 볼트를 능가할 만큼 전력 질주하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아시겠지만 군대의 3고가 춥고, 배고프고, 졸립고인데 이것은 예비역이건 현역 ( 특히 고참순 ) 이건 군복만 입혀놓으면 생기는 무시무시한 병입니다.

 
                               군복을 입으면 춥고, 배고프고 졸립니다.
 

이 병의 구체적인 증세는 한겨울에 반바지만 입는 불끈남이라도 군복은 아무리 껴입어도 춥고, 평소에 다이어트하느라 적게 먹는 신중남도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픕니다. 더불어 전날 충분히 잤어도 틈 만나면 졸기 바쁩니다. 거기에 더해 아무데나 침 뱉고 건덩건덩 대며 무기도 제대로 관리하지 않고 지나가는 아줌마만 보아도 자동으로 고개가 돌아가고 틈 만나면 짤짤이를 하려드는데, 이거 참 이상한 증세 아닙니까?

 
                               


그렇다면 군복과 군대 3고 및 자세불량과의 상관관계를 조사하지 않을 수 없는데, 틀림없이 우리군의 전투 능력을 반감시키기 위하여 가상적국의 스파이들이 군복제조과정에 몰래 침투하여 특수한 약품을 첨가한 것이라는 결론에 도출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복을 입었을 때는 허우대 멀쩡한 사람들이 군복을 입고 이렇듯 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전투력을 무력화 시키는 약품이 첨가되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새 군복을 입은 신병 때는 전혀 약효가 보이지 않다가 고참을 거쳐 예비역이 되어 무시무시한 증세가 절정에 이르는 것을 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그 약발이 강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초강력 세제로 빨아도, 무수한 시간이 흘러도 그 약효가 없어지지 않고 잠복하고 있다가 어쩌다 예비군 훈련 때 군복만 입으면 즉시 무서운 병이 도지게 만들어 버립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이 예비군의 본 모습은 아닙니다
 

원래 군이라는 조직은 고참으로 갈수록 전투력이 뛰어나고 예비역은 훌륭한 전략 전투자원이 되는 법인데 이렇듯 군 전력의 중추인 고참과 예비역들의 영혼을 좀먹도록 암약하는 스파이들의 활동이 계속된다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철저하게 막아야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니면 하루속히 군복에 침투한 무시무시한 독극물을 제거하는 해독제를 만들어야 되지 않을까요?

 
          전략 예비전력인 멋진 예비군들은 실제 훈련에 들어가면 진정한 포스가 작열합니다.

 

만일 군 당국에서 힘들다면 이제는 이런 공공연한 군사비밀을 국민들에게 솔직히 공표하여 군복 공장에서 암약하는 간첩을 잡아내거나 해독제 개발에 모든 역량을 결집하여 적극적으로 해결하여야 하겠습니다. 네? 그런데 죽어도 스파이를 못 잡고 해독제도 만들 수 없을 것이라고요? 왜요? 이렇게 증거가 충분한데 왜 못 잡죠?  이상도 하여라 ~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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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복이야기 [ 2 ] 
                 참호전에서 나온 名品 
 

 
저절로 두툼한 외투를 찾게 되는 쌀쌀한 계절이 되었습니다.  신사들과 새침때기 숙녀들 중에 흔히 바바리(Burberry)라고 불리는 코트로 한껏 멋을 내고 종종 걸음으로 갈 길을 재촉하는 분들도 많아졌습니다.  흔히 두툼한 점퍼류의 외투에 비하면 방한 능력이 떨어지지만 미적 감각을 추구하는 정장차림의 멋쟁이들에게 바바리만큼 잘 어울리는 훌륭한 패션소품도 없습니다.

 
                              바바리코트는 여성 정장에도 잘 어울리는 외투입니다.
 

그런데 이런 멋진 외투가 종종 바바리맨으로 불리는 변태들의 도구로 사용되어 사회문제가 되고는 합니다. (딸 키우는 아빠의 입장에서 하루라도 빨리 못된 변태들이 박멸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무리 비싸고 멋진 옷이라도 이상한 목적으로 사용하면 천박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옷이 제대로 된 주인을 만나야 빛난다는 말은 만고의 진리라고 생각됩니다.

 
              학교근처에서 바바리맨을 체포하는 장면이라고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입니다.
                       하루 빨리 저런 못된 변태들이 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바바리는 고유명사입니다.  원래 이런 종류의 의류를 트렌치코트(Trench Coat)라 하는데, 영국의 세계적인 패션 메이커인 바바리社에서 만든 트렌치코트가 우리나라에서는 대명사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상업적 성공을 거둔 제품 중 이런 케이스가 많은데 예를 들어 해당 아이템의 유명제품인 포크레인(Forkcrane)이나 호치키스(Hotchkiss)는 굴삭기(Excavator)와 스테플러(Stapler)의 대명사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영화 카사블랑카에서 바바리사의 트렌치코트를 입은 험프리 보가트
                  아마 트렌치코트가 가장 멋있어 보이는 명장면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
 

그런데 하필 이처럼 멋진 코트에 뜬구름 없이 참호를 뜻하는 트렌치라는 단어가 붙게 되었을까요?  의외라고 생각될지 모르겠지만 현대 도시인 최고의 패션 정장인 트렌치코트는 말 그대로 참호용 군복이었습니다.  오늘날 신사들의 정장이나 소품 중에 의외로 밀리터리와 관계된 것이 많은데 트렌치코트도 그러하며 오히려 다른 소품에 비해 그 역사도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이 어지러운 참호와 멋진 패션 소품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1914년 제1차 대전 초기, 독일의 진격이 프랑스의 마른 부근에서 멈춰 진 후 서부전선은 종전 때까지 지리 한 참호전으로 일관하게 됩니다.  이러한 참호전은 불과 수 백 미터의 전진을 위하여 수십만 군인의 어처구니없는 희생도 마다하지 않았던, 전쟁사에서 가장 잔인하고 한심한 전투의 표본으로 기록되는데 대표적으로 솜전투, 베르덩전투, 이프르전투 등을 들 수가 있습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참호에서 덧없이 죽어갔습니다.
 

참호를 파고 대치한 양측 사이의 땅을 흔히, No Man's Land라고 지칭 할 만큼 그야말로 참호전은 현실에 나타난 지옥이었습니다.  춥고 습한 지옥 같은 참호에 머물며 전투를 벌여야 했던 군인들을 위해 방습 및 보온기능이 있는 군납외투가 납품되었는데 이때부터 이를 트렌치코트라고 불렀습니다.  그중 영국군들이 사용하던 것이 좋다고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나면서 영국군의 트렌치코트는 일약 세계적으로 유명한 외투가 되었습니다.
 

                  습하고 추운 참호에서 싸우는 군인들을 위한 외투가 만들어졌습니다.
 

바바리社외에도 또 하나의 메이커인 아쿠아스텀(Aquascutum)社의 트렌치코트도 상당히 호평이 좋아 당시 영국군 군수납품시장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습니다.  국내에는 바바리가 최고의 브랜드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영국이나 유럽에서는 아쿠아스텀의 트렌치코트도 꽤나 유명합니다.  어쨌든 종전이 된 후 그 기능성 때문에 많은 이들이 트렌치코트를 애용하게 되어 오늘날까지 중요한 패션 의류가 되었습니다.

 
                               바바리사의 트렌치코트를 착용한 영국군 장교
 

오늘날 세계의 멋쟁이들이 외투로 입고 다니는 트렌치코트는 말 그대로 전쟁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대다수 현대인들이 참호전을 치르는 심정으로 트렌치코트를 입고 출근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트렌치코트는 외부에서 활동이 많은 영업사원들이 착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분들의 삶을 보면 세상 살아가는 자체가 참호전 못지않다는 느낌을 받고는 합니다.
 
바바리맨을 검색하다 보니 재미있는 사진이 있어 몇 장 소개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런 우스운 모습과 달리 못된 변태들은 하루 빨리 사라져야 할 사회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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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복이야기 [ 1 ]
                 눈에 띄지 말란 말이야


전쟁 자체가 살상을 피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노력여하에 따라서는 인명의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전쟁을 일선에서 지휘하는 정책 당국과 지휘관들의 역할은 상당히 중요한데, 만일 이들이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한다면 적보다 먼저 제거 되어야 마땅합니다.

 
                 전쟁은 살상을 피할 수 없지만 노력여하에 따라 줄일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면 너무나 컬러풀한 군복으로 멋을 낸 군인들이 일렬로 도열하여 진격과 방어를 하는 장면이 나오고는 합니다. 그런데 이런 시대극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기는 합니다만 너무 적의 눈에 잘 띄는 울긋불긋한 군복을 입은 모습은 사실 상당히 생소합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를 재현한 사진
 

적에게 이쪽의 세력(?)이 크다는 것을 은연중 과시하기 위해서 그랬다는 설(說)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당시의 통신 사정과 관련이 많습니다. 눈과 귀 그리고 전령의 소식으로만 정보를 얻을 수밖에 없는 당시의 지휘관들은 작전을 원활히 구사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아군과 적군을 쉽게 구별하여야 했는데, 그런 이유 때문에 눈에 짤 띄는 군복을 입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를 배경으로 한 시뮬레이션 게임의 화면인데
                 피아를 구분하여 지휘하기 위해 실제같이 형형색색의 군복을 입혔습니다.
 

더구나 당시에는 칼과 창을 함께 사용하였을 만큼 아직까지는 총포의 정확도가 상당히 떨어지고 사거리나 성능도 지금과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부족하였기 때문에, 병력 배치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을 만큼 눈에 잘 띄는 군복을 입어도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더불어 매복이나 기습보다 정면 대결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던 시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한마디로 노출을 시키고 싸워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무기의 성능도 뛰어나지 않아 군복은 그리 커다란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나폴레옹 전쟁 때까지는 이러한 전장의 패션쇼를 그런대로 용서(?)하여 줄 수가 있지만 무기의 성능이 비약적인 발달이 이뤄진 제1차 대전 당시에도 이러한 전통이 그대로 답습되고 있었습니다. 1870년의 보불전쟁이후 최초로 벌어진 전면전이라서 평화를 너무 오래 만끽하였는지는 몰라도 당시의 전쟁 당국자들의 사고방식은 나폴레옹시대에서 멈춰져 있었습니다.

  
                       제1차 대전 당시 울긋불긋한 군복을 입고 돌격하는 프랑스군
                          놀랍게도 100년 전의 전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다음의 사진들은 제1차 대전 당시 각국의 군복입니다. 참호를 넘어 돌격하는 군인들이 입고 있는 눈에 잘 띄는 울긋불긋한 패셔너블한 군복은 적들에게 " 나 여기 있어! 맞춰봐라 ! " 고 알려주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는 설령 그렇게 입어 눈앞에 보여도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는 공격할 방법이 없었지만 이미 시대는 원거리 저격이 가능한 고성능 소총과 기관총이 일선 무기가 되어 있었습니다.

 
                                       제1차 대전 당시의 독일군
                                       제1차 대전 당시의 러시아군
 
                                       제1차 대전 당시의 영국군

                                      제1차 대전 당시의 프랑스군
 

결국 눈에 잘 띄는 멋있는 군복을 입은 병사들은 상대에게 좋은 표적이 되었고 전선을 무수히 많은 피로 적셔내려 갔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이전의 전쟁과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사상자가 많았던 이유에는 이러한 고루한 복식문화의 전통을 가지고 있던 군복도 한 몫 하였다고 감히 단언하고 싶습니다.

 
 

비록 얼마가지 않아 잘못을 깨닫고 허둥지둥 대책을 세우기 바빴지만, 당연한 상식을 깨닫기까지 덧없이 사라진 고귀한 생명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의장대에게나 어울릴 이런 군복을 입혀 군인들을 사지로 몰아낸 당시의 전쟁지도부는 지탄을 받아 마땅합니다. 전쟁은 절대 멋으로 하는 것은 아니고 패션쇼 경연장도 아닙니다. 그런데 혹시 지금도 너무 과거의 전통에 집착하여 이와 유사한 실수를 반복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반문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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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자에게 대든 하룻강아지
 
                                                                
 
아이슬란드(Iceland)라는 나라에 대해 들어 보셨는지요? 대서양의 북극권에 있는 제법 큰 섬나라로 국토의 크기가 대략 우리나라와 비슷하지만 총인구가 불과 30만에 불과한 약소국입니다. 전통적으로 수산업과 관광산업이 이 작은 나라의 기반 산업인데 작년 말 불어 닥친 국제 금융위기 때문에 커다란 타격을 입고 경제적으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아이슬란드의 풍광입니다
 

군사적으로 볼 때도 지상군이 약 120명 정도이고, 경비정이 4척인 해양경비대, 공군은 없으며 헬기만 4대인 그야말로 웬만한 국가의 지역경찰력에도 미치지 못하는 민망한 수준입니다. 따라서 1949년 NATO 창설 12개국의 일원이었을 만큼 국가의 방위를 대외 동맹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습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아이슬란드의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본인들 의사와 상관없이 국제 동맹 체제에 가담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작지만 정규군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PKO 활동 중인 아이슬란드 여군)
 

아이슬란드는 징검다리처럼 유럽과 북미를 연결하는 대서양 항로 한가운데에 위치한 지리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데 제2차 대전 당시에 공식적으로는 중립을 유지하였음에도 영국과 미국에 의해 군사적으로 점령당하였을 정도였습니다. 대서양을 통하여 생명선을 유지하고 있던 영국과 바다를 건너가 유럽에서 싸워야 할 미국에게 아이슬란드의 중립 선언은 그리 중요한 문제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제2차 대전 당시 아이슬란드 산스케이드에 주둔했던 미군
 

지리적으로 미국과 소련의 중간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1986년 냉전체제의 해체를 예고한 레이건과 고르바초프의 역사적인 회담이 열린 곳이 바로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빅(Reykjavík)이었을 만큼, 냉전 시기에는 미국이 소련을 감시하기 위한 전략 시설물들을 이곳에서 비밀리에 운용하였고 주변 해역에 이를 역 감시하기 위한 소련의 함대가 수시로 출몰하고는 하였던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냉전을 허물기 시작한 역사적인 1986년 레이캬빅 미소정상회담
 
이처럼 군사적으로 자위를 행사하기에도 터무니없이 작은 초미니 국가가 지난 1976년 영국에 일전불사를 외치고 나왔던 적이 있었습니다. 영국이 아무리 늙은 사자(영국의 상징이 사자)이지만 건방지게도 하룻강아지가 사자에 덤빈 형국이었습니다.  전쟁이 벌어지면 영국이 아이슬란드를 요리하는 데 불과 반나절도 걸리지 않겠지만 영국은 곤혹스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아이슬란드 인근으로 출동하는 영국 구축함
 

한마디로 초등학생이 격투기 챔피언에게 싸움을 걸었다고 결투를 벌일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영국의 입장에서는 한마디로 세계의 이목이 두려웠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선언한 아이슬란드도 자신들이 이길 가능성이 전무 하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지만 결코 장난으로 영국과 대결하려 하였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영국에게는 극히 일부지만 한마디로 아이슬란드에게는 모든 것이 걸린 문제였습니다.
 

                아이슬란드는 사자에게 대든 하룻강아지였지만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분쟁은 1976년 초 아이슬란드가 선포한 200마일 배타적 경제수역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영국 트롤 어선단이 아이슬란드의 선언을 무시하고 수역 안에서 조업을 계속하자 이를 쫓아내기 위해 아이슬란드 해양경비대가 출동하였고 반대로 영국해군이 자국 어선단 보호를 명분으로 군함들을 출동시켰습니다. 열 받은 아이슬란드는 펄펄뛰며 영국과 단교하고 전쟁 일보직전까지 갔지만 노르웨이의 중재로 간신히 실전은 면하게 됩니다.

 
                              영국의 어선을 밀어내는 아이슬란드 경비정
 

그런데 이것도 처음이 아니었고 이미 1958년과 1972년에 두 차례에 걸쳐 있었던 충돌의 연장이었습니다. 그때마다 아이슬란드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고 영국과 처절히 맞섰습니다. 아이슬란드가 영국해군을 상대하기 위해 동원한 장비는 어선을 개조한 작은 보트였을 뿐이었지만 거친 북해의 바다위에서 영국의 구축함들과 당당히 대치하였습니다.
 

                       대구는 아이슬란드가 양보할 수 없는 생명선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아이슬란드 근해에서 무슨 고기가 잡히기에 이렇게 나라의 운명을 걸고 전쟁까지 불사하였던 것이었을까요? 바로 유럽인들에게 최고급 어종에 속하는 대구(Cod)때문 이었습니다. 아이슬란드 근해는 한랭어종인 대구가 우글거리는 황금어장인데 앞에서도 언급하였던 것처럼 아이슬란드에서 어업은 국가의 생명선이기 때문에 이처럼 전쟁 불사까지 외치고 나왔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바다를 지키는 것은 결코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독도 근해에서 일본 순시선과 대치중인 해양경찰대 경비함정들)
 

결국 원만하게 타협이 이루어졌지만 혹자의 경우는 만일 1970년대 영국이 아니라 제국주의 시대였다면 과연 아이슬란드의 생존을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무모한 만용이었다고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나의 모든 것을 누군가 빼앗으려든다면 과연 가만히 있어야 하나요?  우리나라가 아이슬란드만큼 작은 나라는 아니지만 적어도 국익을 지키기 위한 노력만큼은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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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자냐 ? 호랑이냐 ?
  
 
사람도 그렇지만 무기도 이름이 있습니다.  통상 개발당시부터 명칭이 부여되고는 하는데 보통의 경우 개발자의 편의대로 이름이 지어진 후 본격적으로 제식화되면서 군 당국에서 정식으로 제식명(Code Name)을 부여합니다.  예를 들자면 제2차 대전 당시 독일육군이 개발하던 로켓 중 개발과정에서 부호 순서에 의거 A-4로 불린 놈이 이후 실전배치 되면서 정식으로 V-2로 명명되었습니다.

 
                          독일의 비밀병기 V-2는 개발 중 A-4로 불리어졌습니다.
 

대부분의 제식명은 알파벳 약자와 숫자의 조합으로 이루어지고 이와 더불어 별도의 별명(Nick Name)이 붙는 경우가 많은데 별명은 스스로 붙일 수도 있고 아니면 타칭으로 불리 우는 경우도 있습니다.  특히, 냉전시기에 소련 무기의 경우는 서방에서 분류하기 편하게 자의적으로 이름을 붙였는데 이를 흔히 나토코드(NATO Code)라고 합니다.  때문에 MiG-25 Foxbat처럼 그럴듯한 이름도 있지만 MiG-19 Farmer와 같이 무기로써는 조금 황당한 별명도 있습니다.
 

        Foxbat (上) 같은 멋진 경우도 있지만 Farmer (下) 처럼 황당한 타칭도 있습니다.
 

무기는 그 성격상 대부분의 애칭이나 별명이 강인한 인상을 주는 명칭에서 따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이 자연현상일 수도 있고 ( ex-Tornado ), 형이상학적 인 것 ( ex-Phantom ) 일수도 있으며, 지명이나 ( ex-Iowa ) 인명 ( ex-Washington ) 일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곤충명 ( ex-Hornet ) 인 경우도 있으나 아마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은 사납고 용맹한 동물명 인 것 같습니다.
 

                                  자연현상인 Tornado에서 명칭을 딴 전폭기
 

구체적인 통계나 자료를 가지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니지만 식육목(食肉目) 고양이과(猫科) 포유류가 무기의 명칭으로 많이 사용되는 것 같습니다.  독수리 같은 맹금류의 경우도 무기명에 많이 쓰이기는 하지만 대부분 군용기의 애칭으로 쓰이는 반면 맹수들인 육식 포유류의 경우는 지상, 수상, 공중 가릴 것 없이 중구난방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강인한 고양이과 맹수들이 무기명에 많이 쓰입니다.
 

식육목 고양이과 포유류 중에서 가장 용맹한 놈들이라면 사자호랑이를 들 수가 있습니다.  이전부터 ‘호랑이와 사자가 싸우면 어느 놈이 이길까?’ 하는 등의 선문답이 많았지만 사실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이놈들이 워낙 맹수들이라 흔히 ‘동물의 왕자’라고는 하지만 아프리카 코끼리와 이놈들이 싸운다면 사실 상대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호랑이와 쌍벽을 이루는 사자
 

그런데 특이한 것은 호랑이나 호랑이 파생어 이름을 붙인 무기들은 많은데 비하여 사자와 관련하여 명명된 무기는 찾기가 힘듭니다.  제가 기억력이 나쁘고 아는 것이 변변치 못하여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Tiger 로 명명된 것 중 쉽게 생각나는 것만 해도 독일의 6호 전차, F-5E 전투기,  F7F ( Tiger Cat ) 전투기, 국산 자주 대공포 비호, 유로콥터 EC-505 ARH 등등이 떠오르는데 반하여 사자로 명명된 무기는 생각나는 것이 IAI의 Kfir 정도 밖에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Tiger 라고 불리는 놈들 ( 6호 전차, EC-505, F-5E )
 

왜 그럴까요?  흔히 막상막하의 용맹성을 가졌다고 생각되는 두 놈 중 호랑이가 더 많이 쓰이는 이유가 아프리카 초원에서 활동하던 사자보다는 유라시아 대륙을 터전삼아 활동하던 호랑이를 더욱 많이 보고 접하여 왔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대부분 현대적인 무기의 개발국들이 유럽 또는 유럽계가 주축인 미국인데 반하여 사자의 활동무대인 아프리카에서 개발 된 현대무기가 전무하다시피 해서 생긴 결과가 아닐까요?
 

               오랜 기간 사자가 밀림에서 사는 것으로 막연히 관념화하여왔는데
          그것은 아프리카가 제대로 알지 못할 만큼 먼 곳이라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뭐 확실한 근거나 객관적인 자료 및 통계적인 분석을 가지고 하는 이야기냐구요 ?  물론 절대 아닙니다.  그냥 august 의 믿거나 말거나 입니다. ^^  여담으로 사자하면 일본 애니메이션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데스카 오사무 (手塚治蟲 1928~1989) 의 ‘정글大帝 (한국명 밀림의 왕자 레오)’ 가 생각나는데 한마디로 잘못된 표현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자는 밀림에 살지 않고 초원 ( 사파리 ) 에서 산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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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가 뭐 어때서 ?
 
뭐 그 이유야 다들 아시는 것처럼 우리나라에서 금기시 되는 숫자가 4입니다.  국군도 끔찍이 이 글자를 피해 다닙니다.  그런데 원래부터 4자를 피하였던 것은 아니었고 창군초기였던 1948년 현지에 주둔했던 제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된 이른바 여순반란사건이후 부대 단대호에서 4자를 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국군에서 4는 터부시되는 숫자입니다.
 
어쨌든 우연인지는 모르겠으나 결국 전통적으로 싫어하는 숫자인 4가 이 사건이후부터 국군에게 더욱 터부시 되는 결정적 이유가 되었습니다.  현재 연대급 이상의 부대는 말할 것도 없지만 그 이하 제대도 4소대, 4중대라는 명칭은 피하고 화기소대, 화기중대 등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극히 예외적인 경우라고 한다면 무기 제식번호에서 K-4를 부여받은 유탄발사기 정도라고나 할까요?


 
                                            K-4 유탄발사기


 
북한의 경우는 현재 4사단이 존재하는 것처럼 4자에 대한 금기는 없는 것 같은데 18은 거부하고 있습니다.  발음이 욕 같기도 하지만 한국전당시 18사단이 한 번도 이겨 본적이 없는 굴욕의 부대였기 때문에 그랬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런 사실이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1952년 북한군 18사단은 해체된 이후 아직까지 재편성되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북한군에게 18은 패전의 상징입니다.


 
중국도 우리와 같은 이유로 4자를 매우 싫어합니다.  반면 재물을 뜻하는 글자와 발음이 같은 8은 최고의 숫자로 꼽힙니다.  아파트도 8층이면 프리미엄이 붙고 2008년 8월 8일 8시에 올림픽 개막식을 시작하였을 정도니 더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숫자에 대해 호불호가 뚜렷한 중국이지만 군대의 단대호에는 4자가 들어가는 부대가 의외로 많습니다.  이런 점을 보면 국군보다 금기 사항은 덜 한 듯합니다.

 
           특정일시에 올림픽을 열 정도로 8에 대한 중국인들의 애착은 남다릅니다.


 
반면 서양에서는 8이나 13이 금기 사항인데 종교적인 이유 때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중 군사 문화와 관련해서 13은 정말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1962년 제정된 통합미군 군용기 제식번호 체계 중 전투기 일련번호에서 13이 공란으로 남아있는데 일부로 피하였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특히 미국은 아폴로프로젝트 중 유일하게 13호가 실패하면서 날아다니는 물체에 13을 붙이는 것을 고의적으로 피한다는 말까지 전합니다.

 
                                서양에서도 금기시 되는 숫자가 있습니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당연히 4자를 피해 다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미 해군의 전투기들을 보면 우리가 금기시하는 4자 제식번호가 붙은 놈들이 유독 베스트셀러가 많습니다.  베스트셀러가 최고의 품질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보편타당하게 애용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우리와 달리 미해군에게는 4가 너무나 사랑스러운 행운의 숫자인 듯합니다.  다음은 미해군에게 전설이 된 4들입니다.


 
                              태평양 전쟁 초기 미해군의 사역마 F4F Wild Cat
 
                         사상 최강의 프로펠러 전투기로 명성을 떨친 F4U Corsair
 
                           불멸의 도깨비 F4H ( 신제식 번호 F-4B ) Phantom II
 
                   베트남 / 중동 / 포클랜드에서 종횡무진 활약한 A-4 Sky Hawk
 
                          이제는 지나간 역사로 남게 된 풍운아 F-14 Tomcat
 


이것을 보면 결국 시대와 지역에 따라 선호하는 숫자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떠한 특정 숫자가 당사자에게 행운인지 불행인지는 사람들이 심정적으로 정하여놓은 기준에 따라 그렇게 생각하는 것뿐이지, 숫자 때문에 행운이 오고 불행이 닥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을 뿐 입니다.  혹시 숫자에 대한 편견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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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들이 무기를 알아?

 
요즘같이 상업제품이 범람하는 시대에 商品들의 라이프 싸이클은 갈수록 점점 짧아지고 있습니다.  멀쩡한 핸드폰이 실증이 난다는 이유로 버려지는 것처럼 나온 지 얼마 안 돼는 제품이 단종 되는 경우를 허다하게 봅니다.  이런 이유로 신제품이나 기술개발에 게을리 한 기업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힘들게 되었고 그만큼 경쟁이 치열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위에서 아래로 발전하는데 한 세대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전시나 냉전시대에 비해서 그 속도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지만 무기의 발전 속도 또한 대단합니다.  무기의 성능이 적이 보유한 것보다 뒤진다면 그것은 곧바로 패배를 의미하기 때문에 최신기술을 접목한 무기의 발달은 상업제품의 발달속도를 능가하였지 결코 뒤쳐지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정밀타격 병기들의 경우만 해도 10년의 간격을 두고 발생한 걸프전이라크전을 비교할 때 엄청난 차이를 보여줄 정도였습니다.


                        Surgical Strike 의 전형이 된 Tomahawk 미사일 발사장면

 
이토록 살벌한 경쟁에서도 길게는 몇 십 년의 명성을 유지하는 스테디셀러들이 있는데 참으로 대단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브라보콘, 박카스, 새우깡, 초코파이 같은 제품들은 무수한 변혁의 시대에도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데 지난 세월만큼이나 이제는 어느덧 해당 아이템의 대명사가 되다시피 하였습니다.


                                 우리주변에서 볼 수 있는 스테디셀러
 

그런데 항상 최신을 추구하는 무기에서도 이런 놈이 있습니다.  흔히 캘리버 50 ( 구경 12.7 mm ) 이라 불리는 M-2 중기관총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이놈이 처음 세상에 선보였을 당시에는 미사일이라는 단어가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고 요즘 보병들의 표준 제식화기인 돌격소총도 만들어 지기 훨씬 이전이었습니다.


                                                  M-2 중기관총
 

제1차 대전 말 항공기에 장착한 M-1918 기관총을 개량하여 탄생한 것이 M-2 중기관총인데 최초에는 수냉식이었으며  M-1921 이라는 제식명이 붙게 됩니다.  그러던 중 이놈이 항공기뿐 아니라 전차 같은 전투차량에 장착해도 효과가 좋은 것으로 판명이 되어 1933년 M-2 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M-2 의 원형인 수냉식 M-1921 기관총
 

이 후 한 번 더 변신을 하여 공랭이 가능하도록 총신을 강화시켜 지속 사격을 할 수 있는  M-2 HB ( Hevy Barrel )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제2차 대전은 물론 이거니와 한국전, 월남전, 중동전을 거쳐 현재까지도 실전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국군이 제식화하여 사용 중인 K-6 중기관총도 M-2 를 베이스로 하여 개량한 형태입니다.

 
                                       국군이 사용 중인 K-6 중기관총
 

이놈은 일반 보병들이 사용하기에는 무겁고 총열 교환을 자주 하여 주어야 한다는 약점이 있으나, 최초에 너무 잘 만들어져서 더 이상 개선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가 나올 만큼 시공을 초월하여 오래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다못해 최신 무기의 습득에 남다른 욕심이 있는 미군당국도 무게를 줄여 보는 등 개량 형 개발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하였을 정도였습니다.
 

                             제2차 대전 당시는 물론 현재도 사용 중인 M-2
 

복엽기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시절에 만든 기관총이 80여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최 일선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움을 넘어 경이의 대상이라 할 것 입니다.  오래전 TV 광고에서 노인이 " 니들이 게 맛을 알아? "  한 것처럼 이놈이 생명체였다면 최신무기라고 뽐내는 놈들 앞에 가서 이렇게 외쳤을 것 같습니다.  " 니들이 무기를 알아? "  혹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오래된 것을 무조건 무시하고 있지는 않았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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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설로 남은 별
 


1960년 9월 26일, 홈구장인 펜웨이 파크(Fenway Park)에서 홈팀 보스턴 레드삭스( Boston Red Sox)가 볼티모어 오리올즈(Baltimore Orioles)와 경기를 벌이고 있었는데 바로 이 경기를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 42살의 老타자가 타석에 들어섰습니다.  그가 날카롭게 휘두른 방망이에 공은 커다란 궤적을 남기고 홈런이 되었고 모든 관중의 기립환호와 아쉬움 속에 통산 521홈런을 기록한 이 타자는 야구복을 벗고 은퇴하였습니다.

 
                          마지막 타석을 홈런으로 장식하고 老타자는 은퇴합니다
.

 
바로 메이저리그의 전설로 남은 위대한 야구선수 테드 윌리엄스(Ted Williams 1918~2002)의 은퇴 경기 당시의 장면입니다.  1941년 시즌 그가 기록한 0.406 (456타수 185안타)의 타율은 역대 8위의 기록이지만 이 기록을 마지막으로 메이저리그에서 아직까지 4할 대 타율 기록이 나오지 않는 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위대한 야구선수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전설의 강타자 테드 윌리엄스


 
20년간 오로지 보스턴 레드삭스 소속으로 있었으면서 통산 0.344타율, 2654안타, 521홈런, 1839타점의 놀라운 성적을 기록한 그를 평가할 때 반드시 따라다니는 하나의 가정이 있습니다. 바로 전쟁에 참전하지 않고 계속하여 운동을 하였다면 과연 어떤 기록을 남겼을까 하는 가정입니다.


 
                                 그의 백넘버는 당연히 영구결번입니다.

 
윌리엄스는 선수생활 중 제2차 대전과 한국전쟁에 현역으로 참전하여 무려 5년이라는 공백 기간이 있었습니다. 호사가들이 컴퓨터로 분석하여보니 공백 기간 동안 그가 선수생활을 계속하였을 경우 222개의 홈런을 더 쳐냈을 것이고, 그렇다면 통산 743개의 홈런을 기록하여 행크 애런보다 앞서 베이브 루스의 통산 714홈런 기록을 경신했을 것이라고 분석하였을 정도였습니다.
 

                       베이브 루스의 기록을 먼저 갱신하였을 지도 몰랐습니다.


 
역사적인 4할 타율을 기록한 그는 이듬해인 1942년 타율 0.356, 36홈런, 137타점으로 타격부문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였으나 시즌 도중 전쟁에 참전하라는 영장이 떨어졌습니다. 그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시즌을 끝마치기 전에 해군에 입영신청을 하고 해병대 조종사로 태평양전쟁에 참전하여 맹활약하였습니다.


 
                          1942년 시즌을 완전히 마치지 못하고 참전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3년간의 공백 끝에 1946년 야구장으로 돌아온 윌리엄스는 타율 0.342와 38홈런, 123타점의 맹타를 휘둘러 공백 기간의 우려를 무색하게 만들어 버렸고 1947년에는 리그 MVP에 오르는 등 참전 이전과 다르지 않은 훌륭한 기량을 팬들에게 선보였습니다. 통상 군복무기간 동안 경기력이 하락된다고 여겨지는데 그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은 이야기였습니다.


 
                       제2차 대전 후 야구장으로 복귀하여 변함없이 맹타를 날립니다.


 
그런데 절정기의 기량을 선보이던 1952년, 그에게 또 한 번의 징집영장이 전달되었습니다.  즉시 현역으로 복귀하여 한국전에 참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에도 윌리엄스는 망설임 없이 현역으로 다시 복귀하였고 1952년 겨울 "이번에는 죽을지도 모른다." 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듣도 보도 못한 극동의 한국으로 떠납니다.

 
                          다시 한국전에 참전하여 최전선에서 활약합니다.


 
이전 참전 때도 그랬지만 윌리엄스는 유명세를 이용하여 후방에서 시간이나 보내는 그런 군인이 아니었습니다.  1953년 2월 16일 평양 남쪽 폭격작전에서 그의 애기가 공산군의 대공포에 맞아 추락당할 절체절명의 위기를 당하기도 하였으나 수원기지까지 날아와 동체착륙을 하였을 정도로 군인 윌리엄스대위는 최전선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던 역전의 용사였습니다.


 
           1999년 보스턴에서 열린 올스타전의 히어로는 바로 테드 윌리엄스였습니다.
 

      메이저리그의 현역 올스타들조차 그의 옆에 한 번 서 보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1953년 휴전까지 총 39번의 출격작전을 수행한 그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레드삭스의 중심타자로 맹활약하였습니다. 윌리엄스는 수차례의 참전기간에도 기량이 전혀 녹슬지 않았고 1957시즌과 1958시즌에 리그 타격왕에 올랐는데 1958시즌의 40세 최고령 타격왕 기록은 앞으로도 깨지지 어려운 불멸의 기록입니다.

 
                           경기 전 추모행사와 펜 웨이 파크에 서있는 동상
 

2002년 7월, 그가 84세로 숨을 거두자 메이저리그는 경기 전 그를 추념하는 행사를 가지고 게임을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기록한 놀라운 성적도 그를 신화의 반열에 올려놓는데 결코 모자람은 없지만 거기에 더해서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모범적인 태도로 인하여 테드 윌리엄스는 모든 미국민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대중적인 인기는 물론 진심어린 존경까지 받을 수 인물이 우리나라에도 많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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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참화를 겪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후 연합군은 베를린으로의 진격을 개시 합니다. 이때 독일은 영국 본토와 가까운 벨기에의 해변 도시에서 다량의 V1와 V2를 영국으로 발사하였고 연합국은 이를 격멸하고자 공습을 단행 합니다. 덕분에 벨기에의 곳곳은 연합국의 폭탄에 의하여 멍들게 됩니다. 하지만 벨기에의 영토가 아작 난 것은 제3제국의 패망을 목전에 둔 시점에서 보여준 히틀러의 똥고집에 의해서입니다.


                 전쟁 말기에 영국을 공격하기 위한 독일의 비밀병기가 벨기에에서 발사됩니다.


결과적으로 독일의 패망을 6개월 앞당겼다는 발지 전투(Battle of Bulge)때문입니다. 제2차 대전 사가들로 부터는 독소전의 다른 전투에 비해서 과장되게 알려 졌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서부전선에서 독일과 연합군의 피 튀기는 마지막 대회전이 벌어진 곳은 바로 약소국 벨기에 영토입니다. 그래서 전쟁 말기에 마지막으로 쑥대밭이 됩니다.


                    벨기에 영토에서 벌어진 발지 전투는 서부전선 마지막 대회전이었습니다.


어쨌든 전쟁은 독일의 패망으로 끝나고 벨기에는 해방이 되나 침략도 해방도 자국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단지 침공로에 놓였다는 이유만으로 국토가 망가지고 국민은 피폐해 집니다. 그것도 30여 년 동안 두 번씩이나 같은 강대국 때문에 말입니다. 아니 처음부터 주변 강대국 사이에서 벨기에의 안위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역사에 비추어


지난 우리역사를 돌아볼 때 벨기에가 겪었던 참화와 비슷했던 치욕의 역사가 계속 반복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마다 목적은 항상 우리를 침탈하는 것이었지만 침략자들의 대외적인 명분은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떠들곤 하였습니다.


                                       임진왜란에서 일본의 명분은 정명가도였습니다.


몽고가 일본진출을 계획 하였을 때도 고려를 짓밟고 황폐화 시켰습니다. 전혀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말입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내세웠던 명분은 정명가도(征明假道)였습니다. 이런 교활한 명분하에 우리는 침략을 받았고 이를 구원한다며 명과 일본은 우리나라 국토를 황폐화시키며 백성을 수탈하며 신나게 피를 흘립니다.


                                청일전쟁 당시 평양전투에서 포획된 청군 포로


근대에 들어와 청과 일본은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제국주의 전쟁을 우리 땅에서 벌입니다. 이 역시 우리와의 의지와 상관없이 말입니다. 역시 황폐화 되는 것은 우리 국토이고, 수탈되는 덧은 우리 민중이었습니다. 우리가 침탈되었을 때의 공통점은 우리 스스로 지킬 힘이 없었을 때나 스스로 태평성대라고 생각하고 국방을 게을리 하였을 때라는 점입니다.
                           

현재의 벨기에와 우리

벨기에는 두 번의 전쟁 결과 어정쩡한 중립이 냉혹한 국제정세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음을 깨닫고 독일과 프랑스로 부터의 위험을 제거하고자, 2차 대전 후 오히려 냉전체제에 능동적으로 참여합니다. NATO 본부를 자국에 유치한 것만 보아도 벨기에의 의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벨기에는 어설픈 중립을 포기하고 국제질서에 능동적으로 참여합니다.
                                       (벨기에에 있는 NATO  본부)


벨기에는 지난 세기에 있었던 두 차례의 연속된 경험으로 독일이나 프랑스로 부터의 침공이 있을 때 자력방위가 힘들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고 소극적인 중립이 아닌 적극적인 동맹에 참여 하여 국가의 안보를 지키려 하였던 것이었습니다.


                               힘을 기르지 않고 국제 질서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체
                                       말로만 평화를 지킬 수 는 없습니다.


우리가 벨기에만큼 인구나 국력이 작은 나라는 아니지만 우리 주변의 국가들이 무시할 수 없는 강대국임을 깨닫고 말만 앞서는 어설픈 자주를 외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국제적 힘의 균형을 이루는 데 참여하여 그 일익을 담당하여야 할 것이며 한편으로는 우리 스스로를 충분히 자위 할 수 있는 잠재적인 능력을 키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침략을 당했을 때 "나가 싸우란 말이야! 제발"이라는 절박한 호소는 냉정한 국제 현실에 절대 통용 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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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국의 이름으로


독일과 이탈리아의 통일이후 현재까지 유럽의 역사를 살펴보면 5개의 강국이 있음을 알게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후 미국과 소련이라는 초강대국의 등장과는 별개로 이들 5개국은 아직까지도 역사의 주역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열거하면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그리고 이탈리아인데 이들은 서로간의 견제와 균형을 이뤄가며 이합집산을 하였고, 20세기 들어 발생한 두 차례 세계대전의 주역이기도 합니다.


                                   영국의 제국주의 침탈을 풍자한 독일신문의 삽화
                           하지만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것과 같았습니다.


흔히, 세계대전을 이야기 할 때 몇 개국이 참전하고 몇 명이 죽고 등의 통계자료가 나오곤 하는데, 실제 위에서 언급한 국가들 외에 자의적으로 대전에 참전한 국가는 극히 들물다고 단언 할 수 있겠습니다. 굳이 예를 든다면 지금은 사라졌으나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강대국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정도였다고나 할까요? 나머지 국가들은 이들 강대국 간의 이합집산에 따라 마지못해, 어쩔수 없이 전쟁의 폭풍에 휘말리게 되었다고 생각 합니다.


                                        지금은 그저 그런 중부유럽의 약소국이지만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유럽의 강대국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훈련모습)


특히, 독일과 독일의 東西에 접하여 있던 러시아와 프랑스는 이러한 충돌의 중심이었으며, 어쩔 수 없이 이들 사이에 끼인 여러 약소국가들이 전화에 휘 말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동유럽 쪽은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 그리고 냉전종식 후 지도제작 업자들이 호황을 맞을 정도로 국가 및 국경의 변동이 심하여 딱히 어떤 나라가 원하지 않는 전화의 피해를 많이 입었나 판단하기조차 어려운 점도 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직전의 유럽지도
                                       중동부 유럽이 오늘날과 차이가 많습니다.


서부전선으로만 시야를 돌려보면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벨기에, 네덜란드, 록셈부르크의 3개국이 있는데 이들 국가들은 고래싸움에 새우 등이 터지는 꼴로 20세기에 들어 원하지도 않는 참화를 입게 됩니다. 그중 양차 세계대전에서 그들의 의사와 아무런 상관없이 최대의 격전지가 되었던 약소국 벨기에(Belgium)의 눈물에 대해 몇 회에 걸쳐 알아보고자 합니다.


예고된 전쟁터


제1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독일은 언젠가 보불전쟁의 패전국으로 이빨을 갈고 있던 프랑스와 일전이 있을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준비성 강한 독일인답게 구체적인 對프랑스전쟁 계획 또한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른바 슐리펜 계획(Schlieffen Plan)입니다. 최단시간(계획상 6주) 내 프랑스를 쳐부수고 난 후, 러시아를 징벌한다는 한마디로 내륙국 독일이 가장 회피하고 싶은 양면 전쟁 거부책입니다.


                           죽기 전에 장차 독일의 전쟁 해법을 연구했던 참모총장 슐리펜


그런데 이 계획은 독일주력이 독불국경에서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고 중립국인 벨기에를 돌파하여 프랑스 북부로 진공 후 파리를 대포위함으로써 프랑스의 조기 항복을 유도 한다는 점이 핵심 이었습니다. 단지 독불국경보다 벨기에가 평야지대인 관계로 대규모 부대의 기동이 용이하여 파리에 쉽게 근접 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영세중립을 표명하던 약소국의 주권을 철저히 무시한 상태로 계획은 입안되었습니다.


                      슐리펜 계획에 의거 독일은 벨기에를 거쳐 프랑스를 침공할 예정이었습니다.


즉, 전쟁이전 부터 약소국의 주권은 전혀 안중에도 없이 단지 침공의 편이만을 위하여 이나라를 전쟁터로 삼을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인데 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어쨌든 사전에 치밀하게 수립되어 있던 슐리펜 계획에 의거 독일은 1914년 8월 3일 프랑스에 선전포고와 함께 벨기에를 침공합니다.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을 점령한 독일군



프랑스, 러시아와 군사적 협력을 약속한 3국 협상국이기는 하였으나 최초 전쟁발발 당시에는 중립을 표명하였던 영국이 1914년 8월 4일 독일에게 즉각 선전포고를 하게 되었던 명분이 바로 중립국 벨기에를 독일이 치범한 것을 이유로 들었을 정도로 당시 세계는 독일의 기습적인 침공에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였습니다.   

(august의 전쟁사 시리즈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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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Holly Wood)는 잘 아시다시피 로스앤젤레스 인근에 있습니다. 1911년 네스터(Nester)라는 영화사가 처음으로 영화촬영소를 건설한 것을 시초로 하여 이곳의 영화산업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전에는 뉴욕 같은 동부지역에서 많은 영화촬영이 이루어졌으나 갈수록 할리우드의 영화제작 여건이 좋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그 명성을 얻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영화산업은 세트를 벗어나 대규모 해외로케나 컴퓨터그래픽 등을 많이 이용하여 영화를 제작하는 관계로 더 이상 할리우드의 촬영장만을 고집하지는 않지만, 아직도 이곳 인근에 많은 영화관련 산업체가 포진하고 있으며 그 명성 때문에 할리우드 자체만으로도 세계적인 훌륭한 관광지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대작 전쟁영화들도 할리우드에서 제작되었습니다.


오래전 미국에 갔을 때 세계 영화산업의 메카라는 이곳에 가 본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을 안내하던 분이 이런 질문을 하더군요.

안내인   august님 왜 할리우드에 영화산업이 발달 하였을까요?
august  글쎄요?... 혹시, 대도시 인근이어서 사람이나 돈을 구하기 편리해서요?

안내인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august   그게 뭡니까?

안내인    바로 비가오지 않는 건조한 이곳의 날씨 때문입니다.
august   날씨요?

안내인    영화를 제작하는데 있어 맑은 날시가 많아야 촬영하기가 좋습니다. 촬영스케쥴을 잡아 놓았는데 비가 오면 계획이 어긋날 수밖에 없습니다. 날씨가 맑더라도 비 오는 장면은 물을 뿌려 인공으로 쉽게 만들 수 있지만, 반대로 비가 오는 날씨를 맑게 할 방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august    아! 그렇군요. (믿거나 말거나) 


                                        비하면 생각나는 명화 Singing In The Rain


영화정도는 소방호스를 이용하여 비 오는 장면을 연출 할 수 있지만 오늘날의 과학 기술은 인공강우를 이용하여 극심한 가뭄지대에 비를 만드는 것이 일부 가능 할 정도 (물론 많은 전제 조건이 따르기는 합니다만) 까지 발달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할리우드의 존재 이유처럼 오는 비를 멈추게 하는 것은 그리 쉽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비 오는 장면은 쉽게 연출할 수 있지만 반대로 비가 오면 촬영이 취소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공기후의 연구와 실용에 있어 앞선 나라가 러시아인데 처음에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연구하였다고 합니다. 전사를 살펴보면 날씨로 인하여 작전 차질을 겪은 예를 찾아보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닐 만큼 기후와 군사는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군사 분야 또한 날씨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러시아-소련이 그 동안 비밀리에 갈고 닦은 날씨 제어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던 적이 두번 있었는데, 두 번의 경우 모두 세계인의 주목 속에 러시아에서 개최 된 국제적인 행사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서였습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개막식 당시 스타디움 인근만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1980년 7월 19일 소련의 수도인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22회 하계올림픽이 개최 되었습니다. 개막식 당일 일기예보로는 모스크바에 폭우가 쏟아지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소련 당국의 비밀작전에 의거 주경기장인 레닌스타디움 반경 500m 이내에 내리는 폭우를 개막식이 진행되는 동안 막아버립니다. 개막식이 끝난 후 폭우가 쏟아 졌다고 하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이러한 소련의 과학기술은 극비에 붙여졌습니다.


                         2005년 승전 60주년 기념식에서도 행사장 인근의 비를 멈추었습니다.


지난 2005년 5월 9일 러시아는 옛 영광을 재현하고자 모스크바에 세계 54개국 정상들과 VIP 들을 초청한 가운데 제2차 세계대전 승전 60주년 기념행사를 성대히 개최하였습니다. 간간히 비가 쏟아지는 날씨에 호스트인 푸틴 대통령 내외가 우산을 쓴 채 내외귀빈을 맞이하였는데 행사의 절정인 군사 퍼레이드가 개시 되자 특수 화학약품을 살포할 11기의 비행기가 투입돼 모스크바 상공의 비구름을 없애는 작전을 실시하여 성대히 기념식을 치룹니다.


                        이런 기술이 복지가 아닌 살상의 도구로 사용된다면 무서운 일이겠죠?




위와 같이 비록 특정 행사를 위해 강우를 제어하는 기술이 선보이기는 하였지만 이러한 기술이 군사적인 부분이 아니고 인류의 복지를 위해서 광범위하게 쓰일 수 있는 시대가 오면 참으로 좋은 일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살상을 위한 도구로 이용된다면 상당히 무서운 일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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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비 트랙백 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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