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 사건으로, 군에대한 불신과 군복무에의 두려움이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 아들을 과연 군대에 보내도 될까?..' 하는 두려움과 함께 또 어떤 분들은 "그래도, 남자는 군대를 다녀와야지!" 하며 군복무를 통해 사회성와 체력, 담력 등을 기를 수 있음을 높이 사기도 하십니다. 


이렇듯 대한민국 남자라면, 군복무를 피하기는 어려운데요, 그렇다면 군복무가 생소한 병사들에게 병영생활에 도움을 줄 누구 없나요?




병사의 취향! '병영생활 전문 상담관'있어요.





'병영생활 전문 상담관' 제도는, '05년 '기본권 전문상담관'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운영되어 주로 '기본권 관련 업무'를 수행하여 왔으나, '08년 말에 '병영생활 전문 상담관','생명의 전화 전문상담관','병역심사관리대 병영상담관'의 3개의 이름으로 개칭되면서 '장병에 대한 심리적 지원을 통한 사고예방'과 '의사소통 활성화'로 기능이 보다 세분화되어 운영되고 있는 중입니다.




군내 '병영생활 전문 상담관'은, 청소년상담사, 사회복지사, 임상심리 전문가 등 '자격'자들로서, 위기상담 능력을 갖춘 군내유일의 상담 전문가랍니다. 병사들에게는 엄마, 아빠와 같은 존재들로 상담을 통해 고민을 들어주고 위로해 주며, 극한 심리적 상황에 처한 병사에게는 위기상담과 지속적인 관리를 통해 군복무 적응을 유도하여 자살 등 위험상황을 미연에 방지하는 등 임무를 수행하고 있답니다.




아래와 같이 '09년말 군내 설문조사를 실시해 보니, 복무병사의 1/5 정도가 군 생활에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다고 답하였고, 병영생활 전문 상담관에게 상담을 요청하는 주된 이유로는, 미래진로걱정, 친구/가족에 대한 그리움, 병영내 인간관계 등이라고 답한 병사들이 많았습니다.


                                               [그림] 군 생활중 어려움을 겪는 이유



상담관은 1인당 월평균 최소20명~최대81명을 상담하고 있으며, 현장방문 상담활동을 통해 의사소통 경로를 지속적으로 확보하여 군무이탈 및 폭행사고 등을 사전에 예방하는 동시에 지휘부담도 경감시키는 효과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상담관의 활동은 장병 및 군인가족의 소원과 고충을 파악하여 처리하며 장병들에게 전역 후 진로 및 직업개발에 대한 실질적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하지요.






특히, 병사들 중에는 새로운 환경에의 적응에 어려움을 느껴 입대후 자살을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요, 이 경우 '병영 생활 전문 상담관'이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것으로 외부 연구결과 나타나고 있습니다. 군내 장병들 대상으로 '09년 말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자살 생각 경험자 중 절반 이상이 전문상담관과의 상담을 경험하였고, 상담후 약 68%가 구체적,실질적 도움을 얻었다고 답하였습니다. 또한, 상담 경험자의 50% 이상이 재상담 의사가 있다고 응답하기도 하였답니다.





상담 경험이 없는 병사들도 77% 이상이 전문상담관 제도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응답하는 등 상담관 제도에 대해 많은 장병들이 기대를 가지고 있으며, 실질적으로 도움을 받고 있다고 응답하였습니다. '08년 대비 '09년에는 복무중 자살자 수 또한 감소추세를 보였습니다.

또한, 상담관들은 상담후 후속 조치로 자살우려자 및 복무부적응자에 대한 정상근무 유도, 병영부조리 식별과 조치, 현역부적합 처리 건의, 병원 진료 조치 등의 임무도 수행하는 등 병사들의 병영생활 적응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하네요.




전문 연구기관의 연구결과 '병영생활 전문상담관'제도가 병사들의 호응과 큰 성과를 얻고있다는 결론에 이르자, 국방부에서는 ‘10년부터 ’14년까지 가용예산을 고려하여 전문상담관 제도을 점진적으로 확대(사 ․ 여단급 이상 → 연대급 이상)할 계획입니다.



 
이렇듯 군은 병사들의 군복무 환경 개선에 노력하고 있으며, 또한 천안함 사건을 계기로 굳건한 안보태세 재정립에 노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군에게 많은 격려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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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포는 무지(無知)에서 온다

 
 
냉전이 한창이던 1976년 9월 6일, 극동 소련의 프리모스키 크라이(Primorsky Krai)에 위치한 추구예프카(Chuguyevka)공군기지에서 이륙한 소련 제11항공군 소속의 전투기 1기가 갑자기 연해주를 벗어나 일본열도 북부의 홋카이도(北海島)에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모습이 정밀하다고 소문난 일본의 방공망에 포착되었다.

 

일본 레이더에 적성국 전투기의 접근이 감지되었다.

 

빠른 속도로 바다를 건너 일본 영공에 다가온 정체불명의 소련전투기를 요격하기 위해 일본항공자위대 소속의 F-4EJ 편대가 출격하였다.
비록 적대행위를 하지는 않아 격추는 하지 않았지만 엄청난 속도를 자랑하는 소련전투기는 일본 편대를 유유히 따돌려 일본을 경악하게 만든 후 홋카이도(北海島)의 하코다테(函館) 비행장에 비상착륙하였다.

 

하코다테기지에 비상 착륙한 소련전투기


 
얼마 후 착륙한 전투기에 다가온 일본 관계자들에게 전투기에서 내린 조종사 벨렌코 ( Viktor Belenko ) 중령은 자신을 미국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며 정치적 망명의사를 명확히 하였다.
이 사건은 당시 서방세계를 발칵 뒤집고 소련에게는 당혹감을 안겨주었는데, 그 이유는 망명 희망자가 몰고 온 비행기 때문이었다.
그 전투기는 NATO코드명으로 박쥐여우(Foxbat)라고 불리던 MiG-25였다.

 

망명 조종사 벨렌코의 모습

 

MiG-25는 종종 고고도로 서유럽 영공으로 날아와 휘젖고 다니고는 하는데 서방측은 이를 막을 마땅한 방법이 없어 쩔쩔매고 있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다.
특히 1970년대 중동의 하늘을 주름잡던 이스라엘 공군이 이집트와 시리아에 임대된 MiG-25가 이스라엘 영공을 가로지르며 정찰활동을 하여도 격추시키지 못하였을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자랑하고 있던 중이었다.

 

냉전시대 서방은 MiG-25에 대해 공포를 느끼고 있던 중이었다.


 
마하3을 넘나드는 속도를 가진 것으로 알려진 소련의 이 최신전투기에 대해서 당시 서방측은 엄청난 공포를 가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소련의 천하무적 비밀병기였는데, 생각지도 않은 망명자 덕분에 미국은 눈에 가시같은 소련의 비밀병기를 샅샅이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당연히 전 세계 언론의 이목은 일본의 변방인 홋카이도에 쏠릴 수 밖에 없었다.

 

불시착한 MiG-25 주위에 몰려든 조사요원들


 
소련은 기체의 즉각 반환을 요구하였지만 미국은 결코 그럴 생각이 없었다.
후방으로 MiG-25를 이송시켜 철저하게 분해하여 원없이 검사한 후 11월 15일 생색을 내고 돌려주었다.
그런데 당시 검사결과가 공표된 바는 없지만 세월이 흘러 드러난 정보에 따르면 당시 MiG-25를 검사한 후 가장 놀랐던 점은 이 전투기에 대해서 서방측 스스로가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후방에서 조사하기 위해 C-5 수송기에 탑재하는 모습


 
일설에는 미국 군부에서 MiG-25의 성능을 이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의회로부터 예산을 많이 따내기 위하여 고의로 정보를 은폐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어쨌든 검사 결과 MiG-25는 고고도에서 속도가 빠르다는 것만 제외하고 그리 훌륭한 전투기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동안 정확한 정보도 없이 단지 소련 측에서 흘러나온 선전에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였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MiG-25는 무지가 공포를 유발하였던 대표적인 물증이 되었다.


 
결국 무지(無知)하기 때문에 필요 이상의 공포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었고, 그렇게 된 이유 중에는 6.25전쟁에서 혜성처럼 등장하여 MiG-15에 호되게 당한 쓰라린 경험도 크게 한 몫 하였다.
사실 세상을 살 때 많이 그리고 정확히 알고 있으면 두려운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모르기 때문에 두려운 것은 군사 뿐만 아니라 인생사도 그런 것 같다.
그래서 공부하고 경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고 그것은 국방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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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군 해외파병 사진전( ~5.2/코엑스)



4.29(목)부터 코엑스 <COEX Hall A (구 태평양홀)>에서 '국군 해외파병 사진전' 개최되고 있습니다.  5.2(일)까지입니다. 서두르세요!


'국군 해외파병 사진전'이 열리고 있는 COEX Hall A



국방부에서는 오랜 기간동안 '국군 해외파병 사진전'을 준비해 왔습니다.
사진전은 국내 최대 사진/영상 기자재 전시회인 P& I (Photo & Imaging, 서울국제사진영상기자재전)과 동시개최행사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COEX Hall A (구 태평양홀) 내 '국군 해외파병 사진전' 전시장 위치



이번 국군 해외파병 사진전은 '국군 해외파병 부대의 민사작전'을 주제로, 현지 및 동맹군들로부터 모범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지역재건, 의료지원, 교육지원 등의 활동을 사진으로 소개하는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진전은,
현지인들로부터 '신이 주신 선물'이라 극찬을 받았던 '자이툰부대'와 해군 최초 지상군 파병이었던 '코브라-골드훈련', 레바논 남부에서 정전감시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동명부대', 지진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아이티의 재건을 지원 중인 '단비부대' 등 4개국 파병부대의 활동을 조명합니다.



해외 파병부대 활동과 예술을 동시에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전시장에서는,
인포데스크 우측으로 천안함 희생장병 추모메시지를 남기실 수 있으며, 파병사진으로 만든 기념엽서와 추모 배지를 드리고 있습니다.
   


 


4월 약 한달간 우리군에는 많은 시련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또한 4월 2일 소말리아 작전지역으로 출항한  해군 '청해부대 4진'을 포함한 우리군은, 앞으로 더욱 강하고 국제사회에도 크게 기여하는 참 국군의 위상을 세우기 위해 더욱 노력해 나아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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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책기획과
김    윤   희   주무관
 

                              오늘 아침은...

다른 날과는 달리 새벽 4시 기상, 7시에 국방부엘 도착하였습니다. 출근시간이 앞당겨진 이유는, 오늘 아침 해군 2함대사령부 안보공원에서 있을 '천안함 46용사' 합동영결식에 참석하기 위함입니다.


연일 내리던 비가 그쳤으나, 오늘.. 날은 흐리고 바람은 거셉니다.
어제는 백년만에 가장 추운 4월날씨였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버스를 타고 어느덧 2함대사 앞에 도착하였습니다.


 

2함대사 맞은편 원정초등학교. 손수건에 추모편지를 써서 소나무에 매어놓았습니다.

 


2함대사 맞은편에는 원정초등학교가 있었습니다. 소나무에 손수건편지가 걸려있었습니다. 원정초등학교에는 희생용사들의 자녀들이 많이 다닌다고 합니다. 희생용사 자녀의 친구들이 천안함용사를 추모하는 마음을 담아 편지를 쓴 것이라고 합니다.




해군 2함대사 영결식장에 참석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


 

 2함대사에 도착하니, 천안함 46용사 영결식에 참석을 위해 전국에서 오신 분들이 무척 많았습니다.



영결식이 열릴 2함대내 안보공원을 바라보며

 


영결식은 국민의례-묵념-경위보고-훈장추서-조사 및 추도사 낭독-종교의식-헌화 및 분향-조총 및 기적-영현운구-폐식사 순서로 진행되었습니다.

시종 엄숙한 분위기로 진행되던 영결식은 헌화와 분향 순서가 되자 유족들의 오열로 가득했습니다. 아들을 부르며 통곡하시는 어머니, 마지막으로 의젓하게 아버지께 인사드리는 어린 아들, 엄마와 함께 슬퍼하는 어린 딸.. 모두 영정 앞에서 떠날 줄을 몰랐습니다. 참석자들도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습니다. 


 

영결식이 끝나고 대전 현충원으로 향하는 운구행렬

 


조총 및 기적 취명 후 영현운구를 끝으로 영결식이 끝났습니다. 46명의 용사들은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었습니다.

영결식이 끝나자 날이 갰습니다.  희생용사들의 영면을 기원하였습니다.


제2차 연평해전 당시 북한군과 싸웠던 참수리 357호정과 천안함 유족


 

영결식장을 나오는데, 식장 앞에 참수리 357호정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2002년 북방한계선에서 교전중 전사한 6명의 용사들의 얼굴이 오버랩되었습니다.

내가 누리는 이 자유와 행복은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로 인해 누리게되는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됩니다.


오늘 아침,
'천안함 희생용사'들을 추모하며, 이땅의 아침햇살에 감사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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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하라! 천안함
 


 
일본이 진주만을 급습하기 직전인 1941년 12월 1일, 전통의 뉴포트뉴스(Newport News) 조선소에서 건조에 들어간 신형 항공모함이 있었다.
이 항모는 에섹스(Essex)급 항모의 2번째 함이었는데, 건조 전에 CV-10 본 홈 리차드(Bon Homme Richard)로 이미 이름이 정해져 있던 상태였다.
그런데 한창 건조 중이던 1942년 12월 26일 이름이 요크타운(Yorktown)으로 변경되었고 완공 이후 1943년 4월 15일 실전에 투입되어 태평양 전역에서 맹활약한 후 1970년까지 일선을 누비다 퇴역하였다.

 

원래 예정되었던 이름이 본 홈 리차드였던 CV-10 요크타운


 
이처럼 이름이 갑자기 요크타운으로 바뀌게 된 데는 미 해군의 자랑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한 정책적 배려 때문이었다.
원래 요크타운은 1936년 건조한 CV-5 항공모함의 이름으로 태평양전쟁 발발 당시에 미 해군이 전투에 투입 가능한 5척의 중형(重型) 항모 중 하나였다.
그러다보니 이들 항모들은 일본의 극성기에 최전선에서 고군분투하고 많은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었다.

 

미드웨이해전에서 타격을 입고 침몰중인 CV-5 요크타운

 

CV-5도 각종 전투에 연이어 참전하여 맹활약하였는데, 특히 태평양전쟁의 전환점이 되었던 미드웨이해전에서 대승을 이끄는 주역이었지만 적에게 맹폭을 당하여 1942년 6월 7일, 최후를 맞았다.
이런 고귀한 이름을 버릴 수 없어 미군 당국은 새로 건조 중이던 신형 항공모함에게 요크타운이라는 의미 있는 이름을 승계시켰던 것이었다.
이것은 세계 해군사에 내려오는 함명 승계에 관련한 수많은 예 중 하나다.

 

군사박물관으로 사용중인 CV-10요크타운. 미해군역사상 최단기간내 이름을 승계한 군함이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급습 시 가장 크게 피해를 당한 군함은 전함이었던 BB-39 아리조나(Arizona)로 일본군의 공습에 일순간 폭발당하여 1,177명의 수병이 전사하고 침몰당하는 미 해군 역사상 최대의 참사를 겪었다.
그런데 아리조나는 아직까지 함명이 승계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비참한 참사를 겪어서가 아니라 침몰한 선체 위에 그날을 영원히 기억하자는 박물관이 세워져 운용되면서 진주만에서 그 역할을 아직까지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침몰된 선체위에 세워진 박물관으로 인해 아직까지도 묵묵히 역할을 다하는 BB-39 아리조나


 
정부는 지난 4월 23일 천안함 침몰참사와 관련하여 군의 사기를 제고하고 희생 장병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최신형 초계함 형태로 천안함을 재건조하는 방안을 적극 추진키로 결정했다.
세부안이 아직 확정된 것이 아니라서 천안함과 동급의 군함을 그대로 재현하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새로 건조될 차기함정에 이름을 승계시킬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어쨌든 천안이라는 함명은 새롭게 부활하여 우리에게 다가올 것 만큼은 틀림없어 보인다.

 

정부에서는 천안함 재건조를 적극 추진하기로 하였다.


 
사실 천안함의 이름은 한국 해군사에 있어 상당히 전통이 있는 함명 중 하나로 최초의 천안함은 상륙함인 LST-801이다.
1943년 건조되어 태평양전쟁에서 미 해군 LST-659로 맹활약한 동 함을 1949년 7월 우리 해군이 인수받아 LST-801 용화(龍化)함으로 명명하였고 이후 천안함으로 함명이 바뀌었다. 제1대 천암함은 6.25전쟁 시에 육군 제17연대의 옹진 철수작전, 군산지구 정부미 및 중요물자 후송작전, 묵호지구 수복전 등 주요 작전에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웠고 1959년 4월에 퇴역하였다.

 

제1대 천안함 LST-801


 
제2대 천안함은 1989년 건조된 PCC-772함으로 1999년 제1연평해전에 참전하여 승리를 이끈 자랑스러운 전과가 있지만 이번에 불의의 사고로 안타깝게 침몰 당하였다.
하지만 앞서 요크타운이나 아리조나의 예도 들었지만 군함의 침몰은 결코 치욕이나 감추고 싶은 아픈 기억으로만 남지는 않는다.
따라서 새로운 함정을 건조하여 천안함의 이름을 승계시키기로 한 것은 PCC-772함이 최후를 당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태어나 부활하였음을 상징하는 좋은 정책이라 할 수 있다.
이름이 살아있는 함정은 죽거나 쉬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맡은 바 임무를 다하고 있다는 명확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비록 불의의 사고를 겪었지만 그것이 천안함의 끝은 아니다. 천안함의 부활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처럼 본연의 임무이든 아니면 새롭게 부여받은 역할이든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면 군함은 결코 죽은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천안함은 이름을 승계받아 새로 태어날 예정이라 하니 더더욱 그러하다.
천안함의 멋진 부활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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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희생장병들의 장례 2일차인 4월26일, 버스를 타고 평택 해군2함대사령부 합동분향소를 찾았습니다.
하늘도... 끝내 눈물을 흘렸고, 2함대사령부로 향하는 도로 가장자리에는 희생장병들을 추모하는 플래카드들이 빼곡히 줄지어 있었습니다. 


평택2함대사령부 합동분향소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2함대사령부 합동분향소에 들어섰습니다. 분향소 입구 위쪽에는 희생장병들의 그리운 이름들이 찾는 이들의 눈시울을 적시고 있었습니다.
 


해군2함대사령부 합동분향소 입구에 씌인 희생장병들의 그리운 이름들



분향소 내에는 희생장병을 찾은 각군 전우들과 관계자들로 가득하였고, 희생장병들 사진 오른쪽으로는 유족들과 하얀 국화만이 말없이 추모객들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희생장병을 애도하며 유족들을 위로하는 장병들의 끝없는 행렬



분향소내 희생장병들의 사진을 보았을때, 그들이 살아생전에 블렀을 해군가 하나가 문득 떠올랐습니다.
 

 
    "우리들은 이 바다 위에 이 몸과 마음을 다바쳤나니 바다의 용사들아 돛 달고 나가자 
    오대양 저 끝까지 나가자 푸른 바다로 우리의 사명은 여길세 지키자 이 바다
    생명을 다하여!.." 
                                                       - 해군 군가 '바다로 가자' 중에서 -



국방부에서는 천안함 희생장병들을 추모하며, 그들의 숭고한 조국사랑의 뜻을 기리고 하나된 국방가족의 위기극복 의지를 다지기 위해 추모배지를 마련하였습니다. 

추모배지에는 군인을 상징하는 군번줄 모양의 바탕에 천안함 함수를 배경으로 희생장병 46명과 고 한주호 준위를 상징하는 뜻에서 'we remember 46+1'이라는 문구를 새겨넣었습니다.  



천안함 희생장병들을 추모합니다.




희생장병 추모의 마음을 함께하기 위해, 국방부는 4.28일부터 국방부본부와 합참, 각군, 국회, 청와대 등에 1만개의 추모배지를 배포하고 있습니다.

'천안함 46용사'의 영결식은 4.29일 해군 2함대사령부 안보공원에서 오전10시부터 2시간동안 해군장으로 치뤄질 예정이며,합동안장식은 오후 3시 국립대전현충원 현충문 앞에서 거행될 것입니다.
4.29일 오전 10시에는 추모사이렌과 함께 1분간의 추모 묵념이 있을 예정입니다.

희생장병을 추모하며 그들을 대신하여 살아갈 일들을 다짐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천안함 희생장병들이여!

'당신의 희생을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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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명의 천안함 희생장병들에 대한 확인과 희생장병들에 대한 수색 종결이 결정되면서, 나라 곳곳에서는 자발적으로 분향소를 설치하는 곳이 늘어나고 4.25일부터 5일간의 희생장병들에 대한 장례가 거행되고 있습니다.
 


천안함과 우리장병들을 기억합니다.



4.25일 정운찬 국무총리는 정부를 대표한 대국민 담화를 통해 4.25일 시작된 천안함 희생장병 장례기간을 '국가애도기간'으로 선포하고, 영결식인 4.29일을 '국가애도의 날'로 지정하기로 하였습니다.


  

4.25일 평택 2함대사령부 합동분향소를 찾은 정운찬 총리와 김태영 국방부장관

 

천안함 희생장병들의 장례는 유가족들의 뜻에 따라 4월 25일을 사작으로 29일까지 '해군장'으로 치뤄지고 있습니다.



평택 2함대사령부 합동분향소


 
이렇듯 천안함 희생장병들을 위해 분향하는 마음은, 희생장병 유족들과 정부만의 것이 아닌가봅니다.

4.25일 천안함 희생장병 장례기간이 시작되면서 전국 곳곳(16개 지자체와 90여 군부대 등)에 설치된 분향소에는 우리 국민들의 분향을 위한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직접적으로 나의 아들, 우리형은 아니지만, 천안함 희생장병을 추모하고 슬퍼하는 마음은 우리국민 모두가 같은가 봅니다.

"희생장병들이 모두 내 아들같고 우리 애아빠같아서 마음이 아파요..."라며 국민들은 말합니다. 



서울광장에 설치된 천안함 희생장병 합동분향소




서울광장 합동분향소에서 진해 종합사회복지관 합동분향소에 이르기까지 우리국민들의 분향을 위한 발걸음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해외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남가주 해군동지회, LA한인회 등도 분향소를 마련하여 분향에 참여하고 있다고 합니다.


국방부와 해군을 비롯한 우리군 모두는 평택 2함대사령부 합동분향소와 국립서울현충원 분향소를 비롯한 전국 90여개의 군 부대에 분향소를 마련하였습니다.


 

국립서울현충원 천안함 희생장병 합동분향소



국방부도 우리장병들을 애도하며 4.25일부터 국립서울현충원 분향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천안함 희생장병들에 대한 묵념(국립서울현충원 합동분향소)





희생장병에 대한 분향이 계속되고, 4.29일에는 천안함 희생 장병들에 대한 합동영결식이 있을 것입니다.

4.25~29일 '국가애도기간'을 통하여 우리군과 우리 국민들은 더욱 성숙될 것이며 모두 하나가 되어 이 나라를 생각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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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해를 지키는 하늘의 파수꾼
 
 

천안함 사건과 별개로 최근 해군이 운용중인 링스(LYNX)대잠헬기가 작전 중 연이어 추락하는 전대미문의 사고가 발생하여 안타까움을 더해주고 있다.


 

해군의 링스헬기


 

지난 4월 15일 오후 8시 58분쯤 전남 추자도 인근 해역에서 초계비행 중이던 해군 3함대사령부 소속 링스헬기가 추락하였는데, 사고 확인 직후 관계 당국에서 구조 활동을 벌였으나 현재 시신으로 발견된 권태하 대위를 제외한 홍승우 중위, 임호수 중사, 노수연 중사 등 나머지 탑승자의 생사여부는 물론 기체까지 아직 파악되지 못한 안타까운 상황이다.


 

故 권태하 대위




그리고 충격이 가시지도 않은 4월 17일, 소청도 남쪽해상 왕건함에서 출동한 해군 2함대사령부 소속의 링스가 추락하는 사고가 반복되었다. 이번에는 불행 중 다행히도 3인의 승무원들이 안전하게 구조되었고 기체도 즉시 인양되어 수리하면 재사용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같이 사고가 이어지자 군당국은 해군이 보유한 전체 링스헬기의 운항을 중지하고 긴급 안전진단 작업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소청도 인근 추락 링스헬기의 모함이었던 왕건함. 즉각적인 후속조치로 인명을 구하였다.




한편 이와 같은 연이은 사고와 보도로 인하여 우리 해군이 운용하는 헬기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도 많이 증폭되었다. 왜냐하면 링스헬기는 육상을 기지로 하여 운용되는 여타 헬기와 달리 주로 함정에 탑재하고 있다가 해상초계 및 대잠임무에 투입되는 헬기이기 때문이다.
사실 창군 후 우리 해군은 오랜 기간 연안해군 규모였고 보유하였던 함정의 크기도 작아서 군함에 해상작전을 위한 항공장비를 탑재하고 다닌 것이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해군에서 헬기를 함에 탑재하여 작전에 투입한 것은 1980년대 초였는데 실전에도 투입되어 전과를 남기기도 하였다.

 
 

한국해군 최초로 헬기데크를 갖춘 구축함중 하나였던 DD-922 강원함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1983년 8월 13일에 울릉도 근해에서 있었던 북한 간첩선 격침작전이었다.
미국에서 도입한 일부 기어링급 구축함의 함미를 개조하여 헬기데크를 만들어 해상작전용 헬기를 탑재시켰는데 DD-922강원함도 그중 하나였다. 당시에 강원함에 탑재되었던 SA-319B 알류트(Alouette) III 대잠헬기가 AS-12대함미사일을 이용하여 도주하던 간첩선모함을 격침시키는 전공을 세웠다.


 

1980년대 우리해군이 운용하였던 것과 동종의 알류트 III 대잠헬기

 


당시에 활약한 구형구축함이나 알류트헬기는 모두 현역에서 은퇴하였고 이제 그 자리는 최신 한국형 구축함들과 1990년대 이후 두 차례에 걸쳐 도입한 OO대의 영국제 링스(Mk-99형, Mk-99B형) 대잠헬기들이 담당하고 있다.
이들 링스헬기들은 현재 우리 해군이 보유한 OO기의 P-3C, P-3CK 초계기와 더불어 하늘에서 우리의 영해를 철저히 감시하는 매서운 눈은 물론 매서운 발톱의 역할도 담당하는 만능일꾼이다.


 

최근 도입한 P-3CK 초계기

 


최근에 와서 대형 구축함이나 헬기모함 등에 탑재하여 사용하는 여타 해상작전용 헬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링스헬기가 경량인 점이 단점으로 종종 거론되기는 하지만 세계 여러나라 해군에서 주력 대잠헬기로 사용 중일 만큼 이들 링스헬기들은 이전에 사용하던 알류트 III 기종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성능을 보유하고 있고 안정성도 입증된 기종이다.


 

조속히 문제를 해결하고 본연의 임무를 다하여주기를 기대한다


 

비록 이번에 사고가 발생하긴 하였지만 우리 해군이 보유한 링스헬기는 현재도 청해부대의 일원으로 소말리아 해역에 파견되어 원양에서 여러차례 해적 퇴치 임무에 투입되는 등 우리의 영해를 지키기 위해 불철주야 최선을 다하고있다.
조속히 사고원인이 규명되어 제반 후속조치가 이루어져 원래 대로 임무에 복귀하기를 바라며 지난 사고에서 실종된 대원들과 기체의 조속한 수색이 완료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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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1..
 우리는 그들을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기억할 것입니다.





'천안함 희생자 가족협의회'는.. "아들을 군대에 보냈으면 나라의 아들이고, 해군의 아들들에게 가장 큰 것은 해군장" 이라며, 국회의사당과 서울광장에서의 장례식을 마다하였습니다.




천안함 희생장병 가족의 기도




천안함 희생자 가족들은, 한주호 준위의 또다른 희생을 보며 자신들의 실종된 자녀에 대한 구조와 수색 중단을 요청하였습니다.



故 한주호 준위의 영결식을 찾은 희생장병의 가족





그들은.. 일부 여론의 신속한 천안함 절단면 공개 주장에도, 선체 인양에 따를 수 있는 위험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다소 시간이 지연됨에도 함미를 얕은 곳으로 옮기는 데에 동의하여 주었습니다.
 
또 그들은, 8명의 아들을 아직 보지 못하였는데도 '산화자'로 처리하는 것에 동의하면서, 이들에 대한 수색도 이젠 중단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생존장병을 위로하는 희생장병의 가족





천안함과 관련된 그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지금이라면 희생자 가족들의 모든 주장이 정부와 국민들에게 받아들여 질 수도 있을텐데, 그들은 자식 잃은 부모의 애끓는 성정을 누르고 단호히 이 나라와 국민들을 위해 여러차례 중요한 결단들을 내려주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그들도 국가와 군에 대한 원망을 금할 길 없었지만, 이제 그들은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애써 참으며 천안함 함장의 입장까지도 이해하려 애쓰는 등 불필요한 국론의 분열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천안함 희생장병의 명복을 빕니다.




우리 모두는 천안함 희생장병들을 사랑하지만.. 지금은 이 나라에 남은 자로서 마땅히 해야할 일들을 생각해 볼 때인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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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천안함 침몰과 관련하여 4월16일 국방부장관이 발표한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을 전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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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보다 중요한 것

 

1950년 9월 25일, 마산을 박차고 나온 미 제25사단은 낙동강방어선을 건너 호남지방을 향해 반격을 개시하였다. 그들이 제일 먼저 진입한 곳은 하동이었는데 전투부대를 바로 뒤 쫓아 전장정리조(戰場整理組)가 함께 투입되었다.

전장정리조가 하동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착수한 일은 지난 7월 28일 하동전투에서 북한군의 함정에 빠져 괴멸된 미 제29연대 3대대의 흔적을 찾는 것이었다. 이들은 당시 전투에서 전사하여 방치된 미군 시신 313구를 두 달 만에 발견하여 수습할 수 있었다.

 

전장정리조에 의해 전사자 뿐 아니라 학살된 시신도 수습되었다(학살된 미군포로)

 

 

1951년 3월 7일, 중공군의 제4차 공세를 막아낸 유엔군은 대대적인 반격에 돌입하였다. 중부전선을 담당하던 미 제9군단은 용문산-홍천방향으로 공격을 개시하였고 선봉은 미 해병1사단이 담당하였다.

 

그런데 미 제2사단에서 파견 나온 전장정리조가 옆에서 동행하였다. 이들의 임무는 지난 2월 중국군의 공세 당시에 국군 제8사단의 조기붕괴로 말미암아 횡성 계곡에서 뜻하지 않은 피해를 입은 미 제10군단 21지원대의 전사자와 장비를 수색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12일 횡성 북방에서 250여구의 전사자와 각종 장비를 회수할 수 있었다.



전사자의 시신을 수습하여 함께 후퇴하는 모습(장진호전투 당시 미 해병 제1사단)

 

 

6.25전쟁 당시의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전우의 시신을 수습하였던 위의 두 가지 사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전사자의 유해를 반드시 발굴하고 수습한다는 미군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사실 당시에 모든 분야에서 경험이 부족하였던 국군의 경우 이런 부분까지 세세히 신경을 쓰지 못하였던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이것은 우리에게 두고두고 커다란 교훈을 준다.

늦었지만 2000년대 들어 진행되는 6.25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은 상당히 다행스런 일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유해자의 발굴에 유효기간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시지탄이지만 6.25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이 꾸준히 진행 중이다

 

 

지난 3월 26일에 발생한 천안함 침몰사건은 국민들에게 너무나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사고 발생원인과 별개로 당장 실종된 46명의 승조원들의 안위는 국민들의 최대 관심사가 되었다.

너무나 암울한 상황이지만 국민들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이들이 살아서 돌아와 주기를 학수고대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시신들이 발견되면서부터는 점차 사고 수습에 최선을 다하여 주기를 바라는 형국이 되었다.

 

 

故 남기훈 상사의 귀환모습



함의 인양과 탑재되었던 무기의 회수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실종자 확인이다. 그 어떤 이유도 사람보다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기적적으로 살아서 생환한다면 가장 좋겠으나 최악의 경우 시신을 온전히 수습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더구나 국가를 위해 임무를 수행하다 불의의 사고로 산화한 경우라면 더욱 그러하다. 이것은 결코 전시인지 평시인지를 구분지어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안타깝지만 이제는 실종자 확인 및 수습에 만전을 기하여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6.25전쟁 당시 미군이 빗발치는 포탄을 뚫고 적진을 함락시키자마자 제일 먼저 하였던 일이 지난 전투에서 미처 수습하지 못하였던 전사자의 시신을 확인하고 처리하는 일이었다.

이번 천안함사태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함미가 인양되었기 때문에 실종자 확인 및 수습에 보다 박차를 가할 수 있으리라 판단된다.


 

고귀한 희생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마지막 한명의 생사 확인이 이루어 질 때까지 모든 노력을 다하여 주기를 기대한다. 지금 이 시점에서 이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

국제적인 협조와 민간의 대대적인 참여 속에 이루어질 사고조사는 시간을 두고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할 사항이므로 승조원의 생사확인보다 우선순위가 앞설 수는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것이 국가를 위해 희생당한 이들에 대하여 살아있는 이들이 취하여야 할 예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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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일 오전, 천안함 함미를 인양하여 자연배수 및 배수펌프를 이용한 인공배수를 실시하였으며, SSU요원이 선상에 투입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지선에 함미가 탑재되었습니다...."




바지선에 탑재된 천안함 함미의 모습




국방부는 실종자가 천안함 함미부분에 다수 있을 것으로 보고, 함미 우선인양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천안함 인양은, '함미인양 - 바닷믈 배수 - 바지선 탑재 - 실종장병 수습'의 순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제 곧 함미의 절단면이 공개될 예정이며, 이후 함수의 인양개시는 4.24일 즈음 가능할 것입니다.



천안함 함미 인양 바지선




군의 천안함 함미인양과 사후조치 계획에 대해 좀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인양작전의 중점은, 실종장병과 탄약등의 유실 방지입니다.

이를 위해, 현장에는 고속단정(RIB)과 고무보트(IBS)를 대기시켜 놓고 있으며, 기뢰탐색함으로 탐색된 유실탄약 등은 인양 또는 수중 폭발 처리할 방침입니다. 이에따른 해수 오염에 대비하여 인양중 오염방지 대책도 마련하고 있습니다.


천안함 인양작업을 준비하는 SSU대원들의 모습




2. 탐색작전은, '해상부유물' 탐색과 '수중잔해물' 탐색으로 나뉘며, 3단계로 진행됩니다.

4.13일 현재 부유물은 총 169종, 171점이 탐색되었으며, 4.15일부터 2단계 탐색작전이 시작된 상태입니다.  
4.14일까지 진행된 1단계 탐색은, 기뢰탐색함과 심해잠수사를 투입하여 잔해물 위치를 확인하고 대형 잔해물을 수거하는 작업이었습니다. 4.15일 시작된 2단계 탐색은, 사건 발생지점 반경 500m 이내에 무인탐사정을 투입하여 음파탐지기와 수중카메라를 이용한 소형잔해물 등을 정밀 탐색하는 단계라 하겠습니다.





무인탐사정





3. 천안함 조사의 기본방침은, 국내외 전문가들과의 협력으로 조사의 투명성과 국제적 공신력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천안함 조사분야는 총 4개분야로 구분됩니다. 1) 영상, 통신, 사이버분석과 2) 사체 검안, 인원 확인 등 과학수사, 3) 침몰원인과 손상과정을 시뮬레이션하는 선체 구조/관리 분야, 4) 폭발유형분석, 해저 장애물과 적 도발 가능성 등을 판단하는 정보/작전분석 분야입니다.




과학수사





4. 생존장병과 실종자가족들을 적극 지원할 것입니다.

군은 생존자 중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환자와 퇴원후 증상악화 환자들을 대상으로 치료연장과 재입원 등을 지원하고 있으며, 실종자 가족들을 위해서는 '의로지원팀'을 운영, 유가족의 경우에는 취업을 돕고 군 아파트 거주 등도 지원할 방침입니다. 또한, 실종자의 순직 또는 전사가 확인될 경우 보상금 지급과 추서 진급 등 다양한 예우 방안들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실종자가족과 생존장병의 모습




오늘 4.15일 천안함 함미 인양이 완료되면, 사고의 원인규명 등 사건이 합리적으로 마무리 될 때까지 군과 우리국민들은 진중한 자세를 취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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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전쟁 UDT 참전사
 
 
작금의 천안함 구난활동과 관련하여 그 역할이 자주 거론되는 부대가 UDT (Underwater Demolition Team) / SEAL(Sea Air Land) 이다.
이들 부대의 대원들은 최악의 조건에서 작전을 펼칠 수 있도록 특화된 정예요원들이다보니 이번 천안함 사태처럼 위험한 해상수색, 구난임무에 투입이 되고는 한다.

 

구조,구난활동에 투입 중인 UDT/SEAL

 


하지만 해군 특수전여단 소속임에서 알 수 있듯이 UDT/SEAL은 수중파괴임무와 육해공 전천후 타격임무, 폭발물처리임무, 해상대테러에 특화된 전투부대로 대한민국 최강의 부대라고 자타가 공인할 정도다.
이 부대는 작전자체가 비밀이다 보니 공식적으로 국군 UDT/SEAL의 실전 활약상을 알기는 힘들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해상 재난사고의 구조, 구난에서만 대중이 그들의 활약상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점은 외국의 특수부대도 마찬가지다.

 

UDT/SEAL은 자타가 공인하는 최강의 특수부대다.



다만 우리나라에서 UDT의 실전 투입기록은 있다. 6.25전쟁 기간 중 미 해군 UDT (미국 UDT는 1983년 해체되어 현재 SEAL이 임무를 대신한다)의 괄목할 만한 작전이 한반도 곳곳에서 벌어졌다.
미국 UDT는 제2차 대전 당시에 상륙전이 빈번하게 벌어지자 통로개척 임무 등을 위해 1942년 8월에 창설되었고 이후 타라와전투 같은 여러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6.25전쟁 발발 초기부터 유엔군 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가 처음부터 상륙전을 구상하자 한반도에 즉시 투입이 되었다.
6.25전사를 살펴보면 총 4회에 걸쳐 미군 UDT는 의미 있는 작전을 수행하였다.

 

6.25전쟁에 투입되었던 미 해군 UDT부대

 

 
1. 인천상륙작전 1950년 9월
인천 앞바다는 갯벌이 많고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여 수로가 극히 좁은 해역이다.
따라서 상륙함대가 진입할 수로일대에 기뢰 부설 여부 등을 사전에 확인하고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이 작전에 미 본토에서 긴급 전개한 10명의 UDT 3팀이 투입되어 맡은 바 임무를 다하였다.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된 UDT 3팀



2. 대천특공작전 1950년 9월 22일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적 후방 정찰을 위해 충남 대천에 8명의 요원으로 구성된 UDT대원들이 심야에 5대의 고무보트를 나눠 타고 상륙하여 적진을 성공적으로 정찰하였다.

 

고무보트를 이용하여 해안가로 침투하는 모습(원산상륙작전 당시)


 
 
3. 원산상륙작전 1950년 10월
미 제10군단이 원산에 상륙하려 하였지만 소련의 원조로 북한이 설치한 3000여발의 기뢰가 원산만을 가득 채워 동해바다 위에 묶여 있게 되자, 이를 제거하기 위해 UDT가 투입되었다.
급거 투입된 UDT대원들은 현지 주민의 협조를 받아 기뢰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여 이들을 성공적으로 제거하면서 2주 만에 미 제10군단은 상륙할 수 있었다.

 

원산 앞바다에서 기뢰에 의해 폭발당하는 한국해군 YMS-516 소해정


 
 
4. 흥남철수작전 1950년 12월
원래 흥남은 북진당시 유엔군이 거점으로 삼았던 항구는 아니었지만 중공군이 원산을 조기 함락시키자 함경도 일대에 고립된 10만여 명의 아군과 수많은 장비들이 철수할 항구로 선택되어졌다.
따라서 사전에 탈출로로 사용될 수로에 대한 안전 확보가 필요하였고 이를 위해 미군 UDT가 투입되었다.
이것은 UDT가 공식적으로 6.25전쟁에 투입된 마지막 작전이었다.

 

작전 투입전 장비를 입는 모습(원산상륙작전 당시)


 
미군 UDT는 휴전 후 1954년 철수하였고 임무를 대신하기 위해 장인표 대위 외 해군장교 7명이 미국 해군 UDT 과정을 수료한 후 귀국하여 1955년 11월 25일 1기 교육생 25명을 훈련시켜서 한국 해군 UDT를 창설했다.
당시 1기 교육생도로 300여 명이 지원했고 그중 25명이 수료한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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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사건과 관련하여, 4월3일 실종자 가족들의 수색작업 중단 요청에 의해 4일4일부터 천안함 수색작전이 선체 인양작업으로 전환되면서, 사건조사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해군 해난구조대(SSU)와 UDT/SEAL요원들은 별도로 실종자 탐색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백령도 해상 기상악화로 인양작전이 잠시 중단된 해병대 현장지휘소




천안함을 신속히 인양하고 사고 원인을 투명히 조사하기 위해, 민간에서도 참여의 노력을 기울이고 계십니다.

천안함 선체 인양작업에는 '해양개발공사'와 '88수중개발' 등이 참여하고 있으며, 3월 30일에는 '민관군 합동조사단'이 구성되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조사단 임무는, 사고원인 규명과 조사간 도출되는 문제점들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조사단은, 합참 전력발전본부장을 단장으로 실종장병 가족대표들을 포함하여 현대/대우조선, STX, 등 민간전문가들과 ADD, 해군 분석관 등 108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계의 요청에 따라 조사인원의 추가를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합니다.

4월6일 합동조사단은 천안함 침몰 사건발생시간에 대한 조사를 마치고, 4월7일 그 결과를 발표하였습니다.



'민관군 합동조사단'의 사건발생시간 조사결과 발표




천안함의 신속한 인양과 투명한 원인조사는, 우리국민들의 의문점을 해소할 뿐만 아니라, 세계각국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기에 또한 중요할 것입니다.



" Is this Korea ?"




국제적으로도 사고원인 조사의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미 합참의장의 적극적인 지원의사에 따라, 4월5일 우리측 합참은 '한/미 군 고위급 협조회의'를 개최하기도 하였습니다.
 
양국 협조회의에는 韓 합참의장, 美 주한미군사령관, 연합사부사령관 등 14명이 참석한 가운데, 우리측 합참은 인양작전계획을 설명하면서 미측에 해난사고 원인분석 전문팀 지원을 요청하였고 주한미군사령관은 적극적인 검토의사를 밝혔다고 합니다. 



한/미 군 고위급 협조회의




인양작업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먼저 인양크레인을 해상에 고정시켜 수중탐색을 실시한 후, 침몰선체를 체인과 와이어에 연결하고 인양 후 배수절차를 거쳐, 선체를 바지선에 탑재하여 실종자를 수색하고, 선체를 탑재한 바지선을 평택으로 예인하는 순으로 진행될 것입니다. 4월7일 현재, 선체를 체인과 와이어에 연결 중이라고 합니다.



천안함 인양작업과 원인조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함체 인양간 합동조사단의 객관적 조사결과를 묵묵히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더이상의 예측은 대한민국을 더욱더 혼란 속으로 밀어넣을 것입니다.

군은 현재, 민간전문가들과 함께 천안함 인양과 사건의 원인규명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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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3일, 천안함 실종대원 가족분들께서 수색중단을 요청하는 눈물의 결단을 하여 주셨습니다. 어려운 결정을 내리시기까지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은 고뇌와 고통 그리고 형연할 수 없는 아쉬움이 크리라 생각됩니다. 그러한 감정은 비단 가족분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모든 국민들이 함께 느끼는 안타까움이기도 합니다.


실종대원의 가족분들께서 어려운 결정을 하여 주셨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사고원인 규명을 위한 조속한 선체 인양 등 각종 후속대책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수색과정 도중 본의아닌 인명피해 사고가 발생하기도 하였지만 마지막까지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구조작업 참여 후 귀항도중 불의의 사고를 당한 금양 98호 선원분들과 관계자분들께도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불의의 사고를 당한 금양98호 관계자분들께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동급어선인 금양97호)


 
그런데 이번 천안함 사태는 그동안 전투무기에 비해 관심이 덜 했던 지원장비들의 중요성과 역할에 대해 살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관심이 덜 했다는 의미가 지원장비를 소홀히 혹은 하찮게 여겼다는 뜻은 아니고 단지 상대적으로 주목을 끌지 못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부대공개 같은 행사가 있을 경우 많은 사람들이 우선 눈에 잘 들어오는 무기류에 관심을 보이고는 합니다.
 

통상 최신 전투무기들에 대해 관심이 높습니다.( 사진출처 - KODEF )



사실 최전선에서 무기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평소 잘 드러나지 않는 지원장비들이 묵묵히 제 역할을 다해 주어야 합니다. 또한 이러한 위난의 시기에 지원장비들의 역할은 상당히 큽니다. 예를 들어 이번에 가장 먼저 투입된 배수량 4,200톤의 LST-685 성인봉함은 해상에서 함미도어를 열수 있는 상륙함의 이점을 십분 발휘하여 구조요원들의 전진기지역할을 하였습니다.
 

해상에서 함미를 열어놓고 작업 중인 성인봉함



 동시에 같이 구조작업에 투입 된 배수량 3,200톤 규모의 ATS-28 광양함은 지난 1972년 미국에서 건조되어 ATS-3 Brunswick 라는 이름으로 활약하던 구난함을 우리 해군이 1997년 구매한 것입니다. 비록 선령이 오래된 듯 하지만 지원함들은 일반 전투함에 비해 오랜 사용이 가능하므로 운용에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이번에 우리를 돕기 위해 투입된 미 해군의 3,200톤급 구난함인 ARS-52 Salvor에 비교하여 함의 성능은 크게 뒤지지 않습니다.

 

구난 및 인양 작업에도 투입될 광양함



 이번 구조 작업의 지휘본부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배수량 14,000톤 규모의 상륙함 LPH-6111 독도함은 아시아 최대의 함정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수시로 기상 여건이 악화되는 백령도 인근 해상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해상기지의 역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미 해군이 사고 해역에 추가 투입한 상륙함 LSD-49 Harpers Ferry에 견주어도 결코 손색이 없습니다.
 

악천후에서도 해상기지 역할을 하고있는 독도함



다음으로 MSH-571 양양함과 MSH-572 옹진함 등 주로 기뢰탐색 및 제거 임무에 투입되지만 심해를 탐색할 수도 있는 다수의 소해함들이 사고해역에 투입되었습니다. 이들은 배수량이 700톤 규모로 그리 크지 않고 임무 여건상 평소에는 주로 후방에서 작전을 펼치지만 이번 심해 탐색활동에 많은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 외에도 많은 지원함정들과 민간선박들이 지금도 사고현장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수중 탐색작업에 노력을 아끼지않고 있는 소해함


 
비록 이번 구조과정이 모든 국민들의 기대를 완전히 만족시켜주었다고는 말하기 어렵겠지만 어려운 가운데서 최선을 다하였음은 틀림이 없습니다. 평소에는 그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있다가 이처럼 위난의 시기에 전면에 나서서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는 지원장비들과 관련요원들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이제 임무가 전환되어 벌어지는 인양작업에도 힘을 내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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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

                                                               < 한용운의 '님의침묵'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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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26일 밤, 해군 초계함 PCC-772 천안함의 갑작스런 침몰이 있었습니다. 아직 구조가 진행 중이며 원인이 드러나지도 않았지만 현재까지의 상황만으로도 충격적인 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또한 아직 실종중인 승무원들을 애타게 기다리는 가족들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라도 희망의 끈을 절대로 놓지 말기를 기원합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희망의 끈을 절대로 놓지 말기를 기원합니다.


 
언론보도나 인터넷 등을 통하여 현재의 구조상황과 관련된 다양한 소식들이 흘러나오고 있지만 사건 발생시점부터 지금까지 모두가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특히 사건지점의 상황이 상당한 악조건임이 알려지면서 직접 투입되어 구조 활동에 나선 민간인 참여자들과 군 요원들의 노고가 많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악조건 하에서도 구조 활동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잠수시간을 초과하면서까지 최선을 다해주는 SSU, UDT, SEAL을 비롯한 해군 특수전부대의 노고가 있습니다. 이들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끔 평소에 혹독한 훈련을 받은 정예요원들이지만 결코 기계가 아닌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구조과정 중에서 해군 특수전부대의 정예요원이 희생당하는 일까지 발생하여 안타까움을 더해 주고 있습니다.
 

살신성인의 자세를 다한 故 한주호 준위



 하지만 이런 비극적인 사고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요원들이 탁하고 차가운 심해로 망설임 없이 지금도 뛰어드는 이유는 그만큼 상황이 다급하기 때문입니다. “후배들을 구하려 간다”는 말을 남기고 최선을 다하다가 순직한 故 한주호 준위님도 마찬가지였겠지만 구조작업의 최일선에서 현재도 임무를 수행중인 모든 요원들이 이처럼 어려움을 마다않고 위험한 일에 뛰어들 수 있는 용기는 바로 전우애 때문입니다. 


전우애는 이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구조에 나설 수 있게 만드는 동기입니다.



 비록 현재 실종된 천안함 승조원들과 일면식도 없는 경우가 오히려 더 많을 수 있겠지만, 동시대에 함께 군복을 입고 있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모두는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명령이 있었고 군인이어서 명령에 따라야하겠지만, 그것보다도 구조요원들은 어려움에 처한 동료를 구하러 간다는 오로지 한 가지 일념으로 최선을 다하였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바로 그 바탕에는 전우애가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승조원들이 전우애로 서로의 용기를 돋우며 위험을 버텨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전우애는 위험천만한 순간에 천안함 승조원들의 반 정도가 사지를 벗어날 수 있었던 힘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탈출에 성공한 이들도 안도감보다 아직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동료들 때문에 많은 애를 태우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고 바로 직전까지 함께 부딪히고 접하던 누구보다 가까운 동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까지 최선의 노력을 다해 주시기 바랍니다.


 
고인이 되신 한주호 준위님의 명복을 빌며, 어려운 여건에서도 전우애를 발휘하여 서로를 위해 희생하고 아껴주시는 모든 관계자분들께 격려의 말씀을 전합니다.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말고 최선의 노력을 다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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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얼굴의 '단비'

2010.03.26 15:33 from 열혈 공감

'아이티'의 친구 '단비부대'를 아시지요? 그런데, 국방부에는 또다른 얼굴의 '단비'가 있었으니.....

매월 말, 국방부에서는 '단비'소식지를 발행하는데요,

오늘은, 현재 중점 추진되고 있는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과 완연한 봄을 기다리는 '현충원'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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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게 너무나 중요한


사람이 살아가기 위한 3대 필수요건이 의식주(衣食住) 임은 모두 알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물론 모두가 중요한 요소이지만 그중에서 식(食)이 제일 중요하다는데 이론의 여지는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방한복을 입고 극지정복에 나선 용감한 탐험대라도 항온동물인 사람이 체온을 유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영양분이 공급되지 않는다면(쉬운 말로 먹을 것이 떨어진다면) 탐사를 포기하고 조난신고를 하여야 합니다. 



인류가 등장한 이래 먹는 것은 가장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이점은 군이라 해서 절대 예외는 아닙니다. 물론 먹을 것이 풍부하더라도 총탄이 다 떨어졌으면 이미 패전한 전쟁이지만, 그렇다고 먹지 않고 병사들에게 싸우라고 한다면 과연 얼마나 전투력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따라서 적을 외부와 고립시킨 후 굶주림에 지쳐 스스로 항복하게끔 하는 것은 유사 이래 보편적인 전술이었고, 당연히 먹는 것을 포함한 군수지원은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인 요인이었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군인도 먹어야 싸울 수 있습니다.


 무적의 나폴레옹 군대가 모스크바를 점령하였지만 초토화 작전을 펼쳤던 러시아에게 결국 무릎을 꿇고 후퇴하였던 이유는 현지조달을 원칙으로 삼았던 군수지원 시스템의 붕괴 때문이었습니다. 광활한 러시아 대지의 한겨울 혹한도 무서웠지만 생각과 달리 점령지에서 먹을 것을 구할 수 없고 후방에서 식량 공급도 이뤄지지 않자 그들은 군화를 씹으면서 후퇴할 수 밖에 없었었습니다.



초토화 작전에 휘말려 비참한 말로를 맞은 나폴레옹 원정군


 150여년 후 독소전 당시 스탈린그라드에서 포위되었던 독일 제6군의 병사가 가족에게 보냈던 편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어머니 창피한 이야기지만 너무 배가 고픕니다. 먹을 것을 보내주세요..(중략)..어머니 저는 살아서 돌아 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히틀러의 후퇴금지명령과 군수지원을 장담한 괴링의 허언으로 말미암아 적진에 고립된 9만여 독일군들이 굶주림에 지쳐 항복하였는데, 전쟁 후 집으로 살아서 돌아온 병사는 고작 6천여 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패전한 독일군 포로


  반면 6.25전쟁에서 미 해병1사단이 장진호전투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부대원들의 강철 같은 신념에 확실한 군수지원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미 해병대는 비록 압도적인 적의 공세에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든든한 지원을 발판삼아 그들을 포위하였던 중공군들에게 몇 배 이상의 출혈을 강요하며 철수에 성공하여 이후 중공군의 재편에 많은 시간이 들도록 만들만큼 엄청난 타격을 입혔습니다.

 

고립된 해병대를 격려하기 위해 적진까지 날아온 맥아더

 
당시에 중공군은 약 5배의 병력을 동원하여 미 해병 1사단의 철수로를 2중, 3중으로 포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후퇴하고있던 미군과 달리 후속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스스로 무너진 경우가 많았습니다. 영하 30도의 매서운 혹한은 후퇴하는 미군에게도 곤혹스러웠지만, 여기에 더해 식량 보급마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던 중공군에게는 제대로 전투도 못해보고 스스로 무너지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장진호 전투에서 포로가 된 중공군


지금까지 먹는 것을 예로들어 설명하였지만 전시나 평시에 전면에 나서지 않고도 티(?)나지 않게 힘쓰는 부대가 바로 군수지원부대입니다. 흔히 전사를 보면 전투부대의 찬란한 전과가 주로 나열되지만 사실 이들 못지않게 중요하면서도 승리를 위해 뒤에서 묵묵히 힘을 보태는 부대가 바로 군수지원부대이고 이들의 노고 없이 승리는 이뤄질 수 없습니다.

      

묵묵히 모두를 위해 애쓰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사실 군수지원부대는 제대로 잘 돌아가고 있을 경우에는 아무도 관심가지지 않고 당연하게 생각만 하다가 막상 조금의 실수라도 있는 경우에는 비난이란 비난은 다 들을 수 밖에 없는 부대입니다. 그런데 군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도 군수지원부대처럼 잘 드러나지 않지만 묵묵히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여주시는 분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의 군과 사회를 지탱하여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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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에 대한 글을 쓰려고 컴퓨터 앞에 처음 앉았을 때 막막했다. 자이툰이나 다이만처럼 직접 경험한 것에 대해서 글을 쓰라면 정말 자신이 있는데 (정말 그 이야기는 책으로 한 번 써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렇지 않은 다른 파병 역사를 소개하는 글은 정말 자신이 없다. 당연하지 않은가?

난 시오노 나나미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이 없다고 해서 열혈국방 식구들에게 대충 짜깁기 한 글을 보여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우선 우리나라 파병사를 담은 두툼한 책 몇 권을 빌려 옆에 쌓아 두고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읽어 봐도 답이 안나오기는 마찬가지. 역사책이 재미있을 리가 없다. 매력적인 소재가 머리에 떠오르지 않아 한참을 고민했다.

         (괜히 쓴다고 그랬어, 괜히 쓴다고 그랬어......뾰로롱~ 블로그에 올려만 주세요~~.^^)

뭐가 좋을까? 뭔가 독특한 것? 아니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진실들? 일단 도전하기로 했다.

우리나라의 파병사(派兵史)에 대한 기록을 정리해 놓은 책은 그리 다양하지 않다. 못믿겠다면 대형서점의 인터넷 사이트나 학교 도서관 홈페이지로 들어가 검색해 보라. “파병”을 키워드로 넣었을 때 나오는 책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아마 대중의 관심에서도, 학자들의 관심에서도 멀어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단순한 戰史가 아닌 파병사이기 때문이거나, 연구할 자료에 대한 접근이 어려워서 일지도 모른다.

각설하고, 앞으로 파병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하도록 노력하겠다. 다른 곳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것, 우리나라의 국익을 위해 해외에서 헌신해 온,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각지에서 땀을 흘리고 있는 戰士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그들이 왜 그곳에 가있는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글을 말이다.


               파병의 기원


우리 군은 베트남에 전투 및 전투지원 부대 파병부터 최근의 유엔 평화유지활동에 이르기까지 세계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임무와 역할을 수행해 오고 있다. 때론 일부 여론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파병은 여러 가지 고려요소를 두고 고민한 결과 국익에 적합하다고 판단해서 내린 결정들이었다.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그 덕분에 우리가 세계 속에 어깨를 펴고 자랑스럽게 우뚝 설 수 있다고 할 수 있는 것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는 언제부터 다른 나라에 파병하기 시작했을까? 우리나라가 언제부터 해외에 병력을 보내기 시작했는지 그 파병의 기원에 대한 것은 학자에 따라서 다소 논란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앞에서 베트남부터라고 이야기한 건 뭐고 지금 다시 기원을 따지는 건 뭐야?’ 라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범위로만 우리의 지식을 한정짓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어리석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조금만 참고 우리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생각해보자.

파병은 우리의 전쟁이 아닌 타국의 요청에 의해 군대를 파견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그대로 적용하여 고대사까지 그 영역을 확대한다면 최초의 파병 기록은 신라 현덕왕 때인 서기 8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사기 본기를 보면 “현덕왕 11년 7월, 당나라 군주절도사 이사도가 반란을 일으켰다. 당의 현종은 이를 토벌하기 위해 양주절도사인 조공을 보내 우리 군사들을 징발해 주도록 했으므로 왕은 순천군(順天軍) 장군 김웅원에게 군사 3만을 거느리고 가서 돕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신라가 3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파병을 했던 당나라에 대한 보답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글쓴이는 해외파병 관련 부서에 근무하고 있는 현직 군인입니다. 「라라라」라는 필명으로 온라인에서 활동하고 있는 파워블로거이기도 하고요.^^  『열혈국방의 Blue Helmet(블루헬멧)』을 통해 넘쳐 흐르는 문학적 소양과 전문적인 군사지식을 접목해 해외파병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정기적으로 기고할 예정입니다.



파병에 대한 세밀한 절차 등이 문헌 자료로 남아있는 것은 고려시대부터이다. 고려는 일본을 공격하기 위해 고려를 원정기지로 삼겠다는 원나라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나 대규모 원정군을 꾸려 파병했다. 1차 원정 때는 9백척의 전선(戰船)과 1만 5천여명을 지원했고, 2차 원정 때도 역시 9백척의 전선과 2만 5천여명이 동원되었다. 물론 원나라 군사 1만 5천여명에 대한 군수지원은 제외하고 말이다.


고려 2차 일본원정 요도

고려시대 전투장면을 묘사한 그림



조선시대에도 역시 유사한 사례가 있다. 명나라로부터 1467년과 1479년 각각 여진족 토벌의 요청을 받고 대규모의 병력을 보냈다. 2차 파병 때는 1만명을 파병했다가 회군했으나, 이로 인해 명과의 관계가 악화될 수 있다는 의견이 대두되자 변방수비부대 3천명을 다시 급파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여진정벌 당시 전투를 묘사한 그림

조선의 2차 여진정벌 요도



조선이 두 차례나 정벌했던 여진은 임진왜란 후에 급격히 성장하여 부족을 통일하고 후금을 세웠는데, 이들이 요동으로 진출하자 명나라는 다시 조선에 정벌군 파병을 요청해 왔다. 조선은 임진왜란에 명나라가 군을 파병한 보답으로 1619년 다시 후금정벌을 위해 파병을 했다. 그런데 파병군을 이끌었던 강홍립은 주력군을 이끌고 홍경 근교 심하전투에서 후금군에게 투항했는데, 이는 광해군은 세력이 성장하고 있는 후금의 보복 침공을 예방하면서 동시에 대의명분도 지킬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파병은 청의 요청에 의한 1654년, 1658년 러시아 정벌이 마지막이었다.


조선의 1차 나진정벌 요도

후금정벌 당시 진군을 묘사한 그림



우리 한민족의 파병역사를 살펴보면 대체로 우리에게 군사적인 지원을 해주었던 주변국의 요청에 따라 정치․외교적인 차원에서 국익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추진된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파병과는 여러 측면에서 많은 차이가 있겠지만, 나름대로 국익증진과 민족자존을 위한 최선의 방안을 모색하려고 노력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현대의 파병



우리 군, 그러니까 대한민국 국군의 이름으로 태극기를 달고 나간 파병의 시작은 월남전이다. 1964년 9월 11일부터 73년 3월 23일까지 총 8년 6개월 동안 연인원 31만여 명이 577,476회의 작전을 수행했다. 월남전에 파병한 부대만도 주월사령부, 맹호부대, 백마부대, 청룡부대, 십자성부대, 비둘기부대, 백구부대, 은마부대 등 총 8개 부대에 이른다. 이 가운데는 해병대(청룡), 해군(백구), 공군(은마)도 포함되어 있다. 1991년 걸프전에 국군 의료지원단(사우디)과 수송단(아랍에미레이트)을 보내기도 했으며, 2001년부터 아프간에서의 항구적 자유작전에는 해군 수송지원단 해성부대와 공군 수송지원단 청마부대를 비롯해 동의․다산부대를 파병해 2007년 12월 14일까지 임무를 수행했다. 이후 이라크 자유작전에도 건설공병지원단인 서희부대와 의료지원단인 제마부대를 보냈으며(2003년 4월 30일~2004년 4월 30일), 2004년 8월 3일부터는 자이툰과 다이만부대를 이라크와 쿠웨이트로 2008년 12월 19일까지 파병했다.

그 이외에도 우리 군은 1993년부터 소말리아, 앙골라, 동티모르 등 다양한 지역에 UN PKO의 이름으로 파병활동을 했으며, 2010년 현재 레바논을 비롯한 전 세계 17개 지역에 약800여 명을 보내 임무를 수행중이다.



<퀴즈>

열혈국방 식구들을 위해서 상품이 걸린 Mini Quiz를 준비했다. 일정병력을 부대 단위로 파병하게 될 경우에는 부대의 임무와 성격을 나타내는 부대명과 부대마크 등을 제작해 사용한다. 그 중 부대마크는 각각의 구성요소가 나름대로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럼 문제 들어갑니다.

Q> 아래의 그림은 어느 파병부대의 마크입니다.
     그 부대의 부대명(OO부대)과 파병했던 곳은 어디인가요?




정답(부대명과 파병 장소)을 비밀댓글로 남겨주시면 정답자 1명을 선정하여 해외파병부대 장병들의 어깨에 붙이는 태극마크 패치와 레바논 동명부대 기념품인 멋진 볼펜을 상품으로 증정하겠습니다.




다음에는 파병복에 관한 에피소드로 만나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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